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련회자료

4강 백신

아빠와 함께 2022. 1. 15. 09:55

2022 겨울 수련회 여호수아 강해 제4강 : 백신 - 이 근호 목사

시작해 봅시다. 땅에 대해서 성경 초반부터 이해하려면 노아 홍수부터 이야기가 제대로 되어야 되거든요. 노아 홍수는 땅 주인이 와서 다 나가라고 하는 것과 똑같은 거예요. 이것은 내 땅이니까 다 나가라, 하는 거예요. “이 땅을 더럽히는 것을 내가 눈 뜨고 못 보겠다. 다 나가라.” 말이 ‘다 나가라’ 지 사실은 홍수로 인하여 어떻게 되었습니까? 홍수로 인하여 다 죽었잖아요. 다 죽었다. 땅, 인간이 살기 위해서 에덴동산에서 나왔는데 하나님께서 그 땅에 관여를 하니까 홍수로 말미암아 다 죽었지요. 다 죽었습니다.

그러면 한번 정리해 봅시다. 땅은 살 수 없는 곳. 그러면 인간은 어디서 살아야 합니까? 땅에서 홍수 나서 다 죽었는데 인간은 어디서 살아야 합니까? 주의 뜻은 뭐냐 하면, 살지 마. 이게 살지 마, 라는 거예요. 그게 어디에 나오느냐 하면, 여호수아 1장에 나옵니다.

이제 여호수아 1장 3절, 이제 ‘여호수아’ 들어갑니다. 네 번째 시간에. 1장 3절에 “내가 모세에게 말한 바와 같이 무릇 너희 발바닥으로 밟는 곳을 내가 다 너희에게 주었노니” 이렇게 되어 있어요. 그 땅의 주인들이 이미 있잖아요. 있는데 그 땅을 너희한테 주겠다는 거예요.

이 말은 뭐냐 하면, 율법을 모르는 자, 또는 율법을 안 지키는 자들은 살지 말아야 된다는 거예요. 이게 원래 땅이 갖고 있는 본연의 기능이라는 겁니다. 율법을 아는 자로 하여금 율법을 모르는 자를 다 추방하고, 말이 추방이지 신명기에 보면 이것은 다 몰살이에요, 몰살, 또는 학살이에요. 어린애로부터 어른이고 여자고 남자고 다 죽여버려야 돼요. 심지어 가축까지도.

이걸 성경에서는 진멸한다. 다 몰살하는 거예요, 몰살. 집에 쥐가 귀엽다고 세 마리 잡고 한 마리 살려주고 그런 것 있습니까? 없지요. 그냥 진멸해 버리지요. “이 집은 쥐 네 집 아니야. 내가 사는 집이야. 따라서 쥐는 좀 죽어줘.” 하고 죽여버리는 거예요.

그래서 이 땅은 뭐냐 하면, 율법이 율법대로 실현되는 곳이기 때문에 율법을 모르는 너희들은 좀 죽어달라는 거예요. 죽일 때 전사가, 군사가 있어야 될 것 아닙니까? 그 군사가 누구냐 하면, 이스라엘이에요. 1장 5절에 “너의 평생에 너를 능히 당할 자 없으리니” 이스라엘이 싸움을 원하지 않더라도 하나님이 싸움을 부추깁니다. 의도적으로 싸움을 부추겨요. 부추겨서 무조건 다 죽으라고 하는 겁니다.

그러면 신약시대에 이 전쟁이 계속 유효하고 가능하냐? 가능하지요. 신약시대에는 어떻게 하느냐? “오지 마! 천국 오지 마.” 이게 신약이에요. 살지 마, 가 아니라 “살아. 네 땅에서, 불로 멸망 당할 땅에서 그냥 살아. 그러나 천국에는 오지 마.” 또는 다른 말로 하면 “저리 가!” 이 전쟁을 하라고 합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을 모르기 때문에 가라, 하는 거예요.

그러면 광야에서 1번과 2번 중 어느 것이 맞는가? 신명기 8장에서 보면 1번, 만나를 주었다. 2번, 말씀을 주었다. 어느 것이 정답입니까? 신명기 8장에 보면 만나를 줬는데 그 만나를 이렇게 이해해야 된다는 말이에요. 말씀을 준 것으로 이해해야 된다는 거예요.

신명기 8장 3절에, 만나를 줘놓고는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너로 알게하려 하심이니라” 신명기 8장 3절에서 말씀으로 산다, 그렇게 되어 있어요. ‘말씀으로 살지 않는 자들은 떠나가고 말씀으로 사는 자들이 그 땅을 차지해라’ 하나님의 일관된 뜻입니다.

그러면 여호수아 1장 7절에 “오직 너는 마음을 강하게 하고 극히 담대히 하여 나의 종 모세가 네게 명한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하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니” 율법을 지키는 방법, 이번 시간에는 율법을 지키는 방법, 이것부터 시작합니다. 율법을 지키는 방법은 간단해요. 내가 먼저 율법 앞에 죽임을 당하면 됩니다. 참 쉽죠, 잉.

율법을 지키는 방법은, 내가 먼저 율법 앞에 죽게 되면 누가 승리합니까? 율법은 승리하고 나는 그 율법 앞에서 뭐가 돼요? 패배하지요. 그러면 내가 죽었기 때문에 죽은 것이 움직인다는 말은 거북이처럼 그 등 껍데기에 뭐가 움직인다는 말입니까? 율법이 움직이잖아요. 이게 바로 탱크 아닙니까, 탱크.

