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겨울수련회 여호수아강해 제 9강 아브라함의 복-이 근호 목사
여호수아는 1장부터가 모세의 죽음의 이야기로 되어 있고 그리고 마지막에 여호수아의 죽음이 되어 있습니다. 모세의 죽음 그리고 마지막에 여호수아의 죽음. 죽어도 괜찮다는 거예요. 뭐냐 하면은 모세가 죽었지만 언약은 살아있고 여호수아가 죽었지만, 여호수아가 마지막 24장에서 죽으면서 당부한 것이 언약입니다. 여호수아가 죽으면서 세겜에 가는데 세겜에 큰 돌을 하나 세워놓고 율법을 거기다가 기록했습니다.
율법을 쭉 기록하면서 “나는 비록 죽으나” 여호수아가 24장 끝부분에 가면은 여호수아가 110세에 죽었어요. 110세에 죽는데, 110세에 죽을 때, 내가 죽었다 할지라도 내 죽음보다도 언약이 살아있다는 겁니다. 그러면 여기서 공식은 뭐냐, 언약이 살아있다는 말은 인간은 죽어줘야 한다. 죽어야 한다. 인간이 죽어주면서 한번 죽을 때마다 언약은 리셋이 되죠. 자꾸 쇄신되고 언약이 마지막 종착적인 인물로 접근하게 되는 겁니다. 도대체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어야 되겠어요?
근데 이 죽음에 대해서 여호수아를 통해서 또 하나님의 언약이니까. 다른 말로 쉽게 하면 예언이죠. 예언. 또는 다른 말로 하면 율법. 율법이, 예언이 살아있기 위해서 인간은 죽어야 된다. 그러면 이 예언에 해당되는 인간, 율법에 해당되는 인간, 이 인간이 죽어나갈 때마다 율법도 죽고 예언도 죽고 언약은 살아나고. 이러한 현상을 이제 보이게 되는 겁니다.
그러나 지금 여호수아 같은 경우는 모세의 죽음에서 모세언약이 살아있어, 끝까지 여호수아는 모세언약에 의해서 죽는데, 모세언약이 이게 율법이거든요. 모세언약은 모세가 하늘에서 율법을 받았잖아요. 율법이 끝난 시점이 되게 되면 여호수아와 그리고 갈렙이 이게 갈라진다는 거죠. 갈렙이 땅을 차지한 그 땅이 헤브론이었습니다. 거기서 갈렙의 자손이 땅을 차지하는데. 무대가 이렇게 있다면 여기 커튼이 있고, 퇴장하는 데가 두 군데가 있는데, 여호수아하고 갈렙이 같은 데서 퇴장하는 것이 아니고, 여호수아는 어디에서 퇴장하는 하면은 에브라임에 있는 어떤 산에, 산 이름이 나옵니다. 여호수아 제일 마지막에. 여호수아 24장 30절, “에브라임 산지 가아스산 북이었더라” 여기 에브라임 산지에 묻히게 됩니다.
왜냐 하면은 여호수아가 에브라임 지파거든요. 그런데 갈렙은 어디에 가느냐 하면은, 여기에 헤브론이 있어요. 헤브론에 나중에 묻히게 됩니다. 근데 헤브론에 묻히는데 여호수아 제일 마지막에 여호수아의 죽음으로 끝나야 되는데, 여호수아가 마지막 뭐로 끝나느냐 하면은, 24장 32절에 “요셉의 뼈를 세겜에 장사하였으니” 세겜에. 요셉의 뼈가 세겜에 장사되었더라. 세겜이 이쪽에 있죠. 그러면 에브라임 지파는 무슨 지파냐 요셉지파에요.
그런데 갈렙과 여호수아가 갈라진다는 말은, 갈렙은 헤브론인데 이게 무슨 지파냐 하면은 유다지파입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결론내릴 수 있어요. 하나님의 율법과 예언이 언약 변천과정에서 진행이 되면서 열두 지파로 균등하게 나누어져야 될 이스라엘이, 어떤 특정 지파가 주도권을 쥐는 쪽으로 방향이 바뀌면서 나중에 야곱의 혈육적인 열두 지파의 의미가 모두 다 상실해버립니다.
요셉지파에서 뭐로 바뀌느냐 하면은 유다지파로 바뀌는 그 과정에 지금 여호수아가 있는 거예요. 누가 한번 크게 읽어보세요. 시편 78편 67절에서 68절. 67절, “또 요셉의 장막을 싫어 버리시며 에브라임 지파를 택하지 아니하시고” 68절, “오직 유다 지파와 그 사랑하시는 시온산을 택하시고” 여기 아니오가 먼저 나오니까 아니오를 먼저 봅시다. 요셉의 장막을 싫어 버리시며, 에브라임 지파를 택하지 아니하시고.
그러면 지금까지 여호수아가 뭐예요? 여호수아는 에브라임, 요셉지파입니다. 그리고 여호수아가 들어간 자리가 뭐냐, 모세의 자리에요. 모세는 레위지파에요. 레위지파의 후계자로 에브라임, 에브라임 지파 여호수아가 모세의 자리에 들어가면서 무엇을 뒤받쳐줬느냐 하면은 율법이 지속되기를 뒷받침하면서, 율법대로 지배하는 이스라엘의 땅이 되기를 원했던 겁니다. 그런데 마지막에 여호수아가 죽고 요셉지파의 원조, 시조가 되는 요셉도 세겜 땅에 묻힙니다.
