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겨울수련회 여호수아강해 제 6강 : 무기 - 이 근호 목사
여섯 번째 시간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전쟁을 치를 때에 할례 없고 언약 없고 율법 없는 그들을 향하여 전쟁을 어떻게 치르는가? 6장에 보면 여리고 성 전쟁을 본격적으로 하게 됩니다. 일단 이스라엘은 할례를 다 행했고요. 할례를 행한 빈 자리에 언약궤가 실리죠. 그래서 할례를 한 입장에서 언약궤만 앞장세워서 그냥 들이미는 거예요.
언약궤를 들이미는 방식에 대해서는 민수기 10장 35-36절에 보면 “궤가 떠날 때에는 모세가 가로되 여호와여 일어나사 주의 대적들을 흩으시고 주를 미워하는 자로 주의 백성 앞에서 도망하게 하소서 하였고 궤가 쉴 때에는 가로되 여호와여 이스라엘 천만인에게로 돌아오게 하소서 하였더라”
상자 그게 뭔데, 길이 한 1m(두 규빗 반, 약 114cm), 높이 1/2m(한 규빗 반, 약 68cm) 정도 되는 아무것도 아닌 상자가 이동함에 따라서 적들이 물러가고 정복하는 자들이 이스라엘 천만인에게로 그들이 항복하고 들어오고 하는 이러한 현상, 참 굉장히 신기하게 느껴질 겁니다.
그런데 이 궤에 대해서 언약에 대해서 집중할 때는 조건이 뭐냐 하면 자기 자신이 갖고 있는 어떤 무기가 없음을 전제로 해야 돼요. 우리 힘으로 한다는 것이 없어야 됩니다. 그래서 시편 20편 5-7절에 보면 전쟁 무기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시편 20편 7절, “혹은 병거 혹은 말을 의지하나 우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하리로다”)
이방민족과 싸운다 할 때 제가 지난 시간에 말씀드렸듯이 ‘이방’이라는 글자가 너무 기니까 그냥 떼어버리세요, 그냥 ‘민족’. 이 세상 땅의 민족들은 칼과 활과 병거, 창 이런 것들을 들고 나오는 거예요. 이를 중국이라고 봅시다. 중국이 이렇게 나올 때에, 또 본디오 빌라도가 이렇게 나올 때에, 북한이 미사일 쏠 때에, 러시아가 공격할 때에 그들은 다 무엇을 가지고 나옵니까? 칼과 힘과 병거와 창 이런 것들을 들고 나오잖아요.
그리고 이스라엘도 예외가 아니에요. 그때나 지금이나 조금도 달라진 게 없습니다. 자, 이 ▭칸에 무엇을 집어넣느냐 이 말이죠, 이런 무기들 대신에. 무엇을 집어넣느냐? 시편 20편 7절을 보니까 이것이 ‘여호와의 이름’이에요. 여호와의 이름. 이게 이제 말이 안 되는 거예요, 여호와의 이름이.
여호와의 이름이 이 공간적 좌표에서 x좌표, y좌표의 어디에 이름이 있습니까? 이름이라는 것은 실체가 있다는 뜻인데 이 실체가 어디 있죠? 뭐 여기 x=5, y=7 이 지점에 주님께서 실체로 떴습니까? 뭐 미륵보살이에요? 공중에 붕 떠있는 겁니까? 어떻게 되는 거예요?
칼, 물체입니다. 눈에 보입니다. 창, 말 그리고 활 전부다 눈에 보이는 거거든요, 손에 쥐어지고요. 사물이라 하는 것은 에너지가 집약된 거예요. 에너지가 집약되어가지고 면적이 좁으면 에너지의 압력이 높아져서 잘 뚫고 나가요, 이게. 스티로폼 가지고 때리는 이런 건 안 돼요. 창을 만들어야지 스티로폼으로 때리면 이게 아픕니까? 단면적이 커서 에너지가 분산돼서 하나도 아프지가 않습니다. 뾰죡해야 쏙 들어가거든요. 그걸 인간들이 중국부터 해서 그냥 민족들이 아는 거예요, 민족들이.
그런데 여기는 여호와의 이름으로 이긴다. 무슨 수로? 너무나 구체적이지 않아요, 이 여호와의 이름이. 그러니까 이방민족들이 볼 때는 여호와의 이름을 거론한다는 것 자체가 여기서 ‘인식의 벽’이 생기는 겁니다, 인식의 벽.
그래서 오늘날 교회에서는 여호와의 이름으로 하지 않고 무엇으로 이기느냐 하면 상대가 칼, 창 등으로 나오잖아요, 그럼 우리는 이기자. 무엇으로? 교인 수로 그리고 헌금으로. 완전히 이건 선거도 아니고요. 헌금, 돈의 액수와 교인 수로 남 기 죽이자, 뭐 이런 식으로 나오는 거예요.
