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련회자료

타인의마을 3강-부정성

아빠와 함께 2023. 1. 14. 20:25

2023 십자가마을겨울수련회 제3강-요한복음: 타인의 마을-부정성
(강의:이근호 목사)


첫째 강의와 둘째 강의를 다시 정돈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지금부터 잠시 동안 어제 했던 강의를 정돈해 드리겠습니다. 정돈하면 더 어려울 수가 있어요. 인간에 대한 긍정 외곽에 부정성이 감싸져있습니다.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는 자체가 부정성이에요. 부정성 안에서 인간이 태어났던 겁니다.

물론 이 부정성의 핵심은 나중에 하나님 자신이 품게 될 부정성을 두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하나님은 신이죠. 당연하죠. 하나님은 신이기 때문에 출애굽기 3장 14절에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나는 나다.” 나는 나다 할 때 모세가 하나님에 대해서 부정성을 날립니다. 부정성을 발휘합니다. 인간에게 부정성을 발휘한다는 말은 이름을 묻는 거예요. 어제 강의한 것 기억나지요. 이름을 묻는다는 것은 카운트하는 헤아리는 겁니다. 헤아리면 내 영역 안에 내가 담을 수가 있어요.

그 영역, 바구니를 세트라 하고 담겨 있는 요소를 element, 바구니(set) 표시는 수학에서 { } 이렇게 표시한다 했지요. 바구니에 담으면 내가 너를 이름을 부를 때 비로소 이름 부른 자에 와서 나에게 하나의 뭐가 되느냐 하면 의미가 되는 겁니다. 내가 이름을 부를 때 의미가 된다는 말은 이름을 불러준 나는 멀쩡하고, 이름 부름의 대상이 된 너는 멀쩡한 나를 더욱더 멀쩡하게 만드는 하나의 요소로서 내 안에 들어오라는 이야기에요.

결혼하고 난 뒤에 자기 아내를 ‘여보’라고 부르는 대신 ‘이름’을 부르는 사람이 있어요. 누구라고 이야기는 하지 않겠습니다. 수십 년 지나도. 그리고 그 이름을 받는 사람도 그렇게 좋아해요. 왜 좋아하느냐? 못 고친다는 걸 알기 때문에.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이제부터 너는 내 거야, 내 것 되라는 이야기입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 때 모세는 나는 이름을 불렀다는 것 때문에 재귀라는 어려운 말을 하는데 자기언급이라고 self 스스로 자기를 뭐로 만드느냐 하면 유일적 존재로 만드는 거예요. 내가 나를 더 단단하게 확고하게 고정시키는 거예요.

그렇게 되면 외부에서 이름을 불러서 나의 긍정을 더욱더 긍정답게 하기 위해서 재료를 소스들을 계속 자료들을 끌어 모으는 겁니다. 하나님을 대할 때에 모세가 하나님에게 이름을 물었던 거예요. 이게 왜 하나님 보시기에 부정성일 수밖에 없느냐 하면 피조물은 먼저 말하는 게 아니에요. 피조물은 먼저 질문을 던지는 존재가 아닙니다. 질문은 창조자가 해야 돼요. 왜냐하면 모세라는 이름조차도 하나님이 지었기 때문에 주객이 바뀌면 안 되거든요. 주인이 종의 위상이 바뀌면 안 됩니다. 주님이 아담아 어디 있느냐, 불러줘야 돼요.

그래서 요한복음에서 내가 주님을 찾아가는 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이걸 한 자로 우리말로 해서 ‘육’이라 하는 거예요. 요한복음 1장 봅시다. 제가 첫째 강의, 둘째 강의 어렵게 했지만 어렵게 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어요. 1장 12절에 보면,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13절에,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라고 돼 있어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그다음에 뭐라고 돼 있지요?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아니’가 뭐예요? 긍정이에요, 부정이에요? 부정이죠. 인간을 부정 속에 가둬버리는 겁니다. 네가 구원 받기를 원하지만 나는 너의 의도를 들어줄 의향이 전혀 없다는 거예요. “너의 뜻을 알아. 너는 네가 필요한 존재를 소스로 삼아서 나라는 긍정을 더욱더 긍정으로 확보하는 것이 네 뜻인 줄 아는데 그 뜻을 알기 때문에 나는 네 뜻을 들어줄 용의가 없다.” 이런 뜻입니다.

네가 구원 받기를 원하는 데 네가 죽어서 천국 가기를 원하는 데 내가 너무나 잘 알기 때문에 나는 너의 뜻을 거절하는 식으로 하나님 내 식대로 나는 나의 구원을 이룰 거야, 라는 것이거든요. 그러면 하나님과 인간의 만남은 뭐예요? 인간이 긍정 되면 하나님은 뭐가 되고? 부정이 되고, 하나님이 부정이 될 경우에만 인간은 뭐가 된다? 비로소 긍정이 되는데 인간이 생각하는 긍정 말고, 긍정₁ 말고 인간의 긍정에서 헤어져야 이별해야 돼요. 나의 긍정에서 내가 다른 긍정으로 떨어져 나와야 돼요.

