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오후예배설교 보충 20221226
오후설교 초반에 성전이야기 나옵니다. 이사야에게 준 말씀과 예레미야에게 준 말씀이 똑같은 원칙을 지니는 데 차이점은 예레미야가 십자가에 좀 더 가까이 간다는 거예요. 그러면 출발은 뭐냐? 이사야부터. 도착지점은? 주님의 십자가. 그 중간지점에 예레미야가 있어요. 이사야 취지를 살리면서 더욱더 깊이 있는 십자가 내용에 감정에 가까이 근접해야 되지요.
그러면 이사야와 예레미야의 차이점은 예레미야가 보다 더 가깝기 때문에 성전이 불타되 구체적으로 불타게 되는 겁니다. 이사야는 그냥 그루터기였어요. 십분의 일도 남기지 말고. 전체 다 날아갔다는 사실을 어디에 남겨야 되느냐? 그루터기에 남겨야 돼요. 이 말은 뭐냐 하면 이스라엘은, “우리가 밥 먹고 살다고 못 살게 되었다. 우리는 어떻게 사나” 생계와 생존 문제를 걱정하는 데 예레미야, 이사야 계시의 초점은 뭐냐 하면, “너거 성전 어떻게 했지, 성전에 무슨 일이 있었지?” 이렇게 되는 거예요.
지하철 입구에 보면 사람들이 번잡하잖아요. 사람들이 왔다 갔다 하는데 휴대폰 잃어버린 당사자는 혹시 휴대폰 액정이 깨질까봐 옷을 던져놓고 옷 안에 있는 휴대폰만 생각하는 거예요. 다른 사람들은 덮어놓은 옷 안에 뭐가 있는지 모르지요. 그런데 잃어버린 사람은 사람들이 약간 한가한 틈을 타서 얼른 옷도 쥐고 그 안의 휴대폰도 챙기려하듯이 그 휴대폰 위치, 그것이 바로 성전을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자신의 뜻을 나타내지요.
날아가 버리고 불탔다. 성전을 깨졌다. 그럼 성전은 뭐냐? 하나님이 자기 백성과 함께 있고 싶다가 성전이에요.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함께 있는 것. 아무리 이야기해도 사람들은 이걸 거부해요. 죄와 함께 있고 싶지 주님과 함께 하고 싶지 않잖아요. 심지어 개와 함께 있겠다는 것은 결국 개도 버리겠다. 여차하면 눈멀고 하면 개도 버리겠다는 뜻이에요. “듣지 마라. 너는 안 들어도 된다.” 개 눈멀면 언제든지 갖다 버릴 거예요. 애완견 귀찮으면.
그런데 주께서 함께 하신 특징은 뭐냐 하면 네가 나 하나님을 버릴 처지가 아니라 내가 언제든지 너를 버릴 입장이란 거죠. 버릴 때 그냥 버리면 이게 원상이 돼버려요. 처음에 함께 있었다는 사실도 날아가 버리잖아요. 그럼 어떻게 하느냐? 버릴 때 네가 버리게 된 이유가 언약 조건의 증명이고 구체화에요. 언약대로 살지 않으면 저주받는다, 우상 섬기면 저주받는다. 이 언약 자체는 생생하게 언제 어디서나 그것은 포기되지 않고 작열한다. 이걸 증명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이용한 거예요.
그러면 그다음 이야기가 이스라엘을 하나님은 왜 버렸느냐? 이것 때문에 버렸어요. 생계와 그다음에 생존 때문에 버린 거예요. 이게 오늘날 현대인들이 복음을 이해할 때 항상 어떤 관점으로? 생계와 생존에 유리한지 따져서 복음과 하나님을, 성당이나 교회 나가잖아요. 이걸 고려해서. 그러니까 옛날 이스라엘이 하나님께서 버림받음과 똑같은 전철을 밟는 거예요. 생계와 생존에 여유 있으니까 교회 나온 거예요. 그러나 다급하면 다 끊어버리죠.
오전, 오후 나온다? 살만하다. 그런데 오후 안 나온다? 이제 생활비가 급하게 되었다, 물가가 올랐다든지 무슨 일이 벌어졌다. 그다음에 오전도 거의 빠뜨린다? 이러면 이제는 보통 급한 게 아니구나. 갑자기 딸이 시집가든지 아파트 해줄 돈이 없구나, 이런 식이죠. 이게 성경말씀에 다 들어있는 거예요.
