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강의

생명의 기계

아빠와 함께 2022. 3. 2. 08:04

대전-76강 사무엘상30장7절(생명의 기계)20220228a
(강의:이근호 목사)


사무엘상 29장을 하겠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그 모든 군대를 아벡에 모았고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스르엘에 있는 샘 곁에 진 쳤더라” 그렇게 시작하지요.

사무엘상이란 성경, 그리고 성경 전체, 이게 의미를 가지려면 두 개를 다 가져야 돼요. 내 쪽과 남의 쪽, 나와 타인, 타인은 남이란 뜻입니다. 성경을 바쁜 시대에 굳이 봐야 되는가? 그렇게 생각할 수 있겠습니다만 왜 성경을 봐야 되느냐 하면, 나는 내가 있으면 여기에 남에 하나님이 이쪽에 있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이 세상에 인구가 나 혼자 아니잖아요. 여러 명이잖아요.

여러 명이라면 왜 나 말고 다른 사람이 있나? 그걸 생각해봐야 돼요. 나만 있는 것과 나 말고 다른 사람이 함께 있는 것과 그렇게 될 때 이 세상은 어떻게 달라지는가? 나만 있으면 나에서 세상이 이렇게 만들어지거든요. 요걸 그림으로 그리면 내가 있으면 이 세상 모두는 나를 위한 나의 세계에요.

만약에 이웃이 이사를 왔다. 촌에 시골에 혼자 살려 하는데 일 년 지나고 난 뒤에 이웃이 이사를 왔다, 신경 많이 쓰이지요. 조용하게 살려 하는데 이웃이 왔다. 그러면 내 영역에 침범하지 않을 수 없어요, 남이. 난 조용하게 살고 싶은데 그 이웃이 부부싸움을 하더라. 그러면 그 소리가 나까지 오잖아요. 이건 가만있을 수 없지요. 같이 조용하게 삽시다, 그러든지 그쪽이 담배를 피운다, 담배연기가 내게까지 올라온다. 또는 개를 키운다. 개가 도사견이다. 입마개도 없고 줄도 매질 않는다. 촌이라고 함부로. 그런 경우 신경 되게 쓰이지요.

개보다 신경 더 쓰이는 것은 이웃에 노인 혼자 왔을 때 이것 신경 쓰입니다. 컴퓨터 다 봐줘야 돼요. 휴대폰 교육 다시 시켜야 됩니다. 틈만 나면 물어보러 오는 거예요. “이것 뭐고? 이거 어떻게 하고? 아들한테 편지 왔는데 좀 읽어줘. 난 눈이 어두워서. 허리가 아픈데 병원에 차 좀 태워 줘.” 개는 그러진 않잖아요. 개나 고양이는 그러지 않지요.

서울에 시집 안 살려고 촌에 왔는데 시어머니 군이 더 많아. 전부 다 시어머니에요. 나이가 육십 다섯인데 청년회 회장, 이장 만들어놨어요. 전부 다 팔십 아홉, 팔십 일곱, 팔십 여덟 이러니까 육십 다섯이 청년회 회장, 이장하고 있어요. 자기 일하기도 바빠. 한 사람 데리고 읍네 갔다 오면 또 다른 사람 데리고, 또 한 사람 도와주면 저 영감은 도와주고 나는 안 도와준다고 삐지고. 도대체 촌에 사는 게 모기와 파리 들끓는 것만 문제점이 아니고 노인들 들끓는 것도 문제점이라. 누가 촌이 좋다고, 흙에 살리라고 누가 이야기 했나. 그 사람 죽었지만. 흙에 살리라고 누가 함부로 경솔한 소릴 했어요, 흙에 살리라고?

세상이라 하는 것은 혼자보다도 남이 있으면 그 남이 자기 세계로 내 세계를 침범하는 거예요. 남이 한 사람이 아닙니다. 여러 사람이 되지요. 그리고 내가 자식을 낳으면 자식이 내 영역을 침범하고. 결혼도 마찬가지고. 문제는 이런 사람들이 같은 인간이기 때문에 피할 수도 있고 무시할 수도 있고 욕해서 관계 끊을 수도 있는데 하나님이 남이 될 때는 여기서는 성경을 보셔야 되는 겁니다.

어차피 천지창조 누가 한 줄 우리가 모르니까 이 세상 누가 있는 줄 모르니까 사람들은 이 세상과 거기에 대한 타인 하지 말고, 내가 만들지 않은 내가 아닌 다른 사물체, 내가 만들지 않은 사물체, 예를 들면 어떤 게 있을까요? 해, 달, 별. 이것 왜 있어요? 내가 안 만들었는데? 내가 안 만들었는데 이게 있다는 말은 단순히 조수간만의 차 정도가 아니고 이걸 만드신 분이 따로 있을 것이고, 혹시 내가 죽게 되면 그분을 만날 수도 있고.

