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십자가마을겨울수련회 제2강-요한복음: 타인의 마을-최소값
(강의:이근호 목사)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아까 계속해서 이어하겠습니다. 나라는 것은, 자아라 하면 어려워요. 그냥 ‘나’에요. 내가 나라는 것을 인식할 필요 없어요. 남이 다가왔을 때 타인이 다가올 때 어떻게 다가오느냐 하면 ‘요구’로 다가와요. 말을 한다는 것은 나에게 뭔가를 요구한다는 뜻이에요. 이것은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는 것도 따먹지 않는 요구를 하시는 거예요.
악마가 이것 때문에 인간과 손잡고 탈피하자, 라고 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악마는 나이고 싶어 했어요. 악마는 모든 시작을 나가 시작점이 되고 싶어 한 거예요. 모든 의미의 시작을 나로부터 출발한 거예요. 그래서 세상이 무에서 유가 없는 데서 있게 되었다는 말을 내가 하고 싶어 한 거예요.
그렇게 이름 짓고 내가 하고 싶고 그걸 숫자로 매기고 하는 그 가운데서 이 세상은 없는 데서 있었다. 심지어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이게 어려운데 무에서 유로 됐는데 그 가운데 나도 포함된다고 이야기를 해버려요. 이걸 가지고 자기 언급이라 해요. 자기가 자기한테 언급하는 거예요. 나도 없는 데서 생겼다, 라는 말은 내가 출발점이 되어서 이야기하고 싶은 거예요.
그러면 내가 출발점 하는 게 나한테 무슨 이익이 있냐? 타인의 요구를 차단할 수 있기 때문에 그래요. 반박하고 돼 칠 수 있기 때문에 그래요. 당신이 어떤 요구를 하던 판정은 내가 들을 만하면 듣고, 안 그러면 안 듣겠다고 내가 내칠 수 있는 최종적인 근거를 나에게 두는 거예요, 나에게.
주님께선 이런 인간을 모든 인간이 그래요. 아까 처음에 많다, 많은 인간이 그렇거든요. 예수님이 무슨 말을 했기에 그들은 예수님을 싫어했습니까? 그 당시 사람들이. 오늘날은 교회에서 무슨 소리를 하기에 사람들이 예수를 안 싫어하고 있습니까? 그걸 알아야 돼요. 요한복음 15장을 건성건성 보셨다면 이참에 제대로 봅시다. 요한복음 15장 24절 이렇게 돼 있어요. “내가 아무도 못한 일을 저희 중에서 하지 아니하였다면 저희가 죄 없었으려니와 지금은 저희가 나와 및 내 아버지를 보았고 또 미워하였도다”
쉽게 말해서 “내가 너희 앞에 타자로 등장하지 않았으면 너희들은 죄가 없다.” 죄가 없지요. 왜? 자기들끼리 무슨 죄가 됩니까. 자기들끼리 여호와를 섬기고 자기들끼리 이 땅은 봐라. 창세기에 아무것도 없는 데서 창조했다. 자기들끼리 말하는 데 그게 뭐가 죄가 돼요. 오히려 정답이지요. 세상은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태초에 하나님께서 빛이 있으라 하매 빛이 있었다. 이게 땡이에요, 이게 정답 아닌 진리 아닌 거예요? 저희들끼린 진리가 되는 거예요. 왜? 그 당시는 유대인이니까. 어릴 때부터 성경공부를 달달 시키는 데니까.
지금 예수님이 어디한테 왔습니까? 이슬람, 그 당시는 이슬람 있지도 않았고. 불교신자한테 갔어요? 힌두교한테 갔어요? 그 당시에 누구보다도 하나님께 열심이었고 하나님을 잘 섬긴다 하는 자들 속에 들어간 겁니다. 예수님께서 열세 번째 사도로서 사도 바울을 찾아갈 때 사도가 예수님 만나기 위해서 간절히 골방기도하고 있었어요? 아니지요. 하나님께 충성된 예라 해서 여호와 하나님을 위해서 열심히 활동했던 그때 예수님이 찾아갔던 겁니다.
그래서 사울이란 사람에게 예수님이 찾아가지 않았더라면 사울은 의인 중의 의인이고 그야말로 율법으로 흠이 없는 사람이에요. 유대인들에게 주님이 찾아가지 않았더라면 그들이 자체적으로 의의 체제가 완벽하게 갖춰졌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딱 오는 순간 바로 요한복음 15장 이런 말씀 했다는 것은 결국은 너희들은 그냥 그대로 있어. 가만히 있어 내가 다 해줄게. 그런 노래 있어요. <둥지>(너는 그냥 가만히 있어 다 내가 해 줄게)
가만있으면 너희들은 뭐가 되느냐? 그냥 죄인이에요. 가만있거나 설치거나 그냥 죄인이에요. 그래서 아까 접점이 안 된다 했어요, 접점이. 주님이 오심으로써 숨겨져 있는 독생자가 옴으로써 비로소 그들이 독생자에 대해서 아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에 대해서 그들은 헛돌고 있었던 거예요. 하나님 나라도 모르고 갈 수도 없으면서 간다고 우겼던 겁니다.
