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십자가마을겨울수련회 제1강-요한복음: 타인의 마을-접점
(강의:이근호 목사)
시작하겠습니다.
우리가 시작한 일이 되지 않고 주께서 시작한 일이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주의 말씀을 대합니다. 우리 있기 전에 먼저 계셨던 그 말씀, 우리는 피동적으로 그 말씀이 우리 속까지 흡수되고 빨아 당겨지는 그러한 귀한 시간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요한복음 핵심 구절부터 먼저 적어보겠습니다. 요한복음 10장 20절, “그 중에 많은 사람이 말하되 저가 귀신 들려 미쳤거늘 어찌하여 그 말을 듣느냐“ 이게 핵심구절 중에 제가 뽑아봤습니다. 여기서 제가 주목하고 싶은 것은 이겁니다. ‘많은 사람들’ 이들이 누구냐 하는 거예요. 많은 사람들의 특징은 그들의 생각이 일치되었다는 거죠. 그들은 굉장히 양식이 있고 상식적이고 서로가 납득이 되는 사람들이에요.
그다음에 요한복음 19장 15절, “없이 하소서” 예수님을 재판할 때 빌라도가 사람들에게 의견을 물었어요. 이 사람을 어떻게 했으면 좋겠습니다, 할 때 여기 많은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없애버리세요. 저 존재를 없애버리라고 한 거예요. 누가요? 많은 사람들이. 대다수의 양식 있는 사람들, 배운 사람들이 내린 결론은 없애버리란 거예요.
그러면 오늘날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그때 그 당시 사람이나 오늘날 사람이나 별 차이 없는데 그 사람들이 생각하기를 저분은 아무 쓸데없는 데 없애버리세요, 하는 자를 예수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이 등장한 겁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 시대 현장에서 없애버려도 전혀 상관없는 무관한 있으면 도리어 손해가 되는 그런 사람이 누구냐 하면 바로 예수란 분이죠.
어떻게 후대에 가서 많은 사람들이 없애버리지 않고 꼭 있어야 될 분이라고 이렇게 인식이 된다는 것은 여기 분명히 뭔가 잘못됐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그 당시 사람들은 예수님을 없애버려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사람들은 예수님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면 이거는 거의 오늘날 사람들이 믿는 예수님은 가짜라는 결론에 도달될 수 있습니다.
그 시대 현장에서는 없애도 아무 삶에 지장이 없는데 오늘날 왜 예수를 찾느냐 말이죠. 그것은 다른 예수, 가짜 예수를 거론하기 때문에 그럴 가능성이 많아요. 특히 소수의 사람들이 없애버리세요, 이러면 그것은 다수의 의견이 아니기 때문에 진리라고 받아들이기 곤란해, 우리가 이렇게 할 수 있는데 많은 사람들, 심지어 대다수, 사실은 대다수보다 숫자가 더 많지요. 그냥 다가 없이 하소서, 라고 한 거예요.
여기에 대해서 제가 마지막으로 뽑은 구절, 요한복음 20장 17절. 여기게 대해서 예수님은 어떻게 대처했느냐? “나를 만지지 말라” 너희들이 만질 대상이 안 된다는 겁니다. 이렇게 세 가지를 연결시키면 많은 사람들 그들의 평가에 의하면 예수란 분은 있으나마나 한 꼭 없애야 될 대상이다.
거기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나를 믿어야 돼, 내가 너희에게 필요하단 말이야. 너희들에게 나 없이는 안 돼.” 이렇게 이야기하시는 것이 아니고 뭐라고 이야기하느냐 하면, “만지지 마! 너희들이 어딜 감히 나를 만져.” 이걸 누구에게 이야기하느냐 하면 제자들 보고 이야기한 거예요. 스승님, 스승님 하고 따르는 제자들을 향하여 “만지지 마. 너희들은 만질 쨉이 안 돼.” 그렇게 언급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건 뭐냐? 이렇게 보시면 됩니다. 의도적으로 오셔서 의도적으로 인간을 기피하시는 분. 의도적으로 오셔서 인간으로 하여금 기피 대상이 됨으로써 예수님께서 얻고자하는 게 뭐냐? 이렇게 주께서 인간과 거리를 띄우면서 뭘 얻고자 하느냐? 절대로 아무도 나를 믿어서는 안 된다는 거예요.
