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겨울수련회 요한복음강해 제 5강 : 사건과 설명 - 이 근호 목사
다섯 번째 강의 시작하겠습니다. 끊어버리고 잇는 것. 끊어버려야 이어짐이 있거든요. 끊어버릴 때 사건으로 끊어버립니다. 사건으로 끊어버리는데
요한복음 2장에서 혼인 잔치 사건이에요.
요한복음 3장에는, 니고데모 만남 사건.
요한복음 4장에는, 사마리아 여인 만남.
요한복음 5장에는, 베데스다 못가에서.
요한복음 6장에는, 오병이어.
요한복음 7장에는, 초막절.
요한복음 8장에는, 간음하다 잡힌 여인.
요한복음 9장에는, 날 때부터 소경 된 자.
요한복음 10장에는, 수전절(하누카).
요한복음 11장에는, 나사로(마리아 마르다 오빠) 사망 사건.
중간에 주께서는 사건을 집어넣어요. 사건을 집어넣어서 다 끊어버려요. 인간의 체인을 다 끊어버려요. 다 끊어버리고 잇는 거지요. 다 끊어버리면 이것은 바로 인간의 긍정을 하나의 부정이 포위해서 여기서 공격을 해버립니다. 이게 뭐냐? ‘로고스의 공격’, 로고스라는 것은 말씀이라는 뜻입니다.
요한복음 1장 1절에 나오는 거예요.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태초에 하나님이 함께 계셨는데 함께 계신 하나님은 부정성을 안고 담고 있었어요. 왜냐하면 십자가에 죽을 분이기 때문에. 태초부터, 창세 전부터 감추어진 비밀이에요.
십자가 사건이 나중에 일어난 불상사가 아니라 처음부터 계획된 겁니다. 그래서 에베소서에서는 십자가 사건을 창세 전부터 감춰진 비밀이라고 해요, 비밀. 그 비밀, 십자가 사건을 위해서 부대 현상, 보조적인 배치공간이 필요했는데 거기에 선악과나무 심어두고, 마귀 등장하고, 인간을 꾀고, 하는 그 모든 사건들이 태초에 숨겨진 그 사건을 들춰내기 위해서 일어났던 하나의 보조적인 환경이지요.
인간들이 갖고 있는 이 긍정, 이 긍정을 부정이 포위해서 공격하는 가운데서 어떤 기능이 있느냐 하면, 끊어내고 잇는 기능이지요. 끊어내는 것은, 사건들이 요한복음 11장까지 죽 나와 있습니다. 그러면 왜 12장부터 20장까지는 사건이 포함되지 않느냐? 이것은 더 이상 끊어낼 것은 다 끊어내고 이제 마지막 남은 것은 주님이 주님을 끊어내는 것, 주님의 십자가 죽음, 자기 죽음이지요, 주님의 자기 죽음, 자기 죽음이 12장부터 20장까지 이어집니다.
이것은 인간들이 거기에 참여할 수 없어요. 왜냐하면 주님의 단독죽음이기 때문에 어설프게 거기에 동참하는 이것은 안 돼요. 밀어냅니다. 베드로가 죽겠다, 할 때 “내가 죽는데도 가겠습니다.” 할 때 “오지 마! 이것은 나만 죽는 거야.” 네가 죽는 게 아니에요. 주님 자신만 죽어서 창세 전 비밀을 보여주는 거예요. 긍정 속에서 주님의 자신의 죽음을 여기에 심어버립니다.
그러면 인간이 무(無)에서 유(有)가 되었다, 하는 이것이 거꾸로 유에서, 있음에서 무로 가버리지요. 그러면 ‘유’도 날아가고 ‘무’도 날아가고, 이 세상 인간들이 생각했던 ‘무’, 없음도 없음이 아니고, 인간이 ‘있다’ 존재하는 그것도 존재가 아니라, 모든 것이 주님의 있음과 없음과 그리고 있음(있음→없음→있음), 그것만 남아 있는 그 세계가 유일한 현실세계입니다. 모든 것이 주님의 세계일 뿐이지요. 나머지는 주님의 보조적인 것이고.
그런데 우리의 관심사는 뭐냐? 끊어버리고, 끊어버려서 인간으로서의 주의 일을 차단시키고 인간의 모든 것을 부정시키는 그것, 그다음에 우리가 궁금한 것은 뭐냐? 잇는 거예요. 자, 이 모든 것이 무산되었는데 어떻게 이어서 영생을 얻고 구원을 얻을 수 있느냐? 이것이 뭐냐 하면, 이게 설명이에요.
설명인데 여러분이 익히 아는 개념은 뭐냐 하면, 해석, 주님의 사건에 대한 자기 해석. 그러면 성도는 뭐냐? 성도는 주님의 설명사건의 일부로서 개입되는 것이 성도에요. 성도는 일부로서 가담이 되면서 이 끊어버리는 사건이 계속해서 이어지는 한 설명사건도 계속 같이 동반해서 이어지는 겁니다.
이런 일을 한 이것은 복음이 전파하는 곳에서 항상 있을 것이다(마 26:13). 마리아가 자기의 향수병을 던질 때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 이 일도 항상 같이 증거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이을 때 성도가 설명, 해석의 일부라고 하는데 그 설명, 해석의 내용은 뭐냐? 이것은 시작과 끝을 체인으로 거기다가 담아버리는 거예요. 시작과 끝을 체인으로 담아버리는 것.
사건은 하나 터졌는데 이걸 인간이 설명할 길이 없네요. 그럴 때 설명, 이 사건에 대한 올바른 설명이 추가가 되어버리면 이 안에는 시작과 끝을 연결해주는 유일한 진리가 주님의 설명에 의해서 다 드러나는 겁니다. 내가 시작한 것은 내가 끝낸다는 것, 주님 자신의 체인이 되는 거예요.
