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강의

추수로서의 예배(십자가5강)

아빠와 함께 2022. 3. 2. 08:07

대전-십자가를 아십니까(5강) 요한복음4장24절(추수로서 예배)20220228b
(강의:이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하겠습니다.

[십자가를 아십니까] 22페이지 중간에 보게 되면 예수님께서 교회라는 것을 언급할 때 무엇을 반드시 반대편에 세웠느냐 하면 마태복음 16장에서 내가 교회를 세우리니, 그 다음에 뭘 의식하라는 뜻이냐 하면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한다. 달리 이야기하면 교회가 음부의 권세를 이기지 못하는 게 아니고 음부의 권세를 이긴 그것만이 교회가 된다, 음부의 권세를 못 이긴다면 교회가 아니다. 같은 말로 음부의 권세 안에 있다가 거기서 성공적으로 음부의 권세를 헤치고 깨치고 나오는 일을 예수님 본인이 하겠다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이 반석은 베드로가 아니고 누가 되느냐 하면 예수님 자신이 반석이 되는 거예요. 왜냐하면 베드로는 음부의 권세를 이기지 못하기 때문에. 그런데 왜 베드로를 네 위에 세운다 하느냐? 예수님께서 결국은 베드로 속에 들어간다. 껍데기는 베드로, 안 쪽에는 예수님 그런 방법이 있는 거예요.

왜냐하면 예수님의 육신은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승천해버리면 영광스럽게 되잖아요. 영광스런 몸은 이 세상 인간의 몸과 함께 있을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 부활한 몸을 제자들에게 만지지 말라고 했지요. 너희들이 만질 몸이 아니에요. 이미 그냥 육에 속한 몸이 아니고 영체에 속한 몸이기 때문에 안 됩니다.

그렇다면 교회라 하는 것은 뭐냐? 예수님이 하신 일의 연속성, 예수님이 육신으로 오셔서 하셨던 그 육신의 일을 계속 하기 위해서는 기존의 열두 제자들부터 해서 육신이 필요했고, 예수님 육신 속에 성령이 들어온 것처럼 베드로나 열두 제자와 오늘날 성도의 몸속에 모든 걸 다 이루신 분의 영이 옵니다. 그게 성령이거든요. 예수님의 성령은 모든 걸 이루실 수 있도록 오시는 성령, 그게 예수님의 성령이에요. 그러나 우리한테 온 것은 너도 이루어라가 아니라 다 이루어졌음을 바깥으로 발산하는 그런 육신으로서 성령께서 들어오시게 됩니다.

그러면 예수님 오실 때, 질문인데요. 예수님 상대자가 누구였던가? 질문은 이거에요. 예수님의 상대자는 누구? ①유대인, ②로마, ③악마. 몇 번이에요? 예수님의 상대자는 누굽니까? 악마지요. 왜냐하면 로마, 유대인은 제자들도 포함됐지만 로마, 유대인은 전부 다 악마가 다 지배하기 때문에 악마 하나만 해도 다 되는 거예요. 로마, 유대인도 예수님을 달려들지요. 유대인,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

그렇다면 이 말은 뭐냐? 주님께서 유대인 상대하는 것처럼 하지만 로마인 상대, 로마인은 본디오 빌라도지요. 상대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궁극적인 적은 누구냐 하면 악마와 상대합니다. “유대인들아, 너는 악마의 자식이다.” 그렇게 되는 겁니다. 우리가 지금 십자가를 아십니까, 교회 이야기기 때문에 교회 이야기와 연결돼야 돼요.

그러면 유대인과 로마, 악마는 눈에 안 보이니까 이것 지우고요. 유대인과 로마 사이에 또는 유대인과 유대인 사이,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사이에 그들은 어떤 논쟁이 있었고, 어떻게 서로를 적으로 간주했습니까? 무슨 해석 때문에 그렇습니까? 율법 해석 때문에 그렇거든요. 율법 해석을 왜 하느냐 하면 제가 첫째 시간에는 율법을 통해서 하나님과 관계했다 하는데 오늘 [십자가를 아십니까] 두 번째 시간에서는 이게 뭐냐 하면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과 나갈 수 있다고 그들은 율법, 구약을 그렇게 해석했습니다.

율법을 집약하면 뭐가 된다? 예배 된다. 예배가 된다는 말은 예배 받으시는 분이 있고 예배하는 자가 있다는 겁니다.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 쉬운 말이 아니고 어려운 말이에요. 예배란 말이 말씀에 있게 되면 예배에서 당구공 탕탕하는 것처럼 두 개가 여기서 마땅히 당연히 두 요소가 필연적으로 나오는 거예요. 예배가 있다는 말은 예배 받으시는 분이 있고, 예배 받으시는 분만 있으면 안 되지요. 예배하는 자가 있다는 거예요.

그러면 예배가 있다는 말은, 예배하는 자가 있으니까 예배 1, 예배하는 자 2, 예배 받으시는 분 3이라면 1, 2만 있어도 3은 자동적으로 성립하지요. 그러니까 우리가 예배한다는 말은 곧 누가 계시다는 뜻이에요? 예배 받는 하나님이 저 하늘에서 존재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들 입장에서 이게 뭐가 문제가 되느냐는 거예요. 예배하라는 말씀 있고 지침서 와 있고, 그 지침서가 나한테 날아와 있고 내가 예배하는 자고,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서 예배 받고자 원한다면 예배 받고자 원한다는 말은 예배가 저절로 되면 우리에게 뭐가 자동적으로 주어진다? 복이 주어진다는 거죠.

