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강의

뒤집기-십자가13강

아빠와 함께 2022. 11. 30. 11:14

대전-십자가를 아십니까(13강) 마태복음23:12(뒤집기) 20221128b
(강의:이근호 목사)


[십자가를 아십니까] 43페이지에 위에 보면, “오직 그리스도의 사랑과 은총을 입고 사는 자에 불과하다는 것을 증거하는 임무를 수행하는 자들이다. 그래서 교회는 자기의 종교 재주를 피워대는 곳이 아니라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는 곳이다. 자기를 부인하는 방식은 서로와 서로의 관계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43, 44페이지에서 강조하는 것은 관계를 이야기해요. 서로의 관계를 통해서 자기 부인이 성립이 된다고 하는 거예요. 혼자 도 닦는 건 안 된다는 말입니다. 그럼 관계를 트게 되면 뭘 하느냐? 여기 제 가방이 있잖아요. 이 가방이 얼마 안 하거든요. 가방이 중요합니까, 가방 안에 들어있는 카메라가 중요합니까? 어느 게 중요합니까? 가방은 싼 거예요. 사만 원 하는가? 가방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가방 안에 들어있는 카메라가 중요하지요.

이게 참 인간에게 그대로 적용됐으면 좋겠어요. 성도라 하는 것은 메신지 전달, 군에 가면 전령이라 하는 겁니다. 또는 택배기사. 중요한 임무를 맡았는데 중요한 임무를 세상에 알릴 임무가 있는 것이 성도에요. 그런데 성도가 자칫하면 안에 있는 내용보다 카메라보다 가방을 더 중요시하는 것처럼 안에 있는 내용이 중요한데 마치 자기도 덩달아 중요한 존재인 것처럼 행사할 경우가 있습니다. 이걸 누가 깎아주는가? 바로 타인과의 관계를 통해서 깎여져나가는 거예요. 혼자 있으면 어느 인간도 자기보다 더 소중한 게 없다고 자부하는 것이 타고난 겁니다.

그래서 43페이지 중간에 제가 빨리 읽어보겠습니다. “서로 사랑하고(요한복음 15:12), 서로 교제하며(사도행전 2:42), 서로 앞장서서 존경하고(로마서 12:10), 서로 합심하고(로마서 12:16), 서로 받아들이고(로마서 15:7), 서로 충고하고 (로마서 15:14), 서로 거룩한 입맞춤으로 인사하고(로마서 16:16), 서로 기다리고(고린도전서 11:33), 서로를 위하여 같이 걱정해주고 (고린도전서 12:25), 서로 사랑으로 종노릇하며 (갈라디아서 5:13), 서로 남의 짐을 져 주고(갈라디아서 6:2), 서로 위로하고(살전 5:11), 서로 덕을 세우고(살전 5:11), 서로 화목하게 지내고(살전 5:13), 서로 선을 행하고(살전 5:15), 서로 사랑으로 참아 주고(엡 4:2), 서로 친절하고 자비로운 사람이 되고 (엡 4:32), 서로 순종하고(엡 5:21), 서로 용서하고(골로새서 3:13),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고 (히 10:24), 서로 나누어주고(히 13:16), 서로 죄를 고백하고(약 5:16) 서로를 위해 기도하고(약 5:16), 서로 진심으로 다정하게 사랑하고(벧전 1:22) 서로 대접하고(벧전 4:9), 서로 겸손하게 대하고(벧전 5:5), 서로 친교를 나누는 것(요일 1:7)이다.”

성경구절 다 있지요. 여기서 누가 중요하냐 하면 아까 가방 예를 든 것처럼 교제가 중요하고, 존경이 중요하고, 합심이 중요해요. 받아들이는 게 중요하고, 충고가 중요하고요. 거룩한 입맞춤과 식사가 중요하고, 기다림도 중요하고, 걱정이 중요하고, 종노릇이 중요하고, 사랑이 중요하고, 위로가 중요하고.

중요한 것을 혼자서 짊어지는 게 아니고 주님이 주신 이 귀한 복음은 서로란 일꾼을 불러서, 가마꾼을 부르는 거예요. 가마를 탄 사람이 주인공이에요. 가마꾼은 주인공이 아닙니다. 이것을 네 모퉁이를 쥐고 있는 가마꾼들이 네 명인가? 두 명이라 합시다. 다 같이 알아야 되지 둘 중에 하나가 강도 되면 가마 뒤집어집니다. 그 안에 있는 마나님 엎어져서 머리 깨집니다.

교회에서 뭔가 회의하다보면 격해지면, “때려치워라. 내 안 나오면 되지.” 확 뒤집어서 예수님 땅에 꼬라박아놓고 지 삐져서 나가버리는 거예요. 권사 투표 이중 표 아니야, 이런 것. 딸내미 다른 교회 갔는데 불러다가 표 찍었나, 이래 나온다고요. 권사 투표, 장로 투표할 때. 그동안 들었던 서로 사랑하고, 서로 교제하고 다 아무짝도 소용없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게 어떤 이상한 현상이 되느냐 하면 자기가 가마꾼인데 가마 안에 본인이 타고 있어요. 이건 말이 안 되잖아요. 가마 안에 본인 타고 가마꾼은 자기가 거기 있고. 차라리 노골적으로 가마 자기가 타고 교인들에게 가마 태워달라는 것과 똑같은 거죠.

남들이 와서 우르르 “아이고, 장로님 최곱니다, 집사님 최곱니다, 목사님 최곱니다.” 가마꾼 태워주듯이 나를 오냐오냐 해주면, “내가 이 교회에 대해서 좀 신경 쓸까? 이번에 돈 좀 풀어봐?” 이러고 있는 거예요. 이건 정치집단이죠. 그렇게 해서 자기노선을 확립하는 겁니다. 자기 아지트를 자기에 필요한 인물들을 자기 당을 따로 구성하는 거예요.

