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오후설교

존재와 기능

아빠와 함께 2022. 12. 11. 19:02

존재와 기능 

2022년 12월 11일                본문 말씀; 예레미야 5:1-5

(5:1) 너희는 예루살렘 거리로 빨리 왕래하며 그 넓은 거리에서 찾아보고 알라 너희가 만일 공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를 한 사람이라도 찾으면 내가 이 성을 사하리라

(5:2) 그들이 여호와의 사심으로 맹세할지라도 실상은 거짓 맹세니라

(5:3) 여호와여 주의 눈이 성실을 돌아보지 아니하시나이까 주께서 그들을 치셨을지라도 그들이 아픈 줄을 알지 못하며 그들을 거의 멸하셨을지라도 그들이 징계를 받지 아니하고 그 얼굴을 반석보다 굳게 하여 돌아오기를 싫어하므로

(5:4) 내가 말하기를 이 무리는 비천하고 우준한 것뿐이라 여호와의 길, 자기 하나님의 법을 알지 못하니

(5:5) 내가 귀인들에게 가서 그들에게 말하리라 그들은 여호와의 길, 자기 하나님의 법을 안다 하였더니 그들도 일제히 그 멍에를 꺾고 결박을 끊은지라

(5:6) 그러므로 수풀에서 나오는 사자가 그들을 죽이며 사막의 이리가 그들을 멸하며 표범이 성읍들을 엿보온즉 그리로 나오는 자마다 찢기오리니 이는 그들의 허물이 많고 패역이 심함이니이다

예루살렘이란 장소는 특화된 공간입니다. 전 세계의 모든 지역을 하나의 특화된 공간으로 축약시켜 놓은 곳입니다. 따라서 그곳에 주어진 질문은 실은 온 인간세계 전역에 주어질 질문이기도 합니다. 그 질문은 이러합니다. “단 한 사람이라도 진리를 아는 자 있느냐”입니다. 답은 “없나이다”입니다.

그렇다면 진리 찾는 이가 단 한 사람도 없는 예루살렘은 운명은 어떻게 될까요? 황폐함입니다. 저주받음입니다. 끝입니다! 이는 곧 인류 전체의 암담한 미래상이며 바뀌지 않습니다. 이미 확정된 운명으로 자리잡은 겁니다. 왜 하나님께서 일을 이렇게 벌리시는 겁니까? 그것은 진정한 인간, 진정한 존재자는 예수님으로 이미 확정되었기 때문입니다.

곧 인간은 단 한명이라도 진리를 찾고 공의로운 사람이 없다는 뜻입니다. 이 이야기를 듣는 자들이 예레미야에게 어떤 태도를 취할 겁니까? 이렇게 대꾸할 겁니다. “너는 의인이냐 죄인이야?”라고 말입니다. 만약이 “나도 죄인이야”라고 나온다면 이것은 곧 “죄인 주제에 알지도 못하면서 어디서 진리인양 선언해!”라고 달려들 겁니다.

또는 만약에 예레미야가 “나는 의인이야”라고 한다면, 그렇다면 진리를 아는 사람, 한 사람은 있는 게 되기에, ‘단 한 사람도 없다’는 예레미야의 주장은 거짓이 되는 겁니다. 여기서 우리는 존재와 기능을 구분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는 오늘 질문하신 것, 곧 ‘과연 공의를 알고 진리에 관심있는 자가 단 한 사람이라도 있느냐’라는 것은 ‘단 한사람’이라는 점에 강조하신 것을 봐서 인간 존재 전체를 한꺼번에 처리할 의지가 있었던 겁니다.

그것은 바로, 인간 존재에 대해서 아예 의나 공의를 기대할 수 없음을 분명히 하시려는 겁니다. 인간 세상에서는 자신이 해낼 수 있는 기능으로 자신의 존재의 가치를 확인하려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인간은 아예 죄인이기에 그 어떠한 공의나 진리가 나올 수 없다고 단언하십니다.

