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오후설교

우연과 필연

아빠와 함께 2022. 11. 24. 19:25

설교노트

 

우연과 필연 

2022년 11월 20일                      본문 말씀: 예레미야 4:19-22

(4:19) 슬프고 아프다 내 마음 속이 아프고 내 마음이 답답하여 잠잠할 수 없으니 이는 나의 심령 네가 나팔소리와 전쟁의 경보를 들음이로다
(4:20) 패망에 패망이 연속하여 온 땅이 탈취를 당하니 나의 천막은 홀연히 파멸되며 나의 휘장은 잠시간에 열파되도다
(4:21) 내가 저 기호를 보며 나팔소리 듣기를 어느 때까지 할꼬
(4:22) 내 백성은 나를 알지 못하는 우준한 자요 지각이 없는 미련한 자식이라 악을 행하기에는 지각이 있으나 선을 행하기에는 무지하도다

예레미야는 선지자로서 인간 세계와 하나님의 세계, 양면을 다 지니고 있습니다. 인간쪽에서는 보면, 이방민족에게 하나님의 백성들이 무참하게 밟히고 무너질 때에, 더는 이스라엘에 있어 ‘나의 것’이라는 것은 없습니다. 사람들에게 있어 슬픈 일과 가슴 아픈 일은, 자기 자신의 것의 가치가 무너지는 일입니다.

자신에게 더는 아무런 희망이 없다면 인간에게는 살 이유가 상실한 겁니다. 살려내려고 하는 그 내용 자체가 없기에 살아야 될 필요도 없게 된 겁니다. 이스라엘은 생각합니다. 이스라엘 본인들이 잘 살아야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증명할 수 있다고 말입니다. 그런데 그 기반이 다 무너지게 됩니다. 하나님에게 부끄러운 백성이 된다는 게 참으로 서글픈 일입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하나님 입장을 생각해봅시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세우신 나라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그 취지를 자진해서 무효화시키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방나라를 통해서 이스라엘을 공격하도록 배후에서 조종하신 이유는, 하나님 자신의 슬픔 마음을 전달하기 위함입니다.

즉 왜 이스라엘은 제대로 하나님의 뜻을 반영해내지 못하느냐에 대한 탄식 같은 겁니다. 이 양면성을 예레미야는 다 담아 보여주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나서서 이스라엘을 멸망시키신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언약 성취에 대한 변함없으신 의지를 보여주신 겁니다. 즉 그 어떤 경우라도 이 인류의 역사는 언약 성취로 이미 목적이 설정되어 있다는 겁니다.

수정되거나 변경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이스라엘이 망하던 흥하던 상관없이 한곁같이 하나님의 뜻이 여전하십니다. 이 뜻에 맞추어서 계속해서 예레미야에게 하나님의 계시가 주어지게 됩니다. 가슴 아파하시는 하나님의 심정을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를 통해서 이스라엘에 나타내십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심정은 전에 이스라엘에게 내려주셨던 계시보다 더 인간적으로 다가오게 됩니다. 예레미야 31:33-34에 보면,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에 세울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그들이 다시는 각기 이웃과 형제를 가리켜 이르기를 너는 여호와를 알라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앎이니라 내가 그들의 죄악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지 아니하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이스라엘이 ‘죄 없는 민족’이 아니라 ‘죄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을 향한 구원을 성취하시겠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인간들로서는 더는 ‘죄없다’가 되지 못하는 이유가 하나님의 조정에 의해서 이스라엘을 통해 드러나고 밝혀져야 하는 겁니다. 이스라엘, 곧 인간의 죄는 하나님께서 설정해 놓으신 천국의 원칙과 맞지 않습니다. 천국이란 인간 자신을 위한 나라가 아닙니다. 그런데 인간은 오로지 자기 자신만을 위한 존재입니다.