이걸 구원이라 하는데 현재 나는 구원 받기를 원하는 데서, 구원 받기를 원한다는 말은 자기언급이거든요. 자기언급이라 하는 것은 나에게 내가 지시하고 명령하고 여기서 압력을 행사하는 것, 압력, 힘이죠. 힘power를 행사하는 것이 자기언급이에요. 그럴 때 나올 때 뭐냐? 자기 유일성이 돈독해 보입니다. 아무리 교회 가도 자기긍정에서 빠져나올 재주가 없어요. 아무리 복음 듣고 수련회 참석해도 자기긍정에 나올 수가 없어요.

자기언급에 대해서 좀 더 설명이 필요한 것 같아요. 보통 자기한테 힘준다고 이야기하지요. 어제 한 것 잠깐 생각해보겠습니다. 이 세상은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질문을 누가 누구한테 던지지요? 내가 나한테 던지지요. 이 세상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과학자들이 하는 거잖아요. 이 세상은 어떻게 되었는가? 빅뱅인가, 벌써 우주가 147억 년 전인가?

이렇게 한다는 것은 예수님한테 물어본 거예요, 아니면 누구한테 물어본 거예요? 내가 나한테 물어본 거예요. 뭐 다른 사람한테 물어봤다는 말이 있는데 나가 우리고 우리가 나에요(나=우리=나). 인간세계에서는. 이게 우리라는 것이 집단적 개체라고 해요. 그게 민족일 수 있고, 국가일 수 있고. 집단적 개체를 어디서 양성하느냐 하면 가정에서 양성해요. 이게 교재에 나옵니다.

가정을 뭘 훈련시킨다? 돈독한 연대감을 훈련시키는 거예요. 남매간에 저희끼리 싸우다가 학교 갔다? 그러면 누나가 뭔가 힘들어 하면 누가 나섭니까? 동생이 그것도 사나이라고 나서잖아요. 이게 뭐냐 하면 가족 연대감이에요. 그러니까 요한복음 1장 13절에 뭐라 돼 있습니까? 이는 그다음에 ‘혈통’이죠. 인간은 혈통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걸 누가 알아요? 하나님이 뻔히 아시는 겁니다.

우리 집안은 중보기도해서라도 우리 집안만은 천국 가야 돼. 나 너와 못 헤어져. 다 같이 다섯 명, 여섯 명 몽땅 천국 가고 싶어. 이건 무슨 의식입니까? 혈통의식, 가족의식이에요. 이게 나가 우리고 우리가 나기 때문에 그래요. 그런데 앞에 있는 ‘나’는 어떤 나냐 하면 지금 개체의 몸의 나라면 여기서 나라는 것은 확산된 더 커져버린 나에요.

이것을 어떻게 설명하느냐 하면 수학의 집합론에서 아주 간단하게 설명하는 겁니다. 이 세상은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없는 데서 있는 것이 만들어졌다(무->유). 어제 했지요. 그럼 이걸 누가 이야기하느냐? 없는 데서 있는 것이 만들어졌다는 답변을 제시한 제3의 자리가 있어요. 제3의 자리가 질문자입니다. 누구겠어요? 바로 나지요. 내가 무에 대해서 언급을 했다는 것은 무가 하나의 의미 요소로서 들어왔다는 거거든요.

그러면 이 무라는 것은 수학에서 공백으로 표시하는 데∅ 공백을 내가 바구니에 담았다{∅}. 이름 지었으니까. 내 바구니에 담아버리면 이걸 {∅}=1이라 해요. 1의 시작이 무에요. 그러면 유는 뭐냐? 이 바구니에 담은 것을{∅} 한 번 더 무라는 것에 의미를 줘서 유를 끄집어냈다 할 때 이게 set에요. 우리말로 바구니고. 세트를 하나 더 치면{{∅}} 이게 2가 되는 거예요. 3은 하나 더 들어가는 거죠.

그래서 이걸 풀이하게 되면 이렇습니다. 2는 뭐냐? 공백에다 요소 하나에다가 공백 요소 하나 더 집어넣은 것{∅, {∅}} 숫자로 카운트가 돼요. 1, 2. 카운트는 창세기 2장에서 이름을 지음으로서 자기 존재감을 더욱더 확보하는 것이 카운트거든요. 그럼 개수가 몇 개냐 하면 이게 두 개지요. 이건 알겠지요. 인간에서는 개수를 통해서 크기를 비교합니다. 처음에는 개수부터 출발하지요. 그다음에 개수를 정렬해요. 개수를 cardinal기수라 하고, 정렬을 ordinal서수라고 이야기합니다.