말씀 앞에서 ‘나 못 지켜’ 십계명 그거 저 벽에 걸린 주기도문 뒤에 십계명이 걸려 있거든요. 한번 들춰 보세요. 저기에 십계명이 있거든요. 십계명을 사서 저렇게 벽에 걸어놓은 것은, 어떤 주일학교 학생도 못 지킨다는 것을 깨닫게 하기 위함입니다. 목사부터 해서 당회로부터 어린아이까지 아무도 못 지켜요. 이거 얼마나 즐거운 일입니까?

율법을 지키는 이유는, 내가 먼저 율법 앞에 죽는 거예요. 이걸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이걸 가지고 ‘백신’(Vaccine)이라 하는 겁니다. 백신은 죽은 코로나 균을 집어넣어서 코로나가 들어왔을 때 ‘오, 내 친구 여기 있네’ 해서 다시 안 들어오게 하는 방법, 그게 백신입니다.

백신, 하면 이야기할 게 많은데 자칫하면 이게 음모론까지 들어가기 때문에 곤란해요. 어쨌든 독감 백신이든 무슨 백신이든 간에 율법에 의해서 먼저 죽은 나를 내 안에 장착해 버려요. 율법에 의해서 먼저 죽은 나를 장착해 버리면 내가 율법 지켰다고 할 수 없게 만드는 그 율법의 위력으로 우리는 세상에 나가게 되는 겁니다.

율법의 완성이 뭐냐 하면, 바로 십자가잖아요. 예수님의 다 이루었다, 그 십자가, 그 십자가에 죽게 되면 이제는 나는 십자가를 운반하는 탱크부대의 탱크 안에 들어있는 운전병이지요. 바깥에는 십자가가 여기에 들어가고요. 마태복음 19장에서 부자 청년이 율법을, 십계명을 어릴 때부터 지켰다는 거예요. 이렇게 지키는 게 아니에요.

어릴 때부터 못 지켰다고 한다면 그 사람은 영생을 얻었어요. “너 어떻게 살았느냐?” “저는 율법을 못 지켰어요” “이거 딱 내 과네” 이래가지고. 마치 12년 동안 혈루병 걸린 여자나 귀신들린 여자, 그런 사람 또는 이방인, 문둥병자, 이런 사람들 율법 지켰습니까? 자진해서 우리는 문둥병자 되어도 마땅하다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자진해서.

그러니까 율법을 못 지킨 사람은 뭐만 쳐다보겠습니까? 율법만 쳐다보는 거예요. 좌로나 우로나 돌리지 않고 율법만 보는 거예요. 율법에서 날마다 우리가 죽기 때문에. 실효성 있는 율법, 자, 실효성 있는 율법 이게 실제적입니까, 아니면 홍콩을 지배하는 중국 공산당이나 북한을 다스리는 김 정은 체제가 실효성이 있습니까? 어느 쪽입니까? 실효성 있는 율법이 중요하지요.

그러면 만약에 북한에 성도가 있다면 북한의 성도는 김 정은 그 덩치를 무서워하겠어요, 안 무서워 하겠어요? 김 정은 보다, 후두암 걸린 그 김정은 보다 뭘 더 무서워하겠습니까? 십자가 지신 주님을 더 무서워하면서 거기서 행복하게 살 거예요. 자본주의 찾아서 내려오지 말고, 내려와서 냉면집 하지 말고 거기서 그냥 살면 되잖아요. 어디든지 주 예수 계신 곳이 하늘나라잖아요.

북한에서 내려온 사람에게는 너무 심하게 이야기하는 것처럼 느껴지는데 무슨 신앙의 자유를 찾아옵니까? 한국에 무슨 신앙의 자유가 있어요? 십자가 있는 곳이 다 자유인데 무슨 신앙의 자유가 있습니까? 이렇게 이야기하면 또 너는 북한에서 안 살아봐서 그렇다고……. 여자가 결혼을 하든 남자가 장가를 가든 시집 탓 친정 탓 탓하지 마세요. 모든 것은 본인이 마음이 안 낮아서 그런 자기 탓입니다.

환경이 우리의 행복을 보장해주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 자신이 주제넘게 자기 자신을 너무 부풀려서 해석하게 부풀려서 이해했기 때문에 환경하고 안 맞는 거예요. 여호수아 1장 7절에서 “나의 종 모세가 네게 명한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렇다면 여기서 나온 것은 백신 맞고 이제 돌격합니다.

돌격하게 되면 율법을 지킨 분은 이스라엘이다, 하나님이다? 몇 번입니까? 점점 문제가 쉬워지지요. 율법 지킨 분은 누구입니까?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율법으로 다스리기 때문에 율법 지킨 분이 누구입니까? 하나님이 지켰기 때문에 이방 민족이, 하나님의 율법이 있는 곳에 이방 민족이 이스라엘을 이기지 못하는 거예요.

그다음에 8절에 보면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가운데 기록한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라” 이 길이 지금 누가 가는 길입니까? 이스라엘이 가는 길이에요, 이스라엘을 엎어 세우는 주님이 가는 길입니까? 주님의 언약궤가 가는 길이에요. 언약궤가. 하나님의 율법이 완성의 차원으로 가는 거예요. 왜? 율법에는 하나님의 자체적인 시공간이 따로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인간들의 시공간 말고 주님의 시공간으로 다스리는 세계가 점점 더 가까이 오고 있는 겁니다. 그쪽으로 진격하는 거예요. 율법, 언약 안에 율법이 들어있습니다. 율법을 언약이라 해도 되는데요, 언약이 이동한다. 언약이 이동한다는 말이 좀 이상하지만 언약이 이동할 때는 이스라엘의 진행경로를 통해서 언약이 이동하게 되면 여기서 뭐가 생기느냐 하면, 아까 두 번째 시간에 이야기한 언약의 적이 여기서 발생합니다.

