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강의

생생한 육

아빠와 함께 2021. 9. 29. 07:58

대전-72강 사무엘상25장41절(생생한 육)20210927a
(강의:이근호 목사)


오늘은 사무엘상 25장 39절부터, “다윗이 나발의 죽었다 함을 듣고 가로되 나발에게 당한 나의 욕을 신설하사” 신설이란 말은 그동안 원통했던 것을 모든 진실이 밝혀져서 부끄러움이 눈 녹듯이 다 내려갔단 뜻이에요. “종으로 악한 일을 하지 않게 하신 여호와를 찬송할지로다 여호와께서 나발의 악행을 그 머리에 돌리셨도다 하니라 다윗이 아비가일로 자기 아내를 삼으려고 보내어 그에게 말하게 하매” 그렇게 돼있거든요.

이 대목에서 두 가지 끄집어내시면 되는 겁니다. 여러분 아시는 이야기할게요. 세상에 두 가지의 원료가 투입되지요. 인간과 인간들. 인간이 범죄 하고 난 뒤에 대지를 땅으로 삼았잖아요. 땅의 세계는 누구의 세계다? 사람들이 세계다. 에덴동산에서 쫓겨나서 토지에 와서 갈았으니까 이 세상은 누구의 세계란 말입니까? 인간과 인간의 세계지요.

이게 바로 이방나라지요. 이방나라는 모든 것이 인간과 인간의 세계에요. 주인들의 누굽니까? 인간들이 주인이에요. 인간이 땅을 가꾸고 문명을 개발한다 이 말이죠. 저희들끼리 땅 차지한다고 전쟁 일으키고. 아프가니스탄 전쟁, 이런 거죠. 탈레반. 이게 인간과 인간의 세계. 그런데 여기에 지금 우리가 하는 것은 성경은 무슨 나라냐 하면 이스라엘이란 말이죠.

이스라엘 나라가 뭐냐 하면 여기에 누가 개입하느냐? 하나님이 개입해요. 그런데 하나님이 개입하는데 인간과 하나님이 만나면 이게 안 돼요. 왜냐하면 하나님은 너무 거룩하기 때문에 인간은 견딜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투입하는 것이 뭐냐? 하나님이 아니고 하나님의 이름이 투입되는 거예요. 이름은 피조물에게 붙이는 게 이름이거든요.

근데 하나님이 스스로 피조물 행세를 하시는 거예요. 이름이 있으니까. 사람 부르듯이 하나님 부르라 이 말이에요. 사람들이 이름을 부르잖아요. 그런데 하나님도 사람에게 호칭의 대상이 되겠다. 나의 이름을 부르겠다. 그 이름이 뭐냐? 사람한테는 이름만 부르면 되지요. 그런데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 때는 그냥 이름만 부르면 안 되고 거기에 인간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 때는 통로가 있어요. 이 통로를 언약이라 또는 약속이라 이렇게 이야기하는 겁니다.

하나님을 부를 때는 반드시 뭐를 통해서 불러야 된다? 언약 또는 언약 안에서. 그래서 이스라엘은 무슨 나라냐 하면 언약의 나라 또는 언약으로 세워진 나라. 그게 이스라엘입니다. 이스라엘의 주인은, 이 세상의 주인은 누굽니까? 인간 대 인간이죠. 왕과 백성들, 계급들 어쨌든 간에 인간들의 모임, 이게 이방나라라면 이스라엘의 주인은 누구냐 하면 바로 하나님의 이름이 주인이 되는 겁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가마 태운다고 보시면 돼요. 하나님의 이름을 가마 안에 집어넣는데 하나님은 피조물이 아니기 때문에 가마 속은 텅텅 비어있고 그 가마를 둘러싼 가마에 해당되는 것이 하나님의 언약입니다. 하나님의 언약 또는 하나님의 약속. 그러면 그 약속을 통로니까, 튜브 같은 것, 하나님의 언약을 통해서 하나님을 모셔야 되니까 만약에 언약이 희미해지고 시시해져버리면 거기에 누가 있을 수가 없습니까? 하나님이 있을 수가 없지요. 그리고 언약이 충실하단 말은 하나님이 거기에 함께 계실 조건이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방금 이야기가 여러분 이해되셨다면 하나님 관점에서 봅시다. 하나님 이름께서는 이스라엘 민족들, 이스라엘 민족은 사람입니다. 다른 민족은 하나님 함께 있으면 죽어 버리지만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과 함께 있어도 살 수 있는 것은 그 주변에 뭐가 있기 때문입니까? 하나님의 언약이 있지요. 그러면 언약이란 결국 용납과 용서가 계속 작동되는 그런 장치, 용서와 용납, “나 너 봐줄게.” 이 ‘봐줄게’가 계속 되는 거예요.

이게 신약에 오면 값없이. “값없이 나 널 늘 함께 해줄게.” 이런 뜻이에요. 일체 인간으로부터 아무것도 받지 않는 것, 헌금이고 찬양이고 봉사고 뭐고 아무것도 안 받는. 어떤 것도 받지 않아요. 찬양과 봉사와 헌금 아무것도 안 받고 그냥 하나님께서 찬양을 하라고 찬양을 주시고, 헌금하라고 돈을 주시는 거예요. 가만 들어보니 그 이야기가 그 이야긴가. 너한테 돈 안 받을게, 해놓고 자기 돈을 주고 내놔. 이것과 똑같은 거예요. 그게 십일조라는 건데.

