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강의

안전성

아빠와 함께 2021. 12. 1. 10:40

대전-74강 사무엘상27장1절(안전성)20211129a
(강의:이근호 목사)


사무엘상 27장부터 하겠습니다. 다윗 이야기가 계속 되고 다윗이 쫓겨 다니는 내용으로 채워져 있습니다. 그런데 다윗이 쫓기는 모습을 보게 되면, 암중모색이라는 사자성어가 있지요. 어두운 데서 더듬어서 물건을 찾는 것. 왜 다윗은 하나님께서 어두운 데서 헤매게 만드는 이유가 뭐냐? 그것은 안정에서 불안정으로 내려가 줘야 다른 계열의 안정성 속에 들어오게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모든 인간은 특징이 뭐냐 하면 안정을 추구하는 데 실제로서는, 안정을 추구하다는 말은 그만큼 본인의 정신이나 마음 자체가 불안정해요. 불안정함이 심리적으로 다 나타납니다. 불안정하기 때문에 불안정한 그 미진한 빠져있는 부분을 마저 채우기 위해서 타인을 공격하게 돼있어요. 이 불안정해서 타인을 공격하는 역할을 누가 하느냐 하면 바로 사울 왕이 그 역할을 해요. 본인이 정서적으로 안정이 안 돼요.

사무엘상 28장 그 다음 장에 딱 나오잖아요. 28장 3절에 보면 누가 죽느냐 하면 사무엘이 죽지요. 정신적인 멘토, 지주가 되는 것, 아쉬울 때는 자기가 불안정해도 그동안 견딜 만 했던 것은 안전판이 있었던 거고 하나님께서 사울이 부족해도 지켜주는 것은 선지자는 최후의 안전핀이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망하지 않는다고 사울은 계산을 한 겁니다.

만약에 이스라엘이 그냥 망해버리면 사무엘이란 선지자가 선지자 아닌 게 돼버리잖아요. 선지자는 뭡니까? 하나님의 것이죠. 하나님이 실제로 성신을 주셔서 심어놓은 하나님의 것이 들어있는 그 집단에서 그 집단 속에 하나님의 것이 들어있단 말이죠. 그러니까 그 집단을 하나님께서 뭉개버리려 해도 그 안에 누가 있습니까? 하나님이 친히 집어넣은 자기 사람이 있기 때문에 그 이스라엘은 안정적이죠. 하나님의 사람이 있기 때문에.

그런데 28장 3절에 보면 사무엘이 죽어버렸습니다. 백성들의 정신적 지주가 죽은 것도 맞지만 그래서 백성들이 마음이 흔들리는 것도 맞지만 문제는 사울은 자기가 믿던 거기에 구멍이 뻥 뚫린 거예요. 의자가 뒷받침이 있다고 생각할 때는 마음대로 젖히는 데 장난친다고 뒷받침을 누가 빼버리면 꽈당탕 뒤로 넘어지는 셈이죠. 그 다음부터는 조심스러워서 행동을 마음대로 못하는 거예요. 자기가 완전히 넘어 질까봐. 안절부절 이죠. 이게 뭐냐? 불안정성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죽였다는 말은 무엇을 뜻합니까? 이스라엘은 내가, 선지자 없는 이스라엘은 적들의 밥이 되지요. 하나님의 요소가 빠져버렸으니까 이거는 누구든지 힘 있는 쪽이 오게 되면 그들의 노예가 되고, 그들의 노예가 되면 옛날 어느 시절로 돌아갑니까? 하나님의 은혜가 없었던 애굽 시절의 그런 참담한 처참한 혹독한 괴로웠던 그 시절이 재판될 가능성이 많은 겁니다.

사람들이 별로 부자가 아니고 여유가 없더라도 우리끼리 같으면 모든 게 용납이 되고 용서가 되는 상황에서는 견딜 수가 있어요. 집안이 가난하고 네 식구 밖에 없어도 서로서로 다 못난 사람들끼리 마음이 하나면 그 가운데서 마음의 안정성, 힘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부자고 아무리 잘 살아도 누구 하나 자리가 비어있으면 그 다음부터는 그 자리가 옛날처럼 채워지지 않는 한 안정성은 보장 받지 못해요. 불안한 겁니다.

그런데 문제는 포로가 된다는 말은 내가 든든하게 믿던 그 자리에 외부 요소 또는 외부인이 침입해버리죠. 지금 27장 하는데 다윗이 쫓겨 다녔잖아요. 사울은 천천이고 다윗은 만만이다. 골리앗을 누가 이겼습니까? 다윗이 이겼지요. 다윗은 이겼는데 쫓겨 다니고 있고 그동안 멘토였던 사무엘은 죽어버리고. 그러니까 민심이 위반되는 그 정도가 아니겠지요. 이스라엘은 그럼 우린 누굴 믿지? 믿을 사람 없네. 전체가 불안하게 되는 겁니다.
그 불안정 자체가 전에는 우리가 사무엘도 있었고 다윗도 있었고, 그때가 안정적이다, 라는 것이 과연 하나님께서 요청하는 그 수준의 안정적일까를 그 당시 사람들은 생각해봐야 됩니다.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고요. 복음 알지, 아이 공부 잘하지, 연금 여유 많지, 내 집 갖고 있어 나가란 소리 안 하지. 이런 정도.

