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련회자료

타인의마을 7강-빠진 흔적

아빠와 함께 2023. 1. 14. 20:30

2023 겨울수련회 요한복음강해 제 7강 : 빠진 흔적 - 이 근호 목사


자, 7강 하겠습니다. 요한복음 8장부터 보겠습니다. 요한복음 8장에 간음하다 잡혀온 여인 장면부터지요. 그것하기 전에 요한복음 6장 57절 잠시 한번 보겠습니다. 요한복음 6장 57절에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살아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인하여 사는 것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인하여 살리라”

“내가 아버지로 인하여” 그다음에 중요한 것, “‘사는 것’같이 나를 먹는 자는 나로 인하여” 그다음에 또 중요한 것 나오죠, ‘살리라’ 이렇게 되어있죠. 산다는 것, 생명에 대해서 생존과 다른 생명은 어떤 관계성과 엮여져야 되느냐 하면 지금 예수님과 아버지의 관계로 인하여만 유일하게 영생을 얻는다는 것을 예수님이 제시했어요.

아버지와 내가 관계있는 그 관계가 생명이다. 이것이 생명이다. 내가 아버지로 인하여 산다 했죠. 지금 예수님은 이 세상에서 살았어요, 죽었어요? 분명히 죽었잖아요. 예수님이 돌아가셨잖아요. 지금 이 세상에서 예수님은 죽은 자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남들 보기에 죽었는데 아버지로 인하여 산다고 이야기했어요.

그러면 이 관계를 그대로 예수님 안에 집어넣으면 “나를 먹는 자는” 즉 “아버지의 관계 속에 들어온 자는 나로 인하여 살리라”라고 되어있죠. 비록 네가 죽더라도 ‘살리라’가 되는 겁니다. 그러면 아버지의 관계 이 세계로 빠져나가면 되겠죠.

그래서 이렇게 정리될 수 있어요. 요한복음은 세상에서 자기 자리를 잃어버린 자에게 천국 자리가 마련된다는 원리, 이게 복음의 원리입니다, 요한복음에서. 이 세상에서 자기 자신을 잃어버린 자에게 천국자리가 마련되는 겁니다.

그러면 요한복음 8장에서 간음한 여인이 나오죠. 간음한 여인을 주님께서 뽑아냄으로써 남아있는 이 세상은 간음한 세계가 되어버려요. 이걸 요한복음 8장에서는 음란한 세상이라고 이야기합니다. 41절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을 음란한 세상으로 봅니다. 혈통이 순종이 아니고 잡종적인 겁니다.

그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간음한 여인 자리를 쏙 뽑아버려서 빈자리로 만들었어요. 마개 하나 뽑아버리면 나머지는 마개 없이 전에 같은 동질이었다는 것을 티내면서 코르크 마개가 뽑히죠. 코르크 마개를 뽑아버리면 그 빈자리를 남긴 현장이 뽑아낼 때 규정된 그 규정이 자기에게 그대로 다 뒤집어씌워지는 거예요.

너희들이 그 여인을 간음했다 했잖아. 바로 간음한 여인을 샘플로 뽑아냄으로써 너희들이 간음한 자라는 것을, 그 뽑혀 나가는 규정을 남아있는 자들이 그대로 물려받는 겁니다. 요한복음 9장에서 소경된 자를 뽑아서 주께서 거기에 변화를 주어서 예수님과 함께 사는 자로 만들어버리면, 소경된 자를 소경되었다고 규정한 그 모든 남아있는 세상은 무슨 세상이 되죠? 소경의 세상이죠.

요한복음 10장에서 바리새인들은 목자가 되고 백성을 양으로 생각해서 목자가 양을 제대로 하나님의 백성으로 키운다는 그들에게 주께서 자기 양들을 뽑아버리면 그들 자리가 뽑혔으니까 거기에 빈 공백이 남겠죠. 떠나버린 그 빈자리, 지금 빈자리 있잖아요, 떠나버렸으니까. 그 빈자리에 의해서, 떠나버린 자에 의해서 그들은 가짜 목자들이고 가짜 양이라는 것을 들통내는 표적이 바로 주님의 요한복음 10장에 나오는 표적입니다.

요한복음 11장은 더 가관입니다. 멀쩡히 살아있는 사람을 살아있을 때 치료가 가능한데 주께서 계속 마르다, 마리아 오빠를 죽을 때까지 기다려요. 죽을 때 됐는데 야, 이거 질기네. 죽을 때 됐는데……. 그런데 전갈이 왔어요. 드디어 기다리다가. 주께서 남의 병은 오지랖 넓게 고쳐주면서, 잡채 얻어먹었지, 탕수육 얻어먹었지, 극진한 대접을 받았던 그 마르다, 마리아 집의 기둥 같은 오빠가 죽지도 않고 아프다는 소식을 들었으면 빨리 왔어야 되는데 주께서는 계속 시계 보면서 “아직 안 죽었네.” 하다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가자. 가자, 이제.” 하는 거예요.