그 사실을 그들에게 버림받음으로서 확정시킨 거예요. 예수님께서 증명해내신 겁니다. 너희들은 원래 하나님이 만드신 그 인간 종류가 아니라는, 다시 말해서 너희는 인간 아니다. 하나님이 생각한 그 인간 아니에요. 예수님께서 인간들이 타인을 통해서 자기를 구성하거든요. 그런데 인간이 만든 타인이란 것은 또래거든요. 그렇고 그런 자들의 집단입니다.
어린아이가 크면서 점점 육체는 작고 머리는 커지면서 주위의 요구사항이 많아요. 부모님 또는 랍비들, 스승, 교회 목사, 신부 전부 다 요구사항들이 많아요. 그걸 부응함으로써 남들이 너는 이러이러하다 그들이 요구하는 내가 되는 것, 이걸 주체라 하는 겁니다. 그래서 이 주체는 남들이 나에게 나를 인정해주는 그 사람이 떠나버리면 주체도 같이 죽어버려요.
주일 낮에도 그런 이야기했습니다만 사람이 죽는다는 것은 죽음의 고통이라 하는 것은 죽기 5초 전 안 아파요. 4초 전에도 안 아픕니다. 인간의 죽음의 고통은 없어요. 왜? 죽으면 죽으니까 고통도 없는 거니까. 진짜 인간의 고통은 주체 때문에 아파요. 남들이 나를 무시할까봐, 남들이 나를 사람으로 인정하지 않을까봐, 남들이 내 집안과 나의 모든 것을 한꺼번에 모독할까봐 그래서 그들은 무서워하는 겁니다.
그 무서운 일을 누가 하느냐? 우리 주님이 하신 거예요. 그 뿌리조차 부정해버립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8장에 보면 자기 아버지를 거론해요. 너희 아비는 악마다. 요한복음 8장에 나오는 말씀이에요. 이 말은 악마의 확장이 너희들이란 뜻이죠. 여기 요한복음 8장 43절, “어찌하여 내 말을 깨닫지 못하느냐 이는 내 말을 들을 줄 알지 못함이로다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예수님께서 이렇게 요구를 했잖아요. 유대인에 새로운 타인으로 예수님이 왔을 때 그들은 뭐라고 하느냐 하면 극구 내가 뭔데 당신을 죽여, 라고 했거든요. 그런데 주의 말씀대로 그들은 결국 예수님을 죽이게끔 돼 있어요. 안 죽이고자 안 죽이고자 했는데 기어이 결국 나를 죽여라, 죽여라 해서 죽이는 거예요, 예수님을.
요한복음 7장 20절에 보면, “무리가 대답하되 당신은 귀신이 들렸도다 누가 당신을 죽이려 하나이까” 주님의 답변은 이겁니다. 너희들은 그렇게 극구 부정해도 너희들은 나를 죽이게 된다는 거예요. 왜? 내가 그렇게 만들고야 마니까. 이래도 안 죽여? 이러면, 이래도 안 죽여? 그럼 이래도 안 죽일 거야? 인간은 몰라요. 없이 하소서, 없애버리세요, 라는 그 씨앗이 자기 안에 깊숙이 감췄다는 사실을 본인이 몰라요.
악마는 노골적으로 따먹지 말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도 따먹으라고 한 그 씨앗이 인간 속에 들어있단 말이죠. 주께선 접근해서 그걸 깨내는 거예요. 그러면 인간의 주체성은 커가면서 어떤 현상을 나타내느냐? 이게 닮아요. 닮아간다는 말은 자기가 익히 닮아갔던 그것들이 축적이 되게 되면 같이 닮아갔던 외에 그걸 기준으로 해서 닮았다, 안 닮았다 차이가 나게 마련이에요. 차이가 나면서 여기서 노선이 발생됩니다.
나는 우리 집안에서 재벌 집 막내아들로서 이렇게 살았는데 너는 가난한 집 아들로 어울리지 않는다. 왜냐하면 나는 내가 원한 것은 평소에 나한테 집약시켰던 정보들의 축적에 의해서 나는 나 닮은 것을 찾아가는 데 너는 나와 닮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 비켜지나가자. 가던 길로 가세요. 이렇게 하게 되면 이 원 속에 꼬불꼬불한 이런 게 생기는 거예요. 이 사이에 뭐가 있느냐 하면 여기서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이 일어나요. 모든 전쟁.
