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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특강

아빠와 함께 2021. 8. 26. 09:16

세종특강 210824a 로마서 8장 1절(당첨) - 이 근호목사

오늘은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 책을 가지고 두 시간동안 다 하겠습니다. 제목이 ‘정죄함이 없다’인데, 정죄함이 없다는 것은 결코 저주가 없다, 더 이상 심판이 없다는 말이에요. 어떻게 심판이 없는가? 결코. 결단코.

한번 적어볼게요, 책들이 없다니까. 결코, 결단코.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께서 단언하건대’, 하나님께서 확정짓기를 결단코 ‘정죄함이 없나니’. ‘저주가 없나니’, ‘심판하지 않으니’ 또는 ‘지옥을 보내지 않을 것이니’ 라는 뜻이에요.

결코 정죄함이 없느니라. 이게 로마서 8장 1절에 나온 말씀이죠. 이것을 가지고 기쁜 소식이라고 하는 거예요, 기쁜 소식. 인류가 또는 인간이 이 세상을 살면서 유일하게 기쁜 소식이 뭐냐 하면 죽고 난 뒤에 결코 너희를 지옥에 보내지 아니하리니 또는 네가 이 땅에서 무슨 짓을 했던 간에, 어떤 우사를 당하고 어떻게 사회적으로 매장을 당하고 네가 교도소를 몇 번 들락거리던 일체 묻지 않고 이 하나님은 너를 죄 있다 하지 않으리니.

이게 무슨 소식이라 했습니까? 이게 바로 기쁜 소식이에요. 그리고 이야기하기를 ‘나는 결단코 정죄하지 않으리니’ 이것을 믿어라. 이걸 믿어라 이 말인 거예요. 왜냐하면 하나님이 단언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단언하기를 “결코 죄에 대해서 묻지 않겠다고 내가 단언하노니 너는 그것을 믿어라.”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이 이야기, 이 기쁜 소식이 왜 사람들에게 안 먹히고 안 받아들여지는가. 왜 이게 안 믿어지는가. 누가 안 믿느냐 하면 본인들이 안 믿어요. 하나님은 너를 지옥 안 보낸다고 이야기하는데 인간들이 이 사실을 안 믿어요. 왜 안 믿느냐 하면 ‘이렇게 나쁜 짓했는데 나쁜 짓한 내가 염치도 없지. 어떻게 천국을 갈 수가 있겠어.’ 하고 본인이 안 믿어요.

하나님은 약속했는데 본인은 안 믿는 이유가 인간들이 평소에 어떻게 사느냐 하면 자기가 약속한 것만 믿어왔던 버릇이 있어서 그래요. 내가 나한테 이야기한 것만 믿고 남이 한 것은 때려죽어도 안 믿는 버릇이 있어가지고 하나님이 이야기해도 ‘나는 내가 생각한 것만 믿어.’ 하는 버릇 때문에 이 로마서 8장 1절, 그것도 말로 한 것이 아니고 문자로 로마서 8장 1절에 “정죄함이 없나니”라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강력하게 거부합니다.

그래서 ‘내가 안 믿는다.’를 좀 더 깊이 들어가면 ‘내가 안 믿는다’ 안에는 나한테 ‘자기 잘난 맛’이 있어요. 내가 내 잘난 맛에 살아가는 그 버릇이 있어가지고 나는 어찌됐든 간에 다소 착하기 위해서 최선의 노력을 다 했다, 라는 이러한 시도의 가치를 나는 쥐고 싶다는 이런 것이 있거든요.

인류의 조상 아담이 선악을 아는 지식을 따먹지 마라 했는데 선악을 아는 지식을 따먹었어요. 선악을 아는 지식은 네가 가질 필요가 없다 했는데 그것을 따먹었고 그러니까 선악을 아는 지식이 우리 안에 오다보니까 하나님께서는 선악을 묻지 않겠다는 이것을 믿지 못하는 겁니다. 이미 자기가 선악에 대해서는 일가견이 있다고 자부하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문제가 뭐냐 하면 결국 이것을 믿어야 되는데 내가 안 믿잖아요. 그리고 스스로 나를 안 믿고 주의 말씀을 믿을 수 있는 위인들은 아담의 후손 논리에 의하면 아무도 없어요. 왜냐하면 아담 자체가, 인류의 조상이 선과 악을 알아서 스스로 자체적으로 선한 사람 되어서 천국 가겠다고 고집을 부리는 그 후손들이거든요, 그 후손들.

내가 완벽하게 살아서 완벽하게 산만큼 내가 잘났다는 사실을 나는 포기 못하겠다는 그런 성질은 아담의 후손들이 다 갖고 있기 때문에 예수님이 이야기한, 하나님이 이야기한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가 먹히지 않는 거예요. 이것이 먹혀들어간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내가 강의한 것을 이야기하면, ‘결단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것을 믿으라고 하지만 이것을 믿을 위인은 인간치고는 있다, 없다? 아무도 없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아무도 없어요. 아무도 안 믿습니다.

이 말은 “다시는 너에게 어떤 질책이나 잔소리라든지 네 잘잘못을 따지지 않겠다.”라고 아무리 하나님이 이야기해도 인간은 “좀 따져 주세요, 왜?” 이런 식이에요. 좀 따져주세요. 나 자신 있어요. 나는 착실하고 바르게 살았다는 그 점에 대해서 누구한테 진짜 지고 싶은 마음 없습니다. 나는 내가 보기에 완벽하지는 않지만 노력은 다 했다는 사실 하나는 하나님도 잘 아시잖아요. 그러니까 우리 거래합시다. 그 거래해서 저울에 답시다. 나쁜 일 한 것과 좋은 일 한 것을 저울에 달아서 나쁜 일이 내려가는지, 좋은 일이 내려가는지. 저는 자신 있습니다, 하는 식으로 선과 악.

나쁜 일은 악이거든요. 선은 좋은 일이잖아요. 이미 인간들이 선과 악을 알다 보니까 이걸 자꾸 밸런스를 맞추려고 하는 거예요, 밸런스를. 이 밸런스를 맞추면 나는 선하다는 자신감이 있다는 이런 생각으로 인하여 자기 자신이 착실하게 살았다는 것을 믿게 되지, 이런 주님의 약속은 안 믿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지금까지의 이야기는 ‘아무도 없다.’ 주의 말씀을 곧이곧대로 들을 사람이 그 누구도, 아무도 없습니다. 그게 로마서 8장 1절에 보면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정죄함이 없다”고 되어 있죠. 여기 하나 드디어 추가 들어갑니다. 아무도 없거든요. 인간으로 태어나서 주님께서 아무리 배려를 해줘도 그걸 받아들일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그래서 조건이 뭐냐 하면 ‘예수 안’.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

그럼 ‘예수 안에 자’가 뭐냐. 교재 있으신 분은 p.10를 한번 보세요. 10페이지 제일 밑에 뭐라고 되어 있습니까? 오늘 교재대로 하겠습니다. 성경은 거의 안 볼 거예요. 교재대로 할 거예요. p.10 제일 밑에 뭐라고 되어 있던가요? ‘예수님 안에서 예수님을 믿는 겁니다.’ 그겁니다.

한번 적어볼게요. 예수님 안에서 예수님을 믿는다. 그럼 그 전에는 뭐냐 하면 ‘내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이것은 가짜입니다. 이런 일은 없어요. 인간이 예수 믿는다는 것은 그냥 남들 보기에 믿는 척하고 있는 것이고 그건 신앙인 ‘코스프레’라 하죠, 흉내 내기, 모방하기. 교회 다녔으니까 믿는 사람이어야 신앙인이라고 간주해주잖아요. 그러니까 그걸 의식해가지고 “나 예수 믿어요.” 이런 이야기를 서슴없이 해요. 그러니 예수 믿는다 해도 예수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그거 속아 넘어가시면 안 됩니다. 갑자기 조용해져버렸는데.

제가 분명히 얘기했잖아요. 예수 믿는 사람 아무도 없다 했죠. 아무도 없는데 교회 가면 사람들이 “나 예수 믿는다.”고 하죠. 그것은 예수 믿는 것 아니에요. 예수는 못 믿게 되어 있어요. 못 믿게 되어 있으면 “나 예수 못 믿어요.”해야 이게 신앙인이에요.

“나는 믿으려 해도 도저히 안 믿어집니다.”해야 이게 신앙인이지, 예수 믿는다 하는 것은 허세 부리는 겁니다. 남들이 나를 볼 때 어떻게 보겠는가를 늘 타인의 시선을 의식해서 구라치는 거예요. 거짓말하는 거예요. 인간은 못 믿게 되어 있는데...... 주님께서 ‘예수 믿으라’는 말은 네가 못 믿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예수 믿으라고 한 거예요.

그래서 예수 안에서 예수를 믿는 방법을 하나님께서는 고안한 겁니다. 보세요. 아무도 못 믿잖아요. 아무도 못 믿지만 하나님께서는 결코 뭐가 없다? 정죄함이, 다시는 죄에 대해서 묻지 않는 사람만이 어디 갑니까? 천국 가거든요.

하나님이 “나는 너희에 죄에 대해서는, 네가 무슨 짓을 했던 간에 난 모르겠다. 묻지 않겠다.”는 그 약속은 약속대로 살아 있어야 되고 인간이 이 사실을 믿을 위인은 이 세상에 없고. 그러니까 예수님이 정죄함이 없다는 말을 믿을 수 있는 사람을 없는 데서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인간보고 닦달 내는 것이 아니고 예수 안에서 예수님을 믿는 것만 성사되기를 주께서 조치하신 거예요.

그래서 예수 안에 있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 하면 ‘내 힘으로 예수님을 믿을 수 없다.’를 자인하는 사람입니다. 인정하는 겁니다. 아, 내 힘으로 예수 믿는다는 것은 가능한 게 아니구나, 인간은. 인간은 왜 예수를 안 믿는다 했습니까? 누가 잘난 맛에 산다? 나 잘난 맛에 살기 때문에.

심지어 나 잘난 맛에 살기 때문에 교회 가서 목사님이 “예수 믿습니까?” 하면 “예! 믿습니다.” 하거든요. 예수 믿는 것도 어디에 포함돼요? 나 이렇게 잘났잖아요. 날 무시하지 마세요. 나는 예수 믿으라 하면 예수 믿고 하나님 믿으라 하면 하나님 다 믿고 하라는 대로 다 할 수 있는 그런 능력이 있습니다. 라고 결국은 자기 자랑하는 거예요.

오늘 마음 같으면 교재 하나씩 다 있었으면 좋겠습니다만. 분명히 제가 언급을 했고 광고에도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라고 했는데 이게 강의 제목인 줄 알았지, 교재인 줄은 몰랐죠. 여기 p.10에 적어놨어요. 예수 안에는 ‘정죄함이 없다’ 너무 기니까 예수 안에는 그냥 ‘천국이다’. 천국에는 일체 우리의 행함을 묻지 않습니다. 네가 어디서 어떻게 살았는지 묻지 않아요. 그냥 받아들여요.

