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양강의

3/16설교보충-선지자의 위선

아빠와 함께 2022. 3. 29. 17:30

수요설교 요약(선지자의 위선, 22.3.16)

수요설교하면서 미처 설명하지 못한 것 중에 하나가 ‘나를 배신하라.’ 하는 거예요. 나를 배반하라. 요 대목을 어제 말씀드렸는데 혹시 기억나십니까? 후딱 지나갔지요. 나를 배신해야 되는 것은 내가 나를 목적으로 삼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내가 노력해도 그 목적은 내가 의도한 목적 쪽으로 가기 때문에 이건 내가 원하는 내가 되기 위해서 노력한 거 외에는 아무것도 아니거든요.

나를 배신하라, 이 말은 이 목적을 겨냥해서 주님께서 인간에게 배신감을 안겨주는 식으로 일을 하셨습니다. 그 이야기에요. 주님께서 인간에게 배신감을 안겨주는 식으로 일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예수님보고 “나, 저 사람 모른다.” 이렇게 이야기했지요. 정식으로 예수님 앞에서는 그렇게 이야기 안했지만 쉽게 하면 이런 거죠. “우리 서로 모르는 사이로 갑시다. 우리 이제 서로 몰랐던 사이로 여기서 찢어집시다.” 하는 그런 내용이지요.

가룟유다는 본격적으로 화가 나가지고 예수님을 상대로 보복을 했고, 은 30냥에 보복을 했어요. “돈이라도 챙겨야지.” 이리 했고,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은 끌려가는데 여기서 더 이제는 되돌릴 수 없는 지경까지 넘어가기 전에 내가 발을 빼야 되겠다. 발 빼기. 저 사람하고 너무 엮여버리면 나중에 그 중력에 의해서 끌려가는 중력에 의해서 발을 빼기가 힘든 시점이 올 수도 있거든요. 그 전에 내가 좀 합리적 사고를 할 수 있는 동안 이성적 사고가 있을 동안은 저 분과 이제는 바이 바이를 해야 되겠다. 한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하신 모든 일은 예수님의 최측근들 누가 봐도 예수님을 잘 안다는 사람들, 동고동락을 같이 한 사람들, 주님의 대선에 도움을 준 사람들 했는데 왜 배신했느냐, 내가 예수님을 바라볼 때 그냥 바라보지 않고 예수님 안에 내가 목적하는 바가 있을 수가 있다는 것 때문에 예수님을 일방적 해석을 덧입힌 거예요. 뒤집어씌운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예수님 자체가 누구냐 보다도 그 예수님에다가 자기의 의미를 쏘아가지고 그 의미가 예수님을 통해서 얼마나 수월하게 달성될 수 있을까를 노리면서 최측근 예수님의 제자들은 3년 동안이나 그렇게 추종을 한 겁니다.

그래서 성령이 오게 되면 바로 이것이 하나의 뭐가 되느냐 하면 바로 증거물이 되는 거예요. 왜 죽었느냐에 대한 증거물로서 제자들이 거기에 등장하게 되지요. 그러면 성령께서 제자들에게 찾아옵니다. 제자들은 뭐가 되느냐 하면 주님의 증인이 됩니다. 사도행전1장8절. 니가 땅 끝까지 내 증인이 되리라. 했잖아요. 그 증인이 어떤 증인일까요. “내가 발 빼기 했습니다.”를 원 없이 증거 하는 거예요. 아주 신바람 났어.

“나는 예수님을 이렇게 오해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에 대해서 내가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에 대해서 오해하고 있었다는 그 뜻이었습니다. 라는 것을 성령을 통해서 마음껏 증거하는 거예요. 그래서 어제 성령이 하는 일은 성령의 객관적인 사역은 뭐라고 했습니까? 주관적인 거 말고. 주관적인 것은 기쁨이고 감사겠지만. 책망하는 거예요. 책망. 무엇에 대한 책망이냐 하면 우리들의 모든 판단에 대해서 책망하는 거예요.

인간의 모든 판단, 인간의 판단에 대해서 예수님은 십자가로 떠나버리고 예수님이 보내신 성령이 와서 이 판단을 책망을 해버립니다. 그래서 어제 수요일날 끝부분에 사람들을 놔두고 예수님 홀로 떠나지요. 홀로 떠났어요. 제자들도 동반하지 않고 십자가에서 홀로 가셨잖아요. 홀로 가시면서 뭐가 남겨지느냐, 비로소 길이라는 것이 있어야 돼요. Way.

