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겨울수련회 요한복음강해 제 4강 : 육이 되신 영 - 이 근호 목사
네 번째 강의 시작하겠습니다. 세 번째 강의 제목은 부정성입니다. 인간은 바르게 사는 것이 아니라 ‘그냥 한다’입니다. 그냥 해요. 바르게 사는 게 아니고 ‘합니다.’ 이걸 활력이라 하든지 생동력이라 하든지, 이게 자아에요. 인간은 그냥 움직이고 생동하고 있어요. 움직이는 것을 가지고 주님께서는 그것을 살아 있다고 보지 않습니다. 그럼 뭐냐? 죽음이 움직인다고 하는 거예요. 죽음이 움직인다.
죽으면 못 움직인다는 것이 우리의 상식인데 죽음이 움직인다, 또는 죽음을 움직이게 한다. 마귀의 배후성, 뒤에 있다는 거지요, 마귀의 배후성을 살아나게 하기 위해서. 마귀가 활동하잖아요. 움직이잖아요. 움직인다, 이 말이지요. 마귀는 영이기 때문에 안 보이잖아요. 그 대신 인간은 움직이는 거예요.
인간을 움직이게 하려면 미끼가 있어야 되잖아요. 그 미끼가 뭐냐 하면, 육입니다. 육의 특징을 언급했는데 육은 내 쪽에서 어느 쪽으로? 내 쪽에서 절대적인 힘 쪽으로 접근해 나가는 거예요. 이게 육의 성향이에요. 육의 경향성, 성향.
이걸 누가 잘했느냐? 유대인들이 열심을 냈기 때문에, 유대인들이 했기 때문에 주님께서 유대인들에게 찾아온 거예요. 그들에게는 모세가 아무도 만날 수 없었던 하나님과 독대해서 건네받은 게 있어요. 그게 뭡니까? 율법이지요. 율법을 하나님이 건네준 것은, 너 죽었다고 알려주기 위해서 줬는데 건네받은 모세부터 전부 다 ‘이거 하면 살겠다’는 식으로 그걸 건네받은 거예요.
왜 그런가 하면, 뭘 빠뜨렸기 때문에 그러냐 하면, 율법 자체가 ‘부정성’에서 유발되었다는 사실을 몰라서 그래요. 이거 지키면 복 받는다, 에 신경 써서 이걸 못 지키면 뭐 받는다? 저주받고, 뿐만 아니고 네가 이 말씀대로 못살면 나는 너의 택함을 취소시키겠다는 사실을 몰랐던 거예요. 생명책의 이름조차도 지워버리겠다는 하나님의 그 엄중한 취지, 네가 이걸 못 지키면 생명책에서 지워버리겠다는 말은, 생명책에 있다가 지워져 버리는 샘플로써 너를 사용하겠다는 뜻이에요.
누가 게재되지 않았기 때문에? 완전한 부정성이 오기 전까지는 그 부정성은 임시적인 부정성, 가짜 부정성, 어설픈 부정성, 대충 부정성, ‘아, 이래서 망하는구나.’ 하는 것을 시범조로 보여주는 그러한 기능으로 이 이스라엘이 작용하는 겁니다. 그래서 어제 강의하면서 잠깐 언급했지만, 인간들의 빛과 어두움의 구분방법, 여러분, 기억나십니까? 제가 이사야 60장 19, 20절 인용했지요.
아버지가 자기 아들한테 밤에 대해서 설명하라니까 “밤은 어둡습니다.” 이렇게 한 거예요. 어제 한 것 다시 하면 이렇습니다. “밤이 뭐냐?” “밤이라 하는 것은 해가 져서 어두운 것이 밤입니다.” 그럴 때 복음을 아는 아버지가 “해가 져서 어둡다는 것을 알면 네가 빛의 세계로 올 수 있어?” 못 오잖아요. 빛의 세계에 못 들어오면 그것은 빛의 관점에서 새삼스럽게 빛과 어두움을 구분하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에요. 새삼스럽게.
빛은, 곧 이 땅에서의 해와 달과 별의 기능, 인간들이 생각하는 모든 개념정리, 개념정리라 하는 것은 어디서 나왔느냐 하면, ‘이름 붙이기’에서 나왔지요, 이름 붙이기. 이름 붙이기에서 다수의 사건을 끌어모으면 이게 하나의 개념으로 정리돼요. 개념으로 정리되는데 주님의 ‘최소값’은 뭐냐 하면, 언어가 도달할 수 없는 곳이에요.
인간의 이름 붙이기가 실패로 끝나는 그 지점부터 ‘최소값’이 되기 때문에 그 사실을 인간들이 모르니까 주님께서는 개념에다 공격하는 거예요. 주님께서는 부정성으로 공격해버리는 거예요. “네가 빛에 대해서 알아? 어둠에 대해서 알아? 구원에 대해서 알아? 세상이 뭔지를 알아?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할 때 그 세상이라는 개념을 네가 아나?” 그 말이에요.
그러면 인간들은 주섬주섬 “세상이란 우리 인간들이 모여 사는 이게 세상입니다.” 그건 세상이 아니라고 본 거예요. 주님 보기에 그게 세상이 아니지요. 세상은 주님의 부정성으로 동반해서 새롭게 주어지는 거예요. 부정성 관점에서 세상을 보는 것과 인간들이, 이 세상은 메시아를 고대하는 이 현실판이 세상이라고 하는 것과 세상 개념이 달라요.
요한복음 3장, 그 대목 여러분이 잘 아시는데 한 번 더 보면, 요한복음 3장 16절, 성경에서 제일 유명한 말씀이잖아요.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할 때 여기 멸망 나오지요. 심판개념이 나오지요.
