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련회자료

7강 이질적 요소

아빠와 함께 2022. 1. 15. 21:15

2022겨울수련회 여호수아강해 제 7강 이질적 요소-이 근호 목사

자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무엇을 믿을 것인가? 어떻게 살 것인가? 이게 계속해서 티격태격하기 마련이에요. 그런데 여호수아 1장부터 하나님께서는 언약, 다른 말로 하면 율법이죠. 율법의 주도적인 인도와 통치, 인도와 이끄심, 이끄심 앞에서 무엇을 어떻게 살 것이냐 하는 것은 이스라엘한테는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무엇을 믿을 것인가? 율법의 현존, 언약의 살아있음, 이걸 믿으라고 하는 거죠.

그럼 이걸 다른 말로 하면, 땅에 거주하기인가? 아니면 언약에 거주하기인가? 같은 말이에요. 여기서 땅에 거주한다는 말은 어떻게 살 것인가, 이고. 언약에 거주한다는 것은 무엇을 믿을 것인가와 관련되어 있어요. 전쟁을 하는 가운데서 우리들의 상식에 의하면 이스라엘 백성은 땅에 거주하기 위함이 아니고 언약에 거주하는 자들이고, 어떻게 살 것이냐는 이미 광야를 통해서 그들은 죽음을 맛보았기 때문에, 그들이 실패를 했기 때문에, 무엇을 믿을 것인가를 위해서 하나님께 부름 받았다고 그렇게 생각해왔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한테는 이 두 개는 없는 걸로 지우도록 하겠습니다. 땅에 거주하기, 이것 없고. 어떻게 살 것인가, 이게 없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리끼리만 살면 되는데, 여기에 여호수아 9장에 보면, 여호수아 9장에 들어가게 되면 기브온 사람들이 딱 등장해요. 기브온 족속이 딱 등장해가지고, 기브온 족속이 어디에 있느냐 하면은 이게 기브온 족속이에요. 기브온 족속이 등장해가지고 이미 이스라엘한테는 그것이 없다고 여겼던, 어떻게 살 것인가? 라는 이런 요소가, 언약만이 지배해야 할 땅에 이게 그냥 쑥 들어왔어요. 그것도 이스라엘을 속이면서. 쑥 들어왔습니다.

어떻게 살 것인가? 어떻게 거주할 것인가? 이 기브온 족속들이, 그전에 이스라엘민족이 아이성을 처참하게 망가뜨리고 여리고성도 무너뜨리니까, 이 기브온이라는 이방민족, 히위족속에 속한 사람들인데, 이 기브온 이 사람들이 이스라엘을 어떻게 평가를 하느냐 하면은, “야! 전쟁의 신이다. 전투력 하나는 끝내준다. 우리가 알아서 기어야지 같이 덤볐다가는 망한다. 그렇다면 저 이스라엘이 쳐들 온 데서 우리가 어떻게 살 것인가? 또는 어떻게 우리가 이 땅에 비비고 견딜 수 있는가” 적들이 너무 세니까. 홍해 통과했죠. 요단강 통과했죠. 강력한 여리고성 무너뜨렸죠. 아이성 작살냈죠.

이렇게 나오니까, 이 기브온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은 이스라엘을 표면적으로 해석하고 이해하게 된 겁니다. 그래서 그들은 위장술을 해가지고 자기는 이 먼 쪽 동네에서 왔다고 생각을 해가지고 그냥 위장항복을 한 거예요. 속여서. 멀리서 온 그러한 사람이고, 이 전쟁, 약속한 가나안 땅 전쟁과 전혀 무관한 그러한 족속인데, 뭐 이렇게 원치 않게 말려들었다는 식으로, “우리는 여호수아의 종입니다.” 이렇게 하면서 약속의 땅에 쑥 들어온 거예요. 그래서 이스라엘이 여기서 속아 넘어갔습니다.

출애굽기 34장 15-17절을 보게 되면, 특히 15절에 보게 되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누가 한번 읽어볼까요? 출애굽기 34장 15절. 목이 좀 갈라지고 해서. “너는 삼가 그 땅의 거민과 언약을 세우지 말지니 이는 그들이 모든 신을 음란히 섬기며 그 신들에게 희생을 드리고 너를 청하면 네가 그 희생을 먹을까 함이며” 감사합니다. 너는 삼가 그 땅의 거민과 언약을 세우지 말라. 맹세하지 말라고 분명히 했어요. 이 말씀을 모세가 듣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들을 때는 그들이 뭐라고 했느냐 하면은 “그럴 일은 없습니다. 우리가 지금 의지할 데는 하나님 밖에 없고 하나님 말씀 밖에 없는데, 우리가 이러한 처지에서 다른 민족과 언약을 세운다는 것은 언어도단이고 우리는 그럴 리가 없을 것입니다.”라고 장담을 한 거죠.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언약을 위해서 하나님에게 순종하는 유일한 백성으로서만 우리는 존재합니다.”라고 자부하고 싶죠.

그러나 언약을 성취하는, 언약을 전개하는 이 과정 속에서 그냥 믿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을 한 겁니다. 여기서 뭐가 등장하느냐 하면은 인간의 선택과 결정을 요구하는 사태가 벌어져버린 거예요. 그냥 믿습니다,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하고 하나님 믿고 살면 되는데,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단순하게 단출하게 우리를 이끄시는 것이 아니고, “그래 네 의견은 어떤데?”라는 것이 그냥 들어온 것이 아니고 훅 들어와요. 이게 훅 들어온다고요.

