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질서
2022년 11월 27일 본문 말씀: 예레미야 4:23-28
(4:23) 내가 땅을 본즉 혼돈하고 공허하며 하늘들을 우러른즉 거기 빛이 없으며
(4:24) 내가 산들을 본즉 다 진동하며 작은 산들도 요동하며
(4:25) 내가 본즉 사람이 없으며 공중의 새가 다 날아갔으며
(4:26) 내가 본즉 좋은 땅이 황무지가 되었으며 그 모든 성읍이 여호와의 앞 그 맹렬한 진노 앞에 무너졌으니
(4:27) 이는 여호와의 말씀에 이 온 땅이 황폐할 것이나 내가 진멸하지는 아니할 것이며
(4:28) 이로 인하여 땅이 슬퍼할 것이며 위의 하늘이 흑암할 것이라 내가 이미 말하였으며 작정하였고 후회하지 아니하였은즉 또한 돌이키지 아니하리라 하셨음이로다
하나님의 단호함이 담겨 있는 계시입니다. 인간들은 눈에 들어오는 풍경이 다입니다. 그리고 인간의 머리 속에서 자신의 경험했던 것들에 대한 자신의 느낌이 다입니다. 그래서 인간들 머리 마음 속에는 공허함이 뭔지 혼돈이 뭔지를 모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사는데 필요한 것들이 늘 나름대로 있어 왔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몽땅 모든 인류가 다 죽고, 더는 이 대자연에서 건질 것이 없다는 상황을 그려낼 수가 없습니다. 경험한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 말씀은 앞으로 모든 인간들이 나름대로 건설한 것을 모조리 다 없애주시겠다는 겁니다. 이는 곧 인간이 대자연을 보고 수립한 자체적인 질서체제를 하나님께서 일절 인정하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사람들은 그 어떤 경우라도 ‘내가 더 살 가치없다’는 인정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악착까지 최후까지 붙드는 바는 “나 어떻게 하면 더 살 수 있어요?”입니다. 즉 이 세상을 보고 거기서 자신이 살 수 있는 질서를 뽑아내도록 허락해 달라는 겁니다. 혹은 용납해 달라는 겁니다. 인간들이 스스로 힘으로 사는 것에 대해서 신이 훼방하지는 말아 달라는 겁니다.
인간들은 하나님의 뜻은 안중에도 없습니다. 즉 인간들은 하나님께서 나름대로 이 자연을 통해서 질서의 윤곽을 떠오르는 작업에 대해서 관심이 없습니다. 자기 살 궁리에 몰두합니다. 인간은 자신이 살아야 이 대자연의 주인공이요 주체인 척을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 인간들의 이러한 의도에 의해서 자연이 망쳤다는 겁니다.
즉 인간의 모든 활동 자체로 인하여 혼돈이 더욱 심화된다는 겁니다. 인간이 자기 일에 치중하면서 치중할수록 혼돈은 가속화됩니다. 처음 인류 역사에서 수학(기하학)이 등장하는 것은 국가적 규모의 관개시설 때문입니다. 홍수가 나게 되면 강 주변의 농토들은 다 물에 잠기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어느 것이 원래 자기 농토인지 아닌지 구분 못하게 되어서 다툼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리고 관개시설을 하면서 토지에 대한 효율성을 높일 수가 있습니다. 기하학이란 영어로 geometry입니다. ge라는 것은 땅이라는 뜻이고 metros는 측정하다는 뜻입니다. 땅을 뽀족한 각이 진 도형별로 구분짓는 것은 이 혼란스럽고 혼돈한 자연에 질서잡기 위함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철저하게 질서잡아 나가도 이 자연의 대변화는 점점 과제를 더 추가할 수밖에 없습니다. 더 세밀하고 더 자세하고 탐색을 하면할수록 이 자연은 무한이 버티고 있습니다. 가까이가면 갈수록 최종적인 끝은 무한쪽으로 물러가게 됩니다. 인간들이 따라잡을 수 없는 정도로 말입니다.
