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오후설교

초신성

아빠와 함께 2022. 12. 4. 20:29

초신성 

2022년 12월 4일                   본문 말씀: 예레미야 4:29-31

(4:29) 기병과 활 쏘는 자의 훤화로 인하여 모든 성읍이 도망하여 수풀에 들어가고 바위에 기어오르며 각 성읍이 버림을 당하여 거기 거하는 사람이 없나니

(4:30) 멸망을 당한 자여 네가 어떻게 하려느냐 네가 붉은 옷을 입고 금장식으로 단장하고 눈을 그려 꾸밀지라도 너의 화장한 것이 헛된 일이라 연인들이 너를 멸시하여 네 생명을 찾느니라

(4:31) 내가 소리를 들은즉 여인의 해산하는 소리 같고 초산하는 자의 고통하는 소리 같으니 이는 딸 시온의 소리라 그가 헐떡이며 그 손을 펴고 이르기를 내게 화 있도다 살륙하는 자를 인하여 나의 심령이 피곤하도다 하는도다

성경을 대하는 것은 인간들이 하나님을 향하여 자기 하소연을 하라는 책이 아닙니다. 도리어 우리 자신의 요구를 끊고 하나님께서 특화시킨 자들이 하나님에 의해서 어떻게 다루어졌는가를 보게 하십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기 이야기 내놓기에 급급해서 하나님께서 제시하는 특화된 민족, 이스라엘에서 일어난 일을 남의 일로 처리하기 싶습니다. 

바벨론 군대가 저돌적으로 거침없이 용맹스럽게 유대민족을 칩니다. 여기에 대해 유대민족은 어찌할 바를 모릅니다. 무력증에 빠져 있습니다. 기껏 한다는 게 자기를 예쁘게 꾸며 침략군대의 환심을 사서 자신을 못죽이게 하는 것 뿐입니다. 하지만 그것조차도 무용지물입니다. 왜냐하면 바벨론 군대의 침략은 사람의 의도를 능가하기 때문입니다.

유대나라 망하라고, 꼭 망하라고, 필히 망하라고 하나님께서 움직인 군대입니다. 평소에 인간들이 위험에 대비해서 자신을 지키는 방식으로서 실패합니다. 이는 사람 대 사람의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런 식으로 망하게 되는 유다나라의 최후의 일에 대해서 그 당시 이방민족이나 오늘날 사람들은 남의 일로 여깁니다. 자기하고 상관없는 일로 봅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계시를 위해 특화된 민족이라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들에게 다른 민족에게 당했던 일은 실은 자기 하나님에게 당한 일입니다. 그리고 앞으로 모든 민족들은 다른 하나님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하나님으로부터 처절하게 당하게 됩니다. 즉 현실 자체가 하나님 자신의 일입니다. 사람들에게 맡긴 일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이 사실을 모릅니다. 예를 들면, 어느 어항에 두 물고기가 살고 있습니다. 한 물고기가 다른 물고기에게 말을 건넵니다. “물이 참 고맙지 그지?” 다른 물고기가 대답합니다. “물이 뭔데?” 이 세상에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은혜가 아닌 것이 없습니다. 하지만 인간들은 그거 어디있느냐는 식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스라엘도 약속의 땅에서 살면서 이런 이방민족의 의식을 닮아갔습니다. 이것은 새삼스럽게 이스라엘이 타락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계속 주어지는 계시 앞에서 인간 본래 지니고 있던 증상이 드러난 겁니다. 인간 자체가 증상이면서 인간들은 그 병이 어떤 병인지를 알길이 없습니다.