그러면 그 뒤에 바통을 받는 것은, 율법이냐? 율법이 아니냐?로 이렇게 판가름이 나는 그 갈림길에 지금 여호수아가 있는 거예요. 율법은 영원하다고 생각을 하는데, 이 법, 이 법이 문자죠. 문자가 영원한 것이 아니고, 율법이 인격화에 접어들게 되면 율법을 완성하는 그 인물이 더 이상 요셉지파에서는 나오지 않고 어디에서 나오느냐 하면은 유다지파에서 나와요. 유다지파에서.
그러면 율법 말고, 율법이 인격화되면서 여기서 무슨 현상이 일어나느냐 하면은 율법 외에 한 의가 등장해요. 율법 외에 한 의. 이스라엘 말고 이스라엘 바깥에서 어떤 여인 하나, 룻이라는 여인이 등장하면서 룻의 계통이, 룻이 유다지파와 결합되면서 유다지파가 더 이상 율법의 문자에 얽매이지 않고 왕으로, 왕 체제로서 새로운 이스라엘을 형성하는 것을 통해서 언약은 살아 있다가 되는 거예요. 한쪽을, 요셉지파를 버리면서 언약이 살아있는 겁니다.
시편 78편을 다시 읽어보면 “요셉 장막을 싫어버리시고” 좋다고 하실 때는 언제고 여기서 또 싫어하시고. “에브라임 지파를 택하지 아니하시고” ‘아니하시고’가 먼저 있고 그 다음에 뭐냐, “유다지파와 사랑하는 시온산을 택하시고” 언약의 형성과정에서 변화가 일어나는 거예요. 변화가. 이 지파의 변화를 통해서 문자인, 율법 지키는 이스라엘, 그것도 아 옛날이여! 그것도 옛날이야기, 옛날로 지나가버리는 거예요. 율법이, 율법적인 나라가 뭔가 이루어질 것 같았었었는데, 율법이 땅에 정착하지 않고 다시 이게 획 날아가 버렸어요. 사라져버려요.
그러면 왜 하나님께서 그러한 과정을 거치느냐, 갈라디아서 3장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8절, “또 하나님이 이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실 것을 성경이 미리 알고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되 모든 이방이 너를 인하여 복을 받으리라 하였으니” 이방이, 이방민족이죠. 그렇게 강의 내내 작살냈던 이방민족이 이제는 복을 받아야 된다는 것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주신 목적이라는 거예요. 이거는 반전입니다. 그럴 줄 몰랐지롱~ 이래 되는 거예요.
아브라함을 선택하실 때 그 안에 이방민족도 구원이 된다고 단순히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아브라함을 선택하실 때에 율법을 모르는 자도 구원이 된다가 아브라함에게 복을 줄 때 그게 들어있어요. 그러면 이방인의 입장에서 복이 뭐냐, 아브라함에게 주어졌던 복이 이방민족에게도 어떤 값없이, 그냥 공짜로 제공된다는 이것이 복이라는 거예요. 아브라함에게 주었던 복, 그 아브라함 자손에게 주던 복을 이제는 이방민족에게 줘가지고, 율법을 잣대로 해서 너는 내 백성이다, 아니다, 라는 그것을 주님께서는 말소시켜버리는 겁니다.
그 말소시킨다는 대목은 골로새서 2장에 나와요. 십자가에 달릴 때 율법을 찢어버리는 거예요. 율법을. 알리안츠 그 보험회사 약관 찢어버리는 거예요. 갑자기 알리안츠가, 알리안츠 보험 회사하면 누가 관계가 되어 있을지 좀 그런데. 그러면 악사다이렉트, 이거는 없겠지. 악사다이렉트. 보험증서를 찢어버리는 거예요.
그러면 어떻게 되느냐,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가 아니라, 백성이 아닌데 백성이 되었다고 해서 그 중간에 아브라함의 복이 어떤 복이냐를 하나님께서는 그 본질을 드러내는 거예요. 내 백성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내 백성이 되었다는 쪽으로 하나님께서는 그동안 율법을 잠시 사용했다. 율법을 잠시 사용한 거예요.
그러면 이스라엘에게 그런 변화가 있어야 되지 않느냐? 일어났죠. 아까 시편에 나오죠. 내가 북쪽 이스라엘을 택하지 아니하고 남쪽 유다를 택했다. 그럼 그전에 나오는 것이 뭐냐 하면은 오늘 여호수아 제일 마지막을 한번 봅시다. 여호수아 제일 마지막에 누구 뼈가 하나 등장하죠. 누구 뼈입니까? 요셉의 뼈가 세겜에 장사되었어요. 창세기에 보면 그들이 애굽에서 나올 때에 그냥 빈손으로 나오지 않고 요셉의 뼈를 들고 나옵니다. 그럼 요셉의 뼈가 가는, 이동하는 경로가 앞으로, 이스라엘에게 주어질 미래의 예언도 함께 동행 해서 계속해서 이끌어지는 거예요.
이미 죽은 사람의 뼈를 왜 하느냐, 하나님이 모세에게 주신 율법의 끝은 어디다? 율법의 끝은 요셉의 뼈가 장사된 세겜, 열두 지파의 땅 분배, 이걸로 이스라엘은 끝났다. 이스라엘은 끝났다. 율법으로 완성된 이스라엘은 이걸로 종결된 거예요. 이제 여기서부터 이스라엘에게는 열두 지파라는 종합체가 하나로 뭔가 다른 지파가 부각이 되는 겁니다. 요셉의 뼈를 여기서 묻은, 에브라임 지파는 요셉지파입니다. 요셉지파가 에브라임과 므낫세로 둘로 나누어졌으니까 요셉지파에요.
