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노트
역주행
2022년 10월 30일 본문 말씀: 예레미야 4:10
(4:10) 내가 가로되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주께서 진실로 이 백성과 예루살렘을 크게 속이셨나이다 이르시기를 너희에게 평강이 있으리라 하시더니 칼이 생명에 미쳤나이다10. Then I said, "Ah, Lord GOD! Surely Thou hast utterly deceived this people and Jerusalem, saying, 'You will have peace'; whereas a sword touches the throat."(NASB)
하나님의 일의 시작은 인간 사회 내부에서 올라오게 됩니다. 인간들은 나름대로 하나님에 의해서 정립하려고 애를 씁니다. 바른 하나님상이 자신들의 구원을 보장한다는 원칙이 고수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실은 본인들이 본인들에게 속아넘어가지 않으려는 몸부림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일이란 인간의 정황을 고려하면서 나타남이 확실합니다.
즉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동행하시는 이유는 신약쪽, 즉 종말쪽으로 다가갈수록 명확해집니다. 그것은 인간들이 생각하는 것과 정반대로 나아가기 위함입니다. 이것은 차들이 맹렬하게 질주하는 고속도로상에서 역주행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가는 겁니다. 왜 사람들은 고속도로를 정상적으로(?) 달리는 겁니까?
고속도로에서 차들의 방향을 해놓지 아니하면 초마다 대형사고 날 겁니다. 인간들은 약속했습니다. 달리는 방향을 달리한다고 말입니다. 사고나지 않기 위함입니다. 차 사고나면 자신들이 다치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인간들은 자신들이 다치지 않는 방식으로 하나님을 믿고 심지고 순종하려고 합니다.
즉 자기 인생이 하나님에 의해서 더욱 발전하고 순항하고 싶어합니다. 사고나고 망하지고 좌절되는 꼴을 보지 않으려합니다. 세상에서도 규칙과 법이 있듯이 하나님의 말씀 세계에서도 규칙과 법이 있는데 그 법을 지키면 자신을 안 다치고 하나님의 보호 아래 살 수 있다고 믿습니다. 이러한 생각에 대해서 예레미야를 포함에 이스라엘 모든 사람들은 동의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에게 특별한 계시를 내려주십니다. 그것은 바로 인간들의 기대치와는 정반대로 이스라엘의 운명이 진행되는 겁니다. 역주행이 일어나는 겁니다. 이렇게 되면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실망할 겁니다. 이 실망의 태도가 예레미야를 통해서 대표로 터져나옵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이 백성과 예루살렘을 속였습니다”라고 말입니다. 바로 이런 고백으로부터 하나님의 일이 시작이 되는 겁니다. 더는 이제 인간쪽에서 하나님에게 협조할 일은 없을 겁니다. 자기들에게 실망스러운 하나님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에게 비난받는 하나님’, 바로 이 하나님께서 구원의 하나님이십니다.
인간 속으로 오셨지만 인간들로부터 배척받아 떨어져 나감에 성공하신 하나님이 바로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런 원칙은 이미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계시로 제시되어 왔습니다. 시편 118:22-23에 보면, “건축자의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는 여호와의 행하신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한 바로다”22. The stone which the builders refused is become the head stone of the corner. 23. This is the LORD's doing; it is marvellous in our eyes.(KJV)
여기서 ‘기이하다’는 표현이 나옵니다. 얼마나 이상스러운 하나님의 행동이었으면 ‘기이하다’까지 하겠습니까? 인간들이 전혀 예상 못하는 식으로, 달리 말해서 인간들과 합세하지 않고 떨어져나가 따로 일하시는 식으로 하나님께서 구원에 나서십니다. 건축자들이 쓸모없다고 간주해서 버린 돌이 기존의 건물이 아니라 새로운 새건물을 새롭게 세우신다는 말입니다.
이것을 오늘날 우리 자신에게 적용시켜 봅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기이하게 일하시는데 그 방식은 바로, 우리 자신이 우리 자신에게도 내보낸 그 우리 자신의 요소를 긁어모아 새로운 우리 자신을 만들어내신다는 말입니다. 인간은 자기 자신을 우수하고 건전하고 훌륭한 존재를 수립하려고 합니다.
