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련회자료

타인의마을 9강-부활의 여분

아빠와 함께 2023. 1. 14. 20:32

2023 겨울수련회 요한복음강해 제 9강 : 부활의 여분 - 이 근호 목사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요한복음 20장, 막달라 마리아가 최초로 예수님의 무덤에 찾아갑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 무덤에 가고 그다음에 두 제자가 가고 그다음 다시 막달라 마리아가 가죠.

처음 막달라 마리아가 갔을 때는 예수님이 나타나지 않았고 두 제자가 갈 때도 예수님이 나타나지 않았어요. 두 번째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의 무덤에 갔을 때 두 천사와 더불어서 예수님께서 앉아 계셨습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첫 번째 갔을 때 뭐가 문제였느냐 하면 이 무덤이 빈 무덤이었다는 거예요. 이번 강의 중에서도 마지막 강의가 역시 상당히 중요한데요. 빈 무덤에 대해서 두 가지의 견해를 대조하는 것이 굉장히 요긴한 겁니다.

하나는, 시신 도난사건이에요. 무덤에 시신을 넣어놨는데 시신이 없어졌다. 그럼 이것은 시신 도난사건이죠. 시신을 누가 갖고 가버린 거예요. 그래서 막달라 마리아도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시신을 누가 가져갔습니다.”라고 이야기 했어요 (요 20:2). 막달라 마리아의 고백, ①시신은 도난당했다- 막달라 마리아.

두 번째는, 시신은 도난당한 것이 아니고 죽었던 분이 부활되었다. 그래서 막달라 마리아의 현장 방문을 통해서 막달라 마리아는 어디서 어디로 이동하느냐 하면 ①시신이 도난당했다,에서 ②죽었던 분이 부활되었다,로 바뀌도록 주님께서 유도하신 거예요.

그럼 어떤 차이가 있느냐 하면 둘 다 무덤은 비어 있어요. 비어 있는데 이것이 시신 도난사건이 되어버리면 최종적인 나의 진지함, 가장 심각한 것은 내 존재가 제일 중요하고 심각하다는 이 사실을 변경 안 해도 돼요. 왜냐하면 이 세상에 도난사건이 많으니까. 도둑이 들어서 귀중품을 가져갔다. 가져간 그 사건을 듣더라도 역시 한결같이 최종적으로 중요한 것은 내가 중요한 거예요.

그런데 시신 도난사건이 일어났을 때는 내 가치에 어떤 변동사항이 없는데, 죽었던 분이 부활되어버리면 최종 진지함이 나에서 예수님으로 바뀌어버려요. 나는 어느 세계에 속하느냐 하면, 태어나서 죽으면 난 없어지니까 출생~죽음의 중간이 중요하다고 여겼던 건데, 죽었던 예수님이 부활되어버리면 내가 진지하고 내가 제일 심각하고 중요하다 여겼던 이 영토가 확장되거든요, 죽음 이후로.

죽음 이후로 확장되어버리면 나는 중요하다, 나는 중요하다, 나는 중요하다, 하다가 하나님께서 최종적으로 나보다 더 중요하고 가치 있는 분을 부활시켜버린 거예요. 예수님이 부활되었다는 말은 평소에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실제가 되는 거예요. 실제가 돼버려요,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그러니까 예수를 믿지 아니한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간다는 이 말이 엄포가 아니고 농담이 아니고 그냥 해보는 이야기가 아니라, 진짜로 지옥 불이 있어요. 그 말씀을 하시고 죽었던 분이 지금 안 죽고 있으니까요. 살아나셨으니까요.

인간이 죽고 난 뒤에 대해서는 우리는 일단 모르는 걸로 쳐서 지옥이 있든 천국이 있든 누가 가봤냐? 이런 식으로 제켜버릴 때 남는 것은 역시 내가 제일 중요해요. 역시 나의 행복이 제일 중요한 겁니다. 그래서 시신 도난사건은 나의 이 마음가짐이 별로 달라질 필요가 없어요. 누가 가져갔겠지.

그럼 막달라 마리아가 어디서 어디로 이동한다 했습니까? 처음에는 ①번으로 생각했어요. ‘우리 예수님 시신을 누가 가져갔지?’ 제자들 붙들고 “제자님들이여, 누가 우리 예수님 시신 가져갔어요.” 이렇게 했어요. 제자들이 보니까 시체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두 번째, 제자들은 없고 막달라 마리아가 다시 갔을 때 거기 예수님께서 턱하니 앉아 계셨어요. 두 천사는 예수님 누웠던 양쪽에 있었고요. 예수님께서 앉아계실 때 다리를 꼬았는지 안 꼬았는지 그것은 지금 밝혀지지 않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뭐라고 하셨느냐 하면 “내가 다시 살아난다고 전에 말씀했잖아. 내가 그렇게 너한테 이야기를 했잖아, 죽었다가 살아난다고.”

그럼 죽었다가 살아난 것만 믿을만한 겁니까, 그 외에 예수님이 하신 말씀은 전부다 믿을만한 겁니까? 전부다 믿을만한 거죠. 그럼 그 믿음에 대해서, 막달라 마리아가 시신 도난사건으로 처리했다는 말은 시신 도난사건으로 이해했다는 이 순간 막달라 마리아는 누구를 믿었다는 겁니까? 자기 자신을 믿었던 거죠. 최종 의미가 자기 자신이었기 때문에.

