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십자가를 아십니까(4강) 민수기25장1절(예배 속에 모순)20211227b
(강의:이근호 목사)
오늘은 몇 페이지를 하느냐 하면 21페이지 합시다. [십자가와 예배]
지난 시간까진 서론이라 치고요. 21페이지 보기 전에 19페이지 밑에서 여섯 번째 줄에 보겠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의 출입구는 하나뿐이다. 십자가.” 십자가를 고린도전서 1장에서 설명하면서 이걸 뭐로 보느냐 하면 ‘모순’으로 본 거예요. 모순이란 말은 인간세계에서는 모순되는데 이걸 쉽게 풀이하면 인간의 지혜를 능가함, 이게 모순이거든요.
그래서 고린도전서 1장에 보게 되면 너희들이 십자가라는 내용을 조금이라도 알았더라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않았다는 대목이 나와요. 십자가 사건, 이런 것 참 설명하는데 여러분들이 못 알아들을까봐 신경이 쓰이는데 그 사람이 어떠냐 하면, 이쪽에서 막 설을 풀며 난 이렇게 생각한다, 이렇게 생각한다 하는 견해가 있을 것 아닙니까.
그러나 사건이라는 것은 이거는 설명할 때만 생기는 게 아니고 설명하든 안 하든 그 사건은 이미 터져버린 사건이에요. 십자가는 하나님께서 사건으로 설명하는 거예요. 이순신 장군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해? 뭐 강감찬은 이렇게.... 인간 대 인간으로 설명할 순 있지만 사건이란 것은 이거는 설명한다고 해서 그것이 사라지는 게 아니잖아요. 설명 안 한다고 해서 사라지는 것도 아니고 한다고 해서 있는 사건이 또 변하는 것도 아니에요. 설명하든 말든 사건은 묵묵히 그 사건의 취지는 거기서 흘러넘치는 겁니다.
믿기 싫거든 말든지, 이런 배짱, 대단한 배짱이 사건이에요. 실제 일어난 사건. 이 사건을 설명할 때 이렇게 되는 겁니다. 인간들은 하나님에 대해서 아는 바 없기 때문에 생긴 사건으로 보는, 십자가를. 빨간 걸로 적어볼게요. 십자가 사건은 인간들이 하나님에 대해서 아는 게 전혀 없어서 생긴 사건. 그러면 십자가 사건이 들이댈 때마다 뭐가 반복되느냐 하면, “너희들은 하나님에 대해서 아는 게 없어. 이 무식한 것들.”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럼 십자가에서 아는 건 뭐냐? 십자가는 오직, 그 뒤에 나옵니다. 오직 하나님만 아는 하나님의 깊은 것, 그걸 하나님의 마음으로만 알 수 있는 것, 이게 십자가에요. 그러니까 십자가를 믿으란 말은 이 세상에서 뭔 뜻입니까? “너는 네가 백날 죽었다 깨나도 십자가는 모른다.” 이걸 전하는 거예요. 모른다 해, 모른다 해. 이걸 전하는 거예요.
“네가 종교생활 백날 한 것 소용없어. 다 무산돼. 그건 아무 소용없어. 십자가 모르면 끝이야.” 왜? 십자가만이 유일한 하나님의 문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럼 문은 어디서 생기는가? 주일 날 이야기했지요. 예수님의 몸통으로 갇혀있는 몸에 오다보니까 구멍이 뚫어졌잖아요. 하나님이 도적 같이 왔기 때문에 비로소 생겨버린 처음으로 생긴 그 구멍이 바로 십자가고, 그것만이 거기서 빠져나오는 출구가 되는 겁니다. 완벽하게 갇혀있는 거예요. 인간의 지혜에.
이것이 모순된다는 말은, 평소에 인간들은 모순을 거부한다는 뜻이에요. 모순 없는 세계를 인간들은 추구합니다. 뭔가 궁금한 게 있으면 나뭇가지 치우듯이 계속 더 탐구하고 연구하고 우주에다 우주선 보내고 태양계 바깥으로 나가기 위해서 지금도 보이저 5호가 아직도 지 혼자 가고 있어요. 어디로 가는지. 영원히 빠이빠이. 계속 가면서 사진 보내오면서. 가서 컴컴한 데 뭐 할 건데? 아무것도 없어, 그냥 가는 거예요. 나뭇가지를 헤쳐서 더 자세히 보려고요.
자세히 보는데 자세히 보는 한계가 이 공식으로 하이젠베르크에서 이미 나왔어요. 플랑크 상수(h=6.6260755×10⁻³⁴ J·s)를 4Π로 나눈 이 범위 바깥에는 인간이 관찰되지만 거기는 관찰이 안 되고 불확정한 거다.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의 원리입니다. 양자물리학에서 나온 거예요. 거기에서는 위치, 속도 둘 다 알 수 없는 거예요.
이 말은 낚싯대로 고기를 잡으면 낚싯대에 걸려든 고기만 보이지 걸리지 않은 고기에 대해선 우리가 아는 바 없다. 그렇게 되는 거예요. 아는 바 없으니까 다른 말로 하면 모르겠다, 나머지는 모르겠다. 현재 나한테 이익이 되는 것만 안다고 할 수 있고 나한테 이익이 안 되는 것은 모르겠다가 되는 겁니다.
예를 들면 집사님 가정에 아들이 있는데 그 아들이 사촌과 같이 식사를 했어요. 그 사촌들은 교회를 안 다니는 아이들인데 초등학교 3학년 아들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세상에 이것이 없었으면 우리가 얼마나 비참하게 굶어죽을 수 있는데 하나님 감사합니다, 이 귀한 것 주셔서. 이렇게 하니까 맞은편에 까불고 놀던 사촌 아이들이, “너무 잔인한 이야기는 하지 마. 너무 부정인 이야기는. 왜 식사시간에 그 이야길 해. 굶어죽는 이야기를 왜 해.”