따라서 전혀 천국 삶에 적합지 않는 자들을 가지고 하나님께서는 천국 백성에 부합되는 자로 전환시키는 작업을 하시기 됩니다. 욥의 경우를 통해서 보겠습니다. 욥은 인간적으로 봐서 완전한 자입니다. ‘완전한 자’라는 말은 실수와 오류가 거의 없다는 뜻입니다. 이는 욥이 나름대로 자기에게 일어나는 매사에 있어 실수가 오류를 줄이는 필연적 규칙을 몸에 배겨 있다는 말이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욥이 추정하지 못하는 고난을 주셨습니다. 그러니까 욥은 평소대로 자신의 삶의 원칙을 가동합니다. “내가 어디가 문제이고 어디가 잘못되었는지 알려주신다면 다음에 고쳐서 제대로 하겠습니다”라는 식으로 나옵니다. 하지만 여기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일체의 언질이 없으십니다.

그 이유는 바로, 욥은 나름대로 우연에서 필연을 만들어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우연은 오로지 자기 자신의 완전한 순결과 의로움을 위한 겁니다. 이런 식의 의는 천국과 맞지 않는 필연입니다. 이로서 욥은 스스로 조치로서는 하나님이 주신 고난을 철회시킬 방안이 없음을 알아야 했습니다.

욥이 미처 알지 못하는 그 큰 필연이 하나님에게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큰 범주의 필연으로 인해 욥은 일체 자신이 구성한 모든 필연적 원칙은 과감하게 허물어져야 했습니다. 이번에는 사사 기드온의 경우를 봅시다. 그는 그저 방앗간하면 평범하게 포도 농사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여기에 갑자기 천사가 들이닥칩니다. 이는 곧 우연입니다. 그리고 난데없이 대낮에 동네 한복판에 있는 바알과 아세라 신상을 깨트리라고 지시합니다. 그동안 기드온이 나름대로 구축해온 삶의 원칙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요구입니다. 자기 자신이 무참하게 깨질 지경입니다. 기드온는 기존의 자기 삶의 필연적 법칙을 지키는데 피해를 줄이기 위해 밤에 몰래 신상을 깨었습니다.

사람들이 자신을 비난 공격하는 것이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일을 더 크게 만들고 맙니다. 온 동네 사람들이 기드온 집에 쳐들어와서 기드온을 죽일테니 기드온을 내어놓아라고 합니다. 기드온의 아버지 요나스는, 이번 일은 사람이 보복할 일이 아니라 바알 신이 보복할 일이라고 하면서 자기 아들을 지켜줍니다.

하지만 천사는 물러서지 않고 그 비겁한 기드온을 또 찾아옵니다. 그것은 그동안 이스라엘이 자체적으로 구축한 필연으로서는 결코 이스라엘을 우상에서 지켜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번에 기드온이 앞장 서서 이방민족의 압제에서 이스라엘을 건져내라고 지시합니다. 기드온은 평소의 자신의 필연 법칙을 동원합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이 제안에 대해서 기적적으로 일이 일어나면 하나님의 뜻에 따르겠다고 합니다. 새벽에 밖에 둔 솜에만 이슬이 맺히고 주변 땅에서 이슬이 없는 경우를 발생하면 하나님께서 명령한 것으로 받아들이겠다는 겁니다. 나중에 기드온은 조건을 반대로 가져가지만 결과는 역시 기드온의 조건대로 일이 일어납니다.

이로서 이스라엘이 이방민족에게 당하는 것은 이방민족의 횡포가 아니라 이스라엘 자체에 문제가 있음이 밝혀집니다. 늘 하나님이 주시는 우연을 맞이하면서 자기를 위한 자기 것으로 챙기지 않아야 하는 것이 천국 조건에 부합되는 천국의 삶인 겁니다. 자기를 제거하는 그 방향성이 곧 천국쪽으로 나아가는 방향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십자가 조건만이 우리 안에서 계속 작용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설교

 

26강-예레미야 4장 19~22절(우연과 필연)221120 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예레미야 4장 19~22절입니다. 구약성경 1056페이지입니다.

