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오후설교

죄와 구원의 만남

아빠와 함께 2022. 11. 14. 08:11

죄와 구원의 만남 

2022년 11월 13일                    본문 말씀: 예레미야 4:14-18

(4:14) 예루살렘아 네 마음의 악을 씻어 버리라 그리하면 구원을 얻으리라 네 악한 생각이 네 속에 얼마나 오래 머물겠느냐

(4:15) 단에서 소리를 선포하며 에브라임 산에서 재앙을 공포하는도다

(4:16) 너희는 열방에 고하며 또 예루살렘에 알게 하기를 에워싸고 치는 자들이 먼 땅에서부터 와서 유다 성읍들을 향하여 소리를 지른다 하라

(4:17) 그들이 밭을 지키는 자 같이 예루살렘을 에워싸나니 이는 그가 나를 거역한 연고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4:18) 네 길과 행사가 이 일들을 부르게 하였나니 이는 너의 악함이라 그 고통이 네 마음에까지 미치느니라

이스라엘이 죄를 지으면 하나님께서 사정없이 재앙과 징벌을 내리십니다. 같은 인간들 입장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너무 가혹하게 다루시는 것같지만 실은 정반대입니다. 이 세상에 그 어느 민족보다 특별히 사랑하시기 때문에 관여하시는 겁니다. 즉 이스라엘에게 죄와 악을 언급하시므로서 아울러 구원도 언급하시는 겁니다.

다른 민족에게는 구원에 대해서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의 죄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이건 죄다”라고 말씀조차도 하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죄나 구원에 대해서 언급해줄 가치도 없는 겁니다. 이스라엘에게 죄와 악에 대해서, 더나아가서 거기에 따른 징벌을 즉각적으로 내려주시므로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특별한 기능을 수행토록 하십니다.

그것은 유일하게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뜻과 그 하실 계획을 아는 민족이 되게 하시는 겁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는 오로지 죄만 나오게 하십니다. 이스라엘 나라가 망할 때까지 말입니다. 즉 이스라엘은 ‘죄만 나오는 인형’입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에게서 쏟아지는 죄는 무엇일까요?

그리고 그 죄가 어떠한 죄이기에 인간의 힘으로 제거될 수 없는 것일까요? 그것은 바로 ‘본인이 본인에게 지시와 명령을 내리는 일’입니다. 인간은 세상 변화에 대해서 쉬지 않고 대책을 세우는 식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여기서 삶의 요령을 생기는 겁니다. 강한 자에게는 고개 숙이고 약한 자들에게는 맹수처럼 달려드는 뺏는 식으로 삽니다.

이는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 하시는 방식이 아닙니다. 인간이 자신에게 지시내리는 이유는 ‘내 것을 나 말고는 아무도 지켜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런 의식들은 다른 민족들 같으면 그냥 지나갈 의식에도 혹은 도리어 장려한 사고방식입니다. 하지만 주님에게는 통하지 않습니다.

이런 의식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제시한 원칙과 같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주신 원칙은 예레미야 13:23에 나옵니다. “구스인이 그 피부를, 표범이 그 반점을 변할 수 있느뇨 할 수 있을진대 악에 익숙한 너희도 선을 행할 수 있으리라” 즉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물으시는 물음 자체가 인간이 인간보고 물을 질문이 아닙니다.

어떻게 흑인의 피부가 희게 될 수 있으며, 어떻게 표범이 그 반점이 사라질 수 있습니까? 인간에게 있어 이 질문은 질문같지도 않는 질문이요 성립될 수 없는 질문입니다. 그렇다면 인간은 어디에 정신 팔려 있습니까? 인간들에게 있어 소망은 자신에게 속한 생명과 재산을 든든하게 지켜줄 수 있는 정부를 자기네들 손에서 만드는 겁니다.

즉 인간들의 타고난 의식은 이러합니다. ‘인간들은 전적으로 죄만 짓는 존재가 아니라 국가와 이웃과 인류를 위하여 보탬이 되는 선한 역할도 해낼 수 있다’는 겁니다. 악만 저지르는 것이 아니라 선과 아울러 해내는 자가 자기 자신들이라고 외치고 싶은 겁니다. 거기에 비해 하나님 자신을 드러낸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끝까지 죄만 보여라’는 겁니다.