이 심판개념이 18절 19절에 나오면 완전히 뒤집혀 버립니다. 뭐라고 되어 있느냐 하면, 18절에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벌써 심판을 받았지요. 그러면 심판은 뭐냐? 새삼스럽게 심판받는 게 아니고 애초부터 너는 심판받고 있었다는 것을 나중에 과거 완료 식으로 확인해주는 관점에서 독생자를 보낸 거예요.
독생자는 인간들이 믿지 못할 분이고, 그래서 주께서 하신 말씀이 “그래서 내 말이 맞잖아. 벌써 심판받았다는 그 환경이 맞잖아. 너는 부정성 속에서 탈출하지 못하는 것이 맞는 이야기”라는 거예요. 그러면 그 세상 개념은 어떻게 주님에 의해서 정리되는가?
요한복음 17장에 보면……, 이런 식으로 요한복음을 외워가는 거예요. 수련회 끝나면 전부 다 아는 겁니다. 혼자 아는 것인지 여러분도 아는 것인지 그것은 두고 보면 알 테지만, 여기 17장 9절에 보면 “내가 저희를 위하여 비옵나니 내가 비옵는 것은 세상을 위함이 아니요.” 세상을 위함이 아니지요?
요한복음 3장 16절 보세요. 내가 이 땅과, 이 세상을 그다음에 뭡니까? 이처럼 뭐하사? “사랑하사” 이것은 세상 전체, 세상 전체를 사랑한 것으로 되어 있지만 요한복음 17장 9절에 보면 세상 전체는 아니라는 거예요. 이건 뭐냐 하면, ‘육이란 전체성에 실패한 상태’가 육입니다. 전체성에 실패한 것. 세상을 전체로 볼 수 있는 안목이 없는 게 육이에요.
그러니까 어디로, 하나님께로 간다, 할 때 ‘네가 전체를 알고 네가 지금 방향을 제대로 잡았느냐, 안 잡았느냐?’가 인간은 모호한 거예요. 그래서 인간은 뭐냐? 그냥 갈 때까지 가보는 거예요. 갈 때까지 가보는 겁니다. ‘살다 보면 뭐 되겠지.’ 내일도 살지 안 살지 어떻게 장담해요? 내일도 살지 안 살지, 두 시간 뒤에 죽을지 살지, 인간이 무슨 권리로 그걸 주장합니까? 인간이 알고 있는 것은 지금껏 살아왔던 그 체인, 체인의 순간까지 뒤돌아보면서 아는 그 전부가 인간이 아는 거예요.
이 우주는 진화되었다고 주장하지요. 진화되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지금 거기까지 알기 때문에 진화되었다는 말을 끄집어내는 겁니다. 인간은 뭔가 바르게 사는 게 아닙니다. 인간이 ‘바르다’ 하는 개념은 전체성에 실패하기 때문에 뭐가 바른지 아닌지는 최종성을 모르기 때문에 그것은 잘못된 거예요.
인간은 꾸역꾸역 그냥 해요. 꾸역꾸역. 11월 되면 꾸역꾸역 김장해요. 배추 절여서 김장 속 꾸역꾸역 집어넣고, 동지 되면 꾸역꾸역 팥죽 해 먹고, 알갱이 동동 띄워서, 1월 말이면 설날이라고 뭔가 꾸역꾸역해요. 꾸역꾸역한다고요. 왜 하는데? 몰라. 그냥 몰라요.
그걸 뉴턴(Isaac Newton, 1642-1727)의 ‘관성의 법칙’이라 하는데 기껏 해왔기 때문에 그냥 하는 거예요. 그걸 좀 더 분석해 보면 왜 하느냐? 남들이 뭐라 하기 때문에 하는 거예요, 남들이. 남들이 뭐라 한다고 왜 하느냐? 남들이 인정하지 않으면 내가 죽은 존재기 때문에 그래요. 남들을 의식하는 그것이 나를 살게 하는 힘이에요.
그걸 유명한 사람은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그걸 가지고 ‘존재의 이유’라고 했어요. <존재의 이유> 이 노래에 나오는 유명한 나레이션이 있어요. 배경음악 죽 깔리면서 나오는데 이게 김종환의 <존재의 이유>입니다. “미안해 너를 힘들게 해서…….” 그다음에 나오는 말이, “조금만 기다려줘 내가 달려갈 테니.”
네가 있다는 것이 내게 ‘존재의 이유’가 되는 거예요, 존재의 이유. 참 대단한 존재의 이유입니다. 그런데, 달려가는데 여자가 다른 남자에게 가버렸다. 가까운 마포대교 준비되어 있습니다. 그것도 안 되거든 30만 원 보내라고 하든지. 뭐 그래서 여자는 30억 보내고 그런 것 있지요.
왜 20대 후반, 30대 초반의 김종환이 이런 이야기를 했느냐 하면, 이제야 말한다, 이제 밝혀졌지요. 뭐냐 하면, 체인이 짧아서 그래요, 체인이 짧아서. 좀 더 길게 가면 아무것도 아닌데 이게 짧아서 자기 하꼬방(판잣집)에 자기만 사는 거예요. 이웃집에 누구 다른 사람 만나서 사돈 맺으면 이게 커질 것인데 아직 그런 사건, 무한한 다수 속에 아직 그런 일을 안 맞닥뜨려서 그런 겁니다.
