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십자가를 아십니까(3강) 로마서10장13절(실체 없는 믿음)20211129b
(강의:이근호 목사)
몇 페이지냐 하면 13페이지 위에서 첫 번째 보면 [하나님 나라로서의 교회]라 있고 그 밑에, 밑에 보면 ‘인간은 종교적 동물’이라고 나오지요. 종교란 말이 나와요. 종교를 가진 사람들 불교나 기독교나 마찬가지고요. 종교를 가진 사람들이 자꾸 위험한 요소를 빼먹고 안전 빵으로 그러니까 안정적으로 믿을만한 내용을 추려서 믿고자하는 경향들이 있어요. 위험한 요소를 의도적으로 빼버린 거예요.
그러나 아무리 빼도 원래 뺀 게 되돌아오게 돼있어요. 인간은. 아까도 말했지만 인간은 안정성을 위해서 내가 믿을만한 안정성을 도모하는데 보탬이 되는 것만 골라서 내가 믿고 싶지만 그동안 너는 들어오지 마, 라고 빼돌린 것들이 정서적으로 침입을 하게 돼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바로 믿음에 있어서 실체 문제입니다. 그러니까 믿는데 실체가 없잖아요. 이건 뭐 복음 오십 년 듣고 육십 년 듣고 소용없어요. 그때그때마다 계속 내부에서 올라오는 거예요. “내가 미쳤지. 실체가 없는 데 내가 왜 믿어.” 실체가 없는데요.
그래서 교회에서는 교인들이 이러한 딜레마에 빠질 걸 염려해서 실체를 보여줍니다. 그 실체가 뭐냐 하면 교회에요. 교회조직이고 거기에 대한 예배당이고. 봐 실체 있잖아요. 그래서 이 실체를 하나님이 인정한 실체라고 간주해버립니다. 하나님이 뜻이 있어서 세워진 교회입니다. 따라서 여러분들의 교회 예배당 보이고 목사, 장로 보이지요. 믿으시면 천당 갑니다, 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없는 실체를 만들어주는 거예요. 만들어서 거기다가 성스런 의미를 다 갖다 붙여요. 특히 그거는 교회도 잘하지만 역사적으로 성당들이 이게 아주 전문가 수준이에요. 하나하나에다가 다 예수님의 살이고 떡이고 뭐 향 뿌리는 것, 옷 복장부터해서 앞에 명동성당의 위치 조직, 제단부터 해서 전부 다 거기다가 옛날엔 그림까지 삼단 제단화해서 유화 같은 르네상스 시대 그림 있잖아요. 성자들의 해골까지 지하에 해서 이걸 실체로 만든 거예요.
실체 있지요. 그러니까 여러분 안심 놓으셔도 되는 겁니다. 실체 없는 것 믿는다고 그렇게 불안, 불안 떨지 마세요. 우리가 이렇게 친절하게 만들어줬습니다, 하고 한다면 혹시 교인 중에서, “당신들 뭐야. 신부들 당신이 뭔데 우리에게 실체를 만들어줘. 당신이 하나님이야?” 이렇게 나오면 그들이 뭐라고 하느냐?
우리에게는 역사가 있습니다. 어떤 역사? 베드로부터 시작된 전통적인 교황의 줄기, 베드로가 첫째 교황이고 줄기가 있습니다. 성경에 마태복음 16장에 보면 네 위에 반석을 세우리라, 교회를 세우리라 했으니까 베드로부터 시작, 릴레이 하듯이 바턴을 이어서 오늘날 지금 교황까지 이어졌습니다. 그러니까 실체 있지, 역사적 실체 있고 진짜 눈에 보이는 성당과 모든 조직적 실체, 전통과 역사의 실체가 있으니 당신은 안심 푹 놓고 눈 감으셔도 됩니다.
우리의 기도도 역시 하나님이 인정한 기도 맞습니다. 그러니 눈 푹 감으시고 혹시 당신이 살면서 죄 지은 것이라든지 여러분 식구 가운데 믿지 않고 돌아가신 분이 지금쯤 구천을 떠돌고 있는 그런 것은 우리 성자들의 기도발이 실체니까 한 이백만 원 내시면, 미사 여는데 최소한 이백만 원 정도 되지요. 신부들, 수녀들 용돈 주려하면. 그렇게 하시면 돈 힘이 작동하니까 연옥 가서 빠른 속도로 연옥에서 빼내서 본격적으로 천국생활 해드리겠습니다.
돈까지 썼는데 연옥 가서 안 되면 어떡합니까? 연옥 가도 기어이 성질 더러운 인간 빼놓고는 그냥 다 통과합니다. 혹시 댁의 남편이 더러운 품성은 아니지요? 더러움까지는 안 돼. 그러면 돈 좀 더 쓰셔야 돼요. 한 삼백 쓰시고 정기적으로 미사 오시고 하시면 당신 덕분에 우리 수녀와 주임신부와 밥 먹고 살고 당신도 걱정했던 당신의 예수 안 믿고 돌아가신 선조부터해서 당신의 자녀까지 또 하나의 기회가 있으니까 패자부활전이 있으니까 공덕을 많이 세우시기 바랍니다.
불교나 천주교나 똑같이 공덕 문제에요. 교회도 거의 비슷하게 돌아가고 있는 중에 있어요. 벽돌 하나 이름 써서 내라하는 것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절에서 기왓장에 이름 쓰는 거나 예배당 벽돌 이름 쓰는 거나 마찬가지거든요. 이 성전, 만날 성전이래. 이건 왜냐하면 실체 제공입니다.