코로나 이년 쯤 지나니까 마스크 쓰는 것도 답답하지 않고 안정적이죠. 오히려 추울 때는 찾게 돼요. 코 시릴 땐 찾게 되고 벌써 익숙해진 거예요. 적응했고. 그리고 얼굴에 손 대고 수술했으면 마스크가 제격 아닙니까. 저 사람이 했는지 안 했는지 코로나 예방하는 사람인지 분간이 안 된다고. 그리고 교회 와서 마스크 쓰면서 꼴 보기 싫은 사람 안 봐서 표정관리가 되거든요. 안 들킬 수가 있단 말이죠.

그런데 그게 과연 하나님께서 우리한테 요구했던 그 성도의 수준 맞느냐 말이죠. 이건 내 몸 편한 거 아니에요? 내가 생각하는 안정성에 우리가 안일하게 머물러 있는 것 밖에 안 되잖아요. 그러면 뭔가 구출이 필요한 거예요. 내가 생각한 안정적과 주님이 생각한 안정적인 안정성과 너무 격차가 생길 때는 반드시 무슨 터널을 통과해야 되는가? 불안정함을 통과해야 돼요.

그 불안정을 통과하는 역할을 누가 맡았다? 다윗이 맡은 겁니다. 다윗을 골리앗 죽인 걸로 역할 끝난 게 아니에요. 이제는 그 불안정한 것을 온 몸으로 겪고 통과를 해야 돼요. 마치 예수님처럼. 예수님이 남성성 세계를 그대로 통과했잖아요. 성도도 그걸 경험해야 돼요. 체험해야 돼요. 주님이 통과해야 돼요. 통과하지 않으면 부활의 세계에 이를 수 없습니다. 십자가를 유발한 세계를 통과하지 않으면 부활이란 것은 그냥 그림 속의 떡일 뿐이에요. 아무 상관없는 거예요.

그림 속으로 들어가야지요. 야 이건 진짜 좋은, 십자가란 그림 속으로 들어가야 돼요. 물론 주께서 다윗으로 하여금 그렇게 만듭니다. 그러면 여기서 통과하면서 다윗이 불안정함 속에 통과하면서 느낀 것은 뭐냐 하면 철딱서니 없던 소년 때 사람들이, “야 사울은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다 으샤 으샤” 해줄 때 그리고 하나님이 나에게 기름 부어서 너는 차기 왕이다, 대권을 쥘 사람이라고 해줄 때 얼마나 우쭐대겠습니까?

하나님께 예쁨 받는다는 것, 남들에게 시기당해도 사울이 좀 시기해도 그만큼 하나님께서 나의 신분을 완전 보장해준다는 하나의 조건으로 우리는 조건의 이유로 받아들이면 마음의 위로가 어느 정도 메움이 되겠지요.

그러나 다윗이 이렇게 불안정을 통과하면서 이거는 전에 하나님께서 언젠가는 내가 왕이 될 거라는 이게 불안정을 거치지 않고 여기서 공중으로 구름다리 건너서 그냥 도착하는 이런 본성은 다윗도 마찬가지고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에요. 복음 알고 편안하게 배불리 살다가 천당이나 가자. 이런 구름다리 건너는 이런 심보, 그 심보 주께서는 이 다리를 허락한 적 없습니다.

십자가가 지식이 아니고 실제상황 아닙니까. 그러면 십자가에 내려와야 비로소 보이는 부활이 있고 십자가를 지식으로 알 때 보이는 가짜 부활도 있고. 그런 거예요. 나는 무조건 살고보자, 그런 욕심도 그것도 탐심입니다. 그것도 우상입니다. 부활이란 이름의 우상, 천국도 우상이에요. 걷지 말고 안정에서 하나님이 허락한 불안정 속에 들어와야 돼요. 불안정 속에 들어오면 여기서 무엇을 아느냐? 다윗이 불안정 속에 들어왔을 때에 뭐냐 하면 본인이 살기 위해서 무슨 더러운 짓도 다한다.

심지어 사무엘상 21장을 잠시 볼까요. 12절부터 15절까지 누가 읽어보세요. “다윗이 이 말을 그 마음에 두고 가드 왕 아기스를 심히 두려워하여 그들의 앞에서 그 행동을 변하여 미친 체 하고 대문짝에 그적거리며 침을 수염에 흘리매 아기스가 그 신하에게 이르되 너희도 보거니와 이 사람이 미치광이로다 어찌하여 그를 내게로 데려왔느냐 내게 미치광이가 부족하여서 너희가 이 자를 데려다가 내 앞에서 미친 짓을 하게 하느냐 이 자가 어찌 내 집에 들어오겠느냐 하니라” 아멘.

그 블레셋 왕도 아기스 왕도 미친 사람은 그들에게도 필요 없지요. 왜냐? 미친 사람 들어오면 그들이 불안정하니까. 그러니까 인간은 항상 안정을 원하는 거예요. 자기 나름대로의 안정을 원해요. 원한다는 말은, 본인이 불안정한 것을 상황으로서 메우려 하고 불안정 아니 한 것처럼 허세를 떠는 거예요. 아기스 왕이. 그러면 미친 사람이 오게 되면 어떻게 해요? 자기 안정성에 방해가 되기 때문에 후딱 이 미친 사람을 쫓아내겠지요.

다윗이 그런 짓까지 한다는 말은 이 세상이 안정을 추구한다는 그 자체가 하나님께서 버린 세계에요, 이게. 하나님의 안정에 들어올 수 없는 더러운 세계인 거예요. 이 세계가. 인간은 태어나면서 자기가 문제 있어요. 불안정해요. 불안정한 데 자꾸 안정을 꾀하고 있는 겁니다. 자기의 심리적으로 불안정한 것을 어떤 지식이나 어떤 복음이나 이런 걸 총동원해서 안 그런 척하고 있는 거예요.

