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강의

11/27설교보충

아빠와 함께 2022. 11. 30. 11:13

대전-지난설교 보충 20221128

어제 한 낮 설교, 오후 설교 요약해드리겠습니다. 시간이 남았으니까. 오후 설교부터 요약해드리면 거기에 ‘유령’이란 말을 제가 언급했습니다. 그 유령을 언급한 이유가, 혼돈의 세계에서는 인간은 유령이라는 역할을 담당해야 돼요. 우리 인간들이 아는 유령은 좀 자유롭잖아요. 유령인데도 고집 있고, 유령인데도 자기 의지 있고, 남이 하자 하면 억지로는 안 하겠다고 버티는 유령.

그런데 실내축구게임 있지요. 그 게임에 달린 조그마한 선수 모양의 목각인형들, 그 인형과 실내축구게임을 실시하는 어떤 사람의 차이점이 어디 있느냐? 인간이 게임하면서 게임자가 조종하게 되면 목각인형들이 부지런히 움직여요. 움직이는데 의미도 모르고 목적도 모르고 그냥 공이 오면 주인 조종하는 대로 발로 찰 수 있고 또는 헛발질할 수도 있고. 이렇게 움직일 때 그런 비유를 들면 사람들은 굉장히 격분하지요. 우리가 로봇이냐?

그런데 인간은 로봇보다 더 로봇이에요. 기계보다 더 기계입니다. 왜냐하면 기계는 우리가 봐도 기계인 줄 알아요. 아무 감정도 없고 시키는 대로 하는 줄 아는데 인간은 감정 다 있고, 의지 다 있고, 고집 다 있고, 자기계획, 의식, 기대 다 있는데 주님 보시기에는 로봇 같은 기계보다 더한 기계가 되는 겁니다.

이걸 어제 설교 때 뭐라고 했느냐 하면 ‘질서’라고 이야기한 거예요. 인간은 나름대로 질서를 갖는데 더 큰 질서, 그 질서에 두 가지 질서가 있지요. 하나는 여자의 후손. 여자의 후손과 또 하는 뱀의 후손입니다. 여자의 후손이 등장할 때는 여기 예수님 등장하고, 두 질서를 갈라디아서 4장에선 두 언약이라고 돼 있습니다. 이거 이야기하면 엄청 어려워져요. 두 언약, 하갈 계통과 사라 계통.

하갈 계통은 율법의 저촉을 받은 계통. 율법은 그냥 오는 게 아닙니다. 반드시 저주를 가지고 오지요. 사라 계통은 없어요. 이게 굉장히 중요한 겁니다. 그러면 여자의 후손은 인간에게는 없어요. 인간들은 다 어디에 몰려 있느냐 하면 뱀의 후손에 다 몰려 있습니다. 조상 하나가 죄를 진 게 아니고, 죄에 삼킴을 당한 거예요. 인간이 욕심을 내는 게 아니고 욕심에 삼킴을 당한 겁니다.

인간이 욕망을 가진 게 아니고 욕망에 삼킴을 당한 거예요. 욕망에 삼킴을 당하면 합리적 이성이, 이게 소용이 없어요. 백화점에서 저것 갖고 싶다고 하면 가져야 돼요. 안 봤으면 몰라도 본 이상은 가져야 돼요. 빚을 내서라도 저걸 사고 싶으면 하루하루 일과가 서먹해지고 살맛이 없어요. 그걸 차지하기 전에. 남자들은 뭐냐? 차. 자기가 원하는 자동차 얻기 전에는 남자는 핏기가 없어지고 퇴근할 때 힘이 쫙 빠져요. “뭐 고민 있어요?” “별로 없어. 열심히 돈 모으는 중이지.” 페라리, 이런 것. 월부로, 할부로 이렇게 나오지요. 갖고 싶은 거예요.

