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오후설교

구원은 좌석제

아빠와 함께 2022. 12. 19. 08:43

설교노트

 

구원은 좌석제 

2022년 12월 18일                  본문 말씀: 예레미야 5:7-9

(5:7) 내가 어찌 너를 사하겠느냐 네 자녀가 나를 버리고 신이 아닌 것들로 맹세하였으며 내가 그들을 배불리 먹인즉 그들이 행음하며 창기의 집에 허다히 모이며
(5:8) 그들은 살찌고 두루 다니는 수 말 같이 각기 이웃의 아내를 따라 부르짖는도다
(5:9) 나 여호와가 이르노라 내가 어찌 이 일들을 인하여 벌하지 아니하겠으며 내 마음이 이런 나라에 보수하지 않겠느냐

사람들이란 자신이 원하는 타인을 본인이 고릅니다. 자신이 원치 않는 타인이 왔을 때는 완강하게 거부하게 됩니다. 사람들이 이렇게 행동하는 이유는, 본인이 질문을 하고 그 답을 본인이 내리는 방식으로 세상을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본인이 본인에게 질문하기 전에 다른 사람이 자기에게 질문하게 됩니다. 이것은 곧 ‘지적질’에 해당됩니다.

이렇게 되면, 이것보다 더 기분 나쁜 일은 없을 것입니다. 인간들은 항상 자기 일에 대해서 최선을 다합니다. 이 말은, 자신이 태만하고 게으르다고 느끼는 그것조차 자신만이 내뱉을 권한이 있다고 여긴다는 뜻입니다. 타인으로부터 추가적인 지적질을 들어오는 것을 사전에 커버하는 취지가 같이 붙어 있습니다.

즉 내가 망하든, 성공하든 무엇을 하든 내가 요청하기 전에 남이 나의 인생에 개입하는 것은 결코 좌시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모든 인간에게 강렬하게 있는 겁니다. 조언하고 자문을 해주는 것도 본인이 먼저 타인에게 요구할 때나 가능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인간이 철저하게 자기 위주로 사는 마당에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를 보내를 가차없이 그들의 한계를 지적합니다.

그것도 일방적으로 쏘아붙입니다. “너희들이 이런 저런 짓을 해놓고서 살기를 바랄 생각을 말라”는 겁니다. “너희들은 나에게 벌받아도 할 말이 없는 자들이다”는 겁니다. 여기에 대해서 인간의 반응은 간단합니다. 그렇게 말하는 자는 무시하거나 피하거나 없애면 됩니다. 참된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이 자신을 죽여 없앨 때까지 계속 인간을 몰아세우게 됩니다.

바로 이점이 이스라엘의 특혜입니다. 이방민족에게는 이런 혜택도 없습니다. 인간들이 하나님을 찾기 전에 먼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에게 자신의 뜻을 전달하는 경우말입니다. 이스라엘은, 자신이 망한다는 것을 미리 알려주신 것에 대해서 영광인 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지시는 인간이 아무리 애써도 지켜내지 못한 지시입니다.

그 원인은 인간은 스스로 자신을 구원해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구원이라는 것은, 인간들이 추가적으로 획득할 수 있는 또 하나의 가능성이 아닙니다. 도리어 인간을 절망으로 몰아세우는 계기가 구원입니다. 구원에 이르기에 인간은 아무 것도 할 게 없고 해내는 것이 없습니다. 마치 바로가 히브리인들에게 요구하는 바와 같습니다.

“너희는 백성에게 다시는 벽돌 소용의 짚을 전과 같이 주지 말고 그들로 가서 스스로 줍게 하라”(출 5:7) 마치 종이를 주면서 가죽핸드백을 만들라는 지시와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인간 지경으로 몰아세우고서 비로소 ‘구원’을 언급하십니다. 즉 ‘구원’이란 인간들이 무엇을 기대하든지 간에 그 모든 기대로부터 빠져나오게 하시는 일입니다.