근데 다윗은 반대로 나가버렸지요. 다윗이 그렇게 한 것이 아니고 주께서 그런 상황을 만들어버렸어요. 다윗이 자칫하면 자기 인생 끝날 수가 있어요. 그러면 방법은 뭐냐 하면 바로 미치지 않은 내가 스스로 미친 자가 되어버리는 겁니다. 다윗이 속으로 이랬을 거예요. “내가 꼭 이런 짓까지 해야 됩니까, 주님이여.”

그 다윗이 쫓겨 다니면서 암중모색하면서 어두운 데서 살 길을 찾아 헤매는 그 가운데서 심리에 대해서 성경에선 사무엘상엔 잘 나타나지 않고 어디에 나타나느냐 하면 시편에 보면 잘 나와 있어요. 시편 34편에 보면, “다윗이 아비멜렉 앞에서 미친체하다가 쫓겨나서 지은 시”에요. 아기스 왕인데 아비멜렉이라고 돼있습니다.

시편 34편 21절, 22절에 보면 이렇게 돼있어요. “악이 악인을 죽일 것이라 의인을 미워하는 자는 죄를 받으리로다” 여기서 갑자기 악인이 나옵니다. 어렵게 설명하지 않겠습니다. 쉽게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다윗이 자기 사적으로 안정하고 싶어요. 자기가 편안히, 안정하다는 것은 뭐냐? 고생 없이 살고 싶어요. 좀 말썽 없이 살고 싶고 평화롭게 살고 싶어요, 그냥. 모든 인간 다 그래요.

그런데 여기에 불안정 속에 내가 원치 않는 인생을 가야 될 이유가 여기서 뭐가 나오느냐 하면 하나님의 원수가 나옵니다. 시편에 들어오면 뭐가 있느냐? 악인이 나오고 악인은 뭐냐? 하나님의 원수에요. 하나님의 원수라는 개념을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굳이 인간이 나서서 알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내 원수가 아니고 하나님의 원수니까요.

여자의 후손의 원수는 누굽니까? 뱀의 자손이죠. 서로 싸우게 돼있어요. 서로 싸우는 거예요. 그러나 성경에서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이 싸운다 할 때에 그거는 우리 인간들 입장에서는 내 이야기 아니지요. 나는 고요하게 살면 그만이지 남이야 하나님이 마귀와 붙들고 싸우든 말든 나한테는 그 고래싸움에 새우등 터지는 일은 미치지 말았으면 좋겠습니다. 그 정도에요.

우리가 큰 싸움에 휘말릴 이유가 굳이 없다 이 말입니다. 왜냐? 나는 소박하나마 내 나름대로의 작은 행복이라도 그러니까 가정이라도 건사해서 진짜 조그만 한 행복 있잖아요. 한 달 수입이 이천오백만 원 정도 되고 아파는 75평 정도 되고 뭘 해도 층간소음 소리 안 듣고 차는 가족끼리 귀찮지 않도록 네 식구에 네 대 정도.

아주 소박한 요렇게 살고 싶은데 그거는 나의 안정에서의 적은 나의 안정을 헤치는 나의 원수만 생각하면 그만이에요. 거창하게 하나님 원수까지 우리가 고려할 필요가 없단 말이죠. 우리 생각에는. 다윗도 마찬가지고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 불안정한 세계에 집어 들어서 이게 뭐냐 하면 누굴 만나게 해요? 주님의 원수를 목격하고 만나는 체험을 줍니다.

주님의 원수가 뭐냐? 전체 이스라엘이죠. 내가 이스라엘 중에서 나만 탈 없이 살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세상에 나만 하는 나가 전체 이스라엘 속의 일원으로서 포함이 된 상태에요. 이스라엘 전체가 하나님의 원수가 된다는 것은 생각도 못하지요. 우리는 주님의 원수에 대해서 관심도 없었어요. 나는 내 행복을 빼앗는 나의 원수만 생각하면 되지 나한테 사기 치고 돈 떼어먹은 사람 빨리 죽기를 바라고 저주받기를 바랄 뿐이지 주님의 원수까지는 머리가 나빠서 생각 못한다. 맨날 그런 핑계대지요.

사람은 자기 구역이 있고 그 구역에 들어오면 와락 물잖아요. 그러니까 사람은 개 아닙니까. 개도 지가 오줌 눈 구역은 쳐놓고 그 안에 들어오지 말라고 하잖아요. 아무리 식구지만 딸, 아들이라도 노크하고 들어온다고요. 옛날에 참 단칸방에 애들 다섯 명 있을 때 노크가 어디 있어요. 그냥 방목하는 데요. 학원이 어디 있습니까. 학교 갔다 왔나 들로 산으로 방목해서 나중에 저녁 먹을 때 되면 옷 다 시커멓고.

그때는 애 많이 키워도 저희끼리 잘 놀고 자기 먹을 팔자는 다 타고난다. 그런데 요새는 지 먹을거리를 부모 것을 빼앗는 것을 예전엔 미처 몰랐지요. 아이 하나에 3억 들 줄 예전엔 미처 몰랐지요. 3억이에요, 3억. 앞으론 비용이 점점 더 늘어납니다. 3억이 될지 5억이 될지. 결혼 끝? 천만의 말씀. 결혼으로 끝나는 게 아닙니다.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 수가 없으니까요.