이 작업을 위해 우리들은 자기에게 필요한 장점들을 모으고 단점이나 나의 가치를 훼손할 추억이나 일들은 갔다버려버립니다. 더는 나의 요소가 되지 않도록 단속합니다. 이런 일들이 개인적으로만 아니라 이스라엘 국가적으로 해오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되면 인간들이 예상하는 ‘남은 자’라는 집단이 생겨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끝날에 생겨날 구원단체는 ‘오직 남은자’라야 합니다. 이 ‘남은자’는 그들 자신의 판단이나 열심에서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여분의 주님의 은혜로 발생됩니다. “그런즉 이와 같이 이제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 만일 은혜로 된 것이면 행위로 말미암지 않음이니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은혜 되지 못하느니라”(롬 11:5-6)
이 남은 자의 끝에서 사람들에게 불필요하다고 간주되어 버려진 돌이 있습니다. “어찌 그러하뇨 이는 저희가 믿음에 의지하지 않고 행위에 의지함이라 부딪힐 돌에 부딪혔느니라 기록된 바 보라 내가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을 시온에 두노니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리라 함과 같으니라”(롬 9:32-33)
이는 곧 인간들은 스스로를 완전케 하기 위해 자체적으로 계속 ‘버리는 작업’을 수행하고 있음을 바라보면서 하신 말씀입니다. 나답지 않는 것들이나 나답게 만드는 일에 방해되거나 불필요한 것들을 거침없이 바깥으로 내다버리고 있습니다. 이는 사람이 자기를 보호하는 방식이 , 하나님께서 나를 보호하는 방식이 같을 것이라고 자부하기 때문에 생긴 현상입니다.
하나니께서 우리를 선택했다고 여기면서 그 선택을 인간 본인들이 행사할 수 있을 것이라고 여깁니다. 하나님께서 인간 무리에게 이탈하므로서 인간들이 걸려넘어질 돌이 되어가십니다. 즉 인간들이 속지 않으려 하니 하나님께서 그런 인간들 보기에 ‘다른 하나님’으로 달라지시는 겁니다.
인간들, 자신들이 달라질 마음들이 없습니다. 자기에게 늘 좋은 이미지로 자기에게 보답하듯이 살아가고 있기에 인간은 자기에게 실망스러운 존재가 안되기 위해 최선을 노력과 집중력을 보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인간들로부터 버려진 분이 되시려는 겁니다. 그 누구도 버려지는 하나님과 합세할 자가 없는 방식으로 말입니다.
왜 인간들은 자기에게 문제가 없다고 봤습니까? 그것은 율법 자체의 지닌 그 거룩함과 완전함을 탐을 내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율법을 보면서 본인들이 완전한 거룩을 달성할 기회를 특별히 부여받았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인간들이 자기 자신을 제대로 알지 못해서 그러합니다.
히브리서 10:1-3에 보면, “율법은 장차 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요 참 형상이 아니므로 해마다 늘 드리는 바 같은 제사로는 나아오는 자들을 언제든지 온전케 할 수 없느니라 그렇지 아니하면 섬기는 자들이 단번에 정결케 되어 다시 죄를 깨닫는 일이 없으리니 어찌 드리는 일을 그치지 아니하였으리요 그러나 이 제사들은 해마다 죄를 생각하게 하는 것이 있나니”라고 되어 있습니다.1. For the Law, since it has [only] a shadow of the good things to come [and] not the very form of things, can never by the same sacrifices year by year, which they offer continually, make perfect those who draw near.
2. Otherwise, would they not have ceased to be offered, because the worshipers, having once been cleansed, would no longer have had consciousness of sins?
