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십자가를 아십니까(2강) 갈라디아서1장8절(살아있는 십자가)20211025b
(강의:이근호 목사)
시작합니다.
십자가는 불합리합니다. 어느 정도 불합리하냐 하면 인간의 모든 지혜와 지식을 총동원해도 십자가를 알지 못하는 이유가 십자가 자체가 이미 인간의 지혜와 지식의 수준과 그 잠재력을 감안해서 주께서 실시한 구원의 기준의 십자가거거든요. 인간을 충분히 감안한 거예요. 인간세계의 지식을 분류를 해보면 이렇게 분류할 수 있어요. 철학, 과학, 정치, 예술, 그 다음에 종교, 이 다섯 가지로 크게 다 포함이 돼있습니다.
철학이란 말은 사도 바울의 편지에 보면 여러 번 나와요. 세상철학이라고. 과학은 어디서 나오는가? 옛날엔 철학이 과학이었습니다. 그럼 과학은 옛날부터 있었단 말인가? 옛날부터 있었어요. 과학을 구약에서는 이걸 우상이라 했습니다. 그러니까 사도 바울은 철학 안에 종교도 포함되는 거예요. 과학은 우상, 이건 뭐냐 하면 자연변화에서 질서를 뽑아내는 게 구약에선 우상이었고, 그것이 현대에 와선 과학이고 그 다음에 중세 때까진 철학이라 한 겁니다.
그러면 수학은 어디 속하느냐? 과학에 속하지요. 경제학은 어디 속하느냐? 경제학은 바로 과학에 속합니다. 경제학을 과학 분야에서도 인문과학, 사회과학 이렇게 이야기하거든요. 경제학은 사회과학에 속하지요. 언어학은 인문과학에 속하고. 전부 다 지금은 과학이 모든 학문을 총괄한다고 보시면 됩니다. 정치학은 과학에 속해요. 그러나 정치학은 과학에 속하지만 정치는 이거는 과학에 속하지 않습니다.
정치는 권력인데 권력에는 뭐가 있느냐 하면 너 죽이다가 들어있어요. “과학 하는 사람 똑바로 안 하면 내가 죽을 거야.” 그러니까 북한의 김정은 같이, “내가 말한 핵폭탄 못 만들면 과학자들 다 죽을 줄 알아.” 이러면 과학보다 뭐가 더 셉니까? 과학의 수학적 이론보다 정치적 권력이 셉니다. 이 정치를 성경에서는 구약에서는 짐승이라 하는 거예요. 바다에서 온 짐승, 권력을 이야기합니다.
그럼 예술은 어디 속하느냐? 옛날에 과학이 예술이었어요. 기교, 기예.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 할 때 인생은 짧고 과학은 길다 이런 뜻이에요. 그 예술은 지금의 예술을 말하는 게 아니고 과학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과학은 뭐라고요? 자연변화 가운데 질서. 이 질서를 그들은 진리, 참 또는 진리라고 하는 거예요. 인간세계 나름대로 철학, 과학 전부 다 진리를 추구한 겁니다.
진리를 추구하는 건 어디서 나오는가? 바로 창세기 2장과 3장 사이에서 어디서 나오느냐? 호기심에서 나온 거예요. 호기심을 다른 말로 하면 욕망이라 하는 거죠. 방금 이야기한 것 안에서 인간세계는 나올 것 다 나왔다. 끄집어낼 것 다 끄집어낸 거예요. 인간에게 욕망이 있다는 말이 아니고 욕망이 인간을 지배한다는 것부터 출발해야 됩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자기 마음을 관장하지 못하기 때문에 악마의 욕망이 인간을 다스리고 인간은 거기서 호기심으로 나오고 호기심을 통해서 뭘 추구한다? 진리를 추구하는 거예요.
진리를 추구하게 되는데 이 진리는 뭐냐 하면 내 욕망에 부합하면 선이 되고 내 욕망에 부합되지 못하면 이건 악이라 보는 거예요. 내 욕망이 치대면 이건 선이 되고요, 이걸 영어로 하게 되면 Good이에요. 악은 evil, 이건 나한테 손해되는 것, 그건 악이에요. 인간 속의 욕망이 이런 식으로 다루는 겁니다.
예를 들면 안중근 의사, 얼마나 훌륭한 사람입니까. 대한국인, 손바닥 피 묻혀서 찍고, 안중근 의사 있지요. 그런데 안중근 의사가 그렇게 이토 히로부미, 이등박문 죽일 때에 가면서 차비를 빌렸는데 옆집한테 요새 돈으로 한 칠만 원 빌려갔는데 죽고 난 뒤에 안 갚았다. 그러면 돈 빌려준 사람한테는 안중근 의사가 나쁜 사람 되는 거예요.
예술도 마찬가지고요. 이외수라는 소설가의 팬들이 많지만 이외수의 옆집에 사는 사람은 골칫거리에요. 종교는 아까 이야기했지요. 종교라 하는 것은 과학이 만들어낸 진리를 근거로 해서 신과 화목에 나서는 거예요. 화해, 화목. 신마저 내 욕망에 필요한 존재로 쥐었다 놨다 마음대로 다루려하는 거예요.