주님의 원수에 대해서 우리가 몰랐던 것은 내 원수에 집착했기 때문에 주의 원수까지 관심사가 가질 않았던 거예요. 그러면 이스라엘은 뭐냐 하면 이스라엘 자기만 살던 나라가 이스라엘 아닙니다. 그건 이방나라에요. 이스라엘은 주님을 위한 나라에요. 그걸 인간들은 깜빡 자꾸 잊어버려요. 지 몸만 편하면 그게 복인 줄 알고 있습니다. 주님과 결부된 사실을 인간은 모르고 자기 단독 인생사를 계산하는 거예요, 자꾸. 다윗도 마찬가지고요.

따라서 하나님이 다윗을 다루는 방법은 숨는 겁니다. 암중모색, 숨어버리게 하는 거예요. 숨어버렸다는 말은 이게 없는 존재가 돼요. 메시아가 없는 존재가 되는 거예요. 사무엘 죽었지요, 다윗은 숨어버렸지요. 그러면 고스란히 남는 건 뭡니까? 하나님의 원수 된 이스라엘. 그 원수 된 이스라엘을 누가 손봐줍니까? 블레셋이 이방민족이 손을 봐주게 되는 거예요.

이방민족이 쳐들어와서 블레셋이 이스라엘을 이긴다는 말은 동질이다. 다윗을 잃어버리면 그것은 곧 무엇을 뜻한다? 이스라엘은 더 이상 이스라엘이 아니고 이방민족이다. 언약 상대자가 왕이 어디로 숨어들어갔습니까? 하나님의 원수라는 블레셋에 숨어들어갔어요. 마치 아기예수 가족이 원래 살던 베들레헴에서 핍박 받으니까 피신하는 장소가 나사렛이 아니에요, 갈릴리도 아니에요.

어디로 갑니까? 이스라엘 되기 이전에 있었던 나라 애굽으로 가버려요. 그러니까 호세아의 예언대로 다시 시작하는 거예요. 애굽에서 나왔지만 그 애굽을 나왔던 이스라엘이 아니고 다시 애굽으로 가서 애굽에서 내 아들을 불러내야 돼요. 그 애굽이 뭐냐? 이스라엘이라는 헤롯이 다스리는 나라가 무슨 나라냐? 그게 바로 애굽 나라입니다. 호세아 예언은 그렇게 성취되는 거예요.

예수님이 애굽으로 내려가면서 결국은 이스라엘이라는 그 유대나라 땅은 뭐가 없어요? 메시아를 잃어버린 거예요. 메시아를 잃어버리고 그 나라는 드디어 하나님의 원수가 다스리는 나라가 되지요. 그게 바로 그 당시에 유대나라고 오늘날 짐승의 나라인 아아 대한민국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도로 하여금 왜 이 세상이 짐승의 나라인지 그걸 알기 위해서 암중모색하는 역할을 맡기고 성도로 하여금 전부 다 한국 땅에 구더기처럼 숨어들어가게 만들었어요. 다윗처럼.

그러면 다윗은 뭘 또 느끼느냐 하면 내 안정성 중심의 편안하게 살고 싶고 무탈하게 살고 싶다는 나 중심의 사고방식이 깨어져버리죠. 왜? 내 중심 자체가 뭐냐 하면 하나님의 원수 된 이스라엘의 다른 사람과 똑같은 의식이기 때문에 그래요. 다윗에서는 새로움이 있어야 돼요. 나 중심이 아니에요.

이러한 현상이 이스라엘 역사 가운데 전쟁할 때 무슨 전쟁을 하느냐 하면 매복 전쟁을 여러 번 일으키죠. 자 매복 전쟁이란 게 뭐냐? 숨어있지요. 전쟁하다가 적이 숨어버렸으니까 상대방 적군들은 아주 신이 났지요. 적이 있을 때는 움츠러들고 긴장되어 어쩔 줄 모르다가 적이 막 도망을 가니까 이건 뭐 이런 신바람이 어디 있어요. 그때는 칼 쓰는 자나 못 쓰는 자가 어중이떠중이 전부 나서서 용감한 군인 흉내를 다 내잖아요.

그때는 “게 섰거라!” 이렇게 하지요. 진짜 서면 안 돼요. 진짜 서면 움찔거리니까. 도망가는 걸 뻔히 보고 게 서라 한다고요. 하여튼 영화 보면 짜증나는 것이 있을 때는 큰소리 못 치고 도망칠 때는 게 섰거라, 이러고 있다고요. 꼭 경찰은 신고하면 나중에 끝 장면에 나오고 주인공은 혼자 얻어터지고 난 뒤에 경찰들 오고.

영화 보면 답답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본드 걸 같은 경우에 제임스 본드 말 듣고 가만있으면 되는데 “안 돼요. 꼭 가겠어요.” 하다가 인질로 잡혀서 본드는 두 배, 세 배 욕을 먹고. 깨끗하게 양복에 피 안 묻히고 끝날 걸 괜히 본드 걸 때문에 또 꼴에 남자라고 여자 위한다고 해서 온갖 고생 다하고. 끝나고 난 뒤에 뽀뽀하면 뭐 합니까 망가져버렸는데.

뭐 자기를 미화시킨다 할까요. 자기는 멋있게 포장함으로써 나는 나로 만족하려는 그런 성향들이 있어요. 그게 하나님의 원수인 줄 인간은 몰랐던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다윗으로 하여금 적군에 미친 척까지 다 해야 돼요. 그러면 자기 꼴이 말이 아니죠. 그때 보이는 것이 뭐냐 하면 주의 원수는 내가 어찌할 바가 되지 못한다. 시편 34편 다시 봅시다.