죽은 자를 발생시킴으로써 마르다, 마리아 오빠에게 일어난 사건에 해당되지 않는 모든 마르다, 마리아 가족 오빠 빼놓고 다 죽은 사람으로 규정할 수 있는 빌미를 주님께서는 오빠를 살림으로써 제공한 거예요. 빈자리가 그들을 규정하는 겁니다. 왜 떠나보냈느냐.

그리고 결정적인 것은 뭐냐 하면 마지막 12장에서 국가 자체에서 떠난 자가 등장해요. 누구게요? 국가 자체에서 뽑혀버린 자. 간음한 세대에서 간음한 여자를 뽑아내서 남은 세계를 음란한 세대라고 규정했다면, 소경된 자를 뽑아냄으로써 나머지가 실제로는 그게 완전히 눈 먼 봉사라는 것을 규정한 것처럼, 마지막에는 국가 자체가 거짓됐다는 것으로 국가 자체를 통째로 다른 국가, 거짓된 국가로 드러내기 위해서 뽑힌 분이 있습니다. 그 분이 누구겠습니까? 예수님. 예수님이죠. 예수님 자체가 뽑힘으로써 요한복음 18장에서 내 나라는 따로 있다는 겁니다 (요 18:36).

뽑아낸다는 것을 다시 말씀드리면 이렇습니다. 세상에서 자기 자리를 잃어버린 자에게 천국에서 새로운 자리가 마련되는 겁니다. 그렇지 않으면 천국에 자리가 없어요. 내(예수님) 나라는 따로 있는 거예요. 예수님이 빠져나오죠.

그래서 베드로전서 2장에도 그런 말씀이 있습니다만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새로운 집의 모퉁이돌이 되었나니 (벧전 2:7). 버림받았다는 것이 얼마나 고맙고 다행스러운 일인지요. 버림 안 받은 것은 정말 저주받은 인생입니다, 이 세상에서 버림 안 받은 것.

좀 버려줘. 날 좀 버려줘. 성도 같으면 버려줍니다. 마귀가 덤프트럭에 실어서 갖다 버려버리죠. 그렇게 도착한 곳이 바로 천국입니다. 친절한 마귀 씨가 우리 조직에 필요 없다고 갖다버리죠. 입만 떼면 복음 얘기하는 넌 필요 없다. 목사 파면당하고 교회에서 욕 얻어먹고 ‘넌 왜 그리 사회성이 없나’ 이런 비난을 받는데 그 사회성, 자기들끼리 결속된 사회성이 주님 앞에 버림받은 백성이에요, 거꾸로.

그게 어디 나오느냐 하면 요한복음 1장에 나옵니다. 1장 11절,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 했죠. 그래서 백성이 아닌 거예요. 백성이 없는 거예요. 백성이 없으니까 백성을 모집해야겠죠. 12절,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사람의 뜻으로 된 것은 아니다. 이렇게 요한복음 11절과 12절에 나와 있습니다.

아까 요한복음 6장 다시 보겠습니다. 성도는 예수님으로 인하여 ‘살리라’ 되어 있죠. 그다음 우리가 생각해야 될 문제는 뭐냐? 그럼 세상은 뭐로 살죠? 이 세상 사람들은 뭐로 삽니까? 성도는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살리라’가 되면 성도 아닌 그들은 뭐로 말미암아 삽니까? 그들이 살고자 하는 그 환경이 뭐냐 이 말이죠. 그것이 바로 국가의 권력, 국가의 권세입니다. 이게 최종적으로 나타나요.

그래서 요한복음 마지막 18장, 19장에는 두 대장이 등장해요. 이쪽 예수님 나라에는 예수님이 등장하고, 저쪽 세상 사람들이 살고자 하는 것은 국가에 종속되어 국가의 권세로 말미암아 그들은 살아보려고 애를 쓰죠. 그들의 대표자가 바로 본디오 빌라도입니다. OK목장에서의 마지막 결투처럼 둘의 최후의 결투가 벌어지죠.

양쪽 다 기 싸움이 있습니다. 본디오 빌라도가 아주 시건방지게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나는 너희들 종교보다 한 수 위에, 위상적으로 더 높은 위치에 있다는 허세와 거만을 부리면서, “너희들의 종교적 수준에 의해서 너희들이 사형시켜달라고 저 예수라는 사람을 나한테 보냈는데 그것마저 뛰어넘어서 내가 그를 풀어줄 권세가 나한테 있다.”라고 이야기해요.

