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련회자료

타인의마을 8강-성령의 역할

아빠와 함께 2023. 1. 14. 20:31

2023 겨울수련회 요한복음강해 제8강 : 성령의 역할 - 이 근호 목사

교재 p.1 보겠습니다. 밑에서 11번째 줄에,【정부를 만들고 국가를 조직하는 것도 그것의 출발선은 가정이다.】 가정에서 무슨 훈련이 되는가? 가정에서는 타인을 만나는 훈련, 남을 남으로 인정해주고 그 남이 없으면 내가 없다는 것을 온몸으로 그걸 진리로 받아들이는 체험이 일어나는 곳이죠. 아빠 엄마 없으면 내가 살 수 없다는 것을 온몸으로 느끼는 거예요.

물론 아기가 아빠 엄마 없으면 젖 줄 사람이 없기 때문에 본능적으로 자기가 죽는다는 걸 알고 울어요. 하지만 그걸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그 관계, ‘아빠 엄마 없으면 너 죽어’라는 명령을 줌으로써 법제화시키는 거예요. 가정에서 법제화시켜요.

“내가 너를 어떻게 키웠는데. 비 오는 날 반티 장사해가면서 너 이만큼 대학까지 보냈다. 내가 너를 이렇게 고생해서 키웠는데 너는 너 마음대로 네 허락도 없이 네가 좋아하는 여자 만나서 결혼하겠다고 불쑥 나오면 어쩌겠다는 거야? 일단 보자. 어떤 여자인지. 나도 그만한 권리 있잖아.” 이렇게 당당히 주장하죠.

가정은 ①타인과 만나고 ②타인과의 관계를 법으로 연결시켜 법제화시키고, 법제화시킨 이것이 윤리와 도덕이 됩니다. 가정교육을 잘 받아야 인간 된다는 말이 여기서 나온 거죠. 호칭, 사돈의 팔촌 호칭을 제대로 해야 가정교육 잘 받은 거예요. 네 외숙모다. 제대로 해야 돼. 저건 조카고 저건 사촌 간이고 제대로 딱딱 해야 나중에 대소사 있을 때 저건 3만원짜리이고 저건 10만원짜리. 저건 안 가도 돼. 이건 꼭 가야 돼, 봉투 10만원 내고. 저쪽 사촌 결혼식 할 때 그건 20만원짜리야. 그런데 10만원 내고 부부 둘이 와서 식권 2장 달라고 하니 본전도 못 찾게…….

③이 뭐냐 하면 연대감, 자아 영역의 확장. 나만 나가 아니라 당신까지 합쳐서 나라고 규정하고 싶다는 거예요. 따라서 나의 사촌하고 연대성 있으면 사촌이 뭔가 아프거나 위험할 때 내가 나서서 지켜줄게, 하는 연대감 이게 가정에서 다져지는 결속이에요. 이게 가정입니다.

그런데 나중에 여기서 탈피합니다. 탈피할 때 새로운 타인을 만나요. 어린 소녀한테 엄마가 물어요. “이 장난감 누가 줬어?” 이렇게 하니까 어린 소녀가 자신만만하게 “친구!” 이랬어요. 그런데 그 엄마가 “그게 아니야. 다시 자세히 봐봐. 이거 누가 줬어?” “아~ 할머니가 줬다.”

새로운 타인을 만나는데 이게 친구에요. 친구를 만나면서 갑자기 이탈하지 않고 점차 점차 가정에서 벗어나기 시작하는 겁니다. 벗어나면서 친구하고 사귈 때 그냥 사귀는 것이 아니고 가족에서 형성된 그 사회성, 연대감을 가지고 거기에 레벨이 맞는 친구를 여기서 사귀게 되는 겁니다. “엄마, 나 친구 사귀었어.” “그래, 걔 몇 등 하는데?” “반에서 2등해.” “사귀어, 사귀어.”

지금보다 레벨이 더 나아지고 있다는 희망으로 엄마는 자식을 약간씩 놓아줘요. 단, 조건은 믿음직한 친구일 경우에. 친구에서 드디어 사회에 나갑니다. 사회에 나가면 여기서 회사라든지 공기업을 다니겠죠. 회사를 다니면 시간이 없죠. 가족 연대감과 점점 더 멀어지죠.

그런데 이 회사 이전에는 혈육 관계에요. 그런데 회사부터는 이익 단체에요. 무지막지한 경쟁을 강요받게 됩니다, 회사에서. 그래서 만약에 친구가 삼성 들어갔다. 그런데 본인은 엘지 들어갔다. 그럼 졸지에 원수 돼서 너 회사 정보 빼내라고 시키는 이런 일도 있을 수 있단 말이죠.

그래서 국가에서는 가정의 토대가 된 이 윤리 도덕성을 국가 전체의 결속력으로 활용할 필요가 있어서 국가의 힘이 개입해서 회사의 경쟁을 순화시킬 필요가 있었던 겁니다. 여기서 약간 어렵게 하면 국가가 개인에게 있어서 타자가 돼요. 국가가 타인이 되는 겁니다.