그러면 어떠한 저주스런 형편에 있더라도 뭐만 성사하게 되면 뭐예요? 예배만 제대로 잘 드린다면 상황이 저주에서 심판에서 뭐로 바뀐다? 복과 축복으로 바뀔 수 있다는 그런 희망을 인간들에게 줄 수 있지요. 그러면 이건 오늘날 이 원칙을 교회에서 그대로 가져왔다 이 말이에요. 천주교나 기독교에서 가져왔잖아요.

교회에서 할 일은 굉장히 간단한 거예요. 예배 처소 마련하고, 예배 처소에 형광등 달고, 문은 삐걱거리지 말고 문 제대로 달고, 강대상 준비하고 탁자, 테이블, 설교단 준비하고, 커튼 계절마다 바꾸고, 사람들로 하여금 동네 주변 애들한테 사탕을 주든지 초콜릿을 주든지 무조건 여기 와서 11시부터 하는 1부 예배에 참석하고, 마지막에 예배 조건에 뒤에 뭐가 있느냐 하면 축도 시간이 있어요. 축도까지 받고, 점심 먹고 가든지 말든지 니 마음대로 하고 거기까지만 참석하게 되면 뭐가 성립된다? 복을 받고 구원이 되는 거예요. 이게 뭐 어려운 겁니까? 예배 봅시다, 안 합니까.

그런데 요즘 사람들이 피하는 게 있어요. 뭘 피하느냐 하면 오미크론을 피합니다. 오미크론이 피할 최후의 적이에요. 요즘에서는. 오미크론 피해서 도망치는 거예요. 그러면 도망치기 위해서 자기 집으로 가지요. 자, 그러면 예배라는 것은 모여서 예배 드려야 되는데 적이 뭡니까? 오미크론을 피해서 적이 되겠지요. 적어볼게요. 말이 어려워졌지만 어렵게 들어가야 돼요.

나에게는 적이 있다. 또는 나에게는 피할 대상이 있다. 코로나 바이러스 피할 대상이 있다. 이럴 경우에 나는 나에게 적이 되겠습니까, 적이 아니겠습니까? 이럴 경우에 어떤 경우라도 내가 나한테는 적이 아니지요. 나는 나에게 아군이 되겠지요. 적군이 아니고 아군 되겠지요. 이게 바로 신약성경에 보면 이래서 예외가 안 되는 거예요.

로마서 5장 10절처럼 내가 하나님의 원수란 생각을 로마서에 나오는데 예배드리는 인간들치고 자기는 중립적인 성향을 갖고 있다는 거예요. 나는 아직까지 적도 아니고 아군도 아닌데 예배만 드리면 중립에서 하나님의 아군이 된다는 생각을 사람들은 갖게 됩니다. 이왕 선악을 아니까 내가 예배드릴 때 남보다 선하게 예배드리면 나는 구원받을 수 있다, 이런 생각이 모든 인간이 다 갖고 있으니까 성당이나 교회는 뭐만 준비하면 됩니까? 이제는 밥상만 차려놓으면 되는 거예요.

예배라는 밥상만 차려놓으면 되고 교인들은 자기 집에 있으면 예배 안 드렸어. 그런데 가까운 예배 처소에서 11시 예배해서 거기서 일어섰다, 앉았다 하고 나올 때 약간의 헌금 좀 하게 되면 한 주가 개운해요. 마음이 안정이 되면서 한 주는 복 안 받으려야 복 안 받을 수 없지. 왜냐하면 예배를 드렸잖아요. 예배라는 것, 어떤 행사에 참석해서 그 시간 출석 도장 찍어놨으니까 이거는 복이 절로 오는 겁니다.

지금 여러분들은 이게 아니란 것을 아시겠지만 촌의 곳곳마다 경상북도 의성이라든지 진짜 교회가 너무 많아요. 선교사들이 그쪽에 집중한 모양이라. 막 뿌렸어, 막 뿌렸어. 가는 곳마다 예배당 세워서 사람들 처소를 마련한 이유가 뭡니까? 예배만, 이 무식한 조선 사람들이여 뭐만 하면 된다? 와서 그냥 선교사님 인도하는 대로 찬송 부를 때 찬송 부르고 기도할 때 눈 감고 헌금할 때 돈 좀 내고 예배할 때 조용히 하고, 그냥 예배 이벤트에 행사에 참석만 하신다면 당신은 죽어서 천당입니다. 무슨 깊은 진리가 필요하고 성경 교리가 뭐 필요해요. 그것만 하면 되는데.

그래서 그쪽에 있는 할머니들이 나중에 죽을 때 돈 좀 있고 땅이나 있는 사람은 지 죽으면 자식들 가잖아요. 그러면 그들이 마지막 하나님과 하는 거래가 있어요. 이 땅을 교회에 바치겠습니다. 이게 뭐냐 하면 행여 내가 살아생전에 하나님을 노하게 하는 빈 구멍이 있을 수 있잖아요. 일을 제대로 다 처리 못할 경우에 아예 확실한 입막음용, 확실하게 결정적인 입막음용으로써 교회에 오천 만원 목돈으로 헌금을 함으로써 자기가 죽을 때 아주 산뜻하게 죽을 수가 있는 거예요. 보험도 그런 보험이 없지요.