그런데 뭘 빼놨습니까? 사람들이 종교라는 걸 받아들이며 뭘 빼놓습니까? 이걸 빼놔요. 하나님이 나를 구원한다고 해놓고 예수 피 믿으면 구원한다고 해놓고 주님께서 나를 배신한다면? 이 배신을 빼놓는 거예요. 하아. 여러분 아킬레스건을 건드린 거예요. 방금. 우리들 신앙의 아킬레스건을.
예수 믿으면 구원받는다고 했잖아요. 그래서 약속대로 믿었어요. 믿었는데 이게 부도가 나버렸네. 나중에 와보니까 지옥. 게임 끝났어요. 더 이상 기회가 없으니까. 영원히 지옥 불에서 못 나와요. 내 인생 돌려줘. 끝났어요. 못 돌려줘요. 그런 경우를 여러분 고려해봤습니까? 그것 고려 안하고 믿어버리면 여러분 임의로 편집한 거예요. 복음을.
오늘 이 시간 그것까지 집어넣습니다. 아까 쉬는 시간에 웃고 즐길 때 좋았지요. 왜냐하면 실체가 없으니까 없는 실체를 내 쪽에서 강제로 만든 거예요. 나 유리하도록 조작해서 만든 거예요. 주님 저 믿습니다. 십자가 믿고요 다 복음 믿습니다. 됐지요, 이 정도면. 그건 지가 지 스스로 다짐에 자기 보고 다짐을 하는 거예요. 실제로 하늘나라 행정기획실엔 아무 영향도 없는데 천사는 시키는 대로 할 뿐인데 땅에선 혼자 바빠. 혹시 서류 미진한 게 있을까 싶어서. 나중에 썼는데 주민등록번호 안 적었어. 그것까지 다해서 한다고요.
제가 대중가요를 자꾸 설교시간에 집어넣는 이유가 대중가요가 일반인들이 모든 인간들이 실체를 믿고 살아가는 모습을 그대로 다 보여주기 때문에 그래요. 인간들이 실체를 어디서 어떻게 끌어 모으는가를 대중가요에 다 들어있어요. 인간은 실체 없으면 아무것도 믿질 않습니다. 행동에 나서지도 않아요. 희망도 실체가 있어야 실체가 커지기를 원해서 희망하지 실체 없는 희망은 하질 않습니다.
그래서 실체 없는 복음에 대해서 믿는다는 것은 거짓말쟁이에요. 그럼 그걸 끄집어내기 위해선 대중가요를 다 끄집어내야 돼요. 왜? 대중가요가 인간들의 보편성을 대변해주기 때문에. 그들은 믿질 않아요. 뭔가 믿을만해야 믿어요. 그 내용이 대중가요에 보면 숨길 수 없이 다 있어요. 왜 클래식을 해선 안 되나? 클래식은 가사가 없어요. 가락만 있지 가사가 별로 없기 때문에. 대중가요는 가사가 붙잖아요.
대중가요는 그들의 종교입니다. 그리고 이게 흔히 말하는 복음 믿는 인간들의 종교와 똑같아요. 실체가 있기에 그리고 뭔가 좋은 결과가 있다는 그걸 내다보면서 나한테 이익이 된다는 조건 하에 나는 그걸 믿기로 했다. 그게 인간이 할 수 있는 전부입니다. 인간은 그 외에는 못해요.
그러면 그 대중가요 중에서 인간이 얼마나 실체적인 것을 제가 어떤 노래 가사를 하겠어요. 제목은 여러분이 맞춰보세요. “마지막 한마디 그 말은 나를 사랑한다고 돌아올 당신은 아니지만 진실을 말해줘요 떠날 땐 말없이 떠나가세요 날 울리지 말아요 너무합니다 너무합니다 당신은 너무합니다” 김수희의 <너무합니다> 이건 다 아는 거고.
떠날 그냥 가면 되는데 뭐라고 했냐 하면 날 사랑한다고 마지막 한마디 하고 떠났어요. 그러니까 헤어진 마당에 이 여자가 너무 화가 더 나는 거예요. 그런다고 당신이 돌아올 사람 아니잖아. 진실을 말해줘요. 그런데 이 여자도 문제에요. 진실은요 인간은 그때그때마다 조작해내는 게 진실이지 본인도 진실이 없어요. 없으니까 조작해내는 거예요.
복음이 뭡니까? 몰라요. 그때그때 지는 신앙인 걸 티낸다고 복음이란 십자가, 지가 지어내요. 믿지도 않아요. 지는 실체 없는 건 믿지도 않으면서 주여 이 정도까지 하는데 설마 배신하리오. 이게 지가 생각한 만들어낸 실체에요.
그래서 가사에 여자가 말합니다. 떠날 때는 좀 말없이 떠나주세요. 군말하지 말고 떠나주세요. 괜히 말해서 날 울렸잖아요. 날 울리지 말아요. 그 다음에 화가 나지요. 농락당했으니까 너무합니다, 너무합니다. 당신은 너무합니다. 김수희의 <너무합니다> 노래 있잖아요. 세상에 실체 있는 인간들의 속내를 그냥 그대로 다 보여주지 않습니까.