인간들은 자신들이 죄만 짓는 자가 아니기에 여태껏 하나님으로부터 정당한 은택을 입어 이만큼이라도 살 수 있다고 믿고 싶은 겁니다. 그 증거를 사람들은 어디서 가져오느냐 하면, 바로 자신들이 살고 있는 나라 발전에 자신이 그만큼 기여하고 있다는 점을 내세웁니다. 실은 이런 사고방식은 이방민족에게는 통하는 겁니다.

이방민족에게 있어 구원이란 본인들의 힘으로 본인의 나라를 지탱하는 것을 두고 말합니다. 즉 “표범의 반점을 없애고 흑인의 피부 색깔을 없이 하는 방식”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이 할 수 있는 바를 최대한도로 끌어올려서 본인들의 삶을 안정적으로 보장받는 기관이나 단체를 만드는 겁니다.

즉 어떻게 하든지 내 재산과 내 생명을 내 힘으로 지키고 싶은 겁니다. 혹시나 하나님께서 “너 나쁜 짓 많이 했잖아? 네 것을 지킨 자격이나 돼?”라고 반격하시면, “저는 나름대로 이 나라를 위해서 이만큼 희생한 착한 일을 했습니다”로 변명할 것을 사전에 미리 마련해두는 것도 잊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들 이방민족들이 문제점은 죄가 그리고 그 극단을 제대로 알지 못한다는 겁니다. 인간의 기본적인 죄는 ‘자경단’이라는 형식으로 잘 나타납니다. 즉 내 것에 속한 생명과 재산을 지키기 위해 ‘자기를 위한 경찰 기능’을 행사하겠다는 겁니다. 호신용 권총들을 준비하는 겁니다.

더는 경찰이나 사법당국을 언제까지 믿을 수 없다는 겁니다. ‘내 것은 내가 지킨다’입니다. 과연 이 의식이 성경의 뜻과 합치될까요? 로마서 12:19에 보면,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인간의 입장에서도 도저히 이런 마음 자세가 나올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주님께서는 어떤 자세로 이 세상에 마주했습니까? 이사야 50:6-7에 보면, “나를 때리는 자들에게 내 등을 맡기며 나의 수염을 뽑는 자들에게 나의 뺨을 맡기며 수욕과 침 뱉음을 피하려고 내 얼굴을 가리우지 아니하였느니라 주 여호와께서 나를 도우시므로 내가 부끄러워 아니하고 내 얼굴을 부싯돌 같이 굳게 하였은즉 내가 수치를 당치 아니할 줄 아노라”고 되어 있습니다.

사람으로는 할 수 없는 것, 곧 구원이란 하늘에서 오신 분이 개입하셔서 가능합니다. 개입하시면서 인간이 때리는 것으로 그대로 다 맞고 계십니다. 때리는 인간들의 심정은 이러합니다. “내 것을 내 식으로 지켜보겠다는데 왜 그것을 죄로 지적하느냐?”는 겁니다. 우리는 여기서 예수님을 때린 자들이 유대인이라는 점을 감안합시다.

그들은 나름대로 율법에 맞춰 살기 위해 온갖 아이디어를 다 끄집어낸 자들입니다. 하지만 그것마저 그들은 죄의 극단으로 치닫는 과정 중의 하나임을 알지 못한 겁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끝까지 ‘죄짓는 인형’으로 사용해주시는 겁니다. 그 죄가 있어야 비로소 구원자와 연결됩니다. 따라서 죄 짓는 인형은 딴 것말고 죄만 내놓아야 합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때리면서 그것이 의로운 일이라고 자부했습니다. 이로서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말씀은 성취가 됩니다. 즉 “너희 죄가 주홍같을 지라도 양털같이 희어질 것이다”는 말씀 말입니다.(사 1:18) 죄를 지은 그들 속에서 구원이 나옵니다. 그들이 질려죽은 분으로만 그들은 구원됩니다.