그러니까 적이 있고 적을 공격한다. 이게 아니고요, 언약이 진행하게 되면 없던 적이 발생한다. 그렇게 되는 겁니다. 이게 하나님 차원입니다. 없던 적이 발생하기 때문에 여호수아 2장을 봅시다. 아, 참 어려운데요. 여호수아 2장에 1절에 보면 “눈의 아들 여호수아가 싯딤에서 두 사람을 정탐으로 가만히 보내”지요. 어려운 내용을 할 때는 미리 결론을 내는 방법을 제가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 여리고 성의 기생 라합이 무슨 뜻이냐, 하는 거예요. 크게 쓰겠습니다. “기생 라합은 구원자의 원래 모델이다. 인간이 구원받으려면 기생 라합같은 그런 절차가 필요하다.” 여리고 성이 여기 있거든요. 여리고 성에 기생라합이 갇혀 있습니다. 여리고 성은 기생라합의 자기 집이니까 갇혀 있다기 보다는 그냥 있지요.

그런데 언약이 시행되게 되면 적을 만들지요. 언약으로 완전히 포위하다 보니까 이쪽은 갇혀 있는 게 돼요. 그냥 살다가 그다음에 뭐로 바뀌었습니까? 갇혀 산다, 가 돼요. 갇혀 산다. 갇혀 산다, 가 되면 갇혀 있으니까 여기서 뭐가 발생 되느냐 하면, 구출, 구원이 어떻게 가능할 것인가가 발생 되는 거예요.

만약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기 안 쳐들어 왔으면 뭐가 성립이 안 됩니까? 구출이나 구원이 있을 리가 없지요. 구출, 구원은 옆에 이 언약의 누가 왔을 때, 이스라엘이 왔을 때 가능한 거예요. 막대자석이 그냥 있어 버리면 이게 N극인지 S극인지 잘 몰라요. 그런데 옆에 N극이 왔을 때 여기에 반응해서 당기면 그게 S극이고 N극이 왔을 때 여기에 반발하면 그것은 N극이 되거든요.

이것은 이방 민족 아닙니까? 이방 민족인데 그냥 ‘민족’이라 합시다. 이방 민족이라 하게 되면 우리는 이방 민족 아니라고 우겨대서 그냥 민족이라 합시다. 그냥 민족이에요. 혈육대로 사는 거예요. 그냥 평범하게 보~통 사람으로 사는 거예요. 여기에 뭐가 왔습니까? 복음이, 율법이 들이닥친 거예요. 졸지에 이들의 상태는 어떤 상태다? ‘우리가 갇혀 있었어?’ 이렇게 돼요. ‘우리가 갇혀 있었어?’

갇혀 있었는데 지금 여호수아 2장에 보게 되면 이쪽에 어떤 소문이 돌았냐 하면, 우리한테 쳐들어온 이것이 뭘 건너왔느냐 하면, 홍해를 건너오고 그다음에 요단강을 건너왔다는 거예요. 홍해를 건너오고 요단강을 건너왔다는 겁니다. 그리고 오면서 뭐도 정복했느냐 하면, 여기에 지도에 나옵니다. 지도 108페이지 나오는 지도에 보면 시커먼 부분이 보이지요. 위쪽에 표시가 있고 옥에서 빼앗은 땅, 시혼에서 빼앗은 땅, 이런 식으로 있습니다.(첨부파일)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와서 주변 왕국의 땅을 빼앗았다는 그 소문을 듣고 난 뒤에 여리고 성 사람들이 간담이 서늘해서 공포에 휩싸인 거예요. 홍해도 건너왔고, 그리고 오면서 민족들을 쳐부수고, 도대체 저지할 어떤 세력이 없어요. 모압도 소용없고. 그 소문이 다 들려온 겁니다. 요단강도 건너왔고 그것도 이스라엘이 요단강을 건너왔을 때 그냥 건너온 것이 아니고 요단강에 물이 많을 때, 홍해에 물이 많을 때 건너왔잖아요.

이것은 뭐냐 하면, 이스라엘은 죽음조차도 이겨낼 수 없는 그러한 민족이라는 것이 소문이 확 퍼졌습니다. 그들이 여기 쳐들어왔다는 말이지요. 그들이 와서는 무슨 시위를 하듯이 하루에 한 바퀴씩 계속 뺑뺑이 도는 거예요. 어지럼증 만드는 작전인지 뺑뺑이 도는 겁니다. 돌고 또 나팔까지 붑니다. 그리고 그들의 앞을 보니까 언약궤를 맨 제사장들이 맨 앞에서 돌아요.

그러면 언약궤를 맨 제사장은 요단강 건널 때 그 언약궤 맨 제사장들이었습니다. 홍해는 언약궤가 없었지만 요단강 건널 때 무엇을 중심으로 했습니까? 언약궤를 앞장세운 거예요. 언약궤 앞에는 아무도 언약궤 가는 진행 방향을 저지할 자연도, 인간도 없다는 뜻이에요.

그러면 언약궤 진행하는 방향은 뭐냐 하면, 하나님이 가는 방향을 피조물이 저지할 수가 없습니다. 바꿀 수가 없어요. 따라서 여리고 성에 왔을 때에 그들은 공포에 잠겨 있었습니다. 그런데 기생라합에게 여기에 누가 왔느냐 하면, 두 정탐꾼이 왔잖아요. 정탐꾼이 왔을 때 기생라합한테는 이게 뭐냐 하면, 자기를 구원할 구원자예요.