3. But in those [sacrifices] there is a reminder of sins year by year.
4. For it is impossible for the blood of bulls and goats to take away sins.
5. Therefore, when He comes into the world, He says, "SACRIFICE AND OFFERING THOU HAST NOT DESIRED, BUT A BODY THOU HAST PREPARED FOR ME;
6. IN WHOLE BURNT OFFERINGS AND [sacrifices] FOR SIN THOU HAST TAKEN NO PLEASURE.
7. "THEN I SAID, 'BEHOLD, I HAVE COME (IN THE ROLL OF THE BOOK IT IS WRITTEN OF ME) TO DO THY WILL, O GOD.'"
8. After saying above, "SACRIFICES AND OFFERINGS AND WHOLE BURNT OFFERINGS AND [sacrifices] FOR SIN THOU HAST NOT DESIRED, NOR HAST THOU TAKEN PLEASURE [in them]" (which are offered according to the Law),
9. then He said, "BEHOLD, I HAVE COME TO DO THY WILL." He takes away the first in order to establish the second.
10. By this will we have been sanctified through the offering of the body of Jesus Christ once for all.(NASB)
즉 율법을 통해 자신을 온전케 되도록 시도하는 그 자체를 죄로 규정짓기 위해 율법을 주셨던 겁니다. 인간들이 자기를 좋게 보는 선입견으로 인해 이러한 주님의 일로 인해 넘어집니다. 그 넘어짐이 마땅함을 아는 자만이 구원받기 위해 남겨진 자입니다. 왜냐하면 행함에서 은혜로 옮겨졌기 때문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의 한계를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설교
23강-예레미야 4장 10절(역주행)221030 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예레미야 4장 10절입니다. 구약성경 1056페이지입니다.
“내가 가로되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주께서 진실로 이 백성과 예루살렘을 크게 속이셨나이다 이르시기를 너희에게 평강이 있으리라 하시더니 칼이 생명에 미쳤나이다”
9절을 먼저 보면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 날에 왕과 방백들은 실심할 것이며 제사장들은 놀랄 것이며 선지자들은 깜짝 놀라리라”라고 말씀하셨는데 이 깜짝 놀랄 일이 예레미야 자신에게 쏟아졌습니다. 이 말은 예레미야가 주의 선지자이면서도 이스라엘에 대해서 하나님 나라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메시아 오실 때까지 계속 버티게 하실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메시아가 와야 하거든요. 약속대로 하면 오실 선지자, 오실 메시아가 있단 말이죠. 그렇게 오시려면 이스라엘이 유지가 되어줘야 합니다. 이스라엘이 유지된다고 이렇게 생각했는데 예레미야가 받은 계시에서는 그게 우리에게 분명히 희망을 줘놓고 끝까지 희망을 붙들고 있는 이스라엘을 희망 주신 주님, 약속을 주신 주님께서 스스로 속였다는 겁니다.
희망하게 하고는 절망하게 만들어 버리는 일들이 일어났으니 선지자 입장에서 또는 이스라엘 입장에서 수습이 되질 않죠. 정리정돈이 되질 않는 겁니다. 그래서 예레미야같은 오늘 본문과 같은 느낌이 어떠하냐면 ‘믿는 자여 어이 할 고’라고 아까 불렀던 찬송가(256장-눈을 들어 하늘 보라)에 계속 나오는 말과 같습니다. ‘믿는 자여 어찌할 고’ 어떻게 대처하면 됩니까 라고 난감한 상태에 빠진 거예요.
결론적으로 먼저 말씀드리면 하나님에게 속은 자만이 구원받은 자예요. 하나님에 대한 나의 인생에 변경이 있어 줘야 합니다. 바뀜이 있어 줘야 해요. 우리는 자신이 안 바뀌어야 한다고 여기잖아요. 그러나 주님 입장에서는 내가 안 바뀐다고 이야기하면서 자꾸 사람들은 하나님을 생각할 때 바뀌지 않는 내가 줄곧 바뀌지 않는 방식으로 하나님이 나를 지켜달라는 식으로 고집을 부립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이 지금 내가 생각하는 하나님을 이해하고 있는 나, 그 나 자신을 ‘하나님이여 이런 나 자신을 좀 바뀌게 하여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한 적 있습니까? 자기가 문제 있으면 바뀌어야 하는데 지금 내가 보기에는 하자가 없어요. 복음의 엑기스만 뽑아서 꽃다발처럼 만들어놓았기 때문에 이것은 바뀔 리가 없다고 여기고 그걸 구원받는데 확실한 보장이 되는 근거라고 생각하고 그걸 내가 소지하고 있습니다.