오늘날 성도는 이 세상 나라의 기여도 보다는 그들의 존재 하늘나라 시민으로서 있습니다.(빌 3:20) 따라서 손으로 이 세상을 심판하기 보다는 그들 앞에서 당당해야 합니다. 이 세상 나라, 그 어느 누구앞에서도요.(행 16:37-39/22:28-29)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때림과 주님의 맞음의 만남에서 구원이 이루어짐을 감사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25강-예레미야 4장 14~18절(죄와 구원의 만남)221113 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예레미야 4장 14~18절입니다. 구약성경 1056페이지입니다.

“예루살렘아 네 마음의 악을 씻어 버리라 그리하면 구원을 얻으리라 네 악한 생각이 네 속에 얼마나 오래 머물겠느냐, 단에서 소리를 선포하며 에브라임 산에서 재앙을 공포하는도다, 너희는 열방에 고하며 또 예루살렘에 알게 하기를 에워싸고 치는 자들이 먼 땅에서부터 와서 유다 성읍들을 향하여 소리를 지른다 하라, 그들이 밭을 지키는 자 같이 예루살렘을 에워싸나니 이는 그가 나를 거역한 연고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네 길과 행사가 이 일들을 부르게 하였나니 이는 너의 악함이라 그 고통이 네 마음에까지 미치느니라”

이스라엘이 다른 민족과의 차이점은 이스라엘은 여호와 하나님을 위반하고 여호와 하나님에게 눈 돌리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이런 환란과 고통을 준다는 겁니다. 이것은 시편 25편 18절에 보면 “나의 곤고와 환난을 보시고 내 모든 죄를 사하소서”라고 되어있어요. 나에게 죄가 있기에 하나님께서는 그냥 방치 하지 아니하시고, 그냥 나몰라라 하지 아니하시고 곤고와 환난을 가지고 이스라엘에게 압박을 주고 또는 성도에게 압박을 주시는 겁니다.

그렇게 될 때 성도는 구원받는 게 이렇게 어렵고 힘들다는 것을 아는데 성도 개인의 구원이 힘들고 어렵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에 내용은 이스라엘의 기능에 관한 겁니다. 다른 민족과 달리 이스라엘이 죄를 지으면 즉각적으로 환란과 곤고가 온다는 것은 이스라엘 통해서 인간 세상 사람들이 외면하고 있는 악, 그 죄에 대해서 그걸 현실화하는 것에 대해서 말하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 14절에 보면 “예루살렘아 네 마음의 악을 씻어 버리라 그리하면 구원을 얻으리라 네 악한 생각이 네 속에 얼마나 오래 머물겠느냐”라고 되어있어요. 그러면 구원이 뭐냐 하면 악에서 벗어나는 것이 구원이고 씻어 없앴으니까 악이 없는 것이 구원의 상태입니다. 이것을 이스라엘에게만 허락했어요. 이스라엘만 악을 알아요. 그리고 구원도 압니다. 다른 민족은 악도 모르고 구원도 없습니다. 구원을 모르니 악하다는 이야기를 할 이유가 없는 겁니다.

너는 악이 있다. 그런데 악을 제하면 너는 구원받는다. 이 구원과 악, 두 가지 다 이스라엘을 통해서 주님께서는 그것을 드러내고자 하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하나님께 있어서 이스라엘은 움직이는 인형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인형이라고 해서 이걸 기분 나쁘게 생각하지 마시고요, 이걸 굉장히 흔쾌히 감사함으로, 내가 주님이 다루시는 인형이라고 받아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인형이 해야 할 일이 뭐냐. 죄 외에는 내놓지 마세요. 그래야 이 구원이 하나님에 의해서만 이루어지는 구원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인형인데 어떤 인형이냐 하면 죄만 내놓는 인형, 죄만 내놓는 일을 하는 하나님이 다루시는 그런 인형이라면 깔끔하지 않습니까? 고민할 것 없지요? 하는 것 족족 죄만 나오니까 그야말로 자동(automation)인형이죠.