개수에서 서수로 나가버리면 여기서 어제 이야기한 것처럼 이 우주 속에 개수로 서수로 돼 있을 때 여기에 뭐냐? chain이 형성되지요. 꼬물꼬물 뒷다리가 나왔다는 개구리들이 나와요. 이 개구리들이 나왔는데 이쪽 개구리를 a라 하고 이쪽을 b라고 한다면 개구리로 있다가 서로 보충할 마음이 있으면 이 개구리들이 합체가 돼버려요. 합체가 되면 이렇게 되겠지요. 이걸 사돈 간이라 합니다. 좋은 집안과 결혼할 때 사돈 간이죠. 사돈 간이면 결혼했다는 게 사건 되겠지요. 이 사건이 또 무슨 사건이 터질지 모른다는.

그러니까 이 사건을 인간이 고대하는 데 이 우주에서는 이게 무한이거든요. 무한한 뭐가 기다린다? 사건들이 기다리는 거예요. 무한한 사건을 이걸 다수라 하는데 제가 어제 요한복음 할 때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뭐라 했습니까? 미친 자라 했지요. 그 다수에요. 무한한 사건이 다수가 되어 할 때 최소 점이라 했습니다. 어제 두 번째 강의 제목이 [최솟값]이에요.

최소 점은 어디부터 시작합니까? 나의 긍정이죠. 나의 긍정으로부터 해서 인생살이를 형성하는 데 뭘 끄집어냅니까? 내가 원했던 나를 더욱더 단단하게 긍정에다 긍정을 추가할 수 있는 요소들을 사건들을 모아서 인생살이 형성하는 데 이 끝에는 뭐가 되겠어요? 점점점이 되겠지요. 무한이 되게 돼요. 무한인 거예요.

그래서 인간은 내가 인생사가 어디서 이러질지 또 중간에 어디서 끊어질지 알아요, 몰라요? 모르지요. 모르니까 뭐가 무산돼버렸느냐 하면 이 점이 무산돼요? 나는 선택받았다, 구원 받았다 이 자체가 완전히 뭐가 돼요? 구라가 되는 겁니다. 아직 안 끝났잖아요. 어떤 무한의 사건이 나를 어떻게 할지 알 수가 없잖아요. 65세까지 복음 알았는데 67세에 복음 알아도 소용없고, 이럴 경우를 닥치면 앞에 있는 모든 것이 과거의 모든 것이 새로운 의미로 확 덮어버리는 겁니다.

그럼 다수는 소수보다 큽니까, 안 큽니까? 크지요. 그러니까 수학의 집합론에서 아주 간단하게 설명하는 겁니다. 이 세상은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없는 데서 있는 것이 만들어졌다(무->유). 어제 했지요. 그럼 이걸 누가 이야기하느냐? 없는 데서 있는 것이 만들어졌다는 답변을 제시한 제3의 자리가 있어요. 제3의 자리가 질문자입니다. 누구겠어요? 바로 나지요. 내가 무에 대해서 언급을 했다는 것은 무가 하나의 의미 요소로서 들어왔다는 거거든요.

자기 의미를 부여하게 되면 이거는 요소들을 가지고 집합이 {1} {2} {3} 그다음에 {1, 2} {1, 3} {2, 3} {1, 2, 3} 공집합∅ 하나 이렇게 되지요. 나한테는 이런 사건으로 분산될 수 있어요. 그러니까 체인이 있는데 이 체인이 뭘 친다? 가지를 가지인데 촉수지요. 촉수는 어디에 민감하다? 돈에 민감하죠. 촉수가 돈에 되게 민감해요. 돈 있는 쪽에 갑자기 길어져요. 인물은 못 생겼는데 돈 있다면 갑자기에 나오고 싶고요. 선보며 하는 거예요. 이게 촉수에요.

문제는 이 자체 전체 집합으로 나눠버리면 1, 2, 3보다 더 크지요. 부분집합이 큰 집보다 크다는 이걸 power set라 해서 멱집합이라 합니다. 내가 현재 나라고 하는 것보다 더 큰 게 나를 촉구하고 독촉하고 있다는, 나는 무한에 대해서 미쳐버리는 거예요. 내가 여기서 만족한다? 이건 어림도 없는 이야기에요. 내 안에 있는 내 촉수 감당이 안 돼요. 갈 데까지 가볼까~ 이거에요. <강남스타일> 그냥 갈 데까지 가보는 거예요. 어디까지 가는지. 긍정, 나는 아직 배고프다. 갈 데까지 가보는 거예요. 왜? 세상은 무한하니까.