그럴 때 나는 어떤 대책이 있어야 되지 않느냐 하는 겁니다. 그 증거로 인간에게는 양심이라는 게 있는데요. 혼자 살게 되면 남하고 살든지 혼자 살게 되면 인간은 알 수 없는 양심이라는 것이 나보다 더 센 형님이 되는 겁니다. 내가 하고 싶어도 양심이라는 것이 명령을 내려요. “그러지 마! 그 짓은 짐승 짓인데 네가 어떻게 그런 짓을 해.” 자기 속에서, “너, 누구야?” 하면, “나, 네 양심이야. 너 나의 명령어길 거야? 그래서 네가 짐승 될래?” “아니야. 그건 아니지.”

자기가 자기와 대화하면서 양심이란 게 뭐로 구성되느냐 하면 선악지식으로 돼 있어요. 선과 악에 대한 구분, 이걸 이성적 판단이라 하는데 선과 악을 구분하는 거예요. 선/악과 비슷한 말이 좋다/나쁘다. 이걸 구체적으로 나한테 이익이 되나, 나한테 손실이 되나. 이런 식으로 계속해서 구분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만약에 손실이 되고 나쁘게 되고 악하게 될 때 우리는 양심에 호소해서 사태를 전환시키려 하는 겁니다.

이게 내가 만든 게 아니고 뭔가 태어날 때 들어와 앉아있어요. 내 속에 내가 어쩔 수 없는 나보다 더 센 나보다 더 말발이 센 그게 들어와 있다. 로마서 7장에 나오는 입니다. 하나님의 율법이 양심이 되어서 우리에게 지시와 명령을 내릴 때 우리는 하나님을 안 믿는다고 그렇게 해도 우리 속에는 양심대로 살고 싶은 생각이 되는 거예요.

이걸 정리한 것이 뭐냐? 동양철학이다. 유교, 맹자, 공자에 이런 게 나와요. 인의예지, 인간이 우물에 빠진 사람을 그냥 지나치지 않고 도와주는 측은지심이 있다. 이런 식으로 해서 삼강오륜 비슷하게 해서 칠정(희(喜)·노(怒)·애(哀)·구(懼)·애(愛)·오(惡)·욕(欲)) 같은 게 있어요. 네 가지의 이성과 일곱 가지의 감정 있는데 이황 등 동양철학에 그런 것 하고 있어요. 그러면서 인간 속에 신이 있다.

그리고 인간 속의 신과 자연 속의 신이 동일한 신이다. 동양철학에서는 그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럼 신은 어떻게 하느냐? 신은 아무도 모르지만 신을 우리보다 먼저 만난 사람이 있다. 그게 누구냐 하면 죽은 조상이다. 따라서 조상을 잘 섬기면 조상이 신에게 빽을 써서 조상 잘 섬겼다는 보상으로 현세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도움을 준다. 이 내용을 현대적으로 하면, 도를 아십니까, 하는 천도제 이론이에요.

그리고 자연에 어떤 질서가 있고 신의 질서가 있다, 이거는 뭐냐? 점성술, 별자리 보고 점치는 것, 타로 점, 주역, 그리고 고대 바벨론부터 했던 별 보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특정, 모든 것이 신의 세계 속에서 우리는 그 신을 나 말고 나를 만드시고 창조하시고 세상의 해와 달과 별을 만드신 그분을 우리는 잘 구슬려야 되고 잘 상대해야 된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이집트의 종교도 마찬가지고요. 그렇다 이 말이에요.

그런데 현대인은 이걸 그냥 타인이라 하는 거예요. 나 말고 자아 말고 타인이 따로 있는 겁니다. 그러면 나 말고 타인이라 할 때 어떻게 연결되는가? 이거는 언어로 연결되겠지요. 지금 다윗과 블레셋 나오지요. 블레셋 왕 이름이 아기스에요. 아기스 왕과 다윗을 나로 보면 블레셋은 다윗 앞에서 뭐가 되느냐? 남이 되지요. 이 둘 사이에 뭐가 형성되는가? 언어가 형성돼 있어요.

예를 들면, 물어볼게요. 혼자 살면서 이런 글자를 써놨어요. 문을 천천히 열고 닫아주세요. 문이 뻑뻑해요. 분명히 여기에 집사님 혼자 살지요. 혼자 사는데 언어가 왜 필요합니까, 글자가 왜 필요하지요? 혼자 사시는데. 그렇지요. “집사님, 화장실에 왜 적어놨지요?” 다른 사람이 있지요. 저는 뻑뻑하다는 이 단어, 맞춤법이 딱 맞는, 공부 많이 한, 어려운 단어인데.... 언어를 통해서 타인과 관계가 되겠지요.

그러면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하나님이란 남과 우리 사이에 그 언어가 있는데 그 언어가 바로 이 두꺼운 성경입니다. 바로 언어를 통해서 하나님과 인간이 소통이 성사되도록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 거예요.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하나님께서는 남과 사용하는 그 언어를 그대로 사용했다는 거예요. 아람어, 히브리어, 헬라어 그대로 사용했다는 것이 얼마나 하나님께서 겸손하게 하신 거예요?

그 언어를 오늘날 우리는 말씀이라 하고 구약 때는 이걸 율법이라 합니다. 모세가 가져온 십계명, 그 글씨를 누가 썼느냐? 하나님이 직접 글씨를 썼어요. 천사와 하나님 사이에는 글씨가 필요 없잖아요. 인간 하고 글씨를 썼다는 말은 그만큼 하나님이 인간 수준만큼 낮출 마음 준비가 돼 있다는 겁니다.