이스라엘이 바로 이런 기능을 담당했습니다. 그러면 이스라엘은 어떻게 해서 악을 알고, 악을 알아야 구원을 아는 거니까, 악을 알고 악을 이스라엘에게 일어나게 함으로써 악을 통해서 이스라엘 자기 자신이 구원될 대상인 것을 하나님께서 알게 하시는 겁니다. 자기 속에서 악이 계속 유발되도록 하나님께서 환경을 조성해나가는 겁니다.

그러니까 성도는 무엇에 감각이 있느냐 하면 내가 하는 것 족족 주님 보시기에 이건 말도 안 되는 나쁜 죄이고 악이 된다는 것을 성도는 매일같이 경험하고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 성도는 매일같이 주님이 주시는 구원에 대해서 늘 고마워하고 감사하죠. 그러면 구원이라는 것을 주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면 이렇게 생각합니다. 이건 제 말이 아니고 예레미야에 나오는 말씀이니까 여러분에게 제가 한번 물어보겠습니다.

예레미야 13장 23절에 나오는 말씀인데 제가 묻는다고 생각하지 마시고요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직접 묻는다고 생각하세요. “구스인이 그 피부를, 표범이 그 반점을 변할 수 있느뇨”라고 묻는 거예요. 구스인은 흑인이죠. 흑인이 피부가 까맣지가 않고 표범이 그 얼룩덜룩한 반점이 없어질 수 있느냐고 하나님이 저와 여러분에게 묻습니다. 답변은 간단합니다. 그런 일은 없습니다.

그런 일은 없어요. 흑인이 DNA가 까만데 어떻게 하얗게 됩니까? 물론 병 걸리면 되지요. 마이클 잭슨처럼. 그렇지 않고서는 흑인이 백인이 될 수 없어요. 표범이 반점 없으면 표범이 아니죠. 그냥 소처럼 보이지. 표범이 반점이 있어야 표범이잖아요. 없으면 그냥 범이고. 이건 주께서 주시는 질문이니까 주님이 주시는 질문에 대해서 우리의 답변은 어떻게 유도하느냐. 있을 수 없습니다.

주님, 그건 말도 안 됩니다. 있을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겁니다. 네가, 죄만 나오는 네가 의만 나온다는 것이 있을 수 없는 것과 동일한 이치라는 겁니다. 이스라엘이 어떻게 구원받느냐가 아니라, 이스라엘을 통해서 구원이 무엇인가를 이야기하는 거예요. ‘너희는 구원받았냐? 우리는 구원받았다’라는 것을 자랑하라는 것이 아니고 성도를 통해서 구원이 뭐냐는 것을 말 하시는 겁니다.

‘이건 내가 할 수 없나이다’라는 그 고백이 나와야 해요. 왜 할 수 없는데? ‘저에게는 죄만 나오는 그런 인형이기 때문에요’ 구원이 될 수가 없지요. 죄를 씻어야, 악을 씻어야 구원이 되는데 계속 퍼내도 퍼내도 죄가 나오는데 어떻게 구원이 될 수가 없지요. 죄가 뭐냐? 내가 나에게 시키는 거, 그것이 죄입니다. 주님이 시키지 않고 내가 내 지시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 죄거든요. 이게 이방인들의 특징이에요.

예레미야 13장 23절에 보면 이렇게 되어있습니다. “악에 익숙한 너희도 선을 행할 수 있으리라” 이게 뭘 하라는 말이 아니고 어디까지나 “있으리라”만 남습니다. 주님 내가 너희를 그렇게 만들고야 말리라. 악만 나오는 너희에게 하나님의 선과 의가 나오게 내가 그렇게 만들어줄게. 그렇게 만든 상태가 구원상태거든요. 설교 처음부터 다시 돌아가 봅시다.

지금 이스라엘이 어떻게 구원받고 우리가 어떻게 구원받는 그런 건 관심 없고, 우리는 하나의 인형이에요. 주님이 가지고 일하는 인형이에요. 전에는 악만 나오고 죄가 나온 거예요. 그런데 이제는 뭐가 나온다? 하나님의 의가 나오고 그의 나라인 천국 이야기가 나오고 영생이야기가 우리 입에서 솔솔 나오는 거예요. 술 한잔 마신 것처럼 술술 나와요.