예배당에 아버지가 목돈으로 했기 때문에 자식들은 건성건성 다녀도 장로는 따놓은 거고, 장로와 결혼한 부인은 권사 따놓은 거고. 그러면 그 교회 부동산에 대해선 본인이 주도권이 쥘 수 있어요. “아버지 준 땅이다. 네가 어디서 굴러온 돌이....” 이러면 끝나는 거예요. 제직회? 필요 없어요. 당회? 필요 없어요. “아버지 물려준 땅에 예배당 세웠는데 목사, 니가 뭐고? 눈깔아, 씨.” 이래 되는 거예요.

문제는 장로가 되게 되면 그걸 비즈니스 장로라. 비즈니스 장로가 되게 되면 장로라는 명함이 지 사업에 상당히 신용이 높은 걸로 간주가 돼요. 장로는 교회에서 존경받을 게 아니겠습니까. 그러면 그 사람 인격에 대해서 증인들이 한둘이 아닐 거란 말이죠. 설마 그 증인들 다 개 무시하고 사기 칠 리는 없을 거고, 신용도가 높은 거예요.

그렇다면 그 교회, 사업하면서 신용도 높이려고 “아이고, 장로님. 수석 장로님.” 수석이라 해서 나는 집에 돌 수집하는 장로인 줄 알았어요. 그게 아니고. “수석 장로님, 장로 시켜주이소.” “집사님, 왜 그러십니까?” 사업하는데 신용이 높아야 되는데 장로하게 되면 어디에도 다 되고 또 장사할 때 신자들한테 그냥 사장이 아닙니다. 사실은 어느 교회 장로입니다, 하면 단골이 될 수 있는 거예요.

다 이 사단이 어디서 나왔다? 내가 죄인인 것을 교회 60년, 70년 다니면서 단 한 번도 인정해본 적 없어요. 그게 무슨 예배입니까. 그렇다면 주님의 예배는 누구 찾아가겠어요? 사마리아 여인에게 찾아가는 거예요. 예배에 대해서 요한복음에, 성전 이야기는 2장에서 이야기했어요. 성전을 허물라. 사흘 만에 다시 지을게. 예배 이야기는 그 다음에 어디 나옵니까? 바로 사마리아 여인한테 예배 이야기가 나와요.

사마리아 여인과 더불어 예배 이야기하면서 그 사마리아 여인의 과거 이야기를 주께서 먼저 선빵 날립니다. 공격 해버려요. 너에게 다섯 명의 남자가 있어요. 그리고 지금은 식스 맨, 여섯 번째 남자와 사귀고 있다. 도대체 이 이야기와 영적 예배와 무슨 관계있습니까? 숨기고 싶은 과거 이야기와 무슨 관계있습니까? 관계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그때 예수님 주위에 남자가 있었습니까, 없었습니까? 남자가 한 명도 없어요. 남자들 전부 다 빵 사러 갔기 때문에. 예수님과 여인만 남았어요.

여기서 여인을 찾아온 이유가, 여인은 빈 공간이기 때문에. 빈 공간, 빈 터에요. 예배를 성사할 때 아무것도 없는 데서 예배가 돼야 된다는 거예요. 예배드릴 만한 건물도 없고 아무것도 없는 데서 예배가 나오는 겁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하면 예배란 기존 예배로부터 배척받는 그 장소에서 예배가 시작되는 거예요. 결국 예수님을 배척받잖아요.

그러니까 그 배척받는 빈 공간인데 앞에 뭘 붙인다면 어떤 빈 터? 배척받는 빈 터. 그러면 유대인한테 배척받는 여인은 어느 나라 지방의 사람이죠? 사마리아 여인, 그냥 여인이 아니고 사마리아 여인 되는 거예요. 옛날의 남자들은 여자를 굉장히 무시했어요. 여자는 모스키토에요. 너무 어려운 방언을 썼습니까? 모기.

여자의 특징은 빨대에요. 여자는 빨대 하나 들고 남자한테 꽂지 아니하면 생존이 안 돼요. 꽂아버려야 돼요. 남자에 기생하는 존재. 남성의 세계기 때문에 그래요. 남성의 세계에서 여성이란 액세서리거든요. 액세서리는 그냥 놓여있는 게 아니고 빨대처럼 꼽혀야 돼요. 만약에 남자가 없다. 고아나 과부 이럴 때는 팔자 끝났습니다. 희망 없습니다. 살기가 정말 힘들어요.

농경시대에 농토 주면 뭐합니까? 여자 혼자 무슨 농사를 짓습니까. 그래서 농토를 가까운 친척한테 이걸 팔고 그 여인은 그 친척에 기생하는 존재로서 생존이 보장되는 거예요. 산업사회, 머리 쓰는 사회가 아니에요. 과부인데 컴퓨터 도사다, 이런 것 없어요. 혼자 사는데 서울 의대 나왔다, 옛날엔 그런 것 없어요. 교육도 돈이 있어야 공부를 하지 돈 없으면서 무슨 교육 받습니까.