요셉지파가 주도권을 쥐고 있던 이 주도권이 여호수아가 죽고 난 뒤에는 이 주도권이 다른 걸로 바뀌는 거예요. 다른 걸로 주도권이 바뀌는데, 그 바뀌는 것이 뭐냐, 원래대로 돌아가는 겁니다. 아브라함이 있던 원래 취지대로 돌아가는 거예요. 그게 요셉의 장지는 세겜이었잖아요. 에브라임 땅이잖아요. 근데 여호수아하고 같이 정탐했던 그 사람 있었죠? 첫 강의에 나오죠. 갈렙. 갈렙의 헤브론이 뭐냐 하면은 이 헤브론이 아브라함의 가족묘지에요. 아브라함의 가족묘지. 원래적인 이스라엘의 시조, 아브라함의 가족묘지가 헤브론입니다. 이게 무슨 굴이냐, 굴이 있어요. 막벨라굴이 있어요.
자, 이 막벨라굴에 누가 묻혔는가, 거기에 국립과학수사연구소에 가져가서 동참을 해보니까, 가족묘지에 제일 먼저 거기에 묻힌 사람이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 사라가 묻히고. 그게 창세기 23장 9절에 나오고. 그 다음에 두 번째로 거기에 매장된 사람이 아브라함. 세 번째 이삭. 창세기 35장 이삭. 그 다음에 누구냐, 이삭의 부인 리브가. 그 다음에 야곱이 별로 안 좋아했던 아내, 자기가 사랑했던 아내 말고, 시력이 안 좋아서 얻은 못생긴 아내가 있어요. 1+1로 세일할 때 결혼한 레아. 그리고 마지막에 야곱본인이 거기에 묻힙니다.
그러면 이 아브라함의 계통은 뭐냐 하면은, 열두 지파가 있기 전에 가족묘지인 막벨라굴, 이걸 누가 차지했는가? 유다지파의 갈렙이 차지한 거예요. 유다지파의 갈렙이. 벌써부터 유다지파와 여호수아는 갈 길을 가자, 빠이빠이 한 거예요. 여기서 둘이 조짐이 보여 지는 겁니다. 나라 주도권이, 어느 쪽이 원천으로 통하는 노선인가. 유다노선인가 아니면 요셉노선인가. 그게 벌써 암시되어 있습니다.
이게 창세기 마지막에 보면 야곱이 예언할 때는 둘 다 누가 옳은지를 드러나지 않아요. 창세기 끝에 보면 야곱이 축복을 하는데, 성경을 보는데 이런 것이 좀 골치 아픈 요소가 됩니다. 창세기 마지막에 야곱이 열두 지파에게 할 때에, 우선 요셉지파부터 함께 볼게요. 얼마나 대단한 축복을 받는지.
창세기 49장 22절에 보면 “요셉은 무성한 가지 곧 샘 곁의 무성한 가지라 그 가지가 담을 넘었도다” 23절, “활 쏘는 자가 그를 학대하며 그를 쏘며 그를 군박하였으나” 24절, “요셉의 활이 도리어 견강하며 그의 팔이 힘이 있으니 야곱의 전능자의 손을 힘입음이라 그로부터 이스라엘의 반석인 목자가 나도다” 그냥 목자가 아니라 뭐다? 반석인 목자가 나도다. 요셉에게서 목자가 나온다.
그런데 이제 유다를 한번 봅시다. 창세기 49장 10절에 “홀이 유다를 떠나지 않고” 유다를 뭐로 보느냐 하면은 9절에 “그의 엎드리고 웅크림이 수사자 같고 암사자 같으니 누가 그를 범할 수 있으랴” 암사자 수사자. “치리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시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미치니리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
아버지가 자식에게 유언을 하면서 애매모호하게 유언을 한 거예요. 유다 자식은 잘 될 것이다. 요셉 너는 멋지게 될 것이다. 이게 뭐예요? 아니 멋진 것하고, 아버지 돌아가시고 나서, 그래, 멋진 것이 세냐? 배틀 붙자. 배틀. 멋진 것이 세냐? 강한 것이 세냐? 뭐 더 큰 것이 세냐? 이거는 비교대상이 되지 않는 거예요. 그러면 이걸 어떻게 하느냐, 진행과정에서 처음에 먼저 요셉이 이스라엘의 반석의 자리를 차지하다가 그것을 유다에게 인수인계하는 방법으로 이스라엘이 진행되는 겁니다.
왜 그렇게 되느냐 하면은 모세의 후계자가 레위지파인데요. 모세의 후계자가 레위지파가 아니고 뭐로 가느냐 하면은 바로 요셉지파로 가버립니다. 여호수아의 지도하에, 인도하에 약속의 땅을 전부 다 차지하게 되었거든요. 그러니까 끝까지 요셉지파 여호수아의 죽음이 이만큼 중요하고 마지막까지 자기 백성에게 잔소리할 자격자는 여호수아에요. 갈렙은 자기 것 딱 챙기고 그냥 가만히 있는 겁니다.
그러나 가만히 있는 이것이, 결국은 이 시대가 끝나고 나중에 치즈 구멍이 난 것처럼 뻥뻥뻥 이방나라가 와서 완전히 짓밟아버릴 때, 사사시대가 끝나면서, 룻도 사사시대니까, 사무엘상 진행과정이 되면서 서서히 레위지파나 다른 지파보다도 유다지파가 드디어 두각을 발휘하게 됩니다. 다윗. 다윗의 조상을 따라가 보니까, 다윗의 족보가 열두지파에는 없어요. 왜냐하면 모압여인 룻에게서 나오거든요. 마태복음 1장 족보에. 룻은 모압여인이에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도대체 일을 그런 식으로, 족보가 순차적으로 흐르지 않게 하느냐. 그 내용에 대해서 성경은 아예 어렵다고 단서를 붙이면서 하신 말씀이 있어요. 어렵다고 하시면서 나온 말씀이 뭐냐, 멜기세덱이야기를 할 때 어렵다고, 이거는 젖이나 먹고 단단한 식물을 먹지 못하는 사람은 이걸 모른다. 어린아이한테는 모르지만 강한 것을 먹는 사람한테는, 장성한 사람에게서는 이 멜기세덱에 대해서 안다고 하면서 히브리서 7장 이야기가 나옵니다.
