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강의

실패자-십자가12강

아빠와 함께 2022. 10. 27. 07:38

대전-십자가를 아십니까(12강) 누가복음12:50(실패자) 20221024b
(강의:이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 [십자가를 아십니까] 41페이지에 보면 사도행전 말씀이 나오지요. 사도행전 4장 31절, 32절. “무리가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 이것도 에스겔 수련회 할 때 이야기했는데 너무 어려워서 설명하는 것도 어려워요. 한 마음과 한 뜻, 에스겔 1강 여럿과 다수에서 설명한 거예요. 인간이 다수가 될 때는 최종적인 하나로 묶이기를 원하고 있어요. 그런데 하나로 묶는 순간 그게 망상이 돼버려요.

그래서 인간은 끊임없이 우상을 섬기기 때문에 피라미드 형식을 갖추되 항상 궁금한 게 뭐냐? 최고, 최고의 자리는 어떤 모습을 갖출까, 어떤 자질을 갖출까, 어떤 능력을 갖출까를 고대하고 있었던 겁니다. 인간은 항상 최고의 자리에요. 그래서 인간에게는 왕을 비록 없앤다할지라도 늘 왕을 찾아요. 그 왕을 뭐라 하느냐? 요새는 끝판 왕이라 해요. 바둑의 왕. 하여튼 왕이란 타이틀을 걸고 이 분야에서 최고가 누구냐를 왜 궁금한 거예요? 인간의 욕망은 멈출 수 없는 겁니다. 최고를 지향하게 돼 있어요.

그래서 왕이 되면 나머지는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그 왕에게 굴복하라는 거예요. 예를 들면 미스코리아대회에 참가한 모든 여성들은 미스코리아 진에게 고개를 숙여야 돼. 미스코리아 진이 혼자 지팡이 들고 갈 때 같이 뒤따라가면 안 돼요. 그냥 가만히 서서 박수쳐야 돼요. 왕을 왕으로 인정해줘야 했어요. 최고가 되기 위해서. 그때 그들은 뭐냐?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었다고 자부하는 겁니다.

그런데 사도행전 4장에 대해서 성경은 어떻게 그게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었는가? 사도행전 성도들이. 거기에 대해서 에베소서 4장 3~6절에서 설명했습니다.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몸이 하나이요 성령이 하나이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입었느니라 주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세례도 하나이요 하나님도 하나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

이 내용은 실패하라는 겁니다. 개인적 인생에 실패하지 말고 전 지구적으로 실패했음을 받아들여라. 미국 가도 캐나다 가도 어딜 가도 한국 실패자가 미국 가도 실패자 되고, 캐나다 실패자가 되고, 호주에 가도 실패자 되고 실패자 아닌 사람이 이 세상에 아무도 없는 그런 세계에 있음을 인정하라는 겁니다. 뭔데 왜 실패하느냐? 최고가 되는데 끝판 왕 되는 데 실패해야 돼요. 낚시 왕, 꽃꽂이 왕, 미용대회 왕, 왕 있잖아요. 그 모든 왕이 되는 순간 그 사람은 실패하는 데 더 멀어져버렸어요. 내가 그래도 옛날 최고가 되었는데 이런 돈 받아야 되겠어, 이런 거요.

올림픽 나가서 태권도에서 동메달 땄어요. 경찰에서는 특혜 줬습니다. 순경으로. 상당히 자존심 상하지만 자존심 꺾어야 돼요. 경기력은 나중에 몸 늙어버리면 힘들어 못합니다. 하지만 경찰은 공무원이잖아요. 길고 오래간다고요. 계산 해보면 경찰 아무나 되는 게 아닙니다. 태권도 한다고 경찰시켜주는 것 아니잖아요. 순경되는 것 감지덕지해야지요. 또 그 나이 대에 맞고.

그래서 실패하지 않으면 자기가 왕이에요. 자기가 왕 같으면 다른 사람과 같이 한 마음과 한 뜻이 될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성령이 묶어준다는 말은 실패자들 다 모여. 실패한 사람 모이란 말 아니고 자기가 실패했다고 여기는 사람 다 모여. 그게 바로 성령의 한 묶임이에요. 모이니까 자산 76억 가진 사람, 820억 가진 사람 전부 다 실패했데. 왜? 850억을 못 가져서. 그래도 괜찮아요. 가진 자나 못 가진 자나 나는 실패자로 태어나서 매 일생에 겪는 게 실패밖에 없다.

이유가 뭐냐? 내가 능력이 모자라서가 아니라 전 지구적이다, 지구가 전부 다 실패의 현장이기 때문에 내 나름대로의 성공이란 것은 없습니다. 그러면 실패한 사람들의 대화를 엿봅시다. 엿볼 것도 없어요. 노골적으로 드러나니까. 이런 내용입니다. “스스로 성공을 아직도 기대하는 자의 대화는 이것 주세요.” 하나님, 이것 주세요. 그런데 실패자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이것 왜 주십니까?” 내가 애가 둘이다. 아이 둘 왜 주십니까? 네 머리가 파마구나. 파마 왜 하게 하십니까? 그다음에 말을 덧붙여야 돼요. 안 주셔도 되는데…….