교육받는 여성은 19세기 들어와야 여성에게 참정권이 있는 거예요. 처음에 참정권 안 준 이유가 무식해도 너무 무식하기 때문에 주나 안 주나 남편한테 물을 게 뻔하기 때문에 줄 필요가 없는 거예요. 한 표 주면 한 표가 아니고 두 표에요. 남편이 두 개 하는 거예요. 여자는 남자한테 물어봐야 돼요. 왜? 여자가 너무 무식하니까요. 무식하면 인간의 악마적 본성이 나오는 걸 생각하는 거예요. 로마시대 때.

그래서 여러분들이 성경 보면 나오지요. 여자는 좀 입 다물라. 배우려면 남자한테 배워라. 난 체하지 말고. 그런데 그 당시에 성령이 와서 방언을 해버리거든요. 방언이란 말은 복음적 내용을 담은 말을 방언이라 해요. 방언은 다른 말로 사투리란 뜻인데. 현대인들이 기존 언어인데 단어가 내용이 앞뒤가 연결이 안 되는 방언을 하니까 너만 방언하나 나도 방언한다 해서 서로 방언하니까 완전히 누구 장단에 맞출지 혼란된 거예요.

예배드릴 때 나도 성령 받았습니다, 나도 성령 받았습니다, 손들고 나오니까 순서 좀 지키세요. 요새 지방교회 비슷하게 그렇게 된 거예요. “혹시 여기서 방금 성령 받은 사람 계십니까?” “왔다, 왔다, 왔다. 저 받았습니다.” 이런 예배, 지방교회 하는 예배 있잖아요. 백 퍼센트 동의해야 등록되는 교회. 전부 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교회 특징이 본인에게 문제 있다는 것을 그걸 절대로 알려주지 않는 그런 교회들이에요. 하나님께 예배하겠다는 자체가 예배 자격 없다는 사실을 이걸 뭔지 모르고 있는 거예요.

성경에서 분명히 뭐라고 했느냐 하면 이방인들은 뭐냐? 개거든요. 이방인들은 개에요. 이게 시편에 나옵니다. 언약을 모르는 또는 율법을 모르는 같은 말이에요. 시편에 둘 다 있어요. 언약을 모르는 이방인에게 저주를 퍼부으소서. 분명히 이방인들은 철저하게 개로 취급해야 됩니다. ※시편79:6, “주를 알지 아니하는 열방과 주의 이름을 부르지 아니하는 열국에 주의 노를 쏟으소서”(에베소서2:11-12(이방인)20190324)

괜히 또 없는 소리하면 안 되니까 에베소서 2장 봅시다. 요 근래 몇 번 한 것 같은데요. 에베소서 2장 12절, “그때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걸 구약에서는 “그때 너희는 언약 밖에 있었고” 이런 뜻이에요. 언약 밖에 있는 진멸의 대상입니다. 진멸 아시지요. 싹쓸이 대상이에요.

그리고 싹쓸이 정도가 아닙니다. 일체 불쌍히 여기기 말라 했습니다. 사람이 사람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을 통한 하나님의 일을 위한 하나의 자원으로 보는 거예요. 그냥 사람이 아니고 석탄이나 석유 같은 철광 그냥 자연물의 일종이기 때문에 발에 차이는 돌에 불과하다 이 말이에요.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는 외인이요” 그 뜻이 뭐냐? 세상 속에서 무엇이 없고? 소망이 없고 뭐도 없고? 하나님이 없고. 이건 사람 아니죠, 뭐. 저주받아 마땅하지요. 그러니 인간들이 하나님을 안다고 해서 아는 게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쪽을 불러줘야 되고 찾아가줘야 돼요. 그래야 하는 겁니다. 이스라엘 같은 경우에는 아예 없는 나라가 하나님께서 만들어내셨죠.

만드신 이유가 하나님이 함께 있는 그들 속에 있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하나님이 만든 단체가 이스라엘이에요. 이스라엘 나라는 없는 거예요. 인간 육에는 없고 인간 육과 다르다는 걸 위해서 할례를 행하고 할례 행한 그 집단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로 해서 언약으로 조성된 나라거든요.

그러니까 예배라 하는 것은 지금 유대인이라 여기는 제자들은 빵 사러 다 보내버리고 그 다음에 이방여인에게 하는데 이방여인은 뭐냐? 없는 것으로, 이 앞에 뭐라고 했던가요? 그냥 빈 공간이 아니고, 다른 말로 하면 배척받는 것 맞는데 사마리아는 유대인한테 배척받았으니까. 그냥 배척보다도 저주에요. 저주받는 이방인, 없는 것 취급받는 그들이 사마리아 여인이에요. 거기다가 남성도 아니고 여성이다. 여성은 홀로 살 수 없는 시대였습니다. 지금은 지 빨대 지가 꽂으면 되니까.

옛날에는 여자가 있는 남자들을 선택했잖아요. 지금은 여자가 먼저 생활의 안정권을 원하면 여자 쪽에서 남자를 골라잡을 수가 있어요. 지금은 돈이 있으면. 골라잡는다는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여분의 자녀를 따로 가진다는 뜻이에요. 이거는 필수적이 아니고 선택적이다. 개를 키울 때 개가 내 운명이다, 이런 생각 안 하지요. 키우다가 아프거나 말썽나면 안락사 시키든지 내보내든지 꼭 필수적인 건 아니잖아요. 아무리 정들었더라도.