히브리서 7장 이야기에서는 처음에 아브라함에게 레위지파에게 아브라함의 정신이 오는 것 같지만, 레위지파의 제사를 뚫고 유다가 여기서 독보적으로 등장한다고, 히브리서 7장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왜 이렇게 뚫고 들어와야 하느냐 하면은, 여러분들이 지금 아는지 모르는지 모르겠어요. 나는 그냥 갑니다. 아브라함의 족보라고 하는 것은 아브라함의 혈통입니다. 혈통을 보면 아브라함이 자식 낳고, 자식 낳고, 자식 낳고.. 아브라함의 자식 이삭, 야곱, 에서, 열두 지파, 이렇게 평등하게 아브라함에게 종속되어 가는데.
문제는 아브라함에게 나타났던 족보 없는 족보. 멜기세덱의 족보를 아브라함의 족보 가운데 어딘가 여기 징후를 드러낼 족보가 나와야 돼요. 이게. 수직적인 요소가 아브라함 속에, 거기에 개입되어 있고 가미되어 있다는 사실을, 아브라함의 후손들 가운데 뭔가 족보 바뀜, 족보교체현상을 통해서 수직적인 것이 여기에 드러나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처음에는 아브라함의 족보에서 열두 지파가운데 레위지파가 일어나야 되는 거예요. 레위지파는 왜 있냐 하면은 율법적이에요. 왜? 레위지파는 제사를 하는 거니까. 율법이 있어야 레위지파의 자기 의미가 발생되거든요. 율법을 먼저 주고 레위지파가 율법을 쥐고 있으니까, 전에 강의한대로 레위지파 없으면, 제사 없으면 이스라엘은 폭삭 망합니다. 레위지파 없으면.
정치적으로서는 요셉지파가 했지만, 열두 지파에게 무슨 지파가 파견되었다고 했습니까? 레위지파가 파견되어 있죠. 땅은 없지만 이 땅을 보존할 수 있는 엔진, 원동력이 작용하는 것은 하나님의 율법이 살아있어야 여기서 하나님의 복이 되니까. 하나님의 복이 연결되니까. 복을 받았기 때문에 레위지파가 굉장히 중요합니다.
그런데 그 중요한 레위지파를, 그걸 빼버리면 이스라엘 역사가 진행되지 없지 아니하는가.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레위지파 제켜버리고 거기서 유다지파가 나왔다는 겁니다. 이게 변화되었다고 하는 거예요. 변화되었다. 율법의 효용도가, 자기의 시효가, 자기의 용도가 끝났다는 이야기입니다.
여러분들의 이해를 쉽게 하기 위해서, 이게 쉬운지 어려운지 모르겠습니다만. 갈라디아서 다시 한 번 보겠습니다. 이걸 보면 충분하게 주님께서 일을 어떻게 하셨는지 아는 겁니다. 갈라디아서 3장 17절에 보면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하나님의 미리 정하신 언약을 사백삼십 년 후에 생긴 율법이 없이하지 못하여 그 약속을 헛되게 하지 못하리라”
그러니까 율법이라고 하는 것은 아브라함에게 주신 그 원래 내용에 대해서 보조적 위치에 있지. 너희가 율법을 통해서, 율법을 지킨 자에게 복이 온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보조적인 거예요. 율법을 모르는 이방인에게 아브라함의 복이 온다는 말은, 너희의 복이 복을 받을 만해서 주는 것이 아니고, 아브라함에게 내린 복 안의 내용 속에 복을 받을만한 가치도 없는 자에게 복이 온다는 하나님의 일관성 있는 취지를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복이라는 이름으로 제공했고, 결국은 요셉지파, 유다지파 두 지파의 바뀜을 통해서, “거봐, 하늘에 있는 멜기세덱의 족보를 따르는 유다지파에서 메시야가 오는 것이 맞잖아.” 이렇게 이야기 하는 거예요.
가만히 들어보면 어떻습니까? 하늘나라에 간다는 것이 이스라엘을 모르고서 하늘나라 간다는 것이 이게 좀 납득이 안 되죠. 이스라엘이 뭔가 복잡하게 거기 튜인, 교체되는, 지파가 교체되고 주도권이 교체되는 그 과정자체가 결국은 신약 때에 와가지고 왜 우리는 우리의 행함으로 우리의 능력으로 구원받지 못하는가를, 미리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해서 벌써 시범적으로 다 보여준 거예요.
이스라엘 역사는 뭐가 주도권을 쥔다? 율법이다. 왜 주도권을 쥐느냐? 모세가 단독으로 독대하면서 하나님을 만났잖아요. 만나서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율법을 줬잖아요. 이것을 지키면 복 받고 못 지키면 저주받는다. 그러니까 거기서는 뭐가 있습니까? 저주가 있는 거예요. 저주가. 이것 지키나 안 지키나 두고 본다. 이렇게 한 것이 아니고. 못 지키면 저주 받는다가 주어졌다 이 말이죠. 못 지키면.
