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양강의

양의 한계

아빠와 함께 2022. 3. 3. 19:33

안양20220217a슥10장3절(양의 한계)-이 근호 목사

오늘은 스가랴10장3절부터 하겠습니다. “내가 목자들에게 노를 발하며 내가 숫염소들을 벌하리라 만군의 여호와가 그 무리 곧 유다 족속을 돌보아 그들을 전쟁의 준마와 같게 하리니 모퉁잇돌이 그에게서, 말뚝이 그에게서, 싸우는 활이 그에게서, 권세 잡은 자가 다 일제히 그에게서 나와서” 이스라엘에 여기에 목자가 나오는데 목자 이게 상당히 특이합니다. 특이한 개념이에요. 목자라는 게. 오늘날 우리에게 목자라는 게 성립이 안 되잖아요. 목자를 여기서는 염소라고 해서 기분 나쁜 존재로 보지요. 숫염소. 목자는 사람이지요. 숫염소는 뭐가 됩니까. 짐승이 되지요. 사람이 뭐로 변화지요? 짐승으로 취급받습니다.

사람을 가지고 짐승이라고 취급 받는 이런 경우를 뭐라고 하느냐 하면 종말의 현상이라 합니다. 종말의 현상. 종말의 현상에서는 어려운 말을 처음부터 할 수밖에 없어요. 종말이라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기존의 사람을 사람으로 인정하지 않고요, 종말에는 하나님께서 기존의 인간이라는 사람이라는 것을 새롭게 이걸 던져 놓고 이걸 끄집어내는 방식을 사용해요. 마지막 때가 되면.

기존의 사람들이 나는 사람이다. 하는 것을 일체 인정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이게 인간이야, 라고 따로 제공하시고, 그 제공된 인간 개념에 준해서 여기서 뭘 끄집어내느냐 목자라는 개념을 끄집어냅니다. 그러면 이 목자는 신약에서는 누구만 목자냐 하면 예수님이 목자가 되시고요, 그 다음에 예수님에 의해서 사람이라고 평 받는 자들이 사람이 되는 거예요. 인간 중에서 하나 뽑혀서 목자가 아니고 목자라는 하나님의 따로 정해놓은 하나님만이 아시는 그 개념과 연결이 될 때만 이게 사람이 사람이라고 규정받습니다.

그러면 나머지는 뭐냐, 짐승이지요. 나머지는 짐승으로 사용하는 거예요. 그래서 이 스가랴 다음에는 말라기 나오고요. 말라기 다음에는 무슨 시대 나옵니까. 신약시대 나오지요. 신약시대를 뭐라고 하느냐 하면 종말이라고 이야기해요. 마지막 때라고 해요. 마지막. 마지막이기 때문에 마지막에 와야 모든 개념들이 여기서 최종 정리가 됩니다. 참고서에 마지막에 뭐가 붙어있습니까? 정답 있지요. 마지막 때 정답을 다 쥐고 있으면서 어떻게 앞에 있는 그 시대에서 일어난 일들이 이것을 답을 답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그러한 경우들이 일어났는가, 이게 정답을 아는 입장에서 말라기, 스가랴, 선지자 등장해가지고 마지막 때를 질주하고 달려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사람인데요.” 라고 하면 안 되고요, 마지막 때에 예수님을 목자라고 인정할 때에만 비로소 사람이라는 규정이 정립이 되는 겁니다. 이것이 마지막 때에 나타나는 거예요. 마지막 때. 마지막 때 목자가 등장해야 사람이라면 그 전에 있던 사람은 뭐라고 이야기하고, 뭐라고 표현하고, 어떻게 정리될 수 있는가, 사람이 아니고 그럼 뭐냐, 기계가 되는 거예요. 기계. 구약에서는 기계라고 이야기 하지 않습니다. 왜 그러느냐 하면 구약은 누굴 이야기하느냐 하면 이스라엘을 두고 이야기하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종말 때 개념이 미리 삽입돼 있는 민족이기 때문에 이스라엘 선지자들 사이에는 벌써 종말이 그 안에 들어있기 때문에 그들을 사람, 내 백성, 내 종, 내 사람으로 취급해 주는 거예요.

그런데 그 이스라엘마저 마지막 기대에 부흥하지 못하고 모든 것이 다 좌초되고 맙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인간이라 하는 것은 이사야 1장에 말씀처럼 소가 그리고 나귀가 주인을 모르면 사람으로 취급 안합니다. 이사야1장에 나와요. 소보다 더 못하고 나귀보다 더 못해요. 어떻게 소도 자기 주인을 아는데, 어떻게 네가 인간이라고 할 수 있느냐, 인간이라면 목자를 알아야 되고 너를 구원하신 주님을 모르면 어떻게 인간이라고 할 수 있어? 이렇게 선지자가 나오거든요.

그래서 일반적으로 사람이라 하는 것은 사람이 아니고 기계라고 이렇게 표현됩니다. 즉 기계라는 표현을 그럼 어디서 툭 튀어나오느냐, 왜 니 마음대로 지어내느냐, 라고 하신다면 기계는 어디서 나오느냐 하면, 점에서 나왔다고 보면 돼요. 점. 제가 사람을 점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어떤 관점이냐 하면 스스로 시작과 끝이 무의미하다. 점의 특징은. 시작과 끝이 의미가 없어요. 처음도 없고 시작도 없어요. 왜? 본인이 모르니까요. 내가 있기 전에 부모님이 먼저 있었잖아요. 그걸 하나님이 구약의 입장에서는 그걸 시작으로 쳐주지를 않습니다. 왜 그러느냐 하면 부모, 그 다음에 어디서 시작했는가, 그럼 할아버지에서 시작됐지. 이런 것을 쳐주지를 않아요.

그러나 이스라엘에서는 시작을 하나님으로부터 시작을 하거든요. 시작은 하나님으로부터 시작한다 해줘야 제대로 시작이지 같은 인간들끼리 고만 고만한 인간들끼리 시작을 하게 되면 그 시작은 늘 소실하고 소멸돼요. 늘 사라져버려요. 자식 낳고 부모는 늙어 죽고. 또 자식 낳고 늙어죽기 때문에 이건 하나의 시작과 끝이 없을 경우에는 점이 되어버립니다. 무의미합니다. 그리고 이 무의미한 존재의 가장 특징이라 하는 것은 뭐냐 하면 그들의 실수나 실패를 간주하지를 않습니다.

기계가 만약에 상품을 잘못하게 되면 회초리 가지고 기계를 막 때립니까. 내가 똑바로 하라고 했지! 짐승은 알아먹어요. 그런데 이방민족은 개만도 못하다. 짐승만도 못하기 때문에 그냥 기계라고 보면 돼요. 무정한 기계. 아무것도 모르는 기계. 기계라는 개념이 확 안 떠오를 때는 이렇게 보시면 됩니다. 이 점 또는 이 기계는 주변의 상황, 환경의 힘에 의해서 그냥 휘둘리고 휩쓸려 갈 수밖에 없는 대상. 그러니 철저하게 기계지요.

내가 뭘 한다가 아니라 이 세상이 나에게 뭘 요구해? 이게 기계입니다. 제가 방금 무슨 단어를 썼습니까? 이 세상이라고 했지요. 현실에서는 이걸 세상이란 말을 좀 구체적으로 표현할 필요가 있어요. 이게 뭐냐 하면 시장이에요. 시장. 시장경제에요. 나라는 이 기계는 내 하고 싶은 대로 못하고 시장경제. 시장경제라 하는 것은 소비자 있고, 고객 있지요. 소비자, 고객이 있으니까 “주인님, 이 물건 준비해 놓으세요.” 하면 “네, 다음에 오시면 이 물건 준비 해 놓겠습니다.” 준비해 놓으면 “고객님이 요구한 거 준비해 놨습니다. 사가세요.” 이렇게 되지요. 그러니 하루 종일 일과가 어디의 눈치를 보고 살아가느냐 하면 이 시장경제가 어떻게 돌아가느냐에 따라서 눈치를 보는 거예요.

그게 하나의 보통 가정에서의 남자들이 해요. 남자들이 세상에서 돈을 버니까. 그러면 아내는 자식들은 누구의 눈치를 보느냐 하면 시장경제의 눈치를 보는 그 가장의 눈치를 보면서 하나의 가정이 형성되는 겁니다. 만약 어떤 남편이 작은 사업을 한다면 아버지가 기분이 좋을 때는 ‘아, 오늘은 무슨 일이 잘 됐구나!’ 아버지가 기만 쓴다 해가면서 ‘아이고, 오늘 아버지 신났구나!’ 아버지 신나는 건 뭡니까. 돈 벌어주는 거예요. 돈 버는 거예요. 그런데 “아버지. 아버지. 최민정 금메달 땄데요.” “왜 지금 니가 금메달 신경 쓸 때냐, 공부나 똑바로 해. 니. 니 공부 못하면 나 같이 돼. 알겠어?” 아버지 바깥에서 무슨 일이 있구나. “최민정이 금메달 딴다고 니 공부 나아지나. 니한테 돈이 들어와?” 모든 눈치코치와 모든 상황이 시장경제와 관련되어있어요.

시장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느냐, 그것과 관련되어있습니다. 그러니 이건 짐승이라고 표현할 수가 없어요. 그냥 기계에요. 기계. 그래서 경제가 나쁘면 그 사람의 인품이나 성격, 도덕성, 관계없이 전부 다 경제가 나쁘면 전부 다 꾸리하게 돼요. 기분이. 기분이 더럽게 되어버리는 겁니다. 경제가 잘 돌아가면 그 사람 개인적인 자질, 성격, 이런 거 신앙 관계없이 전부 다 들떠있습니다.

이것은 세상이 하나의 공처럼 한통속으로 돌아가고 있어요. 공이 이렇게 이쪽으로 굴러가면 이쪽의 사람도 쏠리고, 공이 이쪽으로 쏠리면 이쪽의 사람도 쏠리잖아요. 이 공안에 들어있는 사람들은 공 안에 들어있는 걸 그걸 경제 분위기, 경제 상황이라 하는데 저는 그걸 다른 표현으로 이렇게 합니다. 공안에 들어있는 내재적인 에어, 공기. “아! 오늘 공기 안 좋은데. 오늘 시장 공기 안 좋은데.” 그러면 공기정화기 틀까요. 아니요. 그런 뜻이 아니야. 지금. 그 뜻이 아니야. 공기. 공기라는 표현을 쓴 이유가 보이지를 않아요. 보이지는 않는데 절대 영향을 줘요. 절대적인 영향을 줘요.

보이지는 않지만, 보이는 개인, 개인을 탓할 수 없을 정도로요. 만약에 남편이 와서 짜증을 낼 때, 아내가 같이 짜증을 내려고 하다가 ‘아~ 요번에 남편이 사업이 잘 안 되는 모양이다. 내가 공기 파악해가지고 나도 쭈그리고 있어야 되겠구나!’ 이렇게 맞춰주거든요. 그냥 빈 공간인데도 불구하고 하나가 되어서 같이 돌아갈 수밖에 없게 만드는 거 누가 시킨 겁니까? 누가 시켰느냐 하는 거예요.