그래서 이걸 뭐라고 하느냐? 육. 육은 뭐라고 했어요? 전체성에 실패한 상태, 전체성에 실패한 상태에요. 자, 실패했으면……, 아까 했지요, 인간은 움직이는 것이다. 뭐가 움직인다 했습니까? 인간은 죽음을 움직여요. 요한복음의 말씀이 그렇게 만들어요. “말씀을 응하게 하려 함이라.”(요 18:9, 32) 너는 절대로 네가 알아서 고침받고 나한테 와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그것은, 네 최소값이 악마기 때문에 그래요. 너 따라오면 어디까지 따라와요? 너 따라오면 누가 딸려 들어옵니까? 악마가, 악마가 에덴동산에 또 살게 되는 그런 사단이 나요. 사단(사달)이 나서 사탄인가? 주께서는 생명 나무를 지키는 게 목적이에요. 인간 지키는 게 목적이 아닙니다. 인간은 가차 없이 차버려요. 생명 나무만 지키겠다, 주님만 지키겠다는 게 취지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자기 언급’이기 때문에. “너는 내 아들이다.”(막 1:11) 요한복음 1장에 그게 나옵니다. 이게 살짝 어려워요. 1장 34절, 주께서 성령을 누구한테 주는가? 성령을 누구한테 줘요? 예수님께 주지요. 줄 때 뭐냐? “내가 보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였노라 하니라.” 하나님의 아들이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은 하나님은 숨어있겠다는 거예요. 숨어있겠다. 들키지 않는 방법으로 하나님은 숨어 있겠다. 왜냐하면 인간들이 신을, 너무나 많은 신을 안다고 우기기 때문에 진짜 너희들이 전체성을……, 이런 것을 잘 들어놓으세요. 전체성 있잖아요, 전체성, 전체성을 인간은 추구하지요. 계속 무한한 다수에서 사건이 오게 되니까 그때마다 자기도 지켜야 되고, 발전해야 되고, 더 성장해야 되고, 그래야 자기 욕망을 그때그때 충족시킬 수 있기때문에 끊임없이 인간은 뭘 해요.
하면서 자기가 최선을, 어떤 선택을 하면서 바르게 산다고 우기잖아요. 전체성을 추구하는 거예요. 전체성을 추구하는데 그 전체성이 어디까지 닿느냐 하면, 신의 지혜까지, 그 전체성을 추구하면서 신의 지혜에까지 approach, 닿기 위해서 노력하는 거예요. 인간이 그렇게 전체성을 추구하잖아요.
추구하는데 그 가는 방향에 대해서 그들은 자기가 하는 것이 항상 진리+진리+진리+……, 숫자를 카운트하잖아요. 오늘도 바르게 했으니까 내일도 바르게 살기. 1) 어제도 바르게 살기 2) 오늘도 바르게 살기 3) 내일도 바르게 살기……, ‘1) + 2) + 3)……’ 이렇게 합치면 뭐가 된다? ‘바르게 살기’가 된다. 이게 인간의 산수에요. 항상 ‘최선의 길 + 최선의 길 = 최선의 길’
이게 수학 연산에서 ‘교환법칙’이라 합니다. 3+5=8, 5+3=8, 동일하다고 공리로 정해놓은 거예요. 이거 아무것도 아닌 것을 공리로 정해놓았지요. 다지고 또 다지고, 다지고 다져서, 이걸 해서 오류 없는 데서 계속 진리를 추구하겠다는 이게 뭐냐? mathematics, 수학입니다.
수학에서 나온 게 뭐냐? 과학이에요. 물리, 과학이에요. 수학에서 나왔어요. 수학 자체가 최소값, 이거 자체가 잘못되게 시작하니까 방향이 신(神)쪽으로 간다, 방향이 신인데 그 신이 어떤 분이냐? 수학에서 말하는 그 신은 뭐냐 하면, 무한한 분이라 하는 거예요, 무한한 분. 거기에 철학자들이 협조를 했어요. 선의 무한, 진리의 무한, 진선미.
아름다움의 무한, 아름다움의 무한이라는 것은 누가 여기에 끼어들었습니까? 예술가들이 여기에 끼어들었어요. 예술가와 윤리와 그리고 진리를 찾는 과학자들, 합쳐서 우리는 다 같이 힘을 합해서 무한한 세계로 달려가자. 그래서 로켓 만들어서 화성에 가자, 이런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의 아들이 오시면 어떻게 하는가? 여기에 초를 치는 거예요. 지금 인간들의 이 방향이 어디로 가느냐 하면, 이미 실패한 전체성으로 나아가는 방향입니다. 그러면 실패한 전체성, 전체성을 추구하면서도 이미 실패한 것으로 확정된 존재가 누구지요? 악마지요. 그래서 거꾸로 너의 아비는 악마로부터 너의 최소값이 시작된 거예요. 아브라함의 자손이 아니고 악마로부터 출발한 거예요, 악마로부터.
그러면 옳은 방향은 뭐냐? 옳은 방향은 하나님께서 성령을 주시는 분이 옳은 방향을 유일하게 제시하신 분이겠지요. 성령을 주신 분. 그러면 성령을 주셨다는 게 신기한 게 성령은 영이잖아요. 성령으로 왔다면, 영으로 왔다면 인간의 개념에 의하면 영은 보이지 않아야 돼요.
그런데 이것은 미치고 환장할 지경이에요. 영으로 왔는데 눈에 보여. 사지를 갖고 있고 코와 눈이 있어요. 영으로 왔는데. 보통 영이라 하면 뭐냐? 라면 끓이기 위해서 물 담긴 냄비 불에 올려놓으면 뭔가 펄펄 끓는데 눈에 안 보이지요. 그걸 영이라 하잖아요.
