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강의

피(십자가1강)

아빠와 함께 2021. 9. 29. 08:00

대전-십자가를 아십니까(1강) 사도행전20장28절(피)20210927b
(강의:이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에는 [십자가를 아십니까] 이 책으로 하겠습니다. [십자가를 아십니까]는 1995년도에 나왔어요. 그때는 요런 책 쓰고 나 죽으려고 했는데 아직도 살아 있어요. 이상하게. [십자가를 아십니까] 전체 핵심을 미리 말씀드리면 ‘피 앞에서’에요. 피. 피는 액체지요. 피는 액첸데 어디 있느냐 하면 고체 안에 들어있던 액체가 흘러나온 게 피입니다. 액체 된 피가 주님의 액체가 모든 고체에 대해서 심판하는 이야기. 나는 죽었는데 너는 왜 안 죽었느냐 그런 이야기에요.

아버지께서 나를 피를 내게 했다. 다른 말로 해서 아버지께서 나를 죽이셨다.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다? 모든 이 세상에 들어온 작자들은 죽여 버리고 저주하고 심판하신 하나님이 진짜 이사야에 나오는 숨어 계신 하나님이에요. 그런데 고체가 된 인간들이 따로 만들어놓은 이상형적 신, 하나님이 따로 있어요. 결국 [십자가를 아십니까]의 내용은 뭐냐 하면 하나님과 인간의 싸움의 현장이에요.

싸우는 걸 항목별로 한다면 여기 예배하고 싸우고, 기도하고 싸우고, 헌금하고 싸우고, 주일성수하고 싸우고, 상급하고 싸우고, 전도하고 싸우고. 이게 목록이 나와 있지요. 싸우는 거예요. 이게 예배라고 하나님께서 이야기하면, 아닙니다, 라고 인간 쪽에서 들고 나오는 겁니다. 2강은 십자가와 예배, 3강은 십자가와 기도잖아요.

하나님의 예배는 반드시 뭘 거친다? 피를 거쳐서 뭘 드리는 게 아니고 피 안에 모든 예배가 완료돼있다는 것을 제시하는 거예요. 이 말은 인간들의 예배를 받는다, 안 받는다? 받지 않고 내가 만든 예배만 하나님 내가 받는다는 것이 [십자가를 아십니까] 이 책에서 이야기하는 그 내용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것을 일체 안 받아요. 안 받는데도 인간은 자꾸 신에게 자기 것을 주고 싶어 해요. 왜냐하면 인간은 자기 자신을 드러냄으로써 자기의 존재감을 느끼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말 안 하고 있으면 존재감이 없어져요. 그러나 누굴 만나서 이야기하게 되면 내가 살아 있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이게 숨 쉬는 거구나. 숨만 쉰다고 되는 게 아니고 말을 해야 이게 숨 쉬는 거예요. 그걸 알아듣고 끄덕임이 있을 때 숨 쉬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교회 십 년 전에 어떤 젊은 목사님이 저한테 그랬어요. “나의 소원은 뭐냐 하면 목사님처럼 돌아다니면서 강의하는 게 소원입니다.” 그게 무슨 뜻이겠어요? 남들이 나를 알아주는 그 느낌이 나의 삶의 동력이 되고 싶습니다, 그런 뜻이에요. 내가 목사가 되어, 그 사람은 자동차회사 취직했어요. 자동차회사 취직해서 밥은 먹고 사는데 내가 이것 하려고 목사 된 게 아니다 이 말이죠. 남들이 나를 인정해주는 그 보람으로 살고 싶은 거예요.

그걸 세 자로 선교사라고 합니다. 한국에서 안 알아주는 것 태국이나 저런 데 가면, “아이고, 도사십니다. 성경박사십니다.” 알아주잖아요. 성경적 신학적 후진국이기 때문에. 한국에서 도사가 너무 많아서 지가 낄 자리가 없어. 아프가니스탄은 죽을까봐 안 되고 뭐 키르기스스탄 이런 데 가서 복음을 전하든 거기서 육아하고 교육사업을 벌이든 병원하든 간에 어떤지 간에 내가 여기 살아 있다는 존재감은 남잖아요. 이게 목사뿐이겠습니까? 모든 인간이 다 그렇지요.

만약에 집사님이 재벌 집에 시집을 갔다. 살겠어요? 살겠다. 말 잘못했다. 집사님은 살지 싶어. 어떤 영화배우인데 재벌 집에 갔다. 때려치워버려요. 나는 영화배우로 살고 싶다. 대번에 이혼하고 나오는 거예요. 내가 나다워야지 내가 없는데 밥 먹고 사는 게 짐승이지 무슨 의미겠어요. 그래서 이렇게 정리하세요. 인간에게선 내가 이상형이 되는 거예요.

현재 있는 나와 이상적인 나가 바로 내가 그리던 나의 신입니다. 나는 나에게 숭배하고 나에게 경배하고. 나는 이렇게 어설프고 모자라지만 내가 생각한 나라는 신은 무소부재하고 만유에 계시고 알파요 오메가요, 그 안에서 나는 영원한 나로서 확정되기를 내가 원하고 있는 겁니다. 이게 바로 종교지요. 종교를 구약에서는 우상이라고 하지요.

우상이 없는 하나님은 없습니다. 항상 우상과 대결상태에 있었어요. 그게 창세기 3장 15절에 여자의 후손은 무엇이 오기 전까지 나타나지 않습니까? 여자의 후손은 반드시 무엇과 동반해서 나타나느냐? 뱀의 후손과 동반해서 나타나요. 여기 뱀이라 하는 것은 영적 존재거든요. 뱀이 무슨 자식을 새끼를 낳습니까? 뱀 새끼를 말하는 게 아니라 영적인 존재가 지상에 인간의 모습을 낳는다는 게 뱀의 후손이에요.