그러면 두 정탐꾼이 구원자가 되었을 때에 여기에 원리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구원자로 시작했지만 구원 대상이 되셨고 구원대상이 되었기 때문에 구원자가 된 겁니다. (구원자 – 구원대상 – 구원자)

예수님께서는 어른으로 온 게 아니고 아기 예수로 오셔 가지고 보호를 받아야 되었어요. 구원대상이 되었기 때문에. 천사가 와서 보호하고 그랬습니다. 구원대상이 되었기 때문에 구원자가 됩니다. 구원대상이 되지 아니하면 구원자, 구원할 수 있는 어떠한 소스가 마련되지 않아요. 자신이 친히 구원대상이 되는 것을 경유 했기 때문에 구원자는 우리의 어떤 형편도 개의치 않고 구원할 수 있는 구원자가 정립이 되어 있습니다.

이게 히브리서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주님한테 “주님, 이럴 경우에는 구원 못 하지요.”라는 말을 주님한테는 함부로 하지 말라는 겁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이 겪을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바닥부터 훑어 지나갔기 때문에 어떤 경우라도 우리 조건이 난감해서 구원 못 받는 그런 경우는 예수님한테는 있을 수가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기생라합에게 두 정탐꾼이 왔잖아요. 기생라합은 이쪽에 두 정탐꾼이 이스라엘의 파편 또는 일원이기 때문에 이스라엘로 받아들이고 받은 거예요. 받았는데 두 정탐꾼이 누구한테 신세를 지느냐 하면, 기생라합한테 신세를 지게 됩니다. 이 여리고 성 안에서.

그러면 여기서 뭐가 성립되느냐? 절차가 만들어져요, 절차가. 정탐꾼이 이 여리고 성안에 갇혀 있는 형국이잖아요. 여리고 성이 이렇게 있습니다. 빨간색으로 여리고 성을 그릴게요. 이 여리고 성 안에 두 정탐꾼이 들어왔습니다. 그러면 이 정탐꾼은 지금 어디에 갇혀 있습니까? 여리고 성 안에 갇혀 있는 거예요. 여리고 성을 포위하고 있는 이스라엘의 일원이 여리고 성에 가다 보니까 두 정탐꾼이 여리고 성안에 갇혀 있는 꼴이에요.

그러면 지금 기생라합을 구원하기 이전에 뭐부터 구원되어야 돼요? 정탐꾼부터 어떤 식으로 구원이 되는가가 여기서 정립이 되어야 된다는 말이지요. 두 정탐꾼이 어떤 식으로 구원되는가? 여기 도와주는 기생라합이 있었다는 겁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여리고 성 밖에, 이 이스라엘에만 있을까요, 아니면 기생라합쪽 여기에도 하나님께서 작용을 했을까요? 하나님께서 이기생라합쪽에 작용을 했겠지요

그러면 기생라합이 두 정탐꾼을 살려주는 그 절차, 그 절차가 뭐냐 하면, 구원절차가 되는 거예요. 일단 숨겨주고 창에서 두 정탐꾼이 내려갈 때 여기서 지금 제가 매직으로 붉게 칠한 것처럼 붉은 뭐가 있습니까? “자, 조심해서 내려가세요” 한 발자국, 두 발자국, 세 발자국, 네 발자국……, 하면서 여기서 끈 매고 내려갔잖아요. 창에서 줄을 타고 내려왔지요. 붉은 줄로 내려왔다는 말이지요.

내려오고 난 뒤에 이 절차, 이게 바로 기생라합이 구원자고, 구원받는 대상이 정탐꾼이 되었을 때 요 절차로 창에서 줄로 매달려서 내려왔다는 말이지요. 내려왔으니까 이 작업에 있어서 두 정탐꾼은 누구한테 도움을 받느냐 하면, 하나님께 도움받는 게 돼요. 기생라합을 통해서 하나님께 도움 받은 게 됩니다.

그러면 구원의 절차는 바로 그들이 나가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네가 정탐꾼을 내려가게 한 그 창에 잘 보이도록, 모든 사람이 침략할 때 정신이 없으니까 눈에 확 띄도록 붉은 줄로 표시를 해놓게 되면 너를 내가 와서 구원할 게, 가 돼요.

자, 여기가 여리고 성입니다. 여리고 성인데 바깥에 이스라엘이 포위했습니다. 포위했다는 뜻은 여기에 뭐가 있습니까? 하나님의 언약궤가 있지요. 이 언약궤는 유명했어요. 요단강 건너고 전쟁할 때 승리한 언약궤가 돌고 있습니다. 언약궤의 한 요소가 여기에 들어왔습니다. 여리고 성에 들어왔어요.

그러면 여리고 성은 기생라합이 없다고 치게 되면 정탐꾼들은 빠져나갈 수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못 빠져 나가지요. 그러면 여리고 성, 이것은 그야말로 실체, 실효적인 권세를 갖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기생라합이 와서 실효적인 권세에 대해서 이걸 차이 나게 정탐꾼을 숨겨줬습니다. 숨겨줘서 여기서 출구를 만든 거예요. 그 출구가 기생라합이 구원될 수 있는 유일한 출구가 되는 거예요. 유일한 출구.

전에 설교할 때 그런 이야기 했습니다. 이 세상에 예수님이 오실 때 이 세상은 예수님한테 포위되어서 불로 심판받아야 된다. 출구가 없는 거예요. 출구가 없는데 예수님께서 오셔서 무사히 탈출이 되는 이 구멍, 요 구멍이 유일하게 뭐가 되느냐 하면, 바로 천국 가는 좁은 문이 되는 거예요. <좁은 문> 아시지요? 출판사 이름. 찬스를 놓치지 않습니다.

