우연과 우연
2023년 1월 15일 본문 말씀: 예레미야 5:20-25
(5:20) 너는 이를 야곱 집에 선포하며 유다에 공포하여 이르기를
(5:21) 우준하여 지각이 없으며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백성이여 이를 들을지어다
(5:22)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가 나를 두려워 아니하느냐 내 앞에서 떨지 아니하겠느냐 내가 모래를 두어 바다의 계한을 삼되 그것으로 영원한 계한을 삼고 지나치지 못하게 하였으므로 파도가 흉용하나 그것을 이기지 못하며 뛰노나 그것을 넘지 못하느니라
(5:23) 그러나 너희 백성은 배반하며 패역하는 마음이 있어서 이미 배반하고 갔으며
(5:24) 또 너희 마음으로 우리에게 이른 비와 늦은 비를 때를 따라 주시며 우리를 위하여 추수 기한을 정하시는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자 말하지도 아니하니
(5:25) 너희 허물이 이러한 일들을 물리쳤고 너희 죄가 너희에게 오는 좋은 것을 막았느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에 대해서 단단히 오해했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나라를 자신들이 이끌어 나갈 만한 역량이 있다고 여겼습니다. 그런데 선지자 예레미야는 다른 이야기를 합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이 원대로 해주지 않을 작정이라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이 뭐가 잘못되었는지 이스라엘 쪽에서 알아야 될 겁니다.
하지만 선지자의 말씀은 달리 합니다. “너희들이 하나님 말씀을 못 알아듣는 것은 너희 마음 자체가 망가져서 그렇다”는 겁니다. 이는 곧 수리받아야 될 자가 스스로 수리하는 경우를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않게 하신다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의 생각과 하나님 생각의 차이입니다.
인간은 자신에게 무슨 문제가 있으면 자력으로 해결하려는 심사를 보입니다. 하지만 이럴 경우에, ‘나에게는 근원적으로 문제있음’이 감추어지게 됩니다. 하나님의 뜻은 이것입니다. 인간으로 하여금 인간이 아니라 사물체로 되돌리는데 있습니다. 마치 바다와 땅과 같이 말입니다. 바다가 아무리 세차가 땅을 향하여 파도를 쳐도 바다는 땅의 구역으로 넘어설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바다나 땅에게 스스로 인식하는 능력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시키신 대로 했을 뿐입니다. 이는 곧 하나님께서 하나님 자신에게 지시하고 명령하고 수행하는 시스템을 구성하기 때문입니다. 보다 더 정확히 말해서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서 땅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에게 지시내리는 방식으로 일하십니다.
즉 하나님께서 두 분이 주도적으로 일하십니다. 땅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을 ‘주의 이름’이라고 합니다. 사도행전 4:12에,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늘을 쳐다보고 구원해 달라고 해봤자 소용없다는 겁니다.
그것은 인간들이 합세해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죽여 없애버림으로 자신의 본색을 제대로 다 드러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본성에서 예외될 자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하시는 일은 인간의 일이라고 우긴 것들을 예수님 자신의 일로 돌려놓은 겁니다. 그 방식은 그들을 사물로 만드는 겁니다.
인간에게 자유가 뺏으면 사물됩니다. 마치 군에 간 장정에게 지난 날 살아온 모든 그들의 자율권을 뺐음으로서 하나의 병기로 바뀌는 것처럼 말입니다. 꼭 군대 아니라도 이 인간 사회 전체에서 인간 관계는 ‘상품관계’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이 자체적으로 이스라엘답게 되려는 모든 시도를 거부하십니다.
그 방법이 바로 그 땅에 ‘이른 비’와 ‘늦은 비’를 내려주지 않는 겁니다. 예레미야 3:3에 보면, “그러므로 단 비가 그쳐졌고 늦은 비가 없어졌느니라 그럴지라도 네가 창녀의 낯을 가졌으므로 수치를 알지 못하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정기적으로 10월과 11월 되면 반드시 이른비가 내리고, 이듬해 3월과 4월에서 반드시 늦은 비가 되는 필연적 현상을 하나님께서 틀어버리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약속 위반하신 것이 아니라 이른비와 늦은비가 그 때에 꼭 와서한다는 그 인간들의 생각 자체가 인간들의 일방적 철칙이었던 겁니다. 자체적으로 철칙이나 원칙을 세울 자격도 없는 작자들이 “하나님께서 반드시 이런 식으로 혜택을 주실 것이다. 왜냐하면 그분은 우리를 특별히 사랑하시는 사랑의 하나님이기 때문에”라는 생각이 깨어져야 했던 겁니다.
