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겨울수련회 여호수아강해 제 5강 : 언약적 변천과정 - 이 근호 목사
다섯 번째 시간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언약의 변천과정을 보게 되면 처음에 노아 홍수에서는 물로 사람을 죽입니다. 물로 사람을 죽이실 때 노아식구도 사실상 죽은 거예요. 땅을 떠났으니까요. 살던 땅이 있는데 땅에 기억이 있잖아요. 땅에 살았던 기억, 노아식구마저 그 땅과 결별한 겁니다. 이별했습니다.
땅에서 방주로 이동했고 이 방주를 성경에서는 언약이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땅에 사는 것이 익숙했던 그들에게 땅에 살지 않고 방주 안에 살게 하면서 노아의 이동경로가 언약의 변천과정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노아는 어떻게 구원 받았는가?’ 이렇게 이야기할 수도 있고요. ‘죽는데 합세해서 노아식구는 왜 안 죽었지? 그들은 왜 안 죽었지?’
‘어떻게 살았지?’가 아니라 ‘죽어야 하는데 그들은 왜 안 죽었지?’ 그 때 노아가 하는 말은 ‘언약 때문에 내가 살았어요.’ 하는 게 아니라 ‘언약을 언약대로 살리기 위해서 나를 이용했습니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언약을 언약대로 살리기 위해서, 언약이 나를 품어줘서 나를 살리는 것이 아니고 언약 자체를 살리기 위해서 나를 활용했습니다.’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럼 언약의 주인공이 일단 노아는 아니에요. 노아는 아니고 노아가 그 언약의 주인공 같으면 땅의 기억과 추억과 함께 땅이 자기 인생을 보장해줬겠죠. 그런데 노아마저 여기서 떠나게 만들었다는 말은 노아가 주인공이 아니라는 말이에요.
그럼 언약의 주인공이 누구냐? 방주 안에 있던 정결한, 다른 말로 하면 거룩한 짐승이에요, 거룩한 짐승. 새나 양 같은 짐승이 돼요. 거룩한 짐승이 나중에 언약의 변천과정에서 중간에 끼어들고요. 중간에 끼어든 이 새나 양이 나중에 최종 상태로 인물이 됩니다. 이게 사람이 돼요.
그러면 여기서 멸망당해야 마땅한 이 사람, 시작은 사람을 다루는 것부터 시작했는데 최종적으로 나오는 이 인물과 이 사람이 어제 강조했던 바로 ‘차이’, 차이가 지는 거예요. 최종적인 이 인물은 무엇이고 현재 우리 대다수가 포함되어 있는 사람이라는, 아담에 속한 것은 어떤 차이가 나는가. 로마서 5장에서 사람은 아담에 속한다고 되어 있고 이 인물은 바로 새로운 아담이 되는 겁니다.
여기 보통 인간에서 진짜 하나님이 지목한 인간까지의 그 과정에 언약이 변천과정을 보여주는 거예요. 언약이 그 과정을 보여주는 겁니다. 보여주는데 물로써 사람을 죽이다가 변천과정에서 인물이 등장했을 때는 최종적인 것이고 중간에는 피로서 사람을 죽이는 겁니다. 방주 역할을 피가 하는 거예요.
노아가 방주 안에서 살았다 하지 말고 노아는 방주 안에서 죽어야 되는데 안 죽었다고 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정결한 피 안에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거죠, 정결한 피 안에서 그 안에 있는 사람은 죽어야 하는데 안 죽은 거예요.
그러면 언약 안에서 죽어야 한다는 것이 진실이라면 안 죽어야 한다는 것은 거짓이 되겠죠. 그러니까 인간은 거짓에서부터 출발하는 거예요. 거짓에서 출발하기 때문에 내가 살아야 된다는 것을 진실로 여기고 안 죽어야 된다는 것을 거짓으로 여기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께 속한 사람은 이 진실과 거짓이 어떻게 바뀌느냐를 예수님이 보여주는 겁니다. 그것이 십자가에 죽었다가 사흘 만에 살아남으로 말미암아 진실은 거짓이었고 거짓은 진실인 거예요.
그래서 이렇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성도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할 때 거짓을 믿으라고 해야 돼요. 거짓을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거짓을 진실하게 믿으면 믿음이 좋은 것이고 거짓을 안 믿으면 하나님 앞에 퇴출당한 자에요.
노아 홍수 나기 전에 많은 사람들에게 비가 온다, 홍수가 온다는 이야기를 했잖아요. 그때 대다수의 사람들이 그것을 뭐로 봤습니까? 거짓으로 봤잖아요, 거짓으로. 거짓을 믿지 아니하면 구원을 받지 못해요. 그래서 지난 시간에도 이야기했지만 기생 라합이 내뱉은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기생 라합은 거짓말을 자기의 새로운 안식처, 새로운 방주로 여긴 거예요. 기쁨으로 서슴없이 거짓말할 수 있는 이 용기. 거짓을 인정할 줄 아는 이 자유.
