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노트
불 탄 막대기
2023년 1월 1일 본문 말씀: 예레미야 5:14-18
(5:14) 그러므로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그들이 이 말을 하였은즉 볼지어다 내가 네 입에 있는 나의 말로 불이 되게 하고 이 백성으로 나무가 되게 하리니 그 불이 그들을 사르리라
(5:15)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스라엘 족속아 보라 내가 한 나라를 원방에서 너희에게로 오게 하리니 곧 강하고 오랜 나라이라 그 방언을 네가 알지 못하며 그 말을 네가 깨닫지 못하느니라
(5:16) 그 전통은 열린 묘실이요 그 사람들은 다 용사라
(5:17) 그들이 네 자녀들의 먹을 추수 곡물과 양식을 먹으며 네 양떼와 소떼를 먹으며 네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열매를 먹으며 네가 의뢰하는 견고한 성들을 칼로 파멸하리라
(5:18)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 때에도 내가 너희를 진멸치는 아니하리라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를 앞장 세우십니다. 그리고 그의 말 속에서 불이 나오게 합니다. 실제적인 불은 아니지만 불을 질렀을 때에 나오는 결과를 남깁니다. 그것은 소실, 소멸입니다. 인간이 건설한 세계에서는 소거이지만 인간 자체에 대해서는 누락입니다. 즉 “인간, 너는 필요없다. 나의 일에 대해서!”입니다.
왜 인간을 누락시키려고 하십니까? 그것은 인간들이 우상숭배를 하기 때문입니다. 도상(圖像)들icones로 꾸미는 우상들, 설사 동판화로 숲, 마을, 사람, 전투 장면, 폭풍을 생생하게 우리에게 재현해준다고 할지라도 동판화는 그것이 재현하고 있는 것들과 같지 않습니다. 즉 그것은 그저 여기저기에 동판이 부풀어 오르거나 꺼져 있는 것에 불과합니다. 이것은 사실에 대한 왜곡입니다.
초상화의 경우를 예를 들어보면 이러합니다. 화가들은 전통적으로 부유한 집안의 초상화를 그리면서 생계를 유지해 갔는데 그것은 의뢰자의 기품과 품위를 대대로 그 집안에 남기기 위해서입니다. 예를 들면, 자신의 웃음을 화폭에 담아두면 자자손손 그 작품을 보는 후손들 마음 속에 선조의 권위가 사라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즉 “우리 할아버지는 결코 초라한 존재가 아니었고 대단한 영향력을 주는 위대한 분이다”라는 인상이 후손들에게 축복으로 여겨지는 겁니다. 하지만 화가는 나름대로 노리는 바가 있습니다. 단순히 돈 때문만은 아닙니다. 타인들이 기대하는 이상적인 요소를 자신이 그리는 그림 속에 집어넣는다는 것은 타인의 영혼을 자신이 뺐는 일이기에 자존감을 가질 수가 있습니다.
어쨌든 인간은 우상숭배로부터 어느 누구도 도망칠 수가 없습니다. 자신의 이상적 모습을 본인들이 놓치기 싫기 때문입니다. 자기에 대한 자기 인식을 잃기 싫은 겁니다. 영원히 자기와 더불어 함께 살고 싶어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에 대해서 자신의 이상형이 자기보다 먼저 마중나가기 일쑤입니다.
인간들은 그 누구를 향하여 자기쪽에서 계속 말을 하고 싶어하고 그렇게 해서 그 사람마저 자신의 세계의 일원으로 만들고 싶어합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는 것보다 자신들이 하나님에게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습니다. 힘들다, 어렵다, 못살겠다, 아프다, 괴롭다 심지어 심심하다, 외롭다도 불평거리가 됩니다.
정작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통해서 무엇이 뿜어져 나오는가를 생각지도 못합니다. 선지자 입에서 나오는 말씀이 불의 기능으로 작용하는 이유는 창세기 3:24에 나옵니다.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 내시고 에덴 동산 동편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화염검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지키고 싶은 것이 아니라 생명나무 과실을 지키고 싶었던 겁니다. 그것을 강렬한 두루 도는 불로서 지키고 싶었던 것은, 범죄한 자와 그 나라의 존재에 대해서 일체 하락하신 적이 없음에 대해 분명한 의지를 드러내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언젠가는 불로서 인간 사는 세계를 불지를 것임을 확실히 해두십니다.