따라서 여기 서로라 하는 것은, 그런 경우도 있지만 이런 경우도 있어요. 서로를 앞장세워 존경하고, 서로 합심하고, 서로 받아들이고 죽 성경에 특히 사도 바울 편지에 많이 나오잖아요. 이거는 서로를 또 균등하게 한다고 애를 쓰고 있어요. 중간에 계시는 주님은 안중에 없고요, 주께서 일하신다는 건 생각 안 하고 우리가 서로 만나면 축하합시다, 만나면 교제를 나눠서 어떻게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고 서로서로 노력하고 있어요.

그건 뭐냐? 가마에는 아무도 실리지 않고 주님도 없어요. 자기들이 서로 봉사하는 자랑거리가 서로가 내놓는 만남의 교제의 주제, 테마가 돼버렸어요. 서로 겸손하게 대한다, 서로 친교를 나눈다. 특히 서로 겸손해한다? 이거는 완전히 코미디지요. <웃으면 복이 와요>에서 구봉서와 배삼룡이 나왔던 그때 양반집이란 코미디에 이런 게 있었어요. 둘 다 무식한 사람이 사돈집에 안 꿀리기 위해서 양반 흉내를 내는데 양반들이 인사를 어떻게 하는지 모르잖아요. 그래서 대서소에 갔는데 둘 다 같은 대서소에 가서 인사법을 받은 거예요.

그래서 처음에 나온 게 뭐냐? ‘어흠’으로부터 시작합니다, 할 때 앞에 있는 지문은 지우고 ‘어흠’ 이러면 될 걸 구봉서가, “어흠으로부터 시작합니다.” 저쪽도 똑같은 시나리오거든요. “택은 잘 계셨습니까? 나도 잘 있습니다.” 나중에 둘 다 같은 대서소에서 베낀 걸 알고 치우고 보고 합시다, 해서 읽었어요. 이게 제가 알고 있는 코미디에요. 그걸 어흠으로부터 시작합니다, 그 말이에요.

이게 뭐냐 하면 교회 목사가, “여러분 안 보입니까? 성경에 나와 있잖아요. 서로 교제하고, 서로 존경하고, 서로 걱정해주고, 남의 짐을 지고 근데 우리 교회가 이런 모습 됩니까? 안 되니까 요한계시록 일곱 교회 보세요. 교회답지 않을 때 어떻게 된다? 촛대를 옮겨버린다. 옮기면 벌어놓은 돈 다 날아간다. 교회가 교회답게 되어야 마지막 때에 빛과 소금의 역할을 다해야 되기 때문에 여러분들은 서로 존경하고 서로 덕을 세우고 행하고 자비로운 생활합시다.” 서로 사랑하세, 찬송가 부르고.

그런 것 해봤어요? 이건 미친 거예요, 그 짓은. 왜 그러냐 하면 0과 1 사이에서 서로가 성립되지 않습니다. 내가 0이라면 타인이 1이고, 내가 1이라면 타인은 0이에요. 이 0과 1이 뭐냐 하면 이 세상의 질서입니다. 이걸 디지털 질서라 하는데 디지털은 0과 1의 이진법으로 돼 있어요. 이 세상의 모든 구조가.

현대물리학 하는 사람은 세상의 모든 것은 수학적 질서로 돼 있다 하고 수학적 질서는 0과 1로 돼 있어요. 0을 ‘없다’로 하고, 1을 ‘있다’로 해서 컴퓨터가 발명된 거예요. 모든 숫자 25, 26을 전부 다 이진법으로 있다, 없다, 0과 1, 그러니까 전기가 연결된다 1, 전기가 끊어진다 0. 그걸 반도체라 하잖아요. 이거는 뭐냐 하면 불연속적인 물체, 사물을 통해서 연속적인 것처럼(이게 중요해요) 위장하게 되는 거예요. 조작하게 되는 겁니다.

흔히 부모가 서울에 있는 자식에게 자주 전화하라 하거든요. ‘자주’가 몇 번이죠? 자주 전화해라. 그래서 아들 나름대로의 자주가 있고, 엄마 나름대로의 자주가 있단 말이죠. 그래서 일주일에 한 번씩 전화했거든요. 엄마가 왜 띄엄띄엄 전화하느냐고 했어요. 자기는 지난 주 전화하고 또 전화했단 말이죠.

그러면 0이 일주일이고 그다음 1이잖아요. 0과 1 할 때 자기가 전화한 1, 전화한 그다음 주 1 이런 1은 뭐냐 하면 연속적인 거예요. 그러나 엄마 보기에는 간격이 너무 길었기 때문에 이걸 뭐로 보느냐? 불연속적으로 보는 겁니다. “그럼 엄마 어떻게 하면 돼?” “매일해야지.” 그럼 매일해보세요. 매일해도 마찬가지에요. 매일해도 오늘 했다 1, 밤에는 전화 안 하지요. 그다음 날 아침에 또 했다 1, 0. 맨 1, 0이에요.

인간은 자아가 있는 이상 불연속적입니다. 이 말은 서로가 서로란 것은 성경말씀에 성립되지 않는 겁니다. 성립될 수가 없어요. 서로 위했다고 했는데 서로 오해하고 있는 거예요. 말을 할 때 생각해서 말을 해줘도 상대방이 뭐라 하느냐 하면, “네가 생각해준 자체가 역겨워. 너는 나한테 생각하지 마. 나는 네가 나한테 하는 제일 편한 것은 나한테 전화 안 하고 연락 안 하는 그게 제일 편해. 그냥 없다고 생각하고 살아줘, 내 앞에서는.” “어떻게 그렇게 독한 말을 나한테 할 수 있느냐?” “이것도 모자라. 너한테는 이것보다 더 독하게 해야 되는데 내 실력이 그것밖에 안 돼서 이것도 내가 많이, 내 기분을 설명하자면 이것도 모자라. 기껏 한다는 게 그거야.”