그럼 우리는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저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그럼 하나님이 “네가 믿는 것은 인정하는데, 이럴 경우에는 네 생각은 어떠냐?”라고 훅 들어왔을 때, 예상도 못한 사태가 벌어졌을 때,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것을 그냥 감사합니다, 하고 받기만 하면 되는데, 그게 아니라 믿으려고 준비해도 내가 선택의 상황이 벌어질 때는, 그때는 여러분 어떻게 처신하고 조치해야 됩니까? 왜 하나님께서는 의도적으로 믿겠다는데 왜 하나님과의 괴리될 수밖에 없는 그러한 일들을 왜 하나님께서는 조장하시고 의도적으로 유발하시느냐 이 말입니다. 잘 믿겠다는데. 안 믿겠다는 게 아니고. 목숨 바쳐 믿겠다는데, 주님께서 “너 목숨 잘 못 바쳤다.”라는 사태가 벌어질 때는 그 결과 어떻게 처신하겠습니까?

이 여호수아를 하면서 정말 이상한 일은 계속 신나게 정복하고 다 차지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되었고 우리 힘이 아니고 주의 은혜입니다, 하고 그냥 찬미하고 파티, 파뤼, 파뤼, 파티 열고 그러면 끝날 문제를, 왜 이질적인 요소, 출애굽기 34장에 위반되는 이방민족이 어떻게 해서 어떤 정당함을 가지고 그런 권한도 없는 게 이 땅에 이스라엘 백성과 같이, 공히 비언약적인 민족이 같이 사는 이런 일을 왜 하나님께서는 획책하십니까? 왜 이런 일을 허용하십니까? 라는 의문점을 갖지 않을 수밖에 없어요. 이 여호수아에서.

여호수아 신나게 해석하다가 어디에 걸림돌이 턱 걸리느냐 하면은 이 기브온 사건에 턱 걸려버린 겁니다. 잘 하겠다는데 왜 이물질이 여기에 끼었느냐 이 말이죠.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 기브온을 안 죽이겠다고 하는 것도 아니에요. 어느 쪽에서 속였느냐 하면은 기브온 쪽에서 속였고. “우리는 이 동네 사람이 아니고 먼 동네에서 왔으니까 이스라엘의 적이 아닙니다.”라고 그쪽에서 속였고.

속였다는 증거로서 오랜 여행가운데서나 필 수 있는 푸른곰팡이라든지, 여러 가지 곰팡이 종류, 그걸 조사해보지는 않았지만. 그런 곰팡이 종류. “보세요. 우리는 먼 데서 왔잖아요. 우리는 지나가는 나그네입니다.” 뭐 이런 식으로. “나그네로 와서 여기에 사는데, 그 죄밖에는 없어요. 자 이래도 우리가 당신네 여호와 하나님의 적입니까?” 이렇게 나올 때, “아닌 것 같은데?” 뭐 이런 의견이 나온다 이 말이죠.

그러면 여호수아가 “아하! 이 사람들은 우리 적이 아니니까 그냥 대적하지 말자.” 그렇게 나오니까, 이 기브온 쪽에서 “그럼 말로 때우지 말고 서류로 작성해주세요.” 이래 나오는 거예요. “아니, 말은 누가 못합니까? 서류로 작성해주세요. 실제로 이스라엘 당신들이 가장 신봉하는, 그냥 여호수아 이름 말고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해서 우리를 다시는 해치지 않겠다고 우리하고 맹세해주시고, 그 이야기를 우리끼리 지도층에서만 하지 말고 모든 족장들한테 해주세요. 물어보세요.”

그 족장들도 여호수아한테 이야기 듣고 물어보니까 “그거는 우리 적이 아니니까 살려둡시다.” 그래서 전부 다 족장부터 백퍼센트 다 속아 넘어갔어요. 속이는 자한테 누가 이깁니까? 다 속아 넘어 갔어요. 딱 해보니까, 딱 정체를 꿰고 보니까, 이게 정복의 대상이었던 겁니다. 정복의 리스트 안에 들어있었던 거예요. 히위 족속이었어요.

이 사태를 어떻게 해결할 거예요? 왜 하나님께서 이런 일을 깔끔하게 정리하지 아니하시고 난처한 상황을 왜 의도적으로 일으켜서 이스라엘만 살아야 할 땅에 이방민족이 섞여서 사는 그런 결과를 왜 낳았습니까? 궁금하죠? 되지도 않는 개그하지 않겠습니다. 궁금하면 오백원, 그런 것은 이제 너무 식상해서. 그것은 바로 하나님을 믿습니다, 라고 할 때 이 믿음 자체를 주님께서는 둘로 나누어버렸어요. 나누는데. 그것은 뭐냐 “하나님을 믿습니다.”라고 할 때 하나님께서는 더 확장시켜버려요. 믿음의 내용을. “너를 믿지 마라.” 이 내용을 새끼 친 거예요.

나는 믿습니다. 믿습니다. 이게 자칫하면 뭐가 되느냐 하면은 주님에 대한 믿음이 아니고 신념이 돼요. 하나님 믿는 나에 대한 믿음. 이거는 신념이거든요. 이 세상에서는 신념과 신앙을 구분하지는 않습니다마는 주님나라에서는 이게 철저하게 구분되는 겁니다. 아브라함에게 약속의 아들을 이야기하지만 아브라함은 뭘 낳습니까? 이스마엘을 낳죠. 분명히 야곱과 에서 가운에서 장자가 야곱이 되어야 하지만, 실제로 아버지는 장자를 야곱이 아니고 그 형 에서에게 줄 때에 야곱은 억지로라도 형을 속일 수밖에 없고 아버지를 속일 수밖에 없는 그게 훅 들어오는 겁니다.