안 주셔도 되는데 왜 주십니까? 그러면 여기 주신다, 안 주신다 내용의 가장 근원적인 게 뭐가 되겠어요? 목숨이죠. 이 목숨 왜 주십니까? 오늘도 왜 살게 하십니까? 이것 안 살게 해도 되는데 왜 살게 하십니까? 이게 제대로 성경에서 실패한 사람에게서 나온 대화고 고백입니다. 그러면 이것은 뭐냐 하면 어제도 이야기했지만 성공이란 자체적인 시간성을 갖고 있어요.

과거는 이랬지만 지금 그렇고 내일 뭔가 잘 될 거야. 이게 심수봉이 불렀던 노래, <사랑밖에 난 몰라>에 나와요. “어제는 울었지만 내일은 행복할 거야” 이게 자체적인 시간성이에요.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산장의 여인>(권혜경) 여러분 잘 모른다, 얼마나 오래 됐는지. “아무도 날 찾는 이 없는 외로운 이 산장에” 그 가수는 늙어 죽었어요.

그런 노래는 뭐냐 하면 자기의 시간성을 언급하는 거예요. 그런 트롯 노래는 많지요. <과거는 흘러갔다>부터 해서 모든 노래가 99.99%가 전부 다 자기의 시간성에 관한 거예요. 아무리 실패해도 자기 성공을 버리지 않는 사람은 잠시 실패했다고 보지요. 그러면 성공을 아직도 기대를 갖고 있다는 건 자아가 생생하게 살아 있다는 거예요. 그렇다면 성령께서 여기 동원돼야 되겠지요. 성령은 어디서 오는가, 어디를 경유해서 오는가, 또는 어떤 내용으로 오느냐? 누가복음 12장 49~50절 보겠습니다.

성령이 어디서 오는지 제가 운을 떼는 이유가, 성령 이야기하면 그냥 기도원 가서 빌면 성령을 주시리라는 약속을 믿고 부르짖으면 주실 것이라고 그쪽으로 달려가거든요. 성령 달라고. 성령을 맡겨놓은 것도 아니고. 성령은 오는 코스가 있어요. 달라고 주는 게 아닙니다. 성령 달라고 준다면 망나니 같은 자기 아들이나 자기 식구들, 아는 사람들 특혜 줘서 망나니 같은 막내아들인데 성령 주셔서 개과천선하도록, 하면 쫓아와서 성령 주고 합니까? 아니지요. 성령은 같은 편이 돼야 주는 거예요.

원래 인간들은 인간세계에 막 싸우잖아요. 그것 싸우는 것 아니에요. 싸우는 척하는 거예요. 마태복음 12장에 보면 어제도 언급했지만 같은 편은 전쟁이 계속 되지 않습니다. 사탄세계에서 악마는 귀신과 안 싸워요. 결국은 똑같은 인간들이에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싸웠거든요. 예수님 앞에 오니까 둘 다 같은 편이었어요. 인간은 끝까지 싸우질 않습니다. 반드시 화해할 수 있는 요소를 서로가 다 갖고 있어요.

그게 현대에서 마지막 싸울 요소가 뭐냐 하면 이거에요. 돈입니다. 돈 주면 악한 나쁜 감정도 돈을 어떻게 주느냐에 따라서 눈 녹듯이 다 녹아버려요. “얼마면 돼? 결국 이거였었어? 니가 그렇게 개기는 이유가 돈 더 달라 이 말이지, 그래 줄게.” “진즉 그렇게 나오지. 우리 화해했다는 의미로 악수.” 층간 소음 문제는 돈 주면 돼요. 말썽부리는 심술부리는 시아버지, 시어머니. 애먹이는 시동생 돈 주면 우리 형수님, 형수님 해서……

인간은 같은 편입니다. 돈으로 한 마음, 한 뜻 됐어요. 성령으로 한 마음, 한 뜻 된 게 아니고 돈으로 다 묶인 사회에요. 그러면 그들이 싸우는 척하는 이유가 결국은 돈 문제입니다. 대장동, 화천대유 전부 다 돈 문제에요. 화해의 요소가 이미 인간세계에서는 돈으로 장착돼 있습니다. 따라서 인간은 한 통속입니다. 같은 편이란 걸 제가 말씀드리는 거예요. 돈에 기초하지 않는 분, 주님밖에 없어요. 주님만 그래요. 그래서 주님을 퇴출시킨 겁니다. 바리새인들이.

이유는 뭐냐? 돈이 안 되기 때문에. 대화가 막힌 이유가 끝에는 돈 문제로, 돈 문제라 하는 것은 자기 생존 문제로 생존을 보장해줄게, 이런 문제로 돼야 되는데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나 따라 죽으라 하니까 이게 대화가 안 되는 거예요. 심지어 가룟 유다고 돈 삼십 냥에 팔렸고, 베드로와 야고보는 돈을 요구하지는 않았지만 있는 돈이라도 챙기려고 목숨이라고 챙기려고 도망쳐버렸잖아요. 주에게서 없어졌잖아요. 성령은 그렇게 오는 거예요.

