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강의

후크와 자크

아빠와 함께 2021. 12. 6. 08:19

20211203a 울산강의-역대기상(6강) 4장 40절 : 후크와 자크
(강의:이근호 목사)


오늘은 역대상 4장에 보면 열두지파 가운데 두 자손이 나옵니다. 한 자손은 유다 자손, 또 한 자손은 시므온 자손. 유다 자손과 시므온 자손, 열두지파 가운데서 두 지파가 뭘 보여주는가? 그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뭘 보이시려 하는가? 여기에 주목을 하겠지요. 이 유다 지파와 시므온 지파의 관계는 유다 지파 땅이 있으면 시므온 지파는 그냥 점선으로 포함돼있어요. 이 전체가 유다 지파라면 이것이 실제라면 이 안에 시므온 지파는 흔적도 없이 숨어버린다, 흩어진다, 이렇게 되거든요.

유다는 뭐가 있느냐 하면 나의 것이 있어요. 유다 지파는 각자에게 나의 땅이 있어요. 나의 것, 나의 땅이 있고 시므온 지파는 나의 땅이 없습니다. 시므온과 유다 지파가 같이 연관을 시킨다는 것은 우리들 보기에 나의 것이 있으면 이걸 사람들은 성경에서 나의 것을 있을 때 이걸 한 자로 복이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리고 나의 것이 없을 때 사람들이 나의 것이 없으니까 복의 반대가 뭐겠지요? 저주라고 생각하겠지요.

그래서 이거는 이스라엘이니까 저주받을 일은 없고 여기다가 뒤에 이걸 하나 더 붙여요. 저주‘성’, 저주스러움 이걸 하나 포함시킵니다. 복이 있는데 복을 둘로 나누자 이 말이죠. 하나는 복스러움, 또 하나는 저주스러움 이 두 가지 모두 다 복이 된다는 겁니다. 참 신기한 일이죠. 창세기 49장 7절에 보면, 시므온 지파에 대해서 또 레위 지파에 대해서 이렇게 이야기 나와 있습니다.

5절부터 7절까지 보면, “시므온과 레위는 형제요 그들의 칼은 잔해하는 기계로다 내 혼아 그들의 모의에 상관하지 말찌어다” 하나님의 혼이죠. 하나님의 마음. “내 영광아 그들의 집회에 참예하지 말찌어다” 하나님이 그들이 의논하는 것, 그들의 집회에서 빠져버리는 거예요. “그들이 그 분노대로 사람을 죽이고 그 혈기대로 소의 발목 힘줄을 끊었음이로다“ 이렇게 돼있어요,

지금 창세기 49장은 야곱이 자기 아들 열두지파에게 축복을 하는 장면이에요. 그게 48장 20절에 “그 날에 그들에게 축복하여 가로되” 분명히 축복을 했지요. 축복 내용이 뭐냐 하면 저주스러워요. 저주가 어떤 거냐? 그들의 집단의 모음이 나는 빠지겠다. 나는 참여하지 않겠다. 이게 저주스러워요. 저주스러운데 그걸 뭐로 보느냐 하면 야곱은 하나님의 계시를 받고 그 열두 아들에게 축복을 내립니다.

그러니 말이 이상해요. 축복을 내리는데 하나님은 그 레위 지파와 시므온 지파에 대해서 빠져버리겠다. 그게 어떻게 축복이 되느냐 말이죠. 여러분들이 창세기 49장에 보면 쭉 야곱이 열두 아들에게 복을 내리는 장면이 나오거든요. 이상하게 르우벤 지파부터 해서 49장 3절에 보면, “르우벤아 너는 내 장자요 나의 능력이요 나의 기력의 시작이라” 해놓고 4절에 보면, “물의 끓음 같았은즉 너는 탁월치 못하리니 네가 아비의 침상에 올라 더럽혔음이로다” 이게 무슨 복입니까? 이런 예언이.

설날에 가장 되시는 할아버지가 아들, 손자 모아놓고 내가 올해 축복해줄게 해놓고는, “너, 성질 더러워” 이게 무슨 연초에 자식이나 손자한테 복이 됩니까? 저주 아닙니까. 너는 성질이 더러워서 올해는 맛 갔어. 올해 너한테 줄 것 아무것도 없어, 라고 아버지는 손자와 자식들에게 축복을 하였다. 이게 축복했다는 명제와 그 내용이 이상하게 부합되지 않는다는 생각을 하게 되지요. 지어낸 게 아니고 성경에 그렇게 돼있어요.

창세기 48장 20절에 “그 날에 그들에게 축복하여 가로되” 하고 축복하는 내용이 그들의 장래와 미래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말이죠. 여기서 우리가 뭘 생각해야 되느냐 하면 나는 아버지로부터 자식으로서 복을 받았다, 라고 생각한다면 그거는 복이 아닙니다. 우리 형님 레위와 시므온은 우리 아버지 야곱한테 혹독하게 꾸중을 듣고 자기 땅도 없이, 자기 땅도 없어요.

아까 창세기 49장 7절에 보면, “그 노염이 혹독하니 저주를 받을 것이요” 축복 안에 저주가 있어요. 저주가 두 번 나와요. 7절에. “그 노염이 혹독하니 저주를 받을 것이요 분기가 맹렬하니 저주를 받을 것이라 내가 그들을 야곱 중에서 나누며 이스라엘 중에서 흩으리로다” 이렇게 돼있지요.

그럴 때 여러분 같이 다른 지파, 다른 형제를 생각해봅시다. 그 현장에서 아버지가 열두 아들에게 장래 일을 이야기할 때 이러한 저주가, 저주라 했으니까 저주죠. 저주가 레위 지파와 시므온 지파에 내릴 때에 다른 열 지파 있잖아요. 그 열 지파 형제들이 들을 때 기분이 어떻겠어요? 아주 신났지요. 그렇지요. 자기한테는 이런 저주가 안 오니까.

유다 같은 경우에 9절에. “유다는 사자 새끼로다 내 아들아 너는 움킨 것을 찢고 올라 갔도다 그의 엎드리고 웅크림이 수사자 같고 암사자 같으니 누가 그를 범할 수 있으랴” 유다 지파는 누가 함부로 범할 수 없다. 그 이야기를 7절에서 방금 서열상 자기 형 되는 레위와 시므온한테는 그렇게 듣고 그 다음 차례 유다 지파에 왔을 때 완전히 대조적인 장래 일을 받을 때 기분이 어때요? 기분 되게 좋지요.

원래 남이 망해야 기분이 좋아요. 힘든 인생 살면서 사는 재미가 뭐겠습니까? 남 망하는 그것 때문에 사는 거죠, 뭐. 그래서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내 것 근사히 있으면 기분 좋고 내 것 없으면 그걸 저주로 느끼는 거예요.

그런데 오늘 강의를 들어보면 아시겠지만 이 레위와 시므온 지파가 다 흩어져버리고 땅이 없는 것, 이걸 축복에다가 집어넣을 줄 아는 안목이 있어야 됩니다. 복이라 하는 것은 복스러움와 저주스러운 두 개 다 있거든요. 그걸 레위 지파와 시므온 지파에 내리는 두 번씩이나 언급했던 아버지의 그 저주를 남의 일로 들어버리면 그 사람은 그게 유다 지파가 되던 르우벤 지파가 되던 다른 지파가 되던 그 사람은 여전히 복의 진수를 모르는 사람이에요.

복의 진수를 모르는 이유가 뭔가 누구한테 만약 어떤 사람이 여러분한테 40억을 준다 합시다. 40억이 아니고 50억이지. 요즘 유행하는 게 50억이니까. 무슨 대유인가 있잖아요. 땅 팔아서 50억 줬잖아요. 그 50억을 누가 받게 되었을 때에 자기가 받은 50억을 남한테 주겠습니까? 줄 턱이 없지요. 왜 남한테 안 주려고 하지요? 이거는 복이라고 생각해서 남한테 안 주는 거예요. 맞지요.

그런데 그게 누구 복입니까? 나의 복이죠. 나의 복은 성경에 없어요. 그러니까 50억 받아놓고도 복을 모르는 거예요. 이게 나의 소유가 돼버리면 더 이상 복이 아니에요. 지금 그걸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가르치는 거예요. 같은 형제간에 열두 명인데 어떤 자에게 번창하는 그런 내용에 대해서 장래 일에 대해서 이야기했고 어떤 것은 저주스러운 이야기했을 때 그 저주스러운 이야기조차 이게 나를 향한 하나님의 예언이 된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어야 돼요.

왜냐하면 열두지파는 열둘이 아니고 전부 다 하나의 집단, 단체기 때문에 그래요. 그러니까 이스라엘 각 지파가 복을 받는 게 아니라 단 하나의 이스라엘이 복을 받는 거예요. 이해하시겠습니까? 내가 유다 지파지만 유다 지파가 잘된다고 해서 그걸 좋아해선 안 된다 이 말이죠. 이스라엘이 없는 유다 지파는 유다 지파가 없는 거예요. 유다 지파가 있는 유다 지파는 그건 빨리 거기서 후딱 벗어나야 돼요. 벗어나지 않으면 그건 저주가 되는 겁니다.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저주란 무엇인가? 저주란 나의 것으로 인식될 때 이게 바로 저주가 되는 거예요. 그런데 은 뭐냐? 나의 것이 없어진 우리의 것 안에 들어올 때 이게 바로 복이 되는 거예요. 이게 요한복음 14장에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처소가 마련되면 다시 찾아오는데 다시 찾아올 때 형성된 게 뭐냐 하면 베드로 너의 것이 아니고 우리에요, 우리. 우리라니까요. 거처를 우리와 함께 한다.

우리 속에 누구도 포함하느냐 하면 예수님 제자들은 물론이고요 예수님, 그리고 성령, 거기다가 하나님 아버지까지 포함한 우리에요. 이 우리에 인간, 제자들이죠. 제자들과, 제자가 아니고 제자들입니다. 제자들+예수님+성령+하나님 아버지, 아버지 하나님 포함해서 이게 우리가 돼요. 그래서 우리가 되려면 예수님께서 처소를 마련해야 우리가 된다고요.

