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강의

무당의 중심

아빠와 함께 2021. 12. 29. 08:12

대전-75강 사무엘상28장18절(무당이 중심)20211227a
(강의:이근호 목사)


사무엘상 28장, “그 때에 블레셋 사람이 이스라엘을 쳐서 싸우려고 군대를 모집한지라 아기스가 다윗에게 이르되 너는 밝히 알라 너와 네 사람들이 나와 한가지로 나가서 군대에 참가할 것이니라 다윗이 아기스에게 이르되 그러면 당신이 종의 행할 바를 아시리이다 아기스가 다윗에게 이르되 그러면 내가 너로 영영히 내 머리 지키는 자를 삼으리라 하니라 사무엘이 죽었으므로 온 이스라엘이 그를 애곡하며 그의 본성 라마에 장사하였고 사울은 신접한 자와 박수를 그 땅에서 쫓아내었었더라” 그렇게 시작되거든요.

그리고 난 뒤에 7절에 보면, “사울이 그 신하들에게 이르되 나를 위하여 신접한 여인을 찾으라 내가 그리로 가서 그에게 물으리라 그 신하들이 그에게 이르되 보소서 엔돌에 신접한 여인이 있나이다” 그렇게 28장 시작이 됩니다.

시작을 이렇게 보시면 되죠. 다윗은 사울을 살려주다. 사울이 다윗을 잡기 위해서 몇 번씩 계속 추적해나가지만 사울이 다윗을 추적하는데 하나님께선 어떤 조치를 하느냐 하면 다윗이 결정타를 날릴 수 있는 기회를 계속 유발시킵니다. 이것은 다윗으로 하여금 사울이 너의 적이다. 따라서 사울만 없애버리면 다윗, 너는 이스라엘 온 나라를 접수할 있다, 라는 뉘앙스가 마치 다윗에게 주는 신앙적인 시험, 테스트처럼 느껴지는 거예요.

“적이 저기 있잖아. 저 자만 죽이면 너는 이스라엘을 한꺼번에 다 먹을 수 있고 왕이 될 수 있어.” 그러한 테스트를 하나님께서 여러 번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면 다윗의 적이 사울입니까, 하는 질문이 성립되겠지요. 적 같으면 죽여야 되는데 살려주는 이유는 적이 아니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그러면 다윗의 적은 무엇이냐? 사울은 일단 아니에요. 왜? 사울을 살려줬으니까. 그럼 정답이 뭐냐 하면 사울을 포함시킨 정신적인 환경, 이 자체를 적으로 보는 겁니다. 적이 개인이 아니라는 뜻이죠. 다윗의 적이 개인이 아니고, “저 인간만 제거하면 나는 잘 될 수 있어.” 이게 아니라 사울에 속한 환경 자체를 적으로 보는 겁니다.

그러면 이게 적이란 말은 다윗의 적이란 말이 아니고 다윗이 속해 있는 이쪽의 환경과 두 개 서로 이질적인 환경이 대치되고 있다고 다윗은 보고 있습니다. 나의 적은 나에게 필요치 않다 이 말입니다. 다윗은 자신이 존재하는 것은 하나님의 적과 싸우기 위해서 내가 군대로 나선거지 굳이 나의 적을 내가 칠 이유가 없다 하는 겁니다.

내 적을 내가 쳐버리면 하나님의 뜻은 어디서 찾습니까? 못 찾지요. 하나님의 뜻을 빙자해서 내 뜻이 돼버리면 하나님의 뜻은 따로 어디 있습니까? 없잖아요. 하나님의 뜻을 몽땅 내가 가져와버렸으니까요. 그래서 이 사울과의 만남에서 시편의 내용을 주의 깊게 볼 필요가 있어요. 시편에서 항상 적이 누구의 적이냐 하면 다윗의 적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적이에요.

방금 제가 이야기한 것을 이렇게 정리하면 간단합니다. 다윗은 자기를 위한 인생이 아니고 다윗은 하나님이 함께 있는 그 나라의 적이 사울로 보면 다윗은 어디 속해 있느냐 하면 이스라엘에 속해 있습니다. 이해하기 쉽게 하기 위해서 앞에 ‘참’ 제대로 된 이스라엘. 현재 제대로 된 이스라엘은 없습니다. 다윗과 뭐 400명 정도, 그건 이스라엘이 아니죠. 열두지파가 아니니까요. 열두지파가 구성돼야 이스라엘 됩니다. 다윗에게 이스라엘이 없어요.

그럼 이스라엘이 어디 있느냐? 저기 있어요. 이쪽에 사울이 이스라엘을 다 집어삼키고 있습니다. 왜? 사울은 왕이기 때문에. 그러면 다윗이 존재하는 이유가 뭐냐? 하나님께서 나로 왕을 삼았다. 왕을 삼았다는 말은 민족이 나라가 있을 때 왕이 있는데 나라는 없고 왕부터 덜렁 기름 부은 거예요. 그러면 자기의 왕이 왕답게 옹위가 되는 백성들은 어디서 구하는가? 적으로 간주되는 여기서 구해야지요. 구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이걸 더 이해하기 쉽게 하면 이렇습니다.