가끔 귀신영화 이런 데 보면 영은 가끔은 보여요, 가끔은. 동전이 있는데 막 움직여. 영화 “ghost”, 우리 말로 <사랑과 영혼, 1990> 그 영화에서 남자 배우, 병에 걸려 죽었는데 그건 중요한 것은 아니고요, 동전이 혼자서 움직여요. 그럴 때 사람들은 그 주위에 뭐가 있다? ‘귀신이 있고 영이 있다.’는 거예요.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보이는 것은 육이고 보이는 것 말고 따로 움직이는 어떤 힘이 있는 것을 영이라고 보는 겁니다. 인류 초창기의 영은 무엇이 담당했느냐 하면, 이게 담당했어요. 자석이 담당했어요. 맥스웰(James Clerk Maxwell, 1831-1879)이라는 19세기 말의 과학자가 나와서 이 자석이 무엇까지 담당하느냐? 공간까지 감당합니다.
이 공간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 ‘자기장’이라 해요, 자기장. 맥스웰의 법칙에 나옵니다. 자기장, 그다음에 전기까지 합해서 전자기장. 이게 합해서 뭐냐? 질량이 없는 빛의 광자가 영향력을 행사하는 장(Field), 이걸 공간이라 해서 공간은 비어있는 곳이 아니고 전자기로 꽉 차 있고, 나중에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 1879-1955)에 따르면 중력으로 차 있다고 나와요. 그래서 요새 양자물리학이 종교입니다.
육으로 설명할 수 없는 그걸 실험에서 뽑아내서 위치와 속도를 동시에 얻을 수 없다는 이론을 가지고 보이지 않는 능력까지 접수에 성공했다고 자부하는 세계, 새로운 종교로 등극한 거예요. 그래서 여러분 그 종교 알려면 공부 많이 해야 돼요. 수학도 해야 되고, 물리학 공부도 많이 해야 돼요. 그 종교의 교주는 아인슈타인입니다.
실제로 원자폭탄 만들었어요. 그런데 그걸로 배고프지요. 그래서 만든 게 수소폭탄이에요. 그다음에 그것 가지고도 배고프다고요. 그러면 이제 인공태양 만들지요. 어디까지 가는지는 그것은 인간은 몰라요. 다만 이 방향이 옳다는 것은 안다고 우기고 있습니다.
그렇게 가게 되면, 그러면 그들이 예수 믿습니까? 예수 받아들입니까? 예수님은 어떠한 공간을 마련했느냐 하면, 너희들이 아무리 접근해도 육이기 때문에 나에게 접근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영으로 오신 분이 뭐가 되었어요? 육이 되고 만 거예요.
육을 떠나서 영으로 간다. 그러니까 인간은 뭐로 되어 있다? ‘육신+영혼’으로 되어 있어서 육신은 죽고 영혼은 어디로 간다? 천국 간다는 이것이 바로 아까 이야기한 ‘개혁주의 신학’이잖아요. 이 개혁주의 신학이 바리새인 신학에서 나온 거잖아요. 구약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거예요. 해석해서 어쨌든 간에 아는 정보 다 끌어모아, 다 끌어모아서 하나님 계신 곳에 같이 합세하겠다는 그 시도.
그런데 그 전체성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최종성에 도달하지 않으면 전체를 보는 눈이 빈약하고 이것은 그 방향이 옳은지도 확인할 수 있는 길이 없지요. 확인할 길이 없어요. 잘못되게 가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주님께서 “그럴 필요 없다. 내가 일거에, 한꺼번에 너희들의 실상을 보여주마. 내가 눈에 보이지?” “보입니다.” “내가 바로 영이야.” 이렇게 된 겁니다.
이걸 누가 알아챘겠습니까? 알아챈 사람이 있어요. 요한복음 1장에 나옵니다. 1장 48절에 보면 나다나엘이라는 사람이 나옵니다. 나씨 집안인데 예수님께서 먼저 다가갑니다. 항상 원칙이 있어요. 예수님은 육이지요. 육인데 영의 요소가 있습니다. 육은 인간 쪽에서 다가가는 것, 그런데 영의 특징은 어떻게 합니까? 하나님 쪽에서 다가오는 게 영이에요.
그래서 성령 받았다는 말은, 쉬지도 않고 계속해서 몇 초, 몇 분, 한시도 쉬지 않고 계속해서 누가 다가온다? 아버지 쪽에서, 하나님 쪽에서 계속 다가오는 쪽이 바로 영에 속한 사람입니다. 왜 그렇게 하느냐? 다시 자아를 구축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다시 자아를 구축하지 못하도록.
지금 방금 나다나엘 이야기를 했지요. 나다나엘 이야기하기 전에 이것부터 먼저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인간은 정신병자인 것을 증명한 사람이 있어요. 닫히지 않는 의식, 닫히지 않는 이 의식을 가지고 세자로 ‘무의식’이라고 합니다. 무의식, 닫히지 않는 것, 인간의 의식이 닫혀버리면 이게 뭐가 되느냐 하면, 이게 ‘나’가 돼요.
그런데 인간의 의식이 닫히지 않으면 나는 뭘 요청하는가? 타자를, 남을, 타인을 요청해요. “불렀습니까?” 이런 식으로, “저 찾았습니까?” 이런 식으로 하는 겁니다. 그러면 ‘나’라 하는 것은 항상 뭐가 되느냐 하면, 그 타인 앞에서 다 충족되지 못한 부정성을 드러내는 거예요.