신약에 들어오면, 이른비와 늦은비는 이 지상에서 활동하시는 예수님 자체를 두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주의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 보라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나니 너희도 길이 참고 마음을 굳게 하라 주의 강림이 가까우니라”(약 5:7-8)
즉 주님께서 친히 일하신다면 이는 결국 인간들이 아무 것도 할게 없는 바가 됩니다. 인간에게 할 게 없다는 말은 인간쪽에서 정리하고 구축할 ‘필연’을 하나님쪽께서 용납하지 않으셨다는 말이 됩니다. 그렇다면 인간 존재가 뭡니까? 이 질문은 ‘인간 존재 배후에 누가 있습니까’는 식으로 물어야 맞습니다.
유다 1:12-13에 보면, “저희는 기탄 없이 너희와 함께 먹으니 너희 애찬의 암초요 자기 몸만 기르는 목자요 바람에 불려가는 물 없는 구름이요 죽고 또 죽어 뿌리까지 뽑힌 열매 없는 가을 나무요 자기의 수치의 거품을 뿜는 바다의 거친 물결이요 영원히 예비된 캄캄한 흑암에 돌아갈 유리하는 별들이라”
사람들보고 이야기하는 것같은 실은 그들 배후에 자리잡아서 인간들은 사물처럼 써먹고 움직여온 악마의 최후에 대한 저주의 예언입니다. 인간 입장은 자꾸만 자기 행함과 그 결과 사이에는 필연적 원칙을 뽑아내고 싶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악마의 활동을 한 마디로 말해서 ’거품‘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아무런 실속이 없는 거품 말입니다. 허세, 허풍으로 인간 세계를 요리하고 있었던 겁니다. 그렇다면 참된 성도도 예수님에 의해서 사물처럼 다루어지는 것이 아닐까요? 그렇습니다. 마태복음 6장에 나오는 주기도문은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마 6:10-11)
성도의 삶은 주체적이지 않습니다. 하늘의 뜻이 땅에 이루어지게 하시는 예수님의 활동에 종속되어 있습니다. 그 나라와 그 의를 추구하는 조건 속에서 성도에게는 ’일용할 양식‘이 주어집니다. 이는 곧 내일의 나를 위한 양식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시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즉 인간들이 생각하는 우연과 성도가 생각하는 우연이 다르다는 말입니다.
이순신 장군이 일본과의 해전에서 마지막 남긴 말은 다음과 같다고 합니다. “나의 죽음을 적들에게 알리지 말라” 이 말을 축약하면 이렇게 됩니다. “나의 존재를 적들에게 알리지 말라”. 더나아가면, “나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기 위해 태어난 것이다” 곧 “나는 나의 죽음에서 비로소 살아있으면서 몰랐던 필연을 알았다”가 됩니다.
우리 성도가 홀로 있을 때는 우연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필연과 함께 할 때는 비로소 예수님의 증인이 되기 위해 ’나를 위한 나의 인생‘은 마땅히 포기되어야 함을 알게 됩니다. 바로 이럴 경우에만 바른 이스라엘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지상에서 예수님이 가신 길을 저희들도 가도록 이끌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34강-예레미야 5장 20~25절(우연과 우연)230115 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예레미야 5장 20~25절입니다. 구약성경 1058페이지입니다.