이 취지는 예수님과 제자들 사이에서도 일어납니다. 요한복음 13장에서 베드로는 기어이 예수님을 어디로 가시든지 따라 나서겠다고 말합니다. 여기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기어이 베드로와 함께 하지 않겠다고 하십니다. 그 이유는 요한복음 14장에 나옵니다. 그것은 구원이 좌석제이기 때문입니다.

지정된 자리가 확보될 경우에만 구원이 완성됩니다. 그리고 이 지정된 자리 만들기에 베드로 및 제자들이 할 수 있는 것을 아무 것도 없습니다. 하지만 베드로 및 제자들 입장에서는 지난 3년 동안 예수님과 함께 한 모든 일을 무로 돌릴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왜 예수님께서 혼자 가시려고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즉 구원은 구원해주시는 분과 구원받는 자가 합작해서 이룬 성과가 왜 될 수 없는지를 모르겠다는 겁니다. 이런 생각은 마치 안경을 쓴 채, 안약을 눈에 넣으리는 시도와 같습니다. 인간들은 ‘구원을 생각하는’ 그 자기 자신으로부터 이별해야 합니다. 그런 자기 생각에서부터 구출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인간들은 자신이 질문을 하고 거기에 대해서 자신이 답하려고 하면서 결국 자신의 노고와 수고를 잊을 수가 없게 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질문하시고 스스로 답변하시기에 인간의 요구사항과 별개로 마련된 자리를 만드시는데 바로 그 자리만이 구원의 자리가 됩니다.

따라서 인간이 노리는 바는 구원이 아닙니다. 이 사실이 구약, 야곱의 아들에게도 일어났습니다. 창세기 38장에는 야곱의 넷째 아들 유다 가정에서 있었던 일이 나와 있습니다. 야곱의 아들들은, 아버지께서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은 축복에 관한 내용이 자동적으로 자신들에게 주어질 줄로 알았습니다.

즉 맏이 계열로 주어지는 야곱이 하나님께 받은 복을 위해서 유다는 아들들이 튼튼하게 살아있어야 한다고 여겼습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큰 아들부터 둘째 아들까지 죽어나갑니다. 유다는 위기를 느꼈습니다. 이 불행사가 이방여인인 큰 며느리에게 있다고 단정지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여인과 관계맺은 자식들이 다 죽었으니까요.

그래서 친정으로 쫓아버립니다. 유다 셋째 아들까지 다치기 싫어서입니다. 유다는, 아버지 야곱이 하나님의 개입으로 이름이 ‘이스라엘’로 바뀐 것을 감안했어야 합니다. 인간들의 스스로 결심으로 자기가 자기로부터 빠져나올 수가 없습니다. 본인이 채택한 타인이 자신을 살려주고 구원해주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은 타인을 선택한 권리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구원은 좌석제이기 때문입니다. 본인이 희망한다고 해서 그 좌석을 확보하는 게 아닙니다. 유다는 자진해서 자신이 아버지의 복을 받을 수 있다고 자부하는 반면에 며느리 다말은 말씀 자체에 유념했습니다. 즉 인간 현실 세계는 말씀의 세계에 의해서 치워진다는 사실을 알았던 겁니다.

며느리 다말은 창녀로 변장해서 시아버지와 관계를 맺고 임신할 날만 기다렸습니다. 다말은 아버지로부터 관계 맺은 대가로 도장과 끈과 지팡이를 확보했습니다. 며느리가 창녀로 변장한 것도 모르고 시아버지 유다는 자신이 그녀에게 맡긴 도장과 끈과 지팡이를 되돌려받기 위해 찾아갑니다.

그 전의 소문에 의하면 며느리 다말이 임신했다고 소리를 듣고서는 ‘불로 태워죽여야 한다’라는 과격을 반응을 보입니다. 막상 그 창녀가 며느리인 것을 알고 난 뒤에, 비로소 유다는 다말보고 “네가 옳다”고 인정해줍니다.(창 38:26) 즉 하나님께서 다말을 통해서 유다 자신으로부터 유다를 구출해주십니다.
 