그럴 때 그 아버지 이삭은 자기가 하나님을 믿는 이 하나님이 균열이 일어나야 한다. 그러니까 균열나지 않는 신앙은 신앙이 아니었음을. 내 신념이 쪼가리 나지 아니하면 신앙이 아니었음을. 믿습니다, 할 때에 하나님을 믿는 것처럼 느껴지지만 그 안에 하나님을 믿는 나를 믿는다는 것이 필히 같이 동반했다는 사실을 우리가 놓치기가 쉬워요. 그래서 예수는 믿지만 십자가는 자기를 부인하라고 하잖아요. “나 예수님 인정합니다. 훌륭하십니다.” 이거는 뭐 4대 성자 중에 한분이라고 이렇게 인정하더라도 정작 하나님의 구원은 자기를 부인하는 거예요. 자기를 부인하는 것.

이거는 다시 말해서, 너를 믿지 마라. 이거는 뭐냐 하면은 너를 의심하라. 너를 믿지 마라. 너를 의심하라. 너를 의심의 대상으로 믿는 믿음을 하나님 믿음에다가 집어넣어버려라. 이걸 합체해버려라. 그러니까 나를 의심하는 것에 내가 어떤 흔들림이 없어야 된다는 거예요. 나를 의심하는 데에 있어서 어떤 흔들림이 없어야 돼요. 그래야 내가 정지되니까. 제거대상이 되니까. 하나님께서 기브온 족속을 주는 것은 이스라엘도 언제든지 제거대상이라는 것을, 기브온을 집어넣음으로서 계속 약속의 땅에 정착한 게 하나님의 일의 마무리가 아니라는 겁니다. 이게 하나님의 모든 언약의 끝이 아니라는 거예요. 하나의 중간 과정에 불과한 겁니다.

여호수아 9장에서 일어난 일은 여호수아 8장의 아이성에 대해서 다시 한 번 공격을 합니다. 여호수아 7장에서 아이성을 칠 때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관성의 법칙을 사용했습니다. 여리고성을 무너뜨릴 때, 하나님께서 여리고성을 무너뜨릴 때 하나님께서 적극적으로 도와주셔가지고 여리고성이 함락되는, 나팔 부니까 와르르 외부인이고 내부인이고 와르르 다 무너졌잖아요. 무너졌다 이 말이죠. 그러면 이 추진력으로 그냥 가는 거야. 이런 거예요. 그냥 가는 거야.

여리고성 무너뜨릴 때 여리고성이 굉장히 강한 성이에요. 견고한 성이었습니다. 견고한 성을 무너뜨렸으니까. 아이성은 작다는 뜻이거든요. 아이성은 그저 이 추진력에 의해서 파묻히는, 그냥 밀어붙이면 되는 줄 알았어요. 그러니까 이 여리고성을 할 때 사람들이 하나님을 의지했다, 믿었다 하지만 사실은 하나님을 믿으면서 무엇을 발생시켰느냐 하면은 하나님은 우리편이다, 라는 것을 발생시킨 거예요. 갑자기 우리, 나라는 것이 갑자기 등장한 거예요. 하나님은 우리편이다. 하나님은 하나님편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하나님이 함께 했던 동업자다. 동업자 정도로 생각한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을 믿습니다, 라고 하면 이 믿는다는 것을 굉장히 대견스럽고 동업자로서 자질이 훌륭하고 태도가 양호하다고 본인 스스로 믿었던 거예요. 그러니까 인간은 누굴 믿는다? 인간은 자기 자신을 믿은 겁니다. 왜? 뭘 보고? 결과를 보고. 하나님이 함께 하니까 도대체 난공불락의 여리고성이 무너졌으니까. 야, 이거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 충분히 인정받은 동업자라는 생각을 갖지 않을 수가 없어요. 인정받았으니까.

그런데 그들이 빠트린 게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은 여리고성 할 때에 여호수아가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6장 2절에,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여리고성과 그 용사들을 내 손에” 그 다음에 유명한 단어가 나옵니다. “붙이시니” 붙이시니, 라는 것은 무슨 뜻이냐 하면은 give,deliver 쇠꼬챙이 있죠. 내가 빈 쇠꼬챙이만 들고 있으면 여기서 주님께서 닭고기도 물어다 집어넣고 오뎅도 집어넣고 햄도 집어넣고. 우리는 먼 딴청 피우고 있는데 나중에 보니까 여기 뭐 닭고기하고 소시지 햄 내가 좋아하는 것 전부 다, 오뎅부터 해가지고 어묵부터 해가지고 줄줄이 다 꿰어져 있는 거예요.

그러면 누가? 그 표현을 할 때 변화가 일어났어요. 빈 쇠꼬챙이 꽂이에 이런 고기들이 있을 때에, 채소도 뭐 꽂힐 때에 그 다음에 나오는 표현은요, 우리의 고백은 뭐냐, “누굽니까? 왜 이것들을 나한테 붙였습니까?”라는 질문을 내가 했다는 것을 대신해서 다른 분에게 질문을 해야 해요. 여리고성의 전쟁은 뭐냐, 우리가 새삼스럽게 질문할 분이 따로 계시다는 점이에요. 따로. 이 말은 내 선에서 이 결과를 해소하거나 설명할 길이 전혀 없었습니다, 라는 고백. 이게 바로 믿음이에요. 그게 믿음이에요. 내가 강의 시간에 졸고 있는 것은 전혀 내 뜻이 아니었습니다. 이게 내 선에서 설명할 수 없잖아요. 그렇죠.