“너는 이를 야곱 집에 선포하며 유다에 공포하여 이르기를, 우준하여 지각이 없으며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백성이여 이를 들을찌어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가 나를 두려워 아니하느냐 내 앞에서 떨지 아니하겠느냐 내가 모래를 두어 바다의 계한을 삼되 그것으로 영원한 계한을 삼고 지나치지 못하게 하였으므로 파도가 흉용하나 그것을 이기지 못하며 뛰노나 그것을 넘지 못하느니라, 그러나 너희 백성은 배반하며 패역하는 마음이 있어서 이미 배반하고 갔으며, 또 너희 마음으로 우리에게 이른 비와 늦은 비를 때를 따라 주시며 우리를 위하여 추수 기한을 정하시는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자 말하지도 아니하니, 너희 허물이 이러한 일들을 물리쳤고 너희 죄가 너희에게 오는 좋은 것을 막았느니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야기하시면서 사람으로는 도무지 무슨 뜻으로 이야기하시는지 납득되기 힘든 범위를 몰고 오셔서 말씀하십니다. 물론 선지자를 통해서 말씀하시죠. 그러면 선지자가 이 말을 할 때 그 당시 사람들이 듣고 이런 반응을 나타낼 수밖에 없어요. ‘지금 뭐 하자는 거야? 지금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야? 우리가 할 수 있는 이야기를 해. 이렇게 하고 저렇게 하라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이야기를 해야지. 우리는 시키는 대로 하라고 하면 잘하는데 왜 갑자기 땅 이야기, 바다 이야기, 파도 이야기, 이런 대자연까지 총 동원시키느냐’
우리는 “내가 모래를 두어 바다의 계한을 삼되 그것으로 영원한 계한을 삼고 지나치지 못하게 하였으므로 파도가 흉용하나 그것을 이기지 못하며 뛰노나 그것을 넘지 못하느니라”라는 이런 자연이야기 전혀 궁금하지도 않고 신경 쓰고 싶지 않은 그것까지 총동원해서 꼭 굳이 당신이 나에게 이야기할 때 “바다의 파도가 땅으로 넘치지 못한다”라고 굳이 자연까지 섞어가면서 이야기하는 저의가 뭐냐?
그 이야기를 빼도 이야기되는 쪽으로 말을 해야지. ‘속초 바다에 가보았느냐? 파도가 친다’라고 하면 ‘그래 치겠지’라고 하죠. ‘그런데 파도가 속초 땅까지 침범하지 못한다’라고 하면 ‘그래서 뭐? 그게 우리 신앙과 무슨 관계 있는데. 그런 이야기를 왜 하느냐’라는 거죠. 못 알아들어요. 그래서 선지자가 말합니다. ‘너희들 지금부터 내가 말 할 텐데 못 알아들을 거야’라는 식으로 이야기를 해요.
그런데 듣는 사람은 분석한다고요. 내가 이것은 알아듣고, 이것은 못 알아듣고, 알아듣기는 하는데 예를 들어서 21절에 “우준하여 지각이 없으며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백성이여 이를 들을찌어다”라는 그 말은 알아들어요. ‘지각이 없으니 못 알아듣고 지식이 없는 사람은 듣지 못한다’라는 그 말은 알아듣는데 왜 굳이 그 이야기를 나에게 하는지를 그걸 모르는 거예요. 그 사실을 모르는 겁니다.
성경은 백 독 하는데 무슨 뜻인지 모르는 것과 똑같은 겁니다. 성경은 백 독, 천 독을 하고 심지어 설교까지 하는데 이 이야기를 왜 해야 하는지를 인간들이 알지 못하는 겁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사물로 만들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또 어렵게 시작할 수밖에 없는데, 하나님의 언어는 살아있는 인간을 사물로, 그리고 물체로 만들고 인간 너머에 배후에서 제대로 살아있는 그런 존재에게 이야기하는 거예요. “너 인간을 왜 이렇게 물체로 만들어 놨어? 사물로 만들어 놨어?”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인간에게 자유를 빼앗아 버리면 그건 기계가 되고 사물체가 되어요. 그런데 스스로 자기가 말하고 스스로 알아듣고 하는 그게 인간이 아니야고 생각하실 거예요. 거기에 대해서 하나님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해를 봐라. 달을 봐라. 그리고 바다를 봐라. 땅을 봐” 분명히 그것들은 코도 없고 입도 없고 귀도 없고 아무것도 없어요. 그러나 그들은 움직입니다.