고등학교 졸업한 지 한 10년 됐다. 고등학교 동창생 둘이 만났다. 한쪽은 복음을 알고 다른 한쪽은 고등학교 때부터 지금까지 복음을 몰랐다. 그러면 어느 쪽이 성공한 사람이에요? ‘너 고등학교 졸업해서 취직하고 결혼했나?’ 이렇게 이야기하는 쪽은 살아야한다는 진실에 충실한 자이고 ‘나 고등학교 졸업하고 난 뒤에 복음을 들었는데 네가 주장하고 네가 계획한 그 기대가 다 거짓이래. 네가 만약에 진실이라면 나는 거짓되게 살래.’ 거짓되게 살다가 나중에 거지 되는 수도 있지만…….
이것이 바로 주께서 언약의 변천과정에 우리를 그대로 집어넣어가지고 우리가 이 땅에 살면서 주께로 가는 그 언약의 변천과정을 우리 인생에 도배해버리는 거예요. 그대로 복제를 해버려요. 우리가 이 땅에 태어나서 나 위주로 살다가 나중에는 ‘그리스도께서 나를 이끄시는구나.’까지 갈 때까지 내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그렇게 다루시는 분이 계시다는 거예요. 그렇게 다루시는 방법이 언약의 변천과정을 통해서 다루는 거예요.
제가 오후 설교 때 그런 이야기했죠? 야구장 스탠드 위에 공을 놔두면 그 공이 한꺼번에 저 바닥상태로 떨어지는 것이 아니고 한 계단씩 탁탁 떨어지는 거예요. 위치 에너지가 떨어지게 되면 제일 아래 바닥은 안정된 상태라 해요, 안정된 상태. 그러면 계단을 한 칸씩 올라갈수록 들뜸 상태라 해요. 들뜸 상태는 불안정한 거예요.
하나님께서는 속히 안정 상태로 떨어지게 하는 거예요. 제일 아래로 떨어질 때 여기에 십자가가 있죠. 인간들이 가장 거짓되다고 자부해서 오신 메시아를 죽여버렸거든요. 그 당시 사람들이 예수님을 죽일 때 자기의 결정은 옳다고 생각해서 거짓이 아니라 해서 죽였는데 나중에 예수님의 영, 성령이 와서 무엇을 지적하느냐 하면 너희들의 판단, 너희들의 의에 대한 판단, 죄에 대한 판단, 심판에 대한 판단 자체가 거짓이었다는 것을 고발하는 것이 성령입니다.
성령이 왔다는 말은 쉽게 말해서 “너 안정 상태에 있어 아니면 들떠 있어?” 그걸 묻는 거예요, 성령께서. 성령 받고 들떠 있는 사람들 보면 희한해. 네 자리 찾아가. 네 자리는 네가 죽어 마땅한 자리가 네 자리야. 이게 안정 상태거든요.
탄소(C)와 산소(O)가 만나서 자기의 본자리를 찾아가요. 본자리 찾아가는 것을 ‘환원’이라고 하는 겁니다. 탄소는 CO₂, 탄산가스가 되는데 이것을 산화되었다고 하거든요. 탄소가 산소를 만나서 산소가 들뜬 상태에서 자기의 안정 상태로 갈 때 에너지가 방출되는데 이것을 불났다고 하는 거예요. ‘불이다!’ 이게 무슨 말이에요? 불났다는 말은 탄소와 산소의 들뜬 에너지가 바깥으로 튀어나왔다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불로 심판한다는 말은 “다 죽여버려!” 이거에요. “다 없애버려!” 그 뜻이에요. 품지 말아야 될 에너지를 품고 있다가 그것이 바깥으로 나오니까, 불이야! Fire! 미요미요~ 막 소방차 오죠. 이 세상이 불바다 되어야 될 이유는 본인이 자기 자리를 찾지 못하고 거짓과 진실을 거꾸로 뒤집어가지고 심지어 오시는 메시아까지 죽여 버렸잖아요.
복음은 예수님의 존재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십자가 사건을 복음이라 해요. 예수님 존재를 성화로 그려놓고 그 존재 앞에서 비는 것은 갓바위에서 비는 것이지 그건 복음이 아닙니다. 복음이라는 것은 주님이 이끈 십자가 사건이, 그 언약의 변천과정의 에너지가 내 속에 들어올 때 그게 복음이 들어온 거예요.
제발 좀 살려 주는 대로만 살아. 더 살려고 하지 말고. 이게 안정 상태, 기저 상태, 바닥 상태에요.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에너지 준위, 레벨이 점점 불안정해지는 겁니다. 그래서 원자구조에서 가운데 원자핵이 있고 주변 전자의 레벨에서 s1, s2, p1, p2, p3,… 이런 식으로 에너지준위를 표시하거든요. 전자가 채워질 때는 ↑↓이렇게 들어간다, 여러 가지가 있는데 이 이야기는 다른 게 아니고 전자가 이렇게 자기 자리를 찾아간다는 거예요.
아까 야구장 스탠드에서 공 떨어지듯이 차근차근 오는 거예요. 그것이 이스라엘 역사에서 차근차근 하나의 띠를 이루는 겁니다. 띠를 이루는데 공통점은 이겁니다. 진멸하라. 다 죽어버려라. 언약이 개입되면 들떠 있는 에너지는 전부다 진노로서 저주로서 다 나오게 되어있습니다.