율법이란 그 글씨, 언약, 율법을 다른 말로 모세언약이라 하지요. 언약이 다가 아니에요. 이게 어디까지 가느냐? 이거는 말로 하다가 아예 말 자체가 되는 어떤 분이 오셔요. 태초의 말씀이 육신이 되는 거예요. 말씀이 사람이 되는 거예요. 말씀이 사람 되는데 그건 신약에 오면 그렇고 구약에, 신약에 말씀이 육신이 된다는 인격화 되는 그 와중에 여기 다윗이 등장합니다.

다윗이 등장하면 30장 7절 봅시다. “다윗이 아히멜렉의 아들 제사장 아비아달에게 이르되 청컨대 에봇을 내게로 가져오라 아비아달이 에봇을 다윗에게로 가져오매” 에봇이란 걸 가져오라 했어요. 에봇은 복사한 것 보셨지요. 에봇 그림 있지요. 여기 보면 마네킹 같은 창백한 대제사장 있고요. 여기에 에봇을 입었는데 그 에봇에 판결흉패란 게 있지요. 찾았습니까? 가슴팍에 있는 방탄복 비슷한 거요. 그리고 호마노는 보석이름이고 그 위에 견대, 계급장 다는 견장 하듯이 견대, 여기에 뭐가 들어가느냐? 열두 지파의 이름이 들어갑니다.

그래서 에봇을 가져오라는 이 말은 말씀을 착용한 말씀으로 무장된 존재의 등장이죠. 그 당시 다윗 당시에 또는 제사장 당시에. 이것을 이렇게 보겠습니다. 이걸 말씀 기계. 걸쳐있는 그 에봇이란 옷 전체가 말씀을 압축하고 말씀의 내용이 들어있고요 압축했다는 것은 나중에 한 꺼풀 두 꺼풀 풀리면서 이스라엘 역사를 형성합니다. 실타래 하나 끄집어내면 끄집어낼수록 시간이 흐르고 그 시간이 이스라엘 역사로 계속 이어져서 마지막에 말씀이 다 풀려버리면 계시가 다 풀려버리면 그건 예수 그리스도가 되겠지요. 하나님이 되겠지요.

그래서 이 말씀을 착용한다는 자체가 결국 말씀을 착용한 다윗은 제사장은 기계가 돼야 돼요. 아까 마네킹이라 했는데 마네킹보다 더 심한 말, 기계. 기계는 자기의 자유의지 같은 이건 하나님이 인정 안 하겠지요. 사무엘상 29장에 긴 내용이 나와 있습니다만 간단하게 말하면 다윗은 블레셋의 보호를 받게 돼 있었는데 블레셋 사람들이 지금 누구와 싸웠느냐 하면 이스라엘 북쪽에 갈릴리 바다 근처입니다. 그쪽으로 나아가서 이스라엘과 전쟁을 하게 됐어요.

전쟁을 하게 되면 다윗의 입장이 난처해진 거예요. 자기는 귀순한 사람이란 인상을 줬는데 왕은 귀순한 자니까 전에 있던 이스라엘을 적으로 간주할 게 뻔하고 블레셋도 이스라엘의 적이고 다윗도 이스라엘에게 쫓겨난 적이 되니까 우리와 한 패 먹으면 저 적을 쳐부술 수 있다, 이런 거죠. 쉽게 말해서 윤석열과 안철수 단일화하면 이재명 넉넉하게 이길 수 있다, 그런 전략이죠. 확 오지요.

그런데 안철수는 이재명과 적이 아니고 역시 윤석열보다 아직도 이재명을 더 선호하고 있다고 칩시다. 세 명 다 기계니까 그 본심은 알 필요도 없고요. 하나의 하나님이 움직이는 대로 움직이는 기계니까 인간은 본심이란 게 없어요. 왜 본심이 없느냐 하면 지도 지 본심을 몰라요. 어떤 상황에 어떻게 달라질지 모르는데 무슨 본심이 있습니까. 취중본심? 말도 안 되는 소리에요. 소주 먹을 때와 막걸리 먹을 때 달라지면 무슨 취중본심이겠어요. 다 다르지요. 누구와 마시느냐에 따라 본심이 다르면 그게 무슨 본심이겠습니까.

그래서 다윗 입장에서는 난처했는데 왕은 다윗이 진짜로 귀순한 줄 알고 자부해서 잘 됐다 이참에 원수를 갚으라는 식으로 전쟁에 몰아넣는 거예요. 이스라엘 멸하는 데 동참을 할 난처할 처지에 있습니다. 그런데 누가 반대하느냐 하면 아기스 왕 부하들이 정신 차린 거예요.