“슬프고 아프다 내 마음 속이 아프고 내 마음이 답답하여 잠잠할 수 없으니 이는 나의 심령 네가 나팔소리와 전쟁의 경보를 들음이로다, 패망에 패망이 연속하여 온 땅이 탈취를 당하니 나의 천막은 홀연히 파멸되며 나의 휘장은 잠시간에 열파되도다, 내가 저 기호를 보며 나팔소리 듣기를 어느 때까지 할꼬, 내 백성은 나를 알지 못하는 우준한 자요 지각이 없는 미련한 자식이라 악을 행하기에는 지각이 있으나 선을 행하기에는 무지하도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이스라엘 선지자, 유다 나라의 선지자입니다. 이 선지자가 한쪽은 백성을 바라보고 한쪽은 하나님을 바라봅니다. 이스라엘이 아직 멸망하기 전이에요. 멸망하기 전이라는 말은 하늘에서 보낸 연락책이 파견되어있다는 뜻이고 그 연락책이 선지자 예레미야입니다. 예레미야의 일은 사적인 일이라고 보시면 안 되고, 하나님께서 그 현장에서 느꼈던 기분과 감정을 예레미야가 그대로 대변해 주고 있습니다.

슬프다, 아프다, 이런 것들은 사람들만 느끼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도 같이 느끼고 있습니다. 이것은 다른 이방 나라가 망해서 슬프고 아픈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이 망해서 슬프고 이스라엘이 이방나라에게 당해서 슬프고 아프고 괴롭다는 것이고 답답하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런 이야기들이 인간 입장에서는 참 이해하기가 힘들죠. 왜 그러냐 하면 이스라엘을 공격하라고 누가 배후에서 부추겼느냐 하면 하나님 본인이 부추겼어요.

하나님 본인이 부추겨서 이스라엘 망하게 해놓고 이제 와서 ‘내가 아프다’라고 하면 이건 짜고 치는 고스톱도 아니고 일거리를 조작해 놓고 슬프다는 것을 의도적으로 유발하고자 하는 상황을 만들어가시는 겁니다. 이게 왜 그러냐 하면, 하나님이 슬프다고 하는 그것을 선지자가 슬프다는 것으로 이어져야 하고 그다음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이 슬프면, 선지자가 슬프면, 나도 슬프다고 할 때 그게 진짜 이스라엘 백성들이에요. 서로 통해야 하는 겁니다.

벌써 선지자가 아프다고 하는 것은 선지자가 일방적으로 하나님 편에서 냉정하게 하는 것이 아니고 인간들인 이스라엘 백성들의 입장을 충분히 고려한 그런 마음가짐을 예레미야가 지니고 있다고 봐야 합니다. 그러면 여기서 ‘슬프다, 안 슬프다’보다 더 중요한 것은 왜 이렇게 이스라엘이 망했는가 하는 그 이유가 뭐냐, 그건 다른 나라가 더 나쁘고 힘이 세서가 아니라 그동안 내가 나를 망쳤다는 사실을 이스라엘 본인이 몰라서 그래요.

하나님의 뜻을 위배하는 자가 남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으로 지목당한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고 있다고 봐야 합니다. 그건 간단한 예를 하나 들면 금방 알 수 있는 거예요. 천국이 뭐냐 하면 나의 것을 용납하지 않는 동네가 천국입니다. 나 위주로 살아가는 동네가 천국이 아니에요. 그래서 천국은 내 것을 챙길 수가 없어요.

마태복음(22장)에 나오는 혼인 잔치에 초대받은 사람은 절대로 자기일 바쁘다 하면 안 돼요. 임금님의 아들 혼인 잔치에는 이구동성으로 아무 소리 말고 다 참석해야 해요. 일방적입니다. 강압적이고 임금님의 기쁨에 참여하지 않으면 징벌을 당하고 진멸 당하는 그것이 바로 천국입니다. 천국은 일체 인간의 사적이고 개인적인 욕구나 욕망을 허용하는 곳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그 당시 이스라엘 사람을 어떤 사람이라고 볼 때, 어떤 사람이 교회에 나오면 평소에 그 사람의 행동이 누구를 위해 행동하고 누구를 위해 일하는지를 주시해보면 알죠. ‘왜 일하는데? 뭐 때문에 이런 일을 하는데? 뭣 때문에 그런 행동에 나서는데? 누구 좋으려고 하는데?’라고 할 때 ‘우리 가정을 위해서, 나의 기쁨을 위해서 한다’라고 하면 뭐 땡 탈락입니다. 그건 천국과 안 맞죠.

세상과는 너무 잘 맞는데 천국에 들어갈 사람으로서는 할 소리가 아니고 마음 가질 태도가 아닌 겁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어떤 사람을 볼 때 그 사람이 천국 갈까, 지옥 갈까를 어떻게 판별하느냐. 그 사람의 하는 방향이 어느 쪽인지, 인생의 방향이 어느 쪽인지를 보면 됩니다.