교회 다니나 절에 가나 교회 안 가고 절도 안 가고 세상에 사나 인간은 이런 점에서 똑같습니다. 누구나 똑같아요. 이스라엘도 마찬가지고요. 이방민족도 똑같아요. 자기 안에 무한이란 게 들어와서 자기에게 욕망을 자극시키는 거예요. 자극시키면 이 정도로 만족한다는 게 성립이 안 돼요.

이 긍정을 뭐로 둘러싼다 했습니까? 부정성으로 둘러버리죠. 그러면 아까 구원이란 뭐라 했습니까? 긍정에서 어떤 긍정이다? 지금 이 긍정 말고 헤어지고 이별하고 새로운 긍정₁에서 긍정₂로 빠져나와야 되는데 인간이 자기 내부적인 부정성을 추구하겠지요. 부정성을 추구하는 방법은 뭐냐 하면 토마스 아 켐피스의 책 <그리스도를 본받아> 또는 몽골 선교사의 <내려놓음>, <더 내려놓음> 어디까지 내려가는지 몰라. 낮아지고 낮아지는 그것, <내일 일은 난 몰라요>

하여튼 교계에서 유통되고 있는 그럴싸한 자기겸손의 여러 가지 아이콘이나 아이템들, 트레이드마크, 아프가니스탄 선교해서 우리나라 돈 수십만 불 날린 그런 교회도 있고. 희생, 봉사, 선교, 낮춤, 낮아짐 이런 것들 계속 이런 것을 통해서 자기긍정을 스스로 통제하려는 시도를 하는 거예요.

나는 부족하다. 이걸 누가복음 18장에서 누가 하고 있느냐 하면 바리새인들이 하고 있어요.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금식이 보통 어려운 게 아니에요. 참 어려운 거라고요.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금식한다면 이 금식할 수 있는 에너지, 동기, 추진력 이거는 토요일에 피자가 마련돼야 피자하고 파스타, 돈가스, 탕수육 이런 게 있어줘야 이게 가능해요. 희망이 있어야 금식을…….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구제하고 십일조 하고 이렇게 하는 것, 자체적으로 하는 바리새인들이 했던 거예요.

마태복음 9장에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금식기간을 만들어서 금식했어요. 요새는 하시딤이라 해요. 극보수정통 유대인들 예루살렘에 살고 있습니다. 유대인들 구백만 중에서 그들이 약 백삼십만 돼요. 이들은 남자들은 군에도 안 가고 모든 인터넷 안 보고 휴대폰도 안 가지고 오직 어릴 때부터 율법만 성경책만 보는 사람들이에요. 백삼십만 또는 백만 그러니까 한 11~15퍼센트 되는 사람들이 예루살렘 근처에 모여 살고 있습니다.

그들을 보면 대번에 알 수 있어요. 복장은 펭귄 복장이에요. 모자 쓰고. 그들 가운데 세 파가 있는데 우크라이나, 폴란드에서 온 그게 제일 지독한 사람들이고요. 그다음에 아랍에서 온 사람들은 좀 자유롭고요. 리투아니아에서 온 사람도 자유롭고 그래요. 어쨌든 간에 모자 쓰고 제일 독한 사람들은 옆에 수염 기르고 시커먼 복장에 무채색 옷을 입고 오직 군에도 안 가고 랍비가 되기 위해서 율법적인 훈련을 받는데 토론으로 훈련을 해요.

그들이 기대하는 것은 수전절, 하누카 절기인데 마카비가 전쟁 이긴 것처럼 이들이 극복하고자 하는 것은 놀랍게도 유대인들이 극복하고자 하는 적은 누구냐? 이스라엘입니다. 이스라엘 내부의 이스라엘을 공격하는 거예요. 왜 이스라엘을 공격하느냐? 이스라엘은 시온주의기 때문에. 시온주의가 뭐냐? 약속의 땅을 차지함으로써 하나님의 뜻을 이뤘다는 이들이 바로 사상이 서방세계에 물들었기 때문에 우리가 용납 못하겠다는 것이 정통보수적인 하시딤의 주장입니다.

그럼 이 사람들의 생계는 누가 하느냐? 여자가 해요. 비겁하지요. 여자는 밖에서 돈 벌고 지는 성경공부만 하고. 참 할 것도 없어요. 남자의 희망사항. “니가 해라, 더러운 짓. 깨끗한 게 내가 할래.” 그 바리새인들이 그게 요한복음 7장에 나옵니다. 그 바리새인들의 부정성은 결국 어디로 돌아가는 부정성입니까? 이렇게 나는 마음을 낮췄다. 마음을 낮추는 목적이 뭐냐? 결국 나를 긍정하기 위한 하나의 스킬, 재능을 부리고 있는 거예요. 재주를 부리고 있는 거예요. 나를 긍정하기 위해서.