그래서 종교의 대표적인 사람이 샤먼이에요. 무당들입니다. 무당들은 고객들이 와서 신에게 내 필요한 것을 달라고 하다면 샤먼이 무당이 하는 말이, “내가 하나님을 잘 달래서 당신이 원하는 걸 제공해줄게.” 그 중매역할, 중간역할 하는 게 샤먼, 종교입니다. 이게 바로 인간이 사는 현실이죠.
결국 이 모든 것은 뭐냐 하면 어디서 나왔다? 악마의 욕망에서 비롯된 겁니다. 주님께서 이걸 다 아셔요. 인간 속에 이런 욕망이 잠복 돼있다는 걸 다 아십니다. 다 아시면서 인간의 종교적인 열심 또는 지식적으로 심오함, 이성적인 논리, 수학적인 철저함 그 모든 것에도 터치되지 아니하는 연결이 되지 않는 쪽으로 내세운 것이 뭐냐 하면 십자가지요.
그래서 십자가 믿는 것은 십자가가 아니에요. 십자가는 연결되지 않음에 의미가 있거든요. 따라서 예술 하는 사람의 십자가는 예술작업을 통해서 그 사람 나름대로의 십자가가 따로 나와야 되고요 과학 하는 사람은 과학 하는 나름대로의 십자가가 따로 나와야 돼요. 왜냐하면 과학 하는 사람은 과학적 지식 이것도 진리고 옳고 거기다가 나는 성경에는 아마추어니까 십자가 믿으라 하니 믿자.
자기 것은 자기 것 그대로 꿍치고 있고 아무 문제없다고 여기서 거기다 십자가만 하나 더 보태면 천국 가는 줄 알고 있는 거예요. 십자가가 내가 있는 위치 자체로서는 연결되지 않는 그런 십자가라고 십자가 쪽에서 알려줘야 되는데 자기는 자기 것을 정당화하면서 십자가 하나 더 보태면 되는 줄 알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고정된 십자가는 없어요. 고정된 십자가가 없다는 말은, 십자가는 사건이다. 어떤 사건이냐 하면 우발적 사건이다. 참 십자가는 사건으로 나와요. 우발적 사건이니까 사건의 반대말을 뭐라고 하느냐? 이게 존재에요. 있음이에요. 있음에서 있음을 더 키우기 위해서 했던 모든 노력을 있음에는 없고 없는 어떤 일이 우발적으로 터지면서 있음을 쪼개버리면 그걸 사건이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십자가를 가진다든지 십자가를 믿는다든지 하는 일은 성립되지 않습니다. 주도권은 십자가에 있지 우리가 십자가를 어떻게 다룰 수 있는 처지는 못 됩니다. 우리가 십자가를 다루면 무당 돼요. 복음 가지고 장사하는 무당이 된다고요. 있을 수 없지요. 그래서 제가 강남강의에서 그런 이야기했어요. 예수님께서 세례요한에게 선지자 노릇하게 한 것은 말씀을 전하지 말라고 선지자 노릇하게 했다. 말씀을 전하지 말라고 세례요한을 세운 거예요.
그래서 세례요한은 말씀을 전하면서 결코 이 말이 내 말은 절대 아니라는 것을 전하는 본인이 미리 알면 안 되고 전하면서 그걸 새록새록 체득해야 되는 거예요. “야아 이게 내 일이 아니구나. 주의 일이구나.” 그걸 하면서 느끼는 거예요. 옥에 있을 때 세례요한이 이런 말했지요. “오실 당신이 메시아 맞습니까, 안 맞습니까?” 자기도 의구심이 드는 거예요.
근데 의구심 든다는 말을 한다는 게 결국 뭡니까? 그동안 세례요한이 이야기했던 것이 자기 말이 아니었다는 것을 완전히 티를 내는 거예요. 내가 선지자 노릇하기 위해서 뭔가 하나님 보시기에 그럴싸한 노력을 본인은 한 적이 없다는 것을 거기에 딱 티가 나버린 거예요.
유한한 것, 유한이란 한계 있음, 한계 있는 것 유한체, 인간이죠. 인간이 하나님을 어떻게 기쁘시게 한다는 이거는 없습니다. 하나님을 무한이라 한다면 유한 어떻게 무한을 찾아가는 건 있을 수 없고요. 무한이 무한 되기 위해서 안에 유한한 인간을 유한으로 드러내는 작업을 계속하는 겁니다.
방금 이야기한 어려운 말을 쉽게 하게 되면, 너는 죄인이다, 이 말이죠. 니가 십자가 믿는 것도 내가 십자가 믿는다는 그 믿음으로 니가 죄인에서 의인되는 법은 없다. 십자가 믿는 것조차도 그게 십자가 사건 아니게 하는 거예요. 결국 뭐냐 하면 성도는 자기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할 수밖에 없어요. “주님과 나랑 무슨 상관있는가?” 아무 상관없다는 사실을 희열과 기쁨, 감격 속에서 그걸 받아들이는 겁니다.
