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강의

불 싸대기

아빠와 함께 2022. 11. 30. 11:15

대전-신명기(7강) 신4:24(불 싸대기) 20221128a
(강의:이근호 목사)


신명기 4장 24절부터 보겠습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는 소멸하는 불이시요 질투하는 하나님이시니라 네가 그 땅에서 아들을 낳고 손자를 얻으며 오래 살 때에 만일 스스로 부패하여 무슨 형상의 우상이든지 조각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악을 행함으로 그의 노를 격발하면 내가 오늘날 천지를 불러 증거를 삼노니 너희가 요단을 건너가서 얻는 땅에서 속히 망할 것이라 너희가 거기서 너희 날이 길지 못하고 전멸될 것이니라”

이 이야기를 주께서 왜 미리 언급하시는 이유가 뭔지 생각해봐야 돼요. 나는 소멸하는 불이라는 이야기를 협박도 아니고 겁박도 아니고 마치 장래에 너희들이 그렇게 될 것이라고 미리 아시는 것처럼 불길하고 부정적인 미래를 왜 미리 언급하는 이유가 뭐냐? 그것은 이겁니다. 하나님 앞에서 인간은 없다. 인간이 잘못됐다가 아니라 인간 자체가 없어요.

어떤 인간? 하나님의 말을 알아들을 인간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렇게 돼줘야 그들은 멸망하게 돼요. 그들은 우상을 섬기게 돼 있습니다. 우상을 섬기는 자가 이거는 전에 하나님이 우상을 섬기지 말라 했더라. 그걸 미리 알고 멈칫 주저하면서 우상 섬기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언약을 들을 당사자 찾아가기, 이 작업을 하는 거예요.

그러면 그 가운데서 주님의 언약을 주었던 그 대상되는 사람, 이스라엘이죠. 이스라엘은 이러한 하나님의 예언적 말씀을 듣고서도 무슨 말인지 모르기 때문에 그들은 약속의 땅에 가게 되면 하나님이 예언한 대로 빈틈없이 우상을 섬깁니다. 그리고 섬길 줄 아시고 미리 망한다는 이야기를, 그것도 그냥 망하는 게 아니고 전멸하죠.

왜 하나님께서는 자기 언약 들을 상대자를 딱 지정하지 않고 사람들에게 점검하듯이 말씀해놓고 너 아니야, 라고 제쳐버리는 이유가 뭐냐? 하나님은 그냥 불이 아니고 소멸하시는 불, 소멸 기능을 발휘하기 위해서 하는 겁니다. 그 뒤에 나오는 말이 뭡니까? 소멸하시는 불이요, 또 같은 뜻으로 24절에, “질투하는 하나님”이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상대자가 없는 게 아니고 있어요. 있는데 그 상대자는 하나님의 질투심을 유발하는 상대자가 되는 거예요. 그러면 이걸 종합해보면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알아먹을 인간은 있다, 없다? 없다. 아담 가운데는 없어요. 그 없음을 강조하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어디까지 가느냐? 신약성경까지 가요.

그러면 이 성경을 우리로 보게 하시는 것은 왜 그들이 어떤 이유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언약을 이스라엘 사람들은 다 듣고서도 그런 언약의 상대자로 합하지 못한 부합되지 못하고 계속 탈락하는 그러한 경우가 어떤 경우인지 우리로 보고 알게 하시는 거예요. 신명기가. 신명기 4장만 성경전체가 아니잖아요. 성경전체는 이것 말고 신약성경도 있고 요한계시록도 있고 많지요. 많은데 취지는 동일해요.

“네가 성경 봤냐?” “봤습니다.” “지키려고 애썼냐?” “얼마나 지키려고 애썼다고요.” “탈락.” 지키려고 애쓰고 하나님 말씀대로 살려고 백날 해도 우리는 성경의 본래의 뜻을 전혀 못 알아듣는 사람으로 나중에 들통 나게 돼 있습니다. 그 뒤에 28절부터 보게 되면 구체적으로 돼 있어요. “너희는 거기서 사람의 손으로 만든바 보지도 못하며 듣지도 못하며 먹지도 못하며 냄새도 맡지 못하는 목석의 신들을 섬기리라”

이 이야기를 들으면 이게 일종의 해답이잖아요. 이스라엘이 망한 이유가 우상을 섬겼기에 그렇다, 라는 정답을 미리 보고 있으면 사람은 문제 알고 정답 알면 똑같은 문제 나오면 자신감 같은 것, 말도 안 되는 자신감을 갖게 마련이에요. 그 문제구나, 그 문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멸한 이유가, 사람의 손으로 만든바 보지도 못하며 듣지도 못하며 먹지도 못하며 냄새도 맡지 못하는 목석의 신들을 섬겼기 때문에 망했단다. 정답을 우리는 확보한 셈이죠.

그러니까 자신감이 충천하지요. 우리는 그렇지 않습니다, 라는 말이 막 절로 나오지요. 그런데 그게 아까 제가 한 말 잊어버렸을 경우에 또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 거예요. 제가 뭐라 했습니까? 성경말씀은 우리가 지켰다, 이거는 우리가 이뤘습니다, 라는 말을 못하게 만드는 게 성경이야기라고요. 정답을 안다는 자체가 주제넘은 이야기입니다. 하나의 예를 들겠습니다.