그런데 시작점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시작점이지요. 그리고 십자가로 “다 이루었다.” 요한복음 19장 30절의 말씀 “다 이루었다.” 최종점, 시작점과 최종점은 주님만 독점하고 있어요. 주님만 독점한 그 내용, 하나님께서 그 안에서 설명을 하고 이 설명을 현실화시킴으로써 이 설명 안에 들어온 사람은 비로소 주님이 체인 안에 참여한 자가 되어서 영생에 이르고, 구원에 이르고, 사망에서 생명으로 들어오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은 끝났지요. 방금 이야기한 그 몇 분 만에 이게 다 끝나버렸어요. 그래도 자세한 설명이 필요하겠지요, 자세한 설명이. 이걸로 끝내자는 게 아니고, 집에 가자는 게 아니라. 그러면 여기서 사건에다 설명을 추가해서 하나님께서는 자기 세계로 이끌 때에 그러면 이것은 무엇과 대비가 되느냐 하면, 인간들이 벌이는 사건과 인간의 자기설명과 비교가 되는 거예요.
어느 날 딸아이와 함께 옛날 할머니가 살던 집에 가보니까 거기 오래된 시계가 있었어요. 딸이 어머니에게 묻지요. “이 시계가 무슨 시계입니까?” 자, 시계가 있다. 존재하는 사건이지요. 인간은 그 사건에 대해서 뭘 하느냐 하면, 인간들이 거기에 대해서 “왜 여기 있습니까?” 그 설명을 궁금해 하는 거예요. 그 설명이 궁금해야 미흡한 현실이 보충이 되니까요. 그래서 “여기 웬 낡은 시계가 있습니까?” 하니까 부모가 이야기했겠지요. 그래서 만든 노래가 뭐냐 하면, <할아버지 낡은 시계>에요
길고 커다란 나무위 시계는 우리 할아버지 시계
벌써 잠자고 있네요
길고 커다란 마루 위 시계는
우리 할아버지 시계
90년 전에 할아버지 태어나던 날
아침에 받은 시계란다
언제나 정답게 흔들어주던 시계
할아버지의 옛날 시계
이젠 더 가질 않네
가지를 않네
이런 노래에요. 이걸, 이 가락을 왜 내가 다 불렀느냐? 이건 건전가요에요. 유행가만 되게 부르고, 이런 소리 안 들으려고요. 사건에 대해서 설명을 붙일 때 납득이 되는 겁니다. ‘아, 할아버지와 나는 같은 시대적, 시간적 공간을 이어 오는구나.’ 인간들이 그렇게 아는 거예요. “이게 뭡니까?” 물으면 거기에 설명을 하는 겁니다.
인간의 사건에 대해서 또 하나의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어떤 트로트 경연에 어떤 사람이 노래 하기 전에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저는 저를 가장 사랑해주셨던 아버지를 위하여 이 노래를 바칩니다.” 하고 노래를 불러요. 노래 제목은 <아버지의 강> 이라는 노래입니다.
아 저녁바람에 억새 울고
강 기슭에 물새 울면
어디선가 들려오는
아버지의 뱃노래
사랑 하나로 날 키우시고
뱃노래 불러 날 재우셨던
아 아버지 불러봐도 대답 없이
흐르는 저 강은
아버지의 강이여
저 강 건너 나룻터에
물새 한 마리 슬피 울면
강바람에 검게 타신
아버지가 그리워
사랑 하나로 날 키우시고
뱃노래 불러 날 재우셨던
아 아버지 불러봐도 대답 없이
흐르는 저 강은
아버지의 강이여
아 아버지 불러봐도 대답 없이
흐르는 저 강은
아버지의 강이여
아버지의 강이여
심사위원(마스터)들이 막 눈물 흘리지요. 그리고 노래 끝나고 난 뒤에 버튼 다 눌러서 짠, 하고 ‘올인’ 받고 난 뒤에 하는 말이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자랑스런 아들이 되기 위해서 저는 여기에 나왔습니다.” 하고 설명을 여기에 붙여요, 설명을. “네 살 때 새아버지께 갔는데 지금 20여 년 동안 날 키웠다. 그런데 그 아버지가 갑자기 당뇨로 돌아가셔서 이제는 그 아버지를 기리면서 하늘에 계신 그 아버지의 자랑스런 아들이 되기 위해서 이렇게 나왔습니다.”
그 사람 이름이 ‘황 준’인데 자, 그러면 그 사람은 뭐냐? ‘내가 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야 되며, 어떤 식으로 남은 인생을 보내야 되는가? 하늘에 계신 아버지에게 자랑스런 아들이 되기 위해서 나는 여기에 트로트 가수로 나왔다. 7년 전에 가수로 나왔는데 음반은 못 내고……’ 이렇게 죽 설명이 되는 거예요.
그렇다면 이것은 무엇이 사건이 되느냐 하면, 나의 존재가 사건이 되지요. 나의 존재가 사건이 되고 거기에 대한 설명을 하면서 자기 체인에 최소점이 누굽니까? 사랑하는 아버지가 최소점이 되는 거예요. 지금 인간들은 전부 이런 식으로 꼬불꼬불, 체인(chain) 또 나오지요, 인간은 각자 이런 식으로 꼬불꼬불, 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거예요.
요 체인 앞에 뭔가 무한한 가능성, 희망, 이런 것을 보지만 뭘 모르느냐 하면, 시작과 끝, 감추어진 시작과 감추어진 끝, 전체를 한꺼번에 볼 줄을 몰라요, 한꺼번에. 한꺼번에 볼 줄을 모르니까 이런 할아버지 시계, 아버지의 강, 이런 사건과 설명을 하는 사람들이 요한복음을 보게 된다면 요한복음을 어떻게 해석하겠어요?