내쪽에서 설명할 수 없을 때 무엇이 성취가 되느냐 하면은, 나는 평소에 나를 믿지 않았습니다. 의심했습니다. 그 점에 대해서는 저는 한결같습니다. 앞으로 죽을 때까지 나는 의심할 거예요. 이것이 한결같이 이루어지는 거예요. 이걸 네자로 하면 뭡니까? “붙이시는” 붙이시는 거예요. 이걸 가지고 구약학자들은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이걸 무슨 전쟁이라고 하느냐 하면은 붙이시는 전쟁이라고 하는 거예요. 여호와 전쟁은 붙이시는 전쟁. 지나가기만 하면 자석에 쇠붙이가 달라붙듯이. 떡떡 들어붙는 거예요. 내쪽에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이게 바로 고린도전서 15잘 8절에 보면 내가 나 된 것은, 사도가 된 것은 주께서 사도라는 것을 날아오게 해서 떡 붙인 거예요. 내가 구원받은 것은, 나는 다메섹에 내려가서 예수 믿는 사람을 잡아 죽이려고 했는데 주님이 와서 갖다 붙인 거예요. 너 이제부터 사도야. 끝. 그 순가 사도바울은 자기 자신을 의심한다는 것이 자기의 믿는 믿음 안에 자기 자신을 포함을 시켜버린 거예요. 집어넣어버린 거예요. 나는 불신자라는 내용이 내가 믿어야 할 내용 속에 그게 합류가 되는 기쁨이 주어진 겁니다. 내가 불신자라는 것. 내가 쏟아내는 것은 다 더러운 배설물에 지나지 않다는 것. 그것을 사도바울은 고백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배설물과 그리고 주께서 행하심과 이게 같이 결합이 될 때 제대로 믿을 내용이 완성이 되는 겁니다. 참 쉽죠. 나를 의심하면 되니까. 그러니까 식사기도 할 때도 좀 더 이 믿음의 내용을 확장해서 식사기도하면 이렇게 됩니다. 확장되지 않았을 때는 “오늘도 귀한 양식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래 돼버리면 내가 이거 진짜 밥 먹기 위해서 주님께 기도의 응답으로 이용해야 될지 말아야 될지 이래 되는데. “하나님이여 저는 이걸 먹을 자격이 없습니다.”하고 허겁지겁, 허겁지겁 먹는 거예요. 제가 이걸 먹는다는 것은 언어도단이고 먹을 자격이 없습니다. 허겁지겁. 가져가지 마. 그거 내 거야. 허겁지겁.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괴리현상이 일어나게 만드시는 겁니다.

그런데 7장에 넘어가게 되면, 이 관성의 법칙이라는 게 습관의 법칙이거든요. 한번 인정받았으니까 계속 인정받을 것이라고 교만 떠는 겁니다. 그래서 여호수아고 뭐고 주님한테 물어보지 않고 그냥 쳐들어간 거예요. 쳐들어갔는데 패배했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쳐들어갔는데 패배했어요. 그 이유가 여호수아 7장 12절에 나옵니다. 12절에 뭐라 되어 있느냐 하면 이래 되어 있어요. 12절을 읽어보게 되면 “그러므로 이스라엘 자손들이 자기 대적을 능히 당치 못하고 그 앞에서 돌아섰나니 이는 자기도 바친 것이 됨이라”

이 자기도 바친 것이 됨이라는 것이 무슨 뜻이냐 하면은 너는, 물건뿐만이 아니고 너 자신도 이미 일찍이 하나님께 다 바친 물건과 동급이다. 하나님께 바친 물건은 스스로 취소할 수 없다. 그 원칙을 네가 위배했다는 거예요. 하나님의 물건에 대해서 같이 하나님께 바친 게 돼요. 붙여줬으니까요. 붙여줬으니까 하나님의 전리품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오직 하나님께 공로만 돌리고, 하나님께 공로를 돌릴 때 쭉 금, 외투, 은도 있는데 그 중에 누구도? 여기 선반에다가 하나님의 전쟁에서 얻은 전리품을 놓을 때에 그냥 놓지 말고, 구경하지 말고, 그 옆 빈칸에 자기를 놓으라 이 말이죠. 테이블위에. 자기 자신도 주님의 전리품으로 덜렁 눕는 거예요. 누웠는데, 자기 힘으로 스스로 거기를 빠져나와서 “이거 내 거 할까?”

만약에 이스라엘이 전쟁에서 이겨 귤을 했으면, 귤 자리 옆에 자기가 있어야 돼요. 근데 귤이 먹고 싶다고 해서 벌떡 일어나가지고 귤을 가져버리면 네가 하나님 자리에 앉는 거예요. 네 자리로 돌아가란 말이죠. 너는 바치어진 거라는 말이죠. 바쳐진 거. 바쳐진 자에게 입 벌려! 귤 줄게. 이러면 되는데, 그게 아니고 내가 귤이 좋다고 내가 해버리면, 이것은 뭐냐 하나님이 나를 인정해줬다가 되니까 믿음의 내용에서 자기를 의심하라, 자신을 믿지 마라가 빠져버리는 셈이 되니까, 이거는 탈락이죠. 신앙의 생명책에서 탈락한 경우가 그거 때문에 그렇잖아요.

그러니까 마치 뭐와 같으냐 하면은 형사가 도박장에 급습해가지고 도박하는 사람 열명을 딱 잡았다고 합시다. 그래가지고 경찰서에 다 와가지고 조서를 꾸미는데, 아홉 명은 예예 나이 얼마, 이름 뭐, 이러고 있는데, 열 번째 도박한 사람이 와가지고 “형사님, 이거 내가 제보해서 한 건 해가지고 형사님도 승진하셔야죠?” 그러면 형사가 “너는 네 자리로 가!” “아이고 제가 협조 안 했으면 이번에 이거 건수 못 올렸습니다.” “너도 수사대상이야. 저리 가!” 왜 네가 마치 저 아홉 명을 다스릴 수 있는 자격이라도 된 것처럼 네가 왜 여기서 껄떡대고 있느냐 이 말이죠. “저리 안 가!” 그래 된 겁니다.