그 이야기를 왜 하느냐 하면, 소위 종교인들아, 바리새인, 서기관들아, 너희들이 여호와를 섬긴다 섬긴다 하지만 형식적으로 여호와가 최고라고 보지만 지금 내가 너한테 제안을 했다는 말은 너희 여호와의 권세보다 실질적으로 더 센 게 뭐냐? 이 나라를 실제적으로 통치하고 있는 이 총독, 본디오 빌라도의 국가 권력이 네가 믿는 여호와보다 더 세잖아. 그래서 너희들은 이 예수님의 책임에 대해 나한테 일임했잖아.

만약에 너희들이 원하는 대로 사형을 시켜주면 본디오 빌라도는 여호와보다 위상적으로 더 높다는 것이 증명이 안돼요. 시키는 대로 했으니까. “우리가 시키는 대로 사형시켜주세요.” “예. 시키는 대로 사형시켜드릴게요.” 이렇게 되면 안돼요. 그러면 종교가 더 높으니까.

이참에 본디오 빌라도는 그딴 종교보다도 국가가 더 세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너희들 수준에서 결재 올린 것, 반드시 사형시켜달라 했지? 난 너희들이 발현할 수 있는 권세에 더 붙일게. 너희들 풍습에 의하면 한 사람 놓아주게 되어있는데 어떠냐? 후보감으로 나는 예수를 첨가하는데 너희들 어떻게 생각해?”

너희들이 생각 못한 사면권, 1년에 한 번씩 대통령이 사면하잖아요, 사면권을 발휘함으로써 그 당시 바리새인들이 믿는 여호와라는 신이 국가 아래 있음을 계속 확인시켜 주는 것, 그것에 대해서 그들이 아무 소리 못하고 수용했다는 것은 그들의 종교의 자리는 국가 권세가 할당하고 지정한, 배치된 장소가 돼요.

인간은 무엇으로 사는가? 국가 권세의 보호 아래 사는 겁니다. 국가를 벗어나면 죽죠. 국가를 벗어나면 사형당하고 죽습니다. 그래서 이제야 보게 되는 게 교재에요. 교재를 이제 보는데 다 읽진 않고 중요한 것만 보는데 p.5입니다.

p.5에 【5. 신체】가 나오고요. 세 번째 단락 보겠습니다. 최초의 인간은 인간이 처음 탄생할 때 모든 인간이 출산될 때 모습입니다. 【최초의 인간은 깨진 달걀에서 흘러나온 액체의 흐름처럼 매임이 없었다. 소위 ‘액체 인간’이었던 것이다. 그러다 이 액체 인간이 피부 표면의 구멍들, 즉 눈, 코, 입, 귀 등에 얽매인 인간으로 변한다. 이 구멍들은 신체의 감각 기관들이다.】 이렇게 되어 있죠.

이게 무슨 뜻인가? 계란을 만약에 실수해서 식탁 밑으로 탁 깨뜨렸다면 무엇과 무엇으로 분리되느냐 하면 노른자와 흰자가 같이 분리되어서 액체 점액 같은 흰자가 무질서하게 퍼져서 있죠. 계란 껍질은 저쪽으로 날라가버리고 그 안의 내용물이 쏟아지잖아요. 이것이 인간 몸의 자율성입니다.

경찰이 와서 계란보고 “계란! 어이, 흰자. 똑바로 해. 자세 잡아.” 이러면 흰자가 “예” 하고 자세 잡습니까? 경찰은 국가가 지정한 권력 기관이에요. 국가를 표현할 때 이렇게 표현한 사람이 있어요. 국가는 기계 장치이다. 힘을 분배하고 소비하는 기계 장치라 했어요, 국가가.

기계 장치이니까 여기서 인간적이고 감정적이고 인격적인 요소는 국가의 관료체제에서 완전히 빠진다는 말이죠. 국가는 인정사정 봐주고 이러면 안돼요. 완전히 법적으로 법에 실린 권력을 행사함으로써 국가는 철저하게 기계 장치가 되어야 돼요. 그래서 사람들이 쏟아내고 있는 에너지를 적절하게 분배하고 지정하고 소비시키고 또는 생산시켜서 국가 자체를 유지하는 에너지를 지속시키고 보장해야 돼요.

아까 했잖아요. 나는 우리이고 우리는 곧 나이다. 국가가 나를 대신하는 내가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나는 주체죠. 내가 갖고 있는 주체는 국가가 필요로 할 때 양도해야 되고, 그래서 군에 가는 거예요, 양도해야 되고 국가가 너는 뭐 하라고 지정할 때 그 자리를 할당받고 배정받을 때 우리는 비로소 국가 안에서 우리 자리가 확보되면서 우리는 나의 주체성을 할당받게 되는 겁니다.