요걸 주님에다 그대로 적용해보세요. 나중에 주님 지옥 가서 너무합니다, 내가 성경에 하라는 것 다 했는데 성령까지 믿었어요, 주여. 그런데 지금 이 꼴이 무슨 꼴입니까? 차라리 날 믿으라는 그 마지막 말을 하지를 말아야지 괜히 해서 혹 했잖아. 나는 거기에 농락당해서 이게 무슨 꼴이고. 예수 다 믿고 지옥 오고 무슨 꼴이냔 말이죠. 이런 생각 안 해봤지요. 너무 참담해서 차마 못……, 내가 생각한 실체다, 이건 빼고 한 거예요. 설마 아아 생각하지 말아야 돼. 이건 너무 심한 거야. 내가 빼버렸어요. 스스로 자기를 위로한답시고.
그런데 대중가요에 보면 기적적인데 혹 가다가 복음적인 내용이 가사가 나와요. 가사를 한 구절 할 테니까 어느 노래인지 알아보세요. 아깐 너무 쉬운 문제 냈어요. 너무합니다, 가사에 다 나와서. 이거는 로마서 10장 13절에 나오는 내용이 대중가요에 나옵니다. 로마서 10장 13절 내용인데 가사를 쓰겠어요.
“이름을 불러주세요 나 거기 서 있을게요” <당신은 모르실거야> 이렇게 나와야 된다고. 얼마나 평소에 공부를 많이 했어요. 혜은이가 불렀던 <당신은 모르실거야> 길옥윤 작사인데 이름을 불러~ 노래교실이 돼버렸다, 갑자기. 이름을 불러주세요 나 거기, 그 다음에 중요한 거예요. 정지상태가 돼요.
정지상태가 되면 저쪽에서 외부성이죠. 외부성에서 이름을 불러주게 되면 나는 더 이상 하나의 기계가 돼버려요. 나가 없는 거예요. 그걸 먹먹한 상태에요. 기차가 순식간에 터널에 들어갔을 때 공기압력에 의해서 귀가 달팽이관 이쪽에 문제가 있어서 먹먹해진다고요. 내 자의식이 내가 키가, 식사를 몇 시에 하고 누굴 만나고 다 날아가 버렸어요. 지금 내가 남잔지 여잔지 그딴 것도 생각할 필요 없어요. 내가 천당 갈지 지옥 갈지 그딴 것도 생각하지 마세요. 내가 천국 갈까 지옥 갈까 생각하면 실체를 조작해내는 거예요.
그냥 정지된 상태에요. 나이가 몇 살인지 내년에 또 키가 크든지 뭘 하든지 간에 그냥 먹먹한 상태에요. 그냥 서 있는 거예요. 분명히 움직이는 하나하나가 이름에 의해서 서 있는 상태에요. 이름이 생산된 새로운 피조물, 창조물이에요. 이름을 불러주세요. 나 거기 서 있을게요. 혜은이가 작곡가 길옥윤이 그걸 알았단 말이 아니고 이런 가사가 있다 이 말입니다.
그럼 로마서 10장 13절 그 대목이 어떤 대목인지 혹시 들어봤는지 해보면 알아요. 누가 이야기해보세요.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이게 내가 구원받는다는 뜻이 아니고요 구원이 나를 재료로 해서 로마서 10장 13절 말씀이 구원이 만들어지는 거예요. 구원이 만들어지는 현장에 나는 재료로 들어갔을 뿐이에요. 주의 이름이 있다는 말은 내 이름은 거기서 삭제당하면서, 내 이름이 삭제 안 당하면 또 조작해요, 실체를.
그런데 외부성, 내 이름이 아니고 외부적인 이름이, 주의 이름은 내 이름 아니잖아요. 주의 이름은 나의 외인, 나의 타인이라니까. 타인이 내 이름이 있는 그 장소에 와버리면 내가 어떻게 살고 어떻게 바쁘게 장사한다고 돌아다녀도 나는 주의 이름의 권력 안에 그 영향력 안에 그 영역 안에 나는 굳어져 버리는 서 있는 겁니다.
그 이름 나한테 도달되게 하옵소서. 그 이름을 불러주세요. 나 거기 서 있을게요. 물론 이름이 자기 이름이지만 주의 이름이 스스로 주의 이름의 창조성을 발휘한 실적을 이렇게 드러내는 현장이 생긴다는 겁니다. 어떤 외부성이. 왜 생기느냐 하면 주님이 안 죽었고 살아 계시기 때문에 그래요. 살아 계시면 일을 하게 돼있고 그 일의 흔적이 있기 마련이에요. 바람이 있다는 것은 공기가 움직이는 흔적이거든요.
성도가 생긴다는 것은 주님께서 성도 되게 하는 주님의 선택이 계속 작용하고 있다는 겁니다. 어떻게 작용하는가? 약속대로 작용을 해요. 약속의 내용을 인간이 부정할 이유는 전혀 없습니다. 약속의 내용을 본인이 더는 구성할 필요가 없음을 알고 감사하게 되죠. 구원에 대해서 내가 손댈 수 없다는 것을 감사하게 되죠. 내가 믿을 게 없다는 것을 감사하지요. 왜?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니까, 행함이 아니고 선물이니까. 선물 받은 것을 내가 손대면 안 되잖아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조치한 우리는, 내가 생각할 때 내 이름이 있다는 것은 내가 여기 있고 우리는 구원, 천국, 하나님 나라 실체가 없으니까 실체를 채우기 위해서 내 쪽에서 내가 믿을만한 구석들을 여기다 내가 채우자는 거죠. 그런데 주의 이름이 나의 조작에 밀리지 않고 이기십니다. 나한테 늘 승리해요. 주님이 만든 실체가 나의 실체가 허망하다는 사실을 늘 이렇게 뭉개버리죠. 뭉개버리면 이 자리가 나의 자리가 아니고 누구의 자리냐 하면 주의 자리로 정지돼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다시 육신이 있으니까 육신적인 모습이 있으니까 내가 뭘 할까하는 그 순간 또 다시 우리는 나의 이익이 되고 나의 구원이 되는 쪽으로 성경으로 실제 조립에 또 나서는 거예요. 그게 늘 반복되는 거예요. 왜 한 번에 딱 끝내지 않고 반복시키는가? 반복시키는 그것이 한 번에 끝냈음을 알리는 유일한 방식이기 때문에 그래요. 이미 한 번에 끝났음을 알리는 방식이 우리로 하여금 되풀이해서 그 한 번에 접착돼있음을 확인시켜주는 일을 해요.
