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903a 울산강의-역대기상(3강) 1장 34절 : 구조 속의 언약
(강의:이근호 목사)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역대상 1장 28절, "아브라함의 아들은 이삭과 이스마엘이라“ 달리 이야기하면 아브라함의 아들은 영과 육이라, 같은 말이에요. 아브라함에게 아들이 하나가 있는 게 아니라 둘이 있어요. 이삭이 있고 이스마엘이 있습니다. 이스마엘은 아브라함과 그 부인 사라가 의논해서 가지게 된 이스마엘이에요. 의논할 때 어떻게 의논을 했느냐 하면 아브라함이 여기 사라의 몸종 하갈이 있는데 하갈이 씨받이해서 아브라함으로부터 이스마엘을 낳은 태어난 거예요. 의논한 겁니다.
의논했다는 것은 인간의 능력으로 가능한 자식, 이게 이스마엘이에요 인간의 능력으로 가능한 자식. 그럼 이삭은, 이삭은 괄호 칩시다. 이거는 이스마엘과 반대죠. 아브라함에게 이삭은 신약적으로 영이라면 이스마엘은 육이 되는 겁니다. 아브라함이 언약이라면, 공식 언약에서 뭐가 나온다? 영이 나오고 육이 나온다. 언약에서 뭐가 나온다. 천국 나오고 지옥 나온다. 지옥은 언약 안에 들어가야 지옥이 보여요.
그 악마가 아담에게 선악 지식을 갖게 했지요. 그런데 인간들은 어디서 실수하느냐 하면 선악 지식 바깥에 자기 자리를 확보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겁니다. 이거는 선이고 이건 악이고, 쳐다볼 수 있는 제 바깥에 따로 자기 자식을 자기 자리를 확보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고 생각한 겁니다. 이거는 실수한 거예요 이 마귀가 그런 짓을 한 겁니다.
이거는 선이고 이건 악이고, 라고 판정을 내리는 자리가 독자적으로 선악 바깥에 따로 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이미 악 속에 뭐가 들어 있느냐? 악마가 들어 있잖아요. 악마가 들이 있으면 인간이 이렇게 선악 지식 바깥에 자기 자리를 있는 게 아니고 악 속에 인간이 이미 들어있는 거예요.
선악 지식을 따먹지 말라 하는 그 이유가 있어요. 하나님께서 그렇게 선악 지식을 몰라야 된다는 이유가 뭐냐 하면 하나님은 세상을 모든 것을 언약. 다른 말로 약속이죠. 약속을 위하여 약속으로 창조되었지 인간을 위해서 창조된 게 아니잖아요. 약속이다 약속. 선악을 보는 그 바깥의 위층은 인간이 차지하는 게 아니고 언약이 차지하고 있고 약속이 여기 위치해 있다고요. 인간이 여기에 들어가는 게 아닙니다.
인간은 어느 속에? 선악 중에 악 속에 인간이 포함되어 있어요. 왜? 악마가 여기에 포함되어 있으니까요. 그래서 선악을 아는 자는 알게 하면 정녕 뭐하라? 죽으리라. 이게 죽으리라가 되는 거예요. 이 선악지식 자체가 인간에게는 죽음의 자리예요 그리고 선악지식 자체가 악마한테는 죽음의 자리예요 저주의 자리예요.
선악에 대해서 언약으로 완성이 될 때만 이게 생명의 자리가 되는 겁니다. 생명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이미 인간은 악 속에 포함이 돼 있거든요. 그래서 성경은 뭐냐? 성경은 이 악이 어떻게 펼쳐지느냐를 보여주는 겁니다. 그걸 할 때 언약을 동원하면 돼요 언약을 동원하니까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간다고 했는데 어떻게 됐습니까? 물로 심판받았죠.
물로 심판받았다는 말 자체가 인간의 존재, 사는 것 자체가 선이 아니고 뭐라? 악이라는 뜻입니다. 선악을 아는 지식은 인간에게는 죽음이다, 저주다, 심판이다 이 말이에요. 그러면 이 악은 뭐냐? 육은 뭐냐? 육은 이렇게 되는 겁니다. 각자의 것을 우선적으로 챙기는 것, 이게 육이에요 각자의 것을 우선적으로 챙기는 것.
지금 이삭에다가 내가 괄호 해놨죠. 괄호 한 이유가, 아브라함이 인간이잖아요. 인간이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은 이삭은 나오지를 못합니다. 이삭은 약속에서 나온 거예요. 인간에게 나온 게 아닙니다. 인간에게 나오는 것은 기껏 해봐야 이스마엘 낳는 거예요. 이게 뭐라 했습니까? 인간의 능력으로 그 다음에 뭐해라? 인간의 능력으로 가능한 거예요.
여기 올 때 그 방명록 적고 온도 체크했지요. 속으로 오늘 강의하고 딱 죽이 맞는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왜냐하면 그게 인간이 할 수 있는 거거든요. 코로나 걸리고 안 걸리는 것은 인간이 하지 못해요. 그냥 인간이 할 수 있는 건 마스크 쓰고 요거 적는 거예요. 그래서 그걸 방명록 적고 마스크 쓰시되 그걸 하시되 이게 바로 죄가 된다는 것을 아시고 방명록 쓰시고 체온 다 재시고. 손가락 하든지 이마에 하든지 들이밀든지. 그게 바로 죄에요. 인간이 할 수 있는 거예요.
왜 그렇게 하느냐, 뭐 것부터 챙긴다고요? 빨간색으로 해야 돼. 방금 뭐라고 했습니까, 육의 특징이 뭐라고 했습니까? 무엇부터 챙긴다? 각자의 것. 각자의 것에 자기 목숨이 들어 있죠. 자기 목숨부터 챙기는 거예요. 각자의 것을 우선적으로 챙기는 것. 이게 바로 이스마엘을 낳게 한 겁니다. 인간의 능력을 할 수 있는 것, 가능한 것.
인간이 기껏 하는 것은 백날 해봐야 육으로 난 것은 육이다 이 말이에요. 그러나 천국은 여기 천국 나오죠. 천국은 하나님의 나라는 육으로서는 천국을 가지 못하니까 육은 곧 뭐다? 지옥이다 이 말이에요. 지옥으로 가고 있는 거예요. 천국을 못가니까. 그러니까 육으로 난 것은 육이다.
육에서 영으로 어떻게 갈 수 있느냐? 성경에는 바로 언약을 여기 인간이 악인데 인간이 악마의 유혹을 받아가지고 선악을 아는 바깥에 자기 자리를 만들어놨어요. 이게 자기 자리가 뭐냐 하면 자기 것이 되는 겁니다. 자기 것 내 것부터 챙기는 거예요. 내 것부터. 모든 인생사에서 내 것부터 챙기고 그다음에 하나님이고 예수예요. 내 것부터 챙긴다고요.
내 자식 챙기고. 하나님의 자식 챙겨요. 하나님 자식이 누굽니까? 예수님이죠. 내 아들부터 챙기고 하나님 아들 챙긴다고요. 모든 건 내 것부터예요. 내 것부터 여기서 빠져나간다, 못 빠져나간다? 빠져나갈 수가 없어요. 인간의 능력으로 빠져나갈 수 없습니다. 인간의 능력으로 이스마엘은 결코 약속이 자식이 될 수가 없어요. 없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인간의 능력을 발휘하게 하신 겁니다.
아브라함이 골인하는 것은 이스마엘이에요. 이게 아브라함의 육의 요소고요. 문제는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선택할 때 그게 다냐, 그 육의 요소가 다냐, 육의 요소가 그게 전부냐? 아브라함에게. 아닙니다. 무슨 요소가 있느냐? 바로 오늘 제목으로 할 수도 있는데, 있음보다 더 있는 것. 내가 있는 걸 내놓지 말고 내가 여기 있는 걸 아는데 내가 할 수 있는 걸 아는데 할 수 없는 걸 내놓고 여기에 있는데 내가 있다고 여기는 것보다 더 추가적으로 하나님이 주신 것을 내놓아야 돼요. 그게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있는 것보다 더 있는 걸 내놓을 때 기존에 내가 할 수 있는 것, 내가 있는 것은 뭐 되느냐? 있는 것보다 더 있음에 의해서 이게 부정당하는 거죠. ‘기껏’이란 말, 에게 기껏 고작. 그게 나의 것에 적절한 표현입니다.
여기 사도행전 5장에 보면 그 아나니아와 삽비라 이야기 나오거든요. 헌금 반 토막 냈다가 하루아침에 둘 다 죽은 게 있어요. 그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있는 것보다 더 있는 걸 내놨어야 되는데 그들은 할 수 있는 걸 했어요. 그렇게 돼버리면 하나님께서 아나니아와 삽비라에게 가르치는 것은 뭐냐 하면 그동안 니가 살아온 자기 목숨이 있잖아요. 목숨이 그 바탕이 내 목숨이니까 내가 쥐고 있는 내가 여기 있는 것에서 내 목숨을 믿는 것은 내 목숨이니까 쥐겠다는 그 자체가 하나님이 원하는 교회에 어울리지 않아요.
그 목숨은 어디서 왔는가? 있는 것보다 더 있는 곳에서 선물로 준 거예요. 은혜로 받은 거예요. 그런데 그들은 자기가 할 수 있는 돈을 냈는데 주께서 앗아가 버리고 빼앗아 간 것은 뭐냐? 그 부부의 두 사람의 뭘 뺏어갔어요? 목숨을 빼앗아 간 거예요. 이거는 뭐냐 하면 영은 뭐냐? 참 중요한 건데요. 영은 있는 것보다 더 있음, 맞아요.
영의 특징은 뭐냐? 되돌려주는 거예요 되돌려주는 것. 육의 특징은 뭐냐? 내 것이니까 지키는 겁니다. 지키는 거예요. 영으로 산다는 말은 이 목숨 돌려주기 위해서 하루하루를 이 목숨을 주셨다는 거예요. 다른 말로 하면 돌려받기 위해서 우리에게 목숨을 주신 거예요. 돌려받기 위해서.
그게 어디서 나오느냐 하면 이삭에서 나와요. 하나님이 이삭 줬잖아요. 이삭이 어린애 줬으니까. 어린애가 숨이 후딱후딱 뛰겠지요. 그 뛴 어린애 청년쯤 됐을 때 하나님께서 이삭의 목숨을 어떻게 사용케 하라고 아버지한테 지시합니까? 잘 키워라. 공부 잘 시켜라. 수학과외 시키고 뭐 운동도 시켜야지 이렇게 했습니까? 아니면 어떻게 했습니까. 진짜 이삭의 본질, 이삭을 준 그 취지, 그 의미, 이삭의 그 진짜 전부, 그것은 뭐냐 하면 아버지 손에 위에서 이삭이 하나님께 번제로 되돌려지는 거예요.