그렇다면 예레미야의 경우는 뭡니까? 예레미야도 죄인 맞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이야에게 어떤 낯선 기능이 나오게 하시는데 이는 장차 오실 예수님이 하실 일을 미리 보이시는 겁니다. 즉 존재적으로 예레미야는 죄인이지만 기능적으로 메시야의 기능이 나오는 겁니다.

실은 이 인간 세상 자체는 자기 존재를 버티려는 기능과 기능들로 내뱉어진 세상입니다. 에를 들면, 회사란 사무와 제품개발과 영업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다 기능입니다. 회사에 입사하는 자들은 자신의 존재성을 내세우면 아니됩니다. 자신의 기능성으로 승부걸어야 합니다.

회사에 꼭 필요한 기능 보유자라는 점을 증명해야 합니다. 자신의 착함과 선함과 효도자라는 것은 회사에서는 필요치 않는 기능입니다. 그런데 이런 기능을 뒤따라가면 그 끝에는 자기 존재를 위한 일이라는 점이 밝혀집니다. 바로 여기서 하나님의 일과 충돌이 일어납니다. 하나님의 일은 아예 정의와 진리를 찾는 자가 아예 없다는 겁니다.

이것은 되게 진리를 찾고 공의를 행사하시는 존재자가 따로 계시다는 겁니다. 따라서 그 앞에 모든 존재는 죄인이 되는 겁니다. 예레미야는 바로 의로운 주님의 존재를 위한 기능자로서 선지자가 된 겁니다. 따라서 그가 외치는 말의 내용은 진리요 의로운 것이 되는 겁니다. 존재적으로는 죄인이지만 기능적으로 의로운 겁니다.

이것은 엘리야 선지자에게도 그 예를 찾을 수가 있습니다. 열왕기상 19:11-13에 보면,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너는 나가서 여호와의 앞에서 산에 섰으라 하시더니 여호와께서 지나가시는데 여호와의 앞에 크고 강한 바람이 산을 가르고 바위를 부수나 바람 가운데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바람 후에 지진이 있으나 지진 가운데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또 지진 후에 불이 있으나 불 가운데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더니 불 후에 세미한 소리가 있는지라 엘리야가 듣고 겉옷으로 얼굴을 가리우고 나가 굴 어귀에 서매 소리가 있어 저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고 되어 있습니다. 즉 인간 존재로서는 하나님 존재와 만날 수가 엇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선지적 기능자로 엘리야를 찾아나서면 관계가 성사됩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까지 하시는 이유는, 인간 존재 위주의 세계에서 한 모퉁이를 도려내시는 겁니다. 그 이미지를 따로 떼어내시고 이 존재를 대표적으로 예수님의 존재에 나서게 해서 그것이 일방적으로 죄가 됨을 규정받습니다.

그리고 난 뒤에 그 도려낸 선지자 이미지를 다시 기존의 인간 세계에 붙여 연결시키면, 이 인간 세계는 이제 심판의 기능의 대상이 되는 겁니다. 바로 그 일이 예루살렘을 통해서 알려지고 벌어지게 됩니다. 예루살렘에 전달된 계시가 전 세계적으로 적용되는 현실이 되는 겁니다. 다른 현실은 없습니다.

선지자는 자기 시대에 심판 기능의 내용을 알리고 심판을 실제적으로 실시하는 것은 천사들입니다. “일곱 재앙을 가진 일곱 천사가 성전으로부터 나와 맑고 빛난 세마포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 네 생물 중에 하나가 세세에 계신 하나님의 진노를 가득히 담은 금 대접 일곱을 그 일곱 천사에게 주니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을 인하여 성전에 연기가 차게 되매 일곱 천사의 일곱 재앙이 마치기까지는 성전에 능히 들어갈 자가 없더라(계 15:6-8)

이렇게 되면 인간 세계의 운명은 요지부동입니다. 심판에서 빠져나갈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성도를 왜 하나님께서 이 세계에 남겨두시는 걸까요? 그것은 왜 이 세상이 망해야만 마땅한 지옥에 불과한가를 성도의 기능을 통해서 드러내기 위함입니다. 성도의 인생관을 이제 말끔하게 확정되었습니다.