“악이 악인을 죽일 것이라 의인을 미워하는 자는 죄를 받으리로다” 다시 말해서 이렇게 할 때에 여기 다윗이 아비멜렉 앞에서 미친체하다가 쫓겨나서 지은 시거든요. 그러니까 이러한 자기가 할 수 있는 힘이 하나도 없는 상태가 되니까 비로소 내가 악인을 친다는 것이 주제 없는 생각인 것을 다윗이 알게 된 겁니다.

내 자체가 뭘 나설 입장이 못 된다는 걸 아는 거요? 이게 그동안 몰랐던 나의 안정성입니다. 나의 노력과 수고에 어떤 의미도 가미하지 않는 것, 내가 아무짝도 쓸데없다는 사실을 발견할 때 이게 새로운 안정성 계열에 편입되는 상황입니다. 다윗이 이걸 안 거예요. 유감없이 하나님의 신앙의 시를 남긴 가사를 쓰기 시작합니다. 무수한 가사를. 작사가 다윗, 작곡가 다윗. 하여튼 돈은 지가 다 받아요. 저작권 지가 다 받아요. 작사, 작곡 지가 다 해버렸어요.

이게 터져 나와요. 나를 위한 하나님이 아니란 사실을, 주님은 자기 적을 주목하고 있지 나를 주목하고 있지 않는다는 거예요. 나는 주님의 전쟁에 뒤쳐져 나온 결과물이지 나를 위한 하나님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여기서 다윗은 장차 예수님과 중첩돼있어요. 다윗을 이야기하면서 사실은 다윗 이야기가 아니고 장차오실 진짜 하나님의 왕 되실, 다윗이 이미 왕이지만 그거는 유사 왕, 폼의 왕이고 진짜 왕과 다윗 왕이 중첩돼있어요. 다윗은 왕의 상표, 브랜드에요.

알맹이는 뭐냐? 다윗 뒤에 숨어있어요. 그러니까 시편을 읽어보시면 시편의 모든 내용은 다윗의 이야기가 아니고 예수님 이야기입니다. 그거 알고 시편 보시면 시편 진도 그냥 나갑니다. 여기서 나라는 것은 전부 다 예수님으로 바꿔 넣으세요. 다윗 빼고 예수님 집어넣고, 나 빼고 예수님 집어넣으세요. 우리네 인생도 그래 사세요. 오늘 뭘 할꼬? 그것 빼버리고 예수님 집어넣어버리세요. 주님이 주님 자신의 일을 하는 것, 그게 바로 거룩입니다. 내가 살아 있는 것이 아니고 주님이 내 안에 살아 있는 그게 바로 거룩한 사람, 성도라는 거예요.

그러면 성도의 복음을 방해하는 건 누굽니까? 나지요. 나는 세상 돌아가는 건 모르겠고 나만 편하면 된다는 그것이 복음을 방해하는 거죠. 이게 주의 원수가 되는 겁니다. 나만의 안정을 취하는 것, 고생 덜 하고 그냥 편안하게 무탈하게 살고자 하는 그것, 그러면 그 사람은 시편 속의 다윗과 전혀 상관없는 사람이 되는 거죠.

그래서 그런 관점에서 보게 되면 우리가 아침에 일어나서 빨래 다 해놓고 월동준비 다 해놓고 오늘 할 일이 없네, 이러면 청년이 찾아와서 뭐라고 하늘 줄 아세요? “네가 고난 받는구나.” 그게 고난이에요. 고난치고는 에너지 소비가 좀 적지요. 그게 고난 받는 거예요. 나를 빼는 것, 내가 빼서 할 게 없다는 거예요. 김장 하는 데 내가 할 게 없어요. 그냥 칼 들고 무 썬 것 외에는 할 일 없을 때 그 사람은 지금 김장이라는 고난 받고 있는 거죠. 고난을 즐거워할 수밖에 없는 거예요.

그래서 시편 35편 봅시다. 35편 1절에 다윗의 시지요. 여러분 시편 34편, 35편 연속되는 줄 몰랐지요. 막 연결돼요. 전부 다 시편 전체가 예수님이 이야기기 때문에 내 이야기 아니기 때문에 내 안에서 주님은 34편, 35편을 지금 내 앞에 우리 안에 작동시키고 있습니다. 우리는 다윗처럼 기계니까요. 기계는 자기 자존심 세우면 안 돼요. 그냥 무정한 기계에요.

“여호와여 나와 다투는 자와 다투시고 나와 싸우는 자와 싸우소서” 중복됐으니까 일차적으론 다윗이죠. 이차적으론 누굽니까? 예수님입니다. 일차적으로 다윗이니까 다윗은 지가 싸울 의사도 없는데 자꾸 싸워. 사울이 자꾸 자기를 공격해요. 사울은 나를 공격한 게 아니고 배후에 있는 주님 메시아를 공격하는데 사울은 뭐냐 하면 지금 불안정 속에 있어요.

사울은 어떤 불안정 속에 있느냐? 사무엘 떼버리고 다윗 떼버렸음에도 불구하고 자기를 이스라엘의 왕으로 보는 겁니다. 사울이 왕이 아니면 이렇게 불안정할 이유가 없어요. 사무엘상 28장에 나오는 신접한 여인 있지요. 엔돌에 신접한 여인을 찾아갈 이유가 없다고요. 사울이 심리상태를 우리가 놓치면 안 돼요. 왜냐? 오늘날 현대인들의 심리상태에요.