그게 영의 순환코스예요. 영적 사람이 가는 코스입니다. 뭐 교회 가서 헌금하고, 헌금하다 방금 죽었다고 했잖아요. 아나니아와 삽비라. 헌금하고 전도하고 선교하고 필요 없어요. 그런 짓을 왜 하고자 하는가? 주님 제 목숨 가져가세요, 이런 취지로 하는가? 아니면 하나님께 성의를 표할 테니 제발 내 목숨만은 지켜달라고 하는가? 지키는 쪽인가, 아니면 돌려주는 쪽인가요?
주인은 제가 주인이 아니올시다, 하고 돌려주는 쪽이냐? 그러면 영이고. 하나님께 충성해서 내가 지키고 싶은 내 것 지키겠다면 이건 육이고. 그렇지요. 그런 거예요. 들어보니 뭐 어렵지 않지요. 그걸 행동하기 어렵지 않다는 말이 아니고 논리가 쉽지요. 더 쉽게 해볼까요. 언약은 내 중심이 아니고 언약은 언약 중심이다. 이건 더 쉽지요. 언약은 내 중심이 아니에요.
우리는 언약이 움직이는 그 일에 우리 중심이 아니니까 우리는 변죽이라는 말 또는 곁가지 또는 주변 존재. 그리고 성경에서는 그림자, 실체 없는 그림자. illusion. 그냥 전에 설교시간에 그런 이야기했는데요. 밤중에 달빛이 환한 밤중에 바람에 펄럭이는 커튼지에 달빛에 비친 나무 근처 나뭇가지가 여기에 그림자가 있을 때에 그 그림자를 만져보면 그것은 커튼 원단이 손에 잡히죠. 이것은 illusion, 이는 우리는 한 이미지에 불과한 거예요. 우리는, 내 것이라는 것은.
이미지에 불과하다는 것은 그냥 환상이고 그냥 망상이라고 보시면 돼요. 천상 망상이에요 육이에요. 동생이 비파괴 아마추어 최강자가 됐던, 안 그러면 교회 목사가 됐던, 남편이 새벽 1시에 퇴근해서 우당 탕탕하던 바람에 얼른거리는 율법 중심으로 흔들리는 바람이죠. 이 중심이 율법.
보이지 않는 이 있음보다 더 있음이 주도가 되어가지고 흔들리는 그 바람에 흔들리는 우리는 나뭇가지 같은 그러한 나뭇가지의 그림자 같은 존재예요.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다만 나는 육이요, 라는 말. 나는 육입니다. 그 고백할 수 있는 사람만이 바로 내 것 지키는 것이 죄라는 사실을 제대로 고백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스마엘 낳게 했습니다. 이삭부터 준 게 아니에요. 자식이 없는데 이스마엘만 낳도록 하나님께서 그냥 용납 허용한 거예요. 허용하고 난 뒤에 그 다음에 뭘 줬습니까? 이삭을 줬지요. 판정해봐라. 니가 해석해보란 말이죠. 니 자식 둘 낳고 둘 다 하나님의 자식인지 니가 해석해 봐라. 둘 다 하나님의 자식이 아닌지 해석해봐라. 둘 중에 어느 자식이 하나는 하나님의 자식이고 하나는 자식이 아닌지를 해석해 봐라.
더 나아가서 어느 자식이 나를 구원할 수 있는 내가 구원받았다는 증거가 되는지를 확인해봐라. 어느 것이 하나님이 나의 인생에 개입했다는 사실의 증거를 이스마엘과 이삭 중 어느 쪽이 있음보다 더 있음이냐? 내가 알고 있음, 그 있음보다 더한 있음, 그 있음을 아는 사람은 기꺼이 이삭을 원래 주인에게. 돌려줄 수가 있어요. 그게 바로 창세기 22장에 하나님께서 이삭을 번제물로 드렸잖아요.
원래 주인님께 되돌려준다는 이게 바로 영이에요. 되돌아 주는 거예요 왜 그러냐하면 이게 좀 어려운데 영의 길은, 예수님이 하늘에서 땅에 내려와서 다시 올라갈 때 그 전개 과정이 영이거든요. 그래서 예수님이 있던 그 목숨을 누구한테 바쳤습니까? 아버지께 되돌려드렸잖아요. 그러니까 예수님의 코스와 일치되는 코스지요. 이삭 하늘의 요소, 이스마엘 땅의 요소 합쳐서 이 그 두 개의 내용을 아브라함의 언약. 아브라함의 언약으로 전개해 나가는 것. 이게 언약적으로 이 세상을 꾸려나가는 방법입니다
성경을 해석할 때 불가능으로 해석이 돼야 돼요 가능함으로 해서는 안 됩니다. 구약의 원어연구하고 신약의 헬라어 연구에서 거기서 어떤 정답이 안 나옵니다. 그거는 하나의 철학이에요. 신앙이란 이름의 철학에 불과한 거예요. 왜냐하면 그렇게 원어연구해서 뽑아내게 되면 그걸 스스로 부정할 수가 없어요. 이건 다 쓸데없는 것이라는 말을 안 해요. 요게 쓸데 있고 그 쓸데 있는 거기다가 복음 더 추가하면 뭐가 된다. 이런 생각을 한다고요.
내가 살아온 모든 내가 하는 행동을 매일같이 그것을 죄로 속아내지는 않아요. 인간들의 철학과 신학, 이런 것들은. 제가 무슨 이야기를 하느냐 하면 언약은 우리가 믿어지기를 기다리고 있는 게 아니고 언약이 알아서 우리 속에 침투하거든요. 침투해 보면 뭘 속아내느냐 하면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매일같이 속아내요. 그래야 이 언약의 언약 중심이라고 할 수가 있는 겁니다.
지금 이걸 다 지우고요. 방금 그 이야기를 여기에다가 다시 한 번 써보겠습니다. 지우기 전에 여러분은 기억하세요. 있음보다 더 있음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을 달라고 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할 수 없는 것을 달라고 하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는 뭡니까? 이것만큼은 못 내놓겠다고 하겠죠. 그 못 내놓겠다고 하는 이유가 뭐냐 하면. 그걸 왜 못 냈느냐 하면 하나님 중심이라고 말은 하지만 사실은 내 중심이었거든요. 내 중심 이것만큼은 제발 안 다치게 하고 손대지 말아주시기 바랍니다. 그러고 싶다 이 말이죠.
바로 그걸 달라는 거예요. 가장 내가 사랑하는 것은 나 자신이란 말이죠. 내 자신이 할 수 있는 것, 내 자신을 지켜왔던 것, 그거는 계속해서 사랑의 그 열매로 누적이 돼요. 이게 저축이 된다고요. 적금 붓듯이 계속 부어지고 있는 거예요. 그거 안 다치려고 좀 짬짬이 하나님께서 헌금 더하고 하나님께 봉사도 하고 헌신도 하는 거예요. 실제로 이것 안 빼앗기고 싶어서. 왜냐하면 그게 있어야 나가 있고 내가 사는 보람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네 거는 없다. 다 돌려줘. <돌리도>하는 노래 있지요. 다 돌려 달라 하니까 인간들은 이래 가지고는 하나님하고 나 못 살겠습니다. 이러면 하나님이랑 관계 끊겠습니다. 하나님이, “끊어라. 내가 성령 보내가지고 언약 보내가지고 다 속아낼 테니까. 니가 니 지키는 것 다 그게 다 실패로 끝나게 만들 테니까.”
그게 바로 아브라함이고 이삭이고 야곱이고 요셉입니다. 야곱이 요셉을 얼마나 사랑했습니까? 형제들 앞에서 잊지 말라고. 야곱은 그 요셉은 내 심장과 같은 거라서 절대로 잊으면 안 된다고 특별히 거기에 채색 옷을 입히고 얼마나 간수하라 했습니까.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 많은 열두 아들 가운데 누굴 빼앗아갔습니까? 야곱이 가장 사랑하는 요셉을 뺏어가 버렸죠. 죽여 버렸죠. 짐승한테 물려 피투성이 된 채색 옷만 자기에게 되돌아왔습니다.
이건 여러분들이 한번 상상해 보세요. 애가 자식이 열 는데 그중에 가장 사랑 애가 있는데 밖에서 골목에 놀다가 공차고 밖에 놀다가 5톤 트럭에 치여서 남은 것은 타이어에 피투성이 된 옷만 달랑 돌아왔다고 해보세요. 야곱이 말을 끊었어요. 난 이제 안 살란다. 못 살겠다. 아브라함은 강제로 이삭을 받쳤지만 자발적으로 받쳤지만 야곱은 강제로 빼앗겼어요, 아들을.
야곱은 미치는 거예요 야곱은 자기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언약을 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건 이론이었고요, 지식이었고 실천하고 실제로 만드는 것은 야곱의 솜씨가 아니고 야곱이 손 댈 문제가 아니고 하나님이 야곱을 손대줄 때 비로소 야곱은 언약 안에 들어올 수가 있는 겁니다. 내 것을 가지고 야곱은 언약에 들어가면 그 참담한 결과밖에 안 나요. 뭐 이런 동네가 다 있어. 이렇게 무서웠었어. 이렇게 겁나는 거야.
영의 세계에 들어올 때 들어오면서 나라는 것은 영을 위해서 산 적이 없고 내 육을 지키는 목적으로 평생을 살아왔다는 것이 들통 나게 돼 있습니다. 그게 들통 나게 돼있어요.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하게 각인시킵니다. 백성 만들기는 니가 니 손에 달린 게 아니고 내가 백성 만들 거야, 친히. 이 이야기를 주께서 하고 싶은 거예요
그래서 영이 들어온 사람은 자, 영이 들어왔습니다. 우리 안에 성령이 들어왔습니다. 약속이 들어왔습니다. 다 같은 말이에요. 영이 들어오게 되면 영은 중앙 부분을 차지해요. 중앙을 차지합니다. 그리고 육은 바깥으로 밀리게 돼 있어요. 지금 제가 무슨 이야기를 하냐 하면 육이 어떻게 영으로 바뀌느냐? 이게 바뀌지 않으면 하늘나라 못 가니까. 요한복음 3장에 의해서 뭐 갈 수가 없어요. 육에서 영으로 갈 수가 없는 거예요. 여기서 가위표치겠습니다.
육은 절대로 영이 된 수 없습니다. 백날 충성 봉사하고 뭐 해도 안 돼. 육은 육이기 때문에 안 됩니다. 그래서 육은 안 되기 때문에 육은 그냥 대기 상태에 있고 영이 육 쪽으로 들어가서 방금 뭘 차지한다 했습니까? 중앙 부분을 센터를 차지한다고요. 여기 턱하니 중앙을 차지하니 이 바깥에 밀린 육이 이 영을 얼마나 미워하겠어요.