그래서 어느 강의에서 그런 이야기했습니다. 100제곱미터 정사각형이 한 변의 길이 할 때 사람들은 전부 다 10미터라고 보고 있는 거예요. -10미터는 이것 어디 갔지요? 이걸 일방적으로 없애버린 겁니다. 내가 모순되지 않는 것을 인간은 없애면서 우린 그걸 진리란 이야기를 갖다 붙여요. 얼마나 비겁하고 반칙입니까.
살아 있는 어떤 성자가 살아 있는 나에게 좋은 말씀, 좋은 교훈을 주셔서 네 힘들고 어려운 세계를 편안하게 처세술, 그러니까 성공도 하고 건강도 하고 마음 편하도록 해주게 되면 나는 그 교주를 아낌없이 교주에게 존경을 갖겠다. 그게 인간들이 원하는 거잖아요.
옛날에 나하고 나이가 동갑인데 유명한 가수가 불렀던 노래가 기억나요. “그 음악은 제발 틀지 마세요 디제이” 그러니까 이 세상에 많은 음악이 있더라도 내 허락 받고 틀란 말이죠. 왜? 모든 것은 나한테 모순이 없어야 되니까. 주님께서 “니가 모순이야, 니가. 그렇게 주장하는 니가 십자가의 원수야, 인간아. 니가 모순이야.”
도적 같이 주님이 오신다는 그 이야기가, 그 말씀이 있잖아요. 이 말씀은 우리가 믿을 수 있는 게 아니고 이 말씀 자체가 도적 같이 우리 속에 침투해야 돼요. 그러니까 이미 우리는 누가 구원받은 사람인가? 말씀에 의해서 도둑 당해서 내 위주의 상황이 마이너스로 다 빼앗길 때 그 자리가 임마누엘 자리입니다. 주의 말씀이 있는 자리에요.
그래서 출구가 십자가 밖에 없다는 말은 십자가가 움직이는 거예요. 나는 아무것도 움직여도 소용없는데 십자가가 움직여서 나로 하여금 십자가 들어있는 십자가의 증인으로써 성령께서 그렇게 하게 하시는 겁니다. 그러려면 남한테 복음 전할 생각하지 말고 맨날 아침에 눈만 뜨면 이 전쟁이 내가 기존에 있는 나 위주의 나와 그리고 니는 이미 죽었잖아, 이미 접수했어. 니 인생은 나인데 내 것인데. 내 거야. 아니야, 내 것이에요. 이 인생이 내 거냐, 주님 거냐는 그 싸움이 우리가 살면서 벌어질 때 그 벌어진 모습이 십자가 사건에서 발생되는 그 상황입니다. 십자가 전한다고 십자가 아니고 내가 머리 뜯고 싸우는 이 모습이 십자가를 증거하는 게 돼요. 자기한테.
에를 들면 어떤 집에 그 사람이 복음을 아는데 사법고시를 준비했어요. 그런 일이 별로 없지만 있다고 치고. 그래서 사법고시 그것도 넉넉하게 1차, 2차, 3차 합격해서 부모님이 영감님, 판사님 됐다고 좋아할 때 본인은 싸우는 거예요. “사법고시 이게 내 영광을 위함이 아닙니까? 나는 그 정도 죄인입니다.” 이랬으면 자기 집 식구가, “합격되고 난 뒤에 미쳤나, 무슨 소리야.” 플래카드 붙일까 말까, 얼마나 올리고 앞에 붙일까 뒤에 붙일까 이러고 있는데 자기는 무슨 죄인이고 난리냐 하고 엉엉 우는 거예요.
어떤 사람이 그랬어요. 승진되고 난 뒤에 엉엉 우는 사람 있어요. 내게 합당치 아니함이니이다, 이러면서. 온 집안이 바라보고 있는 승진을 했는데 본인은 엉엉 우는 거예요, 차 안에서. “주여, 이럴 순 없습니다. 왜 저한테 승진하는 이런 수모를 주십니까?” 지금 승진해서 잘 있어요.
이런 ⓐ내부적인 그러한 ⓑ주님께선 진리고 우리한테는 모순이 되는 매일같이 터집니다. 남들은 박수치는데 이건 적절치 않다고 여기는 것, 남들은 망했다 하는데 오히려 그것이 적절하게 느껴지는 기쁨이 느껴지는 이러한 세상나라와 전혀 다른 모습을 어쩔 수 없이 보여줄 때 그게 성도의 사는 모습이죠.
21페이지 봅시다. 하나밖에 없는 십자가에 어떻게 모아지는가? <매트릭스>에 나오는 장면인데요. 여기 시온성이거든요. <매트릭스> 영화 자체가 트리니티, 삼위일체도 나오고 주인공 그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가 되거든요. 예수 그리스도도 나오고 온갖 것 다 나와요. 마지막에 기계의 공격에서 인간들끼리 모여 있는 걸 시온성이라 해요. <매트릭스3>에 보면. 투의 마지막 장면, 쓰리인지 모르겠어요. 여기에 구멍이 뚫려요, 기계들이.
뚫리면 여기 있던 모든 인간들이 시도했던 예배, 목차에 나오지요. 목차 적어볼까요. 예배, 그 다음에 기도, 헌금, 주일성수, 상급, 전도 이 모든 것이 어디로 쏠리느냐? 오직 하나로 연결돼있는 의미가 아니면 그 의미는 잘못된 의미입니다. 그러면 시작도 뭡니까? 예배, 누가 드린다? 내가 드린다. 기도, 누가 한다? 내가 한다. 헌금은 내가 한다. 내 돈 가지고 한다. 주일성수, 내가 한다. 상급, 내가 받는다. 전도, 내가 한다.