그럼 ‘예수 안’이 있으면 반대되는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예수 밖’이 있겠죠. 예수 밖에는 지옥이 되는 겁니다. 정죄함이 있어요, 예수 밖에는. 무엇을 정죄하느냐? 아까 선과 악을 아는 지식을 따먹지 말라 했으니까 선과 악 가지고 저울질해서 선이고 악이고 따지는 모든 인간은 지옥 가는 거예요. 천국에 못 들어가니까 지옥 가는 거예요.

지옥 가는 사람 중에서 착한 사람이 많겠어요, 안 많겠어요? 많은 정도가 아니라 다에요, 다. 모든 착한 사람은 다 지옥 갑니다. 왜냐하면 어떤 깡패도 자기 자신을 나쁘다고 봅니까, 아니면 자기를 착하게 봐요? 깡패가 되든 어떤 인간이든 할 말이 많아요. 내가 이렇게 깡패된 것은 사회적 책임이 많다, 이런 식으로. 부모 잘못 만나 이렇다. 할 말이 많다니까요. 어떤 경우라도 핑계 없는 것 없고요. 변명 없는 게 없어요.

그래서 착한 사람만 지옥 간다고 보시면 돼요. 그리고 천국 가는 사람은 어떤 사람만 천국 갑니까? 자기가 착한 게 없음을 아는 사람. 한번 적어볼게요. 천국 가는 사람은 자기에게 착함이 없고 죄 밖에 없다. 그 죄가 뭐냐 하면 ‘나는 나 잘난 맛에 살아갔다.’는 이것이 죄에 포함되는 겁니다. “나는 눈만 뜨면 내 잘난 맛에 살아가는 그런 죄밖에 지은 게 없습니다.” 할 때 그 사람은 이미 천국에 온 사람입니다.

죄 밖에 없기 때문에 ‘정죄함이 없다’가 가능한 겁니다. 아까 식사할 때 설거지거리가 한가득 나왔죠. 그러면 ‘설거지’라는 이 작업이 왜 필요할까요? 음식쓰레기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음식쓰레기가 있기 때문에 음식쓰레기가 있음, 있다는 이 의미가 ‘설거지 했다’와 결부되면서 ‘설거지가 필요하다’가 드러나겠죠.

주님께서 정죄함이 없다는 말은 죄가 있다는 말입니까, 없다는 말입니까? ‘있었다’ 이 말이에요. 죄가 있었다 이 말이에요. 아예 죄 안 지은 게 아니고 죄밖에 없었는데 그 죄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따진다, 안 따진다? 일체 쉿! 일체 따지지 않겠다는 겁니다. 일체 따지지 않겠다. 그게 ‘예수 안’에서만 성립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 안에 있고 싶은데 예수 안에 있고 싶으려면 예수 밖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돼요. 예수 밖에 있다는 것은 어떤 상태인가. 이것이 이번 탈레반 사건에서 잘 나와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항공기 바깥에서 두 명 떨어졌죠. 그 사람들은 분명히 비행기 탔는데 날개에 탔어요. 시속 1000km 달려버리니까 그 기압과 온도, 속도감 등에 의해서 자기의 완력으로 그 날개를 붙들 수 없어요.

두 사람이 올라탔는데 두 사람이 떨어졌죠. 그럼 그 사람은 항공기 안에 있었던 거예요, 바깥에 있었던 거예요? 분명히 나는 것처럼 보이는데, 땅을 떠난 것처럼 보이는데 가만히 보니까 그것은 항공기 바깥에 있었거든요.

교회는 나왔는데 교회 와서 장로, 목사는 다 하는데 교회 50년 다니고 교회에서 하는 헌금, 전도 다 했는데 나중에 보니까 날개에 붙었어요. 예수 안이 아니고 바깥에, 바깥에 있었던 거예요.

이걸 이렇게 표현할 수 있습니다. 천국과 안 통하는 창구에 바글바글하다. 은행 창구든 뭐 창구가 있을 것 아닙니까, 표 파는 데가 있는데 사람들이 줄을 서고 난리도 아니에요. 뭐 세일하는 것도 아니고 바글바글 거기에 모여 있어요. 그래서 무슨 일이 있나 보니까 그건 천국과 안 통해요.

방금 우리 강의한 내용에 의하면 천국은 결코 뭐가 없다? 정죄함이 없는 곳이 천국과 통하거든요. 그런데 천국과 통한다고 소문난 그 교회에 교인들이 굉장히 많은데 보니까 그 교회가 뭐라고 하느냐 하면 바르게 살면 천국 간다는 거예요. 이 성경 말씀대로 살면 천당 간다는 창구에요. 어떻게 됩니까? 그거 뭐 항공기 날개 위에 올라간 거죠.

비행기 안에 못 들어가고 비행기 날개 죽지에 전부다 붙어 있는 거예요, 그것도 빡세게. 십일조 했습니다, 뭐 이런 것 가지고 붙어있고요. 3대째 유아세례 받았습니다, 뭐 그런 거 가지고 붙들고 있는 거예요. 우리 할아버지 5대째 기독교 가정이다, 이런 거요.

그래서 p.10 밑에서 7번째 줄에 보면 “기독교 냄새가 물씬 풍기죠.”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내가 예수 믿는 것, 이것은 바로 기독교죠. 신앙이 아니고 기독교라는 거예요, 내가 예수 믿는 것. 제가 지금 분명히 몇 번째 이야기합니다. 내가 예수 믿을 수 있다, 없다? 믿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런 교회에서는 뭐라고 하느냐. 여러분, 예수 믿습니까? 묻고, 믿는다면 여러분 로마서 말씀대로 행함이 아니고 믿음으로 구원받는다고 외치는 창구. 그거 천국과 안 통합니다. 그 창구 막혀있어요.

그런데 막혀있는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왜 그리 거기 교인들이 많습니까? 이것은 평소에 예수 믿는 것을 자기가 악한 일로 보지 않고 무슨 일로 봅니까? 선한 일 하나 추가하는 걸로 보는 겁니다. 평소에도 착한데 거기다가 예수까지 믿어주니 이 얼마나 스스로 보기에도 대견스러워요. 아, 이 나이에 예수 믿어주는 게 어디야? 내가 봐도 되게 착해.

여러분, 목사 치고 나쁜 사람 봤습니까, 인상이? 거의 없죠. 교인들이 목사를 뽑을 때 인상부터가 점잖고 인자한 얼굴. 부처같이 생긴 얼굴, 인자한 얼굴, 그런 사람들을 뽑아요. 개척교회 말고요. 기존 교회, 이미 자본이 탄탄한 데, 전통 있는 교회에서는 뽑을 때 인자한 인상보고 그 사람 인품 보고 뽑는다고요. 거기다가 유학 갔다 왔는지 보고 뽑거든요. 그런데 그래놓고 자기들이 목사 잘 뽑았다 하는데 목사 잘 뽑는 것도 자기의 선행에, 자기 저울의 선함 재료로 추가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 안이라 하는 것은 카불 공항에 두 사람 떨어졌죠, 그러한 항공기 또는 수송기, 사람을 수송기에 실었잖아요, 그 수송기가 예수라면 수송기 안에 들어가는 사람과 비행기 날개 죽지에 붙어 있다가 결국은 떨어지는 사람, 이렇게 구분하고 있는데 안과 바깥은 결코 바뀌지 않습니다.

그러면 예수 안에 들어가고 싶은 생각이 들겠죠. 그럼 예수 안이 어디에 있느냐. 이게 예수 안을 찾을 수가 없어요. 왜 찾지를 못하느냐 하면 한 쪽이 사라지게 되면 다른 한쪽도 같이 소멸되어 버립니다. 양말이나 장갑이나 한쪽 구멍 나면 다른 쪽은 어떻게 됩니까? 쓰레기통에 버려야죠, 멀쩡해도. 버려야 된다고요.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버림을 받았어요, 예수님께서. 그러면 예수 안에 있다는 말은 이 땅에서 사람들에게 납득이 안 되는, 이해 안 되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말이죠. 자, 다시 이야기합니다. 사람들이 이해하고 납득하는 이야기는 우리가 인간을 조상으로 둔 이상은 어떤 이야기만 이해가 됩니까? 지금까지 이야기에 의하면 어떤 이야기만 인간 세계에서 통합니까? 노력하고 바르게 살면 결국은 천국 간다는 이야기만 O.K.가 돼요, 오케이.

교회 와서 듣는 이야기는 이거에요. 예수 믿었으면 농땡이 부리지 말고 그 다음에 뭐하느냐. 예수 믿었으면 말씀대로, 말씀은 괜히 있는 게 아니다, 말씀대로 그 다음부터는 빛과 소금이 되어서 착하게 살아라, 나오죠. 이게 인간들에게는 납득이 되고 이해가 된다고요.

왜냐하면 하나님은 선한 분이고 인간은 자기가 보기에도 추잡스러우니까 예수 믿으면 개과천선할거고 개과천선한다면 하나님이 원하는 것은 뭐냐? 전에는 네가 개판같이 살았지만 예수 믿고 난 뒤에는 사회에서 지탄받지 않는, 그렇게 바르게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라는 것에 대해 다른 사람들이 수긍할까요, 안 할까요? 모든 인간들이, 교회도 마찬가지이고 모든 인간들이? 수긍이 되죠.

심지어 교회 안 다니는 사람까지도 저 사람 예수 믿고 난 뒤에 술 끊고 담배 끊고 전에는 돈밖에 모르더니만 이제는 남에게 희생하고 마을 일을 도와주고 야, 역시 예수님의 위력이 세긴 세다. 인간, 새 사람 됐네. 이런 이야기가 통하는 이야기에요. 이게 사람 대 사람끼리 통하는 이야기에요. 이런 게 통한다고요, 이런 게.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안 통했는데 무슨 희한한 일이, 예수 믿는 사람은 사람들에게 납득이 되고 이해가 되는 말을 한다? 이것은 앞뒤가 안 맞는 이야기에요. 예수님이 존경받았으면 예수 믿는 사람도 존경받는 게 앞뒤가 맞는 이야기잖아요.

그런데 예수님은 예수님을 안 미워하는 사람이 있을까요, 없을까요? 베드로가 예수님을 미워했을까요, 안 미워했을까요, 마지막에? 배신했죠. 제자들한테도 배신당했다는 말은 제자들한테도 예수님은 도무지 이해 안 되시는 분이에요.

어떤 분이 절에 아주 열심인 사람인데 제 유튜브 설교를 들었어요. 제 고등학교 후배이기도 하고 제 아내 친구이기도 하고, 같은 동창생이니까. 불교에 열심인 사람이에요. 불교에 심취한 사람인데 자기가 알아서 선배님이 목사니까 설교 어떻게 하는가 들어봤어요. 들어보고 난 뒤에 이런 반응을 해서 제가 속으로 웃었습니다.