이게 바로 주체인데요. 알튀세르(Louis Althusser, 1918~1990)라는 학자가 그런 이야기를 했어요. 여러분이 길을 갈 때 경찰이 “어이, 당신!” 하고 부를 때 자기 이름이 ‘어이’ 입니까? 아니지요. 그냥 “어이!” 할 때 ‘어이? 나는 어씨가 아닌데’ 하고 그냥 갈 사람이 누가 있어요? 없지요. 경찰 제복 입은 사람이 “당신 잠깐 봅시다.” 할 때 그냥 갈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이게 뭐냐 하면, 누가 호명해주는 순간 내가 보이지 않는 권력체제에 이미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는 겁니다. 인간은 그걸 가지고 주체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주체. 예를 들어 학생들이 자기들끼리 점심시간에 놀아요. 도시락 먹고, 책상을 밀기도 하면서 놀고 있는데 그때 갑자기 교무실에 있어야 될 담임선생님이 문 스스륵, 열어요.
그냥 여는 것도 아니고 스르륵, 열어요. 스르륵 열고 나타났을 때 애들이 하던 행동 계속 합니까, 갑자기 정숙 됩니까? 정숙 되지요. 본인도 모르게 담임선생님과 종속된 권력 관계가 이미 형성되어 있는 순간입니다. 그게 바로 타인이 먼저 있고 그 타인의 권력 관계에 매여 있는 것을 주체라고 이야기해요, 주체.
주체에서 벗어나는 것은 언제 벗어나느냐? 죽으면 돼요. 이 말은, 죽기 전까지는 인간은 타인을 의식하면서 살아갑니다. 왜? 나의 의식은 나로 종결되지 않기 때문에. 다 닫히지 않고 끊임없이 내가 원하는 것을 누가 갖고 있는가, 하는데 남이 갖고 있어요, 남이.
남이 갖고 있으니까 이게 닫히면, 닫아 놓으면 안 되지요. 열어제쳐서 ‘나 당신같이 되고 싶습니다.’ 하는 것을 계속해서 염원하는 거예요. ‘여러분, 이런 것 되고 싶지요? <재벌 집 막내아들>’ 이런 식의 드라마가 인기가 있는 거예요, 드라마가.
그래서 드라마 <도깨비> 이런 게 인기 있는 것이 다 뭐냐? ‘당신은 이런 사람 원하고 있잖아요.’ 차라리 공유를 안 봤으면 다행인데 봤다 이 말이지요. 자기가 송혜교를 안 봤으면 괜찮은데 봤거든요. <글로리아>인가 뭔가 본 게 문제에요.
하여튼 인간은 끊임없이 ‘뭐 한다’ 했어요. 바르게 산다고 했어요, 뭐라고 했어요? 뭘 해요. 하는데 무한히 떠도는 모든 사건들이 나를 가만두지 않고 계속 쑤셔 넣어요. 방송으로, 유-튜브로 계속 쑤셔 넣는다고요. 그러면 ‘나는 저것 갖고 싶어. 저건 내거, 내거 하고 싶어.’ 자기가 ‘톡파원’도 아닌 게. <톡파원 25시>라는 프로가 있어요. 맨날 내거, 내거, 하는 프로예요. ‘저거 내거! 이거 내거! 나 노력해야 돼.’ 삶의 추진력을 제공합니다.
애들, 자기 자식이 그런 것이 있으면 뭔가 이상해 보여요. 끊임없이 “엄마, 이거 사줘. 아빠, 이거 사 줘.” 할 때 그거 불평하지 마세요. 정상입니다. 드디어 사회의 주체인으로 거듭나는 순간들이에요. ‘네가 사회에 나갈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구나. 그래 나가라! 어깨에 비상의 날개를 펴고 가라! 내가, 아버지가 못다 한 한을 네가 이뤄야지.’ 이 닫히지 않는 것, 닫히지 않는 이것이 우리를 지시합니다.
(무의식, agent) 요구자.
닫히지 않는 것, 그걸 명령자 또는 요구자, 이게 무의식장소, 이 무의식장소에서 뭔가 자꾸 나한테 요구를 해요. 이걸 agent라 합니다. 요구를 하게 되면 여기서 고분고분 따라 해야 되겠지요, 예, 예! 하고. 이걸 수행자라 합니다.
(무의식, agent) 요구자(S1) → 수행자(S2)
이 자리가 우리의 자리입니다, 수행자. 뭔가 타인이 나에게 요구를 하게 되면 수행을 해요. 하게 되면 여기서 뭐가 나오느냐? 결과를 내야되지 않습니까? 결과를 내야 남에게 인정을 받으니까요. “그것도 못하냐?” 아주 듣기 싫지요. “그것도 못하냐? 너 그것 밖에 못 해?” 그러면 갑자기 긍정적인 나의 최소값에 뭐가 스며듭니까? 부정이 스며들기 때문에 내 속의 악마가 가만두지 않아요.
내가 이만큼 값어치 올리려고 애를 썼는데 지금 졸지에 너를 만나서 나는 인간도 아니고, 이것은 내가 용납을 못 하지요. 강렬하게 뭔가 성과, 결과를 내야지요.
(무의식, agent) 요구자(S1) → 수행자(S2) → 결과(A)
이 결과를 내는데 이 결과가 요구자에 부응이 될 겁니까, 안됩니까? 결과를 내자마자 이게 미흡해요. 그러니까 이것은 뭐냐? 실패지요.