그러면 예수님이 처소 마련 전까지 제자들은 우리였습니까, 나였습니까? 각자 나였잖아요. 이건 타고난 거예요. 이건 그 사람 성격이 더러워서가 아니라 아담의 조상 자체가 각자 신처럼 되겠다는 마귀의 마음이 있기 때문에 이것이 나는 나만 챙기는 거예요. 그래서 이게 복을 받기 전에는 인간들이 뭐냐? 나의 것을 사수한 거예요. 그리고 복을 받기 전이니까 이걸 두 자로 하면 뭐가 되겠습니까? 저주지요. 가끔 집사님이 히트를 친다니까. 복을 받기 전에는 저주에요.

복을 받기 전에는 저주니까 이걸 고대로 공식에 집어넣으면 저주가 무엇이다? 저주는 무엇을 저주라 합니까? 나의 것이 인식될 때 그걸 저주라 합니다. 나의 것이 인식되면 그 다음부터는 일곱 귀신 달려듭니다. “너, 똑바로 살아. 안 그러면 너의 것 날아가는 수가 있어.” 마귀가 이런 식으로, 마귀의 주특기는 참소거든요. 고자질하는 거예요. 계속해서 쑤시는 거예요. 나의 것이란 인식이 있기 때문에 일곱 귀신, 귀신이 일곱만 오겠습니까? 군대 귀신이 와서 매일같이 쑤기는 겁니다. “행동 똑바로 안 하면 너의 것 날아가는 수가 있어.” 이런 식으로요.

자, 아시니까 예를 들면 남자에게 나의 것은 뭐냐 하면 자기의 재산으로 형성된 위신과 자존심, 체면이죠. 그러면 여자에게 나의 것 중에서 가장 나의 것, 내가 모든 다 바쳐서 지키고 싶은 나의 것 딱 하나만 대라면 뭡니까? 자식. 집사님 오늘 계속 히트 친다니까. 연속, 2타수 2안타. 자식이라니까요. 자식이 인질로 잡히면 돈이고 뭐고 체면이고 범인에게 살살 빌고 경찰에 알리지 말라 하면 안 알린다고 비굴하게 하면서까지, 비굴한 게 지금 중요한 게 아니잖아요. 누가 중요합니까? 자식.

그것도 자식 가운데 둘째, 셋째는 아니고요. 뭐? 맏이. 인간의 본성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뭘 바치라 했습니까? 집에 있는 개 바치라 했어요, 소 바치라 했어요, 닭 바치라 했어요. 돈 바치라 했어요? 십일조 내라 했어요? 뭐하라 했습니까? 하나님께서 믿음의 최정점에 너에게 가장 사랑하는 것, 네 맏아들 이삭을 나에게 바쳐라.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하는 일의 내용을 감 잡았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가장 아끼고 정말 천하를 주고도 내 목숨은 버려도 이거는 못 내놓겠다는 이것을 쥐고 있다는 것을 아셔요. 이게 자식이든 돈이든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고 인간은 나라는 것, 나의 것으로서 뭐가 있다는 그 나의 것, 그것이 바로 신약에 나오는 예수 안은 아니다 이 말이죠. 예수 안에 들어오지 못하면 천국은 물 건너 간 거예요. 끝나버린 거예요.

그럼 사람들은 예수 안에 안 들어오면 어디 안에 기거하겠습니까? 이쯤해서 나와야 돼요. 3타수 3안타. 자, 기회 줍니다. 예수 안에 있지 않다면 인간은 어디 안에 있습니까? 평소에. 자기 안에. 3타수 3안타라니까. 홈런 치면 오늘 사이클링 히트하겠다. 1루타, 2루타, 3루타, 홈런까지.

예수 안에 없으면 자기 안에 들어있는 거예요. 항상 어떤 행동할 때 내 것이 이익이 될까, 내 것이 더 커지고 단단해지고 더욱 더 지킬만하냐, 아니면 내 것이 손해 보느냐? 사람들이 선악과 따먹고 난 뒤에 생각하는 복과 저주는 바로 그겁니다. 나의 것이 기준이에요. 절대기준이에요. 왜? 내가 신이니까. 가짜지요. 나는 내 안에 살고 있지요. 이게 가짜 신자 아닙니까. 딴 게 뭐가 있겠어요. 이게 가짜 신자지요.

생활이 어렵지 않고 자식 잘 되고 무탈한데 교회 왜 옵니까? 나의 것이 잘 되는데 왜 와요? 나의 못 됐을 때 자기 손해 본 것 만회해달라고 신에게 빌기 위해서 오거든요. 교회나 절이나 마찬가지에요. 어떻게 열심히 하면 나의 것을 지켜서 심지어 내 영혼 지켜서 내 영혼을 천국까지 들이밀 수 있는가, 그것 계산해서 교회 오는 거예요. “목사님, 나 천당 보내주세요.” 이것 외에 교회 오는 목적 있습니까? 교회 합기도 배우려고 와요? 간판도 합기도 간판인데 뭐. 합기도 배우려왔다가 일요일에 왔다가 이상한 데다 이거. 합기도 이상하게 가르쳐주네.

나의 것이란 것은 나의 자식, 나의 손자, 아들 다 포함돼요. 그리고 그것이 있어야 비로소 나는 숨을 쉴 만하다. 이 땅에. 이것이 모든 인간이 신을 향한 종교적인 본성입니다. 그래서 내가 또 여기서 노래가사 하나 적어왔는데 노래가사를 보시면 여러분 연배가 다 아는 노래에요.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인적 없는 수덕사에 밤은 깊은데
흐느끼는 여승의 외로운 그림자
속세에 두고 온 님 잊을 길 없어
법당에 촛불 켜고 홀로 울적에
아 수덕사의 쇠북이 운다

자, 이게 산길 백 리 들어가는 수덕사에 머리 깎은 어떤 여승이 밤새도록 울면서 기도를 하고 있는데 결국은 이 여승이 기도 왜 합니까? 수덕사의 여승이 잠 안 자고 기도를 왜 합니까? 주 예수를 위해서 기도합니까? 뭐예요? 누구 것 지키겠다는 거예요? 속세에서 남자한테 까였다 이 말 아닙니까. 속세에 두고 온 남자에 까이고 왔는데 와서 보니까 또 그 남자가 그리운 거예요. 그 남자가 남의 남자였어요, 지 남자였어요? 자기 남자였잖아요. 자기 것이에요, 자기 것.

2절 가사, 산길 백 리 수덕사에 밤은 깊은데 염불하는 여승의 외로운 그림자, 염불 왜 하는데? 속세에 맺은 사랑 잊을 길 없어, 니가 속센데 무슨 속세가 또 있어요. 본인이 속세잖아요, 본인이. 이게 절에 가나 교회 가나 내가 여기 있으면 내가 속세 아닙니까. 사람이 나를 떠난 적이, 인간은 나의 것을 떠나본 적이 없잖아요. 사람이 나의 것을 떠나면 자살하거나 죽지요.

산다는 말은 무엇에 근거해서 산다? 나의 것이 있다는 그 의미 때문에 우리는 살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그 나의 것이 뭐라고 했습니까? 여기 보면 그게 바로 저주가 되는 거예요, 저주. 그러니까 가사를 바꿔야 돼요. 인적 없는 수덕사에 밤은 깊은데 흐느끼는 여승의 외로운 그림자 저주에 두고 온 님 잊을 길 없어 법당에 촛불 켜고 저주의 기도하고 울적에, 이런 가사로.

성경에서의 복은 나가 사라진 상태에서 우리가 되는 겁니다. 우리는 반드시 필수적으로 뭐냐 하면 예수님의 요소, 성령의 요소, 하나님 아버지의 요소가 포함된 우리에요. 뭐 교인들끼리 친목회 한다는 우리, 그거는 우리 아니에요. 그거는 제자들이 예수님 떠나고 닫힌 문 앞에서 저희끼리 모인 그건 우리로 쳐주지 않습니다.

문은 닫혔는데 거기에 우리가 되기 위해서 누가 오느냐? 닫힌 문을 뚫고 부활하신 주님께서 잘 있었느냐, 합류할 때 비로소 우리가 되는 겁니다. 예수 없는 교회는 교회가 아니에요. 왜 그러냐 하면, 이거는 정말 상식인데 이 상식마저도 완전히 무시당한 시대가 되고 말았어요. 뭐가 상식이냐 하면 내가 살아 있는 것 아니고, 주님이 현재 살아 있어요. 이게 상식이거든요. 복음세계에서는.

나도 살아 있고 주님 살아 있고, 이런 건 없어요. 나는 살아 있는 게 아니고 나는 그냥 숨 쉬는 거지요. 살아 있는 게 아니에요. 숨 쉬고 행동하고 까불고 축구하고 이건 살아 있는 게 아니에요. 예수님처럼 살아 있을 때 아버지로부터 살아 있다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예수님처럼 살아 있을 때 주님과 함께 살아 있을 때 아버지와 함께 살아 있을 때 살아 있는 거예요. 왜? 예수님은 성령과 아버지와 함께 예수님 홀로 있는 것이 아니고 뭡니까? 우리로 형성돼있으니까요. 혼자 계시는 나라가 아니에요. 우리와 함께 있는 거예요.

마태복음 20장에 포도원 비유가 나오는데 포도원 비유에서 아침 아홉 시에 온 사람, 그리고 열두 시에 온 사람, 오후 세 시에 온 사람, 마지막에 퇴근시간 한 시간 앞두고 오후 다섯 시에 온 사람 있었지요. 있을 때 그 품삯을 제일 마지막에 온 사람부터 줬잖아요. 다섯 시에 온 사람이 한 데나리온, 남성의 하루 품삯을 주니까 그 일꾼이 뭐냐 하면 왜 저에게 하루 품삯을 주십니까, 하고 오히려 의아해했지요.