인간의 병은 완벽하지도, 완전하지도 않으면서 완전이라고 여기는데 있습니다. 예를 들어, 유리컵을 바닥에 던져 산산조각 났을 때, 인간이 아무리 노력해도 그 유리컵이 새것처럼 완전하게 조각을 맞출 수가 없습니다. 문제는 어설프게 대충 맞쳐놓고서는 전에 그 컵이라고 우리는데 있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산다는 것은 인간이 애쓰고 노력한다고 될 일이 아닙니다. 인간 스스로 시도하는 모든 것은 결국 ‘나 이렇듯 완전해지려고 노력하는 바를 가상이 여겨주세요’라는 것밖에 안됩니다. 적군 앞에서 화장하면서 상대로부터 자신의 아름다움에 반하도록 조치하는 인간의 태도처럼 평소에도 인간들은 자기 마음을 늘 화장해오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새로운 마음이 덮치게 되면 자신의 마음을 그만 접고 포기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바벨론 군대가 쳐들어왔을 때의 유다나라의 심정을 다음과 같다고 합니다. 여자가 아기를 임산할 경우라는 겁니다. 육체는 하나인데 거기에 두 마음이 생겨버렸습니다. 참 신기한 일입니다.

두 마음 중에 한 마음을 포기해야 합니다. 빌립보서 2:5-8에 보면,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성도란 새로운 창조물이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기존에 있는 마음을 추방해버리는 새로운 마음이 들어와서 그 마음에 합치되는 새로운 육신의 덧입음을 예비하는 상태에 놓이게 됩니다. 이를 위하여 인간이 육신과 마음의 종결을 맞이해야 합니다. 마치 천문학에서 말하는 초신성같은 입장이 됩니다.

초신성이란 깜깜한 밤 하늘에 갑작스럽게 새로운 별이 나타난 것처럼 순간적으로 빛이 나는 별을 말합니다. 하지만 실은 새 별이 태동한 것이 아니라 지금껏 있었던 그 별이 최후를 맞이하는 순간입니다. 하나의 물질덩어리가 찬란의 빛을 발산하는 것으로 별의 자기 운명을 다하는 현상입니다.

여인이 아기를 갖게 되면 여인은 여태껏 살아오면서 유지했던 ‘나를 위한 삶’은 포기되어야 합니다. 난데없이 자기 몸에 발생한 낯선 마음을 일방적으로 자기만을 위해달라는 식으로 기존의 엄마의 마음을 몰아세웁니다. 아기 엄마도 하고 싶은 것이 되고 되고 싶은 것이 있고 가고 싶은 일이 있을 겁니다.

하지만 아기가 생기는 순간은 그 아이로 인하여 방해받고 저지당하게 됩니다. 기존의 자기 인생을 고집할 수가 없습니다. 이스라엘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들어옵니다. 그 심판을 통해서 하나님의 마음이 인간 마음을 공격합니다. 전혀 완벽하지도 않는 마음으로 하나님이 계시는 약속의 땅에서 살겠다고 우기는 그 시도가 무산됩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완벽한 마음을 원하는 심판입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이렇듯 인간을 공격하고 심판하고 멸망시키는 권한이 있을까요? 그것은 원래적이고 본래적인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마치 춘천에 있는 놀이동산이 ‘레고랜드’에 고인돌 유적지가 다섯 군데나 있습니다. 업주는 그 유적지를 대충 처리하고 개장하는데 급급했습니다. 시멘트로 유적지를 훼손시켰습니다. 우리는 다음과 같이 물을 수가 있습니다.

“진정 그 땅의 처음 주인은 누구인가?” 고인돌의 세운 그들이겠지요. 수 쳔년 후, 후손들이 선지자의 땅에 접수하고 자신이 주인으로 행세하고 있는 겁니다. 마찬가지로  인간들은 땅의 원래 주인공을 잊었습니다. 같은 인간들끼리 살면 그것으로 이 지상에 살 가치가 있다고 우깁니다.

땅이 예수님의 표면이라면 인간이란 존재는 이 피부표면에 피어난 곰팡이균 같은 겁니다. 하나님께서 그 곰팡이 균을 제거하는 것을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요구하는 완벽함에 이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자기 안에 들어오신 예수님의 마음을 자기 마음대신 드러내는 자입니다.