국가가 타인이라는 말은, 내 욕망이 원했던 대상(object)이 바로 국가가 되는 겁니다. 국가가 잘 되면 나도 덩달아 기분 좋고 잘 된다. 손흥민 본 적 있어요? 손흥민을 언제 봤다고 응원합니까? 손흥민이 내가 속해있는 국가를 대표한 팀에 있기 때문에 그래요. 손흥민이 1주일 뛰고 2억 받는다면 그게 자기 돈처럼 느껴지는 이유가 바로 나를 대체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제가 이 말을 왜 하느냐 하면 인간은 어릴 때 생긴 타인과의 결속을 자력으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말하고 싶어서 그런 거예요. 못 벗어납니다. 내가 좋아요. 자발적으로 내가 원해요. 국가에 소속되었다는 그 정서적 안도감을 내가 원하고 그것을 우리는 행복이라고 불러요, 행복. 선진국에 들어서서 후진국은 못 사는 나라라는 것을 아래쪽으로 바라보는 그 즐거움. 다른 나라의 가난이 주는 그걸 매개로 해서 자기가 우월감을 갖는 그것이 자기 욕망을 충족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자기 기분 좋은 걸 가지고 행복이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런데 문제는 뭐냐? 드디어 요한복음 13장에 들어왔어요. 13장은 유월절입니다. 유월절의 확장이에요. 유월절의 특징은 국가의 결속력을 지워버린다는 거예요. delete. 국가의 결속력을 지워버려요. 국가라는 것은 너의 환상에 불과하다는 겁니다.

어릴 때부터 부모가 환상인 것처럼, 그 부모가 아버지의 이름이거든요, 그런데 커서는 국가가 나의 아버지가 되는 거예요. 국가가 나의 아버지, 이상형이 되는 거예요. 아버지의 품 안에서 나는 보다 안정감을 느끼는 겁니다. 내가 아버지를 신뢰하는 것처럼 커서는 국가를 신뢰하는 거예요.

그래서 국가의 특징은 보수적입니다. 안정감을 추구하기 때문에 보수적이에요. TV조선이에요. 국가는 늘 이렇게 안정적으로 나가요. 급변하는 좌파는 위험해요. 좌파가 대통령 되도 마찬가지에요. 안정적인 것을 최우선으로 하는 겁니다. 왜? 아버지가 안정되어야 자식들이 정서적으로 편안을 느끼기 때문에 그래요.

그런데 이 국가를 구약에서는 짐승이라 해요. 국가를 악마라 합니다. 내 안에 있는 괴물이 조명을 받아서 크게 등장한 것이 국가라는 겁니다. 건물 옥상에 조명 시설이 있을 때 이 앞에 박쥐 그림을 가져다 하늘에 비추면 하늘에 뭐가 생깁니까? 배트맨이 보이죠.

나의 마음을 세상에 투영한 것이, 우리나라 잘 되었으면 좋겠다는 것이고 그게 내 속에 있는 괴물의 바깥 투영체입니다. 그리고 그걸 실재로 느낍니다. 이걸 환상으로 못 느끼는 것은 실제 권력에 의해서 지시받고 법제화되고 법률로 명령받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전에도 여러 번 물었습니다만 베드로가 예수님을 왜 배신했습니까? 왜 배신했다고 고백했습니까? 베드로가 자기 집에서 배신했습니까? 누구 앞에서 배신했죠. 바로 국가 권력과 함께 있는 자 앞에서 국가가 예수님을 싫어하기 때문에 자기도 덩달아서 나도 예수님을 저주하면서 싫어한다고 이야기했어요.

그렇게 함으로써 베드로는 한 발자국도 국가라는 실체에서 벗어난 적이 없습니다. 베드로는 구원되지 못했지요. 십자가 지시기 전까지는 성령이 오시기 전까지는 구원되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자기 백성을 끝까지 사랑한다 했으니까 끝까지 사랑해서 건져낼 수 있는 근거를 누가 단독적으로 만들어내요? 예수님 본인이 단독적으로 만들어야 되겠죠. 거기에 맞게 드디어 주께서는 유월절 양의 운명으로 가시는 겁니다.

유월절 양이 되는데 유월절 양의 능력은 모든 것을 지우개로 지워버리는 거예요. 환상이기 때문에 지워버리는 겁니다. 국가를 지워버린다면 뭐가 환상이 아니냐 하면, 국가를 지워버릴 수 있는 이 지워버린다는 행위만은 진짜에요. 이게 진짜배기죠. 국가에 대들만한 자신감이 진짜겠죠.

국가보다 더 센 게 없는데 그 센 것을 지워버리는 거예요. 지워버리면 빈자리 생기겠죠. 그 빈자리가 제자들로 하여금 떠난 자리로 만드는 겁니다. 빈자리를 떠난 자리로 만들어요. 그래서 유월절 어린 양이 이 빈자리를 만드는 거예요.

그럼 여기서 요한복음 1장을 보겠습니다. 여기부터 이제 약간의 어려운 게 시작됩니다. 요한복음 1장 29절에 보면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가로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자, 여기서 예수님이 세상 죄를 지고 가게 되면 우리가 구원받느냐? 안됩니다. 왜냐하면 세상 죄를 지고 가는 분이 우리의 새로운 타인으로 관계가 형성되어야 되기 때문이에요.

세상 죄를 지고 갔다. 그래서 뭐? 뭔데? 혼자 구원받겠네. 끝나는 거예요. 예수님 혼자 구원받는 거예요. 예수님이 세상 죄를 지고 가는, 그러니까 유월절의 율법을 완성함으로써 그 완성하신 당사자만 구원받죠. 다른 사람은 구원이 되지를 못합니다. 왜? 본인이 안 했기 때문에. 내가 하는 행동이 나를 구원하는 거예요. 이게 원칙이거든요.

