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련회자료

타인의마을 6강-기적과 표적

아빠와 함께 2023. 1. 14. 20:29

2023 겨울수련회 요한복음강해 제 6강 : 기적과 표적 - 이 근호 목사

시작하겠습니다. 지금 표적 이야기를 계속하는데 여러분이 핵심 포인트로 꼭 알아야 될 것은, 예수님의 일하심 안에 이미 시작점, 창세 전 시작점, 태초부터 계신 그 ‘시작점 + 최종점’이 예수님 안에서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시작점과 최종성을 시간이 흐르고 있는 이 인간세계, 수평적인 인간세계에 와서 담갔다가 빠지면서 뭐가 발생 되느냐? 담갔다 빠지면서 여기서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는 현상이 일어나는 거예요.

그런데 이것은 내가 그것을 소유할 수 없어요. 왜? 사건이기 때문에, 사건이기 때문에. 주님한테는 이게 소유가 되는데 주님 외 다른 사람한테는 이 구원이나 사망이 소유대상이 안 됩니다. 인간이 자기가 갖고 있는 것, 내가 갖고 있는 것, 예를 들어 사과, 바나나, 딸기 있다면 이것은 우리 집이 갖고 있는 부분집합이거든요.

이렇게 갖고 있을 때 뭐도 여기에 집어넣느냐 하면, 부분집합으로 파워 셑(power set), 멱집합도 여기에 자기 부분으로 차지하게 해요. 뭐냐 하면, ‘사과, 바나나, 딸기를 갖고 있는 나를 내가 갖고 있다.’가 되는 겁니다. 이게 골칫거리에요, 이게. “나는 예수 믿는다.” 진짜 예수 믿는 것처럼 보이지요.

그러나 그 안에 뭡니까? 그 안에 ‘나’가 계속 있기 때문에 ‘나는 예수 믿는 나를 내가 지금 소유하고 있다. 그래서 구원에 안전빵이다.’ 이렇게 주장하는 거예요. 이게 지금 제거 대상인데. 구원을 안고 있으려면 내 자리에 누가 와야 돼요? 예수님이 차지할 자리를 본인이 갖고 있는 거예요, 본인이.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의 뭐가 되어야 되느냐 하면, 예수님의 부분집합이 되어야 되지 내 안에 예수님을 집합으로, 하나의 요소로서 갖고 있으면 안 돼요. 그래서 이 요한복음 4장 끝에 두 번째 표적이 나옵니다. 맨 가나 지방에서 일어난 표적인데, 왕의 신하의 아들이 병들었어요. 4장 46절이지요.

주님께서 표적을 줄 때 주님 안에 시작점과 최종점이 함께 있잖아요. 그런데 인간은 시작점과 최종점이 함께 있는 것이 아니고 지금 시작이 ‘병 들렸다.’ 이러면 최종점은 미래의 거예요, 미래. 지금은 뭐냐? 병 걸렸어요. 병 나은 상태가 아니고 병 들린 상태에요. 인간은 생각하기를 ‘지금 병들었다. 병 낫는다면 나중일 것이다. 미래일 것이다.’라고 생각한 겁니다.

인간의 모든 언어와 파악은 시간의 제약을 받기 때문에, 미래에 대해서는 모르고 있기 때문에 그냥 한번 시도해 보는 거예요. 왕의 신하가 49절에 “신하가 가로되 주여 내 아이가 죽기 전에 내려오소서” 예수님께서 친히 왕림하셔서 고쳐 달라고 한 거예요. 의사가 왕림하면 비용이 굉장히 많이 듭니다. 의료보험이 안 돼요. 많이 비쌉니다. 차비 정도 줘서는 안 되거든요.

뭐라고 합니까? 계속 시간을 집어넣어요. “죽기 전에 내려오소서.” 그런데 50, 51절에 보면 인간의 현재성을 주님의 최종성으로 삽입을 해버려요. “예수께서 가라사대 가라 네 아들이 살았다 하신대 그 사람이 예수의 하신 말씀을 믿고 가더니 내려가는 길에서 그 종들이 오다가 만나서 아이가 살았다 하거늘”

자기 집에 가는 중에 종들을 중간에 마주쳤어요. 52절에 “그 낫기 시작한 때를 물은즉 어제 제 칠시에 열기가 떨어졌나이다 하는지라.” 53절, “아비가 예수께서 네 아들이 살았다 말씀하신 그 때인줄 알고” 바로 ‘그때’ 병이 이미 나아버린 거예요. 주님이 말씀한 그 말씀 안에 뭐가, 주님 말씀 그 자체가 시작점이고 동시에 최종점이 함께 있는 겁니다.

그래서 이걸 뭐라고 하느냐? 예수님이 우리를 영생을 주는 것이 아니고, 그게 아니고, 예수님이 나에게 영생 주는 게 아니고, 예수님 자체가 영생이고 생명이라는 것 이걸 유대인들이 어떻게 알겠습니까? 오늘날 성령 안 받은 사람들이 이걸 어떻게 알겠습니까?

내가 이렇게 했더니 결과로 주께서 이걸 주셨다. 계속해서 시간 요소를 집어넣어서 원인과 결과 관계를 지속하려고 애쓰잖아요. 이게, 이게 아닌 거예요. 예수님 자체가 영생이기 때문에 영생이라는 말은 나 자체가 뭐다? 죽음이라는 뜻이에요. 죽음을 소스로, 재료로 해서 내 안에서 영생이 자기 증상을 보여주는 겁니다.