사무엘상 29장 5절에 보면, “사울의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하던 이 다윗이 아니니이까” 그러니까 이 사람 다윗을 믿지 마세요. 믿으면 안 됩니다. 사람 그렇게 쉽게 믿으면 안 됩니다. 이스라엘과 한 통속이 되어 도리어 우리를 칠 수 있으며, 그러면 우린 감당 못합니다. 그러니까 아기스가 고집을 피우길 지가 또 왕이라고 자기 권위를 내세워, “내가 다윗을 쭉 지켜보니까 지금껏 다윗이 나한테 불충성한 게 하나도 없고 정말 진실하고 순결하기 짝이 없는 그런 사람이었다.”

원래 사업 못한 인간들이 이래요. 원래 세상 허풍만 있는 것들이 사람을 함부로 몰빵해서 믿는 경우가 있는데, 개 피 보지요. 그래서 사업 망한 사람들이 95%나, 사업 망한 이유가 사람 믿어서 그런 거예요, 전부 다. 집사님, 사회생활 해보니까 맞지요. 사람 믿어서 그런 거예요. 적당하니 믿지 자기 속까지 다 내줘서 맨날 망하고 난 뒤에 왜 망했습니까? 사기 당했습니다. 사기 당한 사람도 나쁘지요.

그래서 결론 내리기를 부하들이 저리 반대하니까 어쩔 수 없구나. 참 미안하다. 왕이 오히려 다윗에게 미안하데. 전장에는 오지 말고 블레셋 땅으로 너는 남쪽에 있어라. 블레셋 땅이 남쪽이거든요. 지중해 있으면 가드, 이게 갈릴리 바다고 요단 강, 사해 있으면 전쟁을 여기서(아벡, 1절) 해요. 이만큼 따라왔다가 도로 집에 왔어요. 빼준 거예요.

군대에 간 사람들 이런 경우 정말 감사할 일이에요. 예를 들어서 어떤 작업을 하는데 대장이 너는 공부만 해서 작업도 못하니 빠지고 내무반에 들어가 청소나 해, 이러면 제가 할 수 있는데요 하면서도 속은 기분 좋아서 오늘도 국방부의 시간은 간다, 오늘도 이런 식으로 대충 때우면 하루는 보내겠지. 빨리 제대만.... 군대에선 그냥 조용하게 지내면 최고거든요. 그처럼 다윗이 돌아온 거예요. 와서 쉬려 했는데 여기에 누가 왔는가? 아말렉이 등장한 겁니다. 30장에.

전장 따라서 아기스 왕 따라서 이스라엘과 전쟁하려 한 고 사이에 그 틈으로 아말렉 민족이 쳐들어와서 30장 5절에서 6절에 보게 되면, “다윗의 두 아내 이스르엘 여인 아히노암과 갈멜 사람 나발의 아내 되었던 아비가일도 사로잡혔더라” 이스라엘 지도를 보게 되면, 지중해 있고 하여튼 갈릴리 바다와 요단 강 백 킬로고요, 여기 사해 있고요. 블레셋은 지금도 여기 팔레스타인 민족이 있잖아요.

마온 여기 있고 갈멜, 엘리야가 일했던 갈멜 산 있고, 이건 갈멜이란 지역이 따로 있어요. 갈멜, 마온. 지금은 동영상 보면 황폐화 돼 있는데 왜냐하면 팔레스타인 지역이라 돈이 없어서 개발을 못해요. 이스라엘은 개발하는데 이 사람들은 돈이 없어요. 그래서 그냥 방치하고 유적지로 돈 해서 자기 집 짓고 이런 형편에 있어요. 여기에 아비가일이 있었고 다윗이 쫓겨 다니면서 결혼해서 있었는데 남쪽의 아말렉이 공격해서 자기 아내와 자식들을 많이 사로잡아갔습니다.

그럴 때 아까 봤던 에봇을 가져오라. 에봇을 가져오라 한 것은 그때부터 말씀이 지시를 내리고 다윗을 지시를 따르는 하나의 뭐가 되느냐 하면 하나님의 전쟁기계로 변하는 겁니다. 타인에 의해서 그렇다면 이 에봇을 가져오라고 한 자기가 자진해서 나는 앞으로 내 하는 모든 일에 대해서는 내 의견과 의사는 내 쪽에서 처리해버려요. 나는 여기에 대해서는 이제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일임한다, 그렇게 한 겁니다.

왜 블레셋에서는 그렇게 안 하다가 아말렉에 대해선 그렇게 하느냐? 하나님께서 아말렉 만큼은 출애굽 광야에 있을 때 이스라엘의 연약함을 쳤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에 의하면 하나님의 예언에 의하면 아말렉은 일체 봐주는 것이 없이 그냥 작살내라고 하나님의 지시가 있었기 때문에 현재 이스라엘은 진짜 이스라엘은 다윗 쪽이거든요. 다윗이 이번 아말렉 전쟁에서 과연 자기가 이기게 되면 진짜 이스라엘은 사울 쪽이 아니고 완전히 하나님께서는 사울 쪽을 버리고 다윗 자기 쪽에서 새로운 이스라엘을 구성하려는 하나님의 취지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거예요. 납득이 수용이 될 수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에봇을 가져오라. 하지만 하나님의 지시에 따른 단순한 기계가 되겠다, 라고 한 겁니다. 이렇게 ‘다윗+에봇’ 아니지요. ‘에봇+다윗’이 됨으로 말미암아 이게 뭐가 되느냐 하면 획일적 인간형이 돼버려요. 획일적 인간형이라 하는 것은 인간의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고 인간이라면 뭐래야 돼, 라고 표준적인 존재가 등장합니다. 말씀에 의해서. 표준적 존재라 하는 것은 하나님이 너, 나에게 다 하나님의 말씀이 주어지는 게 아니고 한 명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집약되는 걸 말하는 거예요.