오늘 여호수아 5장 할 차례인데 5장을 하기 전에 먼저 여호수아 11장부터 보겠습니다. 11장 13절부터 보면 “여호수아가 하솔만 불살랐고 산 위에 건축된 성읍들은 이스라엘이 불사르지 아니하였으며 이 성읍들의 모든 재물과 가축은 이스라엘 자손들이 탈취하고 모든 사람은 칼날로 쳐서 진멸하여 호흡이 있는 자는 하나도 남기지 아니하였으니 여호와께서 그 종 모세에게 명하신 것을 모세는 여호수아에게 명하였고 여호수아는 그대로 행하여 여호와께서 무릇 모세에게 명하신 것을 하나도 행치 아니한 것이 없었더라”
이렇게 언약의 변천과정에서 진멸하는 것이 필수적으로 나오게 되어있습니다. 그러니까 진멸한다는 것을 언급할 때 사람들은 대번 드는 의문점이 무엇이냐 하면 ‘왜 진멸해야 되는가? 진멸 없이 그냥 하나님과 인간이 좋게 좋게 지내면 되지 않는가? 하나님께서 상당히 과격하게 인간을 다루시는 그 이유가 뭐냐?’ 거기에 대해서 반발을 하지 않을 수 없어요.
그것에 대해서 여호수아 11장 20절에 나옵니다. 여호수아 가운데 다른 것 말고 한 구절만, 제일 중요한 딱 한 구절만 뽑으라면 여호수아 11장 20절이에요. “그들의 마음이 강퍅하여 이스라엘을 대적하여 싸우러 온 것은 여호와께서 그리하게 하신 것이라 그들로” 다 같이 그다음에 뭡니까? “저주 받은 자 되게 하여” 그다음에 “은혜를 입지 못하게 하시고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대로 진멸하려 하심이었더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여호수아를 참기름 짜듯이 압축시켜 짜서 ‘왜 그렇게 진멸해야 됩니까?’ 한다면 하나님께서 은혜 줄 자에게만 은혜를 주고 은혜가 안 가야 될 자에게는 일체 은혜를 안 주려고 그렇게 했다. 은혜 주고 안 주고는 내 마음이다. 네 마음이가? 이런 식이죠. 그리고 그들로 하여금 저주 받는 자 되게 하는 거예요, 저주 받는 자.
그래서 첫째시간부터 넷째시간까지 줄곧 이야기한 것은 언약에서 말하는 악이라는 게 무엇인가? 언약이 말한 죄악이란 무엇인가? 이것은 언약 없이도 단독적으로 땅에서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그 개별적 의식, 그것이 바로 언약의 적이고 악입니다. 언약 없이, 언약을 드러내는 하나의 표상으로서 피조물이 사용되는 것이 아니라 언약이고 뭐고 저리 가라. 나는 내 자체가 주체로서 실체로서 살겠다고 고집하는 것이요. 모든 것이 내 중심으로 살겠다는 그것이 언약의 적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지난 시간에도 이야기했지만 여호수아에 들어와서 언약의 적의 표증은 이스라엘 내부에도 있었습니다. 여리고성 끝나고 난 뒤에 아간이란 사람이 등장하죠. 여리고성 점령 후에 아간이란 사람이 등장하는데 그것이 여호수아 7장에 보면 나옵니다. 여호수아 7장에 나오는데 25절 끝에 보면,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를 괴롭게 하시리라 하니 온 이스라엘이 그를 돌로 치고 그것들도 돌로 치고 불사르고”
이스라엘이 이스라엘 이름으로 아간을 쳤어요. 여호와의 전쟁 때 하나님께 바칠 물건 중 자기가 외투하고 금하고… 요새 시세로 얼마 되지도 않죠, 외투 한 벌 얼마 합니까? 한 200만원 합니까? 외투 한 벌하고 금덩어리 하나 보고 탐을 내서 취했다고 되어있는데 이스라엘이 그를 돌로 쳤다 이 말이죠.
이스라엘이 친 것은 집단이 개인을 친 거예요. 집단이 되어야 될, 하나의 언약 밑에 모든 것이 종속되어야 될 그것을 아간은 그 종속이 싫어서 자기는 단독으로 빠져나온 거예요. 이게 언약의 적입니다. 돌로 치는 것도 모자라서 “돌로 치고 불사르고 그 위에 돌 무더기를 크게 쌓았더니 오늘날까지 있더라 여호와께서 그 극렬한 분노를 그치시니 그러므로 그곳 이름을 오늘날까지 아골 골짜기라 부르더라” 아골 골짜기다, 괴로움의 골짜기다 그렇게 이야기했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스라엘이 그런 행동을 할 때 일반 사람들은 이해가 안 되는 거예요. 왜 그렇게 해야 되는가? 그것은 아까 원칙이 뭐냐 하면 죽어 마땅함을 삭제했기 때문에 그래요, 죽어 마땅함을. 언약이 있어야 언약 때문에 우리가 겨우 살아남는 것이지, 언약 없이 우리 단독으로 산다는 것은 언약의 입장에서 죽어 마땅한 거예요.