여자는 흔히 말하는 여자가 아니고 영적인 존재에요. 잉태치 못한 여인. 잉태치 못한 여인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영적이기 때문에. 예루살렘은 하늘에 있는 우리 어머니라. But Jerusalem which is above is free, which is the mother of us all.갈라디아서 4장 26절 말씀이에요. 성경에서 가장 어려운 말씀이에요. 하늘에 있는 예루살렘은 우리 어머니라. 어머니라는 말은 남자가 아니고 여자. 성경에서 여자라 할 때는 이렇게 이해하시면 쉽습니다.

여자는 뭐냐? 없음의 표상이다. 없다. 이 지상에 있는 모든 있음에 섞이지 않는, 이 세상의 있음과 같이 할 수 없는 다른 존재기 때문에 없음이란 표현밖에 없어요. 지상에 없는 것. 구원받은 사람은 뭐냐? 이 세상에 없는 존재로서 구원받아야지 있는 존재가 구원받는 건 없습니다. 있는 존재를 뭐로 바꾸느냐 하면 없는 존재로 바꿔버려요. 있는 존재를 없는 존재로 바꾸려면 내가 없어야 내가 구원받아요.

이게 말이 어렵잖아요. 그래서 성경에서 뭐로 바꾸느냐? 내가 여기 있는 걸 아담의 후손이라 해서 그걸 뭐로 보느냐? 육이라고 이야기하고 육은 십자가에 못 박히고 그 안에서 누가 산다? 영이 사는, 예수님이 산다고 하기 전에 영이 사는 사람만 구원받습니다. 육은 육이고 영은 영이기 때문에. 거듭나지 않으면 천국에 못 가기 때문에. 그래서 예수님은 항상 우리를 죽이려고 한 거예요. 네가 스스로 죽지 못하기 때문에 내가 성령을 보내면 나처럼 같은 코스를 밟아서 죽게 될 것이다.

그래서 인간이 죽는다고 이야기하지 말고 죽어있기 때문에 살았었다고 과거형으로 표현을 해야 된다는 거예요. 오늘도 살았다가 아니라 살았었다. 내일 되면 내일도 살았었다. 그러니까 시제가 복잡해져버려요. 한평생을 백 살을 살아도 그건 어디까지나 살았었다 과거분사로 이야기해야 되는 겁니다.

미리 아신 자를 부르시고 부르신 자를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자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더 어려운 말은 에베소서 2장 6절,  And hath raised us up together, and made us sit together in heavenly places in Christ Jesus:이미 하늘에 앉히시고. 구원하사 주님 옆에 앉히시고. 이미 끝내버렸어요. 시제 상으로 끝난 거예요. 첫째 제목이 철저한 육, 철저하게 육 되기. 정육점이라 하겠다만.

철저하게 육, 그것과 연관시키게 되면 철저하게 전에는 내가 인간이었는데 예수 믿고 난 뒤에는 나를 뭐로 파악하게 되었다? 내가 지금 여기 있는 것이 바로 육이라는 것, 결코 천국에 갈 수 없는 그런 육체, 실체 덩어리를 가지고 주께서 뭘 하시려고 하시는 거예요. 예수님이 구원될 수 없었던 너를 구원되게 하셨다는 그 사실을 우리로 하여금 육 되게 하셔서 계속해서 이야기하시고자 하는 겁니다. 우리의 상황에서. 뭐든지 구애받지 마시고 하시기 바랍니다.

어제 낮에 그런 이야기, 불의한 청지기는 남의 노동력 위에서 점프했다고요. 횡령했으니까요. 점프하듯이 이처럼 그 말은 뭐냐? 아무 대가 없이 구원받는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달란트 비유도 이야기했지요. 직원들 노동력 착취해놓고 주인이 거저 주는 양으로 하면서 네가 우리 집에 취직한 값없이 구원받은 것은 네가 애써서 노동력 한 것과 족히 비교되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히 그 차이를 보여주는 거예요.

“네가 나 없을 때 애썼는데 내가 그냥 거저 주는 걸로 하니까 뭐 기분 나빠?” “아닙니다.” 이게 다섯 달란트, 열 달란트는 우리를 직원으로 취직해준 것만도 은혜인데 그게 기분 나쁠 리 있습니까, 라고 한 거고 그 싸가지 없는 한 달란트는 이건 내가 노동했는데 내게 줬으면 내 건데 자기의 자의식이 강렬하게 유지가 되지요. 그 자의식이 비록 육이 늙어서 후패해도 자의식은 점점 신을 닮아갑니다. 나는 죽어도 내가 나답게 여겼던 그 인상 있잖아요. impression인상, 표현.

저는 항상 꿈에 나타나면 38살쯤 돼요. 꿈의 모습이. 여러분 각자 다를 거예요. 이십 대로 나타날 수 있고. 꿈을 조사해보면 꿈에는 동작이 별로 없어요. 항상 멈춰져 있어요. 왜냐하면 꿈은 기억에서 나오기 때문에 기억은 내가 관찰해야 돼요. 남들이 움직이지 내가 움직이는 게 아닙니다. 자기는 고정되고 영구적이에요. 꿈은 바로 내가 진정 우주의 신이고 주인공이라는 것을 꿈속에나마 그걸 느끼는 거예요. 왜? 악마의 본성이 그거거든요.