그러면 인간들이 그걸 못 지키면 저주받으니까. 그렇게 해가지고 과연 저주를 받는지 안 받는지 확인하는, 실험하는 그런 시범조교로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기 한번 들어가 봤잖아요. 들어갔고 이 땅, 가나안 땅에서 살아봤잖아요. 지금. 지금도 살고 있지만. 살아오고 있다. 살아오고 있었는데 그들은 지금 나름, 나름이에요. 나름대로 자기는 복 받았다고 여기고, 땅이 있으니까. 복 받았다고 여기고 말씀대로 살아왔다고 자부했는데, 막상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예수님이 딱 오니까 그들은 예수님을 죽여 버렸잖아요. 죽여 버렸죠.
그러면 결국 지금 마지막 시간에 하는 모든 이야기는 결국 이 이야기에요. 당신은 죽을 때 무슨 구멍으로 들어가서 죽습니까? 죽을 때 성공적인 죽음을 해야 마지막 웃는 자가 승자가 되는 겁니다. 죽을 때 두 개의 죽음의 구멍이 있는 거예요. 두 개의 죽음의 구멍이. 여호수아 13장 22절, “이스라엘이 그들을 도륙하는 중에 브올의 아들 술사 발람도 칼날로 죽였었더라”
이 발람이라는 사람이 여호수아의 전쟁 가운데 죽어요. 이 죽음은 뭐냐 하면은 이게, 전쟁가운데 죽게 되는데, 그럼 발람의 죽음은 이게 저주로 통하는 죽음이에요. 저주로 통하는 죽음이에요. 그런데 처음에 모세도 죽고 여호수아도 죽죠. 나중에 제사장도 죽죠. 마지막에 엘르아살 제사장도 죽잖아요. 이 죽음은 무슨 죽음과 대비가 되느냐 하면은, 발람의 저주스러운 죽음과 관계가 없이 이거는 하나님의 예언에 따라서 이게 죽는다 이 말이죠.
그러면 이 발람의 죽음이 왜 중요하느냐 하면은 이 발람이 뭘 한 사람입니까? 이스라엘에 관해서 어떻게 엮였습니까? 이스라엘에 대해서 예언을 했는데, 그 예언의 내용이 뭐냐 하면은 홀, 지팡이, 다시 말해서 왕의 존재에 대해서 예언한 거예요. 이 발람이. 민수기 24장에 나오는데요. 복잡하죠. 끝나는 시간에 한꺼번에 정리하려고 하니까 복잡한데.
거기에, 민수기 24장 17절에 보면 발람이 예언하기를 “한 별이 야곱에게서 나오며 한 홀이 이스라엘에게서 일어나서” 왕이 나온다는 거예요. 근데 현재 이스라엘은 왕이 없어요. 이스라엘은 왕이 없는데, 민수기 23장 21절에서 발람이 예언하는 대목에 보면 그의 하나님이 그와 함께 있으니 무슨 소리가 있더라? 왕을 부르는 소리가 그와 함께, 왕을 부르는 소리가 있더라. 왕을 부르는 소리가. “여호와 그의 하나님이 그와 함께 계시니 왕을 부르는 소리가 그중에 함께 있도다”
그러니까 발람이 여호와를 위해서 뭘 했습니까? 예언을 했는데, 그 예언이 무슨 예언입니까? 이스라엘의 현재 상태가 아니라 이스라엘이 끝났을 때에 나타날 왕의 등장을 발람이 예언을 한 거예요. 그리고 이 발람은 예언을 하고 저주스러운 죽음을 당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예언은 무엇을 양산하느냐, 저주스러운 죽음이 있잖아요. 그리고 축복된 죽음, 이 두 죽음은 예언에 준해서 결정되는 거예요. 예언에 준해서. 쉽게 말해서 복음 전한다고 천당 간다는 게 아니라는 이 말이에요. 뭔가 절차가 바뀌어져야 하는 게 있어야 해요. 발람은 바꾸어진 게 없어요. 역시 돈 받고 예언한 사람이고, 돈 받고 여호와를 예언한 사람이에요. 예언은 했는데 본인이, 본인이~~ 참, 본인이 한 그 사람 죽었습니다. 이 동네 사람 노태우도 죽었듯이, 노태우가 왜 나와, 노태우도 발람인가. 그러니까 복음을 전하고 예언을 전해도 본인이 사는 데 급급했고, 복음으로 사는 데 급급했지, 내가 어디에 죽을 것인가가 본인의 희망사항이 아니었습니다. 본인의 희망사항.
성도의 희망사항은 어느 구멍으로 빠져서 죽느냐에 있지, 어떻게 이 땅에서 주님 덕분으로 밥 먹고 사느냐가 희망사항이 아니다 이 말이죠. 그거는 발람이나 하라고 하세요. 발람이나. 다시 말해서 수직적인, 멜기세덱의 초월적인 차원에서의 연결고리가 형성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들을 사용하신다는 거예요. 사실은. 그걸 사용하시는 거예요. 그럼 사용하면 그 말이 틀린 말이 아니고 바른 말인데, 전하는 본인은 지옥가고 있다는 거예요. 그게 어느 상황에서? 이스라엘 상황에서 벌어진 상황이에요. 이스라엘 상황에서 벌어진 상황.
자, 그 다음에 마지막으로 여호수아 마지막을 한번 봅시다. 24장에, 여호수아가 24장에서 쭉 이야기하면서 뭐라고 암시를 하느냐 하면은 “내가 죽고 난 뒤에, 내가 떠나고 난 뒤에 너희들은 다른 신을 섬긴다.”라고 예언을 해요. 다른 신을 섬긴다. 그러니까 백성들이 하는 말이, 16절에 보면 “백성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여호와를 버리고 다른 신들 섬기는 일을 우리가 결단코 하지 아니하오리니” ‘아니하오리니’라는 말을 하는 것을 봐가지고, 이게 이미 글렀어요.