어떻게 생명나무도 없이도 살 생각을 하느냐 하시는 겁니다. 다 누락시키고 다 소실시키실 작정이십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끝에 보면, “그 때에도 내가 너희를 진멸치는 아니하리라”고 하십니다. 남겨두시겠다는 겁니다. 그냥 멀쩡하게 남겨두시는 것은 아니고 ‘너희들이 마땅히 불에 타야 해’라는 점을 명백히 하시면서 남겨두시겠다는 겁니다.
이스라엘은 일종의 하나님께서 그리신 초상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그림 안에, ‘인간은 누락되고 소실되는 것이 정당하다’는 내용이 담겨 있기에 남아 있을 수 있는 겁니다. 생명나무가 없는 세계에서 감히 살려고 하는 것 자체가 이미 우상숭배적이라는 겁니다. 따라서 두루 도는 화염검의 여파를 속히 실시하지 않고 인간 세계에서 계속 자식 생산이 이어지는 것은 하나님의 뜻과 취지가 담긴 이스라엘을 그 안에서 배태하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선지자를 보내어서 바벨론 군대로부터 싹쓸이하도록 하시면서도 아주 진멸치는 않으시는 겁니다. 출애굽기 3장에 보면, 하나님의 말씀이 불을 동반하고 불 속에서 나오시는 말씀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그에게 나타나시니라 그가 보니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으나 사라지지 아니하는지라
이에 가로되 내가 돌이켜 가서 이 큰 광경을 보리라 떨기나무가 어찌하여 타지 아니하는고 하는 동시에 여호와께서 그가 보려고 돌이켜 오는 것을 보신지라 하나님이 떨기나무 가운데서 그를 불러 가라사대 모세야 모세야 하시매 그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이리로 가까이 하지 말라 너의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출 3:2-5)
모세는 선지자입니다. 그의 입에서 나는 말씀은 그 시대에 소실과 인간 누락을 유발하십니다. 이것은 애굽 나라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에게도 적용됩니다. 모세를 통해서 나타난 말씀, 즉 우상숭배가 담긴 십계명으로 인해 많은 사람이 죽었습니다. (출 32:20) 즉 나는 사람없이도 일하신다는 됩니다.
그렇다면 왜 이스라엘에게 선지자를 계속 보내시는 겁니까? 그것은 누락되고 소실되어야 옛 인간들 속에서 ‘불에 타다 만 나무막대기 같은’ 자들을 하나님께서 쓰시는 종으로 삼기 위함입니다. 그 예가 다니엘 3:20-25에 나옵니다. “ 군대 중 용사 몇 사람을 명하여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결박하여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 던지라 하니
이 사람들을 고의와 속옷과 겉옷과 별다른 옷을 입은 채 결박하여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 던질 때에 왕의 명령이 엄하고 풀무가 심히 뜨거우므로 불꽃이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붙든 사람을 태워 죽였고 이 세 사람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결박된 채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 떨어졌더라
때에 느부갓네살 왕이 놀라 급히 일어나서 모사들에게 물어 가로되 우리가 결박하여 불가운데 던진 자는 세 사람이 아니었느냐 그들이 왕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왕이여 옳소이다 왕이 또 말하여 가로되 내가 보니 결박되지 아니한 네 사람이 불 가운데로 다니는데 상하지도 아니하였고 그 넷째의 모양은 신들의 아들과 같도다 하고”
분명 세 사람이 불 속에 떨어졌지만 그곳에 신과 같은 계셔서 네 사람이 되고, 다니엘 세 친구는 아무런 불로 인해 태워짐이 없었습니다. 이것이 신약에 들어오면 이러합니다. 육에 속한 사람과 영에 속한 사람을 나뉘어서 육의 출신자가 성령에 의한 심판을 통해 영의 세계로 들어와서 예수님과 더불어 살게 된 겁니다.
육이었던 시절의 성도가 아닙니다. 그 인간은 불의 심판으로 벌써 죽었습니다. 새로운 피조물로서 영의 사람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신분으로서 그들은 악마와 싸우게 됩니다. 그들의 할 일은 마귀가 싸우는 겁니다.(엡 6:10-12) 하나님의 뜻을 가리는 그 악마를 상대로, 이제 이미 죽은 자로 싸우게 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성령께서 우리에게 행하신 바가 우리 인간이 결코 해내지 못한 일임을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설교
32강-예레미야 5장 14~18절(불탄 막대기)230101 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예레미야 5장 14~18절입니다. 구약성경 1058페이지입니다.