인간의 욕망은 인간보다 더 셉니다. 그래서 인간의 질서가 무용지물이에요. 나의 꿈과 계획이 무용지물이 되는 겁니다.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에서 여자의 후손은 뱀의 후손 입장에서 없어요. 없는 쪽입니다. 그러면 인간들이 예상 못한 인간의 욕망의 입장에서 등장하지 말아야 할 낯선 존재로서 의도적으로 주님이 찾아오죠. 그러니까 예수님에 대해서 분석하고 평가하고 파악해서 예수 너도 우리 공동체의 일원이야, 라고 잡고 싶은데 주님이 자꾸 빠져나가요. 오늘날 우리가 예수 믿고 싶어도 예수님이 자꾸 빠져나가요.

우리가 예수 믿는다는 것은 낮 설교에 의하면 예수 믿는 게 노림수가 있다고요. 이게 뭐냐 하면 자아 정체성을 확정하고 확립하고 미래까지 보장하는 데 있어서 하나님이고 예수님이고 필요하다는 거예요. 이건 어디서 나왔는가? 이거는 자기 출신 가정에서 출발했거든요. 이걸 가지고 무슨 정체성? 육신의 정체성이라 했지요. 정체성의 전이.

전이라 하는 것은 모습이 바뀌면서 이동하는 걸 전이라 합니다. 중간 성격을 갖고 있어요. 정체성을 변이시키는 거예요. 뭐로 변이시키는가? 천사로 변이시키는 겁니다. 이게 인간의 능력으로 됩니까? 신앙은 인간의 능력으로 안 돼요. 인간의정체성 자체를 무효화시키고 새로운 주님의 정체성으로 입기 위해서는 중간에 천사라는 중성적 존재로 변이되어서 전이돼야 돼요. 중간에 변형되어 전이되는 그러한 과정을 거쳐야 돼요.

그러면 인간이 자기 정체성으로 확립하는 것은 뭐냐 하면 예수라는 분은 지금 뱀의 후손이 설정한 질서 있잖아요. 이 질서에다 자꾸 집어넣으려 하는 거예요. 예수님을 우리 가정의 일부로 집어넣으려고 하는 거예요. 내 가정이 해체되는 게 아니고, 내 자아 정체성이 해체되는 게 아니고 한 편 먹으려고 하는 겁니다. 내가 기도하면 따박따박 응답해주시고, 내 소원 이야기하면 뭐 필요한 것 없느냐, 뭘 도와줄까, 이렇게 나를 못 도와줘서 안달 난 분, 사람들은 그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사랑이라고 해요. 사랑의 하나님이라고 하는데…….

인간이 말하는 사랑은 두 자로 이겁니다. 네 자로 하면 자기집착이에요. 이걸 사랑이라 해요. “너, 나 사랑해?” 이 말은 뭐냐? 내가 너한테 집착하는 것을 동의해서 협조할 용의 있냐는 그런 뜻입니다. 그걸 간단하게 줄이면 사랑해, 라고 하지만. “나는 나를 포기할 생각은 전혀 없어. 그러니까 내 고집에 네가 같이 끼어들 용의가 없느냐?” “주여, 사랑합니다.” 같은 말로, “믿습니다. 소망합니다.” 그런 뜻이란 말이죠.

정체성의 전이, 변화에 있어서 자기 정체성에 뭐가 문제냐 하면 여기에 권력이 작용하고 있는 거예요. 이 권력을 뭐라고 하느냐? 누구의 권력이냐 하면 이게 아버지의 권력이에요. 어제 낮 설교하면서 새로운 내용들이 막 나오지요. 저도 어쩔 수 없어요. 할 수 없습니다. 아버지의 권력이 나오는데 주님께서 물으시는 거죠. 우리 볼떼기 쥐고 물으시죠. “너거 아버지 뭐하시노?” 둘 중에 어느 쪽이냔 말이죠. 여자의 후손인가, 뱀의 후손인가?

뱀의 후손은 권력을 갖고 있습니다. 이게 어디 나오느냐 하면 마태복음 4장에 예수님께서 마귀한테 시험 당할 때 마귀가 뭘 갖고 있어요. 마귀가 세상 권력과 영광을 갖고 있는 입장에서 흥정을 하고 있는 겁니다. 예수님에게. “내 품에 들어와라. 모든 사람 다 들어왔어.” 안 들어온 사람 없지요. 그러면 우리 같이 눈에 보이는 권력의 세계, 힘의 체제에 같이 살자. 이 시험이거든요. 마귀의 시험이에요.