이스라엘은 해답을 알고 있어요. 왜? 이스라엘은 점이 아니고 기계가 아니고 사람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걸 성경에서는 뭐라고 하느냐 하면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하는 거예요. 하나님의 형상. 하나님이 자기 형상을 드러내기 위해서 특별히 이스라엘을 택하셔서 이스라엘은 본인의 의사와 의도와 전혀 무관하게 마주칠 자와 마주치고 부딪칠 자와 부딪치고 만나야 될 자와 만나게 해주는 모든 그것이 이스라엘 내부에는 없고 하나님에게 있다. 왜? 하나님이 자기 형상을 드러내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에 뭐가 작용하느냐, 선택이 작용해요. 선택이. 선택이 작용하는데 기계적인 이 세상에서는 인간은 선택할 권한이 없습니다. 방금 이야기했듯이 공기가 나를 선택해요. 공기가. 시장경제가 나를 선택해요. 내 행동과 다음의 나의 결정, 어떤 계획을 할 것인가, 내가 무슨 일에 종사할 것인가, 그건 시장경제에서 결정하는 거예요. 그래서 이 기계적 존재에서는 한계가 자체적으로 품고 있어요. 어떤 무얼 하려해도 더 쉽게 합시다.

자기 자신이 자신의 한계입니다. 늘 외부에 대해서 주눅 들어 살아가요. 특정 누굴 눈치 보는 거 아니에요. 그냥 공기의 눈치를 보는 거예요. 그래서 이걸 어려운 말로 뭐냐 하면 내 한계는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고 내 안에 내 자신이 나의 한계가 되는 겁니다. 나는 나를 넘어설 기운도 없고 내가 나를 넘어설 용기도 없어요. 나를 넘어설 용기가 없어요. 방금 이야기 이해했지요. 이해했으면 방금 이야기 한 것을 더 의미를 확장시켜 봅시다.

자신만이 나의 모델이다. 내가 나의 모델이기 때문에 모델을 다치게 하면 안돼요. 내가 누구 잘 되기 위해서 사는 건데요? 나 다치면 안 되잖아요. 그럼 살맛이 없어요. 내가 다치지 말아야 돼요. 그렇다면 뭐냐, 이 공기. 이 사회 시장경제 분위기에 눈치를 봐서 늘 이렇게 나한테 유리한데로 계산할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선택한다는 것은 내가 하는 선택이라 하는 것은 내 자신이 모델이니까 모델이 다치지 않는 한까지만 나갈 뿐이에요. 안 그러면 돌아서게 되어있어요.

데살로니가5장22절에, “악은 모든 모양이라도 버리라.” 악은 어떤 모양이라도 버리라, 고 되어있지요. 이 말씀은 제가 한 번 적어볼게요. 악은 어떤 모양이라도 버려라. 주의 말씀이지요. 자, 악을 버려라, 이 말은 현재 악이 있다는 말입니까? 없다는 말입니까? 악이 없으면 악을 버리라는 말이 안 나오지요. 악은 나의 한계를 못 벗어나는 상태를 두고 말하는 겁니다. 나는 내가 중요하니까. 이게 뭐가 되느냐 하면 이게 악이 되는 거예요. 우리의 어떤 행동과 어떤 선택을 해도 내가 나답게 되는 범위 밖으로 나갈 수 있어요? 없어요? 나갈 수 없지요. 내가 나를 버리고 바깥으로 나가버리면 이걸 정말 평생 내가 뭘 했는지 모르는 거예요. 평생 내가 허무하게 되고 쓸데없는 일이 되어버리잖아요. 그리고 웅크리고 있어야 되는 거예요. 나를 지키면서 내 것을.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것을 향하여 무슨 미사일을 쏘느냐 하면 악을 버리라고 했다고요. 악을 버리니까 자기가 웅크리고 있는 응집 돼있는 이 공기, 시장경제, 시장경제에서 나라 살리기 위해서 하지 않잖아요. 나를 살리기 위해서 시장경제에 대해서 눈치 보는데. 그 속에서 우리는 무슨 요구를 받느냐 하면 니 안에 악이 있는지를 그걸 파악하라는 요구를 받는 거예요. 악 니 안에 있다. 악? 아무리 봐도 악이 없는 데요. 왜? 나는 나를 지키는데 어떤 경우라도 그걸 악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어요. 내가 나를 지키는 그것이 전부이기 때문에 내가 악을 저지르기 위해서 살았습니까? 절대로 아니에요. 내가 악을 저지르는 재미로 살았습니까? 아닙니다. 나쁜 짓하는 즐거움으로 살았습니까? 아닙니다. 나의 일념은 이미 확정됐고 정해져있습니다.

그러면 뭐냐, 내가 어쩔 수 없는 내가 손댈 수 없는 이 시장경제에서 그나마도 숨이라도 쉬어보자. 나라는 살아있다는 것을 확인해보자. 그게 전부에요. 그게 전부인데 그런 우리를 향하여 악을 버리라고 한다면 그러면 여기서 악을 새로 찾아야 된다고요. 악을 한 번 찾으려고 해보세요. 나오는 결과는 뭐냐, 바로 이 시장경제 둘러싼 이 공 안에 있는 공기가 전부 다 뭐가 돼요? 악이 되는 겁니다. 이건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와 똑같은 거예요. 이건 인간 능력으로서는 해낼 수 없는 겁니다.

만약에 우리가 이제는 나쁜 짓 안하겠다고 악을 어떤 모양이라도 버리겠다고 “악아 저리 가!”라고 하면 주께서 뭐라고 물어보는 줄 알아요? “그걸 악이라고 내보내는 이유가 뭐예요?” 라고 물으면 뭐라고 답합니까? 순수한 나를 챙기기 위해서 악을 버렸습니다. “그 순수한 악이 어디서 니 속에 들어왔지?”하면 “바깥에서 들어왔습니다.” 내 안에서 들어오면 안돼요. 왜냐하면 내 안에 들어오면 내 자체가 악이기 때문에 내 자체가 악을 벗어날 수 없어요. 바깥에서 들어왔다는 거죠.

그러면 니 말은 바깥에 악이 있다는 말이지요. 이 말이거든요. 그럼 바깥의 악하고 니하고 이제는 거래 안 할 거냐. 이제는 상종 안 할 거냐. 물으면 답변 못합니다. 왜 그러느냐 하면 악을 물리치는 것이 우리의 존재 이유인양 우리는 그렇게 안 살아가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어떤 악이라도 버리는 것이 내가 존재하는 이유다.’ 라는 생각은요, 그건 종말 때 일어나는 주님의 할 일이지, 내 할 일은 아니거든요. 태어나자마자 악아! 나는 악과 싸울란다. 이러지는 않는다 말이지요.

그래서 지금까지 제가 이야기한 것을 여러분들에게 왜 끄집어내는가, 이것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방민족과 이스라엘과의 차이를 지금까지 제가 말씀드렸던 겁니다. 이방민족과 이스라엘. 그러면 오늘 스가랴하기 전에 스가랴 목자이야기가 너무 어려워서 이렇게 서론을 길게 이야기했는데. 스가랴 들어가기 전에 한 군데를 더 살펴봐야 비로소 스가랴에 들어갈 수 있어요.

우리는 이스라엘과 우리는 똑같은 인간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걸 지금 제켜야 돼요. 그걸 삭제시켜야 됩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함께 있고요, 우리는 우리끼리 우리 인간들밖에 없어요. 그래서 이 말씀은 이스라엘을 위해서 줬거든요. 그러니 우리는 거기에 끼어드는 셈이 되는데. 왜 그러면 이방나라라는 게 도대체 나라는 것이 어떤 처지에 놓여있는가를 에베소서2장12절을 보겠습니다.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는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벌써 사람취급 안하지요.)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고 약속의 언약에 대해서 외인이고, 세상에서는 소망이 없고, 아예 소망이 없대요. 우리는 시장경제 살핀다고 그렇게 아침부터 새벽부터 밤까지 그렇게 바쁜데 그걸 향하여 하나님은 뭐냐 하면 백날해도 니는 소용없어. 그 다음에 나와요. 소망 없는 이유가 그 다음에 뭐가 없습니까? 하나님도 뭐다? 하나님도 없다. 이렇게 규정하는 거예요. 이것은 어떤 규정이냐 하면 이스라엘 하나님 입장에서 이야기하는 거예요. 지금 칸막이를 이방민족과 이스라엘을 나누고 있는데 에베소서2장에서요.

이스라엘 입장에서 여호와 입장에서 볼 때, 이방민족은 전부 다 아무리 그들이 하나님을 믿어도 하나님이 없는 거예요. 나름대로의 국가적인 희망과 경제개발5개년계획 있어도 그들은 뭐가 없다? 그건 소망이 없어요. 그건. 이스라엘이 안 되는 이유는 뭐냐, 이스라엘이 갖고 있던 하나님의 언약이 없기 때문에 이걸 언약의 완성은 그리스도거든요. 그리스도밖에 있는 민족이기 때문에 아무리 거기서 자기끼리 발전하고 문명이 발달해도 이건 그리스도밖에 있는 거예요. 저주지요. 저주. 저주의 모습만 그냥 보일 뿐이에요. 이스라엘은 그리스도 안에 있고. 이스라엘 쪽에서도 복음만 아는 사람만 해당되지요.

그래서 13절 봅시다.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여러분, 장갑이나 양말을 하나 잃어버리면 그 다음에는 어떻게 됩니까? 나머지 장갑은 쓸모가 있어요? 없어요? 쓸모없지요. 같이 버려야 되겠지요. 지금 이방민족에 대해서, 이방민족 사람이 들으면 터무니없는 지금 비난을 퍼붓고 있는 거예요. 그들에게서는 도저히 납득이 안 되는 터무니없는 우리가 보기에 니도 인간이고, 키 165고 나는 175고 같은 인간이고 너도 세끼 먹고 똑같은데 이런 비난은 터무니없는 거예요. 납득이 안 될 정도로 터무니없는 거예요. 너무 일방적 견해를 하고 있다 말이지요.

그럼 이스라엘 너는 잘났나, 이렇게 될 때 여기에 언약이 있는데 언약이 스스로 뭐하느냐 하면 완성을 해버려요. 언약이 완성되면 이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종말이라 하는 겁니다. 종말. 끝이 되게 되면 건질 거 다 건졌다 하고 가면 그만이니까. 언약적 종말을 이루는데 있어서 언약을 이루는데 있어서 누가 손을 내미느냐 하면 언약이 저주받은 이방민족에게 손을 내밀어요. 이렇게. 손가락 5개. 손을 내민다고요.

손을 내밀어서 이스라엘로 가는 것이 아니고 이스라엘과 이방민족 한 가운데 중간에 있는 쪽으로 이렇게 양쪽에 있는 택한 백성을 이쪽에 집합을 시켜버립니다. 이 자리가 무슨 자리냐 하면 바로 ‘없는 공간’이에요. 이게 존재하지 않는 공간이에요. 왜 존재하지 않는 공간이냐 하면요, 이 공간으로 오셨던 예수님께서 피를 흘리시고 사라졌기 때문에 그래요. 이 피를 흘리고 사라졌거든요. 예수란 분이 어떤 아저씨가 오셔가지고 피 흘리고 사라지면서 다 이루었다. 했다 말이죠. 그럼 그 아저씨가 지금 있습니까? 없습니까? 사람들 눈에 보입니까? 안 보입니까? 양쪽에도 훅하고 꺼져버린 존재지요. 꺼져버린 존재니까 없는 공간이에요.