그걸 사자성어로 박하사탕. 속이 다 시원해. 내가 아는 걸 다 비켜가고 내가 믿는 걸 다 비켜가니까 우리는 성도라면 그냥 박수 치고 싶은 거예요. 왜? “저 비켜 가신 것 너무 잘하셨습니다. 저와 의논하지 않는 것 너무 이거는 정말 멋진 아이디어십니다. 주님한테는 다 계획이 있군요.” 내 계획을 비켜 가는 거예요. 이것보다 더 신나는 일은 없어요.
여러분들 제가 문장을 쓸 테니 이 문장을 이해해보세요. “내 나이가 팔십인데 내가 일한 것은 구십 년째다.” 이것 이해해보세요. 내 나이가 팔십인데 내가 구십 년째 은퇴 안 하고 일하고 있다, 이게 말이 돼요? 일이 나의 존재를 밟고 지나가죠. 그것도 십 년 이상 밟고 지나가잖아요. 90-80은 10년 나오잖아요.
세례요한이 이런 이야기했잖아요. 내 뒤에 오시는 분이 나보다 앞선 것은. 그러니까 세례요한이 철로에 누워있는 하나의 고구마라면 주님은 고구마를 밟고 지나가는 육중한 열차에요. 그것도 석탄을 가득 실은 화물열차가 그냥 짓이기고 가는 거예요. 역사를. 그러면 세례요한은 그 육중한 열차의 무게에 터지면서 예전에 몰랐던 희열과 감사와 감미와 찬미가 터져 나오는 거예요. 주여 누가 나를 함부로 밟아주니 고맙습니다. 누가 나를 함부로 밟아주니 고맙습니다.
십자가가 나를 함부로 대하고 함부로 짓밟는 게 없으면 모든 인간은 그냥 그 자리에 스톱한 체 살아가고 있는 중이에요. 그리고 어떤 방향성도 없이 그냥 갈 곳도 없고 방향성도 없어요. 스톱된 거예요. 이게 뭐냐?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라는 게임이에요.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경직돼있지요. 모든 인간은 경직돼있어요. 뭘 해야 될지 뭘 할지 아무것도 몰라요.
이문열이라는 사람도 이런 비슷한 이야기했어요. 나이 팔십인데 구십 년째 일하고 있다는. 뭐냐 하면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 이걸 제가 말을 바꿔보겠어요. 쉬운 말로. 날개는 있는데 날 능력이 없는 것, 가짜 날개를 갖다 붙인 거예요. 모든 인간들이 교회를 오면서 교회는 왔는데 날개는 달았는데 하늘나라 갈 수 없는 날개에요. 뭔가 없는 것보다 있는 게 낫겠다 싶어서 교회 시키는 대로 어깨에 붙여놓은 거예요.
이거는요 비행장에 경운기 다니는 것과 똑같은 거예요. 경운기가 무슨 힘으로 날겠습니까. 그냥 왔다리 갔다리 하죠. 인생이란 이런 거예요. 지평적으로 왔다 갔다, 왔다 갔다 하다가 죽고 없어지고, 죽고 없어지고. 이것뿐이지 날지를 못하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땅에서 하늘에 가신 분은 오직 누구밖에 없습니까? 예수님밖에 없어요. 베드로고 뭐고 다른 사람은 없어요.
인간은 원래 못 날도록 돼있습니다. 못 나는 것이 너무나 당연한 거예요. 그래서 천국 가면 정말 이거는 놀라운 일이고 신기한 일이에요. 땅에서 하늘로 올라가신 분은 주님밖에 없거든요. 그런데 우리는 하늘로 올라가지 못하잖아요. 못하는데 어떤 다른 힘이 와서 날지 못하는 우리를 날도록 주께서 독수리가 땅에 기는 거북이 등짝 잡고 물고 하늘로 당겨올 때에 어느 누가 거북이 난다고 하겠어요. 독수리가 나는 거죠.
출애굽기 19장에 보면 그런 말씀 나와요. 너희가 애굽에서 나올 때 독수리 날개에 너희를 얹어서 약속의 땅으로 이동시켰다, 이렇게 돼있거든요. 독수리 날개가 얼마나 평수가 몇 평 돼야 남자만 육십 만 그 많은 숫자를 독수리 날개에 업었다 이 말이에요. 이 말은 뭐냐? 너희들 힘으로는 갈 수 없는 곳에 내가 데려가겠다. 너희들 생각하는 그 땅이 아니고 너희들 생각에 없는 땅에 내가 데려가겠다.
그게 여호수아, 이번 겨울수련회 테마, 주제가 되는 겁니다. 제목도 [없는 땅], 없는 땅에 데려가는 거예요. 그럴 때 인간 자체가 달라져야 하는 겁니다. 달라지는 방법이 두 가지 방법이 있어요. 하나는 공간적으로 달라진다. 공간적으로 달라질 때는 우리가 없는 땅에 들어가요. 없는 땅에 들어가려면 현재 땅이 있잖아요. 인간은 땅의 사람이잖아요.