이런 식으로 교인 수로 헌금으로 사람들 기 죽이고 교회 나오면 취직 자리 알아본다는 것이 왜 안 되느냐 하면 세상의 모든 권력은 한쪽이 올라가게 되면 다른 한쪽은 비게 되어 있기 때문이에요. 이것을 다 더하면 제로가 되거든요. 로또에 당첨되었다는 것은 한쪽은 돈 날렸다는 뜻이에요. 주식에서 대박 났다는 것은 다른 한쪽에서 전부 돈 날린 거예요. 1880억 날린 거예요. 오스템 임플란트 회사 주식투자해서 다 날렸어요. 한쪽은 모르죠. 내 주식이 왜 이렇게 올라갔지? 그 이유를 모르죠. 하여튼 돈 땄으니까 기분 좋아, 이것 뿐이지, 누군가 바보짓 했다는 것은 모르죠. 주식이 파동처럼 울렁울렁하거든요. 울렁거려가지고 야, 이게 지금 오를 때가 되었으니까 전부다 주식투자 하세요. 이것은 인공지능이 추천해줬고 어느 유명한 수학자가 ‘그 때입니다’ 해가지고 와~ 몰리니까 와~ 몰리는 순간 이게 훅 떨어져버리는 거예요.
이 인간 세계라 하는 것은 희한하게 모든 것이 허상인데 사람들은 이 허상을 실체로 보는 겁니다. 실체인 줄 알고 가보니까 푹 꺼졌어요. 허상입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겁니다. “당신 오늘 내 말 안 들으면 분명히 무슨 일 터질 거야.” 부부 간에 이런 얘기하잖아요. “당신 오늘 내 말 안 듣고 하면 분명히 일 나.” 아무리 봐도 날 일이 없어요. 그리고 그렇게 이야기하는 사람도 그냥 엄포에요. 아무 일 없는데 “이 추운 날 밖에 나가지 말란 말이야.” 엄포 놨는데 아무리 봐도 생각이 안 나가지고 “아니야, 아무리 봐도 날 일이 없어. 나 후딱 갔다 올게.” 하고 갔다 오니까 일 났어요. 뭐냐 하면 마스크를 안 썼어. 무엇에 대응하느라 마스크를 안 썼느냐 하면 ‘무슨 일 일어날 거야’에 대응한다고 거기에 신경써가지고 평소 같으면 습관적으로 마스크 쓰고 나가는데 ‘아니야. 그게 아니야. 아니야.’하고 밖에 나가다보니까 마스크를 안 쓰고 나간 거예요. 일 났어요.
‘일 날 거야’가 일을 만들어버렸어요. ‘주식 대박 나’가 주식을 폭락시키는 거예요. 인간은 허상 위의 존재이기 때문이에요. 허상의 존재거든요. 본인도 허상이면서 본인만은 실체이고 나머지는 허상으로 여겨가지고 함부로 덤벼들었다가는 다 같이 허상으로 드러나는 겁니다.
그래서 칼, 창 이 물질의 무게가 있잖아요. 이 무게로 스스로 그들이 자기가 든 무기에 의해서 자기가 공격받는 식이 되어버려요. 이것이 기드온 전쟁, 사사기 7장에 나옵니다. 사사기 7장에 보게 되면 전쟁 무기가 나오는데 여호와의 이름이잖아요. 이 여호와의 이름이 구체적으로 사물화된 것이 언약궤입니다. 왜냐하면 여호와의 이름은 언약궤 위에 있기 때문에.
그래서 사람들은 또 오해해요. 여호와의 이름이 언약궤 위에 있지, 언약궤 가는 곳에 여호와의 이름이 오지는 않아요. 하여튼 애를 먹여. 하여튼 하나님은 인간의 말을 안 듣습니다. 인간을 너무 잘 알기 때문에.
주의 이름으로 기도하면 주님은 안 듣고요. 기도 안 하면 기도에 응답해줘요. 그러니까 기도하라는 거예요. 내 기도가 왜 아무짝도 소용없는가를 깨닫기 위해서는 기도해야 돼요. 그런데 인간들이 기도를 또 안하잖아요. 기도를 안 하면 기도하라고 압박이 들어와요. 압박이 들어와서 기도했는데 기도발이 소용없어요. 처음부터 너는 소용없는 네가 기도를 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그것이 여호와의 임재하심, 현존입니다. 여호와께서 함께하시기 때문에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 거예요.
여호와 있고 나 있으니까 있는 하나님이 날 도와줄 것이라고 생각한 것은 여호와의 현존에 대해서 나를 집어넣었기 때문에 잘못된 해석입니다. 하나님이 있다는 것은 내가 있으나마나한 존재일 때 그때 비로소 하나님의 현존이 떠오르게 되어 있어요.
그런데 인간은 고집이 세서 하나님은 허상이고 내가 실체이기 때문에 나는 어지간하면 기도 안하는 겁니다. 어지간하면 기도 안하는데 ‘이래도 기도 안할래?’ 막 목 조릅니다. 그래서 기도해보면 결국은 내가 허상인 것을 스스로 자인하게 하기 위해서 주께서는 살아있는 실체로서 활동한 거예요.
마태복음 마지막에 끝나는 대목이 뭐냐? “보라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너무나 모호하고 애매하고 구체적이지 않고 실감나지 않는 거예요. 함께 있다는데 존재라 하는 것은 인간의 여섯 가지 원칙이 있을 때 존재가 되는 거예요. 누가, 언제, 어디서, 무엇을, 왜, 어떻게. 이러한 조건 하에 있을 때 여기 좌표가 형성되는 거예요. 3차원 좌표에서 하나 더 그으면 여기 시간좌표까지 더해져서 4차원 상에서, 우리 어디서 만날까? 언제 만나? 누가? 다 들어가는 거예요.