악마의 본성이 낮에는 그걸 애써 참고 있다가, 큰소리하면 곤란하잖아요. 참고 있다가 밤에 잠을 잘 때 그 잠자는 순간이나마 진짜 나의 진실한 진짜 내 얼굴 내 모습을 그거는 억누르지 않는 상태에서 표출해버리는 겁니다. 그런데 그 꿈은 오직 나만의 고유공간이에요. 꿈속에. 아무도 그 꿈에 침투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참 재주 없는 사람, 느부갓네살, 그리고 애굽나라의 바로. 이런 인간은 세상에 살아 있는 하나님이 오직 나만이 즐길 수 있는 나만이 스스로 자위하는 그 공간, 나만이 특별한 쾌감을 느끼는 그 공간까지 허락도 없이 그냥 들어왔잖아요. 그분이 누굽니까? 여호와 하나님이잖아요. 이렇게 침투해야 구원이 되던 저주가 되던 된다고요. 구원을 교회 가서 내가 손들면 안 돼요. 꿈속이라도 내 공간이라고 허락하지 않겠다는 강력한 힘으로 나를 아예 근원적으로 박살내는 분, 내 것이 아예 없어야 돼요.

여러분들이 아주 보고 싶은 사람을 어디서 가끔 만납니까? 아예 보고 싶은 사람 없으니까 없지요. 꿈에서 만나요. 그래서 광주강의 때 노래 하나 했잖아요. <생각이 나>라는 정동하의 노래에 보면, 어떻게 꿈에만 만나냐. 그래서 너는 꿈속에만 사냐. 그런 게 있어요. 부활의 김태원 씨가 작사한 노래. 꿈속에서만 나오는.

꿈속에서 나올 때 다시 말씀드립니다. 꿈속에서는 주인공이 누구냐 하면 내가 주인공이란 것이 확고해져요. 그리고 이게 무의식 상태거든요. 의식 상태가 되면 잠시 그걸 보류하죠. 내가 주인공인 것을 잠시 보류해야 돈이 생기거든요. 계속 양보하고 타협해야 되고. 그러니까 이것은, 여기 7페이지에 목차 나오잖아요.

예배, 기도, 헌금, 주일성수, 상급, 전도 나올 때에 이런 예배라는 주제, 기도라는 주제. 헌금 주제하면서 여기에 반드시 뭐가 들어가느냐 하면 내가 주인공이고 내가 신이 되고 싶다는 악마의 품성 있잖아요. 그걸 그대로 반영한 예배 해석들이 같이 섞여서 나열되는 겁니다. 그냥 하나님 뜻이다가 아니라 인간이 원하는 인간이 절대적인 악마의 마음으로 악마가 예배드릴 때는 이런 마음으로 예배드린다는.

악마가 기도할 때는 이렇게 기도하고, 악마가 헌금할 때는 이렇게 헌금하고, 악마가 주일성수는 이렇게 하고, 악마가 상급할 때는 이렇게 상급론을 펼치고, 악마가 전도할 때는 이렇게 전도한다, 라고 이야기하고 이 전체를 합쳐버리면 뭐냐? 악마가 세운 교회가 되는 거예요. 악마가 세운 교회, 일곱 자 너무 길잖아요. 두 자로 줄이면 그냥 교회. 교회라 하면 악마가 세웠다.

요한계시록에 보면 주께서 너무 잘 아시고 촛대를 옮겨버리죠. 전부 다. 촛대를 옮기면서 세상에 있는 교회는 없고 교회는 하늘나라 총회는 히브리서 13장 말씀처럼 총회는 하나님께서 이미 마련돼 있다고 나오지요. 요새는 성경말씀 내가 해도 내가 안 믿어져요. 하도 너무 틀리니까. 히브리서 12장 23절에 보면, “하늘에 기록한 장자들의 총회와 교회와” 여기 교회 나오잖아요. 이걸로 충분하잖아요. 이것 있으면 됐지, 뭐.

두세 사람도 내 이름으로 모이면 주께서 함께 있잖아요. 그렇지요. 마태복음 18장에 나오는 말씀. 두세 사람도 내 이름으로 모이면 함께 있으면 되는 거예요. 예를 들어서 집사님 두 분이 주일 날 생중계보다도 우리끼리 만납시다, 할 수 있어요. 그러면 두세 사람도 주의 이름으로 모이면 그게 교회에요. 어느 교회에 다니는 것도 되지만 같이 모이면 교회입니다. 꼭 목사 있어서 교회가 아니라 교인들 모이면 돼요.

그런데 참 이게 문제가 뭐가 문제냐 하면 두세 사람이니까 두 사람 모인다 합시다. 주의 이름으로 모인다고 다 생각했어요. 모이면 제가 주일에 설교했듯이 모든 인간과 인간관계는 거래관계거든요. 두 사람 모였는데 여기서 필히 나타나는 게 돈 이야기가 나오게 돼있어요. 우리는 복음으로 모였는데 오직 십자가 이야기하기로 모였는데 처음에 모였어요.

나중에 좀 모이게 되면 갑자기 아파서 병원에 가야 되는데 십만 원이 비네, 이러거든요. 그러면 복음으로 모였을 때 한쪽이 십만 원이 비는데 구할 데도 없고, 라는 말을 집사님 들으라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나 혼자 하는 이야기라 할 때 상대방은 뭐라고 이야기해야 이게 복음적입니까? 응용문제. 몸 아파서 치료비로 다 끌어 모아도 치료비 오백만 원인데 십만 원이 비는데 구할 데도 없고, 이 소리 듣지 마세요. 나 혼자 하는 소리입니다, 라고 했을 때 두세 사람이 복음으로 모인 상대방은 뭐라고 해야 정답이 되겠습니까?