박경리 소설제목이 뭡니까? <토지> 그 소설의 현장을 내가 가봤어요. 최 참판 댁도 가보고 했는데 이 제목 자체가 마음에 안 들어요. 토지, 이것 저주받을 땅이거든요. 뭘 여기에 미련 갖고 애착 갖고 인생의 전부고 목적이 될 수 있느냐 말이죠. 그러면 인간은 뭐냐 하면 기껏해야 토지에 살리라, 흙에 살리라.
나 지금까지 그 바람에 대해서 의구심 있는데 내가 알기론 표준말은 ‘흙에 살리라’에요. 그런데 그 노래 부르는 사람은 만날 ‘흘게 살리라’에요. 내가 흥분할 건 아니지만. 이 사람은 이 노래 하나로 평생을 먹고 사는 사람인데 흙에 살리라. 하여튼 이게 중요한 게 아니고 이게 흙에 살리라, 그러니까 땅이 있으면 땅에 딱 맞는 인간성이 따로 내가 그 이상의 맞춤 나에요.
그러면 없는 땅에 가려면 지금의 나를 포기해야 되지요. 왜 나는 땅에서 생산되고 땅이 만들어낸 인간형이기 때문에 안 받지요. 자, 다시 하겠습니다. 주님은 땅에서 어디로 올라갔다고요? 땅에서 하늘로 올라갔지요. 근데 땅만 쳐다보고 있는 인간은 그 하늘, 천국을 뭐로 보느냐? 땅의 연장선으로 보는 거예요.
이 땅에 살던 우리가 거뜬히 저 땅에도 살 것이다. 이 땅은 생로병사 고해의 땅이고 저쪽은 눈물도 아픔도 없는 멋진 땅이다. 어떤 맨션아파트라 하는데 맨션아파트 옛날이야기기지 요새 맨션아파트 별로 쳐주지도 않는데 맨션아파트 있고, 장례식장에서 그런 이야기하잖아요. 염려하지 마라. 처소를 마련했느니 다른 말로 맨션아파트, 맨션아파트 방 세 개, 부엌 있고 하는데 사고가 지가 땅에서 괜찮다 싶으면 그게 실현되는 것이 하늘로 생각하는 거예요.
이거는 유한에서 나오는 무한입니다. 이걸 수학에서는 가짜 무한이라 해서 가무한이라 해요. 현대수학에서 가무한, 가우스란 수학자 이후에 가짜 무한, 그냥 가짜 무한인데 순서상 +1+1한 거예요. 그래서 수학적으로 뭐냐? 유리수에 연결되면 안 되고 무리수에 연결돼야 돼요. 무리수란 π이 같은 것, 유리수는 분수로 표현할 수 있는 거거든요. 이거는 규칙적이에요. 그렇지만 무리수는 불규칙이에요. 자연상수 e, π 같은 것 이런 건 무리수라고요. 종잡을 수 없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는 자꾸 예상하고 어떤 질서, 아까 했지요. 과학, 철학 다 질서라고요. 종교도 마찬가지고. 질서란 말이죠. 뭐 심방하면 교회 나오겠지. 이런 것 질서 아닙니까. 이 땅에 있는 나를 이 땅에 살던 생리, 속성 그걸 이게 부정당해야 됩니다.
한 20년 전인가 동해에선가 기관이 고장 난 북한의 군함을 남쪽에서 우연히 어떻게 해서 넘어왔어요. 넘어온 그 해군들에게 우리나라에서 잘해서 북한에 갈래, 남한에 남을래? 우리는 북한에 가겠습니다, 해서 갈 때 그 당시 우리나라에게 제일 맛있는 게 뭐냐? 초코파이거든요. 초코파이 싸주고 해서 갔다고요. 옷도 양복으로 멋있게 맞췄는데.
판문점 통해서 가는데 판문점 저쪽에서 북한의 간부들이 있을 것 아닙니까. 자기가 그냥 가게 되면 죽을까 싶어서 거기서 팬티만 입고 나머지 옷을 이 더러운 자본주의 상품이라 해서 옷을 막 던져요. 그러면 팬티는 어느 제품인데? 왜 그거는 안 벗어? 사람이 일관성이 없어, 일관성이. 다 벗어야지. 팬티는 북한 제품인가, 중국 제품인가?
그러니까 자기 환멸이고 자기 멸시거든요. 이 더러운 땅, 나를 출세케 하고 나를 재벌 만드는 더러운 땅 나는 두 번 다시 꼴 보기 싫어, 이렇게 다 버리고 가면 천국 보내줍니까? 그런 연출하게 되면. 인간 그런 재주도 없어요. 자기를 부인할 수 있는 재주가 없습니다. 공간적으로 자기 땅에서 살기 때문에 흙에서 살기 때문에 땅에서 살기 때문에 천국도 나 사는데 접합한 땅일 것이라고 자기 자신을 부인하지 못한 상태에서 교회에서 이것을 소망이라고 한 거예요. 로마서 8장에는 그런 소망은 눈에 보이는 소망은 소망이 아니라고 이야기를 그렇게 했어도 듣지도 않고 하는 거예요. 공간적으로 없는 땅입니다.
