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강의

권력과 종

아빠와 함께 2021. 10. 27. 10:09

대전-73강 사무엘상26장8절(권력과 종)20211025a
(강의:이근호 목사)


시작하겠습니다.

사무엘상 26장에 광야 나오지요. 십 황무지에 어떤, 황무지를 무대로 봅시다. 대형공연장인 큰 무대, 아무도 거기에 없는 텅 빈 무대에 하나님께서 등장인물을 속속들이 세웁니다. 다윗 편에서 두 사람, 다윗과 그 부하 아비새. 사울에는 아브넬. 이 네 명이 넓은 무대를 이제는 주연급으로 여기 등장해요.

사무엘상 전에 수련회 하면서 나온 책이 [왕의 무대]란 책을 제가 편집 끝내고 출판사에 넘겼는데 거기 마지막 강의에 제가 이런 이야기했어요. 커튼콜 이야기했습니다. 커튼이 쳐져있는 상태에서 다 끝나고 난 상태에서 관객들이 인사 받기 위해서 무대 전면에 나열한 걸 커튼콜. 영화에서도 영화 끝나고 난 뒤에 관객들은 다 떠났는데 스크린에 자막으로 계속 올라오지요.

그들은 하나의 역할을 맡은 사람들이란 말이죠. 역할을 맡았기 때문에 그 총연출은 누가 하느냐 하면 주님이 하시는 거예요. 사무엘상 26장을 황무지 광야에서 대결할 보안관 있고 무법자 있는 것처럼 등장시킬 때 사람들이 보면 이건 뭐가 되느냐 하면 다윗도 사람이고 아비새 사람이고 사울 사람이고 아브넬도 사람이잖아요.

사람들과 사람의 만남인데 어떻게 사람과 사람의 만남에서 하나님의 이야기를 끄집어내는 게 정당하냐? 그러한 생각이 들 수가 있어요. 여기 등장인물에 하나님이 안 계시잖아요. 하나님이 빠졌는데 그게 하나님의 일이 된다, 라고 할 때 이건 어디다 적용시키느냐 하면 오늘날 이 세상에서 한국 땅에서 하나님은 안 보입니다. 사람들만 있습니다. 우리들끼리만 있는데 우리들끼리가 주님이 함께 있는 우리들끼리라고 할 수 있는 그런 복음적인 바탕, 근거를 오늘 본문을 통해서 마련돼야 되겠지요.

사람들이 모였는데 그게 하나님의 일이 된다? 그건 어림도 없는 일이죠. 우리는 사람의 일이 되지요. 예배당에 사람들 모여서 제직회하면 그게 하나님 일이 됩니까? 아니죠. 하나님의 일이 되려면 말만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라고 목사가 기도한다고 해서 그게 함께 있는 게 아니거든요. 하나님이 안 계시면서 인간들이 함께 있으면서 하나님이 함께 있다고 우기는 그 조건과, 그 조건은 사울과 아브넬 조건이죠.

그 조건과 우리 인간들끼리 있는 데도 하나님이 함께 있다는 조건, 이거는 다윗의 안목입니다. 사울의 안목과 다윗의 안목이 똑같은 상황에 있으면서 보는 관점이 완전히 대조적이죠. 다릅니다. 그래서 사무엘상 26장 이야기는 누가 봐도 똑같은 상황인데, “지금 하나님이 연출하는 상황이다.” “아니야. 이거는 인간 대 인간이 그냥 우연히 만난 거야.”라고 완전히 대조적으로 나눠질 수 있는 각자의 근거가 제시 되는 그 본문이 사무엘상 26장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다윗과 아비새, 네 명이잖아요. 이쪽에 두 명, 저쪽에 두 명 만났는데 그럼 하나님은 어디 계시느냐? 하나님 안 계시죠. 없지요. 사람들 넷 있지요. 하나님 계시면 다섯 명이 되는데 네 명이란 말이죠. 그럼 하나님이 어디 계신지 그것부터 찾아내야 되지요. 하나님이 어디 계시느냐?

다윗 입장에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은 내 안에 기름 부음이 있다는 거예요. 기름 부음은 구약 히브리어로 메시아, 헬라어로 같은 말로 그리스도. 그리스도가 메시아가 기름 부음이 다윗과 함께 다윗 속에 있다. 그러나 사울은 뭐냐 하면 나는 기름 부음을 받았다, 이렇게 돼요. 사울은 기름 부음을 받은 거예요. 그럼 사울은 여전히 주인공이고 사울은 뭔가 참기름인지 바른 거예요. 기름 부음이 자기라는 주인공을 장식하는 장식품, 소유품이 돼버립니다. 사울 입장에서.

그런데 다윗은 뭐냐? 기름 부음이 자기 안에 파고 들어와서 자기의 센터를 형성하는 거예요. 자기는 변두리로 빠지고 주변으로 빠져버리고 중심부, 핵심부는 기름 부음이라는 이 하나님의 일이 자기 중심부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똑같이 기름 부음 받은 왕인데 견해가 다르지요. 사울은 기름 부음 받았다. 그러니까 내가 왕이 되었잖아. 기름 부음을 받아서 나는 왕이 되었다는 거예요.