전쟁은 뭐냐? 내가 축적된 나다움에 대한 훼손에 대한 나의 반격, 우리 민족이 어떤데, 우리 집안이 어떤데, 우리 교회가 어떤데 감히 내 걸 건드려? 감히 우리 민족을 건드려서 손가락 끊고 살았던 사람이 누굽니까? 안중근. 안중근 이 사람은 지금 뭔가 착각하고 있는 것이 뭐냐 하면 우리 민족은 우리가 지켜야 된다고 하거든요.
그런데 그 시대에 민족이란 개념은 없어요. 민족이란 개념은 어디서 나오는가? 일본의 교육이 와서 민족이란 개념이 생긴 겁니다. 18세기에 처음 생긴 게 민족 개념이에요. 민족 개념이 생기려면 차이, 민족인 것과 민족 아닌 것의 차이가 나야 돼요. 그런데 우리나라에는 민족 개념이 없습니다. 갑자기 역사시간, 벌거벗은 한국사 돼버렸는데, 고려와 신라 아무 관계없어요. 민족 개념은 외부에서 온 새로운 지식, 정보에 의해서 발생된 거예요.
전라도와 경상도와 합하자. 언제까지 합할 건데요? 여기 전라도 있고 눈 많이 온 곳에, 여기 경상도 비 안 온 곳에 이 둘이 요새 화개장터가 장사가 안 돼요. 이게 하나가 되는 경우는 딱 하나밖에 없어요. 위쪽의 김정은이 쳐들어오면 둘이 하나가 돼요. 그러니까 큰 연쇄, 큰 체인이 결합한 경우는 더 큰 체인이 공격할 때 일시적으로 협약 맺고 단결한다. 이게 인류역사입니다. 인류역사 진리란 것, 선이란 없어요. 자기 챙기는 것밖에 없어요.
독립투사들이 치열한 자기 삶, 자기 가족 희생하고 민족을 독립했다고요? 그거는 다른 베트남. 필리핀, 아프리카 콩고, 우간다 그런 나라 한둘이 아닙니다. 장렬해요. 눈물 막 나요. 그래서 그게 선입니까? 사람이 어떤 행동을 할 때는 자기가 행동한다 하지요. 아닙니다. 너 누구한테 배웠어, 누구한테 배워서 그런 행동이 나와? 그 안에 다 축적된 게 있어요.
자, 그러면 연쇄, 꼬불꼬불한 회충, 십이지장충 이것 다시 그려보겠습니다. 이런 그래프 3차 방정식에 있어서 나올 때 이런 걸 최솟값이라 해요. 최솟값이 왜 중요하냐 하면 인간이 어떤 시작을 하게 되면 행렬을 이뤄요. 아까 이야기한 체인이죠. 그러면 최솟값은 시작점이 되겠지요. 인간들이 악마의 심정으로 뭔가 시작할 때는 맨 처음부터 연결시켜서 지금 자기의 있음을 정당화합니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나는 쭉 이어왔다. 이걸 충실성이라 해요.
충실성을 영어로 하면 faith믿음이에요. 무엇의 믿음, 누구에 대한 믿음이요? 나의 지나간 과거에 대한 나의 충성심이에요. 이게 뭐라고요, 두 자로? 믿음. 믿씁니까, 하는 그 믿음이에요. 지난 15년 전에 성령 받은 걸 믿습니까, 하는 믿음. 15년 전에 내게 있었다는 그것, 21년 전에 굴뚝 타고 온 산타크로스 할아버지가 나한테 간담브이 선물 주고 간 그걸 믿습니까, 그 믿음. 그때 산타크로스 선물 왜 받았어요? 울지 않는다는 조건 하에 받았어요.
그러니까 처음부터 끝까지 내가 옛날에 나름대로 차사고 일으켰지만 내가 곧장 그 사람에게 사과하고 난 뒤에 보험처리해서 그다음부터 보험료 이십오만 원 더 나왔다. 이런 이야기가 계속 담기는 것은 그 어떤 경우라도 나는 나한테 충성할 만한 대상이란 뜻이에요. 내가 나한테 지금도 껌뻑 넘어갈 수 있는 대상이라는 거예요. 이걸 누가 건드려.
부흥사가 맨날 하는 게 육이오 때 내려올 때 폭탄 맞았다는 그 이야기하잖아요. 자기 육이오 때 폭탄 맞은 게 사도행전에 나옵니까, 예레미야에 나옵니까, 어디 나옵니까? 안 나오잖아요. 그래서 거짓이죠. 그건 사기죠. 사기란 그런 일이 없다는 게 아니라, 진짜 그림이 중요한 데, 개구리 노래 알지요. 꼬물꼬물, 하는 노래 있지요. 그 노래에요.