우상 개념의 변천과 확장이 신약 때까지 계속 돼요. 예수님 오실 때까지 계속됩니다. 우상, 이런 신은 섬기지 말라. 그 법, 율법, 하나님의 계명 자체가 안에서 누룩 넣은 것처럼 그 자체가 부풀어요. 동물 가운데 그런 동물 있지요. 조그마한 동물인데 화가 나면 부풀어지면 동물. 공작새도 그렇고요. 가만있으면 깃털만 있는데 펼치면 놀랬지, 하고 화려하게 쫙 펴서 적들을 물러가게 만드는. 만만하게 보다가 1:0으로 진 일본축구처럼 그렇게 되잖아요.

그래서 우상은 아아 그것 보지도 못하고 나무로 만든 목신 말이죠. 그러면 나무로 만든 것 피하면 우상이 아닌 셈이 되지요. 그러나 하나님께서 말한 목신이 어디에 포함되느냐 하면 하나님의 우상 개념 안에 포함되어서 그 일부로 개시된 게 목신이에요. 목신 개념이 점점 더 변천이 일어나서 내용이 더 범위가 넓어져요. 어디까지 넓어지느냐 하면 이것까지 넓어집니다. “네가 너를 사랑하게 하는 신은 우상이다.” 이렇게 돼요.

내가 나를 사랑하도록 계속 그걸 방치하고 그냥 그것을 지켜보기만 하는 신이라면 그거는 우상이다. 이것까지 확장이 됩니다. 그러면 참 신은 뭐냐?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와야 되지요. 주의 말씀 안에 우상 섬기지 말라가 들어있으면, 적어볼게요. 우상 섬기지 말라, 이 이야기를 우리가 듣잖아요. 들을 때 내가 아는 범위 내에서 아아 그런 뜻이구나, 라고 일방적으로 너무 쉽게 생각하는 거예요.

우상 섬기지 말라가 스스로 변천을 일으키고 스스로 확장되고 개념이 부풀어진다는 사실을 우리 인간들은 모르지요. 알 수가 없지요. 끝까지 추적할 거야. 우상을 섬긴다는 것은 우상을 만든 자의 잘못도 아니고 우상을 섬기지는 자만 나쁜 게 아니고 너 자체가 우상 섬기는 속성이 들어있다는 뜻으로 우리가 이해해야 돼요. 내 안에 말씀이 들어왔다는 말은 그 말씀에 위반될 수 있는 요소가 아담의 후손치고 없는 이가 하나도 없다는 뜻이에요.

초등학교 6학년 한 반에 육십 명 되는데 이빨 하나 썩은 데가 없고 튼튼하다 이 말이죠. 어리니까 이빨이 튼튼하고 반짝반짝 빛이 나고 그런 애들 육십 명이 이빨 자랑하듯 웃으면서 갈 때 치과가 죽 있다면 얼마나 치과를 놀리겠어요. 치과가 왜 있는지 이유를 모르겠어. 아파야 있지. 그 치과가 왜 있겠어요? 시어머니 치통으로 치과 가는 날이 돼봐야 아하 치과 없었으면 밤새 끙끙 앓았겠구나, 알잖아요.

지금 문제의 취지가 다 끝이 나지 않았는데 지가 지레짐작 문제 알아, 답도 알아. “이번 문제는 왜 그리 쉬운지 몰라. 목신을 섬기지 말래. 나 목신 발로 찰 거야. 나무로 만든 부처 발로 차면 됐습니까, 이 정도하면? 나 우상 섬기지 않는 것 맞지요?” 그럼 주님께서 종용히 부릅니다. “너 발로 왜 찼지?” “저는 우상을 섬기지 않는 사람 되기 위해서 발로 이렇게 싫어한다는 걸 보여줬습니다.” “그게 니 사랑이야. 그게 우상이야.”

그게 바로 네가 스스로 우상이란 뜻이라는 거죠. 자, 관심은 어디 있습니까? 하나님은 관심 없습니다. 자기 사랑이 있으니까 집착하지요. 사랑은 뭐라 했습니까? 자기 집착이에요. 자기를 못 버려요. 왜? 우상이니까요. 그래서 하나님께선 우리가 우상이란 것을 알려주는 방법은 계속해서 하나님의 율법을 통해서 율법 자체를 확장시키는 거예요. 자꾸 부풀게 만드는 거예요.

집에 조그마한 강아지 키워볼까 했는데 1년 뒤에 강아지 열네 마리 키웠다고 보세요. 어떻게 됩니까? 버리려했는데 못 버렸어요. 이래서 키운 게 열네 마리에요. 다음에 보니까 오십 마리. 이웃에서 신고 들어오지요. 치매 걸린 여자 하나 산다고. 구청에서 다 들어내지요. 인간은 처음에는 남한테 배려하고 도와주고 어려운 사람 용돈도 주고 이렇게 하지요. 인간은 갈수록 자기의 본성을 떠나지 못합니다.