(무의식, agent) 요구자(S1) → 수행자(S2) → 결과(A)→실패자($)→ 요구자(S1)→
실패자인데 가만있습니까? 실패자 되었으니까 다시 뭘 찾아요? 요구자에게 찾아가는 것, 완전히 돌고 도는, 의식에서 무의식으로, 무의식이 의식화되고 다시 무의식으로 돌아가고, 돌고 도는 이 회전목마 같은 세계, 이것이 세상입니다.
종교, 기독교, 불교, 다 의미 없어요. 이겁니다. 이게 현실 그대로예요. 이 결과를 내기 위해서 교회에서 기도하고 여러 가지 다 해도 다 코디에 불과하거든요. 피자 위에 있는 코팅에 불과해요. 아무것도, 아무것도 아니에요. 결국은 이겁니다. 요구하는 거예요. 내 자식만큼은 어떻게 해 달라, 내 아들만큼은, 우리 딸만큼은 40되기 전에 시집가게 해달라 이런 것, 시집가면 애 낳게 해달라, 애 낳으면 내가 안 키우고 시가에서 키우게 하옵소서 이런 것, 이 나이에 나도 좀 쉬렵니다, 이런 것.
자식 잘되어서 엄마 용돈 쓰라고 한 달에 2천만 원씩 주고, 이런 것을 은근히 기대하고 있지요. 이게 뭐냐 하면, 이걸 라캉이라는 사람은 요구자를 S1이라고 하고, 수행자를 S2라고 하고, 결과 이걸 A라 하고, 이 실패한 것은 주체 S에 빗금을 쳐서 $,이렇게 했는데 이게 라캉의 잘못이에요. 빗금을 치지 말고 이렇게 해야 돼요. 완전히 ×를 쳐버려야 돼요.
주님께서 이 육의 세계에서 뺑뺑이 돌도록 만든 것은 인간으로 하여금 네가 죽음의 대행자라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입니다. 죽음은 영과 합체될 수 없어요. 그래서 아무리 깨닫게 되어도 깨닫지 못해야 돼요. 그걸 받아들여야 돼요. 예수님의 십자가, 아버지께 저주받은 그 저주받음을 이제는 내 의식세계 속에 그걸 받아들여야 돼요. 그게 ‘네가 깨닫지 못하게 함이라’는 그 말씀 자체가 우리의 핵심말씀으로 우리한테 꽂혀야 돼요. 그게 꽂혀야 된다고요. 오뎅꽂이처럼 너의 일생을 꽤뚫어야 돼요.
그러면 세례는 뭐냐? 세례는 바로 예수님의 죽으심에 통합된 것이 세례에요. 왜? 예수님 자체가 영이기 때문에, 그분의 죽음이 바로 영의 세계의 구현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내가 나를 모르게 방해했잖아요. 그러면 주의 방법은 뭐냐? 진짜 나를 알게 하기 위해서는 방해물인 나를 주께서는 성령세례로 제거해버리고, 진짜 피조물이 피조물다운, 창조주를 증거하기 위한 용도로 사용하는 진짜 피조물의 원래의 자리로 되돌아가기 위해서 주께서는 성령세례를 먼저 받으신 겁니다.
성령세례 받고 난 뒤에는 육과는 어떻게 돼요? 완전히 육과는 대화가 통할 수가 없지요. 그런데 요한복음 1장에 보면 나다나엘 나오는데 여기서 그의 반응을 보세요. 48절 “나다나엘이 가로되” 그다음에 나오는 부사 나오지요. 한국말로 뭐라고 되어 있어요? “어떻게?” 예상했다, 안 했다? 예상 못 했어요.
다시 동그라미 안에서 체인을 그려 봅시다. 체인을 그리는데 최소값에서 시작해서 예상하고, 기대하고, 목표하고, 1년 새 계획 세우고, 가계부 쓰고, 이런저런 준비 다 하겠지요. 그런데 ‘어떻게’라는 말은 어떤 경우예요? 자기가 예상했던 여기에 무한에서 이것과 닮을 수 있는, 합치할 수 있는 어떤 것을 예상했는데 어떻게 됩니까?
‘WHAT!! 어떻게! 어떻게 이런 일이?’ 갑자기 어떤 다른 유력한 집과 사돈 맺은 게 아니고 누구하고 사돈 맺은 거예요? 예수님이 여기에 다가온 거예요. 육은 찾아가지만 영은 어떻게 된다? 다가오시는 겁니다. 다가와서 이 전체를 뭐로 만든다? ‘어떻게’ 라는 말을 한 것은 ‘지금까지 내가 예상한 것을 어떻게 일거에 무산시켜주십니까? 어떻게 나로 하여금 내가 생각한 내 인생이 가짜라는 것을 들통 내게 해주십니까? 세상에 이렇게 고마울 데가!’
이때 주인, 주체가 바뀝니다. 나의 주체는 주님이에요. 주님이 주인공이고 나는 주님의 호명자가 돼요. ‘주께서 가라 하면 가고 오라 하면 오나이다.’ 이게 바뀌는 거예요. 그런데 이것이 뭐냐 하면, 우발적입니다. 그걸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사건이라고 하는 거예요, 사건.
사건의 특징은 뭐냐? 있다가도 사라지는 게 특징이에요. 따라서 사건 받았으니까 이 사건을 받아서 자아로 만들 생각하지 마세요. 이것은 가짜에요. 어제 했잖아요. 여기 이런 연쇄(chain) 있는데 여기에 6. 25때 폭탄 맞았다고 부흥회에 써먹는 사람, 이것은 지금 계속 우려 먹는 거예요. 자기가 홍자도 아니고요, 홍자라는 사람이 있어요, 곰탕 우리듯이 우려먹는 것 이것 하면 안 돼요.