즉 구원이란 나의 일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주님 자신의 일이었던 겁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주님 자신의 답변 안에 우리 자신을 일방적으로 넣어주신 것에 감사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셜교

 

30강-예레미야 5장 7~9절(구원은 좌석제)221218 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예레미야 5장 7~9절입니다. 구약성경 1057페이지입니다.

“내가 어찌 너를 사하겠느냐 네 자녀가 나를 버리고 신이 아닌 것들로 맹세하였으며 내가 그들을 배불리 먹인즉 그들이 행음하며 창기의 집에 허다히 모이며, 그들은 살찌고 두루 다니는 수 말 같이 각기 이웃의 아내를 따라 부르짖는도다, 나 여호와가 이르노라 내가 어찌 이 일들을 인하여 벌하지 아니하겠으며 내 마음이 이런 나라에 보수하지 않겠느냐”

‘보수’라는 말은 복수한다는 말입니다. 내가 그들에게 행한 것이 있는데 그들은 주님이 행한 것은 생각하지 않고 본인이 행한 것을 자신이 수고했음을 우기는 거, 자신이 최선을 다하고 있음을 주장하는 거, 그런 나라에 하나님이 복수하시겠다고 하십니다. 이 복수의 대상이 되는 나라가 바로, 하나님의 나라 이스라엘입니다. 유다 나라이기도 하지요.

하나님께서 7절에 “내가 어찌 너를 사하겠느냐”라고 하신 말씀에서 아셔야 할 것은 인간이 자기가 마음에 맞는 타인(타자)을 선택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이게 이스라엘과 다른 나라의 차이점입니다. 다른 나라는 본인이 ‘우리와 교제합시다. 사귑시다’라고 본인이 결정할 수 있는데 하나님은 불쑥, 이스라엘이 원치 않는데도 불구하고 쑥 들어오셔서 “나는 너희를 용서하지 않겠다”라고 나서십니다.

그리고 너를 용서하지 않는 이유를 하나둘씩 끄집어내십니다. 그럴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런 하나님 말고 우리를 지적하지 않고 우리에게 따지지 않는 다른 신을 섬기는 것이 우리의 마음과 맞으면 다른 신으로 옮겨갑시다’라고 할 수 있겠죠. 인간이니까. 인간이 요청하지 않는 하나님이 난데없이 쳐들어 와서 “나는 너희를 용서하지 않는다”라고 하실 때, 인간이 할 수 있는 대처법은 그 신을 안 믿든지, 없애버리든지, 외면하든지, 그러면 되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러기를 바라면서 윽박지르고 이스라엘에게 쳐들어오시는 거예요. 왜냐 하면 하나님 자신에게 자신을 죽이는 상대자가 이스라엘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유다 나라죠. ‘너는 나를 꼭 죽여야 해’라는 것을 이루기 위해서 네가 원치 않는 방식으로 내가 너에게 쳐들어갈 거야. 이러한 관계가 얼마나 복된 관계인 것을 우리가 알아야 해요.

우리가 원하는 하나님이 아니고 우리 허락도 없이 쑥 들어올 때 비로소 우리는 하나님의 진실을 접할 수가 있습니다. ‘내가 원하는 하나님이 아니라 일방적으로 쳐들어오는 하나님이 진짜 하나님이구나’ 그럴 때 비로소 뭐가 성립되는가. 구원이라는 것이 성립돼요. 구출이 성립되는 겁니다. 우리는 구출될 마음 보다도 최선을 다할 마음이 항상 있어요.

우리가 어디서 빠져나오는 것보다 내가 최선의 노력을 해서 실적을 얻기를 우리는 더 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이 구출하실 때 애굽나라에서 유대인이 히브리인에게 어떤 요청을 했는가. 그것이 출애굽기 5장 6~7절에 보면 나옵니다. “바로가 당일에 백성의 간역자들과 패장들에게 명하여 가로되, 너희는 백성에게 다시는 벽돌 소용의 짚을 전과 같이 주지 말고 그들로 가서 스스로 줍게 하라”라고 되어있어요.