천국 이야기와 하나님의 의의 이야기가 술술 나오는 거예요. 정치 이야기가 술술 나오는 거 말고요. 국민의 힘 말고, 정치 이야기 말고, 윤석렬 이야기 말고, 주님의 복음 이야기가 술술 나오기 때문에 본인이 그걸 막을 수가 없어요. ‘내가 지금 이 이야기가 나올 자리인지, 분위가 다 버리는데 복음 이야기가 나오나, 그래도 나오네?’라는 식으로 계속 나오는 거예요.

세상 이야기를 안 한다는 말이 아니고 세상 이야기를 해요. 하고 그다음 복음 이야기를 같이 곁들여서 합니다. 세상은 악만 나오고 죄만 나옵니다. 이쯤 해서 세상이 말 할 수 있는 죄의 극치, 죄의 극단은 뭐냐 하면 ‘자경단’입니다. 인간의 심보 속에 이게 들어있어요. 자경단이라는 것은 경찰이고 군인이고 필요 없고 내 마을은 내가 지키고, 내 가정은 내가 지킨다는 겁니다.

자경단에게 꼭 필요한 것은 권총입니다. 학원에서 밤늦게 귀가하는 딸들 지켜주면서 뒷주머니에 권총 소지하고 있다가 누구든지 내 딸을 납치하거나 건드리면 언제든지 쏠 준비를 하고 있는 거죠. 경찰을 믿지 못하죠. 이태원 파출소를, 용산 경찰서장을 못 믿지요. 자경단이 바로 내 가족은 내가 지키고, 내 것은 내가 지키고, 내 재산은 내가 지키고, 이렇게 내가 지킨다는 거예요. 뭘? 내 재산을. 뭘? 내 가족을.

그런데 이스라엘은 뭐냐 하면 내놓는 것이 죄밖에 없어요. 이방 민족은 내놓는 것이 내 것은 내가 지키는 건데. 그러니까 이스라엘이 특수한 거예요. 이스라엘 말고 다른 이야기 하면 이렇습니다. 어제 십자가 마을에 겨울 수련회 교재를 올려놨습니다. 저번 것보다 쉬울 텐데 그 내용이 이러해요. 사실 좀 어렵기 때문에 요약해 드리는 거예요.

인간이 1776년, 7월 4일에 미국 땅에 도착한 영국사람들이 독립선언문을 발표하는 것부터 시작해요. 내 재산과 내 목숨은 우리가 스스로 만든 국가가 정부를 만들어서 지킨다는 것부터 시작합니다. 그런데 그 내용에 하나님이 들어갑니다. 하나님이 만인을 동등하게 창조하셨다고 되어있어요. 그러니까 이건 뭐냐 하면 하나님은 핑계고요, 실은 뭐가 중요한 거냐면 내 목숨과 내 것은 우리가 스스로 만든 정부에게 맡겨서 그 정부가 우리 생명과 재산을 지키는 것이 합당하는 겁니다.

이게 인간의 생각입니다. 방금 성경에서는 이스라엘의 하는 일이 죄가 나오는 인형이라고 했잖아요. 방금 영국사람들이 아메리카 땅에 왔을 때 그들이 하는 사고방식이 뭐냐 하면 복음을 내놓는 것이 아니고 내 목숨과 내 생명은 우리가 만든 정부가 지켜준다는 거예요. 나중에 영국과 싸움이 나는데 프랑스가 많이 도와주죠. 그리고 또 자기 안에서도 남북전쟁하면서 싸우고. 그때 링컨 대통령이 노예 해방을 들고 나왔고 승리하고 난 뒤에 권총에 살해당하죠.