그 후배는 불교에 아주 심취한 사람이에요. 이거였어요. ‘예수보다 더 심하다.’ 그런 평은 처음 들었어요. 예수보다 더 심하다. 그러니까 이 후배가 원하는 것은, 예수는 마음만 먹으면 존경해서 예수님과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그런 여지가 있는 분으로서의 예수라고 생각한 거예요. 그러나 제 유튜브를 들어보니까 이거는 그런 여지 자체가 없어요. 예수 믿을 여지가 전혀 없거든요. 예수 안과 밖이 이렇게 다른 겁니다.

p.12 보겠습니다. 교재가 있든 말든 나는 그냥 진도 나갈 거예요. 12페이지 6번째 줄에 보면 거기에 ‘브라운 운동’이라는 게 나와요. 물리학에 나오는데 아인슈타인의 발견에 기초가 되는 겁니다. 브라운 운동이라는 것은 꽃가루의 움직임을 통해 분자의 흐름을 포착해내는 물리학 실험입니다. 이걸 가지고 p.12 중간에 보면 ‘과학적 사고’라는 말이 나와요.

p.13 넘어가서 중간에 보면 ‘번개는 왜 칠까?’, ‘온도가 0도 이하로 내려가면 왜 물이 얼까?’ 이걸 물리학에서는 상전이(相轉移)라 하는 겁니다. 이런 호기심을 누구도 금지할 수가 없다고 되어 있죠. 이 말을 여기다 왜 썼느냐 하면 과학적 사고란 눈으로 보는 걸 통해서 보이지 않는 것을 포착해내는 게 과학적 사고라는 겁니다. 눈에 보이는 것을 가지고.

교회에서도 간증 집회하잖아요, 간증 집회. 간증 집회라 하는 것은 예수 믿으면 이런 이득을 얻으니까 여러분, 예수 믿으면 손해 안 납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도 예수 믿는 게 당신한테 이익입니다. 그게 간증 집회라는 거예요. 그 사람은 모르지만 그게 과학적 사고에요.

그런데 p.14 보겠습니다. 오늘 2시간 만에 내가 진도 다 나간다 했죠. 중간에 보면 (16번째 줄) 율법이 신에 대한 탐구를 금지해요. 이것은 정말 어려운 말인데 하나님이 주신 그 율법이 무엇의 탐구를 금지한다고요? 신에 대한 탐구, 신이 어떤 분이냐는 이 자체를 하나님께서 금지시켜버립니다.

“하나님 알아서 뭐할 건데?” “믿으려고요.” “네가 알아서 믿는 신은 신이 아니야. 신이 뭔데 너한테 포착이 돼? 이건 말도 안 되지. 신이 그렇게 만만하냐?” 이렇게 나오는 거예요. 하나님이 그렇게 만만해요? 인간이 소주 3병 까먹고 신이시여~ 이러면 신이 막 나타나고, 하나님이 그렇게 만만해 보이는 거예요? 쫄병이 부른다고 왔다갔다 하는 그런 하나님입니까? 아니에요.

인간이 신을 탐구할 수 있는 어떤 자격이나 권한은 없습니다. 그냥 주는 대로 먹고 싸고 하면 돼요, 그냥. 그냥 하나님께서 살게 해주시면 그걸로 누리고 살면 되지, 신하고 거래한다든지 흥정할 생각하면 안돼요.

“하나님이 이런 걸 주셔서 너무 감사합니다.” 이렇게 한다면 “그럼 그거 안 주면 날 싫어할 거야?” 이렇게 나오면 뭐라고 이야기할 거예요? “하나님, 건강하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하나님께서 “그럼 아프고 발목 부러지게 하면 나한테 달려들 기세 같은데? 나한테 한바탕 해보겠다는 거야?” 이렇게 나올 때 여러분 뭐라고 이야기하겠어요? 뭐라고 이야기합니까?

p.16 위에서 2번째 줄에 무엇을 믿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고요, 내가 이미 예수 안에 있다는 것이 더 중요한 거예요. 내가 이미 예수 안에 있다는 것이. 이러면 믿을 필요 있어요, 없어요? 없죠.

자기 애가 있는데 엄마가 바로 옆에 있거든요. 그런데 그 아들이 하는 말이 “아줌마가 엄마인 것을 증명해보세요.” 뭐 이런 거. 아들이 있다가 “아줌마가 내 엄마가 되어야 될 10가지를 증명해보세요. 나는 지금 엄마를 탐구하는 사람인데 증명해보세요.” 이러면 “너 오늘부터 밥 없다. 너 혼자 살아라. 나 집에 안 들어간다.” 이렇게 나오면 “엄마, 그러지 마.”하고 울 게 아니겠어요, 분명히. 책 보는 거 다 뺏어버린다고 하면. 엄마, 잘못했어요, 이럴 거예요.

이미 엄마가 누구냐를 묻는 게 아닙니다. 엄마를 이미 알고 있는 입장에서는 굳이 ‘엄마가 누구입니까?’라는 물음이 안 나오죠. 그 관계가 믿음 관계에요. 그래서 하나님을 따질 필요 없어요. ‘하나님은 누구십니까?’ 할 필요가 없어요.

그래서 p.16 14번째 줄에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무용수가 춤을 추는 것이 아니고 무용수가 그냥 춤추는 것이죠.’ 이게 또 무슨 이상한 말이에요. 무용수가 춤을 추는 것이 아니고 무용수가 그냥 춤추는 거예요. 무용수라는 이 인물이 이제부터 춤이라는 것을 한번 춰볼까? 이래서 춤이 나오는 게 아니고 무용수가 그냥 몸짓을 하게 되면 그걸 춤이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머리 나쁜 사람은 이해 안 돼도 할 수 없고요.

뭘 달성하고 따내는 게 아니고 살아가는 것 자체가 이게 믿음이라니까요, 살아가는 게. 꽃게탕 먹고 잡채 먹고 이게 믿음이에요, 이게. 뭘 따져요? ‘믿습니다. 하나님 믿습니다. 예수님 믿습니다.’라는 이야기할 필요가 없다니까요.

그런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지금 누구를 믿고 있다? ‘나는 안 믿고 있는데 예수 믿으려고 한번 애써볼게요.’ 그렇다면 주님께서 너는 지금 누구를 믿고 있냐고 묻죠. 그럼 나는 나를 믿죠. 자기가 자기를 믿으면 그것은 예수 안에서 믿는 믿음이 아니고 그건 자기 자신을 믿는 거예요. 자기 자신의 잘남을 믿는 거예요.

그래서 p.16 밑에서 9번째 줄에 ‘믿는다고 할 때 그냥 믿음을 따로 분리시켜서 물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p.16 제일 마지막에 사도 바울의 이야기를 끄집어내는데 사도 바울이 하나님 만나기 전에는 내가 여호와를 믿는다, 하나님을 섬긴다, 이렇게 했잖아요. 그러나 하나님을 딱 만나고 난 뒤에는 내가 믿는다는 말 자체가 이게 말도 안 되는, 그것은 성립이 안 되는 이야기라는 것을 알았어요.

왜 그러느냐 하면 자기가 자기 안에 있다가 예수님 나타나니까 내가 예수 믿는다, 이러고 싶었는데 이게 아니고 이미 그전부터 자기는 예수 안에 있었던 거예요. 항공기 안에 있었던 거예요. 수송기 안에 있었던 거예요. 소급해서 전부다 소급해서. 태어날 때부터 아니 디모데후서에 의하면 창세 전부터 이미 택정함을 입은 거예요, 창세 전부터.

그러니까 인간에게 믿음이라는 것은 ‘믿지 말라’가 아니라 믿음 자체가 필요가 없어요. 믿음 자체가 필요 없으니까 신앙생활이 필요치 않은 겁니다. 왜 기존 교회가 천국과 안 통하는 창구인줄 이제 아시겠지요?

이런 곳에 사람들 많이 모였어요. 복 받으세요, 뭐 기도해서 응답받으세요. 아픕니까? 아플 때는 하나님 뜻이니까 기도하면 응답받는다는 온갖 그런 구호들, 1+1 상품, 그런 선전들 쭉 나와가지고 사람들은 자기한테 이익 있을까 싶어서 기도하면 효과 볼까 싶어서 난리도 아니죠. 그러나 백날 많은 사람들이 찾는 그곳은 천국과 통하지 않습니다.

성경들은 다 갖고 있으니까 누가복음 2장 29절 누가 한번 찾아서 읽어보세요.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됐습니다. 읽으실 때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대로 종을” 그다음에 “평안히” 했잖아요. 평안~~~~~히, 그걸 좀 한 7초 정도 평안~~~~~~~히 놓아 주시는군요, 평안~~~히.

그러니 복음을 아는 사람의 특징이 뭐냐. 내가 예수 믿기 전부터 예수 안에 있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의 특징이 뭐냐. 모든 것이 평안~~~~히 놓아 주시는군요. 비행기 탈 때 덜컥덜컥 착륙하는 게 아니고 연착륙(soft landing), 조용~~~하게, 벌써 착륙했나? 안 했나? 보면 벌써 인천공항의 풍경이 쫙 보이죠. 그냥 활주로에 미끄러져 가는 거예요.

벌써 천국에 도착해가지고 그냥 천국에 도착해놓고 비행기는 아직까지 멈추지 않고 달릴 때 그게 바로 성도의 일생이에요, 성도의 일생. 성도의 일생은 이미 예수 안에서 연착륙했어요. 착륙해서 평안~~~히 가고 있는데 날짜가 8월 24일이라, 21년도. 그러니까 그 시간이라는 것은 별 의미 없죠. 내일 되도 25일 되도 마찬가지고 26일 되도 별 의미 없어요. 그냥 연착륙. 평안~~~히 그냥 맡기신 대로 그냥 착륙된 대로 가면 돼요.

한번 적어볼게요. 이게 누가복음 2장 29절, ‘종을’ 해놓고 그다음에 ‘평안~~~~~~히’ 그 다음에 ‘놓아 주시잖아요.’ 그동안 어디 묶여져 있었습니까? 그동안 어디에 묶였었어요? 나의 잘남, 나의 완벽함, 나의 철저함, 나의 위대함, 남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여기에 매여 있었던 거예요. 내가 나한테 매여 있었던 거예요.

죽어서 어디 갈지도 모르면서 개뿔도 아무것도 모르면서 무조건 나를 포기 못 하고 살아갔던 거예요. 그런데 이제 예수님 만나고 난 뒤에, 예수님 알고 난 뒤에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군요. 언제까지요? 죽을 때까지요. 죽을 때까지 평안~~~히 그냥 쭉~ 가는 거예요.

마치 이 집 에어컨처럼. 에어컨 조용하잖아요. 지금 평안~~~~히 시원한 바람만 내놓고 있잖아요, 편안~~하게. 에어컨 문제 있으면 발로 막 차고 그럴 텐데 그렇지 않고 시원한 바람 주듯이 그냥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만 시원한 바람처럼 계속 뿜어내면서 하나의 기계로서 예수님의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만 계속해서 뿜어내면서.