그러니까 짚을 주지 않고 벽돌을 만들라는 터무니없는 요구가 쑥 들어올 때, 그 타이밍에 맞춰서 모세가 등장합니다. ‘가자, 그들과 상관할 거 없잖아. 그들에게 신경 쓸 거 없잖아’라고 하는 거죠. 쉽게 말해서 가죽 핸드백을 만드는 공장에 종이만 주고 가죽 핸드백 만들라는 것과 같아요. 이게 뭐냐 하면 시도 자체가 어처구니없어요. 이거는 될 리가 없죠.

될 리가 없는 상황 만들어서 찾아오시는 하나님. 이 말이 뭐냐 하면 ‘가자. 네가 아직도 미련 갖고 있고 예측하는 이 세상에서 그만 나랑 같이 빠져나오자’라는 것이 구원입니다. 사람들이 구원을 못 받는 이유는 자기가 생각하는 구원이 따로 있기 때문에 그래요. 자기 가오, 자기 명예, 자기 명성, 자기 노력, 이것들을 다 그대로 인정해주는 구원을 생각하고 있는 거예요.

자기 헌금한 거, 자기 기도한 거, 전도한 거, 예배 참석한 거, 성경공부 한 거, 내가 하나님을 위해서 한 그것이 고스란히 성과급으로 남아있는 그 세계를 동경하고 그 세계가 천국이기를 원하는 거예요. 자기만족에 빠지는 세계요. 그런 인간을 우상이라고 하죠. 오늘 본문에서 예레미야가 지적하는 것에 대해서 하나님이 “네가 나를 버리고 다른 신을 섬겼다”라는 말씀은 예레미야의 일방적 주장이에요.

유대인들은 여호와를 버린 적이 없어요. 다만 다른 신을 같이 따져보면서 섬겼지요. 쉽게 말해서 교회 다니는 권사가 점 보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를 안 다니는 게 아니에요. 일단 재미 삼아 궁합은 보자는 거고, 우리 딸과 저쪽 아들이 맞는지 안 맞는지 물어보살에게 가서 한번 사주랑 따져보자는 거죠. 이건 그냥 찝찝해서 해보는 거지 꼭 믿는 것은 아니고.

이게 뭐냐 하면 하나님을 믿든, 누굴 믿든, 내가 선택한 그 선택에 대해서 나의 가치와 의미는 내가 갖고 있겠다는 거예요. 주님은 바로 거기서 나오라는 겁니다. 내가 선택한 가치와 의미 그리고 나의 결정, 그것에서 나오라는 겁니다. 이게 인간으로서는 가능하지 않죠. 그러니까 윽박지르는 방법밖에 없다는 겁니다. 계속 윽박질러요. 지금 예레미야가 이 정도 지적했죠?

산상설교에 가면 예수님은 더 지적합니다. “오른손이 한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부터 해서 돈을 구하는 자에게 그냥 줘버리라는 것까지 있을 수 없는 것만 지적하시죠. “오른손이 실족하게 하면 베어버려라, 아무것도 맹세하지 말라”라는 이건 정말 터무니없습니다. “무엇을 입을까 먹을까 생각하지 말라. 그건 지옥 가는 자가 하는 일이다” 어느 것 하나 우리가 지킬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습니다. “마음속으로 간음한 것도 간음한 것이다”라는 이걸 무슨 수로 지킵니까?