6가지 조건에 의해서 비로소 존재가 확인되는데 주님께서는 6가지 조건을 전부다 거부하고 존재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이 아는 6가지 조건을 거부하고 계셔버리니까 그럼 주님은 어디 계시는가? 내 조건들이 아무짝도 소용없게 되는 상황을 통해서 주님이 바로 거기에 계시는 거예요, 바로 거기에. Here is, 바로 여기에, 바로 여기에 계시는 거예요. 북한이든 중국이든 관계 없어요. 바로 여기에 계시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전쟁이라 하는 것은 여호와를 모시고 가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께서 이미 군대장관 보내가지고 이 땅 자체가 여호와가 계시는 땅이에요. 그런데 이스라엘 입장에서는 그것을 차지해야 전쟁에 이긴 걸로 알고 있어요. 이 차이.
그래서 전쟁의 무기가 뭐냐? 전쟁의 무기는 언약궤라 하지만 언약궤라고 해도 이스라엘이 인식하기에는 난감합니다. 언약궤는 멈췄었어요. 길갈에 있던 언약궤가 실로에 와서 세겜, 여기 멈춰서있다고요. 실로에 왔을 때는 남방 중부, 북부 메롬 지역을 다 쳤을 때에는 세겜에 안착하거든요.
언약궤 이동 과정과 전쟁의 승리 여부가 무슨 관계가 있느냐? 관계가 있습니다. 어떻게 관계 있느냐? 실제적인 무기가 뭐냐 하면 이겁니다. 크게 쓰겠습니다. ‘나팔’이에요, 나팔. 나팔이 무기입니다.
사사기 7장에서 기드온 전쟁할 때 미디안 숫자가 엄청나죠. 십삼만 오천 명을, 사사기 8장 10절에 나옵니다, 몇 명이 이겼느냐 하면 300명이 이깁니다. 300명이 이겨요. 그때 기드온이 ‘기드온의 칼’이라는 말을 해요, 기드온의 칼. 기드온의 칼이 뭐냐 하면 300명의 나팔 소리에요. 300명이 간 것은 칼 쥐고 싸우라고 간 것이 아니고 빰빠바 밤~ 나팔 불라고 300명을 모집한 겁니다.
그럼 이 나팔은 어디 등장하느냐? 출애굽기 19장에 보면 시내산에서 짐승도 올라가면 안 되고 아무도 올라갈 수 없는 시내산 꼭대기 하늘에서 나팔 소리가 들립니다. 누가 있다는 이야기에요. 나중에 알고 보니 이 나팔은 하늘에서 천사들이 나팔을 불어대고 있는 겁니다.
데살로니가전서 4장 끝에 보게 되면 예수님께서 강림하실 때 땅에 있는 자들이 휴거를 당하는데 고참 순서대로 휴거를 하거든요. 먼저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이 올라가고 그다음에 살아남는 자는 뒤따라 올라가는데 비엔나 소세지처럼 줄줄이 딸려서 올라가요.
왜 하늘로 올라가느냐 하면 왕이 되신 예수님이 이 땅에서 하늘로 올라가기 때문에 그 코스가 유효한 겁니다. 세상 끝날까지 함께 있을 때는 주께서 그 코스를 유지하는 거예요.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주님께서는 항상 사다리 있잖아요, 헬리콥터에 공수부대 레펠 탈 때 있는 그 사다리를 주님께서는 쥐고 그냥 주욱 손에 끌고 가는 거예요. 내가 이 땅에 와서 다녀갔던 코스 그대로 걸려들 사람은 걸려드는 거예요, 그 코스대로.
그래서 올라갈 때 하늘에서 무슨 소리가 들리느냐? 천군천사와 함께 나팔소리가 들리게 되어 있어요. 이것은 출애굽기 19장에 나오는 이야기인데 19장을 실제로 봐야 실감나겠죠. 19장 13절, “손을 그에게 댐이 없이 그런 자는 돌에 맞아 죽임을 당하거나 살에 쐬어 죽임을 당하리니 짐승이나 사람을 무론하고 살지 못하리라 나팔을 길게 불거든 산 앞에 이를 것이니라 하라”
이 나팔을 누가 부느냐 하는 거예요. 18절에 보니까 “시내산에 연기가 자욱하니 여호와께서 불 가운데서 거기 강림하심이라 그 연기가 옹기점 연기 같이 떠오르고 온 산이 크게 진동하며” 19절에, “나팔 소리가 점점 커질 때에 모세가 말한즉 하나님이 음성으로 대답하시더라”
그러니까 우리들 생각으로는 시내산이 2290m인가 그런데 나팔 소리가 들리려면 황동으로 만든 나팔을, 트럼펫을 누가 들고 가야돼요. 나팔은 손발이 없어요. 나팔이 손발이 있어서 지네같이 바위 넘어서 낑낑거리고 등산해서 나팔이 알아서 산을 탄다고 생각해 보세요. 만화도 그런 만화가 없죠. 헥헥거리면서 나팔이 산 위에 앉아서 빰빠밤밤밤 빰~ 부는 건 말이 안 되거든요.
