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신명기(8강) 신5:3(마귀잡자) 20221226a
(강의:이근호 목사)
신명기 4장 41절부터 십계명 나오는 신명기 5장 초반까지 하겠습니다. 열 가지 계명에 대해서 출애굽기 20장에 보면 십계명이 처음 나옵니다. 모세가 처음 받았으니까 처음 나올 수밖에 없지요. 출애굽기에 나오는 십계명 취지와 신명기 5장에 나오는 십계명 취지의 차이가 있어요. 이게 뭐냐 하면 신명기 5장 2절에 보면,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호렙산에서 우리와 언약을 세우셨나니” 3절에 보면, “이 언약은 여호와께서 우리 열조와 세우신 것이 아니요 오늘날 여기 살아 있는 우리 곧 우리와 세우신 것이라” 이렇게 돼 있어요.
3절의 말씀은 그때 그 사람들과 언약을 세운 것이 아니라 지금 나와 함께 있는 너희들과 하나님이 언약을 세웠다는 말을 굳이 덧붙이는 그 이유가 뭐냐? 그것은 바로 해석에 관한 문제입니다. 해석에 관한 이것이 상당히 난해한데요. 제가 문장을 하나 쓸 테니까 어디에 초점을 맞췄는지 여러분들이 생각해보세요.
①현재와 미래가 어느 것이 나은지 어떻게 아는가? 여기서 이솝우화 가운데서 <개미와 베짱이> 이야기 잘 알지요. 여름에 덥다고 힘들어 일 못하겠다고 띵까띵까 놀던 그 베짱이, 반면에 추운 겨울 양식 떨어질 걸 대비해서 여름에 힘들지만 열심히 일해서 양식을 비축하려는 개미. 그 개미 형 인간과 베짱이 형 인간 가운데 어느 것이 옳은가? 물론 이솝은 베짱이가 틀렸고 개미가 옳다고 했지만 지금은 옳음보다도 어떻게 차이 나는가 생각해보자. 어떻게 다른가, 왜 다른가 생각해보자 말이죠.
그래서 개미와 베짱이 중 어느 것이 옳은가를 판정할 때는 현재와 미래 어느 것이 더 나으냐의 문제에요. 현재 충실한 것이 행복한가, 아니면 현재 고생되더라도 미래에 행복한 것이 나으냐? 그러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지금 고생되더라도 미래가 보장된다면 미래를 위해 사는 게 낫다고 하지요.
그다음의 문제입니다. 그 문제를 어떻게 아느냐는 거예요. 주식 마찬가지잖아요. 한국 사람이 한국 주식 희망 없다고 미국 주식 테슬라를 샀다고요. 테슬라 36% 빠졌는데요? 똑똑한 게 문제를 일으켜요. 남보다 더 많은 정보가 나를 이롭게 한다는 그 원칙하에 남들이 안 할 때 빨리 한다고 하지만 지 혼자 재주 피우다가 지가 망한 꼴이 돼요. 원숭이 나무에 올라가지도 않았어요. 맨 땅에 헤딩하다 지가 박은 거죠. 미래가 지금보다 못하다면 어떻게 할 거냐 말이죠.
노부부가 열심히 일해서 집 한 채 사고 땅 사놨더니만 도로 개발한다고 땅 값 올라서 횡재했다는 소식이 들리는 순간 타지에 있던 아들 네 명이 달려들어서 사업한다고 대출해서 다 가져가고 다 망해버렸을 때, 나라에서 보상받은 보상금 순식간에 일주일 만에 날아가거든요. 그나마 가난할 때는 자식 간에 전화 통화라도 했고 정이라도 있었는데 있는 정마저 다 날아갔어요. 그 미래가 지금보다 더 낫다는 보장이 있습니까? 없지요.
그러니까 중요한 것은 어떻게 아느냐, 에요. 농땡이 부리는 베짱이가 개미에게 이렇게 했어요. “나중에 네가 일 너무 많이 해서 아프면 지금 기타치고 노는 행복도 너는 구경도 못해. 너는 힘들게 일하지만 나는 겨울에 겸손하게 살 마음의 자세를 갖고 있어.”
평생의 소원이 트롯가수 해서 무대에서 받는 박수소리가 사는 재미라고 느끼는 사람이 집안 반대해서 온갖 허드렛일 다 하지만 결국 나이 사십, 오십 돼서 판 내고 가수하겠다는 사람, 우리나라 만 오천 명입니다. 십오 만인가? 지금 행복도 못 누리고 쪼다 같이 나중 행복도 날리고 그런 바보가 어디 있느냐 말이죠. 핵심은 뭡니까? 인간은 미래에 대해서 모른다, 에요.
그럼 미래에 대해서 아는 방법은 뭐냐? 미래가 현재에 미리 담기면 돌출하면 되겠지요. 자, 이야기가 이것부터 시작됩니다. 어렵습니다. 십계명은 외부성입니다. 이제 외부성이란 말 알겠지요. 인간들의 지혜를 모으지 않고, 인간한테는 미지의 세계, 아무것도 모르는 세계인데 난데없이 뭐가 왔어요.