하나님은 아말렉을 쳐부수는 것이 모세, 여호수아의 일관된 뜻이었고, 일관된 뜻이 블레셋에 관해서 있는데 제3의 요소로 아말렉이 확 들어오니까 아말렉을 처단하는 쪽이 뭐가 된다? 진짜 하나님과 함께 있는 이스라엘다운 이스라엘이 됨을 확정지을 수 있는 겁니다. 아말렉이 뛰어드는 이유를 아시겠지요. 아말렉이 뛰어들었을 때에 다윗의 형편으론 그런 것 구질구질 변명하지 말고 뛰어든 아말렉에 대해서 어떻게 처단이 제대로 시행이 된다면 지금 하나님은 바로 그쪽에 다윗과 함께 있는 겁니다.

그럼 대제사장 복장 그림을 보겠습니다. 대제사장 복장에 대해선 출애굽기 28장과 29장에 보면 자세히 나와 있는데요. 모자를 보게 되면 가는 베실로 짰고, 그 다음에 금으로 만든 띠에 ‘여호와의 성결’이란 글씨가 쓰여 있고, 이건 전부 다 하나님 아이디어입니다. 끈은 청색으로 했고, 관 띠 했고, 그 다음에 수염은 자기 선택이에요. 길러도 되고 안 길러도 되고 마음대로고요. 그 다음에 견장, 견대 두 개가 있어요. 한쪽은 여섯 개의 이름, 호마노는 보석 이름이고. 양쪽에 여섯 개씩 할 때 그 이름은 나이순이에요. 나이순으로 여섯 지파로 돼 있습니다.

그 다음에 나머지 판결흉패, 판결이라 하는 것은 제사장이 하나님의 지시대로 이것이냐, 저것이냐 할 때 흉패. 그 다음에 에봇 띠, 에봇, 에봇 받침 겉옷. 그 다음에 치맛단에 석류를 수놓은 금방울 딸랑딸랑 달고, 일종의 원피스를 만들었지요.

자, 이것을 만드실 때 항상 의미가 뭐냐 할 때는 이것만 생각하면 돼요. 열두 지파의 생산, 하나님의 약속대로 한 열두 지파는 절대로 열두 지파 스스로 힘으로 열두 지파 값을 못한다. 이게 기본이에요. 야곱에게 내린 지파가 열둘로 이게 확산이 되거든요. 야곱은 한 명이잖아요. 한 명이 열두 명의 자식을 낳거든요.

그럼 열두 명의 자식이 수돗물이 위에서 저수지 물이 위에서 퍼지듯이 하나가 열둘로 분산된다는 것은 야곱의 자식이 야곱처럼 복을 받는다는 게 아니고 야곱도 하나의 통로, 연통, 저수지 통이에요, 관. 관 역할하고 관 역할이 열둘로 퍼졌다고 보시면 돼요. 나중에 십사만 사천으로 퍼지겠지만.

너와 나는 경쟁이 안 되는 이유가 동일한 하나님의 율법 완성, 언약 완성에 대한 완성체가 확 퍼지는 거예요. 어디서 어디로 퍼질까요? 그것은 어디로 퍼지느냐 하면 선악체제로 구성된 이 세상에 뭐가 퍼지느냐 하면 생명이 구조처럼 이 안에 다 퍼져서 선악체제 안에서 기어이 하나님의 생명세계, 생명의 기계, 아까 언약기계 했습니까? 그럼 이름을 바꿉시다. 언약기계에서 생명의 기계로 바꿉니다. 생명이 살아서 움직이는 생명을 증거하는 기계, 바꾸는 거예요.

여기서 싸움이 일어날까요, 안 일어날까요? 당연히 일어나지요. 선악체제가 만만지 않거든요. 막 저항하고 대든다 이 말이죠. 그래서 이렇게 보게 되면 열두 지파를 지금 어디 안에 담당하고 있습니까? 대제사장 한 사람이 다 짊어지고 있지요. 대제사장은 어느 지파? 레위 지파에요. 열두 지파 나눌 때 레위 지파는 빠져야 돼요. 레위 지파가 빠지고 요셉 지파가 두 몫을 담당해서 열두 개를 채우게 되는 겁니다. 한 사람이 열두 지파의 운명을 짊어지고 있고 담당하고 있다 이렇게 보시면 되는 겁니다.

제사장 하나에 따라서 제사장 하나에 종속돼 있는 이스라엘의 구조, 이걸 제사장 나라라 하는 거예요. 제사장 나라라 하면 구조적으로 다른 나라와 다르다는 말이 아니고 제사장 나라의 특징은 보이지 않는 분과 유일하게 연락체제가 돼 있는 거예요. 제사장을 통해서, 지성소를 통해서, 성전을 통해서 유일하게 연락이 돼 있어요.