그 다음에 시간적으로 봅시다. 이건 더 난해해요. 아까 했지요. 팔십 년 살았는데 구십 년 일한다고요. 시간적으로 뭐냐 하면 기다릴 것이 없어야 됩니다. 왜냐하면 미래의 시간은 기다림에서 오거든요. <고도를 기다리며> 고도는 독일말로 신, 신을 기다리는 연극이 있잖아요. 그 기다림으로 말미암아 인간은 지금 자기를 부정할 수가 없어요. 곧 내 뜻이 이뤄지는데 지금 와서 내가 자길 포기하면 안 되지요.
그래서 제가 준비한 노래가 하나 있어요. 혹시 이 노래를 여러분 중에 아는 사람 있을 수 있는데 제목이 장욱조 씨가 불렀던 <고목나무>
저산마루 깊은 밤
산새들도 잠들고
우뚝 선 고목이
달빛아래 외롭네
옛사람 간 곳 없다
그 다음, 올 일도 없지마는, 이 대목이에요.
옛사람 간 곳 없다
올 일도 없지마는
만날 날 기다리며
뭐 미친 것 아니에요?
올 일도 없지마는
만날 날 기다리며
오늘이 또 간다
어디로? 그 고목 있는 데로.
가고 또 가면 기다릴 그 날이
올 일이 가깝구나
그러니까 이건 뭐냐 하면 옛사랑은 이마 갔고 지금 다른 남자와 애 둘 낳았어. 그런데 그 여자를 그리워하는 게 아니고 내가 그리던 그 여자에요. 그때 그 사람, 없는 사람이죠. 왜? 첫사랑은 나이가 육십이 넘어서 만나봐야 어느 귀신이야, 그럴 건데. 첫사랑은 만날 수가 없어요. 집사님, 첫사랑 만나보세요. 영감이 뭡니까? 지금 요양병원에 가있는데.
내가 만나고 싶은 것은 지금의 첫사랑이 아니고 그때 그 나잇대 그 모습을 유지한 첫사랑, 다시 말해서 인간은 자기한테 미쳐있는 겁니다. 기다림에 미쳐버리고 악마가 그렇게 만들었어요. 자기 소망에 미쳐버려요. 현실은 내가 찾는 사람이 없습니다.
어떤 사람에게 반해버렸다. 그런데 그 사람이 반하고 난 뒤에 벌써 두 시간 반 지났는데? 두 시간 반 지난 것은 그 사람 아니에요. 내가 반할 때 그 타이밍 때 내가 반한 것이 오후 두시 반이었는데 그때까지 점심을 안 먹었어. 점심을 안 먹은 몽롱한 상태에서 이상하게 예뻐 보였던 그 상태, 그 상태에 갑자기 예쁜 여자 나타날 때 하려면 나도 점심 굶고 그 다음날 그 장소에 가야 됩니까?
가봐야 창 넓은 창가에 앉아봐야 오지도 않아요. 커피 향 만 짙게 깔리는 그리고 밤새도록 있어봐야 나중에 갈색추억만 드리워지고 홀로 그리워지고 커피도 그 커피고 음악이고 그 음악인데 올 사람은 오지도 않고, 하면서 노래 부르며 집에 오지요. 그 다음날 또 가지요, 뭐. 인간은 자기가 만든 망상 속에서 사는 게 유일한 사는 재미입니다.
욥이 고통스러운 것은 육체의 고통으로 말미암아 자신의 희망이 모든 것이 다시 돌아갈 수 없다는 좌절감 이겁니다. 그게 바로 욥의 고통이요, 주님의 십자가의 고통이에요. 내가 죄인도 아닌데 죄인이 당해야 될 모든 최후의 저주를 아버지로부터 예수님이 다 받아요. 그것은 뭐냐 하면 이게 버림받음이에요. 나는 버림받을 필요 없는데 버림받았어요, 아버지로부터. 아버지와 함께 있을 때 아들입니다. 아버지 없는 아들은 아들이 아니거든요. 아버지 아들 관계가 끊어진 거예요. 단절이에요. 불연속성입니다. 이걸 어느 인간이 불연속성을 뛰어넘습니까.
아까 처음에 과학, 철학 모든 게 뭐예요? 연속적이에요. 지금 연구하면 미래에 써먹을 게 있을 것이다. 지금 우주복 연구하는데 우주복 하나 만드는데 비용이 2조 들어요. 2조란 돈을 들이면 언젠가는 2030년 되면 화성이나 달에 관광객 한 사람당 2억5천만 원 받고 티켓 끊고 갈 수 있다. 그 희망 때문에 그들은 사업을 벌이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이십 년 뒤에 달에 우주를 여행하는 걸 누가 환상이라 하겠어요. 환상 아니지요. 옛날 인류역사에서 환상이라고 여겼던 것이 실현되었잖아요, 그렇지요. 어떻게 내가 가만있는데 서울까지 네 시간 만에 가. 이거는 조선시대에는 환상이지만 자동차 나오니까 환상이 현실이지요. 하지만 아무리 현실이라도 그 현실은 환상입니다.