그럼 예수님한테는 뭐가 더 필요합니까? 내가 하는 행동이, 나와 똑같은 행동을 하지 않는 자의 행동으로 이전되어야 될 필요가 있어요. 이게 전달되어야 될 필요가 있어요. 그것이 유월절에 확정되어야 돼요. 전달되어야 될 필요가 있는 겁니다. 예수님 혼자 훌륭하면 예수님 혼자 구원받죠. 관계없죠.

그래서 요한복음 1장 32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추가적으로 이야기를 하시는데 “요한이 또 증거하여 가로되 내가 보매 성령이 비둘기 같이 하늘로서 내려와서 그의 위에 머물렀더라” 예수님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이죠. 그걸 지금 세례 요한이 바라보고 있습니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자는 세례 요한입니까, 아닙니까? 아니죠. 세례 요한은 따로고 예수님 따로 단독행위를 하고 있습니다. 세례 요한의 행위는 아니에요. 그냥 지켜보고 있어요.

그런데 여기에 플러스 들어가요.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에게 위에서 뭔가 내려와요. 비둘기 같이 성령이 내려오십니다. 비둘기 같이 온다면 비둘기는 우편 배달부거든요. 전달 기능을 해요. 노아 방주 때 비둘기를 보냄으로써 새 땅과 노아 사이를 연결시키죠. 브릿지처럼 연결해주는 거예요. 저쪽의 소식과 이쪽의 상태를 연결시키는 게 비둘기였습니다.

연결됨으로써 이 세계를 더욱더 계속 이어가고 적용시키고 확정하는 기능자, 그게 비둘기라는 모습으로 온 거예요. 비둘기 같이 성령이 오셨어요. 그러면 성령이 예수님에게 왔잖아요. 성령이 세례 요한에게 왔습니까? 안 왔잖아요. 예수님께 왔죠.

그러면 여기서 중요하니까 여러분께 물어보겠습니다. 성령이 왔을 때 성령께 주도권이 있습니까, 예수님께 주도권이 있습니까? 성령이 주도권을 갖고 있어요, 성령이. 예수님의 주도권을 성령이 갖고 있는 겁니다. 예수님의 성령이 주도권이 있고 예수님은 세상 죄를 지고 가고 있고.

그러면 성령이 임해야 되는데 여기서 뭐라고 하나님께서 이야기했느냐 하면, 성령이 임했다, 그걸로 끝나는 게 아니고 또 추가적으로 하나 더 들어갑니다. 첫째, 예수님이 세상 죄를 지고 간다, 두 번째,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임해서 아버지의 사명을 예수님 홀로 감당하고 있다. 세 번째는 뭐냐 하면 성령을 받은 그분이 남들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분이라는 지시를 받게 돼요. 바로 그것이 33절에 나옵니다. 그가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이에요.

지금 이 세 가지, 아버지께서 성령 보내시고 예수님께 왔다. 그럼 아버지, 성령, 예수님이죠. 여기에 인간이 낍니까, 인간은 끼지 않습니까? 인간은 완전히 배제되는 거예요. 그래서 혈통으로나 육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의 뜻으로만 나는데 그 뜻이 뭐냐? 이 세 가지의 모습으로 등장하는 겁니다. 아버지께서 성령 보내시고 성령께서 예수님께 임하시고 예수님이 성령을 보내시는 거예요.

예를 들면 폭포가 있는데 폭포가 이중 폭포입니다. 한번 떨어지고 또 떨어지는 거예요. 한번 예수님께 떨어지고 예수님께 떨어진 그것이 또 떨어지는 거예요. 그런데 또 떨어질 때에, 성령이 예수님께 오잖아요. 어린 양이 다 이루게 되면 예수님께서 어느 자리에 가느냐 하면 주도권을 가진 성령의 자리로 옮겨가서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오른손 -하나님의 언약을 이루는 지점, 장소가 왼쪽이 아니고 오른쪽이에요- 하나님의 오른쪽에 하나님의 언약을 달성하신 분께 성령 세례를 주는 것을 맡기고 일임합니다.

그렇게 된다면 이미 이것은 완성된 상태에요. 세상 죄를 지었다는 것이 완성된 상태에요. 그럼 성령으로 세례 받았다는 사람은 우리가 추가한 게 있습니까, 없습니까? 추가할 게 없죠. 성령을 받았다는 말은 일단 완성되었기 때문에 그냥 완성된 자체를 택배로 받는 거예요, 주문하지도 않았는데. 59460원 뭐 이렇게 주문하지도 않았는데 그냥 아침에 현관문 여니까 ‘새벽탁송’이라 해서 뭐가 와있는 거예요. 열어보니까 겉모습은 성령, 안에 들여다보니까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 지우개, 우리의 권력을 다 지우고 나까지 다 지워버리는 그러한 힘을 선물로 받는 겁니다.

주님이 떠난 자리가 찾아오게 되면 나 있는 자리가 점점 더 희미해지고 존재감이 사라지면서 있던 사람이 없는 존재로 전환되죠. 그럼 나는 어디 있느냐? 내가 떠남으로써 새로운 내가 되는 거예요. 새로운 나, 주님 안에서의 나로 가는 겁니다. 그게 바로 인간이 뚫을 수 없는 인간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는 겁니다. 그 본래 자리를 창세기 1장에서는 하나님의 형상이라 해요.