이게 빅뱅 말고 빅 크런치란 게 있어요. 우주가 나중에 어떻게 될 것인가 할 때 찌부러지는 거예요. 그 무게를 못 이겨서. 별의 종말도 그래요. 자체적인 밀도, 중량 때문에 찌부러지는 겁니다. 태우다, 태우다 더 태울 게 없으면 자체적으로 무너지는 거예요. 한 줌의 재 덩어리가 되는 것이 천문학자들이 말하는 별의 마지막 종말의 모습입니다. 자기라고 하는 것이 하나의 새카만 아주 깜깜하고 무거운 초밀도로 돼 있는 납덩어리로 변하는 것, 그렇게 변하든지 안 그러면 자체 무게로 폭발해서 산화되는 산산조각 돼버리는 나 자신이 없는 것.

율법은 누구한테 줬다? 없는 존재에게 준 거예요. 율법을 들을 수 있는 위인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면 여기서 나온 결론은 뭐냐? 율법은 누가 듣느냐? 율법 주시는 하나님은 율법을 만드신 분, 본인이 듣지요. 하나님에게서 하나님에게만 전화통화가 되는 겁니다. “거기 누굽니까?” “납니다.” 하나님하고 하나님하고만 종국적으로 대화가 되고 다른 사람들은 대화가 안 되죠. 이걸 새 언약이라 하고, 새 언약을 두 자로 줄이면 이걸 신약이라 합니다.

그래서 신명기는 구약에서부터 이미 개시된 신약의 맥락이 신명기에 나와 있습니다. 그러면 그 과정 속에서 인간들은 하나님의 율법을 대하면서 특히 이스라엘 백성은 율법을 대하면서 인간들이 아무리 말씀을 지키고자 해도 자기 본성을 말씀이 와서 건드려버려요. 열대지방에 그런 식물이 있다고 하지요. 건드리면 오므린다든지 모션을 취하는 식물, 분명히 가만있는데 건드리면 움츠린다든지 공격하는 그런 식물들 있잖아요.

그처럼 인간이라 하는 것은 가만있는데 율법이 와서 건드리면 외부 말고 자기 내부를 노출시키고 내부의 속성이 바깥으로 자동적으로 튀어나오는 그런 존재가 인간 존재입니다. 예를 들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오늘 본문도 신명기에도 나와 있습니다만 37절 봅시다. “여호와께서 네 열조를 사랑하신고로 그 후손 너를 택하시고 큰 권능으로 친히 인도하여 애굽에서 나오게 하시며”

애굽에서 나왔다, 이건 누가 끄집어냈느냐 하면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끄집어냈잖아요. 하나님 보시기에는 그들이 애굽에서 나온 게 아니고 애굽의 덩어리가 압축된 채 하나님의 율법의 대상자로 애굽의 일부가 주님 앞에 눈에 띠는 언약의 상대자로 보시는 거예요. 구원 받았다는 말은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내 율법을 너한테 이야기하는 대상으로 파트너로 삼았다는 뜻이에요. 그들이 애굽에서 변화되었다는 뜻은 전혀 아니에요.

이제 쉬우면서도 끔찍한 예를 들겠습니다. 이건 드라마 같은 이야기인데 제가 소설로 지어내면 이렇습니다. 어떤 사람이 어릴 때 이웃과 너무 대판 싸워서 원수지간이 됐는데 그 이후로 둘 다 고향 떠나서 서울에 어디서 사는지 몰라요. 헤어졌어요. 그런데 주인공 남자는 성공을 했습니다. 나이가 한 서른 쯤 됐는데 주위에서 선보라 해서 어떤 아가씨를 만나는데 선보기 전에 어떤 사람인지 탐사를 해보니까 옛날 자기 부모를 괴롭혔던 그 집안의 같은 성질 못된 DNA를 가진 사람이었던 겁니다. 우연히, 소설이니까 이렇게 됐단 말이죠.

그러면 원수를 갚아야 되지 않습니까. 원수를 갚기 위해서 호텔에서 약속을 하고 그 여자를 한껏 차려입고 왔단 말이죠. 남자는 물바가지를 가져가는 거예요. “실례지만 나이는 어떻게 되십니까?” “나이는 스물여덟밖에 안 돼요.” 그러면 물바가지로 물 확 부어버려요. 한 달 수입은? 직장 다녀요. 확 부어버리는 거예요.

내력을 모르지요, 그 여자는. 일방적으로 당하며 이 남자가 왜 이렇게, 그게 물 싸대기인데 물 싸대기를 왜 날리는지 모르지요. 선보면서 이야기를 해봐야 당신 집안이 우리 집안을 얼마나 해코지했고 당신들 때문에 우리 아빠가 죽었다고 이런 이야기가 슬슬 나올 때는 시청자들이 납득이 되겠지요. 그런데 당한 여자는 무슨 뜻인지 모르지요.

여자는 그때 그 소녀가 아니고 나는 나고, 이제 나이 서른 가까이 된 성인이다. “나는 애굽에서 나왔습니다.” “아니야. 안 나왔어, 너는.” 물 갖다 부어야 애굽을 알아. 껍데기를 안다고. 인간 껍데기 벗기고 안에 파충류 가죽이 나와야 이게 <브이>라는 외계인 드라마처럼 되는 거죠. 주께서는 율법으로 인간이란 껍질을 벗기는데 그 껍질이 뭐냐? 애굽 껍질 벗기니까 애굽 나오는 거예요. 애굽 요소 나오는 거예요.