이 시원한 공기에다 말씀을 입혀보세요. 이 시원한 공기에다가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를 실어가지고 이 가정을 계속해서 순환하면서 환기한다고 생각해보세요. 생각만 해도...... 이곳이 뭡니까? ‘예수 안’이죠. 항공기 안이잖아요.

다시 p.16 중간에 보면, ‘무용수가 춤을 추는 것이 아니고 무용수가 그냥 춤추는 것이죠.’ 이걸 말로 할 때는 이렇게 해야 돼요. 무용수가 ‘춤’을 추는 게 아니고 무용수가 그냥 ‘춤추는’ 동사죠. 그냥 움직이는 동사죠. 내가 살아가는 것 자체가 이게 신앙이에요, 살아가는 자체가. ‘신앙생활 하자’가 아니라 신앙생활 하자고 덤벼드는 게 아니고 그냥 살아가는 자체가 신앙생활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안 믿는데 그 자체가 믿음이 돼요. 내가 굳이 안 믿어도 믿음이 되어버려요. 세상에 이런 편안~~함이 어디 있습니까?

여기 p.17 7번째 줄에 보면, 두 살이나 세 살쯤 된 아이 엄마가 “이 컵 누가 깼어?”라고 추궁하면 “내가 안 깼어요.” 이렇게 나오죠. ‘누가?’라고 추궁하게 되면 갑자기 자기 방어가 딱 나와요. '내'가 안 깼어요.

p.18에 보면 중간에 로마서에 나오는 말씀인데요. ‘믿지 않고 행한 것이 죄이다.’ 그러니 죄라는 말은 나쁜 짓한 게 죄가 아니고 예수님께서 내 인생을 이렇게 이끌고 가는 것이 안 믿어지면 그 전체가 죄가 되는 겁니다.

그러면 죄가 되었을 때, 예수님을 안 믿을 때 인간이 말하는 ‘의(義)’가 어디서 나오는가. 의는 스스로 만들어요. 이게 바로 죄입니다. 모든 의로움은 내가 정신 바짝 차려가지고 나쁜 짓 안 하겠다고 결심 먹었기 때문에 나오는 의로움이다, 착함이고 정의로움이고 선이고. 의는 스스로 내가 만든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이게 바로 따먹지 말아야 될 것을 따먹은 선악과의 후유증입니다.

그다음 p.21에, 어떤 스무 살 먹은 애가 화가 나서 순간적으로 칼 들고 사람을 찔러 죽였다. 야, 거참 나쁜 놈이다. 어떻게 사람을 살인 하냐? 그런 인간은 잡아서 지도 사형시켜야 돼. 온 사회가 분개하겠죠. 그런데 나이가 97세 된 할아버지가 화가 난다. 그런데 부엌에 칼이 있다. 경상도말로 정지칼, 표준말로 부엌칼, 97세 된 할아버지가 부엌에 있는 칼을 보고, 옛날에는 연상 여인이 많았습니다, 98세 된 자기 부인을 ‘네가 이렇게 남편을 무시하다니!’ 찔러 죽일 때 이 할아버지가 살인을 저지르겠습니까, 못 저지르겠습니까? 칼 들 힘이 없어요.

그래서 살인도 힘이 있을 때나 하는 짓이에요. 힘 빠지면 죄 짓고 싶어도 못 지어요. 그러니까 이 말은 죄 지으나 안 지으나 상관없이 이미 마음속으로 화가 나고 분노하게 되면 성경대로 예수님 말씀대로 이미 살인죄에요. 주위에 쥘 게 없어서 살인 안 저질렀다 뿐이지, 살인자입니다. 힘이 없어서 그런 거예요. 여건이 안 돼서 그런 겁니다.

그래서 어떤 철학자는 인간을 신인(神人)이라고 합니다. 신 같은 존재. 신인(神人)이란 뜻은 새로 등장하는 새로운 사람이라는 뜻이 아니고 사람 인(人) 앞에 뭐가 붙었습니까? 사람 앞에 뭐가 붙어 있어요? 신(神)이 있죠. 인간이 인간을 볼 때 뭐로 본다? 신으로 보는 거예요. 그러니까 인간이 신을 믿습니까, 안 믿습니까? 안 믿죠.

다시 묻습니다. 인간은 자기를 뭐라고 봅니까? 작은 신이죠. 이미 자기를 믿는다는 말은 내가 신이잖아요. 내가 신인데 어느 신을 믿어요? 신을 이용하지. 그렇죠? 그러니까 누구를 믿어서 구원받겠다는 그 자체가 인간에게는 없어요. 누굴 믿어서 구원받겠다는 것은 인간에게 없고요. 스스로 구원하고자 하는 의지만 인간에게 있어요. 인간은 누구나 스스로 자기가 자기에게 노력을 하고 절제와 관리를 철저히 해가지고 그래서 내 힘으로 따내기를 원해요. 누가 그냥 공짜로 주는 것은 본인들이 싫어해요, 본인들이. 자존심이 있어가지고.

결코 정죄함이 없다는 말은요. 얼핏 들으면 굉장히 하나님의 은혜인 것처럼 들리지만 따지고 보면 인간을 근원적으로 개무시하는 거예요, 인간을. 네가 어떤 노력을 해도 나는 너한테 책임을 안 묻겠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p.25에 아까 예수님 이야기 다시 합니다. 예수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밉상을 받고 죽으셨잖아요. 첫째시간 5분 남았는데... ‘예수 안’이라 하는 것은 무슨 말이냐 하면 바로 ‘죽음 안’이라는 뜻이에요. 예수님 자체가 사람에게 죽음을 당했기 때문에 죽음 안에 있는 자는 무엇을 얻는다? 영생을 얻는다, 죽음 안에서.

죽음 안에 있는 자는, 내가 이미 죽었다고 여긴 사람에게는 내가 일체 묻지 않겠다. 죽음 안에서, 십자가 죽음 안에 있는 자에게는 일체 내가 너에게 어떤 죄도 묻지 않겠다. ‘십자가를 믿습니까?’가 아니라 네가 십자가 안에 있다는 것을 네가 그것을 알도록 내가 해주겠다, 십자가 안에 있다는 것을.

그럼 이 죽음 안에 들어가야 되는데 죽음 안에는 무슨 수로 들어갑니까? 산 사람이 죽음 안에는 못 들어갑니다. 그래서 여기서 p.26에 무슨 단어가 나오느냐 하면 ‘당첨’입니다. 당첨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 안에 있음이 당첨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 안에, 예수님 죽음 속에 들어오게 되었다는 것을 어떻게 아느냐에 대해서 p.27에 나옵니다. 여기 보면 들창코 문제가 나오는데요. 자신이 들창코냐 아니냐에 대해서 고민하는 아들이 있다 칩시다. 그래서 그 아들이 엄마한테 물어요. “엄마, 나 친구들이 들창코라 하는데 들창코 맞아?”라고 물을 때 엄마의 정답은 “너 들창코 아니야.” 또는 “약간 들창코야.”라는 것이 정답이 아니고 “너는 이미 죽었어.” 이게 예수 안에 있는 사람의 특징입니다.

“아저씨는 한 달 수입이 얼마에요? 500만원 됩니까, 안 그러면 그 밑입니까?” 그럼 그 답변은 “나 죽었어요.” 이게 정답이에요. 영생 얻는 기준, 천국 가는 기준이 예수님의 죽음, 예수님이 죽었다는 사실,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이해 안 되게끔 죽었다는 그 사실을 내가 알게 되게 되면 그 사람은 이미 예수님의 죽음 속에 함께 있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이 죽었기 때문에 죄 사함이 되거든요. 그러면 이 세상에서 신앙인에게 유일하게 유효한 기준은 딱 하나밖에 없습니다. 뭐냐 하면 내가 얼마나 수입이 좋으냐, 얼마나 착하냐가 아니라 예수님이 나대신 죽었다는 그 기준이 신앙인에게 절대적인 기준이에요. 그 기준 말고 다른 것은 문제 삼을 필요가 없어요.

내 성적이 안 좋았다든지 당구 원래 300 치는데 50밖에 못 쳤다는 그런 것 가지고 고민할 필요 없어요. 땅을 하나 샀는데 땅값이 내려간다든지 전혀 고민할 필요 없습니다. 어쨌거나 저쨌거나 나를 위해서 돌아가셨다, 그 기준 때문에 내가 존재하고 있거든요. 그래서 성령께서는 자기의 죽음 사건을 우리에게 전한다는 이야기를 했고요.

그 다음 이야기가 옛날 구약의 사울과 다윗 이야기입니다. 사울과 다윗의 이야기, p.32에 있어요. 사울도 왕이고 다윗도 왕이 되잖아요. 그런데 차이점이 뭐냐 하면 사울에게는 약속이 없어요. 약속이 없고 다윗에게는 약속이 있습니다. 이 차이점이에요.

그래서 사울은 어떤 행동을 해도 버려져야 되고 다윗은 어떤 행동을 해도 그것이 용서가 되어야 돼요. 똑같이 나쁜 짓을 하고 그보다 더 나쁜 짓을 하더라도 한쪽은 그냥 내치고 한쪽은 무슨 짓을 해도 그냥 받아줘요. 왜냐하면 다윗이 훌륭해서가 아니라 다윗은 약속과 함께 있기 때문에 그래요. 다윗은 예수 안에 있기 때문에. 10분 쉽시다.

 

세종특강 210824b 로마서 8장 1절(당첨) - 이 근호목사

‘예수 안에 있는 자는 정죄함이 없다’는 뜻은 죽음의 특징이에요. 죽음이 싫다고 생각하지 말고 죽음의 좋은 점은 흔들리지 않는다는 거예요. 변화가 없는 거예요. 심전도, 심장 기능 측정하는 표시를 보면 뭔가 위아래로 파동이 있다가 돌아가실 때 보면 찍- 일직선이죠. 이 순간을 가지고 의사들이 “돌아가셨습니다.” 하거든요.

죽음의 좋은 점은 흔들림, 변함이 없다는 거예요. 꼭 에이스침대 같아요. 옆에 뭐가 있더라도 요지부동 그냥 그대로 쭉 갈 수 있는 거예요. 이 예수 안에서 주님의 죽음 안에서 일체 아무 죄를 묻지 않습니다. 죽음 안에 있다는 것이 이건 진짜 당첨된 거죠. 3등 정도가 아니에요. 1등, 2등도 필요 없어요. 이젠 그냥 끝났어요.

퍼펙트, 완전히 종결되었어요. 모든 게 종결되어 버렸습니다. 우리 쪽에서 이룬 게 아니고 주님께서 내게 일어날 모든 일을 앞당겨서 다 해결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게 바로 예수 안에 있는 사람에게 주는 기쁜 소식, 복음입니다.