수백 년 종족들 역사에 코카콜라는 없었는데 어느 날 비행기에서 아프리카에 코카콜라 빈병이 떨어졌어요. 왜 코카콜라인가? 이게 잘 안 깨져요. 옛날 아프리카 땅은 시멘트가 없잖아요. 그냥 맨 땅이라 안 깨진 거예요. 그걸 보고 아프리카 토인들은 신이 존재하는 증거로 삼았던 겁니다. 이게 뭐냐 하면 외부성이에요.
방주도 외부성, 언약도 외부성. 그냥 우상 깎아 섬기던 걸로 생계를 유지하던 아브라함에게 너는 네 아비 집을 떠나라는 계시, 이것도 외부성이에요. 그러니까 외부성의 특징적 요소가 뭐냐 하면 반드시 구비조건이 없어야 된다는 없음이죠. 이걸 한자로 하면 無, 없다는 거예요. 반대로 있음을 한자로 하면 뭐가 되겠습니까? 有가 돼요.
그래서 우리가 알기는 무에서 뭐가 나온다? 유가 나온다, 없음에서 있음이 나온다. 또는 없음에서 있음이 창조되었다. 이게 우리네 상식이잖아요. 그런데 따지고 보면 없음은 어디서 나오는가? 있음에서 없음이 나와요. 인간에서 신이 나와요. 뭐가 깨져요? 외부성이 깨져버려요. 인간의 외부성이.
외부성이 왜 깨지느냐 하면 내가 여기 있을 때 진짜 하나님이 주신 겁니다, 라는 말을 할 수 있거든요. 그걸 은혜라 하잖아요. 하나님의 은혜 받았습니다. 성령세례 받았습니다. 내가 생각지 않았는데 주께 은혜 받았습니다, 라는 이 외부성이 진짜로 은혜를 받았다면 필히 나의 있음은 없음이 돼야 되는데 사람들은 성경 읽어보고 성경 백 독, 천 독해서 하나님의 은혜란 말을 그렇게 알면서도 본인이 그냥 있음이 있음으로 계속 버티고 있는 거예요.
버티고 있으니까 뭐가 되느냐 하면 자기는 자기 자리를 포기할 생각이 전혀 없어요. 결국 따지고 보면 하나님이 어디서 나왔는가? 하나님은 내가 성경을 참조로 해서 내가 만든 게 돼요. 그러니까 이게 있음에서 없음이 나오고, 인간에서 신이 나온 거예요. 그걸 신학이라 합니다. 오늘 첫째 시간 주제는 이겁니다. 마귀잡자. 마귀를 잡아버리자. 엄청난 도전인데 도전과제거든요.
마귀가 있어야 잡지. 마귀가 왜 없어요? 이게 마귀지요. 나. 때려죽어도 없어지지 않는 나, 이게 마귀에요. 이 마귀가 다른 말로 하면 나, 또는 이걸 주체. 주체가 이런 짓을 했어요. 인간이 뭘 생각하느냐 하면 세상이 없는 데서 어떻게 있는 것이 나왔는지를 인간들은 생각하기 시작한 겁니다. 옛날부터 이게 철학인데 중국에서도 그렇고, 서양철학도 마찬가지고.
인간은 왜 이 세상에 해가 있고 별은 있고 달은 있는지 생각한 거예요. 그래서 동양철학이나 서양철학에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거는 다 없는 데서 나왔다. 이렇게 생각한 거예요, 공통적으로. 상당히 믿음 좀 있어 보입니까? 그래서 사람들은 없는 것을 없다고 누가 이야기했습니까? 여기서 어려우니까 정신 바짝 차려야 됩니다.
없다는 것을 누가 생각했어요? 아까 현재와 미래가 어느 것이 나은지 누가 알라 했지요? 누가, 누가? 그러면 생각하는 나에게 누가 있습니까? 나 말고 없지요. 왜? 생각한 주인은 나고 내가 생각한 모든 것은 내가 만들어낸 거니까. 없다는 것을 누가 이야기해요? 내가 없다고 지금 이야기하고 있지요. 이 없음을 숫자로 1로 본 거예요. 없음은 0이 아니에요. 0은 아예 없는 거고.
내가 없다고 부를 때 너는 나에게 비로소 의미 있는 시작이 돼요. 그게 1이에요. 무가 1이 돼요. 아무것도 없으니까 공백이잖아요. 공백은 집합론에서 이렇게 표시합니다. ∅ 동그라미에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선을 긋는 거예요. 1이 생겼잖아요. 그다음에 그걸 추이 적이다, 또는 순서적이다, 또는 정렬 적이라 하는데 추이는 그걸로 멈추지 않고 그다음 걸 기대하게 만들어요.
내가 없다는 걸 생각했잖아요. 나는 없다는 걸 생각했다, 이렇게 너무 기니까 이걸 짧게 하는 거예요. 이걸 집합론이라 하는데 하나의 요소로 집어넣어요. 이게 공집합{∅}이라 해놓고 이걸 2라 하는 겁니다. 그리고 1 다음에 2가 나오죠. 생각이 생각을 낳는 거예요. 숫자를 붙이잖아요. 이름을 붙이는 거예요.