없는 공간으로 이 양쪽의 백성을 끄집어가는 거예요. 그걸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이제는 전에는 멀리 있던 너희가, 멀리 있다는 것을 인식을 하는 자만이 성도가 되는데 ‘아, 내가 멀리 있었구나!’ ‘내가 사람도 아니었구나!’ 그것을 아는 사람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그 다음에 뭡니까? 그리스도의 피로. 그리스도의 피에요. 그리스도 존재가 아니고. 그리스도 피에요. 그리스도 피라는 말은 지금은 찾을래야 찾을 수 없다. 그 때도 마찬가지고 지금도 마찬가지고. 인간 쪽에서 선택해서 골라잡아서 획득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이 말입니다. 왜? 피를 흘렸으니까요.

피라는 것은 인간과 주님과의 사이가 불편했다는 겁니다. 대척해서 한쪽에서 한쪽을 그냥 밀어붙인 거예요. 불도저로 그냥 밀어붙인 거예요. 나가 죽어라 하고 밀어붙인 거예요. 밀쳐버린 거예요. 없애버린 거예요. 주님을 없앴던 거예요. 그 때 없애버리면서 남겨진 게 뭐냐 하면 그게 십자가의 피가 되는 거예요. 14절에 보게 되면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이렇게 되어있지요. 인간세계에는 없어요. 예수님이 사라져 없는 존재라는 말은 없는 개념이 쏟아지고 있다는 거예요. 없는 개념이.

없는 존재가 외친 존재하지 않는 사라져버린 그분이 이야기하는 모든 개념은 이 인간 세상에 인간들이 없는 개념들이에요. 그러니까 없어진 거예요. 그 개념이. 지금 12절, 13절, 14절 전부 다 인간세계에서는 필요치 않고 시장경제만 눈치 보는 인간들에게는 아무 것도 없는 겁니다. 여기14절에 화평이신자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셨다 되어있지요. 중간에 막힌 담을.

한 때 이스라엘이 있었어요. 이스라엘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이 아닌 민족을 이방민족이라고 했고요, 그래서 아니다, 라는 말. 이스라엘 입장에서 아니다가 되었던 그 상황이 종말에는 없는 존재로부터 둘 다 아니다 성립되는 거예요. 둘 다 아니다. 자기 육체로 허시고, 헐어버렸다. 이스라엘과 이방민족이 하나가 되는 것이 아니고 둘 다 같은 쪽으로 없는 존재를 찾지 못하는 그러한 이방민족과 같은 동일한 처지에 있으면서 없는 존재가 내뱉은 없는 개념에 의해서 여기에 존재하는 새로운 공간으로 이것이 택한 백성으로 이방민족이건 이스라엘이건 관계없이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 피안에서 그들이 하나가 되는 겁니다. 이방민족이든 이스라엘이든 그리고 그 모두 다 예수님과 더불어서 하나가 되는 겁니다.

그게 15절에 나옵니다.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그 다음에 나오는 단가가 뭡니까? 자기 안에. 자기가 누굽니까? 예수님이지요.) 이 둘로 자기 안에 한 사람을 지어 화평케 하시고.” 이런 개념이 자본주의 안에 있는, 자본주의에서 쏟아지는 모든 개념의 의미하고는 공통점이 전무합니다. 공통점이 하나도 없습니다. 자본주의 개념에서. 자본주의에서 예를 들어서 애들에게 공부하라는 말은 결국 어디로 이릅니까? 애가 묻지요. 왜 공부해야 되지요? 공부해야 돈을 벌지. 돈이잖아요. 모든 의미가 어디로 모아지느냐 하면 이 바깥세계에 돈과 관련되어있어요. 돈이 있어야 사람이 곡식을 먹고 사니까요.

자본주의는 돈과 관련되어서 돈과 의미로서 쏟아져 나온 겁니다. 그 쏟아져 나온 의미가 이제는 성도는 없는 세계의 의미로부터 하나가 되게 하셨다는 거예요. 그러면 이 하나가 되려면 과정이 뭐냐 하면 그 둘 중에 이 중간이 되려면 이런 게 어려운데. 중간이 되려면 양쪽에 서로 반대되는 원수 된 자. 원수 된 자가 꼭 필요하겠지요. 이 원수 된 자가 있을 때 하나가 되는 거예요.

이제 스가랴 합시다. 이제 더 어려운 거 고만 하겠습니다. 10장 봅시다. 여기에 목자가 나오는데 목자는 뭐가 되느냐 하면 원수가 돼요. 하나님의 원수가 된다고요. 목자가. 목자가 하나님의 염소가 돼요. 염소. 숫염소. 목자는 아까 인간이라 했지요. 염소는 무슨 취급받는다? 짐승 취급 받습니다. 하나님께서 인정하지 않는 내어 쫓아야 될 염소취급 받는 거예요. 그러면 이건 뭐냐 하면 바로 하나님 보시기에 원수가 되는 일이 이스라엘 내부에서 발생돼요. 이스라엘 내부에서.

그러면 아까 에베소서에서 본 이스라엘과 이방나라가 이렇게 나누어지려면 여기에 둘 사이가 나눠지려면 원수지간이 된다 했지요. 아까 에베소서2장 12절,13절 봤지요. 그러면 이스라엘 내부에서 원수가 등장했다는 말은 이스라엘과 이스라엘 사이에 지금의 스가랴 당시의 이스라엘과 마지막 종말 때 메시아 오셨을 때 이스라엘과 이 사이에 뭐가 발생된다 말입니까? 여기에 원수지간이 돼요. 원수지간. 원수지간이 되어야 진짜 참 목자 진짜 목자가 되면 어떻게 되느냐 하면 원수지간이기 때문에 이 이스라엘은 현재 없는 이스라엘이에요. 이게 이스라엘이 실선으로 되어있다면 종말에 오는 이스라엘은 없어요. 아직 생성되지 않은 없는 존재에요.

이스라엘과 숫염소라고 인간취급 안했으니까 여기 선지자가 와서 고발했으니까 원수가 되겠지요. 이스라엘과 원수가 되면서 여기서 무슨 일이 벌어집니까? 여기서 바로 새로운 언약의 완성이 나오는 겁니다. 이제 스가랴 다음에 말라기 다음에 신약에 들어올 때 신약 성경에 종말 때 일어나는 현상을 미리 앞당겨서 이스라엘 내부에서 동일한 원칙으로 이게 분리가 일어나는 거예요.

그러면 이 목자를 보기 위해서는 에스겔34장1절,2절 봅시다.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인자야 너는 이스라엘 목자들에게 예언하라 그들 곧 목자들에게 예언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자기만 먹는 이스라엘 목자들은 화 있을진저(이 목자가 갑자기 하나님과의 원수가 되어버렸지요. 자, 원수가 된다는 것은 지금 이스라엘을 무효로 돌리고 현재 이스라엘 말고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그 시대에 존재하지 않는 이스라엘을 숨은 이스라엘을 하나님이 계획한 진짜 이스라엘을 언약의 완성과 함께 만들겠다는 그러한 증상으로서 이 예언의 말씀이 주어진다. 이 말입니다.)목자들이 양 떼를 먹이는 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쉽게 말해서 교회 교인들이 목사보고 “당신은 목사도 아니고 교회에서 나가!” 라고 그런 일이 별로 없지만. 그런 일이 있다고 칩시다. 그 말은 이 교회가 교인들 보기에 교회답다는 거예요? 안답다는 거예요? 교회답지 않기 때문에 목사보고 나가라고 이야기하는 거잖아요. 적이 있다는 것. 원수가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일관된 원칙에 의하면 하나님이 만족스러운 화평이니까 화평. 만족스러운 그런 하나님과 하나 되기 위해서는 필수적인 요소로서 그 전에 원수라는 것이 일어나야 된다는 거예요. 그게 반드시.

자식과 부모와 원수가 되고 부부와 원수가 되고 이게 있지요. 그게 있어줘야 이번 일이 끝나고 우리는 행복할 거야. 행복한 게 아니고 내가 예상 못한 하나님이 준비하신 그 일을 위해서 우리는 멀쩡한 사람끼리 원수가 되는 그런 사태가 일어나야 된다 이 말이에요.

자, 그렇다면 에스겔34장에서 이스라엘 목자. 이 목자를 왜 이렇게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보내서 고발하느냐 하면, 양들은 이 목자 앞에서 그냥 기계입니다. 이 목자가 자기를 휘두르는 자기 한계에요. 양의 한계가 목자였던 겁니다. 니가 아무리 노력해도 목자의 권세 바깥으로 못 넘어가요. 아무리 목사가 무슨 짓을 해도 “니는 성만찬할 때 그럼 니가 할래? 떡을 니가 떼고 잔을 내가 마실래? 성만찬 없으면 이건 교회 아닌 거 알지? 봐라. 내가 신학교 나와서 정식 목사 되어서 니도 성만찬 하잖아. 성만찬하게 되면 교회가 엉망이 되든 뭐가 되든 일단 성만찬이 되게 되면 내가 죽는 날까지 이걸 기념하라 했으니까 이건 뭐 교회가 약간 문제 있지만 교회가 교회인 건 마찬가지잖아. 그건 변함이 없어.” 라고 여러분들에게 그렇게 가르친다면 여러분들이 그 목사에 대해서 떠나라. 하겠어요? 그럼 다음 후임자 올 때까지 있어 주세요. 하지요.

아니 성만찬을 한다는데 그럼 사찰집사보고 성만찬 하라 할까요. 그럼. 주일학교 애들보고 시킬까요. 거룩한 주의 종이 성만찬을 해야 그게 교인들이 그동안 세뇌 받고 교육 받은 게 뭐예요? 성만찬이 있어야 그게 진짜 참된 교회의 정통성이 있다. 우리는 이단이 아니고 진짜 정통한 하나님이 인정하는 교회가 맞다. 그런 식으로 교육 받아 왔잖아요. 성만찬이 없으면 그건 이단이지. 이런 식으로 교육 받아왔잖아요.

그러니까 내가 원하는 그 눈치, 교회라는 눈치가 되기 위해서는 뭐 좀 참아야지요. 뭐. 월급 올려 달라 해도 참아야지요. 뭐. 참아야지요. 내가 진짜 교회 다닌다는 스스로 자기 자신을 자기가 자기 한계니까. 내가 내 모델이니까요. 구원받은 자의 모델이기 때문에 여기에 필요한 것이 뭐냐 성만찬이 실시되는 정통적인 교회가 필요하다. 그러면 그 조건에 맞추어서 참아야지요. 그래서 제가 그랬잖아요. 본인이 한계라고. 본인의 굴레를 못 벗어나는 거예요. 계속 눈치만 보고 있는 거예요. 눈치, 코치만 보고 있는 겁니다.