내가 한다가 뭐로 바뀝니까? 내가 한다가 십자가에서는 나는 죽었다가 되지요. 거꾸로 하게 되면 죽은 내가 하는 예배와 안 죽었다고 우기고 하는 예배, 그 차이점을 예배라는 단락을 통해서 우리가 둘 다를 알아야 우리 내부의 모순점을 알고 그 사이에 십자가가 나오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내가 하는 예배와 이미 죽은 자를 주께서 시키는 예배와의 차이점, 그 차이점을 보여줘야 되거든요. 자, 어떤 사람이 크리스마스 특집에서 나이 팔십 넘은 신부인데 서울대학 나와서 스테인드글라스를 프랑스에서 그려서 훈장도 받은 사람 있어요. 그 사람이 뭐냐 하면 나는 빛을 그린다. 추상적인 모습으로 스테인드글라스를 프랑스 성당에다 했어요. 금요일에 잠깐 봤어요. 광주에서 올라올 때 kbs 통해서 봤고 재방송은 토요일에 전체를 다 봤어요.
팔십 넘은 신부인데 프랑스 가서 47년 동안 있으면서 지금 도미니크 수도회에 소속돼있어요. 시골 성당 창문에다 자기 작품들을 했는데 빛을 그린다. 나에게는 모든 것이 빛이다, 라고 하면서 그림을 그려요. 뭐가 빠졌습니까? 방금 강의했잖아요, 뭐가 빠졌어요? 바로 자기모순에 빠져있지요. 그 사람은 본인이 할 수 있는 최상을 이야기하면서 그게 곧 주님의 뜻이라고 본 거예요.
나는 볼 때 보게 되면 빛으로 보인다. 이게 천주교 수녀나 신부나 교인들에게 얼마나 잘 먹히겠어요. 아까 배웠지요, 초월. 다른 말로 하면 신령한 거룩, 초월, 인간의 목표에요. 선악과 따먹고 목표가 뭐냐 하면 이 허접스러운 더러운 육체와 아픈 몸과 늘 죄 짓는 이 몸을 떠나서 극상의 거룩한 그런 차원, 그런 레벨에 오르고 싶은 거예요. 그게 인간이 본인이 천사 되려는 야망 같은 게 있다 이 말이죠. 어디 모든 것에 얽매이지 않고 뛰어넘어버리는 거예요. 초월하는 거예요.
이 사람은 자기 작품을 할 때 빛이 와서 빛으로 작품을 그린다는 겁니다. 그걸 작품으로 생각하는 피디나 그걸 보는 시청자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라고 누구나 이야기할 게 아니겠습니까. 그 한 시간 넘는 내내 나오는 가운데서 자기모순이나 십자가 이야기는 어디에도 안 나와요. 십자가라는 뭐냐 하면 언약의 완성입니다. 구약 때 주신 그 언약이 신약에서 완성된 게 십자가에요.
십자가는 뭐냐 하면 어떤 인간도 하늘나라에 올 수 없었음이 드디어 완전히 밝혀졌다, 이게 십자가입니다. 따라서 내가 너를 선택해서 오라 할 때만 갈 수 있는 거예요. 구멍을 주님이 뚫어놨지만 그 구멍 뚫린 처소에 내 있는 곳에 오게 하려면 주님이 나서야 되지 인간이 나설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그림 그리고 빛을 봤다? 빛 본 사람이 천주교만 있는 게 아니에요. 라마교부터해서 심지어 종교 없는 사람도 한두 명이 아닙니다.
은혜 받았다고 신이 되는 모든 우리나라 민속종교 있잖아요. 조선시대 종교부터해서 심지어 농학을 주도한 천도교, 최제우가 맨날 신비체험하고 산 사람이에요, 그 사람이. 지금도 신비체험한 곳이 양산에 있어요. 양산에 가면 그걸 기념물로 성지순례 하도록 만들어놨어요. 신에게 계시 받은데. 신의 계시 받은 내용이 뭐냐 하면 인내천이에요. 인내천 해서 어디 개울가 말하는 게 아니고요 하늘과 땅과 인간이 전부 한다. 천도교의 핵심입니다. 그 천도교를 이어받은 것이 대순진리회. 아이들 공납금 다 가져가는.
남묘호렌게쿄라 하는 그것도 마찬가지에요. 일본의 종교가 일억 개 되거든요. 인구수와 비슷해요. 그중에 교주 하나가 세계평화를 위해서 계시 받았다는. 뭐든지 계시 받는, 계시가 뭐냐 하면 공통점이 있어요. 십자가가 없어요. 언약도 없고 십자가도 없고 내부 모순이 없습니다. 십자가 있는 이단은 뭐냐? 기독교 밖에.... 십자가, 십자가 하는데 전부 다.... 가이드 와서 주께서 고생 되게 한 곳입니다. 봤지요? 사진 찍고, 사진 찍으세요.
여기 십자가 죽으신 곳이고, 후딱 십자가 지나서 이제 부활의 새 생명의 열매를 맺자고 나오는 거예요. 뭔가 인간이 기가 꺾여야 되는데 내가 추구하는 모든 나의 초월이 사실은 악마가 사주한 것이란 그걸 아는, 내 가는 길이 이렇게 저지돼야 되는데 저지가 없어. 이거는 브레이크 없는 벤츠 같아. 홍준표, 그 사람이 그 책 지었거든요. 그냥 브레이크 없이 막 밀어붙이는 거예요.