자기를 돋보이는 쪽으로 가게 되면 그건 지옥이고, 자기를 파멸시키고 자기를 삭제시키고 소거하고 자기 생각을 잃어버리고 안 하려고 한다면 그건 천국 쪽이고 그런 겁니다. 여러분들도 다 그런 쪽으로 살고 있지요? 이 말은 괜히 한 거 같네요. 인간은 바르게 살고 싶지요. 하지만 선악 논리보다 더 우선되는 것이 취향입니다. 나의 취향이냐, 선악이냐, 어느 쪽으로 구분되고 어떻게 구분되는가는 취향이 더 근본적이고 기본적이에요.

머리 속에서는 이게 되는 줄 알지만 끌리는 것은 취향이 더 끌리게 되어있어요. 인간은 나를 위해 살게 되어있어요. 그래서 이 선지자가 바로 너희들 이스라엘 멸망하는 것에 대해서 선지자는 굉장히 슬프게 바라본다는 겁니다. 왜? 본인들이 그 취향에 문제가 있고 본인들이 하늘나라와 안 맞는 태도를 하면서 자기 자신이 구원을 방해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는 것이 슬프고 아프다는 겁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대책이 있어야 하는데 그 대책이 뭐냐. 예레미야 31장 31~33절에 보면 마지막 날에 내가 언약을 다시 세울 텐데, 그 언약이 뭐냐 하면 “나의 법”, 즉 하나님의 마음이죠, 이 하나님의 심정을 돌판에 새기는 것은 이미 끝났고요, 아예 너의 마음속까지 쑥 집어넣겠다는 겁니다. 쑥(SSUG)~너무 말해서 식상한데 이 ‘쑥’이라는 말을 자주 쓰는 이유가 ‘집어넣어야지, 어떻게 한번 받아볼까, 어떻게 내 것 한번 챙겨볼까’라는 이런 나의 사전적인 예상을 무력화시키고 그냥 일방적으로 집어넣는 거, 그걸 제가 쑥(SSUG)이라고 표현하고 싶어요.

그냥 들어오는 거예요. 그냥. 허락도 없이, 난데없이, 무작정 주님이 우리 마음속에 쳐들어오는 거예요. 그래놓고는 ‘내 마음 집어넣었다. 너는 이제부터 이스라엘이야. 그러면 네가 하는 행동 하나하나가 하나님이 아프고 쓰리고 슬퍼하는지를 네가 같이 공감해야 해’라는 그런 관계에 돌입하게 됩니다. 이제는 하나님과 떨어지려야 떨어질 수가 없죠. 작대기가 쑥 들어가 버렸으니까요.

그래서 이건 뭐 우리는 우리 취향대로 내 뜻대로 살고 싶지만 집어넣은 작대기가 휘저어버리거든요. ‘네 인생 네 맘대로 안 돼. 하나님의 언약 맘대로 돼’라는 거죠. 그 언약이 뭐냐?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라는 겁니다. 개인적인 인생관은 끝났어요. 나와 내 가정을 위한 삶도 없습니다.

자식들 장가 시집 보내고 우리는 우리끼리 살자는 그런 거 없습니다. 끝났습니다. 우리끼리라는 말은 이제 없습니다. ‘우리민족끼리’라는 말은 저 북한에 있는 한 언론매체 이름이고 여기는 없습니다. 그냥 일방적으로 다루십니다. 마치 옛날에 이스라엘을 다루듯이 오늘날 성도를 그렇게 다루시는 겁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애초부터 그렇게 쑥~들어오면 되는데 왜 하나님께서 처음에는 그냥 방치하시는가.