없다, 있다 이름 붙이는 걸 관념. 머릿속 관념이니까 추상적 관념이라 하는 겁니다. 추상적 관념을 개가 합니까, 소가 합니까, 돼지가 합니까, 누가 합니까? 내가 하지요. 아무리 노력해도 내가 없어져요, 안 없어져요? 안 없어져요. 마귀 잡았어요. 마귀를 이렇게 잡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게 2잖아요. 2 안에 1이 들어있지요.
이렇게 해서 관념적으로 아무리 나무가 있고 바나나가 있고 딸기가 있더라도 어디로 돌아가느냐? 항상 세월 지나면 딸기가 썩어 없어지지요. 없음으로 돌아간다고요. 없음의 요소를 있는 요소에 가장 기본 공통적 요소로 집어넣는 거예요. 공백으로 만든 공통성이 있는 거예요. 그럼 1 되고 2 되고.
그러면 3은 뭐냐? 3은 앞의 공백∅ 더하기 공백의 집합{∅} 하면 3이 돼요. 공백, 공집합을 전체 더 큰 범주로 집합하면 이게 3이 돼요. [∅, {∅}] 범주가 점점 더 커지는 거예요. 이걸 .... 해서 만약에 n까지 한다? 25, 26, 27, 또는 756. 인간은 n에 멈출 인간이 아닙니다. 어디까지 가느냐? 무한대로 가버려요. 무한대를 상표로 삼는 회사가 있지요. (페이스북이 사명을 META로 바꾸면서 로고도 무한대∞ 모양과 유사하게 바꿈.)
무한대로 가버려요. 있음의 무한대. 아무리 무한대로 가도 그 안에 뭐가 살아 있다? 없음이 살아 있지요. 그 무한대가 뭐냐? 이것이 인간들이 본 대자연입니다. 그래서 이런 공식이 돼요. 대자연이 없다가 돼요. 또는 자연은 없다. 이 세상은 자연이란 없어요. 다만 자연이라고 인간이 불러줄 때만 자연은 있다.
자연이 있나, 내가 있나 하면 내가 있지 자연은 없어요. 내가 자연을 다룰 때만 자연은 대상으로 내 앞에 등장하는 거예요. 왜 그러냐? 자연에 뭐가 붙어있기 때문에? 이름이 붙어 있는 거예요. 그래서 이름 붙어 있는 것, 바나나 이름 붙여주게 되면 바나나는 존재하면서도 플러스 유일자로서 존재하는 거예요. 사과 보고 바나나로 할 수 없잖아요.
이걸 명명이라 하는데 이름을 붙여주게 되면 이름 받은 바나나가 누굴 닮았어요? 바나나가 인간을 닮은 거예요. 인간은 대자연을 부르면서 대자연은 누구의 얼굴인가? 인간의 얼굴이죠. 그러면 대자연을 유일하게 없음에서 있게 하는 것이 만약에 신이라면 이게 하나님이다, 또는 하나님께서 만들게 했다고 믿는 내가 진짜 뭐가 돼요? 신이 되지요. 이게 바로 마귀 아닙니까.
마귀가 어느 정도로 오늘 첫째 시간 제목을 이걸로, 용감한 마귀. 마귀가 왜 용감하냐 하면 분명히 하나님께서 선악과 따먹지 말라 했지요. 분명히 이 사실을 마귀가 알고 있으니까 인간을 유혹했잖아요. 모르면 유혹할 거리가 없잖아요. 하나님께서 따먹지 말라고 한 이유는, “이걸 따먹는 날에는 정녕 네가 하나님처럼 된다고 하기 때문에 따먹지 말라 한 거야. 따먹어도 돼.” 그럼 네가 신처럼 된다고 누가 이야기했어요? 마귀 쪽이 이야기했잖아요.
이건 무엇을 의식하는 겁니까? 하나님께서 따먹지 말라는 금지 명령을 내렸다는 것을 누가 알고 있어요? 마귀가 알고 있잖아요. 마귀가 알고 있다는 전제 하에 따먹으라고 이야기할 정도면 마귀는 굉장히 용감하지요. 그 용감한 마귀의 제자들이 누굽니까, 그 종들이 누구에요? 바로 사람이에요, 사람. 사람이니까 그 용감함이 인간 속에 다 들어있지요. DNA 속에. 그러니까 인간들은 청함은 받으나 그다음에 택함은 인간의 선을 넘어서버리죠.
온갖 것 다 알아요. 십자가 알고, 다 아는데 구원 못 받아요. 이유가 뭐냐 하면 복음 전하는 자들이 본인이 이단인 것을 인정 안 해요. 내 입에서 나오는 게 전부 다 이단적이고 마귀적이라는 사실을 본인이 인정할 줄을 모릅니다. 사람들은 뭘 생각하느냐 하면 틀린 말을 해야 이단인 줄 알고 있어요. 옳은 말을 하면 이단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러면 내가 옳은 말을 하면 옳은 사람 됩니까, 틀린 사람 됩니까? 본인이 하는 말이 옳을 때는 옳은 말로 생각하는 거예요. 그럼 뭐가 깨져버려요? 내가 용감한 악마의 제자라는 사실을 숨기는 게 돼요. 목사가 왜 이단이 되는 겁니까? 본인이 마귀라는 것을 숨기는 식으로 설교하니까 그런 거예요. 다시 이야기해봅시다.