성경은 천하 자식이나 나보다 합당치 않다고 니 집안 식구가 뭐다? 니 원수라고 그렇게 이야기해도 ‘에이, 조용하게 살게요.’ 매일같이 조용히 산다고. 지금 하나님의 언약을 적용시키는 원칙에 대해서 얼마나 인간은 내가 사는 이유와 목적이 내 자신 뿐이기 때문에 내 자신이기 때문에 나를 안 다치는 쪽으로 계속해서 선택과 결정을 해버려요. 내가 안 다치는 쪽으로.

그러니까 에스겔이 너희들 지금 너희들 종교 지도자가, 4절부터 봅시다. “너희가 그 연약한 자를 강하게 아니하며 병든 자를 고치지 아니하며 상한 자를 싸매 주지 아니하며 쫓기는 자를 돌아오게 하지 아니하며 잃어버린 자를 찾지 아니하고 다만 포악으로 그것들을 다스렸도다 목자가 없으므로 그것들이 흩어지고 흩어져서 모든 들짐승의 밥이 되었도다 내 양 떼가 모든 산과 높은 멧부리에 유리되었고 내 양 떼가 온 지면에 흩어졌으되 찾고 찾는 자가 없었도다 그러므로 목자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주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라 내 양 떼가 노략 거리가 되고 모든 들짐승의 밥이 된 것은 목자가 없기 때문이라 내 목자들이 내 양을 찾지 아니하고 자기만 먹이고 내 양 떼를 먹이지 아니하였도다” 완전히 이스라엘 자체가 해체되는 거예요.

그게 이유가 뭐냐 하면 목자가 목자답지 않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이스라엘은 어느 굴레에 종속되어있다? 목자가 이미 경계선을 차지하고 여기에 있는 모든 양들은 목자를 벗어나서 다른 생각을 할 수가 없는 그러한 형편에 있다는 겁니다. 그러한 형편에. 그러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이야기가 예수님 오셔서 하신 말씀이 얼마나 파격적인 이야기인지 마태복음23장8~10절을 보겠습니다. “그러나 너희는 랍비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선생은 하나요 너희는 다 형제니라 땅에 있는 자를 아버지라 하지 말라 너희의 아버지는 한 분이시니 곧 하늘에 계신 이시니라 또한 지도자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의 지도자는 한 분이시니 곧 그리스도시니라”

이게 얼마나 파격적인 거예요. 요약하면 아버지는 혈육적인 아버지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멘토를 이야기하는 거예요. “당신 없었으면 나는 뭐 천국 못갈 수 있었습니다.” 이런 사람들. 그 멘토를 아버지처럼 섬기겠습니다. 아버지는 없어요. 그리고 지도자. 같은 뜻이에요. 하나님은 따로 계시고 내가 하나님께 인도하는 내가 당신을 구원해 주겠습니다. 내가 당신을 지도할 테니 내 말만 들으라고. 이런 지도자도 하나님께서 주신 적이 없습니다.

이건 지도자를 탓하는 게 아니에요. 이 양들아! 백성들아! 정신 좀 차려라! 정신 좀 차려라. 그 시대가 신약시대고 종말의 시대에요. 지금 문제가 뭐냐 하면 내가 여기 있고 있는 나를 좋은 나라 죽어서 천국가려고 하니까 이게 문제가 되는 거예요. 주님께서는 내가 있는 이상 내가 있는 천국은 이건 없는 나라가 아니에요. 내가 이미 예상한 나라기 때문에 이건 존재하지 않는 나라에요.

어제 수요일날 그런 이야기했지요. 그전에 내가 원하는 나는 내가 아니라고요. 내가 원하는 나는 지금 이 순간 내가 원하는 거예요. 여러분들이 스무살때에 현재 나이 50대를 어떻게 상상했습니까? 스무살 때에 30년 후에 내가 어떤 모습인가를 상상해보셨지요. 인간이 할 일이 상상하는 것밖에 없으니까. 상상했을 거예요. 했을 때 지금 그 모습입니까? 아주 엉뚱하지요. 왜냐 하면 그동안 부지런히 외부에 눈치 보면서 나름대로의 선택했기 때문에 이 모양 이 꼴 된 거예요. 외부 탓하지 말고 니 같은 남자 만나서 인생 조졌다. 이러지 말고. 문제는 내가 나를 한 순간도 포기한 적이 없다. 내 상상력을 포기한 적이 없고, 내 꿈을 포기한 적이 없는. 지금이라도 늦지 않아요. 지금 나이가 50이라면 30년 후에 어디가 있겠어요. 또 상상하지요. 그러면 30년보다 더 합시다. 죽어서 어디갈런가 그것까지 상상하겠지요.

그 상상은 지금 이 순간에 나를 포기하지 않은 채 하는 상상, 나의 한계성 안에 있는 나의 상상이에요. 그게 악이에요. 그게 악입니다. 이미 우리 자신이 악을 부른 거예요. 당신을 나의 지도자라 당신을 나의 영적인 아버지라 부를 때부터 이미 그 사람은 자기가 악에 속하고 있습니다. 그럼 뭐 예수님이 지도자고 그럼 예수님 아버지가 하나님이라면 그럼 예수님 올 때 예수님이라고 우리가 알아보면 되지 않겠느냐, 그건 뭐 간단하게 다른 사람은 목자도 아니고 지도자도 아니고 내가 목자고 내가 지도자고 내 아버지가 아버지라 이리 이야기하면 될 게 아니냐, 그리 이야기를 하게 되면 우리는 그 예수님을 원수로 취급한다니까요.

원수라는 요소가 빠져버리면 다시 피라는 요소가 빠져버리면 우리는 예수님과 하나가 될 수 없어요. 천국 백성이 될 수가 없습니다. 그 정도로 우리한테는 지금 한계가 있고 갇혀있는 상태고 문제가 커요. 우리가. 우리는 우리 바깥으로 못 벗어나요. 마치 기계와 같아요. 외부에서 시키는 대로 움직이지 우리의 고집은 꿱 하면 할 수 없습니다.

제가 어느 강의 때 그런 이야기했지요. 중국이 동계올림픽에서 반칙하고 심판 매수하고 그렇게 하니까 그걸 보는 사람들은 뭐라고 했습니까. 이럴 거 같으면 더러운 대우 받지 말고 다 선수 철수해가지고 다시 한국에 다 불러와. 기분상은 속 시원하지요. 그리 됩니까? 제가 분명히 이야기했거든요. 그 연금 메달 그 연금 타는 사람들 그리 안 되지요. ‘아이구~ 더러워라. 그만 참지 뭐.’ 세상이란 그런 거예요. 성질대로 하면 안돼요. 그럼 교도소 다 가있어요. 전부다 교도소 다가있습니다. 싫은 대로 하면 안돼요. ‘아이고~ 나 못났다 하고 나 하나만 참으면 되지. 만사가 조용해.’

원수라는 것은 주님이 만드는 것이지 내가 일부러 원수 만드는 일은 인간들은 절대로 벌리지 않아요. 좋은 게 좋은 거예요. 그저 은혜롭게. 그저 화평하게. 은혜롭게. 우리가 살아온 요령입니다. 그게. 손님 오게 되면 아이구 참 더러워도 겉으로 더럽다 하지 마시고 별나다 소리도 하면 안돼요. 그럼 또 안 온다 하니까. 왜? 시장경제 때문에요. 단골이 입 하나 뻥긋하면 손님 다 끊어져요. 그래서 잘해주고 보내고 난 뒤에 햄버거 사가지고 치킨 사가지고 꽉! 더러워라. 오늘은 이걸로 해소한다. 그리 살 뿐이지 어떻게 곧이곧대로 내 뜻대로 내 맘대로 다 합니까.

그래도 선지자는 그리 했잖아요. 선지자에게는 심장이 바로 주님의 심장이기 때문에 그래요. 심장. 에스겔의 심장은 새로운 이스라엘의 심장이에요. 에스겔의 심장은. 에스겔은 성신을 받아가지고 기존의 목자를 목자 취급을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 목자 이것을 가지고 늘 저주받는다고 이렇게 했습니다. 그 양들에 대해서 필요한 새로운 목자가 온다는 거예요. 새로운 목자가. 그 이야기가 스가랴10장 봅시다. 이제 스가랴10장 시작하는 겁니다. 하려하니까 10분 쉬어야겠습니다. 10분 쉽시다.

 

안양20220217b슥10장3절(양의 한계)-이 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하겠습니다. 첫 번째 시간에 인간은 한계에 돌파할 수 없다 했습니다. 양은 한계에 돌파할 수 없어요. 그러니까 목자에 대해서 시키는 대로 움직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걸 인정해야 돼요. 이방나라의 모델은 이스라엘입니다. 이스라엘 자체가 목자를 통해서 양들을 다스리는 체제로 갔거든요. 그런데 목자가 그렇게 되게 되면 목자가 만약에 딴 생각을 먹어버렸다. 그럼 양의 운명은 어쩔 수 없어요. 목자가 양의 한계이기 때문에 그리고 하나님 자체가 목자 없는 양은 없기 때문에 그래요. 목자 없는 양은 양이 아니에요. 그거는. 그거는 이스라엘이 아닙니다. 목자를 공격하고 이제는 양이 목자 노릇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그런 건 없어요. 목자가 썩었고 목자가 없다고 할 때에 기뻐하고 즐거워하세요.

제대로 된 목자가 준비되어있다는 뜻이에요. 그리고 양은 또 기쁜 소식 할게요. 기쁜 소식만 하네요. 양은 이사야53장 말씀처럼 자기 마음대로에요. 그냥 점이에요. 점. 첫째시간에 점은 실수나 실패가 없다고 했지요. 점은. 그리고 시작도 없고 끝도 없어요. 그냥 점이니까. 포인트니까. 그러니 성도가 자기 실수를 자기 실패를 탓하면 안돼요. 왜? 점 자체가 목자 안에 있는 양답기 때문에 그래요. 목자 안에 있다는 양. 한계는 목자가 정하지 양 스스로가 한계를 정하는 게 아닙니다. 새로운 목자가 오면 돼요. 새로운 목자 오면 되지 내가 스타 되고 내가 훌륭한 사람 되고 실수 줄이고 악을 줄이고 그럴 필요 없어요.

악을 줄이는 그 자체가 악이기 때문에 그래요. 전에 이방민족에 있을 때는 이방나라는 목자가 없어요. 그냥 눈치 보는 거예요. 이 세상 전체를 눈치 보는 거예요. 세상 전체를. 목자가 있다는 것은 이스라엘 체제에요. 이스라엘 구조에요. 그런데 에베소서2장에 아까 했던 다시 하면 2장에서 주님께서 피 그 다음에 원수, 그 다음에 피, 원수 같이 묶고 너, 나 할 것 없이 한 몸이 되는 것이 하나님의 언약의 완성된 모습이지요. 이제는 이방인이고 유대인이고 구분하지 않고 그리스도 피로 예수님과 한 몸 되는 거예요. 내가 니하고 한 몸이 아니고 예수님과 한 몸 되는 거예요. 이스라엘과 유대인이 한 몸 되는 게 아니고 이방인이 이스라엘과 한 몸 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과 한 몸이 되는 거예요. 왜? 사라진 분은 예수님뿐이기 때문에. 이 분이 바로 목자거든요.