가나안 혼인 잔치가 있다. 그러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야~, 예수님이 자기 어머니를 기쁘게 하기 위해서 물을 포도주로 바꿔줬구나. 주여, 제가 예수를 믿습니다. 따라서 우리도 이처럼 희망적이고 남한테 참 결혼식 잘했다고 인정받는 그런 환경이 지속되게 하옵소서.’
자, 이렇게 넘어가고, 이게 설명이 된 거예요. 자기가 부정성으로 끊어진 것은 모르고 끊어짐이 있고 난 뒤에 이어짐이 있는데 자기는 안 끊어진 상태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이어지려고 시도한 겁니다. 그런 식으로 요한복음 해석이 되어 왔었습니다. 요한복음 해석이.
요한복음 3장 니고데모같은 경우도 마찬가지예요. 요한복음 4장에 나오는 사마리아 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주께서 사마리아인을 구원하기 위해서 찾아오셔서 목마르지 않는 샘이 되게 하셨구나. 주께서 저에게도 주시면 저도 목마르지 않는 성령의 삶이 되어서 죽도록 메시아만 증거하겠습니다.’
그러나 요한복음 4장에서도, “나는 네가 수고하지 않은 것을 거두러 왔다 너희들을 참회하게 함이다.” ‘야~, 이제부터 내가 살아야 할 존재의 이유가 여기에 있구나.’ 이거 뭐 백퍼지요. 백프로, 요한복음 4장을 그런 식으로 다 해석을 해버리는 겁니다. 땡, 입니다. 그런 식으로 해석하면 안 돼요.
꼬불꼬불, 이 자체가 이게 바로 ‘부정성’ 완전히 이게 지렁이 아닙니까, 지렁이, 완전히 생물실험실의 곰팡이나 이런 것을 시료로 해서 병균 채취하는 작은 시료 판처럼 생기지 않았습니까? 이 전체가 부정이에요. 이렇게 하지 말라고 준 책이 요한복음이에요. 그렇게 해석하지 말라는 거예요.
끊어짐이 있어야 돼요, 끊어짐. 끊어짐이 있는데 그 끊어짐에 대해서 제가 제일 첫 시간에 이야기한 것을 그려보면 이렇습니다. 처음에 원에 뭐가 온다 했어요? 원에 어떤 선이 주어지는 것을 뭐라고 했습니까? 접선이지요. 접선, 원, 원이니까 이것은 갇혀 있으니 유한(有限)이지요.
유한은 무엇과 접선해야 된다? 제대도 된 무한과 접점, 접선을 이뤄야 돼요. 접선을 이뤄야 되는데 그 접선이 미리 들어와 버리면 이것은 이 통과 지점이 두 지점이 되겠지요. 그런데 소나기처럼 계속 오게 되면 모조리 쪼개지겠지요. 이 접선의 정체가 뭐냐? 예수님의 죽으심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 메시아가 죽음을 품고 오신 거예요. 예수님은 인간입장에서 부정성이니까 죽음을 품고, 껴안고 들어왔다 이 말이에요.
들어오니까 이 안의 세계는 뭡니까? 자기 체인을 가지고 전부 다 살려고 하는 거예요. 살려고 하니까 요한복음 4장을 주든, 5장을 주든, 율법을 주든 전부 다 어디에 활용하려고 합니까? 내가 여기서 내 인생의 의미를 찾고 앞으로 더 살아보겠다고 하는 그쪽으로, 예수님의 복음을 그런 식으로 자기가 껴안게 되는 거예요.
늙어 죽어가는 내가 예수님의 살아계심을 껴안으면 나는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이렇게 설명 안 하는 주석 있으면 나와 보라고 해요. 다 그렇지요. 그래서 이게 엉터리인 거예요.
주님이 살아 있는 것이 아니고 주님의 죽음이 살아 있지요. 그러면 여기서 나오는 것은 뭐냐 하면, 죽음의 동질성이에요. 예수님의 죽음과 동일한 죽음, 이것이 시작이고 끝이다, 그 말이에요. 이 땅에서 보여주는 시작과 끝이에요. ‘사망에서 생명’이라 할 때 생명이라는 개념은, 창세기 3장 24절에서 인간에게는 바깥의 개념이에요. 인간의 언어로 표현되지 않는 바깥의 개념이에요. 낯선 개념이고 이건 동질성이 아니고 이 생명은 이질성이에요.
동질성은 죽음밖에 없어요. 이 땅에서. 이 땅이 있기 때문에, 이 세상이 있기 때문에 들어오신 분도 죽음, 거기에 살고 있는 우리도 죽음, 죽음이라는 동질성, 그것도 율법으로 저주받는 동질성 외에는 이 세상에 어떤 동질성이 없어요. 그러나 여기서 주께서 죽으시면서 설명을 해나가면서 시작과 끝, 끝 지점에 ‘다 이루었다’는 그 끝 지점에 의해서 비로소 이 접점, 지점에서 뭐가 발생 되는가? 여기서 생명이 이어지는 겁니다.
용접할 때처럼 완전히 뭐가 튀어요? 불꽃이 막 튀지요. 생명이 튀는 거예요. 생명이 튀면서 이것은 ‘내 생명은 존재에 대한 것이 아니고 사건에 해당’되는 겁니다. 여러분, 아주 고급스런 단어를 배웠어요. 존재의 반대가 뭐라고요? 방금 뭐라고 했습니까? 사건.
