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노트
우리 망했다
2022년 11월 6일 본문 말씀: 예레미야 4:11-13
(4:11) 그 때에 이 백성과 예루살렘에 이를 자 있어서 뜨거운 바람이 광야 자산에서 내 딸 백성에게 불어온다 하리라 이는 키질하기 위함도 아니요 정결케 하려함도 아니며
(4:12) 이보다 더 강한 바람이 나를 위하여 오리니 이제 내가 그들에게 심판을 베풀 것이라
(4:13) 보라 그가 구름 같이 올라오나니 그 병거는 회리바람 같고 그 말들은 독수리보다 빠르도다 우리에게 화 있도다 우리는 멸망하도다 하리라
이스라엘은 ‘우리’라는 단독성 개념으로 하나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우리’를 깨시려고 하십니다. 멈추지 않는 단호한 멸망수순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이방민족 바벨론을 통해서 사정없이 하나님의 자기 백성들을 치라고 배후에서 작용하십니다. 자기 백성을 치시는 하나님의 행위는 곧 하나님 자신이 자신을 치는 격입니다.
왜 그렇게 하십니까? 그것은 이스라엘 안에 진짜 이스라엘이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마치 호두껍질 안에 먹을 만한 호두가 들어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 내용을 노출하기 위해 단단하디 단단한 껍질을 강하게 공격해서 열어제치시려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서 선지는 “우리는 멸망하도다”라고 합니다.
이것은 예언인 동시에 예고입니다. 필히 그렇게 될 겁니다. 수순이 비틀어지는 경우는 없습니다. 하나님에 의한 공격으로 이스라엘은 사라집니다. 하지만 이 사라짐, 곧 부재(不在)는 존재의 위치를 표시하는 하나의 방식입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그 당시 이스라엘을 없애려하십니까?
그것은 이스라엘이 단독적으로 행동했기 때문입니다. ‘우리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유지하는 목적으로 ‘이스라엘’을 지키려고 한 겁니다. 이것은 앞선 시대에 대한 무지의 증상입니다. 이것은 ‘증상 A’로 지칭해 보겠습니다. ‘증상 A’의 그 다음 절차는 ‘공백’, 즉 빈 자리입니다. 이 빈 자리가 끝나면 ‘증상 B’가 마련되어 있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의 예언에 의하면 이스라엘은 기껏 증상에 불과합니다. 하나님께서 실제적으로 일하고 있음을 보이는 증상말입니다. 필히 망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만드셨습니다. 호두는 껍질을 반질반질하게 닦아 감상하려고 사는 게 아닙니다. 그 안에 호두를 깨어내기 위해 구입합니다.
과연 호두 안에 뭐가 들어 있을까요?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를 보내어 최후의 날을 예언 안에서 미리 담아서 보내주셨습니다. 인간, 혹은 인간 세계에서의 최후는, ‘자기 세계의 부재’입니다. 나의 부재입니다. 즉 나의 시대는 지나간 겁니다. 내 중심으로 모든 것을 이해하던 시절을 날아가 버린 겁니다.
없어진 겁니다. 마치 이성계가 구테타를 일으켜 정권을 잡은 그 다음날 평소같이 입궐해서 행정을 보는 관료들은 졸지요 ‘고려의 잔당’이 된 겁니다. 시대가 바꿨다는 말은 삶의 환경이 바꿨다는 말입니다. 인간은 결코 달라지지 않고 그대로입니다. 하지만 예언이 찾아들면, 달라지지 않는 나는 ‘최후의 내 모습’으로 평가받는 겁니다.