<올챙이와 개구리>(올챙이송)
개울가에 올챙이 한 마리 꼬물꼬물 헤엄치다
뒷다리가 쑥 앞다리가 쑥 팔딱팔딱 개구리 됐네
꼬물꼬물 꼬물꼬물 꼬물꼬물 올챙이가
뒷다리가 쑥 앞다리가 쑥 팔딱팔딱 개구리 됐네
꼬물꼬물 이쪽에 십오 년 전에, 이십 년 전에, 육이오 때 폭탄 맞은 것 이게 꼬물꼬물 여기서 발전해서 이것 정당하니까 이것 정당하고, 이것 정당하니까 이것 정당하고, 이것 정당하니까 이것 정당하고 이게 뭐냐? 자기 의 아닙니까. 이게 유대인 아닙니까. 바리새인들이거든요.
사도 바울이 말하는 십자가라 하는 것은 이 꼬물꼬물 중간에 작살 내버리는 거예요. 그걸 접붙임이라 합니다. 내가 중간에 부셔지고 거기다가 예수 그리스도의 선택이라는 거기에다 접붙임이 될 때에 나는 나의 열매가 아니라 주님의 성령의 열매가 맺힌다는 것, 이걸 사도 바울이 이야기한 겁니다. 나의 역사, 내 가정의 역사 살아온 모든 것 다 무산되지요.
어쨌든 간에 제가 이야기하는 건 지금 그걸 이야기하는 게 아니고 최솟값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수학으로 이야기하면 최솟값이 1, 2, 3, 4, 5, 6 이걸 행렬 또는 정렬한다. 1, 2, 3, 4, 5, 6, 7, 8 정렬하는 거예요. 그래서 ‘많은’이니까 많다는 거예요. ‘많은’의 많은 이걸 다수의 복합물이라 해요. 이것은 집합론에서 그렇게 이야기해요.
이 세상은 다수의 복합물로 돼 있다. 그중에서 하나 뽑아서 체인시키면 주체가 된다는 거예요. 그게 맞는 말이에요? 다시 체인을 만들 때 이걸 연결시키는 거예요. 연결시키면 처음 자리 있겠지요. 1, 2, 3, 4, 5, 6, 7 이게 양의 자연수라 합니다. 하여튼 수학하게 되면 잠 오기 쉬운데 후딱 조심해서 지나가려고 합니다.
그런데 음의 자연수에서는 최소 점이 없어요. 그냥 -1, -2 이렇게 돼요. 뭔가 시작을 음부터 시작하는 게 아니고 양부터 시작하기 때문에 어디서 연결 된지 모르고 -1, -2, -3 이렇게 된다 말이죠. 최솟값이 없는 거예요. 그래서 주님께서 이 땅에 뭐로 오시느냐 하면 최솟값으로 오신 거예요. 최솟값으로 오셔서 뭘 하느냐? 여기서 체인을 만들어버립니다.
예수님께 달라붙은 새로운 체인, 연쇄連鎖, 한자로 鎖(쇠사슬 쇄)라고 하는 거예요. 최솟값을 만들어버리면 이것은 하나님의 이스라엘이 되는 거예요. 요한복음 15장에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뭐예요? 가지. 체인 아닙니까. 예수님께서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느냐 하면 인간세상 다수가 벌써 그 작업을 그들이 가짜든 뭐든 이미 그런 현상들이 일어나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닮은 사람들은 쩍쩍 지남철처럼 달라붙고, 이건 내 스타일 아닌데, 이러면 어떻게 됩니까? 다른 쪽은 아주 배타시해버리죠. 내치는 거예요. 내치는 이유가 뭡니까? 나와 닮지 않았다는 거예요. 닮았다는 말은 똑같다는 말 아닙니다. 테트리스 게임이 이런 게 있어요. 닮았다는 말은 이것과 똑같은 크기로 닮은 게 아니고 이건 동치고, 이렇게 딱 맞아서 나의 미흡함을 채워줄 수 있는 이걸 닮았다고 하는 거예요.
만약에 어떤 아가씨가 상당히 자기 자신의 미모에 자신감이 있다는 거예요. 자, 자기 미모에 자신감이 있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자기 또래의 아가씨들 보면서 저거는 나보다 수준 떨어지고 76점줄까? 평소에 늘 해왔던 거예요. 그렇다면 내가 일단 미모에서는 96점 A⁺ 찍었으니까 그럼 뭐가 없는가? 돈이 없는 거예요. 미모는 우뚝 솟았는데 돈이 빠졌으니까 돈 많은 걸 넣었으면 좋겠다. 또는 나는 이제 진짜 돈도 좀 있고 돈도 부지런히 모았고 한데 몸이 허약하다, 그러면 어떻게 합니까? 보다 건강한 남자가 와서 마지막 채워줬으면 좋겠다. 그게 연결하는 체인화 방법입니다.
이런 연결 방법의 단점이 뭐냐 하면 절대로 내 것은 건드리지 말고, 일단 맞춰보는 거예요. 맞춰보다 안 맞으면 던지면 되거든요. 이걸 이혼이라 하는 거예요. 까기 전에 까는 거예요. 더 붙들다가는 내 것 까이기 때문에. 나의 충실성이라니까요. 믿씁니다, 에요. 인간은 자기종교의 신봉자에요. 틈이 없어요, 여기는.