이게 교회 교인들 사이에 그러한 문제가 사실은 집에 부부사이에 일어났던 대화의 연장입니다. 자기 배우자에게 했던 이야기가 그대로 교회에 노골적으로 다 드러나게 돼 있어요. 그럼 내가 너한테 언제 전화해야 하느냐 하는데 내 기분 좋을 때 전화해. 니 기분 좋을 때는 알아야 될 것 아닙니까.

그러니까 인간들은 불연속성을 억지로 연속성을 만들려하니까 그래야 그 교회에 등록한 사람은 촛대 안 옮기고 천당 간다고 하니까 억지로라도 여기서 교회가 무엇을 장려하느냐 하면 위선과 거짓과 가면을 쓰고 교회 오게 만들었어요. 가면도 너무 쓰면 안 벗겨져요. 내가 누군지를 몰라요. 진짜 나인지 가짜 나인지 조작된 나인지 본인도 헷갈린다니까요.

특히 사기꾼들이 그래요. 사기를 한 번 치게 되면 사기가 나중에 본성이 되어 몸에 배어서 평소 말이 사기의 말이 나와요. 처음에는 위선이 연기가 약해요. 자꾸 해보면 연기가 늘어요. 그래서 오랫동안 교회 있던 장로의 대표기도와 초신자들 기도의 수준차이가 나는 이유가 한쪽은 매뉴얼이 있어요. 들어가는 단어가 있어서 딱딱 정해져서 하면 돼요.

사위와 딸이 오랜만에 고흥까지 내려오니까 그 엄마 되는 권사가 기도하는데 방송에 나왔거든요. 매뉴얼대로 기도해요. 대표적인 메뉴 중에 하나가 머리가 되고 꼬리가 되지 말고 머리가 되게 해달라는. 그게 누구 장모냐 하면 전에 축구선수 이천수 장모에요. 그래서 밥 한 끼 사주고 시킬 것 다 시키고. 고구마 캐는 것부터 해서 자두 따는 것까지 다하고. 새벽부터 운전 다섯 시간해서 고흥에서. 그게 권사입니다. 권사의 원형이에요. 탁 건드리면 매뉴얼에 찬 대화가 나와요. “할렐루야 믿습니다.” 딱 건드리면 다 나오게 돼 있어요.

이게 뭐냐? 틀에 박힌 교회 매뉴얼에 서로 사랑이 넘치고 자비가 넘치는 교회에 오래 다니면 그쪽에서 인정해주는 그 개념들의 언어의 맥락의 인식들을 나중에 다른 사람의 기도 자꾸 듣다보면 거기에 맞장구쳐서 대화에 끼려면 똑같은 매뉴얼대로 해야 그들이 서로 통하거든요. 그래서 위선은 위선자끼리 통하게 돼 있어요. 가면은 가면끼리 통하게 돼 있어요.

자, 그러면 성경에서 이렇게 서로 사랑하고 교제하고 서로 사랑으로 종노릇하고 남의 짐을 지고 그러면 이 말씀은 기초가 기반이 뭐로 돼 있느냐? 여기 42페이지 보면 마태복음 23장 12절,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이렇게 돼 있지요. 자, 예수님의 뜻은 이거에요. 누구를 만나든 서로라는 것은 있을 수가 없다는 거예요. 경쟁관계지 대등한 관계라는 것은 인간세계에는 있을 수가 없어요. 먼저가 된 자가 나중 된다는 순서도 마찬가지고.

마태복음 20장 몇 절을 보시느냐 하면 1절에, “천국은” 이렇게 돼 있지요. 천국은 네모다. 뒤에다 뭘 집어넣느냐 하면 20장 16절을 집어넣으면 딱 맞아요. 천국은 뭐다? 뒤집기다. 16절에 보면 이렇게 돼 있어요.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 자, 이 말씀을 듣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될까요, 되지 않을까요? 나중 된 자가 먼저 되고 먼저 된 자가 나중 되니까 그럼 먼저 되기 위해서 뭘 해야 돼요? 나중 되면 되잖아요.

네가 왜 상석에 앉는가? 말석에 가라 할 때 상석에 앉는 방법은 뭡니까? 말석에 앉으면 상석에서 네가 겸손하구나, 하고 불러내면 어디에 앉을 수 있다? 상석에 앉을 수 있는 그러한 방법 중에 하나가 말석에 앉는 거예요. 천국은 뭐냐 하면 네가 어떤 수작을 부리더라도 뭐다? 뒤집기다. 네가 위하기 위해서 아래로 나오면 그 아래에 있는 그것을 뒤집어서 아래에 있어서 위로 가고 싶다는 그 자체를 위로 만들어버리는 거예요. “어디서 꼼수야, 이게 어디서 꼼수질이야?” 그걸 뒤집어버리는 겁니다.

그러면 천국은 뒤집기다. 이걸 발전시켜보겠습니다. 천국은 둘 이상의 인간관계로 설명한다. 혼자는 안 되고 둘 이상으로 인간관계로 설명되는 것이 천국이다. 제가 얼마 전에 설교한 내용이 이건데요. 내가 만약에 허공에다가 주먹을 치면 뭔가 부딪치는 게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지요. 그런데 어느 날 무심코 툭 쳤는데 뭔가 튕겨져 나왔어요. 얼마나 놀랄 일입니까. 아무것도 없는데 튕겨져 나왔지요.