그 이유가 뭐냐 하면 인간이 자기한테 관심 둬버리면 여기서 무엇이 발생되느냐 하면, 이게 설명이 좀 필요한데요. 인간이란 말 했지만 이걸 그냥 자아라 봅시다. 자아란 뭐냐 하면 나의 소유성의 집결체에요. 내가 끌어 모았고 내 것이라고 여겼던 것이 바로 나가 되는 겁니다. 만약에 내 소유성이 하나둘 빠져나가면 나는 자살하고 싶지요. 내가 죽기 전에 내 자식이 먼저 죽는다든지 갑자기 모아놓은 재산이 다 날아간다든지.
그것보다 더 힘든 것은 뭐냐 하면 비축된 나의 의가 날아가게 되면 인간은 여기서 분노합니다. 인간이 분노할 때는 나의 의에요. 어느 사람이 내 애를 건드릴 때 분노하는 이유는 내 애가 나의 소유고 내 애를 건드린 것은 그 애를 얼마나 잘 나게 키웠다는 나의 자부심을 건드린 게 돼요.
그래서 대중가요나 세상에 있는 것을 우리가 관심 두고 볼 필요가 있는 것은 인간이 어떻게 자기 자신을 이상적으로 조작해내는가 그 방식을 세상은 감추지 않고 다 문학이란 이름으로, 철학이란 이름으로, 과학이란 이름으로, 예술이란 이름으로, 노래란 음악이란 이름으로, 미술이란 이름으로 다 표현했어요. 자기가 그동안 내가 얼마나 잘 났고 나한테는 내가 너무나 아까운 존재라는 것을 과시하는 쪽으로 펼쳐냈다고요. 그 펼쳐낸 그 중에 하나를 제가 예를 들겠습니다.
이번에는 대중가요가 아닙니다. 대중가요보다 줌 격이 높은 거예요. 카프카의 단편소설 <선고>란 소설입니다. 카프카란 이십 세기 초반에 소설가인데 일찍 죽었어요. 몸이 아파서 일찍 죽은 사람인데 카프카의 단편이 참 많이 있어요. <선고>란 이름의 내용이 이것을 쓸 때에 1912년 9월 23일 밤 10시에 이걸 써서 1912년 9월 24일 아침 6시에 완성한 단편소설이에요. 여덟 시간, 우리 잘 때 다 썼어요. 첫 구절이 뭐냐 하면 이렇게 돼있어요. “제일 좋은 소식은 마지막까지 남겨두었네. 친구야.” 이것부터 이야기가 시작되는 겁니다.
이게 무슨 내용이냐 하면 아버지와 아들이 있는데, 지금 제가 이야기하는 것은 그냥 교양이 아니고요 인간이 자기 자아로부터 어떻게 탈출이 가능한가를 카프카라는 작가는 계속 실험하는 방식을 작품을 통해서 나타냈다 이 말이에요. 자기가 아버지 곁을 떠나려고 해요. 아버지는 아버지 값을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아버지 앞에서 아들이 아무리 사업적으로 성공을 해도 아버지는 자기 아들을 하자로 여기는 거예요.
이 말은 아들 속에선 뭐냐 하면 늘 누구한테 감시받고 있는 느낌을 주느냐 하면 아버지의 눈치를 보는 느낌이 있는 겁니다. 자기는 사업적 공을 했어요. 사업적 성공했지만 아버지한테 기에 눌려있습니다. 그런데 친구는 뭐냐 하면 아버지한테 벗어났어요. 예술가에요. 그림을 그리는. 자기 친구가 부러운 거예요.
게오르크라는 주인공이 자아가 둘로 분열되었어요. 뭐냐 하면 현재는 아버지의 기에 눌린 나, 그리고 내 친구는 자유를 찾아 마음껏 자기의 예술적인 취미활동을 예술 활동을 원 없이 마음껏 발휘하는 나, 그 사이에 자기가 딜레마에 빠져있는 거예요. 그래서 편지를 왜 보내느냐 하면 친구가, “너만 자유 있나 나도 이제 자유 있어. 나는 약혼자와 결혼하게 돼있어. 너는 결혼도 못했지 난 곧 결혼할 거야.” 자랑질 하는 거예요. 질투심에.
네 자유가 부럽다는 소릴 못하고 그 대신, “너 좋은 여자 없지 나는 좋은 여자와 결혼해서 가정을 꾸밀 거야. 어때. 부럽지, 부럽지.” 이러고 있단 말이죠. 그 편지를 쓰는 장면이 첫 번째 나오는 장면이에요. 그런데 결혼하고 난 뒤에 아버지 품을 떠나려고 하는데 그 아버지가 그렇게 기는 센데 몸이 유약해요. 허약해서 지금 누워있어요.