이미 여호수아는 암시하고 있어요. 진짜 너희들이, 다시 말해서 여호수아는 뭘 아느냐 하면은 이게 언약의 끝이 아니라는 거예요. 내 시대가. 끝이 있다는 거예요. 언제 나타날 때? 이스라엘의 왕이 나타날 때. 그때가 끝인데, 지금은 왕의 기미가 없어요. 레위지파대로 그냥 진행할 뿐입니다. 미래에 대해서는 본인이 아는 수가 없어요. 그 시대에 당부하는 것은 그냥 율법대로 지켜라. 율법이 임시적 조치로 있다는 사실을 여호수아는 몰라요. 그걸 모릅니다.
결국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 있잖아요. 처음 약속으로 돌아가요. 제가 저번에 강의할 때 그런 강의 했는데. 율법이 딱 내려옵니다. 율법이 딱 내려올 때, “아! 저게 방주다. 저게 구원의 방법이다. 십계명 저걸 믿어야 돼.” 하고 했던 사람들이 이스라엘민족인데, 싹 내려오는데, “잡아라! 잡아라!” 하는데 붕 떴어요. 와가지고 붕 날아가 버렸어요. 와가지고. 날아가면서 여기서 뭘 뿌리는가, 저주의 삐라를 뿌리는 거예요. “에이, 죽어라! 인간들아. 너희들은 율법을 못 지켜.”
율법이 왔는데, 사백삼십년 후에 율법을 주고 난 뒤에 율법은 그냥 해체되고 맙니다. 왜 그렇게 되느냐, 율법을 통해서 모든 인간은 저주아래 있게 하심이라. 어떤 인간도 말씀대로 사는 사람이 없었다. 다시 말해서 너희들이 지옥 가는 것을 당연시해야 되지, 그걸 네가 지옥에 간다고 해서 아쉬워 할 수 있는 그런 자격자는 이 세상에 아무도 없다는 거예요. 본인이 지옥 가더라도. “본인이~ 지옥가야 됩니다.” “그래. 지옥가라.” 대화는 간단하게 끝나죠. 지옥가거라!
이게 사도바울이 예수님의 계시를 받아서 전체적으로, 총괄적으로 다 이야기합니다. 근데 우리는 그걸 여호수아에서 여호수아가 그걸 미리 암시를 하고 있다는 거예요. 자꾸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 뭐 우상을 섬기고 그들과 혼인하지 말라고 하는 것은, 결국은 너희들이 내가 떠나고 난 뒤에는 안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뒤에 바로 한 장만 넘기면 뭐가 나오죠? 사사기 나옵니다. 사사기 나오면서 그들은 이미 글렀어요. 끝났어요.
왜냐하면 지도자가 없어요. 왜 지도자가 없는가, 열두 지파가 평등하게 나가니까. 그러면 레위 제사장이 있는 게 아니냐? 제사장도 이거 뭐, 제사장도 돈 안 주면 제사장도 못 하는데요. 레위지파고 뭐. 사사기에 나오죠. 레위지파가 밥 먹고 살려고 돌아다니는 거 알죠. 레위지파 마지막에. 그 레위지파가 붕괴하니까 결국 베냐민 지파가 날아가 버리잖아요. 레위지파가 첩을 열두 토막 살인사건, 잘랐다고 해서 그것 때문에 내전이 일어나서 베냐민 지파가 통째로 날아가 버렸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들의 이유가 뭐냐, 우리한테 왕이 없기 때문에 그렇다고 하는 거예요. 왕이 없기 때문에. 근데 그 다음에 나온 게 “왕을 주세요.” 이거는 이방민족이에요.
아까 했던 강의를 다시 해보겠습니다. 한번 물어보겠어요. 살기 위해서 사느냐? 아니면 언약 때문에 사느냐? 이 질문에 있어서, 살기 위해서 사는 것은 그냥 그저 삶이에요. 그러나 언약 때문에 사는 것은 어디에 죽는 데 성공할 것인가, 에요. 막벨라굴에 들어갈 것인가. 아니면 발람처럼 그냥 이 세상 살다가 허무하게 남들 가는 것처럼 그냥 죽을 것인가? 그래서 여러분들의 장래희망사항에는 뭔가 정답이 나와 있어요. 잘 죽자. 잘 죽는 거. 제대로 죽는 거.
그것을 주님께서, 성령께서 마련해주셨습니다. 성령 안에서 십자가에 못 박히면 그게 그것보다 더한 다른 희망사항은 네가 품지 마라. 뭐 희망사항, 희망사항 노래 부른 사람이 누구 있죠? 노영심인가? 세상적인 그런 희망사항, 희망사항은 이미 성도로서는 확정되었습니다. 다른 희망사항이 없어요. 제대로 보고 죽자. 언제 죽을지 모르지만. 매일 십자가에 죽어서 있다면, 그것은 막벨라굴에 패밀리묘지, 가족장지에 우리가 참, 주제넘게 거기에 초청받아 들어가는 셈이 돼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묘지로 오신 거예요. “죽을 때 나와 더불어 죽자. 내 안에 들어와서 죽어라. 그러면 네가 살리라.” 뭐, 다른 수는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멜기세덱의 족보, 이 땅에 어떤 접촉점도 없는 멜기세덱의 그 족보, 그 노선에, 그 패밀리, 그 가족에 속한, 바로 예수님이거든요.