내가 아무리 나를 분석해도 지금 내가 바뀔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우리가 성경을 제대로 안 봐서 그래요. 제대로 보게 되면 이스라엘이 있는 이유가 이스라엘이 안 바뀌기 때문에 이스라엘이 멸망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바뀌게 하려고 하고 이스라엘은 바뀔 필요가 없다고 고집부리고, 그러니까 여기서 생긴 것이 뭐냐 하면 바로 시편 118편 22절에 나옵니다. “건축자의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여기에 버림받은 돌이 등장합니다. 하나님의 성전을 세워야 하는데 건축해야겠지요? 그런데 “건축자의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라는 이것은 이스라엘이 지금 하나님의 성전을 짓고자 해서 나름대로 최선의 노력을 다하면서 건축자가 ‘이 돌은 필요한 돌, 이 돌은 없어도 되는 될, 절대 들어가면 안 되고 빼야 할 돌’ 이렇게 건축자가 야무지게 계산해서 합니다.
그 야무지고, 빈틈없고, 확실하고, 이건 진리라고 보장이 된 그 건축자들의 행위로 말미암아 버려진 돌, 그 버려진 돌에서 새로운 건축이 시작되는 이 과정이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일어납니다.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이 변하듯이 이스라엘도 변해야 이스라엘이 되는데요. 그 변하는 내용과 변하는 시나리오는 예수님이 변하는 것과 똑같이 변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변하는 것이 예수님의 마음이 달라졌다는 것이 아니고, 사람들에 둘러싸인 예수님에 대한 사람들의 평가가 달라졌다는 말씀을 드리는 겁니다. 처음에 예수님께서 환영받았죠. 메시아가 왔다고 환영하고 귀신도 쫓아냈고 병도 고치니까 사람들은 예수님을 왕이라고, 호산나 구원자가 왔다고 대환영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예수님의 마지막 환대였어요.
끝나고 난 뒤에는, 모든 사람에게, 심지어 제자들에게도 버림받았습니다. 예수님 자신은 변하지 않지만, 예수님에 대한 사람들의 평가는 완전히 정반대로 바뀌었어요. 제자들마저 떠났으니까요. 제자들마저 떠났다는 것이 뭔 뜻이냐 하면 누가 봐도 예수님의 평가는 결론이 났다는 겁니다. 믿어서는 안 될 분으로 결론이 난 거예요. 그런데 우리는 지금 예수님을 믿고 있습니다.
그러니 예수 믿는 우린 자신이 그 당시에 제자들과 느꼈던 감정과 동떨어져서는 안 되겠지요. 예수님에 대한 평가가 변했으면 제자들의 자기에 대한 평가도 마땅히 변하지 아니하면 예수님의 사도가 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믿고자 한다는 것은 현재 괜찮은 내가 더 괜찮은 나로 더 완성되기 위해서는 예수님이 나에게 꼭 필요한 이런 내 생각이 완벽하게 변해야 합니다.
왜 변해야 하느냐면 지금도 괜찮지만 예수님까지 믿으면 더 괜찮다는 이 생각 자체에는 뭐가 끼어들지 않았느냐 하면 너도 예수님처럼 세상에서 천대받고 버림당해야 한다는 생각이 전혀 들어있지 않아요. 성령이 오게 되면 이제 그 생각이 드러나죠. 내가 세상에서 버림당한다는 말이 뭔 뜻이냐 하면 내가 나로부터 버림받아야 한다는 겁니다. 오전에는 그걸 헤어질 결심을 한다고 말씀드렸는데 이제는 더 나아가서 두 동강 날 결심을 해야해요.