그러니까 나팔은 여기 나팔 소리 있는 곳에 하나님이 계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모세가 시내산에서 율법을 받고 내려오면서 나팔도 같이 이동해요. 이동하는 것이 민수기 10장에 보면 나옵니다. 민수기 10장 한번 봅시다. 나팔을 추적해봅시다. 10장 3절에, “두 나팔을 불 때에는 온 회중이 회막 문 앞에 모여서 네게로 나아올 것이요”
시내산에서 모세가 하나님을 만났잖아요. 그럼 하나님과 모세의 관계가 성립되려면 여기 율법이라는 게 있고 율법이 하나의 체계가 되면서 하늘에서 만든 설계도, 이 체계가 땅에 내려오게 되면 하나님도 자기가 만든 체계이기 때문에 체계에 따라서 같이 내려와요. 완전히 땅에 내려오게 되면 이것을 회막이라 합니다, 회막. 만남의 장소에요. 하나님과 인간의 만남인데 어떤 만남인가? 유일하게 만나는 장소가 바로 회막이 되는 겁니다. 그 회막 안쪽이 궁금해서 들어가 보시려고 한다면 그 제일 깊숙한 은밀한 곳에 뭐가 있겠어요? 언약궤가 있는 거예요, 언약궤가.
그러면 시내산에 있을 때는 여기 회막 설계도 또는 언약궤 설계도가 있을 때 이쪽 주변에 무슨 소리가 들렸다? 나팔 소리가 들렸잖아요, 나팔 소리가. 그러면 이 회막이 땅에 오게 되면 회막이 길갈에서 실로에서 세겜으로 옮기면서 이 주변이 천사들, 하나님의 군대장관이라 했으니까 천사가 군대에요, 그 군대를 인간으로 바꿔보면 이스라엘로 바뀌죠. 하늘의 천사의 군대를 그 표상으로서 이스라엘 사람으로 대체할 때, 물론 천사도 일하지만, 사람으로 나타났을 때 이 안의 관계가 나팔소리로 제사장이 소집해야 돼요.
나팔을 분다는 것은 ‘하나님의 군대여, 빨리 이곳에 소집하라.’ 이거에요. 우리에게 내려지는 어떤 명령과 지시는 제사장의 명령, 지시가 아니고 제사장은 하나의 파이프에 지나지 않고요. 하나의 메신저에 지나지 않고 진짜 지시는 하나님의 지시에 의해 주어지는 나팔 소리가 있는 그곳에 소집하라 이 말이죠.
그러면 언약궤가 있고 이것이 확대되겠죠. 이동할 때마다 확대되겠죠. 북쪽으로 갈 때는 세겜 쪽으로 확대되겠고 남쪽 중부에서는 실로에서 확대가 되는 거예요, 이게. 레이더망이 확산, 확대되는 거예요. 여기서 레이더에 감지되지 않는 스텔스 비행기, 그런 건 존재하지 않아요. 전부다 걸려요. 스텔스기는 없어요. 전부다 걸려요. 다 걸리게 되어 있어요.
미리 진멸할 수 있는 증거 또는 근거를 나팔 소리와 함께 확 퍼트리는 겁니다. 민수기에 보면 속죄제 같은 제사 지낼 때 나팔을 불게 되어있어요. 민수기 10장 8절에 “그 나팔은 아론의 자손인 제사장들이 불지니” 제사장의 나라이니까 제사장이 대표로 붑니다.
레위기 25장 8-9절에 보면, 좀 귀찮더라도 이 기회가 아니면 언제 성경 보겠습니까, 바쁜데… “너는 일곱 안식년을 계수할찌니 이는 칠년이 일곱 번인즉 안식년 일곱 번 동안 곧 사십 구년이라 칠월 십일은 속죄일이니 너는 나팔 소리를 내되 전국에서 나팔을 크게 불찌며” 시내산에서 있었던 상황을 땅에서 재현하라 이런 뜻이죠. 나팔 소리가 있었던 시내산의 상황을 땅에서 재현하라는 거예요.
그러면 레위기 25장 9절, 시내산에서 있었던 그 상황이 회막에서 재현되게 되면 모세가 하나님 앞에서 어떤 태도, 어떤 자세로 하나님과의 만남이 가능했는가 하는 거예요. 도대체 모세는 무슨 용기, 용기라 할 수 없죠, 도대체 어떤 장치에 걸려들었기에 감히 하나님과 독대할 수 있었는가. 그것을 이제는 땅에서 실현시킵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바로 제사였어요, 제사. 모세와 하나님 사이에 어린 양의 피가 들어가니까 이게 가능하더라 이 말이죠. 모세는 이름 자체가 물에서 건짐을 당함이죠, 어릴 때부터. 출생의 비밀이 이겁니다. 물에서 죽은 데서 건짐 당한 거예요.
그렇다면 모세를 뒤따라 나왔던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 운명의 복제죠. 그들도 홍해를 건너왔어요. 그리고 요단강을 건너왔습니다. 이것이 인간이 육적으로 건널 수 있는 상황에서 건너온 것이 아니고 도저히 건널 수 없음을 분명히 해놓고 그걸 통과해온 겁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사람이 통과한 것이 아니고 그들과 함께 있었던 어떤 분 있잖아요, 하나님이죠, 하나님의 이름에 그들이 합세하다보니까 하나님의 이름이 건너오니까 그들은 뒤따라온 셈이 되죠.
홍해를 건널 때 모세가 홍해를 건너게 했습니까, 안 그러면 모세의 지팡이입니까? 모세의 지팡이잖아요. 모세가 있으면 그 옆에 지팡이가 있는 게 아니고 지팡이가 있는데 그 옆에 모세가 있는 거예요. 모세는 지팡이에 종속된 존재에요. 지팡이 없이는 모세는 열 가지 재앙이고 홍해고 뭐고 아무것도 안 되고 반석에서 물도 안 나와요. 모세는 나중에 자기가 지팡이를 지배한 줄 알고 성질나서 두 번 쳐가지고 약속의 땅에 못 갔지만…….