그야말로 좁은 문이에요. 좁은 문으로 빠져나간 거예요. 주님이 오셨다가 빠져나온 그 외에는 다른 길은 없습니다. 다른 이름으로 구원받을 이름을 준 적이 없어요. 오직 오직 그 길밖에 없습니다. 그러니까 구원이라는 것은 누가 와야 되고, 누가 빠져나가야 돼요. 누가 와서 빠져나가야 됩니다.

그런데 기생 라합의 경우에는 왜 정탐꾼을 도와줬을까요? 왜 정탐꾼을 도와줬느냐? 그게 여호수아 2장에 보면 나옵니다. 10, 11절에 “이는 너희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여호와께서 너희 앞에서 홍해 물을 마르게 하신 일과 너희가 요단 저편에 있는 아모리 사람의 두 왕 시혼과 옥에게 행한 일……”

아까 지도에서 옥에게서 빼앗은 땅, 시혼에게서 빼앗은 땅, 봤지요? “곧 그들을 전멸시킨 일을 우리가 들었음이라 우리가 듣자 곧 마음이 녹았고 너희의 연고로 사람이 정신을 잃었나니 너희 하나님 여호와는 상천 하지에 하나님이시니라”

자, 이렇게 이야기했는데 이게 기생라합만 이렇게 생각했을까요, 아니면 여리고 성 사람이 다 그렇게 이야기했을까요? 여리고 성 사람들이 다 그런 생각을 갖고 있었겠지요. 그 소문을 다 들었으니까. 그런데 왜 기생라합은 정탐꾼을 살려줬느냐, 그 말이지요. 이참에 정탐꾼을 우리의 적이라고 간주해서 죽일 수도 있는 문제인데 왜 살려줬느냐는 겁니다.

그것은 아까 언급했습니다만, 이 정탐꾼과 여리고 성 바깥에 있는 이스라엘과 동일한 하나님이 관여한다고 믿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 사람을 도와주는 것은 뭐냐 하면, 홍해를 건너온 그 하나님을 내가 도울 수 있는 기회를 잡은 거라고 여긴 거예요. 하나님과의 접촉, 여호와 하나님과의 접촉기회를 기생라합은 놓치지 않았던 겁니다.

바깥의 이스라엘이라는 그 존재 자체에 대해서 이미 하나님께서 이쪽으로 온다는 그 사실에 있어서 자기의 것을 더 이상 유지할 필요가 없다고 여기면서 그 하나님과 관계되어있는 정탐꾼을 살려준 겁니다. 이게 무슨 정신이냐 하면, 바로 율법 정신입니다.

율법을 지키는 정신은 현재 자기가 속해 있는 이 위치와 그리고 여호와의 위치가 뭐가 되느냐 하면, 이것은 분명하게 차이 난다는 것을 인정한 겁니다. 그렇다면 이 정탐꾼을 숨겨줄 때 야고보 2장에 나오거든요, 기생라합은 무엇과 실효적으로 접해야 되느냐? 이 정탐꾼을 숨겨주는 그 순간에 누가 들이닥칩니까? 경찰이 들이닥쳐요. 경찰이 들이닥치잖아요.

이 때 기생라합에게 경찰이 묻습니다. 하나님께서 구원의 작업을 할 때는 율법이냐, 아니면 평소에 갖고 있던 너희 힘이냐, 를 계속해서 구분, 그것을 둘 다 대조시키면서 우리에게 찾아오시거든요. 경찰이 딱 들이닥쳐서 “이쪽으로 정탐꾼 가는 것 봤는데 어디로 갔느냐?” 할 때 기생라합이 여기서 뭘 이야기합니까? 거짓말을 하지요.

이 거짓말이 참말입니까, 거짓말입니까? 이게 굉장히 중요한데요. 예수님이 십자가 지시고 사흘 만에 부활했다. 이게 참말이에요, 거짓말이에요? 이걸 참말로 받아들이면 안 되고요, 이걸 참말로 받아들이면 구원을 못 받고요, 이게 바로 거짓말이기 때문에 받아들인 사람이 구원받은 사람이에요. 그래야 지금 내가 있는 모든 것은 하나의 망상이고 허상인 것을 인정한 셈이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걸 뭐 하얀 거짓말이라 해도 되는데, 주님은 우리에게 쳐들어 올때에 내가 속한 이 자체가 이 땅에서 멸망 당해야 된다는 그런 안목을 유지한다면, 내가 바라는 대로 내가 진실로 살아간다, 이 자체가 하나님 보시기에 뭐가 되느냐? 거짓말이 되는 거예요. 나에게 진실 되기, 나에게 바르게 살기, 이게 하나님 보시기에 뭐가 돼요? 아직도 내 세계를 내가 붙들고 있겠다는 이 거짓된 모습 밖에 안 되는 거예요.

예수님이 부활했다는 이 거짓말, 이게 여러분 속에 있는지 여러분, 오늘 아침에 설교한 것처럼 수사를 해보세요. 본인이 수사반장이 되어서 여러분을 수사해 보세요. 내가 진실만을 외치는지, 거짓말을 찾아다니는지 한번 보세요. 거짓말을 찾아다니는 사람은 내가 장담할게요. 여러분은 구원받은 사람입니다. ‘나는 어찌 거짓말만 좋아하지? 성경이라는 이름의 거짓말.’

그러면 그렇게 해서 당신이 얻겠다는 것이 뭐냐? 얻겠다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고 바로 ‘차이남’이지요. 같은 여리고 성에 살면서 기존에 있는 여리고 성 사람과 나와는 뭐가 됩니까? 이미 이스라엘이 차이 나는 만큼 이 안에서 차이가 발생 되는 겁니다. 차이의 발생, 차이의 발생이 뭐냐 하면, 바로 거룩의 발생, 이것이 구원받은 자의 롤모델입니다. 원형이 되는 겁니다. 구원받은 자의 원형.

