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오후설교

숯검댕이

아빠와 함께 2022. 12. 25. 18:54

숯검댕이 

2022년 12월 25일                본문 말씀: 예레미야 5:10-13


(5:10) 너희는 그 성벽에 올라가 훼파하되 다 훼파하지 말고 그 가지만 꺾어버리라 여호와의 것이 아님이니라

(5:11)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스라엘 족속과 유다 족속이 내게 심히 패역하였느니라

(5:12) 그들이 여호와를 인정치 아니하며 말하기를 여호와는 계신 것이 아닌즉 재앙이 우리에게 임하지 않을 것이요 우리가 칼과 기근을 보지 아니할 것이며

(5:13) 선지자들은 바람이라 말씀이 그들의 속에 있지 아니한즉 그같이 그들이 당하리라 하느니라

선지자의 말씀은 곧 하나님께서 집중하시는 데가 어디인가를 보게 하십니다. 그곳은 성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성전에다 자신을 뜻을 담아서 표현하십니다. 오늘 본문에서, 성전에서 불타야 될 부분과 그냥 남겨두어야 될 부분을 구분짓습니다. 단순히 ‘성전이 부서졌다’가 아니라 왜 다는 부서지지 않고 남겨두어야 될 게 있어야 하는지를 보게 하십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나 일반인들이 그들의 주된 관심사는 그들의 생존과 생활 여건입니다. 자기 것 무너지면 최종적으로 모든 것이 다 무너졌다고 믿고 있는 자들입니다. 그들이 믿는 하나님은 곧 자기 것 지켜주기를 바라는 하나님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관심은 성전에 가 있습니다.

성전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과 더불어 살고 싶은 의사가 있음을 드러내는 계시입니다. 하지만 인간들은 하나님과 더불어 살기보다는 자기를 위해 사는 현재의 자기 삶을 고집스럽게 유지하고 싶어합니다. 자기만 안 다치면 된다고 여깁니다. 상전이 무너지든 말든지 말입니다. 하지만 이런 생각이 우상적 발상입니다.

왜냐하면 노아 때, 방주는 결코 노아를 위함이 아니라 방주 안에 있던 정결한 짐승의 희생 역할과 그 가치를 지키기 위함이었습니다. 노아가 방주로부터 나와서 그냥 자기 살 궁리를 한 것이 아닙니다. 먼저 정결한 짐승을 제물로 드려서 하나님의 언약의 속내용을 구현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선지자 예레미야는 성전에 초점을 맞추어 예언합니다.

즉 ‘깨진 성전’마저 성전의 의의를 살린다는 겁니다. ‘이 성전은 하나님의 분노와 징벌로서 불타버린 적이 있다’는 그 기능을 지속시켜 나가게 됩니다. 제사드리는 성전과 이스라엘의 운명과의 관련성은 이사야 6장에 분명하게 나옵니다.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때에 그 스랍의 하나가 화저로 단에서 취한 바 핀 숯을 손에 가지고 내게로 날아와서 그것을 내 입에 대며 가로되 보라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 하더라”(사 6: 5-7)

즉 그 시대에 이사야는 노아 방주역할하는 겁니다. 다들 죄악된 세상에서 표본적으로 하나님께서 이사야의 입술을 짖어 깨끗한 죄를 사해주셨는데 여기에 필요한 제물불은 제단 밑에서 사정없이 희생제물을 태우던 불이었습니다. 따라서 예레미야 당시에는 하나님께서 바벨론을 통해서 성전을 불태우게 하셨습니다. 기초는 남기고 말입니다. 일종의 그루터기입니다.

신약에 오면 방주역할을 하는 것은 ‘비밀’입니다. “이 비밀은 만세와 만대로부터 옴으로 감취었던 것인데 이제는 그의 성도들에게 나타났고”(골 1:26) ‘비밀’이란 곧 보이지 않는다는 겁니다. 구약 때의 방주나 불타버린 성전처럼 눈에 보이는 식이 아닙니다. 보이지 않으니 사람들은 곧 ‘없는 것’으로 여깁니다.

방주가 없는 물 심판은 곧 멸망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보이는 것에만 집중하기에 ‘비밀’로 나타난 하나님의 구원방식에 무관심하게 되어 버렸습니다. 그들에게 있어서는 보이는 것에만 신경쓰고 사는 것이 일상화되고 말았습니다. 그렇다면 신약에 들어와서 사람들이 내세우는 구원 방식은 무엇일까요?