파도가 치지요. 땅에서 나무가 자라지요. 분명히 움직였는데 귀도 없고 입도 코도 없어요. 없는데 왜 움직이느냐. 하나님 보시기에 사물체이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바다와 땅은 사물체이긴 하지만 배후에 누가 있느냐 하면 하나님이 배후에 있고 인간은 살아있다고 우기지만 배후에 마귀가 있기 때문에, 배후에 하나님이 있는 쪽에서 이야기를 배후에 악마가 있는 인간이 못 알아듣는 겁니다. 선지자가 그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래서 선지자가 이 이야기 하는 것이 뭐냐 하면 우리 처음부터 다시 하자는 겁니다. 처음부터 다시, 나는 내 나름대로 인생을 살아간다는 그거 하지 말고 주께서 그냥 주시면 움직일 뿐이라는 그쪽으로 다시 돌아가자는 겁니다. 이스라엘아, 유다야, 그렇게 하면 내 말을 알아들을 것이다. 예수님이 오셔서 이야기할 때 예수님을 알아들으려면 우리가 죽은 자가 될 때 알아들어요.
이게 굉장히 모순인데요, 우리는 살아있어서, 분석해서, 그것을 해석해서 알아듣잖아요. 그런 게 아니고 네가 비로소 죽어있을 때 알아듣게 되는 이유가 주님의 모든 말씀은 죽은 자를 살게 하는 부활의 능력으로 말씀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살아있는 자가 살아있는 쪽은 주께서 안 받습니다. 처음부터 출발이 잘못되었어요. 출발점이 ‘나는 살아있다’라고 하니까 안 받는 거예요.
그런데 죽어있는 자를 주께서 말씀으로 입혀서 살게 하시는 그것만 주의 일인 것을 성령 받은 사람은 알아듣습니다. ‘아, 내 쪽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고 내가 죽은 쪽에서 출발하는군요’라고 알아듣습니다. 여러분 어릴 때 많이 들었던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게 뭐냐면 사물과 인간의 만남 이야기인데 이솝우화에 있습니다. 어느 날 해가 있었는데 해가 반짝거리고 사람들에게 존경받으니까 누가 시기를 하느냐면 바람이 시기가 났어요.
그래서 바람이 와서 해에게 시비를 거는 겁니다. “야, 네가 힘세, 내가 힘세?”라고 하니까 해가 “그러면 네가 좋은 대로 겨뤄보자”라고 하죠. 바람이 지나가는 나그네를 가리키며 “나그네 외투를 나는 내 식대로 벗기고 너는 네 식대로 벗겨서, 벗기는 쪽이 힘이 더 센 쪽으로 하자”라고 한 거예요. 그래서 바람이 입에 가득 찬바람을 머금고 세차게 나그네에게 부니까 나그네는 ‘왜 갑자기 바람이 불지’라고 하면서 옷깃을 더 여미는 거예요. 더 단단하게.
그래서 바람이 화가 나서 동쪽에서 서쪽에서 사방에서 막 부는 거예요. 그러니 나그네는 점점 더 웅크리면서 옷을 여미는 거죠. ‘바람아, 할 거 다 했냐. 비켜~비켜~내가 할 게’라고 바람을 밀치고 해가 나서서 나그네를 따뜻하게 해주니까 처음에 좋아하다가 좀 덥게 하니까 ‘왜 이리 덥지? 그래도 참아야지’라고 하며 가니까, 해가 더 덥게 했어요. 그러니까 나그네가 외투를 벗어버린 거죠.
이것은 인간세계에서는 힘으로 남을 제압하려고 하지만 인간 자체는 스스로 자기 본색이 드러나요. 자기 진짜 모습이 드러나는 거, 이게 바로 인간이 해낼 수 없는 주님의 승리입니다. 나의 본색이 드러나는 거. 옷을 만들고, 치마를 입고, 거기에 외투를 걸치고, 또 메이크업도 하고 해서 인간이 되는 것이 아니고, 진짜 인간은 우리 인간들이 가리고 있는 거예요.
동성애를 반대하는 기독교단체에서 사진을 두 개 올려놨어요. 미국의 유명한 잘 생긴 미남을 사진에 놓고, 이 미남이 동성애자여서 에이즈(AIDS-성적 접촉·수혈·모자 감염 따위로 감염되는데, 전신의 면역 세포가 파괴되고, 사망하는 병)에 걸려서 마지막 죽을 때 사진을 올려놨어요. 침대에 누워있는데 얼굴 피부가 괴사(조직이나 세포가 부분적으로 죽는 일)해서 얼룩지고 피부조직이 너덜너덜하고 몰골이 바짝 말라서 누워있는 거예요.