그러면 여기 있는 인간들로 진짜 하나님을 원한다면 그들은 뭘 찾아야 됩니까? 영원한 대제사장만 발견하게 되고 연락이 되어 알게 되면 대전에 살든 세종 시에 살든 그 사람은 생명기계입니다. 제사장의 뭐가 있다? 하나님의 생명구조에 제사장의 옷차림을 완전히 전환시켜놨지요. 추리닝 입고 돌아다니고 이러면 안 되지요. 제사장 할 때 그냥 양복 입고 하면 안 된다 이 말이죠.

제사장 복을 입는다는 말은 내 인생이 있는데 내 인생에 하나님의 생명구조, 선악체제와 반대 되는 다른 구조가 여기서 그냥 옴팍 뒤집어씌운 거예요. 성령으로. 이게 성도 아닙니까. 성령이 가는 곳에 예수님이 제사장이라는 그 사실이 옴팍 씌워버리면 졸지에 성도는 얼음땡이 되면서 주의 일을 하는 거예요. 생명의 기계가 되어 무슨 기계와 싸우느냐 하면 악마의 기계, 선악체제의 기계와 싸우는 거예요. 그 싸움을 누가 보여줍니까? 블레셋과 함께 이 시대에는 누가 보여주는 거예요? 다윗이 보여주는 겁니다.

이 생명체제에서 아말렉과 나중에 전쟁을 하는데 이게 다윗이 한 진짜 전쟁이 다윗 사적인 전쟁이 아니고 하나님의 언약에 의한 생명체제의 전쟁이라 하는 것은 어느 사실을 통해서 드러나느냐 하면 사무엘상 30장 24절에 보면 나옵니다. “이 일에 누가 너희를 듣겠느냐 전장에 내려갔던 자의 분깃이나 소유물 곁에 머물렀던 자의 분깃이” 그 다음에 뭡니까? “일반” 똑같다. 왜? 제사장 에봇에는 제사장만 있는 게 아니고 제사장 몸에 뭐가 있어요? 열두 지파에 여기에 같이 붙어있으니까요.

육이오 피난 때 북한에서 내려오는 새댁이 쌍둥이를 오면서 낳았으니까 그 다음부터 둘을 포대기에 담아서 젖 줄 때나 같이 뭉쳐서 데려오잖아요. 열두 지파가 제사장만 믿고 붙어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전쟁은 누가 이기게 합니까? 아말렉이라는 하나님의 원수와의 전쟁은 하나님이 이기게 하셔요. 하나님이 이기게 하시고 그 전리품은 전쟁에 나갔던 사람에게 돌리면 안 되고 같이 붙어있는 사람에 돌리는 겁니다. 그래야 돼요.

그게 바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사로잡힌 자를 사로잡고 우리에게 뭘 주신다? 성령을 주신 거예요. 예수님 혼자 구원받으려고 전쟁하신 게 아닙니다. 예수님 안에 창세전에 붙어있는 예정된 자, 그걸 요한계시록에선 십사만 사천이라 하는데 붙어있는 숫자 12x12x1000, 12의 완전한 모임이란 뜻이에요. 구원받은 자의 모임을 숫자로 표시하면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십사만 사천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 수없이 많은 사람이 종려나무 들고 온다. 수없이 많은 사람으로 표현한 거예요. 숫자 144000 해놓고 수없이 많은 사람, 그것은 인간의 숫자 1, 2, 3, 4라는 걸로 카운트 되지 않아야 된다는 그런 뜻이에요. 끌어안고 있는 사람들에게 다 부여하는 겁니다. 이것이 민수기 31장 27절에 보면 이미 예언돼 있었어요.

26절부터 읽어볼게요. “너는 제사장 엘르아살과 회중의 족장들로 더불어 이 탈취한 사람과 짐승을 계수하고” 자, 26절에서 전쟁을 했는데 그 전쟁 누가 이기게 했습니까? 하나님이 이기게 했지요. 그럼 하나님이 이기게 한 것을 그들은 파이프니까 관이니까 하나님께서 저 바닥까지 하나님의 자기의 공로와 하나님만의 성과를 이스라엘 택한 백성에게 하나 빠짐없이 제사장한테 명령해서 다 흘려보내도록 하는 거예요.

“그 얻은 물건을 반분하여 그 절반은 싸움에 나갔던 군인들에게 주고 절반은 회중에게 주고 싸움에 나갔던 군인들로는 사람이나 소나 나귀나 양떼의 오백분지 일을 여호와께 드리게 하되 곧 이를 그들의 절반에서 취하여 여호와의 거제로 제사장 엘르아살에게 주고 또 이스라엘 자손의 얻은 절반에서는 사람이나 소나 나귀나 양떼나 각종 짐승을 오십분지 일을 취하여 여호와의 성막을 맡은 레위인에게 주라 모세와 제사장 엘르아살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대로 하니라”(27~31절)

이 말씀은 뭐냐 하면 전쟁을 어떻게 하라가 아니라 전쟁은 해보나마나 누가 이기게 하신다? 전쟁은 하나님께서 이기게 하시는 거예요. 지금 전쟁을 누가 이기게 하는지의 문제가 아니고 과연 너희들이 전쟁의 혜택을 입을 백성 맞느냐, 안 맞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하나님이 전쟁 해놓고 그 혜택 없으면 전쟁 아니지요.