모세는 하나님과 만났으면 모세 본인을 증거하면 안돼요. 우리가 우리를 증거하면 안 된다니까요. 나는 하나님과 어떻게 만났는가? 십자가 피로써 용서받아서 화해해서 그래서 하나님의 종이 되었다면 그 십자가만 증거되어야 되지, 십자가 믿었던 나를 증거하면 이것은 오히려 십자가를 가리는 역할밖에 되지를 않습니다.
나팔을 붊으로써 하나님과 인간의 만남이 가능하고 그 성사된 모습만이 차이 나게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 땅을 진멸할 때 모든 것을 진멸하되 자기가 설계한 그 구역, 그 영토에 해당되는 사람은 따로 반드시 구원이란 이름으로 구별할 필요가 있고 그들을 살려낼 필요가 있죠.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약속의 땅에 쳐들어가게 한 겁니다. 땅 차지함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맺어진 언약이 얼마나 유효한가를 실습시키는 거예요.
그래서 정리하게 되면 나팔은 제사장이 그 제사 앞에 언약궤 앞에 모든 사람을 소집할 때 부는 것이 나팔인 겁니다. 그런데 사사기에 들어가면 십일조를 안 내니까 제사장이 전부다 밥을 굶어가지고 사사기 때는 레위인도 골치 아파요. 살기들 바빠가지고 온갖 데 다 돌아다니고 편의점 하다가 아르바이트 하다가 치킨집하다가… 뭐 안 먹히니까. 백성들이 땅은 있겠다 살만하고요. 이방민족이죠, 이방 빼버리면 그냥 민족들이 사는 방식으로 우리도 살고 싶다. 그들은 왜 잘 사는가? 왕이 있구나. 그러면 우리도 왕이 필요하다.
여러분, 인간의 왕이 하나님과 인간을 만나게 해줍니까? 인간의 왕이 나팔 잘 불어요? 인간의 왕이 제사 지냅니까? 아니거든요. 인간의 왕이 들어갈 필요가 없어요, 이것은. 하나님께서 여호와의 이름, 장차 오실 예수님입니다, 주의 이름이거든요, 예수님의 희생을 대가, 방주로 해서 하나님께서 계속 살려주는 거예요.
하나님 자신의 언약의 현존, 하나님이 여기 계시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 이스라엘을 이용할 뿐인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나중에 약속의 땅에서 배부르니까 이제는 나 살기 위해서 하나님이 필요하다고 아쉬울 때는 부르짖고 좀 배부르면 헤헤하다가 또 이방민족이 확 들이닥치고 그런 식으로 했던 겁니다.
사사기시대 때 하나님께서 기드온에게 전쟁을 시킵니다. 그러면 레위지파는? 레위지파는 소용없어요. 사사에게는 성신이 추가돼요. 성신이 주어지게 되면 어떤 현상이 일어나느냐 하면 성신은 언약의 현존성에 종이 되도록 해주는 그러한 능력이에요. 그러니까 언약이 현재 바뀌어버리면 그 성신도 기존 언약에 종속된 성신 말고 바뀌어진 언약의 성신으로써 새로 주어지는 겁니다.
골리앗을 사울이 이겼습니까, 못 이겼습니까? 못 이겼죠. 골리앗을 사울이 못 이겼습니다. 그러면 사울이 왕 될 때 성신이 임했습니까, 안 임했습니까? 임했죠. 사울이 왕 될 때 성신이 임했지만 골리앗을 상대할 때는 골리앗을 사울이 못 이겼으니까 골리앗을 이기는 하나님의 전쟁에는 다윗이 등장합니다. 새로운 언약의 현존성이 새로운 왕의 인물로 등장할 때는 사울의 성신이 악신으로 바뀌어버리고 다윗에게 성신이 오는 거예요. 언약의 이동에 따라서 그 언약에서만 적용되라고 성신이 주어지는 겁니다.
그럼 성령은 뭐냐? 성령은 이미 최종 확정되어버렸어요. 더 이상 새로운 언약이 없습니다. 십자가로 고정되어버렸어요. 구약에서 언약은 이동 중이에요, 지금. 캐나다에 트럭 운전하는 사람이 트럭에 사료 싣고 가다가 중간에 스톱하면 안돼요. 눈 덮인 도로이지만 그 농부에게 전달해줘야 자기 임무가 끝나잖아요.
언약이 마지막 인물까지 와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기까지는 이동 중이기 때문에 성신은 그때그때 달라요. 있을 때 있고 없을 때 있고. 없다가도 생기고 다시 있다가도 없어지고. 성신은 그 당시 언약이에요. 이 구약은 율법 시대라 할 수 있거든요. 율법이 완성되기 전에 율법적 작용에 따라서 성신이 주어지는 겁니다. 그러면 성령은 이미 율법이 완성된 거죠. 완성이 되었으니까 완성된 데서 성령이 오는 겁니다.
그럼 성령을 받은 사람이 율법 지킬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성령 받은 사람이 율법을 지킬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수시 합격하고 수능 칠 필요 있어요, 없어요? 수능 재미로 칩니까? 이미 수시 합격했는데요. 칠 필요 없죠? 안 쳤죠, 저 뒤에? 합격했잖아요. 왜 칩니까? 자기 실력 자랑하려고 칩니까?