우리는 히브리인이라는 하나님의 아브라함, 이삭 들먹여봤자 안의 내부는 뭐냐? 애굽 사람이에요. 애굽은 무슨 신이냐 하면 태양신입니다. 태양신의 특징, 이것을 여러분이 꼭 아셔야 될 게 오늘날 하나님, 여호와, 삼위일체를 믿으면서 태양신을 믿는 것처럼 똑같이 믿는 사람이 대다수지요. 태양신의 특징은 합리적 신이에요. 합리적으로 설명이 되는 신.

그 선보는 여자가 날벼락 맞았지요. 그러면 그 여자가 남자에게 이렇게 이야기할 거예요. “당신 과거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당신이 뭔데 나를 이렇게 몰아붙입니까?” 하나님께서 자기 언약상대 대표자로 뽑은 인간이 누구냐? 히브리인들이에요. 이스라엘. 이스라엘을 왜 그렇게 몰아붙이느냐 하면 이스라엘을 몰아붙여야 구원은 오직 하나님에 의해서만 되지요.

그런데 인간들은 그게 아니고 말씀 알려주면 성경공부하고 나머지는 나의 논리적 합리성으로 내가 따라붙을게요. 이렇게 나오더란 말이죠. 그건 뭐 얼굴에다 물 싸대기 맞아야 되는데 중요한 것은, 그 남자는 물 싸대기 보내잖아요. 주님께선 불 싸대기, 오늘 첫째 시간 제목을 ‘불 싸대기’로 해야 되겠다. 불 싸대기라고요.

레위기 10장에 보면 나답과 아비후가 죽어요. 그것도 제사장입니다. 백성들의 대표가 죽습니다. 백성들의 대표가 죽는다는 말은 백성들의 대표와 나머지 공동체 사이에 공동의 성격을 갖고 있다는 것이 대표에요. 이들이 죽는다는 말은 그런 요소가 백성들에게 다분히 있다는 뜻입니다.

그들이 죽는데 죽는 이유가 왜 죽었습니까, 자살했습니까, 아니면 교통사고로 죽었습니까? 엉뚱한 불, 그 불을 잘못 사용해서 매 맞는다든지 숨이 막힌다는 게 아니고 불을 잘못했기 때문에 그 얼굴에 뭐가 옵니까? 그 불이 덮쳐서 죽어버려요. 소멸하시는 여호와, 오늘 본문 신명기 4장 24절, “나 여호와는 소멸하시는 불이시다.” 불은 불인데 없애버리는 불이다. “내 이야기했지 내 말 알아듣는 사람 아무도 없다고. 죽어라, 인간아.” 죽인 거예요. 소멸하시는 불이에요.

그러면 그 현장에 인간은 사라지고 불타버린 인간은 재가 되고 있는 것은 뭡니까? 여전히 불, FIRE! 여전히 불만 있지요. 지금 태양신의 특징은 뭐냐? 합리적 설명이 가능한 거예요. 왜냐하면 거기 있기 때문에. 태양은 늘 거기 있잖아요. 아침에 해 뜨면 거기 있잖아요. 거기 있는 그것이 지금 인간들의 눈에 다 보인단 말이죠.

또 이렇게 설명하면 여러분에게 확실하게 다가올 거예요. 내 마음이 어두웠는데 어두운 마음의 창을 여니까 우리 주님이 태양처럼 나한테 와서 내가 환하게 되었다. 천주교 수녀들, 시인들 맨날 읊는 게 그거잖아요. 주님이 태양인데 빛인데 어두운 내 마음에 환히 비춰서 내가 밝았다. 여기에 비합리적인 게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지요. 그러니 우상이지요. 왜? 불의 요소가 날아가 버렸어요.

다시 설명합니다. 하나님의 말 알아듣는 사람 있다, 없다? 없다. 하나님의 말 알아듣고 같이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 없어요. 그러나 인간이 원하는 신은 내가 있어야 되고, 내가 납득이 돼야 되고 두 가지 요소가 다 돼야 돼요. 그러면 뭐냐? 태양신 자리에 여호와 박아 넣으면 그게 여호와인 줄 알고 있는 거예요. 그게 바로 괴물이죠.

얼굴은 사람 얼굴인데 몸체는 사자, 이게 그리스로마 신화에 얼마나 자주 나옵니까. 또 반대로 반대가 더 흉측해, 끔찍해요. 사람 몸인데 얼굴은 뱀의 머리, 메두사 같이. 머리카락 하나하나가 뱀이야. 뱀이다, 뱀이다. 미장원에 가면 냄새 날 거야. 파마한다고. 왜 인간들이 이러한 신, 신이죠. 신화, 신화는 신이에요.

왜 신, 신화를 구성하는 거예요? 인간이 생각하는 인간의 한계, 그 너머에 있는 것이 신의 영역이라고 인간은 생각하거든요. 그것도 합리적이에요. 생각해보세요. 내가 있고 우리가 유한하고 하나님은 무한한 영역이다. 되게 하나님 챙기고 생각하는 것 같지요. 그건 뭐냐 하면 인간을 유한하다고 봤지 인간을 없다고 이야기한 적은 없어요.