하나님의 외부성이 들어올 때는 반드시 뭐가 삭제돼야 돼요? 외부성이 외부성으로 유지되려면 뭐가 삭제돼야 돼요? 내가 삭제돼야 돼요. 그런데 우리는 복음을 아는 내가 나를 믿고 싶은 거예요. 이것 때문에 십자가마을 초반에 깨졌잖아요. 아시지요. 그 목사가 나에게 예수 믿느냐고 묻는 거예요. 그건 니가 할 소리가 아니지, 이 소리했다고 깨진 거예요.
왜냐하면 나는 예수 믿는다고 본인이 하면 안 돼요. 본인의 출발지가 마귀입니다. 그걸 주님은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게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왔다고 하는 거예요. 주님은 사태파악하고 오신 거예요. 하루하루 스케줄 교도소장이 짜는 거예요. 법무부장관이 짜고. 죄수들의 스스로 하루일과 아침 7시 기상, 8시부터 세수하기, 10시부터 12시까지 공부하기. 지가 짜는 게 아니에요. 짜봐야 교도소 생활이에요. 짜봐야 갇힌 생활이에요.
재판정에서 쟤 나쁜 놈이요, 할 때 재판장이, “피고가 그런 소리하는 게 아니야. 피고 손 내려.” 지가 방청석에 앉은 걸로 착각하고 있어, 지금. 지금 재판 중이야. 하나님이 우릴 재판 중에 있는데 그걸 심판주라 합니다. 심판주를 인정한다면 우린 피고석에 있어야 마땅하지 심판주로 인정해놓고 지는 방청석에서 저는 저들과 같지 아니하고, 저들과 같지 아니해서 감사합니다. 니가 왜 그런 소릴 해.
이태원에 위령제단 만들어놨잖아요. 크리스마스 됐다고 젊은 신부들이 거기서 미사 드리고 있는 거예요. 여러분 <영웅>이란 영화 봤어요? 안중근 나오는. 지금 안중근이 뭐가 잘못됐느냐 하면, 제가 그 영화를 봤어요. 안 보고 이런 소리하는 게 아닙니다. 안중근은 지금 뭘 분간 못하느냐 하면 이 세대와 오는 세대를 분간을 못해요. 안중근 세대는 뭐냐? 이 세대가 그냥 가야 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우리나라에 안중근 공부하는 학생들이 뭘 알아야 되느냐 하면 아프리카 이집트 독립운동, 남아공 독립운동, 베트남 독립운동, 캄보디아 독립운동, 중국과 일본에서 독립운동 했던 열국지사들 있잖아요. 그들이 어떻게 살았는지 공부해보세요. 에티오피아, 수단에서 외부 열강에 대해서 안중근 희생한 건 희생 축에도 들어가지 못해요.
지금도 티벳이 중국에서 독립하려는 그것, 이슬람 국가가 있지요, 중국 영토에. 독립운동해서 감옥에 갇히고 억울하게 온 집안이 다 사그리 사형당하는 그런 이야기 들어보세요. 세상에 독립운동 없는 나라 있습니까? 우크라이나 전쟁할 때 젤렌스키 보세요. 얼마나 대단합니까? 러시아가 독일에게 밀렸을 때 러시아 중에서 독일에서 해방하고자 운동했던 그런 영화가 한둘이 아닙니다. 러시아 쪽에서 만든 영화.
눈물 나요. 폴란드도 마찬가지고요. 독일이 쳐들어왔을 때에. 특히 그리스 독립운동, 이태리 독립운동, 크로아티아 이번 월드컵에 3등 한 크로아티아 독립운동. 축구 잘하는 나라에요. 폴란드, 헝가리, 체코 그들 나라 가게 되면 주요 광장에다 독립투사 동상들 다 세워놨어요. 그리고 그 밑에 적어놓은 것 보세요. 눈물겨울 정도입니다. 외국 관광객들도 웁니다.
나라 하나 살리기 위해서 아낌없이 자기 목숨을 국가의 번영을 위해서 독립을 위해서 희생했던 사람들이 어마어마하게 많아요. 심지어 콩고에도 있고요. 콩고에 튀어나온 왕족들 있잖아요. 조나단 아버지, 몰라요? 콩고 다섯 개 나라 중 왕족이었는데 한국으로 도망쳐서 조선대학 교수로 있는 사람. 도망칠 수밖에 없어요.
왜 그렇습니까? 세대가 다르기 때문에. 시대 자체가 달라요. 그 사람이 독립투사인지 아니면 테러집단인지 누가 결정해요? 정권을 잡은 새로운 권력층이 결정하는 거예요. 그래서 안중근이 재판 받을 때 일본 변호사, 판사, 검사가 공통적으로 동의하는 게 하나 있어요. “안중근은 동양의 평화에 대해서 철학적 인식이 부족하다.” 다가오는 세대를 해석하는 능력이 부족한 거예요.