중요한 것은 누가 나의 허락없이 나를 최후로 몰아세웠는가 하는 겁니다. 그 분은 바로 주님이시요 이스라엘에서 ‘희생물’ 코드로 전수되어 오신 분이십니다. 즉 주님의 희생 앞에서 그 어느 누구도 자기를 계속 붙들 수 있는 입장이 못됩니다. 희생물의 희생 취지를 손상시켜서는 아니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사사기 11장에 나오는 입다 이야기가 됩니다. 사사기 11:30-33에 보면, “그가 여호와께 서원하여 가로되 주께서 과연 암몬 자손을 내게 붙이시면 내가 암몬 자손에게서 평안히 돌아올 때에 누구든지 내 집 문에서 나와서 나를 영접하는 그는 여호와께 돌릴 것이니 내가 그를 번제로 드리겠나이다 하니라
이에 입다가 암몬 자손에게 이르러 그들과 싸우더니 여호와께서 그들을 그 손에 붙이시매 아로엘에서부터 민닛에 이르기까지 이십 성읍을 치고 또 아벨 그라밈까지 크게 도륙하니 이에 암몬 자손이 이스라엘 자손 앞에 항복하였더라”고 되어 있습니다. 입다도 하나님께서 전쟁하시면서 무엇을 요구하시느냐를 압니다.
즉 입다는 하나님의 희생적인 도움으로만 이스라엘이 승리할 수 있음을 압니다. 그래서 입다는 희생을 염두에 두고 서원한 겁니다. 자신이 승리하고 집에 가서 자기를 맨 먼저 마중 나오는 짐승을 희생제물을 드릴 용의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희생물이 소이든지 염소이든 양이든 상관없이 말입니다.
아직까지 입다는 하나님께서 희생물을 드리는 것이 마땅하다고 여기는 자기 마음에 하자가 있는 줄 모릅니다. 이처럼 인간들의 말씀해석에서는 필히 자기 것을 상실하지 않는 범위내에서 성의를 표할려고 합니다. 그런데 막상 집 앞에 제일 먼저 입다를 마중나온 것은 무남독녀 입다의 딸이었습니다.
여기에서 입다는 경악을 합니다. 도대체 입다의 전쟁을 무슨 이스라엘을 위한 전쟁이었습니까? 기존의 이스라엘 내부에 변화가 생긴 겁니다. 사람과 희생물을 일치시키는 변화에 대해서 입다는 사전에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입다는 절망해서 자기 서원을 철회하려고 말을 끄집어냅니다.
그런데 정작 죽어야 될 입다의 딸 본인은 자기 중심이 아니라 그야말로 하나님 중심입니다. 즉 아버지 입다의 입에서 나온 말은 사람의 말로 여기지 않고 하나님의 개입으로 본 겁니다. 왜냐하면 아버지 입다의 서원과 결부해서 이번 전쟁에서 이스라엘이 암몬의 지배에서 벗어났기 때문입니다.
즉 기존의 이스라엘을 대한 의식에 변화가 생기게 하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희생물이 되게했음을 입다의 딸은 받아드립니다. 기존의 이스라엘이 깨어지면서 증상A에서 공백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공백이란 이 세상의 그 누구도 모르는 방식으로 새 이스라엘의 모든 조건이 달성되는 것을 뜻합니다.
곧 하나님 자신이 하나님에게 죽임을 당하는 사태가 공백입니다. 어느 누구도 이 비밀을 알아챌 수 없기에 이 사건의 자리는 그저 인간들에게 아무 것도 들어있지 않는 빈 자리로 여겨집니다. 이 공백의 취지를 실어서 새로운 증상B가 이어집니다. 마가복음 12:41-44에 보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께서 연보 궤를 대하여 앉으사 무리의 연보 궤에 돈 넣는 것을 보실새 여러 부자는 많이 넣는데 한 가난한 과부는 와서 두 렙돈 곧 한 고드란트를 넣는지라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가난한 과부는 연보 궤에 넣는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저희는 다 그 풍족한 중에서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구차한 중에서 자기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하셨더라”
이 과부는 부재의 시범을 보입니다. 자기 자신을 아예 헌금궤 안으로 집어넣어 없애버립니다. 이는 마치 자기가 자기보고 “누구세요?”묻는 것과 같습니다. 나는 이 세대에서 사라져도 말씀이 있다면 최후의 세대 이후에 새로운 ‘나’가 등장될 겁니다. 하나님 자신이 희생물됨을 찬양하는 새로운 우리집단의 등장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자신을 주님에게 도로 반납하는 마음가짐으로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24강-예레미야 4장 11~13절(우리 망했다)221106 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예레미야 4장 11~13절입니다. 구약성경 1056페이지입니다.