바깥에 날아온 돌이 중앙에 박혀 있으니까 자기는 변두리에 있으니까 육이 얼마나 불만이 많겠습니까.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왜 하나님은 내사 내 뜻대로 안 되게 하시는 겁니까? 우리 솔직하게 예배시간에 기도할 때나 개인적으로 기도할 때 이런 기도 안 해요. 잘 몰랐고 아양 떠는 기도를 하죠. 알고 있는 고상한 용어 다 동원해서 주의 영광을 위해서 참여한다고 하지만 솔직하게 이야기해서 안에 내부에 뭐가 있냐 하면 왜 하나님은 매사에 내 뜻대로 안 됩니까?
왜 안 되느냐 하면 육이 자라거든요. 육이 계속 이것이 마그마 터지듯이 팡팡 중앙을 침략하고 공격하고 있습니다. 끊임없이 죽을 때까지 계속이에요. 나이 구십 먹은 할아버지가 오토바이 타지 마라 해도 빠라바라빠라바 오토바이 타고 다니지요. 감자 캐서 좀 팔라고 해도 아니야. 내가 다 먹는다. 창고에 썩어 문드러지든 말든 감자 그대로 있지요.
왜 말을 안 듣는 거예요? 왜 부모가 자식 말을 안 듣는 겁니까? 왜 우리는 주님 말 안 듣는 거예요? 영이 영으로 돋보이기 위해서. 말 들으면 우리가 가능해지잖아요. 가능해 가지고는 이거는 구원이 안 됩니다. 천국을 가지러 갈 수가 없어요. 못된 더러운 구석 있잖아요. 계속 하나님께서 거기에 발휘되도록 조치를 하십니다. 계속해서 내 챙긴 내 것부터 챙기는 걸 계속 발휘하게 하셔요. 이렇게 들어보니까 기쁜 소식 아니에요?
이게 28절에 보면 아브라함의 아들은 이삭과 이스마엘로 돼 있지요. 그다음에 34절 봅시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았으니 이삭의 아들은” 그다음에 뭡니까? “에서와 이스라엘이더라” 쌍으로, 쌍, 커플. 역대상 1장 28절과 34절 읽었어요. 이게 육과 영이 멀리 가지 않지요.
여자 분들은 다 아실 거예요. 장갑을 장갑만을 옷걸이에 걸어서 건조시킬 때 장갑 두 개를 저 끝에다가 딱 이렇게 해줘야 옷걸이가 균형이 맞아가지고 한쪽으로 쏠리지 않죠. 그것도 한쪽에 옷걸이 그냥 놔둬버리면 나중에 바람 불면 전부 다 한 데 뭉치잖아요. 딱 밸런스를 맞추는 겁니다. 장갑 두 쪽이니까. 장갑은 두 쪽이죠. 장갑 한 쪽 운동하다 잃어버렸습니다. 그 한쪽 씁니까? 버려야 되죠. 양말 한 짝에 빵꾸났습니다. 다른 한쪽 씁니까? 못 쓰죠.
하나님께서는 이 언약을 할 때 반드시 뭘 대동하느냐? 영이 단독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고 육과 더불어 같이 나타나게 돼 있어요. 육은 영과 더불어 같이 있게 돼 있습니다. 왜냐하면 선악이니까요. 선악은 주님만의 고유 권한이에요. 그 선악이 만나게 되면, 그러니까 서로 질적으로 대비가 되는 두 개가 너무나 가까운 사이에서 거리가 좁혀지면서 크기가 극대화돼요.
여기에 악이 있고 여기에 선이 있으면 하늘에 뚝 떨어지게 하시는 게 아니고 선과 악을 그 바로 근처에 두면서 그 악에서 선이 못 가고 선에서 악을 행할 수 없는 인간으로 할 수 없는 그 간격은 더 높이를 크게 하는 거예요. 퍼텐셜 에너지potential energy(위치에너지)라 하는데 여기서 악 쉽게 못 가고 이걸 타 넘어야 돼요. 이 에너지의 선을. 불가능하지요.
가까이 하기엔 그 다음에 뭡니까? 가까이 하기엔, 그게 아니고. 그건 누가 노래 부르는 거고. 가까이 하기에 너무나 먼 게 드러나게 만들어 버려요. 가까이 대비시키면서. 그래서 하나님이 천하의 죄인 속에 들어오시잖아요. 바로 옆에 있어서 같이 식사하시고 잠을 자시고 사람들에게 뺨 맞으시고 너무나 가까이 하는데 베드로처럼 가까이 최측근인데 그러나 마지막은 뭡니까? 주의 마음을 알 리가 없는 오히려 육이 극대화되죠.
육이 영에 가까이 감으로써 이게 육의 한계구나가 더욱더 또렷하게 드러나게 하셔요. 그래서 말씀을 들어야 돼요. 말씀 듣는 걸 소홀히 하면 안 되는 이유가, 마치 멀찍이 있으면 멀찍이 다음 날 교회 가면 되지. 이래서 되는 게 아니에요. 멀찍이 있으면 마치 한쪽 다리는 영인 것처럼 착각을 하게 만들어요.
복음에 가까이 가야 그동안 육적인 사소한 어떤 고민거리 있잖아요. 걱정거리 염려거리 이 벌려놓은 일이 있는데 잘 안 된다든지 이런 거 있잖아요. 아들한테 집 사줘야 되는데 돈이 없으면 못 사주는 이런 거 있잖아요. 그게 복음과 영에 딱 마주치게 되면 그거는 고민거리도 아니고 시시하고 사소한 것이고 정말 걱정할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 영을 만나야 비로소 알 수 있어요.
병원에 갔더니만, 제 이야기 아닙니다. 병원에 갔더니만 직장암 말기입니다. 이제 배 쨌다가 다시 덮어가지고 그냥 좋은 거나 잡숫고 여행이나 가면서 길어봐야 3개월입니다, 라고 할 때 건강진단 평생 안 하다가 딱 한 번 했는데 째고 그냥 덮었단 말이죠. “당신은 끝났어요.” 의사가 또 핀잔줍니다. “왜 진짜 이럴 정도까지 그렇게 몰랐어요.”
아픈데 잔소리까지 들어가면서 집에 왔다 할 때 육적인 그 사람의 남은 고민이 뭐겠습니까? 위시리스트 써서 죽기 전에 하고 싶은 거 그거 하다가 처음에는 분노하다가 나중에는 울다가 나중에는 뭐 초탈했다 초월했다 하다가 죽음보다 더 센 게 뭔지 알아요? 그게 죽는다는 공포예요. 그것이 찾아오는 거예요. 누굴 만나도 맛있는 걸 줘도 맛도 없고 재미도 없어요. 걱정이 늘어지지요.
그런데 복음은 뭐냐 하면 처음부터 네 목숨은 나한테 반납해야 될 목숨이었잖아요. 뭐 이런 소리 듣는다고 공포가 사라지는 건 아니지만 정말 성령에 의해서 복음을 듣게 되게 되면 뭐 엉덩이 종기 하나 또는 손톱에 가시 하나, 뭐 저절로 낫겠지 뭐. 암 걸린 거 말기 암, 저절로 낮아요. 왜냐하면 죽으면 나아요. 우리 몸이 죽으면 우리 속의 암도 같이 죽거든요.
그러니까 육적인 삶의 특징, 육의 사람의 일 일상은 뭐다? 육의 사람의 일상은 IS 자살테러범이에요. 자살 테러범. 그냥 폭탄 안고 매일같이 살아가는 거예요. 그게 육의 사람, 성령 안 받은 사람, 신앙이 없는 사람의 매일의 삶은 폭탄을, 보지는 않았습니다만 여기에 여자들도 마찬가지에요. IS 여자 폭탄테러 보세요. 여기 총알탄창 온 몸에다가 둘러가지고 2분 45초 남았습니다. 이래가지고 둘둘 해서 가잖아요.
그 복음을 모르는 모든 사람들은 그 배와 그 뒤쪽 허리춤에 시한폭탄 찼습니다. 물론 그 아랫배 나왔다고 장착한 건 아니고요. 그거는 기름 자리고. 빼빼마른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은 걱정근심거리를 아랫배가 꽉 차고 있는 거예요. 그리고 이거는 언젠가 어떻게 됩니까? 터져버리죠. 그럼 평생 동안 그 사람은 태어나서 지금까지 공부 열심히 해가지고 지금까지 고생 고생하면서 살아왔는데 바람 불거나 비가 오거나 눈비 올 때마다 살아보려고 했었는데 그 남는 게 뭡니까? 더 불안하면 이 근처가 요 뒤에 가면 있지요. 무당 골목. 사주팔자, 뭐 타로 점. 타로 점 그 돈 가지고 오징어 다리나 뜯어먹어라.
교사가 되어서 애들에게 가르칠 때 고등학교 3학년 애들 가르칠 때 애들 한 스물 몇 명 됩니까? 하나하나 전부 다 진짜 시한폭탄 다 차요, 배 쪽에. 왜? 복음을 모르니까. 자기들 폭탄 차고 있는 걸 몰라요. 팔십 되서 죽는다고요? 교통사고가 일어나면 어떻게 할래요? 회수용이에요, 회수용. 반납해야 된다니까요. 반납할 때 어디로 반납하는 걸 알고 반납해야지.
나는 이 육은 영을 위하여, 언약을 위하여, 약속을 위하여, 그리스도가 하신 일을 위해서 그것만 드러내기 위해서 반납하는 그런 대상으로 우리에게 이 목숨과 육을 준 거예요. 그동안 살려주신 거예요. 이 육의 사람들의 특징은 뭐냐 하면 그들이 윤리 도덕적이라는 겁니다. 선악적이죠. 윤리 도덕적입니다.
그러면 윤리 도덕적일 경우에 어떤 특징이 있냐 하면 윤리 도덕의 특징은 이 중앙 부분에 누가 가 있느냐 하면 본인이 가 있어요. 본인의 이성과 따짐과 본인이 그동안 착함과 성실함 이런 것들이 중앙을 차지하고 있다고요. 육이 자리를 떡 차지하고 있어요. 째깍째깍 시한폭탄하면서 본인이 본인 걱정해가지고 뭐라고 하냐 하면 착하게 살아야 복을 받는다. 이러고 있던 거예요.
착하게 살자. 이건 뭐 조폭표어도 아니고. 조폭이나 마찬가지죠, 뭐. 착하게 살자. 그래야 우리 가정이 복을 받는다. 무슨 자기 게 있어요. 반납해야 하는데 무슨 자기 가정이 있습니까? 무슨 내 남편, 내 자식들이 어디 있어요. 아브라함은 자식을 바쳤는데요. 어디 내 게 어디 있어요.