자기들에게 돌아오는 몫이 제가 한 게 아닙니다. 이 전쟁에 제가 기여한 건 없습니다, 라는 고백의 표시가 나와야 돼요. 제가 천국 가는 것은 절대로 제 공로가 아닙니다, 라는 표시를 내줘야 그게 누굽니까? 그게 성도지요. 그런 성도 교회 가서 찾아보세요. 기존 교회에 몇 명 있는가? 거의 없어요. 거의 없다니까요. 성당이나 교회 가 보세요. 그냥 푹 쑤시고 질문해보라고요.

“당신 구원받는 데 당신 뭐했습니까?” 묻자마자 일초 만에 딱 튀어나오는 답이 뭐냐? “제가 아무것도 한 것도 없습니다.” 또 한 번 물어보세요. “왜 한 것도 없습니까?” “저, 죄인이거든요.” 연거푸 두 개의 답변이 연방으로 터져 나오는 사람 찾아보세요. 신학 교수한테 물어보세요. 그게 나오는지.

민수기 31장 22절, 23절. “금, 은, 동, 철과 상납과 납의 무릇 불에 견딜만한 물건은 불을 지나게 하라 그리하면 깨끗하려니와 오히려 정결케 하는 물로 그것을 깨끗케 할 것이며 무릇 불에 견디지 못할 모든 것은 물을 지나게 할 것이니라“ 불에 다 지나게 하라. 전리품들을 다시 한 번 하나님의 심판의 차원에서 너희들은 심판 받아야 마땅한 데 내가 내 공로로 이 뜨거운 불, 아무도 빠져나올 수 없는 지옥 불에서 내가 빠져나오게 해줬다는 그것, 그걸 고백할 사람 누가 있느냐 이 말입니다.

고린도전서 3장 볼게요. 13절, “각각 공력이 나타날 터인데 그 날이 공력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력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니라 만일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운 공력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 ”그 위에“가 뭐냐 하면 바로 11절에 예수님의 터를 말해요. 예수님 위에 예수님이 하셨다만 나타난다면 그 사람이 바로 하나님의 성전이요 이 세상 가운데 하나님께 유일하게 구원받는 사람들이다.

그러면 이 세상 자체가 하나님께서 다윗을 통해서 아말렉을 전달한다는 말은 다윗 시대에 의하면, ‘이 세상=아말렉’ 하나님의 대적이 되는 존재들, 그중에 이스라엘도 진짜 이스라엘에 포함됐는지 아말렉인지, 아니면 아말렉을 쳐부수는 하나님 편에 섰는지는 다윗 네가 가라, 이렇게 된 거예요. “네가 내 시키는 대로 가라.”

다윗은, “에봇 주세요.” 제사장 입을 에봇. 제사장은 저쪽에 엉터리 이스라엘에 그쪽에 가 있어요. 에봇 가져와서 자기가 제사장도 아니면서 에봇을 입어버려요. 하나님이 어느 쪽에서 지금 실효적으로, 이론 말고 실제적으로 지금 하나님께서 어느 쪽에서 일하는지, 자기는 지금 블레셋에 포로 잡혀있고 엉터리 귀순해 있지만 그게 아무 상관없이 실효적으로 실제적으로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것은 나와 함께 일한다는 것을 다윗이 지금 보여주는 장면이 사무엘상 29장, 30장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첫째 시간 강의한 강의제목은 ‘생명의 기계’입니다. 방금 한 이것을 이스라엘 역사 안에서 보면 이렇게 표현할 수 있어요. [실패함으로써 성공이 보인다.] 실패하고 난 뒤에 성공이 보이는 게 아니고 실패 속에 그 안에 성공이 들어있는 거예요. 나, 인생 실패했다. 다른 말로 하는 나는 절망이다.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 이런 뜻이거든요.

그런데 이 말이 인간일 때는 성립되는데 이게 만약에 기계라면 어떻게 됩니까? 실패, 절망, 희망 이건 기계에 해당돼요, 안 돼요? 안 되지요. 그러니까 평소에 우리가 아무리 성경을 이렇게 배워도 우린 자꾸 우리 자신이 기계란 생각을 못하고 건방지게 자꾸 인간이고 싶은 거예요. 제가 문제를 하나 낼게요.

기생을 보고 기생이라 하면 기생이 기분 나빠합니까, 기분 좋아합니까? 이게 뭐냐 하면 기생의 희망을 보고 대화를 하지 않고 지금 기생 자체를 두고 대화를 시도했기 때문에 기분 나쁜 겁니다. 이 말은 인간은 자기가 기계가 아니라고 우기면서 뭘 하느냐 하면 지금 상태에서 훌륭하게 벗어날 수 있는 희망이란 것, 혹 어떤 희망이 나의 대체물로 그런 식으로 타인에게 자기를 나타내고 싶어요.