주님의 자기 생명의 증상은 어떤 증상이 있다? 내가 살아도 죽었고, 죽어도 죽었다는 이 희열과 고마움이 하나의 증상으로 등장하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 자신이 뭐가 되느냐 하면, 표적이 돼요. 내가 얻어 챙긴 것이 표적이 아니고 죽어가는 내 존재자체가 표적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21장에 보면 베드로에게 ‘네가 원치 않는 죽음으로 나를 증거할 것이다.’ 하잖아요. 요한복음 21장 18절,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끝까지 베드로는 아직 정신 못 차렸어요. 딴소리는 안 들리고 “네가 원치 않는 죽음으로 죽는다.” 그 소리만 들리니까 이미 자기가 최종성 안에 들어 있으면서도 그 소리 때문에 몹시 비위가 상했던지 “그러면 쟤는요?” 옆에서 가만있는 요한보고 “그러면 쟤는 어떻게 됩니까?”라고 하니까 주님께서 아주 초를 쳐버려요. “내가 다시 올 때까지 살아 있게 한다고 해도 너는 입 다물어! 내가 재림할 때까지 살아 있다 해도 너는 입 다물어! 그것은 내가 맘 대로다.”

네가 죽는 것은 아쉬워할 필요 없는 이유가, 이미 너는 내 것이 되었기 때문에 내가 죽는다 하면 나의 명령의 사건 속에 들어온 그것으로 족해야지 갑자기 ‘아, 내 청춘은 어디서 보상받나?’ 이런 생각을 하고 ‘쟤는 되게 좋겠네. 오래 사니까.’ 이 말은 뭐냐? 제자들은 끝까지 예수님의 증인노릇 하는 거예요. 허접한 인간의 어두움의 속성을 그대로 반영해주면서.

자, 요한복음 4장 54절에 보면 “이것은 예수께서 유대에서 갈릴리로 오신 후 행하신 두 번째 표적이니라.” 표적은 계속해서 이 부정적인 어두움의 세계에서는 알지 못합니다. 언제까지? 성령이 올 때까지 유보돼요. 성령이 올 때까지 요한복음 해석은 전혀 되지를 않습니다.

그러면, 성령이 오면 요한복음을 어떻게 해석하는가? 예수님의 죽음에 동참해서 이미 최종적으로 그 골치 아픈 나를 주님께서 죽은 자로 다룬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만 요한복음을 기쁘게 맞이할 수가 있습니다. 어찌 기쁘지 아니하뇨.

요한복음 5장 봅시다. 베데스다 못가, 자비의 연못이지요. 자비의 연못에서 주께서 여기서 이 시작점과 최종성, 또는 이 세상에 생명을 제공하게 되면 이 세상은 어떤 발작을 일으킨다 했습니까? 예수님이 벌인 일에는 주위에 날 파리 꼬이듯이 뭐가 꼬인다 했습니까? 강퍅과 완악이 여기에 꼬이기 시작하는 거예요.

그래야 예수님이 죽으시니까 의도적으로 그들에게 분노를 유발하는 거예요. 분노유발자, 예수님입니다. 그래서 “없이 하소서”(요 19:15)의 수위에 도달해야 돼요. 그래야 예수님이 죽는데 성공하시는 겁니다. 계속 깔짝깔짝 약을 올리는 거예요, 계속해서.

예수님께서 38년 된 병자를 고칩니다. 38년 된 병자의 특징은 뭐냐? 무능성이지요, 무능함. 무능력, 또는 무능함. 무능함 속에 여기서 타인도 무능하고, 그리고 본인도 무능하고, everybody 다 무능해요. 어떤 경우라도 병 낫는 경우는 없습니다. 따라서 이 38년 된 병자는 그냥 인간의 무능함과 결합이 되면 그냥 무능한 자에요.

독하게 무능해요. 아주 지독하게 무능한 거예요, 철저하게. 37년 되는 해에 안 찾아갔습니다. 37년 6개월째 안 찾아갔어요. 38년 동안 병자, 38년 되었다 하는 이것은 뭡니까? 이것은 ‘시간성’이지요. 시간성이 38년 동안 병자 되었다는 말은 처음부터 병자 되었다는 샘플로 주께서는 아주 적당하게 골라잡은 거예요.

인간은 처음부터 병들었다. 병든 그 증상이 고치는데 무능하잖아요. 그래서 여기서 인간은 자신의 병을 고칠 수가 없다. 제가 두 번째 인가 첫 번째 강의였나, 기억이 안 나는데요, “인간은 자기 원래 자리로 돌아갈 수 없다”고 했잖아요, 원래 자리로.

그래서 인간은 덫에 빠진 겁니다. 죽어도 부활해서 심판받아버리니까 죽어도 독립적이 아니고, 자율적이 아니고, 살아서도 자율적이 아니고, 인간은 그냥 인간 되었다는 자체가 비극입니다. 덫에 빠졌으니까. “차라리 태어나지 말았으면 좋을 뻔 했습니다.” 이거 누가 이야기했어요? 유명한 말인데. 칸트? 아니지요, 아니지요. 니체? 아닙니다!

누구입니까? 욥이지요, 욥. “이러려고 태어났습니까, 이러려고? 이러려면 차라리 태어나지 말았으면 좋을 뻔했습니다.”(욥 3:11)라고 욥이 그런 이야기할 때 뭘 날려버린 거예요? 창조주의 의도에 따라서 태어났다는 사실을 욥이 자기 본성으로 잘라버린 거예요. ‘나는 나 좋으라고 태어났습니다.’라는 것으로 무심코 ‘내가 왜 이런 말을 하지?’ “나는 내 인생 행복하려고 태어났습니다.”라는 말, 말도 안 되는 말이 튀어나와 버린 거예요.

그래놓고 욥은 자기가 의롭다고 우기고 있습니다. 욥이 의롭다, 믿음 있다, 하는 것은 하나님과 욥의 끊어질 수 없는 관계성이 의롭지 욥이 훌륭하다는 뜻은 아니에요. 그게 로마서에 보면, 하나님께서 죄인을 의롭게 한 것은 그 죄인에게 꽂아준, 링거 주사처럼 꽂아준, 수액처럼 꽂아준 하나님의 관계 때문에, 하나님의 요소 때문에 그 관계가 의로운 관계되는 거예요.