이거는 이 세상은 내가 내 힘으로 산다는 것을 탈피한 거예요. 첫 번째 제일 아침에 온 사람은 포도원에 와서도 자기 생각밖에 없어요. 내가 여기서 일하면 포도원 주인 되시는 분이 나에게 하루 품삯을 준다는 그것만 생각, 내가 노동해서 얻은 내 생각만 하는 거예요. 예수님은 그 이야기하시면서 앞에 운을 떼기를 “천국은 이와 같으니”라고 천국은 뭐냐 하면 자기 생각한 사람은 탈락이 되고 자기 생각에서 벗어나서 낯선 분에게 묻는 거예요.

“왜 저에게 하루 품삯을 주십니까, 왜 저에게 이걸 주십니까?” 이렇게 물을 수 있는 사람은 홀로 사는 게 아니에요. 그런 물음을 유발한 그분과 더불어 있는 거예요. 내가 주님한테 뭘 묻는다는 것, 왜 저를 구원하셨습니까, 라고 묻는다는 말은 그 사람은 더는 본인 홀로 사는 생이 아니라는 뜻이에요. 그걸 복이라고 하는 겁니다. 나 홀로 살지 않는 걸 복이라고 해요.

그런데도 사람들은 아쉬운 것 없으면 교회 태만이고 말씀과 멀어져요. 그 말은 뭐냐 하면 교회 왔으나 안 왔으나 나는 내 잘된 맛에 산다, 그걸 철두철미하게 거기에 얽매여있습니다. 그건 아담의 자손으로서 손톱만큼도 변한 게 없는 거예요. 변한 게 없는데 그게 무슨 신자입니까? 집에서 새는 바가지 교회와도 새는데 뭐가 달라진 거예요. 같은 바가지 물새기는 마찬가진 데요.

예수 믿고 달라졌다? 안 달라졌어요. 뭐가 달라졌어요? 하나님 이용하고 교회 이용하는 그 심보 그대로인데 뭐 달라졌어요. 인간은 본인만 살아 있기 때문에 항상 어떤 일을 할 때 누구한테 묻느냐? 살아 있는 게 본인이기 때문에 본인한테 물어요. “나, 어떡하면 돼?” 맨날 자기 자신 나는 나에게 충실해야 돼. 자기가 자기를 닦달 냅니다. “열심히 해. 노력해야 돼.” 그렇게 합니다.

서울의 어떤 분은 권사님은 딸자식에게 초등학교 때부터 지금까지 지금 대학생이지만 맨날 하는 것이 “공부하지 마. 네 하고 싶은 대로 해.” 맨날 그 이야기만 했어요. 그 소릴 듣던 딸이 약이 올라서 왜냐하면 딸은 상식적이잖아요. 공부를 해야 남에게 칭찬 듣지요. 공부를 해야 칭찬이 주어질 뿐 아니라 얻는 게 많잖아요. 자기의 장래를 생각해볼 때. 그런데 사랑하는 엄마가 나를 방치하듯이 “공부하지 마. 공부해도 소용없어. 그냥 알아서 니 나름대로 살면 돼.” 이러니까 독이 올라서 열심히 해서 지금 서울대학 들어갔어요. 엄마한테 복수한다고.

하여튼 교육방법도 반전이 있는 것 같아. 아무나 되겠어요. 머리가 되니까 되지 공부하지 마, 하면 공부 안 하고 나중에 엄마 핑계대고 엄마 때문에 공부 안 했다, 이럴 수도 있거든요. 머리가 되니까 DNA가 되잖아요. 그러니까 서울대를 들어가든 연고대를 가든 인간은 남이 나의 가치를 어느 정도 인정하느냐를 그걸 복이라고 간주하는 거예요. 남한테 무시당하면 뭐가 된다? 그건 저주라고 보는 겁니다.

그래서 오늘 역대상 4장에서 시므온 이야기는 소위 배제당한 지파, 무시당한 지파, 그리고 창세기 49장 5절과 7절에 의하면 레위 지파와 시므온 지파는 두 번씩이나 아버지 야곱한테 뭘 받았습니까? 두 번씩이나 저주받은 지파가 어떻게 땅을 차지하는지 그 과정을 보자는 것, 그 이야기에요.

우리는 저주받았으면, 그냥 지옥 가야지, 이게 아니에요. 아버지가 자식에게 저주를 받았다, 저주를 내렸다는 이 말은 그 저주를 내린 것이, 아까 공식 다시 봅시다. 복에는 뭐냐? 복스러움이 있고, 또 뭡니까? 저주스러움이 있지요. 지금 받아서 복이라 하는 것은 너무나 상식적이고 이거는 뭐 따질 필요 없어요. 그런데 이게 바로 허점이다 이 말이죠.

“레위와 시므온 형님, 아이고 저주받아서 참 안 됐습니다.” 하곤 속으론 쾌재를 부르겠지요. “아이고 속이 시원하다.” 나 유다, 나 요셉은 뭐 받았다, 아버지로부터 뭐 받았어요? 복스러운 것 받았잖아요. 창세기 49장 읽어보세요. 두 지파가 아주 대성공해요. 그러니까 복 받았다 할 때 그걸 복 받은 걸로 여긴다면 그게 다른 지파 아니고 나만의 지파에게 준 복이라고 생각한다면 그 자체가 나중에 저주가 된다. 왜냐하면 나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기회를 놓쳐버린 거니까요.

그러니까 복 주는 것이 여러분들이 그걸 다행스럽게 보면 안 돼요. 저도 이스라엘을 가봤습니다만 세겜 땅이라고 있어요. 세겜 지역 이쪽에는 그리심 산, 이쪽에는 에발 산이 있어요. 근데 두 산 사이에 이스라엘 백성들 포진을 해놨어요. 그리고 언약궤는 하나에요, 두 개에요? 피 흘린 언약궤가 하나에요. 에발 산은 저주 산입니다. 그리심 산은 축복 산이죠.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언약궤는 거룩하고 하나님이 계시는 곳이기 때문에 당연히 축복에 가실 것이라고 생각하지요. 아닙니다. 언약궤는 저주 산에 둔 거예요. 하나님 이 땅에 오실 때 대단히 화려하게 오실 것이라고 생각하지요. 아닙니다. 모든 사람이 기피하는 저주의 모습으로 왔어요. 왜? 모든 사람은 복을 원하기 때문에. 복을 원하는 인간 자체가 이게 뭐냐 하면 벌써 문제, 본인이 문제 있음을 모르고 있는 거예요, 지금.

하나님은 저주 산에 갔어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두 패로 나눠요. 저주 산에 있는 사람에게 뭐가 들려오느냐 하면 축복 이야기를 상대방 산을 향하여 던지게 돼있습니다. 나는 저주받아 마땅하기에 나 자신, 나는 시커멓게 나에게서 뭘 끄집어낸다는 자체가 저주기 때문에 만약에 외부에서 뭐가 날아온다면 뭐가 된다? 나에게는 복이 된다. 저주를 복으로 바꾸시는 것, 예수님께서 자기 제자들 위해서 죄를 저주를 담당하셔서 이 땅에서 사라졌어요. 오늘 강의에서 사라짐 중요합니다. 사라져버렸어요.

사라지고 난 뒤에 그 사라진 세계가 천국입니다. 그러니까 인간들은 그 사라진 세계를 내 것을 유지하는 한 들어갈 수 있겠어요, 없겠어요? 들어갈 수가 없지요.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죄 있잖아요. 자기밖에 모르는 죄, 그 죄 때문에 사라졌잖아요. 내 죄 때문에 사라진 분이다 말이죠. 그러니까 내가 그 주님을 찾을 리가 없지요. 가짜 예수나 찾지요. 우리 좋은 게 좋게 합시다, 하는 그 가짜 예수 말입니다. 그 가짜 예수를 교회에서 외치니까 가짜 예수는 좋아하는데 나 때문에 사라진 분을 찾을 리가 있습니까, 인간은?

그러니까 성령이 아니면 우리는 천국에 못 가는 이유가 거기 있어요. 나 때문에 없어졌는데 무슨 수로 내가 찾을 리가 있습니까. 자식이 엄마 미워서, “엄마 가. 내 엄마 아니야. 엄마 꼴도 보기 싫어.” 그러면 엄마가, “그래 내가 없어져줄게.” 가버렸어요. 그 자식이 엄마를 찾을 때가 언제쯤 되겠어요? 재미나게 놀 때 안 찾지요. “아니고, 엄마 없으니까 속이 시원하네.”

오늘날 십자가 없는 교회 특징이 십자가 없으니까 속이 시원한 것과 똑같은 거예요. 우리 가정에 예수님 없으니까 속이 시원한 것과 똑같은 거예요. 같은 인간끼리 내 것끼리 놀면 즐겁잖아요, 행복하잖아요. 즐거운 곳에서는~ 예수님 있어서 노래 부릅니까? 날 오라 하여도~ 이러고 놀 때 예수님 때문에 노는 겁니까, 예수님 빠졌기 때문에 즐거운 거예요? 예수님 빠졌기 때문에 즐거운 거예요. 십자가라는 부정적인 요소가 빠졌기 때문에 즐거운 거예요.

그런 사람이 어딜 가? 누굴 찾아요? 예수를 찾을 리가 있습니까? 가짜 천국 찾지요. 분명히 이야기합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싫어한바 돼서 사라졌어요. 그래서 혹시 딸내미가 자기 엄마 찾을 경우는 어떤 경우네 찾습니까? “엄마 내가 잘못했어. 엄마, 내 고집과 내 본성 모두 다 엉터리야, 엉터리. 가짜였어.” 이럴 때 “나 엄마 없이는 못 살겠어.” 이럴 때 찾는 거예요.

예수님이 살아 있다 하는 것은 그냥 살아 있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 본연의 하실 일이 있기 때문에 살아 있는 겁니다. 그게 뭐냐 하면 자기 신부 찾기, 그리고 자기 양 찾기. 이거는 성경 언약의 내용이 그런 거예요. 주님이 그냥 살아 있다, 부처도 아니고. 부지런히 활동하시면서 뭔가 찾아내는 활동을 하시는 가운데 살아 계셔요. 살아 있기 때문에 활동하는 거예요.