그때는 그때고, ‘그때는 맞지만 지금은 틀리고’ 이런 거예요. 그래서 늘 상 ‘어떻게?’ 또 계속해서 ‘어떻게?’ 이렇게 되었으면 좋겠지만 인간 세상은 계속 부정성이 유발되어야 주님의 긍정이 드러나기 때문에 ‘하나님, 이렇게 은혜받아서 감사합니다.’ 이러면 이 감사가 계속 어느 정도 가면서 뭐로, 질적으로 바뀌어요. 이게 주님에게 열리지 않고 닫혀버립니다. ‘내가 구원받은 것이 이때를 위함이다.’ 해서 갑자기 내가 구원받은 자가 되어버려요. 내가 선택된 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것은 안 돼요. 선택이라 하는 것은 모든 무한이 끝났을 때 최종적으로 알아가는게 선택이거든요. 무한한 사건, 이 다수의 사건. 그래서 선택이라 하는 것은 그 모든 선택이 다 끊임없이 끝나 봐야 되는데 미리 말씀드리는 결론이 뭐냐? 선택은 주님 자신이 아버지께 선택받는 게 선택의 끝이에요.
그러니까 나를 위한 선택은 애초부터 없었던 겁니다. 주님의 선택을 알리기 위해서 임시방편적으로 우리에게 선택이 제공된 거예요. 마치 세례요한의 기능처럼, 세례요한의 기능처럼! 갈수록 지금 강의가 어려워져요. 쉽게 한다고 했는데 자꾸 어려워지네요.
자, 나다나엘, 나씨 집안 봅시다. “어떻게 저를 아십니까?” 하는 거예요. 이 순간, 어제 했던 멘트, 그 문장을 다시 쓰겠습니다. 어제 잘 쓰려고 했는데 잉크가 다 떨어져서 흐리게 써지고 말았는데요. 나는 나를……, 정신 바짝 차려야 돼요. “나는 나를 선택하지 않겠다, 나는 나에게 자기 언급, 재귀(再歸), 언급하지 않겠다, 나는 나를 내 요소로 집어넣지 않겠다.”
나가 있으면 나를 집합으로 할 때는 내가 등장하거든요. 나에서 나를 언급해서 나를 집합할 때(나 → {나}) 이것을 가지고 뭐냐? 유일자, 독보적인 나가 되는 거예요, 독보적인 나. 그래서 여기 나가 있으니까 숫자로 ‘나1’이 되고, 또 ‘나2’가 되겠지요. 결과적으로 이 ‘나2’는 동일하면서도 동일하지 않은 이걸 가지고 쌍둥이라 해요, 쌍둥이.
그래서 인간들의 최종적인 의식은 뭐냐? 내가 나한테 질문해요. “거울아, 거울아! 이 세상에서 누가 제일 예쁘냐?” 내가 나한테 질문하고 답변하고. 나 홀로 살기에요. 지리산에 들어가 가지고. 꼭 지리산 들어가야 지리산입니까? 자기 집 방구석에 앉았어도 지리산 아닙니까? 내가 나한테 질문하고 스스로 위로하고, 스스로 격려하고 ‘잘~ 될거야’ 스스로 칭찬하고, 치하하고, 위로하고.
내가 나한테 이야기해요. ‘나 너만 한 친구 없고, 진짜 사랑하는 나는 나야.’라고 하는 것, 이게 바로 내가 나한테 이름을 붙이고 그 이름을 내 충실성, ‘믿습니다’ 하는 것, 이게 인간들의 최종성입니다. 갇혀 있는 구조, 나로 갇혀 있는 구조.
그런데 나다나엘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 갇혀 있는 구조가 완전히 빵꾸난 거지요. ‘어떻게 나를 아십니까, 내가 나만 챙긴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았습니까?’ 이것은 외부에서 와서 나의 내부에 들어가는 것, 외부에서, 외재성이라는 어려운 말도 있는데 외부성이 내 내부성에 자리 잡을 때 나는 껍데기가 됩니다.
나는 껍데기가 되는데 무거운 껍데기가 아니라 아주 가벼운 껍데기, 이걸 저는 설교에서 뭐라고 했느냐 하면, 나는 표면, 표면에 지나지 않는다는 겁니다. surface에요. 표면에 지나지 않아요. 표면의 두께는 몇 센티? 몇 밀리? 0밀리. 하나의 표면이니까. 표면이라는 말을 알기 쉽게 하면 하나의 두께 없는 이미지나 형상을 그림자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나는 주님의 그림자, 그게 바로 성도입니다. 두께를 줄여서 육을 하나의 그림자로 전환 시켜 버려요. 그림자로 전환 시키면……, 만화영화에 그런 것이 있잖아요. 생쥐가 나오는 만화영화인데 주인이 보니까 어, 쟁반이 바닥에서 알아서 막 움직이는 거예요. 가만 보니 밑에 생쥐 두 마리가 들어가서 움직이고 있었던 거예요.
예수님께서 육(surface)을 가지고 오셨지만 세례요한한테 물 세례받을 때 성령세례 받으시고 누가 주도적으로 예수님을 행하게 하셨습니까? 성령이지요. 예수님 모델과 똑같은 모델로 주께서는 천국 백성을 만든 것을 가지고 요한복음 1장 12절에 ‘권세’라 했어요, 권세.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 권세는 주님이 갖고 성령세례를 통해서 이 땅에 가져온 거예요.