이 권세에서 어느 인간도 빠져나가지 못해요. 종교요? 그건 이미 했잖아요. 바리새인들도 본디오 빌라도의, 로마의 칼 힘, 권력 힘, 무기 힘에 꼼짝 못한다고요. 본디오 빌라도 앞에 바리새인들이 꼼짝 못한다는 것은 예외가 아닙니다.

자, 다시 묻습니다. 인간은 무엇으로 삽니까? 요한복음은 말합니다. 인간은 무엇으로 사는가? 국가의 권력으로 산다. 국가의 권력에 대든다든지 거기에 반발하면, ‘산다’의 반대말, ‘죽는다’가 돼요. 죽는다. 이것은 목숨을 잃어버리는 거예요.

거기에 대해서 요한복음은 이것을 찬스라 보는 거예요. 이 땅에서 자기 자리, 국가에서 할당해준 자리를 잃어버린 자는 국가를 돌파한 자가 된다는 거예요. 시시하게 이웃집하고 층간 소음으로 싸우지 말고 최종적인 것, 국가라는 권력체를 주적(主敵)으로 보고 살아야 된다는 거예요, 국가를. 왜냐하면 국가가 그냥 있는 게 아니고 내 목숨줄이기 때문에 그래요. 그럼 국가와 싸운다는 것은 내가 나 자신하고 싸우는 거예요. 나는 국가가 할당한 자리에 있을 때만 안전빵이기 때문에.

나라 없는 사람들 많죠. 방글라데시에서 여기 일하러 오는 사람들, 미얀마 사람들, 필리핀 사람들, 그 사람들은 여기 10년 20년 있으면서 빨리 뭘 얻으려고 합니까? 시민권 얻으려고 하는 거예요. 이번에 월드컵 어디서 했죠? 카타르에서 했죠. 카타르는 시민권 가진 사람이 15%밖에 안돼요. 너무 잘 살죠. 조건이 뭐냐? 30년을 그 동네 살아야 시민권 줘요. 그럼 나머지는 뭐냐? 노동하는 기계에요. 그냥 노예로 팔려간 거예요. 실컷 노예로 부려먹는 거예요. 그 가운데 북한 노동자도 있고 거기서 삼천 명 죽고 뭐 이런 이야기 있어요.

시민권을 얻는다는 것은 국가 권력의 일부를 할당받아서 ‘국가로 인하여 살리라’를 구체적으로 실행에 옮길 수가 있는 거예요. 큰 교회 당회장은 뭐로 삽니까? 국가로 살죠. 국가로 살아요. 큰 교회 당회장은 국가에서 마스크 쓰라 하면 마스크 쓰고 모이지 말라 하면 모이지 말아야 돼요. 보세요. 명령 잘 듣잖아요. 국가 말 안 들으면 문 닫아야 되죠. 그럼 교회 문 닫으면 누가 죽어요? 당회장 목사가 월급 못 받으면 살기 힘들죠.

그러니까 결국 이런 논리 방정식을 간단하게 축약하면 뭡니까? 목사는 뭐로 산다? 국가로 산다. 간단한 문제에요. 그게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고 사두개인들이잖아요. 그럼 그 큰 교회가 모시는 신은 우상이죠. 여호와라는 이름의, 삼위일체라는 이름의 우상이 되는 거예요. 우상이라는 것은 가짜 신을 말합니다. 가짜 신.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너희 신, 바리새인 너희들이 여호와가 아닌 우상으로 여겼던 우상에 대해서 우상으로 쳐버리는 겁니다. 그게 요한복음 10장에 나옵니다. 10장 34-35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 율법에 기록한바 내가 너희를 신이라 하였노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성경은 폐하지 못하나니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을 신이라 하셨거든”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을 신이라 했죠. 이 말씀은 시편 82편 6절에 나오는데 벌써 유대인들은 우리는 하나님의 율법을 받았기 때문에 다른 이방 민족과 달리 우리는 신 같은 존재라고 우기면서 자신들을 우상시했던 겁니다.

그런데 시편 82편 6절에 보면 이렇게 되어 있어요. “내가 말하기를 너희는 신들이며 다 지존자의 아들들이라 하였으나” 부정성 들어갑니다, ‘하였으나’. “너희는 범인같이 죽으며 일반 이방 민족의 하나같이 엎더러지리로다”

말씀의 진행 과정에서, 현재 있는 나를 겨냥한 겁니까, 아니면 말씀의 진행 과정에서 여기서 노선이 달라진다는 말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지킨 사람은 하나님의 신이 맞아요. 맞는데 실제로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니까 신이라고 여겼던 사람은 이게 가짜로 들통나는 거예요, 가짜로.