그럼 뭐하느냐 하면 내 신부, 내 색시 어디 갔나, 찾는 거예요. 그리고 내 양 어디 갔나, 찾는 겁니다. 요한복음 10장에서 목자는 양을 알고 양은 누굴 안다고요? 목자 알고. 저 여기 있어요, 찾는 것. 찾을 때 뭐라고 하느냐 하면 너라는 양은 이 세상의 어떤 권세, 악마지요. 어떤 권세라도 내 손에서 내 품에서 빼앗을 수 없을 것이다. 내가 찾은 양은.

그 양을 찾을 때 양은 공통점이 있어요. “제가 잘못됐어요. 제가 다 엉터리였어요. 제가 문제였습니다. 나는 나밖에 몰랐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양이 된다는 말은 오늘부터 나는 주님만 섬긴다, 이게 아니고 평생 죽을 때까지 나는 나밖에 모르는 인간인 것을 계속 깊게 알아가는 거예요. 그것도 즐겁게, 그것도 감사한 마음으로.

만약에 예수 믿는 것을 내 것으로 만들어버리면 예수 믿는 것을 “나는 이제 복음 알았어. 나는 십자가 알았어.” 하고 “이건 내 거야, 내 믿음이야” 하고 만들면 여기에 일곱 귀신, 열두 귀신, 일곱 귀신 정도가 아니고 군대 귀신 다 찾아옵니다. “너 똑바로 살아. 그래서 죄 지으면 탈락이야” 이런 식으로 참소하지요. 악마의 주특기는 뭐냐 하면 고자질하는 거예요. “쟤 예수 믿다가 타락했어요, 하나님.” 하고 하나님 앞에서 계속 고자잘해요, 악마가.

고자질하는 대상이 왜 됩니까? 왜 고자질한 거예요? 예수 믿는 걸 내 거라고 여기니까 우리라는 걸 생각 못하고 성경에서 좋은 것은 내 것 만들었으니까 같이 악마가 찾아오도록 유도한 것 밖에 안 돼요. 사람이 인간이 무너지는 것은 자기 중량 때문에 자기 무게 때문에 무너지는 거예요. 자기 가진 게 많기 때문에 무너지는 겁니다. 옛날 잘 나갔던 시절 생각해서.

마귀가 얼마나 쪼아댔겠습니까? “니 꼬라지 보니 나 같으면 죽어버린다.” 이런 식으로 얼마나 악마가 쪼아대겠습니까. 내 것이 있으니까 사는 게 저주스러워요. 왜냐하면 내 것 지키려고 하니까. 마귀는 고자질하지, “아니에요. 나는 착한 일도 많이 했어.” 지가 지 방어나선다고 긴장돼있으니까 뭐가 탈락이냐 하면, 고마움도 탈락, 감사도 언제나 감사했는지 감사한 적 있어요? 이거 하나 끝나면 이거 안 되면 어떡하지 벌벌벌, 이거 안 되면 내 것 손핸데 벌벌 떨고.

열 자식 있으면 바람 잘 날 없다했듯이 끊임없이 인간은 자기 무게에 진동하고 자기 무게에 후달리면서 세월은 자꾸 가는데 몸은 늙어 가는데 아무리 봐도 자기가 자기 만족스럽지 못하니까 짜증만 확 나는 거예요. 이게 역대상 4장이 이스라엘에게 한 점이라는 것을 여러분들의 유념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럼 이방인들은 뭐냐? 에베소서 2장 12절 누가 읽어보세요. 신약에 있습니다.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너희는 외인입니다, 바깥사람 됐지요. 그러니까 여러분 천국은 없어요. 이방인에게. 천국 없습니다. 하나님도 없어요. 왜? 언약이 없기 때문에. 진짜 하나님은 언약을 주고 오는데 언약이 없는 하나님은 우상이지 그건 신이 아니거든요.

인간에게는 신이 없어요. 이방인들은 하나님 없이 살고, 가짜 하나님 말고요. 아까 수덕사의 여승처럼 가짜 부처 말고 진짜 나밖에 없기 때문에 신도 나를 위한 신이에요. 그러니까 이건 신이 아니라니까요. 허깨비지요. 이방인에게는 언약이 없고요 하나님도 없고, 언약이 없기 때문에 뭐가 없느냐? 천국이 없는 거예요.

그러면 교회 와서 성도 됐다는 말은 어떻게 변화됐느냐 하면 하나님도 없고 천국도 없는 인간이 뭐로 되었다? 하나님 안에 있게 되었고 천국 안에 있는 걸로 변했지요. 그러면 나 자신은 뭐로 변했습니까? 옛날에 내가 믿었던 하나님, 내가 믿었던 천국은 다 가짜임을 알게 된 나로 변한 거예요. 왜? 나를 위해서란 자체가 성경에선 용납이 안 되기 때문에. 나 하나 개인 이익 보려고 믿는 그런 예수, 하나님은 애당초 그런 건 없었던 거예요.

근거를 대라면 창세기 49장 7절, 하나님의 이스라엘 백성, 야곱의 아들 시므온과 레위는 아버지로부터 뭘 받았습니까? 두 번씩이나 저주를 받은 게 근거가 되는 거예요. 아하, 저주받는 복 안에 복스러움과 저주스러움이 있는데 진짜 복을 알려면 반드시 출발점을 저주받아야 마땅함으로부터 복으로 들어가야 돼요. 그리심 산과 에발 산에 있던 그 언약궤의 취지를 알지요.

그래서 성경은 뭐냐? 언약궤의 이동경로가 바로 성경입니다. 이 땅에서 저주받을 분으로 오셔서 부활에 이르는 그 경로, 그 예수님이 바로 언약의 완성이지요. 그럴 때 그 경로를 따라가게 되면 놀랍게도 나의 것은 애당초 주께서는 안 받는다는 그 사실을 알지요. 나의 것, 나의 구원, 나의 믿음, 나의 소망, 나의 복은 애당초 그런 것은 없었다는 겁니다. 우리의 복, 우리의 소망, 우리의 믿음, 우리의 사랑 그게 요한복음 14장에 나오는 거처를 함께 하는 거예요. 거처는 하나밖에 없는데 거기 옹기종기 모여 살아요. 그게 바로 신의 패밀리입니다. 가족이에요.

마태복음 10장 봅시다. 32절, 33절 읽어볼게요.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요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부인하리라” 만약에 어떤 딸이 있는데 “네 아버지, 문재인 대통령이지?” 딸이,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부인한다면 거기에 문재인 대통령 있다가 딸보고, “누구세요?” 할 거예요. 가족이잖아요. 가족인데 어떻게 아버지고 구세주를 부인할 수 있습니까.

만약에 우리가 되는 게 아니고 내 것을 갖고 있다면 우리는 내 것 손해 보게 되면 하나님이든 예수든 뭐든 다 내칠 것입니다. 그리고 같은 뜻으로 이렇게 할 거예요. 내 것 챙겨주면 그게 하나님 되면 하나님 믿고, 부처면 부처 믿고, 알라 되면 알라 신을 믿겠다는 거예요. 심지어 무당이 내 소원을 들어주면 나는 내 사주팔자부터해서 손금, 궁합 다 본다. 요새 서양 점은 뭐라 합니까? 타로까지 다 본다. 그래서 교회와도 타로 보고 교회 갔다 와서 타로 보고 하잖아요.

이게 뭔 뜻입니까? 나는 나만 시인하고 싶다는 거예요. 나 말고 다른 사람은 시인하고 싶지 않다. 예수님께서 인간을 알잖아요. 그래서 마태복음 10장 30절에,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바 되었나니” 아침에 일어나서 나이 육십 넘으면 머리카락이 죽 빠져있지요. 우리는 세는 게 귀찮잖아요. 주께서 다 헤아리지요. 왜? 자기 양이고 자기 신부기 때문에. 그냥 주께서 노시는 게 아니거든요.

그냥 노시는 게 아니고 어떤 프로젝트를 진행시키고 있습니다. 양 아닌 자를 양 되게 하고 내 색시 아닌 자를 색시 되게 하시는 남편의 집요함, 거기에 대해서 우리 양과 신부가 된 성도는 치열하게 얽혀 들어가야 돼요. 인생이. 인생의 어떤 시간도 우리 남편 배제하고 목자 배제하고 그런 시간 보내면 안 돼요.

항상 내 것 아닙니다, 주님. 주님의 것입니다. 그런 마음으로 마트에서 물건을 사시든지 샤워를 하시든지 뭐 잠을 자시든지 식사를 하든지 맛 집에 가든지 항상 혼자 가지 마시고 가족의 이름으로 가시기 바랍니다. 그게 바로 복이에요. 나, 나 혼자 안 살게 되었다는 게 복입니다. 그 의식. 따라서 한 가족은 사람의 말 듣는 게 아니고 늘 주의 말씀을 그리워하고 가까이하고 내 죄를 담당하신 그 십자가의 능력, 효과에 대해서 늘 고마워하게 될 겁니다.

이게 역대상 4장에서 두 번째 시간에 뭘 할 거냐 하면 인간이 먼저냐, 땅이 먼저냐 그 이야기하겠습니다.


10분 쉽시다.

20211203b 울산강의-역대기상(6강) 4장 40절 : 후크와 자크
(강의:이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하겠습니다.

사람이 살려면 땅이 있어야 된다 하지요. 그런데 땅이 사람을 고른다면 사람들이 땅을 할 때 내가 원하는 땅은 내가 가질 수 있다. 왜냐? 땅은 코도 없고 눈도 없고 그냥 멍청하게 가만있으니까 내가 거기서 개발하면 그건 누구 땅이다? 내 소유의 땅이 된다고 생각하잖아요. 그런데 땅이 사람 차별하면 어떤 일이 생기겠지요. 놀라겠지요. 그럼 땅은 죽은 땅이 아니고 땅이 살아 있지요.