“그 누구도 나를 믿어서는 안 된다.” 아무도 나를 믿지 말라는, “나를 믿어서는 안 돼. 나를 믿고자 하지 마!” 그 이유가 뭐냐 하면 바로 모든 인간은 어디에 소속되어 있느냐? ‘많은’에 소속되기 때문에. 많다는 것은 대다수란 뜻이에요. 거의 모든 사람의 대표 격이 많다는 거예요. 많은 사람이 예수님에 대해서 뭐 들렸다? 귀신 들려서 미쳤다. 혼자 나댄다는 그런 뜻이죠.
그러니까 인간 쪽에선 예수님을 떠밀고 천대하고, 예수님은 이런 결과를 낳는 것을 기대하면서 내가 왔다는 겁니다. 그러면 결국 요한복음 전체가 하나의 이게 돼요. ‘해프닝[happening]’이 되는 거예요. 해프닝이란 말은 뭐 있는 줄 알았는데 아무것도 아니네, 이런 뜻이에요. 해프닝이란 말 자체는 어떤 우발적인 단순한 사고, 사태 또는 이벤트? 이벤트는 아니죠. 이벤트는 인간이 벌이는 거니까. 그냥 예상 못하게 터져버린 하나의 불길한 사고 또는 사태, 사건 이렇게 볼 수 있습니다.
해프닝으로 끝났다는 것은 내 그럴 줄 알았어, 별 일 아니었어, 하고 그냥 쉬쉬하고 넘어가는 거죠. 거대한 태평양에 돌 하나 던진다고 거기서 뭐 큰일 나는 것 아니잖아요. 뭐 풍덩 하네? 가보니까 다시 잔잔해. 그럴 줄 알았어. 그게 바로 해프닝이라 하는 거예요. 그래서 주님께서 의도적으로 자신을 숨기기 위해서 해프닝을 벌였다면 인간 쪽에서 매 같은 독수리 같은 시선으로 그걸 포착할 수 있는 인간이 있느냐? 없습니다. 인간은 그걸 포착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여러 번 말씀드립니다만 인간은 ‘많은’ 이란 숫자에서 많다는 것에서 단독으로 벗어날 수 있는 위인들이 아무도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네가 옳다면 그리고 다수가 옳다면 나도 옳다고 인정해줄 게, 같이 묻어가는 게 인간입니다. 이게 실제 요한복음에 나오는 이야기에요. 그래서 요한복음에서는 이러한 구절들을 군데군데 집어넣어서 요한복음 자체가 하나의 반복을 해버리면 해프닝의 반복이 되거든요.
쉽게 말해서 교회 와서 기도하면 응답받을 줄 알았다, 라고 해서 교회에 끈질기게 한 오 년 다녔는데 세상살이 바쁘다보니 교회 다녀서 은혜 받았다는 것은 그때 순진무구한 철딱서니 없이 하나님께 뭔가 얻어 챙길 게 있는가 싶어서 가본 거다. 혹시나 했는데 역시로 끝났다. 이렇게 하나의 해프닝으로 간주해서 물러서도록 요한복음이 유도하고 있는 거예요. 요한복음 말씀 자체가 해프닝으로 계속 반복되게 하시니까요.
그래서 요한복음은 21장으로 돼 있는데 21장에 들어가게 되면 예수님은 하나의 해프닝이었다는 것을 제자들이 증명해주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고기 잡으러 갔기 때문에. 여섯 명인가(21:2,3) 이렇게 고기 잡으러 가요. 역시 우리의 본래 아무 일 없는 것처럼 우리가 잠시 예수님 만나고 삼 년 동안 뭔가 하늘나라가 오고 메시아를 만났다는 그러한 경험을 하나의 몽상 꿈처럼 간주하고 원래 우리 자리 있잖아. 원대복귀하자, 그렇게 생각하는 겁니다.
이걸 그림으로 그리면 예수님께서 하늘에서 오셔서 예수님은 원대복귀하고, 인간들은 예수님을 붙잡았다, 붙잡았다 했는데 실패하고 다시 고기 잡으러 가는 거예요. 고기 잡으러 간 사람이 몇 명이냐 하면 열두 명인데 나중엔 열두 명 되지도 않아요. 한 쪽은 배신하고 노골적으로 배신하고. 열두 명이 배신한 게 아니고 한 명이 배신했지요. 한 명이 배신했는데 나머지 열한 명이 같이 예수님을 버립니다.
그러면 열두 제자의 대표자가 누굽니까? 가룟 유다죠. 하나 배신하니까 나머지……. 11:1로 밀어붙이자. 아니에요. 그러면 우리도 이참에 묻어가지 뭐. 올라갔는데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럼 여기서 뭐가 되느냐? 만남이 실패로 끝납니다. 요한복음은 육에서 시도하는 모든 것을 실패로 돌린다. 육에서 시작한 모든 것이 실패지요. 육에서 시도한 실패, 이게 영의 소스, 영의 재료가 돼요.