보이지 않는 목자와 한 몸 되는 거예요. 그게 바로 양이에요. 그 목자가 올 때까지 눈에 보이는 한시적인 양으로서 양의 구조를 갖춘 것은 바로 이스라엘입니다. 그 이스라엘을 지금 스가랴를 통해서 지금 지적하고 박살내고 있는 거예요. 목자가 썩었다. 목자가 잘못되었다. 자, 그렇다면 다음에 중요한 게 뭐냐 하면 그러면 염소라 했다 말이죠. 아까 10장3절에. 내가 목자에게 뭐를 발합니까? 노를 발하며 내 숫염소를 벌하겠다. 되어있지요. 그러면 이 이스라엘 지도자들에게 분노하고 화를 내고 염소라고 지적을 하게 되면 그럼 목자는 절로 생깁니까.

이 말 듣고 사람들이 “아이고, 그럼 우리는 새로운 제대로 된 목자 모시겠습니다.” 이렇게 하면 일이 해결 돼요? 일이 해결되는 게 아니고 더 망쳐요. “제가 이제부터는 바르게 살겠습니다.” 이게 어디에 해당되지 않느냐 하면 구약의 선지자의 말에 이게 결합이 안 되게 되어있어요. 선지자의 말은 니가 그럴 수밖에 없다는 뜻이지, 이제부터 정신 차리라, 바르게 살겠습니다. 말을 듣고자 선지자가 말을 하는 게 아닙니다. 모든 선지자의 말은 니가 아무리 용을 써도 내가 너를 예언하는 예언대로 너로 망할 수밖에 없어. 그게 이스라엘의 운명이야. 끝! 이게 선지자에요. 이게. 이게 우리를 향하는 성경 말씀의 전체가 우리보고 그렇게 외치고 있는 거예요.

악은 어떤 모양이라도 버려라. 예. 악은 어떻게라도 버리겠습니다. 그런 뜻이 아니고 성령 받고 보니까 나라는 한계에 벗어나서 그리스도의 피로 하나가 된 거예요. 그러면 이미 그 자체는 쉬지 말고 기도하라가 이 안에서 성사가 되고 있는 겁니다. 왜? 내가 생각한 나는 주께서 알아서 나에 대해서 미련 갖고 애착 갖는 나를 주께서는 신경 안 쓰도록 세상 돌아가는 일이 계속 그런 쪽으로 일이 벌어지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세상에서 믿을만한 것들이 실망으로 바뀌는 식으로 주께서 이끌어주시니 이건 뭐 자동적으로 모양이 악의 모양이 버려지는 게 돼요. 세상에 대해서 실망스럽다는 말은 더 나아가서 그 세상에 대해서 희망을 갖은 내가 한심스럽고 진짜 짜증나고 하나님 보시기에 짜증나고 내가 나 보기에 짜증나. 내가 원망스러워. 그 딴 거한테 왜 자꾸 희망을 걸었느냐. 그 딴 거한테. 헛되고 헛된 것들한테. 거기에 희망을 거는 내가 한심스럽고 짜증이 나는 거예요. 그래서 그렇게 몰아가시는 거예요.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선지자의 말은 정신 똑바로 차리고 바르게 하면 니 앞으로 잘될게. 이게 아니라 이미 결정 났다는 거예요. 이스라엘이 멸망하기로 목자는 숫염소가 되어가지고 분노의 대상이 되기로 이미 하늘나라에서 이미 탕! 탕! 이미 결정 났다는 이야기를 이미 통보하고 있는 거예요. 앞으로 잘할게요. 라는 말은 하지 마세요. 우리도 마찬가지고요. 앞으로 잘할게요. 니가 니를 믿어? 그동안 니가 니를 믿어서 잘되는 꼴은 못 봤어. 니 안 믿어. 니도 믿지 마! 뭐 장담을 해. 각오를 다지고. 각오 다지지 마! 너 안 돼! 너 끝났어. 그거거든요.

그럼 이젠 내가 이제부터는 내가 양을 원수로 보지 않고 내가 좋은 목자로 하겠습니다. 그렇게 하는 게 아니고 없는 원수를 유발합니다. 없는 원수를 유발해요. 유발하는 방법은 뭐냐 하면 바로 선지자의 말을 가지고 메시아가 옴으로서 그들에게 뭐가 발생되느냐, 피가 발생되고요, 배척되는. 배척되는 사건이 발생되고 그로 인하여 바로 과연 원수는 원수이었었다. 하는 것이 들통 나게 하는 거예요. 적이 발생되는 거예요.

주님이 하는 모든 말씀은 적이 없다는 현장에서 적이 나타나게 만들어버립니다. 그래서 이 예언의 선지자의 말씀은 지키라고 준 게 아니고 “그랬구나! 그래서 미리 그 말씀을 확정지었구나!” 라고 고개 끄덕이게 만들어요. 고개 끄덕이게. 니 집안사람이 원수라고 할 때, 이건 앞으로는 싸우지 말고 화목하게 살라는 뜻이 아니고 “그랬구나! 집안이 내 원수가 아니고 일단계는 주님의 원수가 되고 그리고 내가 주님의 몸과 하나가 될 때 내 집안 식구가 주님의 원수인 동시에 그 안에 들어있는 나의 원수가 되도록 주께서 일을 그렇게 매끄럽게 깔끔하게 처리해 주시는구나!”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늘 아들한테 며느리한테 무시당하는 그 시어머니가 잘 할 수 있는 게 김치 담그는 거 하나 잘한다. 예를 들어봅시다. 그러면 일년중에 시어머니가 값을 하는 날이 와요. 그게 김장하는 날입니다. 며느리 다 불러놓고 자기 솜씨를 마음껏 보여주는 거예요. 나 이 정도야. 이래도 무시할래. 그래가지고 한 다라이 해가지고 퍼주면 며느리 김치 갔다가 지 집에 쓰레기통에 버려버리고 사먹고.

우리 자신은 믿지 마세요. 제대로 하는 게 하나도 없습니다. 왜? 제대로가 뭔지를 몰라요. 무엇이 제대로인지를 모르기 때문에 실패, 실수라는 게 성립이 안돼요. 뭐 제대로 한 게 있었는데 실수했다. 이러면 실수라는 게 있는데 제대로가 뭔지를 모르는데 무슨 실수, 실패가 있겠어요. 그래서 여기서 필요한 것이 뭐냐 말뚝이 필요하고요, 모퉁이 돌이 필요하고요, 그 다음에 싸우는 활이 필요하고요, 권세가 필요한 거예요. 그게 뭐냐 하면 4절에 나옵니다.

모퉁이 돌, 말뚝, 싸우는 활, 권세 잡는 자. 이 네 개를 합치면 메시아의 할 일이에요. 메시아가 하신 일이에요. 워낙 우리가 부실하니까. 우리는 눈치 보는 거 외에는 아무것도 할 줄 모르니까. 워낙 부실하고 우리의 한계는 목자밖에 못 벗어나요. 본인이 사기꾼이 와가지고 내가 목자라 하면 뭐 어쩔 수 없어요. “총신 나왔습니까?” “예. 목자 나왔습니다.” “예, 아이구, 목자 맞구나!” “내가 성만찬한다. 내가 세례 베푼다. 당신 나한테 대들지 마! 세례 누구한테 받았어? 나한테 받았지. 니가 나한테 대들어. 니는 니 스승도 몰라?” 이러면 그 때는 마태복음 23장을 또 몰라요. 교인들이. 목사가 알려준 적이 없어가지고 이 땅에 있는 지도자를 지도자라 하지 말라. 들어본 적이 있어야지요.

‘아하, 맞아. 지도자 없이는 우리가 구원 못 받는구나! 더럽더라도(혀를 차며) 나보다 나이가 적더라도 고개를 숙이자.’ 이런 식으로. 월급 올려 달라 맨 날 이 핑계, 저 핑계 세미나 비용대고 맨 날 비용 빼먹을 때도, 아이고 참자 주의 종은 하나님이 다룬다 하지. 일반 양은 다루는 법이 아니라 하지요. 주의 종은 하나님도 안 다루어요. 왜? 쓰레기이기 때문에. 다룰 가치가 있어야 다루지요. 뭐 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으면 다루지요. 다루지도 않아요. 쓰레기는 버리면 되지 안 다루어요. 안 다룹니다.

하나님은 예수님만 다루어요. 쓰레기는 안 다룹니다. 주의 종을 벌하는 것은 하나님이 벌한다고. 아니에요. 이 세상에 피 흘려서 원수 된 자만 주의 종을, 주의 목자가 되고 그 사람만이 염소를 염소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우리가 만약 주의 종가지고 니는 가짜야. 목자라 하는데. 누가 봐도 돈만 챙기는 목사가 어느 날 내 남편이 대장암 말기에 걸렸는데 기도하고 나서 나았다. 어떻게 됩니까? 남들은 전부 욕해도 그 사람만큼은 표를 그 사람한테 덮어야지요. 자기 이익을 받았으니까요. 그러니까 목사들이 목회할 때 딴 목회가 딴 게 아니에요. 심방가가지고 자기 표 밭다지는 게 목회에요. 아, 참 이제야 말한다. 이거에요. 표밭 다지는 거예요. “애가 요번에 대학 들어갔지요. 기도해 드리겠습니다. 아이고, 장로님 오늘 생일이잖아요. 아내가 기억하네요. 해가지고 작은 거나마 케익 들고 왔습니다.” 이런 거. 아이고 우리가 목사님 사드려야 되는데. 아닙니다. 섬기는 자가 높으다 했습니다. 온갖 성경구절 다 동원해가지고 자기 자리를 보전하려는 그런 발악을 그냥 발악을 해요. 발악을.

목자는 한 분 밖에 없습니다. 누구냐, 나의 원수 되신 그 분. 그 분이 목자에요. 나의 원수 되신 그 분이 목자에요. 피 흘렸다는 뜻이 뭔 뜻이에요? 나의 원수였다는 거잖아요. 아무도 못 알아봤다 이 말아닙니까. 그 분이 나의 유일한 목자이고 다른 목자는 아니에요. 사도바울이 고린도전서1장에서 사도바울이 뭐라고 했는 줄 알아요? 나는 너희를 위해서 피 흘린 적이 없다. 그래서 나는 메시아가 아니야. 그래서 나는 너희에게 세례주지 않는다.

세례는 오직 하나밖에 없어요. 성령세례 외에는 다른 세례는 없습니다. 물세례는 성령세례 오기 전에 한시적인 거였던 겁니다. 한시적인 것. 만약에 물세례 없으면 구원 못 받을 거 같으면요, 물세례 줄 때 아무나 못 주잖아요. 애들 물 뿌리고 하면 안 되잖아요. 그러면 여기에 뭐가 필요해요? 목사 필요하지요. 목사 필요하면 신학교 필요하지요. 신학교수 필요하지요. 월급 줘가지고 목사 시키는 이유는 나한테 세례주려고. 왜 그래야 되는데. 그래야 내가 양인데 구원받기 때문에. 이러한 이데올로기, 이념, 이런 세뇌, 이건 바로 진짜 피 흘린 분이 나의 내가 그 분의 원수라는 것을 흔쾌히 안 받아 들여서 이런 사단 난 거예요.