아이성을 정복할 수 있는 자격은 이스라엘에게 없어요. 여리고성이 하나님의 전리품이라면, 그리고 거기서 기생 라합도 전리품이라면, 이스라엘도 전리품으로 유지해야 돼요. 유지가 되어야 된다고요. 주님의 공로로만 구원되어야 돼요. 그래서 나중에 알고 보니까, “우리 안 그랬는데요. 우리가 뭘 훔치지 않았는데요.”하니까, 여기 지난번에 이야기한 아간이 그 짓을 했죠. 하나님의 언약을 어기고 망령되이 행했다 하고 아간을 거기서 돌로 치고 불사르고 돌로 파묻었습니다. 똑같은 결과가 8장 28절에 보면 나옵니다. 이제 아이성을 할 때에 여호수아가 하나님의 지시를 받고 한 작전이 매복 작전이었습니다.

여기 8장 7절에 보면 이래되어 있어요. “너희는 매복한 곳에서 일어나서 그 성읍을 점령하라” 그 다음에 뭐한다?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 손에 붙이시리라” 구원받은 자나 안 받은 자나 하나님께 들이대는 도구에 불과하니까 붙이신다. 하고 난 뒤에 27절, “여호수아가 명하신 대로 이스라엘이 탈취하였더라” 28절, “이에 여호수아가 아이를 불살라(아이성입니다) 그것으로 영원한 무더기를 만들었더니 오늘까지 황폐하였으며” 아이를 불사르고 황폐한 무더기로 만든 것은 아간에게 행한 그러한 조치와 동급이에요. 똑같이 했어요.

그런데 이스라엘 속에 무슨 요소가 있었다? 아이성, 이방민족의 요소가 있다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속에 먼저 이방민족의 요소를 끄집어내고, 그걸 끄집어낸, 이방요소가 없는 상태가 되어서, 순전히 하나님의 도구가 되어서 이방민족을 할 수 있는, 그러한 하나님의 정말 붙이심에 대해서 흠집이 나지 않도록 하나님의 전쟁을 그렇게 벌였다는 이야기에요. 아주 처참하게 했고, 그 다음 29절에 보면 “그가 또 아이 왕을 저녁때까지 나무에 달았다가 해질 때에 명하여 그 시체를 나무에서 내려 그 성문 어귀에 던지고 그 위에 돌로 큰 무더기를 쌓았더니 그것이 오늘까지 있더라” 아간의 무덤도 있듯이 아이 왕의 무덤도 같이 있는 거예요.

그리고 난 뒤에 30절부터 35절까지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디에 가느냐, 좀 더 올라가요. 에발산. 그리심산. 이 이야기할 때마다 꼭 뒤에 들러붙는 이야기가 있어요. 제가 가봤습니다. 이 이야기. 이제 식상하고 지금 코로나 때문에 못 간다는 이야기. 우리는 그리심산에 못 올라가고 에발산에 올라가서 그리심산을 마주보고 이 사이에 세겜에 갔습니다. 이 세겜에는 들어가지 말라고 했는데 들어갔어요. 뭣도 모르고 들어갔어요. 진짜 아주 긴장된 도시였어요. 우리 체포해서 돈 받아먹을 수 있는 그런 사람들이 있는 도시에요. 이게 지금은 웃지만 그때는 웃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면 왜 들어갔느냐, 하나님이 붙이시매 들어간 거죠. 인터넷이 안 터지니까. 우리가 여기에 있다는 것을 알릴 수가 없었어요. 왜? 인터넷이 안 되니까. 그 정도로 이 팔레스타인 이 사람들 무슬림 땅은 위험해요. 이게.

세겜 여기 갔습니다. 갔으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리고 지나서 아이 이기고, 여리고 이기고 아이성 이기고 들어가서 실로 올라가서 여기 에발산에 갔을 때에, 하나님의 약속이, 신명기 27장을 한번 보셔야 돼요. 신명기 27장에 있는 그 내용. 미리 예언한 내용입니다. 네가 이렇게 되고, 이렇게 되고, 이렇게 되고, 요단강 건너까지 전부 다, 신명기는 아직까지 정복하기 전이에요. 하지만 요단강 건너가서 어떻게 되고, 어떻게 되고 미리 다 이야기했고. 나중에 결국은 너희가 에발산과 그리심산에 도착할 것이다. 그때를 미리 내가 너희한테 시킨다. 시켜가지고 열두 지파 가운데서 여섯 지파를 나누고.

여기 산이 있는데 세겜이 있고 그때는 세겜이라는 말이 없겠죠. 둘이 나누고 단을 쌓는데 단을 어디에다가 쌓느냐면 27장 4절에 보면 에발산 밑에다가 단을 쌓아요. 단을. 단은 두 개가 아니거든요. 언약궤가 두 개가 될 수 없거든요. 자, 산은 두 개인데 언약궤를 놓는다면 둘 중에, 여기 그리심산은 축복산이에요. 축복산. 에발산은 저주산입니다. 자, 축복산과 저주산 가운데 어느 쪽에다가 제단을 쌓는 것이 복을 받을 수 있을까요? 이렇게. 이건 뭐 주님께서 정하지만. 이거는 바로 단이 저주산에 있을 때에 마주보는 쪽 그리심산에서 날아오는 미사일, 축복의 미사일로 흠뻑 여기 에발산에서 젖을 수가 있는 거예요.

자기를 부인할 때, 주님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왔잖아요. 주님께서 원하는 죄인의 자리에 들어설 때 비로소 안 보이던 복이 보이고 안 보이던 영생이 보이고 안 보이던 생명이 보이고 안 보이던 천국이 보이는 겁니다. 한껏 저주스러울 때. 그것도 내가 저주를 하기 위해서 죄짓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지정한 그 저주, 저주의 자리. 이것은 뭐냐 하면 나를 의심할 수밖에 없는 그 행복한 자리. 그 기쁨의 자리에요. 사람이 자리를 의심하는 게 왜 기쁘냐 하면은 자기를 믿는다는 것은 자아가 자아를 믿기 때문에 내가 두 개로 갈라져가지고 두 어르신네를 다 모실 수가 없어요.