왜냐하면 이 인물, 하나님이 지정한 인물에 비해서 우리는 가짜이기 때문에 그래요. 가짜가 인간행세 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되거든요. 복음도 모르는 것들이 사람행세 하는 건 가관입니다. 입에서 복음이 안 나오는데 ‘나도 인간이다. 백신 맞으세요.’ 그 백신 3차 맞는다고 인간 됩니까?
인간이 하는 어떤 행동도 인간을 변화시키지 않아요. 왜냐하면 들떠 있는 상태이기 때문에. 에너지가 들떠 있는 상태에요. 그 에너지 상태, 이것이 은혜거든요. 은혜를 은혜 값으로 못 돌리니까 다시 하나님께서 불로써 다 불태워버립니다. 인간이고 뭐고 전부다. 옛날에는 물로써 그들을 멸망시켰다면 앞으로는 불로써 멸망하고 불과 물의 가운데서 백성 될 사람을 피로써 뽑아내는 거예요.
그래서 여호수아 5장 진도 이제 나가봅시다. 거기에 ‘할례’라는 것이 나옵니다. 먼저 이 체계를 갖추시고 할례를 이해해야 돼요. 언약의 변천과정입니다. 언약의 변천과정에서 이미 하나님이 지정하신 인물은 따로 있어요. 참된 인간은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가짜이기 때문에 그 가짜가 진짜를 가리도록 하나님께서 허용할 리가 없죠. 하나님의 모든 일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일이기 때문에 가짜 인간이 인간행세 하는 것을 용납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진멸해버리는 거예요. 진멸한다는 것은 호흡하는 자들은 다 죽여버리는 겁니다. ‘제발 좀 죽은 자로 있어다오.’ 이런 거죠.
5장에 보면 드디어 할례라는 것이 나옵니다. 항상 한마디로 규정하는 것이 좋아요, 복잡하게 설명할 것 없이. 할례는 차이 짐 또는 차이 남. 유월절 사건이 일어날 때 선제 조건이 할례였고 할례 받는 조건에서 유월절 피를 발라야 돼요. 할례를 받지 않으면 유월절 피 발라도 소용없어요.
할례라는 것은 제거하는 것이거든요. 생식기 그러니까 혈육을 제거하는 거예요. 혈육을 제거하게 되면 혈육은 빈 자리가 되겠죠. 제거했으니까. 그 빈 자리에 무엇이 삽입되는가? 유월절 어린, 새로운 예수님 노선의 인물의 피가, 거룩한 정결한 피가 이 빈자리에 삽입되어 들어가는 겁니다. 참 쉽죠? 너무 쉽잖아요, 할례라는 것이.
이것을 접붙임이라 해서 로마서 11장에도 나오는데 참감람나무가 있다면 돌감람나무가 참 감람나무에다가 접붙이면서 도려내고 접붙여 들어오는 겁니다. 성령을 받았다는 것은 예수님의 마음이 완악하고 돌 같고 지옥 같은 우리 마음에 쑥 들어오는 거예요. 쑥 들어와서 하늘의 요소가 땅의 요소 속에 개입되는 겁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무엇만 주시하겠어요? 우리의 인품, 자격, 착한 것, 귤 몇 개 먹었는가 그런 것 신경 안 씁니다. 그냥 하늘의 것, 자기 것이 아직 그대로 유지되고 있는가 그것만 보시고 그것 당기니까 줄줄이 딸려 나와서 비엔나 소세지처럼 앞에서 잡아당기니까 줄줄이 우리가 거기서 구원받는 거예요.
그리고 성령은 예수님의 영이기 때문에 성령은 나의 영이 될 수가 없어요. 나는 개별자잖아요. 성령은 예수님의 개인 영이기 때문에 다 같이 공유하는 것이지 어느 한쪽이 이것을 독점할 수가 없습니다. 오순절 성령 임할 때 성령은 불같이 왔죠. 죽어 마땅함을 미리 경험하는 자가 성령 받은 자입니다.
성령 받은 사람의 특징은 ‘어떻게 살아요?’가 아니라 ‘내가 왜 살아있지? 거 희한하다.’ 참 희한한 일이에요. 어떻게 내가 이렇게 매일같이 살아있지? 처음엔 두려움이 있다가 ‘내가 왜 살아있지?’ 하는 신기함을 통해서 범사에 감사로 이어집니다. ‘내가 어떻게 살지?’ 두려움이잖아요. 그런데 ‘내가 왜 살아있지?’ 신기함. 주의 일에 가담하게 되었다, 감사. 이렇게 되는 겁니다.
어린 양의 혼인잔치에 참여했다. 감사하죠. 지난 시간에도 이야기했지만 천국의 특징은 단수에 모든 사람들이 공동으로 복수로 집단적으로 엮어져있는 형태입니다. 여기서 개인이란 것은 있을 수 없어요. 우리밖에 없어요.
할례 이제부터 시작합니다. 할례는 제거를 하는 거예요. 제거할 때 여기서 무엇이 발생되느냐 하면 피가 발생됩니다. 할례 언약에 대해서 출애굽기 4장에서 모세의 아내 십보라가 자기 아들을 할례 해놓고 그 포피를 모세의 생식기 근처에 던지니까 모세가 죽었다가 살아난 거예요.