어느 정도로 깨끗하고 의로우냐? 무시무시할 정도로 깨끗해요. 너무 깨끗해서 미칠 정도로 우리 성도가 깨끗해요. 믿거나 말거나 말입니다. 하는 짓거리 보면 추접고 더럽기 짝이 없는데 주님 보시기에는 너무 깨끗해서 눈부실 정도로 깨끗해요. 미처 우리가 상상한 그 이상으로 깨끗합니다. 예수님의 피로 하얗게 되었다 하지요. 그걸 표백제라 하는가, 깨끗하게, 탈취제라 하는가, 그렇게 된 거예요.

인간은 덫에 빠진 거예요. 무능합니다. 무능한데 그 무능함을 어떻게 구원하는가? 주님은 아무 관심 없어요. 어떻게 병을 고치는가? 관심 없습니다. 이 무능함이 샘플이니까 주위의 무능함에 이유가 있을 게 아니겠습니까? 그 이유를 전체로 같이 뿌리째 뽑아내고 옆에 가만히 있던 흙까지 같이 지상으로 올라오는 계기로서 38년 된 계기로 사용한 겁니다.

38년 된 병자가 갑자기 병이 낫고 난 뒤에는 사람들이 뭘 시비 겁니까? 주님보고 “네가 왜 안식일에 병을 고치느냐?” 그게 나온 거예요. 5장 10절에. “유대인들이 병 나은 사람에게 이르되 안식일인데 네가 자리를 들고 가는 것이 옳지 아니하니라.” 도시에 보면 가로수 있지요. 가로수 보호하는 쇠 덮개가 있지요.

가로수를 누가 차로 박았다. 그러면 그 충격에 의해서 쇠로 만든 그 덮개도 같이 튕겨 나가겠지요. 나가면서 뿌리째 뽑히려고 하다 보니까 덮개 안에 있던, 쇠 덮개에 보이지 않게 잠복되어 있던 뿌리까지 그 실체가 드러나지요. 인간은 율법의 저주 아래 있다. 이게 요한복음 5장에서 보여주는 겁니다. 율법의 저주 아래 있다.

율법의 저주 아래 있는 데 그중 하나가 뭐냐? 안식일의 저주 아래 있다. 안식일의 저주. 다시 말해서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5장에서 하는 것은 “효력 없는 안식일을 반복적으로 지켰다.” 효력 없는, 무능하기 짝이 없는, 아무 능력 없는 그 안에 그들은 계속 갇혀 있는 상태가 되는 겁니다.

그러면, 제대로 안식일을 지키려면 어떻게 하느냐? 이것은 요한복음도 좋지만 마태복음 12장에 보면 이게 나옵니다. 하나님께서는 뭘 원하지 않으시고, 뭘 원하지 않으시고……, 이렇게 나와 있어요. 마태복음 12장 7절에 보면, 나는 뭘 원하고?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죠.

뭐는 원합니까? 자비지요. 뭐는 원하지 않습니까? 제사지요. 그러면, 제사 드리면 뭐가 방해받는다? 자비가 방해받는 거예요. 안식일에 제사 드리라고 되어 있는데 그 제사를 드림으로써 자비에 대해서 너희가 아는 게 없음을 안식일에 알려줍니다.

그러면 어떻게 모르고 있는 자비를 알려줍니까? 제사 지내는 것이 완전히 효과 없는 짓거리라는 것을 발각당할 때 비로소 그들은 자비를 아는 거예요. 그래서 예배시간에 찬양하고, 기도하고, 설교 듣고, 예배에 여러분이 참석해야 될 이유는, 그것이 얼마나 쓰잘데기없는 짓이라는 것을 혹독하게 체험을 해야 돼요. ‘이게 뭐야? 오~, 자비구나.’ 이렇게 되지요.

그런데 만약에 성가대 소프라노, 테너, 제대로 한다고 하면서 찬송할 때 뭐가 방해받습니까? 하나님의 무능함에만 주어진다는 자비가 유능한 자에게는 필요 없는 게 돼요. 그 자비가. 그러면 예배드리고 아무 효과가 없어요. 예배드렸으면 예배드리는 기도순서, 헌금이라든지 하는 이것이 아무 쓰잘데기없는 짓이라는 것을 알아야 돼요.

알기 위해서는 헌금을 많이 해야 돼요. 갑자기 돈 이야기가……. 십일조에 추가적으로 더 해봐야 이게 아무 효과가 없다는, 그저 나를 무능력하게 만들 때 주의 자비는 이런 나의 행위를 무능력하게 만들었다는 사실을 강요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겁니다.

자비는 덮칠 때 나의 무능력도 비례해서 더 강화되어야 되지요. ‘이 정도는 내가 아무것도 아닌 존재기 때문에 자비가 일방적으로 주어졌구나.’ 이렇게 되어야 돼요. 그러면 여러분은 이 이야기 듣고 ‘이왕 효과 없는 것 점심값이나 5천 원 낼래.’ 이런 식으로 하면 그것도 효과 없어요. 그것도 효과 없습니다.

자, 다시 요한복음 5장 봅시다. 어쨌든 자비라는 것은 돈 받고 준 게 아니라는 뜻이에요. 38년 동안 무슨 수완과 노력을 다 했지만 소용없었다 그 말이지요. 그게 사건이었습니다. 자, 사건 있고 난 뒤에 그다음에 뭐가 붙는다 했습니까? ‘사건, 그리고 드디어 플러스(+) 주님의 해석, 주님의 설명이 말씀으로 주어집니다. 그 말씀은 로고스에요.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요 1:1) 그 말씀이, 설명 말씀이 그게 그대로 현실이 돼요. 주님께서는 그냥 공연히 날려 보내는 말씀을 하신 적이 없어요. 이 말씀대로 세상은 되어갑니다. 요한복음 5장 16절에 보면 “그러므로 안식일에 이러한 일을 행하신다 하여 유대인들이 예수를 핍박하게 된지라.” 유대인들이 드디어 예수님을 핍박하기 시작합니다.