일단은 인간은 있고 신이라 하는 것은 인간의 있음에서 유한에서 무한으로 가는 데에 협조할 책임이 있는 쪽이 신 쪽이다. 열심히 빌고 기도하고 봉사하게 되면 무엇을 도와줄꼬, 하고 알라딘 램프에 있는 서장훈 같은 거대한 종이 하나 등장해서 세 가지 소원 듣고, 램프 문지르고 이런 것 생각하는 거예요. 안 그러면 지팡이로 하든지. 안 그러면 영국의 영웅담에 보면 나오잖아요. 칼을 꽂아놨는데 그 칼을 누구도 못 뽑아내는 거예요. 누가 뽑아낼까요? 진실한 사람만 뽑아낼 수 있는 거예요. **엑스칼리버(아서 왕의 전설에 나오는 칼)

그 칼을 쓰면 다윗처럼 골리앗까지 쳐부술 수 있는 그런 칼, 영웅담이잖아요. 영웅은 신과 인간의 경계선, 두 가지 요소를 다 갖춘 존재에요. 인간이면서도 신의 영역까지 내민 것, 기린 같아. 사람들 보는 것 말고 구멍 뚫어서 멀리까지 볼 수 있는 것, 인간이 못 보는 영역까지 머리를 쳐들고 볼 수 있는 것, 지가 타잔인가? 세상 다 볼 수 있는 영웅.

세상은 영웅을 원합니다. 왜냐하면 자연의 요동치는 변화에서, 자연의 조화에서 인간은 자기의 한계를 느끼기 때문에 그걸 신의 영역으로 드리고 날마다 제사를 드림으로서 하는데 그 제사장이 누가 되느냐? 그게 왕이 되는 겁니다. 이게 인간의 의식구조입니다. 의식구조가 정치가 되면 그게 이상화되지요. 현실화되는 겁니다. 우리는 못해도 대통령이 하는 걸 통해서 하늘의 복을 받아서 우리나라 만만세 에요. 월드컵 16강 들어가고, 이런 것.

그렇게 되기를 국민들이, 지금은 민주국가기 때문에 백성이라 하지 않고 국민이라 합니다. 국민들이 지금 간절히 원하고 있는 거예요. 그게 축구만 그럴까요? 교회, 모든 정치제도, 가정. 가정의 가장이 해 뜨면 달뜨면 차 들어가기 복잡한데 가서 비는 이유가 뭡니까? 자기가 제사장 놀이를 하고 싶은 거예요.

문제는, 어려운 이야기 다시 봅시다. 거기 있다는 거예요. 나는 여기 있고 거기 있다는 거예요. 일본영화 <러브레터>, “오겡끼 데스까? 와따시와 겡끼데스!”(거기 잘 계십니까? 저는 잘 지내고 있습니다.) 산에 이미 죽은 사람에게 “오겡끼 데스까?” 계속 아가씨가 자기가 흠모했던 짝사랑했던 남자를 못 잊어서 눈 덮인 홋카이도 산을 향하여 외치지요. 위험한 짓이에요. 왜냐하면 음파에 의해서 눈사태날 수 있어요.

거기 잘 계십니까, 그 심보. 왜? 내 사랑이 도달하는 거기에 나의 신이 거기에 있어줘야 된다고 압박하는 거예요. 인간이 감히 신에게 압박하는 거예요. 신화적 영웅적 존재, 나의 가치, 존재의 의미를 자기 바깥에 하나의 대상체로 설정해놓고 거기다가 마음을 다하여 뜻을 다하여 정성을 다하여 목숨을 다하여 비는 거예요. 이 대목 나오지요. 그 신이 큰 나니까, 나의 확장이니까 자진해서 빌지요. 섬기고. 그걸 구체화한 것이 조상님이에요. 조상님에게 빌고 조상제사고요. 그것도 모르고 시집왔다고 넙죽넙죽 제사하고 다 했지요. 나는 멀찍이 서기만 했습니다. 공범자는 아니었습니다, 이러고.

거기 있지요. 거기 없어요. 인간으로 하여금 나 여기 있음을 인정하지 않는 신, 그게 진짜 하나님입니다. “나 여기 있습니다. 하나님 거기 있지요?” “너 거기 없어. 없앨 거야. 기다려봐. 없애줄게 내가.” 그게 불입니다. 민수기 11장 봅시다. 아까 레위기 봤는데 불 싸대기 이야기하는 거예요. 누가 크게 읽어보세요.

11장 1절, “백성이 여호와의 들으시기에 악한 말로 원망하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진노하사 여호와의 불로 그들 중에 붙어서 진 끝을 사르게 하시매 백성이 모세에게 부르짖으므로 모세가 여호와께 기도하니 불이 꺼졌더라“ 그때 소방서가 있는 것도 아니고요. 용산 소방서장 있는 것도 아니고 불이 났어요.

그러니까 우리가 생각해야 될 것은 민수기 11장 1절에서 백성들이 원망할 때 아마 하나님은 불이기 때문에 원망하면 우리에게 불이 올 거라고 그중에 누구 하나 예상한 사람 있습니까? 없지요. 하나님은 계명을 율법을 갖고 있는데 인간은 율법을 듣기나 했지 그 말씀이 인간에게 도달하지 않았던 거예요. 없어요.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율법을 줬을 때는 율법 없는 것을 인간 존재로 간주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불로써 율법 없는 인간을 불사른들 태워 죽인들 하나님은 아무런 양심의 가책도 없어요. 하나님께서 불을 담았다는 말은 율법에 뭘 동반시켰다? 둘 판을 줄 때 불을 동반시켜준 거예요. 그런데 인간은 계명만 받고 말씀만 받고 합리적으로 받고 불은, 그딴 불은 치워버린 거예요.