그러니까 되지도 않는 양심대로 산다는데 양심대로 살아서 천당 가는 사람 아무도 없어요. 양심은 하나의 나를 생존케 하는 힘이 되기 때문에 위험한 것이고 그것은 옳지 않은 겁니다. 그래서 여호수아 2장 18절에 보면 “우리가 이 땅에 들어올 때에 우리를 달아내리운 창에 이 붉은 줄을 매고”

이게 뭐냐 하면, ‘유월절 정신의 재현’입니다. 자, 유월절을 보겠습니다. 애굽에 누가 갇혀 있습니까? 히브리인들이, 그때는 이스라엘이 아니었습니다, 히브리인들이 갇혀 있지요? 여기에 누가 들어옵니까? 모세가 들어오지요. 모세가 들어와서 여기서 무엇을 일으킵니까? ‘차이남’을 일으키지요.

자, ‘차이남’을 의도적으로 일으킵니다. 이스라엘 히브리인들은 문설주에 뭘 바르고? 피를 바르고 나머지는 어떻게 합니까? 나머지 애굽 사람들은 피를 바를 이유가 없지요. 히브리인들은 피를 바르고 애굽사람들은 피를 바르지 않았다. 누가 쳐들어옵니까? 드디어 이 애굽을 포위한 천사들이 와서 여기에 공격을 해대게 되면 뭐만 쳐다봅니까? 피, 피만 쳐다보고 있는 거예요.

피가 이게 뭐냐? 이 피가 오늘 오전 설교의 제목처럼 ‘절대기준’이에요. 절대기준. 이 피, 절대기준, 이 절대기준 외에 어떤 다른 기준을 여기다가 첨가하거나 빼거나 하면 안 돼요. 보태면 안 됩니다. 절대기준만 달랑 남아 있어야 돼요. 성도는! 다른 기준은 필요치 않아요. ‘이 기준 + 양심’ 이러면 안 돼요. 이것은 아니에요.

이러면 기존의 세계에 그냥 눌러앉겠다는 그런 모션밖에 안됩니다. 절대기준만 유지해 줘야 돼요. 절대기준만 유지하게 되면 주님께서 그 기준에 준해서 나 개인의 나가 아니라 ‘우리’라는 새로운, 피라는 여기에 같이 동참한 사람으로서 구원을 해주는 겁니다. 그게 바로 차이 나는 거지요.

히브리인들이 피를 발랐습니다. 자, 히브리인들이 피를 발랐잖아요. 그러면 히브리인들이 피를 바르고 난 뒤에 갑자기 힘이 세져 가지고 애굽사람들한테 전부 다 한 사람씩 일대일로 붙든지 한 10대 1로 붙어서 해치우고 그들이 탈출했습니까? 피를 발랐으니 뽀빠이처럼 힘내 가지고……, 그 브루투스 있잖아요. 덩치만 크지 뽀빠이한테 당하는 인간 나오잖아요. 그 인간 해치우고 거기 나오는 올리브, 올리브는 왜 그리 몸이 약한지, 그 올리브 모가지 끌고 탈출에 성공했습니까?

그냥 피만 발랐어요. 기생 라합이 데모를 했습니까, 시위를 했습니까? 그냥 붉은 줄만 내렸을 뿐이에요. 그런데 뭘 보고? 그 피를 보고 바깥의 천사가 달려들 듯이 바깥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뭐만 보고? 오직 그 창에 있는 붉은 줄만 쳐다보고 쳐들어오는 거예요. 그 붉은 줄만 쳐다보고. 우리 과라고, 우리 과!

우리가 유월절에 했던 저 방식 그대로 여기 여리고 성에 있는 사람도 주께서 개입해 가지고 유월절 사건을 여리고 안에 재현시켰다는 이 놀라운 것을 보고 다른 사람은 다 치되 이 기생라합의 가족만은 건져내라. 이 방법이 반복해서 오고 오는 세대에 다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여기서 여러분에게 당부하고 싶은 것은, 여기서 주의할 것은, 피 발랐다고 잘난 체 하지 말고요, 창에 붉은 줄 있다고 그걸 동네방네 반상회에서 다, 물론 요새 반상회도 없지만, 하여간 “우리 집에 붉은 줄 있다~.” 이러면 전부 다 서문 시장 가서 붉은 줄 사 가지고 창문에 다 달아요.

하지 마시고 그냥 와서 주님이 와서 데려가도록 우리가 설치지 말라는 이야기를 드리는 겁니다. 유난 떨지 말고, 호들갑떨지 말고 그냥 절대기준, 절대기준을 자랑하고 그냥 사세요. 주식을 하든지 땅 투기를 하든지 그냥 절대기준만 유지하라고요, 절대기준.

이 절대기준을 유지하는 기생라합은 본인의 의가 어디 있습니까? 있습니까, 없습니까? 본인의 의가 없지요. 여리고 성, 멸망당할 여리고 성 시민인데 무슨 의가 있어요? 자기는 멸망당할 사람 중의 한사람인데 무슨 자기 자랑거리가 있습니까? 그냥 창틀에 붉은 줄만 내려와 있을 뿐이에요.

오늘날 저와 여러분의 모습과 흡사하다는 느낌이 못 들었습니까? 똑같지요, 잉! 우리 살아가는 지금 모습이 똑같지요. 피만 내세우고 다른 것은 아무것도 내세우지 않는 겁니다. 여러분이 살면서 여러 가지 경제적으로 가정적으로 또는 힘들 때 딱 하나만 생각하면 됩니다. 피! 주님께서는 피 보고 달려드는 거예요. 딴 것 아무것도 보지를 않습니다. 이게 바로 유월절의 반복입니다.