이 세상을 성공할 수 있는 길이 홀로 가시면서 이게 발생, 생겨나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어제 그런 이야기했지요. 주님께서 가신 길, 제발 혼자 가도록 좀 놔두라고요. 우리가 같이 끼어들지 말고. “주님 저도 가겠습니다.” 이 소리 했다고 찐방 받은 사람 있지요. 베드로. “니는 내 가는 길에 동반할 수 없다. 그냥 가. 그냥 가라고.” 그러한 슬픈 그런 장면은 사무엘상에도 그게 나와요.

흔히 말하는 옛날 우리나라 한국 영화에 <미워도 다시 한 번> 그런 데도 나오고요. 남자가 성공하고 난 뒤에 여자가 계속 따라오니까 남자가 “나는 니 구닥다리 것하고는 이제 상대 안한다.” 쉽게 말해서 여자가 다방레지해가지고 돈 벌어가지고 남편 고시공부 시켜가지고 판사 만들어놓으니까 판사 사법고시 합격하고 나니까 남자가 부자 집에서 중매가 들어오지 않겠습니까. 그래 선봐가지고 부자 집 여자하고 할 때, 여자가 자기가 뒷바라지해서 되었으니까 계속 따라붙지 않겠습니까.

그럼 남자가 휙~ 휙~ 저리 가. 저리 가! 하고 보내지요. 베드로가 예수님 하시는 일에 협조하겠다고 따라오니까, “저리 가! 니 따라오지 못해.” 그 때 한국영화에서는 결정적인 여자 쪽에서 준비한 결정타가 있습니다. 맨몸으로 가면 저리가! 가 되는데 뒤로 싹 둘러요. 그러면 포대기에 누가 있느냐 하면 애가 있는 거예요. 애는 어떻게 할 건데? 그 때는 남자가 나서는 게 아니고 남자가 결혼해야 될 부자 집 얼굴 크고 퉁퉁한 그런 부자 집 장모님 될 사람이 와가지고 다방에 앉아서 조용하게 봉투하나 쓱 내밀지요.

니가 할 수 있는 것은 여기까지다. 더 이상 침범하게 되면 깡패 동원 시킬 테니까 니가 알아서 기라. 이 돈 가지고 남대문시장 점포 하나 옷가게 하나 해가지고 니 애하고 먹고 떨어져라. 우리 인연은 여기서 끝이다. 수요 설교하다가 왜 영화이야기를. 그리 가고 난 뒤에는 그 여자는 한을 품었지요. 잘 먹고 잘 사는가 보자. 나중에 남자가 여자 만나고 난 뒤에 또 문제있어가지고 그제야 진정한 사랑이란 무엇인가. 뭐 이렇게. 부자 집 다 버리고 옷가게 하는 여자하고 잘 살았다는. The End. 미워도 다시 한 번. 이런 식으로.

주님께서 길을 만들었기 때문에 길은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사람들이 예수님을 추방했기 때문에 추방된 자만이 유일한 길이기 때문에 이 세상에는 천국 가는 길은 없습니다. 아무리 교회 다니고 해도 그건 지가 갇혀있는 폐쇄된 공간, 풍선 안에 들어있는 것과 똑같지요. 교회라는 것이 있어가지고 온갖 것 시키는 대로 다 해보지만 튕겨져 나오지요.

왜냐하면 나를 목적으로 삼기 때문에. 내가 나중에 구원받게 되는 존재. 내가 나중에 축복받는 존재. 자기가 자기를 이렇게 자기 이상형을 완전히 구상했기 때문에 모든 것은 실패로 끝납니다. 그런 노력을 유대인들이 다 했지만 다 실패로 끝나고 말았지요.