핍박하면서 예수님께서 조금 더 십자가에 가까이 가는 움직임이 조금씩 조금씩 노출되기 시작합니다. 17, 18절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시매 유대인들이 이를 인하여 더욱 예수를 죽이고자 하니 이는 안식일만 범할 뿐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의 친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심이러라.” 같은 동네에 사시는 분으로 여겼기 때문에 이것은 겸손을 최우선으로 여기는 그들에게 성립이 되지 않지요.

여기 5장에서 대단히 중요한 내용 하나가 드디어 19절부터 죽 나옵니다. 특히 21절에 “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심 같이 아들도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살리느니라.” 아들도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살린다.

여기서 여러분들은 뭘 정리해야 되느냐 하면, ‘선택’이라는 것을 정리해야 돼요. 선택이라는 것은 이 체인이 다 끝나 봐야 알아요. 만약에 ‘50년 믿었다. 51년째 나는 복음과 바이바이, 다.’ 이렇게 하면 그것 선택된 거예요, 안된 거예요? 안 되었지요. 51년째 무슨 일이 일어났다는 것을 우리가 50년 산 사람이 미리 압니까, 모릅니까? 모르지요.

그러면 선택은 뭡니까? 선택은 무용지물이지요. 소용없지요. 앞으로 점선에 뭘 로 채울지를 모르기 때문에. 그러면 이 나의 인생사, 나의 체인 안에 하나님의 선택이 들어설 수가 없겠지요. 왜? 미지의 것이 남아 있으니까. 그러면 어떻게 하는가? 주님이 들어와 버리면 주님 안에 뭐가 있다 했습니까? 시작점이 있고 최종점이 있지요. 주님의 선택이 있지요.

주님의 선택에서 뭐가 나오는가 하면, 무한한 사건들이 나와요, 무한한 사건. 어떤 사건들이 나오더라도, 어떤 소나기가 쏟아지더라도 그 물방울 하나하나에 뭐가 들어 있습니까? ‘최종적으로 선택되었음’이라는 내용이 포함된 소나기, 물방울이 떨어지는 거예요. 선택되었음.

그러면 주님 안에서의 선택이 어떤 결론에 도달할 수 있느냐? 주님 안에서의 선택이 무엇을 공격한다? ‘나의 선택을 끊임없이 공격한다.’가 되겠지요. 내가 나를 선택하고 싶은 거예요. 이걸 어렵게 말해서 내 안에 내가 뭐가 되었다는 것을 나의 부분집합으로 품고 있고 싶은, 그래서 그 전체를 나라고 여기고 싶은……, 이제 집합 좀 배웠다고 응용문제 막 나오지요. 내 안에 ‘내가 선택되었다’가 내가 챙긴 내용물로 들어가 있다 이 말이에요.

여러분이 십자가 마을 온다고 챙길 것 많잖아요. 양말도 챙기고, 수건 챙기고, 칫솔 챙겼잖아요. 가방 안에 뭐 들어 있잖아요. 가방을 하나의 바구니로 생각하고 하나의 집합으로 생각한다면 그 안에 뭐도 챙깁니까? ‘나는 어떤 경우에도 영원히 선택되었어.’ 이것이 포함된 거예요.

그 가방을 2층 창문 열고 밖으로 집어 던져버려야 돼요. ‘이게 왜 또 여기서 나와? 선택이 왜 네가 간직해야 될 내용이야? 네가 왜 선택을 언급해, 선택을?’ 주님의 선택이 나의 선택을 짓밟을 때 비로소 이것이 바로 선택된 사람이에요. “내 선택 작살났다. 내 선택 작살났어.” “그러면 누가 선택되었는데?” “내 안의 주님이 선택되었지.” 이게 정답이에요.

그걸 가지고 에베소서 1장 4절, 아~, 이거 누가 읽어봐야 돼요. 에베소서 1장 4절, 창세 전에……, 이건 챙기면 안 되고 이 말씀에 복종해야 돼요. 에베소서 1장 4절에 누가 크게 한번 목청 좋으신 은사로 읽어 보세요.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됐습니다.

창세 전에 우리가 존재하지도 않았어요. 우리는 존재할 이유가 없어요. 내가 이 땅에 살 이유가 없다니까요! 살 이유는 예수라는 분이 누군가를 위해서 후차적으로 우리가 이 땅에 탄생 한 겁니다. everybody, “생일 축하합니다!” 이거예요. “happy birthday to you……” 영어 쓰면 발음 잘못됐다고 또, 표면을 ‘surface’라 이렇게 해야 되는데 ‘스페이스’ 이런 식으로 해서 미안합니다. 이건 딴 이야기고요.

우리가 없었어요. 우리의 선택은 뭐냐? 내가 존재하고, 내가 태어난 것, 선택되어야 구원받는데 내가 생각한 선택은 일단 태어났다는 것을 기정사실로 해서 ‘주님이여, 어떻게 하면 선택됩니까? 예수 믿을까요?’ 이러고 있다고요. 그 예수 믿는 나는 내가 챙길 나의 부분집합으로, 바구니에 담을 칫솔 정도로 해서 담는데 그것조차 주께서 인정하지 않아요.

바로 유대인들이 그렇게 선택한 겁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서 우리를 선택했다. 아브라함을 통해서 선택했다. 챙겨야 돼, 챙겨야 돼.” 그래서 망했잖아요. 그 망하는 짓을 똑같이 하고 있다고요. 어디서? 칼빈주의, 칼빈주의 선택론이 거기서 나와요.