그걸 저는 신비베틀. 교회 가면 신비베틀, 특히 기도원에 가면 신비베틀. 소나무 누군 세 개 뽑았다든지 난 두 개 뽑아서 한 개는 다음 달에 뽑았다든지. 천주교에선 뭘 마리아를 봤고 마리아 눈에서 피가 나오더라. 진짜 마리아 피 나오도록 해볼까요? 피가 나오든 무지개가 뜨든 그게 뭡니까?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다는데, 성경에서는. 이런 것 안 보여줘요.
그래서 예배라 하는 것은 이런 현상이 무시당하지 말고 인간이 드릴 수 있는 예배의 극치, 노림수, 최고 추구하는 것이 뭐냐? 이미 인간세계에서 다 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누가 통과하느냐? 이스라엘이 언약을 짊어지고 운반체로 통과하거든요. 그러니까 이스라엘 내부에 이방민족의 예배방법이 들어왔겠습니까, 안 들어왔겠습니까? 전부 다 몰려들어온 거예요. 왜 그러냐 하면 이스라엘 사람들이 애굽에서 살던 사람이에요.
애굽에 살던 사람이기에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강제로 주님께서 그들 한 나라로 묶어놨어요. 본인 의사 없습니다. 모세가 인도할 때 그들이 모세한테 한 게 뭐냐? 원망했어요. 맞지요? 원망했다는 말은 모세가 하는 일에 뭐가 있다? 자기들 보기에 모순이 있는 거예요, 모순이. 그동안 자신들은 모순 없는 인생을 살아온 겁니다.
모순 없는 인생을 다른 말로 하면 내 노동한 대가 얻는 인생이 모순 없는 인생이에요. 내가 한 행위가 나한테 복으로 온 인생이 모순이 없는 거예요. 이게 욥기에 보면 욥의 친구들의 이 주장하는 겁니다. 하나님은 선하기 때문에 선하게 하면 복 받고, 악한 일하면 뭐 받고? 저주받는다. 욥의 세 친구가 그것으로 계속 욥을 공경해댄 겁니다.
엘리후가 욥을 공격한 것은 욥의 세 친구가 공격한 것과 달라요. 엘리후가 공격한 것은 지금 욥이 나쁜 짓했다는 게 아니라 욥이 난 나쁜 짓 안 했다가 되니까 욥의 의가 하나님의 의와 격이 같아지는 것에 대해서 엘리후가 기겁을 해버린 거예요. 그러니까 엘리후가 뭐라 합니까? 그럼 네가 해 만들 때, 달을 만들 때, 비 올 때 네 의가 어느 정도 기여분이 있느냐고 따지는 겁니다. 왜? 하나님은 의로움으로 창조했기 때문에. 의롭게 창조했기 때문에.
엘리후 입장에서는 욥이 진짜 의롭다면 하나님이 창조할 때 투입된 그 의 있잖아요. 그 의와 같은 급의 의로서 가담됐을 때나 그게 의로운 거예요. 그 엘리후의 말은 나중에 38장에 나오는 하나님의 말과 이게 일치됩니다. 38장에 보면 욥에게 너 이것 만들 때 어디 있었어? 자꾸 어디 있느냐고 물어요. 염소 새끼 낳을 때 어디 있었어, 북두칠성 만들 때 어디 있었어?
우리 보기에는 질문 자체가 터무니없어 보이는데 이건 뭐냐 하면 욥아 네가 갖고 있는 네 의가 써먹을 데 있었느냐, 물어보는 거예요. 이 세상이 만들어질 때 네 잘난 의가 끼어들 자리가 어디에 있었는가? 끼어들 데가 없으면 그거는 하나님이 의롭다 할 때 일치된 개념이 될 수 없다는 거예요. 하나님의 뜻입니다.
지금 욥 이야기를 미리 해드렸는데 십자가와 예배란 내용이 간단치 않아요. 남들은 절에 다니고 우린 교회 다니니 절에 다니는 것 무시하자, 라고 하면 안 돼요. 절에 다니는 사람이 예배드릴 때 얼마나 치성과 정성을 다하여 그야말로 부처를 위해서 순교할 심정으로 예배를 드립니다. 예배드릴 때만 고생하는 게 아니에요. 예배드릴 때 남들의 찾지 않는 높은 곳에 깊은 산속에 전기가 안 들어오는데 촛불만으로 예배드리거든요.
우리 대구 근처에 갓바위란 데 있어요. 갓바위가 남쪽을 바라본다 해서 부산 사람들이 많이 와요. 특히 추석 때나 안 그러면 수능 칠 때 가을철에 차가 막혀요. 갓바위가 해발 700미터입니다. 그런데 연세 많은 팔십 대 노인네들이 기어 올라가요. 이 힘이 어디서 나오겠습니까? 예배드리는 힘이에요. 남들이 못하는 것을 극복하는 데서 오는 힘, 죽어도 난 저 위에서 죽을 거야.
갓바위에 올라가면 한 300평 쯤 편평하게 돼있어요. 여기에 미륵보살 있고요. 미륵보살은 가장 발달된 병 고치는 부처, 그냥 부처 말고 신이 된 부처 있어요. 부처상 한 20미터짜리 있고 이 앞에 동전들이 떨어져 있어요. 얼마나 했는지. 이 앞에 자부동, 자부동이란 말 알아요? 방석. 방석 깔고 여자 90%, 남자 10% 해서 여기서 손바닥 위로해서 하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이 모든 것은 전부 다 뭐냐? I can do it. 내가 할 수 있는 거예요. 그래서 이방민족의 예배 특징은 뭐냐? 할 수 있는 겁니다. 요한복음 4장에서 예루살렘이 가서 예배드릴까요, 그리심 산에서 예배드릴까요, 할 때 장소에 관한 문제는 다를지라도 예배드릴 수 있다는 그런 자격은 본인들에게 있다고 사마리아 여인이 그렇게 예수님한테 이야기하지요.