그래서 현대 물리학자들은 전 우주를 측정할 수 있는 우주를 재는 미터자도 규정해내었습니다. 소위 ‘프랑크 길이’라는 겁니다. m입니다. 이 프랑크 길이를 발견하기 위해 인간들은 세 가지 우주상수를 정했습니다. 하나는 G라고 하는 중력세기 요 다른 하나는 ħ(에치취 바)인데 이는 양자 효과이며 그 다음에 C 곧 어느 경우라도 속도가 1초에 삼십만 km라는 점을 취득해서 만들었습니다.
이는 곧 온 우주의 변화를 철저하게 탐색하고 규정하겠다는 겁니다. 하지만 인간이 모르는 바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 나름대로 질서잡기를 이미 개시했다는 겁니다. 그것은 창세기 3:15에 나옵니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혼돈 속에서 하나님께서는 나름대로 일관된 질서를 잡아나가셨습니다. 여기서 여자의 후손은 예수님이십니다. 그리고 뱀의 후손은 악마입니다. 인간은 이미 악마의 권세 속에서 꼼짝 못하고 사로잡혀 있습니다. 따라서 이 하나님의 질서잡기에 있어 인간들은 그 어떤 식으로 협조하거나 자기 의견을 개진할 자격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질서의 윤곽을 잡아나가는 겁니다. 이 작업으로 인해 하나님께서 인간은 ‘죄로 인해 이미 죽은 자’로 간주해버립니다. 그런데 이 죽은 자들인 인간들이 자신이 죽은 줄도 모르는 겁니다. 마치 ‘식스센스’라는 영화처럼 말입니다. 주인공인 정신과의사가 자신이 이미 죽은 유령인 것도 모르는 채, ‘유령이 보인다’는 어린 아이를 치료하려고 덤빈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에 의해서 인간이 유령처럼 다루어진다는 사실을 모르고 인간들은 계속 좀 더 자신이 더 살아야한다는 일념으로 세상을 해석하고 설명하려고 합니다. 그러다 보니 자꾸 하나님께서 제시한 질서의 윤곽을 놓치고 있는 겁니다. 이스라엘을 통해서 나타난 하나님의 질서 윤곽은 ‘성전’의 존재로 나타납니다.
이 성전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천국에서 버림받을 자와 천국에 들어갈 자가 어떻게 구분되는지를 보여줍니다. 에스겔 44:7-9에 보면, “대저 너희가 마음과 몸에 할례 받지 아니한 이방인을 데려오고 떡과 기름과 피를 드릴 때에 그들로 내 성소 안에 있게 하여 내 전을 더럽히므로 너희의 모든 가증한 일 외에 그들이 내 언약을 위반케 하는 것이 되었으며
너희가 내 성물의 직분을 지키지 아니하고 내 성소에 사람을 두어 너희 직분을 대신 지키게 하였느니라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스라엘 족속 중에 있는 이방인 중에 마음과 몸이 할례를 받지 아니한 이방인은 내 성소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즉 하나님께서는 할례를 받지 않은 이방인들은 하나님과 더불어 영원히 살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하십니다.
마치 쇳가루가 흩어진 곳에 막대자석을 가운데 놔두면 이 쇳가루들은 N극과 S극 두 극으로 자체 분류가 되어버립니다. 비록 자석 끝부분에 붙지 않더라도 자신이 서 있는 위치에서 그쪽 방향을 향해 가슴을 돌립니다. 이는 보이지 않는 양극에서 나온 힘이 이 자연에 작용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실내축구게임기에 달려 있는 작은 선수모형들처럼, 인간이란 존재는 본인들이 발길질 하면서 자기 게임을 하는 것이 아니라 게임의 주인공이 조종하는대로 인간들은 단지 움직임을 나타낼 뿐입니다. 성도의 특징은 바로 이점을 안다는 데 있습니다. 자신을 조종하시는 분과 함께 있음을 압니다.
홀로 있지 않고 매사에 현재 더불어 함께 있습니다. 반면에 할례받지 못하는 이방인들은 그저 과거 기억에 의존해서 매사를 조종해 나가려고 합니다. 이것은 과거형 존재입니다. 혼자사는 자를 받아주는 천국은 없습니다. 그저 그들은 살아도 죽어도 혼돈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이 뱀의 후손과 여자의 후손을 가름하는 분류과정임을 믿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27강-예레미야 4장 23~28절(두 질서)221127 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예레미야 4장 23~28절입니다. 구약성경 1056페이지입니다.