그렇다면 오늘 본문에서 애굽에서 나왔잖아요. 이 사람들 모든 머릿속에 뭐가 들어있습니까? 애굽의 문화, 시대상이 꽉 들어있지요. 그러면 주께서 십계명을 줬습니다. 십계명이 새로운 시대 질서를 몰고 오겠지요. 애굽에 살던 사람은 생존과 생계가 우선이에요. 하나님의 언약은 외부성이기 때문에 내가 지어낸 게 아니에요.
꾸준히 옛적부터 내가 나로, 또는 주체, 내가 계속 나, 그다음의 나, 이걸 개성이라 하고 서수 또는 서열, 숫자로 하면 서열화 되는데 계속 순서가 나₁, 나₂, 나₃에서 나ₙ으로 가요. 어디까지 가느냐? 나∞으로 가는 거예요. 죽어서라도 천당 가서라도 영원히 살고 싶은 거예요. 이걸 인간의 불멸성이라 합니다. 마치 악마가 불멸적 존재가 되듯이 인간도 불멸적 존재에요. 악마의 품성을 갖고 있는 불멸적 존재.
그러니까 아까 이야기했지만 용감하지요. 어디까지 용감합니까? 자, 나가 있다, 하나님 있다 어느 쪽이 큽니까? 나가 더 큰 거예요(나〉하나님). 이유가 뭐냐 하면 나는 있는데 플러스 하나님의 존재가 추가됐잖아요. 그러니까 이쪽은 나도 있고 추가적으로 하나님도 있으니까 하나님보다 더 크잖아요. 제 말 맞지요? 속이는 것 아닙니다. 이쪽에는 하나님만 있고. 나는 하나님 있고 천사 있고, 예수까지 다 아니까 내 쪽이 더 큰 거예요. 이런 나를 내가 벗어나질 못하는 거예요.
이걸 종교라 하지요. 어제 낮 설교에서 종교라 하는 것은 잊어버린 망각된 나를 되찾는 겁니다. 종교라는 게 나를 찾는 거예요. 이걸 쉽게 하면 내 인생 돌리도, 또는 신이여 내 인생 책임지라는 거예요. 나훈아가 무대 마룻바닥을 치면서 불렀던 노래가 뭡니까? 뭘 돌려달라는 거예요? 청춘을 돌려줘. 잊어버린 시간을 돌려달라는.
그 노래 부를 때는 그냥 안 불러요. 이거 소매 걷고 들어가요. “오늘 한 번 해봅시데이.” 무릎을 치면서 오늘 가 볼 때까지 가봅시다 하고 청춘을 돌려달라는 거예요. 그 아주머니들 대단해요. 토요일에 결혼식에 가는데 같은 사촌 집 결혼식에 안 왔어요. 나훈아 거기 간다고. 나 없어도 결혼식 되는데 뭐. 나 없이도 예배 잘 보는데 뭐 하러 가는데. 똑같은 거잖아요.
어떤 사람은 생중계하는 데 왜 못 봤느냐 하니까 아들 콘서트 표 빨리하려고 놓쳤다는 그런 경우가 점점 생깁니다. 자진해서 자식의 애완견 노릇하는 자발적으로. 그러니까 나+하나님이니까 여기에 자식까지 넣어봅시다. 항상 인간이 노리는 것은 내 영역을 키우는 거예요. 내 영역을 소멸하고 없애는 게 아닙니다. 나를 망하게 해달라는 게 아니에요. 나를 키워달라는 거예요. 아이고, 참.
그러니까 이 말은 뭐냐? 초창기에 한국교회가 부흥됐다 했지요. 부흥된 게 아니고 초창기에 외국선교사가 우리나라 정신의 벽지를 과격하게 뜯어버리니까 그 벽지 밑에 옛날 벽지무늬가 노골적으로 많이 드러난 거죠. 그러니까 천주교도 제사 지내는 것도 우상숭배라고 했어요. 제사 지내는 것, 술 먹고 담배 피우는 것, 계집질하는 것, 첩질하는 것 전부 다 죄가 된 거예요.
인도네시아에서 처녀가 동거생활, 결혼 전에는 일체 육체적 관계 금한다는 이런 것까지 전부 다 죄가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조선시대 때 천주교 신자들 가려내는 데 굉장히 쉬운 거예요. 거기다가 주일 다 지키고, 안식일 지킨다고. 십계명을 안식일 지키는 그렇게 생각한 거예요. 벽지를 확 뜯어버리니까 사람들은 벽지 뜯겼지요. 옛날에는 자기 자신이 그렇게 노골적인 게 안 나타났잖아요.
그런데 확 뜯어버리니까 옷을 빼앗겼잖아요. 옷을 가리기 위해서는 새 옷을 갈아입기 위해서 어디 가느냐? 목숨 걸고 성당 가고 목숨 걸고 교회 가야지요. 부흥회 한다 하면 4킬로, 6킬로 그거는 킬로수에 들어가지도 않아요. 아예 옆에 와서 자. 고신 측에서는 예배드린다면 주일에 안식일 지키기 위해서 버스 안 타려고 토요일에 와서 하룻밤 자고 걸어서 교회 왔어요.