“내가 빌려줄게.” 그 다음에 이야기해보세요. “내가 줄게.” 정답은 제가 말씀드릴게요. “하나님께서 아예 당신 자체가 비길 원합니다.” 이게 정답이에요. 죽어, 죽어, 죽어. 이게 바로 첫째 시간에 배웠던 그 이야기에요. 전혀 응용문제에 적용이 안 되네. 죽어, 그냥 죽어. 그러면 이쪽에서 이제 슬슬. 물론 택시비 천 원 보태는 그걸로 죽으라 하면 안 되고 그땐 보태줘야 되죠. 노골적으로 노리면서 할 때는 이게 복음이 아니고 딴 노림수를 가지고 만난 사람한테는 본색을 드러내지요.

본색을 드러내면서 여기서 무슨 성경말씀을 동원시킵니까? “집사님, 이참에 죽으라는 사인이 왔는데 그냥 십만 원 모자라서 천국 가면 얼마나 좋습니까? 나도 가고 싶어요. 먼저 가시고 나도 나중에 따라 가겠습니다.” 이러면 그쪽에서 상대방이 안색이 달라진다. 성경에 나오지요. 안색이 변하면서 우리 사이가 형제 이웃이 이것밖에 안 되냐고 동원되는 성경구절이 있습니다. 제가 마귀가 하는 짓들을 미리 알려줘야 되지요.

그게 사도행전 2장 44절, 45절요. 누가 읽어볼까요.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고” 이걸 거론하면서 재산과 소유를 팔아서 서로 도와줘야 되지 당신은 왜 그렇게 싸늘하게 차갑게 나에게 악담을 늘어놓느냐, 라고 할 때 그 다음 문제, 여러분 어떻게 답변해야 됩니까? 지금 사도행전 2장 44절, 45절, 이건 진짜 응용문제, 실습해야 될 문제에요. 여기에 대해서 뭐라고 답변해야 되겠습니까? 제가 답변할게요.

이 사람들이 성령 받은 사람이거든요. 성령 받은 사람은 다 죽은 좀비들이에요. 죽었는데 재산이 필요 없어 내놓는 거예요. 그렇지요. 그런데 이 사람이 달라고 했잖아요. 그러니까 이 사람은 죽을 마음이 없다는 거예요. 십만 원이 빈다는 말은 십만 원 있다면 더 살 수 있다는 거예요. 말은 그렇게 안 하고, “아이고, 없으면 죽을래.” 말은 하지만 톤 들으면 죽겠다는 것인지 빌려달라는 것인지 다 알잖아요.

따라서 여기에 같이 하고 있는 사람들은 이미 죽은 자기 때문에 주께서 어서 오시옵소서, 라고 인사하면서 주님에 관심 있는 사람이지 다른 데는 관심 없어요. 주위에 만약에 필요한 사람이 있으면 이사 가고 난 뒤에 빗자루 같은 것 필요 없잖아요. 우리 집에 와서 빗자루 가져갈래요? 집에 있는 돈 몇 천만 원이 지한테는 필요 없는 빗자루 같이 생각되는 사람들의 집합이 이 집합이에요. 성령 받은 이 집합이에요. 한 마디로 미친 사람들, 이상한 사람들이에요.

그러니까 작은 공동체, 성령공동체란 이름으로 이걸 교회가 시도하는데 이게 뭐냐? 이걸 가짜로 시도하면 이 안에 전부 다 아까 같이 예를 들어서 육적인 사람들의 집합체면서 자기의 정체를 감추는 용도로 사도행전 2장 44절, 45절을 둘러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건 뭐냐 하면 결국은 아까 첫째 시간에 나를 기어이 부정하지 않겠다고 강한 악마의 의지를 드러내고 있는 거예요. 교회란 이름으로 모여서. 나는 나를 개무시할 그런 의사는 조금도 없다.

그래서 성령공동체, 그야말로 진짜 죽은 사람들 좀비 같은 사람들이 모여서 집에 있는 빗자루만큼도 못하게 여기는 이러한 공동체와 정반대되는 게 뭐냐 하면 이겁니다. 바로 도 닦는 사람들. 내가 어디까지 우수한 존재가 될 수 있는가, 질적으로 향상될 수 있는 가를 생각하는 사람들.

제가 거기에 대해서 지난 오후설교 때 암벽타기를 설명해드렸지요. 저 높은 곳을 향해서 올라갔는데 보니까 천정이라. 올라갈 데가 없어요. 쓸데없는 아무 의미 없는 짓을 한 거예요. “아아 나 어떡하지?” 이걸 두 자로 하면 절망이잖아요. 제가 분명히 절망도 뭐하다? 절망도 의미 없어요. 처음부터 태어난 게 위기인데 태어난 게 잘못됐는데 무슨 절망할 자격이 있습니까. 절망할 자격도 없어요.

고민 자체가 사치라니까. 주님 보시기에 고민거리도 안 돼. 고민한다는 것은 자기의 이상적인 나를 괜찮게 보기 때문에 고민이 생기거든요. 내가 이런 삶을 살 위인이 아닌데, 이러니까 지금 자기 것을 건전한 것으로 따로 챙겨놨어. 자기가 경배할만한 나를 따로 챙겨놓으니까 현실과 자꾸 부합이 안 되니까 왕 짜증이 나는 거예요. 그냥 콱 죽어버릴까, 이런 식으로.