“내가 땅을 본즉 혼돈하고 공허하며 하늘들을 우러른즉 거기 빛이 없으며, 내가 산들을 본즉 다 진동하며 작은 산들도 요동하며, 내가 본즉 사람이 없으며 공중의 새가 다 날아갔으며, 내가 본즉 좋은 땅이 황무지가 되었으며 그 모든 성읍이 여호와의 앞 그 맹렬한 진노 앞에 무너졌으니, 이는 여호와의 말씀에 이 온 땅이 황폐할 것이나 내가 진멸하지는 아니할 것이며, 이로 인하여 땅이 슬퍼할 것이며 위의 하늘이 흑암할 것이라 내가 이미 말하였으며 작정하였고 후회하지 아니하였은즉 또한 돌이키지 아니하리라 하셨음이로다”
선지자로 하여금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평소에 관심있게 보지 않는 것들을 보게 합니다. 그것은 빛이고 산들이고 공중의 새입니다. 원래 산과 별, 하늘, 해, 땅, 자연은 그냥 그대로 있는 것으로 여깁니다. 그런데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계시에서 추가적인 요소가 있는데 그 모든 게 다 황폐하게 될 것이라는 겁니다. 이 말은 장래에 이 나라가 망한다는 정도가 아니고 관련성이 있다는 겁니다.
이 땅의 주인은 사람이 원하는 대로 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원하는 대로 이 땅의 미래가 진행된다는 거죠. 이 땅에 대한 하나님 나름의 계획이 있다는 겁니다. 그러면 거기에 사는 인간들은 뭐냐. 인간들은 철저하게 하나님의 계획대로 움직이는 그러한 기계같은 존재가 될 뿐이죠. 실내 축구 게임기에 보면 작대기가 있는데, 그 작대기에 축구 선수 모양을 한 작은 인형들이 붙어있습니다.
그 작대기를 잡아당기고 움직이며 공차는 게임이죠. 그때 인형들이 튀어나온 발로 공을 찰 때 인형들의 특징이 뭐냐 하면 아무 표정이 없어요. 그냥 나무 인형이니까 아무 표정이 없죠. 제가 이 말씀을 드리는 것은 그게 인형처럼 생겨도 그 인형이 게임기를 주관하지 않는다는 것을 전하려는 취지로 말씀 드리는 겁니다. 작대기에 달려서 사람처럼 생겼지만, 그들은 그냥 작대기를 쥐고 있는 누군가에게 다루어질 뿐이죠.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계획하시고 밀어붙일 때는 인간들이 생각한 거 말고 다른 계획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계획은 이미 인간들의 생각과 더불어서 하나님의 계획은 이 땅이 다시 혼돈으로 돌아가는 겁니다. 황무하게 돌아가는 거죠. 본문 23절부터 다시 보면 “내가 땅을 본즉 혼돈하고 공허하며 하늘들을 우러른즉 거기 빛이 없으며, 내가 산들을 본즉 다 진동하며 작은 산들도 요동하며”라고 나오죠.
흔히 인간들이 반드시 있게 될 것이라고 자부했던 것들이 결국은 반드시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의도가 있어서 임시적으로 잠시나마 그것을 허락하신 겁니다. 그래서 인간들에게는 이 세상에 어떤 원칙이 있는지 알 길이 없지요. 제가 어릴 때 대구에 미군 부대들이 많이 있었어요. 달성공원 근처에도 미군 부대가 하나 있었는데 거기에 야구장이 있었고 그 야구장 옆에 미군 부대가 잠시 주둔해 있었던 거죠.
그 야구장에서 야구경기를 하면 처음에는 위에서 관람하다가 경기 중반쯤 되면 다 밑으로 가 있어요. 흙으로 되어있어서 전부 다 미끄러져 내려가서 다 내려와서 밑에 있는데 그 야구를 보면서도 철조망 안에 미군들이 어떻게 사는지 어린 마음에 그렇게 호기심이 나고 궁금했었어요. 그들은 맨날 초콜릿만 먹는지 껌만 씹는지 뭐 하고 사는지를 잘 몰랐습니다.