기독교단체에서 아래 쓴 멘트가 ‘여러분, 어느 쪽을 원하십니까? 정말 여러분이 미남 되기를 원한다면 동성애 하지 마세요’라고 올려놨어요. 제가 보기에는 피부가 괴사하고 있는 모습이 우리 모습이에요. 우리가 숨겨놓은 우리의 진짜 모습은 바로 에이즈 걸려서 괴사한 거예요. 왜? 에이즈 걸렸다는 말은 그가 비로소 사물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물건이 되었다는 말이고 물체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영의 요소를 빼버리면 환상 속에 빠지는 겁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겁니다. ‘나는 한국인이다’라는 문장을 채우기 위해서 한국인이 될 수 있는 요소들을 전부 다 끌어오는 거예요. 황인종, 키는 몇 센티, 이런 것들 다 끌어모아도 ‘나는 한국인이다’라는 것을 만족시킬 수 없어요. 그게 전부 다 환상들이기 때문에. ‘나는 한국인이다’라는 것이 내가 만들어낸 환상이에요.
따라서 주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이스라엘 되게 했을 때 하나님이 함께 계속해서 언약적으로 하나님께서 성신께서 도와줘야 이스라엘 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어느 날부터 우리가 자체적으로 하나님이 원하는 이스라엘 되겠다고 나서는 순간 그들은 주의 말씀을 그때부터 못 알아듣는 거예요. 알아듣지를 못해요. 하나님은 항상 처음부터 시작해야 하는 겁니다.
여러분들 잘 아시는 주기도문 있지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 그리고 여러분이 그다음을 주목해서 보세요.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고 되어있어요. 여러분들이 그 관계를 봐야 해요.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고 하고 그다음에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라고 나와요. 일용할 양식은 인간세계에서 나올 발상이 아닙니다.
우리는 창고에 쌓아놓고 먹고 싶어요. 거지도 아니고 조금씩 조금씩 일용할 양식을 얻어먹는 삶은 우리 머리에는 없어요. 우리 생각에는 그런 것이 없습니다. 그 뜻이 뭔 뜻이냐 하면 그 나라 의를 이루기 위해 참여한 자는 자기 자신을 어떻게 봐야느냐 하면 그 나라 의와 연계된 상태에서만 양식이 주어지는 거, 그런 자기 자신을 발견해야 해요. 그게 주기도문입니다.
뭣도 모르고 그냥 줄줄줄 외우기만 하면 되는 게 아니에요. 주기도문이라 해도 무슨 뜻인지 모르는 거예요. 내일 양식 떨어져도 괜찮다는 거예요. 오늘 일용할 양식 있으면 그걸로 되었다는 거예요. 내일 염려는 내일 할 것이고 오늘 염려가 그날로 족하다는 말은 그날로 마감되었다는, 서류 마감이 끝났다는, 은행 업무가 4시로 끝났다는 말입니다. 항상 모든 시작은 나부터 시작하는 것이 아니고 주님부터 시작해서, 주로 말미암아, 주께로 돌아가는 거, 이거는 주님의 한결같은 뜻입니다.
따라서 오늘 본문에 보면 이렇게 되어있어요. 24절에 보면 “또 너희 마음으로 우리에게 이른 비와 늦은 비를 때를 따라 주시며 우리를 위하여 추수 기한을 정하시는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자 말하지도 아니하니”라고 되어있거든요. 그러니까 이게 뭐냐 하면 하나님께서 이른 비와 늦은 비를 사랑의 하나님이 주신다고 한 거예요.
그런데 예레미야 3장 3절에 보면 안 줬어요. “그러므로 단비가 그쳐졌고 늦은 비가 없어졌느니라 그럴지라도 네가 창녀의 낯을 가졌으므로 수치를 알지 못하느니라” 그러니까 이른 비와 늦은 비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니까 늘 주신다고 하나님께 요구할 권한이 우리에게 없는 겁니다. 늦은 비와 이른 비는 우리 이스라엘에게 준 것이 아니고요, 하나님이 하나님의 일을 계속 이어가기 위해서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지상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서 주신 거예요.