이런 세상의 어떤 현상,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라든지 이런 변화조차도 주님께서 생각하는 죽음에 대해 어떤 영향력을 주지 못합니다. 건강 하냐, 건강 안 하냐를 이제는 묻지를 않아요.

왜 그러느냐 하면 죽음을 통해서 두 종류의 죽음이 나오거든요. 이게 로마서에 나오는 거예요. 하나는 육이 나오고 또 다른 하나는 영이 나옵니다. 죽을 때 육은 저주로 나오고 영은 영생으로 나오게 되어 있어요, 죽음 안에서.

그래서 2강의 제목이 ‘이삭과 이스마엘’인데 아브라함에게 아들이 둘 있거든요. 첫째는 먼저 낳은 자식, 이스마엘이고 두 번째는 이삭입니다. 이스마엘(육)의 특징은 뭐냐 하면 약속이 없어요. 약속이 없어서 지옥 또는 저주. 이삭(영)은 이 땅에 이삭이 태어나서 늙어 죽는다 하더라도 이삭은 영생이에요.

이 땅에 육신을 갖고 이삭이 천년만년 사는 거 아니잖아요. 늙어죽는다 할지라도 그에게는 약속이 있기 때문에 예수님의 생명이 있기 때문에 영원히 죽지 않는 겁니다. 분명히 육신은 죽었는데 영원히 죽지 않아요.

그리고 그 죽음도 그냥 저주의 영원함이 아니라 축복의 영원함이에요. 그 영원한 것이 약속 안에 주어져 있습니다. 그 약속을 첫째 강의에서 뭐라고 했던가요? 예수 안에 있는 자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 로마서 8장 1절의 약속이에요. 결코 정죄함이 없다. 네가 한평생동안 어떻게 살았는지에 대해서 내가 입 다무마. 네가 7살 때, 42살 때, 53살 때 뭐했는지 일체 내가 안 물으마. 그게 정죄함이 없는 거예요.

p.36 밑에서 6번째 줄에 그대로 읽어보겠습니다. ‘사파리 알죠? 사파리 동물원에 갇힌 사자하고 호랑이가 서로 온돌방 차지하려고 싸우는’ 게 나왔어요. 아마 이 책 쓸 때 그런 일이 있었던 모양이죠. 거기서 대장인 호랑이가 까불고 설치고 쿠테타를 일으켜서 사자가 호랑이를 물리치고 그 온돌방을 차지하고 있지만 그 사파리 세계는 아무리 무한히 넓어도 사파리 세계의 특징은 갇혀 있다는 거예요. 갇혀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사파리 세계하고 인간들의 세계하고 어떻게 그리 닮았는지. 성공하고 뭐 출세하고 해도 온돌방 차지하려는 그런 아주 작은 것에 의미를 다 거기다 두고 살아가는 거예요.

그런데 이미 자신이 육으로 온 자체가 죽음인 것을 아는 성도한테는, 예수님의 죽음이 안에 있는 사람은 나의 육은 이미 폐기처분된 육인 것을 아는 사람한테는, 자기가 죽을 몸인 것을 아는 사람한테는 더 이상 몸에 얽매이지 않죠. 자기 목숨에 연연하지 않죠. 이걸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갇히지 않은 거예요. 이것을 영이라 하는 거예요. 이것을 성령 또는 영이라 하는 겁니다.

그래서 로마서 1장부터 해서 그 이후에는 육과 영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겁니다. 육과 영을 대비할 때 이삭과 이스마엘을 대비해서 그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스마엘은 하나님의 약속이 없을 때에 아브라함이 자기 여종 하갈과 관계해서 태어난 자식이 이스마엘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어째든 간에 사람이 있잖아, 하는데 있어도 약속이 없기 때문에 그것은 하나님이 사람취급 안하죠.

그런데 이미 이스마엘은 자식이 아니고 그럼 이스마엘이 자식 아니면 자식이 없잖아요. 자식은 없는데 아브라함의 이름은 뭐냐? 네가 ‘만인의 아버지가 된다’는 뜻으로 이름은 거창하게 해놓고 자식은 하나도 없고 그러면 그 자식은 중간에 누가 개입해야 되겠어요? 아브라함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어요. 자기 아내는 이미 태가 죽어서 임신을 못하고 아내가 임신을 못한 상태에서 무슨 자식이 생깁니까? 잉태치 못하잖아요.

여기에 누가 개입하느냐? 하나님의 약속이 개입하니까 없던 자식이 새로 생겼는데 그 이름이 이삭이에요. 인간들이 이삭의 출생에 대해서 얼마나 평소에 그걸 안 믿었으면 이름도 ‘그것은 웃을만한 일이지. 그걸 누가 믿겠어?’ 해서 이름을 짓되 네가 이 이삭이라는 애가 오기 전에 네가 전혀 믿지 않았음을 거기다가 딱 새겨놓아버린 겁니다.

이름이 ‘웃기네? 웃긴다.’ 이런 식으로. 정말 너 같은 인간이 나타날 줄은... 정말 웃기는 이야기야, 라고 이름을 ‘웃기기’라는 의미의 ‘이삭’ 이라고 한 거예요. “이삭아, 너 책 좀 그만 볼래?”, 그걸 다른 말로 하면 “‘웃기네’야, 책 좀 그만 볼래?” 이런 식으로. 이름 자체가 이름을 부를 때마다 ‘아, 나는 진짜 믿음 하나도 없다.’ 이름 부를 때마다 그걸 느끼는 거예요. ‘이건 내가 낳은 자식이 아니고 하나님이 주신 자식이다.’ 이걸 이름 부를 때마다 느끼게 만드는 겁니다.

그렇게 약속의 자식의 특징이 뭐냐 하면 약속의 자식은 죽어도 다시 사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아버지 아브라함이 자기 아들, 이스마엘을 잡는 게 아니고 아들, 이삭을 개 잡듯이 잡았어요. 이삭을 제물로 바치죠. 그리고 남이 죽이는 게 아니고 어디 망나니 불러다가 막걸리 팍 뿜고 죽이는 게 아니고 아버지가, 가장 사랑하는 아버지가 자기 자식을 그것도 전기의자 이런 게 아니고요, 칼로 직접 네 아들을 찔러 죽여라.

칼로 직접 아들을 내려칠 때 아들이 그걸 미리 알고 아버지가 자기 죽이려고 하는 것을 미리 눈치 챘죠. “아버지, 땔감은 있는데 제물은 왜 없습니까?” 아버지가 차마 “너야 너, 너. 나 오늘 너 잡을 거야.” 이러지는 못하잖아요. “주께서 준비해놓으셨겠지.” 할 말 없으면 그런 소리하거든요. 주께서 준비해놓으셨겠지.

집사님, 오랜만에 강의하는데 뭐 점심 뭐해주실 거예요? 주께서 준비해놓으셨겠지요, 뭐. 잡채하든지 족발하든지 뭐 해놓겠지. 그건 모르겠다 이 말이거든요. 나도 몰라. 그냥 시키는 대로 할 뿐이야. 칼 가지고 그저 내리치죠.

이삭은 완전히 꽁꽁 묶여있고. 아버지 눈빛은 이상한 눈빛으로 변해 있고. 아버지가 칼 들고 미친 것도 아니고 사랑한다 해놓고 사랑하는 모습이 자기를 죽이려고 할 때에 그야말로 묶였으니까 도망칠 수도 없죠. 묶어놨으니까. 그때 이삭은 어떤 마음이었겠습니까? 내가 아버지한테 죽었구나. 딱 그 마음밖에 없죠.

칼끝을 들고 찌를 때 하늘에서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영어로 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Stop! 멈춰라! 됐다. 됐어. 뭐가 됐느냐 하면 아들은 죽은 거예요. 아들은 죽었는데 스탑! 하나님께서 개입함으로 말미암아 죽은 데서 살아난 것, 그게 영이에요.

그래서 우리가 살아가는 것은 이미 우리는 죽었고 우리 안에서 우리 대신 죽었다가 살아나신 예수님이 안에서 살기 때문에 우리는 이미 영적으로 관계적으로, 영적이라는 말은 관계에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이것은 영생을 얻은 관계, 살아있는 관계가 됩니다.

그러니까 육신은 남하고 똑같아요. 똑같은데 안에는 주님의 죽었다가 살리는 그 능력, 성령의 능력이 있기 때문에 ‘죽을 너희의 몸도 살리시리라.’ 이게 가능한 거예요. 로마서 8장 10절의 말씀. 누가 성경 한번 읽어볼까요, 로마서 8장 10절?

“그의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의 살으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으심이니” (로마서 6장 10절). 방금 참 좋은 구절 읽어드렸습니다, 정말. 주님은 죽으실 때 단번에 죽었고 살으실 때 단번에 살았다는 말씀입니다. 아, 이것도 정말 기적이다, 그 좋은 말씀을 이것도 당첨되었다.

로마서 8장 10절,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나 영은 의를 인하여 산 것이니라” 너희 몸은 이미 죽어가야 돼요. 치매 걸리든 암 걸리든 그런 건 따지지 말고 이미 우리는 죽기위한 몸을 갖고 있어요. 아무리 노력해도 백 살 이상 못 삽니다. 뭐 102살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만 그건 비정상이고요.

우리는 못 살아요. 하지만 몸을 죽이시는 분이 있다는 말은 ‘살려줄게.’라는 분이 계시다는 증거에요, 우리 몸이 죽었다는 사실은. 우리가 늙어죽는다는 말은 ‘아, 이래서 영생 얻는구나.’ 라고 그런 증거로 이해하시면 되는 겁니다. 자기 죽는 것 너무 애닮아 하지 마시고요. 내가 이런 식으로 서서히 천국으로 지금 연착륙해가는구나. 이렇게 생각하시면 되는 거예요.

그래서 여기 로마서 8장 10절에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나 영은 의를 인하여 산 것이니라” 되어 있죠. 11절,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예수님에게 해당되는 것이 아니고 그다음에 누구 안으로 넘어오죠?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그다음에 누구입니까?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에게 일어났던 그 벌어진 사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이게 약속이에요, 이게. 이게 약속이라고요. 결코 정죄함이 없다는 것의 연속성으로. 그게 1절이거든요. 이건 11절이니까 계속 연결되어서 오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가 이 세상 살면서 알아야 될 것은 육에서 난 사람, 우리가 육에서 난 사람이잖아요, 아담의 후손으로 육에서 난 사람 아까 했죠? 선과 악에 대해서 저울질하는 거요. 그 저울질해서 도대체 우리 인생이 얼마나 스스로 자기 자신을 힘들게 압박을 가하고 있는지에 대해 죽을 때까지 체험을 해야 돼요, 우리가.

이미 산 사람으로 하여금 왜 내 힘으로는 구원이 안 되고 주님께서 내 대신 죽으셔야 되는지 이유를 알기 위해서 우리는 이 육신가지고 뭘 할 수 있는가를 한번 해봐야 돼요. 해보게 되면 이 육신 때문에 우리는 얼마나 울었다가 웃었다가 1등 됐다고 좋다 하다가 3등으로 내려갔다가......