존재는 쥘 수 있고, 품고 있고, 끌어갈 수 있지만 사건은 어떤 누구도 소유화시킬 수 없는 게 사건입니다. 우발적이니까, 있다가도 없어지고 없다가도 생기는 거니까 사건은 내가 이것을 집합화 시킬 수가 없어요. 내 것으로, 나의 부분집합으로 만들어낼 수가 없습니다. 사건의 주인공은 내가 아니니까. 내 존재의 주인공은 나지만 사건의 주인공은 ‘나’가 아니에요. 사건을 유발하신 분이 주인공이에요.
그래서 사건이 주어지는데 이게 뭐냐하면, 사건 뒤에 주어진 설명 로고스, 설명의 말씀, 로고스는 말씀입니다, 설명의 말씀이 요한복음 2장부터 11장까지 사건 플러스, 그다음 뭡니까? 설명이 덧붙여서(사건+설명) 한 장 한 장이 넘어간다 그 말입니다.
그러면 2장부터 해서 저녁 먹을 때까지 11장까지 끝내야지요. 자, 2장부터 봅시다. 인간은 어떻게 제거해야 돼요. 주님의 사건은, 인간은 살고자 하기 때문에 주님의 사건은 살고자 하는 인간을 제거해 버리는 겁니다. 부정해 버리는 거예요. 가나 혼인 잔치에 엄마가 예수님 보고 예수여, 포도주가 떨어졌다고 이야기 했지요.
여기서 예수님이 어머니보고 뭐라고 호칭합니까? “여자여!” 여자여. “여~ 자여!” 이거 말고, “약해지면 안 돼” 그런 뉘앙스 말고 (냉정한 어투로)“여자여!” 다시 말해서 지금 어머니께서 나에게 기대하는 호칭, 어머니 체인에서 나를 보는 것과 내 체인에서 보는 것, 이게 다른 거예요.
여자여, 라는 것은 마리아를 현재에 위치하게끔 마리아가 포함되어 있는 마리아와 그 관계자들, 이 사람들은 뭐냐 하면, 혼인 잔치를 주최하는 주최측이지요. 마리아의 요구가 아니라 이 사람들의 요구를 예수님에게 요청했을 때에는 예수님께서는 ‘보자~! 어머니, 잠깐 그 뒤 좀 봅시다. 어머니 말고 그 관계자들이 들이밀고 있구나.’
물론 예수님하고 마리아 사이는 부모자식간이 맞습니다. 그러나 어머니가 몰고 온 그 배치구조, 배치환경은 예수님하고 관계가 없어야 돼요. 관계가 없어야 됩니다. 예수님이 만약에 도와줘 버리면……, 이 조직, 아까 요한복음 1장 14절에서 했지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가 되는 이것은 혈통으로 안 되지요. 혈통으로 안되는 거예요. 그런데 지금 혈통으로 들이밀고 있는 겁니다. 누가? 마리아가. 혈통으로나 육으로 안되지요. 마리아가 그 육으로 밀어붙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요구조건이 있어요. 그게 사람의 뜻이지요. 안 돼요. 사람의 뜻이 아닙니다. 그들의 포도주가 떨어졌다는 그것은 주님이 의도적으로 일으킨 사건으로 하나의 부분집합으로, 포함이 되어야 돼요. 하나의 요소로서 포함이 되어야 돼요. 주님의 요소로서 체인을 담기 위해서 그런 사건들이 벌어진 것에 대해서 그 주도권이 마리아 및 그 배후세력, 그 세력이 요청하는 것을 예수님께서 거절하는 방법은 어머니여, 가 아니라 여자여, 일반적인 사람으로 간주합니다.
그러면 이쪽의 요구조건이 뭐냐? 자기들끼리의 육적인 뭐가 되겠어요? 육적인 동질성. 예수님은 호칭을 통해서 뭡니까, 예수님은 뭘 보여줍니까? 이질성. 그 동질성과 이질성을 가나안 혼인 잔치에서는 뭐로 규정을 하느냐 하면, 시간으로 규정을 합니다.
지금 이 인간들, 마리아 및 인간들 구조에서는 뭘 모르냐 하면, 최종성을 몰라요. 미래를 모르는 거예요, 미래를. 예수님께서 오실 때 예수님과 연결되어있는 ‘다 이루었다’의 최종성에 대해서 이들은 무지한 거예요. 이들은 미지의 세계를 점선으로 남겨둔 거예요. 점선으로 남겨두고 지금 이 체인에 당장 뭐가 떨어졌어요? 포도주가 떨어져서 혼인 잔치가 끝장, 막장으로 끝나게 될 판이라 이 말이지요.
‘왜 준비를 제대로 안 했어? 이래가지고 손님 대접 제대로 하겠어?’라는 비난이 막 쏟아질 것 같은 이러한 그들만의, 인간들의 시선과 그들에게 인정받아야 될 것을 요구받고 있는 인간들의 혈육적 세상입니다. 그들은 뭐냐? 최종성이 아니고 현재성만 고집하고 있는 거예요. 그냥 현재에서 포도주만 넉넉하다면 아무 문제가 없다고 본 거예요.
문제가 없는 것을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그게 바로 자기 정당성이지요. 그러니 마리아의 모습과 그 뒤에 마리아보고 예수님한테 뭘 부탁해보라고 하는 이 촉구는 오늘날 우리 일상의 생활상을 그대로 그대로 보여줘요. 예수고 복음이고 간에 그때그때 넘어가면 그만이라는 거예요. 그때그때 넘어가면, 다급할 때 기도해서 응답받고 그때 그때 넘어가게 되면.
그런데 그때그때 넘어가게 되면 뭐가 안 되느냐 하면, 자기의 근원적인 시작점이 부정적이고, 최소값이 잘못되어 있다는 것을 발각당할 기회를, 찬스를 자꾸 놓쳐버린다 그 말이지요. ‘지난번에 긍정했기 때문에 앞으로 잘~ 될 거야’ 이런 식이에요.