육과 영은 같이 만나게 돼 있어요. 내가 왜 죽는지 내가 왜 암에 왜 아픈지 그 옆에는 보이지 않는 부분이 붙어 있다고요. 그게 영이에요. 영에 의해서 암 걸리고 영에 의해서 내가 전도사노릇 다하고 영에 의해서 내가 늙어 죽는 겁니다. 보이지 않는 부분을 성경을 통해서 알려주잖아요. 그런데 이 성경을 안 들어버리면 그러면 나머지 지가 뭐 어떻게 하겠다는 거예요. 깨진 접시는 아무리 붙여도 이게 하나가 안 돼요. 깨진 접시는 스카치테이프로 붙여놔도 이건 다시 두 조각나지요.
다시 정리하면 영은 되돌려 주는 거, 육은 뭐라고 했습니까? 육은 내 거 지키는 거. 내 거 지키는 게 육이에요. 왜? 나밖에 없으니까, 내가 전부니까. 영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있음보다 더 있음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있음이 전부라는. 그게 아니니아와 삽비라였어요. 헌금하고 죽었잖아요. 사람이 언약의 세계, 천국으로 안 오는 이유가 뭐냐? 내 거 지키는 데 급급했어요. 내 거 지키는 데 우선해서 그래요.
자, 제가 지금 이야기한 건 중앙부분까지 했어요. 중앙부분에 영이 있으면 그 다음에 뭐가 날아가느냐 하면 윤리 도덕이 아무 의미가 없어요. 윤리 도덕을 되려면 법에 쫓겨야 되거든요. 양심에 쫓겨야 된다고요. 자기가 행동해놓고 잘했는지 못했는지 그걸 해놓고, 거기서 뭐가 나오느냐하면 계속해서 변명과 핑계로 일관해야 돼요.
인간이, 강의 다시 합시다. 인간이 선악을 알고 난 뒤에 인간 자체가, 니가 선악을 알게 되면 니가 죽으리라 했잖아요, 그렇죠. 그러면 인간은 이미 선악을 안 자체가 악이에요. 이게 죽게 되니까 심판받으니까. 그런데 인간은 선악을 알면서 이 선악 바깥에 미지의 고유의 영원한 자기만의 자리를 떡 이렇게 있다고 착각을 하는 거예요. 이게 인생 실수입니다. 내가 선행하면 선하고 악하면 악하고 그건 내 의지에 달렸다. 인간은 자유의지가 있으니까. 이런 또 어디서 들은 소리가 있어가지고 지금 자유의지를 거론하고 있다고요.
인간은 무슨 자유의지가 있어요. 그 자유의지가 없다는 그 티가 뭐냐? 마스크 쓰고 있잖아요. 마스크 쓰는 게 취미예요? 평소에 세 살부터 마스크 쓰고 싶어, 이랬습니까? 아니죠. 인간은 피동적이에요. 외부 환경에 의해서 피동적으로 움직이는 게 인간입니다. 근데 피동적으로 움직여놓고 마스크 내가 썼잖아. 갑자기 변명과 핑계로 일관하고 있어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여기에 34절 봅시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또 낳았잖아요. 아브라함 이삭을 낳을 때 뭐가 탈락됐습니까? 이스마엘은 어디 갔어요? 아브라함은 이스마엘을 낳지를 않았습니다. 분명히 낳았는데 이 대목에 와서 34절에 와서 하나님은 이스마엘을 낳지를 안 했어요.
그것은 아브라함을 아버지 되게 하는 자식은 이스마엘이 아니라 이제는 이삭이 아버지를 아버지 구원의 근거가 되기 때문에 아브라함의 자손이 아브라함을 구원한다 이 말입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이 아브라함의 아들이 아버지를 구원하려면 아버지는 그 자기를 구원할 자식을 자기 능력으로 절대로 낳지를 못해야 돼요. 그래야 육의 고리가 끊어져요. 육과 육 사이에 뭐가 더 개입되었느냐? 약속이, 영이 개입돼요.
내 지켜야지, 내 지켜야지, 내 지켜야지. 그 지켜야지 하는 그 하루하루 일과 가운데 뭐가 개입되면? 영이 개입되면 돌려드려야지, 돌려드려야지 돼요. 돌려드릴 데가 있다는 그 돌려드림이 있는 그 장소가 돌려주는 사람을 구원하는 겁니다. 그래서 쌍을 이루는 거예요. 육과 영을 쌍을 이루어줘야 돼요. 영이 찾아와줘야 육이 영의 세계, 천국을 갈 수가 있는 겁니다.
그 영이 찾아오게 되면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은 그 영 앞에서 일체 의로움으로 선으로 인정을 안 받는 것을 이 시점부터 감사합시다. 내 걸 안 받는 것을 감사합시다. 그리고 평생은 하나님이 안 받는 것을 우리는 평생을 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인정합시다. 암에 걸렸잖아요. 주께서 걸리게 하신 거예요.
근데 암 걸릴 때 가만있는 사람 없잖아요. 온갖 자연식품부터 시작해 가지고 살아보려고 애를 쓰잖아요. 그런데 2개월 만에 완치가 됐다 할 때 그러면 내가 노력해서 완치됐었습니까? 아니죠. 주께서 씨껍함을 준 거죠. 모든 게 피동적이에요. 내가 자발적으로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습니다. 지금껏 혼자 육으로 살 생각하지 말고 균형을 맞추세요. 육과 영이 같은 옷걸이의 빨랫줄에 나는 육으로 있고 주님은 영으로 계셔서 나란히 이렇게 같이 있다는 것, Do you understand? 이해되시겠지요.
괜찮은 주님, 덜 괜찮은 나가 아닙니다. 괜찮은 주님, 엉망진창 나. 이걸 다시 이야기하면 괜찮은 주님, 그다음에 엉망진창 나, 이렇게 해도 맞고요. 그걸 말을 바꿉시다. 엉망진창 나, 그다음에 괜찮은 주님. 그건 말해도 안 해도 괜찮아요. 그건 안 해도 엉망진창 자체가 이미 주님만이 괜찮다는 것을 고백하는 식이 되니까 그건 굳이 이야기 안 해도 돼요.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헌금할 때에 우리 부부는 돈의 욕심내서 이것밖에 안 되니까 주께서 목숨 가져가려면 가져가세요, 하고 드렸으면 안 죽었어요. 그 상을 감추려고 했어요. 자기 것 따로 있다. 내 것 따로, 육 따로. 육을 그냥 따로 두겠다는 거예요. 육은 생겨나는 건 어쩔 수 없어요. 그러나 따로 그걸 챙기지는 마세요. 생겨나는 대로 그냥 영을 생각하는 기회다 이런 생각하세요.
육이 나타나거든 또 주님께서 십자가 알았고 또 이런 일을 벌였구나, 하고 그렇게 그렇다 하고 생각하시면 되는 겁니다. 내 중심의 생각을 내가 지울 수가 없어요. 이거는 인간 이상 이걸 막 누른다고 안 나오는 게 아닙니다. 그래서 오늘날 육과 영을 다 하는 성도에게 일어난 이 현상이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서 오늘날 우리의 모습을 그대로 앞당겨서 하나님께서 재현해 주셨습니다.
그러면 이 이스마일은 어떻게 됐는가? 그리고 그 이삭이 에서와 야곱을 낳았는데 여기 이스라엘이라 돼있는데 야곱을 낳았는데 그러면 그 에서는 어떻게 됐는가? 성경에서는 거기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창세기 21장 18절에 보면 이스마엘에 대해서 이렇게 나와 있어요. 이제 하갈의 소생이 잘리는 거예요. 그 이스마엘이 자꾸 이삭을 괴롭히니까 사라가 안주인이 화가 난 거예요. 그래서 쫓아냅시다. 그 여종하고 자식을 쫓아냅시다.
이거는 고대 황제에 보면 그렇게 궁녀들이 많았어요. 왕의 진짜 아내 따로 있고, 그다음에 왕의 첩들이 많았잖아요. 근데 왕의 첩들에 대해서 그 정실부인이 어떻게 하느냐 하면 굉장히 괴롭힘을 주는 거예요. 첫째는 애를 못 낳게 만들고. 애 낳게 되면 권력이 아들을 낳은 후계자에 그리로 가버리면 자기는 내쫓기니까 자식을 못 낳게 하고, 자식을 임신했더라도 유산되게 만들고.
그러니 그 남편의 사랑을 독차지 하는, 하나의 권력이니까, 그게 육의 모습이에요. 사라의 육의 모습이라고요. <옹정황제의 여인>이라는 시리즈가 있어요. 거기에 보면 중국의 고대 왕들의 여인들이 어떻게 시기와 질투가 일어났는가를 보여주는 중국 드라마입니다. 옛날에 많이 했잖아요.
여기 보면 쫓아내라 할 때에 이거는 아브라함도 어쩔 수 없이 인정했고, 심지어 하나님도 인정했어요. 쫓아내 보내라. 그러면 쫓아내면 그들은 이제 굶어죽게 돼 있거든요. 여기 21장 16절에, “가로되 자식의 죽는 것을 차마 보지 못하겠다 하고” 죽으려 하니까, 18절에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네 손으로 붙들라 그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될 것은, 하나님이 육과 영이 짝을 이루잖아요. 그 이스마엘을 큰 민족으로 친히 주신다는 사실, 계속 먹여 살린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돼요. 그래서 뭐 우리가 소설 같으면 뭐 거기에 나가 굶어죽어야 되는데, 그게 아니고 같이 덩치를 키워요. 이거는 이스마엘 뿐만 아니고 이거 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창세기 36장 6절에서 8절까지 보면 마찬가지로 나와요. 거기도 에서가 소유가 풍부해서, 7절에 보면, “두 사람의 소유가 풍부하여 함께 거할 수 없음이러라” 하나님께 버림받은 지옥 갈 그 에서가 소유가 이 땅에서 풍부한 거예요. 그러니까 사람들이 영보다 육을 쫓을 수밖에 없는 이유에요. 뭐 하나님 안 믿어도 잘 사네. 잘 먹고 잘 살고 공부도 잘하고. 그게 계속해서 육이 우리 영 사이에 같이 맴돌면서 이스라엘 역사를 폐망케 하는 겁니다. 그거는 10분 쉬고 이야기하겠습니다.
20210903b 울산강의-역대기상(3강) 1장 34절 : 구조 속의 언약
(강의:이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 하겠습니다. 첫 번째 시간 마지막에 앞에 중앙이 있고 육과 영은 같이 대동해서 나타난다 했습니다. 거리는 좁히지만 좁히면 좁힐수록 그 크기 그 넘을 수 없는 그 담의 크기는 훨씬 더 높아지죠. 그것을 말로만 아니라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서 보여주는 겁니다. 이걸 간단한 도표로 이야기하면 이렇습니다.
중앙이 있고 중앙에 들어서게 되면 여기서 뭐가 나오느냐 하면 육이 밀려 나오죠. 이게 육이 정말 나는 육이다. 나 아브라함은 이스마엘 낳는데 열심 내었다. 나는 이스마엘이 자식인 줄 알았다, 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것은 이미 여기에 이삭이 나왔기 때문에 나올 수 있는 말이거든요.