누가복음 12장 49절 보겠습니다.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리요” 아까 첫째 시간에 불 이야기했지요. 불놀이야. 불을 던지러 왔다. 아까 한 것 기억나는지 복습해봅시다. 불이란 것은 창세기 3장 24절에 생명나무로 결코 넘어오지 않도록 방비책, 철책 선처럼 불이에요. 불을 넘어설 순 없어요.

불이 인간 쪽으로 진격한다? 인간은 궁지에 몰리지요. 인간은 궁지에 물리면서 불이 오지 않았을 때는 네 편, 내 편이 있었는데 불 앞에서는 모두 다 한 통속이 돼버린 겁니다. 어느 누구도 생명나무가 없다는 점에서는 똑같다. 그들이 영화업에 종사하든지, 어업에 종사하든지, 건축업에 종사하든지, 목사가 됐든, 교사가 됐든, 공직에 있든 간에 아니면 백수가 됐든 어떤 경우라도 그들은 똑같아요. 왜냐하면 불 넘어올 수 없다는 점에서, 생명이 없다는 점에 똑같아요.

주께서는 불을 앞장세워서 밀어붙입니다. 그러면 불을 어떻게 밀어붙이는가? 아주 산불을 내버리는가? 예루살렘 근처에다. 자칫하면 주님이 방화범 돼버리지요. 예루살렘 주위에 휘발유 부어서 불을 내면 여기는 불놀이가 아니고 불바다 되지요. 지옥의 불바다 되겠지요. 바깥에서 쪼아오는 방식, 이 방식은 나중에 마지막 예수님 강림하실 때 주께서 이렇게 조치를 내립니다. 떠나고 난 뒤에 쓰레기만 남았잖아요. 쓰레기는 태워야지요. 쓰레기는 태워야 맛이지. 낙엽 태우는 맛이 괜찮아요. 달콤한 맛.

지금 불을 안에서 시작해버려요. 불을 누구한테 지피느냐? 예수님이 자기 자신한테 불 지펴버립니다. 이걸 내가 받을 세례라고 한 거예요. 그러면 예수님이 세례를 몇 가지나 받느냐? 세례란 세례는 다 받아요. 마태복음 3장을 봅시다. 예수님 세례 받는 장면. 세례 요한이 하나님께 받은 계시가 있어요. 세 가지 세례에 관한 계시를 받았습니다.

지금 마태복음 3장 13절에서 세례 요한이 뭘 하고 있습니까? 요단강에서 백성들에게 세례를 주고 있지요. 그 세례는 물세례지요. 너희들 보기엔 물세례로 보이지 이게 다가 아니야. 물세례 취지를 연이어 받아 챙기는 두 가지가 더 있어. 11절에, “나는 너희로 회개케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회개란 대비하는 것, 미리 예비하는 것.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나와는 견주질 못한다.

그러면 세례 요한의 물세례는 인간이 할 수 있는 세례지요. 그런데 그 뒤에 오는 세례는 인간이 감당 못할 세례니까 뭐냐? 하나님이 몸소 친히 오셔야 하나님만이 보여줄 수 있는 두 가지 세례, 그게 무슨 세례냐 하면,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우리에게 세례를 준다는 거예요.

성령 세례 준다는 걸 요한복음 1장에 보면 이렇게 합니다. 내가 세례 주는데 갑자기 하늘이 열리면서 음성이 들리는데 지금 세례 받을 때 성령이 임한 그분이 바로 너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분이라고 나와요. 마태복음에선 한꺼번에 이야기했는데 요한복음 1장을 볼까요. 33절에,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나를 보내어 물로 세례를 주라 하신 그이가 나에게 말씀하시되 성령이 내려서 누구 위에든지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곧 성령으로 세례를 주는 이인 줄 알라 하셨기에”

그러면 이것은 무엇이냐 하면 길이 없는 곳에 길을 새로 만드는 이야기에요. 하늘로 가는 길이 없어요. 인간에겐 허용된 적 없는데 누가 왔기에 길이 새롭게 만들어진 거예요. 누가 왔습니까? 예수님이 인간 속에 들어왔기에 인간들이 받는 물세례부터 개시해서 그다음에 성령세례, 불세례까지 이어지는 그게 유일한 길이 돼요. 하늘과 땅이 통하는 길이 된다고요.

앞으로 그러면 구원 받은 자란 뭔 뜻이냐? 예수님에게 일어났던 세례 체험 그대로 입혀지는 자만이 천국 가는 천국 백성입니다. 예수님의 코스를 반복하지 아니하면 천국 사람 아니에요.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걱정이 되지요. 성령세례 받은 것은 인정하겠는데, 왜냐하면 누구든지 예수님을 주시라 하면 성령 받은 것이니까. 예수님을 사대성자로 보지 않고 우리 주님으로 심판주로 보는 거예요.