“그러므로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그들이 이 말을 하였은즉 볼찌어다 내가 네 입에 있는 나의 말로 불이 되게 하고 이 백성으로 나무가 되게 하리니 그 불이 그들을 사르리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스라엘 족속아 보라 내가 한 나라를 원방에서 너희에게로 오게 하리니 곧 강하고 오랜 나라이라 그 방언을 네가 알지 못하며 그 말을 네가 깨닫지 못하느니라, 그 전통은 열린 묘실이요 그 사람들은 다 용사라, 그들이 네 자녀들의 먹을 추수 곡물과 양식을 먹으며 네 양떼와 소떼를 먹으며 네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열매를 먹으며 네가 의뢰하는 견고한 성들을 칼로 파멸하리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 때에도 내가 너희를 진멸치는 아니하리라”
선지자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 불이 되게 하고 그 불을 현실화시키는 작업중의 하나가 바벨론 나라가 쳐들어 와서 그동안 이스라엘이 자식들에게 주려고 모아 놓고 상속하려 했던 풍족한 그러한 곡물들, 재산들, 양식들, 소 떼, 양 떼, 이 모든 것을 그들로하여금 칼로 파괴하는 작업 전체를 불로 언급하신 거예요. 불의 특징은 소실시키고 소멸시키는 기능을 하는 겁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서 보이는 선지자를 이 세상에 보내셨고, 선지자는 그냥 인간이지만 중요한 것은 선지자에게서 무슨 말이 나오느냐가 중요한데, 그 말이 불이 되게 하시는 그 목적은 바로 소실, 있는 것을 없이하고 없애버리는 그 기능을 발휘하게 되고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방나라, 너희가 말도 못 알아듣는 나라 사람들이 공격하는데, 그들의 전통(화살통)은 곧 우리의 무덤이 될 것이며 그들은 용사가 되어서 인정사정 볼 것 없이 학살하는 그러한 일들이 벌어지면서 선지자의 말대로 불이 되게 하는 것처럼, 이 백성이 불로 타버리는 백성이 될 것이다.
그런데 18절 끝에 보면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때에도 내가 너희를 진멸치는 아니하리라”라고 되어있어요. 없애기는 하지만 다는 없애지 않는다는 거죠. 어떤 거냐면 불 속에서 거의 다 탔는데 다 탈쯤에 황급히 끄집어낸 불탄 나무 통가리, 그 정도는 남게 하겠다는 거예요. 왜냐 하면 그래야 너희들이 불타서 죽었다는 사실을 불탄 막대기가 증거 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선지자의 말은 불이다. 선지자에게 그런 지시를 내리는 분은 너희들이 믿던 여호와 하나님이 지시를 내렸다. 그동안 너희들이 여호와를 몰랐던 이유가 가진 게 있어서 그렇다. 자식에게 줄 유산과 재산과 추수 곡물과 양식, 소 떼와 양 떼, 이런 것들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 본래의 불이 되게 하시는 취지를 너희들이 그동안 가로막고 있었다는 그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그런 이야기 들으면 듣는 우리 인간 입장에서는 굉장히 기분 나쁘지요. 여기서 중요한 거예요. 주의 말씀이 어떤 말씀이든 기분 나쁘게 들리는 거, 또는 어떤 말은 기분 좋게 들리는 거, 이게 뭐가 문제냐 하면 어떤 말이 들리든 본인이 누락되었다는 사실을 잊었기 때문에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불이 와서 종이를 태운다고 할 때, 누가 자기가 쓰던 종이를 태우는 것에 행인이 또는 우리가 분노하지는 않지요. 왜? 그 불탄 현장에 본인의 것이 없고 또는 본인이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자기가 누락되어서 기분 나쁘지 않다는 겁니다.
그런데 막상 그 불이 나에게 옮겨 온다면 이건 뭐 펄쩍 뛰고 환장하죠. ‘사람을 불태워 죽이려고 하느냐?’라고 달려들죠. 이처럼 인간들은 없어지는 자기 누락 없이, 자기가 삭제되지 않는 상태에서 선지자의 말을 이해하고 해석하고 하나님을 믿으려고 했다는 겁니다. 선지자의 말이에요. 제 말이 아니고. 제 말이라고 오해하지 마시고요. 선지자의 말입니다. 그러면 이게 무슨 이유가 있지 않겠습니까?