다윗의 활동은 요즘 말로 하면 성도 구하기, 또는 성도 찾기, 또는 성도 발견하기, 성도는 없는데 여기 뭐가 있느냐? 성도 자리에다 인간이 있지요. 그런데 이 인간은 하나님과 대적되는 전부 다 인간들이에요. 그래서 인간에서 뭘 끄집어내느냐 하면 성도라는 것을 구하려고 찾으려고 하면 여기에 무슨 요소가 개입돼야 되는가? 다윗의 처신 있잖아요. 다윗의 믿음, 다윗이 사울과 대했을 때 그 마음가짐 그것이 요속에 삽입이 되면 이 인간들은 뭐가 되느냐 하면 성도로 변신하게 되고 이것이 참 이스라엘이 되고 하나님의 참 백성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성도 이전에 이스라엘 되기 이전에 왕부터 기름 부었다는 사실에 유념하시기 바랍니다. 성도 이전에 왕부터 기름 부음 받았어요. 마치 자식은 하나도 없는데 이름은 만인의 아버지라. 이름이 누구에요? 아브라함이죠. 자식은 하나도 없어요. 자식 낳을 수 있는 가능성도 없어요. 불가능성이에요.

여기에 하나님의 언약요소가 싹 들어갑니다. 언약요소가 들어가면 저 하늘의 별같이 많은 자손은 아브라함 사적인 나의 자손이 아니고 장차오실 하나님의 자녀들이 생겨나는 것을 나라는 아무것도 아닌 나를 통해서 시범조로 보여주는 모델로 하나님의 일에 참여하고 있다고 보시면 됩니다.

그래서 시작해서 여기까지 이야기한 것은 한 마디로 이겁니다. 성도 찾기. 오늘날 성도에게 성령이 임한 것은 딴 사람 찾지 마세요. 우리 가족 찾지 말고 잃어버린 북한의 일가친척, 이산가족 찾지 마시고 행여나 성도가 이 대전에 있을 수도 있잖아요. 아 말 참 건방지게 들리지만, 이것보다 더 심하게 건방져도 괜찮아요. 대전과 합칩시다. 오창까지 넓혀서 누구 때문에 넓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세종까지 넓힙시다.

이 중에서 행여나 성도가 있을 수도 있지 않겠느냐. 없는 것 맞는데 행여나 있을 수 있다는 그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여러분 자신들로 하여금 성도되게 하신 거예요. 그러면 우리 자신은 무슨 역할 받는가? 사무엘상 이야기가 남의 이야기가 아니고 다윗 이야기가 아니고 오늘날 누구 이야기냐 하면 성령 받은 우리들 이야기에요. 왜? 성경 안에는 사무엘상뿐만 아니고 모든 성경을 다 이루심이 함축해서 거기 들어가 있거든요.

제가 어릴 때 십대 때 크리스마스에 받고 싶은 선물은 딱 한 가기였어요. 저뿐만 아니고 모든 아이들이 받고 싶은 선물은 그게 뭐냐? 해태종합선물. 그것도 오리온종합이 아니고 앞에 붙는 게 반드시 해태종합선물이에요. 간접광고라도 할 수 없어요. 그것밖에 없었으니까. 종합선물에 보면 온갖 초콜릿부터 다 들어있어요.

그러니까 창세기만 이룬 게 아니고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요한계시록까지 몽땅 다 종합선물로 성령께서 그걸 함축해서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 겁니다. 어느 대목을 우리가 지킬 이유가 없는 게 그 이유 때문에 그래요. 다 지키는 거예요. 이걸 우리가 다 지켰던 겁니다. 다 지켰기 때문에 성령을 선물로 받은 사람에게 너에게 선물 갔다는 그 신호, 시그널 그게 뭐냐 하면 적어볼게요.

“이제 너는 죽어도 괜찮지” 그 뒤에 반드시, “그지?” 선물 받을 것 다 받았어요. 영생을 받았잖아요, 영생을. 영생을 받았기 때문에, 사도행전에 나오는 열두 사도들 특징이 영생 받았어요. 영생 받았기 때문에 사도 바울이 하는 말이, 나는 이제 그리스도 안에 성령 안에 있기 때문에 주님 십자가 안에 있기 때문에 죽음은 그냥 안방에 자러가는 거예요. 죽는다는 것은 잠자는 거예요. 성도의 죽은 것은 귀하게 본다. 시편 116편 15절인가 그럴 거예요.

“성도의 죽는 것을 여호와께서 귀중히 보시는도다” 성도가 죽는 것은 주께서 귀하게 보신다. 이 말은 죽게 하는 것도 내 말씀 성취 차원에서 안 죽으려는 인간을 의도적으로 죽게 하셨다는 겁니다. 그것 봐. 저 사람은 죽어도 괜찮잖아. 그게 어제 낮 설교에 나왔던 마리아의 오빠 나사로, “나사로 죽었잖아. 그런데 사흘 만에 내가 살려냈잖아.”

누가 투덜거리고 누가 짜증을 내겠습니까? ①마리아, ②마르다, ③나사로, 몇 번이겠어요? 나사로 본인이 짜증내는 거예요. 군에 제대했는데, 이미 군에 제대했어요. 속 시원해. 그런데 다시 군대생활 또 하래. 지옥생활 또 하래. 자기는 끝났는지 알았는데. 왕 짜증이죠. 전부 다 누이동생 때문에, “내 오빠 살려내라고 닦달내서 살려줬잖아요. 오빠는 참 힘들게 됐어요. 그래놓고 오빠야~. 너는 나를 힘들게 하는 존재다 말이죠. 그냥 나를 죽도록 놔두지 왜 살려달라고.... 주님이 살려냈지만.