마태복음 23:13에 보면,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천국문’이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즉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율법을 잘 지킨다고 자부하는 본인들이 천국문으로 삼아버렸던 겁니다.

이는 곧 신약에 와서는 인간이 악마의 앞잡이 노릇을 본격적으로 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경향에 대해서 이미 예레미야 시대에 비쳐나옵니다. 사람들은 이사야가 거룩한 하나님과 대면해서 경험했던 바를 잊었습니다. 자신이 죄악된 자들이고 죄악된 백성 중의 하나며, 그런 식으로 총체적으로 죄악된 집단을 이룬다는 것을 모릅니다.

그들은 제단의 숯불에 의해서 입술을 지져야 하는 대상으로 간주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가치를 포기할 마음이 전혀 없습니다. 복음이란, 곧 말씀이란 그 현장에 악마를 출몰시킬 때 성공적입니다. 사람들이 무지해서 복음을 거부하는 것이 아닙니다. 교만해서 거부하는 겁니다.

그들이 자신의 값어치를 고집하는 한 그들은 한결같이 악마에게 속임을 당할 것입니다. 자진해서 악마가 자신이 속일 수 있도록 계속 여지를 남기는 겁니다. 전적으로 하나님 보시기에 더럽다는 이 사실이 죄사함에 얼마나 절대적인 전제인지를 그들은 믿지 않습니다. 계속해서 본인의 인생을 온전하게 유지하려고 합니다.

바이올린에서 현하나 끊어져도 ‘인생 연주’를 제대로 계속할 수 있다고 고집부립니다. 즉 그 어떤 경우라도 본능적으로 하나님이나 예수님 보다 자신의 가치를 우선적으로 둡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이 오늘날 불신자들의 공통적으로 윤리적이고 도덕적이고 정의로우면 참으로 존경받은 사람인양 자부한다는 겁니다.

그러나 비밀, 곧 보이지 않는 천국문을 바로 그 윤리와 도덕과 정의에 구멍이 뚫려야 합니다. 그래서 영적 세계로 들어서야 합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보았던 완전한 거룩의 세계를 말입니다. “화로다 망하게 된 나여!”하면서 주저없이 고백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최종 마련하신 구원의 방식은 우리가 주님에게 패배했다는 의식입니다.

즉 자기 자신을 ‘하나님에게 지게 된 자’로 살아야합니다. 불탄 흔적을 지니고 있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래야 악마에게 사기를 당하지 않는 겁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성전의 기능에 대해서 관심없습니다. 불타는 희생물이 마음에 들어오지도 않고 마음에 담아두지도 않습니다. 마치 노아 당시의 대부분의 사람과 다를 바 없습니다.

오늘날 세상을 대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스포츠와 전쟁 이야기와 문화와 생존에 관한 다급함입니다. 그런데 이런 눈에 보이는 것으로 인해 천국의 비밀은 ‘천국문’을 계속 ‘눈에 보이지 않는 공간’으로 남게 됩니다. 숯검댕이 같은 오늘날 성도들은 실은 오늘날의 천국문입니다. 세상 가치에 눈 돌아가지 맙시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길이 딱 군데, 좁은 길과 넓은 길 밖에 없음을 늘 마음에 새기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31강-예레미야 5장 10~13절(숯검댕이)221225 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예레미야 5장 10~13절입니다. 구약성경 1057페이지입니다.

“너희는 그 성벽에 올라가 훼파하되 다 훼파하지 말고 그 가지만 꺾어버리라 여호와의 것이 아님이니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스라엘 족속과 유다 족속이 내게 심히 패역하였느니라, 그들이 여호와를 인정치 아니하며 말하기를 여호와는 계신 것이 아닌즉 재앙이 우리에게 임하지 않을 것이요 우리가 칼과 기근을 보지 아니할 것이며, 선지자들은 바람이라 말씀이 그들의 속에 있지 아니한즉 그같이 그들이 당하리라 하느니라”

바벨론 군대들이 유다 나라를 공격합니다. 배후에서 하나님이 그렇게 하시는데 하나님께서 집중적으로 공격의 표적이 되게 하는 그것은 유다 나라 전체가 아니에요. 예를 들어 이렇습니다. 길을 가다가 휴대폰을 바닥에 떨어뜨렸을 때, 군중이 많아서 바로 줍는 것이 힘들고 또 남이 주워갈까 싶어서 자기 옷을 벗어서 휴대폰 위에 덮었단 말이죠.