노리는 게 뭐예요? 나를 없애고자합니까, 키우고자합니까? 키우고자. 어느 정도까지? 하나님한테 기죽지 않는 정도까지. 오늘 마귀 잡읍시다. 잡을 것도 없어요. 본인이 의자에 앉아있는 데 나도 포함해서 마귀1, 마귀2, 여긴 주무시는 마귀. 쉽게 이야기해서 마귀와 함께 살기. 예능프로 제목 같다. 마귀와 함께 살기. 그걸 패러디하면 용감한 마귀, 마귀라 안 하지요. 용감한 나지요. 그걸 고상한 말로 하면 주체적인 나가 되자. 무소의 뿔로 홀로 가라. 화엄경에 나오는 불교에서 이야기하는 거죠. 네가 신이다. 이건 불교에서 늘 주장하는 거고요.
인간의 추상적인 관념 속에 뭐가 있느냐 하면 나열을 시켜요. 자연의 요소를 다해서 나열을 시키는 데 그 나열의 첫 번째 첫 출발점이 어디냐? 나입니다. 나로부터 계열화시키는 거예요. 이건 새로운 나의 스토리, 나의 역사가 되는 겁니다. 나를 못 없애기 때문에 나의 역사만 계속 현재적으로 항상 재구성하게 돼 있어요. 그걸 사람들은 해석이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출애굽 때 이미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돌 판을 줬지요. 그러면 그다음 모세언약에 남은 것은 그 계명에 대한 해석만 남아 있어요. 이미 인간세계가 선악과 따먹고 무슨 세계 되었어요? 악마의 세계 됐지요. 악마의 세계 됐으니까 늘 그대로에요. 유한한 세계 되었으니까 여기 주님께서 외부성으로 십계명 준 정도가 아니고 아예 해석이 온다니까. 돌 판을 준 게 아니고 해석을 계속 그 시대마다 재해석을 해버린 거예요.
해석을 할 때 그걸 맞이하는 자는 누구냐? 바로 나로부터 만든 구축한 나의 역사가 나만의 세계가 그걸 맞이하게 돼요. 다시 말해서 신이시여 나도 그 정도는 해석해 오고 있습니다가 마중을 나가요. 그게 바로 십자가에요. 십자가 사건이 터진 이유가 하나님 여호와에 대해서 율법에 대해서 나름대로 우리는 해석이 구축돼 있습니다. 우리한테 더 이상 외부성이 필요 없습니다.
이 전체를 만약에 내가 구상한 이 아름다운 나의 역사를, 그러니까 하나님이 나에게 올 때 있는 나, 쟁반에 딸기 하나 더 얹을 것이면 용납하지만 쟁반을 깰 것 같으면 내 쪽에서 당신을 깨겠습니다, 라는 것이 배후의 악마가 한 사주에요. 악마는 용감하고 이미 자기는 버릴 카르라는 걸 알기 때문에 이러나저러나 고함지르든 아부하든 소용없다는 인생을 알기 때문에 못 먹는 감 찔러나 본다는 식으로 예수 그리스도께 달려들어요.
어차피 당신은 심판주기 때문에 다만 시점만 늦추면 안 되겠느냐고 악마가 귀신이 예수님한테 제시했어요. “주여 때가 되지 않았는데 일찍 왔습니까?” 다른 것들은 귀신이 있는 줄도 몰랐지요. 귀신이 예수님을 알아봤어요. 어떻게? 귀신 같이. 인간은 서서히 귀신 돼요. 내부에서 올라와야 돼. 기분이 좀 올라와서 나중에 귀신 돼요. 묵사, 장로 쯤 돼야 귀신 되지 초자는 그것도 모르고 순진하기 짝이 없어요. 교회 하나 책임져야 귀신 되는 거예요.
어제 낮에도 이야기했지만 주님의 가치,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면서 어디로 갑니까? 그런 방식으로 내 교회 지키는 거예요. 목사가 됐으면 교회 서너 개 말아먹어야 목사답지. 목사는 아까 했지요. 이스라엘은 자기 생계와 생존과 관련돼 있다고. 더 나가서 자기 자존심과 관련돼 있어요. 소유가 없으면 자존심도 같이 깨지게 돼 있어요.
못 사는 사람들이 교회 안 나오는 이유가 지 자존심 상할까 싶어서 안 나오는 거예요. 그래서 바깥에서 교회가 부자 됐다고 욕하고 있어요. 욕하는 지도 마찬가지인데. 지한테 없으니까 시기심 나서 그런 거예요. 왜 교회가 크리스마스인데 어려운 사람 안 도와주느냐? 이게 시기심이에요. 우리나라 가난한 사람은 아프리카 재벌입니다. 다해줘요. 우리나라 장애인들은 아프리카의 정상인보다 귀족보다 더 혜택이 많아요.
걷지도 못하고 앉아있는 데 엘리베이터로 모시는 사람이 귀족만 할 수 있어요. 왜냐 하면 그만큼 돈이 많이 드니까. 장애단체가 그걸 요구하는 거예요. 나를 귀족 대접해달라. 내가 하면 할수록 너희들 가치는 나한테 달려있다는 것, 우리한테 잘해준 만큼 너의 품격이 올라간다는 것. 이거는 완전히 노예로 삼았어.