땅이 하나님의 지시와 명령을 따라버리면 이제는 땅이 하나님의 지시를 따르는 사람들만 하나님의 지시에 따르는 땅에 살도록 허용하고 나머지는 배제할 겁니다. 땅이 사람 고른다는 그런 의식은 이방민족한테는 그게 없습니다. 창세기 3장에서 아담이 범죄 해서 에덴동산 낙원에 살지 못하고 추방되어 나온 곳이 땅인 거예요. 그러면 하나님이 추방했다는 취지가, 땅도 역시 하나님 거니까, 그 땅의 취지가 그대로 녹아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인간은 어디에도 하나님의 취지에서 벗어날 공간은 인간에게는 일체 없습니다.

마태복음 8장인가 거기에 보게 죄면 거기에 갈릴리 바다를 통과하는 열두 제자들이 있지요. 예수님과 같이, 찾아볼 필요 없어요. 여러분 다 아시는 겁니다. 배에 예수님은 주무시고 열두 제자는 배를 타고 갈릴리 바다를 횡단하는데 그때 풍랑이 일었습니다. 자, 그때 열두 제자의 경험은 뭐냐 하면 갇혀있다는 거예요. 풍랑에 갇혀있어요. 그들이 경험한 것은 갇혀있는 거예요. 풍랑에서 빠져나올 수 없는 겁니다. 폭풍과 풍랑에서.

지금 코로나에서 빠져나올 위인이 있습니까? 아무도 없지요, 이 세상에. 인간으로 생겨났으면 RNA 바이러스에 다 전염대상이 되는 겁니다. 이 말은 뭐냐? 인간은 본인이 만들지 않은 상황에 갇혀있는 거예요. 흔히 말하는 나라는 것, 다른 말로 주체라는 것은 그냥 홀로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홀로 있는 게 아니고 갇혀있는 상황을 대변해주고 있는 겁니다. 인간은 그 시대의 풍조에 놀아나고 있는 거예요.

우리가 조선시대 사극 보고 조선시대 사는 것 보고 얼마나 기가 찼습니까. “저게 돼지우리지 사는 거냐?” 하지만 조선시대 사람은 그게 사는 거예요. 왜? 그 사람들은 21세기의 호텔을 모르니까요. 자동차를 모르니까. 조선시대 여성들 사는 것 보세요. 요새 식모도 그렇게 안 살아요. “저거 뭐야 여자가 시집 와서 무슨 짓이야? 왜 저렇게 구박받아. 인간 대우도 못 받는 거야.” 그러나 그 시대 사람은 그 시대 사람이에요. 그걸 대변해주고 있는 겁니다.

요새 사람들의 살아가는 모습을 한 마디로 말하면 이런 거예요. “나 지금 뭐하고 있지?” 이거에요. 열심히 회사 다니고, 가정주부 열심히 하는데 그래서 그게 뭔데? 그게 뭐예요? 그게 모여서 나를 죽게 하는데 그게 뭔데. 시가집에서 김장 다 하고 와서 잘했다고 김장김치 몇 포기 얻고 거기다가 수육까지 얻어먹고 집에 왔다. 집에 오니까, “엄마, 나 백점 맞았다.” 했다. 그게 뭔데요? 아무 의미 없는 아무 의미 없어요. 남들 다 하는 건데 뭐 의미 있어요. 아무 의미 없습니다.

그러면서도 인간은 뭐냐? 뭐하고 있지, 뭐하고 있지 이러면서 세월 가면서 조금씩 뭐냐 하면 나는 없어진다. 점점 촛불처럼 한 해, 한 해 점점 더 깎여나가요. 내가 없어져요. 점점 더 없어져 간다, 점점 더 없어져요. 나중에 죽으면 진짜 다 없어지고. 갇혀있어요. 나를 죽게 한 환경 속에 갇혀있습니다. 그러면 죽기 전에 왜 죽는지를 알아야 될 게 아니겠습니까? 그것은 우리가 이 땅에 살만한 가치가 없기 때문에 죽이는 거예요. 땅이 우리를 죽이는 겁니다.

이걸 이방인들은 몰라요. 그런데 하나님께선 아시고 땅에다가 뭘 입혀버리느냐 하면, 뭘 깔아버리느냐 하면 언약을 쫙 깔아버렸어요. 언약이 깔린 땅에 살 재주 있거든 살아봐라. 이게 열두지파의 땅 분배입니다. 언약이 깔려있는 땅이 너희들이 살 재주 있거든 살아봐라. 그러면 그 땅에 산다는 것은 조건이 이미 정해져있지요. 무엇에 부합돼야 돼요? 하나님의 언약, 다른 말로 율법이죠. 율법에 부합된 자만이 약속의 땅에 살고 그래야 약속을 표출하는 약속을 발산하기 때문에 그걸 약속의 백성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럼 약속이 없으면 뭐냐? 나 지금 뭐하고 있지? 아무 의미 없는 하루하루를 그냥 살 뿐이에요. 어떻게? 그 시대의 풍조대로 그냥 놀아나는 거예요. 놀아난다는 것은 그냥 게임 판에 푹 젖어있어요. 그 시대의 게임. 내년 3월 9일에 국민의 힘 찍어줄래요, 민주당 찍어줄래요? 이게 게임이잖아요. 나는 허경영이 찍을래. 이렇게 되면 그것도 하나의 게임이라고요. 순간순간 내가 뭐하고 있는지에 대해서 너무 무의미하기 때문에 의미를 갖다 붙이려 하다보니까 요새 정치판 어떻게 돌아가나, 이게 지가 인터넷 찾는 거예요. 그 재미나 있어야 약간은 허무성을 메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땅은 우리를 죽여 버립니다. 그냥 살다가 너는 소리 없이 죽어버려. 따라서 주님이 주신 땅은 누구 말 듣느냐 하면 인간 말 안 들어요. 언약 말을 듣습니다. 이 땅이 언약 말을 듣기 때문에 이렇게 생각하시면 됩니다. 땅이라 하면 약속의 땅이 대표적이지만 약속의 땅이라 합시다. 땅이 네모나게 있다면 여기 누가 누워 계시느냐 하면 우리 주님이 누워 계신 거예요. 이게 약속의 땅이에요.

그러면 이 땅에 유다 지파는 아까 땅이 있다 했지요. 보셨지요. 그리고 시므온 지파, 오늘 역대상 4장에 나오는 시므온 지파는 땅이 있어요, 없어요? 땅이 없다 했지요. 여기는 땅이 있음, 땅이 없음 이 사이에 어떤 스펙트럼이 있지요. 빨주노초파남보 이렇게 구분된 모든 절차를 구분하는 색깔들이 있을 게 아니겠습니까.

그 사이에 누가 관여하느냐? 바로 하나님의 이름이 요새 말하는 예수님이 관여하는 거예요. 전부 다. 없는 자는 누가 없게 했다? 주께서 없게 했다. 있는 자는 누가 있게 하셨다? 주께서 있게 하시는 거예요. 그럼 그 사이에 조금 덜 있게 하고 더 있는 것 누가 그렇게 하셨습니까? 주님이 그렇게 하신 거예요.

그런데 사람들은 시므온과 레위 지파는 아까 분명히 했습니다. 이건 무슨 지파냐? 저주받은 지파지요. 저주받은 지파에서 복이 되는 그 과정이 중요합니까, 복 받은 게 복이 되는 과정이 중요해요? 어느 과정이 중요하겠어요? 어느 것이 예수님, 어느 것이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을 더 드러내겠어요? 스펙트럼이? 이쪽이죠. 저주받았는데 땅을 가질 때 더 드러내겠지요. 그러면 은혜의 한도가 갈수록 점점 더 그래프로 이야기하면 이쪽이 저주 쪽에 갈수록 죄가 더한 곳에 뭐가 넘친다? 은혜가 넘치는 거예요. 죄가 더한 곳에. 어차피 가족이니까 내 게 아니잖아요. 가졌다고 내 게 아니에요.

형이 아이큐가 150 넘어서 공부를 잘해서 나중에 졸업해서 돈도 잘 번다. 그러면 부모가 돌아가실 때 유언을 하면서 너는 공부를 잘하니까 너 혼자 잘 먹고 잘 살아라, 이렇게 합니까? 아니면 날 때부터 머리가 나빠 공부도 못하고 지금 하는 일도 안 되는 동생을 돌봐라, 이렇게 하겠어요? 어느 쪽입니까? 동생을 돌보라 하겠지요. 왜? 어느 자식이든 다 누구 자식이기 때문에? 부모 자식이기 때문에.

그런데 이스라엘 같은 경우에 복이 누구냐 하면 예수님 자신이 복이고 예수님 자신이 생명이에요. 생명을 갖고 있다고요. 인간들은 생명이 없어요. 생명을 갖고 있는데 나한테 생명이 있음을 드러내는 티가 저주받아야 될 땅에서 그들이 산다는 자체는 뭐냐 하면 어떻게 저주받을 땅에서 너희들이 생명을 얻고 살 수 있느냐, 희한하지 않느냐, 이상하게 생각 안 돼? 이런 식으로 이스라엘은 이방민족을 향하여 오늘날 우리를 향하여 역대상은 우리를 향하여 이렇게 이야기하는 겁니다.

의식 자체가 나 혼자 산다는 의식으로선 성경해석 자체가 안 돼요. 주님은 왜 오셨습니까, 라고 생각을 해야 돼요. 아까 첫째 시간 다시 질문하겠습니다. “주인님, 왜 저한테 이런 혜택을 주십니까? 이런 은혜를 왜 주십니까?” 물을 수 있는 대상이 있어야 돼요. 그래야 그 사람이 신자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에요. 물을 수 있는 대상. 맨날 자기가 자기 보고 지시 내리지 말고. 주님에게 물어야 돼요. 제가 뭔데 이런 혜택을 주시는 겁니까?

만약에 물을 대상이 없이 혼자 산다면 그 사람이 매일하는 것은 도대체 뭘 하는지 모를 정도로 아무 의미 없는 겁니다. 그래서 항상 없는 쪽에서 우린 은혜를 발견해야 되고 저주받은 쪽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복을 발견할 줄 알고 생명을 발견할 줄 알아야 돼요. 유다가 땅을 많이 차지했다고 해서, 그리고 시므온은 땅이 없다고 해서 그걸 저주나 받아라, 이래서는 안 된다 이 말입니다.