주가 두 분이시거든요. 하늘에 계신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땅에 계신 주님은 땅에 계세요. 땅에 있는 것을 가지고 주의 이름이라고 하는 겁니다. 사도행전 4장 12절에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 우리가 구원받는 것은 이 지상에 있는 주의 이름으로 구원받아요.
그런데 교회에서 사람들은 뭐라고 잘못 알고 있느냐 하면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렇게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자꾸 상상하니까 그게 어떻게 되느냐 하면 이 지상에 오신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없애버렸어요. 죽여서 없애버리라고 요한복음 19장에 나옵니다. 15절에 보면 “저희가 소리지르되 없이 하소서 없이 하소서 저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빌라도가 가로되 내가 너희 왕을 십자가에 못 박으랴 대제사장들이 대답하되 가이사 외에는 우리에게 왕이 없나이다 하니”
사람들의 소원이 뭐냐 하면 하나님을 향하여 지상에 오신 하나님을 죽이라고 하나님께 기도한 자들이 인간들이고 이스라엘 사람들이에요. 하나님이 보낸 모세와 아론보고 “하나님이여, 제발 저 두 사람을 죽여주세요”라고 기도한 사람들이 출애굽 당시 히브리인들의 기도였어요. 본인에게 문제 있다는 것을 모르고 본인의 신앙을 지적하고 모독했다고 화내는 거예요.
성경 전체가 우리를 모독하는 책입니다. 이걸 백 독, 천 독해도 소용없어요. 우리는 자꾸 성경을 읽어서 자기를 점점 더 좋은 사람, 훌륭한 사람으로 스스로 만들려고 하는데 성경은 우리를 훌륭한 사람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고 어떤 상황이 우리를 모독해도, 우리 인생이 나를 속일지라도 우리가 그것을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거예요. 인생이 나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않는 사람이 되는 거예요.
이 세상에 인간관계는, 이건 우리가 대우받으려고 하는데 세상 자체도 인간을 대우하지 않습니다. 이 세상을 한 마디로 말씀드릴까요? 인간관계는 상품 관계예요. 사람은 사람을 볼 때 상품으로 봅니다. 우리 한준이가 내일 군에 가는데 ‘제는 키가 크고 잘생겼으니까 어떤 상품으로 쓸까’라고 생각해요. 키 좀 크고 잘생기면 다른 사람들보다 높은 자리에 배치돼요. 그런데 높은 자리가 괴로운 자리예요. 그러니까 절대 요령 부리고 그러면 안 돼요.
이 세상은 전부 다 상품 관계입니다. 네 자식은 세상에 나가면 상품 가치가 얼마짜리고, 이런 식으로 묻지요. 그걸 쉽게 말하면 ‘연봉 얼마입니까?’라고 하는 거죠. 이 세상은 우리를 사람 취급 안 합니다. 사람 사람 하는 것은 내부에서 사람 취급 안 하면서 그냥 사람으로 대우해 주는 거예요. 여러분도 이건 다 아시죠? 모른 척하지 마시고요. 우리가 남을 다 그렇게 보니까요.
저 사람 한 달에 얼마 받는다고 내가 따지면 상대도 우리를 그렇게 따지는 겁니다. 그래서 이제 진짜 어려운 거 해봅시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른 비, 늦은 비가 오니까 이것을 필연, 이것은 우연이 아니고 하나님의 뜻이라고 본 거예요. 그 뜻을 주님께서 중간에 완전히 부러뜨리시는 거예요. 하나님의 필연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신앙이라고 하면서 붙잡은 겁니다.
그 필연을 부러뜨리니까 이스라엘 본인들도 박살 날 지경이에요. 우리가 믿은 것이 뭐야? 왜 이른 비, 늦은 비가 안 오지? 정기적으로 10월과 11월 되면 이른 비가 내리고, 이듬해 3월과 4월에서 늦은 비가 오는 대, 곡식이 되는 것은 3월과 4월에 곡식이 됩니다. 늦은 비가 와줘야 제대로 곡식이 추수됩니다. 이게 매년 마다 반복되고 이게 똑같이 철칙처럼 되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는 것은 철칙이고 필연이고 우리는 의심하면 안 된다고 생각한 거예요.