그래서 성경 요한복음 11장에 뭐냐 하면 나사로가 죽은 다음에 살아나서 예수 믿는 자가 더욱더 많아졌다고 했어요. 많아지니까 당국의 조치가 뭐냐 하면 이제는 누굴 죽인다? 나사로를 죽이려고 한 거예요. 이게 얼마나 코미디인지요. 죽었다가 살아났잖아요. 이미 이 사람은 안 죽는다는 게 증명이 됐지요. 그런데 인간들 자체적인 세상관의 한계 때문에 본인이 생각한 세상이 올바르고 우기는 그 고집 때문에 저걸 죽여 버리자고 나온 거예요. 죽여도 안 죽는 사람을 죽여 버리자고 나온 거예요. 결국 뭐 나사로는 늙어 죽었지요.

보통 종교에서는 부처를 본받자, 공자를 소크라테스를 본받자 하는데 복음에서는 본받을 대상이 없습니다. 예수님과 나를 본받으라, 너희는 예수의 마음을 품으라, 그런 구절이 나오잖아요. 그 모든 말씀은 네가 나를 본받지 않더라도 이미 본받으라는 명령을 성령께서 앞서 해서 본인이 우리로 하여금 다가오게 하십니다.

그 이유가 뭐냐 하면 나를 구원하기 위해서? 아니요. 이미 성령 오신 자체로 구원받았기 때문에 더 이상 구원이란 건 말이 안 되고요. 뭐냐? 너 말고 네 곁에 너와 똑같은 성도 찾기, 라이언 일병 구하기, 성도 구하기 하는 겁니다. 이 소자한테 또는 선지자 이름으로 상 줄 때 내가 그 상을 잊지 않겠다. 제자 이름으로 상주면 잊지 않겠다. 이 소자한테 물 한 그릇 대접하면 내 잊지 않겠다는 말이 아무도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너희들끼리 주의 사랑으로 교제가 되게 되면 그 가운데 주께서 그렇게 한 줄 알아라, 이 말이거든요. 주께서 그렇게 하신 거예요.

그래서 성령 받은 성도의 특징은 뭐냐 하면 죽음 상황을 넘어섰다. 죽음 상황을 넘어선 거예요. 이 사람들이 성도입니다. 다윗이 개인적으로 살려고 한다면 누굴 죽였겠습니까? 사울을 죽였을 거예요. 왜? 유일한 적이 보인다는 것은 무슨 뜻이냐 하면 나만 살면 그만이라는 뜻의 반영이거든요.

드라마나 영화 보면 그런 게 많은데 누가 나한테 협박한다. 사채업자가 협박한다. 그러면 아주 간편하고 아주 깔끔한 해결책은 뭐냐 하면 사채업자를 먼 황량한 터에 유인해서, 거기는 cctv 없으니까 죽이면 됩니다. 그러니까 나를 귀찮게 할 때 귀찮다는 말은 지금 나는 안 죽고 싶은 나를 힘들게 한다는 뜻이에요.

죽음을 아직 건너뛰지 않은 나를 죽음이 무서워서 벌벌 떠는 나를 더 살아야 돼, 살아야 돼, 하는 나를 자꾸 죽음에 몰아넣으니까 방법은 뭐냐? 죽음의 요소를 지워버리면 전에 내가 의도했던 내 욕구, 더 살고 싶음이 차질 없이 진행되잖아요. 사채업자를 황량한 데서 죽여 버리면 됩니다. 그리고 파묻으면 되고. 문제는 오가는데 거리에 cctv이 깔려있다는 것. 그 광야에 황무지에 들어가는 아스팔트 도로에 다 들킨다는 거예요.

그걸 보면 사채업자가 얼마나 위험한 직업이란 걸 여러분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깡패라는 게 위험한 직업이에요. 자칫하면 자기가 죽는 수가 있어요. 돈 갚아라, 해서. 1년 이자율이 2500% 이랬다는 것은 너 죽고 나 죽자는 이야기지. 네가 죽든지 내가 죽든지 둘 중에 하나 하자는 뜻 아닙니까. 얼마나 막장까지 간 인생, 그걸 이 세상은 우리에게 유도합니다.

그래서 cctv 있기 때문에 나중에는 차마 죽을 수 없을 때는 어떻게 하느냐? 교회 가서 기도해야지요. 그 인간 죽여주시옵소서. 그 인간 사채업자 남이 죽이든지 차가 와서 박든지 안 그러면 질병으로 죽든지 나를 괴롭히는 못난 남편 죽게 하옵소서, 이런 것 비슷하게 죽으면 그 다음부터 내 인생은 행복하다, 편안하게 복음이나 듣고 살면 되겠다.

그러한 기도가 어떻게 나오느냐 하면 이거는 억지로 나오는 게 아니고 절로 나옵니다. “아이고, 저 웬수, 웬수, 저거 또 기어들어왔다. 아이고, 술 냄새. 귀신은 뭐하노? 저거 안 잡아가고.” 절로 나온다고요. 그런데 바로 네가 죽어야 내가 산다는 나, 나는 내 세계는 나만 있으면 그만이라는 세계가 놀랍게도 이게 사울의 세계입니다. 그걸 언급하는 거예요. 이 성경이. 너의 세계에서 못 빠져나왔다는 말은 아직도 죽음 상황에서 넘어서지 못했다는 겁니다.

사울이란 사람이 기를 쓰고 쫓아다닐 때 하나님께서 어떤 상황을 줬느냐 하면 내가 잠자고 있는 것 그냥 죽여 버리면 모든 만사가 깨끗하게 처리된다는 그런 상황을 주신 이유가, 다윗 너는 이미 누굴 죽이고 내가 산다는 그런 차원을 넘어섰잖아, 라는 그런 입장에서 나에게 기름 부음을 준 거예요. 하나님께서 기름 부음, 요새 말로 성령을 주신 거예요.