이제는 그 미군 부대는 없어졌지요. 이처럼 인간들은 하나님에 의해서 만들어진 세계 속에서도 계속해서 내가 왜 있으며, 어디로 가고 있으며, 이 세상은 인간을 둘러싸고 있으나 도대체 인간 말은 듣지 않고 누구의 말을 듣고 어떤 원칙에 의해서 이렇게 주어지는지를 상당히 궁금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예레미야에서는 그 궁금증이 풀리죠. 다시 모든 것이 무(無)로 돌아간다. 혼돈으로 돌아간다. 아무것도 없는 공허로 돌아가는 거예요.
그러면 하나님도 별 볼 일 없잖아. 그러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슨 도움이 되겠느냐. 하나님께서 처음으로 뭔가를 창조하고, 이것도 창조하고, 저것도 하고, 떠들썩하게 뭔가를 창조했지만 결국은 공허로 다 돌아가게 되면 하나님 쪽에서도 도대체 뭘 하시려고 이렇게 천지창조를 했는지 궁금하겠지요. 여기에 하나님께서 혼돈으로 돌아가면서 인간을 개입시키고 그러면서 여기에서 뽑아내는 것이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하나님의 규칙, 질서가 뽑아내 져요. 그 질서가 창세가 3장 15절에 나옵니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이게 윤곽으로 드러나기 시작하는 거예요.
이게 뭐가 중요하냐 하면 인간이 생각할 때 하나님이라 하는 것은 하나님과 내가 상대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사람들의 선입관으로. 예를 들어서 제가 미군 부대 옆에서 야구 구경하면서도 미군 부대가 궁금하단 말이죠. 그러면 미군 부대에 있는 사람들도 야구 본다고 올 수도 있거든요. 그러면 내가 영어를 하지는 못 하지만 영어를 한다고 치고 물어보는 거죠.
“아저씨, 저 미군 부대 안에서 뭐 합니까?”라고 물으면 그 미군이 이렇게 답변할 수 있어요. “나는 너와 상대 안 한다” 이게 정답이에요. 나는 너와 상대 안 해. 너는 하나님은 어떤 일을 하는지 물을 자격이 없다. 너에게 없다. 질서를 잡아가는 것은 하나님의 몫이지 인간이 거기서 호기심 가지고 묻는다고 일일이 청문회 하는 것도 아니고 답변할 의무도 없고요, 답변해 줘봤자 못 알아들어요.
왜냐 하면 인간은 자기중심이기 때문에 답변이 자기가 원하는 답변이 올 때만 이해되는데 그렇지 않으면 못 알아들어요. 결국, 인간은 하나님께서 어떤 원리로 돌아가게 하시는지 아무것도 모른 채 ‘내 할 일이나 열심히 하지. 내 할 것만 열심히 하면 돼지. 그러면 뭐 훌륭하다고 착하다고 열심히 했다고 가장으로서 가정을 잘 돌봤다고, 그러니까 복 줘서 천국 보내주신다고 그럴 거야’라고 자기 마음대로 생각해요. 자기 마음대로.
여기 여자의 후손은 예수님이에요. 그리고 뱀의 후손은 마귀입니다. 이 둘 사이에서 인간은 빠져있어요. 인간과 토론하고 의논하고 협조받아서 세상이, 우주가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들어보니 맘 편하지 않습니까? 속 편하지 않습니까? 나와 상대 안 해요. 주께서 우리가 상대 안 한다고 해서 ‘아이고, 내가 네가 없으니 일이 안 된다’라고 이러시는 분이 아니에요.
우리 상대 안 해도, 아무 차질 없이 일 잘 ~ 되고 있습니다. 믿습니까? 우리 자신을 배제 시키는 것에 대해서 동의하십니까? 뭐 동의하든 안 하든 우리를 상관하실 게 없죠. 주께서 일방적으로 일하시니까요. 그러면 여자의 후손 일도, 뱀의 후손 일도 인간이 빠져있다면, 그리고 인간이 뱀의 후손에서도 빠져있는 것은 이미 악마가 인간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에 인간이 무슨 노력을 해도 그 마귀의 힘에서 못 벗어난다는 점에서 마귀의 노선에서 꼼짝 마라는 입장이기 때문에 협조가 되지를 않는 거예요. 그냥 마귀가 시키는 대로 할 뿐이죠.