성도는 더 이상 자기 존재를 챙길 필요가 없을 정도로 가볍습니다. 주님의 존재로 하신 것들을 알리고 나타내는 이 시대의 선지자로서 기능하는 자들이 성도입니다. 세상은 여전히 자기 존재를 궁극적으로 챙기려는 의도로 가득차 있습니다. 여기서 뿜어져 나오는 각종 잡음들로 가득차 있습니다.

그 잡음들을 뚫고 나오는 ‘세미한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그 ‘세미한 음성’이 공의요 진리입니다. 성도만큼은 이 세미한 음성을 부정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존재보다 우선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세상이 망하는지를 증거하기 위해 주님께서 파견한 그 기능에 소홀하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29강-예레미야 5장 1~5절(존재와 기능)221211 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예레미야 5장 1~5절절입니다. 구약성경 1057페이지입니다.

“너희는 예루살렘 거리로 빨리 왕래하며 그 넓은 거리에서 찾아보고 알라 너희가 만일 공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를 한 사람이라도 찾으면 내가 이 성을 사하리라, 그들이 여호와의 사심으로 맹세할찌라도 실상은 거짓 맹세니라, 여호와여 주의 눈이 성실을 돌아보지 아니하시나이까 주께서 그들을 치셨을찌라도 그들이 아픈줄을 알지 못하며 그들을 거의 멸하셨을찌라도 그들이 징계를 받지 아니하고 그 얼굴을 반석보다 굳게 하여 돌아오기를 싫어하므로, 내가 말하기를 이 무리는 비천하고 우준한 것 뿐이라 여호와의 길, 자기 하나님의 법을 알지 못하니, 내가 귀인들에게 가서 그들에게 말하리라 그들은 여호와의 길, 자기 하나님의 법을 안다 하였더니 그들도 일제히 그 멍에를 꺾고 결박을 끊은지라”

예루살렘 거리를 왕래하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일어난 인간세계의 모든 일을 예루살렘이라는 좁은 공간에 축약시켜 놓았습니다. 집약시켰어요. 여러 동네 이야기를 다 할 것 없이 표본적으로 예루살렘에서 일어난 일만 딱 끄집어내도 인간세계는 뻔하다는 겁니다. 예루살렘을 표본적으로 하는 이유가 거기에 하나님 계시의 완성, 말씀의 완성이 거기서 최종적으로 주어지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예루살렘을 주목하라. 거기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가를 보라’입니다. 무슨 일이 벌어졌습니까? ‘Is anyone here?’ 여기 아무도 없어요? 거기에 아무도 없어요. 사람은 많은데 진리를 구하는 사람, 공의를 구하는 사람, 그런 사람이 단 한 명이라도 있는지 찾아보라는 겁니다. 하나님의 자신감입니다.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모두 다 똑같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예레미야 너는 뭐야?’라고 궁금증이 생기는 것은 당연하죠. 단 한 사람도 없다고 자신만만하게 이야기하는 예레미야 너는 그 단 한 사람에 속하느냐, 아니면 너도 마찬가지냐고 주변에서 들고 일어나서 막 묻고 싶어서 안달이 나겠지요. 단 한 사람이 없다는 거기에 대한 간단한 답변은 두 가지로 나눠서 답변해야 합니다. 하나는, 네가 나에게 묻는 것이 기능적으로 묻느냐, 존재적으로 묻느냐고 갑자기 질문을 어렵게 몰고 가야 해요.

‘단 한 사람도 없다면 예레미야 너는 뭐야? 그러면 네가 하는 것도 공의가, 진리가 아니라면 진리도 아닌 주제에 어디 진리처럼 행세해서 단 한 사람도 없다는 극단적인 발언을 쏟아 놓느냐. 못 믿는다’라고 나올 수가 있잖아요. 네 자체가 ‘나는 옳지 않다고 한다면 옳지 않은 사람이 내뱉는 말을 우리가 믿을 필요가 없지 않으냐?’라고 되는 거예요.