그러면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사람은 신이라는 시편 82편 6절의 말씀은 틀렸습니까, 맞습니까? 맞죠. 시편 말씀대로 지키는 누구밖에 없습니까? 예수님이라 하지 말고 ‘이들, 가짜 우상을 섬기는, 자기를 우상화시키는 자들에 의해서 버림받은 자이다’ 이렇게 이야기해야 돼요. 버림받은 자이다.

말씀의 진척 과정에서 반드시 노선이 두 개로 갈라지기 때문에 그래요. 사람들은 자기가 어떤 존재인 것을 생각하지 못하고 말씀만 지키면 말씀에서 언급하는 그 결과가 자기와 일치된다고 여겼던 겁니다. 말씀대로 지키면 내가 그대로 된다고 여긴 거예요.

예를 들어서 예수님의 살과 피를 마시면 생명을 얻는다고 되어 있잖아요. 그러니까 천주교 또는 기독교에서 예수님의 살과 피를 마시면 영생을 얻는다 했으니까 이 노선에 본인을 집어넣는 거예요, 본인을. 본인을 집어넣으니까 예수님의 살과 피가 어느 정육점에서 팔아요? 선짓국집에서 팝니까? 대구의 유명한 국밥집에서요? 어디서 팔아요? 이걸 먹어야 되잖아요. 그러니까 어떤 수단을 찾느냐 하면 포도주스를 피라 하고 비스켓을 떡이라고 여겨서 그걸 우리 교회가 보증해 줄게, 이렇게 나오는 거예요.

그들은 말씀 자체가 나를 우상화시키고 이런 나를 비켜나간다는 것, 나는 이미 우상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나는 이 말씀에 대해서 곧 예수님에 대해서 거역하는 본성으로 작동하고 있으므로, 말씀이 내게 왔다는 말은 진짜 예수님을 핍박하는 경우가 내 쪽에서 발휘되고 있는 그런 본질이 있다는 사실을 인간은 몰라요.

예수님 자신이 말씀이에요. 그걸 구체화시킨 것이 예수님의 육신이에요. 그러면 예수님의 육신 안에 말씀은 완료 상태입니다. 이 완료를 다른 사람에게 빼앗기지 않아요. 그런데 어쭙잖게 부정성도 모르고 자기가 메시아도 아니고 약속한 독생자도 아닌 주제에 자기가 말씀을 지키겠다고 나서는 거예요. 나서니까 결국 나오는 것은 핍박밖에 없는 거예요.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는 방법은 우리에게는 없습니다. 따라서 영생도 없습니다. 영생이 없으면 방법은 뭐냐? 주님에 의해서 우리 자신이 잃어버린 자가 되어야 되죠. 나라는 이 집합 안에 내 자체가 잃어버린 자가 되는 겁니다. 그건 바로 성령이 오시면서 드디어 본격적으로 실시가 돼요.

말씀이 본래 주인을 찾아가야 돼요. 그게 요한복음 5장 39절에 있는데 한번 찾아보겠습니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이걸 패러디해볼까요? ‘너희가 교회에서 성만찬을 통해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와 똑같은 거예요.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예수님이 다 이루었다는 것을 증거하는 거예요. 우리를 비켜가는 겁니다. 그러니까 시편 82편 6절에 나오는 것처럼 네가 성경 말씀 지키면 신이 된다고 기대하면서 막상 말씀을 대해봤자 말씀이 너로 하여금 신이 아니라 먼지 같은 일반인으로 그냥 전환시킬 것이다, 그 내용이에요.

신이라고 여기고 싶지? 네 마음대로 안 될걸? 이게 성경 말씀이에요. 그 이유가 뭐냐고 물으면 지킬 말씀을 주께서 따로 보내시기 때문에 그래요. 이것이 납득 안 되신다면 히브리서 10장에서 확실히 정리될 수가 있어요. 5-7절에 “그러므로 세상에 임하실 때에 가라사대 하나님이 제사와 예물을 원치 아니하시고 오직 나를 위하여 한 몸을 예비하셨도다 전체로 번제함과 속죄제는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이에 내가 말하기를 하나님이여 보시옵소서 두루마리 책에 나를 가리켜 기록한 것과 같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주께서 율법을 줘놓고 정작 율법을 지키는 사람을 그 뒤에 추가적으로, ‘한 몸’을 따로 준비했어요. 그래서 직접 모든 율법을 홀로 다 지키실 분을, 율법 전문가를 따로 보냈다는 거예요. 그럼 그 전문가가 왔다는 말은 나머지 사람들은 자동적으로 ‘아니다’가 되는 거예요. 독일어로 Ne!, 영어로 No! 너 아니야! 네가 지킬 게 아니야.