그것은 하나님께서 개개인에 대해서 일체 아무것도 기대하거나 묻지 않기 위한 배려입니다. 그걸 어렵게 말해서 하나님은 다윗 중심으로 한 분의 왕에 종속되게 하시는 거예요. 어떤 마술사가 있는데 그 마술사가 마술한다고 해놓고는 그 무대 위에 조수와 몇 가지 기구만 놓여있고 마술사는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관람객들이 마술사도 없는데 무슨 마술이 될까 의아해하며 지켜보는데 어디선가 음성이 들리기 시작해요. ‘조수 아가씨, 이것을 이렇게 옮기세요. 저렇게 하세요’라고 음성만 들리는데 마술이 돼요. 마술사는 없고 소리만 있는 마술. 이게 뭐냐 하면 주님께서 자기 마음을 우리 속에 집어넣어 놓고 우리를 주님의 마술 조수로 만들어버린 거예요.

그러면 다른 사람이 뭐라고 하느냐 하면 ‘너에게 하나님이 계심을 보여라’라고 하겠죠. 뭐 보일 게 있어야 보이죠. 죄짓는 나밖에 안 보이는데 뭘 보여요. 우리가 죄짓는 육신밖에 안 보이는데 뭘 보입니까. 주께서는 마술사 없는 마술사로 음성으로써 우리 내면에 음성, 그러니까 새언약이죠, 우리를 성령의 음성으로 조종하기 때문에 남에게 이렇다 저렇다 말을 할 수가 없어요.

홍시 맛이 나서 홍시라고 한 건데 그 마음을 어떻게 보이라는 말입니까. 대장금에 나오는 대사지요. 홍시 맛이 난다고 내가 그걸 느낄 뿐인데 뭘 보여줘요? 그냥 종속되는 거죠. 그렇게 되는 이유가 이스라엘이, 그러니까 신자가 불신자를 이긴다가 아닙니다. 언약이 이기는 거죠. 하나님의 약속이 모든 인간의 예상치를 넘어서는 거예요.

이제부터 그 예상치를 넘는 예를 몇 가지 들겠습니다. 첫째는 욥입니다. 욥기를 통해서 우리는 인간의 근원적인 실수와 오류를 통해서만 하나님께서 거기에 쑥~들어오신다는 거예요. 인간의 오류와 실수. 그런데 인간은 본인이 하는데 있어서 오류나 실수가 있다고 사전에 몰라요. 항상 인간은 추정합니다. 이렇게 하면 이렇게 되고 저렇게 하면 저렇게 되고, 항상 추정합니다.

그리고 추정대로 안 되게 되면 자기 행동에 다음 기회에 조정하려고 애를 씁니다. 아하, 이게 실수구나. 이런 요소를 내가 빠뜨렸구나. 그런데 그게 보통 인간 같으면 용납이 되는데 욥에게는 그게 용납이 안 됩니다. 왜냐 하면 욥이 추정하는 것과 하나님이 추정하는 거 사이에 욥은 부지런히 이렇게 이야기했어요. ‘하나님, 제가 잘못된 거 같은데 어디가 잘못되었는지 지적만 해주신다면 다음번에 이 짓을 다시 안 할 테니까 나에게 친절하게 세밀하게 나의 잘못을 이야기해 주세요’라는 식으로 나옵니다.

주께서는 대응하지 않습니다. 모든 인간의 잘못은 인간에게 일어나는 모든 것이 우연인데 인간은 자기 선에서 그걸 필연으로 조작하려고 합니다. 인간들의 잘못은 딱 하나밖에 없어요. 전부 다 우연입니다. 여러분들 주민등록 앞에 몇 년도에 태어난 거 나오죠? 몇 년도 몇월에 태어난 거, 이게 다 우연입니다. 누구를 만나서 결혼한 거, 우연입니다. 그리고 자식이 부모를 만난 것도 우연이고 부모가 그런 자식을 낳는 것도 우연이에요.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손에서 만들어지는 어떤 필연적 구조도 주께서는 모두 철폐하십니다. 인정하지 않습니다. 왜? 인간은 언약을 만들 자격이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인간은 어떤 법칙을 만들 자격이 없어요. 그러나 인간은 자꾸 법칙을 만들어서 그 안에서 자기를 의롭게, 대단한 사람으로 규정하려고 합니다. 독자적으로 ‘나 이정도야. 이런 인간이야’라고 이야기할 때는 자기 나름대로 자신이 살아온 법칙들로 가득 차 있어요.