하나님이 윽박지르시는 이유가 뭐냐. 그건 천국이 좌석제이기 때문입니다. 천국은 좌석제입니다. 가고 싶어서 손든다고 넣어주는 곳이 아니에요. 주께서 좌석을 만들어야 해요. 마치 비행기 좌석처럼, 극장의 좌석처럼. 요한복음 13장 36절에 보면 베드로에게 너는 못 온다고 선을 확 그어버려요. “시몬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나의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 올 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오리라”

이건 베드로 입장에서는 자기 단절입니다. 자기 단절이고 베드로 입장에서는 예수님과의 절연 관계입니다. 전선이 끊어진 관계죠. 베드로는 3년 동안 희생했던 모든 것이 다 날아간 허망함을 만끽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마지막으로 한 말은 “오지 마라. 이제부터 나 혼자 갈 테니 너는 오지 마라. 너는 올 수 없는 곳이다”

우리는 교회 다니면서 그것을 한 번이라도 생각했습니까? 천국이 내가 갈 수 없는 곳이라는 걸 생각하면서 교회 오셨습니까? 왜 천국 가고 안 가고를 내가 결정하려고 했습니까? 그래놓고는 뭐 남의 교회가 어떻고, 한국교회가 썩었고, 자기 분간도 못 하면서 쓸데없는 간섭 질을 하지 않았습니까? 자기 자신으로부터 구원받지도 못하면서 남 걱정하고 있어요.

좌석제라고 하는 것은 네가 남을 비판할 권리조차 없다는 거예요. 왜 우리는 남을 비판하느냐 하면 질문을 내가 던지고 답을 내가 갖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질문을 내가 하고 답을 내가 하면 그 안에 뭐가 남아있느냐 하면 나의 수고가 남아있어요. 나의 애씀이 고스란히 남아있습니다. 내가 걱정한 거, 염려한 거, 내가 안절부절한 거, 그것도 하나의 의미로 남아있어요.

우리가 안절부절 애쓴다고 해서 구원해주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은 좌석제예요. 우리가 어떻게 애달든 간에 일체 그것은 구원의 고려 대상이 되질 못 합니다. 인간은 자기와 헤어지질 못해요. 그래서 구원이 못 되는 거예요. 인간들이 기어이 안 헤어지니까 주님께서는 인간이 지킬 수 없는 그 말씀을 가지고 계속 윽박지르는 거예요. 우리가 우리에게 절망할 때까지, 우리가 우리 구원에서 손 놓을 때까지 계속 윽박지르는 겁니다.

요한복음 14장 2~3절에 보면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라고 되어있거든요. 여기에 대해서 들었던 제자들이나 우리도 마찬가지예요. ‘안 오시면 어떻게 해요? 오신다고 분명히 이야기는 했지만 안 오시면 어떻게 해요’

걱정되지 않을 수가 없죠. 거기에 대해서 주님의 준비된 답변은 “그러니까 너희들은 나를 믿은 적이 없다” 왜 인간이 예수님을 믿지 못하느냐 하면 인간은 끝까지 믿는 구석이 따로 있어요. 자기 자신을 믿어요. 자신의 예측, 예상, 기대, 오직 이것만 믿습니다. 그래서 인간들은 말합니다. ‘내가 나를 안 믿으면 누구를 믿나?’ 이것이 교회 50~60년 다녀도 변하질 않아요.

내가 나를 안 믿으면 누구를 믿는데? 사람이 안경을 쓴 채로 안약을 넣을 수가 없잖아요. 안경을 벗고 안약을 넣어야 하지 않습니까. 그 안경이, 나 중심의 안경을 썼다는 것을 인간들은 생각을 못 하고 계속 끼고 있는 거예요. 주님께서는 강제로 안경을 벗겨버립니다. 안경을 벗겨버리면 내 중심의 세계가 한꺼번에 다 날아가 버려요.

어떤 재벌 집 부인이 있는데 그 부인이 50년 동안이나 남편을 봉양해 줬어요. 봉양하면서 자기는 남편에게 할 말이 있어요. ‘50년 동안이나 당신에게 하녀 생활했다’라고 할 때 남편은 뭘 알고 있느냐 하면 ‘네가 나에게 하녀처럼 50년 동안 봉사한 것이 네가 낳은 아들을 순양그룹 다음 후계자로 삼으려고 그 짓 한 거 다 알고 있다’라고 하는 거죠.