인간은 흙으로 만들었죠. 흙이 인간일까요, 하나님의 형상이 인간일까요? 하나님의 형상이 인간입니다. 가장 모델적이고 최초의 인간다운 인간은 형상 그 자체이신 예수님이 두 번째 아담이 돼서 새로운 인간의 시작이 되는 겁니다.

예수님에 의해 마지막 아담의 노선에서 하나님께서는 비로소 인간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어요. 형상,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었기 때문에 그 형상 그대로 있어줘야 인간이고 형상 빠지면 그냥 흙덩어리에 불과합니다. 흙의 조형물에 불과하고 우상에 불과하죠.

그래서 이렇게 보게 되면 세상의 모든 것은 흙으로 만들어진 하나의 우상이고 환상이고 가상들이에요. 진시황이 죽었을 때 십만 명의 군대가 진시황 무덤을 지키고 있었는데 그게 사람일까요, 흙일까요? 흙입니다. 안 가봤지만 사진으로 봤어요. 사람을 진흙으로 만들어 마차까지 똑같이 해서 쭉 세워놨어요. 그걸 창으로 밀면 다 부서지잖아요.

그 조형물이나 오늘날 인간이나 다를 바가 뭐가 있습니까? 새로운 인간이 등장했다는 말은 ‘기존 인간들아, 좀 깨어져라.’ 그런 뜻이거든요. ‘좀 없어져줄래? 꺼져줄래?’ 그런 뜻이다 이 말이죠. 예수님이 인간 세계에서 떠남으로 말미암아 기존 국가는 짐승의 국가가 되어서 국가도 안 되고요. 그 속에 인간은 인간도 아니에요.

진짜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 그 자체를 머금어야 그게 하나님의 인간이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그 인간 되는데 있어서 성령께서 역할을 하죠. 그 정도는 여러분 이제 아시겠죠? 그 다음 순서 들어갑니다.

자, 그럼 이제 예수님께 집중해봅시다. 예수님이 세상 죄를 지고 가기 위해서 예수님은 어떠한 길을 가야 되느냐? 예수님이 세상 죄를 지고 가게 되면 죄가 무거울까요, 예수님이 무거울까요? 죄가 예수님을 압도하죠. 죄가 있는 곳에는 율법에 의하면 저주가 있죠. 저주가 셀까요, 예수님이 셀까요? 어느 것이 강력합니까? 저주가 강력하죠. 그래서 예수님은 저주받습니다.

저주만 나오도록 저주의 제물이 되는 것이 십자가입니다. 아버지로부터 끊어진 것이 저주거든요. 그래서 십자가에서 예수님은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예수님이 저주받을 때 제자들은 뭐했죠? 그냥 아무것도 안했죠. 도망치기 바빴죠. 그게 우리의 원래 모습입니다. 예수님, 예수님 해도 세상 권력 속에 있기 때문에 세상 권력에 의해서 뽑아져 나오는 데 있어서 예수님만 빠져나오지, 다른 사람들은 못 빠져나옵니다.

안 빠져나와도 괜찮아요. 예비군 훈련하시고 군에 가세요. 안 빠져나와도 성령 받으면 됩니다. 성령 받으면 돼요. 성령 받게 되면 우리 자신이 흙으로 돌아간다는 것을 기쁘게 받아들일 수가 있어요. 이제는 김흙, 최흙, 박흙, 이젠 흙이 돼요. 흙이 다 된 사람도 있고, 흙 되기까지 좀 많이 남은 사람들도 있고 반쯤 흙이 된 사람들도 있고……. 그렇게 웃고 즐기다가 언젠가 ‘흙 되었습니다’ 하고 부고장 날아오고, 가시는 길 잘 보내드리겠습니다, 하고 보람상조 차 왔다갔다 하고 그렇게 되죠.

저주 아래 있는 이 코스, 이 경로를 주께서 그렇게 만든 거예요. 주께서 만든 sequence, 순서대로 이제 가는 겁니다. 그대로 하는 거예요. 주께 일어난 그 상태, 저주 아래 들어가서 영광의 몸으로 다시 부활되는 그 코스를 주님께서 이미 여행사에 연락해서 이미 상품화했어요.

다른 길은 없어요. 애들 노래에 있잖아요. ‘다른 길은 다른 길은 다른 길은 없어요~’ 이걸 사도행전 4장 12절에,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 다른 이름으로 구원받을 이름은 없다, 얼마나 부정성입니까.

벌써 또 잊어버렸어요? 긍정적인 세계, ‘앞으로 잘 될 거야’하는 세계가 뭐로 포위되어 있다고요? 부정성으로 포위되어 있는 거예요. 그러면 이 긍정에서 빠져나와야 되는데 우리가 손 놓고 있어요. 아무것도 못해요. 할 수가 없습니다.