‘내가 나에게 너무 실망스럽고 남들이 다 나에게 기대하는데 어찌 사람이 저렇게 바뀌었냐, 무너졌느냐’라는 평가를 여러분들이 스스로 원하겠습니까? 만약에 그런 일이 있으면 우리는 귀를 막고 ‘안 돼~~~’라고 비명을 지를 거예요. 뭉크에 ‘절규’라는 그림에 이런 게 있어요. 그리고 ‘나 홀로 집에’라는 영화에 남자아이가 ‘‘안 돼~~~’라고 고함지르는 것처럼 안 된다고 소리를 지르게 되죠.
내가 나를 얼마나 귀하게 모셔왔는데 이렇게 사람들에게 버림받고 보기 싫은 바가 되는 건 안 되죠. 이건 가족들에 대한 배신이죠. 나에게 기대를 걸었던 사람들이 실망스러워하면 그건 안 되는 겁니다. 나는 나를 못 버리죠. 이렇게 될 때 오늘 본문은 이해 못 합니다. 그러니까 양해를 구하는데 지금 오늘 설교 순간만큼은 안 되는 것이 아니고 되는 일로 그렇게 실망스러운 존재가 나로부터 또는 누구로부터도 내가 실망스러운 존재가 되도록 하신다면 ‘되겠습니다’라고 20분 정도만 참아주세요.
20분 정도만 마음으로 그렇게 생각을 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그걸 어떻게 실감 나게 하는가. 사람들이 훌륭하다고 사람들끼리 부추기는 방법 중에 하나가 ‘당신은 참 인격자입니다’라고 하는 건데 이것만큼 주님을 모독하는 일은 없어요. 인간은 인격자는 없습니다. 점잖은 사람도 없고 아무도 없어요. 그런데 어떤 인격적으로 존경하는 아버지가 상가(喪家)집에 가서 술을 한잔 먹고 밤에 차를 타고 오면서 역주행을 해서 사람을 여럿 죽였는데 그중에서도 신혼여행 가는 부부를 죽였다는 소식이 만약에 여러분께 들렸다면 그 아버지에 대한 실망감은 어떻겠습니까? 크지요.
내가 존경하는 아버지로 인하여 남들이 억울한 죽임을 당했을 때 아버지에 대해 평생 가졌던 존경심은 다 날아가죠. 그 원인이 뭐냐. 아버지가 역주행했기 때문에 그런 거죠. 방금 제가 술을 먹고 역주행했다고 했잖아요. 주님께서는 우리를 주님의 정신으로 이 세상을 역주행하게 만듭니다. 왜냐 하면 주님이 사셨던 사회로부터 떨어져 나가신 분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모든 인간은 자기가 속해있는 공동체에 어떻게든 합류하려고 애를 씁니다. 남들이 나를 떨쳐 내지 않도록 나는 이 사회에, 이 가정에 꼭 필요한 가장이고 꼭 필요한 사람이라고 말은 안 해도 행동으로 막 호소하는 것 같아요. ‘날 버리지 마세요. 나를 여기서 떨어내지 마세요. 나를 보듬어 주시고, 안아 주시고, 지켜 주세요’라고 호소하는 것이 우리들의 본심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여기 다시 읽어보면 “건축자의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 말씀이 성경에 한군데만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마태복음 21장 42절에 보면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성경에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것은 주로 말미암아 된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하도다 함을 읽어 본 일이 없느냐”라는 이 말이 뭐냐 하면 시편 118편에 22절 말씀에서 주님은 한치도 이탈하지 않으시면서 그 말씀을 타고 예수님께서 그 시대에 일을 행하시는 거예요.
주의 일이라고 해도 되고 말씀이 살아서 주를 통해서 실현되는 일이라고 해도 됩니다. 그런데 여기에 시편 118편에서는 그 당시 이스라엘에 성전 짓는 것과 관련된 일인 반면에 마태복음 21장 42절에 말씀은 성전이 아니고 이스라엘 자체 내에서 예수님이 떨궈져 나가는 일을 하는 겁니다. 왜 떨어져 나가야 하는가. 그것은 로마서 9장 33절에 보면 “기록된바 보라 내가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을 시온에 두노니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리라 함과 같으니라”
떨어져 나가신 분으로 인하여 실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 떨어져 나가는 존재임을 파악하는 자, 그런 자를 로마서 9장 27절에서는 남은 자라고 합니다. “또 이사야가 이스라엘에 관하여 외치되 이스라엘 뭇자손의 수가 비록 바다의 모래 같을찌라도 남은 자만 구원을 얻으리니” 주님께서는 남은 자만 건지십니다. 오늘 말고 지난 주일날 설교에서 이야기했어요.