사울에게 기름 부음을 준 사람이 누구죠? 선지자 누굽니까? 사무엘이죠. 사울에게 기름 부은 사무엘이 또 누구한테 기름 부었습니까? 다윗이 어릴 때 소년 다윗이 기름 부음을 받은 거예요. 기름의 화학적 성분 똑같지요. 전혀 차이점 없습니다. 그럼 다시 묻습니다. 하나님은 어디 있느냐? 인간들밖에 보이지 않는 이 현실 속에서 하나님 어디 계시냐? 그거는 바로 질문을 네 자신을 후벼봐라. 네 안에 하나님의 요소가 들어있는지, 아니면 하나님께서 너한테 기름 붓고 저 멀리 가버렸는지, 아니면 기름 부음과 동시에 너를 장악했는지? 그걸 한 번 생각해야 되지요.

그래서 기름 부음은 다윗 입장에서는 나에 대한 검열이죠. 검열이니까 검열은 조사하는 거잖아요. 윗분이 아랫사람을 조사하는 거죠. 기름 부음이 다윗을 끌고 다니고 당겼다, 밀었다 인도하시는 거고. 사울은 그냥 기름부음을 받아서 자기의 정치적 상황에서 내가 왕이라는 것을 공식화시켰던 하나의 형식에 불과한 거예요. 사울은 기름 부으나 안 부으나 자기는 멀쩡하니까요. 자기 내부는 자기 것으로 꽉 차있지요.

그래서 세상사람 보기에는 누가 정상적이냐 하면 다윗이 정상이 아니고요 사울이 정상이에요. 사울은 어떤 변화를 겪지 않습니다. 멀쩡하게 있는데다가 멀쩡한 것을 더 멀쩡하게 돋우기 위해서 사무엘이 와서 너, 왕이 되어라 해서 기름을 부었다. 그럼 이제부터 내가 왕이 되었으니까 기름 부음은 이제는 좀 떠나도 관계없어요. 내가 이미 왕 되었잖아요.

놀이동산 입구에서 표 받잖아요. 그러면 놀이동산이 놀이기구를 즐겨야 될 것 아닙니까. 그런데 입구에 서서 표 받는 사람과 이야기하게 되면 그건 안 되잖아요. 사울의 마음은 뭐냐 하면 내가 기름 부음을 받았다. 요새 말로 내가 구원을 받았으면 이제는 내 활동하면 되지 구원받은 그 자리에서 제자리 뛰기 할 이유 없다는 거예요. 이게 사울의 생각입니다. 구원받은 당사자가 나기 때문에 그래요.

그런데 다윗은 구원받은 당사자가 내가 아니에요. 기름 부은 그분이 나를 사용해서 자기 구원을 이루고 나가는 그 경로와 그 루트, 절차에 나를 끌어당긴 거예요. “나, 네 몸 좀 사용할게.” 이래서 하나님이 하나님 됨을 자기의 구원됨을 드러내기 위해서 사울을 사용한 것, 다윗은 그렇게 생각한 겁니다.

기름 부음 자체가 하나의 인격이고 다른 어떤 인격이 나라는 인격 속에 들어왔을 때는 나는 검열대상인 겁니다. “네가 기름 부음을 제대로 하는지 조사할 거야, 검열할 거야. 똑바로 해.” 이거고. 사울 같은 경우는 뭐냐 하면 나 좋으라고 하나님께서 기름 부음 줬다는 겁니다. 내가 이스라엘 왕이 되어서 이스라엘 왕으로 제대로 통치하면 되지 않겠느냐, 그렇게 생각한 겁니다.

그런데 사무엘상 26장을 읽어보게 되면 기름 부음의 효과가 사울에게는 권력을 강화시켰고, 다윗은 뭐냐 하면 권력을 강화시키는 쪽으로 잘못 해석한 그 해석에 의해서 다윗은 지금 쫓겨 다니고 있다. 이게 뭐냐? 희생하는 거예요. 기름 부음이 지상에 나타났을 때에 서로 대조되는 두 개의 결과적 양상, 한쪽은 그걸 권력적인 뜻으로 기름 부음을 사용하는 쪽과 오히려 그 권력에 의해서 희생당하는, 그래서 희생당함으로써 기름 부음을 권력으로 생각하는 그 자체가 잘못이라고 지적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하는 쪽이 다윗 쪽이에요.

그러면 이걸 오늘날 우리한테 적용시키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함이다, 할 때 이건 뭐냐? 그 생각 자체가 다윗이겠어요, 사울이겠어요? 사울이죠. 왜냐하면 내가 잘 되기 위해서 안 그래서 잘 되고 싶었고 죽어선 천국 가고 싶은데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해서 우릴 구원하는구나. 이거는 없었던 구원의 능력을 내가 소유한 게 돼요. 나는 멀쩡해요. 나는 변화될 것도 없고 파헤칠 것도 없어요. 후벼낼 것도 없어요. 그냥 나 하나 건지면 되지요.