그럴 때 사람들은 그저 무심코 자기 갈 길로 걸어가지요. 덮어 놓은 옷 위를 밟기도 하고 그 위로 지나갈 때, 휴대폰 당사자는 밟고 지나가는 사람이 여자냐 남자냐, 크냐 작으냐, 나이가 얼마냐는 관심 없어요. 그저 내 휴대폰이 다치지 않도록 거기에만 집중해서 관심을 두는 겁니다. 그런데 유다 나라 이스라엘은 뭐냐 하면 그저 우리나라가 잘 먹고 잘살기를 바라요.

그러나 하나님의 관심사는 어디 있느냐 하면 성전에 있어요. 성전은 하나님과 인간이 함께 살아가는 곳이 성전 또는 성소라고 할 수 있는데 오늘 본문 10절에 보면 ““너희는 그 성벽에 올라가 훼파하되 다 훼파하지 말고 그 가지만 꺾어버리라”라고 나오는데 “가지만 꺾어버리라”하는 이 말은 그 터는 남겨놓고 그 위에 증축된 것은 날려버려도 뭐라 하지 않을 테니 그 터는 남겨두라는 뜻입니다.

마치 휴대폰 위에 옷 덮어두었을 때 사람들이 얼마나 분잡스러운지는 관심 없이 옷 안에 있는 휴대폰만 관심 있죠.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옷이 덮여있으니까 그 안에 휴대폰이 있는지, 가방이 있는지, 돈이 있는지 모르죠. 그러나 잃어버린 당사자는 그 옷 안에 귀한 휴대폰 있다는 것은 본인만 알죠. 그래서 하나님께서 바벨론에게 “옷자락은 밟아도 되는데 옷 중심부는 밟지 마라”라고 하시는 것과 똑같아요.

물론 바벨론이 그 말을 들은 것이 아니고 바벨론 배후에서 그렇게 시키는 겁니다. 이 말씀을 성전 그러니까 성소에 대해서 이 말씀을 알아야 하는데, 성전의 가치가 이사야 6장에서부터 나옵니다. 거기부터 한번 보셔야 해요. 이사야는 선지자입니다. 그런데 선지자는 의인이 아니에요. 선지자도 아담 족속이니까 죄인 맞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 담은 본래 이스라엘의 취지가 뭐냐 하면 죄인을 용서하는 거예요. 의인은 없어요. 의인은 없으니까 죄인을 가지고 용서해줘서 천국 백성 되게 하는 거예요. 이건 지난 수요일에 제가 말씀드렸어요. 죄사함 받았으면 이제는 우리 목숨같은 거 아무 쓸데 없다고. 죄사함 받았으면 되었지 목숨 가지고 뭐합니까? 스키장이라도 놀러 갈 거예요? 뭐 아무것도 할 게 없어요.

관점이 내가 어떻게 되느냐가 아니고 천국에 누가 들어갈 것이냐는 주님의 관점이거든요. 주님 보시기에 죄사함이 중요한 거예요. 내 인생이 얼마나 착실한지 그것은 전혀 주님의 관심사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이 죄인인데, 유일하게 용서를 받은 민족이고 용서를 받게 되면 뭐가 되느냐 하면 거룩한 민족이 되어요. 그런데 유다 이스라엘이 지금 하나님을 버렸잖아요.

버렸지만 그 터는, 나머지 다 날아가도 그 터는, 그 선지자 하나만큼은 남겨두는 거예요. 휴대폰처럼. 그걸 가지고 여기 이사야 6장에 보면 “그루터기”라고 하는 거예요. 이사야 6장 13절에 “그 중에 십 분의 일이 오히려 남아 있을찌라도 이것도 삼키운바 될 것이나 밤나무, 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당하여도 그 그루터기는 남아 있는 것같이 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니라”

십 분의 일이 날아가도 괜찮아요. 그러나 그루터기는 남아 있어야 해요. 그 그루터기 역할을 하는 자가 누구냐 하면 이사야 선지자입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하나님의 거룩을 보고 난 뒤에 본인이 이스라엘을 대표해서, 유다를 대표해서 고백합니다. 이사야 6장 5절에 “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그러면 나만 더러운 인간인가. 아니에요. 계속 보면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라고 되어있어요. 이게 다수중에 하나를 표본으로 뽑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뽑았죠. 다수 중에서 하나를 딱 뽑아 보니까, 그 뽑힌 자가 누구냐 하면 선지자예요. 저와 여러분들이죠. 뽑고 나니까 교회 안 다니고 성령 안 받고, 예수 안 믿는 사람은 자기가 잘난 줄 알고 있어요.