이유도 없이 불안정해요. 아침에 눈만 뜨면 불안정해요. 나의 선택이 내 마음에 들지 않아요. 그래서 항상 화가 나있어요. 앵그리 버드처럼 전부 다 화나 있어요. 퇴근한 남편이, “아는? 밥 줘.” 요새 같으면 아는 없으니까, “개는? 밥 줘. 물 줘. 자자.” 돈 벌어왔다고 돈 버는 데 고생했다는 거예요. 내 안정성 하기 위해서 이런 힘든 진짜 못할 짓까지 다했다 이 말이거든요.

그러면 화가 난다는 말은, 자기 빼놓고 다 적이 되지요. 다윗은 거기서 벗어나는 거예요. 이게 내 적은 내가 없는 이상은 나한테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아요. 그래서 시편 35편에, “여호와여 나와 다투는 자와 다투시고 나와 싸우는 자와 싸우소서”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철저하게 나를 이용한 거예요. 나에게 기름을 부어놓았어요.

이스라엘에 왕을 세웠다는 말은 이스라엘이 있다는 말이에요, 없다는 말이에요? 왕 있으면 뭐가 있다? 나라가 있다는 말이죠. 그런데 나라는 지금 블레셋에 저버렸는데요? 나라가 없는 데요? 지금 패배했어요. 자기는 어디 숨어있습니까? 지금 블레셋 나라의 신하로 행세하고 있어요. 오늘 27장 본문이 그겁니다.

블레셋 왕이 말하기를 이스라엘 차기 왕이 자기 나라에 망명했다면 이게 블레셋 왕 입장에서는 앞으로 할 것은 분명해졌어요. 뭐냐? 그 나라를 자기에게 접수하면 그만이에요. 침략해서 빼앗으면 그만이죠. 그러니까 전쟁준비에 나서는 거예요. 아니 이미 왕이 자기한테 투항해서 망명했다면 전쟁하나마나 끝난 거지요. 아기스 왕은 신난 거예요.

만약에 북한의 김정은이 우리나라에 귀순해보세요. 김정은한테 “위원장 당신 앞으로 뭐할래?” “나 냉면집 할래.” “됐어. 냉면집 차려줄게.” 한다면 북한문제 절로 풀리죠. 끝난 문제잖아요. 사울은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인 사람이 그렇게 칭송받던 사람이 자기한테 망명했기 때문에. 그러면 이스라엘은 세상사람 보기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이 상태에서 가장 안정적인 사람은 사울 왕이 아니고 블레셋 왕 아기스지요. 그런데 아기스 왕은 삼키지 말아야 할 자를 삼켰다는 사실을 몰랐던 겁니다.

그게 바로 사무엘상 27장 8절에 보면,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올라가서 그술 사람과 기르스 사람과 아말렉 사람을 침로하였으니 그들은 옛적부터 술과 애굽 땅으로 지나가는 지방의 거민이라 다윗이 그 땅을 쳐서 남녀를 살려두지 아니하고 양과 소와 나귀와 약대와 의복을 취하고“ 여기 블레셋이라는 적을 이용해서 아말렉이라는 적을 치고 있습니다. 그러면 아말렉 적을 치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에 의하면 그 땅에 있는 모든 이방민족은 이스라엘 속에 복속돼야 돼요. 이게 하나님의 예언이기도 하고 이스라엘이 해야 될 일이기도 하고요.

아말렉을 치기 위해서 무엇에 의지해서 칩니까? 블레셋이라는 그러한 안정성을 받침대로 사용해서 아말렉을 쳐버리죠. 그러면 이것은 이스라엘이 해야 될 고유한 기능은 멈췄어요, 안 멈췄어요? 계속 진행되고 있는 겁니다. 그러면서 이긴 이것을 다윗은 블레셋 왕한테는 함구하고 있습니다. 말을 안 하고 있습니다. 왜냐? 말을 해버리면 우리가 사자새끼를 길렀구나, 이렇게 돼버려요.

그러니까 이게 뭐냐 하면 하나님의 원수를 다윗 보고 치라는 말이 아니고요. 하나님의 원수를 다윗을 통해서 노출시키는 일을 주께서 하셔요. 언제까지? 예수님 오실 때까지. 우리가 나대지 마세요. 우리가 마귀 이긴다고 나대지 마세요. 주께서 친히 원수를 이미 쳤고, 쳤다는 사실을 확인한 입장에서 우리를 사용하기 때문에 그 사용하려면 우리는 시건방지게 우리가 원수 이긴다고 나대면 안 돼요. 우리가 유혹을 이기려고 나대면 안 돼요.

왜냐하면 다윗 같은 입장에서는 칠 수 있는 거점은 누가 보장해준 거예요? 안정적인 블레셋이 보장해준 거잖아요. 그럼 이 세상이 그다지 혼돈상태가 아니고 정치적으로 안정돼있다는 말은 베드로전서나 로마서 13장 말씀처럼 이 세상의 권력으로 인하여 복음을 전파하기 위함으로 짐승의 나라를 살짝 우리가 지금 이용하고 있는 겁니다.

정치적으로 사회적으로 경제적으로 안정이 되게 되면 이것은 복음 전하도록 하나님께서 기횔 준 거예요. 열어준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는 이중첩자지요. 이 세상에 잘 붙는 것 같지만 사실은 하늘나라의 첩자가 되는 겁니다. 007이에요. 그렇게 이런 일을 한다는 것은 다윗 입장에서는 얼마나 자기 자신의 처지가 비참하겠어요. 불안정하지요. 자기가 왕으로 칭찬받던 그 시절이 그리워지겠지요. 그러나 다윗은 이미 끝난 상태에요. 이제 과거의 나 혼자만의 안정성과 혼자만 즐길 수 있는 그 좋았던 시절은 더는 오지 않습니다.