골라잡는다는 말은 내가 골라잡았잖아요. 골라잡을 때부터 주도권이 개시가 되지요. 계속 여자가 남자를 골라잡으면 남자에 대해서 속으로 뭘 생각합니까? 나는 내가 널 선택했어, 인간아. 까불면 쫓아내버린다. 이것이 바로 남녀란 자체가 현대 시대에서는 아무 의미가 없는 시대로 돌입한 겁니다. 남녀 자체가 의미가 없어요.

그래서 왜 사마리아 여인은 다섯 명이나 사귀었는가? 지금 사귄 사람은 여섯 번째인가? 그거는 남자를 위해서가 아니라 본인이 살기 위해서 한 거예요. 본인이 살기 위해서 그렇게 하면서 어떤 예배를 드렸습니까? 그리심 산에서 예배를 드렸지요. 그리심 산이란 특정지역을 말합니다. 여기에 갈릴리 바다 있고 요단 강 있으면 그리심 산과 에발 산이 이쪽에 있어요. 이걸 이스르엘 평야라 해서 뭐 대단한 평야는 아니고 좀 넓은 데 있어요. 가봤어요. 좀 넓어요. 여기에 톡 튀어나온 그리심 산과 에발 산이 있어요.

그리심 산이 축복 산이잖아요. 거기다가 예배를 그동안 드리면서 했다 이 말이죠. 그 여자가 그리심 산에서 드리면서 뭐냐 하면 나 아무 문제없다, 이렇게 된 거예요. 그게 유대인 입장에서는 어떤 상태냐? 버림받은 상태가 돼요. 요한복음 4장에서 지금 예배를 이야기하면서 제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그겁니다. 요한복음 4장 봅시다. 4장 35절 누가 읽어볼까요?

“너희는 넉 달이 지나야 추수할 때가 이르겠다 하지 아니하느냐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도다” 자,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다. 추수 이야기를 하는데 지금 열매를 거두는 게 추수에요. 그런데 지금 예수님이 제자들이 빵 사고 오니까 나 벌써 추수했다고 했어요. 추수를 한 거예요.

이 추수를 했다는 말은 어떤 뜻이냐 하면 이게 마지막 때 종말이 될 때 하는 추수에요. 그럼 종말의 추수는 예배를 드려서 열매를 거두는 게 아니고 예배 자체가 뭐가 되느냐 하면 이미 추수를 하고 있을 때 예배 방식으로 추수가 이뤄지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여기저거 걸쳐놓은 개념을 이 한 마디로 정리하겠습니다.

종말과 종말론을 여러분 구분해야 돼요. 종말론이라 하는 것은 인간이 자기의 잘못과 죄를 모르는 채 종말을 대비할 때 만들어내는 이론이 종말론입니다. 나한테는 하자가 없어요. 이렇게 종말을 기다리는 이것만해도 자기가 기특하고 대견하고 본인이 생각해도 기특하고 어쩔 수가 없어요. 세상에 종말이 도적 같이 온다는 데 미리 준비하다니 기름 준비하다니 나는 대견해. 이게 종말론에 해당 돼요.

그리고 남들 다 맞는 백신도 안 맞았어. 왜? 백신은 마귀가 666 놓기 위한 음모, 특히 제약회사들이 백신 안 맞아도 되는데 부자 되기 위해서 국가 권력과 공모해서 전 세계를 백신 맞게 해서 이제는 백신 없이는 못 사는 666에 종속되는 존재로서 인간들 다 파괴할 때 영적 눈이 떠진 사람은 백신을 맞지 않아야 악마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그런 종말론이잖아요.

제약회사에 있는 자금이 정치자금으로 들어가서 나중에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치는 무슨 전쟁? 드디어 마곡끼리 붙은 아마겟돈 전쟁, 3차 대전 벌어졌다. 이제는 러시아 핵폭탄 동원하고, 그러면 미국은 거기에 맞붙어서 유럽과 합세해서 3차 대전 핵전쟁 일어나면 세상은 끝이 날 때 마지막 이 대 환란에 살아남는 자는 뭐냐? 지하벙커지요. 어제 이야기한 지하벙커 돈 주고 사는 거예요. 한 십오만 불 주면 산다는.

지금 이 종말론 가운데서 내가 저주받아 마땅하다는 그 이론이 나옵니까, 안 나옵니까? 어디에도 안 나오지요. 지금 제자들이 유대인들이에요. 유대인들 없는 사이에 하나님께서 예배를 만들어버린 거예요. 예배라 하는 것은 예배하는 자가 있고 예배 받는 자가 있지요. 예배하는 자가 유대인들 보기에 버림받은 사마리아인이 그리심 산에서 예배한다는 거예요. 그 여자의 말에 의하면 유대인들은 우리를 욕하기를 그리심 산에서 하면 안 된다는 거예요. 그럼 어디서 하나? 자기들은 예루살렘에서 해야 된다는 거예요.

그럼 예배자 자체가 이미 있잖아요. 이걸 주님께서는 어떻게 하느냐? 이걸 완전히 무시하는 겁니다. 예배하는 자 자체를 완전히 무시해버려요. 예배하는 것은 어디에 관계되느냐 하면 종말에 버림받은 자만이 예배하는 자가 되고 그 예배하는 자의 열매가 추수라는 형식으로 나타난다. 그렇게 보시는 겁니다.