미국에서 소위 민주주의라는 것이 그렇게 됩니다. 유명한 게티스버그라는 유명한 곳에서 링컨이 연설한 것이 있어요. 옛날 영어참고서 성문종합영어에 연설이 영어로 나와요. “under God, shall have a new birth of freedom-and that government of the people, by the people, for the people, shall not perish from the earth.” 오직 인민의, 인민에 의한, 인민을 위한 정부는 영원히 이 세상에서 사라지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 앞에 연설한 사람이 2시간 30분 동안 연설했는데 링컨이 한 것은 20분이 채 안 돼요. 그런데 앞에 긴 연설은 다 잊어버리고 링컨의 연설만 그렇게 유명하게 되었어요. 인간을 위한, 인간 이전에 우리의, 나의 소유를 위한 정부, 나의 소유에 의해서 우리 손으로 세운 정부는 이 땅에서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것을 그들은 민주주의라고 본 겁니다.

따라서 인간은 뭐냐, 나의 가치는 뭐냐, 네가 속해있는 정부와 국가에서 네 역할을 제대로 긍정적으로 하게 되면 그 인간은 나라에서 네가 가치 있고, 그 나라에서 네 역할이 국가 성장과 발전에 보탬이 되지 아니하면 너는 무가치한 존재가 되는 거예요. 인간이 죄만 나오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거예요. 이방 민족의 정부, 오늘날 우리가 익히 아는 현실 세계에서는 죄만 나오는 것이 아니고 내가 이 나라에 얼마나 기여하고 얼마나 보탬 되고, 내가 생물학자로서 새로운 약품도 개발했는데, 내가 물리학자로서 인공지능을 연구했는데, 이것이 국가 수출에 얼마나 이바지를 했는데 내가 죄만 지은 것이 아니고 의로운 일도 함으로써 나는 당당히 이 한국에서 내 역할을 고집할 수 있는 자격이 된다.

이것이 바로 미국의 시민 정신입니다. 언뜻 들어보니까 미국까지 갈 것도 없이 우리가 평소에 사는 마음가짐이죠. 마음가짐이에요. ‘물론 죄짓는다. 이웃에 해코지하고 함부로 쓰레기도 버리고 죄를 짓지 죄만 짓는 것이 아니고 의도 함께 행하고 있다’라는 이것이 바로 오늘날 이방 민족인 우리에게 콱 박혀있는 사고방식입니다.

정부도 나에 의해서예요. 그러니까 내가 주인이에요. 우리나라 헌법 1조가 뭐냐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예요. 나라의 주인이 국민 말고 따로 정하는 사람을 우리는 일체 인정 하지 않는다는 것이 헌법 1조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그게 아니에요. 이스라엘은 이렇게 합니다. ‘그래 가지고 표범의 반점이 변할 수 있냐? 네가 그렇게 민주주의 주창해서 그런 이상적인 정부 주장해서 그래서 흑인이 피부가 하얗게 변하겠느냐?’

왜 우리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지만 우리는 못 하는 일인 줄 알아요? 우리가 죄인이기 때문에 그래요. 주님은 의인이기 때문에 해내는데 우리는 죄인이기 때문에 표범의 반점을 없애지 못하고 흑인을 백인처럼 못하는 겁니다. 우리의 죄를 우리가 어떤 노력을 다하고, 어떤 아이디어를 끄집어내고, 어떤 참신한 정보를 만든다 할지라도, 얼마나 정부에 기여한다 할지라도 우리의 죄에서 우리는 구원받지 못합니다. 구원 없습니다.

죄에서 벗어날 수 있는 능력 있어요? 구원받을 방법 없습니다. 정말 이건 한숨 쉴 문제예요. 이건 보통 문제가 아닙니다. 이사야 1장 18절 보겠습니다.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하나님과 이스라엘과 한번 토론하자는 거죠. “너희 죄가 주홍 같을찌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찌라도 양털 같이 되리라”라는 이 점을 두고 논쟁하자는 겁니다. 너희들이 이 이야기를 받아들일 수 있는지 없는지 논쟁하자는 겁니다.

너희는 죄를 지었기 때문에 너희 힘으로 양털같이 희어질 수가 없습니다. 왜냐 하면 짜면 짤수록 붉은 죄가 계속 나오기 때문에 있을 수가 없어요. 그런데 제가 설교 처음에 이야기했듯이 이게 이스라엘의 장점이라는 겁니다. 다른 정부에게는 우리의 정부가 우리를 살린다는 그런 사고방식에 관심이 있잖아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 죄나 악의 문제를 거론하는 것은 바로 구원을 해주시기 위해 그렇게 하신 거예요.