아니면 다른 사람은 타락하고 다른 사람은 모두 진리가 아니라도 예레미야 나는 옳다고 이야기한다면 ‘그러면 한 사람은 있네. 예레미야 너는 있잖아. 네가 한 말이 거짓이잖아. 한 사람이라도 있는지 찾아보라는 말은 없다는 말인데 네가 거기서 왜 나와? 네가 불쑥 튀어나와서 옳다고 해버리면 네 말의 내용과 네가 말하는 것이 모순되지 않느냐?’라고 반박이 들어온다는 거죠.

그렇게 될 때 이 반박을 피하는 방법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존재적으로 우리에게 공의가 없고 진리가 없는 것을 죄라고 합시다. 이 세상에는 의인은 없고 오직 죄인밖에 없습니다. 죄인만 있는 사회에서 그러면 죄인끼리 살면 되지 않느냐고 나오겠죠. 누가 아쉽고 답답하겠어요. 죄인끼리 월드컵하고 축구하고 살면 된다고 할 텐데, 문제는 죄인이 되게 되면 어떤 혜택이 없느냐면 이런 혜택이 주어지지 않아요.

마태복음 5장 33~34절에 보면 “또 옛사람에게 말한바 헛맹세를 하지 말고 네 맹세한 것을 주께 지키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도무지 맹세하지 말찌니”라고 나옵니다. 도무지 맹세하지 말라는 것은 도무지 기도해도 소용없다는 뜻이에요. 네가 어떤 것을 요구하더라도 하나님은 너의 기도를 안 듣는다. 왜? 하나님의 원칙에 죄인의 기도는 안 듣습니다.

죄인의 기도를 안 듣는다는 말을 다른 쉬운 표현으로 한다면 내가 한 기도는 안 받습니다. 내 이름으로 하는 기도는 안 받습니다. 하나님의 기도는 주의 이름으로 한 기도만 받습니다. 달리 이야기하면 주께서 한 기도만 받습니다. 성령께서 한 기도만 받습니다. 이미 창세 전에 확정된 기도만 받습니다. 그렇다면 나의 이름을 가진, 나의 명예를 가진 이런 내가 하는 기도가 소용없는 기도라면 내가 소용있는 기도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내 이름을 일단 없애야죠. 내 이름을 없애야 하는데 그냥 자살한다고 없어지는 것이 아니에요. 주의 이름이 나의 이름으로 하는 기도에 침범해야 해요. 침투해서 내 이름으로 하는 기도 내용에 대해서 완벽하게 지배해야 합니다. 내 기도에 대해서. ‘너 기도했지?’ ‘네’ ‘그거 가져와’ ‘제 기도에 대해서 응답 안 해주시나요?’ ‘응답같은 소리 하지 말고 가져와. 내가 알아서 요리할 거야’

이렇게 기도하는 가운데 그 기도하는 우리 자신까지 주님께 일임하고 맡겨야 합니다. 그럴 때 내 이름에서 주의 이름으로 전환됩니다. 이것은 내 이름으로 기도하는 이 간절함이 주께는 전혀 통하지 않고 먹히지 않는다는 겁니다. 나의 간절함, 그것조차도 묵살한다는 말은 곧 나의 죽음을 기정사실화 시켜서 나의 죽음이 그다음에 주께서 일하실 때 기능적으로 필요하신 겁니다. 이제 기능이 나옵니다.

나의 존재를 죽여서 주님이 원하시는, 주님의 존재가 필요한 기능으로 활용하는데 우리의 기도가 필요했던 겁니다. 기도발이 먹히지 않는 기도가 주님에게 필요했던 거예요. 기능적으로. 그래서 기능적으로 지금 예레미야는 의인입니다. 기능적으로는 의인이에요. 그리고 존재적으로는 죄인입니다. 그러나 그 죄인이 외치고 있는 이 선지적 예언은 기능적으로 하나님이 필요해서 예레미야에게 예언하게 하신 겁니다.