막달라 마리아로 하여금 ‘어? 무덤이 비어있네. 우리 랍비, 우리 선생님의 시체를 누가 훔쳐갔지?’ 이럴 때는 자기 신념의 변화가 하등 없어요. 그런데 부활을 함으로써 자기 속에 주의 말씀이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한 겁니다. 부활한 것뿐 아니라 나머지 모든 것도 진실이었던 거예요, 진실.

그러면 내가 나를 믿는 것은 더 이상 버티기가 곤란하죠. 이제부터는 나를 믿어서는 안 되죠. 내가 주의 말씀의 훼방자로 드디어 규정되는 순간입니다. 내가 바로 주님을 믿지 않는 불신자입니다.

사울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을 때에도 똑같은 현상이 일어났습니다. “네가 나를 핍박했다.” 너는 너를 믿었으니까. 너의 생각과 너의 결정과 너의 판단이 가장 진지하고 가장 심각하고 가장 중요했으니까. 그걸 네 인생 의미의 마감으로 생각했으니까.

‘죽고 난 뒤를 누가 알아? 그건 몰라도 돼. 중요한 것은 지금 우리의 행복이 중요하니까. 나를 믿는 그 자체가 행복이니까.’ 이렇게 살다가 그것이 바로 주님에 대한 핍박이었던 사실이 밝혀진 겁니다.

이게 왜 그러느냐 하면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은 어느 누구를 의식하고 일어난 사건이거든요. 모든 인간은 불신의 세계에 갇혀 있다는 것을 의식해서 죽음 뒤의 가장 최종성까지 내다보는 주님께서 말씀을 해오신 거예요.

그렇게 되면 우리의 의식에도 변화가 있어야 되겠죠. 어떤 변화인가? 변화된 의식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요한복음 21장 14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난 뒤에 세 번 등장했어요. “이것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 세 번째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것이라” 세 번 등장했습니다.

그럴 때 사람들이 지금 막달라 마리아의 의식대로 놀라운 변화, ‘아 나를 믿는 것이 주님에 대한 핍박이었구나. 주님에 대한 모독이었구나. 내가 나를 믿는 자체가 말씀을 농담으로 여기게 만들었구나. 주님만이 진실한데…….’ 이런 사실의 변화 없이 그냥 예수님이 세 번 등장했다고 한다면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해요.

당시에 제자들이 일곱 명 있었거든요. 고기 잡으러 간 일곱 명이 있었는데 예수님이 찾아갔을 때, 사람들은 일곱 명에게 세 번째로 예수님이 찾아갔다고 생각했어요. 이게 잘못이에요. 부활하신 예수님이 찾아온 게 아니고, 지금 이 인식 변화가 되어버리면 이렇게 보면 됩니다.

1인용 침대 있잖아요. 매트도 1인용 매트 있죠. 만약에 두 사람이 춥다고 1인용 매트 깔아놓고 그 위에 누워 자게 되면 서로 처음에는 점잖게 양보하다가 나중에는 엉덩이로 막 밀고 등짝 내밀죠. 면적에 비해서 사람 수가 많으면 이 면적의 수용한도를 넘어서 포화 상태가 되어버립니다. 그렇게 자다 보면 상대방의 등짝이 나한테 밀리겠죠.

그러니까 아직 아버지께로 승천하기 이전에 예수님께서 부활하셔서 같은 공간에 계신 예수님의 등짝이 제자들을 민 거예요. 실존성의 침범현상입니다. 예수님이 찾아온 게 아니고, 부활하신 예수님의 경계선과 제자들의 경계선에서 예수님의 경계선이 포화상태가 되어서 제자들이 밀려버린 겁니다.

헐크가 XL 셔츠를 입었는데 안에 근육이 자꾸 증가하니까 이 셔츠가 찢어져버리죠. 틈이 생기죠. 살점이 그 틈 사이로 삐져나온 거죠. 예수님의 실존이 제자들의 실존영역에 삐져 들어온 거예요, 세 번씩이나.

그럼 이건 함께 있는 거예요, 함께 있는 것. 찾아오는 게 아니고 함께 있는 거예요. 찾아왔다고 생각하면 안돼요. 함께 있어요. 함께 있다는 근거가 어디 있느냐? 그 근거가 요한복음 20장에 있습니다. 어렵죠. 어렵더라도 참아내야 돼요. 마지막 강의 제목을 <부활과 성령>이라고 한번 정해봤는데요.

요한복음 20장 21절에 보면, “예수께서 또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찌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이 말씀을 하시고 저희를 향하사 숨을 내쉬며” 이 숨을 누가 쉰 겁니까? 제자들이 숨 쉰 거예요, 예수님이 숨 쉰 거예요? 예수님이 숨을 내쉬니까 여기서 뭐가 나왔어요? 성령이 나왔죠. 실존성의 침범현상이 벌어졌죠. 예수님이 숨을 쉬었는데 거기서 성령이 나와버렸어요.

그러면 예수님이 성령을 받아서 숨을 내쉬니까 성령이 나왔다는 것은 예수님이 성령 받을 때 성령이 예수님께 1차로 왔잖아요. 그리고 19장에 보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마지막에 하신 말씀이 다 이루었다 했으니까 (요 19:30), 성령께서 예수님께 오신 취지는 이미 작업이 완료가 돼요.