다시 제가 말씀드립니다. 어떤 사람이든 두 사람이든 세 사람, 네 사람, 여러 명이 모이든 모든 장소는 반드시 무슨 이야기가 나오게 돼있다? 돈 문제가 나오게 돼있어요. “집사님, 애 하나 사고 쳤는데 합의금 오십만 원이 비네요.” “채우지 마라 했잖아요.” “이번 말에 곗돈 타는데 갚아줄게요. 이자 쳐드릴게요.” “애 잡혀가도록 그냥 놔두세요.” 이런 말을 할 수 있어야 됩니다.

왜냐하면 성경에 착한 일하는 게 있지요. 유다서에 나오지요. 성령 받은 것은 이 세상에 착한 일하기 위해서 하는 거예요. 그 착한 일이 뭐냐 하면 오늘 특별히 알려드릴게요. 가장 착한 일은, 당신은 이단입니다. 이것보다 더 착한 일은 없어요. 이게 최고 착한 일입니다. 이거는 태어날 때부터 이단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 나오지요. 이게 착한 일이에요. 이게 예수님이 하신 착한 일입니다.

누구만 이걸 영광으로 돌리겠습니까? 같은 종류, 같이 성도인 사람만 찬양, 찬미를 드릴 거예요. “내가 꿍쳐놓은 본질을 당신한테 들켰군요. 내가 이단인 걸 우째 알았지? 진짜 친구를 만났네.” 이런 결과를 기대는 하지 마세요. 아주 드뭅니다.

주님은 이미 우리의 생명을 하늘나라 금고에다 넣어놨어요. 금고비밀번호 알려드릴까요? 그거는 십-자-가. 이미 금고 안에 우리의 생명이 들었어요. 그러면 그게 진짜에요. 내가 상상한 나 말고요 주님께서 우리는 모르고 창세전에 예정된 야곱 있고 예정된 아브라함 있어요. 그건 아브라함도 지상에선 몰랐어요. 주께서 어떤 나를 미리 만들어놨는지를 설계한지를 아무도 몰랐어요.

주님께선 창세전에 알아서 아버지와 아들과 협의해서 그걸 해놓고 우리가 이 땅에서 내가 느낀 것은 뱀의 후손으로서 악마의 속성이 계속 스며들기 때문에 이거는 제거대상이에요. 이거는 죽음의 대상이라고요. 그러면서도 우리는 살아 있으면서 악마가 나한테 부추겼던 나의 이상형이 따로 멈추지 않고 계속 나옵니다.

그게 뭐냐 하면 광야의 시험이에요. 돌이 떡 되는 것, 그리고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것, 뛰어내려라. 이걸 한 자로 하면, 와~. 이건 가문의 영광입니다. 아들이 만약에 뭔가 잘돼보세요. 집사님 뭐라 합니까? 무슨 말이 더 필요해. 한 자만 필요하죠. “와. 진정 네가 내 아들이었단 말인가, 내 배에서 태어난 자식이란 말인가.” 이렇게 되지요.

사람의 공포는, 인간의 공포와 두려움은 뭐냐 하면 남들이 세계에 날 안 끼어 넣어줄까 봐 겁을 내기 때문에 그래요. 지들 노는데 나를 안 넣어줄 때 그래서 왕따 사건이 어릴 때부터 생기는 거예요. 초등학교 때부터. 왕따라는 것은 인간에게는 주님에게는 이게 없어야 되는데 악마 자식이기 때문에 왕따라는 걸 느끼게 돼요. 왜 안 놀아주나, 하는.

지가 지대로 놀면 되잖아요. 혼자 노는 게임, 예수님 혼자 놀았잖아요. 지도 놀면 되잖아. 왜 안 놀아준다고 그렇게 닦달내고 트라우마가 어떠니, 학교 고발에 폭행 고발하고 <펜트하우스>에서 자기 아버지, 엄마까지 달려들어서 아이 소프라노 만들어서 쳐지고. 왜 혼자 놀면 안 돼요? 인간은 혼자 못 놀아요. 남이 인정해주는 게 나에요. 왜냐하면 나의 이상형은 타인에게 베껴왔기 때문에. 나는 저렇게 되고 싶어, 를 베껴왔잖아요.

골프 치는 아가씨들 이상형은 뭡니까? 박세리잖아요. 박세리인데 뭔가 빠진 박세리에요. 그냥 박세리가 아니고 시집 간 박세리가 돼야 돼요. 박세리는 시집 안 갔으니까. 그러니까 어쨌든 박세리에요. 야구선수에게는 바람의 아들은 이종범, 바람의 손자는 이정후. 모든 각 분야에는 이상형이 있어요. 아까 십 몇 년 전에 오신 목사님처럼 나도 목사님처럼 돌아다니면서 강의하고 싶다. 아이고~ 두 사람만 붙여줘도 감당 못하면서 돌아다니면서 강의는 하고 싶은.

그게 눈에 보이는 것들이 자기 이상형에 띠는 거예요. 아까 이상형에 몇 가지 조건, 제가 다섯 가지밖에 안 했지요. 그 다섯 가지 조건을 한방에 날려 보내는 것이 뭐냐 하면, “예수님이 나의 남편입니다.” 그걸로 끝났어요. 나를 죽이던 그분이 바로 나의 남편이기 때문에 나를 죽이지 이런 건방 떠는 나를 사랑하는 분이기 때문에 나를 죽이는 거예요. 네가 이단이야, 라고 진정으로 너는 네 모습 모르지? 알려줄까? 네가 바로 마귀 새끼야, 라고 이야기하는 그분이 성령으로 오신 우리 주님이십니다.