바리새인들이 그런 짓을 많이 했잖아요. 그래서 인간은 그 법칙을 만들 때 어떻게 하느냐. 자꾸 몸에 익히는 거죠. 그걸 심리학에서 절차 기억이라고 하는데요, 자꾸 반복한 행위는 나에게 진리로 작용한다는 겁니다. 운전하는 거, 자전거 타는 거, 수영하는 거, 이거는 뭐 무의식중에 하다 보면 그렇게 나오도록 인간들이 훈련만, 경건을 위한 훈련이 약간의 유익이 있는 것처럼, 훈련해서 몸에 기억하게 하려고 했는데, 오전에 설교한 것처럼 그 몸은 렌트한 거니까 마귀에게 돌려줘야 해요.

소용없어요. 여러분, 자전거 탄다고 천당 갑니까? 하나님에게 관심사가 뭐냐 하면 지금 너의 가는 방향이 뭐냐는 겁니다. 자기 완벽함에 철저하면 철저할수록 점점 더 하나님을 안 믿게 되는 겁니다. 우연을 안 믿고 내가 그동안 구축해 놓은, 신학적으로 구축해 놓은 괜찮은 것을 가지고 자기 것을 꽉 소유하려고 해요. ‘나는 이 법칙대로 하게 되면 천당 가는데 지장없다’라는 식으로 고집을 부리는 거예요.

사실 이스라엘도 그런 경우를 거쳐왔죠. 사사기 6장에 보면 너무 길기 때문에 제가 짧게 요약해드리겠습니다. 거기 보면 난데없이 기드온에게 천사가 쑥 찾아온 거예요. “부수어 버려라. 너희 동네 중앙에 바알, 아세라상 있는데 그거 낮에 부수어 버려라”라고 하니까 이게 우연이잖아요. 그런데 기드온의 필연은 뭐냐 하면 방앗간 일 하는 거예요.

이건 몸에 밴 절차 기억이 되어서 절차대로 순서대로 아침에 일어나서 방앗간 일을 하는 겁니다. 떡집에서 새벽부터 일하는 것처럼. 떡집에서 40~50년 일 해보세요. 자동으로 다 해요. 쌀을 물에 불리고 하는 것처럼 그냥 자동으로 하듯이, 자기 종사하는 일이 하나의 법칙이 필연이 되어서 그냥 착착 진행하게 되어있어요.

그런데 전혀 관계없는 일, 바알과 아세라를 부수라 하니까 기드온이 하긴 해야 하는데 겁이 나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27절에 “이에 기드온이 종 열을 데리고 여호와의 말씀하신대로 행하되 아비의 가족과 그 성읍 사람들을 두려워하므로 이 일을 감히 백주에 행하지 못하고 밤에 행하니라”라고 되어있어요. 이게 뭐냐 하면 우연을 우연으로 행하지 못하고 자기의 필연이 다치지 않도록, 지금까지 쌓아온 내 명성과 위신에 흠집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밤중에 한 겁니다.

주님께서는 이런 기드온에 행동에 대해서 묵과하고 그냥 넘어가지 않아요. 난리가 나게 하십니다. 그때 CCTV도 없었는데 다 알아버렸어요. ‘아침에 보니까 어젯밤에 다 부서졌더라. 이거 누가 했는가. 우리가 조사하면 다 나와’라고 나온 거죠. 30절에 보면 “성읍 사람들이 요아스에게 이르되 네 아들을 끌어내라 그는 당연히 죽을찌니 이는 바알의 단을 훼파하고 단 곁의 아세라를 찍었음이니라”

내놓으라는 겁니다. 우리가 죽여버리겠다고 하면서. 그러니까 아버지가 아들 죽으라고 내놓겠습니까? 아버지가 아주 멋진 말을 했어요. ‘우리 아들이 사람 죽인 거 아니다. 사람 때린 것도 아니다. 바알 때렸다. 그러면 우리 아들을 쳐도 바알이 때려야지 왜 너희들이 치려고 하는데’라고 하는데 옆에서 기드온이 그 이야기 들으면서 발발발 떨고 있었어요.