완료가 되었기 때문에 예수님은 아버지의 약속에 의해서 주의 자리에 오릅니다. 그게 하나님의 오른편이라고 제가 아까 강의시간에 언급했죠. 하나님의 오른편에 오르시면 그 오른편 자리가 어떤 자리냐 하면 아버지가 예수님이 처음 요단강에 있을 때 성령세례를 주셨던 성령이 나왔던 그 자리가 오른편의 자리였어요.

그 오른편의 자리에 예수님이 올라서버리면 그때부터는 예수님이 죄 있는 육신의 몸, 로마서 8장 3절의 말씀, 죄 있는 육신의 몸을 지닌 채 주의 자리에 올랐기 때문에 주의 자리에 오른 상태에서 성령을 보내버리면 그 성령이 죄의 몸을 가진 자에게 갈 수 있는 권한이 발생되는 거예요.

그게 되어야 사도 바울의 편지에 나오는 속죄, 대속, 그리고 구속이 돼요. 속죄(贖罪)라 하는 것은 죄를 강조한 거고요. 구속(救贖)이라 하는 것은 끄집어낸 자에게 종속되었다는 것을 강조한 거고요. 대속(代贖)이라 하는 것은 너의 죄를 대신 처리했다는 ‘대신’이 강해요. 그걸 합쳐서 구원이라 하는데 구원의 3대 기능이 거기에 다 있습니다.

그 3대 기능을 위해서 구약에서는 모세 율법이 주어지는 겁니다. 제물을 바쳐서 장차 신약에서 일어날 일을 구약에서 제사판을 통해서 모형으로 미리 그걸 보여준 거예요. 지금 제가 하는 말이 거짓말이 아닌 이유가 그런 말을 하셨던 예수님이 부활했기 때문에 그래요.

아까 처음에 말씀드렸잖아요. 예수님이 부활이 안 되고 시신 도난사건이 되어버리면 내가 제일 중요하고 하나님이 하신 그것을 내가 그냥 ‘믿습니다. 예, 그거 받아들일게요. 손들고 나가서 그걸 받아들이겠습니다.’ 모든 일을 내가 해서 그걸 받아내야 돼요.

예수님은 십자가 지는 것까지만 하고 그다음 예수님이 십자가 진 효과를 내가 나서서 ‘십자가 믿습니다’ 하는 자기의 결단과 결심을 동원해서 그걸 끄집어내야 돼요. 그게 바로 이단 아닙니까. 그게 침례교 이단이거든요. 완전히 구약적이죠. 구약은 실패한 역사잖아요.

그럼 본인이 그걸 결심하는데 본인은 죄 된 상태거든요. 죄 된 상태에서 뭐가 나옵니까? 의가 나올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죠. 없는데 내가 윤리적으로는 죄 지었지만 믿는다는 것은 죄가 아니라는, 이런 말도 안 되는 논리가 튀어나오는 거예요. 내게서 나오는 믿음, 소망, 사랑은 죄가 아니라는 거예요.

그 침례교 사상과 똑같은 사상이 천주교 사상입니다. 인간이 범죄해서 타락한 것은 맞지만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하나는 남겨뒀다는 거예요. 하나님을 바라보는 마음, 그 믿음만큼은 타락하지 않도록 남겨뒀다는 겁니다. 그리고 자유의지도 남겨뒀고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생명나무에서 쫓아낼 때 어느 정도로 쫓아냈느냐 하면 두 번 다시 들어오지 말라고 천사를 통해서 그 주변을 화염검으로 돌려버렸어요. ‘이거 남겨뒀잖아요. 양심은 있잖아요.’ 이걸 보는 게 아니에요. 자유의지, ‘주님 주신 이것 간직한다고 내가 애먹었습니다. 이건 하나님께서 주신 그대로 유지했습니다.’ 이거 없습니다. 이미 마귀의 통제를 받고 있기 때문에 모든 것은 다 오염되었어요. 썩었어요.

그런 믿음, 소망, 사랑, 나의 자유의지에 의한 어떤 믿는다는 결심만큼은 그렇게 남겨뒀다면 무엇이 훼손되느냐? 생명나무가 훼손돼요. 왜 그러느냐 하면 ‘나 이제 반성했습니다. 다시는 선악과는 안 따먹겠습니다.’ 아직까지 순수하게 남아있다고 여기는 것은 자유의지죠. 그럼 그 자유의지가지고 뭘 따먹겠습니까? 생명나무 건드리겠죠. 그걸 방지하는 취지로 생명나무에서 쫓아낸 거예요.

그러니까 천주교, 침례교, 침례교도 한 종류니까 한꺼번에 제가 말씀을 못 드리지만, 구원파 이런 종류가 얼마나 악마적인가를 알아야 돼요. 악마적이라는 말을 요한복음 8장에서 주님께서는 그걸 잡종이라 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순종(純種)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했거든요 (요 8:33).

그렇게 말할 때 주님께서는 “너는 잡종이야. 아버지가 아브라함이 아니라, 똑바로 알아, 너희 아버지는 악마야.” 악마와 피가 섞이면 아브라함의 순종 혈통이 아니고 잡종이 돼요. 그걸 음란이라고 하는 겁니다. 유대인들이 그걸 알아듣고 우리는 음란하지 않았다 하거든요 (요 8:41).

다시 한번 말씀드리겠습니다, 이건 너무 중요하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실 때 그 집합의 요소가 뭐냐 하면 죄 된 몸을 갖고 왔어요. 그냥 몸이 아니고 죄 된 몸이에요. 육신의 연약한 몸이에요. 로마서 8장 3절에 있으니까 읽어드리겠습니다. “죄 있는 육신의 모양” 죄 있는 육신+예수님이에요. 예수님의 하나님의 아들 되시는 지위 또는 자리, 거기에 하나님의 형상으로 이렇게 오신 거예요.