네가 약속의 땅에서 인간들이 하면 하나의 농산물도 생산되지 않아요. 그런데 젖과 꿀이 흐르게 해놓고 임대차 계약한 거예요. 레위기 마지막에 나와요. 이스라엘은 임대한 농부에요. 자기 땅도 아니에요. 이 땅은 하나님의 땅이에요. 하나님의 땅에서 생산물 열어놓고 우리 갈라먹자. 내가 많은 걸 달라고 하진 않을게. 십분의 일만 내놔.

그럼 누구한테 합니까? 바로 하나님의 언약이 모털 엔진이에요. 거대한 것을 움직이는 엔진. 거대한 이스라엘을 움직이는 엔진은 뭐냐 하면 언약입니다. 그 언약 안에 하나님은 안 계시다 했지요. 하나님은 안 계시는데 하나님이 하는 일을 대행해서 보여줘야 될 것들은 계속해서 투입돼요. 구약은 하나님이 계시고 하나님을 대신해서 짐승들이 희생을 하잖아요. 신약은 반대로 인간들은 그냥 있고 하나님이 대신해서 죽어서 하나님의 나라를 가동시키는 겁니다.

구약에서는 반복적으로 짐승들의 제사가 들어가는데 이 때 언약의 모털 엔진, 거대한 이스라엘을 전차바퀴처럼 움직이게 하는 그 작동의 언약의 핵심은 이거에요. 죽음입니다. 죽음이란 의미는 뭐냐 하면 이스라엘을 전체 인간세계를 대표해서 하나님 보시기에 모든 인간은 이왕 이미 죽은 자란 사실을 어린양이나 제사들 통해서 계속 그걸 표현해내라 이 말이죠. “저거는 죽은 자 맞습니다, 하나님.”이라는 것을 매일같이 상번제라 해서 드리라 이 말이죠.

죽은 자가 돼야 이게 일용할 양식이 하루치만 배급이 가능해요. 이걸 광야에서 만나로 줬거든요. “하루치 받은 것도 고마운 줄 알아라, 이것들아.” 이런 뜻이에요. 하루치. 하루라는 말은 창세기에 보면 저녁이 되고 낮이 되면 하루거든요. 하루는 뭐냐 하면 하루가 되었다는 그 과거를 일체 문제 삼지 않는 거예요. 과거의 죄가 오늘로 이전될 필요가 없는 거예요. 하나님의 언약 안에서는.

과거의 죄 때문에 고민하고 고생하고 있는 것은 인간들이 과거와 오늘의 identity정체성을 연결시켜야 된다. 지속시켜야 된다는 생각 때문에, 그걸 두 자로 기억이라 해요. 과거에 대한 기억 때문에 과거의 나와 오늘의 나와 동질성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러면 하나님의 언약, 어제는 어제고 오늘은 오늘이고 내일은 없는 거예요. 딱딱 두부 자르듯이 자르시는 만나의 원칙은 하나님이 지키는 겁니다. 인간은 못 지켜요.

그래서 상번제, 매일같이 아침저녁으로 제사를 드림으로써 어제까지의 너의 인생은 없다. 없는 것으로 규정시킵니다. 하나님의 약속 안에서. 어제까지 얼마나 잘했든 못했든 신앙이 좋든 없든 일체 나는 거기에 대해서 입을 다문다. 왜냐하면 네가 너를 키운 게 아니기 때문에 네가 너를 살게 하는 게 아니기 때문에 네가 너를 천국에 보내지 않기 때문에. 주께서 친히 이끄셔야 되거든요. 이끄는 방법은 언약으로 이끌고 이끄시기 위해선 과거와 단절이에요.

과거가 단절되면 뭐가 단절되느냐 하면 과거가 단절되면 미래는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미래라는 것이 어디서 생겼느냐 하면 과거에 미흡한 것을 미래에 보상받기 위해서 만회하기 위해서 소망과 희망을 갖기 위해서 미래를 계산한다고요. 그런데 과거가 없으면 오늘은 새로운 인큐베이터에요. 산부인과에요. 오늘 새로 태어났어요. 애가 새로 태어나려면 새로운 양식을 받았어요.

아침 안 먹고 온 사람은 점심 때 점심 잡수었으면 점심 때 새로운 잉태한 거예요. 양식을. 오늘 쌈밥 먹고 새로운 인간 되신 겁니다. 일용할 양식을 준다는 것은 우리가 양식을 먹는다는 게 아니고 양식이 우리를 삼킨다는 거예요. 내가 산다는 게 아니라 주님이 생각하시는 삶, 삶이라는 것은 주와 함께 있는 삶에 대해서 내가 초청해야 그 삶에 네가 들어올 수가 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하나님 생각은.

그래서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란 말은, 나는 주님 때문에 살았다는 것은 이건 엄청나게 잘못된 생각이에요. 주님 때문에 내가 산 게 아니고 나 때문에 주님이 살아 계시다는 걸 확인할 수 있지요. 주님이 나를 살려줌으로써 네가 사는 게 핵심요소가 아니고 하나님이 지금 살아 있다는 것을 증거 하는 용도로 우리를 사용하는 거예요. 성령이 그거잖아요. 성령은 누굴 증거 합니까? 주님 증거 하잖아요.

예수 믿고 난 뒤에 구원되었다고 일반교회에서 그렇게 이야기하는데 제가 목사님한테 질문 던질게요. 일반교회에서 전에는 내가 세상을 살다가 이제는 하나님 알아서 하나님 말씀대로 살게 되어서 이제는 천국이 나를 기다린다, 라고 주장하는데 그럼 질문합니다. 그런 나, 천국 간다는 나를 무슨 수로 부정합니까, 부인합니까? 그것 한 번 답변해보세요.