육에서 실패한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거듭나는 소스가 돼요. 재료가 돼요. 실패가 없으면 성령께서 일하지 않습니다. 충분하게 실패가 될 때, 그러니까 인간 쪽에서 시도한 모든 것이 실패가 될 때 비로소 예수님의 정체가 드디어 드러나게 돼 있어요. 하늘과 땅은 만나지 않는다. 끊어졌다, 라는 사실을 여기서 규정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요한복음 1장에서 보게 되면 태초에 뭐가 있다 했습니까? 태초에 말씀이 있거든요. 태초에, 처음 여기서 말씀이 시작됐고, 태초에 말씀이 있다고 돼 있지요. 이번 강의가 어려운 게 있다, 많다 이 점이 굉장히 난해하지만 제가 쉽게 하려고 노력은 할게요.
태초에 말씀이 있다 이 말이죠. 태초 그다음에 말씀이 있어요, 없어요? 있지요. 있으니까 있는 거잖아요. 있음이 이전에 있었다는 거예요. 성경에. 그러니까 있는 것이 있지요. 있으니까 첫 번째 있음, 두 번째 있음, 두 번째가 있으니까 세 번째도 있겠지요. 그럼 계속해서 요한복음 1장까지 오는 거예요. 그럼 여기가 뭐가 되느냐? 여기는 구약시대가 되겠지요. 구약시대부터 말씀이 있어 온 거예요.
그러면 요한복음 1장에서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은 지금도 뭐가 있단 말이에요? 지금도 태초도 있지만 태초부터 줄곧 이어져 온 거예요. 그러면 이렇습니다. 태초가 있는 데 태초를 하나의 풍선으로 보자. 태초에 있는 내용이 발사하는 거예요. 부웅~ 태초가 있기 때문에 거기서 나오는 모든 것들이 태초의 연속성 또는 태초의 연장으로 계속 있는 겁니다.
있으니까 여기 있음의 의미를 알려 하면 어디로 돌아가야 하느냐 하면 태초로 돌아가야 합니다. 태초에 있는 것과 지금의 있음이 일치되는지 동일한가를 요한복음이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러면 제가 아까 설명한 것처럼 인간과 예수님 사이에 접점 되지 않지요. 그럼 처음부터 피조물과 창조주는 접점이 있었다, 없다? 접점이 없는 겁니다. 접점이 있을 수 없어요. 접점이 없는데 그걸 요한복음은 증명하는 거예요.
아까 많다는 이야기했잖아요. 사람들의 많다는 것은 어디서 나왔는가? 창세기 2장 19절에 보게 되면 이런 말씀 있는데 같이 봅시다.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어떻게” 그다음에 뭘 합니까? 이름 짓지요. 아담이 이름을 짓는데 이름의 대상이 뭐냐 하면 있음이에요. 피조물이죠. 개구리, 코끼리, 노루, 사슴, 코스모스 전부 다 돼요. 이들이 있다는 거예요.
아담이 이름을 지은 거예요. 그러면 아담은 무엇과 함께 있느냐? 아담이 있는 것과 독수리 있는 것과 차이점은 아담이 있을 때 무엇과 함께 있느냐 하면 아담이 이름을 지은 주인이다. 이름을 지었다는 것과 아담이 함께 있고, 독수리나 개구리 이쪽에선 이름을 지음 받은 것과 함께 있는 거예요.
갑자기 이름을 왜 강조하느냐? 아담이 이름 짓고 난 뒤에 범죄 하지 않았으면, 아담이란 이름은 누가 지었습니까? 하나님이 지었으니까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는, 아담이 피조물의 이름을 지음으로서 그 피조물은 아담에게 복속되는 거예요. 이름 지었기 때문에. 이름을 지음 받은 그 개구리는 자기 이름을 준 인간에게 예속되고 지배당하고 명령받는 입장에서 이름을 지음 받은 거예요.
그래서 여러분들이 잘 아시다시피 창세기 1장에 보면 다스리고 정복하라(28절) 그걸 누구한테 맡겼습니까? 뱀한테 했습니까? 독수리 보고 안 했지요. 사자 보고 안 했지요. 사람 보고 한 거예요. 이름을 지음으로서 예속되고 복속된다면 아담의 이름은 누가 지었습니까? 하나님이 지었기 때문에 인간은 하나님에게 자기가 이름 지은 똑같은 방식으로 예속되고 복속되는 거예요. 그 이름이 주어진 운명 밖으로 벗어날 수 없는 겁니다. 지금 태초부터 나온 말씀 내용입니다.