구원하기 위해서 죄 문제를 거론하시는 것이 하나님만이 하실 수있는 방법이에요. 왜 하나님만 하실 수 있는가. 예수님이 바로 그 죄의 노선을 따라 들어왔기 때문이에요. 너희를 죄밖에 없는 인형으로 죄만 짓는 세계로 의도적으로 조성하시는 이유는 ‘기다려라. 그 죄만 있는 곳에 가서 내 아들 보낼 게. 내 아들 보내서 내 아들마저도 그 죄에 함몰되게 만들게’라고 하시죠.

죄는 함몰되지 않지만 죄가 주는 고통과 아픔이 함몰되게 만들어 놓고요, 거기서 누구를 끄집어내느냐 하면 그 죄밖에 없는 어떤 인간도 해내지 못하는 곳에서 하나님께서는 자기 아들을 죄 가운데서 구원이라는 것을 시작하십니다. 이 대목에 대해서 이사야 50장 6~7절에 이렇게 나와요. “나를 때리는 자들에게 내 등을 맡기며 나의 수염을 뽑는 자들에게 나의 뺨을 맡기며 수욕과 침 뱉음을 피하려고 내 얼굴을 가리우지 아니하였느니라”

예수님께서 이 죄에 대해서 맞이하는 마음 자세가 뭐냐 하면 수염을 뽑고 등을 때리는 이에게 등을 맡기고 뺨을 치는 자에게 뺨을 맡기면서 반항하지 않는 거예요. 권총 들고서 ‘어디 나를 감히 때려’라고 총 쏘는 자경단을 만들지 않아요. 보통 인간들은 죄만 나오기 때문에 죄의 극치가 뭐냐 하면 내 신체, 내 딸, 내 가족, 내 재산은 내가 지킨다 예요. 누가 감히 내 것을 건드려.

로마서 12장 19절에 보면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라는 이게 인간이 안 돼요. 인간은 성격이 이상해서 이게 안 돼요. 물론 총 들고 쏘아죽이기도 하고 칼 들고 찌르기도 하고 먹는 주스에 약을 타기도 하면서 노골적으로 해코지하는 것도 하지만 속으로 저주하고 ‘가다가 바나나껍질에 미끄러져서 넘어져라’라고 하는 것도 같아요.

‘뭐 그런 말도 못 합니까’라고 따질 수가 있는데 그런 말도 못 해요. ‘바나나 먹고 자기가 먹은 껍질에 미끄러져서 죽어버려라’라는 이런 것도 안 돼요. 어떤 것을 하든 결국에는 뭐냐 하면 ‘너같은 인간은 사라져줘’라고 하는 거예요. 정작 사라진 분은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다른 사람은 이 땅에서 안 사라졌어요. 예수님만 사라졌지. 예수님만 아버지께서 뽑아내 가신 겁니다.

결국 인간은 말씀대로 살지 못한다는 것을 계속해서 이야기 드리는 겁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인간의 죄는 스스로 하얗게 될 수도 없고 표범의 반점이 변하지도 않고 흑인이 피부가 하얗게 되지 않는 것처럼 우리의 죄는 그대로 있습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이 성도라면 이 점을 받아들여야 해요. 그러면 이스라엘 이야기를 왜 하느냐. 남을 통해서 내 모습을 보는 거예요.

왜냐 하면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구원자가 누구에게 돌아가셨느냐 하면, 누구에게 수염 뽑히고, 누구에게 뺨 맞고, 누구에게 채찍을 맞았는가 하면 바로 하나님이 구원하시고자 보냈던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예수님, 이스라엘 하나님은 이렇게 당했던 거예요. 구원자이신 하나님을 구원받을 인간이 등을 때린 겁니다. 이게 우리 본심의 끝자락이에요. 우리가 이 본심 가지고 하나님과 만나야 해요.