매일 반복되는 심판을 통해 초신성처럼 매일 주어진 새로움이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가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의 은혜의 물 안에서 살고 있음을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28강-예레미야 4장 29~31절(초신성)221204 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예레미야 4장 29~31절입니다. 구약성경 1057페이지입니다.

“기병과 활 쏘는 자의 훤화로 인하여 모든 성읍이 도망하여 수풀에 들어가고 바위에 기어오르며 각 성읍이 버림을 당하여 거기 거하는 사람이 없나니, 멸망을 당한 자여 네가 어떻게 하려느냐 네가 붉은 옷을 입고 금장식으로 단장하고 눈을 그려 꾸밀찌라도 너의 화장한 것이 헛된 일이라 연인들이 너를 멸시하여 네 생명을 찾느니라, 내가 소리를 들은즉 여인의 해산하는 소리 같고 초산하는 자의 고통 하는 소리 같으니 이는 딸 시온의 소리라 그가 헐떡이며 그 손을 펴고 이르기를 내게 화 있도다 살육하는 자를 인하여 나의 심령이 피곤하도다 하는도다”

바벨론 나라가 쳐들어 왔을 때, 하나님의 백성 유다 민족은 처절하게, 비극적으로 모든 상황이 변합니다. 그럴 때, 우리가 실제로 일어난 역사적 상황을 대하면서 우리는 다행이라고 생각하게 되면 이 말씀에 대해서 우리가 오해하고 있는 겁니다. 왜냐 하면 성경은 자기 이야기를 할 때 그것을 누구에게만 허락했느냐 하면 이스라엘에게만 허락했고, 그 이스라엘의 자기 이야기는 자기가 잘된 이야기를 허락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 앞에 이렇게 당했다는 이야기를 먼저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서 내뱉게 했습니다.

그것은 다른, 우리같은 이방민족으로 하여금 자기 이야기를 하나님 앞에 하지 말라는 거예요. 우리 자신의 괴로움과 우리 자신의 슬픔을 하나님께 입 떼지 말고, 말하지 말라는 겁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특화된 민족에서 특화된 계시가 일어나는 그 활동성, 주님이 어떻게 그들을 다루었는가 하는 그 활동성에 대해서만 언급할 가치가 있습니다.

우리의 슬픔과 기쁨, 우리가 좋아했던 거, 자랑하는 거, 또는 우리가 망하는 그런 이야기는 계시적 기능이 없어요. 여기 예레미야 4장은 31절로 끝나는데, 거기에 자기가 32절, 33절,..막 집어넣고 ‘나는 어제 짜장면 먹다가 돌을 씹었다’라는 이런 이야기를 거기에 집어넣으면 이게 계시가 됩니까? 계시는 특화된 사람, 특화된 민족, 하나님에 의해서 구약 때 미리 특화된 민족에게만 주되, 그 특화된 민족이 어떻게 해서 선재 적으로 멸망하는가를 보란 말입니다.

그리고 그 멸망하는 이유에 대해서 너희들도 똑같이 당한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걸 가지고 증상이라고 이야기해요. 증상이라고 하는 것은 몸에 병이 있는데, 병이라는 것은 눈에 띄지 않고 증상만 나타납니다. ‘콧물 난다. 감기 기운 있다. 두통이 있다’라고 하는 것을 몸살 났다고 하거든요. 이걸 증상이라고 해요. ‘나는 감기다’라고 어떤 괴물이 등장하는 것이 아니잖아요. 뭔가 증상만 나오잖아요. 낌새만 나와요.

그 낌새를 다른 나라 아니고,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그 낌새를 끄집어내는 겁니다. 그로 말미암아 이스라엘 말고 다른 사람들의 낌새에 대해서는 입 다물게 만들어요. 하나님의 계시는 이스라엘로 특화해서 그것을 뽑아내는 식으로 하는 이유가 뭐냐 하면 하나님은 그들과 만남에서 “다 이루었다”를 성사시키기 위함입니다.