예수님의 선택, 그걸로 충분합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시는 분이 아니고 예수님 자체가 영생이고 우리는 거기에 없던 존재로서 예수님이 창세 전부터 선택을예수 안에서, 그래서 무한한 선택이 예수 안에 있어요. 그 무한한 선택 중 하나가 자기 백성이 되는 거예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록된, 생명책에 기록된 자기 백성, 이 소유권은 예수님한테 있어요.

이름 적혔다고 우리한테 있는 게 아닙니다. 주님의 생명책에 있을 때 이 사람들의 공통점은 뭐냐 하면, 자신의 선택이 박살났다는 체험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에요. 주님의 선택이 나의 선택을 밀어내 버린 거예요. 쉽게 합시다. ‘하나님 아버지는 너를 선택한 것이 아니고 예수님을 선택했다.’라는 사실을 너로 알게 함으로써 네가 예수님이 갖고 있는 그 무한의 축복을 공유하게 되어 있어요. 같이 누리게 되어 있는 겁니다.

아 말을 쉽게 한다고 믿을 것 같으면 내가……, 어쨌든 다시 요한복음 5장 봅시다. 자, 선택이 되었다면 5장 27-29절, “또 인자됨을 인하여 심판하는 권세를 주셨느니라 이를 기이히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할 때 이게 염려스럽습니까, 아니면 신바람 나는 이야기에요?

자기 안에 있는 게 아니고, ‘이걸 믿어야지’가 아니라 예수 안에 있다면, 그러니까 예수 안에 있다는 말은 내가 존재하지 않을 때, 내가 없을 때부터 계획한 바다, 내가 나 된 것은 내가 없을 때 하나님께서 프로젝트, 기획한 일이에요. 나와 의논할 필요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나와 의논할 필요가 없고 주께서 내 말을 들을 하등의 이유가 없는 거예요.

말을 해도 주님이 사건으로 잘라내고 그 사건의 설명 가운데서 설명의 일부로서 우리가 거기에 포함되는 겁니다. 주께서 한 신나는 일이 나의 신나는 일이 되면 그걸로 족하잖아요. 5장 38절, 다 같이 합시다. 이것은 목청 좋은 사람만 하면 안 돼요. 다 같이 합시다. “그 말씀이 너희 속에 거하지 아니하니 이는 그의 보내신 자를 믿지 아니함이니라.” 아멘!

예수님이 우리가 믿을 대상이 아닙니다. 그렇게 만만한 분이 아니에요. 내가 믿자, 해서 믿을 수 있는 분이 아니에요. 이 사실을 안다는 것이 믿는 사람입니다. 내가 믿어서 알게 된 분이 아니고 그분이 눈을 뜨게 해줬기 때문에 알게 되었습니다.

요한복음 6장, 요한복음 6장에 사건이 일어납니다. 오병이어, 이 오병이어에 대해서 알려면 역대상 16장 3절을 봐야 돼요. 1절부터 보면 제일 먼저 뭐가 나오느냐 하면, ‘하나님의 궤’가 나오지요, 하나님의 궤. “하나님의 궤를 메고 들어가서 다윗이 위하여 친 장막 가운데 두고 번제와 화목제를 하나님 앞에 드리니라 다윗이 번제와 화목제 드리기를 마치고 여호와의 이름으로 백성에게 축복하고 또 이스라엘 무리의 무론 남녀하고 매 명에 떡 한 덩이와 고기 한 조각과 건포도병 하나씩” 그 다음에 뭡니까? “나누어 주었더라.”

나누어 주었다. 주님 안에서는……, 다시 여러 번 합니다. 주님 안에서는 뭐가 있다? 시작점이 있고 그다음에 뭡니까, 최종점이 있지요. 하나님께서 준비한 마지막 언약이 뭐냐 하면, 매개자 예수님을 보내서 나누어 주는 거예요, 나누어 주는 것. ‘나누어줌’이라는 것은 회수, 하나로 모인다는 거예요, 회수.

제가 1월 1일에 설교할 때 “올해 우리 교회의 목표는 성전 문 닫자.” 성전 문 닫자. 왜냐하면, 고린도 후서 5장에 보면 성도는 자기를 위해 살지 않았다 했어요. 우리 교회를 위해서 존재한다면 그것은 성도 아니지요. 십자가 마을을 위해서 산다면 그것도 성도 아니지요.

그러면 뭐냐? 두세 사람도 내 이름으로, 이름이 하나로, 이름이 여러 사람의 이름이 있더라도 그 이름은 전부 다 묵살되고 하나의 이름으로 움직이고, 하나의 이름으로 봉사하고, 하나의 이름으로 존재해야 돼요. 그 이름 안에 시작점과 최종성이 들어 있기 때문에. 그래서 뭘 해도 주의 이름으로 하라는 것이 그 말이고, 기도할 때도 마찬가지고요.

하나의 이름으로. 하나의 이름이라 할 때 노아 때 방주로 짐승들 두 쌍씩 그리고 정결한 짐승은 몇 쌍입니까? 일곱 쌍씩. 노아가 채찍으로 후려쳐서 막 몰아가듯이 “방주 들어가!” 이랬습니까? 예? 노아가 그랬습니까? 채찍 들고, 카우보이모자 쓰고, 말 타고 “이럇, 이럇!” 하면서 그렇게 했습니까? 아니지요.

노아 식구를 비롯해서 모든 동물들이 자기가 알아서 주께서 붙여서 그 안에 들어가게 하는 거예요. 나눔은 결코 나눔으로 머물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나눠준 거예요. 사람마다 전부 다 은사가 다른 것은 이게 하나로 최종적으로 모아졌음을알리기 위해서 중간단계로 나눠지게 된 거예요. 죽죽 하나로 와서 나뉘고 나눠진 것이 하나로 모여지는 겁니다.