요번에는 다른 우연 이야기해 줄게. 이번에는 네가 나가서 전쟁하고 싸워라. 대번에 못 한다고 나오죠. 못 한다고 하면서 필연을 자기 쪽에서 만들어내요. 필연이 뭐냐 하면 새벽에 양털을 두고 양털에만 이슬이 맺히고 그 주변에는 이슬이 안 맺히면 하나님이 진짜 나를 돕는다고 생각한다는 그 자체가 자지가 구축한 필연적인 법칙을 아직도 기드온은 포기를 못 하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그렇게 한 거예요. 진짜 양털에만 있고 땅에는 바짝 마른 거예요. 그러니까 기드온이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면 이게 솜털이 되어서 이슬을 빨리 머금으니까 그랬구나. 이번에는 내가 반대로 바꿔보자. 그리고는 양털은 바싹 마르게 해주고 주변 땅만 촉촉하게 해달라고 요구한 거예요. 하나님이 그렇게 해버렸어요.

이것이 뭐냐 하면 하나님께서 우리 성도에게 찾아올 때 우연으로 오시되 처음에는 인간이 우연을 몰라요. 뭔가 자꾸 내가 오류를 범했고 내가 실수했다고 하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인간의 실수와 오류를 신경 쓰지 않습니다. 오류에 신경을 쓸 거 같으면 하늘나라에 그런 법칙이 없어요. ‘네가 이런 잘못을 했구나. 이런 죄를 지었구나’라는 걸 따지는 천국은 존재하지 않는 천국이에요.

그건 여호와 증인에게 물어보세요. 천국은 우리에 대해서 일체 쉿! 우리에게 일체 묻지않습니다. 어디서 무얼 했는지 아무것도 묻지 않습니다. 왜? 어차피 우리는 뭐든지 날 위한 필연으로 모든 상황을 구성하기 때문에. 기억이라는 자체가 그렇게 구성하거든요. 하나 예를 들어봅시다. 중학교든, 초등학교든 학교 앞에 중국집이 많을 때 학교 앞이기 때문에 중국집이 많습니까, 중국집 앞에 일부러 학교를 세웠습니까?

세상에 학교가 중국집 앞에 세우는 법이 어디 있어요. ‘아이고, 중국집이 있네. 여기에 학교 세워야겠다’라고 교육청에서 그런 식으로 나오지 않잖아요. 학교 세우고 난 뒤에 교사들이랑 아이들 먹으라고 중국집 세운다고요. 우리는 하나님의 필연을 몰라요. 모르는데 필연이 인간 내부, 우리 마음속에 집어넣으면서 교체가 되어야 하죠.

내가 내 체면과 위신과 밥 먹고 살기 위해 만든 필연과 ‘그딴 거 내가 묻지 않을 게. 그게 완벽했는지 그런 거 안 따질게’라는 주님 중심의 완전한 필연, 언약이죠, 그 약속을 우리 속에 집어넣는 겁니다. 그렇게 하나님께서는 구원한단 말이죠. 제가 이 이야기를 왜 하느냐. 기드온은 예레미야가 아닙니다. 기드온은 아주 바들바들 떨고 있어요.

그런데 예레미야는 예수님의 십자가에 시대적으로 더 가까워요. 가면서 하나님의 마음을 때려치우는 것이 아니고 아예 마음 자체를 예레미야 안에 품고 그 시대에 일찍 오신 메시아로서, 그 시대에 하나님의 아픔을 예레미야가 대변해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예레미야도 아직 좀 남아있어요. 미완이죠. 그러면 신약에 우리 성도는 뭐냐. 우리는 알죠. 천국 만들고 우리는 중국집이라는 사실을.

이미 천국이 있기 때문에 있다는 그 사실, 피로 말미암아 거룩함을 입은 완전한 거룩, 완전한 성도, 완전한 백성, 그걸 전도한다고 우리로 하여금 이 땅에 살게 하신 겁니다. 이제는 예레미야에 언약 정도가 아니라 아예 십자가에 다 이루었다가 우리 안에 있어서 수시로 우리의 필연을 주께서 우습게 만들 때, 도리어 이것은 마술사 없는 마술을 부리고 계시는 구나를 알고 어떤 경우에도 십자가만 증거 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을 믿지 않게 하옵소서. 우리 자신의 완벽함을 자랑치 않게 하옵소서. 따로 이미 완벽한 조건이 다 갖춰졌는데도 불구하고 내가 완벽해야 한다는 이런 교만, 오만을 우리가 스스로 발각당하게 하여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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