그러면 아브라함 이후에 여기에 만약에 이삭이 등장하면 여기 중앙 안에 또 중앙이 생겨요. 그리고 야곱 되면 야곱 안에 중앙이 또 생겨요. 그리고 야곱 안에 요셉, 요셉 안에 또 생겨요. 계속 평면에서 보면 동그라미 안에 동그라미 되지만 이걸 옆에 옆에서 보면 이 위에서 본 동그라미 안에 이렇게 큰 가면 갈수록 점점 더 좁아지는 최후의 중앙이 있어요.
여기서 아브라함 같으면 여기 제일 꼭대기에 아브라함에서 이 예수님 사이에는 뭐냐 하면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면서 자손의, 자손의, 자손이 되는데 여기 자손이 할 때마다 개입 되는 게 뭐냐 하면 하나님의 언약이 계속 추가적으로 개입되는 거예요. 개입되면서 여기서 언약이 추가적으로 되게 되면 인간이 생각한 육의 개념이 생각도 못한 새로운 육의 개념, 육의 개념, 육의 개념이 자꾸 옆에서 잘라지듯이 나무를 이렇게 대패로 밀면 뒤에 자투리가 계속 만들어지잖아요. 계속 육이 만들어지는 거예요, 계속.
그런데 이 만들어진 육을 이 쓰레기 같은 육을 조사해보면 한 결 같이 경건한 거예요. 경건하고 한 결 같이 훌륭한데 이 모든 그 요소에서 뭐냐? 훌륭하고 경건하고 오직 우리 이스라엘 지키고자 하는데 그 공통점이 뭐냐 하면 내 것 지키기에요. 그래서 이스라엘 망하는 거예요. 이스라엘이 이스라엘 지킨다고 여호와 믿었던 겁니다. 오늘날 내 가정 지키고 내 교회 지키기 해서 예수 믿는 거 똑같은 거예요. 그게 저주예요. 저주의 증거예요. 내 몸뚱이 하나 지키기 위해서 하는 거예요.
파고, 파고, 파고 들어가면 마지막에 최후의 남은 자, 딱 남은 자에게 준 게 뭐가 나오느냐? 이 예수님이거든요. 예수님이 뭐냐 하면 든 율법을 다 이루라는 주님의 지시가 등장합니다. 그 모든 율법 이루는 특징이 뭐냐 하면 희생입니다. 그의 찔림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는 거예요.
결코 본인을 위해서 아무것도 하지 않아요. 그냥 반납하는 거예요. 그냥 반납하지 않고 계속 반납하는 가운데서 하나님의 언약에 의해서 선택, 창세전에 예정된 자만 백성으로 만드는 근거가 여기서부터 올라오기 시작하는 겁니다. 내려오면서 올라가면서 거꾸로 뒤에 낙오됐던 자 중에서 자기 백성을 골라서 구원하는 방법을 사용하시는 거예요.
그러면 그 이스라엘이 이런 수직적으로 이렇게 했고요. 영적으로 이렇게 그리스도와 아브라함과 연결시키면서 이런 이야기를 제가 말씀드렸는데 이걸 수평적으로 구약적으로 말하는 지평적으로, 지평적이라 하는 건 지리적. 지리적으로 이스라엘 사람들 주변에 하나님이 육에 아까 한 말한 에돔, 에서죠. 에돔 나라가 에서입니다.
에서 그 다음에 이스마엘 나라. 이스마엘을 의도적으로 하나님은 이스라엘 주변에 포진을 시켜 놔버려요. 포진을 시켜버리면 육이 어떤 성향을 갖고 있는가를 나타나는데 그게 어떤 성향을 갖고 있느냐 하면 영은 가까이 하면 육으로 도드라지게 드러나게 돼있는데 육은 가까이 하게 되면 이게 영향을 받아서 그 유행과 관행과 간섭에 흠뻑 그 문화에 젖어들게 돼있어요.
제가 여기서 지도를 한번 그려보겠습니다. 여기 이쪽에 장화처럼 생긴 이게 이탈리아예요. 지중해에 있는 이탈리아. 여기에 아드리아 해가 있고요. 이 밑에 이렇게 이오니아 해, 그다음에 여기 터키하고 맞대어있는 에게 해. 여기 전체 밑에는 지중해고요. 여기 들어가면 흑해라고 아주 큰 바다가 있습니다. 흑해, 호수인데 굉장히 큰 바다죠. 터키, 이스라엘 여기 있고요.
지금 제가 어느 범위를 그렸냐 하면 이 반도 있잖아요. 이 반도를 뭐라 하느냐 하면 이걸 발칸반도라 해요. 발칸이라는 말은 아라비아 사람들의 표현에 의하면 그냥 산이다. 숲이 울창한 산이라는 뜻이에요. 여기 발칸반도에서 보면 흑해로 들어가는 강이 있어요. 이걸 다뉴브 강이죠. 헝가리에서 배 뒤집어진 그 강이죠. 남쪽 독일에서 발원되어 흑해로 빠지는 다뉴브 강. 이거는 라인 강과 반대로 가지요. 이 간격은 내가 재보니까 여기서 여기까지 한 1000km 돼요(남북으로). 여기서 여기까지 한 800km가 됩니다(동서로). 이 사이에 나라가 얼마나 많으냐? 열다섯 개 나라가 있습니다.
여기 그리스. 그리스 위에는 이게 마케도니아. 참 복잡해요. 이게 그리스가 마케도니아를 주장하기 때문에 이게 북마케도니아. 여기에 알바니아. 이 사이에 코소보. 이 옆에 몬테네그로. 들어간 여기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이름도 길어. 여기 이렇게 있는 게 크로아티아, 축구 잘하는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 위에 다뉴브 강이 이렇게 간다 치고 이 위에 체코. 여기 체코슬로바키아. 위에는 폴란드. 요 옆에 보스니아 옆에 나라가 보이보디나, 이름도 생전 처음 들어. 여기에 세르비아. 이 옆에가 헝가리. 이 중간에 여기 보면 루마니아. 이 밑에 불가리아. 여기에 몰도바. 위에는 우크라이나. 여기 위쪽에는 독일. 옆에는 오스트리아. 이건 이탈리아. 옆에서 프랑스 되겠지요.
자, 제가 이걸 왜 쓰느냐 하면은 이 각 나라의 종교가 어떻게 되는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오스트리아하고 여기 있는 헝가리 이쪽은 가톨릭이에요. 이 동네 종교가 세 종류로 보는데 첫째는 가톨릭, 두 번째는 러시아정교회, 세 번째는 이슬람, 이 세 개가 있는데 오스만제국이라는 게 있어 가지고 16세기부터 쭉 올라가서 오스만제국이 차지할 때는 여기에 이슬람의 영향을 받아요.
지금 이스라엘이 영향 받는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영향을 받고 여기에 오스트리아, 헝가리제국이라고 해서 합스부르크제국에 거기에 왔을 때는 이쪽이 뭐냐 하면 가톨릭이 되고, 그다음에 슬라브 민족 해서 범 슬라브 민족계가 자주독립을 했을 때는 이쪽이 뭐냐? 러시아정교회가 돼요.
사람들은 가만히 있는데 이스라엘이 몰려오게 되면 이스라엘을 믿게 돼 있고, 러시아가 오게 되면 러시아정교를 믿게 돼 있고, 가톨릭이 오게 되면 여기 가톨릭 믿게 돼 있어요. 왜냐하면 마스크 써야 되니까. 국가의 권력이 인간의 사상과 종교와 신앙까지 전부 다 이거는 일괄적으로 거기서 그냥 덮치듯이 오게 돼있어요. 안 그러면 밥 먹고 못 사니까요.
이스라엘이 이스라엘 주변에 온 세상의 온 우상들은 다 모여 있어요. 이스라엘이 자기는 언약이 있는 거룩한 백성, 택한 백성, 영적 존재로 생각했죠. 아니에요 육입니다 앗수르가 오면 앗수르의 지배를 받고, 바벨론이 오면 바벨론 지배를 받고, 아람 나라 오게 되면 다시 협상하고,솔로몬 같은 경우에는 여자를 많이 해서 외교적인 정치성을 발휘해서 그렇게 나라를 이끌려면 그 시집 온 후궁들을 위해서 그들의 종교를 신상을 세워줬어요. 솔로몬이.
이스라엘 국왕이니까 이스라엘을 지키는 자기 의무가 있잖아요. 지킨다는 게 뭡니까? 아까 제가 첫째 시간에 이야기한 인간은 지가 할 수 있는 것을 감추지 않고 내놓게 돼있어요. 내가 할 수 있는 것. 그 할 수 있는 것이 바로 뭐다? 육이고 그 육은 절대로 뭐가 될 수 없습니까? 영이 될 수 없는 거죠.
오스트리아-헝가리 영향을 받아가지고, 트루크족 터키는 이슬람이고요. 이슬람은 붉은 걸로 하겠습니다. 터키는 이슬람, 오스트리아-헝가리는 가톨릭, 여기 체코, 체코슬로바키아 이쪽은 러시아 공산주의화 됐기 때문에 이것은 러시아정교, 불가리아는 슬라브 된 트루크인들 그러니까 불가리아는 역시 이슬람과 러시아정교회가 주고 이슬람도 포함돼 있고, 루마니아 러시아정교, 그다음에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여기는 이쪽 이태리에 가깝기 때문에 가톨릭이 많아요. 코소보 이쪽은 이슬람 쪽이 많아요. 코소보 사태 때 이슬람 사람들 다 죽여 버렸잖아요.
여기 몬테네그로는 러시아정교, 세르비아도 러시아정교회, 보스니아 이쪽에는 가톨릭이 많아요. 헤르체고비나도 가톨릭 신자가 많아요. 크로아티아도 나라가 이렇게 됐어요. 크로아티아 이쪽에도 가톨릭이 많아요. 그런데 여기 중부 보스니아 가운데는 또 이슬람이 많아요. 세르비아 이쪽에는 아까 이슬람이고요. 여기 그리스는 그리스정교회예요. 알바니아는 이슬람인데 친미현상 미국에 친해요. 코소보도 이슬람이 많은데 친미에 미국을 좋아해요. 러시아보다. 몰도바는 완전히 이거는 러시아 위성국가예요. 슬로베니아는 아까 러시아정교회라고 했지요.
보세요. 이 동네에 전쟁이 안 날래야 안 날 수가 없지요. 민족이라는 것은 종교가 하나가 되고 언어가 하나일 때 민족인데 하나가 될 수가 없어요. 그럼 어떻게 되느냐? 쪼개고 쪼개야죠. 종교별로. 울산 같으면 성당에 있는 쪽은 나라 만들고, 교회 맞춰 나라 만들고.