그러나 성령받아서, 성령이라는 족집게로 딱 뽑아서 보니까 입술이 더럽고, 나만 쓰레기가 아니고, 나만 더러운 것이 아니고 원래 다 더러운데 유독 더럽다고 아는 사람만 성도가 되는 겁니다. 왜? 주님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왔기 때문이지요. 아주 특이한 안목이에요. 세상을 보고 자기를 보는 특이한 안목. 이게 선지자입니다. 이제 선지자를 확대합니다.

선지자를 그루터기로 보는 거예요. 십 분의 일보다 더 숫자가 적은 그루터기. 그루터기로 보고 이 선지자에게 주어졌던 만남, 주님과의 컨택(contact), 주님과의 접촉을 하나님의 새로운 계시로 확장시킵니다. 이게 이사야 시대와 노아 시대와 비교하면 확연히 차이가 납니다. 노아 시대에는 세상을 물로 덮어놨습니다. 물속에서 살 사람 아무도 없어요.

손흥민이도 죽고, 이재명이도 죽고 윤석열이도 죽고 다 물속에 있는 상태에요. 하나님께서 관심 있는 것은 대통령이냐 축구선수냐가 아니고, 연봉이 얼마냐를 보지 않습니다. 지금 네가 어디 안에 있느냐만 보십니다. 어디 안에 들어있는가. 방주 안에 들어있는가를 보십니다. 그러니까 노아 당시에는 시각적으로 굉장히 뚜렷합니다. 동동 뜨는 방주 속과 그리고 그 외의 바깥. 굉장히 뚜렷하게 등장해요.

그런데 이사야 시대는 이런 식입니다. 이사야와 함께 그리고 그 외는 멸망. 노아가 방주에서 나와서 그 민족이 확장되는 것처럼 이사야에게 있었던 경우를, 이사야에게 있었던 그 상황을 주께서는 이사야가 죄사함 받는 것을 확장합니다. 그러면 이사야가 죄사함 받을 때 이사야 본인이 사포(빼빠)로 자기 입술을 밀어버린 것이 아니고 숯불이 와서 입술을 지져버리니까 죄가 사해졌어요.

자, 그 숯불의 원천을 찾아가 봅시다. 그 숯불이 어디 있느냐. 바로 성전 제단이죠. 성전입니다. 왜 성전이 절대적인지 아시겠죠? 성전이라는 것은 천국을 들어올 때 모든 죄사함의 기능이 유일하게 제공되는 곳이 성전입니다. 성전의 제단, 희생제물의 제단, 희생제물을 홀라당 태워버리게 했던 그 불, 희생제물마저 태워버렸던 그 불이 이사야의 입술을 지져버립니다.

그러면 희생제물의 대신 죽음의 효과가 이사야의 입술에 담기는데, 그 사례, 그 경우를 주께서 확장시키시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사야가 뭘 언급할 수밖에 없느냐 하면, 이제 이스라엘은, 그러니까 유다 나라는 망합니다. 하나님의 약속대로 우상을 섬겼기 때문에 망하는데, 망할 때 망하더라도 제단은 망하는 가운데에 있어야 하는 거예요. 제단이 그 가운데.

기존의 제단은 바벨론에 의해서 홀라당 다 타버립니다. 하지만 그 그루터기같은 역할, 성전 자체의 모양을 통해서 홀라당 날아갈 대목과 어떤 재앙이 와도 버티고 있는 그 뿌리 부분을 구분 지어서 예레미야에게 예언하게 하는 겁니다. 그래서 이 성전이야기 하는데 바벨론이 와서 다 태워서 기초석만 남고 다 날아가거든요. 날아갈 때 후대 사람들이 뭐라고 이야기하겠습니까?

‘하나님이 만들라고 해서 만든 그 멀쩡한 성전이 왜 불탔지? 그리고 왜 그루터기는 남아 있는 거지? 남아 있는 것은 무슨 의미고 날아간 것은 무슨 의미냐?’라고 물을 거잖아요. 물을 때 여기서 선지자가 성전 자체에 대해서 해석하는 겁니다.