아니 쓰레기와 싸울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쓰레기하고. 쓰레기 붙들고 짚으로 만든 허수아비 있잖아요. 허수아비 붙들고 모가지 쥐고 네가 나를 괴롭게 하는구나. 다른 사람 보면 웃습니다. 그 짚으로 만든 허수아비나 오늘날 거리에 돌아다니는 이런 쓰레기나 다른 바가 뭐가 있어요. 결국 남을 닦달 낸다는 말은 본인 자체가 죽음을 안 넘어섰다는 티를 낸 것 밖에 안 돼요.

그림 좀 그려서 대회 나가니까 돈 있는 사람은 특선 줘버리고 나는 잘 그렸는데 입선일 때 그때 성도의 태도는 뭡니까? 잘 먹고 잘 살아라. 그러면 될 문젠데 내가 이 비리를 이제는 말하고 싶다 고발하고. 이러지 말고 그냥.... 그러니까 제가 어제 그런 이야기했지요. 세상 승부에 참석하지 말라고 짧게 이야기했어요. 세상 승부에 승자와 패자를 나누는 그 게임에 참여할 필요 없다고요. 이력서 허위기재했다고 기자회견할 필요 없고요.

코로나로 죽었다, 살았다 그게 큰 문제가 아닙니다. 더 큰 문제는 어떻게 인간은 불가능한 죽음 그 이후의 상황을 그 소속을 산 채로 부여받는가? 세상에 이런 횡재가 어디 있어요. 그 횡재를 받았다고 좋아할 게 아니고 사명을 부여받는 거예요. 너와 똑같은 성도를 네가 찾아서 만나야 돼, 라는 사명. 너와 똑같은 일을 내가 이 땅에다 보물찾기 하듯이 어딘가 숨겨놓은 거예요. 여러분 주위에 있을 수도 있고 멀리 있을 수도 있고 숨겨놨습니다. 그걸 찾아내는 겁니다.

그럼 찾아낸다면 몇 가지 전제가 필요하겠지요. 다시 보면 죽음 넘어 상황, 죽음 넘어 상황에서 다윗이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따로 할 일이 있구나. 다윗은 깨달았습니다. 죽음 넘어 상황의 적이 뭐냐? 사울이라고 하지 말고 이제 알았으니까 죽음을 넘지 못한 상황의 대변자로서 사울로 인식하게 되면 사무엘상 28장 해석은 다 된 겁니다.

죽음을 넘지 못한 인간이 살기 위해서 무슨 짓거리까지 할 수밖에 없었는가? 그게 다윗 보기에 다윗의 옛 모습일 수 있고 오늘날 우리들의 옛 모습이었으면 합니다. 지금 모습 하지 말고. 내가 이렇게 여기에 겁내면서 발발 떨면서 두려워하면서 그렇게 나는 살았었었었었었었었었었었었었지. 이렇게 볼 때 주변사람들 보세요. 전부 다 이제 저들이 사울이구나. 그들이 어떤 마음으로 살아가는지 28장에 나오는 사울이 어떻게 살았는지를 그대로 보여주면 되는 겁니다.

그런데 오늘 28장 신접한 여인으로 넘어갑니다. 다윗에게 아기스란 사람이 있었어요. 가드란 지역의 왕 이름이에요. 아기스 왕이 다윗에게 속아 넘어갑니다. 다윗은 이미 내 사람으로 포섭되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런데 다윗은 거기서 아기스 왕을 속이지요. 제가 왕의 신하가 됐는데 뭘하면 됩니까, 라니까 아기스 왕이 너는 내 보디가드 하면 된다. 이게 머리 지키는 사람이라고 나와요(2절).

여기서 다윗은 사울의 죽음에 대해서 하나님께 맡겼는데 하나님의 뜻이 뭐냐? 다윗은 사울을 죽일 때 블레셋을 통해서 죽이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란 걸 받아들이게 됩니다. 내가 안 죽이는 거예요. 블레셋을 통해서 죽이는 거예요. 이건 어느 원칙이냐 하면 적은, 다른 말로 언약이 없는 자는 언약이 없는 자끼리 서로 부딪쳐서 둘 다 코피 나게 만드는 방법, 하나님의 방법이에요.

언약이 없는 자는 저희끼리 충돌해요. 복음을 모르는 당회장 목사와 복음을 모르는 부교역자가 서로 하나는 예배당 1층에 예배드리고 하나는 2층에 예배드리고. 둘이 박아 둘이 다 망하게 하시는 거예요. 교회에서 싸우면 복음 싸움이 아닙니다. 기득권 싸움이거든요. 이 예배당 지을 때 너 지금까지 돈 얼마 냈느냐? 그 싸움이에요. 지분 싸움이에요. 어디서 날아온 돌이 박힌 돌을 빼려고. 이 싸움이란 말이죠.

요새는 그런 시어머니 없지만 옛날에는 며느리 들어오면 텃세에요. “우리 집안이 얼마나 대단한 집안인데 근본도 없는 것이 연애해서 아 하나 낳았다고 재벌 집에 들어오느냐? 안 나가냐, 빨리. 얼마면 돼, 얼마면 되겠어? 네 아이 데리고 나가. 너는 우리 재벌가문의 명예를 손상시켜.” 그럼 옛날에는 질질 짜면서 <사랑과 전쟁> 나오겠지요. 요새는 뭡니까? 니가 나가라, 해서 시어머니한테 총 들고, 시어머니도 며느리한테 사냥총 들고 사냥개는 이렇게 훈련한다 하고. 무슨 드라마지요? 수애 나오는 드라마 있어요. <공작도시> “이게 어디 시어머닐 건드려.” 요새 이 세상이거든요.