내가 살고 죽고 하는 것이 그분 소관이지 나는 그분의 종이 된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성령을 받았는데 무슨 세례 받아야 돼요? 나는 뜨거운 건 싫어, 성령 받았으면 됐잖아요. 꼭 굳이 불세례 받아야 됩니까? 은근히 세 가지 중에서 두 가지만 받았으니 불합격이야. 어쩔 거야. 세 가지 다 받아야 되는데. 예수님 세 가지 다 받았잖아요. 우리는 두 개 받아선 안 된다니까요. 똑같아야 돼요.

지금 세 가지 받아야 되는데 주님은 세 가지 받았는데 우린 두 가지 받아선 안 되잖아요. 세 가지 다 받아야 돼요. 그래서 어떻게 하느냐 하면 누가복음 12장 49절에서 내가 받을 세례가 뭐냐?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가, 이 말할 때 물세례를 이미 받은 분이에요. 사람들은 성령세례만 그분이 줄 거라고 생각하고 기다리는데 그게 아니고 중간에 뭘 받느냐 하면 예수님이 불로 세례 받는 거예요. 자기가 불질러놓고 그 불속에 본인이 들어가는 거예요.

그 불이 뭐냐? 아까 첫째 시간에 했지요. 불이 하나님의 저주지요, 심판이죠. “오지 마라. 영생 있는 곳에 오지 마!” 저주잖아요. 저주라 하는 것은 인간이 쫓겨나고 난 뒤에 이 대지 위에 사는 인간의 모든 양상을 딱 두 자로 이야기하면 ‘저주’에요. 이래 살아도 저주고, 백 살 살아도 저주고, 두 살 살다 죽어도 저주고. 오직 저주 안에 갇힌 상태에서 그냥 인생을 살아가는 겁니다. 송해는 96세까지 살다가 두 번째 사망을 맞이해서 저주로 가버리죠. 그 자리가 뭐 좋다고 탐을 내는지. 전국~ 노래자랑, 그 자리가 무슨 좋은 자리라고.

그 세례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불 받은 세례를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내가 답답하다. 편치 않다. 내가 불편하다.” 이걸 다른 대목에선, “내가 쓴 잔을 마신다.” 이 답답함과 쓴 잔이 겟세마네 기도에 나옵니다. “어떻게 안 되겠습니까? 안 마시고 그냥 주의 일하면 율법 이루시면 안 되겠습니까? 역시 안 되겠지요.” 주님께서 기도할 때 땀방울이 핏방울이 된 이유가 온전히 이 불세례를 기꺼이 감당할 마음자세를 갖출 때까지 기도를 하신 거예요.

기도응답은 기도하고 응답 주어지는 게 아니고 응답이 있고 응답과 괴리된 상태를 맞춰나가는 것이 기도에요. 응답주신 분이 기도하게 하신 거예요. 기도는 우리가 하는 게 아니고 주께서 기도하게 하신 겁니다. 말씀은 이건데 할 수만 있거든 지나가게 하옵소서, 이게 우리의 본능이거든요. 따라서 말씀이 말씀되기 위해서 우리로 하여금 강제조치로 기도하게 하셔서 기꺼이 그 사태를 맞이하도록 하는 겁니다.

그게 어제 설교시간에 자세히 이야기 안 했습니다만 그게 위기에요. 위기, 오늘 대전모임에서 자세히 이야기해드립니다. 제가 위기란 말을 왜 이야기했느냐 하면 인간의 목표, 길은 단 하나입니다. 인간은 둘로 목표로 하지 않아요. 둘로 하더라도 항상 하나로 하게 돼 있어요. 왜냐하면 인간은 두 주인을 못 섬기게 돼 있어요. 최종적인 것은 하나에요. 기어이 결승전을 치러야 돼. 자체적으로. 우승자를 가려내야 돼. 그래야 마음이 정서적으로 안정이 돼요.

아이들이 아빠, 엄마를 힘들게 하는 불합리한 게 뭐냐? “아빠가 좋아, 엄마가 좋아?” 있잖아요. 그럴 때 부모의 현명한 답은 뭐예요? 되물을 수밖에 없지. “어떤 때 아빠가 좋아보였고, 어떤 때 엄마가 좋아보였어?” 이렇게 물으면 아이는 들켰구나. 왜냐하면 아빠가 좋아, 엄마가 좋아 묻는 것은 나한테 누가 잘해줄 거야, 그걸 기대하고 하는 거예요. 최종적인 목표가 하나기 때문에 그래요. 하난데 둘 싸움 붙여서 하나를 얻어내려는 심보라니까. 애들이 영물입니다, 귀신이라니까. 우리가 그렇게 적응해서 그 가정에서 생존해왔고요.

인간의 모든 길은 단 하나에요. 단 하나에 몰빵합니다. 전부 다 바쳐요. 이걸 실패로 끝나게 만들어요. 이게 위기에요. 실패를 할 때 내가 갔던 그 문이 닫혔다고 보여요. 문이 닫힐 그때 다른 문이 열려요. 실패한 순간 주께서 다른 문을 열어놨어요. 바람이 막 들어요. 문을 열어놔서. 그런데 우리는 다른 문이 절대로 안 보여요. 내가 결정하고 내가 선택하고 내가 의지로 했던 문은 오직 하나, 그뿐이에요. 그분뿐이라고요.