나는 전에는 하나님을 몰랐는데 이젠 하나님을 알았다. 그 알게 된 나는 천국 간다. 자, 이것마저 부정해야 되거든요. 결국 그 이야기는 누구 좋은 이야기입니까? 하나님을 빙자해서 내 챙길 것 챙겼다는 그 이야기잖아요. 그러면 누가 주인공이 돼버려요? 내가 주인공이 돼버리잖아요. 이거는 마태복음 16장 24절, “자기를 부인하고”에 위반돼요. 교회가 미끼 던지면 안 돼요. 보이스피싱 짓하면 안 돼요. 여러분 천국 가고 싶어요? 내 시키는 대로 하면 갈 수 있습니다. 이거는 주의 뜻이 아닙니다. 종교 영업하는 거예요. 코로나 때문에 영업도 못하겠지만.

지금 제 강의 보세요. 철저하게 하나님의 이름은 인간과 함께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일단 제목을 “배제”라고 하겠습니다. 저리 가라고 밀어내는 것, 배제. 그러니까 설교할 때나 강의할 때나 항상 들어야 할 것은 뭐냐 하면 지옥 갈 자가 누구인지 철저하게 찾아내는 식으로 설교가 돼야 돼요. 지옥 갈 자가 천국 가는 사람에 섞여 들어오는 법이 없어야 돼요. 철저하게.

만약에 예수 믿으면 천국 간다는 것은 누구나 좋아하는 거거든요. 예수가 누군지 모르지만 자기가 지금은 고생하지만 죽어서 천당 간다 하니까 싫어할 사람 누가 있습니까? 그럼 거기에 뭐가 안 뜨겠어요? ‘싫어요’가 안 뜨겠지요. 그러면 그건 잘못된 설교에요. 배제요소가 없잖아요.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이 인간에게 십자가를 통해서 이미 충분하게 하나님 쪽에서 배제했잖아요.

어제 낮 설교에 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나머지는 어느 편에 있었다? 예수님을 몰아내는 데 배제하는 데 전부 다 모든 인간이 다 가 있었습니다. 소극적이든 적극적이든. 소극적으로 주님 편에 서지 않은 사람은 열두 제자들, 그런 사람들. 나머지 사람들은 적극적으로 예수님한테 가표 던졌지요. 바라바냐 예수님 할 때 사람들은 뭘 원했습니까? 바라바를 원했잖아요. 대통령 뽑을 때 예수님을 뽑겠느냐, 허경영을 뽑겠느냐 할 때 허경영. 이건 당연한 거지요. 허경영 뽑지요. 신혼부부 일 억 준다는데 안 뽑을 이유 뭐 있어요.

주님은 우리한테 주시는 분이 아니고요 같이 죽자고 했잖아요. 자기 십자가 지고 나를 따라오지 않으면 내 있는 곳에 너희가 없다 이 말이죠. 예수님 편이 없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은 내 편이 아무도 없다는 걸 확인 차 오신 겁니다. 그것도 십자가를 통해서 어떻게 했다? 분명해졌거든요.

그러면 성령님께서는 뭡니까? 성령님께서는 뭘 앞장세워요? 그 십자가를 앞장세우는 거예요. 왜? 인간의 지혜로서는 아무리 공부해도 어느 속까지는 못 들어옵니까? 십자가 지혜까지는 신학을 하던 뭘 하던 간에 인간의 지혜로서는 십자가는 배제대상이지 받아들일 수가 없지요. 그러니까 가짜 십자가가 난무하는 거죠.

다시 아까 질문에 답변을 제가 해드리겠습니다. 자, 예수 믿고 천당 간다, 라고 했을 때 그런 나를 어떻게 부정하느냐? 성령께서는 내가 예수 믿을 때 예수 못 믿게 했던 여러 가지 죄악들 있잖아요. 바리새인, 사두개인들, 여기 구약에 나오는 사울 왕, 가룟 유다, 그런 죄들 나는 과감하게 그것 뿌리치고 이제는 나는 건전한 인간이 되어서 예수 믿어서 천국 간다. 이래 하잖아요.

성령께서는 어떻게 하느냐 하면 내가 물리친 죄들 죄다 끌어 모아서 도로 나에게 갖다 안기는 일을 하십니다. 왜냐하면 진짜 예수 믿는 사람과 가짜 믿는 사람을 철저하게 골라내기 위해서 하는 거예요. 자기 부인이 되지 않고, “나 괜찮은데 뭐 또 괜찮은 일 없나? 옳지, 예수 믿어야지.” 그렇지 않아도 괜찮은 인생인데 거기다 추가해서 예수 믿는 것까지 했으니까 자기는 점점 더 괜찮아졌지요. 그래서 바리새인들이 그런 사람들이잖아요. 나는 저들과 같지 아니하고, 막 이걸 삶의 보람으로 느끼는 거예요.

그럴 때 성령께서 주님의 십자가를 증거 한다고 해서 예수님의 존재를 증거 하는 것이 성령이 아니고 십자가를 증거 하는 거예요. 예수님의 존재를 증거 해버리면 어떤 훌륭한 아저씨 믿듯이 “나, 예수님 사랑해” 이렇게 돼요. 가스펠송에 그런 게 얼마나 많습니까, 선교단체에서. “나, 주님 사랑합니다.” 주님 사랑하는 나를 부정할 수 있는 방법은 안 돼요. 왜냐? 주님 사랑해버리면 오늘 본문도 나옵니다만 누굴 사랑해버리면 그 사랑하는 나를 부정하지 못해요. 그런 문제가 한계 있는 거예요.