왜 우리를 누락시킵니까? 우리가 우상을 섬겼다는 거예요. 그러면 우상이 뭐냐. 우상은 진짜와 다른 것이 우상입니다. 초상화를 가지고 설명을 해드릴게요. 옛날 화가들이 귀족 집에 가서 돈을 받고 귀족들 초상화를 그려줬어요. 초상화를 그린 이유는, 또는 왕의 초상화를 그리면 그건 그 나라 최고의 화가죠. 초상화를 그리는 이유는 왕이라는 지금의 부귀영화를 누락시키지 않기 위해서 하는 겁니다.
초상화를 그릴 때 위엄있게 그려달라고 요청을 해요. 그러면 돈을 받고 당대 최고의 화가들이 위엄있는 초상화를 그립니다. 렘브란트나 레오나르도 다빈치나 그 당시 화가들은 그게 자기들 업종이니까 다들 그렇게 했어요. 할 때, 비록 나는 죽어도 초상화에 있는 나의 웃음은 그 작품, 회화작품, 그림작품이 있는 한 영원하다는 거죠. 이게 바로 인간의 스스로 누락하지 않으려는 하나의 꼼수이고 요령입니다.
돈이 있기 때문에 하는 거죠. 초상화를 후손이 보면서 ‘우리 할아버지가 저런 귀족인데 할아버지의 저 위엄있는 자태와 여유 있는 얼굴의 표정과 웃음을 봐. 이건 영원하리라’라고 하는 거죠. 사람들이 그걸 노리는 거예요. 그러면 화가는 왜 그렇게 그려주는가. 돈 받고 그려주는가? 물론 돈 받고 그려주죠. 그러면서도 화가는 그림을 그리며 나름 노리는 것이 있어요.
뭘 노리느냐. 이 초상화를 보는 후손이든, 관람객이든, 왕이든, 당사자든, 누구든 초상화를 보면서 그들이 보고자 하는 것을 시선을 빼앗아서 자기 그림에 심어놓는 거예요. 그러면 보는 사람들은 화가 본인 작품에 매료가 됩니다. 이것은 화가로서 더할 나위 없는 자부심이 되는 겁니다. 내가 남들의 영혼을 빼앗았고 자부심을 빼앗았고 정신을 앗아가서 내 작품 속에 영원히 가둬놓은 것이 되는 거죠.
돈만 취하는 화가가 아니라 그 정도로 잘 그리는 감동하게 하는 화가, 자기 작품을 통해 잊히지 않게 하는 화가. 심지어 어떤 화가는 얼마 전에 죽었는데, 그 사람이 아버지를 다큐멘터리로 찍었어요. 외국에서 알아주는 우리나라 최고의 화가 중 한 사람인데 프랑스에서 활동했어요. 그 사람이 맨날 뭘 그리냐 하면 물방울만 그린 거예요. 어떤 사람은 드라이기 가지고 그 물방울을 말리려고 했어요. 너무 정교하게 그려서 진짜인 줄 알고.
물방울을 가지고 온갖 것을 그리고, 심지어 물방울 안에 창문까지 그려요. 멀리서는 물방울인데 안을 들여다보면 그 안에 창문까지 그려 넣었어요. 왜 그렇게 물방울을 그렸느냐. 그 사람 자식이 영화감독인데, 아버지의 다큐멘터리를 찍으면서 묻는 거예요. ‘아버지, 이야기 좀 해보세요. 왜 물방울입니까?’라고 물으니까 아버지 하는 말이 ‘내가 6.25 때 내려오면서 상처를 입었는데 상처를 말로 달랬다’라고 하는 거예요.
내가 이런 아픔이 있고, 과거에 이렇게 고생을 했다고 사람들에게 말을 했는데도 이게 치료가 되지를 않는 거예요. 내 마음에 평화가 없는 거죠. 그래서 그때부터 어떻게 했냐면 말은 듣지만, 말을 안 한 거예요. 그리고 자기 작품 활동에 그 모든 것을 다 담는 겁니다. 스스로 고독한 사람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그 사람이 치료되고 말았어요. 인간에게는 진짜 말을 하지 않는 것이 힘들어요.