“그 때에 이 백성과 예루살렘에 이를 자 있어서 뜨거운 바람이 광야 자산에서 내 딸 백성에게 불어온다 하리라 이는 키질하기 위함도 아니요 정결케 하려 함도 아니며, 이보다 더 강한 바람이 나를 위하여 오리니 이제 내가 그들에게 심판을 베풀 것이라, 보라 그가 구름 같이 올라오나니 그 병거는 회리바람 같고 그 말들은 독수리보다 빠르도다 우리에게 화 있도다 우리는 멸망하도다 하리라”
멈추지 못하고 거침없이 들이닥치는 하나님의 후속 조치,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 바로 자기 나라를 위해서 하나님께서 심판하신다는 것은 곧 하나님 자신이 자기를 심판하는 것과 같은 맥락입니다. 자기를 때려서 자기를 죽이는 하나님, 이것은 남을 때려서 내가 살려는 인간세계에 일반적인 현상과 너무나 차이 납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는 나를 살려주는 하나님을 찾지요.
종교라는 거, 기독교, 천주교 다 마찬가지인데, 나를 살리는 것이 종교라면 진실은 나를 살리는 것이 아니고 나를 죽여서 내가 생각하지 않는 다른 나로 다시 창조하시는 하나님, 그 하나님이 진짜 하나님입니다. 이스라엘은 이스라엘 속에 이스라엘 있다는 사실을 몰랐어요. 현재 이스라엘이 그것이 전부인 줄 알았죠. 이스라엘을 쳐야 비로소 이스라엘 나오는 겁니다.
그것을 저는 이렇게 표현할 수 있어요. 호두 껍데기 속에 있는 이스라엘. 단단한 호두 껍데기를 하나님이 먹고자 하시는 것이 아니고 그 호두 껍데기를 깰 때 먹을만한 호두 알갱이가 그 안에 들어있죠. 하나님은 우리를 때리려고 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미워서가 아니라 우리 속에 하나님 자신이 집어넣어 준 것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도리어 하나님의 일을 훼방하고 방해하는 자가 누구냐 하면,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려고 하는데 우리 자신의 방식으로 구원하기를 원하는 우리 자신이 하나님 일을 방해하죠. 그래서 오늘 본문같은 경우에는 뭐냐, 예레미야가 말하기를 “우리 망했다”라는 이런 뜻이거든요. 오늘 본문 13절 끝에 나옵니다. “우리는 멸망하도다”
이게 뭔 뜻이냐 하면 예배당 짓고 난 뒤에 기둥에 표어를 붙이는데 “우리 이제 망했습니다”라고 하는 것과 똑같은 거예요. 뭐 세일 할 일 있습니까? “우리 망했습니다” 90% 세일. 가게 마지막 떨이하기 위해서 하는 표어처럼 이렇게 예고하고 예언하고 있는 겁니다. 예언이 곧 예고니까. “우리 망했습니다. 하나님에게 살려달라고 하지 마세요. 하나님에게 맞을 만해서 맞습니다”라고 고백하라는 겁니다.
그거는 뭐냐 하면 하나님이 준비해놓은 다른 이스라엘이 있기 때문에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것을 저는 지난 울산 강의에서 제목을 이렇게 말했지요. ‘도래와 미래’. 도래라는 것은 미래가 일찍 현재 속에 일찍 들어온 것을 도래했다고 하는 겁니다. 누군가 끝에 만나야 할 분이 끝도 되지 않았는데 앞서서 미리 와버리니까 우리는 끝을 다 살지 않더라도, 죽어서 천국이 있느냐 없느냐 살피지 않더라도, 천국이 어떤 나라인지 미리 알도록 성령께서 그렇게 오신 거죠.