그냥 이 육신으로 사는 것을 저는 한마디로 이렇게 표현합니다. ‘인생은 기분 따라 사는 것이다.’ 앞에 이것 하나 붙인다면 ‘그저’. 북한말로는 고조 고조, 인간은 기분 따라 사는 거예요. 옳고 그름이 아닙니다. 바른 게 아니고 누가 ‘너 잘 한다.’ 하면 막 기분 좋아서 기마이(돈이나 물건을 선선히 내놓는 기질) 쓰고요, 못한다 하면 푹 기죽어 있고. 하루하루가 기분 따라 사는 거예요.

p.45 제일 끝에 보면 이런 말이 쓰여 있습니다. ‘쉽게 말하면, 지금 제가 독한 냄새를 뿜었다고 합시다. 그런데 어떤 분이 제 옆으로 와서 “와~냄새!” 하고 코를 막으면’ 곧 그분의 방문은 나에게 뭘 보여주느냐 하면 나에게 냄새나고 있다는 것을 냄새 얻는 그 분이 나에게 지적해주죠.

그게 바로 율법입니다. 우리 몸은 왜 죽어야 되고 우리는 열심히 살려고 애를 쓰는데 왜 죄라고 그러느냐? 그것은 우리 옆에 누가 와야 돼요. 전혀 죄 없는 분이 우리 자신을 보고 코를 막고 “아우, 더러운 냄새. 똥냄새.” 이렇게 되죠.

그래서 p.46 밑에서 5번째 줄에 이런 얘기가 나옵니다. ‘외과 의사가 환자의 몸체를 메스로 절개해 놓고 회생할 가능성이 없으면 손도 안 대고 그냥 덮어 버리지요.’ 주께서 그렇게 하시는 겁니다. 얼마나 감사한지. 야, 안 되겠다. 안 되겠다. 그냥 덮어. 수술 없다, 수술 없다. 그냥 덮어버려. 왜? 손댈 게 어디 한두 군데가 아니거든요. 그게 얼마나 감사합니까?

그냥 네 기분대로, 하고 싶은 대~로 그냥 살어, 그냥. 전원에서 집을 짓든 말든 그냥 살아. 그냥 살다 죽어. 어떤 간섭도 없고 평생 네가 죽을 때까지 원 없이 하고 싶은 대로 살다가 그냥 이 껍데기 같은 육은 화장터에 가면 1시간만 하면 다 태웁니다. 아, 죄송합니다. 정정합니다. 2시간만 하면 다 태웁니다.

얼마 전에 우리 장모님이 화장터에 가셨거든요. 2시간 만에 다 태웁니다. 딸 셋이 붙들고 어머니, 마지막에 그랬는데 거기 근무하는 사람이 “이제 됐습니다, 그만.” 집어넣으시고 비디오로 보시기 바랍니다, 잘 타고 있는지. 8번 방에 들어가 있습니다. 그게 어떻게 98세 된 장모님만의 인생이겠습니까? 그게 바로 누구 모습이에요? 지금 우리의 모습이에요.

가까워요. 사고 안 나도 몇십 년 차이 안 납니다. 사고 나면 빠르고요. 이게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니까요. 그럼 98세쯤 되면 그동안 원 없이 살았기 때문에 후회 없다? 아니에요. 인간이라 하는 것은 과거는 어찌 됐든 과거일 뿐. 지금! 지금 자기 기분이 중요한 거예요. 내가 왜 죽지? 이러고 있다고요. 그래서 로마서 8장에서 육과 영을 그렇게 계속해서 비교하는 겁니다.

자, p.49 보면 밑에서 5번째 줄에 ‘내가 전도하고 찬양하고 십일조 하고 강의하고 설교하고 목회하고 무슨 짓을 해도 “나는 안 된다”는’ 뜻이 십자가 안에 이미 박혀 있어요. 내가 어떤 짓을 해도 내가 한 일을 통해서 내가 구원받지 못한다는 그 사실이 이미 십자가에 박혀있다니까요. 안에 들어있어요.

따라서 십자가를 제대로 아는 목회자라면 ‘내가 이렇게 열심히 강의 준비하고 열심히 강의하니까 나를 알아주세요.’가 되겠어요, 안 되겠어요? 그러면 그건 지 자랑하는 게 되죠. 이렇게 열심히 하는데 왜 교인 수가 안 늘어나냐? 뭐 유튜브 조회수가, ‘좋아요’가 왜 늘지를 않아? 이러면 안 되겠죠?

뭐만 이야기해야 돼요? 그것이 죄라는 것을 드러낸 그게 바로 십자가에요. 그러니까 십자가를 안 이상, 에이스침대죠, 흔들리지 않는 이상은 로또를 하든지 마음대로 하세요, 마음대로. 다음에 1등 노리고 또 하시든지 마음대로 하시라고. 어차피 안 되는 걸 알고 하시면 돼요, 안 되는 걸. 그냥 천 원 날렸다 생각하시면 돼요.

이건 로또를 하든 뭘 하든 마찬가지에요. 로또는 나쁜 짓이고 딴 거 하면 좋은 짓이고, 텃밭 가꾸면 좋은 짓이고 이런 거 없어요. 뭘 해도 마찬가지에요. 로또 안 하면 죄 안 짓고 그런 거 없어요. 뭘 해도 마찬가지에요. 고추 심으나 파 심으나 아무 의미 없어요. 그냥 하고 싶은 대로 사세요. 사시되 그게 의미 없다는 사실.

p.51 중간에 보면 로마서 1장 6절에 이런 말씀 나오거든요. “너희도 그들 중에 있어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입은 자니라” 그리스도의 것, 예수님의 소유로 부르심을 입었다는 말은 십자가 안에 있는 사람은 내 소유가 나에게서 다 없어졌다. 이 몸도 나의 것이 아니고 주의 것이고 주님이 주신 육이 되니까 우리의 남은 인생은 육은 육대로 살아보는 거예요.

아, 이렇게 내 기분대로 살아가 보는 거예요. 이게 어디로 끝나겠어요? 이게 결국 허탈과 허무와 무의미로 끝나는 거예요. 할 때는 뭐 대단한 걸 했는데 지나가보니 처음에는 뭐 재밌다고 이건 10년 갈 거라고 하더니 2개월도 안 돼서 재미 하나도 없고, 또 저건 재밌을 거라고 해봐야 또 재미없고. 하여튼 성도가 되어서 세상살이의 특징이 여러분 아시지만 뭡니까? 재미있는 게 있어요, 없어요? 재미있는 게 하나도 없어요.

제3강, p.65에 ‘신이라는 우상’이 제목인데 p.66 3번째 줄, ‘아브라함이 ’육‘을 만들 어 낼 수 있다는 증거가 이스마엘 속에 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육을 만들었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p.71 7번째 줄에 우상 문제가 나오는데 우상이 뭐냐. 우상을 세 자로 ‘합리화’라고 했어요, 합리화. 우상, 다른 말로 하면 거짓 신. 거짓 신의 특징은 합리적이에요, 합리적. resonal, 이성적이다. 딱딱 따질 수 있는 신, 그게 거짓된 신이에요, 거짓된 신. 뭐해주면 뭐해주고 뭐해주면 뭐해주는 딱딱 따질 수 있는 신.

왜 이 신을 합리화로 보느냐 하면 인간 자체가 세상을 살 때 자연이 혼돈스럽거든요. 혼돈스러울 때 인간의 이성과 지혜가 추가되면 특히 수학과 물리, 지혜가 추가되면 여기서 질서잡기가 나와요. 이걸 가지고 여기서는 ‘형식화’라 하는데 인간의 모든 학문은 형식화시켜야 됩니다. 학문이란 것은 움직이는 변화에 대해서 인류에게 유용하고 이익이 되는 것들을 뽑아내기 위한 규칙을 만들기 위해서 반복적인 실험과 실습에 나서는 것, 이게 학문이에요.

끊임없이 해서 지금의 이 규칙이 2시간 뒤에 2년 뒤에 20년 뒤에 100년 뒤에 동일한 법칙으로 똑같은 결과를 낸다면 이걸 가지고 공리 또는 규칙이나 방정식이라 해서 그렇게 세우는 거예요. 똑같은 규칙, 이게 바로 합리화에요. 신이 이런 지혜를 줬다고 하는 거예요, 신이. 거기서 말하는 신이 뭐냐? 바로 거짓된 신이에요.

그럼 참된 신은 뭐냐. 합리화의 반대말은 ‘우연’입니다, 우연. 우연의 반대말은 필연. 이 규칙대로 한다면, 예수 이름으로 기도하면 응답해 주실 거죠? 하는 이건 필연이죠. 이건 우상이 되는 거예요.

그러면 우연은 기도하나 안 하나 관계없이 그냥 주시는 것, 이게 은혜죠, 은혜. 기도하나 안 하나 착한 일 하나 안 하나 그냥 주시는 것. 이것이 은혜 주시는 하나님이에요. 그런데 사람들은 왜 자꾸 규칙을 하느냐. 지가 노리는 게 있어서 그래요. 지금 주님이 주신 것은 별로 안 좋고 내가 내 힘으로 얻어내야 내가 신앙인 같다는 느낌을 받고 싶어서 그런 걸 하는 겁니다.

그다음에 4강, p.97보면 밑에서 8번째 줄에 ‘율법이 없이 죄를 범한 자는 또한 율법 없이 망하고’ 라고 되어 있어요. 율법이 없이 죄를 범한 자는 율법이 없이 망하고 율법이 있고 죄를 범하는 자는 율법이 있어 망하고. 율법은 하나님의 법이죠. 법이 있으나 없으나 결론은 그다음에 뭡니까? ‘망하고’.

이번 여수특강의 장소가 바뀐 줄 몰랐는데 바뀌어 있어요. 장소가 ‘고맙소 빌’이라 하는데 가봐야 알겠지만 고맙소 빌이 방이 몇 개인지 모르겠어요. 그런데 제가 알기로는 아마 4층 건물쯤 되겠죠. 그 방마다 특징이 있어요. 101호든 102호든 관계없어요. 전부다 한 곳에 뭡니까? ‘고맙소’ 안에 포함되어 있어요. 301호도 늘 고맙소. 고맙소~ 고맙소~ 전부다 ‘고맙소’ 안에 포함되어 있어요. 전부다 김호중 안에 포함되어 있어요.

인간은 살아가는 모든 것이 이러나 저러나 망하게 되어 있는 거예요. 망하게 되어 있는 거예요. 아프가니스탄에서 살다가 구사일생 탈출해가지고 그 사람이 미국 가서 살아도 망해요. 어떤 경우라도 망하게 되어 있다는 것을 미리 당겨서 알게 될 때 그게 바로 영적인 사람이에요.