율법은 우리를 저주케 하지, 우리가 지킬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율법은 우리로 하여금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게 만드는 거예요. 이 말은 ‘네가 죄인이다’라는 규정으로 끝나는 게 아니고 ‘따로’ 있다는 거예요, 따로. 그 분이 따로 있는 거예요. 이제 전체적으로 뭔가 정리가 되시고 감이 잡히죠. 주의 일에서 누구를 배제한다? 나를 배제하는 거예요, 나를.

요한복음 8장 봅시다. 요한복음 8장에서 간음한 여인이 등장해요. 간음한 여인이 등장할 때 그때 사람들이 뭐라고 하느냐 하면 율법에 의해서 간음한 자를 돌로 치라 했단 말이죠. 간음한 자를 돌로 치라 했기 때문에 주님께서 간음한 자를 돌로 침의 대상에서 빼내주는 거예요. 간음했다고 돌로 치는 그들이 간음한 자에요.

예수님 빼놓고 나머지는 간음한 자라는 사실을 돋보이는 방법은 자기가 간음한 세계, 음란한 세계라 합니다, 음란한 세계에서 태어나서 잡종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없는 간음에 해당되는 자로 있으면서도 오히려 그들 중에 있는 어떤 여인을 간음한다고 했으니까 주께서 찾아와서 그 여인보고, “일단 너 잠깐 비켜봐라.” 코르크 마개 빼듯이, “일단 너의 자리는 빈자리 만들어줄게. 나가 있어.” 딱 빼고 주께서는 땅에다 글을 씁니다. 이래도 네가 남을 칠 주제가 되냐고 글을 써요.

그 글을 본 사람들이 나이 많은 사람부터, 이 더러운 세상을 오랫동안 살았기 때문에 나이 많은 사람부터 딱 보니까 여자 때린 돌을 쥐고 도로 내가 맞을 입장이 되었어요. 너 여자 때렸지? 주제 파악도 못하면서. 그럼 네가 한번 맞아봐라. 오늘 좀 맞자.

그들이 왜 간음한 자이냐 하면 주님께서 죄를 지적할 때 그 죄를 지적한 예수님을 떠났다는 사실이 간음입니다. 얼마나 간음하면 주님을 떠났겠어요. 간음한 여인은 벌벌 떨면서 저기 가도 맞아 죽고 이쪽에서도 맞아 죽게 생겼죠. 주께서 여인에게 묻는 것은 딱 하나였어요. “너를 고소하는 자, 어디 있느냐? 너를 고소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네가 지금 자리 잡고 있는 너에게 할당된 자리는, 너보고 간음했다고 고소한 그 자리에서 뽑혀 나온 자리인 줄 알아라. 이것은 너를 구원함이 아니라 저쪽이 우상의 세계이고 간음한 세계인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네가 샘플로 뽑혔느니라. 이게 바로 요한복음 8장의 내용입니다.

요한복음 9장을 보면 이번에는 소경 이야기 나옵니다. 9장 5절,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 아, 참 어려운 말이죠. 어려운 말인데 제가 이미 이야기했습니다. 예수님에게는 새로운 시공간이 자리 잡는다. 이 시공간을 데카르트의 좌표계로 설명하지 않고 블랙홀로 설명해드렸죠. 예수님과 함께 있을 때 예수 안에 있을 때 거기에 수채 구멍처럼 빨려 들어온 사람들이 있어요, 여기에는.

다시 이야기합니다. 기존의 세계에서 사람들은 뭐로 삽니까? 국가의 권력 안에서 살죠. 거기서 뽑아내졌다는 것은 드디어 국가 권력 안에 있지 않게 되고 우리는 빈자리만 남긴 거예요. 국가에서 보면 우리 자리가 없어요. 뽑혀 나왔으니까.

그걸 빌립보서 3장 20절에서는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다”고 되어 있지만 골로새서 3장과 보충해서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이 땅에는 내 자리가 없다”가 돼요. 나는 이 세상에서 존재하지 않는다 이 말입니다. 존재하지 않는 방식으로 우리는 이 세상에 존재하죠.

그걸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나는 예수 안에서 존재한다. 또는 갈라디아서 2장 20절, 나는 그리스도 안 십자가 안에서 존재한다. 그래서 갈라디아서 6장에 보면 너희들은 십자가로 인하여 내 바깥에 있고 나는 너희들 바깥에 있는 존재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세상에 포함되었지만 예수님은 하늘에 속했고 예수님 외에는 땅에 속한 것처럼 그와 똑같은 현상이 성령 받은 사람에게 주어지게 되어 있어요. 왜냐하면 성령은 반복이니까요. 예수님을 모델로 해서 그걸 그대로 되풀이해서 적용시켜버려요. 예수님께 일어났던 시공간을 그대로 적용시켜버리면 이게 성령 안이 되는 겁니다.