블레셋으로 하여금 사울을 치게 만들어요. 둘 다 언약이 없다는 점에서 똑같아요. 똑같은 형편에 있습니다. 칠 때 사울은 여기서 자기가 이 나라를 뭐로 봅니까? 이스라엘로 보지요. 주님께서는 사울을 치면서 이스라엘도 같이 다 쳐버립니다. 다윗중심에는 점선으로, 점선이란 말은 보이지 않는 이스라엘은 따로 준비돼있어요.

실선으로 돼있는 거짓된 이스라엘, 하나님께선 다윗을 바꿔치기할 때 방법은 뭐냐? 여기에 블레셋이라는 이방민족을 통해서 치게 하는 거예요. 이것은 바로 이방민족이 이스라엘을 치는 것이 하나님의 언약에 부합됩니다. 신명기 9장에 보면, 네가 만약에 말씀대로 여호와를 버리면 내가 주변에 깔려있는 이방민족을 동원시켜서 너를 징벌할 것이다. 그게 언약에 나와 있잖아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융통성 없어요. 그냥 언약대로 할 뿐이에요. 하나님의 관심사는 자기 언약이 완성되는 거예요. 해태종합선물이 완성되는 데 있어요. 그렇기 때문에 해태종합선물이 없는 사람은 언제든지 이거는 지가 아무리 하나님 믿고 몇 십 년 봉사해도 그냥 제쳐버립니다. 언약이 없으면, 하나님의 약속이 없으면. 하나님은 자기 것만 찾으니까요.

우리 것을 안 받아줘요. 천국에선 인간의 것이 요만큼도 끼어들 안 됩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것은 반드시 무슨 요소가 있느냐 하면 ‘나를 위하여’가 포함되기 때문에 나를 위하여 이것은 주님을 위해서에 거슬리는 것이 대척관계에 있어요. 그래서 천국에는 ‘나를 위해서’를 제거한 채 주님을 위해서만 들어가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천국 이야기하면서 무슨 비유를 하느냐 하면 혼인잔치 비유하지요. 혼인잔치 특징이 뭐냐 하면 임금이 자기 아들 장가보낸다고 참석 안 하면 다 죽여 버린다는 그런 잔치에요. 임금이 자기 아들 장가보낸다고 니 장가 중지하란 겁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내 장가간다고 못 간다 했다고. 자기가 예식장에 오후 2시에 3층에서 예식 드리고 있는데 1층에 임금님 아들 한다고 꽃 빼고 후다닥 신부 버리고 지가 가서 하객으로 참석할 수 없는 것 아닙니까.

그래서 그 천국 이야기가 무슨 이야기냐 하면 천국은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니고 네 것을 빼는 과정과 더불어 빠진 그 자리에 천국이 채워진다는 거예요. 그전에는 나를 위해 살다가 이제는 나를 위해 사는 이것이 저주스럽다고 인정할 때 그게 천국 사람이 되는 거예요. 모든 게. 이거는 뭐 아주 과격한 것 아니에요. 그냥 공원 벤치에 앉아있으면 아는 거예요.

전에는 잔디밭이 나를 휴식하기 위해서 있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날 성령 받고 난 뒤에는 이 잔디밭은 나를 위한 게 아니고 잔디밭 되기 위해서 내가 얹혀있는 배치물에 불과한 거예요. 하나의 그림 좋게 하기 위해서 이 잔디밭에 2시에서 3시까지 한 시간 동안 앉아있는 겁니다. 모든 주어진 상황을 주님이 만들었기 때문에 주님을 위해서 나는 여기에 살기 싫더라도 살아야 돼. 손자 봐야 돼요. 어쩔 수 없어요. 그 그림이 주께서 원하는 그림이라면 내 뜻대로 마옵시고 주의 뜻대로 해야지 어떻겠습니까? 내 편한 데로 못하는데.

아직까지 결정적인 것은 제가 이야기 안 했습니다. 28장에. 블레셋이 찾아오니까 안 찾아오면 사울은, “다윗 쫓는 것 나중에 미루지, 뭐.” 했는데 갑자기 블레셋이 찾아오니까 여기서 위기를 느끼는 겁니다. 그래서 6절에 뭐라고 돼 있느냐 하면, “사울이 여호와께 묻자오되 여호와께서 꿈으로도, 우림으로도, 선지자로도 그에게 대답지 아니하시므로” 대답지 아니했다.

그러니까 사울이 몰랐던 것은 사무엘이 그동안 살아 있을 때 이스라엘 중보자 노릇한 거예요. 오늘 첫째 강의에서 결정적인 것은 중보자가 노골화되었다. 내가 나 중심으로 살 때 진짜 사무엘이라는 하나님의 선지자가 정말 중보자였던가를 생각해보자. 내가 살고 싶을 때 내가 사울 심정일 때 예수님이 중보자라고 고마워하고 감사합니까, 라는 질문을 우리에게 하는 거예요.