사람들은 성령을 성신으로 이해해가지고 막 시험 치면서 도와주소서, 이러고 있다고요. 성령은 율법이 완성되었기 때문에 완성된 이유가 너는 개이고 안개이고 쥐뿔도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이 확정된 상태이기 때문에 시험쳐봐야 빵점, 빵점, 빵점의 연속선이에요, 우리는 시험쳐봐야. 여기 또 십계명 한번 들춰볼까요?
십계명 하나 지킬 수 없게 된 것을 여러분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율법을 못 지키는 것을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지 않게 된 것을 감사하게 생각해야 됩니다. 그것을 감사함으로써 십자가를 안 가리게 되기 때문에 그래요.
만약에 그걸 지키게 되면 사람의 관심은 뭔가 노동을 주입하면 노동한 나에게 계속해서 신경 쓰게 되어있어요. 내가 얼마나 성과를 냈는가, 내가 이거 지켜가지고 기도해서 얼마나 응답 받는가 자꾸 검토하고 측정하게 되어있어요.
측정이란 사물이 멈춰졌을 때 나오는 것이 측정이에요. 사물이 멈춰져 있을 때 나오는 것이 측정입니다. 멈춰있지 않으면 측정이 불가능합니다. 가는 걸 딱 붙잡아서 측정하는 거예요. “당신은 시속 50km인데 지금 90km로 갔습니다.” 그 경찰한테 걸리면 우리는 뭐라고 합니까? “저 스톱했는데요? 지금 경찰관 앞에서 차 스톱했는데요? 속도 90아닌데 지금 제로인데요?” 그렇게 하면 경찰관이 뭐라고 이야기합니까? “카메라 저기 찍혔는데 한번 볼까요?” “봅시다.” “당신 90나왔네.” “그때는 그때고. 당신이 돈을 받으려면 90달릴 때 그때 돈을 받아야지, 지금은 제로인데 제로 된 나한테 왜 돈을 받습니까?” 그때는 맞지만 지금은 틀린 거예요. 어떤 감독이 만든 영화제목에 그런 게 있어요.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 하는 영화 있어요.
제가 세 번째 시간에 했죠. 변화에 대해서는 인간이 해석할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인간이 자아를 생각할 때는 자기를 멈춰놓고 자기를 측정하기 때문에 이것은 틀린 거예요. 내가 나를 측정하는 것은 모조리 다 인정받을 수 없는 오답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오답에 휘둘리게 돼요, 오답에.
그 이유가 뭐냐 하면 타인 때문이에요. 남들의 시선 때문에 남들의 시선이 나를 스톱시켜서 측정하니까 남들의 시선 속에 타인의 욕망이 들어있어요. ‘너는 우리 가문의 영광이야.’ 이런 거요. ‘너는 남한테 욕 얻어먹을 짓 하면 안 돼.’라는 이런 타인의 욕망에 우리가 맞춰준다고 하니까 나도 맞췄는지 안 맞췄는지 선악체계로 측정을 하다 보니 자꾸만 선악체제를 못 버리게 되는 겁니다.
그러나 성령이 임한 사람이 사도행전에 바로 이방인들이에요. 이방인들이 성령이 임해서 의인이 되었죠. 이에 대해서 누가 화를 냈느냐 하면 예루살렘에 있는, 이걸 전문 용어로 꼬장들이라 하는데 꼬장꼬장한 사람들이에요. 이방인들이 뭔데 율법을 쓰레기 취급해? 이것 때문에 화가 난 거예요.
그래서 여기서 ‘율법도 지켜봤고 성령도 받아본 사람이 등장합니다’ 해서 등장한 사람이 바로 사도 바울이에요. 유튜브에 보면 그런 사람이 있어요. 서울대학도 나와 봤고 하버드도 나와 본 사람이 나오는데 최재천 교수라고 있어요. 허연 수염 기르고 다니는 사람 있는데 둘 다 졸업한 사람이 있습니다. 여기 사도 바울은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으로 율법도 지켜봤고 성령도 받아봤고. 그런데 저쪽 꼬장들은, 꼬장꼬장 경직된 사람들은 성령을 안 받아본 거예요. 그러니까 성령을 모독했다고 그들은 화를 내는 거예요.
그래서 사도 바울이 누구한테 화를 내느냐 하면 갈라디아서 2장에서 자기의 선배격인 고참격인 베드로에게 화를 냅니다. 아직도 할례 언약 무할례 언약이 십자가로 완성된 것을 모르십니까? 율법이 왜 있는데요? 의가 의를 드러내기 위해서 율법을 줬는데 이미 의가 성령으로 와서 의인 되어버렸는데. 물론 받은 사람은 황당하지만 황당해도 받은 건 받은 거고요. 황당하지만 받은 건 받은 거고 의인 된 사람에게 왜 여기서 수능을 왜 치게 하십니까? 왜 그런 시선으로 그들을 비난합니까?