놀이동산이나 큰 관광지에 가면 커다랗고 투명한 공이 있고 그 공 안에 사람이 들어가 앉아있어서 공이 굴러갈 때의 마찰을 줄이기 위해 공 바깥에는 물을 좀 뿌려요. 옷도 물에 견딜 수 있는 옷차림을 해서 저 언덕 위에서 굴려버리죠. 이 공이 투명하거든요. 공이 막 굴러가요. 그런데 멀리서 보게 되면 저 사람은 새로운 안, 새로운 세계 안에 속하고 우리는 그 바깥에서 구경하고 있는 겁니다. 공 안에 있는 존재, 이게 바로 성도입니다. 공 안이 어떤 세계입니까? 말씀이 다 이룬 거예요.

신명기 28장에 보면 네가 율법을 지키면 들어와도 나가도 복을 받죠 (신 28:6). 시편 1편에 보면 복 있는 자들은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라고 되어 있어요 (시 1:2). 주야로 묵상해서 그 결과를 그때그때마다 생산하는 그분과 더불어서 함께 사는 자가 이게 바로 성도이고 그게 완성되었다는 증거가 뭐냐? 성령 받은 거예요.

성령 받았다는 것은 날마다 늘 쉴새 없이 예수님의 완성된 소식을 메일로 받고 있는 상태라는 거예요. 계속 소식을 듣고 있는 거예요. 다 이루었다. 다 이루었다. 다 이루었다.

얘가 수학 시험을 쳤는데 40점이에요. “엄마, 40점 받았어.” 엄마가 말합니다. “다 이루었다. 오늘까지 주께서 너한테 허락한 실력은 40점. 학원 다녀라. 내일 50점으로 올려보자.” “엄마, 드디어 50점 됐어.” “그래, 오늘 다 이루었다.” “엄마, 내일은 80점 될게.” “80점? 그래, 잘해야지.” 하다가 두 시간 뒤에 교통사고로 죽어버렸다. 그럼 뭐 다 이룬 거죠.

이 사람이 공 안에 있는 순간, 이 사람은 바깥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공 안에 있기 때문에. 그런데 문제는 이 공이 우리의 시공간과 함께 있으니까 이 공 안도 우리의 시공간과 같이 적용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같은 물리법칙이 여기에 적용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공 안에서 만약 6시간 반 동안 놀아보세요. 배고프죠. 물리적인 현상을 적용받잖아요. 배가 고프잖아요, 이 안에서도. 6시간 반 동안 놀았으니 배고프죠. 공 바깥에서도 배고프죠. 이걸 육신이라 하는 거예요. 성도도 육신이에요.

6시간 반 동안 있었기 때문에 6시간 반 동안 늙었습니까, 안 늙었습니까? 늙었겠죠, 조금. a little, 조금. 하지만 늙긴 늙었잖아요. 이게 바로 육신이에요. 몸은 후패하나 속은 날로 6시간 반 동안 그만큼 주님과 더 가까이 있었던 거예요. 이 예가 제가 생각해도 억지 같지만 다른 방법이 없어요. 제주도에서 공 굴리다가 이 사람 실제로 다쳤거든요. 제주도에 공 굴리는 게 실제로 있어요.

요한복음 8장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와요. 요한복음 8장 23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는 아래서 났고 나는 위에서 났으며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였고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느니라” 라는 분이 이 세상에 오셨어요. 자기 공 들고 오신 거예요.

그런데 그분을 사람들이 본디오 빌라도를 이용해가지고 자기 국가 세계에서 추방시켰죠. 그게 주님이 원했던 작전이었습니다. 그래야 나라가 둘로 쪼개질 수 있기 때문에. 이 나라 말고 다른 나라는 일단 이 나라를 거쳐서 빠져나가야 이 세상에 속한 자기 백성들도 자기 경로를 그대로 밟아서 빠져나올 수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빠져나오면서 경로를 만들어요, 경로. path, 길이죠. 길을 만든 거예요. 이 길로 뭐가 주어지느냐 하면 성령이 주어지거든요, 성령이. 주께서 다 이루었다는 소식을 계속 전하는 거예요. 완료했다는 소식을 계속 전하는 거예요. 네가 이미 의인이 되었다, 의롭게 되었다는 소식. 네가 이미 완벽하니 손대지 마라. 거룩하니까. 손댈 필요 없이 완벽하게 거룩한 소식이 계속 들려오는 거예요.