그러니까 애굽에 내려가는 모세는 처음부터 죽은 모세지요. 숙소에서 하나님께서 모세를 죽임으로써 죽은 모세의 그 실체가 드러난 거예요. 너는 지금 그 상태로 가봐야 죽은 모세거든요. 그러면 죽은 모세가 애굽에 도달할 때는 죽은 모세가 되는 게 아니고 언약을 실어 나르는, 언약의 변천과정에서 언약의 운반체로써 애굽에 들어가야 되는 거예요.
왜냐하면 애굽에는 언약이 없으니까요. 언약이 없다는 말은 이게 차이 남이에요. 이 차이 남이 거룩이 되기 때문에. 차이 남은 하나님의 언약이 다른 차원에 계시는 하나님이 개입할 때 차이가 나는 겁니다. 어떤 차이냐 하면 ‘너는 땅에서 태어나서 땅밖에 모르잖아. 그러나 이스라엘 봐. 하늘의 요소가 들어왔잖아.’ 이 차이 남이에요.
그냥 추가해서 들어온 것이 아니고 땅에 있는 모든 것이 거짓이고 죽어 마땅하고 진멸되어야 된다는 것을 하늘의 요소가 들어올 때 비로소 파악이 되고 확인이 되는 겁니다. 이건 뭐 아주 신나지 않습니까? 남이 없는 것을 내가 갖고 있다는 것이 얼마나 뿌듯합니까? 얼마나 뿌듯해요.
전에도 이야기했지만 신보라라는 개그우먼이 상을 받고 난 뒤에 수상소감을 말해보라니까 “이 모든 것을 십자가 죽으신 예수님의 은혜로 돌립니다.” 십자가를 집어넣었어요, 생중계에. 보통 하나님 은혜라 하는데요. 하나님 이야기 안하고 “십자가 죽으신 예수님의 은혜입니다.” 이랬다고요. 자기가 말을 해놓고도 무슨 말인지 모르겠지만……. 십자가에요, 십자가.
그러니까 신보라 그 사람이 진짜 복음을 안다면 이 코스에요. ‘제가 왜 이 상을 받아야 됩니까? 신기하여라. 어? 아하, 상을 받음으로 말미암아 주님이 나로 하여금 십자가 일에 참여시키고 있구나.’ 라는 것을 아는 거예요. 그러니까 상 받아서 감사한 것이 아니고 십자가가 계속 유효하게 작동한다는 사실에 감사하는 거예요. 내가 신보라를 너무 많이 띄웠는데요.
피가 나면서 죽은 모세는 언약 운반체로서 여기 등장해야 돼요. 그래서 남편에게 뭐라고 하느냐 하면 ‘당신은 피 남편’이라 해요, 당신은 피 남편. 당신은 할례 언약이 있는 남편, 피 남편이에요. 혈육을 제거하는 거예요. 제거하고 여기 들어올 때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차이나는 백성으로서 이제 들어가는 겁니다. 이렇게 할례 언약을 행하게 되면 그다음에 할례를 행했던 이 사람들이 언약궤를 운반해야 돼요.
자, 여호수아 5장을 봅시다. 여호수아 5장 2절에, “그 때에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너는 부싯돌로 칼을 만들어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다시 할례를 행하라 하시매” 이것도 봅시다. 할례 언약은 피를 내는 것이다. 그러면 이 피는 하나님의 율법입니다. 하나님의 율법이고 언약입니다. 할례 언약을 행함으로 말미암아 이 율법에 의해서 인간의 육적인 것은 이미 제거되었어요. 육적인 것은 제거되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지난 시간에 여호수아 1장을 하면서 율법을 지키고 좌로나 우로 치우치지 말라고 설명할 때 제가 이렇게 설명한 것이 기억나요. 율법을 지킨다 할 때 미리 율법에 대해서 죽은 자로 살면 그 율법은 우리를 대행해서 움직이고 우리는 그 안에서 율법만 의지하면서 같이 움직이며 다 따라가게 되어있어요. 냄비가 움직일 때는 분명히 그 안에 쥐가 있던지 고양이가 있던지 뭐가 있어요.
그러니까 드러나는 것은 율법만 드러나고 너의 육적인 요소는 할례 언약을 통해서 없는 것으로 여겨라. 다른 말로 하면 율법이 할례 언약이 너를 지배했기 때문에 네가 전쟁할 때는 율법으로 나가야 된다. 왜? 너는 미리 죽었으니까. 그러니까 진멸이 가능한 거예요.
노아 때 모든 사람이 땅에서 죽었지만 노아는 살았던 이유가 이미 노아는 방주 안이라는 언약 안에 있기 때문에 노아가 죽어야 되는데 살았단 말이죠. 이게 어렵지 않잖아요. 아까 했잖아요. 노아는 자기 집에 산 게 아니고 자기 집에서 쌍안경 들고서 남들 홍수에서 저주 받는 거 구경하고 히히덕거리고 그런 게 아니에요. 본인도 방주 안에서 이동했어요. 나의 것이 없어요. 그리고 방주의 주인공도 자기가 아니고 정결한 짐승이 방주의 주인공이었고. 그래서 나중에 방주에서 나와서 제사 드리게 되는 겁니다.