그러니 뭐 더 이상 아내가 설거지 할 생각마세요. 왜냐하면 설거지 안 해도 남편이 다 알아서 해주니까, 값없이 다 해줬으니까 그냥 놀기만 하는 거예요. 그냥 놀려니 심심하니까 찬양하고 기도하고 헌금하고, 그냥 놀다 심심하니까 성경 공부하는 거예요. 봉사하고. 진짜 어제 낮 설교, 지난 설교이야기해서 죄송합니다만 끝부분에 우리 교인들에게 진정으로 감사한다고 했지요. 우리 교인들이 오지랖이 없다는 거죠.

다시 말해서 왕따 되기 전에 자진해서 왕따 된 사람들, 자진해서 왕따 되기 때문에 왕따 되는 세상의 시험을 안 받아요. 처음 우리교회 올 때는 같이 복음 아는 사람끼리 나도 넣어주세요. 나도 복음 알아요. 같이 복음으로 이야기하면 얼마나 재미나는 교회생활이 될까 하다가 좀 다녀보니 내가 상황파악을 잘해야 되겠구나. 야아 이 동네가 내가 생각한 천국이 아니고 자칫하면 진짜 천국이가, 이런 생각이 들 수 있다는 감이 와요. 정말 참, 주의 능력 아니면 이런 표현 안 됩니다.

“당신은 이단입니다.” 이것을 주님의 말씀으로 안 되고 십자가로만 가능해요. 자, 광야의 생활, 첫째는 돌이 떡 되게 하는 것, 인정받는 것. 세 번째는 뭐냐 하면 세상에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는 에너지를 권력을 갖는 것. 인정받는 것, 그 다음에 권력. 권력이란 것은 반드시 일인자에요. 내가 최고의 일인자가 되는 거예요.

이 세 가지를 구비하면, 떡이니까 돈이 있어야 떡을 사잖아요. 농사짓는 것도 아니고. 그러니까 돈과 재력과 남한테 명예와 그리고 세상 실제적인 권력, 이걸 가지고 두 자로 지옥이라 하는 거예요. 악마가 제시했잖아요. 그러니까 지금 이 지옥에서 인간들이 자식을 키울 때 목표가 뭐냐 하면 지옥이란 말은 괄호에 집어넣고 출세하라, 이 말이에요.

그런데 따지고 보면 이걸 붙여보면 뭡니까? 출세하되 어디서 출세하라? 지옥에서 스타 되라 이 말이거든요. 지금이 무슨 시대냐 하면 지금은 연예인 백만 명 시대에요. 유튜브 하는 사람들 전부 다 연예인이에요. 인기, 남들이 인정해줄 때 존재감을 느끼는 그 시대에요. 두 번째 사람들 인정받을 때 숨을 쉬고 살 희망이 있다는 거예요. 모든 교회도 마찬가지고 인기고 전부 다 이런 거예요. 아까 사도행전 2장에 나오는 공동체와 다르지요. 이런 인정과 재력과 권력에 대해서 전혀 생각하지 않지요.

그렇다면 우리가 [십자가를 아십니까] 책을 보면서 제가 미리 말씀드릴 것은 예배드리고, 기도하고, 헌금하고, 주일성수하고, 상급하고, 전도하는데 그 뒤 내면에 다 노림수가 있다는 거예요. 나는 목사로서 교회 성장함으로써 우리 교회가 정말 성경에 나오는 이상적인 초대교회 같은 모습, 일곱 교회, 어디서 듣기는 들었는지 빌라델비아 같은 그런 교회를 함으로써 내가 주의 종이 맞다, 라는 것을 내가 되고 싶은 하나님도 인정하는 이상적인 목사 되고 싶은 이상형을 그대로 받쳐주는 목회하고 싶어 하는 자들이 만들어낸 예배와 기도와 헌금과 주일성수, 그 신학과 이론이다. 그걸 지금 제시하는 거예요.

‘나는 목사다’와 ‘나는 이단이다’는 완전히 다르지요. 완전히 다른 겁니다. 그러니까 이단 되면 안 되는 게 아니라 성도는 이단이라도 좋소. 주님이 이단이라 하면 얼마나, 이미 혼인한 사이인 데요. 남편이 날 보고, “니는 못 생겼어.” 얼마나 감사한지요. 못 생겼으면 어때. 이미 결혼해버렸는데 무를 수도 없고 끝났는데. 니는 예뻐. 이러면 불안한 거예요. 내가 만약에 예쁨이 사라지면 나를 내치고 다른 여자가 내 자리에 들어올 수 있다? 그 다음부터 골치 아파요.

그런데 주님께선 혼인생활을 그런 식으로 하지 않고 계속 캐내요. 못 생긴 것, 아이고 못난 것, 이순재지요. 계속 이렇게 하니까 점점 감사해지는 거예요. 그런 남편이. “아이고, 나 같은 것 데리고 산다고 주님이 고생이 많습니다. 할렐루야. 찬미 드립니다.” 모든 말씀은 세세하게 우리의 뼛속까지 다 파헤쳐서 네가 밝혀낼 수 없는 죄가 끝까지 담겨있다는 걸 파헤치는 그게 성령께서 말씀을 다루는 방법이에요.

그래서 어제 오후에 성경해석은, 오전에 했지요. 반드시 환란을 추출해내는 식으로 성경해석을 해야 된다는 거예요. 네가 사는 이것이 환란이 너한테 딱 맞는다는 것을 정당화하는 식으로 성경 해석해야 돼요. 환란에서 벗어나게 해달라고 하지 말고 그것보다 더 심한 환란이 있더라도 참 이것도 사랑입니다, 라고 받아들일 수 있어야 돼요.