3장을 봅시다. 그렇게 해서 건져내고 난 뒤에 1-3절에 “여호수아가 아침에 일찌기 일어나서 이스라엘 사람들로 더불어 싯딤에서 떠나 요단에 이르러서는 건너지 아니하고 거기서 유숙하니라 삼일 후에 유사들이 진중으로 두루 다니며 백성에게 명하여 가로되 너희는 레위 사람 제사장들이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언약궤 메는 것을 보거든 너희 곳을 떠나 그 뒤를 좇으라”

이렇게 언약궤 이야기가 나오고요. 여기서 다른 것 볼 것 없어요. 3장 16절 “곧 위에서부터 흘러 내리던 물이 그쳐서 심히 멀리 사르단에 가까운 아담 읍 변방에 일어나 쌓이고 아라바의 바다 염해로 향하여 흘러가는 물은 온전히 끊어지매 백성이 여리고 앞으로 바로 건널쌔” 이렇게 되어 있어요. 15절 “(요단이 모맥 거두는 시기에는 항상 언덕에 넘치더라)”

모맥 즉 보리 거두는 시기가 4월에서 5월인데 이 시기에 요단강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가? 요단강을 건너는데 동에서 서로 건넙니다. 건너는데 하나님께서 저 위쪽에 아담읍이라는 마을이 있어요. 즉 25킬로미터 상류에서 물이 더 이상 흘러 내려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계속 누적이 되고 있어요. 그러면 그 아래쪽의 물은 중력작용에 의해서 염해, 사해 바다로 다 빠져버려요.

다 빠져버리니까 그 사이에는 물이 남아 있겠어요, 안 남아 있겠어요? 위에서는 스톱이 되고 그 아래쪽으로는 물이 빠져버렸으니까 이것은 뭐 그냥 맨땅 나오는 거지요. 여기에 누가 들어갔느냐 하면, 제사장이 뭘 메고? 언약궤를 메는데 그냥 언약궤를 메는 것이 아니고 여기에 열두 지파의 대표들이 함께 여기에 동참을 합니다.

제사장에 함께 동참을 하거든요. 이 말은 뭐냐 하면, 요단강을 건너가야 이게 무슨 땅이 됩니까? 약속의 땅이 돼요. 그러면 약속의 땅에서 열두 지파가 분배를 받는데 분배를 받는다는 말은 이게 누구를 통과해서, 제사장을 하나의 파이프라 본다면, 그리고 여기 열두 지파가 있다면 이 사이에 뭐가 있습니까? 그러니까 제사장이 여기 있는 거예요. 그러면 제사장 안에 뭐가 흐른다? 요단강이 흐른다고 보면 돼요. 요단강. 그것도 제일 비가 많이 올 때의 요단강.

비가 홍수진 요단강이 흐른다면 이것은 무엇의 재현이냐 하면, 바로 홍해의 재현입니다. 이미 그전에 홍해를 건너온 사람들이 실패했습니까, 성공했습니까? 갈렙과 여호수아 빼놓고는 다 실패했지요? 자, 홍해를 건너왔는데 왜 실패했는가?

홍해 건너올 때에 하나님과 함께 건너오지 않고 하나님이 다 만들어준 것 건너오다 보니까 홍해 건너올 때 그냥 자기 뜻을 유지하면서도 건너올 수가 있었던 거예요. 자기 뜻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오, 길 있네. 건너가자’ 하나도 어렵지 않았어요. Thank you, 모세. 모세는 지팡이 계속 물에 대고 있었고요. 그래서 물을 갈라지게 해놓고 홍해를 건너온 겁니다.

그런데 여기 요단강 건널 때는 누가 참여합니까? 열두 지파가 참여하는 거예요. 그러면 열두 지파는 이 약속의 땅과 이 사이에서 누가 빠지면 안 된다는 것을 알게 돼요? 제사장. 제사장은 뭘 모십니까? 언약궤. 하나님을 모시는 이게 없다면 우리 열두 지파가 약속의 땅으로 건너갈 수가 없다.

요단강이야 그 정도는 헤엄쳐도 건너갈 수가 있어요. 그러나 헤엄치고 건너가 봤자 그것은 뭡니까? 하나님의 속을 통과했다는 그 의미가 없는 한 들어가 봤자 소용없어요. 무슨 목적을 달성한다고 해서 그 목적의 의미까지 다 갖고 있다고 할 수가 없어요. 목적은 목적이고 중요한 것은 약속의 땅이 목적이 아니라 우리가 누구 없이는 이 땅을 얻을 수 없다는 그러한 내용을 장착해야 비로소 약속의 의미 됨을 이들이 알 수가 있는 겁니다.

그래서 제일 비 많이 올 때, 누가 봐도 못 건넌다 할 때에 그때를 정해서 물이 내려오는 한쪽을 막아서, 전부 다 맨땅을 만들어서 제사장으로 하여금 요단강을 건너가게 했습니다. 3장 12, 13절에 “이제 이스라엘 지파 중에서 매 지파에 한 사람씩 십 이명을 택하라 온 땅의 주 여호와의 궤를 멘 제사장들의 발바닥이 요단 물을 밟고 멈추면” 이렇게 되어 있지요.

그러면 제사장은 요단강을 멈추게 했고 제사장 안에 누가 들어있다? 열두 지파가 몽땅 다 들어있다고 보면 됩니다. 그러면 사람은 그 물속을 건너갈 수 없는데 하나님은 뭘 한다? ‘이 죽음의 바다도 하나님이 함께하면 건너갈 수 있다’라고, 그들은 이 사건을 통해서 다른 차원에서 일어나는 땅의 차원의 변화에 대해서 하나님 차원에서 설명이 가능한 거예요.