남자 다섯 명 사귀었지요. 지금 그 다섯 명과 헤어지고 지금 사귀는 남자는 여섯 번째지요. 그동안 사랑과 전쟁이 얼마나 많이 있었겠습니까. 그러니까 절로 자기가 주님 앞에 죄 용서해달라고, 하나님 용서해달라고 제사 안 할 수 없지요. 중요한 것은 내 인생이 중요하니까요. 하나님은 용서해준다니까 내 인생 중요하니까 해겠지요. 이 말은 뭐냐? 내가 예배드릴 수 있는 자격자다, 라고 하는 겁니다.
그런데 주님은 뭐라 합니까? 예배드릴 수 있는 자격자 자체를 하나님께선 거부해버립니다. 너는 자격이 없다. 신령과 진정, 이건 인간이 아닙니다. 누가 드리는 게 아니에요. 누구를 이용하는 거죠. 예배는 예배드릴 자가 따로 하늘에서 내려옵니다. 하늘에서 내려와서 그분이 예배드릴 자격 없음을 분명히 하고요 자격 없음 자리에 진리와 성령으로 들어가 버립니다.
그럴 때 둘 다 모순됨이 나오지요. 예배드릴 수 없는 자가 예배에 성공했다가 돼버려요. 이게 내부적인 모순되는 거예요. 예배드릴 수 없었는데 주께서 그걸 예배라고 하나님께서 받아주는 거예요. 이게 웬일이냔 말이죠. 그 안에 십자가의 의미가 담겨있으니까 주께서 그 예배를 받아주는 겁니다. 했다고 받아주는 게 아니고 한 것을 대신해서 가져가시는 분에 의해서 그 예배가 받아들이는 거예요.
그래서 주님한테는 꼭 뭐가 필요 하느냐 하면 죄인이 필요한 거예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의인을 모집하려 온 게 아니고 죄인을 모집하려 오신 거예요. 예수님이 의사기 때문에 잘난 사람은 전부 다 집에 가고 누굴 모집하느냐? 난 의사기 때문에 병든 자가 필요한 거예요. 그 작업이 바로 주의 일입니다. 주의 일이 흐리멍텅 모호한 게 아니에요. 실력 없는 게 아닙니다. 구체적이에요, 주의 일은. 네가 주의 일이다, 하는 것은 네가 주의 일을 하고 있다는 뜻이 아니고 너를 내 일에 모순된 일에 끌어당기는 그것이 주의 일의 시작점이죠. 우리를 버리지 않습니다.
성전 지을 때 46년간 성전 지었지요. 짓게 해요. 지어, 지어. 46년간 짓게 해놓고 이걸 무너뜨리게 만들어요. 로마에 의해서. 무당에 속한 같은 헛짓하고 있는 것끼리 서로 무너뜨리게 해놓고 없애버려라. 없애버리고 여기에 비교가 되는 새로운 성전, 예수님의 곧 죽었다가 살았다는 이 말은 제자들이 나중에 한 거고 예수님이 그 현장에서 뭐라고 했느냐 하면 3일 만에 짓겠다고 한 거예요.
이거는 물이 포도주가 된다 해놓고는 포도주 만들기 전에 뭐냐? 나는 이 일과 상관없다 이 이야기와 똑같은 거예요. 주님께선 자세히 알아듣게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툭 던져버려요. 이걸 헐어버려라. 그러면 3일 만에 지은 성전을 위해서 46년 동안 지은 성전은 필요 있다, 필요 없다? 필요 없으면서 필요한 거예요. 무너져야 된다는 기능 때문에 필요한 거예요.
우리의 몸은 저주받아야 된다는 것 때문에 여러분 몸이 필요한 거예요. 백신 맞았어요? 꼭 맞으세요. 무너져야 되기 때문에. 내가 너무 심하게 이야기했나. 병원에 가시고 백신 맞으시고 관리 잘하세요. 왜? 찢어야 되니까. 찢는 그 손길, 십자가 손길 아닙니까. 네가 공들였던 것 내가 찢으니 기분 어때? 좋습니다. 이러면 이게 바로 모순을 극복하는 성령과 진리와 통하는 관계거든요. 관심사가 다른 거예요.
제가 강남강의 때 그런 이야기했지요. 코빅, <코미디빅리그>에 나오는 예를 들었잖아요. 광주 때 했지요. 여자가 바람피우는 걸 좋아해서 남자와 있는데 마침 출장 갔던 남편이 들어왔어요. 그래서 옷장에다 숨겨놨어요. 남자는 속옷 바람으로 옷장에 앉아있는데 남편이 오자마자 옷장 활짝 열고, “그것 봐, 그것 봐. 내가 이 옷 사지 말자고 했잖아.” 밑에 남자는 보이지도 않아. “내가 이 옷 관리 잘하라 했는데 왜 관리 안 했어. 그것 봐. 내 그럴 줄 알았어. 이것 때문에 일찍 왔어. 옷 관리하는가.” 남자가 왜 있는지 관심도 없어요.
주님의 관심은 십자가입니다. “그것 봐, 네가 예배드린다고 했잖아. 네가 헌금하고 예배드리고, 그것 봐. 내 그럴 줄 알았어. 이러지 말라 했잖아.” 이렇게 나오는 거예요. 실컷 하게 만들어놓고. “주여, 착한 일 했습니다.” “그런 것 나한테 묻지도 마. 착하든 안 착하든 다 악해. 먹는 것 아는 것 자체가 악해. 그런 건 관심도 없고 내가 준 십자가 어디 갔어? 십자가 복음 어디 갔어? 왜 자꾸 잘난 척해.” 이렇게 되는 거예요.