나는 때리고 주님은 얻어맞는 분으로서 만나줘야, 내 죄의 극치가 나타나요. 내 죄의 마지막 모습이 나타납니다. 나 건들지 말라고 했지?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한다고 했지? 내가 이 국가에 얼마나 보람되고 훌륭하고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거 알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수련회 교재 서론부터 이렇게 되어있어요. 국가에 말고, 다른 국가의 기능을 갖고 있는 사람, 예수님이죠, 다른 국가의 기능으로 이 땅에 오신 분은 이 국가가 예수님을 용서하지 않는 겁니다.

성도는 이 세상에서 얼마나 중요한 존재인가 하는 그것이 성도가 아닙니다. 성도는 하나님 나라에 얼마나 중요한 존재이냐의 문제입니다.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지요. 이 땅에 있는 것이 아니에요. 이 땅에서 우리는 소멸해요. 언젠가 주민등록 말소됩니다. 이 국가에서 나는 이 정도 기여했다고 우기지 마세요. 그건 미국 독립선언문에 나올 이야기예요.

이스라엘은 그게 아니고 주님이 자신을 때린 자를 주님이 구원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사람들은 ‘표범의 반점이 변하냐?’ 할 때 그거 안 되죠. 그러니까 네가 왜 네 죄에서 구원이 안 되는 이유를 아느냐? 너는 악한 역할을 해야 하기 때문에 안 되는 거예요. 되지를 않는 겁니다. 끝으로, 그러면 성도는 맨날 쭈그리고 앉아서 ‘나는 죄인입니다’라고 살아야 할까요? 아니면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그게 사도행전에 두 군데 나옵니다. 사도행전 16장 37절에 먼저 보면 사도바울에게 간수가 이제 나가도 된다고 말을 하니까 사도바울이 이렇게 말합니다. “바울이 이르되 로마 사람인 우리를 죄도 정치 아니하고 공중 앞에서 때리고 옥에 가두었다가 이제는 가만히 우리를 내어 보내고자 하느냐 아니라 저희가 친히 와서 우리를 데리고 나가야 하리라 한 대”

이게 뭐냐 하면 성도는 이 땅에서 말할 것도 없이 당당해야 해요. 왜? 우리 시민권은 하늘에 있기 때문에 정권이 어떻게 바뀌든 상관없이 우리는 어떤 경우라도 당당해야 해요. 우리가 심판한다는 것이 아니고 당당해야 해요. 사도행전 22장 27~28절에 보면 “천부장이 와서 바울에게 말하되 네가 로마 사람이냐 내게 말하라 가로되 그러하다, 천부장이 대답하되 나는 돈을 많이 들여 이 시민권을 얻었노라 바울이 가로되 나는 나면서부터로라 하니”

이게 뭐냐 하면 성도는 이 땅에서 어떤 정권이 바뀌어도, 김정은 정권 앞에서도 당당해야 합니다. 왜? 사람이 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났잖아요. 많은 죄가, 주홍같은 죄가 양털처럼 희어졌잖아요. 이제는 우리 입에서 놀랍게도 슬금슬금 그 나라 의가 나와요. 예수님이 채찍에 맞음으로 죄 사함을 얻었다는 이야기가 슬금슬금 자꾸 나와요. 물론 수업시간에 이런 이야기 하면 문제가 되겠지만 어쨌든 간에 계속 나와요.

세상이 하지 못하는데 그걸 주께서 하셨고 그 하신 일이 나에게 일어났다는 이야기를 슬금슬금 계속 나온다는 이야기입니다. 이걸 왜 당당하게 이야기 못 합니까? 물론 뭐 실없이 당당하게 이야기하지 마시고요. 회사에서 이야기하지 마시고요. 누가 뭐라 하거든, 세상 고민에 대해 이야기하거든, ‘나는 걱정 안 해. 원래 세상은 그런 거야’라고 당당하게 사도바울처럼 초연하게 이 땅을 뛰어넘은 사람으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를 죄가 나오는 인형으로 사용해 주심을 감사합니다. 구원이 있을 수 없는 우리에게 죄를 언급함으로써 구원도 이루어주시는 그 사랑을, 그 놀라운 주의 일을, 이제는 주님만 증거 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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