그래서 한번 정리하면 유다지파는 뭐가 없다? 유다지파는 열두 지파와 접촉점이 없게 돼요. 독보적으로 딱 띱니다. 왜 그러냐 하면은 유다지파 안에 모압 여인이라는, 이스라엘 율법적 체계 안에서는 용납되지 않는 개 같은 이방여인이 유다지파 속에 들어오면서 유다지파가 둘로 나누어지죠. 지상의 유다지파. 이게 바로 유다나라, 예수님 십자가에 못 박는. 그것 말고 새로운 유다지파. 이것은 바로 예수님이 오시는 족보. 그 족보.
룻이라는 외부인이 들어오는 겁니다. 외부인의 특징이 뭐냐, 칠판을 지워야지 누가 또 글씨 안 보인다고 이야기해서 그것도 신경 많이 씁니다. 외부인의 특징은 율법 없다, 에요. 율법에 의하면 모압 여인은, 룻은 이 세상에 인간취급을 못 받습니다. 개 같은 존재기 때문에. 그래서 사마리아 여인, 요한복음 4장에 사마리아여인이라든지, 그리고 예수님을 따르는 여러 가지 이방인들이, 백부장 같으면 율법에 의하면 이 땅에서 이미 죽은 자에요.
그런데 천국 백성이 누가 천국백성입니까?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백성들이 쫓겨나고 누가 들어가요? 마태복음 8장에서 이 백부장이 그 자리를 차지하는 거예요. 그게 뭐냐 하면은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거예요. 행함이 아니고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거예요. 이스라엘 입장에서. 여호수아는 그것까지는 설명을 못하고요. 여호수아 24장 19절을 봅시다. “여호수아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가 여호와를 능히 섬기지 못할 것은” 나오죠. 뭐, 지금까지 해서 마지막까지 이야기하는 것은 이 19절로 끝났어요.
너희는 누굴 섬기지 못한다? “여호와를 섬기지 못한다. 내가 받은 계시가 이거야.”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니옵나이다. 우리는 지키겠습니다.” 21절에 보세요. “아닙니다.” 입은 살아가지고. 여러분들에게 하는 것이 아니고 여호수아가 백성들에게 그래요. 입은 살아가지고. 뭐 들은 풍월은 있어가지고. 인간은 과거의 기억에 매여 있는 사람들이에요. 과거의 기억. 조금만 잘 살고 잘 살고 잘 살면 앞으로 잘 살 것이다. 과거의 연속성을 이루기 위해서 미래를 이룬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에요.
근데 그들은 뭘 모릅니까? 미래를 몰라요. 미래는 예언에 속하고 약속에 속하고 언약에 속하는 문제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우리가 공부한 것이 뭡니까? 여호수아잖아요. 신약이 아니에요. 과거 십자가에 준해서 여호수아를 해석하자 이 말입니다. 그러니까 그들이 무슨 큰소리를 쳤다? 못 지키면서 지켰다고 큰소리치는 이 모습이 오늘날 우리 모습하고 다를 바가 뭐가 있느냐 이 말이죠. 그들이 왜 지켰느냐, 과거에 의해서 나는 열심히 지키려고 애썼기 때문에, 열심히 지키면 복을 받는다는 거예요.
우리는 그러지 맙시다. 우리는 복 같은 것, 그거 기대하지 맙시다. 복을 못 받아야 되는데 왜 살았지? 그게 복이에요. 나는 이방인인데 왜 구원받았지? 그게 복입니다. 그게 아브라함에게 주신, 넣어준 복이에요. 교회에서 아무것도 한 것도 없는데 주께서 봉사했다는 거예요. 그냥 대걸레 들고 청소 좀 했을 뿐인데 이게 봉사라는 거예요. 이게 봉사야? 뭐 교회에 이천 넘게 육백만원 헌금 했는데, 이게 헌금이야? 아무리 봐도 나는 그걸, 이천육백만원을 낸 적이 없는데, 나는 그냥 돈을 이동했을 뿐인지 헌금한적 없는데 그걸 헌금이라고 해주니.
이 모든 것이 뭐냐, 그리스도께서 우리 행동 하나하나를 복으로 다 쳐주시는 거예요. 그게 우리가 예뻐서가 아니라 아브라함의 복을, 아브라함 자신에게 내린 하나님의 약속을 스스로 증명하기 위해서, 쓰레기 같은 우리의, 별 볼 일없는 우리를 채택한 겁니다. 이방인을. “너 율법 없지?” “없습니다.” “너는 죽어야 마땅하지.” “마땅합니다.” “천당 가라” 뭐 이래 돼요.
끝으로 말씀드릴 것은 바로 예수님의 말씀, 마태복음 5장, 6장에 보면 금식한다. 구제한다. 구제할 때 오른 손이 한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 기도할 때 이방인처럼 달라고 하지 마라. 있어야 할 것을 주께서 미리 다 아니까 달라고는 기도하지 마라. 금식할 때 찡그리지 마라. 이 이야기를 왜 하는 겁니까? 방금 이 말씀에 의하면 왜 하는 겁니까? 구제, 금식, 이런 의미가 있는 것은 네가 못한다는 거예요. 못하는데, 못하기 때문에 한 걸로 쳐주겠다는 겁니다. 그게 아브라함의 복이에요. 아브라함의 복입니다.