십자가에서 하나님께서 “걱정하지 마라. 내가 다 이루었다”를 성사시키려면 그들이 서서히든, 갑자기든 망해버리는 특별한, 특화된 민족을 따로 하나님께서 설정해 주었습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또 오해해요. ‘이스라엘이 좀 제대로 하지. 말씀을 들었으면 성실하게 지키지. 그렇게 꾸중 듣고도 개과천선 못하고 왜 안 지키느냐?’라고 우리는 이스라엘 유대인을 비난하지만, 유대인들이 ‘그러면 네가 해봐라’라고 하겠죠. 안 되거든요.

왜냐 하면 몇 개 지켰다 싶으면 ‘지켰냐? 그러면 이것도 지켜봐라’라고 추가적으로 계속해서 말씀의 깊이를 더하기 때문에 어떤 인간도 말씀을 못 지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통해서 이야기하는 것은 뭐냐 하면 여러분이 유리컵을 딱딱한 시멘트 바닥에 던져보세요. 산산 조각나죠? 그 깨진 유리컵을 다시 완벽하게 못 부칩니다.

이것을 악마가 인간에게 그동안 이렇게 속였죠. ‘뭐 대충 붙이면 그게 유리컵이다’라고. 하나님은 완벽을 원하지 대충을 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럴싸함을 원하는 것이 아니에요. 완벽을 원해요. 그런데 그 완벽의 표준도 우리는 몰라요. 모르는데 완벽에 완벽을 기하며 완전히 하실 분이 ‘다 이루었다’고 외치시기 위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겁니다.

예수님을 믿으라는 것은 본받으라는 말이 아니에요. 우리가 안 되는 이유를 발견해서 주님께만 의지하도록 예수님이 오신 겁니다. 다만 나를 의지하고 내가 나를 믿는 것을 포기하는 것을 말합니다. 세상에 있는 법은 그 법을 지키는 자로 자랑하고, 자기 긍정이 되고, 내가 착하다는 것을 확인해주기 위한 근거로 법이 있고요, 그것을 통해서 자기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 세상 인간에 의해서 만들어진 법들이에요.

그러나 언약은 자기 부인을 하고 자기 부정을 하라고 주어진 법이 하나님의 언약입니다. 방주를 탔던 노아도 ‘역시 나는 바른 선택을 했어’라고 한 것이 아닙니다. 같이 방주에 동승 했던 흠 없는 정결한 짐승을 방주에서 내리자마자 제일 먼저 잡았어요. ‘죽어주세요. 짐승들, 새들. 너희들 때문에 우리가 방주에서 심판을 무사히 견뎠지. 너 아니었으면 우리는 벌써 죽었어’라는 고백이 새를 잡는 고백이고 소를 잡는 고백이었습니다.

제사가 뭐냐, 실제로 내가 나를 잡는 것이 제사예요. 이게 제사이고 그게 예배이어야 해요. 내가 내 목을 조르는 거예요. 내 목을 졸라서 죽이는 이게 제사입니다. ‘살아도 소용도 없는 것이 왜 사냐’라고 자기를 죽이는 거죠. 왜 죽이느냐? 하나님 말씀에 의하면 우리는 못 지켜요. “마음속으로 간음한 것도 간음한 자다” 제가 울산강의에서 그런 이야기했거든요. 질문을 던졌는데 ‘오른손이 한 일을 왼손이 알게 되면 어떻게 될까요?’ 정답은 ‘지옥 가지요’

이게 주의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방인들은 그걸 모르죠. 그러나 오늘 예레미야 본문에서 이스라엘은 이걸 들어도 그만이고 안 들어도 그만이 아니라 말씀이 현실을 토해내는 거예요. 어항 속의 물고기가 대화합니다. 한 물고기가 친구 물고기에게 “우리에게 물이 있으니 참 고맙지?”라고 이야기하니까 친구 물고기가 “물이 뭔데?” 그리고 현대인들에게 “공기가 참 고맙지?”라고 하면 그들은 몰라요.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으면서도 은혜를 몰라요.