야곱의 아들이 몇 명입니까? 열두 명. 열두 명이 하나가 될 수 없어요. 내 맘도 모르는데 그 맘 어떻게 알아요? 그런데 주의 언약으로 말미암아 열둘이 하나가 돼요. 뭐냐? 마지막 언약에 내 살과 내 피를 마시게 되면 열두 명의 제자, 물론 가룟유다 빼면 열 한 명의 제자지만, 열두 명의 제자가 예수님의 몸으로 하나로 합체돼요.

이게 독수리 12형제에요. 독수리 5형제가 아니고 독수리 12형제. 적이 왔을 때 “크로스!” 해가지고 이게 합쳐야 에너지, 기가 모이거든요. 그래서 “이 지구를 괴롭히는 외계인들아, 덤벼라! 정의의 이름으로 너희를 벌하노라.” 어벤져스, 이 크로스, 독수리 5형제, 독수리 12형제, 12형제에서 12가 나오지요.

그래서 곱하기 1000, 하면 ‘12×12×1000’ 하면 얼마입니까? 14만 4천이지요. 구천지, 신천지가 잘 떠드는 그것, 언약으로 시작해서 언약으로 마감된다는 숫자가 14만 4천이에요. 그래서 이스라엘은 나눠줘봤자 나눠줬을 때 떡을 받은 사람은 떡 받았다고 하면 안 되고, 도로 그걸 어떻게 해야 됩니까? 떡 받았다는 그 이유가 하나에서 나온 떡을 받았기 때문에 그것은 ‘내가 떡 받았다’는 그것을 제거해야 되지요.

그래서 남은 광주리가 몇 광주리 남았습니까? 열두 광주리. 그 유명한 ‘워치만 니(Watchman Nee, 1903-1972)’의 책 시리즈 <열두 광주리> 하~, 워치만 니도 참…… , 지방교회 이런 사람들, 위트니스 리(Witness Lee, 1905-1997) 따르는 사람들, 완전히 그 책에 환장했지요. 3분설, 이중구원설, 이런 것 해서.

열두 광주리, 12라 하는 것은 이런 뜻이에요. 1로 오기 위한 중간단계입니다. “너희들 눈에 12로 보이냐? 그게 1이다. 1이 궁금해? 12를 봐라.” 이런 뜻이에요. 열둘로 갈라졌다. 언약대로 갈라졌다. 갈라져서 오는 겁니다. 하나로 모여야 되지요. 그러면 역대상 16장에서 다윗이 떡 나눠줄 때 어디서부터 시작했습니까? 어디 앞에서 시작했습니까? 언약궤죠.

언약궤가 몇 개지요? 하나지요. 모든 이스라엘 백성은 언약궤 중심으로 하나라는 사실을 떡을 떼주면서 그걸 확인시켜주는 겁니다. 떡을 떼주면서. 그래서 은사가 다양하지만 은사가 추구하는 것은 오직 하나에요. 각자의 믿음, 소망, 사랑, 다 다르지만 최후에 남은 것, 그중 제일은 뭐다? 사랑이다.

사랑이란, 사랑의 근거는 오직 예수님 살과 피뿐이에요. 내가 주님 사랑한 그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내가 주님 사랑한 그것은 주님의 피 앞에서 제거 되어야 되지요. 그래서 고린도전서 1장에서 사도바울이 말하기를, “나는 너희를 위해서 십자가 진 적이 없다.” 주님이 나와 함께 십자가 졌지만 너희를 위한 십자가는 내 몫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리스도께서 어찌 나뉘었느뇨 바울이 너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혔으며 바울의 이름으로 너희가 세례를 받았느뇨”(고전 1:13)

나는 내 몫도 챙기기 바쁜데 무슨 남을 위한 게 있겠습니까? 그래서 어느 누구도 타인을 대신할 수 없는 존재, 어느 누구도 타인을 대신할 수 없는 존재를 위해서 대신하신 분이 예수님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한계를 알아야 돼요.

여기서 기쁜 소식 나갑니다. 우리의 한계는 간단하지요. 나밖에 모른다. 이거 다 같이, everybody 합창하고 싶어요. 나는 자식이고 부모고 형제고 필요 없어요. 점점 커가면서 친구고 뭐고 필요 없어요. 나는 나밖에 모른다. 이 말은 뭐냐? “나는 십자가 진 적이 없습니다.” 이 말은 ‘남을 위해서 나는 내 주먹 내가 흔들 거예요. 그래서 나는 지옥 가야 마땅합니다.’ 그런 뜻이에요.

그러니까 오병이어 떡을 떼준 것은 네 주제 파악하라고 준 거예요. 주제 파악하라고! 그래서 사건을 일으켰지요. 이제 남은 것은 뭡니까? 설명, 주의 설명계시, 설명의 말씀이 나옵니다. 나올 때 그들은 예수님을 어떻게 했습니까? 왕으로 삼으려고 했지요, 왕으로.

왕으로 삼으려고 했을 때 주님께서 휙 돌아보면서 “너희가 왜 나를 따라왔지?” “주님께 잘 해드리겠습니다.” 할 때 6장 26절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고 기적을 봤기 때문에 그래요. 표적은 최종성까지 봐야 표적입니다. ‘하나님은 내가 원하는 것을 제공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아들이 권세가 되는 것은 내 뜻이 아니어야 한다.’는 최종성을 모르는 거예요.

그런데 지금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무슨 뜻이 강력하게 가미되어 있습니까? ‘저분 같으면 임금으로 괜찮다.’ 해서 자기 뜻이 가미된 거예요. 그걸 가지고 27절에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의 인치신 자니라.” 하니까 28절에 “저희가 묻되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썩지 않을 양식을 위하여)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

여기에 자기 노동 개념이 들어갔어요. 그러니까 예수께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29절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하시니.” 여기서 또 강조하지만 “일하지 마, 일하지 마, 일하지 마!” 일을 하게 되면 일을 하는 주체가 내가 되기 때문에 계속 노동하는 주체인 내가 나의 부분집합이돼요. 나를 구성하는 요소가 돼요.