인간의 욕구와 욕망이라는 것은 자기가 끄집어낼 문제가 아니거든요.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질서를 잡아줬는데 인간들, 마귀에 속한 인간들은 또 가만히 있지를 않죠. 기하학은 영어로 ‘geometry’라고 하는데 ‘geo’는 땅을 의미하고 ‘metros’는 측정한다는 의미예요. 기하학(geometry). 인간은 이 땅을 뾰족한 다각형, 사각형, 삼각형, 오각형으로 쪼개면서 질서를 잡아나갔습니다.
이게 인간의 문명, 역사가 보여주는 거예요. ‘하나님의 질서는 몰라도 돼. 우리가 알아서 질서 만들어서 나가면 되니까’ 최초의 기하학, 수학이 등장한 것은 뭐냐, 강이 홍수가 날까 봐서 관계시설을 만들 때 이것들이 처음 등장했어요. 원래 옛날에는 관계시설을 잘해야 추앙받는 왕이 됩니다. 왕국이 만들어지면서 개인이 하지 못하는 것을 집단 대표자의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은 왕의 자리에 앉은 자가 힘을 모아서 그것을 해줘야 하죠.
양쯔강에 있는 운하를 뚫는 것도 마찬가지이고 진시황제 때도 마찬가지고, 고대에도 마찬가지고, 강을 다스려야 왕 답다는 그런 이야기가 있잖아요. 옛날에는 홍수같은 것을 어떻게 하지를 못 했으니까. 국가적인 힘으로 힘을 합쳐야 하지 않습니까. 거기에 구심점이 작용해야 하고 구심점인 왕이 나서서 작용해야 하죠.
그런 일을 하면서 인간은 굳이 하나님께 기대지 않더라도 우리 식대로 자연의 질서를 잡아서 그걸 이용하게 되면 하나님이라는 종교같은 것이 필요 없이 우리끼리 잘먹고 잘 살면 되잖아. 죽음 문제는 자식을 낳고 자식을 통해 내 요소를 계속 물려주게 되면 나도 자식 속에서 계속 불멸의 존재가 된다고 처리하면 되니까 지금 죽는 문제 해결되었죠, 사는 문제도 관계시설, 수학, 과학, 기술 동원해서 해결되었죠. 아쉬울 것이 뭐가 있습니까?
하나님 안 도와줘도 우리끼리 산다는 것이 가능하겠죠? 그런데 인간에게 문제가 뭐냐. 인간은 그렇게 해서 스스로 ‘이만하면 되었어. 이만하면 사는 것은 되었어’라고 하고 싶은데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인간의 욕망은 아무리 다가서고 다가서도 또 다가서고 다가서도 이 무한이라는 벽을 뚫을 수가 없어요.
사람은 마귀가 준 욕망이 ‘이만하면 되었다’라고 그걸로 쓱 만족하면 우리도 좋겠는데 그게 아니고 계속해서 이 집착과 집념이 ‘그 뒤에는 뭐가 있을까? 달에 가면 화성은? 화성 다음에 목성은?’ 끊임없이 인간은 결핍을 느끼는 거예요. 뭔가 목마름을 느끼는 겁니다. 아무리 우물가에서 물을 마셔도 계속해서 목마른 거예요. 영원에 접근하면 접근할수록 접근할 수 없는 것이 무한이라는 겁니다. 이게 가무한(假無限)이라고 하거든요. 끝나도 끝이 아니고 계속 있는 거예요. 그래서 인간은 벽을 느끼면서도 그 벽에 손을 터치할 수 없어요. 그 벽을 들어가서 저쪽으로 나올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현대 양자물리학에서는 그것을 뚫었다고 자부하는 그런 이론들이 나와요.
이론이 아니고 실제 그런 일들이 일어나는데 그게 양자 터널효과라고 합니다. 벽이 있는데 벽이 확률상 이걸 뚫어 줘야 우라늄에서 방사능이 나와요. 분명히 벽이라 못 뚫는데 극한 확률상으로 이것을 뚫는 것이 나온다는 거예요. 그리고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생각하지 못하는 극히 작은 것까지 자기는 발견했다는 겁니다.