그러니까 이필옥 여사는 자신을 포기한 적이 없어요. 남편이 여사에게 ‘네가 죽이려고 했지?’라고 해놓고는 다시 한번 그 여자의 역할을 깨우쳐줍니다. “나 지금 배고프다. 아들 하나 낳았다고 유세하나? 정지(부엌)에 묵을 거 하나도 없더라. 점방가가 계란 하나 사 온나. 후라이나 해묵자”라고 말하고 의자에 누워서 다시 잡니다. 이게 ‘재벌 집 막내아들’ 드라마에서 나온 대사예요.

이필옥 여사는 남편을 봉양한 것이 자기 행함의 의미를 살리는 미래를 생각한 거예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그걸 우째 그리 잘 아시는지, 주님이 도사죠, 계속 윽박질러요. “구원은 좌석제다. 네가 나설 문제 아니다. 50년? 종살이? 그런 거 필요 없어”라고 끝까지 밀어붙여요. 네가 자신의 행한 것을 손 놓을 때까지. 다 놔버리라고 하는 겁니다.

그러면 왜 인간은 자신을 놓지 못하느냐. 이게 조금 어렵지만, 창세기 38장을 한번 생각해 보겠습니다. 거기 보면 유다가 나와요. 유다가 야곱의 4번째 아들이잖아요. 그런데 유다가 뭘 생각하느냐면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똑같이 생각해요. 여러분이 아셔야 할 것은 야곱의 아들이 유다입니다. 그런데 아직 이스라엘의 아들은 아니에요. 아침에도 이야기했지만, 성도에게는 두 개가 있습니다.

야곱이라는 육신, 아담의 계열이 있는 반면에 이스라엘이라는 마지막 아담, 예수님의 계열이 똑같이 성도에게 작용하고 있어요. 야곱은 이스라엘로 바뀌었잖아요. 그런데 유다는 아버지가 아니니까 야곱의 요소를 그대로 물려받은 거예요. 그러니까 이런 생각을 하는 겁니다. ‘아버지가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아서 아버지의 약속에 의하면 그 복이 그대로 열두 아들에게 전달된다. 따라서 전달되는 중간노선에 우리가 있으니까 이건 자동으로 아버지 복이 우리에게 주어진다는 이것이 하나님의 약속 맞다’라고 이렇게 유다뿐만 아니라 야곱의 아들 전부다가 생각한 겁니다.

그런데 야곱의 아들들이 뭘 놓치고 있느냐 하면 야곱이 계통은 그 말이 맞아요. 그러나 이스라엘에게 준 복은 그런 계통이 아닙니다. 육의 계통이 아니에요. 야곱이 이스라엘로 바뀌듯이 나도 같이 바뀌어야 해요. 물론 나중에 유다와 나머지 아들들이 바뀌어요. 요셉이 희생됨으로써 그제야 정신을 차려요. 내가 복을 받을 자가 아니라 이건 복을 원하는 자체가 죄이고 복을 원하는 나로부터 구원되어야 한다는 사실, 그 사실을 깨닫게 되어요.

구원은 좌석제이지 내가 미리 요청한다고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 따로 정해져 있는 거예요. 유다도 착각했죠. 복이 우리에게 온다. 복이 오면 내가 낳은 아들에게도 하나님께서 복을 주실 것이다. 당연히 그렇게 생각한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자식을 안 주네요. 자식을 줬는데 그 자식이, 있는 자식 중에 첫째 아들 죽고, 둘째 아들 죽고, 셋째 아들은 아직 살아있는데 유다 생각에는 곧 죽을 것 같은 거예요.

여기서 유다 자체가 야곱이 이스라엘로 바뀌는 경험처럼 동일하게 유다 자신이 바뀌어야 할 경험이 창세기 38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기록이 유다뿐만이 아니고 오늘날 우리 이야기예요. 쉽게 말해서 나는 내가 안 되는, 내가 도저히 할 수 없는, 내가 나로부터 구원은 어떻게 성사되느냐. 그걸 유다를 모델로 제시해서 우리에게 말씀해주고 있는 겁니다.