부분집합, 어려우니까 차라리 내가 나답다는 것을 견지할 만한 이유가 되는 근거로서 괜찮은 내가 내 안에 심겨 있다, 그 말입니다. 그걸 제거해야 돼요. 그걸 제거해야 믿음이 되는데 주의 보내신 자의 일, 그게 뭐냐? 최종성이 있어요. 그 최종성이 53절에 나오지요. 여러분이 잘 아시지요.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야~, 여러분, 잘 보세요. “인자의 살과 인자의 피를……” 그다음에 뭐라고 되어 있어요? “인자의 피를 마시지” 그다음에 ‘부정성’ 나오지요, “마시지 아니하면, 마시지 아니하면” 그러니까 ‘내 살과 내 피를 흘리는 이유가, 너희가 죽었다 깨나도, 죽었다 깨나도 너희들의 뜻으로서는 결코 영생을 얻을 수 없음을 보여주기 위해서 내 살과 내 피가 너희에게 보란 듯이 너희를 향하여 날아간다. 내 살과 내 피, 너희들이 내 살과 내 피를 흘리게 만든 동기유발로 작동하게 될 것’이라는 뜻이에요.

그런 뜻이 있으니까 최종성을 인간은 모르잖아요. 모르니까 그들은 무슨 뜻인지 모르지요. 대화가 안 되지요. 언어가 공동체를 만듭니다. 언어가 공동체를 만들거든요. 의미 순환구조가 공동체에요, 의미순환구조가. 그런데 뜻이 통하지 않으니까 따르던 그 수많은 제자들은 어떻게 됩니까? 떠나는 정도가 아니고 “다시는” 66절에 “이러므로 제자 중에 많이 물러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

다시는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 “다시는” 점점 더 표적이 십자가에 가까이 갈수록 주님 홀로 남게 되어있습니다. 바닷가에서 하는 놀이 중 하나가 모래에다, 심심하니까 그런 놀이 하겠지요, 모래 쌓아서 중심에 작대기 하나 꽂아놓고 조금씩 조금씩 모래를 긁어내면서 마지막에 작대기 넘어지게 한 사람은 해물찜 사기로, 속초의 해물찜이 유명한데, 그렇게 하듯이 주님께서 십자가 지고 가기 위해서 조금씩 조금씩 외부에서 발작증세를, 그 강도를 높여가고 있습니다.

표적과 표적 사이에 스토리가 형성되어 있어요. 더욱더 그들로 하여금 분개될 만한 사건들을 주께서는 일으키지요. 7장, 7장에 보면 초막절이 나옵니다. 초막절은 1년 절기 가운데 최종적인 절기가 초막절이에요. 초막절에 예수님께서 있으니까 “예수님, 당신이 하는 일을 세상에 알리소서.” 이렇게 합니다.

3절에 “그 형제들이 예수께 이르되 당신의 행하는 일을 제자들도 보게 여기를 떠나 유대로 가소서.” 그때 예수님이 뭐라고 하느냐 하면, 7장 6절에 나오는 유명한 말이 있지요.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때는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거니와 너희 때는 늘 준비되어 있느니라.”

아직 나의 때가 되지 않았다. 내 때가 되지 않았다. 그러면 그때는 뭡니까? ‘아직까지 너희들이 발작할 때가 덜 되었다. 정말 너희들과 예수님 사이에 완전히 괴리되어 있고 연결점이 전혀 없다는 사실을 밝힐 때가 되지 않았다.’ 7절에 보면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지 못하되 나를 미워하나니” 그러니까 ‘나를 미워할 때가 되지 않았다.’ 자꾸 예수님은 세상으로 하여금 자기를 미워하도록 유도합니다.

미워하게 된 이유가 나오지요. 7절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지 못하되 나를 미워하나니” 그 이유가 뭡니까? “이는 내가 세상의 행사를” 뭐라고 증거하기 때문에? “악하다 증거함이라.” 그러니까 그 시대, 그 당시에 오셨던 예수님은 이런 분인데 오늘날 교회에 예수님 오셨다면, 예수님이 할 일은 연속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우리 교회에 오신다면 우리 교회가 악하다는 것을 계속해서 이야기하실 분으로 예수님이 함께 계시면 참 좋겠어요. 참 좋겠어요!

그래서 이야기하는데 그중 하나가 초막절과 관련해서 요한복음 7장 22절에 “모세가 너희에게 할례를 주었으니 (그러나 할례는 모세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조상들에게서 난 것이라) 그러므로 너희가 안식일에도 사람에게 할례를 주느니라.” 이 말씀 나오지요.

이것 좀 설명이 필요한데요. 유대인들은 이스라엘의 시작을 모세로 보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는 모세 이전에는 없었어요. 애굽나라의 히브리인으로 있었지 이스라엘은 나라 정체성이 없었어요. 그런데 어린양의 피로 제사법과 더불어 나옴으로 말미암아, 유월절과 나옴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그들은 할례를 모세로부터 온 것으로 생각했어요, 모세로부터. 그런데 예수님은 뭐로 봅니까? 시작점과 최종점을 아시는 예수님께서 이 할례 해석을 모세로부터 시작하는 것이 아니고 더 나가지요. 더 나가는 거예요. 모세로부터 시작한다면 이미 이스라엘이 있는 상태에서 이스라엘의 역사와 전통을 이어받으려면 뭘 하면 됩니까? 할례를 행하면 되겠지요.