그러면 왜 교회에서 예수님이 엉터리 예수냐? 이것 보충해주는 예수님으로 믿는 거예요. 지가 조작해 가는 거예요. 주여, 주와 함께 임마누엘, 온갖 것 동원, 아는 단어 다 동원해요. 임마누엘, 평화가 있을지어다, 온갖 것 하지만 결국은 내 것은 안 건드리기, 건드리지 말기에요. 나를 없애지 말기. 50년 교회 다니면서 이것 하는 거예요.
50년 교회 다녔으면 장로 쯤 되겠지요. 내 장로 직에 누가 되지 않도록. 장로 되면서 교회 교육관 짓는다고 한 이천만 원 냈을 것 아닙니까. 그러면 자기의 꼬물꼬물 하다가 요쯤 이천만 원 낸 거예요. 이천만 원 낸 것은 하나님의 작정하신 계시였다. 이게 정당성이죠. 그다음에 교회 신입이 오면 내가 누군지 알아? 교회 예배당에 이천만 원 냈어, 정당성이 계속 가는 거예요.
그냥 곱게 이천만 원 낸 게 아니고 거기에 뭐가 붙느냐 하면 신화와 전설이 붙어요. 내가 이천만 원 낼 때 하늘에서 허연 영감이 와서 이천만 원 내라. 그러면 네 자식이 오천만 원 줄 것이다. 이런 빅딜이 있어서 이천만 원 내면서 정말 오천만 원 줄 줄로 믿씁니다, 이래서 전설이 붙는 거예요. 이게 예배당만 전설이 아니고 각 가정마다 전설이 다 붙어 있어요. 죽은 너거 아버지가 어떤 사람인 줄 알아, 이래서 전설이 붙는 거예요.
그래서 인간의 가장 애로사항은 내가 어떤 시절로 못 돌아간다는 거예요. 온갖 분탕질을 다해. 있으니까 있는 걸 그냥 가만두지 못하고 거기다가 메이크업을 계속하는 거예요. 포장하고 조작하고 치장하고 누가누가 메이크업 잘했는가, 누가 허세 더 떨고 있는가? 그것 하다가 몸도 피곤하고 나이 들고 지쳐서 둘 다 요양병원 동기생 되어 들어가서 싸우고, 자기 과거 이야기하고.
최솟값, 상당히 중요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최솟값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을 죽인 이유가 등장하지요. 내가 생각한 최솟값이 아니기 때문에. 나는 예수님처럼 많은 사람들에게 뭇매 맞고 채찍 맞아서 그리고 하나님이 전혀 도와주지 않는 상태에서 허망하게 죽는 것을 나의 시작점으로 나는 절대로 용납 못한다. 나는 당신처럼 되기 싫어. 이게 왜 그러냐? 나는 나로부터 시작하기 때문에. 나 뒤에 아무것도 없어. 출발점이 나에요.
그러니까 복음 전한다는 많은 목사들 들어보면 지 출발점은 안 건드리고 계속 거기다가 언약사, 뭐 온갖 것 멋있어 보이는 것 있잖아요. 개혁신학, 구속사 등 온갖 것 다 집어넣어서 계속 축대 쌓듯이 쌓아 올라가는 거예요. 자기 연쇄 고리를 만들고. 유대인들이 그렇게 해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한 이유가 바로 이런 겁니다. 우리만 그런 게 아니고 유대인들도 그래 왔어요.
그런데 그렇게 하면서도 아까 했지만 태초에 말씀이 계속 있어오면서 어딜 경유하느냐? 이스라엘을 경유하면서 그래서 결국 마지막에 이스라엘의 남은 자, 유대인들에게 예수님께서 메시아로 찾아오게 됩니다. 태초의 있음이 유대인에게 계속 오는 거예요. 그러면 예수님의 있음과 유대민족의 있음을 통해서 주님께서는 계속해서 이걸 뭐 했느냐 하면 파괴시켜 왔습니다. 끊임없이 그걸 부수고 계속해서 이걸 파괴시켜 왔고 했지요.