죄 있는 육신의 몸을 가지고 여기에 결합해서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뭘 보냈습니까? 하나님 아버지께서 언약의 자리, 오른편에서 성령을 보냈죠. 아버지와 아들 간에 창세 전에 계약한 게 있습니다. 에베소서 1장 4절, 말씀드렸죠. 창세 전에 예수 안에서 모든 걸 이루었다 하는 거요. 그러니까 십자가 사건은 이미 창세 전에 결정된 거예요. 하나님 자체적인 부정성.

예수님께 성령이 오셔서 성령은 추진을 시켜요. 예수님으로 하여금 십자가에 다 죽기까지. 그렇게 되면 예수님은 성령에 의해서 다 이룬 거예요. 완전히 이루었어요. 아버지의 뜻을 다 이루었어요. 이루었기 때문에 성령이 왔던 그 주의 자리에 앉습니다. 그러면 죄 있는 자, 자신의 업무의 경로에 부분집합으로 참여된 그 자에게 성령을 보낼 수 있는 권한자가 되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이 대목을 찾아보겠습니다. 다 아시겠지만 모르는 분이 혹시 있을까 싶어서 사도행전 2장을 보겠습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사도들이 주요하게 십자가와 부활을 이야기했어요. 부활의 의미를 설명해주는 겁니다. 사도행전 2장에 베드로가 설교하시는 대목, 2장 32-33절에 보면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로다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

그러면 예수님에 의해서 성령 받은 자가 어떤 자이어야 됩니까? 죄 있는 육신이죠. 그 죄 있는 육신이라는 입장에서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이방인의 차이가 있겠습니까, 차이가 없겠습니까? 차이가 없는 거예요.

이게 성신과 성령의 차이에요. 성신은 결코 이방인에게 하나님의 언약을 주지 않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택한 자가 아니기 때문에. 성신은 구약, 옛날 언약에 해당되는 이스라엘 민족에게만 하나님의 언약이 적용되고 이방인에게는 반대되게 절대로 언약이 가지 못하게 한 겁니다.

여호수아 11장 20절을 읽어보겠습니다. “그들의 마음이 강퍅하여 이스라엘을 대적하여 싸우러 온 것은 여호와께서 그리하게 하신 것이라 그들로 저주받은 자 되게 하여 은혜를 입지 못하게 하시고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대로 진멸하려 하심이었더라”

여호와께서 그들로 저주 받는 자 되게 하기 위해서 주께서는 그들에게 은혜가 가지 않도록 하신 거예요. 이게 누구하고 붙어서 그런 겁니까? 그들이 그냥 그런 게 아니고 계기가 있어요. 이스라엘과 이방인과 마주쳐야 돼요. 그래야 아브라함의 언약, 아브라함을 축복하는 자는 복을 받고 아브라함을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는다는 그 언약을 이루기 위해서 이방민족의 존재가 필요했던 겁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민족이 필요했던 거예요.

그런데 그때 그 이스라엘이 예수님을 만나서 이제 이스라엘이 은혜 입지 못하고 진멸당하는, 그들로 하여금 강퍅하게 하나님을 대적하는 대상으로 이스라엘이 등장하는 거예요. 예수님 앞에서 모든 자가 죄 있는 육신이라는 사실이 최종적으로 드러났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어느 인간치고 ‘구원해주세요. 은혜 주세요.’ 할 수 있는 자격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그냥 주는 대로 받아. 이거에요. 그냥 내가 주는 대로 받아버려. 그 주시는 은혜 안에 내가 나에 대해 미처 파악하지 못한, 나는 죄 된 모습으로 태어났다는 사실을 받는 거예요.

시편 51편에 나온 말씀처럼 내가 모친의 죄 중에서 태어난 인간 죄의 작품인 것을, 내 모습을 최초로 발견한 순간이 바로 성령 받은 순간이에요. 내가 바로 주님을 핍박한 죄인 그 자체입니다. 그리고 저들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깨우치게 하신 것은 바로 주님의 은혜입니다. 주님께서 특별히 선물 주셔서 이 세상의 실상을 낱낱이 밝혀주셨습니다.

그냥 죽었다 살아난 것은 소생이고요. 부활이라는 것은 자기가 한 공로를 남들에게 이전할 수 있고 전달할 수 있는 자격자가 부활된 자에요. 그래서 죽은 자의 세계가 부활의 세계가 아니고 성령 세례를 줄 수 있는 그분의 세계를 부활의 세계라 하는 겁니다.

예수님 이전에 죽었다 살아난 사람은 더러 있어요. 나사로도 죽었다 살아났죠. 엘리야도 안 죽었죠. 에녹도 안 죽었죠. 그런데 그 사람들은 자신의 행함을 타인의 행함으로 전이할 수 있는 권한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죠. 자기가 잘나서 자기가 구원받은 거예요, 물론 은혜를 입었지만.

모세도 상당히 괜찮은 사람이었고 엘리야도 참 괜찮은 사람이죠. 죽을 때 특별히 하나님이 보내준 불수레 타고 특별대우 받으면서 갔고 엘리야의 제자들은 시체 찾는다고 사흘 동안 찾았어요. 장례를 치를 수가 없었습니다. 엘리사가 말렸어요. “못 찾는다. 없다.” “못 믿겠다.” “한번 찾아봐라.” 없었어요.