이 권세 어떻게 얻었느냐? 부정적으로 이야기해요. 이것은 혈통으로 난 것도 아니고, 육으로, 육적으로 난 것도 아니고, 사람의 뜻으로 난 것도 아니고, 그다음에 뭐라고 했어요? “오직 하나님께로 난 자” 그걸 가지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거예요. 하나님의 아들.
아버지를 숨기는 자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거예요. 아버지를 숨기는 자. 본인이 숨기는 것이 아니고 주님이 알아서 숨겨요. 왜? 육으로 찾아오는 것을 차단시키기 위해서. 창세기 3장 24절에 하나님께서 인간을 내쫓았잖아요. “마귀와 함께 살림 잘 살아라. 마귀와 함께 잘 먹고 잘살아라.” 쫓아냈다 이 말이에요.
그런데 인간은 마귀를 벗어버리고, 마귀를 떼 놓고 ‘제가 홀로 왔습니다.’가 될 수가 없어요. 인간이 가는 모든 행함 뒤에는 마귀가 따라오게 되어 있어요. 마귀가 최소값이니까 따라오게 되어있다고요. 그러니까 인간을 차단한다는 것은, 마귀가 천국에 못 오도록 막는 그런 하나님의 대의, 큰 뜻이 있었던 거예요, 큰 뜻.
그게 뭐냐 하면, 하나님 생각은 전체성이에요. “마귀야 오지 말라.” 요한복음 3장 한 번 보겠습니다. 이러다 보면 다 외우는 거예요. 3장 31절 “위로부터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고 땅에서 난 이는 땅에 속하여 땅에 속한 것을 말하느니라.” 땅에 속한 것을 말하기 때문에 언어로 통하는 개념 형성은 안 됩니다.
말한다는 것은 언어잖아요. 인간의 언어는 땅으로 국한돼요. 하늘까지 확장할 수 있는 의미를 인간이 제시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되어있지요. 그다음에 요한복음 6장 63절이요,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요한복음 8장 23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는 아래서 났고 나는” 어디서 났다? “위에서 났으며”
위에서 났다. 막혀 있다. 닫혀 있다. 믿지 마라. 찍지 마라, 에요. “날 믿을 생각하지 마.” 나를 믿고자 하는 것도……, 하나님의 말씀, 요한복음 12장에서 읽은 말씀이지요, 38-40절 “이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가로되 주여 우리에게 들은 바를 누가 믿었으며 주의 팔이 뉘게 나타났나이까 하였더라 저희가 능히 믿지 못한 것은 이 까닭이니 곧 이사야가 다시 일렀으되 저희 눈을 멀게 하시고 저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셨으니 이는 저희로 하여금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깨닫고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하였음이더라.”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뜻은, ‘너희가 스스로 고쳐지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원치 않는다.’ 너희는 그냥 어디로 끝나야 된다? 부정성은 부정성으로 마감하는 것이 너희 할 도리다 그 말이에요. 그래서 주님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왔다. 그 죄의 수준, 죄의 바닥, 주께서 성령께서 고이 모실 것입니다. 보람상조처럼 가시는 길 잘 모실 거예요. 여러분들의 죄의 세계까지.
그래서 이번에 새 책 나오는데 머리말이 그거예요. 친절, 친절하신 하나님, 우리를 구원하지 않는 그 친절하신 하나님, 우리를 구원해주지 않는 그 친절하신 하나님, 우리를, 나를 없애고 하나의 껍질로만 사용해주시는 것, 내가 너에게 필요한 것은 그림자만 필요하고 그 표피만 필요합니다. “그 안은 내가 채울 게.” 역시 만두는 속 맛이야. 속이 꽉 찬 남자, 하는 것 있지요. 속이 꽉 찬 남자.
자, 나다나엘은 속을 뭘 로 채웁니까? 주의 일로 꽉 채워요. 나다나엘은 껍데기고 ‘야, 나는 구원 받았다.’ 그런 인간 사용 안 합니다. 껍질만 사용해요. 나다나엘은 껍데기 층위로, 바깥으로 보여주기 위함이에요. 성령, 영인데 뭐로 보여준다? 남들 보기에 육으로, 철저하게 육으로만 보여야 돼요.
따라서 철저하게 육의 모습으로만 다뤄지고 있습니다. 여기서 신비 같은 것 뭐 그런 것 없어요. 예수님은 밥 안 잡숴도 배부르고 이런 것 없습니다. 철저하게 육이어야 돼요. 예수님은 잠도 안 주무시고……, 아니에요. 꼭 주무셔야 돼요. 예수님 감기걸렸다. 판콜A 들어가야 됩니다. 왜냐? 엄마가 마리아니까, 육이니까요. 철저하게 육이어야 돼요.
그러니까 어딜 봐서 영이냐? 티나지 않아야 돼요. 어딜 봐서? 그러니까 영이 없는 사람의 특징이 뭐냐? 계속 영의 것을 가지고 도입한다는 특징이 있어요. 갑자기 뭐 벌벌 떨고 진동이 오면서 진도 3.5 지진이 일어난 듯이 벌벌 떨면서 쭈여, 쭈여, 하고요. 갑자기 이상한 소리 내면서 믿씁니다, 믿씁니다, 하면서 변신을 시도하는 것, 얼마나 믿음이 없으면요, 그렇게 스스로 자기에게 미쳐버릴까요?
그게 스크린에 대한 자기 공여, 자기 연출이에요. 자기발악입니다. 그 자기발악을 보면서 ‘바로 저 체인이, 저게 우리의 진짜 내 모습이었다.’라고 과거시제로 사용해주시기 바랍니다. 식사하러 갈 시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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