여기 수정과가 있는데 수정과를 집사님이 만들었잖아요. 수정과를 그냥 마시면 시원하니 청량감도 좋고 참 좋잖아요. 그런데 집사님이 수정과를 만든 이유는 뭐냐? 수정과에 독을 탄 거예요. 왜 독을 탔느냐 하면 그 독이 제대로 독으로 잘 효과가 있는지를 시험하기 위해서 살아있는 우리를 시험한 거예요. 이게 다윗의 생각이에요. 먹고 죽어라 이 말이죠. 생명은 먹고 죽으라고 주신 거예요. 우리에게. 살려고 하는 것은 그 자체가 생명이 아닙니다.

기름 부음을 다윗을 쪼개고 다시 결합하는 접착제로서 기름 부음이 주어지는 겁니다. 다윗을 쪼갭니다. 사울을 쪼개질 마음이 전혀 없어요. 권력을 강화시키는 마음이 있지요. 그래서 다윗이 기름 부음을 만남으로 말미암아 다윗은 본인이 원하는 인생을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쫓기고 싶은 사람 누가 있고 희생되고 싶은 사람 누가 있겠습니까? 아무도 없지요. 다윗도 나름대로 손해 안 보려고 불행스러운 비극적인 인생이 되지 않기 위해서 애를 쓰지만 사울은 계속해서 다윗을 죽으라고 쫓아다니면서 죽이려고 시도하는 겁니다.

그럴 때 다윗이 뭘 느끼느냐 하면 이게 시편에 쭉 나와요. 쫓겨 다니면서 나오는 시들이 시편인데, 이게 뭘 절감하느냐 하면 이걸 절감해요. 나는 나의 것이 아니다, 라는 것을 절감합니다. 자기 등짝에 뭔가 내가 아닌 어떤 분이 올라탔다 이 말이죠. 그리고 이랴, 합니다. 그리고 올라탄 분을 떼어낼 수 없어요.

사울은 그냥 어떤 분이 올라탄 게 아니고 기름 발랐어요. 참기름 발랐어요. 그냥 기름 하나 바른 것뿐이에요. 참기름인지 챔기름인지 발랐을 뿐이고 다윗은 뭐냐 하면 자기보다 더 센 인격적인 분이 올라탄 거예요. 그러니까 이게 어떻게 되느냐 하면 내 쪽에서 어떤 성경에 있는 내용을 획득해서 그게 유리하게 작용해서 천국 가는데 보탬이 되겠다고 시도하는 그것은 사울적 사고방식입니다.

주님께서 찾아오는 것 있잖아요. 주님께서 찾아올 때는 내 의견 묻지 않고 찾아오신 거예요. 내 의도가 뭐고 내 생각이 뭐냐, 그런 것을 주께서 감안하시고 그걸 피해서 그냥 덮쳐버린 거예요. 나는 주인공 되고 싶고 나는 내가 꿈꾸는 인생을 내가 만들고 싶다는 것을 하나님께서 너무나 잘 아시기 때문에 그것을 찢어버리는 겁니다. 그걸 용납하지 않는 거예요.

기름 부음이 왕은 맞는데 어디로 내려가느냐? 바닥을 치는 바닥으로 내려가는 왕이 되게 하시는 겁니다. 사울은 그냥 버티는 거죠. 그래서 왜 그렇게 하시는가? 다윗을 구원하고 사울을 버리기 위해서 그렇게 하는가? 아닙니다. 그럼 뭐냐? 이게 무대잖아요. 대형무대거든요. 연극상영관.

다윗과 사울을 통해서 기름 부음이 보여주고자 하는 심층과 표층의 양면을 다윗을 통해서 심층, 사울을 통해서 표층을 보여주고자 하는 겁니다. 기름 부음 스스로가 주연이고 싶은 거예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보이는 인간을 가지면서 스스로 우주의 주가 되심을 드러내고 싶어서 기름 부음으로 찾아온 겁니다.

인간들이 기름 부음에 대해서 얼마나 잘못 오해하고 있느냐를 사울을 통해서 보여주고 다윗도 오해하기는 마찬가지지요. 나도 왕이구나. 그러나 다윗은 이게 내 생각이 주님의 생각과 다르고 이게 틀어진다는 것을 쫓겨 다니면서 그것을 계속해서 알게 만들어버립니다. 다윗으로 하여금 내가 나로부터 떠나게 하는 거예요.

예를 들어서 차가 시동 꺼져서 주저앉았다. 우리는 차만 고장 났지요. 그냥 그 차 타고 다니는 나도 저 차와 같이 고장 나야 된다는 사실을 우리가 언제나 받아들이겠습니까? 차 고장 난 것은 가슴이 철렁 내리는 일이고 지 태어날 때부터 고장 난 것은 이건 철렁이기는커녕 못 느끼면서, 그걸 전혀 느끼질 못하는 거예요.

주님이 주인공 되셨다는 것은 양발차기처럼 양쪽을 쪼개는 겁니다. 다윗의 자기 동일성 자체에 파급해서 사울과 다윗의 이질성인 동시에, 이제부터 어렵습니다. 지금까지 쉬운 거였어요. 다 같이 기름 부었어요. 기름 부음에 대한 견해가 다윗과 사울이 다르다 이 말이에요. 이게 이질성. 다윗과 사울의 이질성, 첫 번째, 다윗과 사울은 다르다.