할 수가 없는데 요한복음이라는 것이 말씀이잖아요. 말씀이 주어졌다는 것은 앞으로 말씀대로 그대로 우리에게 코스 잡아서 적용되는 거예요, 말씀대로. 그 말씀이 요한복음 1장에 보게 되면 ①예수님께서 세상 죄를 지고 간다, ②성령이 임한다, ③성령으로 완성하신 분이 자기에게 주어진 성령을 우리에게 그대로 세례 주는 거예요.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처럼 너희는 나로 인하여 살리라. 성령 오지 않으면 죽는다. 제대로 죽는다, 가 되는 거예요. 죽음과 삶을, 하나님의 형상인 예수님이 기준점으로 정해놨다는 이것이 요지부동 변하지 않는 진리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은 요한복음을 끝내면서 다른 것도 알아야 되지만, ‘확정되었네, 진리가.’ 이것만 알고 있으면 돼요. 모든 것이 확정되었다는 거예요. 난 이제 예수 버리겠어. 버리든 말든 마음대로 해요. 네가 버려도 마지막 때 다 불러낼 거요. 진리는 뭐냐? 이미 다 이루었어요. 확정되었어요.

그게 통보 들어오면 구원받고 그게 통보가 안 오면 가시던 지옥 길로 그냥 갈 수밖에 없는 거예요. 통보가 오게 되면 점차 내 몸이 안개가 되고 흙이 되고 자꾸 내게 의미 있던 것, 내가 중요시했던 가치, 나는 누구의 남편이다, 누구의 아내다, 나는 집사다, 이게 점점 더 희미하게 delete, 지워지기 시작하는 겁니다. 우리 애는 1등 해야 돼, 이게 별 중요하지 않아요. 나는 커서 벤츠 타야지, 벤츠를 타든 뭘 타든 그게 별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모든 것이 국가라는 타자, 이 타자 안에서 국가로 형성된 그 질서로부터 내 자리를 배정받아야 비로소 나는 산다고 여기는 것, 예수님으로 사는 것이 아니고 현재 눈에 보이는 국가로 인하여 나의 어떤 특정 자리를 확보해야 비로소 나는 제대로 산다, 행복하다, 내 미래가 열렸다, 라는 식의 이러한 인간성, 이게 바로 본래 우리 모습이에요.

종교도 국가 밑에 있으니까요. 교회 다닌다고 하다가 예비군 훈련 나오라 하면 나가야 되죠. 누가 힘이 센데요? 국가가 힘세지, 교회가 힘셉니까? 교회 까불다가는 푸틴이 와서 밀어버리는데요. 크리스마스 때 푸틴이 미사일 쏘고 이러는데요. 국가가 더 세지, 종교는 나를 지켜주지 못합니다. 국가가 나를 영원히 보호하는 타자가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문제는 뭐냐 하면 성령을 받게 되면 성령은 “다 이루었다. 내가 이제 너의 자리를 지워줄게.” 너의 자리를 지워주게 되면 나도 희미해지지만 이 타자의 자리도 희미해져요. 복음 없는 친구, 복음 없는 일가친척, 이거 별 의미 없습니다. 저건 뭐 어둠에 속하는데… 이런 식으로 의미 없어요. 국가가 지시하면 “예, 예.”하고 따라가기는 하지만, 가만히 있는 성령께서 자신을 주께서 이끄시는 거예요.

그렇다면 저주의 무게에 대해 조금만 하고 마치겠습니다. 저주의 무게는 국가의 무게다. 저주의 무게는 짐승, 국가의 무게입니다. 이 말은 하나님께서 국가를 이용해서 우리하고 예수님하고 떨어지게 만든다는 거예요. 떨어지게 만들어서 따라가지 마. 따라가지 마.

애들이 어릴 때 무턱대고 엄마 따라가잖아요. 그때 엄마한테 중요한 일, 만약에 선보러 간다면, 이상한 사례를 들었지만, 친척들이 아이보고 “넌 따라가면 안 돼. 상대방 새 남자한테 아이 있다고 하면 안 되니까 따라가지 마.” 설정이 좀 이상한 설정입니다만.

국가로 하여금 우리가 주님을 따라가고 싶어도 우리는 따라가지 못하도록 성령께서 이렇게 떼내어 줍니다. 그게 요한복음 13장에 나와요. 전에는 이걸 보고 ‘베드로 참 안타깝다’ 했는데, 이제 성령을 받은 사람은 안타까운 것이 아니고 ‘감사합니다’가 나와야 돼요.

‘주님과 떼줘서 감사합니다. 어쭙잖게 자기 주제파악도 안됐으면서 주의 일을 한다고 나섰는데 그게 얼마나 잘못된 큰 착각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나는 그저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으면 된다는 그런 자유함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렇게 되는 거예요.

요한복음 13장에 보면 37절,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내가 지금은 어찌하여 따를 수 없나이까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 세상 죄를 지고 간 성령 오지도 않은 주제에 그 목숨이 어디 쓰잘데기 있다고 그 더러운 목숨을…, 가만있어도 죽는 목숨 그게 뭔데. 그냥 죽어. 네가 따라올 수 없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닭이 여기 투입되죠. 여기 닭이 왜 등장합니까? 닭이 너보다 낫다는 뜻이에요. 닭은 시키는 대로 하잖아요. 베드로야, 너 왜 자꾸 고집을 부려. 고집이 왜 그리 심해. 닭은 시키는 대로 파이브, 포, 쓰리, 투, 원, 꼬끼오~~ 그것도 세 번씩이나. 닭 울 때 베드로 한번 주님 배신하고 저주하고, 닭 한번 울 때 또 저주하고. 죽이 맞아. 추임새가 멋져요.