아까 매복 전쟁을 좀 더 이야기해보겠어요. 전쟁에서 매복한다는 것은 상대의 기를 세우는 겁니다. 상대의 기를 세우면 상대는 건방지겠지요. 하나님께 전쟁할 때 정면 싸움을 하는 게 아니고 매복 전쟁을 하게 한다는, 매복 전쟁 여러 군데 나오지만 여러분 잘 아시는 이야기만 하나만 하겠어요. 그게 아이 성 칠 때에요.

아이 성 칠 때 처음에는 이스라엘이 여리고 쳤다고 기세등등하게 갔다가 서른여섯 명 죽었잖아요. 두 번째는 전쟁을 어떻게 합니까? 누가 기가 셉니까? 아이 성이 여리고를 이겼다는 이스라엘, 여리고 성을 이긴 그 강팀을 조그마한 우리 팀이 이겼으니까 얼마나 우리 스스로 자랑할 만한다고 여기겠습니까.

그런데 결국 매복 전쟁을 통해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치고자하는 이야기는 뭐냐 하면, 교만한 자가 하나님의 원수의 특징이다, 이렇게 되지요. 허세, 허풍 이것은 인간 자체의 불안정 때문에 감추기 위해서 나올 수밖에 없어요. 하지만 그 나왔던 그 모습 교만이고 건방지지요. 전쟁에서 내 힘 가지고 이기는 게 아니고 상대방이 저희들이 끌어 모은 힘이 상대방 스스로 자기를 파멸시키는 쪽으로 몰아세우는 그 전쟁 방법이 무슨 전쟁이냐? 바로 여호와 전쟁입니다.

기드온 알지요. 기드온 전쟁 때 기드온에게 칼이 있었습니까, 없었습니까? 기드온의 칼은 거의 없고 삼백 명 남았는데 그들이 든 것은 칼이 아니고 횃불과 항아리에요. 자, 횃불과 항아리, 횃불이라는 빛 에너지는 항아리라는 어둠 속에 갇혀있어요. 암중모색이에요. 이 모습 자체가 여호와의 전쟁을 함축한 거예요. 그대로 보여준 겁니다.

그런데 미디안 군대는 십삼만 오천 명인가? 하여튼 십삼만 오천 명 대 몇 명입니까? 삼백 하지만 삼백 한 명, 기드온은 포함해줘야 돼요. 삼백 한 명 대 십삼만 오천 명, 이게 말이 돼요? 그래도 삼백 명 있잖아, 하잖아요. 약분해보세요. 나눠봅시다. 이게 450:1이에요. 여기서 한국의 국군 한 명 놔두고 중공군, 인민군 사백오십 명 둘러서지도 못해요. 자리가 없어서 뒤에 중첩해서 또 서야 돼. 해보세요. 이걸 이겨냅니까? 못 이겨내지요.

사사기 봅시다. 몇 명인지 자꾸 찜찜한데요. 제가 자꾸 확인해봐야 앞으로 덜 잊어버리죠. 이게 사사기에 나오거든요. 사사기 8장 10절, “이 때에 세바와 살문나가 갈골에 있는데 동방 사람의 모든 군대 중에 칼 든 자 십 이만명이 죽었고 그 남은 일만 오천 명 가량은 그들을 좇아 거기 있더라”

십삼만 오천 명이 있었어요. 십삼만 오천 명이 다 죽은 거예요. 삼백 명에게. 그 죽이는 에너지, 칼 힘은 누구 칼입니까? 자기들끼리 미쳐서 자기들을 찔렀잖아요. 그 칼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 기드온의 칼이라 해요. 적의 칼이 여호와의 칼이에요. 세상에 적들이 갖고 있던 무기가 여호와의 무기에요. 하나님의 원수 됨을 드러내는 그 일을 이스라엘을 통해서 할 때 이스라엘은 굉장히 미약하고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나타나는 겁니다. 이 소자한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다. 마태복음 25장의 말씀처럼.

그 소자를 멀리 찾지 마시고 본인이 소자 되면 돼요. 본인이~ 하는 그 사람 아니고 본인이 부족합니다, 이것 말고 진짜 우리는 기존의 세상 사람들이 앉는 그 안정성 있잖아요. 여유롭고 잘 살고 아무 탈 없고 가정 잘 살고 죽을 때도 고난이 없고 매사가 만사형통하고 그런 안정성을 원하지만 주님께선 우리로 하여금 그게 얼마나 안정성이 아니고 얼마나 불안한가를 실제로 이 땅에 삶을 살게 합니다. 성도로 하여금. 그래서 우리를 오늘도 안 죽게 만든 거예요.

세상의 심리, 정신적인 불안정을 너도 혹독하게 겪어라. 주님도 이걸 통과했어요. 우리로 하여금 그 불안정한 삶을 봐야 됩니다. 거기 들어가게 되면 우리는 온갖 시편에 나오는 내용 있잖아요. 온갖 것 다 들어옵니다. 하나님 뭐하십니까, 나를 안 도와주시고. 하나님 나는 힘이 없으니까 주께서 내 대신 원수가 되게 하옵소서. 전부 다 내 중심으로 시편 이야기를 내가 옛날 괜찮았던 그때 그 시절로 되돌아갈 수 있는 방법을 시편 다 찾는 거예요.