여러분이 결혼할 때 남편 되시는 분이 총각 때 뭐라고 다짐하던가요. 물론 술김에 이야기했겠지만. 오직 내가 사랑한 사람은 단 한 사람 당신뿐이라고 하잖아요. 그래서 나온 노래가 <뿐이고> 오직 당신뿐이다. 목적이 뭐냐? 당신을 사랑한 게 목적이 아니고 당신을 내 소유화한 목적이기 때문에 말 표현을 그렇게 하는 거예요. “너를 기어이 내 것 만들고 말리라.” 이게 남성의 마초적인 남성다움이라고. 그러면 여자는 못 이기는 체하고, “역시 당신은 남성다워, 해놓고 밥 먹여줘야 돼. 나 이제부터 놀 거야.” 쇼핑하고 놀다가 그 꿈 다 깨져버리고.

인간의 목적은 내가 결정했거든요. 나의 결정은 뭐냐 하면 내가 성공하는 성공의 의지에요. 성공의 의지로 목적을 정했기 때문에 예수님의 답답함, 세례는 물세례는 참여했지만 예수님의 십자가에 참여한 사람은 세례 요한도 안 돼요. 세례 요한도 여기서 잘린 거예요. 세례 요한은 불세례, 성령세례 예고하고 거기서 은퇴해버렸습니다.

더 살았으면 큰일 날 뻔했어요. 모가지 날아간 게 잘했어요. 더 살아 있으면 큰일 났을 거라니까요. 자기 역할, 시나리오대로 끝나야 돼요. 왜냐하면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물세례지만 그다음부터는 세례 요한도 끼어들 수 없는 세례가 남아있어요. 그거는 세상을 불질러버리는 거예요. 불지를 때 예루살렘 한 가운데 예수님께서 불의 화신이 되어 스스로 자기 몸에 불 지른 거예요.

1963년 6월에 베트남에서 불교를 말살하려는 독재자가 있었는데 거기에 승려들이 대항하는 방법은 뭐냐? 베트남 대도시 한 가운데서 휘발유를 붓고 분신자살하는 거예요. 그걸 타임지 등에서 사진으로 보도하고. 그때부터 독재자가 유럽 강대국한테 밉보여서 쫓겨나고 그다음부터 불교국가가 된 거예요. 그 전부터 불교국가지만 본격적으로 불교국가가 된 거예요.

정치보다 중의 독함, 어딜 감히 불교를 무시해? 정치로 사상으로 억누르고 천주교로 억누르면 불교가 밀릴 줄 알았지? 내 목숨 하나 희생해서 불교는 안 죽을 거야. 틱꽝득의 분신자살을 시작으로 다른 중들도 따라서, 그걸 등신불이라 해요. 지 몸에 불 질러 부처가 되는 것. 그래서 전부 다 불 질러서 자살하니까 다른 승려들이 들고 일어나고 불교신도들이 들고 일어나니까 정치도 손들고 불교를 용납해줬습니다. 어떻게 천주교에서 말하는 김대건 신부는 고상하지 않습니까?

그 중들은 자기 것 지키는 거예요. 자기가 소속돼 있는. 정치가 불교를 무시한 게 아니고 정치가 악마를 무시한 거예요. 귀신을 무시한 거예요. 정말 그 중이 메시아 같으면 따른 사람이 아무도 없어야 돼요. 인간의 자기 결정력이 이 정도로 독해요. 지 목숨도 기꺼이 내놓을 정도로 독해요. 안중근 의사나 이순신 장군도 마찬가지지만. 이순신 장군은 자살한 건 아니고 총알에 맞았지요.

이렇게 인간은 자아가 생각한 것보다 더 독한 귀신이 들어있는 겁니다. 귀신, 악마의 목적은 뭐냐 하면 이거에요. 그냥 우리 사는 식으로 내버려둬. 신이시여, 그냥 우리끼리 살도록 간섭하지 말고 내버려둬. 우리끼리 소박하나마 살도록 내버려둬. 이게 귀신의 요망사항이니까 십자가 복음이 먹힐 리가 있습니까. 그냥 지금 편한 데로 살겠다는 데, 그건 우리도 마찬가지에요.

우리도 안 답답한 데 이럴 수가 있겠어요? 그러나 여기에 위기를 준다니까. 위기가 뭐냐 하면 내 식대로 했는데 할 도리 다하고 내 모든 능력을 다 동원했는데 투자를 했는데 더는 내가 손댈 수 없는 예상 밖의 사태가 벌어진 거예요. 그 사태가 내가 무척이나 소용없는 사실을 발견한 겁니다. 뭘 해도 내가 나한테 보탬이 안 된다는 사실, 그게 뭐냐 하면 피조물성이에요.

피조물이란 본인이 만들지 않았다는 고백입니다. 나보다 누가 먼저 있었다는 고백이 피조물이거든요. 어떻게 보면 교회에서 가장 기본적인 거예요. 창세기 1장만 읽어도 아는 거예요. 우리 있기 전에 하나님이 만들었다. 그런데 그걸 천 번, 어떤 사람은 만 독했다고 해도 아직도 지가 주인인 줄 알고 있어요. 누가 만들었는데. 만들 때 그냥 만들었겠습니까? 만든 이유를 집어넣어서 만들었잖아요.