이게 코미디보다 더 놀라운 코미디 아닙니까. 우리는 십일조 어겼다고 벌벌 떠는데 그것 봐 십자가 안 믿을 줄 알았어, 이렇게 나오니까 주님의 관심사와 우리의 관심사가 예배드리면서도 서로 어긋나는 거예요. 인간은 예배드리면서 자기의 예배드리는 모습을 자기가 캡처해버려요. 멀리서 촬영해버린다고요. 헌금 하면서도 천사가 보고 있지 사진 찍어라.
심지어 성가대 하면서도 4부성가하면서 안 틀렸는지 하고 지휘자는 인상을 그리고 나올 때 나오라고 하는데 성가대 내내 그 일하고 있는데 자기가 죄 짓고 있는 일이란 걸 성가대 하면서 생각 못하지요. 내가 시간 없는데 이렇게 한다고 고생했는데 이번 주 무슨 중요한 계약 있는데 주께서 성사시켜주겠지, 자기 계획만 생각하고 있는 겁니다.
예배라 할 때는 필히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서 진행하면서 이방민족들은 어떤 예배를 드렸는가? 그것을 알아야 되겠지요. 민수기에 보면 그게 잘 나와 있어요. 몰렉 신을 믿는 발락이란 모압의 왕이 자기 딴에 신에게 드리는 예배를 그대로 발람 선지자에게 그걸 시켜서 이 방식대로 자기 진영에 통과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저주가 돌아가도록 해달라고 요청하는 장면이 나와요.
그럴 때 발람 선지자가, “당신 이 방법 안 통합니다. 이스라엘 하나님은 다릅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당신이 하는 것 중에서 유인할 만한 요소가 따로 있습니다. 그건 뭐냐 하면 신에게 제사하면서 성적인 열정을 드러내는 방식에 대해서는 이거는 종교를 떠나서 환장할 겁니다.” 발람이 그걸 시켜서 이스라엘 백성 이만오천 명인가 많이 죽었잖아요. 민수기 25장에 나오는, 요새는 성경 이야기하면서 내가 구라가 아닌가....
“이스라엘이 싯딤에 머물러 있더니 그 백성이 모압 여자들과 음행하기를 시작하니라” 이 여자들이 어떤 여자들이냐 하면, 민수기 25장 1절에, 그 당시 제사에 종사했던 거기 상주하는 성직자들이에요. 왜 그러냐 하면 바알종교가 오시리스, 이시스라는 애굽에서 나왔던 종교거든요. 그게 뭐냐 하면 땅은 여자고 남자는 하늘이에요. 땅과 하늘이 교접을 해줘야 하늘에서 적절한 타이밍 맞춰서 풍년들도록 비가 내리는데 그 비 내리는 모습이 남녀가 성관계에 있어서 땀을 흘리는 모습을 빗대어 그렇게 한 거예요.
우리 현대인으로 보면 납득이 안 되지만 그러나 그때는 농경시대로 땅에만 의존하기 때문에 자기들이 동원할 수 있는 자연의 질서 자체가 초월이거든요. 신의 영역이에요. 그들이 뭐가 신기하냐 하면 해가 제자리에 돌아오는 게 신기하고, 달이 제자리에 돌아오는 게 신기하고, 별이 제자리에 돌아오는 게 신기한 거예요. 왜? 그들은 그것을 인간들이 손을 안 댔으니까. 이거는 불가능한 영역이죠.
그 불가능하다는 말은 인간의 영역이 아니라 신의 영역이죠. 그러면 하늘에 비 오는 것은 누구 마음대로? 이건 신의 마음대로 아닙니까. 그러면 신은 혼돈에서 뭘 끄집어내요? 혼돈에서 질서를 잡아주는 게 신이라면 여러분 한 번 따져보세요. 혼돈에서 질서 잡힌다는 게 얼마나 신기한 일입니까.
너무 과학이 발달하니까 우리는 과학적으로 해명하니까 안 신기해보이지만 옛날 사람들은 굉장히 신기해보인 거예요. 해가 살아 있다니까요. 오늘날 해가 살아 있습니까, 죽은 물체입니까? 죽은 물체잖아요. 달이 살아 있다? 여러분, 옛날 사람은 다 그랬어요. 달이 살아 있는 거예요. 달보고 비는 거예요. 해보고 비는 거예요. 이것까지 설명해야 되는데.
옛날에는 해를 만드신 신에게 비는 게 아니에요. 해 자체가 신이고 달 자체가 신이고 신이 한둘이 아니에요. 여럿이에요. 왜? 이거는 스스로 움직이잖아요. 마치 인간처럼. 인격을 가진 인간처럼 스스로 움직인다고요. 그럼 비도 스스로 오는 거예요. 별자리도 마찬가지고. 그래서 해에다 해님, 달에다 달님. 둘이 만나고 오작교가 어떻고 만나고 그런 것들이 장난이 아니고 진지해요. 농사짓는 사람들 진지합니다.
그 질서, 하늘의 질서가 땅의 질서가 될 때 그들은 혼돈에서 벗어나서 정기적으로 곡물을 얻을 수가 있는 겁니다. 이거는 심각한 문제에요. 자기 목숨과 생명과 관련된 문제입니다. 이걸 현대에서는 뭐로 바꿨습니까? 과학으로 바꿨잖아요. 과학의 질서는 뭐로 표현되느냐? 과학의 질서는 수학으로 표현돼요. 수학 방정식으로 표현돼요. 이걸 결정론자, 수학으로 표현되는 겁니다.