그러면 사마리아 여인의 잘못은 어디에 있는가? 남자 다섯 명 다 헤어지고 지금 여섯 번째 사귄다는 말은 여인으로서 할 수 있는 극한의 생존방법이거든요. 이런 생존방법에서 나온 예배는 그리심 산에서 예배드린다 했잖아요. 인간들의 드리는 예배는, 결국은 예배가 바탕이 아니고 나도 밥이나 먹고 좀 삽시다, 이게 기본이 된 채 예배가 나와 버리니까 이거는 마지막 때에 추수할 열매로서는 자격이 없는 거예요. 이렇게 예배해서 어떤 좋은 복을 받는다, 이런 건 성립이 안 되는 겁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여인이 자기가 남자 다섯 명 사귀었다는 말을 처음부터 까발렸습니까, 아니면 감추었습니까? 감추었지요. 감추고 뭘 앞장세웠어요? 예배에 대해서 이야기했지요. 그런데 주님께서 하니까 그 다음부터 여자가, 저 예배드리고 있어요. 당신은 선지자입니다. 우리는 예배드리고 있어요, 라고 이야기한 거예요. 그 예배가 엉터리 예배가 된 거예요. 예루살렘이라든지 장소적인 위치해서 예배드리는 이것은 하나님께서 인정하지 않는 예배입니다. 그 예배는 종말론과 관련돼 있어요.

그래서 종말론 예배 또는 종말론 자체가 무너뜨리는 것이 바로 종말의 현상 중의 하나입니다. 인간의 종말론을 무너뜨리는 거예요. 너희들은 종말을 기다릴 자격도 안 된다. 나중에 죽으면 천국 갈까요, 지옥 갈까요? 할 때 어디서 잘못됐느냐 하면 내가 죽으면, 이게 잘못된 거예요. 이미 죽었어요. 죽은 놈이 천국, 지옥을 선택할 권한이 없는 데요. 천국, 지옥은 누가 내 대신 예배를 드려서 추수로 알곡으로 뽑아줄 때 그게 바로 천국이에요.

예배드린 자가 따라오기 위해서는 우리 인간은 엉터리 예배를 그동안 할 수밖에 없다, 그 이야기입니다. 그 엉터리 예배가 그들은 엉터리 예배로 보질 않지요. 그런데 제가 처음에 뭐라 했습니까? 인간의 예배가 왜 엉터리일 수밖에 없는가? 음부의 권세를 이기지 못하니까요.

23페이지 봅시다. 23페이지 위에서 아홉 번째 줄. [예수님께서 생각하신 교회는 음부의 권세와 관계가 있다. 예수님 본인이 음부의 권세와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오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었다(요일3:8). 그러나 예수님께서 마귀를 멸하신 도구는 예배 형식이 아니었다. 그 당시 유다이즘의 예배 양식이 악마를 이길 수 있었다면 예수님께서 구태여 이 땅에 오실 필요가 없었다.]

얼마나 세밀하고 정결하고 거룩해 보이는 양식을 인간의 아이디어에서 다 끄집어냈잖아요. 그런데 그게 악마의 권세를 이길 수 있다, 없다? 악마를 못 이겨요. 악마를 못 이기면 악마한테 지금 잠식돼 있는 거예요. 정신과 마음이. [유대인의 예배는 무용지물이다. 음부의 권세를 이기는 데] 그 뒤는 넘어가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한 결 같이 거기에 매달렸다. 그들은 자기들의 예배 양식이 옛날 선지자 모세가 직접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지시받은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 다음에 [예배의 절차와 순서(여러분 생각해보세요), 집례자의 복장(아까 에봇 있지요), 성지의 위치(그리심 산이냐, 예루살렘이냐), 제단을 중심으로 한 건축물의 구조(솔로몬의 건축이라든지 이런 것)뿐만 아니라 사회 전반에 적용되는 십일조와 안식일 준수(예배 종사하는 제사장 월급 나가잖아요), 율법 강론, 성전세 납부(성전세 납부 아시죠. 예수님께서 물고기 잡아주니까 더도 덜도 아닌 딱 그 액수의 동전을 물고기가 물고 있었잖아요), 더러운 것을 거룩 되게 하는 세세한 정결 조항]

제가 아까 강의할 때 그런 이야기했지요. 현대인들은 피해야 될 것이 있다고, 뭐라 했습니까? 오미크론, 코로나 바이러스지요. 그것 왜 피합니까? 아직 자기는 안 죽어야 되기 때문에. 왜? 자기는 잘났으니까 의로우니까 죽으면 안 된다는 거예요. 사람이 뭔가 피한다는 것은 내가 아직까지 지킬 가치가 남아있다는 거예요.

처음에 요한복음 4장에서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땅으로 갈 때부터 유대인 제자들이 뭐라고 합니까? 그 길로 가지 말라 했잖아요. 사마리아로 통과해야 되겠다. 그런데 제자들은 이리로 가지 마시고 갈릴리로 갑시다. 사마리아 땅은 여기 있고 갈릴리 호수는 여기 있다고요. 이렇게 갑시다, 했는데 예수님은 사마리아 땅으로 가자 한 거예요. 사마리아 땅으로 가서 갈릴리로 가자는 거예요. 이것부터 이미 벌써 제자들과 사고방식이 틀린 거예요.