그게 요한복음 1장에 나옵니다. 요한복음 1장 5절에 보면,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 이 전체가 말씀의 작용이거든요. 이사야 60장 19절에서 20절에 보면, “다시는 낮에 해가 네 빛이 되지 아니하며 달도 네게 빛을 비취지 않을 것이요 오직 여호와가 네게 영영한 빛이 되며 네 하나님이 네 영광이 되리니 다시는 네 해가 지지 아니하며 네 달이 물러가지 아니할 것은 여호와가 네 영영한 빛이 되고 네 슬픔의 날이 마칠 것임이니라“
이 말이 뭐냐 하면 지금 쉽게 말해서 이렇습니다. 네가 살았던 눈에 보이는 것은 전부 다 가상이다, 허상이다, 다 헛것이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이게 인간으로선 용납이 될 수 없어요. 왜냐하면 인간은 직접 자기가 경험하고 있으니까 자기 역사가 지금까지 꾸준하게 분명히 다 느껴온 거예요. 제가 아까 했잖아요. 사람은 없다, 이 말 믿을 수 있습니까? 못 믿지요. 사람이 여기 있는데 왜 사람이 없다고 하느냐. 그 사람이 어떤 개념인지 관계없이 나는 있잖아, 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런데 요한복음 1장에서 빛이 있느냐, 아니면 네가 있느냐를 묻는 거예요. 대비시켜서. 체인이 있는데 인간이 악마가 만든 체인과 주님이 출발점이 최솟값이 되어서 처음부터 시작하는 주님의 노선과 이걸 이스라엘은 대조해 왔던 거예요. 그래서 이쪽이 빛이라면 인간은 뭐가 되겠습니까? 반대로 이게 어두움이 되는 거예요. 그런데 인간들 세계에선 그게 아니고 어둡다는 것은 해가 구름에 가릴 때 어둡고, 밤 되면 어둡다는 거예요. 이걸 인간들은 계속 고집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면 밤이 어둡다, 라는 것을 안다고 해서 내가 제거됩니까? 아니죠. “엄마, 밤에는 해가 없어요. 별이 있지만 별로 밝지 않아. 그래서 어두움 맞지요, 내 말 틀리지 않고 맞지요?” 엄마가 말하기를, “그래 밤이니까 어두운 거야. 하지만 그런 말한다고 해서 네가 어둡다는 것은 밝혀내지 못해.” 그동안 유대인들은 뭐하고 온 거예요? 도대체 하나님을 어떻게 섬긴 겁니까?
여기서 또 진짜 중요하고 어려운 것 할 시점이 왔습니다. 여기 꼬불꼬불한 연쇄체인을 유대인들은 하나로 통합시키려했어요. 통합시키는 방법은 뭐냐? 그들의 시작점이 있을 거란 말이죠. 시작점은 사람들마다 다 다르니까 출발점이 다 다르니까 숫자로 달리 해보겠어요. 이건 1, 2, 3, 4, 5, 6, 7, 8, 9라고 합시다.
1로 시작했는데 1에는 set, 세트는 우리말로 하면 집합이란 뜻입니다. 요소는 elements 이걸 요소 또는 원소라 해요. 세트 안에 원소가 있는 거예요. 그러면 1 세트 안에 {1, 3, 7, 8, 9} 있고, 2 안에는 2부터 시작했으니까 {2, 7, 14, 28} 아무거나 하는 거예요. 이렇게 됐다 이 말이죠. 7 안에 7부터 {7, 8, 12} 있다 하고, 시간관계상 다 못하고 이렇게 있다고 칩시다.
그러면 여기서 인간들에게 뭘 뽑아내느냐 하면 최솟값을 뽑아내는 거예요. 최솟값을 따로 뽑아내면 {1, 2, 7, 4} 되겠지요. 최솟값으로 뽑아낸 이 세트가 뭐냐 하면 인간세계 전부를 한꺼번에 표현할 수 있다고 본 거예요. 이게 뭐냐 하면 선택입니다. 유대인들이 선택받았지요.
인간들이 생각한 선택은 이미 있다는 것 중에서 각각 처음부터 그들의 근원, 그들의 시발점부터 있는 것만 뽑아서 일단 샘플로 뽑아내면 샘플이 모아놓았던 정보가 눈에 보이는 나머지 결과물의 전부를 대신할 수 있다는 생각, 그게 선택이에요. 한 번 선택받았으니까 그 사람들이 어떻게 살든지 간에 그들의 마지막 목표는 천국이다. 교회에서 그렇게 이야기하지요. 그게 유대인의 선택논리입니다. 지금 인간들의 아이디어에서 끄집어낼 수 있는 선택논리입니다.
자, 방금 제가 이야기한 선택논리에서 뭐가 문제입니까? 이 선택논리에 주님께서 어떻게 왔느냐 하면 자신을 뭐로 봤습니까? 자신의 최솟값이 인간세계에서 추방했기에 없어요. 최솟값이 없어지는 거예요. 최솟값이 없으니까 인간세계는 꼬물꼬물 올챙이처럼 왜 하느냐 하면 인간들이 계속해서 다수가 다수로 인간 숫자가 많아지니까 최솟값만 챙기면,
예를 들어서 여기 최 진사 댁 셋째 딸이라면 시집가서 애 낳을 것 아닙니까. 그러면 아무리 애 낳든 뭘 하든 시작점은 최솟값은 뭡니까? 최 씨 집안이면 되는 거예요. 아무리 무한대로 숫자가 후손들이 늘어지더라도 최솟값만 있으면 이거는 진짜 선택된 민족으로 규명할 수 있다고 본 거예요.