두 번째 이질성은 뭐냐? 다윗 내부의 이질성. 다윗과 앞으로 점점 더 하나님이 깊숙이 개입하면서 등장하는 그 다윗, 다윗 내부가 분리되면서 거기에서 다윗 내부에 있는 기름 부음이 실제로 어떤 인간형으로 인격적이죠. 인격적 존재로 드러나게 되거든요. 드러나는 인격적 이 분이 하늘의 왕이면서도 하늘의 주가 되면서도 십자가에 죽기까지 종이 되는 것, 정반대 하늘의 우주의 주님이 세상에 종이 되는 상반되는 전혀 이질성을 자기 내부에 기름 부은 자 내부에 이미 포함이 되어서 인간 내부에 내부적인 이질성이 그 사람 속의 이질성으로 확산, 파급되는 거예요. 확 퍼져버린 거예요.

나는 내가 꿈꾸는 내가 아닐 수도 있는 게 아니라 아예 아닌 거예요. 내가 생각한 나는 주님이 생각한 내가 아니에요. 그럼 주님이 생각한 나는 뭐냐? 그건 내가 생각할 근거도 없고 권한도 없어요. 맡길 문제에요. 내가 죽게 되면 주님은 죽고 난 뒤에 저를 어떤 조치를 하실 겁니까? 주님께 묻게 되면 너는 그걸 묻을 권한과 자격은 죽을 때 박탈된 거예요.

하여튼 감독 입장에서 시나리오대로 연기하면 되는데 자꾸 감독한데, 컷, 해놓고 지가 죽는 걸 몇 분 동안 죽어있으면 됩니까? “내가 일어나라 할 때까지 기다려 봐. 나한테 맡겨, 나한테.” “못 맡기겠는데요.” “그런 니가 감독하든지.” 우리는 남한테 내 인생을 맡길 생각을 안 하고 자꾸 주님한테 묻을 생각을 하는 거예요. 주여, 주여, 하고 간절히 기도하면서 자꾸 묻는 거예요.

어제 오전 설교 후반에 그런 이야기했지요. 인간은 자꾸 하나님을 거론하면서 평생토록 자기를 시험에 나선다고요. 하나님이 이렇게 하면 얼마나 도와줄까, 자꾸 하나님을 상대로 실험해요. 실험해서 뭐 어떻게 하겠다는 거예요. 실험해서 된다 싶으면 나는 구원받은 걸로 확신하겠습니다. 구원의 믿음의 확신이란 실험하는 게 아니고 애초부터 본인 자신을 의심하는 거예요. 끊임없이 의심해야 돼요. 왜? 이게 괴물 되어 기어 올라오기 때문에 그때그때 밟아줄 필요가 있어요. 입 다물어. 가만있어.

여러분 만나를 생각하세요. 만나라는 것은 분명히 광야에서 일일용이었어요. 일일용 비상식량이었어요. 그런데 인간은 만나 입장에서 하루치를 줬기 때문에 내가 하루에 필요한 에너지란 말이죠. 그러면 만나의 취지에 맞추려면 우리는 하루만 살아도 이게 남는 장사에요. 웬 하루치 줬나. 그런데 인간은 하루치 만나를 줬는데 인간이 욕심을 내서 내일도 살려고 하는 거예요. 반 먹고 반은 남겨서 내일 먹으려고.

이 절약을 뭐라고 하느냐? 절약 이게 바로 자본주의에요. 자본주의는 절약하는 거예요. 안 입고 안 먹고 안 쓰고 남겨서 자본을 모으는 게 자본주의입니다. 이게 자본주의에요. 그래야 이게 밑천이 돼요. 보다 많은 밑천이 된다고. 그러니까 광야의식과 다르지요. 나는 지속돼야 된다. 자아의 영속성이라 하지요.

그럼 만나는 뭐냐? 하나님의 계시는 뭐냐? 만나가 계시니까 이게 말씀이거든요. 신명기 8장에. 이 만나는 뭐냐? 영속성을 뭐로 바꾸느냐 하면 불연속성으로 바꾸는 겁니다. 끊어버리죠. 떡집에서 떡 할 때 인절미 길잖아요. 그때 어떻게 합니까? 사정없이 끊어버리죠. 자칫하면 이천 원으로 오만 원짜리를 가져갈 수 있기 때문에 이천 원짜리로 딱딱 끊어줘야 되지요. 끊어주는 것은 누구 마음대로? 떡집 주인 마음대로에요.

이렇게 불연속성이 될 때 인간은 연속성을 주장하거든요. 계속 미래 시간관념 때문에 미래로 가는데 주님께서는 이걸 마디를 줘서 탁탁 끊어줘요. 끊어줄 때 연속성이 반칙을 해서 끊어진 것을 임의로 자기가 이어버려요. 이어버리면 어떤 나쁜 결과가 생기느냐 하면 연속성, 끊어진 그것을 이어버리면 이 노선이 천국 가는 노선이 어디로 환상으로 만들어져서 끝장나느냐? 자기 세계, 내가 그리는 천국으로 자기가 추락해버리는 겁니다.

내가 관여했기 때문에 그 계열은 내가 관리할 계열로 추락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인생은 내가 관리한다. 이게 연속성이에요. 인간은 고장 나게 돼있어요. 성경에 보면 고장 나는 대목들이 많아요. 불의한 청지기, 탕자부터 해서 세리, 창기 전부 다 우리 보기에는 고장 났는데 고장 난 그것이 우리 주변에 깔려있는 주님의 만나라고 말씀이라고 받아주시기 바랍니다.