그다음에 제5강, ‘율법 외(外)’라는 게 있습니다. 율법을 주신 것은 율법과 인간이 끊어지지 않고 율법이 있으나 없으나 망하게 되어 있다는 거예요. 네가 율법을 지키든 또는 세종대왕은 율법을 본적이 없어요, 연개소문도 그렇고. 왜냐하면 우리나라에 기독교 들어온 지 150년밖에 안됐기 때문에 그전에 사람들은 율법 없이 죽었어요. 강감찬도 마찬가지고 김유신 장군도 마찬가지고 율법 없는데 죽었어요. 하나님이 그렇게 하신 거예요.

이건 율법을 지킬 때만 있는 게 아니고 율법은 내가 알던 모르던 간에 율법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그게 p.133, 벌써 133페이지까지 갔어요, 밑에서 9번째 줄에 ‘옛날 우리나라 고전 유머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너는 왜 소를 훔쳐오느냐?” 하니까 “저는 소를 훔친 적이 없고 소가 묶여 있는 노끈만 훔쳤습니다.”’ 이건 말도 안 되는 억지죠. 그래서 그다음에 써놨어요. ‘너무 시시합니까?’ 그렇게 되어 있어요, 그 뒤에 보면.

‘노끈이 있어서 노끈을 당기니까 뭔가 덤으로 따라온 거지요. 자기는 별 신경도 안 쓰고 단지 노끈만 필요해서 당겼는데 거기에 소가 매달려 있더라는 말이죠.’ 나는 노끈만 훔쳤지, 소는 안 훔쳤다는 코미디가 있어요. 문제는 거기에 노끈과 소는 분리가 안 되는 것이라는 거예요. 율법과 인간이 분리가 안 되어 있어요. 인간보다 율법이 먼저 있었거든요.

잠언서 3장 한번 보겠습니다. 잠언서가 어디 있는지 아셔야 돼요. 구약성경 잠언서 3장 19절, “여호와께서는 지혜로 땅을 세우셨으며 명철로 하늘을 굳게 펴셨고” 보세요. 땅이 있기 전에 하늘이 있기 전에 무엇이 먼저 있었는가? 하나님의 법이 먼저 있었어요. 이게 지혜와 명철. 하나님의 지혜로 하나님의 법으로 하나님의 생각으로 하늘도 만드시고 땅을 만들기 때문에 노끈과 소가 분리되지 않듯이 이 세상과 법은 분리되지 않습니다. 여기 하나님의 율법과 인간은 율법이 있든 없든 분리되지 않습니다.

또 사자의 코털과 사자의 몸체는 분리되지 않습니다. 사자의 코털을 건드렸는데 사자의 몸이 막 움직여요. 자기는 코털만 건드렸는데. 그러니까 남의 차 건드렸는데 그 차 주인이 화내는 이유를 모르겠다. 이런 거 말 안 되죠? 차하고 주인하고 분리가 안 됩니다.

p.134 밑에서 17번째 줄에, 사자의 코털을 뽑았는데 사자 전체가 움직인다는 말은 한 율법 속에 모든 율법이 다 들어있다는 생각을 못한 겁니다. 골라잡아서 골라, 골라, 내가 지키는 것만 지키는 게 아니고 이 성경 어느 구절 하나를 건드리면 모든 구절을 다 건드린 셈이 돼요. 하나를 어기면 다 어긴 게 돼요.

그래서 인간이 왜 하나님 말씀을 못 지키는지 알겠죠? 인간이 지킬 수 없는 이유를 알겠죠? 성경은 인간이 지켜도 못 지킨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성경을 준 거예요. 뭐 창구에 바글바글해도 소용없어요. 그건 천국과 관계없는 겁니다. 지옥과 관련 있는 거예요. 지옥 가는 티켓사기 위해서 그렇게 교회 와서 바글바글 찬양하고 난리도 아니죠. 그렇게 하는 거예요.

율법 속에 모든 율법이 들어있어서 어떤 인간도 지킬 수 없다는 그것이 로마서 3장 19절에 보면 율법을 주신 이유에 대해 나와 있습니다. 율법을 주신 것은 인간으로 하여금 죄를 깨닫고 입을 막고 저주 아래 있게 하려 하심이라. 다 아는 이야기니까 그냥 넘어가겠습니다.

그다음에 p.146 중간에 보면 ‘나’라는 자체가 거짓되기 때문에 ‘하나님-나’의 구조도 거짓된 거예요. 무너져야 돼요. 내가 아는, 내가 믿는 하나님은 하나님이 아니에요. 거짓된 거예요. 그래서 기존 교회에서 십자가 이야기를 안 하죠. 무슨 이야기를 하느냐 하면 하나님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하나님 이야기해서 하나님 인정하면 다 신자인 줄 알고 그렇게 하죠.

그렇지 않습니다. 그 하나님이 가짜라는 것을 받아들여야 돼요, 성경을 통해서. 아, 내가 하나님을 믿을 잽이 못되는구나. 내가 하나님을 안다는 자체가 나의 착각이고 내가 환상한 거예요. 내가 나보다 더 뛰어난, 이걸 수학에서 ‘메타형식’이라 하는데 형식보다 더 초월적인 형식을 만들어서 그 형식 속에 모든 형식의 의미를 잡아두려는 그런 기능을 가지고 있어요. ‘메타’란 말은 초월한다는 뜻이에요.

어떤 마을에 이발사가 있는데 이발사는 모든 사람의 이발을 다 한다. 그러나 본인의 이발은 누가 하지? 이런 거요. 그레데 사람은 모두다 거짓말쟁이다. 그럼 그 말 자체는 거짓말일까, 아닐까? 이런 거요. 그레데에 살고 있는 사람이 말하기를 모든 그레데 사람은 전부다 가짜다. 할 때 그렇게 이야기하는 본인은 가짜냐, 안 가짜냐가 결정 나지 않을 때는 메타형식으로 하는 겁니다. 분리시키는 거죠.

한국교회는 다 이단이다. 라고 말하는 나는 이단입니까, 아닙니까? 이거하고 똑같은 이야기에요. 나는 이단이라고 하면 깔끔하게 문제 끝나죠. 그런 나는 괜찮다, 이렇게 나오면 니도 마찬가지죠.

그래서 p.160 9번째 줄에 보면 ‘율법 외에 한 의’에요. 그런 율법 말고 한 의. 이건 뭐냐 하면 인간이 잘났다 못났다, 지켰다 못 지켰다, 나는 죄인이다 아니다, 그런 얘기 말고 쉿! 입 다물고 내가 그냥 줄게, 내가. 율법 외(外)에 율법을 완성한 예수님께서 예수님의 생명을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그냥 주시는 거예요. 그게 율법 외에 한 의에요.

아까 그랬죠? 인간은 선악과를 따먹고 의를 누가 만든다고 생각합니까? 본인이 착실하게 살았기 때문에 이 정도라도 의롭다고 하죠. 그런 의를 안 받아줘요. 그런 의를 인정하지 않고 예수님이 홀로 이룬 율법을 우리에게 선물로 그냥 줘버린다니까요. 택배로 보내준다니까요, 그냥.

p.165에 이런 말씀 나옵니다. 위에서 3번째, ‘꽃봉오리는 법 없이 핀다.’ 가을은 여름은 법이 없이 오게 되어 있죠. 왜? 그건 하나님 말 들으니까. 낙엽은 낙엽 떨어지라고 우리나라에서 헌법 만들어서 떨어지는 게 아니에요. 법 없이 낙엽은 떨어지고 법 없이 꽃봉오리는 피게 되어 있어요.

자기 아들한테 너 키 좀 커라. 하면 법 없이도 알아서 키가 크고 제발 살 좀 빼라 하는 그건 법으로 해야겠지만, 그건 빼든지 말든지 해야겠는데 어째든 사람들은 법이 있어도 말 안 듣고 법이 없어도 말 안 듣고. 인간은 이미 육이기 때문에 육으로 갈 수밖에 없죠.

문제는 나중에 율법이 오니까 그게 불법인 게 드러났어요. 그런데 불법이 있는 걸 가지고 너무 슬퍼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로마서 4장에 나와요. 4장 7절, 교재 p.174 위에서 7번째 줄에 7절을 보니까 이런 말씀 나오죠. 불법이 있어요. 불법이 있는데 뭐라고 합니까? “그 불법이 사하심을 받고” 불법을 만들어놓고. 있지? 너 불법 맞지? 라고 해놓고 내가 용서해줄게. 이렇게 나오는 거예요.

사하심을 받고. 사람이 뭘 노력을 해서 삯을 얻게 되면 그건 은혜가 안 되는데 아무 한 것도 없이 그냥 무턱대고 모든 걸 용서받았으니까 이걸 은혜라고 하는 겁니다. 그냥 은혜로 구원받는 거예요, 은혜로. 봐줘서 구원받는 거예요, 그냥. 조건이 있죠. 자기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아는 조건이에요.

p.186 보겠습니다. 밑에서 6번째 줄에 이게 로마서 7장에 나오는 이야기인데요. 율법이 인간과 함께 있다 했죠. 아까 노끈하고 소하고 묶여있듯이 인간은 누구든지 율법과 관련되어 있어요. 그걸 로마서 7장에서는 결혼한 사람은 누구든지 부부가 한 몸으로 되어 있다는 거예요. 문제는 남편이 율법이라면 그 아내는 정말 정신병 걸려서 죽습니다, 아내가. 왜냐하면 남편 이름이 율법이거든요.

아내가 아내다워야 되고 아내의 도리를 다해라. 여자가 우리 집에 시집왔으면 시어머니 모시고 시아버지 모시는 게 당연한 거지. 뭐 네가 유세야? 우리 선조들 다 그렇게 살았어. 네가 뭐라고. 신식이야, 너는? 이 집 왔으면 이 집 귀신 되어야지. 요새 그런 이야기하는 사람 없습니다만. 그래도 말은 안 해도 속이 그럴 수 있어요. 이 집 귀신 되어야지. 뭐 친정을 세상에 한 달에 한번이나 가는 친정이 어디 있노? 친정은 친정아버지 돌아가실 때 한번 가고 친정 동생 결혼할 때 한번 가면 되지, 뭐 시도 때도 없이 일 년에 두 번씩이나 가려고. 이런 식으로.

그런데 그 남편이 죽었어요. 죽어버리면 남편이 율법인데 법이 죽어버렸으니까 여자는 해방이 된 겁니다, 해방. 그 해방을 해방되게 하는 것을 가지고, 새로운 남편이 왔는데 그게 바로 율법이 아니고 성령. 성령의 은혜로 너를 해방했다. 너를 법으로부터 해방했다.

다시 말해서 나의 착함과 나의 악함 여부를 따지지 않는 그곳으로 네가 들어왔다. 법이 따지지 않는, 법을 가지고 따지지 않는 그곳에 네가 놓여져 있다는 거예요. 이것은 뭐 손쓸 수가 없어요, 하나님이 그렇게 했다는데. 본인이 자꾸 본인이~ 거기에 대해서 부정하지 마세요. 스스로 뭐 겸손한다고 ‘아니되옵니다. 저는 죄 받아야 돼요.’ 이러지 마세요.