그런데 오늘 주일학교에서 했지만 여기서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선악을 알게 하는 그 나무의 과실은 따먹지 말라고 이야기했어요. 부정성입니다. 예를 들면 여기 계세요, 또는 물건을 거기다 올려놓으시면 안 됩니다. 보통 낯선 곳에 갔을 때 주의사항 같은 게 있잖아요. 그게 그 안에 뭐가 들어 있느냐 하면 부정성이 들어 있어요.
SRT나 그런 데 보면 승무원들이 신발 벗지 마세요, 해요. 냄새 나니까. 마스크 쓰세요. 자, 모든 명령 가운데 뭐가 들어 있어요? 이럴 경우엔 허락이 되지만 이럴 경우는 안 됩니다, 라고 한계를 지어주는 거죠. 한계를 지어줘야 지시가 지시 값을 해요. 명령이 명령 값을 한다고요.
그런데 마귀의 심정을 이해해 보세요. 우리가 마귀의 심정을 어떻게 이해하는가? 그건 쉽지요. 전부 다 마귀니까. 모든 것이 마귀의 심정이니까 쉽단 말이죠. 마귀 심정은 뭐냐 하면 ‘감히(dare)’ 네가 뭔데 나한테 명령을 해? 이게 마귀 심정이에요. 내가 하겠다는 데 내 돈을 내가 쓰겠다는 데 네가 감히 어디 여기서 부정성을 가지고 지적 질이야, 이렇게 나오지요. 이게 마귀의 심정입니다.
오늘 주일학교에서 한 것처럼 하면 로봇 안에다 아예 마귀 엔진을 장착시켜버려요. 두뇌와 심장에다 장착하면 껍데기는 인간인데 속에는 마귀, 그렇게 되는 거예요. 그러면 악마가 인간에게 위협하기 전에 악마의 마음을 먼저 생각해보세요. 악마는 뭘 아느냐 하면 하나님께서 따먹지 말라는 명령을 너무나 잘 알고 있어요. 만약에 하나님께서 저 선악과 따먹으라 했다면 악마는 어떻게 나오겠습니까? 따먹지 마, 이랬을 거예요. 왜냐? 하나님의 지시 안에 들어가 버리면 악마의 독자적인 자기 것이 없어요.
벌써 어려운 표정을 하는데 제가 말하는 건 뭐냐, 이거에요. 인간은 무로 돌아갈 수 없다. 이게 인간에게 가장 골칫거리에요. 인간은 원래 자리로 돌아갈 수 없다. 원래 자리라 돌아가려면 인간이 범죄 해야 돼요. 원래 자리로 돌아가는 것은 하나님께서 돌아가게 해주셔야 돼요. 언제? 인간이 범죄 했을 때.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라” 할 경우에만 원래 자리로 돌아가요.
그러니까 인간이 원래 자리로 돌아갈 때는 폭삭 망하거나 저주 받을 경우나 돌아가지 그렇지 않으면 인간은 절대로 원래 자리로 돌아가지 못합니다. 악마가 인간을 유혹을 할 때는 하나님 제치고 여기서 여기까지는 하나님의 지시가 따먹지 마라에요. 따먹지 마라가 여기서는 따먹어도 된다는 새로 구분 짓는 겁니다. 말로 하니까 어려워서 제가 답답해서 그림으로 그리겠어요.
원이 있는데 원에 어떤 선이 오니까 이걸 수학에선 접선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중간에 통과하는 것을 할선이라 하는데 할선이란 말은 안 쓰기 때문에 지우겠습니다. 그냥 접선이에요. 이거는 접점이 두 개 있고, 이거는 한 개 있지요. 이건 두 개 있고 이건 한 개 있고, 그런 겁니다.
지금 요한복음에서는 분명히 인간이 자기가 존재한다, 있다는 거예요. 아까 있다는 건 알지요. 태초에 말씀이 있으니까 있는 거예요. 태초에 말씀이 있으니까 피조세계가 있는 거예요. 있는 것을 요한복음은 뭐냐 하면 접점이 안 된다 했지요. 접점이 안 되는 식으로 와버렸다는 것은 끊어버리는 거예요. 끊어버리게 되면 조각조각 나겠지요.