복음이란 어떤 누구로부터 비난받을 것이 깨끗하게 깔끔하게 청산된 것이 그게 바로 복음입니다. 아무도 너를 정죄하지 말라 했어요. 왜 우리 자신이 우리를 정죄합니까? 그것은 남들이 너 신자냐? 자꾸 측정을 해대니까 나 신자다, 이런 식으로 남의 장단에 맞춰준다고 주님이 주신 성령과 십자가의 은혜를 모독하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 성령 받아놓고 성신처럼 살지 마시라 이 말입니다. 성령 받아놓고 율법 지키려 해서는 안돼요. 바리새인은 금식하고 뭐하고 ‘그 근거는 구약성경에 나옵니다.’ 하는데… 구약 성경에 나오죠. 성경은 누가 지키는 거예요? 율법이죠. 율법은 누가 지키는 겁니까? 히브리서 10장에 보면 율법 지키라고 따로 한 분을 마지막에 세운 거예요. 이 분을 왜 세웠겠습니까? 이 분 외에는 아무도 율법을 지켰다는 소리 하지 말라는 거예요. 그분이 오셔서 모든 율법을 자기 것으로 다 수거해서 내가 다 지킨 거예요. 주님이 다 지킨 거예요.
‘그분의 공로를 우리는 믿습니다.’ 이 말은 내 공로는 없죠. 내 공로는 도려내는 거예요. 성령이 오게 되면 주님의 공로가 나의 성과와 공로를 날마다 도려내는 겁니다. 가위가지고 다 도려내는 거예요. 또 또 자랑거리 있으면 또 또 도려내는 거예요.
그래서 남들이 와서 “너 신자냐?” 하면 “나 불신자다. 그것도 구멍 난 불신자다.” 왜 그걸 자신 있게 말 못합니까? 저건 내 사람이다 왜 말을 못해요? 저 사람은 내 여자다 왜 말을 못합니까? 왜 우리는 진실에 대해서 그렇게 화끈하게 못합니까? 그것은 우리가 어릴 때부터 남들의 주변의 안목과 시선에 같이 놀아나느라 그런 거예요. 세상과 화해하기 위해서. 화해는 이성적 조치가 아닙니다. 주님 십자가의 비극적인 사태를 받아들이는 것이 화해이지, 남하고 좋게 지내는 그런 관계는 사람 대 사람을 다 이용하는 관계에요.
그래서 주일 낮에 사실 제가 강조하고 싶었던 것이 모든 인간의 만남은 폭력적이라는 거예요, 폭력적. 가다가도 툭 건드리고 심심하다고 건드리고 오면서도 건드리고. 그래서 그 2학년 2반 친구보고 한마디만 하고 싶은 거예요. 툭 건드릴 때 참지 말고 ‘너 나 알아?’ 이 한마디만 했으면 아무리 덩치 커도 ‘아니, 몰라.’ ‘모르는데 왜 나한테 할 말 있어?’ 그러면 그다음부터 안 건드려요. 그냥 참아야 하느니라. 지가 왜 그래? 참아야 하느니라. 뭘 참아? 인간의 만남은 전부다, 만나면 좋은 친구 MBC 문화방송 아니고, 모든 만남은 폭력적입니다.
그래서 실제로 기드온 전쟁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죠. 기드온 전쟁에 이만 이천 명 왔거든요. 이만 이천 명이 왔는데 어떤 절차를 보여줘요. 처음부터 이만 이천 명 오지 말라고 한 것이 아니라 300명 될 때까지 어떤 과정을 보여줍니다. 이만 이천 명 왔을 때 기드온 자신이 빈 자리가 아니고 약간은 나의 걱정을 채웠다 할 수 있죠. 왜냐하면 저쪽은 십삽만 오천 명이니까. 다 칼을 들고 활을 들고 말을 가지고 병거를 가지고.
옛날에는 화살이 바퀴살이었어요. 이 바퀴살 있는 쪽이 승리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인도 지방에 기원전 6000년쯤부터 생긴 흑해근처 유목민족인 아리아족들이 있었어요. 그들이 1700년 경인가 인도를 점령할 때 마차 들고 점령했어요. 그리고 이집트가 정복할 때도 마차 들고 했고요. 놀랍게도 마차가 말보다 먼저 발명되었습니다. 고고학적으로 그렇게 되어 있어요.
그들이 그렇게 무기가 발달되었으니 얼마나 기고만장했겠습니까? 그러니 이 전쟁을 어떻게 합니까? 이 전쟁을 어떻게 해야 돼요, 기드온은? 레위인들은 이미 기대할 게 없고. 기드온에게 무엇이 왔습니까? 성신이 왔죠. 성신이 왔다는 말은 하나님의 언약 앞에 소집하는 거죠.
소집한다는 말은 여기 하나님의 군대장관, 천사들 지금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현존하는 모든 군대들을 하나님께서는 기드온과 미디안의 전쟁에 집중하는 거예요. 집중할 때 하나님의 적이 둘이에요. 하나는 이방민족 미디안 십삼만 오천 명도 적이고 또 누가 적입니까? 이스라엘이 적이죠. 이스라엘이 적인 거예요.
파인먼 다이아그램(Feynman diagram)에서 양자가 주어졌을 때 두 개의 입자와 반입자로 갈라진다고 제가 두 번째 시간에 했죠.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지만 하여튼 그런 소리 했어요. 주님이 싹 들어오면서 비로소 이스라엘다운 이스라엘과 이방민족, 그리고 거짓된 이스라엘이 갈라지는 거예요.