전혀 모릅니다. 그것도 모르면서 인간은 똑똑하다고 자부합니다. 인간이 처음에는 허리 꼬부라진 원숭이였는데 나중에 점점 펴져서 사람이 되었다는 겁니다. 이게 얼마나 무식한 이야기인지요. 그걸 진화론이라고 하는데 과학교과서에 다 실려있어요. 방송에도 떠들어댑니다. 이방 민족 티를 팍팍 내는 거예요. 창조주를 만난 적이 없어요.

창조주를 만난 적이 없으니까 하나님 제키고 인간과 인간이 모여서 ‘우리 대화하자’라고 이렇게 나와요. 똑같이 환자들인데 대화할 것이 뭐가 있습니까? 오늘 본문 이야기는 이렇습니다. 이 땅은 하나님 땅이에요. 하나님 땅이고 이스라엘 백성은 율법을 줬는데 못 지켰어요. 그럴 수밖에 없지요. 아담의 DNA를 받았기 때문에 못 지킵니다. 지킬 수가 없어요. 아담과 악마가 결탁했기 때문에 지킬 수가 없어요.

그 땅에 곰팡이 핀 거예요. 그 곰팡이를 다른 곰팡이로 용역으로 동원해서 제거하는 겁니다. 땅은 예수님의 피부예요. 피부에 곰팡이 났으니까 그거 제거하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무좀균을 제거하는 거뿐이에요. 내 땅이라는 거죠. 그걸 어렵게 말해서 주의 이름이 계시는 곳, 이렇게 이야기하는 거예요. 이게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서 나타나는 겁니다.

그러면 인간으로서는 대책이 없지요. 대책이 없어야 해요. 대책이 없어야 주님의 대책만 감사히 받을 수 있습니다. 내 쪽에서 대책이 없어야 해요. 우리는 하루하루 대책 없이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그러면 그 대책이 뭐냐 하면 초신성(超新星)입니다. 이 초신성이라는 말이 천문학에서 나온 용어인데 굉장히 신기해요. 초신성이라는 말은 글자 그대로 하면 ‘새롭게 등장한 별’이라는 뜻인데요.

그런데 그 내용은 뭐냐 하면 하나의 별의 마지막 순간을 초신성이라고 해요. 이게 왜 그렇게 설명이 되느냐 하면 인간이 깜깜한 우주를 볼 때 갑자기 밝은 빛이 팍 터지면서 떠오르니까 사람들이 그걸 초신성이라고 부른 거예요. 그런데 그 불꽃이 새로운 별이 등장하는 불꽃이 아니고 기존에 있던 희미해서 있는지 없는지 분간도 안 되는 그 별이 마지막 순간만큼은 혼신의 힘을 다해 자신을 태워버리는 거예요. 스스로 폭발시켜 버립니다.

그때 그 폭발력이 강해서 멀리서 망원경으로 쳐다보는 천문학자의 눈에 띄게 될 때, ‘이것은 새로운 별이다’라고 하는데 새로운 별이 아니고 그 별의 마지막 순간이었습니다. 마지막 순간. 그것이 우리나라 가요에 나와요. ‘끝내 불꽃을 태우리라’ 윤시내가 부른 ‘열애’라는 노래입니다. ‘뜨거운 마음속 불꽃을 피우리라~, 태워도 태워도 재가 되지 않는~, 진주처럼 영롱한 사랑을 피우리라~나나나나~우우우우~’

장렬하게 죽는 안중근 의사, 이순신 장군, 투신 자살자. 스스로 자기 이미지 관리하면서 죽을 때까지 목숨 바쳐서 자기 이미지 관리한 겁니다. 끝까지. 이렇게 지저분하게 사느니 차라리 내가 내 인생을 끝장내리라. 왜? 남들이 보니까. 바보고 병신이에요. 지금까지 자기 인생은 없어요. 남들 보여주는 인생을 살았던 겁니다.