다니엘서 5장에 벨사살 왕이 파티를 열었는데 거기에 초청도 안 받은 손가락이 나타난 거예요. 손가락이 나타나서 지 마음대로 글 썼다는 것을 그 파티장의 모든 사람은 어디에 종속된다? 이 새로운 예언에 종속되는 미래를 갖게 될 것이라는 거예요. 그러면 이 말을 바꿔서 말하면 천국은 뭐냐? 너희들의 눈에 띠지 않는 제삼의 인물로 그 자리를 친히 주선하셨다 또는 마련하셨다가 되는 겁니다. 어떤 사람이 두 사람이 만났을 때 보이지 않는 제삼의 인물이 주선을 하는 거예요.

이것을 제가 광주강의에서 그랬지요. 세 명이 만든 두 명. 이게 이상하게 보이지만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창세기 읽어보세요. 전부 다 이런 식입니다. 에서와 야곱과 얍복 강 이후에 만났지요. 몇 명입니까? 두 명 만났지요. 야곱은 두 명으로 보지 않습니다. 지난 날 밤에 천사가 와서 나를 쳤다는 사실을 품은 채 야곱이 오기 때문에 야곱은 일인이지만 이인 몫을 갖고 있는 거예요. 그게 증거가 뭐냐? 그날 이후로 야곱이 절고 있기 때문에. 에서가 “어제 밤에 뭔 일 있었어? 왜 절어?” “형님 제가 홀로 혼자 있는 게 아닙니다.”

어떻게 있는가? 나는 서로를 알았습니다. 서로의 자리에 사람과 상대하면 안 되는 이유가 거기에 있어요. 사람 자리에다 주먹을 치면 아무것도 없는데 튕겨져 나오는데 여기에 우리 말고 어떤 분이 계시다면 튕겨져 나오겠지요. 야곱은 형, 에서를 만나기 전에 먼저 자기에게 찾아온 사람이 있었어요. 그게 누구냐 하면 진정 복을 받을 분이요 복을 주실 분이 자기에게 찾아온 거예요.

그러면 야곱이 받은 복은 헛방이었습니다. 물론 쓸데없는 짓은 아니었지요. 야곱은 삼인관계를 생각하지 않고 이인관계를 생각한 거예요. 내가 복이면 형은 저주고, 형이 복 받으면 나는 저주받기 때문에 악착같이 거짓말해서라도 형이 있는 자리를 내가 차지해서 아버지를 속여서라도 이건 형 자리입니다, 라고 속여서 형의 자리인 줄 알고 받는 복을 낚아채서 중간에 내빼든지 해야 된다 이 말이죠. 엄마와 같이 작당을 해서 했지요.

그러면 물어보겠어요. 이삭은 누구한테 속았습니까? 야곱에게 속았지요. 이삭은 이걸 뭐로 받느냐? 야곱에게 속은 게 아니고 내가 하나님한테 속았다고 받아들인 거예요. 그래서 “내가 준 건 무효, 진짜 주인공 왔어. 야곱아 너는 못 됐어. 너 한 번 당해봐라.” 이렇게 하지 않고 그 결과를 흔쾌히 받아버린 거예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한테는 자식을 죽음으로써 아브람을 아브라함 되게 했지요. 자기를 없애버렸지요. 이삭이 자기를 없애는 방법은 자식한테 속임 당하는 거예요. 하나님의 의도적으로 그렇게 한 거예요. 내가 복을 주되 그냥 나는 하나의 주님이 조성한 환경 속에서 네가 주는 것 아니야. 네 안의 약속의 아버지 하나님이 주는 거야, 라는 것을 그걸 체험하면서 이거는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옵소서하나의 천국으로서 언약세계로서 자기한테 덮쳐버린 거예요.

이게 이삭한테는 땡 잡은 거예요. 인간이 안 바뀝니다. 인간이 바뀌려면 하나님이 와서 나란 인간을 뒤집기를 해줘야 돼요. 우리는 지옥 갑니다. 그런데 뒤집기를 해주면 천국 가요. 완전히 뒤집어요. 진짜 현기증 날 정도로 뒤집어야 돼요. 완전히 피가 거꾸로 솟을 정도로 예상 못한 사태로 인하여 내가 예상 못한 내가 예상하지 않은 다른 나로 뒤집으려면 이건 하나님이 관여해야 됩니다.

그걸 보편화시킨 것이 신약의 십자가 사건이에요. 개개인에 주어진 모든 일들은 십자가 사건에서 비롯된 겁니다. 십자가 사건을 이끌지 아니한 것은 악령의 일이고 십자가 사건을 십자가로 다시 와서 뽈대기 쥐고 이리와, 이리와 한 번 봐. 이 사건 봐. 네 모습 한 번 봐. 돌아가신 분이 네 모습의 결정체야. 네가 이분처럼 되는 거야, 라고 우리를 십자가로 데려갔으면 우리는 땡잡은 겁니다. 로또도 이런 로또가 없어요. 진짜 소 잡아야 돼요. 한우 잡아야 돼요. 기분 좋아서. 감사해야 됩니다.

무슨 수로 내가 바뀝니까? 그 고집스러움, 내가 생각해도 내가 안 바뀌어요. 바뀔 방법도 모르겠고 바뀌고 난 뒤에 어떻게 바뀌었는지 미리 예측이 안 돼요. 그런데 바뀌고 보니까 뭘 아느냐 하면 혼자 있지 않고, 그러니까 나 혼자 바꾸려면 안 바뀌는데 나 말고 허공을 쳤는데 뭔가 부딪치는 거예요. 이걸 쉽게 말해서 뭐냐? 맨날 내가 살아 있다 해놓고 아니지요, 아니지요. 내가 살아 있는 게 아니고 나는 죽고 주님이 살아 있지요, 라고 그게 늘 이렇게 매일같이 바뀌고 안 바뀌고는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그건 주님 소관이지만 이게 완전히 바뀌어요.