이런 시험이 매일같이 우리 인간에게 계속해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우리 자신에게 우리가 우리한테 속삭이고 있는 거예요. 오늘도 멀쩡하게 살기, 이런 것. 오늘도 내가 가진 힘 고수하고 그걸 더 끌어 모으는데 매진하기. 권력이에요, 힘. 그래서 <재벌집 막내아들>이란 드라마 대사 하나 인용했잖아요. 한도제철 인수하는 과정, 봐야 한도제철이 나오는지 알지.

이게 뱀이 후손이며 그것에 인간은 굉장히 실효성 갖습니다. 거기서 낯설지 않아요. 마귀 말이 낯설지 않아요. 낯설지 않는 그 말에 우리가 포위돼 있기 때문에 복음에 대해선 매순간 낯설어요. 무슨 뜻인지 모르겠고, 제가 아까 신명기 4장 보시면서 여러분에게 무슨 뜻인지 생각해보라 했지요. 이걸 보면서 하나님께서 이런 일을 하겠다는 감은 잡는데 그래서 뭐? 그래서 우리 보고 어쩌라고?

그다음부터 맥락이 다 끊어져요. 탁탁 끊어져 있어요. 고무줄 냉동시키면 어떻게 됩니까? 고무줄 다 끊어지지요. 성경의 말과 우리가 친근했던 말 사이에 연결이 하나도 안 됩니다. 다 끊어져있습니다. 끊어져있음으로써 정체성 전이작업은 일방적으로 주님의 작업이죠. 어떻게 하느냐 하면 바로 십자가에서 나온 정체성입니다. 이것도 설명을 제가 거의 안 했어요. 이런 것 설명하면 너무 길어져요.

십자가에서 나온 정체성을 설교 끝부분에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성령의 소욕과 육신의 소욕으로 나뉘어서 서로 다툰다는 거예요. 성령의 소욕에 네 안에서 서로 다툰다는 말은 성령을 안 받은 사람한테는 자기와 무관한 남의 일이 돼버려요. 상관없는 일이 돼버립니다. 그리고 다툰다는 말을 생각해봐요. 거기에 뭐가 있다는 거예요. 하나님 보시기에 비로소 눈에 띠는 거죠. 사람이 아니고 육신이에요.

성령은 예수님의 영입니다. 여자의 후손의 영이죠. 여자의 후손이라는 질서가 오기 때문에 이쪽에선 뭐냐 하면 개인의 정체성 같은 건 없고 집단 권력에 속해 있는 개인이죠. 자, 정리가 됩니다. 이미 악마가 만들어준 공동체가 있지요. 우리죠. 우리 안의 우리는 뭐냐? 악마에 의해서 너는 나라고 그러한 양육을 받은 거예요. ‘나’가 있었던 게 아니고 주님 보시기에는 나보다 권력이 공동체라는 악마의 다수의 권력의 일부가 나가 되는데 악마는 이걸 감춰버리고 네가 최종적이라고 알려주는 거예요.

그래서 주님께서 정체성을 전이, 변이시킬 때 어떻게 하느냐 하면 새로운 우리를 마련해서 그 우리의 일부로서 자기 백성을 십자가 정체성은 뭐냐 하면 부활시켜버리는 거예요. 부활이 되려면 반드시 예수님이 거쳤던 경로, 과정을 거쳐야 부활이 돼요. 예수님 죽을 때 죽은 척했습니까, 몸이 아팠는데 부활됐습니까? 완전히 죽었지요. 그걸 인간들이 확인했고요. 법의학자가 가서 완전히 죽은 것 맞습니다, 이렇게 했고요. 완전히 죽었어요. 법의학자 있는 게 아니고 로마 군병이 창으로 찔러놓고 뼈를 꺾어볼까 했는데 “이미 갔어. 꺾을 필요 없어.” 이렇게 해서 법의학적으로 이미 사망으로 처리된 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악마가 다스리는 인간 질서에서의 사망의 개념이 인간들끼리는 통용되고 거기서 심각하게 적용되지만 새로운 질서에서는 인간이 제일 심각하게 여기는 사망, 죽음 있잖아요. 죽음조차도 새로운 질서 앞에서는 문제가 안 되는 거예요. 바로 그 자유를 성령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시는 겁니다. 죽어도 살겠고. 이미 요한복음 11장에서 주께서 언급했는데 마르다, 마리아는 무슨 뜻인지 모르지요.