그렇게 되면 나는 무엇으로 사는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실 때 아버지로 인하여 사는 그게 경로에요. 그래서 요한복음 6장에서, 내가 아버지로 인하여 사는 것처럼 너희들도 나로 인하여 살리라 (요 6:57). 여기서 바로 산다는 새로운 생명 개념이 등장하면서 기존에 내가 이 땅에서 세상 권세로 산다는 것과 대비를 이루게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생명 알고 ‘아, 이 땅에 사는 생존은 우리가 신경 쓰지 말아야 되는구나.’ 라는 것을 가장 못 믿는 사람, 가장 믿기 힘든 사람은 누구입니까? 힌트 주겠습니다. 석 자에요. 주님의 힘으로 산다는 것을 가장 못 믿는 사람, 잘 모르겠어요? 앞 글자 힌트 줄게요. ‘사’자. 뒷 글자는 ‘님’자. ‘사모님’.

개뿔 신앙도 없으면서 신앙 있는 척, 복음도 모르면서 복음 아는 척하려 하니까 얼마나 이게 위선을 떨어야 되고 조마조마한지……. 교인한테 복음 아는 것처럼 행세해야 되고 실제로는 애 피아노 가르쳐줘야 되지, 학원 보내야 되지. 기가 찰 일이에요. 목사는 하시딤이지, 완전 성경만 들여다보고 있고. 자기가 돈벌이 나서려 해도 경력 단절되어서 취직도 잘 안돼요. 그것도 사모 주제에 직업도 골라 가야 돼요. 이것은 되니 안 되니, 저건 되니 안 되니.

바로 그런 자에게 성령 임하면 무슨 마음이 생기냐? ‘아, 이러다 죽는 게 낫겠다.’라는 생각이 들어요. 누구보다도 천국에 가까운 사람이에요. 너무 지긋지긋해서 죽고 싶은 거예요. 위선자로 사는 게 너무 힘들어서 너무 스트레스 받아서 못 살겠어서 차라리 죽는 게 낫다는 생각을 절로 갖게 되죠. 그게 바로 사모들의 인센티브에요. 이렇게 살다 죽을래. 나 위선자 노릇 그만 할래. 이게 사모님에게 주신 인센티브죠. 목사님께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날 빨리 죽도록 만들었으니.

교재를 좀 보겠습니다. 몸의 자율성이죠. 간단합니다. 몸의 자율성과 반대되는 것은 국가의 타율성. 몸의 자율성이라 하는 것은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경찰이 와서 대통령이 와서, “어이, 노른자, 흰자. 정신 없으니까 왔다 갔다 하지 말고 제자리에 가만히 있어.” 명령 못하죠. 우리의 자아는 국가의 말을 듣지만 우리의 몸은 내 말을 안 들어요. 내 말도 안 듣고, 내 자아나 주체의 말, 국가의 말을 안 듣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자아로 보지 않고, 자아를 제키고 몸으로 봐요. 네 몸이 하고 싶은 대로 해라. 그래서 세리와 창기가 구원받는 거예요. 그대로. 강도도 구원받는 거예요.

전에 했잖아요, 막달라 마리아가 귀신 일곱 들렸다고. 막달라 마리아는 일곱 귀신 들렸던 여인이에요. 그 여인을 왜 거기서 빈자리 만들고 타일 뜯어내듯이 빈자리로 뽑아내시느냐 하면 그 여인들은 더는 자기를 의롭게 포장할 수 있는 여력이 다 날라가버린 거예요. 위선 떨 위선거리가 없어요.

날 것 그대로, natural하죠. 생생한 날 것 그대로. 통제받지 않는 내 몸 그대로를 보여주는 것, 뭐 이성적 합리적으로 도덕적 윤리적으로 꾸밀 수도 없어요. 남들 보기에 내가 어떻게 되느냐, 그런 것도 생각 안 해요. 모든 타인은 나를 욕하기 때문에 내가 원하는 타자는 없어요. 나를 지켜줄 타인도 없어요.

성경에서 그 대표적인 인물이 누구냐 하면 이혼한 여자 말고 과부, 남편이 전쟁통에 하나님에 의해서 죽은 과부는 이 세상에 의지할 사람이 아무도 없어요. 그런 사람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친히 적절하게 보는 겁니다. 이 땅에서의 국가 힘으로 살 수 없게 되는 자, 국가로부터 배척받고 버려진 자, 국가의 힘으로부터.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두벌 옷 하지 말고 직업 가지지 말고 아무 것도 하지 말라 하죠. 요새 말로 하면 휴대폰도 갖지 말고 그냥 네 운명에 맡기라는 식으로. 복음에 맡겨서 복음이 너로 먹고 살게 하라, 이렇게 그냥 내던져버리죠.

12장은 중요한 것 다 했기 때문에 그냥 넘어갑시다. 13장 보겠습니다. 자, 13장에서 본격적으로 예수님께서 돌아가실 준비를 합니다, 유월절 때. 우리도 10분간 쉬면서 준비해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