어제 들뢰즈가 그런 이야기했거든요. 인간이 무지한 게 문제가 아니고 교만한 게 문제에요. 자꾸 무지하다 하는데 무지한 게 아니고 교만한 거예요. 본인이 어느 정도 교만한지 몰라요. 쉽게 말해서 본인이 어느 정도로 악마적인지 몰라요. 자, 오늘 제목 뭐라고 했어요? 악마는 용감하다. 용감하게 교만을 떠는 거예요. 어느 세대에서 이 세대에서. 이 세대는 막혀있습니다. 오는 세대가 막혀있어요. 그게 십자가 사건입니다.
왜 이 세대가 바깥 세대로 못 가느냐? 해석 문제에요. 본인이 본인을 해석하는 시대가 이 세대거든요. 그런데 이 세대를 마태복음 16장 4절, 어제 낮에 이야기했지요. 악하고 무슨 세대? 악하고 음란한 세대. 이 해석은 누구의 해석입니까? 예수님 해석이에요. 인간은 예수님의 해석을 안 받아들이는 거예요. 왜냐하면 그걸 받아들이는 순간 이게 플러스가 안 돼요. 나+예수님의 해석, 이게 안 돼요.
만약에 예수님의 해석이 들어오면 나의 해석은 이거는 악마적 해석인 것이 들통 나기 때문에 십자가마을이 갈라지든 말든 모르지요. 십자가마을 갈라질 때 돈 삼백 만원 있었어요. 이거 다 가져갔어요. 만약에 돈이 0원 제로라면 갈라질 이유가 없습니다. 제로라면 돈 모아서 갈라져야지요. 갈라져봐야 수익이 없기 때문에. 얼추 모였다 싶으니까요.
왜 그러냐 하면 소유 없이는 뭐가 없다? 존재감이 없기 때문에 그래요. 인간은 가진 돈이 있어야 인간대우를 받지, 그 인간대우 받아서 뭐 할 건데요? 제가 지난 수요일에 연결이란 제목의 설교했잖아요. 이미 죄 사함이 우리 속에 있잖아요. 그러면 이 목숨이 쓸 데가 없다니까요. 어떤 남편이 있는데 아내에게 한 달 용돈 하라고 이천칠백 만원 줘요. 이왕 구라인데 액수야 뭐. 그리고 조건이 한 달에 다 써야 돼요. 다음 달에 이천칠백 또 줄 테니까.
그렇다면 자기가 애써서 노동해서 얻은 자기 카드에 이십 만원 쓸 데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지요. 주께서 이천칠백이 뭡니까? 매일같이 오늘 죄 사함 해주니까 내 목숨으로 빛낼 일이 없다니까요. 내 목숨으로 내 자랑할 일이 없어요. 할 게 없어요, 내 목숨으로. 집에서 화장이나 하지. 내 해석이 쓸모 짝이 없어요.
그럼 어디 쓸모 있는가? 하나님께서 우리를 버리지 않는 이유는 그게 바로 반 언약이었고 악마적이었고 그게 쓰레기라는 걸 드러내는 데 쓸모 있게 하는 거예요. 걸핏하면 화내고, 걸핏하면 시기하고, 남 잘되면 밤잠을 이루지 못하죠. 네가 뭔데 내 자식보다 먼저 결혼하느냐, 네거 뭔데 먼저 취직하느냐 그것 때문에.
여러분 자녀 가운데 경찰이 없어서 그렇지 만약에 경찰이나 있다면 그다음부터는 그 엄마의 할 일은 뭐냐? 우리 아들 언제 승진하느냐에 있어요. 그런데 순경에서 경장 순서로 올라가는 데 같은 한 십 년 정도 하면 빠른 사람은 경위까지 내다볼 수 있거든요. 그런 자격이 있거든요. 십 년은 안 되고 더 해야 되겠구나. 그런데 어떤 사람이 강도 하나 잡아서 특진해서 경위되면 그다음부터 엄마는 새벽제단을 쌓습니다. 금요철야하게 생겼어요. “내 아들 책임져.” 복음 아는 목사는, “오늘도 악마가 들어왔구나. 악마가 엎드려 기도하는구나.”
누가복음 2장에서 시므온이 하는 말이 있지요. 아기 예수에요. 십자가 지지도 않았어요. 그런데 자기를 뭐로 봅니까? 새로운 해석에 의하면 자기가 종이에요. 자기를 종속된 존재, 내가 삭제됐어, 내가 없어졌어. 누구 있음이 그걸로 내 있음이 돼버렸어요. 끝났어요.
마귀는 선악과를 따먹게 해서 인간들로 하여금 윤리, 도덕, 정의로움에 자진해서 막히도록 만들었어요. 그걸 구멍이 뚫어줘야 저쪽 세계, 영적 세계 가는 거예요. 그게 오후 예배 때 했어요. 지금 또 생각나네. 영적 세계로 가는데 앞에 뭐가 막혀있습니까? 윤리, 도덕, 정의가 있지요. 윤리, 도덕, 정의는 나로 무엇을 기대하게 만드느냐 하면 시간이 지나면 점점 더 발전할 가능성 있는 나를 기대하게 만들어요. 과거보다 우수한 것.