그래서 아버지 방에 들어가서 연약한 아버지를 눕힐 때, 아버지 이불 덮으세요, 하니까 아버지 하는 말이, “이불이 제대로 안 덮인 것 같은데.” “아버지 이불 제대로 덮었습니다.” “아니야. 이불 제대로 덮이지 않았어.” 아들은 아버지에게 온갖 지극정성을 다해요. 효자 노릇을 다하는 거예요. 효자 노릇을 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아버지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에 효자 노릇하는 거예요.
효자 노릇하면서 아버지에서 벗어날 궁리만 생각하고 또 뭐냐 하면 그 친구처럼 자유로운 영혼이 되어서 하고 싶은 것 다하지 못해서 또 시기 질투 나는 그 나, 양쪽으로 지금 이 사람은 거기에 눌려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화를 내면서, “네가 이불을 제대로 못 덮었잖아.” 계속 병약한 아버지를 돌보고 있으면서도 아버지는 조금도 기가 죽지 않았어요. 멀쩡해요. 아프면서도 기 다 살았어요.
그러니까 명령을 해요. 마치 너는 나한테 명령받을 자고 나는 명령내릴 자라는 죽을 때까지 아파 쇠약한 노인네가 되도 절대로 그걸 감수하지 않았어요. “이불도 제대로 못 덮는 너는 아마 물에 빠져 죽을 거야.” 그 소릴 듣고 마지막 장면에 뭐냐? 아들은 아버지의 예언을 소원을 들어줘요. 물에 빠져 죽는 게 마지막 장면입니다. 이게 무슨 자존심이 이런 자존심이 있어요.
아버지 예언이 터무니없다는 걸 알고 아버지가 반드시 물에 빠져 죽는다고 했으면 내가 안 들어줘야 아버지 품에서 아버지의 그늘에서 벗어날 수 있는데 아버지의 그늘에서 못 벗어나서 터무니없는 예언이지만 끝까지 아버지의 예언을 들어줘서 아버지의 기를 살리기 위해서 지가 안 져도 되는 짓을 물에 빠져 자살합니다. 그게 마지막 장면이에요. 이게 실체 없는 인간이 실체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얼마나 몸부림치는가를 아시겠지요.
이걸 오늘날 하나님에 적용시켜봅시다. 평소에 하나님을 병약한 하나님을 이젠 남들이 믿지도 않는 하나님을 모시려고 얼마나 노력했습니까. 하나님의 약속은 맞다. 그래 예수 믿는 자는 구원을 얻는다. 나 다른 사람은 안 믿어도 아버지여 저는 그 말씀 믿어줍니다. 아버지 앞에 효를 다하는 거예요. 가족이 네가 광신도다, 네가 복음에 미쳤구나. 그 소릴 들으면 들을수록 아버지 신이라는 그 기에 눌려서 오히려 그걸 고난 받는 영광으로 자부심 얻는 거예요.
그게 뭐냐? 내가 신앙인 맞는다는 실체 재료가 되는 거예요. 땅이잖아요. 온갖 것 친구 다 떠나고 가족도 네가 미쳤구나, 이렇게 하든 말든 오히려 그러면 그럴수록 고난으로 찾아오는구나, 라고 실체를 지가 조작해내는 거예요. 조성해나가는 겁니다. 그러면서도 아버지에게 효를 다하는 것은 나중에 설사 신이 나를 배신한다 할지라도 나는 신 앞에서 할 도리는 다했다는 나의 의로움은 남잖아요. 그걸 계산한 거예요. 지옥 가도 큰소리칠 수 있는 인간, 얍삽하지요. 간교하지요. 마귀가 인간의 구원론 가지고 장난치는 이유를 아시겠지요.
이미 아담의 조상 자체가 밥입니다. 악마의 밥이라서 실체 없이는 인간은 아무것도 안 믿어요. 다시 말해서 나를 신격화, 나는 끝까지 의롭고 정당하다는 나의 전지전능한 실체만 끌어 모아서 믿고 싶은 거예요. 예수님께서 자기 목숨을 아끼지 않고 죽었다 할 때 세상에 저렇게 귀한 사랑, 내가 안 믿으면 누가 믿어줘. 나라도 믿어줘야지. 효도한답시고 복음 믿어주는 거예요. 내 효도.
그러니까 복음이 귀한 것이 아니고 그걸 믿어주는 내가 귀한 거예요. 여기서 벗어날 수 있는 기존 교회 교인들 있으면 나와 보라 그래요. 못 나와요. 나올 수가 없어요. 탈출 안 됩니다. 결국 이 주인공 탈출 못하잖아요. 벌써 너는 나를 믿고 십자가에 죽을 것이라고 하면 그 말씀대로 우리는 실행에 옮길 거예요. 아프가니스탄에 들어가서 탈레반한테 가서 죽으려고 할 거예요.
이 말은 도대체 인간은 내 마음대로 대상이 아니라는 거예요. 나란 인간이. 왜? 좋은 것만 기억하기 때문에 내가 싫은 것, 나한테 손해되는 것, 나를 파멸시키는 것은 내가 의도적으로 다 빼돌렸어요. 애써 안 보려고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재혼해서 남의 집 애 키울 때 가족사진에 그 애를 일부러 빼는 그런 재혼한 어머니의 심정을 이해해야 돼요. 아무리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더욱 더 미워지는 거예요.