그래서 그 길이 없는데 여기서 성령이 와요. 뭐를 따라서? 길 따라 오지요. 길 따라 오니까 성령이 오게 되면 내가 나를 목적으로 삼았다가 어떻게 바뀌느냐 하면 목적이 나를 이용했다, 로 바뀌어요. 주님의 목적이 나를 이용했다로 바뀌어버려요. 왜냐 하면 방향이 바뀌니까. 내 쪽에서 가면 주님도 나의 목적이 되지만. 주님 쪽에서 오면 내가 하나의 목적이 되니까 이걸 가지고 뭐냐 하면 내가 곧 길이요, 내가 곧 생명이요, 내가 곧 진리가 되는 거예요.

성령이 와야, ‘아~ 길은 주님 쪽에서 만들었지.’ 내가 나를 목적으로 삼는 한 길에 들어설 수 없다는 것을 아는 겁니다. 그래서 어제 수요 설교에서 중요한 것은 내가 나를 목적으로 삼지 않기 위해서는 성령이 오게 되면 누가 배신해야 되는가, 전에는 내가 예수님을 배신했는데, 성령이 오게 되면 내가 나를 배신해야 돼요. 이 못돼 먹은 것! 나만 쓰레기인가! 이런 식으로.

내가 나를 배신해야 돼요. 내가 아는 것, 내가 믿는 것, 내가 희망하는 것, 내가 사랑하는 것, 내가 헌신하는 것, 전부 다 이건 다 깡그리 소용없다는 사실을 알고 감사하는 겁니다. 그래서 어제 설교 시간에 내가 나를 배신하는 것과 주님 가신 길을 홀로 가시게 하라. 우리가 동승을 못한다. 그리고 몇 가지 더 말씀을 드리면 불신자에게는 지옥, 저주가 기다리고 있는데 불신자인 것을 아는 자에게는 천국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천국 가는 백성들도 이 땅에서 불신자고, 지옥 가는 자도 불신자인데 천국 가는 자는 성령이 오심으로 말미암아 불신자를 의인되게 하셨던, 내가 죄인입니다. 하는 그러한 진정한 고백은 성령이 옴으로 그렇게 발생될 때 이미 주님 앞에 잠식당한 존재에요. 주님한테 포획당한 존재. 이거 대구강의에서 했지요. 아메바. 아메바에 함몰당한, 큰 원 안에 작은 원이 함몰당하는 거죠. 큰 비누방울 안에 작은 비누방울이 흡수 통합되는 것처럼.

주님께서 그걸 껴안아 주시면 우리는 그걸 예수 안이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전에는 내 안에 예수님을 강제로 끌어당기고자 했는데 이제는 주님 안에 우리가 들어가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사도바울 편지에서 제일 어려운 대목이 예수 안에 있다는 거예요. 예수 안에.

예수 안에 있는 것은 주일날 설교에서 예수 안에 있는 것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 라고 해요. 때. 때는 콤팩트 압축되어 있으니까. 시간과 때는 반대가 되는데요. 시간은 흘러가는 거지만, 때는 이미 고정된 거예요. 그 때에서 다른 우리가 아는 시간 말고 주님의 때로 다시 귀환시키는 돌아가야 될 그러한 주님의 고유 시간 안에 우리의 인생이 성도의 인생이 놓여있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성도의 특징은 어떤 과거일이나 지금의 일이나 어떤 일이라도 주께서 필요해서 발생된 사태라고 해서 모든 의미가 고정된 주님의 십자가 때로 들어가게 되어있어요.

주일날 설교도 시간관계상 하지 않은 중요한 이야기가 있었는데 그게 뭐냐 하면 재림이라는 것도 역사가 아니고 시간이 흘러가면 재림이 아니고, 그건 유대인적 사고방식이고요, 재림이 뭐가 되느냐 하면 때가 돼요. 재림되기 전에 먼저 함축, 재림의 의미가 재림에게 끌려가는 식으로 우리 마음에 오실 분을 고대하게 만듭니다. “나는 아닙니다. 주께서 오셔야 됩니다.” 재림도 때고, 주님도 때고, 그 때가 아까 방금 이야기한 예수 안에서는 이미 우리는 주께서 하시지 우리가 할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이웃사랑이라는 것도 내가 의지를 발휘하는 것이 아니고 이웃사랑을 계획적으로 조직적으로 하면 안돼요. 이게 바로 거짓 선지자들입니다. 거짓 선지자. 이웃사랑을 계획적으로, 조직적으로 해보면 뭐가 필요하지요? 돈이 자금이 필요해요. 이건 회사에요. 그러면 성경에서 이웃사랑은 뭐냐 하면 그냥 ‘우연한 마주침’입니다. 우연한 마주침.