근원적으로 뭔가 자기의 좌표가 바뀌어야 돼요, 좌표가! 좌표라는 말이 나왔으니 현재 오늘날 인간 세상을 이렇게 보면 돼요. 언젠가 한 것 같은데요. 데카르트의 좌표지요. 좌표계에서 인간은 뭐냐? 어떤 지점이 있어요. 시간과 공간, 뭐하나 여기에 더 긋는다면 시공간인데 복잡하니까 그냥 공간만 생각하겠습니다.
어떤 공간에 y와 x, x=3이라면 y=7이라 하는 어떤 지점을, 이 세상의 지점을 딱 점유하고 있어요, 점유. 점유하고 있는데 주님께서는 어떻게 하느냐 하면, 이걸 빨아당기는, 소용돌이치는 원으로 해서 블랙홀로 이걸 삼켜버려요. 이 세상은 주님이 다 이루었다는 그 죽음의 세계로 빨아당겨서 산자나 죽은 자나 다 마지막에 심판받기 위해서 다 빨아당기는 거예요.
수챗구멍에 물 빠질 때 어떻게 됩니까? ssg, 슥, 빠지지요. 갑자기 훅 빠지지요. 모든 인간들의 운명이 원 안에 빠져버린 거예요, 원 안에, 수챗구멍 안에 빠져요. 그 수챗구멍 역할이 뭐냐 하면, 유일하게 이 세상과 로고스로 오신 예수님 사이의 연결구조가 죽음의 하수구로 예수님 오신 거예요. 왜? 긍정 주위에 뭐가 포위되었기 때문에? 부정성으로 오셨기 때문에.
열심히 책 쌓아놓고 공부할 때 어느 날 쑥 빠져버리는 거예요. 그동안 공부하고 배웠던 것 전부 다 같이 쑥 빠져버리는 거지요. 열심히 공부해라. 자기는 공부할 때 여기 이 좌표(x=3, y=7)에서 나중에 y=7646, x=2456, 그래서 자기보다 더 높은 사람, 몇 명 되지 않는 이 좌표이동을 목표로 하는 거예요.
이건 무슨 구조냐 하면, 평면사고구조에요, 평면사고구조. 이 세상은 평면인데 열심히 하면 성공할 수 있고, 나태하면 패배하고 낙오자가 된다. 낙오자가 되는 그 우세스러움을 면하기 위해서는 열심히 공부해야 나중에 성공한다. 이런 평면구조지 블랙홀 구조가 아니에요. ‘우리 이러다 같이 우물에 빠진다.’ 이런 구조는 아니다 그 말이지요.
이 수챗구멍이 어디서 나타날지 몰라요. 왜? 이걸 돌출이라 하는데 돌출은 사건일 경우지요. 어디서 돌출해서 나를 쓱, 하고 죽음의 세계로 빠뜨릴지 모르지요.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포도주를 주되 이 포도주가 예수님의 최종성, ‘다 이루었다’ 와 관련되어 있는 포도주를 줘버립니다. 이걸 가지고 ‘기적’이라 하지 않고 이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표적’이라 해요, 표적.
기적과 표적의 차이는, 기적은 현재 아쉬운 것, 표적은 미래에 다 완료된 것. 포도주로부터 시작한 주님의 첫 번째 표적, 그것은 예수님 죽음의 개시를 이야기하는 거예요. 죽음의 개시, 이게 바로 가나안 혼인 잔치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포도주를 주지 않아요. 뭘 주느냐? 물을 주는 겁니다. 언젠가 주일학교에서 이 설교 했잖아요. 물을 항아리에 담아요. 또 나온다. 이스라엘 갔던 이야기. 가나라는 그 동네 항아리 사진 찍어 왔습니다. 물론 그때 그 항아리는 아니지만 동질성을 갖고 있는 항아리에요.
그 큰 항아리에 물을 담았어요. CCTV가 장착되어 있다고 가정하고요. 물을 담았습니다. 1 미터 옮겼습니다. 물입니다. 2 미터 옮겼습니다. 물입니다. 물이 도착했을 때 하인들이 보니까 물입니다. 물인데 계속 물이에요. ‘이게 물이지 뭐가 포도주냐?’ 하고 ‘포도주 달라고 하는데 왜 예수님은 물을 주시지? 확인해 볼까?’ 확인해 보니 포도주가 아니고 물이에요.
‘아이고, 뭐 이게 어떻게 포도주가 돼? 그냥 떠서 주라 했으니까 떠서 주자.’ 한 그 순간, 다시 말해서 자신의 동질성을 포기한 순간 그 물은 뭐로 바뀌는가? 포도주로 바뀌는 거예요. 자기 체인에서 이동이 되는 것, 그게 믿음이지요. 그 표적이 바로 가나 혼인 잔치입니다.
내가 나를 살리기 위해서 한 어떠한 기적은 주께서 주신 적이 없습니다. 오직 주님의 기적은 뭐냐? 나의 죽음에 동참하라는 기적 외에는 여태껏 인류역사상 주신 적이 없습니다. 나를 살리는 기적을 주신 적이 없어요. 암에 걸렸다. 기도했다. 살았다. 그건 산 게 아니에요. 여전히 죽은 거예요.
어떤 경우도, 어떤 경우도 내가 이렇게 해서 구원받은 사람 맞다, 믿음이 맞다, 그럴 경우는 그런 기적을 하나님께서 허락한 적이 없습니다. 나는 구원 받아서는 안 되고 지금 내가 살아 있는 것은, 내 죽음이 살아 있는 식으로 살아 있다는 그 인식이 나를 포도주로 만들어버리는 거예요.