이 말은 오후설교도 그런 이야기했지만 내가 상대방이 밉다는 것은 곧 내가 밉다는 거예요. 내가 이럴 줄 모르고 나는 선택했다는 겁니다. 인간은 모든 선택의 연속이거든요. 태어날 때는 선택을 안 했지만 태어나고 난 뒤엔 모든 게 선택이에요. 네 살 때 먹은 선택, 짬뽕 먹을래, 짜장면 먹을래? 분명히 아빠가 선택하라 할 때 그때 짜장면을 선택하면 될 걸 짬뽕 선택해서 오징어에 체해서 그때부터 나이 육십까지 오징어 못 먹는 이런 것.
오징어에 대해서 트라우마 있어서 나중에 <오징어 게임>도 트라우마 됐어. 오징어가 너무 미워서. 우리 형은 잡채 잘못 먹어서 오늘까지 채 안 먹는다니까요. 그 맛있는 잡채를 안 먹어요. 왜? 잡채 먹고 체한 적 있어서. 자기가 안 먹잖아요. 먹는 사람보고 얼마나 미워할까. 죽이고 싶을 거예요. 내가 안 먹는 걸 네가 왜 건방지게 먹어.
왜 세상은 내가 모아놓은 실체 덩어리에 부합되지 않는가? 그래서 세상을 향하여 인간은 분노하는 겁니다. 그 분노하는데 분노가 어디까지 미치느냐 하면 악마가 뒤에서 조종을 하니까 그 분노가 결국은 십자가까지 사건이 터져버린 거예요. 뭐야 너? 나보고 어쩌라고, 하고 죽여 버린 거예요.
그래서 제가 주일 설교할 때 했잖아요. 십자가에 예수님이 죽어 버렸는데 제작자가 죽었는데 제작물들은 왜 멀쩡하게 있어요, 그래. 어쩔 수 없이 크레용팝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었어요. 오토바이 모자 쓰고 춤추는 애들 이야기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모든 인간은 멀쩡해요, 전부 다. 나만 있으면 돼. 예수가 왜 필요해요, 하나님이 왜 필요해요. 이 땅에 나만 근사하면 그만이에요, 인간은. 우리가 우리의 본성과 속성과 우리의 욕망이 바로 그건 거예요. 너만 영원하면 되는 거야. 네가 부처야, 네가 신이고. 그런 인간이 어떻게 복음을 믿습니까?
제가 <십자가를 아십니까> 13페이지 들어가는 것은 지금 인간들의 전부 다 구라를 떨고 있는 거예요. 교회에서. 안 믿으니까 억지로 믿는 티를 내는 거예요. 성령 받은 사람은 이게 눈치 채요. 안 받은 사람은 눈치 못 챕니다. 성령 받은 사람은 눈치 채요. 왜? 내가 너니까. 내가 하는 행세를 내가 너무 잘 아니까. 어떻게 나를 신앙인 만들기 위해서 매일같이 조작하고 있다는 것을 내가 아니까요. 너도 나 같이 똑같이 하고 있으니까 같은 아담의 족속이잖아요. 아담으로 물려받은 게 똑같잖아요. DNA가 동일한 DNA란 말이죠. 그러면 너한테 일어난 일을 지금 내가 벌이고 있는 겁니다. 믿습니다하는 자체가 나는 믿을 것만 믿는다는 뜻이에요.
실체 이야기를 보기 위해서 로마서 10장 앞에 부분 봅시다. 10장 6절에 보게 되면,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이같이 말하되 네 마음에(우리들 마음이에요. 우리들 마음의 실체를 찾는 거예요) 누가 하늘에 올라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올라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모셔 내리려는 것이요 혹 누가 음부에 내려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내려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모셔 올리려는 것이라“
무슨 말이냐 하면 사람들은 보지 않고서는 안 믿거든요. 그래서 천국이 있느냐 없느냐를 강요하지 말고 내가 신이 있다면 하나님 있다면 나한테 천국 보여줘. 내가 안 믿어도 그땐 믿어줄게, 이렇게 되는 거예요. 인간이. 지옥? 지옥 내가 믿고 싶지만 나는 지옥 확인해본 적 없다. 그러니까 나한테 지옥 보여주면 가라 해도 안 갈게, 이런 뜻이에요.
다시 한 번 찾아봅시다. 누가복음 16장 찾아봅시다. 결국 성경 전체 싸움이 이 싸움이에요. 내가 믿을 수 있느냐, 아니면 못 믿는 사람이냐? 그 싸움이에요. 누가복음 16장 28절부터 31절까지, “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저희에게 증거하게 하여 저희로 이 고통 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 지옥에 이미 도착한 나사로 앞집에 사는 부자는 빼도 박도 못합니다.
빼도 박도 못하는데 자기 자아성은 있어요. 누가 내 형제냐는 그 정도는 아직까지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모든 기억은 자기 소유성과 관련돼있는데 그게 자아라 했지요. 먹먹해서 없으면 다행인데 지옥 가도 자아성이 남아 있으니까 지옥이 지옥다운 거예요. 고통스러운 거예요. 나의 기억이 계속 살아 있으니까 고통스러운 거예요.
그래서 천국 간 아브라함 품에 있는 나사로 보고 불러다가 지옥에는 못 온다 하니까 세상에 다시 들어가서 아직까지 지옥에 안 온 형제 다섯 명이 있는데 천국도 있고 지옥이 있다는 걸 좀 알려주세요, 라고 아브라함에게 부탁을 하는 거예요. 부탁을 왜 합니까? 그래서 동생이 지옥에 안 오고 천국 가면 누가 좋다는 말이에요? 지옥 온 내가 약간은 위로가 되겠다는 거예요.