왜 그러냐 하면 인간의 사회는 인간과 인간의 관계예요. 인간들 인간관계이기 때문에 인간이 서로 서로 이익이 되는 쪽으로 이게 한 통속이 되게 되어 있어요. 생존의 이익 되는 쪽으로, 정을 많이 나눌 수 있는 쪽으로. 그러면 사상과 그 생각이 종교와 같으면 서로 그냥 도와주겠지요. 그야말로 그들만 이웃 사랑 되겠죠.
그러나 그거는 영적인 이웃 사랑 아니에요. 그거는 내 것을 지키기 위해서 괜찮은 이웃이 우리 집 옆에 이사 왔으면 하는 거예요. 교회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사람 사귈 목적으로 복음 믿는 거예요. 외로워서. 섬김과 희생 이런 게 아니에요. 줄 것 주고, 받을 것 받으면 결국 나한테는 이익이 아니냐는 거죠. 내 것 지키는 방식 중에 하나가 복음을 거기다가 집어넣는 거예요.
바로 그런 식이 구약 이스라엘 역사 내내 그것이 계속되어 왔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역사의 왕들은 한 결 같이 여호와를 위해서 제사 드리고 국민들을 위해서 제사 드리고 했잖아요. 그런데 했는데 예레미야 선지자 같은 경우에 하는 말이 차라리 망하자, 차라리 망해버리자 이렇게 이야기해요.
그러니 여기서 이스마엘 말고 이삭, 그리고 에서 말고 이스라엘 된다, 라는 처음에 그 언약의 취지 있잖아요. 그 언약의 취지는 그 당시 사람이 그 언약대로 아무리 신봉하고 애를 써도 마지막 때 예수님 오실 때까지 그 결과를 유보해야 돼요. 유일한 영은 오직 주님의 십자가 행위밖에 없습니다.
이제 이 정도는 여러분들이 쉽지요. 이제부터는 본격적으로 어려운 거 하겠습니다. 어려운 거 한다 해가지고 진짜 어려운 것 하는 게 아니고요. 마태복음 5장에 나온 말씀을 한번 해볼게요. 여러분 잘 아시는 말씀인데 마태복음 5장 아니고 6장이요. 6장 3절에 보면 구제할 때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
이 말씀은 오른편이라는 의미를 살리기 위해서 반드시 무슨 편이 필요하냐 하면 왼편이 필요한 거예요. 출애굽기 15장에 보면 그 미리암이 선동이 되어서 출애굽하고 난 뒤에 찬양하는 대목이 나옵니다. 그 찬양하는 가사에 보면 하나님께서 애굽을 어떤 식으로 이겼다 하는 대목이 나와요. 하나님이 어떤 식으로 이겼냐 하면 하나님의 무기가 뭐냐? 출애굽기 15장 보면 그게 나와요. 그게 뭐냐 하면 하나님의 오른편입니다. 오른쪽. 하나님의 오른편의 능력이에요
우리가 여기서 15장 12절에 보면, “주께서 오른손을 드신즉 땅이 그들을 삼켰나이다” 이렇게 돼 있어요. 주의 오른손이에요. 자, 방금 이야기했던 오른손이 있다는 말은 반드시 뭐가 있다? 왼손이 있는 겁니다. 오른손의 의미를 부각하기 위해서는 왼손이 필요한 거예요. 이것은 그 주의 능력을 묘사할 때 이게 주님이 오른손이잖아요. 주님이 오른손이니까 이거는 사람의 오른손은 이게 주님의 오른손 앞에 무용지물이 되는 겁니다. 인간의 행함은.
주님의 능력을 행사, 오른편의 능력을 행사하게 되면 여기서 뭐가 발생되느냐 하면은 여기서 하나님의 원수가 발생돼요. 이게 뭐가 왜 어려우냐? 이게 왜 어려우냐 하면 인간이 아까 말씀, 선악을 판단하는 이게 선이고 악이고 판단하는 자리를 인간들은 어떻게 했습니까? 인간들은 착각해가지고 선악 속에 자기가 포함 안 되고 자기는 따로 어떤 자율성을 가지고 자유의지를 가지고 따로 나와서 따로 자기 자리를 확보하고 설정한다고 했지요. 그게 착각이고 잘못이라고 했지 않습니까.
그렇게 모든 인간은 그런 입장에서 시작을 했기 때문에 오른편 왼편, 이게 어려운 거예요. 하나님의 원수가 하나님의 능력을 행해야 비로소 원수가 나와요. 이게 어려운 거예요. 인간은 하나님이 무슨 일을 하는지 관계없이 인간은 자기 위주이기 때문에 자기 원수가 따로 있어요. 나의 원수가 곧 하나님의 원수인양 마귀인양 그렇게 오해를 할 수밖에 없습니다. 나를 힘들게 하고 나를 괴롭히는 것.
제가 지난 낮 설교에 그런 예를 들었습니다. 어떤 분이 이야기하기를 지긋지긋한 코로나바이러스 언제 없어지나 이야기했죠. 제가 뭐라고 했습니까? 코로나바이러스가 없어지는 게 아니고 인간이 없어져야 되죠. 뭘 지금 오해하고 있느냐 하면은 코로나바이러스는 나쁜 거다, 흉한 바이러스다. 이건 누구 입장이에요? 우리는 자연적으로 누구 입장부터 시작합니까, 발언이? 내 입장에서 시작하잖아요.
내 입장을 시작하는 그런 안목을 가지고 성경을 천독 백독해봤자 이거는 전부 다 오해예요, 오해. 내 자리가 따로 설정돼 있는 것처럼 그렇게 스스로 착각한다고요. 내 자리가 그게 죽음의 자리인지도 모르고 이게 육의 자리인줄 모르고 자기로서는 최선을 다했다고 이런 말도 안 되는 변명과 핑계로 일관하는 거예요.
주님이 언약을 갖고 나올 때에 이스라엘 백성이 그렇게 이야기할 때 이스라엘 백성은 뭘 오해하느냐 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한다고 생각한 겁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한 게 아닙니다. 하나님은 주님은 주님 자기만을 구원해요. 하나님이 행사하시는 그 주의 능력, 오른손의 능력은 그냥 오른손과 차이 나는 오른손에 정복을 당할 주의 원수를 발생시키기 위해서 한 겁니다. 뭐 내가 고함지른다고 이해 될 문제도 아닌데요.
요한계시록 한번 보겠습니다. 참 이게 어느 정도 어려운지를 요한계시록 9장 1절부터 한번 읽어볼게요. “다섯째 천사가 나팔을 불매 내가 보니 하늘에서 땅에 떨어진 별 하나가 있는데 저가 무저갱의 열쇠를 받았더라” 땅에 떨어진 별 하나, 마귀 같지요. 마귀가 무저갱 열세를 받아가지고 무저갱 열쇠를 열은 거예요. 그러면 열쇠를 열었다는 말은 마귀는 항상 주님 앞에 귀속되고 갇혀 있는 신세라는 것을 말해주지요. 열쇠를 열어야 비로소 활동을 허락받기 때문에 그러는 거예요.
러시아에 가면 영구동토 층이 있답니다. 영구적으로 얼어버린 땅이 있대요. 그런데 지구온난화 때문에 영구 시베리아의 땅에 있는 영구동토 층의 눈이 녹아버리니까 그 안에 있던 메탄가스들이 올라가서 온난화를 더 증강시킨다는 그런 이론이 있어요. 실제로 러시아에서 산불도 많이 나는 게 그 메탄가스가 온도 진짜 시베리아 온도가 40도까지 올라가요. 이게 말이 돼요? 영하 80도까지 내려갔던 곳이에요. 그런데 온도가 40도까지 올라갔으니까 30 몇 도까지 올라갔으니까요. 그 영구동토 층, 영구히 얼었다는 땅이 개방한 거예요. 시베리아가 난리도 아닌 거죠.
하나님께서 허락을 해가지고 악마로부터 무저갱 열쇠를 받아가지고 자기 패거리 귀신들을 여는 거예요. 여니까 그동안 갇혀 있던 그 귀신들이 우르르하고 그 무저갱 감옥에서 나와서 설치고 날개를 치면서 보통 난리도 아닌 겁니다. 그러나 그 말은 악마가 이 세상을 난리 친다는 이 말은 그래도 그들은 갇혀 있는 주님한테 종속된 존재라는 뜻이에요. 이게 허락을 받고 한 거예요.
왜 그렇게 풀어줬는가? 하나님께서 가둬놓고 왜 풀어줬는가? 그게 주의 활동이에요. 주의 오른손의 능력이 임하게 되면 하나님의 원수가 등장한다고요. 이게 지금 내가 그 이야기를 안 했구나. 시편 110편을 이야기 안 했네요. 시편 110편에 보면,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으라 하셨도다”
오른손의 능력이 발휘되면 발휘될수록 원수가 새롭게 만들어지는 게 아니고 원수가 확인되는 거예요, 이 세상에서. 아아 이 세상에서는 나의 원수가 설치는 게 아니고 주님의 원수가 설쳐요. 나의 원수가 아니고. 그러면 나의 원수를 포기하고 주님의 원수를 가려면 무슨 조치가 있냐면 주의 오른편의 능력이 우리 자신에게 임하게 되게 되면 그다음부터 우리의 안목이 그동안 내 원수들이 보이던 그 안목이 아니라 누구의 원수로 보이냐 하면 내 원수가 아니고 누구냐? 주님의 원수로 보이는 거예요.
주님의 원수란 주님의 영이기 때문에 영은 반드시 짝을 필요로 하죠. 쌍이니까 짝을 필요로 하죠. 그 짝이 누구여야 합니까? 육이어야 하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하는 말은 지금까지 한 말은 뭐냐? 육은 육이어야 한다 이 말입니다. 들어보니 참 쉽지요. 다시 말해서 지옥 갈 사람은 나쁜 짓에서 지옥 가는 게 아니고 주님을 위해서 나쁜 짓 가도록 하나님께 선별된 겁니다. 선택된 거예요.
그러면 같은 말을 영적인 사람 할 수 있죠. 영적인 사람은 지가 착해가지고 구원되는 게 아니고 주의 오른편의 능력을 위하여 그들은 육의 자리에서 또는 하나님의 원수의 자리에서 그런 빼냄을 당해야 되는 거예요. 그 빼낼 때 능력이 뭐냐? 주의 무슨 능력? 오른편의 능력이에요. 따라서 구원받은 사람은 어느 자리에 앉는가? 하나님이 왼편에 앉을까요, 오른편에 앉을까요? 오른편에 앉히는 거예요.