그래서 제가 존재와 기능을 구분하는 거예요. 그러면 이것이 성격적 세계에서만 그런가. 아니에요. 일상에도 그렇습니다. 일상적으로 이 사회 자체가 자본주의 사회 아닙니까? 자본주의 사회에서 선생님이 학생에 물을 때 ‘너 아버지 계시냐?’라고 안 물어요. ‘느그 아부지 뭐하시노?’라고 묻죠. 기능적으로 물어요. 회사에서 직원을 뽑습니다. 회사라는 경제주체가 할 수 있는 것은 딱 세 가지예요.

하나는 개발입니다. 상품개발. 또 다른 하나는 영업입니다. 세 번째는 그 두 가지를 뒷받침하는데 필요한 일들, 경리, 서무, 총무, 회사관리에 필요한 인원들이에요. 제품 개발과 따로 있고 개발한 것을 영업하는 일, 그리고 내부적 사무일, 회사는 이 세 가지입니다. 이 세 가지 기능, 기능에 필요해서 기능적인 사람을 뽑는 거예요. ‘나는 인간성 좋아요. 믿음 좋아요’라고 해도 뽑지 않아요. ‘나는 부모님에게 효도합니다’라고 하면 ‘네, 집에 가서 효도 많이 하세요’라고 하죠. 뽑지 않아요.

회사 기능에 필요한 부속품을 뽑는 거예요. 이 사회는 기능만 찾는 사회예요. 착한 사람 찾는 게 아니고 능력 있는 사람 찾는 겁니다. 그런데 인간은 기본적으로 자기 존재가치를 회사에서 찾으려고 하니까 회사에서는 오래된 사람 내보내고 젊은 사람 뽑을 수밖에 없어요. 월급만 축내고 월급 값을 못 하는 생산성을 발휘 못 하니까 밀어낼 수밖에 없죠.

드라마 잘 안 보는데 쓱 보니까 이런 이야기가 있어요. ‘고구마가 좋아, 내가 좋아?’라고 여자가 훅 들어오는 거죠. ‘삼 남매’라는 드라마 보면 나와요. 지금 그 여자가 뭔가 착각하고 있는 거예요. 그때는 남자가 이렇게 대답해야 해요. ‘너 존재적으로 묻는 거야, 기능적으로 묻는 거야?’라고. ‘고구마 캐는 여자가 좋아, 여자라는 사람이 좋아? 라고 물은 거야, 아니면 고구마라는 존재, 그 뾰족하고 겉은 붉은 맛있는 호박고구마가 좋아, 아니면 사람이 좋은지 물은 거야?’

그것은 묻는 게 아니죠. 그건 개 대통령에게도 그렇게 안 물어요. ‘개가 좋아, 사람이 좋아?’라고 그렇게 묻는 게 아니에요. 그걸 가지고 어이가 없다고 하는 거예요. 맷돌 돌리는 손잡이인 어이가 없다고 하는 거예요. 어처구니없다는 뜻이죠. 그러니까 왜 예루살렘에 집약을 시키느냐 하면 예루살렘은 사람들이 자기 존재를 살리는 곳이 아니에요. 예루살렘이 뭐 하는 곳이냐면 모든 인간이 다 죽었음을 유일하게 표현해 주는 축약된 장소입니다.

모든 인간은 죽어 마땅하다. 로마서 6장의 말씀처럼 인간이 죽는 것은 자기 죗값입니다. 이걸 편안하게 흔쾌히 받아들이면 그때부터 우리는 기능적 존재가 되는 겁니다. 내 존재에 대해서는 주님에게 예수님 안에 일임해 버리세요. 아까 이야기했잖아요. 주님께서 필요한 것은 죄인이라고. 주님을 의인에 대해서는 아예 모집 광고를 내신 적이 없어요.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눅5:32)

그래서 우리는 주님이 부르실 때는 어떤 입장에서 부르시느냐 하면 ‘너 죄인 맞잖아’라는 입장에서 우리를 불러주십니다. 그렇게 해서 내가 의인이 되려는, 내가 스스로 의인 되려는 모든 정신적 부담에서 우리를 해방시킵니다. 죄인 주제에, 내가 바르게 살아서 구원받는 그런 경우는 없습니다. 아까 주일학교에서도 이야기했지만, 죄인이 많이 운다고 해서 의인 취급해주지 않아요.