그러면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엘리야는 이렇게 안 죽었으니까 ‘야, 엘리사는 그럼 손해가 많네.’ 같은 선지자 급인데 엘리야는 붕 떠서 올라갔잖아요. 약간 뜨겁기는 했겠지만 불수레 타고 올라갔는데 엘리야는 그냥 죽었어요. 그러면 엘리야는 이익이고 엘리사는 죽을 때까지 고생했느냐? 엘리사가 엘리야 이후이기 때문에 십자가의 때에 더 가까이 가요. 십자가의 경우의 수가 많이 포함되어 있어요. 엘리사의 부분집합에 예수님의 요소가 더 많이 있는 거예요.

그래서 엘리사가 죽고 난 뒤에 그 시체에 다른 사람 시체가 접촉을 했는데 엘리사는 가만 있고 그 사람이 살아나버렸어요 (왕하 13: 21). 이게 대신 죽음입니다. 사도 바울의 편지에 나오는 대신 죽음. 그게 장차 오실 분이 하실 일이에요.

그래서 제가 하는 말은 본인이 스스로 살려고 하지 마세요. 그것은 믿음도 아니고 그건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도 아닙니다. 그냥 곱게 죽으세요. 안심 푹 놓고 죽으세요. 안심 푹 놓고 돌아가시는 분은 성령 받은 사람이고, 죽어가면서 ‘주께서 재림 안하면 어떻게 하나. 주께서 나를 데리러 안 오면 어떻게 하나.’ 이거는 자기 의지의 결정이 최종적인 판단 기준으로서 여전히 남아있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죽을 때만 그런 게 아니고 평소에 교회 다니면서 얼마나 열심인지…… 믿씁니다. 믿씁니다. 할렐루야. 십일조 하라면 십일조 다 하고 선교헌금 다 하고 주정헌금 다 하고 교육관 짓는다 하면 다 하고, 일 년에 네 번씩 정기적인 목돈 내는 날 있잖아요. 부활절 목돈 내죠, 맥추절 목돈 내죠, 추수감사절 목돈 내죠, 크리스마스 때 목돈 내죠. 그런데 교회에서 주는 건 뭡니까? 부활절에 계란 삶아서 줍니다. 계란 얼마 한다고…….

왜 거기에 집착합니까? 강박증이에요. 하나님의 말씀이 주는 응시에 대해 마중을 나가서 자기 나름대로 얼추 흉내 내는 거예요. ‘주님이여, 저를 더 몰아세우지 마세요. 너무 몰아세우면 저 자빠집니다. 이정도 밖에 못 하니 이 정도라도 눈 질끈 감고 좀 이해해 주세요. 우리 집 사정 아시잖아요. 이 정도만 해도 엄청 많이 한 겁니다. 10의 1조는 못해도 200조 분의 1은 할 수 있거든요. 그래도 좀 봐주세요. 다음에 돈 벌면 해드릴게요.’ 라는 그런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계속해서 자기 판단, 자기 결정이 자기에게 최종적인 판단이기 때문에 여전히 그 판단을 갖고 있는 내가 이 세상 어느 누구보다도 최종적으로 제일 심각하고 진지하고 중요한 사람 되어버린 거예요.

그러니 이건 자기 자신을 믿는 사람이죠. 그냥 내 배 째라, 하면 되잖아요. 어차피 죄인으로 태어난 거, 그냥 노골적으로 ‘나 죄인이다’ 이렇게 살면 되지 않습니까. 다윗이 간음하기 전에 살인하기 전에 그걸 몰랐어요. 그때는 성신이 왔는데 성신이 오기 전에는 성신이 타인이거든요, 타자.

우리 강의 제목이 뭡니까? <타인의 마을>, 이 타자가 바뀌는 거예요. 남이 바뀌는 거예요. 십자가 없는 인간을 의식하다가 십자가 지신 분과 바뀌어지는 것이 성령의 역사에요. 십자가 지지도 않은 그 타인들이 남을 주시하니까 그들의 입맛에 그들의 시선에 맞추어 살면 얼추 나는 그 사람에게 인정받는 사람이 되는 거예요. 어릴 때부터 그렇게 훈련받았으니까, 가정에서.

“너는 우리 집안의 훌륭한 딸이 되고 아들이 되어야 너를 키운 아빠, 엄마가 너 키운 보람을 얻겠다. 너 엄마를 슬프게 할래, 기쁘게 할래?” “기쁘게 할래요.” “그러면 공부 해, 지금. 게임 그만하고 빨리 방에 들어가서 공부해. 나는 네가 얼마나 잘 되는지 지켜보겠어. 그게 너를 키워준 보람이야. 아들, 이 엄마심정 알지?” 이게 엄마인지, 귀신인지…… “아들, 이 엄마심정 알지? 너한테 온 기대를 다 거는 거 알지? 네 아버지 뭐 이렇게 해도 너를 사랑하는 사람은 나밖에 없어.”

그런 엄마들의 특징이 주로 직업이 없다는 거예요. 직업이 없어요. 직장을 가져야 가정에 소홀해지고 미안한 감이 있는데, 내부 살림은 자기가 완전히 황제거든요. 제왕이기 때문에 “양말 똑바로 안 벗어놔? 거꾸로 하면 내가 안 된다 했지?” 안에서는 제왕의 위치에 있어요, 집에 살림하는 사람들이. 그래서 남편은 밖에 가서 사장한테 당하고 집에 오는 순간 아내한테 당해요. “신발 나가는 방향으로 되돌려놓고. 서서 오줌 누지 말라 했잖아, 내가. 너도 청소 한번 해볼래? 하수구 막힐 때 그렇게 하지 말고 옆으로 흔들어서 다 빠질 때까지 하란 말이야.”