그래서 내 마음대로 못 떠나요. 내가 떠나야 할 시점은 하나님이, 너는 떠나도 언약은 떠난 자리에 이렇게 성공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조건을 유지하면 자기 백성은 약속의 땅에서 내보냅니다. 어떻게 보내느냐? 비참하게, 제목이 ‘숯검댕이’죠. 불쏘시개 집어넣었다가 다는 안 타고 안에는 시커멓게 탄 그게 귀한 거예요. 그게 성경에 나와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사야 6장에서 그루터기 남길 때 그 이야기를 누구한테 하느냐? 이사야한테 했다고요. 그 이야기를 설교시간에 못했는데 오늘 강의 첫째 시간엔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다수 중의 하나에요. 다수 중에 샘플, 시료 샘플 뽑잖아요. 표본이라 하는데 다수 중에 하나를 뽑는 거예요. 뽑을 때 이사야가 그냥 뽑힌 게 아닙니다. 많은 죄악 된 백성 중에 대표로 뽑았다는 이야기를 굳이 합니다.
그러니까 오늘날 교인들도 그 이야기 못해요. “나 구원 받았구나, 나 택함 받았구나.” 이렇게 되지 똑같은데 왜 뽑았습니까, 말을 안 해요. 지가 교회 나와서 열심히 한 것을 돋보이고 싶어서. 똑같은 데, 란 말은 안 해요. 내가 얼마나 착하고 마음이 넓었으면 교회를 다 나오고 하나님을 다 믿느냐, 스스로 자기한테 위로가 되기 위해서 그런 마음을 안 가지지요.
똑같은 데 똑같다는 말을 하게 되면 어떤 점이 위험하냐 하면 도로 믿음이 없고 주께서 버린다 할지라도 그들은 내 인생 책임지란 소릴 못하잖아요. 그러니까 인간들이 행동할 때 조건이 뭐냐 하면 나를 이렇게 받아놓고 내치기 없기, 이런 권리가 있는 줄 알아요, 인간에게. 그래서 새벽기도 할 때 그걸 다 압축해서 이야기하면 딱 하나에요. 내 인생 책임지란 거예요. 누구보고? 하나님에게 따지는 거예요.
생각해보세요. 자기 인생이 있었습니까? 없지요. 없는데 뭘 책임져요. 마치 자식이 아버지한테 내 인생 책임지란 것과 똑같아요. 아버지가 결혼할 때 자기는 없잖아요. 그런데 자식이 뭐라고 하느냐 하면, “누가 낳아 달라 했어요? 지가 낳았으니까 책임져야지.” 이 이야기를 할아버지는 할 수 있어요. 그런데 자식은 하면 안 돼요. 아버지의 아버지는 할 수 있어요. 아버지기 때문에 간섭하는 자격이 되는데 자식은 순서에 위반돼요.
이런 것이 첫째 강의에 참 어려운 데 뭐냐 하면 있다가 없잖아요. 있다가 없으면 있음이 아니고 그 안에 무슨 요소가 있느냐 하면 나는 없다 요소를 품은 있음이 돼요. 그러고 보면 인간은 자기 자신이 누군지 몰라요. 지금 이렇게 설명하면 외면해버려요. 오후에 안 나온다는 말은 나는 더 이상 복음 듣기 싫다는 뜻이거든요. 나는 그것 없어도 괜찮다는, 말씀 없어도 괜찮다는 뜻입니다.
여기 계신 분들 우리교회 근처에 있어도 오후예배에 두 달 나오다 안 나올 사람 많을 거예요. 배부른 데 뭐. 생계와 생존이 보장돼 있는데 굳이 뭐. 생계와 생존이 보장돼 나왔기 때문에 주께선 이걸 버립니다. 생계와 생존을 보장할 때는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적어볼게요. 내 인생 책임져라. “하나님이 나를 선택했고 나를 구원했기 때문에 남은 인생 책임지세요.”
하나님이 책임은 지되 책임을 받을 사람은 책임지란 말을 하면 안 돼요. 그러면 하나님이 책임지는 취지가 날아가 버려요. 주께서 책임지는 방법은 어제 낮 설교에 한 것처럼 죽여서 책임져요. 산 채로 책임지는 게 아니고. 왜냐하면 이 세대에 속한 사람은 오는 세대에 가질 못해요. 이게 오후 설교의 핵심부분인데 이 세대에 속한 사람은 오는 세대에 갈 수가 없어요.
그게 십자가라 하는 게 뭐냐 하면 이 세대와 오는 세대를 구분해놓고 그걸 중간에 틀어막았다는 뜻이 십자가에요. 틀어막았기 때문에 자꾸 인간들은 뭘 생각하느냐 하면 내 인생 책임지라고 나오는 거예요. 그러니까 어제 낮에도 이야기했지만 초청받았다는 말은 선택 문제가 내 문제가 아니구나, 라는 걸 알라고 초청받은 거예요.