여러분이 잘 아시지요. 우연이가 불렀던 우연히. 우연히 만났네. 나이트클럽에서. 날 보고 미안해하네. 나는 안아주었지. 다독여줬다 이 말이지요. 모든 것이 우연히 만나는 거예요. 계획적으로 저 사람을 사랑해야지. 이건 안돼요. 그냥 우연히 만남에. 우연히 만나기 때문에 실적 같은 건 기대하지 마세요. 내가 저만큼 해줬기 때문에 나한테 보상이 와야 된다. 그건 조직화된 회사에서나 기대하지 이웃사랑은 그런 거 없습니다.

사마리아 사람이 강도 만난 사람 했다고 해서 그 사람이 새로 직장을 바꿔가지고 강도 만난 사람 도와주기 주식회사 만들었습니까. 그런 거 없잖아요. 그냥 우연히 만난 거예요. 우연히 마주친 거예요. 이웃사랑을 우연히 마주치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더욱 더 우리를 죄인 되게 하는 결과를 낳습니다.

내가 사랑해줬으니까 사랑 받은 사람은 죄인이고, 나는 의인이다, 이게 아니라 그 사람을 만나게 함으로서 내 속에 갈등을 유발시켜서 갈등 속에서 그 사람을 도와주는 식으로 주께서 작전을 진행해 나갑니다. 그러면 도움 받은 사람도 죄인 되고, 도와주는 사람도 죄인 되고. 오직 주에 대한 영광으로 감사밖에 되지를 않지요.

마르다 누이동생 마리아가 그동안 모아놨던 향수를 예수님 발 앞에 뿌릴 때에 자기가 지금 의로운 일을 했다고 보지를 않아요. 우연히 그게 울컥 올라와서 한 거예요. 그 행위에 대해서 해석은 마리아 본인이 하는 게 아닙니다. 주님이 저 마리아의 행동은 내 죽음 장례식을 빛내기 위해서 했다. 그건 마리아한테는 생뚱맞은 이야기에요. 내가 언제 그랬습니까? 그렇잖아요.

마태복음25장에 보면 후반부에 나오지요. 니가 나한테 먹을 것을 주었구나! 막상 먹을 것을 준 그 소자는 “제가 언제 했습니까?” “니가 나한테 입을 것을 주었구나.” “제가 준 적 없는데요.” “내가 옥에 있을 때 니가 돌아봤다.” “제가 한 적 없는데요.” 이러면서 천국 가는 거예요. 내가 한 적이 없는데. 왜? 의미와 해석은 주님께서 일방적으로 붙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거 빼라는 것은 이것을 압축을 시키면 우리가 태어난 것부터가 이게 내 의도가 아니었고, 죽는 것도 마찬가지고요. 예수님을 만나게 한 것도 내가 예수님을 만나고자 노력한 것이 아니라 우연하게 모든 나의 인생 전체를 앞으로 살게 될 남아있는 인생까지 전부를 다 끌어 모아서 그 시골장터에 뻥튀기 있지요. 뻥튀기 눌러버리듯이 콤팩트 납작하게 된 그렇게 우리 인생을 그런 식으로 하는 겁니다.

거기에 있는 모든 인생의 굴곡은 주 안에 있는 하나의 무늬가 되지요. 무늬가 있어야 인생이 재미있지요. 사직서 내고 또 일하러 나가고. 아슬아슬하고 깜짝 깜짝 놀라게 만들어요. 이게 인생의 무늬지요. 고요한 것은 권태롭습니다.

그렇게 지난 수요일날 주님의 홀로 가신 길에 성령이 와서 우리로 하여금 불신자임에도 불구하고 천국 가게 해주시는 주님의 성령의 찾아오심. 거기서 우리는 죄인인 것을 고백하면서 천국 가는데 감사하는 것. 그게 어제 수요 설교의 핵심이었습니다.

'안양강의' 카테고리의 다른 글

4/13설교보충-바뀐인생  (0) 2022.04.30
불러 모음  (0) 2022.03.30
양의 한계  (0) 2022.03.03
물 퍼내기  (0) 2022.01.02
확인  (0) 2021.11.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