성령이 왔다는 것은 ‘너의 운명은 요지부동이고 이제 바뀌지 않는다. 확정되었다’라고 하는 겁니다. 확정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망하도록 확정된 것과 이미 구원되도록 확정된 두 가지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우상을 섬긴 이스라엘은 이것은 필히 호두 껍데기 깨지듯이 깨지기 위해서 만든 나라예요. 깨지는 것이 확정되었지요.
깨진 나라 깰 때, 그 안에 구원되기로 확정된 이스라엘이 남은 자로서 들어있습니다. 그동안 버티고 버틴 깨지기 싫어하는 이스라엘로 인해 굉장히 예레미야 선지자가 핍박을 많이 받아요. 우리에게 왜 희망적인 말씀을 전하지 않느냐고 욕을 많이 얻어먹어서 예레미야도 하나님 앞에 하소연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자기가 예언의 말을 끄집어내기만 하면 사람들이 욕을 한데요.
내가 욕을 한 것이 아니고 그냥 예언한 건데 사람들은 ‘너는 우리에게 망하라고 악을 쓰느냐’라고 그 당시 백성들이 선지자에게 달려든 겁니다. 다들 여러분도 그런 경험이 있지요? 미장원에 머리하러 가서 욕 얻어먹고 한 그런 경험이 있지요? 왜 긍정적으로 사람이 희망을 안 하고 절망을 이야기하느냐는 겁니다. 왜 나쁜 쪽으로만 이야기하느냐고 그런 욕을 얻어먹을 거예요.
네가 나쁘거든요. 나쁜 자에게 나쁜 결과가 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건데 그것을 이상스럽게 여기면 안 되죠. 예언자는 새로운 시대의 선지자입니다. 기존의 이스라엘을 쥐고 있다는 옛 시대에 속한 거예요. 쉽게 말하면 이렇습니다. 이성계가 조선에서 정권을 잡고 보니까 이성계 반대하는 사람은 졸지에 고려의 잔당이 되고 말았어요. 희한하죠?
이성계가 쿠데타를 일으키고 보니까 지금의 나는 변한 것이 없이 아침에 밥 먹고, 궁궐에 출근해서 일했는데 갑자기 이성계가 ‘이 고려의 잔당아’라고 한다고요. 사람이 고려 사람이잖아요. 사람은 같은 사람인데, 여기서 고려냐 조선이냐는 중요한 것이 아니에요. 내가 동일한 사람인데 시대가 바뀌니까 내가 새로운 조선 건국의 방해자로 낙인찍혀서 선죽교에서 죽고 말았죠. 최영 장군도 죽고 그런 일들이 벌어지는 겁니다. 나는 똑같은 사람인데.
선지자가 왜 시대를 분간 못하느냐고 지적하고 있는 겁니다. 망한다는 것은 끝을 의미하고 끝을 미리 알았다는 것에 대해서 감사하라는 겁니다. 너의 끝, 너의 종말, 너의 최후, 그걸 앞당겨 안다는 것이 얼마나 우리 자신을 자유하게 하는지 모릅니다. 최후가 되면 우리의 존재 표시는 의미 없습니다. 나의 존재 표시가 없는데, 이걸 어려운 말로 부재라고 하는데 이 부재라는 말이 새로운 존재의 위치를 표시하는 하나님의 방식이 됩니다.
쉽게 말해서, 이게 쉬운 말인지 어떤지 모르겠지만 네가 최후의 순간, 새 시대에 왔을 때 너는 평소에 이렇게 물으라는 겁니다. 내가 나에게 ‘누구세요?’라고. ‘내가 이런 일을 하는데 앞으로 결과가 좋아야 할 건데, 내가 이렇게 열심히 했는데 좋은 평가 받아야 할 건데...’라고 생각하지 말고 내가 열심히 어떤 프로젝트를 하면서 걱정하고 있을 때 새벽 3시 30분쯤 일어나서 내가 나에게 물어보세요. ‘누구세요?’