예수님께서 풍~덩 하고 구정물에 들어오시면서 그 구정물 수면 위로 떠오른 것이 뭐냐 하면 더러운 땟물이 떠오른다고 했지요. 그 더러운 땟물을 건져내시면 그게 구원이에요. 집에서 간장을 담가 보시면 이해가 가는데 그 위에 올라오는 것을 걷어내면 그게 구원이에요. 풍덩하지 않으면 떠오르지 않는 더러운 땟물, 더러운 죄의 물, 그것을 건져서 구원하시는 거예요.
한 분은 들어오고 그렇게 위로 더러운 것이 표출되면서 떠오르고요. 그게 남은 자예요. 이 시대에 어떤 공동체에서 사람을 추방하는 이유는 딱 하나밖에 없습니다. 그건 공동체에 전혀 기여한 바 없고 흔히 말해서 그걸 죄인이라고 하죠. 죄인은 영원히 사회와 격리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겁니다. 광주강의에서도 언급했는데 이은해라는 여자가 공범인 한 남자와 함께 보험금 8억 노리고 남편을 고의로 물에 빠뜨리고 건져준다고 하고 안 건져줘서 살인한 사람인데 판사가 판결하기를 너같은 사람들은 너무나 죄가 악랄하기 때문에 이 사회로부터 영원히 격리되어야 한다고 해서 여자는 무기징역이고 남자는 징역 30년을 내렸어요.
악랄한 죄가 이거예요. 우리가 너로 인해 피해를 본다는 겁니다. 그래서 광주강의에서 제가 물었죠. 이은해는 이런 판결을 받았는데 예수님은 십자가 사건 때 무슨 판결을 받았죠? 무슨 판결을 받았기에 사회에서 격리 정도가 아니고 영원히 죽어 마땅한 판결을 받았습니까? 오늘 이 시간처럼 답변은 제가 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너(예수)를 버렸다는 거예요. 하나님이 버렸기 때문에 내가 너(예수)를 버렸다는 겁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예레미야 4장 10절 봅시다. 지금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자기들은 하나님을 잘 믿고 있는데 예수님은 자기가 믿는 하나님에게 버림받았다면 오늘 예레미야는 바리새인과 반대로 이야기합니다. 주님이 우리를 속였다고 이야기해요. 다르지요. 하나님이 우리를 속였다는 이야기이고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은 하나님이 우리를 속일 리가 없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래서 예레미야는 구원받는 거예요. 그래서 바리새인은 지옥 가는 겁니다.
한번은 하나님이 우리를 속였다는 사실을 눈치챌 수 있어야 해요. 이것은 나 자신의 본성에 대한 눈치이고 낌새입니다. 내가 뭔가 잘못되어있다는 것에 대한 낌새. 지금 내가 하나님 믿는다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라고 인정하지만, 은연중 우리는 이것이 나의 일이 되어버린 겁니다. 나의 일로 구원되는 일은 없어요. 다시 말하면 남은 자라 하는 것은 튕겨 나가야 해요.
더 쉽게 말씀드리겠습니다. 내가 나답지 않은 것은 내가 골라내서 내 바깥에 던져버려요. ‘이 나 같지 않은 거’라고 던져버려요. 주님께서는 내가 싫어서 던져버린 그것을 주워서 주님이 그것을 구원한다고요. 왜 던져버립니까? 내가 나에게 속아 넘어가지 않기 위해서 던져버린 거예요. 나의 동질성을 유지하기 위해서. 나는 늘 착하고, 나는 늘 훌륭하고, 나는 늘 이쁜 것만 생각하고, 아름다운 것만 생각하고, 좋은 것만 생각하는 나, 이런 나에게 나쁜 것은 어울리지 않는 겁니다.