베드로 자리에 닭을 집어넣어서, ‘베드로야, 네가 나한테 나올 생각하지 말고. 내가 예언한 대상인 닭이 하는 그 행위가 그러하듯이 바로 네가 나를 떠나서 결별하는 것도 이미 예상한 나의 뜻이다.’ 라는 것을 베드로에게 각인시켰죠.

배신해야 되는 역할을 맡은 겁니다. 베드로도 따지고 보면 연기자죠, 역할자. 베드로도 배우에요. 여러분들도 배우이고. 닭도 주께서 설정해놓은 배우죠. 그러니까 닭으로 하여금 베드로 자리를 교체시킨 것은, 이 모든 일은 지금도 홀로 하시고 앞으로 구원받는 모든 여정에서도 오직 주님 홀로만이 작용해서 나중에 천국 갔을 때 내가 아무 한 것도 없이 이곳에 왔다는 사실에 새삼스럽게 화들짝 감격하고 놀라게 만들어요. “아무것도 한 것 없는데 제가 여기 왔습니다.” 이런 고백이 절로 나오도록.

이제 14장에 들어갑니다. “왜 저를 이렇게 떼놓으시렵니까?” 하니까 여기서 “내가 너희 처소를 예비하러 간다.” 이렇게 되어 있거든요. 이거 참 어려워요. 처소, 누구 처소냐 하면 베드로 처소죠. 현재 베드로는 이 지상에 자기 자리가 있다고 자부하죠. 현재 자기가 있으니까 처소가 있는데 그 처소는 하나님께서 준비해놓은 처소가 아니에요. 이것은 인정받지 못한 처소입니다.

그럼 처소를 마련한다는 말은 네 처소를 이제는 인정할 수 없다는 뜻이죠. 그러면 주께서 처소를 마련하게 되면 그다음 작용은 뭡니까? 처소는 이미 마련되었기 때문에, 있는 자기 처소를 헐어야 되겠죠. 처소를 헐어버려야 되겠죠. 그 작업이 바로 성령의 작업입니다.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내 존재를 자꾸 흐릿하게 만들어요. “제가 이번에 뭐 어떻게 해서 큰돈을 벌었습니다.” 그럼 성령께서 “의미 없다.” “이번에 투표했는데 제가 90% 찬성으로 장로가 되었습니다.” “의미 없다. 아무 의미 없다.” “제가 교회 목회하다가 이제 퇴직했습니다.” “그냥 기원에서 바둑이나 둬. 아무것도 하지 마.”

그러니까 성령께서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어떻게 하면 내가 지워버릴 수 있는 쪽입니까? 내 가치가 망할 수 있는 쪽이 어느 쪽입니까?’를 계속해서 촉구하는 것이 성령의 일입니다. 여기서 나오는 네 자, 추임새, 할렐루야! 어느 쪽으로 가야 내가 망합니까? 뭐 물을 필요도 없어요. 지금 망하고 있으니까. 알아서 잘 망하고 있으니까. 돌아가는 일이 여러분 뜻대로 되는 것 봤어요? 안되죠. 잘 망하고 계신 거예요.

처소 이야기하고 난 뒤에 또 철딱서니 없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14장 5절에, “도마가 가로되 주여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삽나이까” 이 도마 보세요. 참, 자기가 한 말이 무슨 뜻인지 몰라요. 주께서 길을 알려주지 않은 것은 간단하게, 유치원 애들도 아는 이야기에요, 오지 말라는 뜻이에요. 그런데 “우리가 어디로 가면 됩니까?” 오지 말라는데……. 오지 말라는데 “왼쪽, 오른쪽 어느 쪽으로 갈까요?” “오지 마!” “어느 쪽으로…?” “오지 말라니까!”

6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여기서 하나 더 집어넣으면 이해하기 쉽습니다. “내가 막힌 길이고 내가 막힌 진리이고 내가 막힌 생명이다. 오지 마!” 이거 집에 걸어놓은 어떤 교인들도 있어요.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그 사람들이 액자 걸어놓고 어떻게 생각하겠어요? 막혔다는 그것을 집어넣을까요, 안 넣을까요? 안 넣죠. 그러니까 그걸 보고 있는 제 마음이 또 아프죠. 저게 막힌 길인데. 우리가 갈 수 없는 길이거든요. 주님 쪽에서 오는 것이지, 내가 길을 알고 진리 안다고 해서 갈 수 있는 길이 아닙니다.

그걸 불연속성이라 하는데 그 불연속성이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를 자랑하라는 말은, 막혔었다는 것을 보게 하는 거예요. 이 길이 막혔다. 다 통과하고 난 뒤에 뒤돌아보니까 그 길이 막힌 길이었어요, 막힌 길.

그 뒤는 쭉 생략하고 14장 12절 봅시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 뭐 예배당 짓습니까? 그게 아니고 내가 모든 타자로부터 버림받는 그 큰일을 하듯이 너희들도 세상으로부터 깔끔하게 버림받을 수 있느니라. 여기서 하나 더 보탠다면, 믿씁니까? 내가 이 세상에서 망한 것처럼 너도 하나님의 축복과 은혜로 이 땅에서 실패자가 될 수 있습니다. 믿씁니까? ‘믿씁니까’는 이럴 때 사용해야 되죠.

주께서 하신 주님의 일, 그 큰일을 우리는 감히 못합니다. 내가 너무 아까워서. 그런데 해낼 수 있도록 해주는 겁니다. 내가 나와 이별할 수 있고 내가 나를 버릴 수 있습니다. 내가 나를 아주 우습게 볼 수 있는 그런 자유가 있기를 여러분들께 바랍니다.