그러나 이 할례가 모세 이전이 된다면 모세 이전부터 모세 때까지 일어난 그 상황을 겪어야 비로소 할례 언약의 핵심에 도달될 수가 있는 겁니다. 그러면 모세 이전, 곧 이스라엘 이전이니까 이스라엘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을 때지요. 이스라엘 없을 때 할례 취지부터 예수님이 그 바통을 이어받아서 새로운 이스라엘을 구축하겠다는 겁니다.

그게 뭐냐 하면, 모세 때는 뭐가 있어요? 제사가 있었지요. 번제가 있었지요. 그 제사가 있으나 없으나 상관없이 이스라엘이 되는 방법을 주께서는 홀로 알고 계셨다 이 말입니다. 율법 되기 이전에 이미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는 방법이 예수님에게 있다는 말이에요.

혹시 살아 있다면 올여름에는 ‘갈라디아서’ 할 생각입니다. 거기에 보면 율법 이전으로 돌아가요. 아브라함 때로 돌아가서 ‘아브라함이 의롭다’부터 시작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법이라는 것이 오히려 인자(仁慈),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자비, 그 사랑을 훼방, 훼손하기 위해서 법이 주어진 겁니다.

그게 바로 요한복음 7장 23절에 나와 있습니다. “모세의 율법을 폐하지 아니하려고 사람이 안식일에도 할례를 받는 일이 있거든 내가 안식일에 사람의 전신을 건전케 한 것으로 너희가 나를 노여워하느냐”

그러니까 이 말은 뭐냐 하면, 예수님께서 계속 시비 거는 거예요. ‘제발 너희가 좀 분노를 일으켜서 나를 죽여줘. 그러나 아직 때는 안 되었다.’ 그런 뜻이에요. 그러면 초막절이라는 것은 어디에 속합니까? 초막절은 모세 이전에는 없었어요. 그러면 모세때 뭐가 생겼습니까? 초막절이 생겼지요. 초막절이 마지막 절기지요. 최후의 모습을 보여주는 거예요.

이스라엘의 최후의 영광스런 모습을 초막절이 보여주는 겁니다. 그러면 이미 노선이, 체인이 바뀌었잖아요. 그 영광스런 모습은 이제는 그 노선이 율법을 따르는 이스라엘을 통해서 초막절이 완성되는 것이 아니고 어느 체인을 따릅니까? 예수님 체인을 따라서 초막절이 완성되지요.

그게 뭐냐 37절에 나옵니다. “명절 끝날 ” 명절에 가지도 않아요. 끝날에 가요. 끝날에 ‘너희들식으로 다 했냐? 다 했어? 너희들 식은 다 끝났지? 그러면 이제 나의 시작이다.’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가라사대 누구든지” 누구한테 옵니까? “목마르거든” 누구한테 오라? “내게로 와서 마시라”

초막절 마지막에는 성전에다 실로암에서 물을 떠서 물을 부어요. 그러면 물이 졸졸 흐르겠지요. 이것은 에스겔 42장에 나오는, 성전에서 물이 흐른다는 그것, 성경에 이런 내용이 있다는 것의 교재로 사용하는 겁니다. 교재, 옛날 에스겔에 이런 약속이 있으니까 우리는 그 약속을 믿으면 우리가 구원받는다는 겁니다.

그런데 아까 본 요한복음 5장 38절에 보면, 아까 다 같이 읽었습니까, 38절에 보면 너희 속에 무엇이 거하지 못한다? “그 말씀이 너희 속에 거하지 아니하니” 그 결과가 뭐였다? “이는 그의 보내신 자를 믿지 아니함이니라.” 예수님이 최종자라는 것, 모든 것을 일방적으로 자비로 완성한다는 사실을 너희들이 지금 못 받아들이고 있다는 거예요.

그 점을 지금 계속해서 하나의 표적으로서 사건으로 6장, 7장, 8장, 계속 이어져 나갑니다. “거봐. 너희들 속에 말씀 없잖아.” 또 “말씀 없잖아, 봐. 내가 사건 일으켜도 또 말씀 없잖아. 그들은 성전에서 물 붓는 의식을 행하는데 그것은 말씀이 아니고 최종자가 되는 예수님이 이렇게 옆에 있는데 내 말을 믿어야지 성전 물 붓는 그러한 연출, 그걸 왜 믿느냐?” 하는 거예요.

딱 대비를 시키는 거예요. “너희들이 할 수 있는 게 뭐냐?” 성전에다 물 붓는 것, 실로암에서 물길어서 부어서 “이런 분이 오신단다.” 주님께서는 “이런 분이 왔단다! 내가 최종성이야. 내가 왔어.” 기다릴 필요 없어요. 왜냐하면 예수님 안에 미래가 다 앞당겨서 왔기 때문에 예수님 안에 들어가면 미래, 현재, 과거의 구분이 의미가 없는 거예요. 예수 믿으면 그 자체가 영생 되는 거예요. 영생을 위해서 우리가 부름을 받게 된 거예요. 영생을 위해서.

그래서 사마리아 여인이, 그 물동이 있잖아요, 물동이, 물 길러 갔으면 뭘 해야 돼요? 물 길러 갔으면 물을 길어 와야지 가만 있는 그 애꿎은 물동이는 왜 버려둡니까?예? 물 길러 갔다. 중간에 누굴 만나든지 ‘아, 참, 내가 물 길러 왔지.’ 물동이는 챙겨와야 될 것 아닙니까? 그런데 뭐라 합니까? “메시아 만났다! 심 봤다!” 해가지고 물동이를 갖다 버려 버립니다, 물동이를!

얼마나 혼났을 거예요? 그게 추수된 자의 공통점입니다. 뭔가 엄청난 게 오니까 물 뜨고 생존하는 이것은 다 시답지 않은 시시한 일이 되고 말았어요. 왜?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으니까. 산다는 자체가, 내 생존 자체가 이게 힘든 죽음의 반복인 것을 깨달았을 때 “나는 생존보다 생명이다.” 이것이 바로 오늘 저녁을 먹을 자격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