이게 왜 그러냐 하면 어릴 때부터 주입된 것이 남들의 시선이 주입되었기 때문에 어느 행동 하나하나를 하더라도 그 주입된 남들의 시선에 쪼르르 쫓아가서 검사 맡고 거기에 점검 당하는 그 인생 말고 다른 인생을 상상한 적이 없습니다. 인간은. 그걸 이미지 관리라고 하죠. 이스라엘 백성도 처음에는 하나님만 쳐다보다가 좀 배부르고 여유 있다 싶을 때는 주위에 있는 나라들의 눈치를 보면서 그들의 우상을 섬기지 않으면 그들이 쳐들어올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그들이 우상을 섬기기 시작한 거예요.

물론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그렇게 한 거예요. 아까 이야기 다시 해보면, 깨진 유리 파편은 완벽하게 붙일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신기하게 인간세계를 다 깨 놔요. 다 깨 놓고 그다음에 뭐냐 하면 말씀이 오게 되면 그 흩어진 것들이 뾰로롱 하면서 완벽하게, 심지어 이음새도 없이 완벽하게, 다시 하나님이 보시기 심히 좋았다는 그 새로운 인간으로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초신성이라는 말을 끄집어낸 이유가 거기 있습니다. 완전히 폭파해서 나라는 것이 전혀 없게 만들고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새로운 나를 창조하는 작업, 그 초신성 적인 작업을 주님께서 하시는 겁니다. 그렇다면 그다음에 우리가 질문한 것은 뭐냐 하면 오늘 본문에도 나오는 것처럼 그렇게 망하는 거예요.

망하는 과정에서 인간들이 숨어있는 본성들이 나오는데 바벨론 군대가 고함지르면서 쳐들어오니까 이스라엘이 변변한 무기가 없어서 남자들이나 여자들이나 어떻게 하느냐 하면 너무나 인간적이죠. 예쁘게 꾸며요. 비싼 옷을 입고 예쁘게 꾸미고, 특히 여성들이 금 장식을 하고 단장을 하고 눈을 또 이쁘게 그리는 거예요. 여자들이 화장했느냐 안 했느냐의 경계선이 뭐냐 하면 속눈썹 붙이느냐 안 붙이느냐로 결정되는 겁니다.

아무리 화장을 잘해도 속눈썹 안 붙이면 그 인간이 맨 그 인간인데, 속눈썹 딱 붙이면 갑자기 다른 사람 되어버려요. 속눈썹 밑이 안 보임으로써 무슨 환상을 유발하는지 그건 잘 모르겠지만 그렇게 꾸며놓고, 이렇게 해서 당신 바벨론 군대가 나를 치려고 하니까 내가 너무 아름다워서 아깝지요? 아깝지? 이런 식으로 최후 무기로 내세우는 거예요.

설마 이렇게 아름다운 나를 저렇게 매서운 칼로 그리고 활로 쏴서 죽일 수가 있겠느냐. 그런데 그 바벨론 군사들도 자기 마음대로 못 해요. 누구 마음대로냐 하면 하나님 마음대로예요. 인정사정없이 개무시하고 쏴버리죠. 평생 자기를 꾸미며 살아온 그것이 하나님이 적용하시는 멸망 앞에서는 아무짝도 소용없었다는 말입니다.

화장만 꾸미는 것이 아니에요. 행동하는 것도 남들 보기에 참 착하고, 점잖고, 인간성 좋고, 사랑 많고, 배려심 많고, 이런 것들이 속눈썹 붙이는 것과 똑같은 거예요. 깨어진 유리잔을 어설프게 스카치테이프로 붙이는 것과 똑같은 겁니다. 그래서 이걸 30절에 보면 “헛된 일이라 연인들이 너를 멸시하여 네 생명을 찾느니라”라고 나옵니다.