예수님의 부활로 말미암아 사도 바울이 전하는 그 계시, 편지에 적었던 계시가 확정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자기가 전한 구속, 대속 또는 속죄, 이것이 구약을 한꺼번에 십자가로 해석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한 거예요.

사도 바울이 말하기를 갈라디아서 2장 20절, 예수님의 십자가 안에서 자기가 죽었다고 이야기했거든요. 그 말은 새삼스럽게 죽었다는 말이 아니라 태어날 때부터 죽은 존재로 태어났다는 것을, 십자가가 와서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십자가의 성령을 통해서 비로소 알게 되었다는 거예요.

죽은 존재가 되어버리면 더 이상 누가 관여할 수 없느냐 하면 악마가 내 몸에 대해서 더 이상 간섭하거나 지시할 수 있는 어떤 게 남아있지 않아요. 그것이 고린도전서 15장에 나옵니다. 역시 이 대목도 굉장히 어려운 대목입니다. 15장에서 사도 바울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55절에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이 사망을 다른 말로 바꾸면 뭡니까? 죄죠. 죄의 배후에는 악마가 있고.

사도 바울이 지금 이 이야기를 하는 것은 나에게 타자, 타자는 남입니다, 남이 바뀌었다는 거예요. 강의하면서 중간에 어려운 것들이 많았기 때문에 여기서 다시 한번 복습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다시 할게요. 타인이 있음으로서 내가 생겨요. 이 원리입니다.

왜냐하면 어릴 때 나라는 것이 규정되기 전에는 내 주변에 나를 키워준 타인들이 있어요. 그 타인들의 사고방식과 의식과 기본 양식 같은 것이 내 몸에는 안 오지만 내 자아에는 이게 쏟아지거든요. 몸에는 안 오지만 자아한테 쏟아지는 거예요. 그래서 나에게 자아를 일깨워준, 자아를 양육시킨 타인과 헤어질 수가 없어요.

그래서 내가 사랑하는 타인, 나를 나 되게 하는 그 타인이 죽어버리면 자아도 같이 살 의욕이 사라집니다. 네가 없는데 내가 왜 살아. 네가 없는데. 강의 중간에 했잖아요. 존재의 이유. 네가 있으매 비로소 나는 산다.

사도 바울에게 타인이 바뀌었는데 그럼 타인이 바뀌기 전 사울 시절 때 사울을 사울 되게 격려했던 타인은 누구입니까? 사도 바울은 이렇게 표현합니다. 그게 바로 죄였다는 거예요, 죄. 그래서 로마서 6장에 보면 우리가 다시는 죄한테 지시와 명령을 받을 필요가 없다고 나와요 (롬 6:6-14).

그러면 이 죄, 악마가 우리에게 나를 양육하는 하나의 스승으로서 작용할 때는 이렇게 했어요. 히브리서 2장에 나오지만, ‘네가 율법을 앞장세워서 율법대로 살지 아니하면 너는 죽어. 너는 지옥 가. 그러니까 열심히 하란 말이야. 율법대로 살란 말이야.’ 라고 한 거예요.

율법 품에 죄가 담겨있었던 거예요. 율법이 오면서 그 안에 죄가 같이 담겨 있었던 거예요. 율법은 선한데 그 율법이 오니까 내가 마중 나가는 게 아니고 내 속의 죄가 먼저 마중을 나온 거예요. 그러니까 ‘탐내지 마라’ 하니까 내 속에 ‘탐내지 말아야 우리는 살 수 있고 탐내지 말아야 천국 갈 수 있다.’고 하는 거예요.

이게 거짓말이에요. 율법을 지킬 수 있다는 것도 거짓말이고요. 율법을 지킬 수 없는데 지켰다는 것도 거짓말이고, 결국 이 거짓말을 악마가 먼저 알고 있는 거예요. 이미 인간은 하나님의 생명나무에서 잘렸다는 사실을 악마는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그게 노린 점이고.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면 구원받는다는 자체가 악마의 전매 특허에요. 악마가 특허 냈어요. 그렇게 해서 네가 지옥 가는 이유는 말씀을 위반했기 때문에 지옥 간다는 거예요. 그거 어디서 가르치겠습니까? 총신, 장로, 감리측에서 가르쳐요. 하마르티아라는 말, 죄는 과녁에서 벗어난 게 죄라는 거예요. 과녁에 맞춰 쏴야 되는데 엉뚱한 데를 쏘는 거예요.

그래서 예천에 있는 우리나라 대표 양궁장의 양궁선수처럼 맨날 쏘는 연습하고 있어요, 교회 와서. 표적을 향하여. 고린도전서 15장에서 하는 말이 표적 찢었다. 끝났어요. 게임 끝났어요. 승부는 이미 끝났습니다. 내가 의인이라서 그런 게 아니고 이미 내가 죄인으로 규정된 상태인데 죄인이 갈 곳은 죽음이죠. 처음부터 죽은 몸으로 태어났다는 사실을 악마는 그동안 우리에게 안 가르쳐준 거예요.