어떤 노래 가사에서 이런 모순점이 있는 것을 발견했는데 ‘잘~있거라 나는 간다~’라는 가사가 대전부르스 노래거든요. 그런데 그 뒤에 가사가 말이 안 돼요. 들어보세요. ‘잘~있거라 나는 간다~이별의 말도 없이~’ 말이 없으면 말없이 가야지 왜 ‘잘~있거라’라는 말을 왜 해요? 좀 억지 같기도 한데, 그냥 잘 있으라는 말을 하지 말아야지요. 이게 인간은 말을 안 하면 못살아요.
실제로 이런 일이 있는데, 군에 개를 키우는 군견병이 있어요. 2년 동안 개 옆에서 개만 키우는 병사가 그동안 개와 동고동락 하다 보니까 자기는 제대날짜가 다가왔고 개는 제대가 안 되고 늙으면 안락사시키니까 헤어지는 것이 아쉬워서 나중에 개가 늙어서 기능 못 하면 자기가 데려가려고 생각을 하고 있었던 거예요. 그 군인이 제대하고 집에 있는데 함께 있던 개를 잊을 수가 없는 거예요.
그래서 항상 꿈에도 개, 밥 먹을 때도 개, 그렇게 항상 개만 생각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자기보다 기수가 많이 차이나는 늦은 후배 군견병이 자신이 제대하면서 개도 같이 제대해서 개를 키웠답니다. ‘고독한 훈련사’라는 프로가 있어요. 고독하게 돌아다니면서 개를 잘 키우는 집만 골라서 돌아다니는 거예요. 아무튼 군에서 자기가 키우던 개가 나중에 알고 보니 후배랑 같이 제대를 해서 너무 잘 돌봐주는 데 어느 정도 환경이 좋으냐 하면 자기 아버지랑 누나가 수의사예요.
개는 더할 나위 없죠. 가까운데 병원이 있는 거예요. 개는 그렇게 편안하게 자기 퇴직 생활을 하는 겁니다. 나이 들면 병원 가까운 게 최고잖아요. 그 사실을 알고 선임자가 너무 만족해서 그때부터 꿈에 개가 안 나타난답니다. 정신이 치료된 거예요. 이처럼 인간은 혼자 자기를 생각하는 것이 아니고 자기를 이상화하고 초상화에 웃음처럼 자기 자신을 절대화 할 수 있는 우상과 더불어 인간은 살아갑니다.
그냥 홀로 살 수가 없어요. 그러니까 선지자가 너희들이 우상숭배 했다고 이스라엘에게 윽박질러도 이스라엘은 대책이 없습니다. 왜? 인간이 원래 그런 존재이니까요. 나의 이상형을 인간은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어도 자꾸 예수를 자기 원하는 예수상으로 자꾸 바꾸는 거예요. 이런 경우에 인간은 어떻게 할 수가 없으니까, 자기 누락이 안되니까, 하나님의 방법은 뭐냐 하면, 이런 게 참 어려운데, 성경에서 이게 제일 설명하기 어렵지만, 여러분이 이해하실 거예요.
이스라엘 자체를 불에 탔다가 끄트머리에 그냥 끝만 남기고 다 타버린 이스라엘 자체를 하나님이 자신의 초상화로 사용해버려요. 하나님이 화가입니다. 그림을 그리는데 모든 인간은 우상숭배자 이기 때문에 이렇게 되는 게 맞고, 누락되는 게 맞고, 하나님에게 당해야 마땅하다는 주님 자신의 뜻을 구현하는 초상화로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사용하시는 겁니다.
그 사실을 이스라엘은 몰랐으니까, 자신들이 섬기는 하나님이 왜 이렇게 나오는지 당황하고 어떻게 우리에게 이럴 수 있느냐고 항의하고 원망하게 되는 거예요. ‘우리를 치료해야지요’라고 이스라엘이 주장할 때, 치료의 대상 자체가 안 된다는 그 자체가 진정으로 인간이 성도 되는 모습입니다. 나는 내가 원하는 모습으로 치료될 대상조차도 아니라는 겁니다.