지옥은 위로받으면 안 돼요. 왜냐하면 나는 내가 구성해놓은 창조물이기 때문에 내가 위로받을 일이 생기면 안 된다니까요. 창조주도 아닌 게 내 마음을 내가 창조했기 때문에 이건 반칙이거든요. 내가 위로받는 일이 생기면 안 돼요. 내가 없어져야 되지 내가 위로받은 일이 생기면 안 돼요. 나는 있고 위로받고 이러면 안 된다 말이죠.
주님께서 이 이야기를 하시는 이유가 인간들이 이런 식이란 거예요. 실체가 내 자아가 있고, 어려운 것 아니에요. 자아가 있으면 반드시 뭘 만들어낸다? 실체를 만들어내고 실체를 만들어서 그걸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다음에 결국 뭡니까? 역시 나는 잘났다, 이 자아는 잘났다. 지금 이게 순환되고 있어요. 서클이 계속 뱅뱅 돌고 있는 거예요.
내가 왜 신이냐? 역시 나는 내 자신을 믿을만하네. 그것 자기증명이에요. 내 잘남의 증명이에요. 나 증명. 주님은 내가 가짜인 걸 증명, 나는 내가 가짜가 아님을 증명. 이 싸움이 성경 누가복음뿐만 아니고 모든 싸움이에요. 그럴 때 아브라함이 제시한 말씀은 뭡니까? 나사로 죽었다 깨나서 그들에게 간다 할지라도 그들은 믿을 것만 골라서 믿는다는 뜻이에요. 다시 말해서 지옥에 간 특징은 자아 밖으로 나온 적이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대선 나오고 재벌 나오고 무슨 화천대유 해서 50억 받고 그것 하나도 부러워하지 마세요. 집사님, 안 부럽지요? 왜냐하면 지 밖으로 지가 못 나오니까. 자기의 판타지 속에 자기가 못 나와요. 김정은이도 그렇게 자기 밖으로 자기가 나오질 못해. 죽어야 나와요. 죽으면 내가 지옥 온 게 아니고 지옥 되기 위해서 나를 여기다 집어넣었군. 나 같은 인간이 모아져야 지옥이 되니까. 하나님께서 언약대로 철저하게 지옥을 만드는데 나는 하나의 재료였구나.
부자는 죽어서 지옥이 아니고 살아 있을 때부터 지옥의 일원이었어요. 그걸 우리가 세상에서 지옥 갈 일원들을 주위에 매일 만나지요. 심지어 가족끼리도 만나지요. 개 팔자가 좋은 이유는 그게 좋지요. 개를 위해서 십자가 피 흘리진 않았습니다만. 아무것도 모르니까 개는 멍멍하니까 파충류의 뇌를 갖고 있으니 아무것도 몰라요. 개나 인간이나 자기 밖으로 못 나오면 이게 딱딱해져요. 당구공처럼 딱딱해져서 처음에는 나는 부드러운 남자라 하지만 들어가 보세요. 딱딱한 남자지요.
제가 주일학교 설교에서 그런 이야기했습니다. 딸이 성급하게 선택해서 나중에 대판 싸워서 친정 오니까 친정엄마가, “네가 왜 그 남자를 좋아하느냐?” 내가 사귀는 남자친구가 담배 피우고 술 먹고 마초 같은 기질이 그게 매력적이었다는. 그래서 그랬어요. 술 먹으면 그게 인간이야, 개지. 그걸 설교시간에 하기 뭐했어요. 술 먹는 사람이 있어서 좀 주의해야 되는데.
그게 개지 인간이란 말인가. 그게 무슨 매력이냐. “사회성 있어 보여서.” 그것 좋다고 해놓고 이제 와서 술 하면 뭐합니까? 술주정하기 마련이죠. 때려놓고 미안하다고 백화점 가서 뭐 하나 사주고 지나면 또 패고 자식 패고. 왜 팹니까? 지 선택에 지가 만족을 못하니까 남 탓으로 돌리는 거예요. 평소에 술, 담배 할 때 알아봐야지, 뭐. 왜 해로운 걸 왜 피워요.
담배 보세요. 얼마나 모순입니까? 담배 피우는 사람은 이렇게 목이 상하고 암 걸리고 폐암 걸립니다, 하면서 예쁜 담뱃갑에 스무 개의 담배를 넣어주잖아요. 이게 무슨 짓이에요, 이게. 이것 피우시면 폐암 걸립니다, 하고 앞에는 시커먼 흉측한 사진을 올려놓고 포장도 예쁘장하게 해서 넣어준다고요.
국가가 모순되는 것 아니에요? 뭘 하나 빼야지. 다시 말해서 흉측한 폐암 걸린 사진을 했으면 폐암 걸린 마지막 신음소릴 집어넣어야 되는데 담배를 집어넣어요, 그래? 제 말이 무슨 뜻인지 아시겠습니까? 애야 독약 먹으면 안 돼, 하면서 독약을 집어넣어서 독약을 먹으면 안 되는 걸 네가 맛봐라. 그 짓을 왜 하느냐 말이죠. 다 대선 표 때문에 하는 거지.
술이 뭐해서 필름이 끊긴다고? 진짜 필름이 끊어지게 하려면 사형당하면 제일 좋네요. 좋지요, 뭐. 뭐하면 필름 끊어졌다고. 그럼 아예 죽여 버리지. 술 먹으면 사형시켜버리지. 필름 끊어지면 좋잖아요. 아무 기억나지 않으니까.