불이 엮어줘야 말씀이 말씀답게 소멸하시는 하나님으로 연결이 되는데 불 치워버리니까 연결이 안 되는 거예요. 그저 최선을 다했을 뿐입니다, 이것만 남는다 이 말입니다. 자기 잘남과 자기가 얼마나 대단하게 경건하고 정숙하고 순결한지 그것 확인하려고 교회 가고 성당 가고 있는 거예요. 마리아 상에 성호 그어가면서 그 짓하고 있는 거예요.

시선이 자기 하나의 시선으로 자기가 충분하다고 보는 거예요. 자기가 꿇어앉아 기도하는 시선을 누가 상상하느냐? 기도하는 본인이 상상해요. 그것 상상한다고 기도시간이 길어져요. “가만있어봐. 내가 지금 꿇을 때 제대로 꿇었는지, 지금 몇 시간째야.” 시계 가끔 봐가면서. 자기 감상한다고 기도시간이 그렇게 긴 거예요.

이왕 말한 김에 기도가 뭐냐? 기도는 간단한 거예요. 기도하기=기도응답, 기도하기는 그 자체가 기도응답입니다. 기도가 응답됐기 때문에 기도할 마음이 생긴 거예요. 이 자체가 기도에요. 기도든지 뭐든지 우리는 실내축구게임에 있는 모형에 불과해요. 나에게 일어나는 어떤 일도 주의 계명과 무관한 게 없고 주님의 불의 소멸하는 작업과 무관한 일은 일체 일어나지 않습니다.

일본이 1:0으로 진 것도 불의 요구와 관련돼 있어요. 문제가 좀 어렵지만 거기까지 가는 복잡한 논리가 있긴 있어요. 그건 잠언에 나오지요.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잠16:18) 주전을 왜 뺐는가? 8강전 브라질 때문에 뺐다. 근데 16강도 못 들어갈 수 있지요. 이게 뭐냐 하면 일본 감독이 예측하기 때문에 그래요. 근데 그 예측이 어디서 나왔는가? 이미 우리는 독일을 이겼다는 데서 나왔잖아요.

그러니까 인간은 자기 육신적인 정체성이라 하는 것은 이미 내가 이것은 당연히 내 것이라는 것부터 확보된 것부터 출발하는 게 정체성이에요. 과거형 인간이죠. 과거 이랬으니까 그런 잘못과 그런 실수는 하지 말아야지. 또는 이 장점으로 내게 이득이 왔으니까 그 장점을 내가 살려야지. 인간이 할 수 있는 게 그거잖아요.

그래서 어제 낮 설교 때 한 건데 다시 하게 되면, 인간의 전향은 하나님에게 소용없다. 분명히 이 이야기했어요. 전향적 자세를 갖자. 나는 이제 대한민국 사람이다. 북한 사람 아니다. 전향하지 마. 전향도 하지 말고 반성? 되도 않는 반성. 회개? 회개 같은 소리하고 있네. 인간이 회개해서 인간 되는 법이 없어요.

죄인입니다, 하면서 울다가도 앞에 돈 만 원짜리 보면 헤헤헤. 성경에 하나님과 재물은 겸하여 섬기지 못한다고 했는데 울면서 돈은 챙기고 눈물 닦으면서 누가 가져갈까 얼른 자기 무릎 밑에 숨겨놓고. 그다음부터 기도할 땐 잘 있는지……. “자식 수능 칠 때 성적 올려달라고 기도하는 게 아닙니다. 그건 기복신앙으로 내가 딱 싫어하는 겁니다. 그저 아는 만큼만 하게 하옵소서.” 솔직하게 말해서 아는 문제만 나오게 하옵소서.

지가 뭐 과거의 인물입니까? 비행기 떨어지는 이런 것 다 알고 미리 대비하고, 이거는 드라마 <재벌집 막내아들>에나 나올 내용이지 죽어도 다시 태어나서 주식 값 다 알아서 미리하고, 서울 법대 문제 미리 알고 수석입학하고. 그 주인공 이름 뭐지요? 송중기.

인간은 일어난 사태를 자기 손 안에 두려고 해요. 하나님마저. 그러니까 이게 우상 되는 거예요. 손 안에 둔다는 말은 이 손은 절대로 하나님이나 누가 와서 손은 다치면 안 되고 흠집 나면 안 되고 소멸되면 안 된다는 거예요. 이게 부정적인 요소가 될 수 없다는. 출발 자체가 우상으로부터 출발해서 교회 나오고 성당 나오고 하나님 믿는 거예요. 복음 받아들인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성령이 오게 되면 거꾸로 돌리지요. 그래서 우리를 철저한 기계로 만들어버리지요. 네가 한 것 아무것도 없고 너는 철저하게 구원에서 배제돼 있다는 이것이 무슨 소식이냐? 기쁜 소식이죠. 어제 제가 이야기했잖아요. 보상부터 먼저 주어지고 그다음에 평가, 그다음에 결과, 그다음에 노력. 그래서 성도는 끊임없이 노력합니다. 뭘 위해서? 보상이 나와 상관없이 주님과 상관해서 주어졌다는 그걸 증인 노릇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주께선 우리에게 일하게 하죠.