조각조각 나면 인간은 어디로 돌아갑니까? 원래 뭐로 돌아갔다? 아예 있음이 뭐로 돌아가는 거예요? 아예 없음으로 돌아가는 거예요. 이게 복음입니다. 이게 요한복음이에요. 쉽게 말해서 진짜 쉽게 말하는 겁니다. 인간은 없습니다. 요한복음에서 있음이라 하는 것은 예수님만 있지 인간은 없는 거예요. 잠시 있다가 없어지는 걸 있다고 하지 말자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 있는데 왜 없다 하느냐? 우리가 있다고 하는 것은 인간들끼리 많은 다수가 그렇게 주장하는 거예요. 그 다수가 어디서 나온 사고방식인지 규명하는 거예요. 요한복음을 통해서. 많은 사람들이 저 사람은 귀신 들렸다 우리가 그 말을 왜 듣느냐, 할 때 그 많은 사람들이 말하는 그 많다는 것 도대체 어디서 나온 많음이냐. 많다는 건 일단 있잖아요. 그런데 하나님의 뜻은 없다, 에요. 인간은 있다는 겁니다. 누구 말이 맞아요?
지금 누구 말이 맞는 겁니까? 인간이 나름대로 있으니까 있는 것을 계속 있기 위해서 힘쓰고 애쓰고 스트레스 받고 온갖 노력 다하고 비굴한 짓, 더러운 짓, 아부하는 짓 다하는 거예요. 왜? 내가 스스로 자살해도 안 돼요. 있음을 없애는 방법이 없어요. 괴롭다고 자살한다고 있다가 없어지는 게 아닙니다.
얼마나 요한복음이 지독하지요. 요한복음 5장에 보면 “죽었어? 네가 지금 죽었다고 피했다고 생각해? 내가 죽은 너희들 살려낼 거야.” 요한복음 5장에 보면 무덤에 있는 자들로 다 나오라 해요. 그러니까 무덤에 간 사람이 우크라이나 전쟁에 갔다가 러시아 미사일 맞고 산산조각 났어요. 그냥 흙이 됐어요. 흙이 됐는데 주님께서 “어이, 흙 된 상병 나오라.” 흙이 된 상병이 주 앞에 심판 받기 위해서 다시 나와야 돼요.
요한복음에 의하면 죽은 자나 선한 자나 악한 자나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그의 보이스, 세례요한은 보이스입니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듣게 되면 그는 심판대 앞에 설 것이다. 그래서 이것을 주께서 끝까지 밟을 거야. 내가 끝까지 다 밟는다. “네가 기분 나빠? 그것은 네가 인간으로 태어났다는 그 자체가 너한테는 참 불운이었다.” 인간으로 태어난 게 불운이에요. 안 태어났으면 심판도 안 받을 건데.
그래서 주님께서 없는데 너희들 왜 있지? 인간들은 주께서 만들지 않았습니까? 나는 너 같은 인간들 만들지 않았다. 대화가 연결이 안 되는 거예요. 네가 만든 것은 내가 만든 게 아니야. 네가 있다고 하는 것은 육으로 있는 거야. 내가 만든 것은 영으로 있는 걸 만들었지 육으로 있는 걸 만들지 않았어, 라고 하나님께서 계속해서 밟아나가는 겁니다.
이게 지금 원으로 돼 있는데 온 우주를 제가 원으로 표현했고요. 이 원 안에 갖가지의 연쇄 고리가 있어요. chain이라 하는데 지금 원으로 돼 있지만 이 안에 이런 사태의 곡선이 있을 거고, 이런 것도 있었을 거고, 이런 것도 있었을 거예요. 이게 하나하나가 체인인데 이건 뭐냐? 내 인생 여력, 내 인생 경력, 내 인생사. 내가 어디서 뭘 하며 살았는지 이게 연결시켜보는 거예요. 이렇게 연결.
이걸 수학으로 공식화하면 y=x²이에요. y=x³ 이렇게 돼서 여기는 3 있고 2 있다면 y=(x-2)(x-3)² 이렇게 표현이 돼요. 어쨌든 간에 이렇게 꼬물, 꼬물, 꼬물 있단 말이죠. 있는데 인간은 이게 자기 인생이잖아요. 자기 인생만 다독거리고 간직하고 챙기고 내 인생 내가 산다 하니까 제가 이걸 빨간 걸로 하겠습니다.