오늘날 내가 선택받았다는 것과 똑같이 그렇게 우기는 거예요. 누구를 위한 선택이고, 누구를 위한 말씀이고, 누구를 위한 사랑의 하나님인지 인간은 도대체 감을 못 잡고 있습니다. 주를 위해서, 이 땅에서 일하는 보이지 않는 주님을 위해서 아버지가 일하신 건데 우리는 자꾸 우기기를, 내 행복을 위해서, 나를 위해서 주께서 이 세상에 오신다고 하는 거예요.
‘목적이 이끄는 삶’ 같은 그런 책을 보면 자꾸 나를 위해서라는 거예요. 그건 고린도후서 5장에 15절 보면 성도는 자기를 위해 살지 않는다는 조건이 붙어 있어요. 자기를 위해 살지 않고 오직 주를 위해 사는 거예요.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
아버지가 오직 주님 위해서, 주를 드러내고, 주를 증거 하라고 이 세상을 움직이는 겁니다. 내가 밥 먹고 살라고 일용할 양식을 주시는 것이 아니에요. 내일 양식은 우리가 보장 못 해요. 갑자기 집에 불나면 소용없는 거 아닙니까. 그래서 처음으로 돌아가자는 겁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에서 이야기하는 결론이 뭐냐. 예수님 자체가 이른 비이고 예수님 자체가 늦은 비예요.
그런 해석을 인간들이 못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교회에 이른 비와 늦은 비를 주십니다’라고 하는 거예요. 오늘도 비가 왔는데 그게 우리교회를 위한 비일까요? 아닙니다. 야고보서 5장 8절에 방금 이야기의 근거가 나와 있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주의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 보라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나니 너희도 길이 참고 마음을 굳게 하라 주의 강림이 가까우니라”
주의 강림하심이 늦은 비예요. 이른 비와 늦은 비 그 중간에서, 사이에서 곡식은 자라거든요. 추수되는 거예요. 그 추수를 누가 하느냐. 추수 담당자가 누구냐면 책임자가 예수님이에요. 주님이 알아서 자기 농사 짓는 겁니다. 그러니까 여기 야고보서 5장에 뭐라고 나오느냐면 남에게 원망하지 말고 남에게 불평하지 말라고 하는 거예요. 네 인생은 네 인생사가 아니고 주님의 겁니다.
왜 남의 인생사에 네가 걱정하느냐는 거죠. 내 인생이 내 것이 아니고 주의 것이라면 우리가 걱정할 자격도 권한도 우리 자신에게 없습니다. 그게 이스라엘이에요. 그게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렇다면 이 문제를 좀 더 자세히 하기 위해서 성경을 찾아봐야 하는데, 하나님께서 우리가 하나의 사물이라면 우리에게 욕하는 것은 도대체 누구에게 욕하는 것이냐.
성격에서 공식적으로 욕하는 욕설 구절이 나와 있습니다. 공식적으로. 이건 써먹어도 괜찮아요. 유다 1장 12~13절에 보면, “저희는 기탄없이 너희와 함께 먹으니 너희 애찬의 암초요 자기 몸만 기르는 목자요 바람에 불려가는 물 없는 구름이요 죽고 또 죽어 뿌리까지 뽑힌 열매 없는 가을 나무요 자기의 수치의 거품을 뿜는 바다의 거친 물결이요 영원히 예비된 캄캄한 흑암에 돌아갈 유리하는 별들이라”라고 나오는데 이게 마귀보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사람보고 이야기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람은 사물이니까 그 배후에서 사람을 사물로 다루는 악마의 운명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래서 한마디로 무슨 욕이냐 하면 “이 거품아”라는 겁니다. 다른 말로 하면 “이 허풍아, 이 허세야” 여러분들 지금 기분이 안 나쁘잖아요. 왜냐 하면 이미 이 모든 것들을 각오하고 있기 때문에. 거품이라는 것은 환상이라는 뜻이에요.