누락되고 소멸되어야 하는데 다 진멸하지 않고 다 소멸하지 않는다는 말은 ‘소멸되어야 마땅합니다’라는 그 순간 주께서 끄집어내 버려요. 그러면 그 안에 뭐가 들어있느냐 하면 ‘나는 내 방식으로 나를 구원할 수가 없고 나를 건져 낼 수가 없습니다’라는 존재로 주님 앞에 붙잡힌 바 되죠. 이러한 존재가 된다는 것은 인간으로서는 이럴 수 없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런 성도의 경지가 되면, 굳이 남을 속일 필요가 없어요. 남을 속이면 그만큼 우리가 스트레스받아요. 산다는 것은 속이는 행위의 연속 아닙니까? 굳이 남을 속일 필요가 없어요. 그저 나는 불에 타다가 만, 아무 쓸데 없는 작대기란 식으로 세상에 나서면 되는 겁니다. 비상하는 날개를 펴고 날려고 하지 말고 그냥 주님에게 당했던 그 모습으로, 그대로 나가면 됩니다.
그러면 세상 사람들이 ‘너는 그렇게 불탄 존재로 하나님 앞에, 네가 믿는 예수님에게 그렇게 당해놓고 지금 살 맛이 나냐? 차라리 죽어라!’라고 하면 지금 이 모습이 죽은 모습이라는 거예요. 죽었다는 것이 네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고, 죽음의 끝이 아니고, 나를 없애는 분이 나와 함께 있다는 그것이 바로 내가 죽었다는 표시예요.
‘나는 죽었고, 죽었고’라는 것이 뭐냐 하면 멀쩡하게 잘 사는 모습이 죽은 모습이에요. ‘나는 이 모양으로 살아. 됐냐?’라는 것이 나의 죽은 모습이라니까요. 겨울철에 사람들이 먹고 싶은 것이 붕어빵이에요. 길거리에서 파는 것이 붕어빵인데 요새는 밀가루값이 비싸고 설탕값이 비싸서 사람들이 판매를 잘 안 해요. 그걸 노렸는지 우리나라 식품회사에서 붕어빵을 만들어냈어요.
그런데 그런 붕어빵들은 모양만 붕어빵이지 진짜 길거리에서 파는 그런 모습과 맛의 붕어빵이 아니거든요. 그런데 ‘여태껏 이런 맛은 없었다’라는 자신감을 내세우는 붕어빵이 나왔어요. 설빙에서 나온 붕어빵인데 길거리의 진짜 붕어빵보다 더 맛있기 때문에 이건 제한 판매를 해서 홈쇼핑에서 세 박스를 주문해도 한 박스밖에 안 준대요. 한 박스가 1킬로인데 가격은 16650원. 절대 다른 회사는 안 됩니다. 설빙 회사 것만 맛있고 속에 팥이 들어있는 것만 맛있대요. 이 이야기를 함평에 우 집사님에게 들었어요. 자기 아들이 사줬다고 큰 자랑을 하셔서 기억합니다. 너무 맛있다는 거예요.
이게 뭐냐 하면 없는 것 대신에 뭔가 새로 나온 건데 진짜 붕어빵은 아니에요. 가짜인데 주께서 새로 만든 가짜, 그게 바로 성도인 우리 자신들입니다. 내가 원하는 유사한 내가 아니라, 나는 사라지고 나를 닮은 가짜인데 주님께서 친히 만드신 나를 닮은 가짜, 그것은 죄인 되었다가 옴팡지게 얻어터진 그 가짜, 그게 바로 주께서 준비해 놓은 이스라엘입니다.
이걸 좀 어렵게 설명할까요? ‘나는 한국인이다’라고 할 때, 그 ‘나는’에 붙어있는 ‘한국인이다’라고 할 때 한국인에 들어가는 모든 것은 다 가짜로 들어가요. 진짜 나와 동일한 것은 없어요. ‘나는 한국인이다’라고 하면 한국인은 어때야 하는데? ‘황인종이다’ 이렇게 해서는 전부 다 실제와 안 맞거든요. 결국은 비슷한 것들만 집어넣는 것을 환유(換喩)라고 해요. 수사법에서 환유.
비슷한 것만 집어넣는 건데, 이게 뭐냐 하면 이 세상은 전부 다 가짜와 가짜의 배열로 되어있다고 설명할 때 이렇게 설명합니다. 이 세상 자체가 전부 다 진짜는 없고 가짜들만 넘실거리고 있어요. 가짜들만 넘실거리니까 네가 만든 가짜와 내가 만든 가짜, 이렇게 가짜들끼리 비교하고 경쟁하는 겁니다. 진짜는 없어요. 월드컵 축구 했잖아요. 게임이잖아요.