나중에 알고 보니까 시편 그 이야기가 내가 아니고 너, 나가라고 나가리 시켜버리고 배후에서 주님이 하나님이 아들에게 한 이야기를 내가 시건방지게 인터셉트해서 내가 중간에 끼어서 이게 나한테 올 복인 줄 알고 내가 막 받는 거예요. 여러분들이 이러한 이야기의 확실한 증거는 시편 1편에 보면 잘 나옵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이게 누구겠습니까? 예수님 빼놓고 누가 있습니까? 날마다 묵상하고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않으신 분 누구밖에 없어요? 예수님이 오만하지 않다가 아니라 예수님이 와야 오만하지 않음이 규정이 돼요.

지가 겸손 떨면서 이건 오만한 상태가 아니다. 이래 하는 것은 그거는 니 생각이고. 주님이 와야 모든 성경 개념은 비로소 규정이 된다고요. 이게 정답이야. 이게 학교에서 참고서 제일 마지막에 뭐가 있습니까? 수학 같은 경우에 제일 마지막에 정답 나와 있지요. 그 정답 자리가 주님의 자리에요. 우린 문제 푼다고 빨리고 보고 하지요.

그것 봐도 실전엔 약한 이유가 정답을 알기 때문에 약한 거예요. 꾸준히 정답이 아닌 것을 밟아야 내가 정답이 아니라는 이 자체가 정답인 것을 우리는 왜 예전에 미처 몰랐어요? 내가 정답을 갖지 말아야 하는 존재인 것을, 그게 정답인 것을 사전에 왜 몰랐냐 말이죠. 왜 자꾸 나의 행복에 미련을 갖느냐 말이냐. 나의 애착, 나의 행복, 나의 평안 이건 뭐 원수가 평안하면 안 되잖아요. 망할 때 같이 망해야지요. 그래서 우리가 성경을 보면서 우리가 주님께 진노한다 하면 우린 납득이 안 되는 거예요.

이건 시간 좀 가더라도 찾아봐야 돼요. 골로새서 3장 5절 어제 설교도 약간 나왔지만 이런 말씀 있어요.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라고 돼있지요. 6절 한 번 보세요. 이것들로 인하여 그 다음에 뭐가 임한다고 했습니까? 하나님의 진노지요.

아니 이런 일로 진노하시면 도대체 앞뒤가 연결이 안 되는 거예요. 인간인 이상 그 정도 마음으로 그럴 수 있지 왜 이것까지 진노해버리면 진노 안 당할 사람 없겠습니다, 라고 우리가 입이 대발 나오는 거예요. 갑자기 하나님을 원망하는 거예요. 우리가 천사입니까, 인간인데 죄 많은 인간이 그 정도 했다고 그걸 보고 갈구면 하나님끼리 축구해야지 동네축구에서 골 넣고 잘했다 하시면 안 되잖아요. 좀 레벨을 맞춰서 오시면 안 되겠습니까, 하고 주님을 밀어낸다고요.

그게 아니에요. 우리는 우리 자신의 안정성에 지금 미쳐있어요. 거기에 푹 빠져서 하나님의 뜻이 뭔지 안중에 없어요. 관심도 없고 나만 행복하면 그만이에요. 교회 다니고 열심히 기도해서 나만 행복하면 그만이다. 이런 것을 주께선 거기서 빼내주는 겁니다. 그게 거짓 안정인 거예요. 거짓 안정에서 벗어나서 진짜 주님의 계열에 주님의 나라에 들어가게 하시는 겁니다. 주님의 안정성에.

그러면 주님의 안정성에 들어가는 방법은 뭐냐? 우리로 하여금 주님으로 인하여 주의 성령 받았기 때문에 불안정 속에 강제로 우리가 처해집니다. 그러면 내가 이 정도까지 굳이 살아야 되나, 하는 자존심 있잖아요. 다 망가져요. 가게 하면서 자존심 상하고, 직장생활 정말 더러워서 사표 낸다고 니가 까기 전에 내가 깐다는 식으로 폼 나게 딱 15센티면 사직서 내는데 그때 전화가 오네. 아내한테. “왜 여보.” “나, 임신했어.”

임신했다는 순간 15센티 남겨놓고 그 낙하지점을 그림자만 드리우고 빨리 회수해버려요. 사장이, “김 대리 무슨 문제 있어?” “아니에요. 고맙다고 인사하러 왔습니다.” “내가 꼭 이렇게 침까지 흘리면서 미친 짓해야 되나.” 해야지요. 내가 하나님의 원수와 한 통속인 것을 내가 그동안 나를 몰랐던 거예요. 내 안정성을 취하겠다는 것이 주님의 복음을 방해한다는 사실을 그동안 내가 몰랐던 겁니다.

우리가 심리적으로 불안정할 때 마음껏 불안정하세요. 그것도 주님의 코스입니다. 그것과 주께서 구원하는 것과 무슨 상관있습니까? 불안정한 것은 내 일이고 그런 나를 이미 구원한 것은 주의 일이고. 내가 불안정하다고 주의 일에 영향력을 줄 수 있는 게 아니고 또 안정된다 해서 내 구원에 보탬이 되는 것도 아니고. 계열이 달라요.

주께서 나로 하여금 너는 죽을 때까지 실컷 불안정한 즐거움을 누려라. 이게 즐거울 거리가 되는지 모르겠습니다만. 혹독한 상사 만나서 청춘을 다 뭉개져라. 그런 내 귀한 젊은 세월을 잘못된 선택으로 인하여 다 뭉개지고 하지만 다시 돌아올 안정성을 찾지 마세요. 같이 망가지는 것이 마땅함을 아는 게 새로운 안정성입니다. 기쁨이고 감사함입니다. 주의 이런 혜택을 주의 백성 아니면 우리의 영원한 왕이신 주님이 지금도 함께 하지 않으면 주님의 체험을 할 수 없는 겁니다.


10분 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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