인간은 실제적인, 이 단어를 실증, 실증적 이것이 바로 환상 또는 망상이에요. 본인이 미쳤어요.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미쳤어요. 환상 아니면 살 재미가 없는 그 환상에 미쳐있습니다. 그러니까 메시아도 뭡니까? 자기 환상에 부합되는 메시아를 원했던 거예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얼마 전에 몇 주 전에 제 설교에 그 대목을 언급했어요. 멸망한 것이 성전에 설 때에 그것이 바로 종말이 온 줄로 알아라. 이랬거든요. 멸망한 것, 존재지요. 성전, 장소지요. 이 장소에 멸망한 것이 선 날이 온다는 거예요. 그럼 성전은 누가 서야 되는 겁니까? 성전은 오직 메시아가 와야 되거든요. 그런데 이 세상에는 이미 메시아는 쫓아 보냈어요.
이거는 다음 주일 설교할 건데, 이미 예수님은 추방됐잖아요. 인간이 있는 한 예수님은 늘 추방돼야 돼요. 다시 오심이란 것은 인간이 있는 한 현실이란 이름의 망상, 과학, 철학, 예술, 학문 이게 있는 한 예수님은 항상 망상적 존재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오고자 하는 그 성전은 인간들이 성전이라고 여기는 곳에는 올 수가 없지요. 인간은 예수님 쫓아내고 이걸 성전이라고 규정했기 때문에 이 성전은 망상의 일부가 되는 겁니다.
어디 올지 언제 올지 인간은 모르는 것이 너무나 당연하지요. 본인이 미쳤으니까. 내가 미쳤어, 하잖아요. 자기가 미쳐있으니까 아무것도 모르는 거예요. 아무 의미가 없는 겁니다. 원래 유한은 무한을 드러내기 위해서 있는데 유한이 무한한 악마의 사주를 받고 유한이 무한한 악마의 말을 듣고 진짜 예수님이라는 무한을 쫓아냈잖아요. 쫓아냈으니까 여기에 인간이 찾고자 인간이 그리워하는 것은 뭡니까? 전부 다 망상밖에 없는 거예요.
그렇다면 아까 했어요. 공간적으로 없는 땅, 그럼 시간적으로 없는 시간. 인간의 그리움이란 시간은 그리움으로 나오기 때문에 그리움 말고 오는 시간, 그거는 인간의 그리움이 이미 있기 때문에 그리움에 장착될 수 없는 다른 시간이 오겠지요. 인간 보기에 어떤 시간입니까? 인간이 기다릴 조차도 없는 시간이 오죠. 인간이 기다릴 수 없는 기다림의 대상이 안 되는 시간이 오는 거예요.
그러면 그 시간은 인간 시간에 뭘 하느냐? 구멍을 내버리는 겁니다. 이게 십자가 사건이 뾰족한 바늘처럼 우리의 기다림이 있고 내가 이 땅의 사람이라고 자부하는 그 핵심부에 성령께서 찔러 구멍을 내버립니다. 이게 사도 바울의 편지에 나오는 이야기를 제가 지금 함축해서 이야기하기 성경에 없는 이야기라고 오해는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성경에 다 있는 이야기에요.
그러면 예를 들어봅시다. 사도 바울이 있는데 여기에 뭐한다고요? 구멍을 내지요. 사도 바울이 십자가의 영을 받지 아니하면 사도 바울은 사도도 아니고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구멍을 내버리니까 사도 바울은 구멍 말고 여기까지는 누구 것이냐 하면 사도 자기 것이죠. 그런데 자기 것인데 자기 것 한 가운데 이 구멍의 면적은 자기 것이에요, 자기 것 아니에요? 이거는 자기 것이 아닌 겁니다.
그래서 갈라디아서 1장 8절, 여러분들이 참 어려운 것을 지금 안 주무시고 듣고 있다는 것은 정말 박수 치고 싶습니다. 안 주무시고 있으니까 계속 더 어렵게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1장 8절에,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자, 보세요.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저주받는 대상에 누가 포함돼있습니까? 복음을 전하는 본인과 우리와 심지어 하늘로 온 천사라도 저주의 대상에 해당되는 거예요. 그러면 이 나라는 것이 이 구멍자리에 내가 여기서 나라는 이름으로 참여할 수 있다, 없다? 참여를 못하는 거예요. 내가 참여할 수 없는 그 공간이 나의 중심으로써 내 한복판에 자리 잡고 있는 겁니다. 그러면 나는 사나 죽으나 나의 것이 아니지요. 나의 것이 아닌 겁니다.
이걸 구멍으로 이야기하는데 구멍 말고 다른 말로 하면 더 좋아요. 블랙홀. 블랙홀과 구멍의 차이점은 둘 다 구멍이지만 날 것이 쏟아져 어두움 속에 다 소실돼요. 소멸돼버려요. 나중에 결국 나이 많으면 다 없어지겠지만 이게 소멸된다고요. 그 구멍 속으로 빠져서. 나는 소멸되고 여기서 새로운 주님의 십자가의 은혜가 계속 나오지요. 죄는 받아들이고 은혜는 나오고. 죄가 있는 곳에 은혜가 넘치고.