그래서 여호수아도 그렇고 사사기에도 나오지만 다 찾을 순 없고요. 시므온 땅은 어디 안에 있느냐 하면 유다 안에 있어요. 여호수아 19장 9절을 누가 읽어보세요. “시므온 자손의 이 기업은 유다 자손의 기업 중에서 취하였으니 이는 유다 자손의 분깃이 자기들에게 너무 많으므로 시므온 자손이 자기의 기업을 그들의 기업 중에서 얻음이었더라” 이게 뭐냐? 더부살이한 거예요. 얻어먹고 살은 거예요.

그러면 우리가 알아야 될 것은 열두지파 자체가 스펙트럼이란 말이죠. 어떤 사람은 복이 들어가고 어떤 사람은 저주가 들어가는데 그건 나는 복 받았다 하면 안 된다 했지요. 나는 저주받았다 하면 안 된다 했지요. 이 모두가 열두지파 하나를 형성하는 거예요. 빨주노초파남보가 전부 다 하나 안에 패밀리로서 들어가 있는 거예요. 그 전체가 뭐라 했어요? 그 전체가 복이에요.

그 복을 구성하기 위해서 복스러움이 주어질 수 있고 어떤 사람은 저주스러움이 주어져있지 저주스러움이 저주가 아니에요. 역시 복 안에 있으니까 저주가 무엇이 저주인가를 드러내는 역할을 맡을 뿐입니다. 영화가 되려면 주인공도 있지만 악한 역할도 있잖아요. 악한 역할도 해야 돼요.

<사랑과 전쟁> 드라마 보면 늘 학대받고 미움 받는 착한 며느리도 있지만 어떤 역도 있습니까? 못된 시어머니 있잖아요. 김장김치 들고 김치 싸대기 날리는 역도 있다고요. 그런데 김치 싸대기 맞았다고 드라마 촬영 끝났는데 멱살 쥐고 흔들면 안 되지요. 왜? 영화는 영화니까요. 우리 영화배우들 아니에요? 여러분들 하나님의 색시 아닙니까, 양 아니에요?

오른쪽에 있는 양은 천국 가고요 왼쪽의 염소는 어디 갑니까? 마태복음 25장에서 지옥 가지요. 지옥 역할, 합기도 바깥에서 잘하고 있어요, 지금. 그 사람들은 자기밖에 몰라요. 자기가 전부에요. 그 역할 해야 돼요. 근데 그게 저주라는 걸 모르고 있다는 거예요. 출세하고 성공하고 서울대학 들어갔다고 좋다 하지요. 그게 저주에요. “아이고, 니가 남편 잘 만나서 팔자 고쳤구나.” 그게 팔자 고치면 뭐합니까, 그게 저주인데요.

여러분들 교회 나올 때 복음 관심 없이 나온 사람한테 물어보세요. 당신이 생각하는 좁은 길은 어떤 모습입니까, 라고 물어보세요. 성경에 마태복음 7장에 좁은 길, 넓은 길 나오지요. 그러니까 질문을 이렇게 하라고요. “당신이 생각하는 좁은 길은 어떤 길입니까?” 물어보세요. 성도란 답을 내는 사람이 아니고 질문을 하는 사람이 성도입니다. 성경대로 질문할 수 있는 사람, 주님의 입장에서 질문하는 사람이 성도에요.

자꾸 답을 내는 사람들은 가짜일 말뿐일 가능성이 굉장히 농후합니다. 99.99%로. 질문을 할 수 있어야 돼요. 당신이 생각하는 좁은 길은 어떤 길입니까, 라고 그 사람들에게 복음에 관심 없는 교회에 나온 사람들에게 물어보세요. 그러면 뭐라고 이야기하겠어요? 예상을 해보세요. “주를 위해서 고난을 받은 사람이다.” 이렇게 이야기하겠지요. 그렇게 나오면 그 다음 물어보세요. “좁은 길 가는 사람은 어떻게 됐지요?” “그거야 천국이지요.”

그러면 좁은 길 반대말이 뭐냐고 물어보세요. 넓은 길이죠. 그럼 넓은 길은 어떤 길이냐고 물어보게 되면 고생 안 하고 예수 믿으려고 그렇게 요령부리는 사람이죠. 그 다음에 마지막 물어보세요. 그런 사람이 교회 나오는데 어디 가냐고 물어보세요. 교회 나오는데 지옥 가지요. 결국 교인들에게 그런 질문하면, 니가 뭔데 지적질이야, 라고 대판 싸우자 하지요. 내가 지적하는 게 아니고 좁은 길이 뭔지 궁금해서 물었다고 하세요.

좁은 길이 뭔지를 여러분들은 평소에 생각합니까? 좁은 길 보내주셔서 고맙다고 하루일과를 시작하십니까? 오늘도 좁은 길로. 이렇게 좁은 길, 좁은 길 구호외치면서 시작합니까? 오늘도 무탈하게, 무탈하게! 무탈해서 지옥 가잖아요. 넓은 길이기 때문에. 심지어 놀라운 사실은 좁은 길은 찾은 사람이 어떻습니까? 적지요. 그런데 아까 울산에 한 사람밖에 없고, 우리 동네에 한 사람밖에 없고. 제대로 좁은 길이 돼 제대로 가고 계시네요. 뭐 감사해야지요. 친구 없어서 섭섭하지만.

시므온 지파가 유다 지파에서 얻어먹듯이 이 땅 네 땅해라, 이렇게 동냥 받듯이 얻는 땅도 있어요. 그런데 역대상, 오늘 본문 처음 한다. 역대상 4장 41절에 보면, 역대상 4장 24절부터 계속 시므온 자손 이야기하거든요. 시므온 자손 이야기하면서 어디까지 이어지느냐 하면 40절까지 이어져요. “아름답고 기름진 목장을 발견하였는데 그 땅이 광활하고 안정하니 이는 옛적부터 거기 거한 사람은 함의 자손인 까닭이라” 이렇게 돼있어요.

시므온은 이스라엘 내부에서 복스러움에 속합니까, 저주스러움에 속해요? 저주스러움에 속하지요. 그래서 빌어먹듯이 자기 땅은 없고요 흩어지고 유다 땅에 얹어 살지요. 얹어 사는 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뭘 허락했느냐 하면 함 자손의 땅을 주신 거예요. 그러니까 이스라엘 내부에서는 저주스럽지만 이방인인 함에 비해서는 이거는 도저히 비교할 게 없이 영광스러운 약속의 땅을 거주하게 된 거예요. 적어볼게요.

땅의 거주가 아니고 약속의 땅에 거주하는 거예요. 감히 약속이 펼쳐진 제한된 가나안 땅에 거주하는 거예요. 이 약속의 땅은 어떤 땅이냐 하면 약속이 없는 자들을 추방시키고 저주하는 땅이에요. 그 땅을 여러분 감당할 수 있습니까? 약속이 없는 자를, 하나님 말씀이 없는 자를 추방하고 내쫓는 그 땅을 여러분이 감당할 수 있겠어요?

그리고 43절을 보면, “피하여 남아 있는 아말렉 사람을 치고 오늘까지 거기 거하였더라” 아말렉은 저주받은 민족이에요. 이방민족입니다. 이방민족이라도 가장 저주스러운 민족이에요. 이 민족을 치고 누가? 유다 아니고 시므온 자손이 오늘날까지 거기에 거하였더라. 오늘날까지라 하는 것은 역대상이 결정된 것은 바벨론 포로 잡혀가 있는 그 상태, 역대상이 바벨론 포로이후에 쓴 책이거든요. 그러니까 바벨론 이야기, 잡혀간 이야기 역대상하에 다 나와 있습니다.

그때까지 시므온 지파가 그 약속의 땅에 거주하고 있었던 겁니다. 분명히 창세기 49장에 보면 야곱이 예언하기를 너는 흩어져서 네 소유의 땅은 없다고 돼있는데 네 소유의 땅이 없기 때문에 약속과 은혜 됨이 더욱 더 시므온 지파, 레위 지파를 통해서 빛이 나는 겁니다. 자, 지금 시므온 지파 이야기했지요.

근데 아까 창세기 49장 5절에 보면 시므온과 레위는 형제고 그들의 칼은 잔해하는 기계라 해서 저주받는 것이 시므온 지파뿐만 아니고 레위 지파도 같이 저주받잖아요. 지금은 시므온 지파는 유다 지파에 대부분 더부살이하는 형국으로 살아 있는 거예요. 내 땅이 없는 거예요. 이게 저주스러운 복이에요. 저주스럽기나 말거나 복 받은 땡이지 뭐. 이거 우리 모습 아닙니까.

우리가 무슨 율법을 지켰어요, 뭐 지켰어요? 아무것도 안 했잖아요. 그런데 우리는 오후 다섯 시에 온 사람처럼 왜 저에게 천국의 그런 복을 주시는 거예요, 라고 물음이 돼요. 내가 묻는 분이 한 가족이 되는 거예요. 저를 왜 오늘도 살게 하십니까? 물을 수 있는 분이 계시다는 거예요. 성도가 아니면 그런 존재가 없어요.

아쉬울 때는 신이시여, 아까 수덕사의 여승처럼 비는 거지, 오히려 반대로 생각하지 않는 거예요. 무의미하게 살아야 될 내가 왜 나로 하여금 예수님에 관해서 질문을 던지는 관계로 만들어주십니까? 주님과 어떻게 아는 사이가 됩니까? 주님, 뭐라고요. 우린 이순신 장군, 세종대왕도 안 보는데 예수님은 아는 사이가 됐잖아요. 세상에 이런 엄청난 일이요.

시므온은 그렇고 레위 지파 보세요. 레위 지파는 땅도 없어요. 땅도 없는데 레위 지파가 뭐냐? 장자 노릇합니다. 레위 지파가 하는 제사행위 없이는 이스라엘 멸망하게 돼있어요. 비록 자기 땅은 없지만 비록 자기는 얻어먹는 입장이지만. 왜? 십일조 안 해주면 레위 지파 몽땅 다 망합니다. 그들은 땅이 없어 생산지가 없어 십일조로 밥 먹고 사는데 그들이 신앙이 없어 헌금 안 내면 다 망해버려요.