나에게 오래 두면 이것은 내 가치를 손상해. 내 가치를 손상하는 이런 일은 절대로 나에게 일어난 적이 없어. 나는 그런 일을 내가 저주할 거야. 그것은 선악과를 따먹었기 때문에 악하다고 여기는 것은 내 쪽에서 쫓아내려고 애쓰는 겁니다. 제가 오후에 기도 제목을 뭐라고 했느냐면 과거는 사라졌으니 잊어버리라고 했지요. 몇 분 전에 이야기했잖아요.
여러분, 과거에 잘난 것을 기억합니까, 못난 것을 기억합니까? 잘난 것을 버리고 못난 것만 모읍니까? 아니면 잘난 것만 모으고 못난 것은 내 칩니까? 어느 쪽이세요? 인간은 선악과를 따먹었기 때문에 자기를 선한 쪽으로 데려갑니다. 그건 역주행이 아니에요. 정상적인 주행이에요. 그러니까 우리는 남은 자가 될 수 없는 겁니다. 스스로는 남은 자가 안 되고 현재 기존의 보수진형, 우리 모습 자체가 보수적이에요. 좌파도 오래 하면 보수가 됩니다.
우리가 보수적이 되고 상투적이 되죠. 상식적이고 기성품이 된 거예요. 한마디로 역주행할 줄을 모르죠. 이 몸은 내 몸을 내가 지키는 방식과 주님이 지키는 방식이 다르다는 거예요. 그러면 어떻게 하느냐. 주님께서 많은 여분의 경우를 우리에게 줘요. 그러면 우리는 그것을 됫박에 이렇게 담습니다. 시장가면 밤이나 땅콩이나 대추같은 것을 팔 때 됫박에 달아서 팔잖아요. 팔 때 흘러넘치는 것이 있을 거예요. 그 넘치는 여분의 것, 통속으로 못 들어가고 바깥으로 흘러나가는 거.
이미 건전한 나, 우수한 나, 괜찮은 나, 누구 앞에 내놔도 자랑스러운 나, 그 나에게 우리는 괜찮은 것을 다 담아요. 주님은 그런 나를 몽땅 다 버리는 겁니다. 네 안에 들어오지 못하고 네가 배척한 것을 끌어모아서 새로운 나를 만드는 거예요. 그럴 때 우리는 그 바깥에 안목을 가지고 나를 볼 때 내가 괜찮다고 여기는 것에 끼어들지 못하는 나가 진정 나예요.
건전한 나로부터 쫓겨난 나가 진짜 나예요. 그게 남은 자입니다. 남은 자는 특징이 뭐냐 하면 자기의 열심을 행함을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오직 은혜만 이야기해요. 나에게도 추방된 나, 나에게도 밉상 받은 나, 그 모습이 진짜 하나님께서 찾고자 하는 나의 진실한 내 모습입니다.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창세기 6장 6절에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가라사대 나의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 버리되 사람으로부터 육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 하시니라”
하나님께서 스스로 인간을 만들어놓고 스스로 인간이 죄를 지으니까 하나님께서 쓸어버리겠다고 이야기하셨거든요. 이 말씀에 대해서 노아는 조금도 하나님의 하시는 일에 대해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보통 인간들은 뭐냐 하면 ‘만들어놓고 왜 버리느냐’라고 나와요. 현재 이스라엘을 대변하는 것이 예레미야예요. 예레미야도 이스라엘 사람이에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우리 이스라엘을 지켜 준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하나님이 나를 지켜 준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하나님은 나를 지키는 것이 아닙니다. 나로 인해 버림받은 돌이 내 안에 있기 때문에 그 돌을 지키는 겁니다. 그 주님을 지키는 거예요. 여러분도 자신이 미울 때가 있죠. 우리가 우리 자신이 미워질 때 그 미워지는 그것을 주님은 굉장히 사랑하고 있어요. 이제는 네가 정신을 차리는구나.