그러니까 결과적으로 외부적으로 뭡니까? 범사에 계속해서 감사하고 감사하는 거예요. 내 것은 거둬들이고 주님의 것으로 살게 하니까 말씀이 너희 안에 역사하느니라. 말이 아니고 말씀이 내 안에서 역사하느니라. 또는 성령이 내 안에 역사하느니라. 그래서 사도는 나는 죄인 중에 괴수니라. 심지어 사도 몸에는 사탄의 가시까지 있었어요. 그냥 가시가 아니고 사탄의 가시에요.
그런데 사탄의 가시를 왜 주셨습니까? 사도한테 물어보면 이 구멍 되시는 주님이 십자가 자기 활동하기 위해서 나를 하나의 칩 판으로 사용해서 사탄을 줬는데 내 것도 아닌데 사탄을 왜 주십니까, 라고 내가 말할 자격이 안 되지요. 이렇게 답변할 거예요. 내 몸 같으면 왜 주십니까가 되는데 내 몸이 아니고 주님의 몸이 주님 자신의 십자가 증거 하라고 내 몸을 사용하는 입장에서 왜 이렇습니까, 할 수가 없지요.
전세 놓고 맨날 전셋집 찾아가서 왜 벽에 못을 박습니까, 이러면 그 사람 못 삽니다. 전세 줬으면 나중에 나갈 때 빼면 되지 왜 자꾸 매일같이 찾아가서 집주인입니다. 못 박았는지 감시하러 왔습니다. 이럴 수 없잖아요. 했으면 자기 집이 아니잖아요. 이 몸은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에요. 고린도전서 6장에 보면 값을 주고 구입한 겁니다. 그리고 성령으로 인하여 등기이전 됐어요. 떼어 봐도 내 이름 없고 예수의 소유권, 주님의 이름으로 돼있다고, 우리가.
이게 사도 바울이 말한 복음이거든요. 문제는 이게 지식에서 출발한다는, 지식에서 와서 이게 실제 현실화되기까지 우리는 말씀이 이끄는 대로 성령이 이끄는 대로 날마다 달라져야 될 이유가 필요한 거예요. 그럼 아까 이야기한 것 다시 해봅시다.
내가 여기 있는데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나는 바리새인 중에 바리새인이고 그 당시의 학문으로서는 자기가 탑이에요. 모르는 게 없어요. 그래서 사도 바울을 만났던 사람들이 사도 바울의 평가가 뭐냐 하면 학문에 너무 뛰어나다. 네가 아는 것이 너무 많구나, 이런 식으로 했어요. 성경에선 짧게 나왔지만 다른 말이 얼마나 많았겠어요. 그게 이 사람은 모르는 게 없다, 이렇게 된 거예요.
거기에 대해서 고린도후서에 보면 내가 세상 지식을 다 알고 철학을 알지만 이 철학 판에 뭘 뚫었다? 바로 십자가로 뚫은 거예요. 이게 고린도전서 1장에 나오지요. 세상에 헬라인은 지식을 원하고 유대인은 기적을 원하나 내가 이야기하는 것은 구원받는 사람에게는 십자가만이 하나님의 능력이다.
십자가만이 하나님의 능력이라 하는 것은, 이미 다른 것은 다 통달하고 있다는 것을 전제로 깔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이 십자가, 십자가, 십자가, 십자가 되기 위해서 우리는 내가 아는 것과 십자가 지식이 자꾸 섞여서 자기 중심부를 차지하는 경향이 있어요. 그 대표적인 것이 신학이에요. 신학 알았다고 복음 알았다고 오해하거든요. 신학교 가서 신학 알게 되면 마치 진리를 아는 것처럼 그렇게 생각하고.
내가 십자가 복음 안지 30년이다, 하거든요. 30년 됐다고 아는 게 아니에요. 왜냐하면 사건은 십자가는, 다시 반복하면 십자가는 사건이에요. 사건은 그때까지 있던 걸 무로 돌립니다. 없음으로 돌려요. 안다는 것도 같이 휩쓸려나가야 되지요. 예를 들어서 “지금은 십자가에 대해서 감격이 없습니다, 목사님. 내가 20년 전에는 십자가 안고 눈물을 흘렸는데 너무 좋았는데…” 할 때는 이렇게 하세요. “옛사람 간 곳 없다 올 일도 없지만은” 바로 기다림이거든요.
옛날 좋았던 자기가 자기에 대한 자기 첫사랑, 나에 대한 첫사랑 그때 참 좋았다. 언제 그날이 올까, 또 기다림이에요. 자기 기다림. 그걸 신자라 하지 않고 그걸 도인이라 해요. 소위 복음 안다는 도인 많아요. 신학 좀 한 도인들. 복음 알 때는 멀쩡하게 수염 깎다가 복음 알고 십자가 알고 난 뒤에는 갑자기 수염을 허연 수염을 길러서 또 잘 입던 양복 안 입고 한복을 입네. 개량한복 입고.