그 일을 통해서 뭘 버리게 하느냐? 내가 소멸당해야 마땅함을 버리고 실제로 나라는 것은 제거됩니다. 나가 끼어들면 우리 시스템이 깨져요. 천국이란 우리 시스템이. 성령과 예수님과 성도와 제자들과 하나가 되는 시스템이 내가 독보적으로 끼어들면 이거는 가시처럼 불쑥 찢어지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런 인간을 받질 않습니다. 그래서 천국은 나를 사랑하는 자는 단 한 사람도 없다. 천국은 나를 사랑하는 자는 거기에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다음에 민수기 16장 봅시다. 계명 안에 불이 함께 있습니다. 민수기 16장 보게 되면 여기에 고라자손 나오지요. 고라자손이 땅이 갈라져서 죽고요. 그다음에 46절, “이에 모세가 아론에게 이르되 너는 향로를 취하고 단의 불을 그것에 담고 그 위에 향을 두어 가지고 급히 회중에게로 가서 그들을 위하여 속죄하라 여호와께서 진노하셨으므로 염병이 시작되었음이니라 아론이 모세의 명을 좇아 향로를 가지고 회중에게로 달려간즉 백성 중에 염병이 시작되었는지라 이에 백성을 위하여 속죄하고 죽은 자와 산 자 사이에 섰을 때에 염병이 그치니라 고라의 일로 죽은 자 외에 염병에 죽은 자가 일만 사천 칠백 명이었더라”

그리고 그전에 35절에, “여호와께로서 불이 나와서 분향하는 이백오십 인을 소멸하였더라” 이건 코로나로 죽은 사람보다 더 많은 같아. 35절에 그날 250명 죽었어요. 그리고 나중에 거기서 비난한다고 해서 몇 명 죽었느냐, 전염병에? 14,700명 죽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어떤 분이다? 살리시는 분이 아니고 마음에 안 들면 죽이시는 분인데 그럼 왜 죽이느냐? 원래 인간은 없기 때문에. 있음에서 없음으로 돌리는 거예요.

그럼 왜 있게 하느냐? 계명과 대화의 상대가 된다는 조건 하에 임시적으로 있는 존재지요. 주께서는 계명을 살리지 인간을 살리지 않습니다. 인간을 살릴 것 같으면 창세기 3장에 아예 인간을 동산에서 쫓아내지도 않았어요. 주께서 쫓아내시고 생명나무 되시는 주님께서 거기서 여자의 후손으로 따라 내려가시는 이유는 주의 약속을 살리기 위함이지 인간을 살리기 위함이 아니에요.

그러니까 인간 입장에서는 하나님이 거기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지요. 인간은 하나님이 어디 있는지 파악이 안 되는 거예요. 만질 수도 없고 파악이 안 돼요. 불이 저기 있네, 이러지 않잖아요. 하나님 저기 있네, 인간은 그렇게 말하고 싶지 우리를 죽이는 불이 저기 있네. 도깨비불인가? 그렇지 않지요.

불 넘어 갈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불 넘어 가려면 그냥 혼자 가면 안 되고 말씀 완성과 더불어 내려가야 돼요. 그래서 신약에 보면 예수님의 십자가를 그다음에 뭐냐 하면, 내가 받을 불세례, 내가 아직까지 불세례가 남아있다. 이 말은 주님이 저주받을 죽게 되는 주님의 말씀을 완성할 의미에서 그 세례에 합쳐버리죠. 세례는 물로 덮는 걸 세례라 합니다. 한 번 정리해보겠습니다.

불 앞에서는 인간 대 인간의 그 어떤 차이도 성립되지 않는다. 그러면 우리가 구원 받았다는 건 불 속에서 구원 받은 거죠. 이사야 6장에 나오죠. 이사야가 어디서 구원 받았습니까? 불의 심판 속에서 구원 받잖아요. 불이 와서 이사야의 입을 지져버리잖아요. 네가 죄 그대로 있으면 안 된다. 따라서 죄를 사하는데 네가 회개하라, 이게 아닙니다. 불이 와서 이사야의 입을 지짐으로써 이제는 이사야 입에서 뭐가 나오느냐 하면 주님의 추가된 새로운 계명의 말씀이 터져 나오기 시작하는 거예요.

아까 처음에 이야기했잖아요.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말씀 상대자로 계속해서 나가는데 있어서 그 개념이 어떻게 된다고 했습니까? 확장되고 부풀어진다고 했지요. 소멸하는 불에 점점 가까이 가는 거예요. 베드로후서 3장에 가면 마지막엔 전에는 물로 소멸됐지만 이제는 이 세상은 불로 소멸되는 겁니다. 또 다시 제가 물어봅니다.

왜 하나님은 극단적으로 그렇게 밀어붙이는가? 거기에 대한 답변을 아까 제가 해드렸습니다. 뭡니까? 구원은 일체 인간의 행함과 노력으로 성사되지 않고 일방적인 하나님의 조치가 구원이란 것을 이게 끝까지 밀어붙여요, 끝까지 붙이는 거예요. 캐낼 때까지 다 캐내는 끝까지 밀어붙이는 거예요, 복음은. 대충 설교해서 온 사람들 위로해주고 목회하시지 왜 끝까지 밀어붙입니까? 끝까지 밀어붙여야 주님이 성령 주신 사람과 안 준 사람이 가려질 게 아니겠습니까. 끝입니다. 멀었어요. 누가 마음대로 끝이래.