말씀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에 오늘 식으로 하면 우리 주변에 주님이 기름 부음의 작용이 그런 인물들을 통해서 우리 보기엔 허접한 인물들을 통해서 우리가 바로 사울이라는 것, 나 위주로 살아간다는 것을 허접한 다윗을 통해서 힘없는 나를 통해서 우리에게 계속해서 경고사격, 경고해주시고 있었던 거예요.

예수님 때 세리와 창기는 본인을 본인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싫어요. 왜냐하면 너무 아무것도 아니니까. 자기 인생이. 사람들이 평소에는 일 바쁘면 자기를 안 느끼는데 언제 자기를 느끼느냐 하면 자기 인생이 뭔가 자기 뜻대로 안 되고 망가졌다고 여길 때는 굉장히 그때마다 자기 자신을 단도리 하려고 다시 연속성을 이어보려고 애를 쓰는 겁니다.

그래서 지금 사울과 다윗의 관계에 있어서 이것을 설명하기 전에 먼저 야곱언약의 원리를 설명해드릴게요. 야곱에게는 쌍둥이 형이 있었습니다. 이름이 뭐지요? 에서죠. 야곱과 에서가 먼저 불연속성이 돼요. 이거는 하나님의 말씀이 그렇게 했어요. 어떻게 불연속성이냐? 야곱에 에서는 태어나기 전부터 자궁 속에서부터 싸우는 관계에요. 관계가 싸움질을 하는 관계에요.

그러니까 대적관계지요. 그런데 싸움관계를 방금 뭐라 했습니까? 하나님의 계시, 하나님의 말씀이라 했지요. 말씀이라 하는 것은 항상 서로 화합되지 못하는 상반되는 인물들을 대동하면서 말씀이 현실화되는 겁니다. 그래서 인간은 누구나 남한테 지기 싫어하잖아요. 그래서 야곱이 거짓말해서라도 에서를 이겨요. 그리고 다윗이 왕이 되고 사울은 죽습니다. 다윗이 이길 걸로 돼있지요.

그런데 이것은 1라운드고 2라운드, 진짜 본격 라운드에서는 야곱과 이스라엘이 이질적으로 갈라져요. 야곱은 죽고 이스라엘로 다시 태어나야 되는 겁니다. 야곱과 에서에서 야곱은 나라고 이야기하고 에서는 너라고 이야기하잖아요. 이럴 때 나는 너에게 지지 아니한다. 이게 야곱의 철칙이고 오늘날 우리들의 철칙입니다. 출발은 이렇게 시작되는 거예요. 내가 너한테 질까 보냐.

이게 무슨 생각이냐? 사울 생각이에요. 지금 사울이 왕이잖아요. 다윗에게 백성들에게 칭찬받을 수 있는 기회가 행운처럼 찾아왔어요. 이건 뭐냐 하면 다윗이 골리앗을 쳐 죽였습니다. 여기서 문제 나갑니다. 다윗이 골리앗을 이긴 이유를 묻는 게 아니고요. 골리앗이 다윗에게 진 이유를 묻는 겁니다. 이유가 뭡니까?

골리앗이 다윗에 진 이유가, 골리앗이 지지 않고 이긴다는 편에 누가 속하느냐 하면 골리앗의 블레셋 백성만 있는 게 아니었어요. 그 당시에 그 전장에서 목격했던 이스라엘 전체가 사울 왕까지 소년 다윗과 골리앗 중 누가 이기겠는가? 골리앗이 이긴다는 거기에 전부 다 한 표 던졌습니다. 그렇게 되는 거예요.

골리앗이 이긴다는 쪽에 모든 게 섰다는 말은 다윗이란 존재는 어떤 존재냐 하면 이게 없는 존재에요. 왜? 인간에게 있음, 있다는 것은 그냥 있는 게 아니고 내가 승리자로 있을 때 있음이라고 사람들은 자기 있음을 토대, 바탕이 되거든요. 다윗은 어른 다윗이 아니에요. 어른 다윗 같으면 저것도 한 명 있겠는데 이거는 소년 다윗이에요.

다윗이 열여섯, 열다섯 살로 봅시다. 근데 숫자 더 낮춰서 두 살이라면 심지어 시편 8편에서 다윗을 뭐라 했습니까? 싸움에 이긴 쪽이 몇 살이라 했습니까? 시편 8편에서 열 살? 일곱 살? 여덟 살? 젖먹이에요, 젖먹이. 젖먹이는 몇 살이냐 하면 난 지 10개월까지예요. 젖먹이가 이길래, 김정은이 이길래? 이야기해 봐요. 누가 이기겠어요? 젖먹이가 이기겠습니까, 북한의 김정은이 이깁니까? 말 같은 소릴 해야지. 말이 안 되잖아요.