게임은 가짜가 가짜인 것을 숨기기 위해서 어떤 새로운 기쁨을 마련할 때 게임을 하는 거예요. 게임을 하는 순간 ‘나는 기쁘다. 즐겁다. 신난다’라고 느끼는 그 순간만큼은 내가 가짜라는 것을 잊어버리게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이 얼마나 마귀적인지를 우리가 알아야지요. 자, 그러면 본론으로 들어가서 왜 불이냐 하는 겁니다. 인간을 누락시키기로 했다고 말씀드렸죠.
왜 인간은 누락되어야 하는가. 그러니까 소리, 불이죠, 인간은 자신이 누락되지 않으면 자꾸 말씀을 지키려고 하니까 말씀을 못 지키게 만들기 위해서 말씀인 소리에다가 불을 대동시켜요. 불을 동반시킵니다.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라고 분명히 우상 섬기지 말라고 했잖아요. 그런데 그 말씀이 신명기 5장에 보면 이게 불이에요. 사람들이 ‘야, 말씀이다’라고 하면서 지키려고 하니까 불이 와락 달려드는 거예요.
화상 입는 거죠. 말씀을 지키려고 하는데 불이 나를 태워버리는 겁니다. 그러면 거기서 우리는 피하면 안 됩니다. 불의 지짐을 옴팡지게 당해야 해요. 쉽게 말해서 하나님은 인간을 누락시키고 일하고 싶다는 거죠. 인간이 있던 자리에 불을 두고 싶은 이유가 창세기 3장 24절에 있습니다.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동산 동편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화염검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범죄한 것을 눈 뜨고 못 본다. 내가 용납하지 않는다. 불로 싸질러 버린다. 내가 원하는 것은 생명나무 있는 곳이지 생명나무 없는 곳을 나는 있다고 말하기 싫다”라는 것이 하나님의 확고한 뜻입니다. 그렇다면 처음부터 불이 되어야 할 텐데 왜 불이 안 되고 사람들이 번성하고 태어났느냐. 출애굽기 3장에 보면 떨기나무 나오지요.
떨기나무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신발 벗으라고 하면서 떨기나무에 불이 붙는데 그 불에서 나오는 소리가 모세 안에 들어가면 모세 속에서 나오는 말소리는 세상을 누락시키고 소멸시키는 불같은 소리가 되어버려요. 그게 선지자입니다. 모세가 선지자 되기 위해서 불에서 나온 말씀이 모세 속에 들어가 버려요. 모세는 지팡이 들고 모세가 예언할 때마다 애굽나라는 소멸됩니다.
그렇게 소멸되고 소실되면 남는 게 뭐가 있느냐. 다니엘 3장 20~25절에 보면 유명한 대목인데 그 부분을 제가 다 읽어보겠습니다. “군대 중 용사 몇 사람을 명하여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결박하여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 던지라 하니 이 사람들을 고의와 속옷과 겉옷과 별다른 옷을 입은 채” 그러니까 집어넣는 그 사람들을 완전무장했어요. 자기들은 불에 안 타기 위해서. 그런데
“결박하여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 던질 때 왕의 명령이 엄하고 풀무가 심히 뜨거우므로 불꽃이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붙든 사람을 태워 죽였고” 불이 얼마나 심하게 뜨거웠는지 그 세 사람을 붙든 사람은 타죽었고 그 붙들림을 받은 다니엘의 세 친구는 멀쩡하고. 그러면 왜 멀쩡했는지 이유를 알아야 하겠지요. 이제 남은 것은 불밖에 없어요.
불 속을 왕이 자기는 안 타죽으려고 멀찍이 서서 살펴보니까 분명히 세 명이 들어갔는데 네 명이에요. 마태복음 18장 20절에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이게 교회라 했죠. 분명히 세 명이 들어갔는데 의외의 플러스 1명이 있어서 같이 그들이 불 속에서 거닐고 있어요. 왕이 놀랐죠.
“불가운데 던진 자는 세 사람이 아니었느냐 그들이 왕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왕이여 옳소이다 왕이 또 말하여 가로되 내가 보니 결박되지 아니한 네 사람이 불 가운데로 다니는데 상하지도 아니하였고 그 넷째의 모양은 신들의 아들과 같도다 하고” 이렇게 된 거예요. 다니엘 세친구도 몰랐어요. 다니엘 세친구가 불에 들어간다고 생각했지 주님 안에 들어간다는 생각을 못 한 거예요.