그러면 주님의 부정성이 왔을 때 자기 백성을 찾으러 왔을 때 앞에 뭐가 가로막고 있겠습니까? 자기가 긍정의 긍정을 자기가 계속 끓어오르는 욕망들이 있거든요. 그 욕망을 자제해서 끊어버리기 위해서 자체적으로 개발한 자기 낮춤프로젝트가 있을 거 아닙니까. 그것과 주님의 부정성이 어떻게 됩니까? 정면으로 충돌하겠지요. 그게 요한복음이에요. 육에서 영이 되고자 얼마나 시도하는지 몰라요. 육에서 영이 되기 위해서 나름대로 육과 영의 개념을 따로 마련한 겁니다. 그게 육이 되던 영이 되던 그게 바로 사람의 뜻에서 나온 거예요.

요한복음 1장과 2장과 3장에서 하나님께서 세례요한을 먼저 보내셨는데 그 세례요한이 해야 될 것이 뭐냐 하면 내가 하는 어떤 일도 그분 앞에서는 뭘 했다, 라는 이름을 붙일 수 없다는 점이 요한복음에서 어려운 점이에요. 너 세례를 왜 주느냐, 라고 할 때 내가 세례 주는 이유는 내 세례는 이렇다 이렇게 설명하는 게 아니고 요한복음에서는 세례? 나 세례 아닌데? 부정으로 이야기해야 돼요. 요한복음에 보면 그게 나와요.

1장 25절에 보면, “네가 뭔데 세례 줘. 네가 엘리야야? 네가 선지자야? 네가 제사장이야 뭐야?” 그렇게 하니까 세례요한은 뭐라고 이야기합니까? “나 ~아니요, 나 ~아니요, 나 ~아니요”로 답변해요. 부정성의 아이템으로 움직이는 겁니다. 내 뒤에 오시는 부정성은 나의 부정성과는 족히 비교 안 된다. 더 큰 부정성이 온다.

멱집합을 power set라 했지요. 부분집합을 집합 화시킨 게 멱집합인데 멱집합은 범주를 무한 쪽으로 더 확대시킨다. 모든 인간 속에 다 들어있습니다. 일주일 전만 해도 이것만 해도 나는 만족한다 했는데 일주일이란 시간이 주어졌을 때 그때 만족은 벌써 시시해졌어. 시답지 않은 아무것도 아닌 게 됐어요. 그걸로 만족할 내가 아니지, 하고 안에 있는 욕망이 또 튀어나와서 다른 촉수가 또 예민하게 굽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자기에 세팅된 바구니가 안에 내용이 커진 만큼 감당하기 위해서 더 커져야 될 필요성을 느끼는 거예요. 갈 데까지 가보는 어디까지 갈지 모르지요.

주의 방법은 그들을 어떻게 하느냐? 자기 무한 요소에 의해서 스스로 폭발하게 만들어버려요. 폭발하도록 유도하죠. 하나님은 출애굽기 3장 14절에서 나는 나에요. 나는 나라는 말은 이 세상에 스스로 나를 지칭할 수 있는 유일자는 누구밖에 없다? 하나님밖에 없지요. 이게 바로 하나님만 존재란 말을 붙일 수 있다. 하나님만 제대로 있음이 되는 거예요.

하나님만 있으면 다른 존재는 어떻게 됩니까? 마땅히 이 있음이란 개념에 부합되지 못하기 때문에 없음이 돼야 돼요. 하나님 긍정되면 우리는 마땅히 부정돼야 되고, 이 부정된 것을 동의하고 찬동하고 감사하게 되면 존재에서 온 힘에 의해서 그렇게 되기 때문에 이것이 우리가 긍정₂가 되는 겁니다.

그게 세례요한이 보여주는 “나 아니요, 나 아닙니다.” “너 뭐 했잖아.” “내가 뭐 했는데?” “니 세례 줬잖아.” “이건 세례가 아니지.” 나는 물로써 세례 주지만 내 뒤에 오시는 분은 31절에 그분이 성령으로 세례 주기 때문에 난 물로 주는 거다. 따라서 물과 성령이 이게 비교 게임이 되냐. 비유할 건더기가 되냐? 이건 비교 안 되지요. 물에 들어가세요, 나오세요. 이것과 성령으로 세례 주는 것과 그게 어떻게 비교가 되냐.

족히 비교되지 않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 너희들이 만만해 보이는 세례, 인간으로 할 수 있는 것, 물속에 들어갔다 물세례 받는 것, 그런 인간의 한계를 내가 보여준다. 그게 세례요한의 역할입니다. 그분은 흥해야 되고 나는 망해야 된다, 그게 요한복음 3장에 나오잖아요. 그분은 흥해야 되고 나는 쇠해야 된다. 그 앞에 하나 넣으면 나는 마땅히 쇠하는 것이 나의 기쁨이다, 이렇게 되겠지요. “내가 소리 없이 사라지는 것이 내 존재가 있다고 하는 것이 없음으로 넘어가는 그것이 나의 소원입니다.”