바뀌는 게 뭐냐? 딴 게 아니에요. 성질이 바뀌는 게 아니고 정말 내가 죽어 있는가, 살아 있는가를 주님과 같이 있으면서 그걸 재정리하는 거예요. 나는 살아 있는 게 아니고 죽어 있는데 어떤 사람을 만난다, 거래처의 손님을 만난다, 주께서 만나게 해줬다. 이걸 짧은 순간이지만 그걸 느끼는 겁니다. 어떤 집에 가서 음식을 먹는데 음식이 잘 나왔다. “아이고, 이 사람들 잘하네.” 아니지, 아니지. 주께서 오늘은 이 메뉴다, 주께서 주신 것. 남들 보면 미친 거죠. 너 누구와 이야기하노? 맨날 이런 식이죠. 그러면 우리는, “넌 몰라도 돼.”

“에서야 너는 몰라도 돼. 나 옛날 야곱 아니야. 옛날 야곱처럼 너한테 이기려고 하다가 완전히 멀리 날 뻔했어. 뒤집어졌어.” 사람이 뒤집어지면 어떻게 됩니까? 속에 있는 주머니에 있는 차 키부터 다 쏟아지겠지요. 자식이고 뭐고 재산이고 부동산이고 펀드고 저금이고 털어버리고 다시 세우지요. 다시 세우면 주께서 용돈 주잖아요. 주께서 용돈 준다, 하면 이게 아직 정신 못 차렸구나. 다시 뒤집어요.

그래서 성도가 느끼는 매일 삶은 뭐냐? 하나 일 해결되잖아요. 꼭 딴 게 탈이 나요. 자식이 취직되잖아요. 그때부터 갑자기 이빨이 아파서 치과에 뽑아야 돼. 이빨 뽑고 난 뒤에 걱정 없다 하면 차 펑크 나고. 그러니까 도대체 주여 저한테 왜 그럽니까? 이리와, 이리와. 또 뒤집자. “주여 제발 한국 16강, 김민재 못 나온답니다. 손흥민이도 지금 얼굴 안 좋고. 황희찬이도 못 나와서 빌드업 되는지 안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딴 건 말고 1:0으로만 이기게 하옵소서.”
“그게 뭐 의미 있느냐? 이 무의미한 인간아.” 네가 살아 있는 게 아니라 내가 살아 있다고 했단 말이죠. 내가 살아 있는데 16강 들어가는 걸 즐기고 있는 나를 살려버린 거예요. 이왕 사는 것 16강 해주고 살면 천국 가도 좀 기쁠 건데, 이러고 있단 말이죠. 그러니까 이리와, 이리와 또 뒤집자. 맨날 뒤집어버리는 거예요. 매일같이 뒤집기를 하는 거예요. 뒤집기하면 안경도 막 떨어지고. “안경 떨어졌습니다.” “누가 눈을 나쁘게 했나? 내가 나쁘게 했잖아. 안경 쓰지 마.” 안경 쓰지 마, 하셨는데 안경 주시네? “잃었다가 얻으니 감사합니다.” “그렇지. 그러니까 내가 범사에 감사하라 했잖아.” 잃어봐야…….

제가 광주강의 끝나고 난 뒤에 김을수 집사님한테 전화했어요. 볼펜 잃어버렸다고. 얼마나 찝찝한지. 그런데 여러분 복음적으로 생각하면 볼펜은 누구 것이냐 하면 내 것도 아니에요. 주님 주신 건데 그래서 볼펜 또 주시겠지. 포기하자, 하고 있었는데 오늘 아침에 문자 왔어요. “볼펜이 성경책 안에 끼워져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메시지를 이렇게 보냈습니다. “고맙습니다. 잃었다가 얻었네요.”

주께서는 이미 주신 십자가 사건 외에는 영생 외에 다른 복은 없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내가 살아버리면 육신으로 살기 때문에 계속 남들 가진 걸 얻고 싶은 거예요. 그러니까 자꾸 잃어버리게 해놓고 얻게 함으로써 놓쳐버린 감사를 주께서는 그걸 마저 채우시는 거예요. 볼펜 하나라도 잃어버렸다 얻으니까 굉장히 감사한 거예요. 진짜 한 턱 쓰고 싶어. 볼펜 값보다 더 쓰고 싶어.

십자가 사건에서 나온 게 ‘서로 ~하라’입니다. 그러면 서로 ~하라는 말씀을 완성하는 것은 우리 인간이 아니에요. 라이벌관계, 시합하고 눈치 보고 질투하고 이런 게 아니고 우릴 어디로 경유하게 하느냐? 십자가 사건을 경유해버리면 갈라디아서 2장 20절, 내가 살아 있는 게 아니라 나는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살아 있는 거예요. 그럼 내가 죽고 내가 살아 있으면 이건 사적으로 죽고 사적으로 부활한 게 아니냐? 아닙니다. 내가 살아 있는 건 우리가 살아 있는 거예요. 나 말고 나와 똑같은 자들이 그때부터 눈에 띠기 시작하는 거예요.

그러면 뭐냐? 이것 이야기하고 싶은 거예요. 두 번째 시간은 봉사입니다. 섬김이에요. 천국은 뭐냐? 섬기는 자들밖에 없어요. 섬김을 받는 것은 누구냐? 우리에게 섬기도록 거꾸로 뒤집어씌운 주님만 섬기는 데에요. 남 섬긴다고 하지 마세요. 그 사람이 복음도 없는데 섬긴다? 그거는 그 사람한테 아부하는 거예요.