그러면 성령께서 어떻게 하느냐 하면 너는 애초부터 주님을 사랑할 사람이 못돼, 라는 것을 주님께서 확실하게 밟아가는 거예요. 확실하게 밟아줘요. 사랑하는 사람이 없다.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되느냐? 전에는 내가 부정 안 당할 때는 내가 구원받는데 주님께서는 내 안에서 주님이 구원되지요. 내가 아니고. 나는 껍질이고, 나는 껍데기고 내 안에 계신 주님이 구원이 되는 거예요.

그걸 어려운 경상도 말로 여기 경상도 사람 별로 없지요. 덩더쿵이라 하는데 덩더쿵이란 말을 혹시 아십니까? 덩달아 값없이 그냥 어떤 블랙홀에 끌려들어가는 존재, 그게 경상도 말로 덩더쿵이라 하거든요. 지금 제 말에 경상도 살던 사람들 굉장히 반가워할 거예요. 덩더쿵, 아무 한 것도 없이 그냥 끌려들어간 거예요.

그럼 주인공이 누굴까요? 예수님이죠. 예수님이 하나님의 이름이거든요. 하나님의 이름으로 밥 먹고 살고 기도하고 헌금하고 뭐하고, 전부 다 누구 이름으로 한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게 돼요. 난 덩더쿵이니까. 나는 주인공이 아니니까. 그러니까 애써 자기 부정을 할 이유가 없어요. 난 부족합니다, 부족합니다. 차 뒤에다 내 탓이오, 내 탓이오. 그런 쓸데없는 짓을 할 이유가 없어요. 금요 기도할 때 보면 내 탓이오, 내 탓이오. 커피 안 줍니까. 전부 다 아들 탓이고 남 탓이고.

세상이 자꾸 내 탓이라고 하는 이유가 뭐냐? 과거와 안 끊어져서 그래요. 과거가 안 끊어진 이유가 기억이 있기 때문에, 인간의 두뇌가 있어 두뇌세포가 시냅스가 과거의 자연적인 적응력이 계속 유기가 되거든요. 성령께서는 아주 가을 날씨 바람처럼 속 시원하게 이야기했습니다. 회개하라, 잘못을 뉘우쳐라, 네가 반성하라가 아니라 어제 없다, 끝나요. 어제가 없는 거예요. 오늘은 신생, 다시 창조돼요. 오늘부로.

그러면 내일은 내가 염려할 필요 없어요. 이방인들은 그게 안 돼요. 무엇을 먹고 마실까 입을까 하는데 이방인들은 맨날 걱정하고 있거든요. 그러나 주님께서는 무엇을 입을까 마실까 먹을까가 왜 문제가 되느냐 하면 주인공이 나기 때문에, 내가 나를 살리는 방식 외에는 다른 생각이 전혀 없기 때문에 그렇고, 예수님께서 너희들은 그렇게 이방인처럼 하지 마라. 이방인은 지옥 간다. 지옥 가는 사람처럼 살지 말고 너희의 주인공이 뭐냐 하면 그 나라와 그 의에요.

그 나라와 그 의가 누구냐 하면 예수님이에요. 예수님이 살려주는 식으로 살아가는 거예요. 마치 참새와 같이. 공중의 새를 보라. 공중의 새를 보라 하면서 제가 굉장히 특이성을 갖는, 요 근래 특이성을 갖는 데요. 특이한 문장이 무슨 문장이냐 하면 이걸 제가 강의하려는 내용이에요. 공중의 새를 보라 하면서 무슨 단어를 집어넣느냐 하면 이 단어를 집어넣어요. “창고”를 집어넣어요. 지금 이 창고에 대해서 설명해드리겠습니다. 공중의 새를 보라. 공중의 새의 특징이 뭐냐 하면 창고가 없어요. 저장고가 없다고요.

이스라엘에 있어서 이스라엘에는 두 가지 요소가 다 있습니다. 이방나라의 요소가 들어가고, 그 다음에 하나님의 이름 요소 들어가지요. 그러면 언약을 누가 받느냐? 이방나라라 하지만 그냥 이스라엘 백성, 이스라엘 백성이 뭘 받는다? 하나님의 언약을 받지요. 언약이 언약으로 도드라지게 노출이 되려면 이들은 언약으로 인하여 철저하게 이방민족과 다를 바 없음이 드러나줘야 돼요.

나 하나님 믿습니다, 라고 했을 때 이스라엘 백성이 그런 이야기했을 때 또는 교인들이 그런 이야기했을 때 자기가 이 세상 사람과 다를 바 없다는 사실을 본인이 지금 놓치고 있어요. 뭐 예수 믿는다고 다른 사람하고 다르다고 생각하면 안 돼요. 다르다, 안 다르다는 것은 성령께서 주님의 언약께서 얼마나 후벼주느냐에 그 사건에 달려있지 내가 큰소리치는 데 달려있지 않거든요. 나는 세상 사람과 다를 바 없습니다.

그럼 이 창고와 무슨 관계있느냐? 이 세상 많은 사람들이 생업에 종사하지요. 생업에 종사하면서 만약에 교회를 다닌다, 또는 예수를 믿는다, 하나님을 섬긴다는 이것이 생업이 안정적일 때 나오는 교회 다니기, 하나님 섬기기 이것하고 생업이 불안정할 때 달라져요. 달라진다는 말은 무엇이 단단한 기초가 됐느냐 하면 생업이 기초가 된 거예요.