괜히 여러분께 가치 있다고 한다면 일곱 귀신이 뭐에요, 열두 귀신 다 달려듭니다. 너는 잘 할 수 있어. 미래 희망이 있어. 아니에요. 우리는 어느 쪽이 망하는 길인지, 그게 생명의 길이고 그게 좁은 길이고 영생의 길입니다. 그래야 세상 가는 길과 정반대의 길을 갈 수 있는 거예요.

여러분들이 일기 쓰거나 가계부 쓸 때, 오늘은 얼마나 망했는가 한번 보자. 아, 오늘 이렇게 망했구나. 이번 달 수입은 이천 육백 만원, 아이고 망했네. 돈을 사랑하는 쪽으로 가버렸네. 오늘 주식 던져놨는데 21%, 망했어. 주여, 왜 자꾸 망하는 길로 가게 하십니까. 오늘 애 성적을 한번 볼까? 또 성적이 올랐네. 야, 이거 어쩌려고 성적 오르는지 모르겠다. 주여, 왜 자꾸 애를 망하는 변호사 쪽으로 망하는 의사 쪽으로 왜 자꾸 몰아넣습니까. 맨날 옆에 책 쌓아놓고 공부만 하고 엄마의 심정은 애타기 짝이 없어요. 연기입니다, 연기. 그냥 연기죠.

그다음 봅시다. 14장 18절,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전에 설명했는데 또 설명해드리겠어요.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않죠. 버려두면 어떻게 하실 겁니까? 이게 문제인 거예요. 성경에서는 “내가 너희를 다시 찾아올게. 일단 우리 갈라서자. 일단 너는 네 자리로, 나는 내 자리로 갈라서자.” 우리는 졸지에 고아 되었잖아요. “내가 고아를 만들었는데 내가 다시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내가 찾아서 너희를 데리러 올게.”

이건 완전히 <미워도 다시 한번>이잖아요. 엄마가 가출하면서 그 꼬마 애한테 뭐라 합니까? “엄마가 장에 가서 맛있는 거 사가지고 다시 올게.” “엄마 따라 갈래.” “오지 마. 너 공부 열심히 하고 있으면 내가 네 밤 자고 다시 올게.” 그러면 애가 또 연기가 좋으니까 “엄마!”하고 붙들면서 울어야죠. 그래야 감독이 컷이 되니까. 여러분 태어나기도 전에 그런 영화 있어요. 다시 온다 해놓고 안 왔어요. 안 옵니다.

안 오면 어떻게 할까요? 지금 제자들에게 믿음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믿음이 없죠. 믿음이 없으니까 믿음 없음을 점점 더 노출시키는 거예요, 믿음 없음을. ‘내가 다시 올게’ 할 때 그들이 기다렸습니까? 안 기다렸습니다. 왜? 믿음이 없기 때문에. 믿음이 없기 때문에 헤어져야 했고 그 헤어진 불연속성을 메우는 것은, 그들의 믿음으로 메꾸는 것이 아니고 주님께서 성령으로 그들을 사로잡습니다.

그러면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달해요. 중요한 결론인데요. ‘주님을 기다렸더니만 주님과 재회했다.’ 이런 인간은 주께서 죽여 버립니다. ‘내 식대로 사는데 주님이 자기에게 한 약속대로 고아같이 버려두지 않고 찾아왔다.’ 이들이 바로 천국 백성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요한복음에서 말하기를, 예수님 죽고 부활하고 난 뒤에 주의 모든 말씀을 주께서 친히 이루었다는 사실을 성령 오고 난 뒤에 알아요. 그러면 성령 오기 전까지는 끝까지 그들 쪽에서 주님께로 다가오는 모든 다리를 다 지워버리게 되는 겁니다. 다 지워버리게 돼요.

왜냐하면 사랑이라는 것은 사랑을 기다리는 자를 사랑하는 게 아니고 그들에게 사랑이 끝났을 때 비로소 사랑이 시작되거든요. 심지어 인간들도 그래요. 사랑할 때는 사랑이라고 우기지만 사실은 자기가 투자해놓고 투자의 결실을 상대방에게 뽑아내려고 하는 것이 흔히 사랑이라는 말로 통용돼요. 결혼 안 한 사람들은 잘 알아들으세요. 투자해놓고 투자에 걸맞는 내가 예상한 결과를 뽑아내려할 때 사랑이라 하는 겁니다.

그런데 사랑도 아닌 것이 사랑이라 우기면서 그 수명이 다 됐을 때, 끝났을 때, 아무것도 아닌 나를 사랑해주는 사랑이 비로소 보이죠. 그러나 인간은 주님이 아니고 둘 다 인간이기 때문에 한쪽의 사랑이 끊어지게 되면 한쪽이 삐치고 삐칠 때 사랑하게 되면 또 삐친 채로 ‘한번 또 용서해줄까?’ 이렇게 돼요.

그러니까 똑같이 사랑하는 경우는 인간에게 단 한 경우도 생기지 않습니다. 한쪽이 쉬면 한쪽은 열나고 한쪽에서 열심이 끊어지면 또 다른 한쪽에서 시작되고 그런 겁니다. 심지어 인간과 인간 사이 뿐 아니라 인간과 개 사이도 마찬가지에요. 개는 귀여워해주면 자기가 돛대인 줄 알고 침대 막 기어오르죠. 그래서 쫓아내면 그때는 끼잉, 낑. 밖에 나가서 사랑해달라고 하잖아요. 개나 인간이나 전부다 똑같죠.