새로운 우리가 등장해요. 그러면 여기 성령 안 받고 교회 온 사람들, 성령 안 받고 복음 공부하고 복음 안다고 여기는 사람들, 여러분한테는 없지요. 없어야 되겠고. 이런 사람은 뭐냐 하면 복음을 좋아하고 다 아멘하고 싶은데 문제는 천국 가서 즐기는 나가 어떤 나냐에 대해선 아직도 뭔가 그걸 변별이라 해요. 뭔가 시원치가 않아요, 께름칙하고.

천국 가는 것 다 좋은데 주와 함께 영원히 살자. 얼싸안고 우리는 다 에브리바디 다 하나다, 다 좋은데 백날 집에 오면 도로 뭐로 돌아옵니까? “그럼 나는요? 나는 천국 가서 내 토지, 내 부동산, 내 역할, 내가 차지하는 지금의 나는 어디 있습니까?”라고 하지요. 성령 안 받은 사람은 이렇게 하지요.

그런데 이런 버릇은 분명히 악마가 보기에는 인간을 그렇게 만들어놓은 거예요. 길들여놓은 거예요. 악마의 욕망에 놀아나고 악마 앞에서 나라 하는 것은 실내축구게임처럼 악마의 손에 놀아나는 존재이면서 그 인형 하나가 작대기 하나가 나라고 계속 우기는 거예요. 그 자아가. 그걸 육신적 자아, 뱀의 후손에서 나온 자아. 이 자아를 본인이 털어버리질 못하는 겁니다. 심지어 성령 받아도 마찬가지에요.

그래서 부활의 새로운 정체성, 예수님이 죽었다가 부활한 그 부활의 정체성은 성령의 욕구, 성령의 의지로 다가오잖아요. 그럼 성령의 의지가 뭐냐 하면 우리가 털어버리지 못한 것을 성령께서 싸우고 다투면서 매일같이 털어버리게 해주시는 게 바로 성령의 소욕과 육신의 소욕이에요.

매일같이 한 번도 쉬어가는 법 없이 끊임없이 너에 대해서는 네가 구원 받는데 보탤 게 아무것도 없다. 그리고 주인공이 네가 아니다. 너는 의의 종이지, 하나의 직원이고 그리고 남편의 신부지, 네가 걱정하고 염려할 단독적인 나라는 개념은 이제 잊어줘, 하면 우린 뭐라 합니까? “역시 잊지 못한 게 죄였습니다.” 그것 그날 저녁까지 에요. 아침 되면 또 다시 시작되고 아침 되면 성령이 그럴 줄 알았지, 하고 또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성도라 할지라도 육신이 있는 이상 계속 남아있는 것이 뭐냐? 어제 낮 설교에 했지만 내가 예수 믿고 평생 40~50년 믿었는데 도대체 내 인생 내 뜻대로 된 게 없다. 자꾸 돌아보면 이런 생각 들거든요. 그걸 오후 설교에서 무슨 형 인간? 과거형 인간. 어떻게 살았냐? 그때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축하드립니다.

바로 그게 나는 주님의 공로만 돌리고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라는 말을 하는 것 하고 그건 진심이 아니에요. 진짜 진심은 자기 보고 탄식하고 절망하는 거예요. “아이고, 평생 나 뭐했노?” 박수. 그게 바로 성령의 작품이에요. 성령의 솜씨입니다. 그런 마음으로 나중에 죽어서 주님과 합류하게 되면 나 평생 뭐했노, 이것이 영원토록 계속 되면서 우리의 강의는 이걸로 끝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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