그리고 아파트 팔고 산속에 가서 머리는 길고 수건으로 단군인지 십자가의 증인인지 분간이 안 돼, 도대체. 자기를 꾸미는 데 뭔가 돋보이는 식으로 차별화시키는 것 있지요. 그걸 개인적으로 한 사람도 있지만 공식적으로 집단적으로 하는 사람 있어요. 감리교 목사들. 뭐 하느냐? 로만컬러도 아니고 십자가로 천주교 신부와는 다르게 십자가로 해서 교단에서 연금 받고 살고.
이게 무슨 짓입니까? 장로교 통합 측, 양복 입어도 되는데 이상하게 가운 같은 것 걸친다고요. 거기다가 루터교나 우리나라 성공회 보면 철따라 봄여름가을겨울마다 뭘 하느냐 하면 커튼을 바꿔. 무대커튼을 보라색으로 노란색으로. 그걸 그 사람들은 뭐라고 하느냐? 이게 전례, 의식, 예식이라는 거예요. 경건한 예식이라는 거예요.
이것 바리새인이 다 한 거예요. 사두개인, 바리새인들 예수님 때려죽인 인간들 다 했던 거거든요. 왜 그런 짓합니까? 성스러움으로 유인해서 교회 숫자 채워서 교회 자금 마련하려고 그 짓하고 있는 거예요. “천국 가고 싶습니까? 보내드리겠습니다.” 시키는 대로 하면. 등록부터 하시고 그 다음부터는 주께서 주신 교회법도 따르시고 갑자기 십자가는 날아가 버리고 그 자리에 교회법이 틀어막아버려요. 교회법이 들어가 버려요. 교회법에 제직회는 , 교인들은, “이걸 꼭 알아야 돼?”
그게 뭐냐 하면 아까 인간은 갈 곳을 몰라요. 십자가로 막아놓으니까 나름대로 뭘 해야 그럴싸하잖아요. 어제 오후설교에 그런 이야기했습니다. 교회는 뭐가 없다? 실체가 없다. 교회는 실체가 없어요. 왜냐하면 인간 자체가 실체가 없는데 교회가 실체가 있을 리 있겠어요. 다 무의미한, 의미가 없는 거예요.
그 구멍 난 안에서 총알 맞은 것처럼 주님의 총알 맞아서 안에서 계속해서 말씀의 새로움이 나와야 되는데 새로움이 안 나오니까 있는 시간과 공간, 역사성으로 자기 구멍 난 것을 성스럽게 조작하는 거예요. 유네스코에 등록된 겁니까? 거룩한 거예요? 이걸 해서 역사와 전통과 자기의 복음 지식으로 꾸며서 이걸 증거하고 전하는 겁니다.
그럼 구멍 난지 어떻게 압니까, 라고 한다면 바로 이렇게 인간은 누구나 땜질하다가 성령이 오게 되면 땜질한 이게 찢어져요. 나 이래 까불다가 이래 맞았다는 것, 이게 찢어져버려요. 나의 역사와 나의 실적과 업적, 내가 과거에 복음을 설교를 얼마 하고 교회를 얼마 하고 강의를 얼마 하고 이게 찢어진다고요. 아무 의미 없는 것들이에요. 왜? 나 자체가 의미 없어요.
주님과 나랑 무슨 상관있어요. 아무 상관이 없는데 주께서 그때그때마다 우리로 하여금 새로움의 증거, 새로운 복음의 증인으로 사용하시는 것, 내 안에 주님 계셔서 나부터 찢어버리죠. 왜? 주님은 마동석이니까. 이야기할 것도 없어요. 그냥 한 방에 찢어버려요. 날마다. “그만 살아라, 인간아. 살려하니까 문제구나.” 찢어버리죠.
그 찢길 때 이 복음도 아닌 것, 의미도 없는 걸 의미로 여겼던 걸 찢길 때 그 시원함, 박하사탕 열두 개 먹은 것보다 더 시원한, 속이 다 시원한 거예요. 내 인생이 내 것이 아니구나. 주의 것이란 걸 우리가 느끼죠. 이 느끼는 것 다시 간직하지 마세요. 간직하면 이게 역사되고 전통돼요. 느끼면 또 일회용이다, 그때뿐이란 걸 각오를 하세요. 또 주께서 찢어주면 찢어지고 안 찢어주면 할 수 없지, 이단으로 살아야지. 마음가짐을 이게 내 일이 아니고 주의 일이니까 일임해야 됩니다.
방금 그렇게 해서 어디까지냐? 다음 시간부터는 13페이지부터 교회가 무엇이냐, 교회부터 다음 시간에 하도록 하겠습니다. 읽어보세요.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이 우리한테 짐이 된다 할지라도 그 짐스러움마저 십자가에 활용하기 위해서 주께서 연장시켜준 하나님의 선물인 것을 마음 편하게 거리낌 없이 감사함으로 받아들이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