지금 코로나바이러스가 퍼졌잖아요. 코로나바이러스가 퍼진 상태에서 독일 북서쪽에 육가공회사에서 코로나 확진자가 250명 나왔어요. 그렇게 될 때 독일이야기를 왜 여기서 끄집어내느냐 하면 확진된 사람들이 이민자들이에요. 그리고 프랑스 남부, 플로리다 오렌지농장, 테네시 주 채소와 과일농장, 이태리 남부의 농장 거기에는 제 때에 과일을 따지 않으면 과일이 다 썩어 내려가요.

정기적이 아닙니다. 제 때에 인력이 확 동원되려면 누가 필요하냐 하면 시리아 난민, 아프가니스탄 난민, 각종의 난민들이 필요해요. 그러니까 그 사람들이 국가정책에서 정리가 돼버리면 농산물이 다 없어지는 겁니다. 그리고 그 이민자들은 정규직이 아니기 때 그 때 바짝 벌어서 밥 먹고 살지 않으면 생업에 종사하지 않으면 자기의 생계가 위태로워져요. 위험하다고요.

지금 여기 교회, 신앙, 성경공부 이것은 그들에게 전혀 중요하지 않습니다. 시급한 게 아니에요. 성경에서 무엇을 마실까 먹을까 입을까 예수님이 운을 떼신 이유가 뭡니까? 너는 네 자신을 속이지 말란 말이죠. “네가 하나님 믿는다고? 그럼 너는 생업 없어? 돈 없이 살 수 있어?” 이걸 묻는 겁니다. 산상설교를 못 지키는 거예요. 지킬 수가 없어요.

우리는 이방인이 아니니까 그 나라와 그 의를 바라본다? 돈이 있어야 그 나라와 그 의를 바라보지. 돈도 없는데 무슨 그 나라와 그 의를 바라봐요. 그 나라와 그 의를 바라보는 이것은 지금 배불렀다는 이야기에요. 뭐 아쉬운 게 별로 없다는 뜻이에요, 결국은. 몸은 몸대로 견딜만하니까 나오신 거예요. 몸 아프면 병원에 입원해 있지.

생업이라 하는 것은 단순히 돈 있음이 아니고 자본이 있음을 말합니다. 돈과 자본에 차이점이 있거든요. 이건 별 중요한 말 아니니까 놔두고요. 돈은 현재용이고 자본은 미래용이에요. 자본이 있다는 것은 오늘 쓰고 끝나버리면 돈이 돼요. 그러나 내일까지 보장하는 것은 자본이 되는 겁니다. 개인이든 회사든 가정이든 자본금이 있어야지 돈이 있으면 안 돼요. 이게 그렇게 돼요. 오늘 먹을 것 있으니까 성경공부하자. 이러진 않아요. 내일 먹을 것 있으면 오늘 가볼까?

오늘 본문이 나발이잖아요. 아비가일이 다윗에게 좋게 했을 때 과연 아비가일이 어떤 의도로 다윗에게 접근했는가를 추적해봐야 됩니다. 아비가일은 여자고 다윗은 남자잖아요. 그러니까 중간에 여기 나발에 대해서 성경은 어떻게 돼 있느냐 하면 왜 아비가일이 유부녀가 자기 남편을 버렸느냐? 이유가 뭐냐 하면 여기 성경에 나옵니다만 29절에 나와요.

아비가일이 다윗을 볼 때 여기에 물매를 던져서 여호와의 원수를 죽였다고 돼 있어요. 그러니까 아비가일이 볼 때 다윗은 다윗 혼자 있는 게 아니고 하나님과 함께 있는 겁니다. 지금 성경에선 아비가일이 다윗을 선택한 것은 다윗이 인물이 좋다, 젊었다, 그게 아니고 하나님과 함께 있는 사람과 내가 혼인을 한다면 호감을 보여준다면 저쪽에서 적극적인 대시가 온다면 나는 다윗과 혼인한 동시에 하나님과 함께 있는 사람이 되는 거예요.

그런데 이게 과연 신앙적이냐 하는 거예요. 지금까지 강의에 의하면 신앙적이라 하는 것은 성령이 앞장세워서 나의 신앙을 완전히 파헤쳐야 비로소 그때에 주인이 주도권이 바뀐 신앙이 나온다. 분명히 제가 그렇게 설명했잖아요. 내가 선택한 것은 신앙으로 선택하겠지만 그건 신앙이 아니라 그것은 다른 육적인 요소가 섞여있는 겁니다.

하나님 믿고 복음 알고 다 아는데 생업이 위태롭다. 그러면 어떤 여자 분이 복음을 아는데 생업이 너무 힘들다. 그러면 우리가 가상할 수 있는 것은 그냥 제가 예를 들어볼게요. 서너 가지 조건을 댈 수 있는데 나도 생업이 힘드니까 새로운 남자를 만나고 싶다. 첫째는 재산이 100억 대, 자산이 아니고 재산, 유동성 있는 재산 100억 대쯤 되고, 두 번째는 뭐냐 하면 좀 젊어야 돼. 왜? 지금 늙어서 병수발 들면 짜증나거든요. 내려온 DNA도 괜찮고 잔병치레도 안 하고 좀 젊고 나는 후패하지만 내 배우자는 날로 새롭도다. 이런 약간은 젊은 사람.