그게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본인이 본인에게 누구시냐고 의아하며 물을 수 있는 낯선 존재로 물을 수 있는 그것이 뭐냐 하면 나의 기억은 살아온 만큼 계속 삭제가 되게 하시는 새로운 시대의 작용이 있어 줘야 해요. 돌아서면 우리의 기억은 ‘누구세요’라고 계속해서 지워지고 지워진 것에 대해서 애타거나, 맘이 아파하거나, 그것에 대해서 아쉬워하거나, 그것에 대해 마음 졸이는 그런 어리석은 짓은 하지 말라는 말이죠.
멸망한다는 것은 최후가 왔다는 하나님의 즐거운 통보잖아요. ‘너 망했어’라는 말은 ‘너는 새사람이 되었어’라는 뜻이에요. 우리가 지키고 싶은 우리 자신을 유지하려고 해서는 안 되는 겁니다. 그러면 이스라엘은 왜 망했느냐. 이스라엘은 이스라엘만 단독으로 생각한 거예요. 하나님과 더불어 이스라엘을 생각하지 못하고 우리가 잘해서 하나님께 잘해드리면 되지 않습니까. 우리가 잘 먹고 잘살아서 기쁘게 해드리면 되지 않습니까.
하나님과 결합 되지 않고 하나님 배제하고 자기의 독자적인 현상에 민감해서 이런 현상이 일어났습니다. 독자적인 현상이라는 말은 어떤 사람에게 어떤 행동에 대해서 이야기하게 되면 그 사람의 독자적인 반응이 딱 나와요. ‘휴대폰 가지고 게임 왜 하세요?’라고 물으면 ‘심심해서 합니다’라고 딱 나오잖아요. 딱 질문을 던지니까 ‘나는 나로 인해 삽니다’라는 답변이 금방 탁 튀어나오는 거예요.
‘왜 게임 하십니까?’ ‘주께서 하게 하셨습니다’라고 이러면 얼마나 좋아요. 왜 단독적으로 생각하느냔 말이죠. 이스라엘이라는 하나님의 나라는 나 혼자 즐기는 나라가 아니에요. 단독적으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나 위주로 하는 이게 망해야 하고 실패해야 해요. 그런데 이게 참 어려운데요. 인간은 어릴 때부터 나는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살았습니다.
사람들이 무심코 이야기하잖아요. 그건 너무나 잘못된 생각이에요. 인간은 환경과 더불어 있어요. 환경이 가르쳐준 대로 생겨 먹는 게 인간이에요. 아프리카 콩고에 물이 없어요. 나라에 돈이 없어서 상하수도 시설이 없으니까 그냥 개울물 먹고 살아요. 아침 되면 열세 살 먹은 소녀들이 물동이를 지고 와서 물을 퍼가요. 그걸로 마시고 빨래도 하고 그러는 거예요.
가만히 보면 여기서는 물 마시고 있는데 저 위쪽에서는 빨래하고 오줌 누고 난리도 아니에요. 그걸 KBS 특파원이 모두 보여주더란 말이죠. 제가 주시해서 본 것은 저 열세 살 먹은 소녀가 한국에서는 어디를 가야 하느냐면 지금 중학생이에요. 물 뜨는 시간에 지금 공부하고 학원가고 그러고 있다고요. 왜 그렇습니까?
우리나라의 열세 살 먹은 여자아이와 콩고에 여자아이와의 차이가 뭐예요? 환경의 차이입니다. 인간은 환경의 산물이에요. 홀로 사는 것이 아니에요. 선택의 여지가 없어요. 결정의 여지가 없다고요. 얼마 전에 봉화 탄광에서 17일 만에 어떤 사람이 살아나왔잖아요. 그 사람은 북한이었다면 살아나온 즉시 도로 아오지탄광으로 들어가거나 총살당합니다. 왜?
나오면서 왜 이 말을 안 합니까? ‘이 모든 것은 김정은 지도자 덕분이다’라는 말을 왜 안 합니까? 내가 그 안에서 2주 이상을 버틴 것은 커피믹스가 아니라 우리 김정은 지도자의 은택을 입어서 나왔다는 말을 왜 못해요? 이게 환경 탓이에요. 이걸 신약에서는 뭐냐 하면 악마의 통치라고 하고 마귀의 통치에 우리가 놀아나고 있습니다. 악마는 독자적으로 신이 되려고 했지요.