할례 언약을 행한다는 것은 이제는 율법이 모세를 주장한다 또는 지배한다, 통치한다. 모세는 율법에 예속되었다 그런 관점에서 들어가는 겁니다. 모세가 들어가서 다수가 나왔죠. 모세를 따라 나온 사람이 남성만 육십만 명이 따라 나왔어요. 그럼 이것은 모세가 아니고 모세에게 행해졌던 율법을 따라 나온 사람, 유월절 어린 양의 피를 따라 나온 사람이 육십만 명이에요.
이제는 모세 죽어도 괜찮아요. 이제 여호수아가 있으니까. 여호수아 죽어도 괜찮아요. 그다음 사사들이 있으니까. 그러니까 율법, 언약의 변천과정에서 인물들을 자꾸 바꾸면서도 언약은 새로운 양상을 띄는 거예요, 언약이. 인물이 어떻게 바뀌든 간에. 지금은 이 율법의 완성이 뭡니까? 십자가죠. 십자가로 완료가 되었기 때문에 십자가에 의해서 믿는 사람이 어떤 형편에 있든 어떤 상태에 있든 항상 드러나는 것은 십자가만 드러나기 때문에 하나님의 율법적 작동, 기능을 다할 수가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제 율법을 가지고 들어갑니다. 들어가니까 여기 애굽의 바로가 마주 대하며 나옵니다. 그런데 할례를 행해서 공격했던 하나님의 언약 쪽이 결국 노리는 것은 할례 언약이기 때문에 할례 언약은 혈육과 관련되어 있잖아요. 그래서 유월절 피를 받지 않을 때 당하는 징벌은 뭘까요? ①둘째 아들 죽는다, ②첫 딸 죽는다, ③집에 개 죽는다, ④맏이가 죽는다. 몇 번입니까?
맏아들 죽어요, 맏아들. 맏아들이 죽는 거예요. 그러니까 애굽의 맏아들이 죽었다는 말은 이스라엘 그들도 역시 맏아들이 있다, 없다? 맏아들은 새로운 맏아들의 자리를 하나님께 빈 자리로 내어줘야 되는 거예요. 그래야 새로운 족보의 노선이 새롭게 갈라지는 거예요.
자, 그렇다면 할례 언약을 좀 더 들어가 봅시다. 할례 언약의 원형은 아브라함 언약입니다. 아브라함 언약은 하나님의 하늘의 차원과 땅의 차원을 최초로 연결시킨 사람이에요. 그 전에 창세기 11장에서 인간들 쪽에서는 자기 이름을 하늘에 닿고자 했지만 하나님께서 인간 쪽에서 올라오는 것은 차단해버리고 하늘 쪽에서 일방적으로 선택에 의해서 아브라함을 선택해버렸습니다.
그런데 이 아브라함이 선택될 때에 그 준비과정은 할례 언약이 되어 있어요. 할례 언약이 되어 있고 할례 언약 다음에 주어지는 것이 할례 언약의 완성된 인물로써 아브라함 당시에는 이삭이 돼요. 이삭은 육에서 태어난 자식이 아니고 약속으로 태어난 자식이라고 로마서 4장에 나옵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이 자식을 원할 때 애굽 사람부터 모든 인간은 나의 DNA를 받은 나를 닮은 자식이 나의 자식이라고 그렇게 알고 있어요. 그런데 그건 하나님도 알고 있어요. 우리들이 어떤 자를 내 자식이라고 인식하고 있는지 하나님도 알고 있습니다. 알고 있으면서 여기서 하나님께서 변칙을 가해버려요. 뭐냐 하면 네가 네 아들을 내게 바쳐라.
할례 언약을 행사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받는 맏이는 네 혈육에서 나온 이스마엘이 아니에요. 할례 언약과 동치(同値), 동치라는 어려운 말을 쓸 수밖에 없는데요, 할례 언약에서 할례를 떼어버리고 언약, 언약을 구현하는 인물이 등장해요. 이게 바로 이삭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에게 그 당시의 구세주가 누구냐 하면 이삭이에요. 없는 데서 있게 하고 이삭을 죽은 데서 살게 했으니까요.
할례 언약을 입구로 해서 어디로 들어가느냐? 언약 깊숙이 들어가는 거예요. 언약의 최종 자리까지 들어가는 거예요. 왜냐하면 하나님한테는 시간이 없기 때문에. 시간이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시간이라는 것은 이 땅에서 인간이 공간적으로 좌나 우로 이동하면서 시간이 그다음부터는 지연되기 시작하는 겁니다. 여러분들이 아무 생각 없을 때는 시간 가는 줄 안 가는 줄도 몰라요. 그러나 어떤 계획을 잡고 목표를 잡게 되면 그다음부터는 시간이 아주 초조하게 되는 겁니다, 어떤 목표와 계획이 있을 때.