그렇다면 여기서 하나님께서는 군대장관이 한 것처럼 이미 시간적으로 차이가 없는 현존하는 군대로 하여금 나팔을 불게 하는 겁니다. 나팔을 부니까 미디안 군사들이 칼에 창에 찔려 죽었어요. 이 칼, 창 어디서 도입된 겁니까? 뭐 직구한 거예요? 어디서 가져온 거예요, 이 칼, 창은? 이스라엘 백성들 300명에게는 뭐가 없어요? 이스라엘 군대는 칼이 없어요. 칼이 없다고요. 기드온도 칼이 없고 여호와도 칼이 없어요. 칼이 없는 여호와가 적들을 칼에 찔려 죽게 하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본인들을 완전히 미치게 만들어버리는 거죠, 본인들을. 자기들이 갖고 있는 칼로 적을 찔러야 하는데 적이 누군지도 분간 못하도록 혼란에 빠뜨리는 겁니다.
내가 가진 주식, 내가 가진 돈, 내가 가진 부동산 이것이 나를 지옥으로 보내요. 내가 가졌다는 것, 나는 뭔가 채워졌다는 이것이 누구를 찔러요? 남한테 자랑질하려고 했던, 남을 찌르려고 했던 이 재산, 부동산, 지금 여러분에게 전혀 해당되지 않는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이것 가지고 나 너한테 안 질란다, 이길란다 하는 그것이 결국은 자기를 파멸로 보냅니다. 그래서 부자가 천국 가는 것이 낙타가 바늘구멍 통과하는 것만큼 안 되는 겁니다. 여러분 가운데 재산 3500억 이상 되는 사람 있습니까? 손들어 보세요. 없죠? 내가 마음 놓고 이야기합니다.
부자가 천국 가기 어렵다는 말을 현장에서 제자들이 들었잖아요. 이걸 제자들이 이렇게 해석했습니다. 모든 인간은 천국 못 간다고 이해했어요. 제대로 해석한 겁니다. 모든 사람은 부자 되는 것을 인생의 목표로 삼기 때문에. 부자가 천국 못 가면 비엔나 소세지처럼 부자 되려는 사람도 천국 못갑니다. “그럼 사람은 아무도 구원받지 못합니까?” 라고 질문했을 때 주께서는 그걸 “O.K.” 라고 합니다. 그래. 아무도 구원받지 못한다. 이제는 하나님이 나설 때다. 하나님이 건지면 구원이 된다.
그 하나님의 하늘의 요소가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지상에 와서 십자가로서 성령을 통해서 우리에게 하늘의 요소를 줬습니다. 그러면 하늘의 요소로써 구원되면 문제가 거꾸로 올라가야 되죠. 그럼 부자도 당당하게 천국 갑니다. <엽기적 그녀> 영화 보면 이미 고등학교 졸업한 전지현하고 차태현이 술집에 주민등록증 보이면서 둘이 당당하게 들어가는 거예요. 부자인데 당당하게 천국 들어가는 거예요. 주께서 그렇게 하게 하시니까요.
그 순간 부자가 부자임을 생각 안하겠죠. 내 생각 안하겠죠. 돈 있음이 다 이루었다 함이 아님을 알기 때문에. 내가 재산 있음이 다 이루었음이 아니기 때문에. 그런데 성령을 안 받은 사람은 모든 관심사가 타인의 욕망에 있다 보니까 나 부자다, 자기 의식하고 자기 자랑하는 데에 있기 때문에 하나님과 인간의 만남에서 형성되어 있던 그 체제 있잖아요, 이 체제를 누락시켜버리는 거예요.
나는 어떤 체제에 종속되어서 체제에 이바지해야 되는데 단독적으로 내가 따로 칼 가지고 총 가지고 재산 가지고 부동산 가져가지고 나 이렇다, 나 건드리지 마, 이렇게 되어버리면 가진 그것이 자기를 파멸시키는 이 방법이 바로 진멸하는 진멸의 원칙입니다. 진멸의 원칙이에요.
자, 나팔이라 하는 것은 ‘내 백성 다 모여라’ 소집하는 것이고 나팔 부는 장소는 모세가 하나님과 만났던 그 체제에서만 나팔이 나오는데 그 체제에 보면 하나님의 언약궤와 하나님의 성막에 대한 설계도가 있던 그 자리, 그걸 바로 모세 언약, 율법이라 하고 그게 제사법이에요. 제사법에 보면 제사장이 나팔 불게 되어있죠. 여호수아가 불지 않아요. 여호수아는 사라질 존재에요. 제사장은 계속 가야될 존재에요, 모세 율법이 있는 한.
따라서 제사장이 모였다는 것은 우리 동네에는 나타나 있는 왕은 더 이상 필요치 않다는 것을 보여주는 겁니다. 왕이 필요치 않은 것, 왕이 없음을 도리어 감사해야 되는 그러한 체제가 바로 전쟁을 통해서 그들에게 계속해서 알려지고 있죠.
정리해볼게요. 무기란 인간 대 인간의 싸움이 아니고 하나님과 인간의 싸움입니다. 싸움하는 이유는 내 백성 남기고 나머지는 진멸하기 위한 확실한 목적이 있습니다. 따라서 여호수아 11장 한번 봅시다. 그 본문 다 같이 읽고 마치겠습니다.
11장 20절, “그들의 마음이 강퍅하여 이스라엘을 대적하여 싸우러 온 것은 여호와께서 그리하게 하신 것이라” 여호와의 개입이죠. “그들로 저주 받은 자 되게 하여 은혜를 입지 못하게 하시고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대로 진멸하려 하심이었더라” 모세와 하나님이 만나는 체계에 합당하도록 일치하도록 그렇게 하시는 겁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언약의 일관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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