아들이 있다가 “엄마, 구질구질한 인생 언제 끝나는 거야?” “조금만 기다려. 너 하고 싶은 대로 우주선 태워줄게.” 그러니까 지금 희망이 있다는 것은 지금 나를 그게 진짜 나라고 생각하지 말고 내가 얼마나 큰 희망을 갖는가, 그 희망이 있는 나와 당신, 나의 희망과 이야기하라. 그래서 만약에 거의 희망이 없다면 자살하지요, 인간은.

인간은 이런 희망 가지고 진짜 자기를 계속 감추는 겁니다. 희망이 없다면 자살하거나 자살 안 하고 싶어도 희망을 없을 때 어떻게 하느냐? 타인을 잘라내서 없애버려요. 그래서 인간들이 예수님을 죽인 이유가 자기의 희망을 고스란히 살려내기 위해서 예수님을 밀쳐버린 겁니다. 사울이 왜 다윗을 미워하고 싫어하느냐? 그것은 바로 사울은 천천이고 다윗은 만만이라서 아무리 사울이 자기 희망을 가져도 다윗을 넘어설 수 없기 때문에 그래요.

그러한 비슷한 예가 선거 전에 전화여론조사를 해요. 제가 없을 때 우리 집에 여론조사가 온 모양이에요. 제 아내가 받았어요. 여론조사에 조건이 있어요. 나이가 60대면 여론조사 안 해요. 60대 이상이면. 그래서 제 아내가 몇 번 실패해서 이번엔 속였어요. 나, 20대 중반이라 하니까 그때부터 여론조사가 시작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전화여론조사하는 쪽의 그 희망이 절망으로 바뀌기가 싫은 거예요. 인간이 희망이 있어야 절망적인 자기 형편을 애써 감출 수가 있는 거예요. 부정할 수 있는 거예요. 학교 선생님이, “너 수학 또 빵점인데 이래서 뭐할래?” “영어는 잘하잖아요.” “영어 40점 잘한다. 수학 빵점은 어떻게 할래?” “그래도 나는 공부는 못하지만 아이돌 해서 노래해서 나중에 방탄소년단 같이 전 세계에 유명한 가수 돼서 돈 많이 벌게요.” “방탄소년단 아이큐 150인데, 공부 못해서 방탄소년단 된 게 아닌데? 요새 공부 못하면 아이돌 될 수도 회사에서 잘라내 버리는데.”

다윗을 둘러싼, 다윗은 기계에요. 그런데 정작 기계면서도 인간인 척하는 인간 주변에 있지요. 그것이 뭐냐? 선악체제, 나한테는 양심이 있으니까 인간으로 충분하다는 겁니다. 천주교교리 보세요. 그게 천주교교리에요. 성경 그런 것 필요 없어요. 양심대로 사시면 나중에 구원받습니다. 이게 불교인지 천주교인지 구분도 안 돼요, 궁극적으로. 사람들 설득하려면 그 수밖에 없다는 거예요.

어떤 사람이 저한테 전화했어요. 그 사람이 시비조로 이야기하는 거예요. 어떤 목사가 있는 그 목사가 십자가마을 쪽에 글을 남겼는데 혹시 우영희라는 그런 목사 아십니까? 우영희요, 저는 모르겠는데요. 이 사람이 광주, 전남으로 후비고 다니면서 우리 가족이 교회를 다니는데 우리 가족 교회를 괴롭혔다는 거예요.

“우영희라는 목사가 뭐라고 괴롭혔습니까?” 우리 교회는 장애자도 있고 어려운 노인들도 있는데 맨날 설교를 한국교회 썩었다고 했다는 거예요. 그런 목사 없습니다. 세미나도 안 데려가고 저희끼리만 세미나 가고 또 외부에서 온 사람들끼리만 놀고 본 교회 교인들 소외했다는 거예요. 그런 목사 없습니다. 화가 나는 거예요. 아아, 십자가마을 사칭해서 하는구나.

그런데 전화하면서 기분 나쁜 게 장애자 있고 가난한 사람 있는 교회를 한국교회 복음이 아니라는 그 이야기만 했다는 거예요. 가만히 괜히 기분 나쁜 거예요. 그동안 교회가 성당이 무슨 짓을 한 거예요. 복음을 전한 게 아니고 당신 사람이지? 하나님 당신 사랑합니다. 당신 천국 보내줄 거예요. 어이구, 장애자 불쌍해, 가난한 사람 불쌍해. 도와줄 겁니다. 이런 식으로 했다는 것이 확 온 거예요. 그래서 전화를 끊었어요.

우영희란 사람이 없는데 자꾸 조각조각 퍼즐이 맞추는데, 전남 광주, 우영희? 우영희가 아니고 오용익을 우영희라? 분명히 우영희 없습니다. 나중에 그 사람이 오영희라고. 오영희도 없는데. 사람 이름 똑바로 알아야지. 나중에 보니까 이건 한 50% 오용익이란 사람 있다. 앞뒤 문맥으로 보면 가능성이 있는 것 같아요. 정말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도록 주께서 생명기계로 잘 사용하셨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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