유다가 아들을 낳았는데 큰아들이 엘, 둘째 아들은 오난, 셋째 아들 이름은 셀라입니다. 엘이 죽고, 오난이란 아들이 죽을까 조마조마한데 하나님의 주신 법에 의하면 형에게 자식이 없을 때는 형이 중요하기 때문에, 맏이에게 복이 오니까, 맏이의 복을 인수인계 받도록 아들을 낳기 위해 시동생들이 형수와 관계를 맺어서 자기 아들이 되질 못 하고 죽은 형의 아들로 아들을 만들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율법에 의해서.

그래서 법대로 오난이라는 시동생과 다말이라는 형수와 관계를 맺다가 오난이 아이를 낳아봐야 내 아이가 안 된다는 생각을 해서 그만 엉뚱한 데 배설하고 말았어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둘째 아들을 죽여버렸어요. 이 사실을 누가 목격하고 있는가. 아버지가 목격하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아버지가 뭘 생각하느냐 하면 이 사건의 화근이, 이런 사달 난 것이 형수 다말에게 문제가 있다 해서 셋째 아들 살리려고 첫째 아들 부인인 며느리 다말을 추방시켰습니다.

‘재수 없는 것이 우리 집안 들어와서 집안이 망하게 된다. 우리 집안이 어떤 집안인 줄 아나? 하나님 약속의 집안이다’ 지금 유다는 본인의 이런 생각에서 구원받을 수가 없어요. ‘하나님, 하나님’ 거론하지만 나도 살고 하나님도 살고, 지금 이런 엉뚱한 생각을 하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말씀의 세계가, 너무나 명확히 인간들이 자기만 챙기는 이 현실의 세계를 말씀의 세계가 밀어버리고 치워버리는 거예요.

마치 눈 오면 눈 치우듯이 화끈하게 치우는데 이 며느리 다말에게 뭐가 있느냐 하면 하나님의 생각을 제대로 아는 것이 들어있었던 거예요. 그래서 자기 시아버지에게 아들을 달라고 요청했지만 유다는 친정으로 가라고 쫓아냈어요. 그러니까 다말이 창녀로 변장해서 아버지가 온다는 소식을 듣고 거기서 아버지와 관계를 맺어버립니다. 그리고 돈을 안 받고 당신이 갖고 있는 염소 새끼를 준다는 약속의 담보로 시아버지 유다의 지팡이, 도장, 그리고 끈을 챙기고 헤어졌어요.

그러고 난 후에 소문에 며느리가 임신했다는 소식을 듣고 유다가 노발대발하면서 ‘내가 그런 여자인 줄 알았다. 그렇게 함부로 몸을 굴리는 여자인 줄 알았다’라고 생각하면서 그냥 죽이지 말고 불로 태워죽이라고 합니다. 원래 이보다 먼저 유다가 자기 물건 찾으려고 창녀를 찾으러 염소 새끼를 들고 거기에 갔었어요. 그런데 거기 사는 사람들이 ‘여기에는 창녀가 없습니다’라고 한 거예요.

그리고 석 달 후에 며느리가 임신한 소식을 들은 거죠. 그러니까 다말은 자기의 임신 소식이 알려질 때까지 계속 기다린 거예요. 그러고 그렇게 불태우라고 해서 며느리를 데려올 때 ‘너 어느 놈과 붙었냐?’라고 추궁하니까 ‘이놈과 붙었습니다’라고 내놓은 것이 지팡이와 도장과 끈을 내놓은 거예요. 그때 유다가 알게 된 거예요. 하나님은 말씀으로 나 중심의 현실을 지워버리고 치워버린다는 사실을 발견했어요. 나보다 말씀이 더 우선인 거예요.