자꾸 단독으로 살려고 해요. 단독으로. 내가 그렇게 하고 싶어서 하는데 네가 왜? 이런 식이지 주님이라는 말이 나오질 않아요. 끝까지 그렇게 지옥 가서도 전부 다 단독으로 살아요. 지옥 가면. 그런 인간들 다 모였어요. 내가 잘나서 부자 되었다는 거예요. 내가 잘나서 가족 식구들 다 먹여 살렸다는 거예요. 인간은 달라지지 않아요. 인간은 바뀌지 않습니다.
환경이 바뀌어야 인간이 바뀌어요. 인간은 달라지지 않습니다. 인간은 하고 싶은 대로 하고, 나는 나 하고 싶은 대로 살고, 남이야 죽든 말든 나는 나밖에 모른다고 하는 이것이 바로 내가 망해야 할 이유입니다. 새로운 시대, 고려 말고 고려의 멸망 후에 조선 시대 되면 그 뒤에 말이 붙어요. ‘나는 바뀌지 않습니다. 나는 나밖에 모릅니다’라는 이것이 바로 나의 한계이고 내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날마다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을 멸망하면서 이스라엘은 멸망하지만 멸망하는 과정에서 무엇이 숙성하고 무르익느냐 하면 하나님의 멸망하는 이스라엘 중에서 자기 백성을 살리는 방식을 멸망하는 이스라엘 안에서 생산해 내요. 그게 뭐냐 하면 희생물입니다. 희생자. 이렇게 하면 잘 모르니까 예를 들겠습니다. 사사기 11장 31절에 보면 입다라는 사사가 등장해서 아모리 땅을 치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건져낼 때 암몬 자손으로부터 이스라엘을 해방시키면서 뭐라고 다짐을 하느냐 하면 하나님께 서원합니다.
하나님께서 제 편에 서서 이기게 해주시면 이것은 하나님이 이기게 하셨다는 표시로 제 집 문에서 제일 먼저 나온 것을 희생물로 드리겠다고 한 거죠. 이것은 어떻게 보면 상당히 신앙적으로 보이죠. 그런 말 할 때까지는. 이게 뭔 뜻이냐 하면 입다도 율법을 알고 있는데 하나님의 전쟁에서는 반드시 희생물을 바쳐야 해요. 여리고성도 마찬가지였고요. 바쳐야 하는 이유가 개인이 잘해서 구원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개인이 잘하면 그건 개인 나라가 되어요. 그러나 하나님께 뭔가 희생했다는 말은 하나님이 잘하셔서 그 나라가 하나님 나라가 된다면 특정 개인이 하나님의 공로를 대체하거나 대신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우리교회는 우리교회 목사님이 잘해서 부흥되었다는 말을 해서는 안 되는 이유가 거기 있습니다. 주님의 공로를 어느 누구도 앗아갈 자격이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말하기를 내가 나 된 것은, 다시 말해서 내가 거저 사도 된 것은 주님의 조치였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은혜라는 뜻이에요. 그러니까 사도바울도 사도 된 것이 은혜라고 여겼지요. 나중에 고린도후서 12장에 보면 사도바울이 거기에 더 추가해서 이야기합니다.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단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니라” (고후12:7)
내 몸에 사탄의 가시가 있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라고 합니다. 점점 더 은혜의 깊이가 깊어져요. 내가 말기 암 된 것도 세상에 이런 선물이 어디 있느냐는 식으로 이렇게 바뀝니다. 세 번씩이나 복음 잘 전하기 위해서 이것을 나가게 해달라고 사도가 기도했는데 다 거부당했습니다. 은혜면 은혜지 어느 것은 은혜 아니라고 네가 고르지 말라는 겁니다. 그저 전체가 은혜입니다.