그러니까 레위 지파, 시므온 지파 특징이 뭐냐? 없음이에요. 없음의 위력을 보여주는 겁니다. 내 것 없음의 위력. 제가 이렇게 하면 여러분들 걱정이 돼서 목사님 그럼 우리 거지되란 겁니까, 라고 이야기할 건데요. 한 달 수입이 천오백만 원 되는 사람은 한 달 수입이 십오억 되는 사람한테 거지에요. 거지란 말이죠.

그러니까 한 달 수입이 천오백만 원으로 거지지만 참고 사세요. 할 수 있나. 참고 살아야지 어떻게 하겠어요. 거진데 뭐. 그래서 성경에 먹는 것 입는 것 족한 줄로 알라 했잖아요. 차 두 대 있는 사람은 네 대 있는 사람한테 거지고요, 국산 차 타는 사람은 벤츠나 고급 차 미국 차에 비하면 차도 아니잖아요. 뭐 어쩌겠어요, 그랜저나 타고 다녀야지. 거진데 뭐요. 내가 가진 모든 것이 거지에요. 천국에 비하면. 참으시기 바랍니다. 이 거지 생활을. 한 달 수입 천오백 밖에 안 되는 거 참으시기 바랍니다.

자, 그 다음에 중요한 게 이거에요. 뭐냐 하면 그 창세기 49장에 보면 5절에, “시므온과 레위는 형제요 그들의 칼은 잔해하는 기계로다” 왜 이러한 저주스러움을 받는지 이유가 창세기 34장 25절에 보면 나옵니다. 야곱의 열두 아들 말고 딸이 하나 있어요. 이름이 디나. 미국식으로 하면 다이애나. 디나가 그 땅 여자를 보고 같은 여자 친구 찾아갔다가 2절에 세겜이 그를 보고 강간했어요. 강제로 성폭행이란 말 듣기 싫어요. 그냥 강간이에요.

그리고 거기에 대해서 야곱이 하나의 패밀리, 가족 아닙니까. 자기 가족 중에 구성원이 하나 당했지요. 그러면 가족의 이름을 더럽히는 거잖아요. 7절에 보면, “야곱의 아들들은 들에서 이를 듣고 돌아와서 사람 사람이 근심하고 심히 노하였으니 이는 세겜이 야곱의 딸을 강간하여 이스라엘에게 부끄러운 일 곧 행치 못할 일을 행하였음이더라”

그 땅 추장이 세겜이고 그 아버지 이름이 하몰. 하몰한테 세겜이란 자가 총각이 지 아버지한테 이야기해서 내가 새로 들어온 나그네 집단인 야곱 집단의 디나를 사랑하니 아내로 삼게 해 달라. 그러면 하몰도 좋은 게 좋다고 이미 일 저질러진 것 어떻게 좋게 넘어가라. 이렇게 했는데 야곱의 아들들이 분에 못 이겨서 25절 봅시다.

일체 모든 남자들이 할례를 행하면 우리 집안과 당신 집안이 결혼 하겠다 해서 24절에, “성문으로 출입하는 모든 자가 하몰과 그 아들 세겜의 말을 듣고 성문으로 출입하는 그 모든 남자가 할례를 받으니라 제 삼일에 미쳐 그들이 고통 할 때에 야곱의 두 아들 디나의 오라비” 그 다음에 나오는 단어 뭐예요? “시므온과 레위가 각기 칼을 가지고 가서 부지중에 성을 엄습하여 그 모든 남자를 죽이고 칼로 하몰과 그 아들 세겜을 죽이고 디나를 세겜의 집에서 데려 오고” 여러분 이게 정의구현 아닙니까? 정의구현 맞잖아요.

그것 보셨지요. 그리고 난 뒤에 창세기 49장 5절을 봅시다. “시므온과 레위는 형제요 그들의 칼은 잔해하는 기계로다” 잔인한 기계 같단 말이죠. 7절에 봅시다. “그 노염이 혹독하니 저주를 받을 것이요 분기가 맹렬하니 저주를 받을 것이라 내가 그들을 야곱 중에서 나누며 이스라엘 중에서 흩으리로다” 그들을 흩어서 독자적인 그들만의 땅, 그들만의 지위는 내가 주지 않겠다고 돼있어요.

자, 정의구현이 아니었다 이 말이거든요. 그러면 시므온과 레위가 왜 그렇게 여동생 강간당한 것에 대서 화를 내서 모든 남자를 다 죽이는 일을 하게 되었습니까? 아까 첫 번째 강의에 의하면 그들은 지금 힌트가 어디 있느냐 하면 나의 혼, 하나님의 마음은 그들의 단체, 그들의 모임에 나는 참여하지 않고 빠지겠다고 돼있거든요. 창세기 49장 맞지요.

49장 6절에, “내 혼아 그들의 모의에 상관하지 말찌어다 내 영광아 그들의 집회에 참예하지 말찌어다” 나는 그들의 집회에 내 영광을 허락하지 않겠다고 나왔다 이 말이죠. 그러면 이 말은 뭐냐? 하나님께서는 시므온과 레위가 갖고 있는 의무, 그 정의감에 인정 못하겠다는 뜻이거든요.

지금 피해 입은 자가 디나가 그 사람은 야곱이란 복 받은 가정에, 언약의 가정에 딸이기 때문에 디나를 건드린 것은 야곱언약 자체를 건드린 건데 왜 하나님께서는 그 정의로운 대처를 인정하지 않느냐 이 말입니다. 첫 번째 강의에 의하면 그들은 그 가족을 뭐냐 하면 나의 가족으로 봤기 때문에 그래요. 뭐로 생각했어요? 우리의 가족이 아니죠.

그런데 우리 안에 누가 들어간다 했습니까? 야 4타수 4안타. 예수님과 하나님의 이름, 다른 말로 언약. 언약이 들어갔다는 것은 주도권이 누구한데? 언약한테 있는 거예요. 주님한테 있습니다. 주님의 지시를 받아야지요. 주님의 지시를 받는 중개, 매개자가 그 당시 아버지 야곱이에요. 아버지의 지시를 안 받은 거예요. 왜? 아버지가 사다리가 왔다 갔다 했으니까 천사가. 야곱이 언약의 주도권을 갖고 있기 때문에.

그러면 이 창세기 34장의 야곱은 어떤 야곱이냐 하면 창세기 32장의 야곱이 아닙니다. 창세기 31장의 야곱이 아니고 창세기 32장을 거쳐서 온 창세기 34장의 야곱이거든요. 창세기 32장의 뭘 거쳤느냐 하면 야곱은 누굴 만났느냐? 밤에 하나님의 천사를 만나서 야곱이 와장창 다 깨졌지요.

야곱의 본성은 뭐냐? 지고는 못 산다 아닙니까. 하나님이든 뭐든 나를 공격하면 나는 가만두지 않는다. 이게 육적인 거예요. 나는 누가 지킨다? 나는 내가 지키는 거예요. 이 말은 뭐냐? 내가 나를 지키지 않으면 아무도 지킬 사람 없다. 이게 바로 육적인 인간의 특성입니다. 타고났어. 모든 인간은 태어나면 다 그래요.

간단하게 쉽게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후크에서 자크에요. 하나의 천이 있다 합시다. 천은 중간에 갈라짐이 없어요. 자, 여기서 갈라졌을 때 두 조각냈을 때 이쪽과 이쪽을 연결시키려면 여기다 단추 달아서 붙였다. 뎄다 후크를 만들면 되겠지요. 바지에 있는 후크처럼 붙였다, 뎄다 하면 되겠지요.

그러면 이스라엘 열두지파는 아버지가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았지요. 복을 받았을 때 그들은 복을 받았다고 여기는 거예요. 아버지께 받은 복이 나의 어떤 행동으로 취소가 될까요, 안 될까요? 취소가 안 되지요. 그래서 디나라는 여동생이 지역의 토착민 남성한테 힘에 부쳐서 강간을 당했다는 사건이 없다고 한다면 그 당시 세겜 남자들에게 야곱의 아들들이 분노를 가질 필요가 없겠지요. 이게 어려우니까 잘 들어보세요.
내가 남한테 사람 만나면 다 쳐 죽이려 하면 그건 정신병자고, 그건 아니고 사람에게 감정을 갖는다 말은 심지어 부부사이에도 마찬가지에요. 부부사이도 싸우려고 결혼한 사람 없습니다. 우리 본격적으로 싸우자. 그거는 링에서 격투기 붙으려고 결혼한 것 아니잖아요. 나 잘해주면 니 잘해줄 거라는 그러한 어떤 가능성 믿고 하잖아요. 남자가 남편이란 작자가 또는 아내란 작자가 나의 심기를 건드린 거예요. 처음엔 한두 번 봐줍니다. 나중엔 가만있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 와락 달려들지요. 그렇다고 이혼하고 거기까진 안 나간단 말이죠.

무슨 말이냐 하면 이미 아버지한테 복 받았잖아요. 복 받은 자식들이 성깔대로 성질대로 살아도 괜찮다는 그런 계산이 소위 하나님 복 받은 가족들에게 다 있다 이 말입니다. 예수님 십자가 피 흘려서 우리 죄 사했잖아요. 사했으면 성깔대로 살아도 괜찮다 이 말이에요. 이런 아이디어가 있는 거예요.

그런 질문을 얼마나 받았는지 막 살아도 됩니까, 막 사세요. 이런 것. 목사님은 왜 막 사세요 해서, 이런 것. 이런 이야기를 수십 년 동안 들어왔던 거예요. 어떤 사람은 예수 믿었으니까 바르게 살아야지 막 살면 안 된다는 거예요. 또 어떤 사람은 예수 믿어 죄 용서받았는데 우리가 의인인가 죄인인데 막 살 수밖에 없지, 그런 사람도 있어요. 막 살 수밖에 없지는 맞는 말인데 막 살자하고 막 살고 싶어, 이런 건 안 되거든요. 이 차이점을 몰라요.