여러분 지옥 가면 영원히 못 빠져나옵니다. 불구덩이에 가는 것 생각해보세요. “엄마, 나 출세했어.” “아이고, 이 불쌍한 인간아. 출세에 눈이 멀어서 지가 지옥 불에 가는 것도 모르고, 아이고 인간아.” 그럼 다른 사람이, “지옥 간다는 말을 해보지요?” 했지요. 엄마 말 듣는 자식 봤습니까? 안 듣습니다. 안 들어요. 왜냐하면 자식을 엄마를 부모를 이용하기 때문에 안 들어요. 지가 신인데 신이 누구 말을 들어요. 갈수록 신이 되게 되면 남의 말을 들을 여지가 없어요. 그냥 참고할 뿐이지요.

제목이 뭐냐 하면 [십자가를 아십니까]에요. 이게 몇 년도라고요? 1995년. 95년도에 이 제목으로 한 이유가 십자가를 도를 증거 하는 것이 교회에요. 그때 95년도까지 제가 알던 복음은 교회는 십자가를 증거 하는 거예요. 십자가는 피거든요. 피만 증거 하는 거예요. 피가 주님의 최종적인 거예요. 아까 액체라 했잖아요. 액체 앞에 고체는 고개를 숙여야 돼요. 고체는 살아 있는 상태고 액체는 죽은 상태기 때문에. 그 죽음이 곧 살아 있는 것보다 더 전제돼야 되고 더 우선적이어야 됩니다.

그게 사도행전 20장 28절에 나오거든요.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저들 가운데 너희로 감독자를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느니라” 그러니까 감독자가 뭐냐? 이 교회는 무엇이 우선이다? 피, 하나님의 피가 우선이 돼야 돼요. 하나님의 피가 우선이 안 되는 교회는 교회가 아닙니다. 이스라엘 우선은 유월절 양이에요. 제사에요. 언약궤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망한 이유가 이스라엘이 이스라엘을 우선했기 때문에 망한 거예요. 교회가 교회를 우선하게 되면 그거는 이미 맛이 간 교회입니다. 그거는 뭐 지옥 가는 교회지요. 오직 핍니다. 피 복음 전해서 교회 키우겠다? 이런 수법은 유튜브 목사들이나 하라 하세요. 유튜브 목사들 보면 얼마나 많은 목사들이 있습니까?

원어로 하면서 십일조 안 해도 된다, 주일성수안 해도 된다. 이렇게 하면서 한국교회 썩었다. 복음으로 나가야지 왜 교회를 주장하느냐 이런 식으로 하면서 나중에 자기 교인 나가면 네가 나가버리면 우리 교회 어떻게 되느냐? 방금 지가 말해놓고 복음 해놓고 나중에 막상 지 교회 교인 나가니까 네가 어찌, 내가 당신을 얼마나 사랑하고 좋아했는데 당시는 나를 때리고 배신하고 나가십니까? 이건 뭐예요, 지금. 그런 분들이 있어요. 이 강의 듣고 있어요.

뭐 원어에다가 오직 복음, 구속사, 언약사 괜찮은 다 집어넣고 막상 그 교회 나가니까 저주받는다고 저주를 퍼붓는 거예요. “당신 저주받습니다.” 그래서 나가신 분이 하는 말이, “당신 죄는 주님에게 용서받고 내 죄는 용서 못 받고 그런 게 어디 있어.” 무릇 새벽 세 시까지 까였다 아닙니까, 목사한테. 감히 이걸 버리고 가다니 당신 저주받을 거야.

그 말은 뭐냐 하면 그동안 예수를 이용한 거예요. 저주 안 받기 위해서 이용한 거예요, 그 목사가. 자기 이상형이 안 깨지기 위해서 하나님 이용한 거예요. 이단이 좀 깨지면 어때요. 이단 맛이 나잖아요. 그런데 나는 죄인이라고 하면서 죄인이라 했는데 왜 때리십니까와 똑같은 소리에요. 지 죄를 아는 게 목적이 아니고 맞는 게 싫어서 죄인이라고 해주는 겁니다. 잘못됐습니다, 잘못됐습니다. 이 짓하고 있는 거예요. 진짜 잘못된 게 아니고.

그래서 [십자가를 아십니까]는 바로 사도행전 20장 28절에 근거해서 피를 아십니까? 요새 말로 당신이란 고체 말고 주께서 흘린 액체를 아십니까, 이 말이에요. 모든 이야기는 피로 끝나버렸어요. 인간은 그렇게 생각 안 하는데 주님 하늘나라 쪽에서 피로 끝내버렸어요. 딱 한자, ‘피’입니다. 영어로 blood피로 끝내버렸어요. 거룩한 피.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그걸로 끝내버렸어요. 이미 여러분들은 결론과 결과를 알고 있어야 됩니다.

그 다음에 나오는 십자가를 아십니까, 굵은 글씨로 해놨지요. 그 밑에 9페이지입니다. 십자가를 아십니까, 해놓고 그 밑에 뭐라고 돼있어요? “누구나 멀미해 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멀미라는 게 어디 나오느냐 하면 요한계시록 3장 16절에 나와요. 원래 3장 16절에 괜찮은 구절들이 많아요. 요한복음 3장 16절, 요한일서 3장 16절.