거짓말하는 타인이 되어서 우리는 죽기 위해 태어났다는 사실을 어느 누구도 가르쳐준 적이 없어요. 국민학교 3학년 2반 담임 선생님이 안 가르쳐줬어요, 이 사실을. 그때는 국민교육헌장을 외우라고 시켰어요. ‘우리는 민족 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 그런 거 이야기했지, “너는 살아봤자 죽어.” 이런 이야기를 한 사람이 없다니까요. 교회 와도 마찬가지에요. “희망을 가져라. 말씀 지키면 복 받는다.” 이게 교회인지 대순 진리교인지 이게 신천지인지 이게 개혁주의인지, 감리교, 장로교인지……. 전부다 똑같아요. 한결같이 똑같아요. 여러분, 천국 가고 싶죠? 구원받고 싶죠?

구원대상이 아니에요, 우리는. 천국 대상이 안 된다고요. 그곳은 예수님만 가는 곳이지, 우리가 가는 곳이 못돼요. 왜? 천국은 하나님의 나라가 아니고 골로새서 1장에 보면 예수님의 나라에요. 아들의 나라에요(골 1:13). 그 차이도 사람들이 알아야 돼요.

사람들은 악마한테 법적으로 훈련받았어요. 네가 하는 일이 꼬이는 것은 네가 법을 위반해서 말씀을 위반해서 벌 받아서 하는 일이 안 되는 거다. 그러면 처방책은 뭐냐? 간단하다. 네가 목사님 말씀대로 따르면 너는 복 받아서 네 하는 소원대로 잘 풀리리라. 그걸 상품화시키는 곳이 교회 아닙니까.

우리는 목사 입에서 그 이야기만 나오기를 고대하죠. 우리 교회는 너무 긍정적이야. 우리 교회는 적극적 사고방식을 갖춰서 너무 행복해. 세상에 어떤 어려운 일이 있더라도 우리 교회가면 마음이 다 풀리는 것 같아. 그래, 할 수 있다. I can do it. 나는 할 수 있다. 나는 된다. 주여, 도와주소서.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이게 조폭인지 다단계 사원들 훈련소인지 교회인지 분간도 안돼요.

그래서 어렸을 때 엄마 따라 아빠 따라 약간 교회 맛을 봤던 젊은 애들이 사회에 나가니까 자기 뜻대로 됩니까? 빌라 왕들이 돌아다니는데 전부 사기 안당하고 돼요? 영끌해서 송파에 아파트 샀는데 다 6억씩 내려가고 그걸 어떻게 해요. 그러니까 걔들이 믿을 것은 뭐냐? 희망을 주는 교회를 찾는 거예요.

젊은이들이여, 오라. 드럼치고 둥둥둥둥 베이스 기타치고 ‘어두운 밤에 깜깜한 밤에~’ 논산 훈련소에서 배워서. 열정 페이로 달라고 하는 교회도 있어요 심지어. 기타 배우는데 돈 다 들였거든요. 돈도 안 주고 헐값에 애들 부흥회 끌어 모으려고. 교회에 충성한다고 학점 다 날려. 점수C 막 나와. 그러니까 그 성적으로 취직이 안돼. 취직 안 되니까 갈 데 없는 사람이 갈 곳은 복음학교밖에 없어요. 복음학교에서 아프가니스탄 같은 데 가가지고 15만 불로 나라에서 빼내가고. 구역 정해놓고 오늘은 수단 담당구역, 너는 유럽 선교. 세상을 기도로서 복음화 시키자. 참내. 마귀입니다. 그 단체가 마귀라고 하는 그 교단도 마귀에요.

더 이상 이길 게 남아있지 않은 것을 주께 찬송하시기 바랍니다. 이길 게 없어요. 경쟁 대상이 안 됩니다. 왜냐하면 나의 의미의 수준을 내 죽음 이후까지 확장시켰기 때문에. 원래 태어날 때부터 죽었기 때문에 율법 지키지 못하면 저주 받는다는 것에는 해당사항이 없어요.

태어남 그 자체가 저주의 덫에 갇혀 있기 때문에. 태어나는 것보다 더 심한 저주는 없습니다. 내가 이야기한 게 아니라 욥이 이야기했어요. 욥은 선지자입니다. 선지자 안에 그리스도의 영이 미리 들어가 있다고 베드로전서 1장 10절에 나와 있어요.

“그럼 목사님, 우리가 할 건 아무것도 없네요.” 왜 굳이 하려고 하십니까? 일단은 굳이 하려고 한 게 문제이고 두 번째는 성령께서 예수님을 놀게 했습니까? 예수님께서, “성령아, 좀 놀자. 나 힘들어 죽겠다.” “아드님, 계속해서 십자가에 가셔야 됩니다.” “좀 그만! 제발 그만해, 그만. 나 지쳤어, 기도한다고.” “가셔야 됩니다. 십자가 죽어야 됩니다.” “이 잔을 좀 나한테서 지나가게 하면 안 되나? 죄 안 지었잖아. 죄 안 지었는데 왜 내가 해야 돼?” “몸이 말합니다.”