내가 나에게서 꼴 보기 싫어서 버린 그 쓰레기를 주님께서는 귀하게 수집하십니다. 병 하나에 십 원씩 받듯이. 우리가 소주 마시고 갖다 버린 소주병같은 그 쓸모없는 나가 바로 주님이 말씀하신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오신 거예요. “너 나랑 같이 세상에서 쫓겨난 인간으로서 남은 자 되자”라고 하는 그것을 믿음이라고 하는 겁니다. 예수를 믿는 것이 믿음이 아니라 나를 포함한 세상에서 쫓겨난 그 예수님을 믿는 것이 믿음이에요.
예수님의 역주행을 믿는 거죠. 그러면 오늘날 성도는 역주행합니다. 세상 사람과 전혀 의사소통되지 않죠. 끝으로 이스라엘 내부에 하나님이 율법을 줬고 제사 드리게 했잖아요. 그런데 그 이스라엘을 왜 버립니까? 이 말이 너무 상식적이고 예레미야도 그렇게 생각했어요. 왜 하나님은 우리 이스라엘을 버려서 이 희망을 좌절시킵니까? 이스라엘 없으면 메시아도 오지 않는데 어떻게 합니까?
거기에 대한 방법은 히브리서 10장 1~2절에 사도바울에 의해서 제시됩니다. “율법은 장차 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요 참 형상이 아니므로 해마다 늘 드리는 바 같은 제사로는 나아오는 자들을 언제든지 온전케 할 수 없느니라” 온전치 않음을 알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준 거예요. 그런데 이스라엘은 오해해서 이스라엘을 더욱 온전케 하려고 율법을 줬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안일한 생각처럼. 그다음이 중요한데 계속 보겠습니다.
“그렇지 아니하면 섬기는 자들이 단번에 정결케 되어 다시 죄를 깨닫는 일이 없으리니” 이것이 얼마나 하나님이 우리를 속이는 말씀입니까. 율법을 줘놓고 이 말씀이 정결케 하는 말씀이라고 줄 때 하나님이 우리를 속이는 말씀이라고 어느 누구도 눈치 못 챘지요. 율법을 주셨고 우리가 지키면 정결케 되는 줄 알았어요.
그러나 히브리서 10장 2절에서는 네가 만약에 율법으로 정결케 되어버리면 정작 주께서 찾고자 하는 죄를 깨닫는 일이 없을 것이라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나는 이 율법 듣고 그만큼 정결하다고 깨닫는 그 자체가 죄 자체로 드러내기 위해서 율법을 준 거예요. 나쁜 짓 해서 죄가 아니라 내가 착하려고 하면 착할 수 있다는 그 자체가 내가 상상도 못 한 죄 자체였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려고 주님께서는 율법을 준 거예요.
그러니까 신약적 입장이 아니고 구약적 입장인 사람은 하나님이 정결케 하려고 율법을 줘놓고는 나를 속여버리면 나는 지금까지 엉터리로 알았습니까? 이거는 하나님이 책임을 지셔야 한다는 쪽으로 나올 것이 분명하다는 겁니다. 우리가 이 땅에 살아가는 것은 늘 하나님 앞에 속는 자 되기 위해서 사는 겁니다. 그게 바로 남은 자고 날마다 주님에게 속아 넘어가야 해요.
정답은 날마다 주님이 속이는 것이 아니고 날마다 은밀하게 우리가 우리 자신을 속이고 있음을 주님의 역주행 말씀으로 깨닫게 하여주시지 아니하면 내가 나를 은밀하게 속이고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알겠습니까. 따라서 죄인인 주제에, 주의 은혜로 구원받은 남은 자 주제에, 십자가로만 구원받는 주제에 더이상 내가 이 정도 하면 괜찮은 인간이라고 나대지 마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께서 우리에게 많은 일을 주었을 때 우리는 괜찮은 것만 내 것 만들고 나를 죄인으로 만드는 것은 갖다 버렸습니다. 주여, 이제는 반대로 역주행하며 살게 하옵소서. 내가 버린 그것이 진정 나인 것을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