원 안에 자기만의 고유 인생, 고유 영역을 동그라미로 표현하는 거예요. 동그라미로 표현하게 되면 전체를 이렇게 와서 잘라버리는 그 하나님의 말씀이 작은 원도 안 자를까요? 와서 자르지요. 자를 때에 어디서 통과하느냐를 이걸 상세히 보게 되면 여기 2차 방정식에선 이렇게 통과(수직선)할 수 있단 말이죠. 이렇게 통과(수평선)할 수도 있고. 칼날처럼 쫙쫙, 쫙쫙 어쨌든 간에 살벌한 킬빌의 칼날처럼 그냥 조각조각 나면서 마주침이 있지요.
이 마주침이 뭐냐 하면 이게 바로 복음입니다. 내가 아무리 해도 우리는 내가 없앨 수 없어요. 내가 죽는다는 것은 내게 있을 수 없습니다. 내게 일어날 수 없어요. 그럼 나는 내 힘으로 내를 없애거나 죽을 수가 없으니까 주님이 와서 주님의 원초적인 사건으로 해서 원래 내가 있던 자리에, 그 자리가 한자로 하면 무슨 자리가 되겠어요? 원래 있던 자리 한자 한 자로 하면 뭐가 되겠습니까? 無지요, 무. 없음이죠. 사람이 자살하고 죽어도 없어지질 않아요. 이거는 저주입니다. 무와 만나야 돼요. 무와 만나서 태초의 처음의 무에서 다시 유가 되는 있음이 되는 그것과의 만남이에요. 그게 복음이에요.
그러면 이게 복음이란 근거가 어디 있느냐? 바로 모든 인간이 하나님이기 때문에 할 수 있고 인간은 못하는 그 경유를 밟았습니다. 누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사람들이 밀쳐서 예수님을 죽였잖아요. 아까 귀신 들렸다, 죽였잖아요. 죽였는데 사람들 보기에는 그냥 일개 많은 사람들 중에 한 인간이 그냥 일반적인 정치범으로 죽었다, 이렇게 돼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나의 죽음은 말씀에 응하게 함이라. 갑자기 태초에 있는 말씀과 연결시켜버립니다. 말씀대로 하게 하옵소서. 말씀에 응하게 함이라. 내 옷을 나눈 것도 말씀대로 이루어진다. 그러니까 2장에서 유일하게 말씀으로 오셔서 말씀으로 죽으신 분은 예수님밖에 없기 때문에 그분만이 창조전의 상태, 태초의 상태로 돌아가서 죄 없던 상태로 다시 유가 될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기쁜 소식이라는 거예요.
자, 그렇다면 인간도 무, 없다가 있다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지 않느냐? 그게 안 돼요. 왜 안 되느냐 하면 인간이,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이게 없던 곳에서 우리가 있다, 이렇게 이야기하고 싶은데 이야기할 때는 여기서 반드시 근거가 있어야 돼요. 우리는 없던 데서 있습니다. 특히 창조과학 하는 사람도 이런 이야기해요. 그리고 유신론적 철학도 이런 것 해요. 없던 데서 있습니다, 라고 이야기하는데 왜 이게 거짓말이냐 하면 없던 것이라고 누가 이야기하느냐? 내가 이야기하죠.
이게 얼마나 모순인지 인간이, 우리는 없던 곳에서부터 시작했습니다, 라는 말을 있는 인간이 이야기한 거예요. 그러니 이 말에 속아 넘어가면 안 된다 이 말이죠. 우주가 진화가 되어서 인간이 출현했다. 진화론에서 이렇게 이야기하잖아요. 우주가 147억 년 전이죠, 과학에서. 지구는 56억 년이고.
147억 년 전에 우주가 빅뱅으로 시작해서 진화가 되어서 오늘날 인간이 출현했다, 라고 주장할 때 이게 왜 말이 안 되느냐 하면 인간이 출현했다, 라는 그 말을 하기 위하여 인간이 출현했다는 그 존재가 등장하기 위해서 진화는 인간에게 어떤 일을 행할 수 있느냐에 대한 정답이 없습니다. 지금 무슨 말인지 아시겠어요? 가만히 생각해보세요.
최종성에 도달할 때까지 뭐든지 계속 인간은 발달한다. 얼른 보면 맞는 말 같지요. 그런데 최종성이 발달한다는 그 인간이 그 말을 하기 위한 인간을 출현하기 위해서 이 우주는 있다는 말이거든요. 있어왔다는 말이죠. 그걸 자연이 증명할 수 있습니까? 여러분 제가 질문 의도가 뭐냐 하면 모든 인간들 생각이 자기 위주에요.
자기 위주란 뭔 뜻입니까? 이건 악마의 심성이에요. 독자적으로 나를 위해서 이 우주가 진화되었다는 거예요. 마지막에 우주는 진화되었다는 그 말을 할 수 있는 인물이 등장하기 위해서 태초부터 그렇게 아팠는가보다. <국화 옆에서>처럼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그렇게 애를 썼는가보다, 이런 소리밖에 안 되는 거예요.