결정적인 것은 오늘 강의에서 중보자가 뭐로 바뀌느냐 하면 신접한 여인으로, 무당이 중보자였어요. 어떤 경우에? 내가 나 지키려고 나를 위해서 사는 나를 지키려 할 때 예수고 삼위일체고 구색에 불과하고 아무짝도 소용없고 진짜 중보자는 뭐냐? 나를 위하는 무당만이 진정한 나의 중보자였다. 그러니까 예수를 뭐로 바꾼다? 나를 위한 무당으로 다 바꿨다 이 말이에요. 교회가. 몽땅 다 교회고 성당이고 전부 다 나를 위한 예수여야 한다는 내 쪽에서 예수를 신접한 여인으로 다 바꿔놓은 거예요. 삼위일체 하나님을 다 바꿔놓은 겁니다.

그래서 중심은 뭐냐? 여자 무당이 중심이에요. 28장 중심이. 이걸 다른 말로 하면 이 세상에서 가장 정신이 온전한 사람은 신접한 여인 밖에 없어, 28장에서. 제대로 정신이 올라간 사람. 지금 사울이 나중에 사무엘 만나고 난 뒤에 정신이 게거품 물고 쓰러져 있잖아요. 그때 온전한 정신으로 “임금님, 임금님. 일어나세요. 아이고, 정신이 갔구나.”

22절에, “그런즉 청컨대 이제 여종의 말을 들으사 나로 왕의 앞에 한 조각 떡을 드리게 하시고 왕은 잡수시고 길 가실 때에 기력을 얻으소서” 그래서 블레셋 전쟁에서 왕으로서 앞서 나서야지요. 사울이 정신없어 안 된다고 하니까 신하들한테 이야기해서 빨리 24절에 보면, 여인이 그 비싼 한우까지 드리면서 가루로 빵을 만들어서 불쌍한 노인네 사울을 먹입니다. 정신이 유일하게 온전해요. 이 세상에 온전한 정신은 무당밖에 없습니다.

무당 입장에서는 모든 세상은 이미 하나로 정리가 됐어요. 모든 인간은 각자 자기 위해 산다, 끝. 교회를 나오든 절에 가든 성당 가든 어딜 가든 무교라고 이야기하든 교회도 없고 아무것도 없는 윤석열하고 부인이고 뭐든 간에 교회 갔다 튕겨 나온 이재명도 마찬가지고 모든 인간은 오직 나를 위해 산다.

그걸 제대로 말할 수 있는 자는 무당, 그것도 그냥 무당이 아니고 용한 무당, 제대로 된 무당, 이것이 뭐냐? 이것이 이 땅에 작용하는 초월입니다. 이 땅에 초월이 없는 게 아니에요. 이 세상의 자연성을 뛰어넘는 초월이 없는 게 아니에요. 있어요. 있는데 이 지상의 초월은 어디를 안 벗어나느냐 하면 각자 나만의 영광을 위해서, 나만의 자존심을 위해서, 신약 같으면 나의 의를 위해서 각자 자기 위해서 필요한 초월의 내용들을 여기서 무당들의 조달해줘요. 무당은 조달책입니다.

당신이 하늘에 뛰어난 사람이라고 스스로 위로하시기 바랍니다. 그에 필요한 모든 재료와 내용들은 무당 쪽에서 다 조달해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이 무당은 얼마나 이웃사랑이 철두철미한지 기력이 없어서 엎어진 노인네까지 비싼 한우까지 잡아서 이웃사랑을 솔선수범해서 보여줍니다. 이것 잘하는 데가 원불교, 원불교 무당들. 이 사람들 모토가 수녀회나 수도회나 마찬가지에요. 부처의 말씀은 실천에 옮겨야 효과 있다.

브라만 교회에 허례허식적인 제단을 탈피하고 그걸 실천에 옮기는, 아트만이 자아거든요, 인도 종교에. 아트만의 것을 내가 신이라는 것을 그냥 말로 하지 말고 제사로 하지 말고 실천해서 이웃을 도우면서 살겠다는 모토를 들고 튀어나온 종교가 바로 불교입니다. 제도화된 교회에 불만을 갖고 실제로 주님처럼 산상설교를 실천해서 초월의 모습을 보여주자, 하는 수도회가 도미니크 수도회에요.

나중에 도미니크 수도회는 누가 학문적으로 나갔고요, 성 프란체스코가 했던 그 수도회가 따로 나와요. 도미니크 수도회는 얼마나 유명한지 노래도 있어요. 도미니크, 니크, 니크 하는 1963년도에 나온 노래인데 그 노래에 보면 도미니크의 성자 이야기가 가사로 돼있어요. 도미니크는 착해요, 순해요, 복음을 전해요, 어려운 사람을 도와줘요, 빵을 나눠줘요. 산타클로스 할아버지처럼 그렇게 돼요.

그래서 KBS나 공영방송에서 크리스마스 되면 나오는 특집프로가 이 무당에 관한 거예요. 이 세상에 지상에 돈에 찌든 것보다는 더 초월한 돈에 구애받지 않고 자기를 헌신해서 인류사랑을 구현하시는 그러한 초월, 그게 바로 신접한 무당이 하는 짓이에요. 그래서 이렇게 해서 뭐하는 겁니까?

신접한 무당은 누굴 도와줬어요? 여러분 답변해보세요. 사울 왕을 도와줬죠. 그럼 블레셋을 동원해서 사울 왕과 이스라엘을 없애고자 하는 것은 누구의 뜻입니까? 그건 하나님 뜻이죠. 그러니까 하나님 뜻은 언약이지만 신접한 여인은 동질성을 갖고 있어요. 인간의 존엄성을 유지하고 있는 거예요.