세 번째가 뭐냐 하면 그 남자한테는 재산을 뜯어먹을 다른 일가친척이 일체 없어야 돼요. 괜히 재산분쟁 할 수 있다고요. 그리고 일가친척이 없기 때문에 네 번째는 뭐냐? 나만 바라봐야 돼요. 다섯 번째는 나한테는 그 남자가 종속돼도 그 남자는 나를 종속하면 안 돼요. 잔소리 싫으니까. 뭐 별 조건 아니죠. 다섯 가지니까. 100억 대에 건강. 내가 아프면 젊은 남자가 나를 수발할지라도 늙은 너를 수발하긴 싫다. 그리고 너는 나만 쳐다보되 잔소리는 하지 마라. 나 하고 싶은 대로. 100억 대 되니까 백화점 쇼핑에 쇼핑백 균형 맞춰서 라랄랄라, 원피스 입고 있잖아요. 맨날 그런 삶, 아무도 간섭 못하는 거.

지금 아비가일 마음에 이런 게 없겠느냐는 거예요. 왜냐하면 하나님과 함께 있다는 이것이 결코 신앙이 아닌 거예요. 나중에 보면 그게 다윗 때에 여자가 남자 바꿔치기를 했구나. 남자를 바꿔치기한다는 것은 소유성이거든요. 소유성은 무엇과 반대되느냐 하면, 이건 배제가 됩니다. 그러니까 아비가일의 특징은 한 마디로 말해서 나는 안 바뀌고 내 환경만 바뀌면 나는 호강할 수 있다는 그런 생각을 가진 겁니다.

그리고 그 근거가 뭐냐 하면 나발이 자기 남편이 죽고 난 뒤에 아비가일한테 다윗이 청혼을 했어요. 다윗이 청혼한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아비가일이 예뻤어요. 그게 성경에 나와요. 미모가 예뻤다. 25장 초반에 나오죠. 25장 3절에 보면, “그 사람의 이름은 나발이요 그 아내의 이름은 아비가일이라 그 여자는 총명하고 용모가 아름다우나 남자는 완고하고 행사가 악하며 그는 갈멜 족속이었더라”

그러니까 아비가일은 자기 예쁜 것을 예쁜 것으로 계속 지속할 필요가 있지 예쁨을 부정할 수 있는 새로운 사건이 덮치지 않는 한 아비가일은 신앙이라 할 수 없는 거예요. 예뻤다는 조건을 근거로 해서 하나님과 함께 있는 남자와 혼인하고 싶은 거예요. 그래서 25장 41절에 보면 뭐냐? 쉽게 말해서 번역하면, “다윗이여 나를 몸종으로 삼아주옵소서.” “내 주의 여종은 내 주의 사환들의 발 씻길 종이니이다” 몸종으로. 자진해서 다윗의 종이라고 표현했어요.

자진해서 종이라 할 때 주의해야 됩니다. 이거 뭔가 꿍꿍이 있어요. 주님에 의해서 강제로 종이라 느껴지는 게 아니고 자진해서 뭘 하겠다는 것은 자기한테 어떤 이익 되는 것, 계산이 된 거예요. 그러니까 내가 스스로 몸종 되어서 다윗의 아내가 되겠다는 이 계획이 차질 없이 진행되는 자체가 자기가 달라질 수 있는 기회가 점점 없어지는 거예요. 내 뜻대로 다 되네. 몸종이라 하니까 다윗이 반해서 당신은 괜찮은 여자요, 하니까 아비가일은 속으로 휘파람을 불고 있는 겁니다.

남편 죽고 난 뒤에 다윗은 젊었거든요. 아까 두 번째 조건에 젊었다는 것. 그리고 100억 대보다 더하죠. 장차 왕의 권력을 갖고 있는 사람이에요. 졸지에 왕후가 되는 거예요. 장차 왕후가 되는 거예요. 왕후가 되기 때문에 나의 모든 이상적인 내 예상을 뛰어넘는 인생의 목표를 새롭게 정해지는데 자기가 몸종이든 뭐든지 다하지요.

그래서 아비가일에선 뭐냐 하면 내가 어디까지 달라질 수 있느냐가 이것이 삭제돼있습니다. 없습니다. 난 이대로 죽 가면 생각해요. 나는 달라질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거죠.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변화시킵니다. 다윗을 변화시켜버리면 아비가일 입장에서는 과거가 생각나죠. 어, 내가 저 남자 괜찮은 남자라고 생각했는데 괜찮은 남자가 고정적으로 계속 괜찮을 때만 자기 자신도 인생 괜찮게 살았다고 유지가 되는데 내가 바라보는 저 사람이 졸지에 달라져버리면 여자 쪽에서는 자기 인생에 회의를 느끼게 되는 거예요. “내가 누구와 결혼했지?”

이게 자기가 안 달라지고 버티는 이 방식은 바로 제가 아까부터 이야기한 인간은 어차피 이방민족이에요. 언약이란 인간에게 낯설어요. 제가 왜 자꾸 이런 이야기하느냐 하면 어차피 언약의 성취자는 딱 한 분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을 빙자하고 하나님을 언급하는 신앙인을 언급해도 다윗의 경우에는 결국 달라졌을 때 뭘 달라졌습니까?

“내가 골리앗을 이겼다”에서 “나는 상한 심령입니다. 내가 죄 안에서 태어난 난 죄인입니다” 거기까지 달라졌잖아요. 그러면 다윗이 달라졌으면 그 주변 인물들 다 어떻게 돼야 돼요? 다 달라지는데 자기는 과거에 괜찮은 그 남편만 생각하고 같이 달라질 생각이 없는 거예요. 인간들이 자기의 안 달라짐으로 고집부리고 이걸 지탱하려는 이유가, 무슨 이야기를 하느냐 하면 자기 빼놓고 나머지 달라진 걸 이야기해요. 어느 노래 가사 적어볼게요.