이삭은 난 지 8일 만에 할례하고요. 그전에 이스마엘은 이미 할례를 했고 아브라함도 할례를 행했어요. 할례를 행하고 난 뒤에 이삭 받은 것처럼 여호수아 5장에서는 단체로 할례를 받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이 등장했습니다. 할례란 개인적인 사항이 아니고 이것은 단체적이다. 하나의 할례 언약에 온 사람이 공통적으로 전부다 할례를 행했던 겁니다. 하나의 단체에요.
그래서 할례라 하는 것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만 해당되지, 적들한테는 해당 됩니까, 안 됩니까? 적들에게는 할례가 해당되지 않아요. 그런데 적들에게 이것을 요구했던 사람이 있습니다. 레위지파, 시므온 지파가 야곱의 제일 막내딸 디나가 강간당하고 난 뒤에 할례라는 언약적 의미, 언약이 들어와야 될 빈 자리에 이것을 빈 자리로 생각하지 않고 남을 괴롭히고… 그 당시에 의료가 발달되지 못해서 3-4일 동안 꼼짝도 못하고 아파서 고통 가운데 있어야 된단 말이죠, 할례 언약이.
창세기 34장 한번 봅시다. 창세기 34장 25절, “제 삼일에 미처 그들이 고통할 때에 야곱의 두 아들 디나의 오라비 시므온과 레위가 각기 칼을 가지고 가서 부지중에 성을 엄습하여 그 모든 남자를 죽이고” 이것은 인간의 육의 고통을 주기 위해 할례라는 것을 이용해서 이스라엘도 할례 행하는데 너희도 할례 행해야 우리 혼인이 수입된다고 해버리면 적들에게는 용납이 안 되는 거예요.
그래서 나중에 야곱이 축복할 때 레위와 시므온에게는 어떤 벌을 주느냐 하면, 이 벌 자체가 축복인데, “너희에게는 땅이 없다.” 이렇게 해버려요. “너희는 하나님의 언약 취지를 놓쳤으니까 약속의 땅에서 살 가치 없어.” 라고 이렇게 제껴 버립니다. “너희는 남의 지파에 얻어먹고 살아라.”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것은 그냥 저주받은 것이 아니고 언약이라는 것이 유지되기 위해서 언약을 위반했을 때 그다음 시기의 언약은 위반사실까지 포함시켜서 언약 제대로의 본질을 위반이라는 것을 통해서 제대로 보일 수 있는 증거로서 시므온과 레위지파의 성깔을 사용하신 거예요, 성깔을.
그러니까 레위지파가 저주받았다고 할 수 없어요. 그들은 복 받았는데 다만 까불면 맞는다. 까불면 이렇게 맞는구나. 이 언약을 내 편익 위주로, 내가 너한테 이기기 위해서 사용할 수는 없는 용도라 하는 것을 알 수 있지요.
이것이 오늘날 교회나 오늘날 성도끼리 상당히 주의할 겁니다. “넌 십자가 복음 모르나? 난 아는데.” 하면서 십자가 가지고 자꾸 콩콩콩 뾰족한 걸로 찍으려고 하지 말고. 십자가는 누굴 이기기 위함이 아니고 누구한테 승리하기 위함이 아니에요. 하나님의 십자가를 그런 식으로 자기 자존심 챙기는 데에 이용하면 안 됩니다.
계속 말씀 이어나가겠습니다. 할례 언약은 제거가 되어서 빈 자리가 되고 여기에 하나님의 언약이 실리는데 할례 언약이 실릴 때 여기 여호수아에서는 언약궤가 실리는 겁니다, 언약궤가. 광야에서는 언약궤가 만들어지기 전이니까 할례를 행하지 못했어요, 형편이 안 되어서.
그래서 여기 여호수아 다시 5장 돌아와서 그들로 하여금 할례를 행했다 이 말이죠. 그래서 여호수아 5장 9절에 보면 지명이 나옵니다, 지명. ‘길갈’이라고 나오죠. 길갈의 뜻이 뭐냐 하면 ‘굴러갔다’. 그러니까 지도에서의 한 지점이 대구라면 여기는 김천쯤 되겠죠. “엄마, 김천의 뜻이 뭐야? 엄마 저 김천 장수 이름이 뭐야?” “‘굴러갔다’야.” “굴러갔다? 왜 ‘굴러갔다’야?”
그다음부터는 “옛날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방민족은 할례가 없고 이스라엘은 할례가 있어야 되는데 그들이 광야생활하면서 이방민족과 똑같이 아무런 차이 남이 없을 때 하나님 보시기에 ‘이것은 나의 백성의 수치다’ 해서 할례를 행함으로 말미암아 떨어져 나갈 것이 진작에 떨어져 나갔었어야 된다는 그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집단적으로 할례를 행했고 그 떨어져 나간 인간의 생식기 끝이 한두 명이 아니니까 또르륵 또르륵 해서 전부다 다 떨어져 나간 거야.”
전부다 굴러가게 했다는 거예요. 다 떨어져 나갔다는 거예요. 그래서 드디어 빈 자리가 있는 존재. 하나님의 언약을 담을 수 있는 그릇이 된 존재. 이제는 하나님의 운반체가 된, 마음 준비가 되어 있는 존재. 그렇게 해서 이제 전쟁에 나가게 되는 거예요.