성경을 모르고 상식적으로 성경에 덤벼들다가는 전부 다 문제는 신접한 여인이 얼마나 예쁘냐, 예쁜지는 안 나오는데 이 무당이 알았지요. 옛날에 사울이 이스라엘을 이스라엘답게 한다고 그 동네에 있는 모든 무당들은 다 추방해버렸다는 사실을 너무 잘 알아요. 여기 9절에 보면, “여인이 그에게 이르되 네가 사울의 행한 일 곧 그가 신접한 자와 박수(남자무당)를 이 땅에서 멸절시켰음을 아나니 네가 어찌하여 내 생명에 올무를 놓아 나를 죽게 하려느냐”

신접한 여인도 마찬가지에요. 일단 내가 살아야 자기가 하는 특이한 직업 있잖아요. 신을 부르는 이 일, 이게 뭐라 했습니까? 이게 초월이죠.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이 땅에 무엇을 허용했습니까? 신접한 여인을 무당을 허용한 거예요. 왜? 거기에서 나를 위한 행위를 하는 자들의 무당이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하나님께서는 거짓 선지자를 허락을 하신 겁니다. 이 땅에 귀신들과 마귀들을 허락하셨어요.

그들이 몽땅 누구의 적이냐? 바로 하나님의 적이 되기 때문에 그래요. 그리고 초월자, 신접한 여인이라 했지만 제가 아까 용어를 뭐라 했습니까? 중보자라 했지요. 하늘과 보이지 않는 세계와 보이는 세계를 연결해주는 연락책 또는 가이드 역할하는 신접한 여인이 사울은 언약대로 말씀대로 율법대로 한다고 쫓아냈지만 정치적으론 쫓아냈지만 심정적으론 그들의 그리운 거예요.

왜냐하면 사울은 오직 사울의 자존심을 위해서 하나님이 존재한다고 자기가 그렇게 느끼기 때문에 그래요. 하나님은 나를 위한 하나님일 때 진정한 하나님이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사울은. 그래서 아까 7절에 보면 사무엘이 있을 때 그 사무엘이 마치 나를 위해서 존재하는 것처럼 생각하는 거예요. 그런데 여기 사무엘이 등장했잖아요. 노인 모습으로, 14절에. 그 사무엘은 뭐냐 하면 네가 왕 시절에 내가 등장하는 것은 너를 잘라내기 위함이란 뜻입니다. 그 증거로서 18절에 보면, 네가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치 아니했다 했지요.

여러분에게 물어봅시다. 사울이 하나님의 율법을 무시했습니까? 아니지요. 사울이 하나님을 여호와를 안 믿었습니까? 아니지요. 믿었지요. 사울이 하나님을 버렸습니까? 아니지요. 자기는 사울은 어떤 경우라도 전쟁할 때 제사부터 먼저 드리고, 그래서 사무엘 오기를 기다렸고 자기로서는 최선을 다하여 하나님 앞에 화내는 일은 안 하기로 맹세를 하고 그렇게 한 거예요. 옛날 자기 과거를 아니까요. 하나님을 위해서 최선을 다한 겁니다.

그런데 사울이 믿는 하나님은 그 하나님이 나를 제거하는 하나님이라는 생각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어요. 왜냐? 자기는 최선을 다하기 때문에. 최선을 다하는 나를 예뻐하고 나를 보호하고 내 능력을 키우고 내 자존심을 지킬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거예요. 내가 지키고 싶은 나를 하나님도 내 마음을 알아서 지킬 수 있을 거라고 그렇게 생각한 겁니다.

그것이 정작 하나님의 마음과 하늘과 땅 차이라는 것을 상상도 못한 거예요. 사실은 하나님께서 사울에게 문제 있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중간에 사울 인생에다 허리춤에 쑥 들어온 게 있지요. 훅 들어왔지요. 누가 들어왔어요? 소년 다윗을 보냈잖아요. 함 봐라. 걔가 소년이지만 누굴 이겼다? 이스라엘을 공격하는 골리앗을 이겼잖아. 너 뭐였어?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러면 사울이 그 정도 되면 그동안 이스라엘 주인이 내가 아니고 하나님이 주인이구나, 라고 알면 되는데 갑자기 백성들이 사울은 천천이요, 할 땐 기분 좋았지요. 그 다음에 다윗은 만만이요 하니까 그만 여기서 그 다음에 성경에 보면, 악신이 들었다. 악신이 뭐냐 하면 아무나 죽이는 게 악신이 아니에요. 악신은 성신 받은 사람을 파악해서 보호해주는 게 아니고 창을 들고 네가 죽어야 내가 산다고 찔러버리는 게 악신입니다.

대학교 때 두 친구가 있는데 한 친구는 현대 들어가고, 한 친구는 삼성에 들어갔습니다. 그래도 사적으로 친구 사이에요. 그런데 회사에서 프로젝트를 줍니다. 현대 있는 사람에게는 삼성에 있는 친구 꼬셔서 삼성에서 새로 개발한 기밀 기술을 빼내라 하고, 삼성에선 현대 친구 꼬셔서 빼내라 할 때 둘 사이는 원수지간이 되겠지요.

사적으로 아무리 대학교 때 친하게 지냈지만 본인이 속해 있는 환경이 내가 원치 않는 곳으로 몰아넣을 때 사표 낸다, 아니면 친구를 속인다, 몇 번입니까? 가정 생활하는 여자 분들은 잘 몰라요. 김장만 하면 되니까. 그런데 사회 생활하는 남자들은 굉장히 갈등이 되는 거예요. 사표 내고 싶어요. 인간이라면. 전에도 이야기했지요. 사표 내려고 하는데 전화가 하필 와서, “여보, 기뻐해. 나 임신했어.” 그 소리 듣고 사표 도로....