“봄 여름이 지나면 가을 겨울이 온다네.” 이건 김정미가 불렀던 <아름다운 강산>이란 노래에요. 날씨 이야기하고 코로나 이야기하고 봄여름가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만나서 이야기할 것 뭐 있습니까? 내 빼고 이야기하자, 이것 아닙니까. 내 빼고 달라진 것. “오늘 코로나 숫자 몇 명이고?” “이천 몇 명.” 이 이야기 왜 해요? “나 건드리지 마라. 나 안 달라질 거야.” 그런 뜻이거든요.

그러니까 제가 어느 강의에서 그런 이야기했어요. 페이지 수를 카운트한다고 해서 책 한 권 다 읽은 게 아니라고 했지요. 그처럼 봄여름가을겨울 카운트한다고 해서 그걸 인생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니 카운트하나 안 하나 봄여름가을겨울 계속 봄여름 지나고 가을겨울 오나니 아름다운 강산. 이건 뭐냐? 너무나 무책임해요. 무책임하잖아요. 그러니까 이런 달라지지 않는 나에다가 하나님 함께 있다는 그 교리와 신학을 이렇게 걸쳐봐야 이게 신앙이겠느냐 하는 겁니다.

나 다윗의 몸종이라고요? 나 당신의 종이 되겠습니다. 진짜 마음에 드는 남자와 결혼했을 때 결혼 초반에 그런 말 할 수 있어요. “나 너무 좋아. 당신의 종이라도 나는 시키는 대로 다 할게.” 그 다음 한 6개월 지나서 왜 내 시키는 대로 안 하느냐 하면, “내가 이야기한 그 말은 6개월 전에 이야기한 거야. 지금은 너 아니야. 누구세요?” 옆에 있는 사람이 누군지 몰라. 내가 생각했던 그 남자가 아니에요. 그 남편 아니라고.

진리를 찾을 때 상대방에게 불빛 비추지 말고 지한테 불빛 비춰야 돼요. 불 끄고 자기한테 불빛 비추면 본인 얼굴이 귀신 됩니다. 으아악, 지가 놀래지요. 바로 다윗이 주인공이 아니고요 환란 가운데 다윗을 있게 했을 때 그럼 아비가일은 그 환란을 해석할 수 있어야 돼요. 우리 남편이 결국 잘 될 줄 알았다는 그 잘 된 미래를 생각하지 말고 환란과 함께 있을 때의 그 남편이었어요.

내가 육을 버리면 안 돼요. 내가 육과 함께 있을 때 내가 신앙인인 겁니다. 참 어려운 말인데요. 아까 이야기했잖아요. 인간은 무엇을 입을까 먹을까 마실까 그걸 바탕이라고요. 결국 무엇을 입을까 마실까 먹을까를 걱정한다는 것은 누굴 걱정한다? 나를 걱정하는 거예요. 내가 나를 걱정하는 것을 나중에 성령이 오시거든 이걸 본격화시키셔요. 성령께서는 내가 얼마나 나밖에 모르느냐를 이젠 성령 주시고 본격적으로 우리에게 알려주십니다. 그래야 이게 늘 자기 부인이 돼요.

내가 예수 믿었다고 잘했다고 할 때에 인간은 반드시 뭘 끄집어내느냐 하면 예수 잘 믿으면 무엇이 날아가야 되느냐 하면, 주일설교에서 시간관계상 다 할 수 없어요. 인간이 예수 잘 믿는다고 할 때에 굉장히 내가 보기에 수상한 게 뭐냐 하면 잘 믿어줄 테니까 제발 고난과 환란과 역경을 이제는 그만 떠나게 해주소서. 이게 덤으로 같이 붙어있는 거예요.

왜 그러냐 하면 인간은 육에서 영이 되었단 말은, 육이 홀로 있을 때 육하고 영과 함께 있을 때 육은 내가 미처 몰랐던 내 죄까지 함께 아울려서 보여주시고자 하는 그 육이 바로 영과 연관된 구원받은 사람이에요. 왜냐하면 이 영을, 사도 바울은 십자가거든요. 예수님의 존재가 아니고 십자가입니다.

십자가 사건 앞에서 왜 주님은 내 대신 죽어야 하느냐를 이제는 죽을 때까지 성도기 때문에 본격화되어야지요. 내가 때려죽어도 나는 나를 포기 못하는 인간인 걸 이렇게 십자가 불빛을 내게 비춰주신 것에 대해서 감사해야 돼요. 그래서 남을 심판하는 권한이 우리한테 없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 심판하려면 남을 심판하는 내가 나를 심판해야 되기 때문에. 천하에 못된 나를 심판 안 하려거든 나보다 더 못된 남을 심판할 필요 없어요.

사람은 각자 세상이란 환란을 받아요. 이 점은 주일에 한 건데 너무 어렵기 때문에 설명을 못했는데 보충 설명을 해드리는 겁니다. 푸앵카레 추측이라는 것, 후딱 지나가듯이 이야기했는데 이걸 설명해드릴게요. 도넛 있잖아요. 도넛에다가 끈을 묶어버리면 도넛은 전부를 못 묶어요. 왜냐하면 끈을 묶어서 조이면 동그란 요쪽 편은 조이게 되는데 이쪽은 못 조여요.