보통 많이 우는 것을 군에서는 ‘즙 짠다’라고 합니다. 남자들은 잘못하면 얻어맞는데 여자들은 잘못해도 즙만 짜면 다 용서가 돼요. 하사관이든 장교든 찔찔 짜면 다 용서가 돼요. 거기에 한마디 했다가는 성차별로 법무국장까지 모가지 날아가는 수가 있습니다. 군에는 여자에게 말만 잘못해도 자기 평생 직업이 날아가고 연금도 같이 날아가요. 큰일 날 문제죠.

그러나 성경의 세계에서는 찔찔 짠다고 해서 구원해주지 않습니다. 회개한다고 구원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어떤 것을 행사해도 우리는 구원이 안 됩니다. 그것은 우리 존재에서 나오는 기능이기 때문에 우리 존재를 아예 도외시하기 때문에 받지를 않습니다. 그게 어디에 나오느냐. 열왕기상 19장 11~13절에 나옵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너는 나가서 여호와의 앞에서 산에 섰으라 하시더니 여호와께서 지나가시는데 여호와의 앞에 크고 강한 바람이 산을 가르고 바위를 부수나 바람 가운데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바람 후에 지진이 있으나 지진 가운데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바람과 지진같은 이런 것은 인간이 자기 존재로 다른 존재를 바라볼 때 차이를 파악할 수 있는 대상들이죠. 그다음을 보면,

“또 지진 후에 불이 있으나 불 가운데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더니” 바람, 지진, 불 가운데 여호와가 계시지 않습니다. 이 말은 인간 쪽에서 시도하는 여호와 찾기는 실패한 거예요. 여호와는 인간에게 찾아지지 않습니다. 왜냐 하면 인간 존재는 여호와 존재와 만나지 않기 때문에, 오직 기능적으로 만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면 여호와가 어디 계신가?

“불 후에 세미한 소리가 있는지라” 세미한 소리. 어떤 분이 저에게 기도문을 써달라고 해서 제가 써줬어요. 그런데 기도문 안에 이걸 집어넣었습니다. 오늘날 21세기를 살아가면서 너무 잡음을 많이 들어요. 잡다한 이야기를 많이 듣습니다. 거기에 같이 휘둘리고 있어요. 잡다한 소리. 어디에 땅 사 놓으면 좋고, 주식은 얼마가 올랐고, 대출받는 방법, 이런 온갖 잡다한 이야기를 엄청나게 들어요.

그런데 세미한 소리를 못 들어요. 잡다한 소리는 내 존재를 키워주고, 내 존재를 부자 되게 만들어주는 잡다한 소리예요. 나를 우쭐하게 만들고 나를 건방지게 만드는 소리라고요. 요근래 많이 듣던 소리가 이겁니다. ‘대~~한 민국! 짝!짝!짝!짝!짝’ 이 잡다한 소리를 많이 들어요. 그 잡다한 소리 때문에 세미한 소리가 들리지 않습니다.

잡다한 소리는 내가 내 존재를 인정하고 뭔가 다른 존재를 파악하는 능력이지만 세미한 소리는 우리에게 일체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엘리야에게 그리고 오늘 본문 예레미야에게 예루살렘에서 의인이 있으면 찾아보라는, 장담하는데 한 사람도 없다는 이야기를 왜 하시는가. 이게 좀 어려우니까 여기서 좀 참으시면 됩니다.

뭐가 어려우냐 하면 여기서 하나님의 기호적 재봉기술이 동원됩니다. 기호적 재봉기술이라고 하는 것은 뭐냐 하면 하나님이 생각한 응축된 이미지를 한쪽을 재단합니다. 딱 찍어내요. 예루살렘이 대표적인데, 예루살렘에서 일어났던, 그래서 그들이 3절, 4절, 5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엄청나게 심판을 가해버려요. 예루살렘을 힘들게 합니다. 하나님께서 “나는 의인을 찾는다. 내가 율법을 너희에게 줬잖아. 그런데 율법에 관심 있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고 지키는 사람도 한 사람도 없지? 그래서 나는 너희들의 맹세나 기도한 거 일체 듣지 않고 일방적으로 심판을 선포해버리겠다”라고 하시는 거죠.