그래서 현대 물리학자들은 자신감이 어느 정도냐 하면 이 우주를 측정할 수 있는 미터자를 만들었어요. 그 미터자가 프랑크 길이라고 하는데 10⁻³⁵미터입니다. 섬세하게 모든 것을 자신감을 가지고 알아내는 겁니다. 이 세상의 질서가 어떻게 되는지 궁금한 거예요. 신만이 아는 질서를, 하나님만 아는 질서를 드디어 우리가 커닝해서(몰래 살펴서) 알아냈다는 겁니다.
이 우주가 아무리 요동해도 달라지지 않는 세 가지의 상수를 발견했다는 겁니다. 하나는 ‘G’라고 하는 중력세기 이고, 다른 하나는 ‘ħ’(에치취 바)인데 이는 양자 효과이고, 그다음에 빛의 속도가 일정하다는 ‘C’ 곧 어느 경우라도 속도가 1초에 삼십만 km라는 점을 취득해서 만들었습니다. ħG(분자)/c^3(분모) 이것을 루트로 씌워버리면 거기서 프랑크 길이가 튀어나오는 겁니다. 그게 자연 세계의 기본 상수가 된 거예요.
이런 인간들의 노력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그래도 계속 혼돈하고 공허하고 해봤자 ‘너희들은 거기 없어. 완전히 황폐해져’라고 밀어붙이는 하나님의 방법은 뭐냐. 인간들이 계속해서 이런 찬란한 문명을 이루고 월드컵까지 하고 수백조 들여서 새로운 도시 건설한다고 사우디아라비아에서 투자하려고 그렇게 한국까지 왔는데 여기에 대해서 하나님의 대책은 뭐냐.
하나의 쉬운 예를 들겠습니다. 식스 센스(six sense)라는 여섯 번째 감정이라고 번역되는 영화가 있어요. 그 영화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간단히 줄여서 이야기할게요. 어떤 심리학 박사가 자기가 주위에서 인정받는 심리학 박사인데 한 어린아이를 치료를 잘못해서 양심에 가책이 되고 있는데 어느 날 청년이 와서 ‘선생님은 엉터리다. 내 병도 못 고치고’라고 하며 그 정신과 의사를 총으로 쏴서 죽여버렸어요.
그러면서 영화가 쭉 진행됩니다. 초반에 그게 나왔을 때 관객들은 그게 왜 나오는지를 모르죠. 영화가 다 끝나고 난 뒤에 밝혀지는데 영화에서 계속 박사와 한 가정과 다른 새로운 아이와 얽혀서 그렇게 이야기가 되면서 어떤 아이가 등장하느냐 하면 자꾸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열 살 아이인데 뭐라고 하느냐 하면 자기는 유령을 볼 수 있다고 하는 거예요. 자꾸 유령이 보인다는 거예요.
그래서 박사가 이 병을 고쳐줘야 하겠다 싶어서 ‘아이야, 정신 차려. 유령이 보인다는 것은 뭐가 과다한 스트레스 때문에 그런 거야. 내가 고쳐 줄게’라고 하는데 나중에 영화가 끝나가면서 보니 그 아이 말이 맞아요. 바로 주인공인 그 정신과 의사가 사실은 진작에 죽은 유령이었습니다. 이게 영화의 반전이에요. 주님께서 어떻게 질서를 잡아나가느냐 하면 왜 너희들은 뱀의 후손과 여자의 후손 사이에 낄 수 없는가.
내가 너희들을 유령들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게 식스센스처럼 성경의 반전이에요. 유령으로 울고 있고 유령으로 웃고 있고 유령으로 살면서 추억이란 추억은 온통 다 끌어모으고 있는 거예요. 자기가 유령인 줄 모르고 과거를 아쉬워하는 거예요. 그래서 이 세상 인간들의 특징은 한마디로 과거형이에요. 과거형. 과거형 존재입니다. 맨날 기억 속에는 과거만 들어있어요.
어제는 뭐 했고, 지난달 수입은 이천 오백인데 이번 달은 이천 만 원밖에 안 되고. 이처럼 항상 과거와 현재를 비교하는 과거를 잊지를 못해요. ‘She came home’ 그녀는 집에 왔다. 과거예요. 그러나 성경에서는 ‘She has come home’ 그녀는 집에 왔다. 한글로 해석하면 둘 다 똑같아요. 그런데 현재 완료로 보면 집에 왔던 그녀는 지금 집에 와 있는 그 결과가 유지된 채로 과거에 ‘왔다’라는 의미를 전하는 겁니다.