주님이 “아버지여, 이 잔을 할 수만 있거든 좀 치우면 안 됩니까?” 세 번 기도하고 난 뒤에 그래, 몸이 원수다. 이 죄된 몸이. 죄는 지은 적 없는데 죄 된 몸이 원수다. 몸이 이끄는 대로 가야지. 몸은 자체적인 자율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마음대로 못 하거든요. 죄가 거기서 처리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에서 하는 말이, 표적이 찢어져서 더 이상 쏠 게 없어요. 목표라는 게 의미가 없습니다. 주께서 가라 하면 가고 오라 하면 오면 됩니다. 가라 하면 가고 책 이만큼 쌓아놓고 공부하라 하면 공부하면 되는 거예요. 칠판 닦으라 하면 닦으면 되는 거예요. 한시도 성령께서 놀리지 않습니다. 가게 문 열고 뭐 팔라 하면 파는데 진상 고객 있잖아요. 그것도 주께서 보내신 거예요. “이게 가게냐?” “너 죽을래?” 이 말도 또 주께서 하게 하십니다.

아무 문제없어요. 아무 문제될 게 없어요. 왜 그러느냐 하면 막을 사이에 두고 함께 있는 주께서 성령을 세례로 막 헐크 셔츠 다 찢어지도록 틈 사이로 계속 주시거든요. 베드로한테 네가 원치 않는 길을 갈 것이다. 베드로가 원치 않는 길을 본인이 결정했습니까? 아닙니다. 성령 받고 난 뒤에 계속 나오는 거예요.

아까 요한복음 20장 다시 봅시다. 22절, “너희가 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할 때 천주교 신부들이 결정적으로 잘못한 것은 본인이 죄를 사할 수 있다고 생각한 거예요. 그게 아니고 본인은 그냥 찢어진 셔츠, 찢어진 막 역할만 했을 뿐이고 주께서 죄를 사해주는 죄 된 몸으로서 눈에 보이는 죄인 역할을 사도가 할 뿐입니다.

왜냐하면 사도는 자기 마음대로 결정 못하기 때문이에요. 사도행전 10장 이야기, 이번 주일에 설교했잖아요. 하필 못 먹는 것만 골라놓고 주께서 베드로에게 먹으라 했잖아요. 베드로가 “율법에 의해서 못 먹습니다.” 율법에 의해서 더러워서 못 먹는다 할 때 베드로가 아직도 모르는 것은 본인이 율법에 의해서 이미 더러워졌다는 사실을 본인이 몰랐어요.

그것도 나쁜 짓해서 더러운 게 아니고 태어날 때부터 율법에 의하면 더럽게 되어 있고 악마는 더러운 것을 어떻게든 율법 지켜서 선한 것으로 바꾸어야 네가 천국 간다, 라는 구원론을 제시하는 것이 악마이고 성령은 이미 구원문제에 대해서는 네가 나설 문제가 아니라고 완전히 주님과 함께 못을 박아버린 거예요.

성령이 와서 죄의 몸인 나의 최종성은 이미 십자가로서 모든 심판을 완료했어요. 누가? 예수님이 대신 했기 때문에 예수님을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 한 거예요. 그래서 지워버린 거예요. 애굽에서 이스라엘이 나올 때 유월절은 애굽의 장자, 그리고 이스라엘 장자를 다 지워버린 겁니다.

나는 더 이상 대를 이을 필요가 없다. 그럼 대를 잇는 노선은 무슨 노선인가? 내 혈육의 노선이 아니고 어린 양의 노선이라 해서, 문설주에 뭘 바릅니까? 양의 피를, 내 아들 죽은 피를 대신해서 바르죠.

그 유월절을 근거로 해서 요한복음 13장에서 예수님은 유월절 전에 유월절을 내다보면서 “내가 너를 사랑한다.” 이 사랑 이야기를 하면서 마치겠습니다. 사랑은 내가 더 이상 사랑할 수 없는 존재일 경우에만 사랑의 가치가 고스란히 100% 살아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눈물을 흘리면서 자기의 귀한 가치를 주님의 사랑 앞에서, ‘내가 전에 이런 것들을 사랑했었습니다.’하고 아낌없이 내놨어요. 또 기도원에 가서 재산 바치고 하지 마세요. 걱정돼요. 바치려면 여러분 자신한테 바쳐요. 이미 죽었던 여러분들이 죽었다는 사실, ‘너 돈 좋아하잖아. 그 돈을 죽은 너한테 바쳐라. 돈이나 실컷 벌고 죽어라, 이 인간아.’ ‘알았어. 돈이나 벌고 죽을게.’ 내가 나한테 이야기하는 거예요.

이게 바로 성도의 삶이죠. 어떻게 하면 내가 죄인임을 더 드러낼 수 있나? 어떤 쪽이어야 내가 망하는 쪽으로 갈 수 있느냐? 히히히. 왜? ㅋㅋㅋ. 왜? 이미 난 그걸 아니까. 뭘 해도 내가 건질 나는 없고 주께서 따로 마련한, 죄의 몸에서 영광의 몸으로 바뀌었죠.

1강에서 했잖아요. 만지지 마라. 아직 만지지 마라. 그 몸이 바로 우리의 몸이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을 누가 만지려 하면 만지지 말라고 하세요. 성령 안 받은 주제에 만지지 말라. 죄의 몸에서 새로운 영광의 몸으로 달라진 그 몸을 샘플로 미리 우리 앞에 주님이 마네킹이 되어서 그 몸을 우리에게 보여준 거예요. 만지지 말라는 그 몸이 장차 너희의 몸이 될 것이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모든 것이 우리가 끼어들 수 없이 주께서 다 하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마귀가 이 복음을 감추기 위해서 얼마나 극단적으로 저돌적으로 사력을 다하여 막아왔는지를 이제는 깨닫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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