그런데 어제 낮에 한 열세 가지 중에서 첫 번째가 뭐냐? 첫 번째가 제일 중요한 거예요. 인간은 자기가 사다리 타고 올라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어제 나를 딛고 내일의 나를 올 수 있는데 어제 내가 없어졌어요. 딛는다는 것은 관념적 추상적이에요. 이걸 아까 뭐라 했습니까? 서열화. 공집합의 서열화. 계속 집합. 집합이란 관념이에요. 이런 게 있지. 전에 이런 게 있었지. 전에 이런 게 누적돼 있지. 화살표를 보세요. 점점 가는 거예요.
어딜 향합니까? 불멸의 존재. 불멸의 존재를 추구하고 있습니다. 불멸의 존재로 가는데 중간에 이태원에 가서 귀신놀이하다 죽었다. 그럼 뭐가 끊어졌어요? 불멸의 존재인데 왜 자식이 먼저 죽었느냐? 돈 내놔라는 거예요. 똑같은 거예요. 그리고 창원의 어떤 시의원이 했지요. “네가 나라 구했나. 네가 안중근이가. 귀신놀이하다 죽은 걸 나라 구했나.”
보세요. 세월호 아이들 청소년이죠. 기성세대에 종속돼 있지요. 이태원에 사람들 애입니까? 밀리는 재미, 파도타기 위해서 간 거예요. 이태원에 세 명 갔으면 갔습니까? 열두 명 갔으면 갔습니까? 이태원 넓은 마당에 오십 명 갔으면 갔습니까? 십만 명 모이니까 가는 거예요. 어떤 집단 속에서 자기가 그 집단화와 같은 리듬을 타는 것이 젊은 사람한테는 스트레스가 확 풀리는 거예요. 내가 다수 중에 하나가 되었구나 하는, 무한 속의 일부가 되었구나. 이게 이 세대고 마귀의 세대입니다.
오늘 십계명 들어가지도 못하겠다. 주께서 어떻게 하신다? 새로운 해석을 줘요. 계명을 줘놓고 이 계명이 어디에 쓰는 물건인지 몰라요. “아아, 우리가 옛날에 십계명 알았잖아. 그리고 우린 발전될 것이다.” 하나님께서, “아니, 아니. 노, 노, 노. 새로운 해석이 너를 찾아갈 거야.” 그 해석은 기존 해석이 악마적 해석이고 애굽적 해석인가를 지적해주는 새로운 질서로 다가옵니다.
해석은 해석일 뿐이지. 아닙니다.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요. 언약의 새로운 질서, 그러니까 말씀이 말씀 스스로 움직이는 거예요. 그래서 어제 낮에 이사야 40장 6~8절, 풀 붑니다. 꽃 피게 해요. 그런데 풀과 꽃을 피게 하는 존재 이유가 뭡니까? 사라지기 위해서 사그라지기 위해서. 그것도 비참하게 낱낱이 다 아작나게 만들고 깨지게 만들어서 하는데 그건 왜냐? 말씀 해석이죠.
새로운 해석이 오게 되면 성경은 확정됐으니까 확정된 해석이 새로운 시대를 만들어내요. 새로운 해석이 오게 되면 풀이라는 것, 그거는 주님의 해석 속에 녹아져야 되고, 꽃 그거 뭔데? 녹아져야 되죠. 그 새 세대에 옛 세대에서 판사 하고 의사 한다고 넣어주는 게 아니에요. 오히려 판사, 의사로 인하여 지가 삭제되는 게 아까운 거예요.
의대생들 일주일 한 번씩 시험 칩니다. 남들 미팅할 때. 판사, 변호사들 하버드의 공부벌레들이란 영화 보면 알지요. 맨날 모여서 세미나 하고 호랑이 같은 선생 앞에서, 로스쿨 이야기거든요. 끊임없이 토론 논쟁하면서 어떤 경우의 사례가 소송이 오더라도 해결할 수 있는 해결점을 미리 찾아내는 것, 그렇게 해서 자기키보다 높은 두꺼운 책의 핵심을 알아야 변호사 시험을 통과할 수 있어요. 지금은 로스쿨 자체 내에서 시험 쳐서 하는데. 그것도 세 번 떨어지면 로스쿨 졸업한 것도 무효가 돼요. 영원한 자격이 없어요.
그런데 그렇게 애를 많이 쓴 게 자기 가치잖아요. 그런데 그렇게 하면 할수록 자기 해석이 자기 역사를 만들어서 그 역사 깨기가 더 힘들어요. 더 강력하게 주께선 그 사람을 다룰 거예요. 그래서 바로 내가 없어져야 될 이유는 내가 바로 악마의 아바타에요. 내 안에 악마 있으니까, 쉽게 말해서 옛 세대에 속하니까 새 세대가 옛 세대를 이겼구나, 그걸 고백하라고 주께서 우리 육신을 남기게 하신 겁니다. 10분 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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