초청받은 걸로 구원 받은 게 이다, 아니다? 이게 아니구나. 그다음에 남아 있는 갭, 건널 수 없는 불가능의 갭, 그건 선택의 문제인데 그것은 초청했다는 것과 전혀 무관하게 이뤄진다는 거예요. 초청자리에서 선택이 돼버리면 뭐가 남느냐 하면 선택되지 않음이 그 현장에 발생됩니다. 그렇게 되면 언약이 살아요.
언약이 어떻게 됩니까? 언약은 축복받을 자에게 복이 오고, 이게 야곱 아닙니까. 그다음에 저주받을 자에게 뭐가 온다? 에서, 저주가 오지요. 이게 언약이에요. 그런데 사람들은 저주받을 것은 생각 안 하고 성급하게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안 하는데 김칫국부터 마신다고 지가 지 마음대로 야곱 자리에 앉아서 책임지라는 거예요. “예수 믿어줄 테니까 책임져라.” 이건 뭐 술 먹고 행패부리는 것과 똑같은 거죠. 말도 안 되는 거죠.
그래서 주님께선 어떻게 하느냐 하면 그 성전을 무너뜨리되 이게 바로 성전을 무너뜨리는 책임이 너희에게 있다는 것을 이제는 그걸 까발리고 본격화시킵니다. 그러면 예레미야는 이사야와 예수님 사이잖아요. 그러면 그 정답을 알려면 그 실상을 알려면 어디까지 가야 돼요? 예수님까지 가야 되겠지요. 그래서 예수님이 하나님 믿는 백성에게 맞아 죽으신 거예요.
인간들의 본색은 하나님에게 책임지라고 하지만 막상 진짜 책임질 하나님을 보냈더니만 그들은 어떻게 했습니까? 예수님을 죽여 버린 거예요. 그리고 이스라엘은 샘플입니다. 이스라엘이 예수님 죽였다는 말은 사실은 모든 인간이 다 예수님을 죽였다. 따라서 예수님 이후에 부활되고 성령이 돼버리면 그다음에 누구에게 성령이 오고, 안 오는 그 문제는 인간이 관여할 문제가 아니고 주신 자에게 오지요.
그게 비로소 그동안 숨겨져 있던 비밀이에요. 오후예배 끝에 비밀 이야기했어요. 이 비밀은 감춰진 거예요. 숨겨져 있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 거죠. 인간세계에서 보이지 않는 것은 어떻게 되느냐? ‘없다’가 돼요. 그럼 있는 건 뭐냐? 손흥민, 월드컵 이런 게 있겠지요. 여기에 환장하는 거예요. 있는 것에 환장하는 거예요. 돈, 자본, 부동산 이런 것도. 보이지 않는 것은 상대적으로 천대받고 무시당하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함께 있음이 성전인데 뭐가 되느냐? 오늘날 성도가 되거든요. 그래서 어제 오후에 방주이야기를 했지요, 제가. 오늘날 우리가 방주에요. 사람들은 관심도 없어요. 전부 다 보이는 것에 미쳐서 보이지 않는 방주의 존재에 관심 없듯이 오늘날 성도가 움직이는 방주에요. 오후에는 움직이는 성전, 이건 오전에도 그렇게 이야기했지요. 오전, 오후 성전이야기 다 했네요.
비밀로 작용하는 겁니다. 그럼 비밀로 작용했다는 말은 내가 깨달았다가 돼요, 안 돼요? 안 돼요. 그럼 어떻게 되느냐? 우리 자신 비밀이 돼야 되지요. 주께서 알아서 우리를 택했다는 말은 비밀에 함께 있음이 이제는 버릴 자에게 건졌기 때문에 내가 주님을 버릴 자도 안 되고 주께서 우리를 버린다는 것도 성사 안 되는 조건 하에 구원이 된 겁니다.
그래서 어제 오후에 그런 이야기했지요. 나를 구원한 주님의 가치를 최우선적으로 한다는 조건 하에 주님께서 우리의 과거에 대해서 완전히 묵인해준다는. 우리의 과거, 어디서 뭘 하면 어떻게 살았는지 일체 주께서는 그걸 묵살해주시는 거예요. 더 이상 말은 안 꺼내시는 거예요. 조건은 뭐냐? 주님의 가치가 전부라는 것을 아는 한도 내에서.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