요한계시록 3장 16절에 뭐냐 하면 이걸 주님께서 이렇게 돼있다, 이게 뭐냐? 으으윽. 라면 먹고 토해 본 적 있습니까? 상상하지 마세요. 괜히 말했다. 으으윽. 토하고 싶다. 더러워서. 이 말은 뭐냐 하면 배제, 밀어내기에요. 오지 마. 너 천국에 오도록 내가 가만두지 않을 거야. 오지 마, 너. 밀어내는 거예요. 토하는 거예요. 저는 주님 사랑해요. 플래카드 해서 사랑해요. 찬미하세 주 예수. 주님이, “오지 마!”

어떤 분이 강의할 때 강의 첫 마디가 뭐냐 하면 이거에요. 오늘 제목, 이거 괜찮은데. “문 잠그라.” 문 잠그세요. 내 강의에 감히 늦게 온 사람 용납 안 한다. 닫으면 열 자 없고. 열어주세요. 에스케이에서 기름 준비했습니다. 가! 에스케이주유소고 어느 주유소고 문 잠겨서 기름 준비 백날 소용없어요. 끝났어요. 문은 특징이 뭐냐 하면 창세전에 예정된 자만 들여놓고 문을 닫아버리면 바깥에서 열 수가 없어요. 비밀번호 없어요.

그동안 바깥에 있는 사람은 자기가 자기를 결정한 거예요. 인생을 자기가 결정하고 결심하고 선택했기 때문에 그래요. 한 번이라도 주님이 찾아온 사람은 내 결정과 결심은 아주 박살내놨거든요. 니 결심, 결정 나는 안 들었다고 전혀 무시합니다. 오늘까지 어제의 결정은 전부 다 힘아리 없어요. 휘리릭하고 모든 결정 다 날아가고 없어요. 오늘의 결정이 오늘 너를 있게 한 거예요.

그 결정이 뭐냐? 피 묻은 손으로 결정한 거예요. 그냥 결정, 선택이 아니고 피에요. 선택이든 뭐든 예배든 간에 항상 피가 나와야 되지 선택 자체가 적용되고 삼위일체 나오면 안 돼요. 피를 앞장세운 삶이어야지, 피를 앞장세운 선택, 피를 앞장세운 예정론 항상 핍니다. 그게 십자가지요.

그래서 초반에 멀미해 본 적이 있을 것이다. 토하고 싶을 때가 있다. 거짓 교회는 토해내신다. 그래서 우리가 생각하기는 거짓 교회 토할 것 없이 처음부터 안 만들면 되지 않느냐? 하나님께서 안 만든 이유가 그런 교회가 있어줘야 피가 나와요. 핍박을 하는 자가 있어야 핍박이 성립되지요.

지옥 가는 사람이 있어야 천국 가는 거예요. 지옥이란 천국에 못 가는 사람이에요. 지옥 가려고 애쓰는 사람이나 천국에 못 가는 사람은 자동적으로 지옥 가게 돼있습니다. 그래서 천국이 있다는 것은 지옥 가는 사람한테는 그거는 하나의 공포에요. 위기고. 그래서 그 다음에 네 번째 줄에 봅시다.

“한국 교회는 너무 오랫동안 거짓말을 하고 있다.” 한국 교회는 그냥 거짓말이 아니고 어떻게 거짓말한다? 너무 오랫동안 거짓말했어요. 제가 왜 이런 말하느냐? 오랫동안 하게 되면 관성이 관행이 되고 관행이 법이 돼버려요. 전통이 돼버리고. 바리새인들이 그런 짓했거든요. 오랫동안 한 것이 이게 권위가 돼버린다고.

갈라디아서 5장 24절 누가 찾아보시고 그것 설명하고 마치겠습니다. 누가 읽어보세요.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감사합니다. 육체와 함께 정과, 그 다음에 뭡니까? 탐심. 이게 합쳐서 육인데 육은 시간성을 갖고 있어요. 과거, 현재, 미래. 과거가 아까운 거예요. 과거가 내가 얼마나 애써서 공들여 살아온 인생입니까. 남의 자식은 안 아깝고 내 자식 아까운 이유가 내 자식에게 너무 투자를 많이 했어요.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겠지만 너무 공들였어요. 제2의 나기 때문에.

그런데 거기에 뭐 박혔지요. 뭐가 박혔어요? 십자가에 예수님 달릴 때에 그냥 달리면 흘러내리잖아요. 예수를 고정하기 위해서 여기에 뭘 합니까? 못을 박지요. 그러면 못 박힌 예수님의 피 흘림을 사람들이, “나, 저분 그리워라” 백부장 외에는 별로 없어요. 대부분 사람들은 이런 처참한 시체의 모습 안 좋아하잖아요.

이 달린 예수, 이 예수님 이름 속에 너의 이름도 여기 합류된 사람은 이게 바로 성도다 이 말입니다. 피가 생산한 새로운 나, 피 묻은 채. 정과 이거는 걸레라는 것을 받아들이는 사람이 바로 성령 받은 성도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가끔 쳐다보는 게 아니라 늘 함께 있지요. 신랑과 신부, 주님과 우리가 아내가 되어 함께 사는데 그 집에 빌라, 오피스텔 아니에요. 십자가 안이에요. 십자가라는 집에서 예수님과 우리는 피에 둘러싸여서 함께 사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께서 뭘 했느냐를 생각하게 하옵소서. 그런데 인간들은 내가 살면서 얼마나 고생했고 뭘 했느냐를 하나님이 알아주기를 원합니다. 이제는 그 내가 알아주는 것을 또 다시 십자가에 못 박게 해주셔서 네가 십자가 안에서 네 진짜 생명은 하늘에 있음을 날마다 확인시켜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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