이것은 개인뿐만이 아니고 우리 전체도 마찬가지예요. ‘너는 왜 교회 와서 게임 안 하는데? 주의 은혜지 뭐’라는 거나 ‘너는 왜 교회 와서 게임 하는데? 다른 데서 재미가 없는데 교회에 와서 하면 그렇게 재미있어. 주의 은혜야’라고 하나 왜 이런 말을 붙이고 있는지 물어보고 싶어요. 진짜로 입다는 자신이 주님 말씀대로 은혜대로 모든 영광을 돌릴 마음 자세가 되어있었어요. 아직도 자기를 몰라요.
그런데 승리하고 올 때 뭐 닭이나, 소나, 양이나 뭐 이런 것이 마중 나올지 알았겠지요. 평소에 주로 그런 것들이 ‘꼬꼬댁~~~’하고 쫓아 나왔으니까. 그런데 세상에 평소에 안 일어나던 일이 벌어진 거예요. 자기가 사랑하는 딸, 그것도 외동딸, 그리고 딸이 시집 안 가서 애도 없어요.
무남독녀 딸이 소고 들고 춤추며 나오는데 입다는 자기 한 말은 있고 딸이 춤추며 나오니까 뭐라고 표현되느냐 하면 사사기 11장 35절에 보니까 “입다가 이를 보고 자기 옷을 찢으며 가로되 슬프다 내 딸이여 너는 나로 참담케 하는 자요 너는 나를 괴롭게 하는 자 중의 하나이로다 내가 여호와를 향하여 입을 열었으니 능히 돌이키지 못하리로다”
이 말이 뭐냐 하면 입다는 본인이 본인도 모르게 속아 넘어간 겁니다. 자기를 믿어도 너무 믿었어요. 자기 신앙을 너무 믿었던 거예요. 주님은 네가 믿는 신앙을 비켜 가게 하시는 분이 주님이거든요. 나의 믿음을 믿을 때 주께서는 그걸 말살시켜버립니다. 왜? 나의 기억이기 때문에. 내가 간직하고 싶은 나의 장점이기 때문에. 입다는 참담했습니다. 오늘 본문처럼 망한 거예요.
그러나 입다가 망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희생물이 양에서 사람으로 바뀌는 전이 과정에 이스라엘이 있거든요. 이 바뀌는 과정에서 이스라엘 망하고 난 뒤에 누가 망하느냐 하면 예수님이 망합니다. 하나님이 망해요. 하나님이 망한 덕분에 우리는 천국가게 된 겁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닭이나 돼지나 이런 거나 나오지 자기는 안 망하고 싶고 자기 대신 자기보다 못한 어떤 것이 망해주면 좋겠다는 그런 심보가 하나님께서 입다를 깸으로, 호두 껍데기처럼 깸으로 비로소 입다로 하여금 네가 얼마나 하나님의 일에 방해자로 사사가 되었는지를 보여주는 겁니다.
믿는다는 내가 주의 방해자가 된 거예요. 예수님과 경쟁한 거예요. 예수님의 희생보다 예수님을 위해서 살았던 내 희생이 크지 않은가 하는 이런 은밀한 심보가 우리 안에서 물 끓듯이 끓고 있는 겁니다. 그것이 우리는 들통이 덜 난 거죠. 여기서 말렸습니다. ‘야야, 내가 이런 소리 한 것을 네가 몰라서 그러는가 본데’라고 하며 입다가 말하니까 사사기 11장 36절에서 입다의 딸이 말합니다.
“딸이 그에게 이르되 나의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여호와를 향하여 입을 여셨으니 아버지 입에서 낸 말씀대로 내게 행하소서 이는 여호와께서 아버지를 위하여 아버지의 대적 암몬 자손에게 원수를 갚으셨음이니이다” 이게 말씀이에요. 왜 우리가 성경해석을 못 하는 줄을 아시겠죠? 은근히 저 빼돌릴 것을 다 빼돌리고 자기 귀한 거 따로 다 챙겨놓고 ‘주여, 시킨 대로 하겠습니다’라고 나오는 겁니다.