확률도 수학이에요. 그러니까 이 세상 모든 것은 확률로 수학이에요. 확률에서 나온 것이 통계학이고 통계학에서 나온 직업이 뭐냐 하면 보험입니다. 모르는 체하지 마세요. 맞지요. 보험이 연금제도지요. 보험회사 알지요. 동부화재부터해서 여러 가지 외국회사 있잖아요. 전부 다 확률로 계산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는 보험세계에서 살고 있다는 말은 확률에 모든 운명을 맡기고 살아가는 세계에요. 확률이 높으면 믿을 만하고 확률이 적으면 안 믿어야 되고, 그런 겁니다.
그러니까 고대인과 우리가 차이점이 있어요, 없어요? 없지요. 없습니다. 우리는 혼돈을 무서워하고 거기서 질서를 뽑아내는 이 점에서 있어서는 고대인이나 현대인이나 전혀 차이점 없습니다. 과학을 모르고 기술을 모르면 취직이 안 돼요. 노래만 부른다고 취직이 안 된다고요. 인기 얻는다고 취직 안 돼요. 요새 오래가는 취직은 역시 기술직이에요. 맞지요? 기술직도 한물 간 기술은 안 되고 늘 업그레이드된 기술.
의사들도 맨날 학회 가서 외국에서 들여온 새로운 진단기술, 오퍼레이션 어떻게 작동하는지 그것 배워야 돼요. 옛날처럼 어디 봅시다, 이렇게 진맥하는 게 아니에요. 기계에 다 집어넣어요. 내과 의사들이 늘 공부해야 될 이유가 새로운 기계가 자꾸 들어오기 때문에 수십 억 되는 기구를 병원 두려고 기술을 배워야 돼요. 이게 뭐냐 하면 질서 잡아야 누가 살아요? 내가 살아요.
그러면 성경공부를 한다는 것은 뭘 끄집어낸다? 혼돈적인 주의 뜻을 뭘 끄집어낸다? 거기서 질서를 끄집어내서 질서는 나의 노동과 나의 가능성으로 마중을 나가는 겁니다. 주의 뜻대로 행하면 나에게 복이 온다. 웃으면 복이 오는 게 아니고. 주의 뜻을 알아서 그 주의 뜻을 뽑아내는 것은 목사나 신부들이 하는 거예요. 우리는 그대로 실천에 옮기면 되니까.
그러면 신부나 목사들이 누가 들어도 안 틀리는 이야기를 해요. 무슨 이야기를 하느냐 하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라. 안 틀렸지? 이러고 있다고. 이단 아니지, 이러고 있다고요. 그게 이단이에요. 왜냐하면 그걸 누가 이야기했습니까? 그게 바로 누가복음 10장에 바리새인 율법사가 이야기한 거잖아요. 예수님 보고, “예수님 모든 율법의 중심은 뭡니까?” 그걸 이미 그들이 알고 있어요.
그들이 뭘 모르느냐 하면 이웃이 누구인지 규명을 못하고 있는 거예요. 이웃은 내가 죄인일 때 비로소 아는 거예요. 그런데 자기가 이웃을 죄인이라 여기서 짱돌 들고 간음한 여인을 죽이려고 할 때 이미 그 사람은 뭘 끝났습니까? 질서와 혼돈 가운데 어디에 속합니까? 혼돈에 속하는 거예요. 질서라고 우기는 자체가 그들은 주님 보시기에 그 자체가 혼돈에 빠진 겁니다. 악마가 저지른 혼돈에 빠진 거예요. 수학자들 과학자들 전부 다 혼돈에 빠진 거예요.
해와 달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끄집어낼 수 없으면 그건 혼돈입니다. 로켓을 만들어내는 정확한 이성을 가진 사람들이 이런 복음을 모르고 십자가를 모르면 그 자체가 혼돈스러워요. 옷을 한 벌 만들 때 디자이너가 재봉사들이 얼마나 철저하게 줄자 그어서 정확하게 디자인한 대로 재단해서 옷을 만들어냅니까? 만들어냈을 때 작품은 뭐냐? 질서 체에요. 자기가 생각했던 모든 질서가 실제로 구체화된 거죠.
그러면 복음 아는 사람은 묻습니다. 그것 왜 만드느냐? 입으려고. 그 다음에 나오는 질문은 무한대로 나오는 연속되는 질문은 뻔 하죠. 입어서 뭐할 건데? 입어서 즐거웠다. 즐거워서 뭐할 건데? 즐거우면 기분 좋지. 기분 좋아서 뭐할 건데? 그러면 돈 벌지. 돈 벌어서 뭐할 건데? 답변해봐야 소용없어요. 계속 뭐할 건데, 라고 계속 나와요. 결국 정답은 뭡니까? 죽잖아요. 그 다음에 나오는 질문이, “죽어서 어디 가는데?” 디자이너가 옷 하나 만드는데 결국 마지막은 어디까지 도달돼요? 인간은 죽음에 갇혀있다는 것에 그냥 천장으로 이끌려서 딱 들어붙어요.
“엄마, 나 시집가게 됐어.” “가서 뭐하는데?” “남편 만나 행복하게 살지.” “행복해서 뭐하는데?” “아파트....” “아파트 사서 뭐하는데?” “애 낳지.” “애 낳아서 뭐할 건데?” 나중에 화가 나서, “엄마, 그럼 시집가지 말까요?” “시집 안 가서 뭐할 건데?” 마찬가지죠, 뭐. 그거는 답변을 이리 하나 저리 하나 마찬가지에요. 증거할 건 없고 나 하나 살리기 위해서 내가 가능성 있는 질서만 여기서 계속 누적하는 거예요. 계속 채우는 거예요. 물론 그것도 안 하는 것보다 하는 게 낫지만 안 하면 그것으로 골치 아파요.