실체를 찾는 인간들이 하는 짓거리가 그냥 눈에 보이면 된다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주님은 부활하고 난 뒤에 안 나타났습니다. 나타나게 되면 뭐가 살아요? 인간의 자아를 위한 실체 만들기가 이게 유효한 걸로 살아나잖아요. 그게 정당한 걸로 살아나잖아요. 인간 속엔 일체 자기 의가 없어야 되거든요. 모든 것이 가짜고 엉터리이어야 되고 악마적이어야 돼요.
그런데 눈에 보여주고 믿어버리면 뭐가 돼버려요? 보고 있는 나는 그걸 보고 진짜 천국 가면 천국 가는 데도 이제는 나의 죄인 됨이 그 과정이 필요치 않다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지요. 내가 죄인으로서 갈 수 없음이 돼야 천국 감이 주님의 공로가 되는데 내가 실눈 뜨고 알아봤다, 이렇게 되면 실눈 뜬 만큼 자기 의가 되잖아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는 말은 뭔 뜻입니까? 천국 같은 소리는 인간에게는 해당사항이 없다는 것을 출발점으로 삼는다는 뜻이에요.
그렇다면 진짜 천국을 알고 천국 간 사람은 뭡니까? 만날 이 이야기하는 거예요. 나는 가짜라는 것, 나는 나를 만날 조작해서 그걸 신앙인 줄 착각했다는 그 이야기를 그때는 심각하게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어떻게 하느냐? 웃으면서 하는 거예요. 웃으면서. 다 지나간 이야기하듯이 옛날 그랬었어. 만날 지나간 이야기를 웃으면서 하는 거예요.
내 이야기가 내 이야기 아니고 어느 이름 모를 죄인 이야기라고 자기 이야기를 할 수 있어야 돼요. 내가 삼층천에 갔는데 사도 바울이 이야기 꺼내면서 내 이야기가 아니고 이름 모를 어떤 사람의 이야기다. 왜? 내 이름은 벌써 작살났으니까. 이름 모를 이야기에요. 내 이야기는 아니지요. 내 이야기 아니니까 내가 화를 낼 필요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내가 화를 낼 이유가 없지요.
그게 바로 뭐냐 하면 반복되는 십자가 사건은 매일같이 반복하는 거예요. 만약에 어제로써 구원이 종결되게 되면 아직도 어제까지 살면서 알았던 그 내용으로 오늘도 저장하게 됩니다. 그래서 어제의 내용이 신앙이 아님을 완전히 박살내기 위해서 십자가의 새로움을 새로운 기쁨과 안도감과 이게 다 과거지사입니다, 이렇게 할 수 있는.
오늘분의 새로운 여유분을 주기 위해서 오늘 새로운 상황을 보여줍니다. 그 부자 이야기가 곧 지금의 웃으면서 이야기하는 나 이야기였다는 것을. 그래서 나는 지옥 갈 나라는 사실을 매일 같이 동반해야 됩니다. 어차피 우주궤도에 인공위성 궤도에 올라갈 때까지는 마지막 남은 우주선은 타기 전까지는 계속 동반해줘야 돼요. 마지막 캡슐 부분과 성령 부분과 우리 부분과 떨어질 때까지는 버려야 될 것은 계속 있어줘야 왜 은혜가 은혜인지를 새롭게 깨닫는 겁니다.
참 문제는 이야기 들었잖아요. 이게 오늘도 두 시간 뒤에 지식이 된다니까요. 안 돼, 안 돼. 우리 힘으로 견지할 수가 유지할 수가 없지만 성경을 말씀을 보게 되면 이미 십자가에 죽을 때 내가 죽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죽었다는 걸 알기 위해서 지금 나로 하여금 또 살아나는 그러한 일이 반복되지요.
그래서 13페이지 중간에 보게 되면 이 땅에 썩은 나무를 심판하겠다. 또는 썩을 나무를 심판하겠다. 이게 마태복음 3장에 나오는 세례요한이 사람을 볼 때 “너는 썩었어, 인간들아. 썩은 인간에게 나오는 하늘나라, 천국, 구원 개념 전부 다 썩었어. 십자가고 메시아고 다 썩은 개념이다.” 이것을 세례요한이 있는 이 자리에 와서 그걸 발견하라는 겁니다.
그럼 세례요한의 자리가 어느 자리인가? 세례요한의 자리는 물속에 들어가는 자리에요. 물에 빠진 자리에요. 그게 바로 죽음의 자리에요. 나 죽어 마땅합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일단 세례요한과 합세해보자. 그래 세례요한한테 오잖아요. 네가 죽은 것을 내가 확인해줄게. 물 붓고.
옛날에는 그렇게 안 하지요. 침수시키지요. 하나, 둘, 셋 물에 확 집어넣지요. 너 있나, 없나? 없습니다. 없다는 인간이 말을^^ 물에 집어넣어요. 그 물에 집어넣을 때 같이 고개가 물에 들어오신 분이 계셨으니 그분이 바로 세례요한도 말렸던 메시아입니다. 바로 나의 죽음 자리에서 매일같이 죽은 자리에서 예수님을 위해서 우리가 창조되었고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새롭게 아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난 뒤에 다시 하루를 살게 되면 썩은 나무, 썩은 통나무를 우린 이미 살아 있는 주님에 의해서 어떻게 사용되는가? 썩은 통나무, 주님은 살아 있는 성령, 합쳐서 그걸 이젠 새로운 피조물을 나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어떠한 내용도 주께서 실시할 내용이지 내가 이룰 내용이 아님을 믿는 그 믿음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그러니까 배신했다는 믿음도 주님이 실시하는 겁니다. 우리가 하는 게 아니에요. 우리 일 아니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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