그러면 남아있는 것은 뭐냐. 31절에 보면 “여인의 해산하는 소리 같고” 그러니까 아름답고 멋진 여성이 그다음부터는 자기 아니고 배 안에 다른 생명이 자라나기 시작합니다. 이건 따지고 생각해 보면 정말 신기한 일이에요. 왜냐 하면 몸 하나에 자아가 두 개가 들어있으니까요. 이건 기존 자아의 분열을 의미합니다. 한쪽 자아가 본인 의사가 아니라 타의에 의해서 철저하게 밀리는 겁니다. 쭈그러지는 거예요. 그걸 엄마라고 해요.

아기 가지기 전까지는 우리끼리 행복 하자고 하다가 아이가 생기면 우리끼리의 행복은 파괴됩니다. 그리고 여인에게 남는 것은 고통 외에는 없어요. 애를 낳고 다시 추스르기 위해서 허겁지겁 애를 씁니다. 늘어난 심줄 다시 탄력적으로 만들려고 여기저기 찾아봐도 옛날의 몸매는 바이바이~이미 끝났습니다. 그리고 새벽 2시고, 3시고, 자기 울고 싶을 때 울고요, 어디 맡겨 놓은 것처럼 아무 때나 배고프면 젖 달라고 하죠.

30세에 아기를 낳는다고 하면 자기의 30년 자아 인생은 완전히 짓밟히고 망가뜨리는 폭력적인 제3의 존재가 등장한 것에 대해서 자기가 어떻게 추슬러보려고 애를 씁니다. 결국은 내 인생이라는 것은 여기서 다시 스카치테이프로 붙일 수 없다는 사실을 완전히 알고 자기 포기가 되면서 흔쾌히 엄마 되기를 작정하고 그다음부터 어떻게 하느냐, 결국은 자식에 대한 집요한 집착이 시작됩니다.

아이에게 역공하는 거예요. ‘그래. 나는 망가졌고 나 죽고 네가 살아났으니까 네 안에 나 집어넣을게’라고 나오죠. 이제는 내가 시키는 대로 해야 한다는 거죠. 성경은 그 반대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성경도 동일한 과정을 거치는 대요. 성경에서 보면 우리 새로운 인간의 창조, 천국 가는 백성을 만들어 낼 때도 똑같은 과정을 거칩니다.

빌립보서 2장 5절에 보면,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이 말은 네 마음은 안 받는다는 뜻이고요, 새로운 마음이 들어오니 품으라는 이 말씀은 우리 마음이 따로 있고 주의 마음을 품는 것이 아니고 들어온 마음에 의해서 네가 점령당하고, 너는 네 마음을 완전히 포기하고 더 나아가 그 마음이 너의 모든 것을 지배하도록 하라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되느냐, 우리는 주님 마음 안에 나의 마음이 들어있는 샘이 되어요. 뭘 아느냐 하면 내가 주님 모시고 힘들었다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힘들었다는 겁니다. 주님인 내 마음에 들어올 수 없는 너를, 너의 그 죄 많고 지저분하고 추잡한 마음을 주님인 내가 건사한다고 그만큼 더 큰 희생이 필요했고 힘들었다는 그 아픔을 마음 안에 하나의 증상으로 남기게 되는 거예요.

우리라는 것이 쓰레기로 변하면서 쓰레기마저 처리해주는 그 기쁜 마음, 깊은 사랑, 죄 사함의 그 마음으로 전환 시키라는 이야기입니다. 그 마음을 품으라는 거죠. 간단히 말하면 그게 뭐냐 하면 십자가라는 겁니다. 어떻게 그런 원리가 가능하냐. 그게 우리의 주인이 원래 적으로 따로 계셨는데 그 원래 적인 분이 우리를 찾아왔다는 행운이 찾아왔기 때문이에요.

우리가 자식 낳아봐야 이건 아담의 계통이잖아요. 그러나 성령이 찾아왔다는 것은 아담 계통 말고 우리의 원천적인 하나님이 우리에게 찾아오는 겁니다. 춘천에 있는 놀이동산이 레고랜드인데, 그 레고랜드가 사채를 끌어서 썼다고 자금시장에 말썽이 많지요. 그런데 그것만 말썽이 아니고 레고랜드 안에 뭐가 있었느냐 하면 나중에 그걸 개발하면서 그곳에서 고인돌 유적지가 5군 데나 나왔어요.