말이 안 돼, 라는 것이 뭐냐 하면 그게 사울 생각이에요. 다시 말해서 이스라엘에게는 현재 뭐가 없다? 하나님이 없는 거예요. 하나님의 없음을 드러내기 위해서 소년 다윗을 박아 넣은 겁니다. 사울 왕은 저 골리앗을 이기기 위해서는 골리앗보다 더 힘세고 키 크고 더 군사력 하고 완전무장 된 사람이 우리한테 필요하다, 라는 의식을 갖고 있었던 겁니다.

그래서 사울과 이스라엘이 소위 졸은 겁니다. 심장 졸듯이 바짝 졸은 거예요. 골리앗이 한 판 붙자고 몇 시간 째 이야기한 줄 알아요? 사십 일 동안 했어요(삼상17:16). 이 주 격리만 해도 지겨운데 한 달 열흘 동안 했으니. “나 와.” 진짜 이스라엘이 망하는 것은 시간문제에요. 사십 일 동안 했으니까 그 다음엔 작살날 일만 남았지요. 왜? 아무도 그 군사력과 완력을 이길 재간이 없었기 때문에.

그들은 그랬을 거예요. “하나님은 뭐 하시노?” 본인들이 하나님 편이라고 생각했다는 자체가 이게 근거가 없는 거예요. 하나님의 기름 부음이 있잖아요. 사울 왕이잖아요. 기름 부음이 뭡니까? 아까 심층, 표층 했지요. 표층에서는 기름 부음의 뭐다? 권력이지요. 그런데 심층, 저 깊은 곳의 하나님은 뭡니까? 하나의 권력을 탐내는 사람, 권력을 지향하는 사람에게 뭐가 된다? 하나의 종으로만 비치는 거예요.

하찮은 것, 대수롭지 않은 것, 개 무시해도 괜찮은 존재, 바로 그 자리가 누구 자리냐? 주님의 자리 아닙니까. 주님께서 그런 분으로 오셨잖아요. 우리가 원하는 걸 제공하지 않아요. 주님은 우리보고 이야기합니다. 니가 왜 이 자리에, 니가? 자꾸 주님, 내 자리 키워달라는 데 내가 니 자리에 오라고 하지 말고 니가 내 자리로 오면 안 되느냐? 이 종의 자리에, 하찮은 자리에, 없음의 자리에. 갈 생각 없어요. 사람들이. 왜냐하면 자기는 연속적인 미래에 대한 기대와 소망이 있기 때문에 그래요.

누구 로마서 8장 18절 찾아보세요.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아멘. 그러면 이 말씀이 나한테 그대로 말씀으로 다가오기 위해서는 우리는 어느 자리에 가있어야 됩니까? 영광입니까, 고난입니까? 고난의 자리지요. 그 고난의 깊이, 그 고난의 아픔은 어느 정도가 돼야 되느냐 하면 하늘나라 외에는 아무 짝도 돌아보지 않을 수준이 돼야, 레벨이 돼야 고난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내가 가야 될 천국 외에는 다른 소망이 일체 안 끌리는 지경이 돼야 이 고난에 부합되는 고난이 돼요. 뭐 천국도 원하고 어제 산 로또도 기대되는 이래서는 그거는 고난이 아니지요. 이 지상, 이 세상에서 일말의 어떤 기대와 희망을 가질 필요가 없다는 것을 절감할 때 그때 오롯이 뭐만 크게 다가오겠어요? 천국만 다가오겠지요. 하늘나라 돌아보는 겁니다.

어제 낮 설교에서 그런 이야기했습니다만 악마가 거짓말쟁이인데 뭐가 거짓말이냐 하면 자기한테는 개코도 아무것도 없어요. 생명나무가 없다고요. 자기는 중요한 핵심 되는 게 없는데 있는 척하면서 사람들을 현혹하는 거예요. 아무것도 없어요. 생명 없으면 아무것도 없는 겁니다. 그런데 사람들한테는 큰소리치는 거예요. “너 그러면 천당 못 간다. 죽는다. 이 목사 말 안 들으면 저주받는다.”

개코도 아무것도 없으면서 뭐 하는가? 참소하는 거예요. 네가 그렇게 살아선 저주받아. 실패해. 참소하는 거예요. 자기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큰소리치면서 계속 자길 감추는 방식을 악마가 사용하는 겁니다. 그걸 사자성어로 ‘허풍선이’라고. 허풍이죠. 그러니까 죽기를 무서워하는 사람들은 누구의 엄포에 다 넘어갑니까? 악마의 엄포에 넘어가죠.

그 악마가 어디 있습니까? 교회에 있습니까? 본인의 마음속에 악마가 있는 거예요. 본인이 본인의 엄포에 졸았어. 벌벌 떨어요. 이러다가 내가 망하는 수가 있겠다. 주님 뜻은 뭐냐? 벌써 망했어, 니는. 왜 자꾸 벌써 망한 건 생각 안 하고 망할 수가 있겠다? 아니 태어날 때부터 이미 망한 자로 태어났단 이 말이죠. 니가 안 가려는 니 원래의 자리를 주님께서 먼저 조르르 그 자리에 와서 이리로 오라. 이 십자가로 오라. 이렇게 부르시는 거예요. 성령을 통해서.