“이 환상아, 아무 실체 없는 환상아” 이게 바로 마귀에게 하는 욕이죠. 마귀는 실체가 있지만. 마귀가 남긴 인간들, 마귀의 조종을 받는 인간들은 전부 다 거품입니다. 오염된 바닷가에 보면 허연 거품들이 떠 있죠. 거품. 그건 바로 오염되었다는 뜻이에요. 비중이 낮은 화학물질이 가스가 차서 떠오르는 거거든요. 공단 개천에 보면 맑은 물이 아니고 그런 물들이 나와요.
그게 불신자들이에요. 물론 그 거품 중에서 벤츠 타고 뒤에 골프채 넣고 다니는 거품도 있어요. 쥐나 개나 이천만 원 주면 벤츠 다 사니까. 다른 사람이 거품으로 사니까 본인도 거품으로 사는 거예요. 그게 인간 성공의 티라고 내는 겁니다. 본인이 하나의 물체인 줄 모르고. 그렇다면 우리는 뭐냐. 우연이죠. 우리는 우연이에요. 우리가 비로소 죽을 때 필연으로 바뀝니다.
나는 애초부터 죽기 위해서 이 땅에 태어났다. 그럴 때 비로소, 예수님과 함께 있을 때, 우리는 필연이에요. 주여 저는 주님이 다루시는 물체입니다. 가라면 가고 오라면 오는 물체에 불과합니다. 모세가 쥐고 있는 작대기라도 저는 좋습니다. 모세 자체가 지팡이니까요. 주님이 모세 자리에 모세는 지팡이 자리에 가는 거예요. 주와 함께 있을 때 필연이고 그 외에 내가 나섰다 하면 전부 우연입니다.
자기의 죽음을 필연이라고 느꼈던 비슷한 사람이 있어요. 그 사람이 그랬다는 것이 아니고 제가 일방적으로 그렇게 느낀 필연적 죽음을 겪은 사람이 있어요. 그게 이순신 장군입니다. 이순신 장군이 죽을 때 뭐라고 했느냐 하면 “나를 알리지 마라. 나의 존재를 알리지 마라. 나의 죽음을 적들에게 알리지 마라” 이순신 장군은 그렇게 생각 안 했어요. 복음을 모르니까.
저는 해석을 이렇게 합니다. ‘나는 이 땅에 하나의 거품으로 왔다가 거품으로 사라진다’ 이건 어디까지나 제 생각입니다. 이순신 장군이 그랬다는 것이 아니고. 나는 일개 거품이었다. 아무것도 아니었다. 나는 살고 싶지만 바다가 육지를 넘을 수 없는 것처럼 나는 이게 다다. 그런데 이순신 장군만도 못하면서 자기 사는 것이 필연인 것처럼 여기는 사람이 있어요. 우연은 당연히 모르고요.
상주시 내서면 서원 2리에 사는 할머니. 나이가 84살인데요, 12살부터 뭐만 했느냐면 감 껍질만 깎았어요. 뭐 하려고? 자기 집에 곶감 만드니까. 아무것도 안 하고 어디 놀러 다니지도 않고 감만 깎았어요. 12살부터 84살까지. ‘6시 내 고향’이라는 TV 프로그램에서 나왔어요. 5.16 왜 일어났는지 그런 거 몰라요. 우크라이나 전쟁, 이런 것도 몰라요. 자기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감만 깎는 거예요.
바다의 파도가 육지를 넘을 수 없듯이 그 할머니는 감만 깎았어요. 자기는 나름대로 내 인생 내 팔자가 이렇다는 거예요. 아니에요. 그냥 거품입니다. 아무것도 몰랐어요. 주님을 모르니까 모르는 거예요. 이스라엘은 이런 식으로 지적받아야 해요. 그리고 우리는 이런 식으로 말씀을 지적받아야 해요. 우리가 지금 정신을 어디에 팔고 있는지. 단독적으로 나는 이렇다고 하지 마세요. 나는 거품입니다.
그러나 주와 함께 있으면 주를 증거하기 위해서 이만큼 살아왔고, 내 인생은 일용할 양식 제공하신 것이 주님이기 때문에 내 인생은 없고 주의 인생이라고 증거 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이 뭐라도 된 것처럼 여겼습니다. 아무것도 아니고 정말 아무것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닌데 주께서 태어나게 하신 인간을, 예수님 증거 하는 용도로 천국 백성 만드는 이 놀라운 기적, 주여 이 기적을 감사하게 하옵소서.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