성전이 이렇게 훼파된 이유는 거짓 선지자들에게 사람들이 다 속아 넘어갔기 때문에 그렇다는 거예요. 사람들은 말합니다. 물론 저에게도 이야기합니다. ‘사람들은 왜 복음을 모르는지 몰라’라고 그렇게 복음을 모른다고 해요. 저는 절대로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복음은 알고 모르고 문제가 아니라 인간의 교만을 들춰내는 것이 복음입니다. 무지가 못 배운 것이 무지한 것이 아니고 교만해요.

복음을 전했잖아요. 전했는데 나오는 태도가 뭐냐 하면 ‘그러면 나의 가치는?’이라고 나오는 거예요. 교인님, 그것을 교만이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걸 교만이라고 해요. ‘나의 가치는? 내가 열심히 하나님을 섬기고 충성봉사 하는 나의 가치는 어디서 찾습니까?’라고 하는 그것이 바로 교만이고 그 교만이 뭘 불러내느냐 하면 자기를 교만케 한 악마와 한통속임을 불러냅니다.

간추려서 이야기하면 이렇습니다. 복음을 제대로 전파하고 해석하는 경우는 그 현장에 악마가 호출되는 경우입니다. 악마라고 해서 어디서 본 괴기영화에서 보는 그런 악마가 아니라 교만을, 깊숙이 숨겨졌던 교만을 유발하게 하는 거예요. 물론 설교시간에 손들고 아니라고 항의하는 경우도 있겠지만 보통은 입을 깨물어요. ‘설교시간 끝날 때까지만 참는다’라는 식으로 입술을 깨물어요.

기쁨으로 입을 벌리는 것이 아니고 격분해서 이를 악물어요. 그게 드디어 악마의 이미지가 얼굴에 등장한 순간입니다. 뭐냐면 ‘지기 싫다’라는 마음입니다. 누구에게? 주님에게. 주님에게 이겨서 뭐 할겁니까? 뭐 하려고 주님을 이깁니까? 주님에게 좀 지면 안 됩니까? 사람들이 그래요. 주님이고 사람이고 나는 태생이 누구에게 지고는 못 참는다는 식이에요.

‘내 가치가 엄연히 있는데 왜 훼손하느냐?’라는 식이에요. 다시 오늘 본문으로 돌아가 봅시다. 이건 제 이야기가 아니고 예레미야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하나님께서 바벨론에게 시켜서 나머지는 성벽에 올라가서 다 부숴도 그 기초는 남겨두라고 말씀하셨다고 전했습니다. 분명히 이렇게 성경에 나와요. 그럴 때 이렇게 한 번 생각해 봅시다.

그래서? 그 성전과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는데. 옛날 이스라엘 역사와 지금 오늘날 21세기 한국 땅과 무슨 상관인데? 내가 왜 거기에 신경을 써야 하느냐는 겁니다. 기름값 오르는 것이 신경 써야 할 일이지 우크라이나 전쟁 언제 끝나는지를 왜 신경 써야 하는데? 난 그거 관심 없어. 그렇게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 오늘 대부분 사람의 솔직한 심정입니다.

안 그래도 지금 바빠. 하루 일과가 빠듯하고 지금 돈 번다고 바쁜데 ‘성전이 뭐야?, 성전이 어떻게 훼파되고, 뭐가 좀 남겨있고, 하나님이 어떻고’ 이런 것들이 내 마음을 움직이지를 않아요. 우리 마음을 움직이는 요소가 아니라고요. 그거 한 번 이야기해보세요. TV 시청률 오르지 않습니다. 구약 때, 방주가 있다, 없다는 참 쉬워요. 선지가 있다, 없다는 참 쉬워요.

신약에는 더 어렵습니다. 성전은, 아예 없는 것은 우리는 관심 두지 않기로 다 같이 마음속으로 동의했어요. 주님은 이겁니다. “보이지 않는 것에 가치를 둔다면 내가 지난날 네가 한 모든 짓거리를 묻지 않도록 할게.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것에 네가 더 가치를 둔다면 네가 지난날에 어떤 짓을 했든 내가 입 다물게. 됐냐?” 이게 지금 신약시대의 방주의 조건이에요.