우주는 진화되었다. 그게 우주야, 라는 말을 하는 인간을 등장시키기 위해서 이 대자연이 그 인간을 위해서 만들어졌습니까, 그걸 증명해보라고. 무슨 근거로 그렇게 주장합니까? 인간 지가 뭔데? 인간들은 말은 안 하지요. 우리가 신이거든요, 차마 이 악마의 심보는 말을 못해요. 그게 뭐냐? ‘많은’이에요. 모든 인간이 다 거기에 복속돼 있어요. 다 예속돼 있어요. 못 빠져나가요. 뭐 예수를 믿어요. 예수든 하나님이든 자기를 위해서 믿고 있는데.
요한복음 19장 15절에서 본디오 빌라도가 예수님을 어떻게 할까, 할 때 아까 했지요. 없애버리세요. 없애버린다는 그것에 다수가 동의했던 거예요. 반대한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었어요. 만약에 여러분들이 그 현장에 있다면 반대하시겠습니까? 반대를 할 수 없어요.
왜 반대할 수 없느냐 하면 인간은 자기 의견이란 게 없고 많은 사람들, 다수에 같이 속해 있기 때문에 남들이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 모방하면서 마치 내 생각인양 끄집어내는 것이 사회 생활하는 인간의 처세술입니다. 베드로도 마찬가지였고요. 예수님을 세 번씩 배신했고요, 나 저 사람 저주한다고 배신해버린 거예요.
인간은 무, 무를 뭐라고 하느냐? 공백, 빈자리라 하는 거예요. 인간은 창세기 2장 19절에 뭐한다 했습니까? 이름 짓지요. 이름을 지으면 무는 공백이 있게 돼요. 공백(∅)에다 이름 짓는 순간 {∅} 이걸 숫자로 1이라 하는 거예요. {∅}=1 괄호{ } 이걸 영어로 set, 우리말로 하면 집합이라 합니다. 공{ }을 집합화{∅} 시키면 그게 1이 돼요. {∅} 여기서 세트를 더하면{{∅}}=2가 되고, 세트 하나 더하면 {{{∅}}}=3이 돼버려요.
그게 이름 짓기에요. 숫자 짓기입니다. 숫자가 아무리 무한이고 대단하다 할 때라도 이름 짓는 주인공이 누굽니까? 본인이죠. 본인을 없앨 수가 없어요. 이미 이름 짓는 상태에서 범죄 했기 때문에 이름을 안 지은 상태가 아니라 이름을 짓는 상태에서 악마와 결탁해서 범죄 했기 때문에 다시 원래의 자리로 되돌아갈 수 있는 길은 완전히 차단되고 말았어요. 처음의 창조로 돌아갈 수 있는 길은 없습니다. 원래 나를 잃어버렸어요.
원래 나를 잃어버렸으니까 좋으나 싫으나 누구와 짝짜꿍 될 수밖에 없는가 하면 바로 마귀와 함께 살 수밖에 없는 겁니다. 마귀가 만든 예수, 마귀가 만든 삼위일체를 계속 교회에서 그걸 신학이란 이름으로 끄집어내는 거예요. 전부 다 마귀가 만들어낸 그런 개념들이고 단어들이에요. 어떤 신학, 삼위일체, 신앙고백 그 고백해서 자기를 잃어버린 적 있습니까?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이것 해서 없어져요? 주기도문 외운다고 없어집니까? 주기도문 외우면서 지금 주기도문이 반 지나갔다 마지막 두 절 남았다, 그걸 누가 의식합니까? 본인이 의식하고 있는 거예요. 그리고 끝나고 난 뒤에 나 오늘 주기도문 외웠다. 어쩌라고? 마귀가 잘했어, 잘했어. 그게 성도다운 모습이지, 이렇게 격려를 해주네. 누가? 많은 사람들이.
없음을 있음에서 아이디어 끄집어내서 없음으로 해서 없음과 있음을 이어주는 데 여기다가 없는 데다 이름을 지어서 있다고 이야기하는 아이디어를 인간이 갖고 있는 거예요. 있지요. 그럼 여기서 그걸 어떻게 하느냐? 그걸 해요. 행렬로 만들어요. 행렬로 만들면 아까 원 안에서 이런 게 생겨요. chain이 생겨요. 미생물 실험실에 꼬물꼬물한 그것처럼.