십자가 졌다 하면 주여, 제가 주의 원수입니다. 이런 고백만 하면 돼요. 그걸 세례는 뭐라고 했는줄 알아요. 누가복음 18장에서. 내가 죄인입니다. 그 이야기한 거예요. 주님 앞에. 나는 죄인입니다. 감히 고개를 못 들겠습니다. 그러면 될 문제를 가지고요. 수요일에 이야기했듯이 하나님과의 공통의 자리는 주님은 의인으로 돌아가고, 우리는 죄인으로 돌아가고 끝나는 거예요. 그 공통된 자리에 우리는 죄인으로 돌아가고 주님은 죄인을 위해서 대신 죽으신 분으로 들어가는 거예요.

양은 양이 죽었다는 말은 이삭이 죽는 자리에 양이 죽었다는 말은 양은 하나님의 표상이고, 거기에 누가 죽어요. 이삭이 죽잖아요. 양과 결합이 될 때 이삭이 살아나잖아요. 스톱! 해가지고. 양 잡고 이삭은 이미 죽은 자지만 양 덕분에 살아난 자로 새로 언약 개시. 언약 스타트! 언약 새로 개시. 그게 바로 새로운 피조물이잖아요. 그게 새로운 피조물이라고요. 이게 벌써 구약 때 창세기22장부터 벌써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그게 유월절 되게 되면 어린 양 피 바르고 이스라엘 백성은 살고.

자, 그러면 이제 첫 번 시간에 처음 나온 거 어려운 거 해보겠습니다. 왜 기존의 모든 목자, 제사장도, 선지자도 세워놓고 거짓 선지자죠. 물론. 세워놓고 왜 그걸 염소라고 짐승이라고, 양을 뜯어먹는 짐승에 불과하다고 왜 그렇게 하는가. 그게 무슨 문제 때문에 그런가, 혈통 문제 때문에 그래요. 혈통 문제. 혈통 문제가 어려워요. 쉽게 이야기해서 기존의 혈통을 아담의 혈통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겁니다. 기존의 혈통. 이스라엘과 이방나라 둘 다 공통점이 뭐냐, 둘 다 혈통으로 유지되는 나라들이에요. 혈통으로. 아버지 없는 아들 없고, 할아버지 없는 아버지 없어요. 혈통이 혈통으로 내려온 나라에요. 둘 다. 둘 다 메시아 올 때까지는 구약적이에요. 구약적. 구약적이라 하는 거예요.

구약틀을 안 벗어나요. 구약틀은 아브라함의 언약에서 주어지는데. 두 번째 요소가 중요해요. 첫 째는 땅이 실제로 주어집니다. 그 다음에 자손이 실제로 주어진다. 아브라함의 자손이 실제로 주어지고 아브라함의 땅이 실제로 주어진다. 이 땅이 무슨 땅이냐 가나안 땅입니다. 이거 어디에서 이루어졌어요? 여호수아 할 때 이루어졌잖아요. 지난 수련회 마지막 할 때 여호수아의 마지막에 요셉이 어디에 묻힙니까? 세겜이라는 곳에 요셉 뼈가 묻히지요. 그래서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을 정복한 것은 사실은 내부에 이스라엘 중요핵심부에 요셉의 뼈가 자기 자리를 찾아가는 거예요.

그럼 요셉은 이미 죽은 사람이에요? 산 사람이에요? 죽은 쪽이지요. 이미 죽은 쪽에 영향력이 산 사람 쪽에 미친다는 거예요. 이미 죽어서 없어지고 사라진 쪽이 있다고 여기는 쪽에 영향력을 계속 주고 있다는 그것을 실제로 증거로 보여주는 것이 여호수아전쟁이었습니다. 그러니 다른 이방민족에서는 어처구니없지요. 도대체 아무리 봐도 무기도 변변치 않고 훈련된 군사도 아닌데 이상하게 여리고성이 무너지고 아이고 성이 무너지고 요단강 갈라지고 도대체 어디서 든든한 백이 누구야? 배후에 백이 뭐가 있어? 그건 죽은 자의 백이지요. 죽은 아브라함의 백이고, 이삭의 백이고, 야곱의 백이지요.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죽은 자의 하나님, 죽은 자의 하나님. 죽은 자의 하나님. 예수님이 죽었잖아요. 죽은 자의 아버지 이게 바로 하나님 아닙니까. 이게 이방민족의 신과 다른 언약의 하나님이잖아요. 언약의 하나님이에요. 그러니까 혈통을 뭐로 바꾸느냐 하면 살아있는 자가 살겠다는 혈통을 뭐로 바꿔야 돼요? 죽은 자의 혈통 속에 가입하는 것. 이게 관건입니다. 그렇게 하려면 이미 죽으신 분이 영향력을 산 쪽에다가 영향력을 입혀줘야 돼요. 산 사람이 자살한다고 혈통의 족보가 언약의 족보에 가입이 될 수 있는 게 아니에요. 백신, QR코드 한다고 들어가는 게 아니에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다시 할게요. 첫 번째 한 거 원칙을 다시 한 번 해봅시다.

원칙은 원수가 없이는 새로움이 없다 했지요. 아까 에베소서2장에서. 아까 새로운 피조물 했잖아요.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라. 원수를 일부러 만드는 거예요. 원수. 혈통과의 원수. 혈통과의 원수는 바로 언약에 속한 분이 혈통과의 원수를 유발시켜 버려요. 어떤 인간도 자기 혈통, 자기 살아있는 몸에서 벗어날 위인은 아무도 없기 때문에 꼼짝 마라! 지요. 살아있으니까 밥이나 먹고 먹으려면 돈이나 벌어야 될 거 아닙니까. 이건 뭐 너무나 상식이고 이건 뭐 이걸 문제 삼는 사람이 문제이지. 이게 무슨 문제가 되겠어요. 이게 무슨 악의 모양이에요. 이게. 이게 무슨 악입니까. 내가 사는 게 무슨 악이 되겠어요. 그럼 죽으라는 말입니까. 말이 안 되잖아요.

그러니 예수님의 말이 너무 항상 과해요. 그러니까 할 수 있는 말 같으면 우리가 들어주지요. 그게 아니라니까요. 집안 식구가 원수다. 이 말은 항상 너무 과도해요. 참,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이런 말도요, 한 마디 한 마디 이렇게 너무 심하지 않다는 말이 하나도 없어요. 전부다 너무 심해요. 이건 예수님 말씀뿐만이 아니고 선지자 말도 그래요. 지키라고 준 게 아니고 어쩌라고? 어떻게 할 수가 없어요. 주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이 혈통 자체를 원수로 하기 위해서 스스로 뭐냐 하면 버림받는 자 되신 거예요. 스스로 버림 받아버려요.

그럼 버림받으면 뭐냐 하면 버림받게 되면 이 세계는 여전히 건재한 세계가 되겠지요. 그리고 예수님은 뭡니까? 버림받은 쪽이 되겠지요. 버림받을 때 곱게 나가주세요~~ 하고 버림받은 게 아니고 여기서 원수가 되지요. 원수. 원수된 것은 버림받았지요. 버림받은 쪽에 여기에 여전히 건재한 세계에서 자진해서 버림받은 쪽이 나올 수 있는 사람은 있어요? 없어요? 아무도 없지요. 아무도 없는 거예요. 이게 주님이 자기 백성에게만 제공하는 양, 또는 나의 한계입니다. 전에 한계는 뭐냐 하면 내가 여기 있고, 요새 같으면 시장경제가 한계이고, 그 당시 유대인 같으면 지도자들이 한계가 되고. 율법이 한계가 되겠지요.

그런데 예수님이 오셔서 십자가 바로 너는 나의 원수고, 나는 너 때문에 나는 죽었다고 이야기할 때 이게 뭐냐 하면 나의 양이 나의 한계가 십자가까지 이게 확장된 거예요. 십자가까지. 아~ 이 세상 넘어 천국이 있는 것이 아니고 세상 넘어 가보니까 산 넘어 가보니까 거기에 제대로 된 저주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겁니다. 어린 애들이 동네 산을 보면서 특히 연약한 감성을 가진 애들은 꿈을 꿔요. 저 산 넘어 뭐가 있을까? 산 넘어 어떤 이상세계가 펼치는 거예요.

옛날 내가 알던 노래 이런 노래가 있어요. 산 넘어 산 또 넘어 산. 아득한 고향이라는 노래가 있어요. 산 넘어 산 또 넘어 또 산. 아득한 고향 있어요. 굉장히 노래가 슬퍼요. 여러분이 아시는 오빠생각 같은 거요. 오빠생각도 고향에서 벗어나요. 오빠가. 벗어나서 서울 갔던 오빠가 내 한계선에서 벗어난 외부에 있는 오빠가 나에게 비단구두 사주지요. 그게 애들의 여망이고 이게 바로 교회 다니는 사람의 여망 아닙니까.

주님이 천국을 줄 거라 생각하지요. 그러나 내가 했던 막상 그 한계를 그냥 꿈으로 여지로 남겨둔 이건 내가 미처 모른다고 한 그것을 몽땅 알게 하셨습니다. 그게 뭐냐 내가 내 너머에 내가 죽어 마땅한 십자가 죽어 마땅한 것은 예수님이 아니고 내가 바로 당사자였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 이게 바로 우리가 느끼는 한계입니다. 비로소 우리는 십자가를 통해서 성령을 통해서 내가 누군지를 비로소 알게 된 거예요.

마치 군대생활 힘들어서 철조망 넘어 탈영을 했는데 탈영해서 보니까 더 넓은 철조망이 있었던 거예요. 더 넓은 철조망이 있어가지고 탈영 괜히 했어. 그냥 탈영하지 말고 그냥 종교생활이나 할 걸. 주님께서는 이 아담의 혈통 자체를 이걸 한계로 삼아버립니다. 인간은 왜 살고자 하느냐 아담의 한계 안에 갇혀있기 때문에. 혈통 안에 갇혀있기 때문에. 그리고 내가 부모로부터 태어난 것이 아니고 내가 있음으로서 부모가 나의 한계라는 것을 이야기하고, 할아버지가 있음으로서 내가 백날 애써도 할아버지 틀을 못 벗어나는 거고, 내가 백날 애써도 증조할아버지 틀을 못 벗어나고, 백날 노력해도 아담의 틀을 못 벗어난다는 것. 선악과 따 먹은 그 정녕 죽으리라에 그 사실만 계속 내 자식들에게 전수하지요.