아우슈비츠 수용소가 원래 폴란드 지역인데 나중에 독일에 편입되었어요. 그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독일 사람들이 유대인들을 색출할 때 바지 내려서 할례를 행했는지 그걸 봤습니다. 할례를 행했으면 전부다 유대인이라고 하는 거죠. 유대인도 아닌데 할례 행한 사람은 얼마나 억울했겠습니까?
여기 5장 9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오늘날 애굽의 수치를 너희에게서 굴러가게 하였다 하셨으므로” 이것이 언약의 변천과정에서 언약과 결부가 될 때 언약 백성이 되고 이것은 장차 한 인물, 하나님의 왕에 예속된 백성이 되는 그 방법을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겁니다.
할례 언약이 이렇게 굴러갔다면 그 빈 자리에 언약궤가 들어온다고 이야기했는데 그럼 아브라함 당시에는 바로 멜기세덱의 족보가 들어오죠, 멜기세덱의 족보. 이 땅에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다는 말은 멜기세덱에 흡수, 통합이 되게 되면 이 땅의 아비나 어미나 가족이나 그건 아주 잊어버려라. 너의 너 됨은 네 부모의 DNA나 유전인자 받아서 된 것이 아니라 그것 말고 따로이 하나님의 아들에 의해서 네가 하나님 백성 됨이 이 멜기세덱 족보를 통해서 언급됩니다. 멜기세덱 족보가 결합된 장소가 바로 이 할례 언약이에요.
그다음에 여호수아 5장을 보게 되면 만나를 그다음부터 얻지 못했다 했죠. 지난 시간에 만나 이야기했습니다. 만나가 그쳤다는 말은 광야시절이 끝났다는 말이 아니고 만나 없는 상태에서 광야시절을 그대로 지속할 수 있느냐를 묻는 거예요.
11절에, “유월절 이튿날에 그 땅의 소산물을 먹되” 유월절은 뭐 징글징글해요. 사라지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이 있는 한 할례가 있는 한 유월절은 반복됩니다. 새로운 제사 언약, 피를 내는 제사 언약에 의해서 계속 유지되겠죠.
할례 언약은 인간의 몸에서 피가 나지만 레위기의 제사는 제물에서 계속 피가 나오는 거예요. 피 자체가 일종의 방주가 되니까요. 피로 말미암아 진멸당해야 될 쪽과 거기서 이상하게 건짐 받아야 될, 어린 양의 세상 피가 묻은 자만 건져내는 하나님의 언약 원칙을 계속해서 이어나가고 있습니다.
결국 이 이야기는 인간을 구원하는 것이 아니고 십자가 사건을 건진다는 것입니다. 죽었다가 다시 사신 그 사건을 본질로 한 새로운 종족의 탄생, 동족이 발생되도록 이렇게 한 거예요. 그래서 12절에 “그 땅 소산을 먹은 다음 날에 만나가 그쳤으니 이스라엘 사람들이 다시는 만나를 얻지 못하였고” 이제 만나 없는 광야 생활 때의 그 마음자세를 유지해야 돼요.
그리고 난 뒤에 드디어 여리고 성 가까이 갔을 때에 한 사람, 군대장관이 왔죠. 군대장관이니까 하늘나라의 천사장, 천사의 군대, 천사장입니다. 그럼 군대 종류가 몇 종류에요? 지상에서는 이스라엘, 천상에서는 군대장관 휘하에 인솔되는 천사들의 부대, 마하나임이죠.
어느 것이 주력부대입니까? 땅이에요, 아니면 하늘이에요? 하늘이죠. 그 증거가 15절에, “신을 벗으라” 이 쫄병아, 신발 벗어! 너는 거룩하지도 않잖아. 그러니까 여호수아가 거룩할 것 같으면 신발 안 벗어도 되는데 거룩하지 않으니까 신발을 벗어야 돼요. 거룩은 종속 관계이기 때문에 거룩에 종속되어야 거룩이지, 개인적으로 거룩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피가 이것을 의미해요. 빈 자리에 거룩이 들어올 때 거룩이지, 내가 빈 자리 가졌다고 거룩이 되는 것은 아니거든요. ‘나 빈 자리 있다. 할례 행했다.’ 거룩 아니에요. 율법에 할례 언약의 완성이 들어와야 이것이 거룩이 되니까요.
신발 벗어라. 그러면 신발을 벗었으니까 그 신발은 누가 가져가는 거죠? 군대장관이 가져가죠. 신발은 어떤 용도입니까? 가라 하면 가고 오라 하면 오나이다. 까라면 까겠습니다. 우리가 신발을 신는 것이 아니고 신발에 우리가 얹혀사는 식이라 이 말이에요. 그러니까 거룩이 이동하는 경로에 따라서 너는 따라와. 따라와야 돼요.
그럼 그 뒤의 전쟁은 어떻게 되겠어요? 그 뒤의 전쟁은 언약을 앞장세우는 율법을 앞장세우는 거룩을 앞장세우는 전쟁과 할례도 없고 율법도 없고 아무것도 없는 것들과의 맞짱, 그것이 어떻게 전개되는가? 10분 쉬고 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