무대장치 세트 바꿀 때 막간에 조용필 콘서트를 하는데 조용팔을 먼저 올려 보내요. 나훈아 콘서트 하는데 너훈아를 먼저 올려 보내요. 그것 무슨 효과 있습니까? 쟤 아니잖아, 라는 것을 먼저 전제로 맛보기로 보임으로서 역시 진짜는 다르구나. 임영웅이 나오기 전에 김영웅이 보내는 거예요. 야아, 진짜 다르네. 그 다름의 역할을 수행한다는 것이 얼마나 영광스럽습니까.

부정을 하나님께서 긍정적 사용을 함으로써 새로운 긍정을 맞이하게 하신다 이 말이에요. 부정적인 것을. 어제 주일에 설교했잖아요. 디모데전서 6장 10절에 보면 분명히 이렇게 돼 있어요. 돈을 사랑하는 것이 일만 악의 뿌리죠. 그러면 성도는 뭘 해야 됩니까? 잘 배웠네. 언제 그렇게 배웠지요. 돈을 사랑하고 무엇이 일만 악의 뿌린지, 난 이만까지 삼만까지 나가. 무엇이 뿌리가 되는지를 스스로 주님의 부정성, 이 세상에서 바깥에 있는 부정성을 보여주기 위해서 우리를 여기다 심어놓은 거예요, 미리.

돈을 사랑하면 안 된다. 그럼 난 돈을 사랑하지 않아야지, 이렇게 하면 주께서 불러서, “니 돈에 대해서 알아?” 개코도 돈에 대해서 모르면서 사랑하니 마니 왜 네 선에서 결정해?
경험해. 돈을 사랑하는 것이 얼마나 너를 찔렀는지.“ 그래서 실제로 주님 시키는 대로 돈을 사랑해보니까 전혀 안 찔리지요. 그건 잘린 자에요. 비로소 내가 말씀과 무관하다는 것이 들통 나는 순간입니다. 들통 나기 싫어서 미리 또 돈을 사랑 안 한다고 해봤자 나의 돈 좋아하는 촉수는 나를 가만두질 않아요.

다시 말해서 요한복음 1장 13절, 이건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그다음에 나온 말 사람의 뜻을 배격하여, 사람에서 출발하고 사람에서 미리 예단하고 예상하고 기대하는 모든 것, 그중에서 제일 큰 문제가 사람은 자기를 선택한다는 거예요. 어떻게 선택하느냐? “꼭 저를 천국에 넣어주세요.” 이거는 횡포입니다.

그런데 이런 횡포를 안 부릴 인간이 없어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부려봐. 부려보고 실제로 네 촉수와 네 체인, 이 땅에서 무한 쪽으로 계속해서 벌어지고 있는 사건들을 다 접촉해보는 거예요. 하루하루 살아가면서. 칠십 년 동안 산 사람은 그만큼 많이 받았고, 팔십 년 산 사람은 그만큼 세상의 무한을 보다 많이 경험한 사람이에요. 많이 깨진 사람이에요.

사십 년? 아직 멀었어. 사십 년 살고 울면 안 됩니다. 오십 대 되면 그것 아무것도 아닌데 왜 울었지, 이렇게 돼요. 저를 꼭 천국에 넣어 달라 할 때 경험해봐라. 요한복음 1장 13절이 옳다는 것을 네가 알게 될 것이다. 천국 넣어 달라고 넣어주는 분이 아니라는 사실, 그게 진짜 살아 계신 하나님이라는 사실.

그러니까 요한복음 자체가 철저하게 부정성이란 콘택트렌즈를 넣어버려요. 우리 눈에다가. 세상을 부정성으로 보되 너 자체를 부정성으로 보게 하는 겁니다. 그게 바로 소경이 아닌 자에요. 소경이 아닌 자에게 있어서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은 예수님의 활동성만 존재하는 그 세계가 유일한 리얼리티, 유일한 현실세계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그다음에 더 나가봅시다. 긍정세계, 긍정은 못 고칩니다. 인간은 자기긍정에 대해서는 확고해요. 뒤에서 마귀가 계속 하기 때문에. 어제 두 번째 강의에 최솟값 이야기했잖아요. 유대인들은 요한복음 8장에 보면 자기의 최솟값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이 수련회 끝나고 요한복음 전체 다 외울 거예요.