목사들이 목회하면서 사기를 치는 방법이 바로 목사들이 자진해서 교인을 섬긴다는 데 있어요. 실제로 인간들이 속아 넘어가도록 섬겨요. 부자들은 안 찾아가고 어려운 사람들 찾아가서 김장 해주고 하는데 요새 어려운 사람들 김장 짜게 하면 안 먹습니다. 목사가 친히 어려운 사람 한다고 전도사가 놓친 것, 구역의 어려운 사람, 홀로 사는 사람 라면 주면 그 노인네 뭐라 하는지 알아요? 무슨 라면인지 묻습니다. 신라면이라 하면 전에 가져다준 것과 똑같은 것 가져왔다고 통깨라면인가 신상 달라 해요.

인간은 돈 줘서 된 인간 없습니다. 돈 주고 난 뒤에 버리지 않은 인간이 없어요. 목사가 할 수 있는 사랑은 냉혹한 복음, 십자가에서 자기를 부인하라는 복음 외에는 더 큰 사랑은 없어요. 여러분도 마찬가지에요. 자식한테 뭘 남겨줄 것도 없지만 남겨줄 생각하지 말고 네가 누굴 만나든지 봉사하는 자세로 살아야 돼요. 섬기는 자세로 살아야 돼요.

나 죽어도 너한테 안 진다, 이러면 아무리 겸손한 체해도 위선 기술이 기능이 발달할 뿐이지요. 절대로 섬기는 게 아닙니다. 언젠가는 그 사람이 눈치 채요. 저 사람이 자기 의를 키우기 위해서 섬기는지 아니면 지 죄인인 것을 알아서 주께서 나를 붙여줬다고 생각해서 주님 대하듯이 그렇게 섬기는지를 상대방이 성령을 안 받으면 모르는데 성령 받은 순간 목사가 나를 사랑한 게 아니고 목사가 나 어렵다고 봉사하는 것은 지 목회 성공하려하는구나. 지금 주의 사자 코스프레하는 거구나. 목자 코스프레하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절대로 속아 넘어가면 안 됩니다. 여기 성경본문 나오잖아요. 서로 나누어주고, 히브리서 13장 16절. 서로 격려하고, 서로 기도하고, 다정하기. 서로 기도해서 나온 게 뭐냐? 중보기도 아닙니까. 시끄러워. 중보기도는 조용하면 안 되는가, 시끄럽게 떠들어야 중보기돈가? 서로 남의 짐을 져주고. 현대자본주의에서 짐은 뭐예요? 돈 아닙니까. 돈 얼마 필요해, 얼마면 되겠어?

서로 위로하고, 이것 진짜 구역질나는 거예요. “집사님, 위로합니다. 자제분이 그렇게 아파서 어떻게 합니까. 어서 완쾌하기를…….” “너나 잘하세요. 소금 뿌려라. 지금 지 아들 이번에 사법고시 합격했다고 자랑질하려고 집집마다 돌아다니고. 나가, 나가. 그래 우리 아들 백수다, 됐냐?” 만나면 좋은 친구가 아닙니다. 그건 엠비씨고요. 만나면 라이벌이고 경쟁이고 비교입니다. 이 본성을 숨길 수 없어요. 그날 밤에 주님께서 뒤집어줘야. 창세기 33장 그 구절 봅시다. 야곱이 어떻게 나왔는지.

그 행동이 얼마나 과도한지 보세요. 3절에 보니까 야곱이 먼저 선방 날리죠. 에서가 사백 명 데리고 나옵니다. 동생 잡아 죽이려고 왔다는 소문이 들렸어요. 그전에 32장에서. 그러니까 야곱이 소문 듣고 귀중품 빼돌리고 자기 아들들 빼돌리고 단독으로 형과 마주 서겠다고 작심 먹고 배수진을 친 겁니다.

그런데 밤중에 전쟁을 했지요. 누구와 전쟁을 했습니까? 에서와 전쟁했습니까? 자기에게 축복을 줬다고 여겼던 하나님과 전쟁한 거죠. 하나님과 싸웠다는 말은 자기는 하나님 반대편에 있고 자기는 저주 편에 서있으니까 주님과 대적이 된 거예요. 같은 복을 받은 사람은 안 싸우지요. 다른 편에 다른 영역에 속했기 때문에 싸움이 성립되는 거예요. 내가 전혀 복 주시는 그 복의 나라에 서있지 않다는 티가 나버린 거예요.

혼자 노력한 거예요. 애를 쓴 거예요. 복 받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내가 백날 해야 그 저주의 경계선을 내가 넘어선 적이 없다는 사실을 발견한 겁니다. 그러니까 야곱이 본인이 죽어도 여한이 없지요. 사나죽으나 저주인데 뭐. 복 안 받고 죽으면 끝나는 거예요. 그래서 결사적으로 매달린 거예요. “지금 이래 가시면 안 되잖아요. 천사님, 하나님. 복 안 주고 가면 안 되잖아요.”

그래서 호세아 보면 어떻습니까? 결사적으로 매달린 거예요. 그런데 사실은 하나님께서 야곱이 매달리도록 은근히 발을 내밀은 거예요. 그 때문에 밤새도록 안 떠난 겁니다. 뭐냐 하면 하나님 자신 속에 야곱의 속성을 내가 언젠가는 그걸 담아서 언약 완성 차원에서 이 땅에 찾아올 때가 있다는 것을 야곱에게 미리 보여준 거예요. 기도하면 응답이 되도록. 그 기도한 자가 바로 예수님이잖아요.