하나님 보시기에 이렇게 돼 있지요. 이거 김 집사, 최 집사. 어디서 뭘 하는지 어떻게 살았는지 전부 다 꼬물꼬물 자기의 내러티브, 자기의 인생사를 연결시키고 있습니다. 나는 이렇게 왔다. 너는 그렇게 왔나? 난 이렇게 왔다, 이렇게 왔다. 이 특징이 행렬을 지으면서 1에서 2에서 3에서 모든 걸 하나의 체인 화시켜요. 연결 화시킵니다.
자기 인생사를 자기가 갖고 있을 때 연결시키는 걸 뭐냐? 기억이라 하고 기억을 자아라 하는 거예요. 자아란 없는 거예요. 자아는 없고요 두뇌라는 소프트웨어에요. 늙어가는 죽어가는 몸은 있는데 자아는 없어요. 없는데 나라고 했던 것은 어디서 나오느냐? 이거는 내가 하는 것이 아니고, 오늘 교재 제목이 뭡니까? [타인의 마을]
남들이 다가왔을 때 나는 비로소 뭐가 생기느냐? 자아가 아니고 주체가 발생됩니다. subject라 하는데 주체라는 것이 있어요. 주체는 나 혼자 만들어내는 게 아닙니다. 주체를 만드는 방법은 <백설 공주> 동화책에 잘 나와요. 마음씨 나쁜 고약한 후처로 온 왕비가 거울을 보고 한 이야기 있지요. 그거 굉장히 중요한 거예요. 거울아, 거울아. 자, 거울 안에 누가 있습니까? 본인이 있어요. 본인이 만든 조형물이에요.
내가 나를 아는 방법은 없어요. 없는데 거울에 비친 모습이, 저 모습이 나라고 생각하는 그것은 개인적인 그걸 이미지라 하는데 어려운 말로 하면 상상이라 하는데, 그 개인적인 이미지를 마치 나처럼 그렇게 일단은 간주하고 가보는 거예요. 누구와 대화하느냐? 그 이미지는 나중에 사회에 나가면 그 이미지가 타인으로 바뀌어요. 내가 이렇다 하는 것이 다른 사람이 수정해줍니다. 그 수정해주는 대표 격이 누구냐 하면 집에 있는 아버지와 어머니죠.
그냥 얼굴 비친 것은 영상만 비추지요. 내가 마음씨 나쁜지 좋은지 내가 착한지 안 착한지는 누가 결정하느냐? 주위에 있는 사람들 지시와 명령에 의해서 우리는 다듬어지고 있는 거예요. 다듬어지고 있으니까 아버지가 있을 때는 아버지 말 듣다가 현장에 없으면 다시 아버지 없는 상태의 자기로 돌아가지요. 그러면 아버지가 와서 “이리 와봐. 장난감 치우라 했어, 안 했어? 빨리 치워!” 빨리 치우지요.”
비로소 아이는 안심을 느끼는 겁니다. 왜? 아버지가 있음으로 본래 주체로 돌아갈 수 있는 기회를 주신 아버지에 대해서 감사하지요. 그래서 무럭무럭 자랍니다. 뭐도 자라는지 알아요? 기린 그림에 키 재려고 줄 그어놓지요. 줄을 그으면서 자기가 이만큼 자랐다는 것을 커서 돌아보게 되면 내가 세 살 때, 네 살 때 자라나듯이 이거는 육체만 그런 것이 아니고 우리의 마음도 과거의 일기장 보면서 내가 이만큼 자라났다.
본인이 자라난 게 아니고 본인의 아버지가 원하는 아들 상에 점점 더 합치되는 대로 자라났겠지요. 그러면 나는 타인의 사람이 돼요. 영원히 나는 내가 누구냐는 것은 묻히고 마는 겁니다. 인간은 본래의 자기로 되돌아갈 수 없어요. 그럼 아버지 죽으면 어떻게 하느냐? 아버지가 만든 나기 때문에 아버지기 끝까지 책임지라고 해서 아버지 앞에 제사 드리죠.
왜? 나는 아버지 집에 막내아들이기 때문에. 물론 상속도 한 푼 못 받지만. 나는 영원히 아버지 품을 못 벗어나는 거예요. 그러면 아버지는 이미 돌아가셨잖아요. 하지만 아버지를 벗겨버리면 내가 없어지기 때문에 나는 4대째 기독교 집안, 이런 것 있잖아요. 그게 하늘나라에 통합니까? 택도 없는 소리죠. 그 택도 없는 소리 이뿐만 아닙니다. 그건 10분 뒤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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