이게 에베소서 2장 7절, 8절에 나옵니다. 이미 하늘에 앉히시니 주와 함께. 주의 능력이 감싸지는 거기에 이미 성도가 거기에 지금 놓여있는 겁니다. 사람들이 제가 어렵다고 이야기하는 이유가 이런 이야기를 하게 되면 이야기는 맞는 것 같은데 실감이 안 나네요. 이런 식이에요. 왜? 자기는 아파트에 살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 왼편에 안 살거든요. 주님 왼편에 침대 놓고 안 산단 말이죠. 자기는 아파트 10층이고 2층이고 거기 살잖아요. 아무리 좋은 말이라도 실감이 나야지 할 거 아니에요, 실감이. 실감은 안 나는데 믿으라 하는 것은 이거는 핑계거리 또 만드는 셈이에요. 믿습니다, 해놓고 실제로 안 믿는 게 되거든요.
이스라엘이 망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자기 나라 자기가 챙기려고 하는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 이스라엘나라 속에서 계속해서 하나님의 언약을 유입시킨 겁니다. 집어넣은 거예요. 집어넣으니까 집어넣을 때 그게 무슨 누구의 능력이냐? 주님의 능력으로 지상에 누가 왔는가? 선지자들이 왔고 이 선지자들은 외쳤고, 그래서 그들은 그 이스라엘한테 내부에서 뭐가 됐고? 희생자가 된 거예요. 피를 흘린 거예요. 욕을 얻어먹은 거예요.
주의 능력이 하늘의 능력이 땅에서는 어떻게 된다? 욕을 얻어먹고 핍박받는 거예요. 그러면 주의 능력을 핍박했을 때 주의 능력이 아까 제가 시편 110편에 주의 능력은 뭐를 만든다고 했습니까? 뭘 남긴다 했습니까, 주의 능력은 뭘 남기죠? 주의 원수를 남기죠. 주의 능력이 임해야 주의 원수가 확인될 수 있는 거예요.
그러면 이스라엘은 곧 뭐다? 주님의 원수가 되는 겁니다. 이스라엘 자체가. 이게 육이에요, 육. 이게 육이라고요. 육인데 그러면 이스라엘 다 멸망해야 될 텐데 이 선지자 있잖아요. 고난 받는 선지자, 이들은 그러면 또 신학을 공부해서 이렇게 됐는가, 또 공부를 말해서 그런가? 아니에요. 주의 능력에서 뭐가 나오느냐 하면 주의 능력은 주의 원수에서 누구도 빠져나갈 수가 없어요. 목숨 멀쩡하게 빠져나갈 수 없다고요. 죽어서 빠져나오지요.
하지만 죽음에서 건져내는 능력이 무슨 능력이다? 주님의 능력이 되는 겁니다. 따라서 그 원수의 이스라엘 가운데서도 남은 자들이 있는 거예요. 룻 같은 사람, 다윗 같은 사람, 이사야, 예레미야 있잖아요. 선지자들. 그 오늘날 성도들이 그런 사람이다 이 말입니다. 그래서 제가 아까 요한계시록 몇 장 했습니까? 요한계시록 9장에서 악마와 그 새끼들, 그 귀신들을 확 풀어놓게 하신 그 이유가 뭐냐? 주의 능력을 돋보이기 위해서 하는 거예요
자, 이걸 실제로 교회나 일상에다가 적용시켜 봅시다. 인간 대 인간의 만남에서 우리는 사람만 만나면 아무 의미 없어요. 거기에 주의 능력이 가미되어서 만나야 되거든요. 주의 능력이 가미되게 되면 인간과 인간의 만남에서 서로 필요한 것을 챙기고 얻기 위해서 협상과 타협에 정치적 타협을 하지요.
“여보, 당신 오늘 저녁 설거지 해주면 내가 맛있는 거 사줄게.” 이런 거 있잖아요. 모든 말은 협상과 타협이에요. “당신이 내 시킨 대로 하면 당신 좋아하는 해물탕 끓여줄게. 재래시장 가서 장 봐가지고. 당신 좋아하잖아.” 이런 거. 그런데 성령은 그걸 삭제시켜버립니다. 인간적 인간의 만남에서 육으로 드러나게 만들어요. 그러니까 인간과 인간의 만남에서는 인간의 본성을 스스로 위반할 수는 없어요.
타인이든 누구든 내 이익을 위해서 그 사람을 이용하겠다는 것은 모든 인간이 타고난 거기 때문에 그걸 강요할 수는 없습니다. 그냥 하는 거예요. 하게 되면 주의 능력이 그들 가운데 임하게 되게 되면 바로 내 이익을 위해서 남에게 뭘 하겠다고 봉사하겠다, 이 모든 것이 의를 그 가치와 의미를 주께서 삭제를 시켜버립니다.
이걸 크게 쓸게요. 이게 무슨 원칙이냐 하면 복음 안에 들어와야 주의 지시가 느껴져요. 복음 안에 들어와야. 자기 이익을 챙기면서 주의 지시라는 말을 하지 마세요. 그건 마귀가 한 짓이에요. 복음 안에 들어와야 비로소 주의 지시가 주어지면서 저 분을 내가 저 사람을 만나고 만나는 것은 다시 또 다시 나의 주의 원수 된 육을 들추어내가지고 오직 십자가에 대해서 고맙고 그 효과가 얼마나 귀한 것인지를 알리기 위한 그러한 상태와 상황을 주님 쪽에서 지금도 열심히 조성해 나가고 있다는 주님의 일하심을 온 몸으로 만끽하기 위해서 사람을 만나는 거예요.
성도와 성도 사이에 상대도 마찬가지로 상대가 성도라면 그렇게 느끼고 나도 느끼게 되게 되면 그 둘 사이에 남는 것은 뭐냐? 고마움밖에 없어요. 그래서 사람이 고마움 없으면 같이 못 삽니다. 그놈은 위선은 언제까지 견디겠습니까. 위선 가지고 밑천은 다 드러나요. 성도가 서로 사랑해도 돈 문제 나오면 벌써 끝났어요. 돈 문제 나오면 끝났다고요.
요한계시록 9장을 다시 보게 되면 그 악마를 하나님께서 이 땅에 허락한 것은, 오늘 제일 중요한 대목 왔습니다. 악마를 허락한 것은 어떤 누구도 이게 언약적으로 구조화됐기 때문에 육과 영 구조화됐기 때문에 자력으로 탈출이 불가능하다 하게 하기 위해서 악마를 풀어놓은 거예요. 악마의 그 졸개들을 이 땅에 풀어놓은 거예요. 어떤 위인도 자력으로 풀어놓은 이 마지막 때에 악마의 위세를 이길 자가 없습니다.
제가 수요 설교에 그런 이야기했어요. 유혹을 이기겠다는 게 마지막 유혹이라고요. 왜냐하면 유혹을 이기려면 또 더 큰 유혹이 또 있어요. 유혹은 이기라고 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어떤 약속의 구조에 갇혀있음을 바라볼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유혹을 주신 겁니다. 내게 찾아오는 유혹은, 이거는 내가 오지 말라고 해서 안 오는 게 아니에요. 유혹이 내 말 듣는 게 아니라 라고요.
그런데 그 유혹이 나의 원수가 아니에요. 내가 이 언약 구조의 원수예요, 내가. 언약 구조에서 구조로 생각하지 않고 나는 개별자로 생각해요. 나 잘하면 천당 가겠지, 나 예수 믿으면 천당 가겠지. 육과 영의 구조로 생각하지 않고 짝을 생각하지 않고 내가 혼자 열심히 하면 최선을 다하면 그래도 이 바쁜 가운데 교회 나와 줬으면 하나님께서 기특하다고 천당 보내주겠지. 자꾸 자기 구조 안에 생각하지 않고 단독으로 주님과 거래할 생각하고 있어요.
크게 한번 쓰겠어요. 파란 거 있으면. 인간의 가장 큰 실수는 원천을 모르는 거예요. 원천, 중앙지점. 원천을 몰라요, 원천이 없어요. 원천이 어딘지 맨날 두리번거리고 자꾸 다른 데를 찾아요. 제가 어느 설교에서 그런 예를 들었는데 카불 공항에서 머물고 있는 사람에게 그 아프가니스탄 그 아줌마한테 cnn의 그 여자가 물었어요. “여기서 빠져나가면 어느 나라 갈 겁니까?” “미국, 캐나다, 영국, 프랑스.” 어디서 살기 좋은 나라는 듣기는 들은 모양이에요. 자기 주제 파악 안 하고 그저 좋은 데만 가려고 하는 거예요.
이게 뭡니까? 이게 바로 이스라엘이 구약에서 이스라엘을 보여준 그 행태예요. 하나님이 지켜줘서 나를 잘되게 한다는 거예요. 자기 뜻이 우선이에요. 그게 하나님의 원수인지 몰라요. 그게 육인지를 몰라요. 그런 식으로 살다가 지옥 가는 줄 몰라요. 자기 배에 시한폭탄 터지는 것도 몰라요. 저주의 시한폭탄인지도 몰라요. 그래서 지 한 몸 챙기고 내 한 몸 붙들고 내 자식 잘 키우면 된다는 거예요. 아이 던져가지고 들어가지도 못하고 철조망에 걸려가지고 도로 나오고요. 처참하죠.
여러분, 아프가니스탄 나라에 힌두쿠시라는 이름의 산맥이 있어요. 그 산맥이 나라의 중앙을 차지해요. 보통 나라는 산맥이 주변에 있잖아요. 그런데 아프가니스탄은 산맥이 한 가운데 있어요. 살기 힘들다 이 말이에요. 칠천 미터 산이 있고요. 기껏 중간쯤이 삼천 미터고요. 제일 낮은 데가 천 몇 미터예요. 그냥 오다가다 하는 나라가 길거리에요. 길이라고 길. 고갯길이에요, 나라 자체가. 이 놈이 와서 밟고 저놈이 와서 밟고 역사가 그런 역사예요. 꼭 이스라엘 같아요. 이리 오면서 한번 쳐들어오고. 저리 올라가면서 쳐들어오고 내려가면서 쳐들어오고.
그런데 그러한 그것을 누가 그렇게 하셨다? 주님이 그렇게 하신 거예요. 왜? 오늘 강의에서 중요한 것, 왜 그렇게 하시는가? 언약 구조를 위해서. 무슨 구조? 육과 영 쌍으로 나오기 위해서. 그래서 아브라함은 이스마엘을 낳게 만들고, 그다음에 누굴 주시고? 이삭을 하고. 이삭은 저주받은 창세전부터 미움 받은 에서를 태어나게 하시고 또 쌍둥이로 누굴? 그 야곱을 태어나게 이스라엘을 태어나게 하죠.
그러니까 인간은, 나는 이중성이에요 육과 영이 함께 있을 때 이 구조가 언약의 구조예요. 너는 육이었었다. 그리고 육은 육의 힘으로 천국 못 간다. 왜? 육의 특징은 그 자체가 이미 죄고 악이기 때문에. 그럼 어떻게 할까요? 니가 육으로 있는 것보다 더 있음, 그건 영이죠. 육이 있어야 영이 있잖아요.