그럼 아브라함의 복이 어떤 복이냐, 그게 창세기 12장에 나오죠. 너를 축복하는 자는 뭘 받고? 복을 받고. 너를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는다. 그러니까 이거는 축복과 저주를, 너의 삶의, 너 중심의 기준을 나는 절대 인정 못하고, 아브라함의 자손 그러니까 예수님이죠. 예수님이 와가지고 복과 저주를 새로 규정하겠다는 거예요. 재규정이죠. 재규정. 다시 규정하는 거예요. 다시 규정하려면 우리가 하는 규정은 주께서 일체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스스로 선하다, 악하다 하는 이것은 매일같이 주님께서 삭제시켜주시는 겁니다. 삭제시켜주시고, 예수 그리스도가 주신 그 결과물로서 우리 삶 자체를 주님께서는 복으로 간주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주님과 우리 사이에 어떤 고집 같은 것이 있습니다. “내가 착하게 했기 때문에 착합니다.”라고 한다면, “일단 너 한번 맞고 보자. 맞고, 네가 무슨 짓을 해도 착하다.” 그러면 우리가 또 “아니옵나이다. 우리는 착한 일 할 때만 착합니다.” “일단 너 두 방 맞자. 너는 뭘 해도 착하다.”
나는 내가 행동한 것에 대해서 내가 책임지기 위해서 착하다고 했는데, 주님께서는 나의 행동에 대해서, 일체 네가 책임지지 마. 책임은 내가 져. 그것 때문에 너는 착해야 돼. 아니, 착해. 사람 찔러 죽이는 착함인지 뭔지 모르지만 너는 어떤 판정도 하지 마. 네가 거짓말을 하던 어디에 있던 그냥 착해. 이거는요, 성령이 안 오면 믿을 수가 없어요. 이거는. 인간은 계속 육으로 살게 되면 자기 판정과 자기 측정에 굉장히 몰두해요. 자기가 자기한테 미치고 매료돼요. 맨날 자기 환상에 빠져있거든요.
그걸 너 말고 아브라함. 네가 스스로 결정한 그 삶의 기준 말고 아브라함에게 주신 아브라함의 복. 율법 없는, 율법이 없다는 말은 그냥 저주받는 거죠. 저주받는 자에게 아브라함의 복을 그냥 집어넣어주는 거예요. 그냥. 그게 아브라함의 복의 역할이에요. 그냥 주시기 위해서 예수님께서는 율법과 상관없이 멜기세덱과 관련되어서, 유다지파가 아닌 다른 초월적인 유다지파로 오셔가지고 그냥 멜기세덱의 반열에 있는 하늘나라로 경과해서 올라가신 겁니다.
이것을 가지고 로마서 1장에서는 그럴 복음이라고 해요. 기쁜 소식. 내가 너한테 기쁘다는 말이 아니고 내가 너한테 준 내가, 하나님 내가 너로 인하여 기쁘다. 네가 주님의 사랑을 받아서 네가 좋다는 말이 아니라 내가 일방적으로 너를 예쁘다고 하기 때문에, 그 예쁘다고 하는 그것이 바로 내가 기쁘다는 거예요. 이걸 구약과 연결시키면 바로 이게 그 유명한 아가에요. 이유도 묻지도 따지지 않고 무조건 예쁘대. 전에 이야기했잖아요.
아가서의 특징은, 여러분 구약에 있는 아가서의 특징은 시간이 정지되어 있어요. 늙지도 않아요. 나이 30이 되도 예쁘고, 45가 되도 예쁘고, 86이 되도 예쁘고. 그냥 내가 예쁘면 예쁜 거예요. 서로가 그래요. 내가 예쁘면, 내가 사랑스러우면 사랑스러운 거예요. 뭐보다? 죽음보다, 죽음을 이길 정도로 아름다운, 죽음으로 들어가고 아름다움으로 튀어나올 거야. 이게 바로 아가, 이걸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지혜라고 하는 겁니다. 지혜. 예수님의 십자가는 바로 사랑의 지혜를 완성하기 위해서 이 땅에 오신 분입니다. 구약 전체를 다 완성하러 오신 분이에요.
구약에서 룻이 바로 그런 사람이에요. 룻은 이방여인이라서 율법도 없어요. 율법도 없는데, 하나님께서는 보아스로 하여금 혼인하게 하셔가지고, 율법 없는 쪽에서 왕이 등장했다는 것은 곧 하늘의 초월적인 왕이 이스라엘 왕으로 등극하는 시점에 이르렀다. 이래 되는 겁니다. 그래서 이 다윗은 하나님에 의해서 뭐냐, 아라우나 타작마당에서 제사장 역할을 하게 돼요. 율법은 하나의 인격으로, 왕이라는 인격으로 드디어 구체화되는 겁니다. 그 다윗의 후손으로 예수님이 오시게 되어 있죠.
아까 한 거 다시 하고 마치겠습니다. 언약의 변천과정에서 제일 마지막에 뭐가 등장합니까? 어떤 인물이 등장하죠. 이 인물이 등장하게 되면 시작은 뭐냐, 여기 아담의 존재들이 있잖아요. 이것을 거쳐서, 파인먼 다이아그램 식에서 전자라는 것을 양자, 광자, 다시 말해서 주님의 언약을 거쳐서, 이거 요동치는 거 보세요. 요동치는 거. 지파가 교체되잖아요. 해가지고 결국은 뭐로 최종 됩니까? 예수 그리스도로 최종 이게 종결이 되는 겁니다. 그 언약의 과정에 우리는 여호수아라는 한 대목을 잘라서 본 겁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전체를 보고 부분을 보게 하옵소서. 십자가 안에서 성경을 다시 보게 하옵소서. 모든 것이 주로부터 시작해서 주로 말미암아 주께 완료를 시키는 그 과정 속에서 우리가 어떻게 쓰여지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주의 이름을 위해서 어떻게 활용되는 것을, 도리어 우리의 구원보다 더 기뻐하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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