기름 부음 받은 다윗이 사는 게 사는 몰골이 말이 아닙니다. 골리앗 죽였을 때 사람들은 사울은 숫자 몇 명이었어요? 사울은 천천이죠. 다윗은 열 배, 만만이었습니다. 유튜브 조회수가, 구독자가 만 명이에요. ‘좋아요’가 만 명이라니까요. 결국 지 몇 백 명 데리고 쫓겨 다니는 그런 처지라 올 것이라곤 상상도 못해요.

그러면 왜 다윗이 그런 고생을 하고 쫓기느냐? 다윗 본인의 구원이 아니기 때문에 그래요. 본인의 자리가 아니고 다윗 속에 자리 잡고 있는 기름 부음에 대한 인격적인 그분이 하나님이죠. 메시아지요. 주님이 다윗을 데리고 가면서 정작 기름 부은 왕의 자리가 이 더러운 인간 세상에서는 바로 이 자리다, 하고 그 자리로 다윗을 이끕니다.

그 자리가 어디 있느냐? 다윗이 이끌린 자리는 바로 없음의 자리, 이 땅에 없는 거예요. 이 땅에 자기가 어떻게 예수 믿고 구원받을 수 있는 인간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예수 믿을 사람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없고 예수 믿을 사람은 기름 부음 받은 자가 새로 만들어내야 돼요. 없는 데서 만들어내는 거예요.

자 다시 할게요. 야곱과 에서 할 때 우리는 야곱이 이겼지요. 야곱이 에서를 이길 때 뭐로 이겼습니까? 거짓말로 이겼어요. 거짓말할 때 야곱의 생각은 이겁니다. “이기면 되지, 뭐.” 역사는 승자의 편이다. 역사란 누가 편집한다? 이긴 자가 역사를 써간다. 왜곡되게. 정의는 누가 정의를 말할 권한이 있느냐? 힘 가진 자가 정의를 말할 권한이 있어요. 교회에서 부교역자 백날해도 안 돼요. 당회장 목사가 기라 하면 기는 거죠. 그거라 하면 그거고.

그러니까 우리나라 아시아대회에서 금메달 딴 사람 있잖아요. 임춘애. 임춘애가 라면 먹고 금메달 땄잖아요. 그런데 어떤 조폭이 임춘애가 아니고 현정화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부하가 하는 말이, “그거 형님. 현정화가 아니라 임춘애입니다.”라고 하면, “내가 현정화라면 현정화야.” 그런 영화가 있어요. “내가 현정화라면 현정화야. 어딜 임춘애, 현정화라면 현정화지.” “내가 넘버 쓰리야.” 그 대사 나오는 영화에 송강호가 그 대사를 쳤습니다.

이게 남의 이야기가 아니고 교회에서 그 일이 벌어져요. 교회가 오징어 게임이니까. “내가 기라면 기는 거야. 니가 당회장이야? 내가 당회장이지.” 모든 조직사회가 그런 거잖아요. 주님은 그걸 염두에 두시는 거예요. 이 권력의 힘. 그러니까 사울이 골리앗을 못 이긴 이유가 지향점이 동일하기 때문에 그래요. “이야 저 힘, 저 권력 내가 갖고 싶은데.” 본인이 갖고 싶은 걸 골리앗이 갖고 있으니까 이거는 기죽고 들어가야지 이걸 이길 수가 없는 겁니다. 이거는 다른 노선이 필요한 거예요.

그런데 사울 입장에서 사울 편에 있는 인간의 편에서 이 세상에 살면서 힘 말고 더 소중한 것은 있을 리가 없다고 철석같이 믿는 겁니다. 그 사람이 누구냐 하면 바로 다윗 코밑에 있던 아비새에요. 아비새 이 사람이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이렇게 합니다. 오늘 본문에 26장 8절에, “아비새가 다윗에게 이르되 하나님이 오늘날 당신의 원수를 당신의 손에 붙이셨나이다”

자, 아비새가 누굴 거론합니까? 단어 나오지요. 하나님. 아비새가 하나님을 거론해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있다는 거예요. 이게 맞는 말이 아니거든요. “하나님이 오늘날 당신의 원수를 당신의 손에 붙이셨나이다 그러므로 청하오니 나로 창으로 그를 찔러서 단번에 땅에 꽂게 하소서 내가 그를 두 번 찌를 것이 없으리이다” 하나님이 적절한 기회를 줬다는 거예요.

내가 만약에 다윗이라면 아비새한테 이렇게 물을 거예요. “아비새야, 그렇게 해서 네가 무엇을 얻고자 하느냐? 네가 사울 왕을 단번에 없애면서 네가 궁극적으로 노리는 게 뭐야, 뭘 원해?” 그럼 아비새가 뭐라고 하겠어요? 입 다물고 있다가 솔직하게 이야기하면, “권력” 이러겠지요. 그게 바로 너는 네 속의 권력은 못 죽이고 남의 권력은 죽이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거는 아비새가 다윗과 한 패가 됐다는 말은, 다윗의 위상이 앞으로 달라져야 될 여지를 계속해서 주시는 겁니다. 9절에, “다윗이 아비새에게 이르되 죽이지 말라 누구든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를 치면 죄가 없겠느냐” 이렇게 이야기했다고요. 자, 이것 보세요. 아비새가 하나님 거론했지요. 그런데 아비새가 말하는 하나님, 오늘날 인간들이 말하는 하나님입니다.