율법이라는 것은 절대로 못 지키기 때문에 p.201, 벌써 201페이지로 넘어갔습니다, 밑에서 7번째 줄에 ‘고급 식당에서의 음식 값에는, 남들이 함부로 출입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가격에 프리미엄이 붙어 있습니다.’ 따라서 고급 식당에는 돈이 없는 사람은 들어간다, 못 들어간다? 아예 서민들은 들어오지 말라는 이야기죠.

율법이 그와 같은 거예요. 율법은 너무나 지키기 힘들어서 얼추 뭐 양심대로 산다고? 가세요! 양심, 집에서나 많이 하세요. 그것 가지고는 통할 수가 없어요. 오직 예수님 아니고는 아무도 지킬 수 없는 게 율법입니다.

p.204 위에서 9번째 줄에 보면 ‘성령이 남편이 된다’ 아, 이게 남편이 있는데 아내가 되었다는 말은 별로에요. 그런데 ‘내가 있는데 남편이 왔다’ 이건 중요한 거예요. 왜 그러느냐 하면 남편은 우리의 보호자가 되기 때문에. 아내가 남편을 보호하지 않거든요. 든든한 남편이 아내를 든든히 보호해주잖아요. 든든한 아내가 왜소한 남편을 보호한다, 이것은 별로 안 맞는 겁니다.

남편이 성령 같으면 아내가 된 걸 가지고 여기서 이걸 union, 연합이라 합니다. 하나가 된 거예요, 하나가. 그래서 성경에 보면 이제 둘이 하나가 되었으니 사람이 나눌 수 없느니라. 아내가 남편을 떠날 수 없고 남편이 아내를 떠나지 못해요. 사람이 나누지 못해요. 내가 예수 안 믿고자 도망쳐도 주께서는 끝까지 물귀신 돼서 따라옵니다.

우리가 예수 안 믿고자 도망쳐봤자 이게 소용이 없어요. 왜냐하면 이건 내가 시작한 일이 아니고 주님이 시작한 일이기 때문에 주님이 시작한 일이 절대로 우리를 놔주지 않습니다. 자기 아내인데 놔줄 리가 있습니까? 이게 믿어지는 거예요, 이게. 그게 안 믿어지는 나는 날마다 죽어야 되겠죠.

그다음에 p.211에 보면 제8강, 제목이 ‘십자가 냄새’. p.212 위에서 8번째 줄에 보면 ‘여학생들이 가정 시간에 배운 카스텔라 만들기를 집에서 실습하게 되면 온 집안에 카스텔라 냄새가 진동합니다.’ 여러분, 여자분들 여학교 다닐 때 가정 실습 해봤죠? 카스텔라 만드는 거. 카스텔라 만든다고 온 집안에 카스텔라 냄새를 다 풍기죠.

이렇게 성령이 있어버리면 성령이 함께 하는 냄새가 다 온 집안에 풍기기 마련입니다. 어떤 카스텔라 냄새가 나오느냐. p.212 위에서 3번째 줄에, ‘고린도후서 4장 11절을 봅시다. 우리 안에 카스텔라 냄새가 진동합니다. “우리 산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니라.”’ 예수님의 생명의 냄새가 온 집안에 가득합니다.

그 생명의 냄새가 어떤 것이냐. p.213 밑에서 7번째 줄에 보면 ‘재미있지, 재미있지?’ 이렇게 나와 있어요. 사는 게 재미있지, 그치? 기분대로 사는 게 재미있지? 로또 1등 된 줄 알았는데 3등 되니까 재미있지? 안 재미있을 수가 없죠. 망해도 재미있고 잘 되도 재미있고 전부다 재미있는 거예요. 재미있죠.

그래서 p.233에 위에서 10번째 줄에 나옵니다. ‘여기에 무슨 경쟁이 필요합니까.’ 페이지 수를 제가 말하는 것은 나중에 교재 샀을 때 이 강의 들으면서 찾아보면 되니까. 이 세상에 경쟁할 필요가 없어요. 너는 수입이 얼마인가. 그걸 경쟁할 필요가 없어요. 네 텃밭 몇 평이고? 나는 몇 평이다. 경쟁하지 마세요. 텃밭 있어도 가꾸지를 못할 걸, 힘이 없어서. 나중에 97살 되어보세요, 가꿀 수 있는가. 97살 되면 잡초만 무성하죠.

p.241에 밑에서 5번째 줄에 인생은 뭐냐. ‘시편 39편 6절에 보면, “진실로 각 사람은 그림자 같고”’ 그림자 같다는 말은 실체가 없이 왔다갔다 왔다갔다 그냥 표면만 덮고 죽을 때 쑥 그냥 세상을 떠나고 마는 거예요. 마치 폭이 없는 그림자처럼.

식탁보 있죠? 식탁보 덮어놨다가 밥 먹을 때는 식탁보를 그림자처럼 쑥 빼잖아요. 식탁보를 와그작 와그작 막 삼키고 먹는 사람은 없잖아요. 자기 젓가락으로 식탁보를 먹는 사람은 없죠. 식탁보를 치우죠. 그 치워지는 식탁보 같은 존재, 가벼운 존재, 이게 인생입니다.

p.243 밑에서 10번째 줄에 ‘예수님께서 40일을 굶었던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분은 배고픈 것도 주의 일이었어요. 배고픈 것도 주의 일이었습니다. 우리는 배불러야 주의 일하는데 배고픈 것도 주의 일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p.252 중간쯤에 ‘로마서 12장 19절에 보면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제 무슨 뜻인지 아시겠죠? 경쟁이 없는데 무슨 원수가 있어요? 원수가 아니고 웬수죠. 너는 웬수야. 웬수가 더 이상 필요치 않는 거예요.

그러니까 쓸데없이 인생을 힘들게 사는 이유가 뭡니까? 그놈의 자존심 때문에 경쟁자 하나 만들어놓고 너한테 질 줄 아느냐, 속으로 그 사람은 가만히 있는데 지가 쓸데없이 해가지고 경쟁한다고 나중에 끝나고 보니까 나이 97이고. 평생 아무것도 아니고 그림자 같은데..... 뭐 바쁜 것도 없는데 되게 바쁜데 가보면 피곤한 몸뚱아리만 남아 있어요. 아이고, 허리야 허리야. 평생 뭐 아무것도 한 것도 없는데 허리만 아파오고 좌골 신경통, 머리 어깨 무릎 팔 안 아픈 데가 없어요. 고쳐도 안 돼요.

특히 율법의 완성은 사랑이거든요. 그 사랑에 대해서 이런 시가 있습니다. 시인지 노래 가사인지 그런데 한번 해볼게요.

나에게도 이런 감정이 오다니
보이는 모든 것들이 경이로워요
하늘엔 구름 한 점 없고, 내 눈엔 태양만 담겨있죠
이게 꿈이라 해도 놀랍지 않아요

내가 바라던 세상 모든 것이
특별히 나만을 위해 펼쳐지고 있어요
그 이유는 분명해요 이곳에 당신이 있기 때문이죠
(당신은, 주님으로 보면 됩니다, 사랑의 주님)
당신은 제가 본 중에 가장 천상에 가까운 사람이에요

세상의 꼭대기에서 모든 것을 내려다보고 있으니
내가 설명할 수 있는 유일한 건
당신이 곁에 있고 나서 찾은 사랑이에요
당신의 사랑이 나를 세상 꼭대기로 올려놓았죠
(주님이 나를 꼭대기에서 보는 것처럼 나도 꼭대기에서 보게 하셨다 이 말이에요)

2절,
바람 속의 무언가 내 이름을 알아내고서
모든 게 달라졌다고 말해주네요
나무 잎사귀에서, 산들바람의 감촉에서
날 위한 기분 좋은 행복이 느껴져요

그 후렴이,

세상의 꼭대기에서 모든 것을 내려다보고 있으니
내가 설명할 수 있는 유일한 건
당신이 곁에 있고 나서 찾은 사랑이에요
당신의 사랑이 나를 세상 꼭대기로 올려놓았죠

이것을 영어로 한번 해보겠습니다.

Such a feeling's coming over me
There is wonder in most everything I see
Not a cloud in the sky,
got the sun in my eyes
And I won't be surprised if it's a dream

Everything I want the world to be
Is now coming true especially for me
And the reason is clear,
it's because you are here
You're the nearest thing to heaven that I've seen

*I'm on the top of the world looking down on creation
And the only explanation I can find
Is the love that I've found ever since you've been around
Your love's put me at the top of the world*

Something in the wind has learned my name
And it's telling me that things are not the same
In the leaves on the trees, and the touch of the breeze
There's a pleasing sense of happiness for me

There is only one wish on my mind
When this day is through
I hope that I will find
That tomorrow will be just the same for you and me
All I need will be mine if you are here

Repeat*
I'm on the top of the world looking down on creation
And the only explanation I can find
Is the love that I've found ever since you've been around
Your love's put me at the top of the world

이게 카펜터스(Carpenters)가 불렀던 'Top of the world' 노래 가사에요, 이게. 여기 보면 ‘당신은 천상에 가장 가까운 사람’이라고 되어있는데 그건 내가 이렇게 변화된 것은 내 가까이에 나를 사랑하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내 옆에 있기 때문에 나는 세상 꼭대기에서 내려다볼 수 있게 되었다는 거예요, 세상 모두를. Top of the world.

거기에 ‘Your love's put me at the top of the world. 당신의 사랑이 나를 세상 꼭대기에 올려놓았죠.’ 세상 꼭대기에 당신이 나를 놓아서 세상을 내려다보면서 살 수 있도록 해주신 그것은 바로 나를 사랑하는 당신이 내 주위에 있기 때문에 그렇다.

다시 한번 그 한글 가사를 보면 ‘나에게 이런 감정이 오다니 보이는 모든 것이 경이로워요. 이게 꿈이라 해도 하등 놀랍지 않아요. 내가 바라던 세상 모든 것이 특별히, especially, 나만을 위해서 펼쳐진 것 같아요. 그 이유는 분명해요. 이곳에 당신이 있기 때문이죠. 당신은 내가 본 가장 천상에 가까운 사람이에요.’

이 부분 영어 가사가 ‘Everything I want the world to be. Is now coming true especially for me. And the reason is clear, it's because you are here. You're the nearest thing to heaven that I've seen.’ 내가 보아온 천상 중에 가장 가까운 데에 있었던 겁니다. 그런 이야기, 이걸 로마서의 예수님에다가 인용하게 되면 딱 바로 성도에게 해당되는 especially, 특별한 당첨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인간의 말이 아니고 이렇게 성경으로 문자적으로 남겨주시니 감사합니다. 누구의 사적인 견해도 아니고 의견도 아니고 예수 안에 있는 자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는 그것을 문서로 남겨주시니 고맙습니다. 이제는 단순히 문서나 글자가 아니라 지금 살아있는 현실 그 자체인 것을 저희들이 받아들이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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