그래서 창세기 34장에 아버지께 복 받았는데 이게 뭔가 외부에서 세겜, 이방민족 아닙니까. 약속의 땅에 살 수 없는 게 건드렸잖아요. 건드렸을 때 화나는 것은 당연하다고 여기는 겁니다. 그 당연한 걸 주님께선 문제 삼는 거예요. 그러니 이거는 뭔가 안일하게 생각한 겁니다. 하나님의 복을 긍휼을 너무 값싸게 헐하게 본 거예요. 예수님 피 흘려 죽은 것을 그게 주님의 주특기인데 잘하셨고 우린 믿으면 될 것 아니냐. 너무 가볍게 여긴 거예요.

다시 말해서 주님은 죽었는데 우린 어떤 변화가 없는 거예요. ⓐ완전하게 살아가는 변화를 말하는 게 아니라 ⓑ그 전에 나를 봤던 나의 정의감, 나의 윤리와 도덕이 이게 천국에는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본인이 알아야 되는데 모르고 있었던 겁니다.

무슨 식이냐 하면 인간은 후크로 생각해서 성질내서 꾸중 듣잖아요. 꾸중 들어도 양쪽에 자석이 있어서 자석이 붙으면 다시 원상태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원상태 없습니다. 죄 짓고 용서받아 하나 되고 또 죄 짓고 용서받고 그런 식의 이스라엘, 그런 식의 교회, 그런 식의 천국백성 없습니다. 얼굴들 보니까 다 그런 식으로 생각한 모양이네.

그건 뭐냐 하면 후크가 아니고 자크에요. 자크와 후크의 다른 점은 후크는 갈라지면 완전히 갈라져요. 나중에 붙여줬던 뎄다 하잖아요. 자크는 뭡니까? 아무리 완전히 열렸더라도 완전히 다 끝까지 벌어지지 않아요. 자크 밑에 매듭이 있기 때문에. 그러면 자크 올리고 내리고, 올리고 내리고 하면서 열렸다 닫혔다, 열렸다 닫혔다 이렇게 되지요.

열린 것을 다시 닫을 때에 이게 뭐냐 하면 저지르는 것은 인간이 하고 봉합은 주님의 복이 인간의 죄를 이긴다는 것 인간에게 어떤 상황에 몰아세워서 그 상황 속에서 인간의 본색을 드러내는 거예요. 후크는 왜 안 되느냐 하면 성질내서 따로 갈라지면 저주를 저주스러움을 받아서 갈라져버리면, 그래 아버지 따로 내 따로 이렇게 돼버린다고요. 그래 예수님 따로 내 따로 이렇게 돼버린다고요.

나는 나지 뭐. 내가 예수 믿어줄 때 주님은 나한테 주가 됐지 나 안 믿으면 주님도 섭섭할 걸, 이러고 있는 거예요. 자기중심을 계속 유지하고 있는 거예요. 그러나 자크 같이 돼버리면 내가 뭔가 벌어졌을 때에 이 벌어짐이 십자가로 묶어놓은 그 피를 모독하는 것을 경유해서 다시 봉합되는 겁니다. 후크가 되면 “아이고, 잘못됐습니다. 하나님. 내 그때 괜히 인간의 성격상 한 번 분노를 했는데 저 죄인입니다. 십자가로 봐주세요.” 하고 자기를 위해서 십자가를 다시 도용한 셈이 돼요. 후크처럼 단추처럼.

그런데 자크는 뭐냐 하면 내가 구원받기 위해서 주님이 있는 게 아니고 십자가 이미 하나 되기 위해서 내가 이런 짓을 할 수밖에 없구나, 를 아는 거예요. 월수입 천오백 밖에 안 되는 가난한 사람 되면 되는데 괜히 욕심내서 주식투자해서 월수입 오천 되려다 쫄딱 망했을 때 내가 주님의 십자가를 드러내기 위해서 이런 욕심과 이런 정황이 일어나야 했군요, 라고 내 중심이 아니고 여전히 주도권이 누구한테 있다?

주도권이 나한테 있지 않고 주님한테 있음을 주님이 살아 있음을 인정할 때 그 사람은 자크 안의 세계에 놓여있는 사람입니다. 후크 안에 있는 게 아니고요. 만약에 후크 안에 있으면요 다시 주님의 자석에 단추에 달라붙기 위해서 내가 내 쪽에서 노력을 해야 된다고요. 그게 너무나 마귀적이죠. 그러니까 여기 붙어있을 우리가 아니에요. 예수님 십자가 백날 생각해도 하나 안 됩니다. 이미 하나 된 자만 하나가 되지 따로 떨어진 자가 하나가 될 수 없어요.

그래서 자크는 열렸다 닫혔다 계속 반복해요. 예수님 기도 마지막에 뭡니까?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뜻대로 한다 이 말은 내 뜻은 내 뜻대로 드러내되 그 뜻이 내 뜻대로 이뤄지지 않은 그것이 바로 주의 뜻인 것을 받아들이는 조건 하에 주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거예요. 그럼 미리 주의 뜻을 알면 안 되느냐? 우린 주의 뜻을 몰라요. 그냥 내 뜻밖에 몰라요. 내 뜻밖에 모르니까 내 뜻을 그냥 내놓으시고 그게 내 뜻대로 안 될 때 그게 주의 뜻이 되는 겁니다.

예를 들면 내 아들이 하나 있는데 내 아들이 복음을 받아들이게 하옵소서. 기도한다 이 말이죠. 자기 보기엔 하자가 없지요. 주의 뜻 그대로 있지요. 이건 내 뜻이에요. 나에게서 나온 내 뜻이에요. 자크가 아래로 열리는 거예요. 내 뜻대로 기도했는데 기도하기를 마음속으로 내 이름으로 기도하는 게 아니고 누구 이름으로?

주의 이름으로 기도하기 때문에 주의 이름으로 기도한다는 말은 내 뜻대로 마옵시고 누구 뜻대로? 기도하는 이름, 주의 뜻대로 마음대로 하시옵소서 했는데 아들이 복음을 받아들였다. 그럼 내 기도응답이에요, 주의 기도응답입니까? 주의 기도응답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우린 쉬지 말고 기도해야 자크가 오르락내리락하는 거예요. 계속해야 되는 거예요.

다시 창세기 49장 봅시다. “그들이 그 분노대로 사람을 죽이고 그 혈기대로 소의 발목 힘줄을 끊었음이로다”(6절) 이렇게 돼있지요. 이게 그들의 분노가 문제고요 그들의 혈기가 문제에요. 인간은 분노할 수 있고 혈기대로 움직이죠. 그래서 문제가 되는 거예요. 문제된다 하니까 혈기 없애고 분노 없애면 되지 않겠느냐? 아닙니다. 모든 인간은 혈기 있고 분노 있어요. 그래서 인간이에요.

그 인간을 혈기와 분노를 죽이란 말이 아니고 그게 발휘되되 발휘되게 되면 그게 주의 뜻이 아니고 주의 뜻이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뭐한다? 시므온과 레위 지파에게 저주스러움이 주어지는 것은 레위 지파와 시므온 지파에게만 해당되는 게 아니고 모든 다른 지파에게 다 해당되는 오늘날 우리에게 해당되는 이야기로 그들은 역할을 한 겁니다. 이제 그 퍼즐이 메워졌지요.

혈기와 분노는요 안 하고 싶어도 상황 오게 되면 내 여동생을 누가 놀리면 돌멩이를 죽든 말든 던지는 거죠. 인간은 타고난 아담의 본성이 그래요. 그게 자크가 내려가는 거예요. 주의 은총은 없고 분노가 우선이 되는 그런 상황이 오게 마련입니다. 문제는 열두지파 가운데서 사람 죽이자 할 때 다른 형제들은 가만있었는데 아까 창세기 34장에 저 인간들 남자들 다 죽이자 할 때 다른 형제들 말렸겠지요.

그건 너무하다. 그래도 내 동생 안 죽었잖아. 안 죽었는데 저 남자들 다, 그것도 죽여도 세겜만 죽여야지 모든 남자가 무슨 죄 있다고 다 죽이느냐. 말릴 사람이 있었지요. 있었지만 워낙 시므온과 레위가 너무나 분노해서 다른 형제들 보고 뭐라 했습니까? “너희들은 내 동생 지킬 자격도 없어. 너희들은 정의감도 없고 비겁한 인간들이야.” 하고 얼마나 다른 형제들을 욕했겠습니까. “그래놓고도 네가 오빠야? 오빠가 동생 못 지켰으면 자기체면 지키지 말고 목숨 걸고 그 남자들과 싸워서 다 죽여야지. 그래야 동생을 지킨다는 오빠 값을 하지.”

뭡니까? 그게 자기 정의죠, 자기 의로움 아닙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빙자해서 챙기기는 뭘 챙겼습니까? “나, 죄인 아니다.” 그것 챙겼잖아요. 그게 무슨 주의 자비와 주의 고마움과 주님의 감사가 넘치는 사람이라 할 수 있겠어요. 안 되지요. 시므온과 레위 입장에서 다른 형제들이 비겁하다는 뜻이 아니고 역할이 성질 급한 혈기 넘치는 시므온과 레위 지파한테 이런 역할을 맡긴 거예요.

그러니까 같은 교회에도 혈기 넘치는 사람 많이 있어요. 있더라도 바로 궁극적인 결정적인 것은 그겁니다. 내가 뭘 해도 나는 의로운 건 하나도 없다는 이야기를 그것도 억지가 아니라 고맙고 감사함으로 나와야 돼요. 나는 내 것만 챙기면서 평생을 살아가는 이 꼬라지가 참 주님 보시기에 얼마나 한심스럽겠는가. 그런데 이런 것을 향하여 왜 주께선 영생을 주시고 천국 신부라 하고 내 양이라 하는지 그것 생각하게 되면 나는 너무 감사하다. 이 감사와 고마움이 빠져버리면 하나님의 백성 아닙니다. 약속의 땅에 살 자격 없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나 잘난 맛에 살지 말고 주께서 십자가 지신 그 이유를 증거 하는 맛에 사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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