요한복음 8장 33절에 “저희가 대답하되 우리가” 최솟값으로 뭘 줍니까? ‘아브라함’을 준 거예요. 최솟값이 아브라함인데 요한복음 8장 44절에 보니까 주님께서 너희의 최솟값이 뭐라 했어요? ‘마귀’라 했지요. 그러니까 주님과 대화가 될 리가 없지요. “우리 아비는 아브라함이다.” 그 유명한 아브라함. 이방인과 유대인을 최소로 시작한 그 아브라함. 아브라함을 축복하는 자에게는 복을 내리고 아브라함을 저주하면 저주 받는다.

마치 노아 때에 방주 기능을 하는 것이, 방주라는 사물체가 그걸 인격으로 구체화된 것이 아브라함이죠. 방주 바깥에는 저주고 방주 안에는 복이 된 것처럼 그걸 인물로 내세워 시작한 것이 아브라함이에요. 아브라함과 함께 있으면 축복이고 아브라함 밖에 있으면 저주인데 아브라함과 함께 있다는 증거가 뭐냐? 하나님께서 창세기 17장에 할례를 행하거든요. 하나님께서 할례를 행하게 되면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고 너희는 거룩한 백성이 된다고 하는.

그러니 할례를 행했던 남성들은 얼마나 자랑스럽겠어요. 그러면 여성은 어떻게 구원 받을 수 있느냐? 할례 받은 남편을 구하면 되지요. 아까 현재 예루살렘 하시딤 남자들, 여자가 할례 받은 남자 구하기 위해서 2억 내지 5억을 줘야 돼요. 여자 쪽에서 구원 받고 천당 가기 위해서. 천당 가는 비용치고 많은 것 아니에요. 신천지도 돈 갖다 바치고, 뭐 대순진리회도 애들 등록금 다 바쳐서 이 호텔 세웠는데. 2억에서 5억 줘서 할례 받은 남자를 찾으면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하시딤에서 사두개인과 바리새인 나와요. 나중에 역사적으로 B.C. 2세기경이니까. 하시딤의 문제점은 뭐냐 하면 율법은 열심인데 자기가 문제 있다는 사실을 몰라요. 그래서 두 번째 강의에 했잖아요. 뭔가 하나님이 자꾸 뭘 요구하니까 내 쪽에서 그게 감당이 안 돼요. 감당 안 되는지 본인들이 알아요.

자기 내부에 올라오는 율법에 대해서 반대되는 속성이 율법이 오히려 자극시켜서 탐내지 말라는 것이 오히려 가만있는 탐심을 자극했다는 사실을 로마서 7장에 나오는 내용을 그들이 경험하고 있다고요. 경험한 그들의 대처방법은 뭐냐 하면 여기 하나님께서 요구하니까 이걸 마중을 나간다 했지요. 마중을 나가 이 스크린에다가 내가 하나님 말씀을 이렇게 문제도 있고 죄 지은 것도 있지만 내가 착한 일해서 그걸 상쇄시키고 나름대로 노력하고 있습니다, 라는 여러 가지 아이디어를 스크린에다 자기 행함으로 공연을 하고 연출을 하는 거예요.

이게 뭐라 했습니까? 신학. 신학의 주제는 이겁니다. 이 좋은 복음과 진리를 될 수 있는 대로 많은 사람에게 전파하기 위해서 유도리, 아주 전문용어지요. 융통성이 있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라는 제안이에요. 보다 많은 사람은 천국 보내기 위해서 좀 우리 노력한 취지를 주께서 아시지요. 이 취지가 건전한 취지기 때문에 수단이 어떠해도 목적이 옳으면 수단도 같이 옳다고 해주시옵소서, 이렇게 나온 겁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이 신학을 공부 안 해서 그런데 신학을 공부하시게 되면 이걸로 신학이 끝이 아니에요. 또다시 무한이 자기를 더욱더 새로운 사건에 입각해서 돈독케 하기 위해서 새로운 방어체제를 계속 개발해야 되는 거예요.

예를 들면 이런 겁니다. 옛날에 고신파, 안식일에 차타고 버스 타면 안 된다. 버스노선이 빈약하고 버스요금이 비쌀 때는 그게 됐어요. 그런데 그 뒤에 이제는 교회가 버스 타고 갈 입장에서는 어떻게 하느냐? 초반기에는 이렇게 아이디어를 가지고 연출한 거예요. 일단은 토요일에 버스 타고 가까운 여관에서 자고 그다음에 교회를 가라. 문제는 모텔의 티비가 문제에요. 안 좋은 게 나와요. 그래서 경건하게 예배할 심령이 음란마귀로 완전히 도배가 되고 말았어요. 무한이 제공하는 새로운 사건이 들이닥친 거예요.