그래서 그 업자가 대충 비 안 맞게 정자 하나 만들어 놓고 고인돌 위에 시멘트를 발라놨어요. 그렇게 해서 유적지가 훼손된 거죠. 그 고인돌 사건이 뭐냐 하면 춘천에 있는 레고랜드 토지가 원래 누구 땅이냐는 겁니다. 그 고인돌 아래 있는 죽은 고인의 땅이잖아요. 수천 년 후에 후손들이 거기에 레고랜드를 떡하니 만들어 놓은 거예요.

후손들이 그것을 감추고 훼손하고 덮어서 지금의 자기가 주인인 듯이 노릇하는 이 모습이 뭐냐 하면 내 안에 매일같이 상투적으로 반복적으로 이루어지는 주님의 심판을 우리가 세상에 나가서 ‘남들은 나를 어떻게 생각해요? 나 괜찮은 사람 맞죠?’라는 식으로 자꾸 덮어버리는 거예요. 그러니까 성경을 안 보는 거예요. 이스라엘 역사를 우리가 모른 척하고 있는 거예요. 나는 잘났다는 겁니다.

그런데 예레미야 선지자의 예언은 예수님의 십자가로 완성이 되면서 성령을 통해서 예레미야를 다시 십자가 차원에서 보게 하는 겁니다. 이스라엘 백성 망할 때 남의 이야기 같지? 남의 이야기 아니야. 네 이야기야. 네가 꾸몄다고 하나님이 너에게 반할 줄 알아? 그렇지 않아. 하나님이 매일같이 우리를 마지막이 되게 하시는 겁니다. 왜? 우리가 매일같이 마지막으로 항상 우리를 새로운 사람으로 만들어내기 때문입니다. 초신성이에요. 우리의 마지막이 새로운 별의 시작이에요.

울산강의에서 자기 부정을 못 하는 거, 그것을 저는 블레셋 교회라고 이름을 지었습니다. 자기 긍정, 자기 자랑, 자기 과시, 그런 것들 할 사람만 교회로 오라는 거죠. 여러분이 잘된 거 자랑하고 싶은 사람만 오라는 겁니다. 이게 블레셋 교회예요. 그런데 진짜 다윗의 이스라엘 교회는 비겁하기 짝이 없어요. 못났어요. 자기 실패를 기정사실로 여깁니다. 그러니까 이게 뭐냐 하면 불꽃을 태우는 거예요. 자기의 마지막을 보여주는 교회. 이게 진짜 교회입니다.

이 세상 누가 뭐래도 성경은 맞는 말씀이에요. 이 세상은 불꽃이 꺼져갑니다. 다 같이 심판입니다. 버스가 흔들리니까 빈 버스 안에 손잡이가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한결같이 같은 방향으로 움직여요. 버스가 흔들리니까.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 매달려있다는 겁니다. 인간은 이 멸망하는 세대와 같이 함께 가요.

여기서 특화된 사람, 그것은 하나님이 직접, 원래적인 창조주께서 직접 찾아온 사람, 고인돌의 주인공이 직접 찾아와서 네 몸은 내 것이라고 자부하는 사람, 그게 모든 말씀으로 컵을 완성 시켜서 완벽하게 새로움을 창조하기 위해서 “좀, 죽어줘. 제발~” 물이 뭐냐고 그러지 좀 말고 모든 것이 고맙지 아니하냐는 고백, 그것이 바로 예레미야 선지자가 내포하고 있는 예수님의 복음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누구 덕으로 사는지 우리는 모르고 살았습니다. 그저 해 뜨고 해지고, 비 오고, 달 뜨고 달 지고, 그저 그런 줄 알았습니다. 주님, 그게 주님의 십자가 사랑의 연장인 것을 이제는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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