그런데 농구공은 밧줄로 조이면 결국은 전체를 다 덮고 덮은 밧줄을 잡아당기면 하나의 점이 된다 이 말이죠. 왜냐하면 농구공은 구멍이 없고 도넛을 구멍이 있으니까 안 되는 거예요. 구멍이 없다는 말은 나로부터 시작해서 나로 말미암아 나로 돌아오는 것이 이게 바로 인간의 육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믿든 예수 믿든 성령을 믿든 무슨 소리를 하던 결국은 제일 소중한 것이 뭐냐? 지옥 가더라도 격려해줄 사람은 누구에요? 여러분. “지옥 가도 고생해라. 지옥 가도 할 수 없지 뭐.” 지옥 가도 나를 격려해주고 연민을, 나에 대해서 연민해 줄 사람은 나밖에 없어. 이게 왜냐? 나한테 구멍이 없으니까 항상 나는 내 편이에요.

그런데 여기에다가 주님께서 그 나에다가 십자가로 십자가가 뾰족하잖아요. 십자가로 찍어버린 거예요. 찍어버리니까 구멍이 생겼지요. 이게 무슨 할례? 마음에 할례. 할례가 찢는 거잖아요. 중간에 찢어져버려요. 찢어졌으니까 우리가 육이잖아요. 육이니까 무슨 생각? 나밖에 모르지요. 예수 믿는데 왜 이렇게 힘듭니까? 이 말을 차마 못하고 누르고 있는 거예요.

나도 남들처럼 사는 것처럼 살게 해주세요, 이런 것 차마 말은 못하고 그 대신 주께 찬양합니다, 이런 걸로 대충 때우는 거예요. 혹시 잘 보이면 진짜 내가 원하는 걸 채워줄까 싶어서 가식적으로 하는데 문제는 그렇게 날 해도 이게 전체 나로 못 돌아와요. 왜? 중간에 십자가로 찢어놔서 결국 육은 어디로 간다? 육으로 간다는 그 말씀이 구원받은 우릴 통해서 말씀이 실현화되는 거예요.

육은 육이라는 그 말이 나와 상관없는 게 아니고 나한테 본격적으로 상관있는 말씀이 돼요. 바리새인들은 저 인간과 같지 않음을 감사하나이다. 저건 내 이야기 아니고, 이렇게 생각했는데 나중에 살다보니까 “아이고, 저런 인간이 안 된 걸 감사하나이다.” 어, 이거 바리새인 이야기네. 내 자체에서 말씀이 십자가를 경유해서 새롭게 해석해서 나오는 거예요.

그러면 그건 뭐냐? 나 구원받았다는 걸 증거 하는 것이 아니고 십자가를 증거 하는 거예요. 이게 바로 다윗이 가는 길이에요. 아비가일은 참 오해하고 있던 겁니다. 물맷돌 던져서 골리앗 이겼다고 저 남자 하나님과 함께 있으니까 나 팔자 폈다고 생각하는데 아비가일은 큰 오해하고 있는 겁니다.

나발이 죽었다고 했을 때 누가 봐도 나발은 하나님의 원수요, 다윗의 원수요, 아비가일을 그렇게 괴롭혔던 적어도 미모의 아내를 얻었으면 값을 해야지 그때뿐이고 진짜 지 마음대로 사는 이런 모든 것에 원수가 되지만 따지고 보면 나발의 처지나 다윗 처지나 아비가일 처지나 전부 다 동일한 아담의 자손에서 태어난 거예요. 성경을 그렇게 읽어야 돼요.

나발은 왜 이렇게 싫어했느냐? 나발이 싫어한 이유는 딱 한 가지입니다. 아까 인간은 돈이죠, 자본이죠. 돈이 아까워서 그러니까 내가 아까워서 다윗에게 주기 싫었던 거예요. 그걸 어떻게 오늘날 우리가 나발 보고 욕을 할 수 있습니까. 뜨내기라 해요. 나발이 다윗 보고 뜨내기라 했거든요. 뜨내기란 국가적인 힘을 못 가진 소수의 집단을 뜨내기라 하는 거예요. 그런데 뜨내기가 만약에 국가가 되게 되면 나발은 단번에 다윗에게 온갖 것 대접할 거예요.

이게 다윗을 위함입니까, 국가를 위함입니까? 아닙니다. 누굴 위해서? 나 자신을 위해서. 그게 바로 나발이라면 그 나발 형 인간이 우리 모습이잖아요. 그것 때문에 성경에 나와 있는 거예요. 하나님이 악하다고 쳐서 죽었다. 이게 어디 나오느냐 하면 38절에, “한 열흘 후에 여호와께서 나발을 치시매 그가 죽으니라” 나발이 죽었다는 말은 아비가일 입장에서 과거의 남자가 죽은 거예요. 따라서 우리는 매일같이 어제의 나는 나발로 간주해서 주께서 쳐내시고 있는 겁니다. 매일같이. 쳐냈다는 말은 이미 살았다는 뜻이에요.

그래서 첫째 시간 결론을 내린다면 우리는 하나님 믿으나 예수 믿으나 삼위일체 믿으나 나밖에 몰라요. 나 교회 다녀도 이익 봤다. 맨날 이익이라. 이익 봤고 손해 안 봤다. 따져보니까 맨날 자기 이익만 생각하는데 그걸 유지해주세요. 기쁜 소식입니다. 그걸 멈추면 안 됩니다. 멈출 수가 없는 거예요. 이걸 유지를 해주세요. 유지해줄 때 어제 몰랐던 새로움이 십자가의 일방적인 대신 죽으셨다는 용서하심이 새롭게 어제 몰랐던 기쁨으로 다가오실 겁니다.


10분 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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