왜 사마리아 땅은 가선 안 된다고 생각한 겁니까? 가면 자기가 더러워지니까요. 자기는 하얀 옷을 입었다고 생각한 거예요. 시커먼 옷을 입었다고 생각을 못한 거예요. 제가 누구한테 그런 이야기했지요. 사람의 모든 정신병은 거울만 안 보면 다 낫는 병이라 했어요. 자기를 자꾸 비춰보는 겁니다. 거울만 안 보면 모든 정신병은 다 나아요. 기도안수 받을 필요 없어요. 거울 안 보면 돼요. 물론 거울도 안 보는 여자라고 욕을 하겠지만 욕을 하든 말든 거울 안 보는 사람치고 생활은 어렵겠지만 정신적으로 다 건강해요.

자아 지키는 그 자체가 배후에서 악마가 자꾸 그렇게 하기 때문에 악마가 시키기 때문에 악마의 힘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거예요. 악마가 나의 원수가 되는 게 아니라 악마가 나의 친구가 되고 나를 격려해주고 위로해주고 나를 같이 동정해주고 나에게 힘을 실어주는 데 그게 어떻게 적군입니까? 아군이지요. 그래서 예배하고 가니까 잘한다, 잘한다, 내 스스로 격려해주는 차원이기 때문에 우리는 기존의 예배를 고집하는 겁니다.

기존의 예배를 고집하니까 예배당이 고집되고 고수되고, 예배당 고수되니까 예배당 처음 할 때 어느 장로가 돈 냈나, 그게 그만 예배당 주인노릇하게 되고. 그러니까 그 사람들은 예배당에 있다는 그 자체가 거룩으로 인식되기 때문에 그 사회 전체가 이렇게 인간이 잘날 수도 있구나, 이렇게 훌륭하다고 인정받을 수 있는 찬스가 왔는데 그걸 놓칠 수가 없지, 해서 나도 교회 다닐게, 이런 식으로 전도가 되도록 구축되는 사회 자체가 문제 되는 겁니다.

그래서 그들은, [완벽하게 하나님의 말씀, 즉 율법으로만 구축되는 이상세계가 그들의 목표였습니다. 예수님의 그 어떠한 생각이 이 모든 율법의 구조를 깡그리 부정하는가?] 24페이지, “그런즉 율법은 무엇이냐 범법함을 인하여 더한 것이라” 이게 갈라디아서 3장 19절에 나와 있는데요. 이게 무슨 뜻이냐?

성공은 어디 안에 있다 했습니까? 실패 안에 있어요. 그럼 인간은 이미 실패했어요. 문제는 인간이 실패한 것을 본인이 모르고 있잖아요. 그러면 하나님의 뜻에서 구원받을 사람 같으면 하나님께선 단 하나만 알려주면 돼요. 너는 실패하기 이전에 이미 실패에 있다는 사실을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함으로써 그 실제를 들춰주면 돼요. 이게 성령께서 우리에게 오시는 이유입니다.

너는 실패자야, 라고 우리를 지적하는 거예요. 그냥 지적하는 게 아니고 성령께서 손가락 있다면 손가락으로 이마를 콕콕 미는 거예요. 인간아, 너 실패자야. 실패자는 감사 외에는 항상 기뻐함 외에는 범사에 하나님 주신 것에 반응을 나타내는 그 쉬지 않는 기도 외에는 아무것도 할 게 없어요. 손가락으로 이마 쑤시는 그게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니라, 라고 돼 있어요. 이게 성령 안에 하나님의 뜻이니라.

아이고, 인간아. 사마리아 여인아. 아이고, 이 빨대야. 유대인 싫어하는 남자야, 이런 식으로. 매사가 실패만 있어요. 여러분 감사하지 않습니까? 실패만 있어요. 오미크론? 주님께서 뭐라 합니까? 너 어디까지 내빼는지 보자. 재택치료? 재택까지 찾아갈 거야. 네가 이걸 피해? 끝까지 따라갈 거야. 코로나 끝나면 다른 것 준비해서 너는 뭘 해도 실패야.

참 이게 하나님께서 율법 준 것이 얼마나 큰 사랑입니까? 그 율법이 우리 내부까지 들어와서 우리로 하여금 실패로 하는 거예요. 불신자의 양심은 선악체제기 때문에 내가 죄 짓지만 선을 더 많이 지으면 이 죄를 극복하고 나중에 죽으면 선한 사람만 가는 천국에 갈 수 있다, 이렇게 하지요. 로마서 7장에 보면 이 율법은 사도 바울에게 성령 받은 자에게는 선악체제가 아닙니다. 이제나 죄를 더욱더 죄인 되게 하실 때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란 것을 기쁘게 고백하게 만드는 이게 성령이 그렇게 하시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미 주님 안에 추수가 되었고 이미 우리 안에서 예배가 되고 성령의 열매가 된 이상은 마음껏 실패하고 마음껏 망가지고 죄 있다 할지라도 이게 뭐냐 하면 이미 그리스도 밖에서 일어났던 일을 이 육신이 그걸 담고 있으니까 육에 일어난 일을 마음껏 우리에게 경험케 하는 겁니다. 이게 율법적 기능이에요. 죄가 더한 곳에 뭐가 더한다 했습니까?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치지요. 예배는 누가 드리고? 주님이 드리고. 우리는 성령으로 예배 못 드립니다. 주님이 드리고 우리는 그 예배에 참여자가 되지요.