다시 말해서 주님은 나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주신 말씀 자체를 건진다는 거예요. 말씀 자체를. 그러니까 말씀이 없는 사람은 탈락이에요. 말씀이 나를 이겨야 해요. 세상 모든 주시는 말씀이 나의 뜻과 내 생각을 밟아야 해요. 어떻게 밟느냐. 내 고집과 내 희망을 극단적으로 몰아가는 거예요. 파도가 가장 높아질 때, 파도가 부서지기 직전이 가장 높아요.

주께서 극단적으로 나를 몰아세울 때 기뻐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곧 구원받을 거예요. 유리창 깨지듯이 와장창 나의 전부가 깨어질 때, ‘이거 하나만큼은, 내 자식만큼은, 이 신학 공부한 이것만큼은 가치 있는 겁니다’라고 뭘 자꾸 쥐려고 할 때 그것마저 무너져야 해요. 내 것 남기는 것은 마치 짚을 주고 벽돌 만드는 것과 같아요. 짚을 주지 않아야 해요. 가죽 안주고 가죽 핸드백 만드는 것과 같아요.

왜, 왜 그렇게 하느냐. 질문을 주님이 질문하고 답을 우리가 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이 질문하고 주께서 답하신 것에 내가 걸려들 때 비로소 내가 질문하고 내가 답하는 것은 나의 구원과 무관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겁니다. 나 잘되기 위해서 내가 기대하고 희망하는 거, 그것이 계속 솟아 나올 때, 바로 이 사실에서 내가 건져냄을 당해야 한다는 것을 아는 거죠.

이것을 숫자로 이야기하면 ‘0’ 다음에 숫자는 없다는 말이 됩니다. 인간은 ‘0’ 다음에 ‘1’을 만들어냈어요. 주님께서는 ‘0’ 다음에 ‘0’ 이에요. ‘없음’ 다음에 ‘없음’이고 끝까지 없음이에요. 너는 없음. ‘0’ 다음에 ‘1’ 있고, 다음에 ‘2’ 있고, 그다음에 ‘3’ 있고, 이런 것이 아니고 ‘0’ 다음에 ‘0’ , 그다음에 ‘0’, 애초부터 ‘0’ 이고 끝까지 ‘0’ 이에요. 나중에 천국 가니까 주님만 계시고 주님에게 우리가 그냥 좌석제로 주의 이름으로 구원받은 거죠.

그 사실을 위해서 오늘 본문 예레미야는 끝까지 밀어붙입니다. “내가 너에게 복수하겠다. 내가 너희를 지워버리겠다. 내가 너희를 없앤다고 해서 섭섭하게 생각하지 마라” 어찌 벌하지 않겠습니까. 주께서 이스라엘을 벌하는 것은 결국 너희들이 나를, 이렇게 벌하겠다고 훅 들어온, 네가 선택하지 않은 타인으로서 내가 너희들을 찾아갈 것이고, 너희의 선택하지 않은 타인이라는 이유로 나를 죽일 것이다.

따라서 피조물이 하나님을 죽였으니까, 어찌 하나님이 피조물을 벌하지 않겠느냐. 그러니까 너희 하나님이 하시는, 너희를 지워버리는 일은 합당하다. 그런데 그것이 바로 구원의 전제가 되고 환경이 되는 겁니다. 그냥 내가 원하는 사람 뽑아서 천국에 좌석에 채워 넣는데 세상에 누가 말하리오. 누가 시비를 걸어요? 시비 걸 사람 없습니다.

시비 거는 사람이 누구냐? ‘제가 이만큼 하나님께 노력했는데 왜 나를 안 건집니까?’라는 이런 마귀 자식들만 시비 걸 거예요. 항상 처음에 우리가 없을 때 주께서 말씀으로 시작해서 말씀으로 진행되는 그 과정에 우리가 걸려든 거예요. 따라서 나의 생각보다 말씀대로 되어감에 대해서 우리가 찬양할 뿐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구원에 대해서 공부를 하고 주님을 공부했지만, 항상 장애가 되고 애로가 되었던 것은 우리 자신의 고집이었습니다. 애로가 있다는 자체가 도리어 구원의 빌미가 되었다는 것을 도리어 감사하고 찬양할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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