왜냐 하면 오늘날의 성전, 오늘날의 선지자, 오늘날의 복음은 보이지 않는 비밀이기 때문에. 구약은 그래도 이스라엘이 있잖아요. 구약은 그래도 성전이 불탄 흔적이라도 있잖아요. 신약에는 아무것도 없어요. 그저 있는 것은 월드컵 경기장만 있어요. 눈에는 도시 있고, 빌딩 있고, 그런 것들이 있어요.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가 있고 그저 국가가 있어요. 그러나 성경에 관심 두는 거 없어요.

그러니까 사람들은 관심 없어요. 없는데 무슨 관심을 둬요. 눈에 보이지도 않는데. 그런데 신약에서는 이 성전 이야기가 비밀로, 보이지 않는 것으로 나와요. 이게 성경에 나와 있는데요, 굉장히 어려워요. 골로새서 1장 26절 “이 비밀은 만세와 만대로부터 옴으로 감취었던 것인데”라는 이 말이 굉장히 어렵습니다. 왜 주께서는 방주처럼, 이스라엘 성전처럼, 눈에 보이도록 하면 되는데, 일단 눈에 보이는 것은 다 아니에요.

감추어졌고 보이지 않는 거예요. 왜 그렇게 하는가. 길게 하면 길어지는데 짧게 하겠습니다. 우리가, 인간은 악마랑 같이 움직이는 한통속이 되어서 내가 천국 문을 막아요. 내가 천국을 막아요. 그게 마태복음 23장에 나오는데 13절에 보면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라고 할 때 여기서 천국 문이 뭐냐 하면 본인들 덩치(몸집)예요.

뱃살 뺄 때는 운동을 어떻게 하면 되고, 비타민을 어떻게 챙기면 되고, 약은 몇 가지를 먹어야 하고, 남성들 전립선에는 뭐가 좋고, 이런 것들이 모든 관심사가 나의 가치 때문에 악마와 한통속이 된 거예요. 악마는 악마에게 사기당한 거예요. 보이스피싱에게 사기당한 거예요. 우리는 천국이고 뭐고 천국 문을 가로막아버렸다는 거죠.

그런데 이 바리새인들이, 바리새인들은 악마의 자식이라고 했는데, 그들이 천국 문을 닫는 방법이 뭐냐 하면 마태복음 15장에 보면 그들이 계명을 내세워요. 아침에도 그런 이야기 했지만, 자꾸 계명을 내세워서 ‘이 계명대로 지키면 여러분은 천국 갑니다’라고 한 거예요. 그러니까 이 말은 교만한 인간들을 더욱더 교만케 해서 속았다는 생각이 안 들게 만들어요. 이게 참 어려운데 정리해봅시다.

문은 비밀이라 없어요. 없는데 인간에게는 문이 뭐냐 하면 본인이 만든 문이 있어요. 말씀 열심히 지키고 교회 열심히 다닌 내가 천국 문을 자처하고 있어요. 이런 인간들의 선배가 누구냐 하면 바리새인들이에요. 바리새인들이 본인들이 말씀을 잘 지키고 율법을 지켰거든요. 그게 뭐냐 하면 천국 문을 가로막는 돌멩이, 가짜 문 역할을 하고 있었던 겁니다.

거기에 대해서 예수님은 네가 악마에게 철두철미하게 속아 넘어갔다는 거예요. 뭐가 빠졌습니까? 하나님께서 바벨론을 통해서 천국 문을 불태운다는, 한쪽은 불태우고 한쪽은 남긴다는 그 사실이 우리 안에는 지금 작용 안 하고 있는 거예요. 이사야에게 입술을 지진다는 그것이 우리 안에서는 작동을 안 한다는 거예요. 우리 안에는.

‘내가 뭐 어때서. 내가 얼마나 말조심한다고’ 이렇게 말조심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로 지져야 해요. 제단의 확장이니까. 이사야에게 있었던 그 경우가 확장되어야 해요. 이사야는 뭘 찾느냐 하면 시커멓게 불타버린 숯검댕이, 불타고 있는 나무 잡아당겨 보면 시커멓게 탄 부분, 그렇게 타버린 막대기같은 그런 사람을 찾는 거예요.