내가 처음부터 물이었고 나는 물이어야 마땅한데 주님의 최종성의 체인, 그 체인이 사건으로 찾아오니까 나는 뭐가 된다? 아무리 봐도 물인데 주께서는 뭘로 간주해요? 포도주로 간주하는 거예요. 왜냐? 포도주는 예수님 자기의 최종성이거든요. “내 피를 마셔라.” 최종성이잖아요. 십자가, 이게 마지막 표적인데 그 최종성에 동참하니까 포도주로서 동참한다는 뜻이에요. 이게 바로 주님의 사건이 갖고 있는 해설입니다.
복잡했는데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주님의 모든 기적은 살고자 하는 나의 의지를 꺾어주시고 주님의 죽으심에 동참하는 그것이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긴 결과물이고 하나의 증상……, 감기들면 콧물 나지요. 증상이라는 것은 내 관리대상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냥 나의 모든 이성을 이기고 자연발생적으로 발생된 것이 증상이거든요. 내 생각이 아닌데 주님의 생각이 떠오르게 되고 그게 발산될 때 그게 증상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 증상의 내용은 뭐냐? 나는 주님의 죽으심에 참여하기 위해서 이 땅에 태어났다는 거예요. 굳이 내가 살 이유는 없다. 그런데 그 생각이 평소에 내 생각과는 달리 너무나 이질적이다. 그때는 노선 바뀌신 줄 아시기 바랍니다. 노선이 바뀐 거예요. 체인이 바뀐 거예요. 주의 사람입니다. 축하드립니다. 혼자 다 하고 축하도 드리고, 뭐 허락은 맡았는지 모르겠습니다만.
그다음에 2장 21절에 보면 46년 동안 지은 건물이 등장하지요. 성전건물입니다. 성전건물을 보고 예수님께서는 또 미래성, 미래의 최종성을 두고 이야기합니다. 뭐냐 하면 “이 성전을 헐어버려라.” 자, ‘성전을 헐어버려라’ 할 때 이 명령을 제자들이 따랐습니까, 안 따랐습니까? 갑자기 제자들이 곡괭이 들고 성전에 달려들었습니까? 어떻습니까?
엄두가 안 나지요. 주의 요구는, 주의 명령은 불가능성이에요. 주의 명령을 지킬 수가 없습니다. 어떤 명령도 못 지켜요. 왜? 못 지켜야 끊어냄이 돼요. “내 말 독하게도 안 듣는구나.” 제가 언젠가 강의하면서 그런 예를 들었잖아요. 권투선수 코치가 “푸트워크(footwork) 하고, 상체도 활발하게 움직이란 말이야! 왼쪽으로 들어오면 오른쪽으로 피하고 그렇게 하라는 말이야.” 하고 지시를 했는데 이건 뭐 계속 얻어맞는 거예요.
그래서 “맞지 마, 맞지 마!” 했거든요. 나중에 너무 맞아서 KO 되었다고요. 그러니까 그 코치가 올라와서 “너 되게도 말 안 듣는구나. 정말 무지무지하게 말 안 듣는다.” 성전을 헐라고 했잖아요. 마리아에게 기존의 친척들이 있는 것처럼 기존 성전의 권세자, 권력자들이 쥐고 있는데 곡괭이 들고 망치 들고 갔다가는 혼쭐나지요. 아예 엄두가 안 나지요. 같은 권력의 체인에 있기 때문에 안되지요.
마지막에 결국 이 성전은 헐리리라, 하는 뜻이에요. 명령은 네가 못한다는 것을 분명히 주지시키고, 네가 못하게 된 지경과 내가 그걸 못하는 것을 하는 것, 그걸 통해서 주님께서는 끊임없이 부정성으로 인간의 긍정을 공격하시는 거예요. 인간을 공격하시지요.
2장 19절에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그리고 21절에 “그러나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죽은 자 가운데서” 그다음에 뭡니까? “살아나신 후에야” 시간 공격이에요, 시간 공격. 주의 최종성으로 현재를 공격하는 겁니다. 아직 도착하지 않은 시간이 이미 그것만 고수하는, 현재만 고수하는 자에게 공격하는 식으로 주께서는 설명을 하시는 거예요.
따라서 이 설명사건의 로고스, 말씀의 설명사건에 휩쓸린 사람은 그야말로 세상 사람들한테 또라이 소리를 들을 수밖에 없지요. 왜? 남들은 그걸 모르니까요. 그다음에 3장 니고데모. 사무엘상 6장 6절을 보겠습니다. “애굽인과 바로가 그 마음을 강퍅케 한것 같이 어찌하여 너희가 너희 마음을 강퍅케 하겠느냐”
요한복음 3장의 니고데모 이야기가 이게 왜 강퍅과 관련되어 있느냐 하면,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올 때 조연급, 연기 잘하는, 눈빛 잘 쏘아대는 연기자가 필요해요. 그가 누구냐 하면, 조연으로 연기해줄 사람, 그게 바로 왕입니다. 바로 왕이 맡은 역할은 강퍅입니다.
강퍅은 뭐냐 하면, 모세가 전했던 하나님의 말씀이 그에게 오게 되면 강퍅에 강퍅, 곱하기 강퍅, 곱에 세제곱 강퍅해야 돼요. 그래야 요한복음 3장이 해석이 돼요. 전도하는 사람이 ‘이 복음을 왜 안 믿지?’ 그게 아니에요. 그게 아니고 말씀, 주께서 사건을 일으키는 그 사건의 핵심은 이 세상으로 하여금 강퍅의 도를 더하게 하는 효과를 동반해서 말씀을 주시는 겁니다.