인간은 내가 이상적이 자아, 상상계에서 이상자아라고 하는데, 내가 기대한 이상자아, 이상자아를 내가 달성할 수 없어서, 달성하기 위해서 어디로 가느냐 하면은 사회에 나가거든요. 사회, 세상에 나가게 되면 젊은 사람들 행동 그대로에요. 가정에서 내가 꿈꾸는 게 있어서 그걸 이루기 위해서 목포를 버리고 서울로 올라가잖아요. 거기 사회에서 내가 되고 싶은 나의 이상자아 말고 자아이상을 여기서 꿈꾸는 거예요. 이게 반대로 됐네. 자아가 이상한 것을 나는 스스로 갭을 느끼고 결핍을 느끼기 때문에, 세상에 나가서 내가 꿈을 이루리라. 보이즈비엠비셔스Boys Be Ambitious!!소년들이여 꿈을 가져라고 하는 것처럼.

세상에 나가서, 서울이나 경기도 큰 데에 가면 내 꿈을 이룰 것이라고 생각할 때, 여기서 꿈을 얻기 위해서는 얼마나 많은 것을 양보하고 자기의 자아이상을 파괴시켜야 됩니까? 그만큼 상처가 더 깊은 거예요. 그러니까 이런 결핍 때문에 사는 것이 아무리 몸부림쳐도 자기 욕망을 좁힐 수가 없으니까, 한마디로 아무리 밥 먹고 살아도 어떻게 느끼느냐 하면은 비참하게 느껴지는 거예요.

여기서 나오는 적절한 예는 바로 그 유명한 노래 ‘존재의 이유’ 내가 굳이 꼭 이래 살아야 되는가. 신림동 자취방에 누워가지고, 이 김종환이라는 작곡가. 내가 왜 이래 사는 거야? 도대체 이거 말고 다른 대안이 없는 거야? 내 인생이라는 데에 있어서. 하나밖에 없는 인생인데. 왜 이렇게 구질구질해. 왜 나는 인생이 이렇게 되었어? 촌에서는 잘 나갔는데 서울에 와서 이게 뭐야? 이게. 점점 더 자기를 잘 감추는, 숨어들어가고, 음성적인 곳에, 음지로 들어가려고 하고, 남한테 눈에 안 띄려고 하고, 전화도 다 끊어놓고, 날 찾지 말라고 이야기하고. 내가 성공할 때까지는 가족도 멀리하고.

그러면서도 내부적으로는 그게 행복한 게 아니에요. 자아세계 속에 도피 생활하는 것. 그거는 이 세상이 만들어낸 죄고 저주에요. 이거는 주님의 저주 뜻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이 저주, 복이라고 하는 것은 율법 아래에서 누구나 이게 축복산에 설 자격이 아무도 없음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하나님과 함께 있고 싶다면 차라리 하나님의 율법의 단위, 하나님의 이름이 축복산과 저주산에서 어디에 지금 그분은 앉아있는가, 거기에 참여하면 되는 거예요. 제가 바로 죄인입니다. 제가 바로 저주받아야 합당한 사람입니다.

참여하게 되면 저쪽에서 날아오는 미사일, 북한미사일정도가 아니에요. 중거리 장거리 미사일 막 날아옵니다. 전부 다 축복이 돼있어요. 그래서 여기서 나오는 것은 범사에 감사하는 겁니다. 이렇게 제 논리로 한다면, 그러면 여기 축복산에 있는 사람은 손해가 아니냐? 그들은 축복을 상대방에게 날렸지만, 선포했지만 이쪽에서 날아오는 것은 뭐냐, 온몸으로 저주를 받게 되니까, 그럼 우리만 손해라고 그렇게 생각하겠지만, 이 축복산에 있는 사람은 이게 최종결과로 축복을 생각하는 거예요.

왜냐하면 제단은 이쪽에 있는 것이 아니고 저쪽에 있기 때문에 비록 축복산에 있더라도 저쪽에 제단을 거쳐서, 저주를 거쳐서 이렇게 보기 때문에 이미 축복을 받은 상태에서, 그까이 거, 저주받아도 저주는 제단에서 이미 해결했음을 받아들이기 때문에, 어느 쪽에 서더라도 이스라엘은 이미 말씀 안에 있다는 자체가 축복입니다. 쓸데없이 걱정할 필요가 없어요. 중요한 것은 자기를 부인한다는 거예요. 이것은 나 자체도 하나님의 전리품이라는 사실. 그렇게 봐야 돼요.

그래서 이 신명기 27장에 나오는 그리심산 에발산의 그 예언에 의하면 한마디로 말해서 율법은 살아있다. 늘. 항상. 율법은 살아있다. 항상. 그것을 인정하기 위해서 공중에 축복과 저주에 관한 율법만 막 날아다녀요. 공중에. 머리에 모자 쓰고 있으면 모자 막 핑핑 날아다녀요. 창공에 축복과 저주의 율법만 가득해요. 그 상황이 지금 주님과 함께 있는 상황입니다. 주님 입에서 나올 것은 내가 원하는 복 달라고 하지 않고 축복과 저주의 율법이 계속해서 튀어나오는 겁니다.

그러면 나는 어디에 위치하느냐, 바로 아까 다시 이야기하면 나라는 것은 이 저주의 제단과 함께 있는 거예요. 그래서 이 제단에서 어린양이 또는 염소제물이 우리를 위해서 대신 저주의 피를 내고 그리고 홀라당 다 태워지는, 있음에서 제물이 없음이 되면서 여기서 잉여에너지가 나오죠. 여분의 에너지가 뭐냐 하면은 언약이 나옵니다. 용서가 나와야 돼요. 표상은 제물에서, 양이 있다가 죽어 없어지잖아요. 그러면 그냥 나오는 것이 아니고 제물 안에 내장되어 있는, 본질로 들어있는 하나님의 약속이 축복으로 나오는 그러한 공식이 제단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겁니다.