이 말은 인간은 천국에 갈 수 없음을 알려주는 적들 속의 환경이 꼭 필요한 거예요. 내가 스스로 힘으로 천국 갈 수 없다는 것을 아는 순간 이미 그 사람은 천국에 온 사람이에요. 성령을 안 받은 사람은 최선의 노력을 다하지 이게 바로 내가 있던 내가 살던 그 모습이야, 라고 알 수가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동시에 다 줘버렸어요. 중보자가 여호와인지, 아니면 중보자가 신접한 여인인지.

사울은 본인이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중보자로 여겼고 다윗도 자기가 이스라엘 대표자로 여겼지만 하나님께서 이끄시는 가운데 중보자는 다윗의 시편을 통해서 내가 중보자가 아니고 여호와란 중보자가 진짜 이스라엘 왕이다. 왕이 있다면 백성은, 이스라엘은 뭡니까? 다윗의 나라가 되면 안 되고 여호와의 나라가 된다는 것을 다윗은 일찍 알았고 사울은 끝까지 그게 막혀있었던 겁니다. 다윗 네가 죽어야 내가 산다는 거예요.

하나님께서는 블레셋을 통해서 사울을 죽이기로 하면서 먼저 선제 작업으로서 신접한 여인이 그동안 네가 알고 있던 사무엘과 비교해보라. 신접한 여인이 사무엘을 불러냅니다. 한 노인네가 올라왔지요. 사울은 생각했지요. 신접한 여인을 찾아간 이유가 사무엘한테, “잘못 됐습니다. 다시는 그런 짓 안 하겠습니다. 한 번만 도와주시면 은혜를 영원히 잊지 않겠습니다.” 이렇게 빌면 될 줄 알았지요.

그런데 사무엘이 사울 왕과 있을 때 사무엘은 사울을 쳐내기 위함이고 사울이 생각했던 이스라엘을 쳐내기 위함이에요. 쳐내는 데 그게 바로 자기는 사울 왕이 신접한 여인을 쫓아낼 때는 하나님께서 나의 의로운 행동을 좋게 봐주고 우리나라 이스라엘을 지켜줄 줄 알았지요. 하나님이 사람 마음을 왜 모르겠어요. 다 압니다. 그러한 비장하고 거룩해 보이는 마음씨까지 다 네가 죽음에 넘기지 않고 그냥 살고 싶어 하는 짓이라는 걸 나를 살리고 자존심을 살리고 내 의를 지키려는 짓이라는 걸 다 알고 있어요.

물론 다윗도 마찬가지지만 다윗은 택했기 때문에 성신이 임해서 사울 왕을 죽일 수 있는 데도 안 죽이잖아요. 이것은 내 인생은 내 일이 아니고 하나님이 내 인생을 장악해야 되지 내가 내 인생에 관여하면 안 된다는 것을 다윗은 알았던 겁니다. 쫓겨 가면서 알았던 거예요.

그래서 여기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18절에, “네가 여호와의 목소리를 순종치 아니하고” 순종했는데 순종 안 했단 거예요. 순종에 뭐가 동원돼야 하느냐 하면 진노, 그의 진노를 아말렉에게 쏟지 아니하였다. 그러니까 이스라엘의 적들에게 하나님의 진노와 동일한 감정으로 그들에게 진노를 퍼붓지 않고 여기서 그들의 왕과 좋은 것들을 인도주의적 입장에서 살려준 거예요.

그러니까 사울 왕이 자기가 이미 정복했잖아요. 싸우는 게 아니고 이미 항복했잖아요. 항복한 자에게 동정과 배려와 인심을 베푸는 이것이 인간적으로 봐서 너무나도 이것은 인도주의적 누가 봐도 하나님에 합당한 착한 심정이라고 자부했을 겁니다. 그런데 사무엘이 와서 거기에 대해서 그 행위의 절차에 대해서 분노하고 있는 거예요. 살아 있을 때 분노했고요 죽은 사무엘을 끄집어내니까 죽은 귀신이 똑같은 차원에서 또 꾸짖고 있습니다.

“죽어야 될 놈이 꾸중 들으려고 또 나를 불러냈나. 죽어, 인간아.” 이로써 사울을 죽기 전에 이미 죽었습니다. 이게 오늘날 이 세상 사람들은 인생을 몰라요. 불탈 수밖에 없는 이 지구상에 그게 전부인 줄 알고 살아가는 그 모습이 꼭 사울같이 초월도 아닌데 하나님도 아닌데 하나님인 양 무당 같은 그런 가짜 초월, 지상에서 인간들의 아이디어로 만들어낸 신성함이 신성함인 줄 알고 하는 그들에게 평생 매여서 그냥 자기 안 죽으려고만 바들바들 떠는 이 불안감과 공포 이 자체가 이미 살아도 그거는 산 것이 아닙니다.


10분 쉽시다.

'대전강의' 카테고리의 다른 글

생명의 기계  (0) 2022.03.02
예배속의 모순(십자가4강)  (0) 2021.12.29
실체 없는 믿음(십자가3강)  (0) 2021.12.01
안전성  (0) 2021.12.01
살아있는 십자가-십자가를 아십니까2강  (0) 2021.10.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