이 하나님은 아비새 자기는 멀쩡하게 있고 나를 도와주는 하나님이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흔히 말하기를 하나님을 뭐라고 합니까? 사랑의 하나님, 나를 도와주는 하나님. 자기는 멀쩡하다는 거예요. 나는 망할 자가 아니란 거죠. 아무 근거도 없이 그런 주장하는 거예요. “나는 안 망해야 됩니다.” “근거 있나?” “근거 없습니다.” 근거도 없이 주장하는 거예요.

자, 하나님이 있을 때 아비새가 보기에 저 사울 왕이 지금 잠들었지요. “기름 부음은 인간을 잠들게 한다.” 인간이 잠들게 한다는 말은 기름 부음만 생산적 활동을 하는 거예요. 이 땅에서. 우리는 열심히 새벽 잠 안 자면서 밤새지 말라 해도 밤새도록 게임해도 우리는 잠들고 있는 거예요. 열심히 돈 벌이해도 잠들고 있는 거예요. 몇 개월 된 애 본다고 아르바이트해도 잠들고 있는 거예요.

모든 인간은 기름부음의 활동을 알지 못하는 잠자는 상태에 있습니다. 그런데 자기 잠든 건 모르고 남 잠든 걸 보고 생각하면서 절호의 찬스가 왔다고 하는 거예요. 자기한테 문제 있는 걸 모르고. 귤 개한테 주는 것 사진 찍어놔요. 찬스에요. 이게 찬스로 보는 것은 권력만 생각하기 때문에. 그리고 권력만 생각한다는 것은 자기 안에 권력으로 완전히 피막으로 둘러버린 거예요. 이게 하나님이 살아 계시는 증거라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권력 때문에 돌아가셨잖아요. 도대체 니가 아는 하나님은 무슨 하나님인지, 어디서 그런 하나님을 얻었는지 힘주시는 하나님, 그런 하나님은 없어요, 이 땅에. 십자가로써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진짜 숨어 계시는 하나님은 예수님 십자가를 통해서만 나타나지 다른 방식으론 나타나지 않습니다.

다른 방식은 악마가 자기 패가 없는 악마, 정말 영생이 생명이 없는 악마가 인간을 전부 다 그렇게 교회고 절이고 종교고 천주교고 다 그렇게 만들어 놔버렸어요. 우리의 가정일상, 우리의 심정, 마음까지 다 그렇게 조작해놓고 말았습니다. 우리가 못 사는 건 힘이 없고 돈 힘이 없고 자본의 힘이 없고 권력의 힘이 없어 못 산다는 거예요.

주님은 뭐냐? 니는 니 자신이 아예 죽은 자로 태어났다는 걸 모르는 게 문제라는 거예요. 내 자신이 고장 난 거예요. 고장 난 나를 못 고쳐요. 그러니까 주님께서 다윗 속에 기름 부음이 박히는 겁니다. 니 혼자서 차를 못 고쳐요. 주님이 와서 고장 난 속에 들어가서 들어가야 함께 고장 난 차로 가야 다윗이, “아아 내가 고장 나도 보통 고장 난 게 아니구나.”

내 손으로 사람을 죽이고 내 손으로 간음하고 그러면서 내가 뭐가 돼야 된다? 이스라엘의 뭐가 돼야 돼요? 왕이 돼요. 껍데기만 왕이에요. 죄인의 왕이죠. 죄인의 왕에 주께서 우리아라는 희생이 들어감으로 말미암아 구원받은 죄인이 바로 새로운 이스라엘의 요건이 되는 요소가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자기 안에서 우리 안에는 기름 부음이 잠자지 않으니까 우리는 밤에 잠을 자도 주님은 잠자지 않고 있는 거예요. 사울처럼 잠자고 있다가 우사당하는 일은 없는 겁니다.

요한일서 2장 봅시다. 요한일서 2장 27절 누가 읽어볼까요, 다른 분이 읽어보세요. 다윗 없나. 전부 다 골리앗 눈치…… “너희는 주께 받은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

여기에 ‘너희’ 나오고 ‘기름 부음’ 나오지요. 기름 부음이 주관이 되고 우리는 뭐냐? 피동적이 돼요. 난데 다른 사람은 내가 주인인데 내가 주인이 아니고 주인은 따로 있어요. 기름 부음이 주인이 나는 기름 부음이 시키는 대로 하는 거예요. 하나만 찾고 첫째 시간 마치겠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어제 낮 설교 그 대목이죠. 다른 분이 읽어보세요. 많이 괴롭혀서 미안하지만.

데살로니가전서 2장 13절 끝부분에요.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속에서” 뭐한다? 일한다. 내가 일하는 게 아니고 누가 봐도 그 사람은 그 사람이 일해요. 그러나 성도는 극구 아니래. 내가 일하는 게 아니라 내 안에 말씀이 스스로 말씀의 세계를 이루기 위해서 나를 활용하고 있는 중이다.

그게 역할이에요. 무대 역할. 사울 그리고 아브넬, 아비새, 다윗 전부 다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을 네 명 중에서 오직 다윗만 아는 겁니다. 왜? 기름 부음의 효과를 내는 사람은 다윗밖에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10분 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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