예수님의 야곱의 속성을 흡수통합해서 야곱의 하나님으로 오신 분이 예수님이에요. 야곱은 나중에 오실 예수님을 미리 하나의 예시로서 가담된 겁니다. 야곱은 나중에 요셉을 통해서 알게 돼요. 이게 내가 애를 탔지만 사실 주님께서 이미 설정한 연출한 것이라는 사실을 알아요. 그래서 야곱이 밤새도록 하니까 하나님께서 응답을 해주고 축복을 해줘버려요. 대신 야곱은 없어요. 이제 야곱은 죽었습니다. 다른 이름으로 야곱이 행사합니다. 그 이름이 뭐냐? 하나님 자신의 이름이에요. 하나님의 이름은 하나님 자신의 기능을 포함하고 있어요. 이 기능에 따라서 하나님이 이 땅에 오신다는 뜻입니다. 이스라엘.

그래서 야곱이 거기 왔고, 맡기고 오니까 여종과 자식들 앞에 두고 레아 자식들은 뒤에 두고 자기는 몸을 굽혀 절하는데 몇 번 절합니까? 일곱 번이죠. 그런데 여러분들이 그걸 보시기 전에 이걸 보시면서 뭐도 알아야 되느냐? 창세기 27장 41절을 보세요. 누가 크게 읽어보세요. “그 아비가 야곱에게 축복한 그 축복을 인하여 에서가 야곱을 미워하여 심중에 이르기를 아버지를 곡할 때가 가까왔은즉 내가 내 아우 야곱을 죽이리라”

자, 야곱에 대해서 어떤 태도를 갖고 있습니까? 죽이리라. 이것이 야곱이 형을 만났던 마지막 야곱이 알게 되었던 형의 최후의 마음가짐이었어요. 그러니까 야곱이 에서를 만날 때는 필히 어떻게 한다? 나를 죽이려고 달려들지요. 그 마음을 변할 리가 있어요? 안 변했겠지요. 야곱을 죽인다 이 말이죠. 그럴 때 에서가 야곱을 죽인다 할 때 야곱은 이미 죽은 자지요. 죽은 자로서 하나님께서 만나게 해줬던 에서에 대해서 야곱과 함께 하나님의 심정에서는 그 에서에 대해서 어떤 태도를 보이는 것이 하나님이 야곱을 대했던 태도와 동일하냐 이 말이죠.

하나님이 야곱을 섬기는 그 태도, 봐준 거죠. 하나님이 야곱 하나를 섬기는 태도. 그래서 예수님도 내가 너희를 섬김을 받으러 온 게 아니고 섬기려 한다. 어디까지 섬기는가? 죽음을 넘어설 때까지 넣어주는 섬김. 이거는 스스로 죽음을 넘어설 수 없습니다. 주님의 섬김이 없으면 우리는 영생도 없습니다. 영생을 쪼개볼 때 안에는 백 퍼센트 주님이 우리를 종노릇했고 우리의 희생물이 되었다는 그것만 담겨있어야 돼요.

어떤 경우라도 그 이야기를 섞여서 할 때 성도고 그런 사람한테는 봉사할 가치가 있습니다. 그 외는 봉사하지 마세요. 상대방 버립니다. 지가 대단한 줄 알고 있어요. 요 정신이 그대로 에베소서 5장에 나옵니다. 아내 된 자는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교회가 주님에게 복종하듯 하라. 생속 여자한테는 있을 수 없어요. 저거 죽여 버릴까? 니가 내 인생 조져 놨단 말이죠.

내가 무엇에 홀려서 세상에 삼십삼 일 만에 연애해서 결혼하고 또 이혼하고 그다음에 삼십사 일 만에 결혼하고 또 이혼하고 그런 사람도 있어요. 방은희. 오은영 박사 상담할 때 나왔어요. 오은영 박사 기가 차서, “한 달 동안 무슨 생각했습니까?” 이 남자 있으면 좀 외롭지 않을까 싶어 그냥 해버렸다는 거예요. 그런데 이것이 의외로 한 달, 일 년 지나도 마찬가지에요. 내 중심으로 생각하는 거예요. 섬김? 미쳤어요. 섬김 아닙니다. 저 남자는 내 외로움을 달래줄 용도만 끝나면 된다.

야곱이 혼자 있으면 마찬가지에요. 그저 남 속이는데 급급해요. 평소에 자기를 속이듯이 남 속이는 것이 인간에게 할 수 있는 게 그 외에는 다른 게 없어요. 그 속이는 것 중 하나가 기도 아닙니까. 그런데 야곱에게는 종교고 이런 게 아니고 실제로 맞닥뜨려서 허벅지 이쪽이 나갔다니까요. 절었다니까요, 실제로. 기도를 응답받았다, 이게 아니고 하나님이 마음이 환했어요. 마음이 환하고 편하고 그게 아니고 실제로 허공을 쳤는데 허공에서 누가 왔단 말이죠.

남들은 모르지요. 밤중이니까. 남들은 모르지요. 홀연히 거기 있습니까? 오겡끼 데스까, 하고 아침 되니 가버렸어요. 없어요. 어떤 분 저기 있었는데? 아무도 안 믿습니다. 이런 실정이 이런 형편이 오늘날 성도의 형편이에요. 주님 찾아와서 십자가 사건 알려줘서 우리가 저주받아야 마땅한 사람이다. 누가 이야기해줬는데요? 어디 갔지? 안 보여. 누가 이야기해줬는데 없어요.

우리가 합리적 논리적으로 설명할 길이 없어요. 다만 이웃이 당신이 왔을 때 똑같이 죄인인 것을 인정할 때 이상하게 당신에 대해서는 대가 없이 섬겨야 되겠다는 생각이 들더라. 절대로 당신이 고마워해서는 안 되지요. 여러분 이게 안 돼요. 남을 용서한다는 게 말이 안 돼요. 우리가 무슨 자격으로 용서합니까. 오히려 내 용서를 받아주는 자가 고맙지요.