주께서는 철저하게 기다린 보람으로 구원받는 경우가 생기지 않도록 하십니다. 그러니까 고아같이 버려두지 않는다는 사실은 그들이 기다려도 소용없다는 거예요. 기다리면 오지 않고 안 기다리면 오시는 분.

철저하게 예수님이 이루는 그 모든 sequence, 순서에 인간의 요소가 조금도 섞이면 안돼요. 왜냐하면 홀로 다 이루어야 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인간은 추방된 자이고 쫓겨난 자이기 때문에 죄수에게 어떤 것도 기대 안 해요. 우리는 자꾸 성의를 표시하려고 하는데 그러지 마세요. 죄수는 죄수다워야 돼요. 그래야 예수님의 유월절 어린 양이 빛이 납니다. 우리는 그러한 자부심과 용기가 없어서 그래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찾아오시는데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26절에 보혜사가 등장하죠.

제가 14장을 이렇게 집중적으로 하는 이유는 그다음 15장, 16장, 17장, 18장은 14장 안에 다 들어있기 때문에 그래요. 다 들어있어요. 이거에요. “너희가 내게로 오는 방법은 내가 던진 밧줄 -이 밧줄이 뭐겠습니까? 보혜사- 내가 던진, ‘다 이루었다’가 매겨져 있는 성령 없이는 너희가 절대로 내게로 올 수가 없다. 그리고 내게로 왔을 때 내가 너희에게 준 모든 말씀을 다 이루었다는 것을 체험하면서 오너라.”

주의 말씀대로만 진행되어서 가는 곳이 천국이구나, 라는 것을 말씀대로 밟아서 오는 거예요. 사뿐히 즈려 밟고 성령께서 인도하는 대로 가는 곳마다 골짜기마다 ‘주께서 이런 말씀을 남겼구나. 왼쪽으로 트니까 주께서 이런 말씀 남겼구나. 이건 요한복음 13장이네. 요한복음 14장이네.’

하여튼 모든 것이 말씀대로 되어진다는 것을 늘 느끼면서 살아가야 돼요, 성도가. 성령께서 당기면 그렇게 족족 가는 곳마다 하나님의 말씀 속을 통과하는 방식으로 우리가 구원받는 겁니다. 그러면 이 말씀도 주님이 이루었고 저 말씀도 주님이 이루었고. 그럼 내가 한 것은? 없죠. 나는 지워져야 되니까.

그것이 요한복음 17장 24절, “아버지여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 아버지께서 창세 전부터 나를 사랑하시므로” 그 사랑을 주께서 찾으십니다. 드디어 창세 전으로 되돌립니다.

다시 묻습니다. 창세 전에 우리가 있었습니까, 없었습니까? 나라는 것은 없었어요. 그러면 주께서는 없는 나를 예수님이 새롭게 만드신 겁니다, 없는 나를. 그런데 지금은 같이 중첩되었어요. 내가 알고 있는 나와 주께서 만드는 나는 같이 있거든요. 그러면 주께서 성령께서는 내가 아는 육의 나와 영의 나를 우리 안에서 헤어지고 점점 이별되게 하는 거예요.

이걸 주일 낮 설교에서 설명했는데 이것만 하고 오늘 강의 마치겠습니다. 우리에게 성령이 오게 되면 나의 내부에서 현재 자아(주체)와 간격이 벌어져요. 간격이 벌어지면서 불연속성이 생기는데 주께서 준비한 나가 따로 있죠. 이것은 말씀대로 다 이루었다,의 나에요.

여기서 성령이 계속 일하시면 나는 불연속적이니까, 육의 나는 영의 나를 믿을 수 없으니까, 계속해서 후패하고 썩고 육적이고 세속적이고 감정적인 쪽으로 가겠죠. 가게 되면 영의 나와 점점 더 간격이 벌어지겠죠. 벌어지니까 벌어진 만큼 이걸 건너간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요, 하나님의 공로만 큰 자리를 차지하게 되는 겁니다.

내가 나 된 것은 주께서 이렇게 하게 하셨던 겁니다. 그래서 나오는 고백이 뭐냐? 나다나엘이 고백한 것과 똑같은 고백이에요. ‘어떻게 저를 찾아오셨습니까?’ 날이 갈수록 70이 되고 80이 되도, 어떻게 허물어져야 될 나를 이렇게 구원하셨습니까? 왜 그런 고백이 나오느냐 하면 자기 내부에 큰 간격이 보이기 때문에. 그리고 주께서 준비한 게 보이기 때문에 너무 좋아서 그런 고백을 하는 거예요.

어떻게 돈만 알고 이렇게 내 자존심밖에 모르는 나를 이렇게 구원하셨습니까. 날마다 그것이 증거 되기를, 더해지기를 바랍니다. 안녕히 주무세요.

'수련회자료'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나를 죽여라  (0) 2023.01.19
타인의마을 9강-부활의 여분  (0) 2023.01.14
타인의마을 7강-빠진 흔적  (5) 2023.01.14
타인의마을 6강-기적과 표적  (0) 2023.01.14
타인의마을 5강-사건과 설명  (0) 2023.01.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