그 이유가 뭐냐? 바로 창세기 2장, 3장에 나오는 우리로 하여금 실패자의 모습이 되게 하는 거예요. 우리가 하는 모든 인생은 위기가 오나 안 오나 위기 오면 다행이고, 위기 안 온 채 편안하게 살다가 결국 뭐 됩니까? 나중에 죽게 되면 어떻게 돼요? 지옥에 잘 도착했습니다. 버스 여기까지입니다. 지옥에 잘 도착했다고 되는 거예요.

시편 37편에 보면 1절 누가 읽어볼까요? “행악자를 인하여 불평하여 하지 말며 불의를 행하는 자를 투기하지 말지어다 저희는 풀과 같이 속히 베임을 볼 것이며 푸른 채소 같이 쇠잔할 것임이로다” 잘 먹고 잘 살고 죽을 때도 편안하게 죽는 그런 죄악 된 사람, 이것 같은 인간이 복수하면 안 돼요. 심판할 수 없습니다.

그거는 누구 소관이냐 하면 불세례 소관이고 성령세례 소관이에요. 이 세상은 인간 소관이 아니고 창조주 소관이기 때문에 인간들은 예수님 따라가다가도 중간에 낙담해야 되고 실패해야 되고 예수님은 시속 백 킬로로 가는데 지는 시속 이 킬로로 가고 헥헥거리다 나중에 뒤쳐져서 그 자리에 주저앉는 것이 우리의 할 일입니다. 여러분 다 주저앉았잖아요. 성령 받고 바르게 살려하다가 지금 요양사로 주저앉고, 나 더는 못합니다. 따라가려하다 중간에 주저앉았지요.

그럴 때 내 목적, 내 의도가 실패했음을 감사해야 됩니다. 내가 추구하는 길 말고 다른 길이 나에게 찾아오기 때문에 그래요. 이 자리에서. 이건 무상이에요. 문을 두드려서 열리는 게 아니고 활짝 열어놨어요. 그 열린 문을 왜 못 봤는가? 자기 일에 미쳐서 자기에게 완전히 반해서 지 인생에다 모든 걸 다 투자했기 때문에 이렇게 옆에 활짝 열어도 들어가질 않아요.

왜? 자기 영광, 자기 멋있음, 자기 자랑거리가 거기는 용납하지 않기 때문에. 내가 이렇게 잘났음을 일체 인정하지 않는 그 자리에 못 가지요. 여러분들 동호회, 친목회 할 때 자기 자랑에 입 다물라 하면 다음에 그 모임에 가겠습니까? 안 가지요. 일 년치 회비 내고 안 가면 그다음에 그쪽에서 돌려줍니다. 사람 비참하게. 나는 동냥했다는 식으로 약간의 역시 너희들은 내 돈이라 처먹어라 했는데 돈까지 돌려주니 사람을 더욱 비참하게 만들어요. 참 이혼할 때 패물 돌려줄 때 그 비참함을. “더럽다 내가 너한테 줬다고 치고 갖고 있어라.” “안 돼. 다시 돌려줄게.”

우리는 주님이 열어놓은 문을 못 봐요. 왜냐하면 우리가 매일같이 내 성공에 미쳐있기 때문에 안 되는 거예요. 그래서 성령은 뭐냐? 다시 누가복음 12장 봅시다. 이 본문이 만만한 본문이 아니에요. “나는 받을 세례가 있으니 그 이루기까지 나의 답답함이 어떠하겠느냐” 이루기까지는 주님이 그냥 죽으시는 게 아니에요. 죄를 안고 죽어야 돼요.

주님은 죄가 없으신대 자기 택한 백성의 죄를 다 거두어서 자기에게 옴팍 뒤집어씌우겠다는 것이 아버지 뜻이니까, 불이란 저주의 불이고 심판의 불이거든요. 그 심판의 불을 그 무거운 죄의 무게를 다 감당을 해야 되니까. 처벌의 무게에요. 고통스럽지요. 그냥 말로서 죄인이라 하면 하나도 안 무거워요. 그런데 우리 지은 죄를 처벌받기 위해서 우리 평생을 보낸다면 하루하루가 지옥 같지요. 주님께서는 그 코스를 밟은 거예요.

그래서 예루살렘에 불을 질렀습니다. 그럼 이런 그림이 나오지요. 유다지만 이스라엘로 보고 중간에 예루살렘이 있고 여기에 예수님이 있습니다. 예수님에게 뭐가 주어졌습니까? 인간의 죄들이 주어졌지요. 예수님을 위하여 세상이 있으니까 예수님 받은 세례, 십자가 죽음, 하나님께 저주받은 저 죽음이 어떻게 돼요? 확장되니까 이스라엘이 멸망되는 거예요. 멸망할 때 그냥 멸망하는 게 아니지요.