그러나 과거로만 이야기하면 그 여자가 집에 왔었는데 지금은 어디 있는지 모른다는 겁니다. 지금 왔다는 사실만 중요하지 그녀가 어디 있는지는 모르겠다는 뜻이죠. 성경은 현재 완료입니다. 지금 주님이 우리와 함께 있어요. ‘과거에 뭘 했든 간에 그 과거에 너 혼자 했던 과거가 아니야. 너만 애쓴 과거가 아니야. 너만 용쓴 과거가 아니야. 너만 괴로워한 과거가 아니야. 그 과거 내가 만들었어’라고 하시는 거예요. 주님으로 내가, 여자의 후손으로 내가 만드셨다는 겁니다.
그래서 주님은 심판주가 되고 이 세상에 모든 행함에 대해서 심판할 수 있는 권한이 있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유령으로 만들어서 주님이 너를 죽은 자로 만들었던 바로 그 주님인 내가 너희와 함께 있다는 것을 그들이 모르고 엄연히 죽어있으면서도 혼자밖에 없으니까 내가 살아야 내가 살 맛이 난다고 여기면서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해, 어떻게 하면 더 살 수 있어?’라고 혼자 사는 데 더 몰두하고 열중하는 거예요.
그 방법이 뭐냐 하면 과거에 내가 알았던, 내가 정립했던 자연의 질서 중에서 오늘 나의 생존에 유리한 것만 골라서 내가 기억하게 되면 지금의 나를 살릴 수 있다는 겁니다. 장소는 단골 장사지요. 지금 제가 그 이야기하는 거예요. 과거에 내가 알았던 거, 장사만 단골 장사가 아니에요. 교회도 단골 장사예요. 이미 내가 알고 있던 그 위에 나를 구축해서 ‘나는 안 죽었어. 나는 죽을 때까지 죽은 것이 아니야. 끝날 때까지 끝난 것이 아니야’라고 계속 가는 것처럼.
끊임없이 자기를 위해 살려고 더 많은 정보와 기술과 자연의 질서에 대한 비밀을 획득해야 하는데, 아까 말씀드렸던 것처럼 인간은 끝이 보이지 않습니다. 끝이 보이지 않아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뱀의 후손과 여자의 후손에 대한 질서가 어찌 되었단 말인가. 그것이 어떤 식으로 구체화 되었는가. 그 구체화는 이스라엘로 구체화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의 질서가 구체화 된다는 말은 그들 앞에 눈으로 드러나도록 그렇게 하나님께서 조치한 거죠. 사실은 이게 더 무서운 이야기예요. 에스겔 44장 7-9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대저 너희가 마음과 몸에 할례 받지 아니한 이방인을 데려오고 떡과 기름과 피를 드릴 때에 그들로 내 성소 안에 있게 하여 내 전을 더럽히므로” 그러니까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성전 안에 들어옴으로 성전이 더럽혀졌다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내가 너희에게 준 약속이 위반되었기 때문에 계속 보면
“너희의 모든 가증한 일 외에 그들이 내 언약을 위반케 하는 것이 되었으며, 너희가 내 성물의 직분을 지키지 아니하고 내 성소에 사람을 두어 너희 직분을 대신 지키게 하였느니라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스라엘 족속 중에 있는 이방인 중에 마음과 몸이 할례를 받지 아니한 이방인은 내 성소에 들어오지 못하리라”라고 엄중하게 하나님께서 이야기하셨습니다.
자, 질서가 뭐냐. 성전입니다. 성전이 질서예요. 그러면 성전이 뭐가 있는데? 이방인의 뜰이 있어요. 이방인의 뜰이라는 것은 이방인은 거기까지만 오라는 겁니다. 그 넘어는 들어오면 안 된다는 거예요. 이게 눈에 보이는 지형적인 질서예요. 요한계시록 11장 2절에도 나옵니다. “성전 밖 마당은 척량하지 말고 그냥 두라 이것을 이방인에게 주었은즉 저희가 거룩한 성을 마흔 두달 동안 짓밟으리라”
성전 자체가 질서인데 이방인들은 자기중심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이고 이스라엘이고 뭐고 그런 것은 생각 안 하기 때문에 ‘어, 이거 그냥 건물이네. 저 안에 금덩어리 있겠다. 쳐들어가자. 부수러 가자. 불태우자’라고 하면서 성전이 불태워진 거예요. 누구에 의해서? 이방인에 의해서. 그러면 이방인의 의식이 뭐냐. 하나님도 모르고, 하나님 질서도 모르고, 여자의 후손이나 뱀의 후손도 모릅니다.