아까 전에 마태복음 5장에 맹세 이야기를 좀 더 설명해 드리면 이렇습니다. 34~37까지 다시 보면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도무지 맹세하지 말찌니 하늘로도 말라 이는 하나님의 보좌임이요, 땅으로도 말라 이는 하나님의 발등상임이요 예루살렘으로도 말라 이는 큰 임금의 성임이요” 메시아의 성인 거죠. “네 머리로도 말라 이는 네가 한 터럭도 희고 검게 할 수 없음이라”

그러니까 아무것도 맹세하지 말라는 거죠. 맹세할 수 있는 자격은 죄인에게는 없습니다. 인간은 맹세해야 미래가 보장되는데, 미래 자체를 인간 손으로 설계할 자격이 인간에게는 허용된 적이 없습니다. 내일 염려는 주께 맡겨야 해요. 내일 염려까지 미리 당겨서 할 필요가 없습니다. 내일의 일까지 걱정할 권한과 자격은 우리에게 없습니다.

그러면 ‘내일 일을 걱정하지 말라는 말입니까?’라고 나올 텐데 제가 아까 이야기했죠. 하나님은 내일까지 염려하고 미리 당겨서 염려하는 기능이 필요하다고요. 죄가 필요한 거예요. ‘하지 말라’라는 말은 지금 그 죄를 네가 현재 짓고 있는데 그 의미를 바꾸자는 겁니다. 네가 그 의미를 갖고 있지 말고 주님께 이 죄가 어떤 식으로 활용되는지를 네가 똑똑히 보라는 겁니다.

그게 바로 기능적인 건데, 이미지를 셋팅해서 잘라버려요. 그걸 누가 가지고 있느냐 하면 주님이 이걸 사용하십니다. 주께서는 죄인의 육신의 모습으로 오셔서 자기 특정한 인간들의 현실을 재단해서 잘라버려요. 이미지를 잘라놓고 그 자른 것을 가지고 기존에 멸망할 수밖에 없는 세상에 다시 재봉틀을 가지고 연결해 버려요. 이게 하나님의 기호적 재봉기술입니다.

특화된 존재로서 기능으로 발휘하는 거예요. 그런데 이렇게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사람은 이미 그 사람들은 구원받은 사람으로서 예수님의 존재에 의해서 쓰이는 사람, 그런 사람으로서 이 세상에 남겨진 인생을 살게 되는 거예요. 제가 어렵다고 했죠. 그런데 왜 그런 식으로 설명하느냐 하면 그렇지 않으면 오늘날 성도의 하루하루가 무의미하게 되는 겁니다.

‘그냥 죽이지 왜 살려둡니까?’ 아니 아니야. 네가 ‘죽이면 되지, 살리면 되지’라고 하는 것은 존재적으로 생각하는 거야. ‘내가 죽으면 편하겠지’라는 것은 너의 존재만 생각하는 거야. 너의 편한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주님께서 네게 없는 것을 주께서 주시는 거예요. 인간은 주님께 없는 것을 요구하고요, 주님은 내가 원치 않는 것을 주시려고 하는 겁니다.

타인에게 없는 것을 요구하고 내가 원치 않는 것을 일방적으로 주려고 하는 관계. 이것을 사랑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인간의 사랑이 왜 자꾸 깨지는지 아시겠죠. 일방적으로 자기 생각만 하시기 때문에 다 깨지는 겁니다. 상대방이 없는 것을 요구하는 겁니다. 상담 필요 없어요. 부부 상담 이런 거 하지 마세요. 당신은 남에게 없는 것을 자꾸 요구하는 본인의 습성이 본인의 인생을 망쳐버린 거예요.