불 앞에 인간들은 어떤 차이도 성립되지 않습니다. 직업이 뭐냐, 직장이 뭐냐, 한 달 수입이 얼마냐 그런 것은 하나님의 불 앞에 소용없습니다. 그래서 마지막에 불은 뭐냐? 인간이 갖고 있는 인간의 시간과 공간을 불태워버리죠. 불로써. 인간의 시간과 공간이 있으면 내가 여기 있다고 적시할 수 있기 때문에, 나 여기 있습니다. 나 여기 있고 너 거기 있습니다, 되거든요.

우리로 하여금 여기 있는 자리가 없게 만들어버려요. 그게 십자가 안이고 그게 성령 안이에요. 성령 안에서 미국 가나 캐나다 가나 그것 의미 없습니다. 성령 안에선 내가 여기 있다가 아니라 성령 안에 있고 주님 안에 있지요. 사도 바울이 맨날 이야기하는 게 뭐냐 하면 너 어디 있느냐? 나 예수 안에 있다. 예수 안에는 내가 세상적인 시간과 공간을 적시할 수 없어요.

이미 예수 안에 들어와 버렸어요. 이걸 다른 말로 생명 안에 들어온 거고, 다른 말로 하면 성령 안에 들어온 것이고, 다른 말로 하면 뭐냐? 십자가 안에 들어온 거예요. 십자가 안에서 너희들은 죽은 자가 되고 너희들 보기에 내가 죽은 자로 보일 것이다. 이게 십자가 안이에요. 갈라디아서에 나옵니다.

성경을 해석할 때 조금이라도 인간이 해낼 수 있는 것으로 설명하면 성경해석 그거는 엉터리입니다. 잘못된 거예요. 그건 아예 예수란 우상을 섬긴 것밖에 안 돼요. 일체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전혀 없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각인시키는 그걸 다시 되새기는 성경해석이 돼야 돼요. 열심히 하면 됩니까, 지키면 되지 않습니까? 하나의 예를 들면 이렇지요. 어제 낮 설교 본문 기억하지요.

디모데야 너는 나이 많은 사람을 아버지라 여기고 나이 많은 여자를 어머니로 여기고 같은 형제를 자매로 여겨서 함부로 대하지 말고 같은 남자를 형제라 해라. 그걸 선교단체에선 어떻게 인용합니까? 선교단체 모일 때 별칭이 뭐예요? 자매님, 형제님 이러잖아요. 그게 말씀 실천이라고요. “형제님, 사랑합니다. 자내님, 사랑합니다.” 오월 되면 갑자기 교회에서 어버이주일이라 해서 떡국 해주고 교회가 어버이 섬기는 모범을 보인다고. 언제? 어버이주일날. 그리고 집에 가면 끝났지 뭐. 자기 집 아버지, 어머니도 감당이 안 되는데.

자기 집에 있는 여동생 뭐합니까? 맨날 오빠, 오빠 돈 달라하고 시집가도 찡찡거리고 친정 찾아다니고. “너 시집갔으면 빨리 집에 가라. 여기 기대지 말고.” 그러면 여동생지지 않고, “이 집이 오빠 집이가?” 무슨 뜻인지 아시겠지요. 아버지 재산 다 차지할 생각 말라는 그런 뜻이에요. 우리 남편 사업하는데 돈 모자라 다 차지할 생각하지 마라. 지금 아버지 돌아가실 때 됐는데 간 보기 위해서 왔어. 빨리 요양병원 보내고 뒤처리, 부동산 처리됐는지 그것 보러온 거예요.

그러니까 백날 그 사람이 교회 다녀서 교회 가면 아버님, 어머님, 형님 이랬던 것이 집에 오면 왜 그리 달라지지요? 달라지는 게 아니고 폼 낸 거예요. 주님 성경말씀 지켰으니까 진짜 내가 원하는 것을 주께서 좀 들어주세요. 내 소원 하나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이러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런 대목들 지키기 참 쉽지요. 집사, 권사, 장로님보다도 훨씬 낫잖아요. 정겹고. 나중에 돈 빌려 달라하고.

그런 식으로 설교하면 오초내지 십초면 끝났습니다. 찬송 부릅시다. 실천들 하시지요. 이제부터 연습해볼까요? 자매님, 형제님 시~작~ 끝났습니다. 다 지켰습니다. 그게 뭐예요? 인간이 할 수 있는 내가 뭘 해드리면 되겠습니까, 이 말은 뭐냐? 하나님 보세요, 저 여기 있다는 거예요.

그럼 하나님이, “네가 거기에 새 언약이 있는지 네가 있는지 보자. 네가 새 언약 십자가 안에 있는지.” 성령 안에 우리로 있지요. 십자가 안에 성령 안에 복음 안에 생명 안에 있는지 단독으로 네 안에 있는지 너 혼자 있는지 보자는 겁니다. 성령 안에 있으면 주님 주신 혜택을 입지만, 단독으로 있으면 지가 뭘 하려고 해. 왜? 나를 못 버렸으니까. 이게 바로 우상입니다. 이 우상은 불 싸대기 준비돼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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