그러니까 바리새인과 똑같아요. 세칙이 필요한 거예요. 안식일을 잘 지키기 위한 세칙. 그게 이스라엘의 탈무드란 겁니다. 이럴 경우는 이렇게 하시고 저럴 경우에는 저렇게 하시고. 거기에 여러분들이 놀아난 거예요. 그 마귀한테 놀아난 거예요. 자기 뜻을, 분명히 요한복음 1장도 안 믿었어요. 1장 13절을 믿을 재주가 있어야지. 신나는 데 다시 읽어볼까요.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내 뜻과 무관하게 이뤄진다 이 말이죠. 내 뜻 저리 가. 니 뜻 안 받아줘.

기도 내용이 뭐예요? 자기 뜻 담았잖아요. 안 받아요. 중보기도고 뭐고 안 받아요. 골방기도고 안 받아요. 기도 안 받으면 기도 안 하면 되지. 기도 안 하는 것도 안 받아요. 기도를 안 했다는 것을 하나님 인정 안 합니다. 인간을 기도 안 해도 쉴 새 없이 쉬지 않고 기도하거든요. 뭔가 구하고 바라는 게 있어요. 말로는 형식화시키지 않았지만 끊임없이 요구하는 게 있습니다.

그래서 여기서 뭐냐? 종교 환상, 복음적인 환상이 일어나는 거예요. 여기는 뭐냐? 성경에 나오는 모든 신앙의 위인들을 모방하기, 흉내 내기, 사도 바울처럼 되기, 예수님처럼 되기, 엘리야처럼 되기 흉내 내기가 되는 겁니다. 여기 이 스크린에 아주 영화가 <아바타2>는 비교가 안 돼요. 화려한 자기, 그러니까 자기 공연이라니까. 시나리오 짜고 연출도 하고 난리도 아니에요.

이것을 용납하고 이런 식으로라도 교인들이 교회 와서 복음 들어야 되지 않느냐는 그것이 바로 신학교에서 가르치는 겁니다. 일단 전략은 꼬시고 교회 데려온다. 일당 주더라고 교회 오고 난 뒤에 두 번째 전략, 그다음에 복음 전한다, 이거거든요. 그런데 돈 받고 온 사람이 복음을 전하면 일단 의도를 갖고 온 사람이 복음이 먹히겠습니까? 안 먹히지요.

그래서 기껏 나오는 것이 개혁주의신학의 모토는 뭐냐? 복음 알았으면 은혜 받았으면 마음을 낮추고 바르게 살라. 이거잖아요. 이게 선배가 있어요. 누구냐 하면 바리새인이에요. 이레 두 번씩 금식하고 기도하고 십일조 하고 구제하고. 자, 이 바리새인 신학에 뭐가 문제입니까? 어제 두 번째 강의 제목이 나옵니다. 최솟값이 자기로부터 시작하는 거예요.

지금까지 한 것이 어제 1강, 2강 정리한 거예요. 정리해도 여러분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지요. 그러면 여기서 주께서 어떻게 하느냐? 이게 중요한 데 요한복음 4장 48절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는 1)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 아멘. 하나 더요. 요한복음 12장 37절, “이렇게 많은 표적을 저희 앞에서 행하셨으나 저를 믿지 아니하니” 됐습니다.

보세요. 예수님의 전략이 이런 거예요. 그들이 원하는 걸 다 줘요. 해주고 그들의 한계를 바닥내게 만드는 거예요. 왜 바닥을 내야 되느냐? 마지막 표적이 남았기 때문에. 그 마지막 표적이 뭐죠? 십자가. 누가 믿어요. 아무도 못 믿습니다. 그래서 거기에 요한복음 12장 38절에 보면, “이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40절에 보면, “저희 눈을 멀게 하시고 저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셨으니 이는 저희로 하여금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깨닫고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부정성이죠.

아무도 제발 믿지 말라는 거예요. 주의 하소연입니다. “주여, 믿습니다.” “믿지 마.” “주님 따르겠습니다.” “따르지 마.” 그래서 유튜브에 유명한 말 있지요. “찍지 마라.” 몰라요? 아이들 자매가 싸우니까 아빠가 찍으니까 찍지 마라, 하는 게 있어요. 참고로 들으세요. “너 믿지 마. 너희는 그냥 부정성이야.” “그러면 시키는 대로 안 믿겠습니다.” “네가 안 믿을 위인이야?”

우리가 내 안에 돌아오는 무한을 하나의 집합으로 세트로 가둬놓는 작업 있잖아요. 내가 하나의 일자가 된다니까. 나는 나다. 이것을 인간이 포기할 수 없어요. 나는 나다. 하나님만이 신이 되지 말고 우리고 같이 신이 되자 하는 게 마귀의 제안이었고 거기에 합세한 거예요. 최소 점을 하나님은 자기로부터 출발했는데 우리의 최소 점도 우리로부터 시작하는 게 어떠냐? 그럴 경우에 우리는 더 이상 피조물이란 족쇄에서 벗어날 수 있다. 이게 진정한 해방이고 자유다. 이게 마귀의 심정이잖아요. 10분 쉽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