그 뒤에 51~53절 봅시다.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려고 온 줄로 아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도리어 분쟁케 하려 함이로라 이 후부터 한 집에 다섯 사람이 있어 분쟁하되 셋이 둘과, 둘이 셋과 하리니 아비가 아들과, 아들이 아비와, 어미가 딸과, 딸이 어미와, 시어미가 며느리와, 며느리가 시어미와 분쟁하리라 하시니라” 가족에서 싸움 나거든 전부 다 예수님 십자가 때문인 줄 아시기 바랍니다. 너희들 편안하게 인생 안 보내줄란다.

그런데 인간들은 이 말씀 보고서도 편안하기를 원하고 편하다고 하지요. “편해. 예수님이 무슨 소리했든 나 지금 편해. 행복해.” 성령이 준 위기가 안 온 거예요. 주님의 고난이 오질 않은 거예요. 그러나 성령이 와서 복음을 알아버리면 상대에게 한 마음 되려고 어떻게 애를 쓰고 다가서도 한 발자국 다가서면 두 발자국 물러서지요. 완전히 백지영이지요. 한 발자국 다가서면 두 발자국 물러서고, 또 다가서면 또 물러가고. 소통이 안 돼, 말이 안 통해요.

그들은 실패하기 싫다는 거예요. 우리는 일찍 실패를 맛보자는 거예요. 실패란 것이 집안 망하고 울고불고 집 나가고 사기 당하고 몸이 아프고 이게 아니고 내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데서 오는 그 실패, 따라서 이거는 실패가 아니고 어떤 점에서는 존재의 가벼움이죠. “나에게는 애초부터 날개가 없었다.” 이거는 이문열의 소설에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 상당히 역설적 이야기했잖아요. 우리한테는 애초부터 날개가 없었음을 재확인하는 데 있어요.

실패 중에 한 예를 고린도전서로 보겠습니다. 고린도전서 7장 이 대목을 보면서 참 성경말씀 해석하기가 복잡하다는 걸 느끼는데, 7장 33절, “장가 간 자는 세상일을 염려하여 어찌하여야 아내를 기쁘게 할꼬 하여 마음이 나누이며” 그 앞에 29절에 보면, “형제들아 내가 이 말을 하노니 때가 단축하여진 고로 이 후부터 아내 있는 자들은 없는 자 같이 하며”

그런데 에베소서 5장에는 아내 사랑하기를 주님이 교회를 위해서 자기 목숨을 바친 것처럼 아내를 사랑하라고 돼 있거든요(25절). 아내가 없는 자처럼 대하면 안 되지요. 그러면 성립이 안 되잖아요. 사랑할 대상이 없어지는데. 아내가 있는 자 돼야 아내를 위해서 목숨을 바치든지 할 건데. 에베소서에서는 아내 사랑하기를 목숨 바치라 해놓고 여기서는 뭡니까? 아내 있는 자들은 없는 자처럼 하라.

또 고린도전서 7장 30절에, “우는 자들은 울지 않는 자 같이 하며 기쁜 자들은 기쁘지 않은 자 같이 하며 매매하는 자들은 없는 자 같이 하며 세상 물건을 쓰는 자들은 다 쓰지 못하는 자 같이 하라 이 세상의 형적은 지나감이니라” 형상, 이 세상의 흔적, 지금 실패자의 형상은 형상으로 간주하지 않고 주께서 없는 것으로 간주해버리는 겁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갔던 그 뒷자리는 예수님이 없기 때문에, 인간들이 예수님을 죽였다는 십자가 흔적만 있을 뿐이지 주님은 지금 어디 가 있느냐? 하늘에 영광스러운 부활의 형상으로 하늘나라에 가 있거든요. 하늘 위에 있다는 말이 아니고 새로운 영역에서 자기 백성과 임마누엘, 함께 있어요.

그러니까 예수님과 함께 있는 사람은 세상 물건에 대해서 그렇게 성공, 실패 여기다가 내 목숨 걸 필요 없다는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이게 없음이죠. 나한테 날개가 없다. 내가 비상하여 이제는 세상을 향하여 나가자 하는데 날개 자체가 없는 거예요. 결국 이건 뭐냐? 없음이에요. 비록 나한테 있다고 하는 것이 환상이었고, 망상이었고 나한테는 없고 심지어 내 몸도 곧 없어질 거고 나는 김 안개, 최 안개에 불과할 거고. 밤안개.

결국 인생 수십 년 살았는데 지나고 보니까 오늘 단 하루만 남아있어요. 어제 어디 갔어요? 어제는 없지요. 열일곱 살, 열여덟 살 때 안 예쁜 분이 없잖아요. 다 예뻤잖아요. 그때 예뻤던 것은 사진에만 있고 그것도 빛바랜 사진, 그것도 보관 잘못해서 누렇게 뜬 사진, 그 빛바랜 사진에 이 아가씨 누구지? 다 옛날이야기고 지금은 그 아가씨가 육십이 넘은 내 안에 잘라도 해부해도 없어요.