‘이렇게 하나 저렇게 하나 땅 차지하면 되지.’ 이것은 아니에요. ‘이래가나 저래가나 천당 가면 되지’ 이것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내 안에 누가 계셔야 천국을 갈 수 있지 ‘가게만 해준다면 뭐든 하겠습니다’ 이런 식으로 해서는 안 돼요. 주님이 계시고 주님 안에서 우리는 주님의 나라에 갈 수 있지 주님 빼버리고 도와주세요, 이런 식으로는 갈 수가 없는 겁니다.

그래서 저는 ‘성경 쓰기’ 한다든지 교회에서 많이 하는 것 있잖아요, 종교적 감수성을 더 예민하게 키우기 위해서 하는 철야기도라든지 그리고 간증집회, 이런 것을 좋지 않게 보는 이유가 너무 목적이 우선되어서 그래요. 애쓰고, 열심히 하고, 순수하고 솔직하게 하고, 마음을 낮추고, 부족합니다, 이렇게 하게 되면 그것이 무슨 효과를 주는 줄 생각하는 거예요.

기존교회에서 목사가 나올 때 그냥 안 나오지요. 뭐라고 합니까? (목소리를 팍 깔아서) “할렐루야~! 할렐루야~!” 이렇게 나오는 거예요. “믿습니까~!” 뭘 믿는다는 말입니까? 생뚱맞게 “믿습니까?” 뭘? “아멘, 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아멘, 하시면 아멘, 하라니 이게 말이 돼요?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믿습니까! 할렐루야! (강대상 막 두드리면서) 다 같이 찬송합시다. 할렐루야!” 이게 미친 것도 아니고.

이미 인간들의 소원이 뭐냐 하면, ‘뭐 어떤 미친 짓을 하든지 간에 천당만 보내주이소’ 이런 식이에요. ‘천당만 보내주이소 뭐 하라는 대로 다 할 테니까.’ 천당에 가기 전에요, 천국이 아예 우리 마음을 쑤시고 들어와야 돼요. 아까 제목 뭐라고 했습니까? 백신.

먼저 우리가 율법에 죽어야 돼요. 우리가 죽어야 율법이 율법대로 살지 나도 살고 율법도 살고 좋~다, 집안싸움 좋~겠습니다, 예? 율법은 예수님을 가리키는데 우리는 ‘나 부자 되게 해 주세요’ 이게, 이게……, 마귀도 서로 저희끼리 싸우면 망한다고 했거든요.

이게 무슨 꼬라지입니까? 주님은 예수님의 십자가 피의 절대적인 기준을 이야기하는데 ‘교회 부흥되게 하옵소서’ 하이고~, 이것도 교회라고, 예? 교회 부흥되게 해달라고, 이게 뭐가 교회 부흥이에요? 백신을 맞아야 되는데. 맞아도 소용없어요. 벌써 돌파해버렸어요. 벌써 3차를 돌파해버려서 4차 맞아야 돼요, 4차. 4차 맞아도 안 될 것 같아요.

요단강 건널 때 열두 지파가 관여합니다. 그러면 이제부터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전쟁할 때는 여기 여리고 성에도 언약궤가 돈 것처럼 요단강 건널 때도 언약궤가 한 것처럼 하나님께서 가라, 할 때만 가야 되고 그렇지 않으면 가면 안 되는 거예요.

잠언서 20장 24절에 보니까 “사람의 걸음은 여호와께로서 말미암나니 사람이 어찌 자기의 길을 알 수 있으랴” 여호와께서 그 길을 인도하시지 인간이 자기 가고 싶다고 덜렁 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이 말 듣고 뭐라고 합니까? 갑자기 아무 일도 안 해요. “너 왜 아무 일도 안 해?” 하면 “주께서 나한테 계시를 안 줘서 안 하겠다”는 거예요.

나의 길이라는 것은 내가 죽을 때나 나오는 것이 나의 길이에요. 내가 멀쩡하게 살아 있으면 그걸 길로 취급을 안 합니다. 내가 죽었다고 치고 ‘주님, 제가 뭐하면 됩니까?’ 이럴 때 길이 나오는 거예요, 길이! 혼처 자리가 세 군데 나왔는데 직업은 그만그만한 직업이에요. 하나는 성형외과 의사고, 하나는 법원의 판사고, 또 하나는 삼성의 주식 많은 임원이고, 세 사람 중에 네가 골라라 어느 것 할래, 이렇게 나왔다 칩시다.

예를 드는 거예요. 예는 들 수 있잖아요, 예는. 이렇게 할 때에 ‘주여, 주께서, 여호와께서 인도하는 것은 여호와께로만 말미암지 어찌 사람이 자기 길을 알 수 있습니까?’라고 이야기하지 말고요, 잠언서 20장 24절 동원 시키지 말고, ‘내가 어떤 남자라도 내가 죽겠나이다’ 그러면 주께서 인도하셔서 그러면 판사한테 결혼해서 죽도록 고생하게 할 거예요. 죽겠나이다, 했다면서!

말씀을 적용할 때는 백신, 항상 백신을 염두에 두고 주님의 죽으심, 언약궤가 양의 죽음이잖아요, 언약궤의 피, 피가 묻어 있는 그 언약궤가 우리 안에 들어올 때 이제는 우리가 가는 길이 넓은 길이 아니고 좁은 길이라는 사실을 알 수가 있는 겁니다. 안녕히 주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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