여러분 주변에 그런 사람이 있겠습니까? 여러분 말고, 여러분 주변에 숯검댕이 있던가요? 사람들은 뭐가 자기에게 애로가 있으면 애로를 감추고 그걸 극대화하지 않고 그걸 그냥 유야무야 넘어가려고 해요. 제가 어제 결혼식 가서 들었던 이야기인데 교회 100주년 기념식인가 하는데 나이 80 되신 장로님이 바이올린을 배웠던 모양이에요.

자기 이만큼 배웠다고 자랑하려고 바이올린을 연주하려고 하니까 성가대 하시는 집사님이 ‘장로님, 바이올린 줄 하나 끊어졌는데요’라고 하신 거예요. 그러니까 그 장로님이 하시는 말씀이 ‘줄 하나 없어도 나머지 줄로 연주하면 됩니다’라고 하신 거예요. 그래서 그냥 바이올린을 켰어요. 찍~~~찍~~거리는 쇳소리가 나고 연주가 안 되는 거예요.

우리가 어떤 말씀을 지켜도 그저 찍~~~찍~~거리는 쇳소리만 나요. 우리 자체가 애로예요. 우리 자체가 숯검댕이에요. 그런 사람을 이사야가 찾고 주님이 찾는다니까요. 이건 뭔가 하나님께서 확 달려들어서 ‘너는 죄인이다’라고 규정해놓고, 그 증거인 남아 있는 불탄 흔적, 그게 성도입니다. 오늘날. 그리고 그게 선지자예요. 선지자가 세상을 볼 때, 자기 자신과 이스라엘을 볼 때 그렇게 봤어요.

그런데 가짜 선지자들은 말씀 지키는 것을 격려하고, 위로하고, ‘당신은 잘 할 수 있습니다’라고 얼마나 헛바람을 집어넣는지 여러분도 보셨지만, 다시 한번 같이 보면 이렇습니다. 예레미야 5장을 다시 보면 얼마나 헛바람이 들었는지 12절에 보면 “그들이 여호와를 인정치 아니하며 말하기를 여호와는 계신 것이 아닌즉 재앙이 우리에게 임하지 않을 것이요 우리가 칼과 기근을 보지 아니할 것이며”라고 나오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렇게 섭섭하게 하실 그런 하나님이 아니다. 사랑의 하나님이신데 그럴 리가 없다’라는 그런 뜻이죠. 그리고 ‘하나님께서 일하는 거, 그거 너무 잘 아는데, 착하게 산 만큼 복을 주게 되어있다’라는 식으로 나오는 거예요. 그런데 그게 바로 바리새인이 스스로 천국 문을 막는 것처럼 마귀에게 속아 넘어간 거예요. 안 망하려고 하니까 자꾸 속는 겁니다.

끝으로 이 말씀 하고 마치겠습니다. 윤리, 도덕, 정의 수준으로 이게 막히면 안 됩니다. 정말 부탁합니다. 여러분들이 자기 신앙관으로 ‘이만큼 착하고, 이렇게 도덕적이고, 이렇게 정의로우니까, 이만큼 하면 되지 않느냐’라고 스스로 막아버리면 본인이 천국 문을 막는 거예요. 그 윤리, 도덕, 정의로움, 이것들이 구멍 나야 해요. 이것이 악마의 속임수라는 사실을 알아야 해요.

그걸 눈치채야 해요. 뻥 하고 구멍이 뚫려야 해요. ‘난 도덕 몰라. 윤리 몰라. 정의로움이 뭐야?’라고 구멍이 나야 해요. 내가 보는 것은 영적 세계에 도달되어야 하는 거죠. 주께서 나를 찢어버린 영적 세계. 나는 잘났다고 생각했는데 주님 보시기에 전혀 다른 평가가 주어졌던 그거. 다 날아가 버리고 “너는 죽어 마땅해”라는 증거로써 끄트머리가 시커멓게 불에 타다남은 그거, 그게 바로 오늘날 방주입니다. 성도의 성도다움이죠.

세상 사람들 잘사는 거 절대 부러워하지 마시고, 세상 사람들 상장받는 거 부러워하지 마시고, 우리의 관심사는 이 땅에 천국이 없다는 오히려 그것이 얼마나 영적 세계가 지금 도래하고 있다는 것을 도리어 반증으로 받아들이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문이 있다면 쥐나 개나 다 천국 갔을 건데, 문이 없기에 주께서 지진 자만 보이는 문, 아무도 찾지 않는 문, 그 문의 가치가 나의 존재의 가치보다 월등함을 도리어 기뻐하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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