그런데 아까 많다 했지요.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미쳤다 했지요. 예수님께선 이걸 의식하고 새로이 최솟값을 해버렸습니다. 최솟값을 정해버렸어요. 그러면 이 최솟값이 어떻게 됩니까? 전부 다 계시로 절단해버리죠. 절단하면 무엇과 무엇의 싸움입니까? 우리 족보, 나의 원천과 주님의 십자가의 싸움이 돼버리죠. 너의 최솟값은 무의미하다. 너는 시작도 모르면서 시작이라고 우겼다는 겁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이 이렇게 합니다. 어떤 소경이 지나가니까 제자들이 최솟값을 이야기해요. 저 사람이 소경인데 자기가 최솟값입니까, 자기 부모입니까? 이렇게 이야기해요. 그때 주님께서 하는 말이 자기의 죄도 아니고 자기 부모의 죄도 아니고 너희들이 바로 소경인 것을 지적하기 위해서 너희들이 알지 못하는 최솟값이 너희들 앞에 지금 들어오고 있다는 거예요.
본다고 하니까 소경이고 못 보는 쟤가 보는 자를 소경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유일한 최솟값 되는 겁니다. 그래야 내가 소경이란 걸 깨우치는 시작점이 되기 때문에 그래요. 그게 믿음이죠. 이 다수를 이렇게 드디어 하나가 선택됐지요. 선택된 민족이 믿는 신이 구약에서 무슨 신이라 합니까?
요한복음은 지금 예수님이 유대인들에게 온 거예요. 이스라엘을 젖히고 설명하면 안 돼요. 여호와를 섬기죠. 그러니까 그들은 여호와를 안다가 돼요. 여호와를 알기 때문에 여호와로부터 뭐가 왔다? 하나님이 우리 민족을 선택했다. 선택한 결과가 우리의 숫자가 무수하게 선택된 민족으로 번지게 되었다. 이게 유대인들의 신학이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일거에 다 날아가요. 그러면 주님의 선택은 뭐냐? 우리가 생각한 주님의 선택은 주께서 시작한 많은 주의 택한 백성이 있을 것이고 그들이 바로 주께서 택한 진짜 예수님의 십자가로 제시한 주의 백성이라고 이렇게 이야기하고 싶지요. 그렇게 되면 이 사고방식과 똑같은 사고방식 돼요. 그게 선택이 아니라 선택된 족족 이 무한한 선택을 작살내는 하나님의 계시 속에서 새롭게 등장하는 최솟값이 있어요.
아까 꼬물꼬물 나오는 걸 끊으면서 새롭게 등장, 톡 튀어나오는 낯선 존재. 그래서 이걸 끊어냄으로써 계속 새롭게 나오는 거예요. y=x 좌표에서 접선이 왔을 때 두 접점이 나올 때 이쪽 요소, 원래 있던 인간들의 연쇄에 속하면서도 주님의 계시로 인하여 원초적인 처음으로 돌아간 이게 나왔을 때 이게 바로 선택입니다. 선택의 특징은 뭐냐? 이렇게 하면 됩니다. 두 번째 시간에 중요한 대목에 왔습니다. 나는 나를 선택하지 않습니다. 이 말은 내가 나의 최솟값이 되지 않겠습니다. 무슨 이런 현상이 다 있어요.
나는 ~하지 않겠습니다. 나는 나를 선택하지 않겠습니다. 않다, 부정이죠. 부정 들어오지요. 부정 들어 있잖아요. 그러니까 처음의 인간 자리가 맞는 거예요.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 부정이죠. 이 부정이 하나님의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부정을 나의 요소로 받아들이는 거예요. “너 이것 하지 말라 했는데 했잖아.” 그걸 받아들인 거예요. 그래서 사도 바울은 내가 죄인 중에 괴수, 내가 바로 죄인입니다. 주님이 지적하는 부정성이 이젠 나의 주체를 이룬 타자의 요구가 되었습니다. “주여, 마음껏 나에게 주님의 부정성을 쏘세요.”
그래서 나의 선택은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지요. 주님의 최솟값이 들어온 거예요. 그럼 나는 날마다 주님의 최솟값만 남기기 위해서 내가 있는 인생사의 포물선이 날마다 새로운 충돌의 점들이 발생되는 겁니다. 그것 때문에 우리는 아직도 하나님 뜻이라면 오늘 말고 내일도 여러분 살아 계셔서 식당에서 밥 먹어야 돼요. 내가 몰라요. 주께서 나의 연쇄에 어떻게 나를 잘라낼지 그거는 주님 소관이지 내 소관 아니거든요.