그딴 거 필요 없어요. 내 힘으로 이 세상의 질서를 만들어서 어쨌든 간에 살고 보겠다는 겁니다. 이게 이방인들의 의식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십자가를 통해서 너는 이미 죽었다는 겁니다. 이미 모든 인간은 죄로 말미암아 죽어있는 거예요. 유령들이에요. 자기가 유령인 줄을 모르고 최선을 다하여, 밥을 먹을 때까지, 요양병원에서 치매 거릴 때까지, 살 때까지 살아보자는 거고, 그게 내 인생이라는 겁니다.
그게 뭐냐 하면 자기 속에 기억만 있는 거예요. 현재 누구와 함께 있다는 거, 나의 과거를 누가 이끄느냐는 것에 관심 전혀 없이, 오직 자기 기억 속에는 ‘내가 이렇게 했다’만 과거에 이렇게 했고, 저렇게 살았고, 교회에서 이렇게 봉사했고, 자꾸 자기 과거만 드러내는 과거형 인간이에요. 거기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질서상, 하나님의 성전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그 성전에 대해서 낮에 언급했습니다.
요한복음 2장에서 그 성전이, 눈에 보이는 성전이 뭐로 바뀌느냐 하면 예수님의 몸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래서 성령을 주지 아니하면 천국에 못 간다는 말은 그들은 내 성전에, 이 하늘나라 성전에, 들어오는 것을 주님인 내가 허락지 아니한다는 겁니다. 이게 바로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을 아주 날카롭게 가름하는 질서입니다. 끝으로 한가지 예를 들게요.
쇳가루가 바닥에 놓여있을 때 무작위로 무질서하게 흩어져 있어요. 이 쇳가루가 어떤 식으로 정리되느냐 하면 막대자석을 중간에 쏙 집어넣습니다. 집어넣으면 쇳가루가 각자 자기가 가게 될 방향을 쳐다봐요. ‘좌양 좌’ 하는 것도 있고, ‘우양 우’ 하는 것도 있어요. 자기 자리가 비록 쇳가루 끝에는 붙는 것도 있고 안 붙는 것도 있지만, 거리가 멀어서 안 붙을 때도 방향은 자기 가슴팍을 자기가 속하는 쪽으로 S극에 속하면 S극 쪽으로, N극에 속하면 N극 쪽으로 자세를 잡아요. 충성!
그게 뭐냐 하면 이 자연 세계는 염소와 양, 좋은 고기와 나쁜 고기, 천국 백성과 지옥 백성, 그 사람이 어디 있든지 그 마음 자세는 그쪽으로 향하게 되어있는 거예요. 이것이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으로서 질서를 잡는 겁니다. 어디서 무얼 하든지 간에 너의 방향은 하나님께서 한쪽은 주님 계신 천국으로 방향을 잡게 되고 다른 한쪽은 과거형, 내 식대로 살고 내가 잘하면 그만이라는 식으로, 나는 나밖에 없다는 식으로 주님 쪽으로 방향을 돌리지 않는, 넓은 길로 가는 멸망의 길로 가는 사람, 반석 위에 집을 지은 사람, 모래 위에 집을 지은 사람.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화끈하게 질서 잡고 나중에 이 세상은 모조리 황폐한다는 것이 예레미야를 통한 하나님의 미리 제시된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혼돈 가운데서도 하나님께서는 쉬지 않고 열심히 하나님의 원리원칙대로 밀어붙인 것에 대해서 감사합니다. 또한, 감사할 것은 그 일에 우리를 끼워 넣어 주지 않은 것에 대해서 감사합니다. 어느 자리에 있든지 주께서 어떤 일을 하는지 관심 둘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