여러분이 전도할 때 이점을 감안해주시기 바랍니다. 복음만 안 전하면 사이좋은 관계에요. “요새 좀 아파트 값 올랐제?” “투기지역 해제하니까 좀 올랐지.” 이럴 때는 싸울 일이 없어요. “얼마나 올랐는데?” 이렇게 하면 서로 간에 섭섭한 마음도 들지 않고, 인상 그리지 않고, 싸우지 않아도 되는데 “그런데 말이야. ‘하나님은 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그 말을 왜 꺼내, 그 말을?’
지금 분위기 파악도 못 하고 그 말을 꺼내는 순간 그들 30년 여고 동창생과 헤어지게 되어 있어요. 아마 여러분이 세상 사는 요령 중 하나가 헤어지지 말아야 될 사람에게는 절대로 복음을 전해서는 안 된다는 그런 노하우, 기술이 장착되어 있잖아요. 나하고 맘이 맞는 사람 앞에서는 절대로, 특히 일가친척 앞에서는 절대로, 절대로 복음 끄집어 내면 안 됩니다.
왜냐하면 아플 때 누가 여러분을 위로해줘요? 여러분? 아닙니다. 일가친척이에요. 미우나 고우나 “아이고, 그래, 이모가 돌봐줄 게.” 이런 식으로, 또는 “삼촌! 내가 삼촌 조카인데 내가 삼촌 요양병원 보내줄 게.” 결국 믿을 만한 것은 친척밖에 없거든요. 그래서 디모데전서에 보면 어떤 어려움이 있을 때 교회로 짐 지우지 말고 일가친척한테 맡기라는 말이 거기서 나온 거지요(딤전 5:16). 그런 말씀이 있어요. 기억하려고는 하지 마세요.
요한복음의 니고데모 해석에서 니고데모가 뭘 몰랐는가? 니고데모가 뭐가 그렇게 궁금하고 어떤 점에서 하자가 있었는가? 세상은 예수님의 오심과 동반해서 어떤 조짐과 변화가 일어나는데 그 변화가 뭐냐? 모세가 바로 앞에 등장했을 때 바로는 평소와 달리 강퍅해야 될 역할을 담당하는 사람으로 주님의 사건 현장에 출현한다는 사실이에요.
그래서 여러분이 요한복음 보면서 ‘야~, 내가 그 당시에 거기 있었다면 니고데모에게 설명을 잘 해줬을 텐데.’ 그렇게 생각하면 안 돼요. 점점 더 복음에 대해서 잠자고 있는 괴물의 눈을 뜨는 것처럼 복음은 우리 속에 없다고 여겼던 괴물이 드디어 활동을 개시하는 거예요. 죽음의 움직임, 그리고 생명의 움직임으로 세상이 재편되는 겁니다.
2장은 상당히 고정되었다고 보면 3장부터는 운동성을 갖고 있어요. 주님의 활동, 생명이 움직일 때, 예수님이 가실 때 그들은 가만히 있는 게 아닙니다. 예수님이 움직일 때 그들은 도발하는 자세를 취하면서 같이 핍박하는 것으로 움직여 줘요. 예수님의 자기 죽음에 성공할 수가 있어요. 뭔가 조력자가 있어야 돼요. 예수님 죽는데 가룟유다처럼 조력자.
예수님이 꼭 죽으셔야 되는 분위기를 유발시키면서 예수님은 십자가로 가는 겁니다. 그래야 뱀의 후손과 여자의 후손, 또는 같은 말로 죄 와 의, 또 같은 말로 지옥과 천국, 이것이 같이 감으로써 여기서 변화율을 만들어내지요. 곡선이 이렇게 만들어지면서 아버지 나라의 접선을 형성하기 위해서 올라갈 수 있도록, 십자가로 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겁니다. 여기에 세상이 어두운 세상이 조력해야 돼요.
무슨 뜻이냐 하면, 예수님 당시에 점잖은 사람이 한두 사람이 아니었잖아요. 예수님 당시에 인간적으로 인성을 봐서 훌륭한 사람이 한둘 아니었잖아요. 많이 있었잖아요. 인성적으로. 가정교육 잘 받은 사람은 인성이 좋잖아요. 예의도 바르고.
그런데 그들이 어디로 다 집중해서 휩쓸리고 끌려가느냐? 어두움이지요. 어두움이 되어야 돼요, 어두움. 어두움이 되어야 예수님만이 뭐가 된다? 빛이 될 수 있도록 어두움이라는 것으로 굳어져야 돼요. 어두움 안에 총 집결해야 돼요. 예수님은 빛에 집결해야 돼요. 예수님은 방주고, 저쪽은 물에 빠져도 할 말 없는.
그러니까 방주 역할도 마찬가지고 하나님의 언약이 뜨면, 언약이 뜨면 점잖은 사람들도 다른 것은 화를 안 내는데 십자가라든지 방주라든지 여기에 대해서는 그 사람들의 평소 인간성과 전혀 관계없이 분개하는 발작, 이게 증상인데요, 발작을 일으키는 트라우마가 있는 거예요.
인간들이 본인이 모르는 트라우마 그것, 평소에 있을 때는 좋아요. ‘우리 친구 아이가!’ 그런 사이라도 복음 전하면 트라우마, 갑자기 발작이 일어나게 되어 있어요. 속으로 여러분은 ‘짝짝짝!’ 하시기 바랍니다. “나는 이 노래를 돌아가신 아버지 이름으로 바치고 싶습니다.”라고 누가 하게 되면 초치기는 쉬워요.