그러면 사마리아 여인은 그것도 버림받은 빨대 있잖아요. 빨대 사마리아 여인은 누가 돼요? 우리들이 사마리아 여인 돼요. 왜? 우리는 생존이 가장 기본이니까. 누굴 다섯 명이든 여섯 명이든 무조건 갈아치우고 하든지 내가 살 수 있는 한 나는 모든 수작은 다 부립니다. 그 당시 살기 힘든 여인 상, 남자 없이는 못 사는 여인을 통해서 인간의 예배는 어떤 예배도 하나님께서는 받지 않는다.

예수님의 예배, 그걸 진리와 성령으로 드리는 예배, 그렇게 돼 있어요. 성경에선 진정과 신령이라 하는데 그 말은 뭐냐? 진리와 성령으로 드리는 예배, 성령이 있어야 예배가 되거든요. 성령께서는 우리의 육의 본모습을 계속 들춰내면 들춰낼수록 우리에게 예배가 다 이뤄졌음을 계속 보여줄 수 있는 그런 예배가 되는 겁니다. 그 다음에 들춰낸다는 이야기했고요.

26페이지 봅시다. 중간에 성령으로 시작했다가 육체로 돌아서면 안 된다고 했어요. 갈라디아서 3장 3절. 이 말은 성령으로 시작했다가 육체로 돌아선 사람이 있다, 없다? 질문을 잘못한 게 아닌데. 성경 말씀은 예수님이 하신 일을 성경 말씀이라 해요. 그러니까 우리 자신은 우리 자신을 몰라요. “네가 어떤 인간이냐? 육으로 돌아갈 수 없는 성령으로 시작했다가 성령으로 올 수밖에 없는 인간이 너야.”

그래서 주께서는 절대로 성령으로 온 사람은 육체로 돌아가지 않게 만드시는 겁니다. 따라서 우리는 늘 육신의 일 밖에 나올 게 없어요. 이 문장을 앞뒤로 잘 연결시켜줘야 돼요. 육신의 일 밖에 나올 게 없어서 구원은 내 일이 아니고 성령의 일이라는 것을 자꾸 빼앗아 내 일로 돌아와 버리면 이거는 우리가 추수된 게 아니고요 내가 알아서, 돼지가 칼 들고 자기가 삼겹살 도려냅니까? 이런 일 없잖아요.

돼지고기를 만들더라도 외부가 작동해야 되듯이 성령이란 외부 그분이 우리로 하여금 성령 되게 하시는 거예요. 육신에 속한 사람을. 우리는 그 과정만 보여주기 위해서 우린 육신에서 성령으로 된 것을 매일같이 보여주는 그게 바로 성령 안에서의 예배입니다. 전에는 율법에서 누가 나섭니까? 우리가 예배드린 자라 했지요. 지금은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으로 우리는 예배를 드리는 겁니다. 주께서 하는 예배에 참여하게 된 거예요. 그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그게 뭐냐 하면 아까 종말론에서 벗어난 종말, 마지막 때는 인간은 어떤 일도 못하니까 인간은 할 수 있는 게 뭐냐? 종말이 아니고 종말론. 이제 종말론 아시겠지요. 성경구절 가운데서 종말 있는 것 다 추려서 어떻게 하면 우리가 여기서 기름 준비하고 빠져나갈 수 있고 마지막에 666 도장 안 맞고 갈 수 있는가? 그것 연구하는 건 종말론. 철학에선 존재와 존재론을 구분해요.

비슷하게 종말론과 종말이 달라요. 종말은 주님이 하시고 종말론 누가 해요? 인간 본인이 구원받기 위해서 애를 쓰는 거예요. 마지막 때 종말론에도 추수가 있고요 종말에도 추수가 있어요. 종말론은 유대인들이 만든 거고요 그 유대인이 없을 때 예수님 본인이 오셔서 종말을 종말 되게 해버린 거예요.

구원받지 못한 사마리아 여인을 추수의 알곡으로 주께서 임의로 그 여인을 구원하신 겁니다. 왜? 배척받으니까. 주님처럼 배척받는 아무것도 남자 없이는 못 사는 여자의 가려한 일생이 보여주기 때문에 아무것도 없어요. 혼자 못 살아요. 남자 여섯 명을 사귀어야 돼요. 여섯 명 째 마음에 안 들면 일곱 명 사귀어야 돼요. 그게 그 당시 여인의 상이었습니다. 그게 좋은지는 모르겠는데....

예수님은 이처럼 아무것도 없이 배척받는 그 사마리아 여인의 모습으로 예수님이 오셔서 인간이 할 수 없는 모든 영적 예배를 다 이루시고 그 결과에 우리를 참여시켜서 우리가 얼마나 육적이고 유대인적이고 자기가 못하면 무시하고 주께선 차별을 두지 않는데 혼자, “나는 예배당 예배드리고 너는 절에 가서 불공드리나.” 예배당이나 절이나 성령 받지 않으면 똑같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의 종말을 경험해야 될 텐데 우리는 종말론을 끄집어내고 깨작거리고 있고 그것 따지고 있는 한심스러운 우리의 모습입니다. 이제는 지식으로 살지 말고 그 지식마저 주의 성령에 의해서 죄로 들춰지는 그런 감사와 기쁨이 있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대전강의' 카테고리의 다른 글

무단점유  (0) 2022.03.30
3/28보충강의  (0) 2022.03.30
생명의 기계  (0) 2022.03.02
예배속의 모순(십자가4강)  (0) 2021.12.29
무당의 중심  (0) 2021.12.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