우리가 자식을 키워서 남겨 준 것은 자식이 늙어죽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남겨준 게 없어요. 아이고, 아이고, 이 볼때기 이쁜 것. 이쁘다 해도 그렇게 해도 결국 그 이쁜 볼때기 나중에 늙어 죽는 볼때기. 뭔가 이렇게 사라지고 흘러가요. 강물처럼. 자꾸 없어져. 닳아지고. 그러면서도 해답은 없고요. 그래서 요 문장을 쓸 텐데 ‘인생은 문제만 야기한다.’ 살면 살수록 계속 문제만 야기합니다. 너무나 힘든 문제가 등장하면요, 심지어 이런 말을 해요. 내가 5년 전에 일찍 죽었으면 좋았을 걸. 괜히 5년 더 살아가지고 문제만 더 크고. 이런 꼴 보려고 더 살았나. 자식들에게 그러잖아요. 자식들이 마구 싸우면, “내가 이런 꼴보려고 눈을 못 감은 줄 아나” 부모들이 화를 낼 때 그런 말을 한다고요. 내가 못 볼 걸 봤다. 이런 식으로. 인생은 살면 살수록 문제만 야기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 흘러간다는 것. 아담 혈통. 아담 혈통 문제는 계속 흘러가게 하는 거예요. 인간 세상에서 성공한다. 출세한다, 하는 것은 마치 뭐와 같으냐 하면 KTX 기차를 타는데 어떤 염치없는 아주머니가 오성역에서 타가지고 그 다음에 천안역까지 한 10분밖에 안 걸려요. 아무도 표 검사를 안 하니까. 오성역에 들어갔다가 앉아 있다가 천안역에 후딱 내리면 돈 벌었잖아요. 앉아있으니까 승객 관리하는 아가씨가 딱 와가지고 이 자리에 앉으시면 요금을 내셔야합니다. 이렇게 이야기했거든요. 그런데 그 아주머니가 돈을 낸 게 아니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 다른 자리에 앉아요. 이게 인생입니다. 이 자리에 앉으면 돈 낸다 하니까 옆에 옆에 자리 앉는 거예요. 결국 오성역에서 돈 냈어요.

이 세상, 이 자본주이 안에 있는 모든 남자나 여자나 자식들이나 부모나 모든 하는 일이 이 짓하고 있어요. 이 사업하면 걷어치우고 딴 사업하고, 도박을 쳐도 이 자체가 아담 열차 계통 자체가 지금 흘러가는 거예요. 허무하게 날아가 버리는 겁니다. 비고정적이에요. 비고정적. 오늘 제목 이걸로 하겠어요. 비고정적 혈통. 그러니까 이 목자가 와가지고 “똑바로 살아. 바르게 살아.” 이게 됩니까? 안 됩니까? 이 열차 자체가 흘러가는데 여기에 앉지 말고 저기에 앉아. 이게 돼요? 안 돼요? 안 되지요. 그러면 목자가 해야 될 것은 이 자체를 기대하지 말아야 돼요. 원수를 만들어야 돼요. 원수를 만들기 위해서 만들고 그 다음에 뭐해야 되느냐 혈통을 고정시켜 놔야 되지요. 앞침으로 못으로 박는 것처럼. 그게 바로 4절에 모퉁이 돌, 말뚝, 그리고 싸우는 활이라 하는 것은 결국 싸움을 통해서 이 일이 벌어져요.

그 다음에 권세 잡은 자. 마지막에 권세 잡은 자부터 먼저 보겠습니다. 마태복음28장18절이요.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20절,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이제 감이 오지요. 아~! 이 분이 목자구나! 왜? 권세는 확정적이에요. 그래서 점 같은 우리한테는 실수, 실패를 우리한테 묻는다? 안 묻는다? 우리 자체를 안 물어요. 아예. 우리 자신의 행동에 대해서 묻지를 않아요. 왜냐? 이사야53장6절에 양은 각지 제 갈 길로 가거늘, 양의 특징은 제 갈 길로 가는 거예요. 왜? 목자가 확정이 안됐으니까. 이 목자가 괜찮은 목자일까, 저 목자가 괜찮은 목자일까, 11호차 탔다가 12차 탔다가 그냥 자리 이동해가지고 그냥 눈치 보면서 꽃꽂이 하다가 치우고 술집하다가 치우고 노래방하다가 치우고 지하에서 지상으로 올라가다가 커피점 때려치우고 뭐 그냥 뭐 계속 아담의 혈통에서 살아남아야 하니까 하는 거예요.

요한복음17장2절 봅시다. 성경 이렇게 찾아보는 것은 하나라도 기억하라고 하는 거예요.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사람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그 다음 뭡니까?)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이니라.” 영생을 받을 자에게만. 더도 덜도 말고 딱 영생 받을 자에게만 아버지와 아들이 창세전에 이미 의견한 대로 그 사람, 그 사람 천국 들어와. 들어와야 돼. 탁 탁 집었던 그 집었던 사람에게만 영생이 가도록 그래야 영생이 허비가 안 되니까요. 영생이 허비가 되면 안돼요. 낭비가 되면 안 되잖아요. 영생은 딱 그 사람에게 주기 위해서 권세를 조정해요. 권세를.

그러면 영생 받을 자들은 어떻게 됩니까? 자기 한계를 저주 받아 마땅함을 깨닫게 돼요. 안 그러면 주님 주신 영생에다가 내 착함을 거기다가 자꾸 보태려고 하는 거예요. 이러면 자기가 하나님의 원수 된 자, 나는 세리요, 창기요, 하는 그게 완전히 날아가 버려요. 주께서는 죄인을 부르러 왔는데 졸지에 자기가 죄인이라고 고백하는 의인이 되어버리니까. 그건 주의 일을 일종에 훼방하는 게 되지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이 권세를 가지고 우리에게나 세상 사람에게나 딱 적합하게 해서 우리 자신에 대해서 애착과 미련을 안 갖게 만들어요. 그건 니가 모자란다. 나쁘다가 아니라 니가 니하는 일에 스스로 시시하게 볼 줄 아는 안목이 있어야 한다. 니 자체가 어떻게 성공하고 어떻게 실패하고 이 자체가 아무 의미 없는 시시한 일. 주께서 원하지도 않는데 지 혼자 대단한 사람이라고 여기는 그 자체 그것이 주님께서는 그 비고정적인 것에 대해서 신경 쓰지 말라고 그렇게 하시는 거예요. 권세는 그렇게 봤습니다.

따라서 사도들은 주님의 권세에 의해서 자기 원치 않는 길로 가가지고 세상 사람보기에 고생 직사게 해요. 그런데 고생 직사하게 해도 고생 누가 하겠습니까? 주님의 권세가 고생하는 쪽으로 몰아넣었어요. 그러니 그들은 범사에 감사했지요. 그걸 고생이라 여기지 않고 그걸 고난이라 하지요. 주의 고난에 참여하게 된 것을 앗싸! 한 거죠. 아! 주께서 또 일을 벌리셨구나! 이런 식으로.

그 다음에 봅시다. 말뚝 봅시다. 말뚝. 이사야22장23절에 있습니다. “못이 단단한 곳에 박힘 같이 그를 견고케 하리니 그가 그 아비 집에 영광의 보좌가 될 것이요” 사실은 못이 단단한 것과 그 다음에 아까 스가랴10장 4절에 나오는 모퉁이 돌 전부 다 같은 겁니다. 그리 보시고 그 다음에 스가랴4장7절 보겠습니다. 이건 모퉁이 돌이에요. 이렇게 보시면 성경 전체가 여러 권이 아니라 한 권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습니까. 한 권이죠. “큰 산아 네가 무엇이냐 네가 스룹바벨 앞에서 평지가 되리라 그가 머릿돌을 내놓을 때에 무리가 외치기를 은총, 은총이 그에게 있을지어다 하리라 하셨고” 은혜에 은혜가 또는 긍휼하심, 주께서 불쌍히 여기심이 거기서 있다는 거예요.

머릿돌, 말뚝, 모퉁이 돌, 전부다 이걸 합쳐버리면 고정된 것이지요. 고정된 것. 고정된 이것을 주께서는 이걸 뭐라고 하시느냐 성전이라 합니다. 성전. 요번에 여름수련회는 에스겔로 할 예정입니다. 에스겔은 성전 이야기입니다. 성전이 없는 성전이에요. 눈에 안 보이는 성전이에요. 그 벌거벗은 임금님이야기알지요. 누가 봐도 옷을 안 입었는데 신하들은 입었다고 이야기하지요. 성전은 없는데 천사가 와가지고 측량합니다. 희한하지요. 성전이 없는데 왜 측량을 해요. 측량하는 그 숫자가 뭐냐, 사람 숫자에요. 사람들 머릿수를 모아서 인간을 벽돌로 간주해서 모아지는 성전. 그게 바로 주께서 만드신 성전입니다.

그래서 어떤 그림에 보면 약간 흉측하기는 하지만 어떤 그림이 멀리서 보면 하나의 몸이 인체가 되어있어요. 멀리서 보면. 단 하나의 몸이에요. 옛날 신학교 다닐 때 어떤 그림을 봤는데 멀리서 보니까 한 그림인데 자세히 보면 하나, 하나가 사람모습이에요. 사람 하나, 하나가 세포로 구성되어있는 모습. 좀 징그럽지요. 좀 징그러워요. 내 기억으로서는 루터교에서 나온 전도용에 이렇게 나왔어요. 이걸 설명하기 위해서. 너와 나가 모두가 한 몸이 되었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여기서 이렇게 되어버리면 여기서 고유의 개별적인 것, 개별적인 고유성 독자적인 것은 날아가 버려요. 이걸 에베소서4장에서 뭐냐 하면 몸도 하나요, 믿음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요, 소망도 하나요, 그렇게 되어있어요.

그러니까 여기 믿음도 하나니까 나의 믿음도 아니지요. 무슨 믿음, 우리의 믿음, 우리의 믿음이 성령을 통해서 에베소서2장8절에 믿음은 행함이 아니고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니까 주님의 이 세상에 가졌던 주님이 세상에 살면서 가졌던 아버지라는 믿음이 여기서 하나의 흘러내려서 전부 다 예수님과 합하여 이게 우리의 믿음으로 구원받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의 믿음으로 구원 받는다는 이것을 가지고 사도바울은 뭐냐 주 예수의 이름으로 구원 받는다는 거예요. 주님의 이름. 주님의 갖고 있던 그 믿음을 우리가 분양 받아가지고 내게 아니고 주님의 것을 같이 흘러 제공받아 가지고, 제공받았으니까 무슨 힘이냐, 당기는 힘이 있어요.

줘놓고 당기는 거예요. 줘놓고. 그리스도에게 팍팍 당기는 겁니다. 그래서 아까 봤던 말뚝에요, 말뚝 다시 돌아가 봅시다. 정말 이런 거 보면 책이 66권이 아니고 한 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어요. 이사야22장22절에 보면, “내가 또 다윗의 집의 열쇠를 그의 어깨에 두리니 그가 열면 닫을 자가 없겠고 닫으면 열 자가 없으리라” 이렇게 되어있지요. 에스겔34장에서 제가 아까 봤잖아요. 목자를 치지요. 그러면 에스겔35장, 36장, 37장, 보면 목자가 오는데 누가 목자가 되느냐 하면 다윗이 목자가 돼요. 다윗이. 그 다윗은 이미 죽은 걸로 되어있는데 죽은 걸로 되어있는 그 다윗이 목자로 등장합니다. 그걸 가지고 무슨 언약이라 하는가, 다윗언약이라 해요.