예수님이 육신으로 오셨거든요. 예수님이 유령 같이 오신 게 아니에요. 육신으로 오셨어요. 육이 있어야 비로소 영이 동반해서 나타난다고. 그 육이 육 되게 하는 그 모든 성질과 속성은 주님께서 마귀를 풀어놨어요. 무저갱에서. 마음껏 유린해라 유린하고 마음껏 갖고 놀라고. 그 육이 뭐냐? 그 마귀 풀어놓은 그 가연체가 뭐냐? 국가입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에서 국가는 짐승이에요. 그런데 뭐 아프가니스탄 탈출해서 미국 간다고? 미국은 짐승 아닌 줄 알아요, 영국은 짐승 아닙니까? 어느 나라든 이 세상은 돈 없이는 못 살게 돼 있어요. 돈만 있으면 어느 나라 가도 잘 살고 북한 가도 잘 살아요. 어느 나라도 돈 없으면 어느 좋은 나라도 못 살게 돼 있습니다. 왜? 인간의 모든 생각과 활동과 실천력은 육으로 살아온 그 버릇과 그 방식밖에는 못 벗어나기 때문에. 육이 육을 낳으니까요.
자, 그러면 어떻게 해서 영이 되는가? 원천이라 했죠. 원천을 아까는 뭐냐? 중앙. 이제부터도 잘 들으셔야 됩니다. 원천 중앙이 영의 요소로서 우리 안에 들어와요. 구조니까 구조. 육이 있는 곳에 영이 있고요. 세상에 불신자들은 육이 있고 영은 들어오는 게 아니고 심판 대상이죠. 이걸 뭐라고 하느냐? 이걸 버림받았다. 영으로부터 버림받은 게 육이에요.
그런데 사람들은 자길 육으로 보지 않고 뭐로 보느냐 하면 자기를 어엿한 사람, 거기다 앞에 뭘 붙여 존엄한 인간, 인격적인 존재. 이거 어디서 배운 겁니까? 선악구조 바깥에서 따로 자기를 절대화해서 한 사상에서 나온 거예요. 선악구조를 쳐다보면서 판정내리는 따로 제3의 지역을 만든 거예요.
그래서 인간이라는 말이 단어가 거기서 나오고 여기 나온 겁니다. 신학도 마찬가지고 철학도 마찬가지고 과학도 마찬가지에요. 아인슈타인이 죽으면 어디 갑니까? 지옥 가지 뭐요. 볼 거 뭐 있어요. 뭐 생각하지 마세요. 그냥 지옥 가는 거예요. 유명한 과학자라고 해서 유명 과학자고 뭐 간에 영이 먼저 성령이 들어오지 아니하면 지옥 가는 겁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 사람이 아니에요.
고린도 전서 16장 22절, 누가 한번 찾아서 읽어보세요.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거든 저주를 받을 지어다 주께서 임하시느니라” 아멘.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거든, ‘누구든지’입니다, 누구든지. 과학자, 철학자, 신학자, 목사, 장로, 집사 필요 없어요.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않으면, 그 다음에 뭡니까? “저주를 받을 지어다”
이것이 문제는 이걸 우리가 안다는 거예요. 그런데 이것이 안 감사해지고 있는 일상이라는 게 이게 문제 아닙니까. 이게 그렇게 고맙게 느끼지 않고 협박과 위협과 공갈로 느껴지는 게 문제거든요. 이게 진짜 고마우면요 말기 암 걸려도 여기에 대해서 말기 암이 사소한 문제처럼 느껴져야 돼요.
왜냐하면 구원받아서 고마운 게 아니고요. 구원받아서 고맙다면 오늘 강의 잘못 들은 거예요. 구원받아서 고마운 게 아니고 주의 능력이, 오른손의 능력이 작용하고 있다는 그 사실 자체가 그 사실 안에 내가 포함돼있는 거예요. 인간은 악이 있든지 주에게 있든지 어떤 경우라도 탈출이 불가능합니다. 인간은 주님의 원수에서 탈출이 안 돼요. 구원이 안 되는 거예요. 이 말은 뭐냐 하면 주님 안에 있으면 아무리 악하고 독한 짓을 해도 이게 탈출이 안 돼요.
왜냐하면 그 구조 때문에 그래요. 구조 때문에. 쌍으로 된 구조 때문에 그래요. 진짜 영의 사람은 육이라는 그 구조를 유지해줘야 돼요. 예수 믿는 영적 사람은 육에서 벗어났다. 육에서 이제 육은 빠이빠이다. 이렇게 돼버리면 그건 자기의 그 본심이 드러난 거예요. 그게 무슨 본심입니까? 나 내 구원 챙겼다. 그 내 구원 챙겼다가 돼버리면 이건 육이에요. 이건 구조가 아니니까요.
쌍을 계속 이게 지속시켜줘야 돼요. 계속 이어져 가고 있어야 돼요. 그래야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한다는 그 말씀이 구조적으로 나한테 계속 일어나야 하기 때문에 그래요. 우리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대번에 알잖아요. 그게 대번에 알아줘야 돼요. 그래야 오늘손이 하는 걸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그 말씀이 우리한테 유효합니다.
아 육이구나. 내가 죽을 때까지 육이구나. 그러니까 여기서 나온 게 ‘고맙소’가 나온 거예요. 고맙소빌도 물론 나올 수 있지요. 여수 특강한 장소가 고맙소빌이에요. 계속 고마움이 나오는 거예요. 암에서 낫게 해서 고마운 게 아니고 암에 걸린 것 자체가 시시하게 여겨서 고맙고, 암에 안 걸려서 다행스러운 게 아니고 암에 안 걸렸다고 다행스러워하는 그게 육인 줄 알게 해줘서 고마운 거예요.
내 자신을 지키고자 하는 것이 얼마나 쓸데없는 걸 지키는 거예요. 마치 전에도 이야기했지만 어째 어린 아이가 구슬 치게 해서 얻었던 그 구슬을 아버지가 넣어놓은 귀한 금고에다 같이 넣어놔요. 그게 구술이 금고에 들어갈 만 가져야 됩니까? 전에 이야기했거든요. 다이소에 가면 구슬 500그람에 천 원 한다고요. 가격표 봤어요. 그 천 원짜리를 수표 나오는 귀한 집문서 나오는 금고에다 왜 넣습니까? 애 입장에서는 그게 굉장히 큰 보물이거든요. 그 애가 일곱 살이라면.
사람은요 나이 70되도 일곱 살이에요. 너무 많이 줬다. 70되면 일곱 살이잖아요. 80되면 세 살 돼요. 90되면 두 살 됩니다. 감자 해놓고 감자 자 다 먹겠다고 하는 거예요. 세 살 애와 똑같은 거죠. 이게 누구 모습이에요? 우리 모습이에요. 우리는 일상은 내게 관련된 것만 그것밖에 몰라요. 인간은 지 아는 것만 이야기해요. 얼마나 철딱서니 없는지 이게 문제는 구조를 모른다는 거예요. 내가 그게 육이라는 사실을 몰라요.
자기는 최선을 다해서 내가 노력한 만큼 이 이만큼이나 내 가정 살려냈다는 겁니다. 그래도 내 보고 죄인이라고 하면 안 되지, 라고 뭐 막 우기고 있어요. “내가 왜 죄인이야. 내가 나 위해서 맛있는 김밥이라도 사 먹는 줄 알아.” 자식을 위해서 그렇게 고생했다고. 그래서 내 덕분에 애들 대학 보내고 공납금 다 댔다는 거예요. 그게 바로 주의 원수입니다, 하면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들어요. “그게 왜 주의 원수야. 얼마나 아이 키운다고 기도 많이 했는데.” 그게 기도 많이 한 것도 원수입니다. 무슨 뜻인지 몰라요.
왜 구조적이지 않느냐, 왜 언약적이지 않느냐 이 말입니다. 왜 키우려고 합니까? 살려고 키우죠. 누구? 남의 자식? 아니 내 자식. 도전! 자기 자식 아닙니까. 이스마엘이에요. 이스마엘 키우기 위해서 그렇게 애쓴 거예요. 이삭은 죽이고. 이삭은 보내버리고. 예수님 보내버리고. 이스마엘을 키우는 거예요. 야곱은 보내버리고 에서만 키우는 거예요. 제발 살려달라고 빌고요.
여기 코소보하고 보세요. 나라 꼬라지 보세요. 우리 민족 최고. 얼마나 많은 전쟁을 했습니까, 학살을 했으니까? 종교 다르다고 민족 다르다고. 라틴계 있지요, 슬라보계 있지요. 트루크계 있지요, 그리스계 있지요. 네 개 파가 발칸반도, 대포 이름 같다. 그리스계, 트루크계, 라틴계, 라틴 사람들이 옛날 로마 때 이걸 점령했거든요. 러시아는 슬라브계, 슬라브 민족. 헝가리 같은 경우는 훈족의 몽고 피까지 다 섞여 있어요. 이 지리, 국가, 세계 역사를 보게 되면 육이 뭔지 다 드러나요.
제가 언제 그런 이야기 했잖아요. 뭐 안중근 최고, 이봉창 독립투사 한다고요? 어느 나라 가보세요. 독립투사 없는 데가 없어요. 국가와 민족을 위해서 정말 초인적인 희생을 했다고요. 어느 민족에 가보세요. 초인 없는가. 이슬람 종교에 보세요. 그 희생자가 없는가요? 아주 눈물겨운 희생들이 많아요. 이스라엘 국가 내에. 인간적으로 자기 목숨 귀한 줄 알면 남의 목숨을 위해서 아낌없이 바치는 사람들. 그거 여호와증인에 그런 거 많아요. 신천지 그런 거 많아요. 아프리카에 그런 거 많아요. 토속종교, 이슬람교, 불교도 그런 사람 많아요.
인간이요? 주의 원수 밖에 못 벗어나는 갇혀 있는 포로였습니다. 언약 히브리인들이요? 애굽 나라의 프로였어요. 바로의 포로였습니다. 그냥 여호와 다 따르라? 아니에요. 그들은 여호와를 거부했습니다. 그들은 결국 어린 양이 피를 발라야 죽어야 비로소 하나님의 언약세계에 들어올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죽는 그 효력과 효과가 저와 여러분들에게 죽을 때까지 그 구조가 계속 되길 바랍니다. 그 능력 받았다고 헤헤 까불지 말고 그 구조 안에 십자가 작용하기 위해서 구조 안에 우리는 육으로 산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내 것부터 챙겼습니다. 내 할 일부터 챙겼습니다. 복음 알고 신앙 아니까 매사가 잘 된 줄 알았습니다. 바로 그 자체가 얼마나 육적인 것을 깨닫고 이걸 깨닫지 못하니까 고맙고 감사함이 날아가 버리고 그저 걱정과 근심과 최선의 노력, 발악밖에 남지 않은 저희들의 하루하루 일상이었습니다. 이제는 고맙소가 이어져서 십자가가 늘 개입되는 그런 삶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