그리고 그 이루어지는 제단에 누가 있다고 했습니까? 여호와의 이름이죠. 이 말은 하나님께서 지시만 내릴 뿐만이 아니라 자기가 내린 그 지시에, 본인 자신이 그 지시의 대상으로 여기에 합류하시는 겁니다. 그분이 바로 나중에 오실 바로 예수그리스도에요. 본인이 출제한 문제에 대해서 본인이 그걸 정답으로 이 땅에서 주신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을 만나야 출제 경향도 알고 정답도 미리 다 알고. 우리는 그 정답노선에서 이미 의롭게 돼버렸어요. 수학정석이라는 책에서 수학문제보고 후다닥 제일 마지막 끝에 있는 답보고. 다시 문제보고 답보고. 참고서 떼기는 그게 쉬워요. 문제보고 답보고. 문제보고 답보고. 자기가 풀려고 끙끙거려봐야 그거는 자기신념이고요. 그렇게 문제를 알고 저주를 받든지 복을 받든지. 중요한 것은 내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말씀이, 율법이, 언약이 살아있다는 그것을 증거 하는 용도로 살면 되는 겁니다.

이처럼 해서, 다시 여호수아로 갑시다. 여호수아. 방금한 것이 여호수아 8장까지 했어요. “모든 율법을 낭독하여” 8장 34절에 나옵니다. 그리고 난 뒤에 아까 이야기한 9장에 기브온 거민들 이야기가 여기 나오고 있어요. 자, 이 기브온 거민들의 이야기를 계속하겠습니다. 기브온 거민들이 왜 위장으로 자기 자신을 속이면서 들어왔느냐, 그것은 아까 이야기했듯이 이스라엘의 정복을 그냥 전투력에, 뛰어난 국가의 전투로 생각했지, 붙여주는 전쟁으로 그들은 생각하지 않았어요.

그 이유가 뭐냐 하면은 살고보자, 에요. 살고보자. 이 살고보자가 뭐냐 하면은 비언약적요소에요. 이스라엘은 말씀위주인데 이 기브온 민족은 그냥 목숨붙이고 살면 이게 남는 장사라고 이래 생각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비언약이 이스라엘 복판 예루살렘에서 얼마 멀지도 않아요. 여기에 또 턱하니 차지하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아까 이야기한 것처럼 이미 맹세를 했습니다. 여호수아가 맹세해서, “그래. 너희들을 치지 않겠다.” 맹세를 하고 난 뒤에 비로소 그들이 자기 정체를 드러내죠. 그럴 때 하나님께서 언급하시는 것은, 왜 너희들은 나한테 묻지 않았느냐 하는 거예요. 왜 너희들은 나한테 묻지 않았느냐? 왜 경솔하게 네 맘대로 약조를 했느냐?

자, 여기서 하나님께서, 그러면 우리가 하나님 편에 같이 합세해가지고 여호수아를 나무랄 수가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수사하기 위해서 “왜 너는 내 지시도 안 받고 기브온 사람들을 받아들였어?”하는데, 하나님이 이야기하는데, 같이 있다가 이쪽으로 와서 “왜 그랬어요?”라고 이야기할 자격이 됩니까? 주님께서 “너 뭐야? 네가 왜 이 자리에 있어?” 할 거예요. 그것은 여호수아, 인간이라는 것은 앞일에 대해서 예측할 수 있고 정답을 내릴 수 있는 자질이 인간에게는 전혀 없습니다.

그냥 닥쳤을 때에 하나님께서 이야기하는 것에 대해서 나름대로의, 나는 하나님을 이렇게 안다는 그것, 자기 아는 범위 내에서 새로운 사태에 대해서 어떡하든 결정하고 어떡하든 선택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한계가 바로 그겁니다. 그 한계가 이제는 이스라엘 속에, 이스라엘 내부의 한계로서 쑥 들어온 거예요. 뭐, 깔끔하게 우리 편끼리 살면 좋겠는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내부에다가 인간의 한계를, 속에 있는 그 증거를 의도적으로 집어넣은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묻지 않았다는 것이 9장 14절에 나옵니다. “무리가 그들의 양식을 취하고 어떻게 할 것을 여호와께 묻지 아니하고” 15절 “여호수아가 곧 그들과 화친하여 그들을 살리리라는 언약을 맺고” 하나님께 묻지 않고 약속을 맺어버린 겁니다. 그러면 이 이야기를 듣고 여호수아나 어떤 사람들, 족장들, 그 당시 족장들도 같이 합세했습니다. 동의하자고. 받아들이자고. 해놓고 이렇게 뒤늦게 지적을 해버리면, 지적을 할 때 사람들은 ‘아, 그때 물을 걸. 하나님께 물을 걸.’ 하잖아요. 인간이 물어서 대체할 수 없어요. 모든 것은.

모든 상황은요, 지나간 뒤에 해석으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거예요. 왜냐 하면은, 우리의 존재가, 우리의 존재는 결과물이기 때문에. 내가 여기 존재하는 것은 내가 여호와께 제대로 물었고 제대로 기도해서 바르게 살아서 그 공로로 지금 우리의 존재가 보장되는 것이 아니고. 우리는 그냥 헛발질이에요. 매순간 어떤 선택을 해도 주님께서는 안 받아준다는 헛발질을 했는데 뭐가 나왔다? 결과가 나왔다면, 우리의 존재는 더럽게, 에이, 더럽다. 더럽게 하고. 더럽게 나왔는데 결과는 뭐냐 의인으로 깨끗하게 나왔다면 여기에 무엇이 투입이 된 거예요?