그러나 아는 것은 뭐냐? 부정성이에요. 나에 대한 부정성. 그럼 유대인들은 어떻게 하느냐? 유대인들은 정신병자들이죠. 어떻게 하느냐 하면 하나님의 율법이 부정성으로 오잖아요. ~하지 마라가 많지요. 그러면 하나님의 부정성이니까 이걸 하나님의 시선, 눈동자로 그려보겠습니다. 눈동자로 부정성으로 유대인에게 쏜다고요. 너 이것 하지 마.
아까 이야기했습니다. 모든 지시는 뭐라고요? 모든 지시는 요구사항이에요. 하지 마, 하지 마 이렇게 하니까 이게 너무너무 무섭다는 걸 알고 유대인들이 여기서 마중을 나가요. 이게 스크린인데 스크린까지만 신의 지시를 받고 여기서 마중을 나간다고요. 마중을 나가서 내 쪽에서 이 스크린으로 다가가요. 다가가게 되면 “주님, 이것 하라 해서 했고요, 이것 하지 마라 해서 안 했어요.” 이 스크린에 자신의 신과 하나될 만한 어떤 상황을 조작해버리는 겁니다.
이걸 히스테리라 해요. 너무 무서워서 내가 감당이 안 되니까 감당할 수준 내에서 내 쪽에서 처리하는 데 나의 의와 나의 정당성 있잖아요. 내 최솟값 그게 유효하게 정당하게 남을 범위 내에서 적당하게 버무려버리죠. 내가 이건 못 지켰지만 이건 지켰잖아. 그걸로 그만 퉁 칩시다, 이런 식으로 끊임없이 주의 말씀을 그런 식으로 중간에 이런 망상을 만들어놓고 망상이 주의 뜻이라고 일방적으로 해줘야 자기가 숨을 쉴 수 있습니다. 숨 쉬어서 뭐 할 건데? 가짜지요.
이렇게 하는 것, 이렇게 할 수 있고 나머지는 다음에 하고 이건 열심히 하고, 이건 안 하고 이렇게 해서 하나의 조작된 신을 하는 이 신학이 바로 개혁주의신학이에요. 어디서 들어나 봤습니까? 한국교회의 모든 장로, 침례, 감리, 성결 다 포함돼 있는 신학, 개혁주의신학이 이겁니다. 전부 히스테리 환자들이에요.
깨놓고 죄인이라 하면 간단한 문제를 죄인이긴 하지만 교회 봉사는 많이 했잖아요. 어렵게 굶어가면서 선교는 했잖아요. 지난 번 선교회비 못 낸 것 두 달치 다 냈잖아요. 지금 하나님도 나한테 닦달내지 마세요. 아이 셋 키우는 게 장난이 아닙니다. 이런 것. 이만한 시간 내서 교회 가주는 것도 남들 못하는 겁니다, 주여. 사람의 사정을 감안해야지 자꾸 몰아세우면 자빠져요. 자빠지면 주님 좋겠습니까?
지금 누굴 상대로 딜을 하고 있어요? 지금 무슨 이야기하자는 거예요? 이게 유대인들이에요. 바리새인들이 그렇게 한 거예요. 될 수 있는 대로 많은 사람들이 많이 지켜서 너도 나도 천국 갈 수 있도록 여러 가지 세칙들을 마련해준 그 친절한 아저씨들이 누구냐? 바리새인들이에요. 그들이 노리는 것은 뭐냐 하면 하나님이 보우하사 이스라엘을 이어가는 것. 기원전 168년 10월 24일인가 그때 그들은 마카비 전쟁에서 이겨냈거든요. 헬라에서 이겨냈으니까 하누카, 수전절이라 해서 그게 요한복음 7장에 나옵니다.
그 기념하는 날. 우리는 봐라. 믿으면 되잖아. 믿으니까 승리를 줬잖아. 천주교에서 보는 책, 마카비 상하가 그거에요. 이기면 뭐합니까? 십자가 귀신 들렸다 하는데. 한 번 생각해보세요. 그래서 찬란한 민족적인 중흥과 역사를 이루면 뭐합니까? 메시아 왔을 때 어떻게 했어요? 미쳤다, 귀신 들렸다, 그다음에 뭐라 했습니까? 없이 하소서. 거기에 대한 주님의 대처는 만지지 말라. 네가 만질 위인이 아니야.
자, 이 정도 했으니까 잠은 충분히 주무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아무 염려하지 마시고요. 이미 꿈속이라도 율법 위에 목 내밀면 목 날아갑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여러분 자아가 주체가 생기거든 율법 쪽으로 목을 내미시기 바랍니다. 목 날아가게. 원래 내가 아닌 그것으로 데려가시는 것은 주님께서 우리를 없이 하는 것, 우리를 없애고 그리고 없는 그 자리에 주님만 턱하니 차지하시는 것, 그게 바로 원래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입니다. 오늘은 이걸로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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