이게 주님 안에 들어갈 때 불로 들어가느냐, 물로 들어가느냐는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주님이 실존하고 주님이 함께 있음을 안다면 그 수단이 어떤 수단이든 다니엘 세친구는 거기에 개의할 필요가 없어요. 자기가 근심하거나 고민할 필요가 없습니다. 사람은 자기의 절대성적인 모습을 보고싶어해요. 주께서 그것을 치워버리십니다.
그런 인간을 누락시킴으로써 ‘나는 이런 인간이 되고 싶다’라는 것도 같이 누락시켜요. 누락시킨 그분이 누락시킨 현장에 주님이 가신 길을, 주님이 당했던 일을, 주님에게 일어났던 일을 거기에다 위치해 버려요. 그러면 주님을 위해서 살아야 했던 겁니다. 누락되어야 마땅한데 주님을 위해서 주와 함께 있어야 하는 거예요.
그러면 불로 다 지지고 태우고, ‘성도냐? 이리와. 불속에 들어가 보자. 믿음 있는지 시험해보자’ 이런 식으로 하시는가. 실제로 성경에 다니엘 보면서 다들 그런 걱정을 했을 거예요. ‘안 돼~~. 난 불에 약하단 말이야. 지금은 난로 앞에도 못 가. 너무 뜨거워서. 그런 식으로 시험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이라고 할지도 몰라요. 성경에는 그런 걱정이 되는 대목이 이것뿐만이 아니에요.
아버지 아브라함이 이삭 바칠 때, 그 대목 성경에서 보면 옆에 아들 붙잡고 ‘나는 지옥 가도 좋으니 너는 살아야 해’라는 이런 마음을 가질 수가 있다고요. 그게 이제 구약과 신약의 차이점을 몰라서 그러는데, 신약에서는 불로 어떻게 태우느냐. 사자에게 물려 죽게 하느냐. 아닙니다. 이렇게 합니다.
고린도전서 2장 12절에 먼저 보면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그리고 14절에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
신약에서 성령이 와버리면 불 통과하는 거, 자식 죽이는 거를 대체합니다. 굉장히 마음이 편해졌지요. 성령만 받아버리면 이미 죽은 자로 간주 되어서 새삼 불이고 물이고 그런 것은 이제 할 필요가 없어요. 성령 안에서 옛날 내가 알던 붕어빵은 누락시켜버립니다. 예수님에 의해서 새로운 피조물 된 붕어빵, 설빙 회사에 붕어빵, 이렇게 해서 없어졌던 나를 대체해서 생명나무와 끊어졌던 나를 생명나무를 증거 하는 사람으로의 새로운 창조를 불을 동반한 선지자의 기능 속에서 그것을 결과물로 내게 되어있어요.
그게 바로 성령의 사람입니다. 끝으로 그렇게 하게 되면 어디에 쓸모가 있느냐. 바로 에베소서 6장에 나옵니다. 10~12절에 보면 “종말로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마귀의 궤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이미 불로 태울 사람과 제발 싸우지 말고 논쟁하지 말고 그들 붙들고 비교 경쟁하지 말고 네가 잘났나 내가 잘났나, 네가 이겼다, 내가 이겼다, 그런 거 할 필요 없어요. 우리는 공중권세 잡은 악마와 싸우는 겁니다. 육이 전부라고 우기는 그 악마, 너는 없어지면 안 된다고 강조하는 악마, 너 죽으면 하나님도 소용없다고 주장하는 악마, 너를 살려줘야 사랑의 하나님이라고 우기는 그 악마, 가짜 예수, 자꾸 우리를 붙들고 우리를 없애지 않으려고 독려하고 격려하는 그 악마, 너는 훌륭하다고 긍정적 발언을 해주는 악마, 우리의 씨름은 그런 허상을 실제라고 우기는 그 마귀와 싸워야 할 것이 바로 오늘날 성도에게 주어진 임무인데, 그것도 우리가 싸우는 것이 아니고 우리 안에 성령께서 그렇게 해주십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이 가짜였습니다. 진짜인 줄 알았습니다. 부모에게 받은 이 몸이 죄에서 태어난 것도 모르고 괜찮은 줄 알았습니다. 이제는 죄에서 벗어나서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긴 입장에서 생명을 가리는 모든 육적인 것과 싸우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