다윗 후손이 왕이 되는 식으로 새로운 이스라엘이 구성되는 약속, 다윗언약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복음이라는 것은 로마서1장에 보면 다윗의 혈통으로 나신 분이 메시아다. 그런데 그 혈통은 다윗의 혈통인데 다윗 가문에서 온 혈통이 아니라 다윗의 가문 자체를 혈통으로 간주하지 않은 채 다윗이 다윗의 혈통이 되시는 겁니다. 다윗의 혈통을 부정하기에 다윗의 혈통이 되는 방식. 아, 어렵다. 정말. 다윗의 혈통으로 오신 그 분이 혈통과 바이 바이하면서 죽어버려요.

죽었는데 그것이 끊어져야 될 다윗의 혈통이 본격적으로 생명을 얻는 부활의 새로운 다윗이 혈통으로 하나님 앞에 고정적으로 간주되는 겁니다. 그 족보를 가지고 무슨 족보냐, 멜기세덱 족보라 해요. 하늘에서는 족보가 없는 멜기세덱이 내용은 멜기세덱 족보고 땅에서는 다윗의 혈통이고. 그래서 단군의 후손, 단군의 자손, 단군의 자손이 멜기세덱에 들어가려면 지상에서 뭐를 거쳐야 돼요? 다윗의 혈통을 거쳐서 올라가야 돼요. 다윗의 자손. 다윗의 자손이 누굽니까? 우리를 마중하러 하늘에서 오신 분이 누구지요? 바로 예수님이지요.

예수님이 오셔서 영으로 우리 한국 사람에게 영으로 왔다 합시다. 예를 들어서 쉽게 금메달 딴 최민정이라 합시다. 최민정 금메달 땄잖아요. 연금 얼마 주나 그거 생각하겠지요. 그런데 갑자기 여기서 성령이 임했다. 성령이 임했다 하는 것은 죽은 적 있었는데 그 죽었다는 이야기가 옛날이야기였다. 라는 게 성령이에요. 왜냐 하면 성령은 예수님의 영이거든요. 죽은 적이 있는데 지금은 살아있다. 능력을 품고 있는 것이 성령이잖아요. 그럼 성령이 왔다는 말은 죽은 적이 있는데 지금은 살아 있다, 에 그 경유, 그 절차를 그대로 우리에게 적용시켜 줄게. 해서 오신 분이 성령입니다.

성령은 옛사람도 알고 새사람도 알고. 이 자본주의도 알고, 하늘나라 다 알고. 흘러가는 아담의 혈통도 알고, 확정된 최종적으로 다 이루었다. 확정된 혈통이 따로 있는 걸 알고. 보이는 세계도 알고, 보이는 세계는 너무나 잘 알지요. 왜? 본인이 한계를 느꼈던 그 세계기 때문에 본인이 못 빠져나온 세계. 늘 눈치코치보고 산 그 세계를 너무 잘 알고, 눈치 본다는 것은 누구 눈치를 본다는 겁니까? 내가 내 눈치 본다는 거예요. 니 이러면 미쳐. 니 너무 광신도야. 니 너무 나대지 마. 적당히 해. 좋은 게 좋은 거야. 남하고 원수지지 말고. 이렇게 늘 내거 챙기는 세계도 알고, 이제는 안 그러는 게 아니고 그럴 필요가 없는 거예요.

세상의 재물은 결핍을 느끼고 성도는 만족함을 느끼고, 이게 아니고 만족할 필요조차 없는 거예요. 나는 이제 만족스러운 삶을 살아야지. 그것도 시시해. 그러지 마. 만족한 삶이 어디 있어요. 인간에게. 만족해도 안 해도 둘 다 시시하다는 것을 알려주는 삶, 그 기쁨이 오래 안 간다는 것을 아는 삶, 그게 별게 아니라는 것을 아는 삶, 그게 바로 성전 안의 혜택입니다. 성전은 죽었다가 사흘 만에 내가 만든다 하는 게 성전이에요. 성전 자체가 주님의 확정되고 고정된 겁니다.

이제 스가랴 봅시다. 스가랴4장6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요것도 좀 설명해 드릴게요. 하나님께서 솔로몬 성전을 이스라엘에게 지라 했잖아요. 박살났지요. 바벨론해서 완전히 불로 다 태웠습니다. 해놓고 난 뒤에 70년 후에 다시 와가지고 또 성전 지라 하는 거예요. 또 성전 박살나요. 왜? 어디까지나 원수가 아직 안 나타났으니까. 이방민족이 같이 겸해서 나타나지 않았으니까. 장갑 한 짝을 잃어버리면 그 한 짝 못 씁니다. 마찬가지로 둘 다가 등장해야 돼요. 양말도 마찬가지고. 짝이 있어요. 이스라엘의 원수가 등장해야 그 중에서 둘 다가 의미 없이 날아가고 이스라엘 내부에 또 원수가 발생해야 되고.

그런데 성전을 지라하니까 이스라엘 백성은 성전을 짓고 있었던 거예요. 아직까지 구약적이에요. 자, 구약적이라 하는 것은 다시 여러분에게 알려드리면 아브라함 자손이 약속의 땅을 차지하고, 또 아브라함의 자손이 약속의 땅에 사는 걸 말하는 거예요. 그러면 성전 짓고 또 지라는 말은 그 성전이 어디에 있는 땅입니까? 약속의 땅이라는 것이 아직도 유효한(종말이 아니라서) 땅에 성전 지으라는 말이지요. 그런데 성전 지라고 해놓고 둘 다 다 날아갔다는 말은 약속의 땅이 드디어 마지막이 되면 그것마저 이제는 의미 없게 되는 그날 그게 종말이에요. 종말. 그럼 땅이 하늘로 올라가지요. 그럼 성전은 어디에 하늘로 올라가지요. 땅이 하늘로 올라간다는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그 성전이 로켓처럼 죽었다가 사흘 만에 하늘로 승천하잖아요.

승천했다는 말은 모든 언약의 완성은 이 지상에서는 찾을래야 찾을 수가 없는 거예요. 이 지상에는 오직 자본주의 사회뿐이에요. 주님 찾아봐야 주님 없어요. 하지만 고정된 것은 하늘에 있으니까 하늘에 있는 고정된 원칙 안에서 지상의 모든 것은 이제는 갇혀있는 상태에서 모든 일은 영생 줄자에게만 영생이 돌아가도록 권세를 발휘하는 그런 장이 되는 겁니다. 이 땅에서.

그러니까 여기에 4장6절에 보면 “그가 내게 대답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스룹바벨에게 하신 말씀이 이러하니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영으로(성전이 만들어지는 거예요. 영으로) 되느니라” 성전이 안 보인다는 말도 되지만 성전은 바로 내 몸이 성전이라는 말도 돼요. 여러분의 몸이. 고린도후서6장에. 그리스도 영이 임한 자가 곧 하나님의 성전이다. 여러분이 아시지만 찾아 읽어드리겠습니다. 고린도후서6장16절에,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 그러므로 너희는 그들 중에서 나와서 따로 있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라 내가 너희를 영접하여” 이리 되어있지요. 이런 말씀이 나올 때 “그래, 불신자하고 결합하면 안 돼!” 이런 식으로 하지 마시고요, “이 말씀 지키겠습니다.”가 성립이 안 되는 시대라고요. 이 시대가.

성령이 그냥 놀고 계시는 게 아니잖아요. 고린도전서3장도 마찬가지입니다. 3장16절,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 선언했잖아요. 거룩하다. 이게 확정된 것이고 모퉁이고 이게 못이에요. 이 못 내가 박았어요? 여러분이 박았어요? 내 인생은 내가 어떻게 할 수 없어요. 우리는 한계에 있고 갇혀있는 상태이기 때문에 우리는 양이 되어가지고 어디로 갈지를 몰라요.

목자가 와서 양을 딱 자기 안에 집어넣으면 우리는 그 목자의 그 양이 되어가지고 목자가 선언하는 모든 성전이 되어라, 뭐가 되어라, 되어라, 너는 될 수밖에 없다. 그냥 혜택을 다 입는 거예요. 그냥. 그래서 우리가 성도가 할 것은 뭐냐 하면 주께서 다 이룬 것만 그냥 뽑아내듯이 하루, 하루 뽑아내면서 살면 돼요.

아침에 치약 짜면서 치약도 주님께서 주신 겁니다. 이리 하면 돼요. 그게 뭐어렵습니까. 말로 하려하니 길고 어렵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가지고 새벽3시반에 잠깨가지고 오늘도 잠 깨워주셔서 그것도 주께서 하신 일입니다. 이런 식으로 하루 일과 시작해가지고 30분 깨다가 또 잠 자가지고 아침 10시에 일어나더라도. 그것도 주께서 하신 일이잖아요. 내가 할 게 아무것도 없는 이유는 우리가 너무 시시하기 때문에 그래요. 아무것도 별게 아니기 때문에.

점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점. 제목을 바꿔야겠다. 점. 전에는 악마에 속한 기계였다면 이제는 주님에 속한 주님의 증인으로서의 기계 같아요. 끝으로 이 말씀드리겠습니다. 천사가 기계에요. 천사가. 융통성이라는 것은 손톱만큼도 없습니다. 냉정하고, 냉혹하고, 봐주는 것도 없고, 그 천사의 기능. 하나만 더 하고 마치겠습니다. 싸우는 활. 시편45편5절이요. “왕의 화살은 날카로워 왕의 원수의 염통을 뚫으니 만민이 왕의 앞에 엎드러지는도다” 왕의 원수를 염통을 뚫지요. 우리가 압니까? 양이 압니까? 아니면 새로운 확정지은 목자가 원수를 뚫어야 그래야 최종 권세를 주님이 갖고 있습니다.

인생이 힘든 것은 자꾸 정상을 찍으려고 하기 때문에 그래요. 우리가. 우리에게 정상이란 없습니다. 그냥 세례 왔을 때, 평탄케 하라 했거든요. 높아진 건 낮아지고, 낮아진 것은 높아져가지고 예수님 눈앞에서 어떤 높은 것도 없고 어떤 낮은 것도 없고 출세한 것도 없고, 실패한 것도 없고, 우리 원래 자체가 실패니까요.

우리가 목표할 정상은 우리 눈앞에는 없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그냥 정상은 없어요. 전교1등하는 거 정상 찍는 거 아닙니다. 1등하라고 주께서 환경을 그렇게 조성해서 구차 없이 1등한 거예요. 구차 없이. 나오는 건 다 아는 것만 나와 가지고 찍어서 그만 100점 맞은 거예요. 모든 것은 어쩔 수 없이 주께서 그렇게 하신 거예요. 왜? 우리는 그리스도의 기계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마지막 때에, 종말 때에, 일어난 일을 앞당겨서 저희에게 알려주시니 감사합니다. 숨어있고 세상에 보이지 않는 그 분의 활동에 의해서 죽은 우리가 이미 살았고 이미 벌써부터 주의 일을 할 수 있는 천국 백성 되게 해주셨사오니 이 기쁨을 항상 잊지 말고 늘 감사하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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