그러니까 없음을 우리는 떨어뜨리고 사는 거예요. 오늘 지나면 어제는 없었던 거예요. 내일 되면 오늘은 없는 거예요. 없음을 자꾸 소독약 뿌리듯이 뭔가 엉덩이로 없음이 뿜어져 나오는 것, 이건 없음 덩어리기 때문에 가능한 거예요, 우리가. 성령께서 그게 바로 뭐냐 하면 예수님도 그리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마음과 뜻으로 하나된 것을 에베소서 4장에서 그걸 교회도 하나요, 믿음도 하나요, 소망도 하나요, 천국도 하나고, 세례도 하나고 그렇다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네 것 있나? 없습니다. 그렇지. 없으니까 하나된 거예요.

실패자라는 것을 미리 알아챈 것들의 하나, 그리고 성공이란 것은 망상에 불과하고 이건 누가 꼬였지요. 거짓말한 거예요. 인간은 성공 없습니다. 성공은 주님만 성공하면 그걸로 됐어요. 굳이 내 성공 따로 뽑아낼 필요 없습니다. 그것을 하나님께서는 하나 된 것을 천당 가라고 하나 된 게 아니고 미리 전체적 교회가 있었던 것은 이 땅에서……

이 세대가 무슨 세대? 불바다지요. 지금 예수님 때문에 불바다 됐잖아요. 불의 세상에서 성도는 뭐냐 하면 용출구가 돼요. 용출구가 뭐냐 하면 아이슬란드에 가면 지금도 안에서 용암도 나오고 뜨거운 물도 나온다는 거예요. 얇은 구멍을 뚫고 나오는 그걸 용출구라 해요. 뭔가 뿜어져 나오는 구멍, 성도는 없지요. 없으니까 주님의 다 이루심만 계속 나오는 거예요.

그래서 성도는 구멍이다. 사람이 아니고. 인간은 없으니까. 없음만 나오니까. 하루치만 있을 뿐이에요. 내일은 보장 없어요. 내일 살지 안 살지 누구도 장담 못합니다. 없는 인간인데 계속 복음만 나오는 거예요, 복음만 용출되는 거예요. 복음이 뭐냐? 물세례, 또 불세례, 그다음에 뭡니까? 성령세례. 예수님은 성령세례 받고 물세례 받고 그다음에 불세례 받고 다 이루었지요.

세례란 뭐냐? 아까 한 마음했는데 같은 뜻입니다. 연합. 한 덩어리. 에베소서 같으면 한 몸체. 몸체를 분해하면 머리 부분과 삐져나오는 사지 부분이 나오는데 사지는 현상적으로 이 세상에 눈에 띠는 거예요. 머리 부분은 주님이기 때문에 사람들 눈에 띠지 않는 영광스럽기 때문에 감춰진 분이죠. 예수님 승천하고 영광스럽기 때문에 아까 첫째 시간에 인간의 눈이 영광을 보질 못해요. 해 같이 빛나는 영광을 보질 못합니다.

하지만 뭐는 볼 수 있어요? 사지, 같은 인간이기 때문에 볼 수 있지요. 보기는 보아도 용출구의 기능에 대해서는 그들은 세상은 모르지요. 우리도 몰랐지요. 성령이 임하니까 주의 하신 일이 멈추지 않고 지금도 지속된다는 사실을 아는 겁니다. 주님만 성공했기에 그 성공한 자에게 붙는 이름은 주의 이름이에요.

그래서 방금 이야기한 것을 함축한 것이 주기도문이에요. 여러분 다시 생각해보세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그 이름을 거룩하게 하옵소서. 어떻게? 내가 이 땅에 뛰어내려옴으로 가능한 거예요.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뤄질 겁니다.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만 주옵시고, 용출구니까. 본인이 인생을 굳이 고집할 이유가 없지요. 과거는 잘라버리고 미래는 안 주고 오직 현재의 기능만 필요하니까. 시나리오대로 현재만 있으니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그들을 어디서 끄집어낸다? 그들을 죄에서 끄집어내는 데 방법은 뭐냐? 용서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할 때 용서의 주인공은 누구냐? 이 주기도문의 기능을 먼저 경험했던 주님의 이름으로 하기 때문에 모든 영광을 주님께 아버지께 드리는 겁니다. 이게 바로 주기도문의 내용입니다. 그 안에 모든 것이 함축돼 있지요.

성도끼리 한 뜻과 한 마음 될 때 어깨동무하고 사랑하는 주님 앞에 찬송 부른다고 되는 아니고 전부 다 귀신들이었는데 성령 받으니까 주님만 성공했기에 주의 이름만 부릅니다. 주께서 죽이든 살리든 주의 이름만 드러나게 해 달라, 그렇게 기도하시면 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께서 한 결 같이 일하신 흔적이 놀랍게도 오순절 날 불같은 성령이 오심으로써 이게 빈말이 아니라 그냥 가설이 아니라 실제 현실 그 자체인 것을 알았습니다. 이제 세상이 불바다 되는 것도 가설이 아니고 과학적 이론이 아니라 실제로 될 일인 것을 우리가 미리 깨닫는 기쁨과 즐거움을 허락해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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