하나님의 복음적인 효과와 능력이 여기서 개입된 결과로 여기서 이렇게 나왔잖아요. 그래서 이 결과에 대해서 아, 그때 물어볼 걸. 잘해볼 걸. 후회하거나 반성하지 말고 감사하면 되는 거예요. 감사하면 되는 거예요. 세상에 내가 아무것도 한 것도 없는데 한 달 수입이 이천 오백원이다. 이천 오백만원이 아니고 이천 오백원. 이거는 아침점심저녁 라면 끓여먹으면 끝나요. 내일 양식도 없어요. 근데 뭐하라고요? 범사에 감사하면 돼요. 그때 물어봤으면 이천오백원이 아니고 이십오만원 줄 걸. 괜히 안 물어봐서. 이런 후회는 하지 말라 이 말이죠. 후회해도 소용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하고 의논한 적이 없어요.

왜냐, 하나님의 도와주심만 부각되는 것이지. 너 참 알아서 의논 잘하네. 이런 것은 없습니다. 그래서 22절에 보면 “여호수아가 그들을 불러다가 일러 가로되 너희가 우리 가운데 거주하거늘 어찌하여 우리는 너희에게서 심히 멀다 하여 우리를 속였느냐” 23절, “그러므로 너희가 저주를 받나니 너희가 영영히 종이 되어서 다 내 하나님의 집을 위하여 나무패며 물 긷는 자가 되리라” 이 이야기가 인간 쪽에서 기껏 대책회의해서 내놓은 결론이에요. 이것밖에 안 돼요. 이거 뭐 쫓아낼 수도 없고. 왜냐하면 맹세 자체를 위반해버리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것이, 출애굽기 34장 다시 한 번 봅시다. 34장 15절, “너는 삼가 그 땅의 거민과 언약을 세우지 말지니 이는 그들이 모든 신을 음란히 섬기며 그 신들에게 희생을 드리고 너를 청하면 내가 그 희생을 먹을까 함이며” 16절, “또 네가 그들의 딸들로 네 아들들의 아내를 삼음으로 그들의 딸들이 그 신들을 음란히 섬기며 그 아들로 그들의 신들을 음란히 섬기게 할까 함이니라” 17절, “너는 신상들을 부어 만들지 말지니라”라고 했죠.

근데 이 본문을 딱 보면서, 만약에 우리가 안 해야 되는 건 맞는데요. 만약에 우리가 의도한 것이 아니고 저쪽에서 속여서 맹세를 했다면 그때는 우리는 어떻게 하면 됩니까? 라는 그 뒤에 후속조치가 출애굽기 34장 15절에 안 나옵니다. 하지마라만 나오지. 그리고 모르게 했을 때는 어떤 조치를 취하면 됩니까? 라는 게, 이게 나옵니까? 안 나오죠. 이 말은 너는 원래 말씀을 위반하게 되어 있어. 우리가 이걸 안 지키면 말을 하지 마. 너는 늘, 올웨이즈always, 항상 어기게 되어 있어요. 우리가. 어느 하나 제대로 지킨 게 없습니다. 뭐 새삼스럽게 이건 지킨 것이고 이건 안 지킨 것이고, 어데 감과 귤을 자기 맘대로 구분해내려고, 우리는 구분할 자격도 없습니다. 우리는 항상 뒷북친다니까요. 아하, 이게 죄네. 이게 문제였었어. 그러면서도 우리는 웃고 있어요. 실수는 우리가 하고 구원은 우리가 받고. 뭐 이런 이상한 상황에 속합니다.

율법의 완성, 의가 우리를 작용하기 때문에 항상 우리는 실수하는 자로 주님께서 우리를 다루십니다. 실수할 수밖에 없는 대상으로서. 어찌 감사하며 기쁘지 않을 수가 있으리요. 이러한 현실에 대해서. 어쨌든 간에 이 기브온 사람들은, 다시 여호수아 9장에서 기브온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거기에 끼어들게 됐습니다. 24절에 보면, “당신들을 인하여 우리 생명을 잃을까 심히 두려워하여 이같이 하였나이다” 그들이 언약을 알아서가 아니라 자기의 살 궁리를 챙기는 이 모습으로 이스라엘 속에 박혀있다 이 말은, 그 기브온 사람들의 심보, 그 본성, 그거는 계속해서 이스라엘 사람들 속에 내재되어 있는 겁니다.

나중에 하나님 언약, 언약하지만 속셈을 딱 보게 되면 “우리도 약속의 땅이 너무 좋아서 그냥.. 하나님의 언약보다는 우리가 살고 싶은 그것이 우선적이었습니다.”라는 것이 나중에 노출되고 폭로가 돼요. 오늘 강의할 때 처음에 이야기했잖아요. 언약에 거주할 것인가? 땅에 거주할 것인가? 하나둘셋! 땅. 예수님이 좋으냐? 부동산이 좋으냐? 하나둘셋! 부동산. 이거 뭐. 예수 안 믿고 십년 더 살래? 지금 예수 믿고 죽을래? 십년 더 살기. 이거는 뭐 툭 치니까 탁 나오는 거예요. 퍽치니까 툭 나오는 거예요. 이거는 본성적으로.

그러니까 이런 이질적인 것이 우리 속에 있다고 하지만 그 이질성이 우리 안에 내장되어 있는 거예요. 그게 이스라엘 속에 섞여서 계속 계륵처럼, 목에 넘어가지 않는 닭뼈처럼, 우리 내부와 함께, 이스라엘과 함께 계속 진행되고 있는 겁니다. 뭐 끝내라는 이야기에요? 십분 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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