그런 자세가 되니까 말씀을 못 지키는 거예요. 만약에 어떤 사람이 나에게 넥타이 5개 줬다면 “오늘 밤에 네 영혼 데려가면”이라는 말씀에 ‘안 돼요~~다섯 개 다 착용해 보고요~~’라고 한단 말이죠. 자기 실익 다 챙기고 자기 호강 누릴 거 다 누려놓고 무슨 자세가 그런 자세가 다 있습니까. 딸 시집 다 보내고. 지금 입다 딸은 시집도 못 갔어요.
“아버지, 저에게 2달만 허락해 주시면 제가 실컷 울겠습니다. 처녀로 죽은 것에 대해서 제가 울겠습니다. 내 자식 없이 죽은 것에 대해 울겠습니다”라고 하죠. 자식 없이 죽는 것은 저주를 말하거든요. 내가 저주받은 자로 죽겠다는 이것이 바로 희생이에요. 하나님의 죽음입니다. 이게 말씀과 매칭이에요. 우리의 희생이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주님의 죽음만 그 말씀에 담겨 있어요.
이것을 이스라엘 역사 속에 끌고 가는 겁니다. 한가지 예를 더 드리면 신약에 와서 보면 지금 이 상황은 이스라엘에게 증상이거든요. 이것을 증상 A라고 한다면 이스라엘이라는 우리는 모두 실패했어요. 실패하니까 예수님이 오셔서 단독적으로 성공을 해요. 예수님이 단독으로 성공함으로써 우리 인간들은 주님 앞에서 부재, 존재해봐야 존재하지도 않는 존재가 되고 말았어요.
그리고 난 뒤에 증상 B가 되어요. 예수님으로부터 시작한 새로운 우리가 등장합니다. 마가복음 12장 41~44절을 보면 “예수께서 연보 궤를 대하여 앉으사 무리의 연보 궤에 돈 넣는 것을 보실쌔 여러 부자는 많이 넣는데, 한 가난한 과부는 와서 두 렙돈 곧 한 고드란트를 넣는지라” 요새로 따지면 한 2천 원쯤 넣은 거죠.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가난한 과부는 연보 궤에 넣는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저희는 다 그 풍족한 중에서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구차한 중에서 자기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하셨더라”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 예수님 하나를 위해서 과부는 스스로 자기를 부재 하는, 그러니까 존재하지 않는 존재로 만들어 버린 거예요.
자기 몸 전체를 연보 궤 안에다 머리부터 해서 집어넣어 버린 거예요. 그 유명한 사자성어인 ‘영구 없다’라는 거죠. 나를 예수 안에 집어넣어 버린 거예요. 자기 기억을 집어넣은 거예요. 나는 이제 없는 존재예요. 살아도 주를 위해 죽어도 주를 위해 사는 오로지 주의 것이라는 고백으로 집어넣어 버린 거예요. 이것은 헌금에 관한 문제가 아니고 예수님만 존재함을 보여주는 주님에 관한 고백입니다.
나는 존재하나 안 하나 주님만 존재하면 오케이입니다. 영생의 말씀이 있으면 그다음 말씀에서 만들어진 나는 말씀이 알아서 하실 겁니다. 나는 말씀에 종속되고 싶습니다. 이건 헌금에 관한 문제가 아닙니다. 내 존재에 대한 말소, 제거에 관한 문제예요. 끝으로 말씀드리면 날마다 자기 존재를 삭제하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가 뭐냐 하면 새로운 우리가 돼요. ‘주께서 그렇게 하셨습니다’
둘이 만나서 이야기하는데 ‘왜 그렇게 하셨습니까?’ ‘주께서 그렇게 하셨습니다’, ‘오늘 점심에 밥을 많이 못 드셨는데 무슨 일 있으십니까?’ ‘주께서 그렇게 하셨습니다’라는 주라는 한 분의 나, 너, 모두가 동일한 입장에서 다 같이 종속된 거, 그것이 새로운 이스라엘, 새로운 우리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매사에 주께서 일으키지 않는 환경이 없음을 깨닫게 해주시옵소서. 주님 주신 환경 속에서 주님의 사람으로 만들어지고 있음을 도리어 감사할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