주님이 우리에게 섬기듯이 주님의 요소가 들어오게 되면 우리는 그때부터 주께서 맺어준 서로에 해당되는 형제들에 대해서 서로 용서하고 서로 사랑하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이것이 시도가 아니고 결과라니까, 결과. 이걸 여러분들이 참 어렵지만 알아야 돼요. 이렇게 섬겨야지. 아니에요. 결과를 돌아보니까 결과를 통해서 여기서 뭐가 발견되는가? 십자가를 경유하게 된 사실을 발견해요. 십자가를 경유하면 우리는 뭐가 돼요? 의인입니까. 죄인입니까? 죄인 되지요.

내가 당신을 만나서 비로소 죄인인 것을 알게 된 것은 주께서 당신 만나게 주선을 해서 주께서 희생하셔서 주님이 처음 되신 분이 섬기는 자, 그러니까 그게 천국이란 사실을 우리 인생 내부에 그걸 새겨주신 것, 말씀이 우리 삶이 되도록 새겨주신 분에게 감사합니다. 당신을 만나게 해준 것에 대해서 감사합니다. 이걸 더 줄여서 당신과 만남에 난 당신에게 너무나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상대방은 또 오해할 거죠. “내가 그렇게 괜찮은 사람이었어?” 꿈 깨.

거기서 나오는 유명한 이선희가 불렀던 노래, <그 중에 그대를 만나> 여러분 들어보세요. 그 많은 사람 중에 어떻게 기적 같이 당신을 만났다. 당신도 그렇게 생각하지요, 하는 가사에 나오거든요.

그렇게 대단한 운명까진
바란 적 없다 생각했는데
그대 하나 떠나간 내 하룬 이제
운명이 아님 채울 수 없소
별처럼 수많은 사람들
그 중에 그대를 만나
꿈을 꾸듯 서롤 알아보고
주는 것만으로 벅찼던
내가 또 사랑을 받고
그 모든 건 기적이었음을
그렇게 어른이 되었다고
자신한 내가 어제 같은데
그대라는 인연을 놓지 못하는
내 모습 어린아이가 됐소
별처럼 수많은 사람들
그 중에 그대를 만나
꿈을 꾸듯 서롤 알아보고
주는 것만으로 벅찼던
내가 또 사랑을 받고
그 모든 건 기적이었음을
나를 꽃처럼 불러주던
그대 입술에 핀 내 이름
이제 수많은 이름들
그 중에 하나 되고
오 그대의 이유였던
나의 모든 것도 그저 그렇게
별처럼 수많은 사람들
그 중에 서로를 만나
사랑하고 다시 멀어지고
억겁의 시간이 지나도
어쩌면 또다시 만나
우리 사랑 운명이었다면
내가 너의 기적이었다면


그런데 섬겼는데, 아직까지 천국 이야기 안 끝났습니다. 섬겼는데 그때부터 상대방이 적당히 나오는 거예요. 너 나 아니었으면 지옥 갈 뻔했어, 이런 식으로. 분명히 일곱 번 절했잖아요. 그런데 에서를 보세요. 에서가 칼 들고 왔습니까? 그를 안고 목을 어긋맞고 피차 울지요. 누가 에서의 마음을 이렇게 변하게 했습니까? 주님이 변화시켰지요.

주님이 변화시켰는데 세상의 교회나 성도 말고 교우들 만나 보면 그다음부터는 내가 잘나서 내가 너한테 복음 전했으니 니가 섬기는 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이래 나온단 말이죠. 어긋맞고 우는 게 아니고 한쪽은 웃고 있어요. 나는 울고 있는데. 이건 무슨 시추에이션입니까? “여보, 당신 같은 남편 만나서 내가 너무 감사해요.” 이래 나오면 지도 같이 울어야지.

“왜 그런 소릴 하느냐? 내가 돈 못 벌어서 한 달에 칠백팔십만 원인가 세상에 그게 돈이냐? 내가 밤잠을 못 자. 미안해. 내년엔 천만 원 돌파할게.” 이래 나와야 될 건데, “이번엔 팥밥 해줘. 이번엔 운동화 깨끗하게 닦아줘.” “뭐 이런 게 다 있어. 내가 길을 잘못 들였나?” 시건방지게 나오는 거예요. “아아, 아니었네. 성도인 줄 알았더니만 혹시나 했더니 역시나.”

그래서 나중에 야곱이 자기의 일부를 줍니다. 안 받지요. 그리고 각자 갈 길을 갑니다. 에서가 구원 받았겠어요, 지옥 갔습니까? 지옥 갔어요. 다만 야곱언약이라는 설치된 무대에서 야곱은 자기의 조그마한 실내축구게임의 인형 역할을 한 거죠. 에서는 그냥 일본 팀이고 야곱은 승리한 어제 이겼던 코스타리카 팀이 된 거예요. 그러니까 연출을 됐는데 갈 길은 달랐다.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사람을 구원할 생각하지 마세요. 전도할 생각하지 마세요. 이거는 주제넘은 짓이에요. 왜냐하면 이미 숫자는 확정됐습니다. 우리가 저 사람 구원 안 받는다고 하등 애쓸 이유가 없어요. 하나님께선 자기 택한 백성을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고 반드시 다 살립니다.

다만 매순간 우리를 시키는 이유가 그리스도를 우리 마음속에서 주님은 이렇게 해서 자기가 우리를 섬김으로써 희생물이 되심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있을 수 없는 뒤집기(오늘 강의제목)가 되었음을 매순간 어떤 계기를 줄 때 그 순간순간마다 복음의 증인되라고 우리에게 아직까지 육신의 생활하게 하시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 사는 이유, 목적 우리한테 없었고 천국이 이런 곳이란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친히 사용하시는 주님의 가마꾼으로 이렇게 활용해주시는 것에 모든 일에 감사하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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