그리고 자꾸 아내를 기쁘게 하려고 애쓰는데 그거 다 쓸데없는 짓이에요. 줘도 줘도 내가 언제 달라고 했느냐고 그런 소리밖에 안 나와요. ‘재롱떨지 마. 언제 내가 이런 거 원했어?’라는 반응뿐이죠. 나는 성의를 다했다고 해도 ‘언제 너의 성의를 원했는가. 나의 마음을 알아주기를 원하지’라고 하는데 세상에 그런 무리한 요구가 어디 있습니까. 자기 마음도 모르는데 무슨 남의 마음을 알아요.

차라리 ‘고구마가 좋아, 내가 좋아?’라고 하세요. 인간은 결코 타인의 마음을 알 길이 없습니다. 자기 마음에 충실하기 때문에 남의 마음에 신경 쓸 수가 없어요. 그래서 사랑이라 하는 것은 한쪽이 다른 한쪽에 맡겨야 해요. 기능적으로 맡기시기 바랍니다. 끝으로 이렇게 기능적으로 맡긴 사람이 있느냐.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에 엄청나게 많이 나옵니다.

요한계시록에 보면 천사가 나오는데요, 15장 2~8절에 보게 되면 제가 축약해서 말씀드릴게요. 짐승과 우상에 속했던 자들이 모세의 노래를 부르면서 유리 바다를 건너 천국으로 도착했습니다. 존재적으로 이미 그들은 구원받은 겁니다. 그러면 이 세상에는 어떤 일이 벌어졌는가. 구원받았으면 이미 끝난 일이 아닌가. 아닙니다.

여기에 일곱 재앙을 가진 일곱 성전에서 나오는데 6~8절을 읽어보면 “일곱 재앙을 가진 일곱 천사가 성전으로부터 나와 맑고 빛난 세마포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 네 생물 중에 하나가 세세에 계신 하나님의 진노를 가득히 담은 금 대접 일곱을 그 일곱 천사에게 주니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을 인하여 성전에 연기가 차게 되매 일곱 천사의 일곱 재앙이 마치기까지는 성전에 능히 들어갈 자가 없더라”

이 말이 뭐냐 하면 오늘 본문 그대로입니다. 이 세상에 의인도 없고, 진리도 없고, 공의도 없는 세상을 목격하라고 오늘날 성도들을 이 세상에 기능적으로 살게 하십니다. 우리 인생관은 간단해요. 저래서 망하는구나. 그거 발견하는 재미로 사시면 나중에 요양병원 가더라도 즐겁습니다. 아무 걱정하지 마세요. 괜히 다른 헛꿈 꾸지 마세요. 내가 잘 될 거란 생각하지 마세요. 존재는 없습니다.

우리 존재는 이미 판정 났기 때문에 끝났어요, 끝났고 이제 어느 구석에 가든 ‘아, 이래서 망하는구나. 아, 군대가 이래서 지옥이구나. 지옥 구경 한번 해볼까? 아, 여기서 대장질하고 까불고 그러는구나. 안 가봤으면 큰일 날 뻔했네’라고 느긋하게 회사에 취직해도, 어디를 가더라도 의인은 없고, 공의나 진리를 찾는 사람 없고, 모두 다 자기 잘남을 위한 기능인들만 들끓는 세상, 자기 존재밖에 모르는 하나님 진노의 대상입니다. 말씀대로 되어가는 겁니다.

그런 점에서 다른 사람들이 ‘너는 의인이야?’라고 물으면 ‘두 가지 이야기해라. 존재적으로냐, 기능적으로냐? 존재적으로 나 죄인이야. 그러나 기능적으로는 주께서 일을 시키니까 그 일은 의인이야’라고 이렇게 의를 증거 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복잡한 인생관 깔끔하게 정리되게 하옵소서. 이미 모세의 노래, 유리 바다 건너서 천국에 도착하고 합격한 자에게 남아서 육체에 있는 것은 왜 세상이 진리를 찾지 않는지, 멸망해야 마땅한지를 우리가 발견해서 주님의 모든 조치가 합당한 것을 증거 하는 증인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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