“느그 아부지 어데 갔는데? 느그 아부지 지옥 갔는데!” 이 한마디만 하면 완전히 무대는 완전히 초치는 거예요. “느그 아부지 무슨 하늘에 있어? 지옥 갔어. 절에 갔는데 그럼 지옥 갔지 어딜 갔겠어?”
왜 그런 진실, 진실은 말하면 안 돼요. 진실은 말하면 안 되고 유발되어야 돼요. 진실은 터져 나와야 되지 내가 진실을 말하면 ‘너는 진실을 모르지? 나는 진실을 안다.’ 이게 자기의 어떤 승리감을 노리면서 ‘너는 이런 것도 모르지?’ 자랑질하려고 하시면 그것은 상대방에 대한 예의가 아닙니다.
3장 13절에 니고데모가 주님한테 욕 되게 얻어먹는데요. 뭘 몰랐느냐? 이걸 몰랐어요.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 그러니까 니고데모는 지평적으로 생각했어요. 좌표로 생각한 거예요. 주님께서 하늘로 올라간다는 말은, 예수님이 하늘로 올라가 버리면 이미 이 땅은 진리가 말씀의 완성이 예수님에게 독점되어 있지요.
그러면 예수님이 가는 곳에 땅이 따라가면 되는데 땅이 못 따라가고 예수님 홀로 보내버리면 땅은 그냥 자동적으로 뭐가 돼요? 지옥이 되어버리지요. 어둠이 되어버리는 겁니다. 이 땅에 착한 사람, 훌륭한 사람, 선한 사람, 남에게 희생한 사람, 굉장히 많아요.
그러나 예수님을 따라 붙이지 못한 그 이유 때문에 다 같이 어두운 자가 되는 겁니다. 헤겔이 그런 이야기 했지요. 밤에는 모든 소가 다 어둡다고. 맞지요, 그 말. 조명 없는 밤에는 소가 다 무슨 소다? 어두운 소예요. 똑같다 그 말이에요. 잘난 사람 못난 사람이 똑같다 그 말이지요.
빛이 없으면 다 같이 한통속으로 어두움으로 묶어낼 수가 있습니다. 하나의 집합화 시킬 수가 있어요. 하나의 바구니에 담을 수 있어요. 어두운 자식들의 집합, 그것은 주님께서 의도적으로 도발한 거지요. 살짝 담갔다가 살짝 올라가게 되면 졸지에 훌륭했던 이 세상은 어둠의 세계로 졸지에 변합니다. 그러면 세상 자체는 이미 심판받은 거예요. 이 세상 자체가 이미 심판받은 거예요. 어느 관점에서? 최종점의 관점에서 이미 심판받은 겁니다.
그러면 빛의 자녀인 여러분은……, 아~, 이 말 함부로 하면 안 되는데, 빛의 자녀인 여러분들은 어떻게 살면 됩니까? 신나게 살면 되지요, 신나게. ‘보자~, 오늘도 어떤 어두움의 종류가 있는가 보자.’ 이게 주님의 설명사건 안에 일부로 포함이 되어 있으면 어두움에 대해서 ‘참 가지가지 한다.’ 이렇게 살면 돼요.
그러면 뭐만 주의하면 돼요? 개선의 여지를 주지 마세요. 개, 돼지한테는 복음을 전하는 게 아닙니다. 김 돼지, 박 돼지, 최 돼지, 그냥 어두움이에요. 복음 전하면 발작하기 때문에 복음을 전할 수 있는 타이밍, 그것은 주님의 소관이기 때문에 제가 여기서 하고 싶은 말은, 복음 전하지 마세요. 복음 전하지 마세요.
그 이야기가 4장에 나옵니다. 4장 38절 “내가 너희로 노력지 아니한 것을 거두러 보내었노니” 자, 추수의 상황은 어떤 상황이냐? 어떤 요소가 필수요소입니까? 내가 전혀 노력하지 아니했다, 를 증거 하는 것이 바로 추수입니다. ‘나는 노력한 게 없다’ 가 반드시 살아있어야 돼요. 디테일하게 살아 있어야 돼요.
‘나는 노력한 적 없습니다. 어두움에 대해서 내가 아침부터……, 어두움이 어두움이지 주께서 일부러 어둡게 한 것에 대해서 내가 거기에 대해서 미련 두거나 아쉬운 것이 없다.’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사람이 어떤 사람이냐 하면, 이 사람이에요. 아쉬운 것 없는 사람, 제일 무서운 사람입니다.
이걸 흔히 길게 일곱 글자로 ‘재벌집 막내아들’ 아쉬운 것이 없어요. 재벌이 자기한테 상속분을 안 줘도 아쉽지 않아요. 송 중기. 왜? 비자금이 있기 때문에. 드라마를 뭘 봐야 이해가 되지요. 전혀 아쉬움이 없어요. 이미 받아 챙겼기 때문에.
그게 바로 사마리아 여인입니다. 전혀 아쉬운 것이 없어요. 사마리아 여인. 동네 사람들이 뭐라고 했습니까? “너 뭐 남자 다섯 명 사귀었다면서?” “나? 지금 목표가 열두 명이다.” 전혀……, 미모가 되어야 열두 명이지, 전혀 아쉬운 것이 없어요. 노력? 전혀 노력한 적 없어요. 왜? 빛과 어둠의 세계기 때문에.
“추수할 때이니 추수합시다.” 이건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어요, 교회가! 추수는 그렇게 하는 게 아니에요. 예배당 수백억 들여서 지어놓고 “자리가 비었으니 채웁시다. 추수합시다. 요한복음 4장에서 주께서 지시한 겁니다.” 주께서 지시한 것은 절대로 이루지 못하는 거예요. 주께서 지시했잖아요. 하지 마세요. 하지 마, 하지 마, 찍자 마, 하지 마! 십분 쉬기나 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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