그래서 여기 21페이지 중간에 보면, 간단하게 이렇게 돼있어요. 욕망과의 대결. 십자가는 인간의 욕망과의 대결로 인하여 발생된 사건입니다. 나의 욕망. 그러면 이방민족은 뭐예요? 욕망의 화신이죠. 아까 민수기 봤지요, 25장. 욕망의 화신. 욕망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그쪽에서 종교가 욕망을 불질러버렸어요. 욕망을 불질러버리니까 욕망을 억누르며 살다가 그걸 완전히 개방해버린 거예요.
욕망, 이것은 곧 뭐냐? 그동안 내가 지켜왔던 모든 윤리도덕 자체를 벗어나는 무질서가 되겠지요. 따라서 인간은 무질서가 되면 사회에서 못 살기 때문에 무질서를 이걸 프레스해요. 억압을 해요. 억압을 하니까 여기서 발생된 것이 뭐냐 하면 억압된 것은 숨기고 올라오는 건 숨기고 억압되어 내가 편집한 것, 내가 관리한 것은 드러내니까 여기서 뭐가 생기느냐 하면 인격적으로 괴리가 생긴 거예요.
이 괴리가 바로 정신병이에요. 정신병은 언어, 말로 나타나요. 정신병자가 말 안 하고 설치는 건 뭐냐? 행동으로 나타난 언어에요. 이게 뭐냐? 나의 외침이에요. 그래서 화병 들기 전에는 전라남도 곡성 그런데 가든지 대나무 숲이 많아요. 혼자서 고함지르고 또는 동네에 우물 있으면 우물에다 하든지 이것도 저것도 안 되거든 노래방에 가서 어찌 합니까, 하고 부르든지 뭔가 내가 진즉에 하고 싶은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 없기 때문에 그걸 터뜨려야 되지요.
그래서 교회에 유아실이라든지 주일학교 1층에 왜 있습니까? 새벽 기도하라고. 새벽 기도할 때 일찍 와서 자부동 깔고 목사 설교 듣든지 말든지 원통, 절통, 분통하면서 바닥을 치면서 어찌 합니까, 어떻게 할까요, 하면서 자기 욕망, 이것 하나 들어주신다면 제가 주 앞에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라는 이방예배가 드리는 그 현장이 돼요. 초월의 현장, 신성한.
그러다가 점점 억압이 더 심해지면 뇌에 신경전달물질이 과다하게 나와 버리면 여기서 하얀 옷 입은 예수님 등장합니다. 마치 부흥회할 때 말단 신경조직을 강하게 쳐버리면 전기가 찌르르 와서 불 받은 것처럼 느껴지듯이 성령의 불 받았다고 하잖아요. 불 받게 되면 정신체제가 왕왕 울리게 돼있어요. 공명체제가 돼있어서 모든 신경이 한꺼번에 작동하다보니까 이게 천사도 보고 온갖 것 다 봐요. 악마도 보고 천국도 보고 지옥 보고 다 본다니까요. 그것 보면 이제 그날 새벽기도는 끝나는 거예요. 빨리 집에 가서 밥해야 돼요.
그 짜릿했던 모압 종교의 체험을 잊지 못하면 그 다음날 출석해야 돼요. 그때 그 기분을 또 코스프레 닮아야 돼요. 그때 그 감정 올라올 때까지 해야 돼. 그러니까 처음 새벽기도 30분하다 점점 한 시간, 두 시간, 교회 갔는데 집에 오질 않네. 아침밥도 안 해주고. 오래 걸립니다. 자아가 그만큼 더 웅크린다. 점점 더 자아가 웅크러지는 거예요. 당구공처럼 점점 더 단단해지는 거예요.
요 안에는 질서, 질서 이전에 뭐냐 하면 내부 모순이 없어지는 거예요. 나의 의에 도움 되는 것만 기억하고 나머지는 다 강제로 억압을 시켜놨어요. 이걸 자기는 거룩하게 성화되었다고 우깁니다. 여기에 목사들이 이용하지요. 십의 일조했다고 성화됐습니까? 어떤 사람은 십의 이조하던데요. 이러면 뿔따구 나서 그까짓 것 내 가능성으로 못 할 줄 알고, 십의 이조해버려요. 십의 삼조까지 하는 사람 있는데 하면 십의 삼조합니다.
이게 바로 뭐냐 하면 오늘날 무당들이 사는 방법이에요. 세상 무당들이. 그 무당이나 돈 빼먹은 목사나 둘 다 같은 동종업체에 속하는 사람. 사람의 약점을 이용해서 돈만 빼먹는 거예요. 그 사람들은 자기의 거룩을 극대화시키는 그것에 목적을 두고 살아가니까. 결국 결론은 뭐냐? 예배는 누가 했습니까? 내가 예배한 거예요. 내가 할 때는 내 잘남이 있기 때문에 내부적 모순이 없어요. 내가 죄인이 안 되잖아요. 점점 죄는 멀어지고 천사가 돼가잖아요. 그것이 바로 여러분의 옛날 모습이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옛 모습을 계속 알게 하고 깨닫게 하옵소서. 도대체 주님께서는 우리의 어떤 존재이기에 그냥 구원해주셨는지 어느 정도로 문제성 있는지를 예배를 통해서도 늘 발견해서 주의 십자가 예외조치에 대해서 감격하고 감사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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