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을 전할 자격이 미달 됨을 알게 하시려고 말씀을 전하게 하시고, 말씀 들을 자격이 없음을 알게 하시려고 말씀이 들리게 하시며 살 필요 없음을 알게 하시려고 빼꼼히 관 뚜껑 열고 나오게 하셔서 사망의 몸에 담긴 생명으로 하루 치만 살리신다는 말씀이 선인과 악인을 구분하지 않고 햇빛과 공기를 주시듯 듣고 있는 모든 이에게 주어질 때, 어떤 이들에게는 심판의 증거가 만들지는 현장이 되고 다른 이들에게는 아무 상관 없는 자리가 된다. 하나님의 구분하지 않으심은 구분하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선별작업에서 발생하는 효과를 건지시기 위한 것이고 하나님은 오직 생명나무가 있는 아들의 나라만 중요하시고 예수님의 피의 효과만 집중하신다.
불신의 육이 성령의 투명한 막에 싸인 채로 주님의 지시가 움직이는 모습과 육 자체로 받아 이해하고 지시를 행하려는 모습이 갈린다. 행함이라는 것은 종교적 감수성으로 부풀어진 기쁨이 지속되지 못하고 알 수 없는 불쾌가 올라오는 것에 당황하며 그것을 타인에게서 그리고 나에게서 감추려고 반복하는 동작이 결국 노동이 되는 현상이다. 감출수록 감추어야 할 것이 더 많아지면서 노동의 강도는 세지고 이런 열심이 어느새 자기 의로 둔갑하여 나는 나를 의심할 기회에서 점점 더 멀어져간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믿으라는 건지 말라는 건지, 도대체 뭘 하라는 건지, 일부러 도발시키려는 것처럼 말씀이 귀에 꽂힐 때, 기존 오락단체를 순회하며 당할 만큼 당하고 속을 만큼 속은 것이 부족하기라도 한 듯이 나의 의미를 어느 정도는 북돋우며 복음이라는 것을 듣게 해달라는 반발이 화수분처럼 올라오고, 복음 전도자는 그 반응을 기다렸다는 듯이 말씀을 깔맞춤으로 입에 귀에 쏙 넣어달라는 심보가 어디서 오는 지 쏙쏙 집어내면서 이거나 듣고 꺼지라는 복음 중의 복음으로 대응한다.
젖을 거부하는 아이가 갈망한 것이 엄마의 사랑이었던 것처럼 인간은 따뜻하게 품에 안아주시는 하나님을 말씀보다 더 욕망하고 있기에 버림의 요소가 삽입된 생생한 십자가 복음에 걸려 넘어질 수밖에 없다. 나의 선택으로 인해 내가 버림받고도 여전히 남는 어떤 것이 있다면 그것은 내 전진의 결과가 아니라 일방통행하신 주님의 작업이다. 주님의 선택에 함유된 잃어버림의 요소와 내가 나를 상실할 수밖에 없는 요소가 함께 작용하면서 나와 나의 간격이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그 사이에서 피어오르는 대속의 은혜가 나와 상관이 있을 리가 없고 그것을 꿈도 꿀 자격이 없다는 것만 선명해진다.
모든 것의 끝을 만나지 않았기에 모든 것의 시작을 모르고 시작과 끝을 모르는 자가 ‘나는 나를 안다’라고 말하면 그건 백 퍼센트 거짓말이다. 자신을 모르기에 마음속에는 끊임없이 누군가의 시 속에 소망처럼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는 삶을 살고 싶은 미련을 떨치지 못하게 하는 기제가 작동한다. 카운트하지 말라고 말라고 해도 별 헤는 마음으로 착하고 참되고 아름다운 무엇인가가 되고 싶다.
멋들어진 무언가가 되고 싶기에 그것에 방해가 되는 모든 것을 향해 부끄러운 짓을 서슴지 않고 할 수 있고 부끄러움의 기준을 자체 조정하며 나의 참되고 바름에 흠이 없는 쪽으로 더 가까이 나아가는 쪽으로 스스로를 속이며 나는 나를 기뻐하고 싶고 나에게 고마워하고 싶다. 도대체 왜 그러냐고 묻지 말기를. 그래야 잠시 숨이라도 쉴 수 있을 정도로 그놈의 의미라는 것이 나를 옥죄며 한시도 가만히 두지를 않는다.
태어나기 전부터 싸움의 요소가 삽입된 것처럼 태어나고 살고 생을 마감하기까지 싸움으로 시작해서 싸움으로 마감하는 운명임을 감지하고 어떻게든 이겨야 하는 것이 선인 줄 알고 달리다가, 뒤바뀐 흐름 속에서 내가 지는 것이, 속는 것이 주님의 일이고, 내가 싸우는 상대는 항상 어떤 모습으로든 예수님이 나의 적이 되며, 내가 이기는 순간 반드시 예수님이 죽고 내가 지는 순간 예수님의 죽으심이 승리하는 것을 보게 되는 비연속의 한 지점은 인간의 유한한 세계 밖에 있기에 고도를 기다리듯 기다릴 수 있는 무언가가 아니다.
구원받을 수 있는 나가 구원받을 수 없는 나를 이겨서 패배시키려는 싸움을 끝까지 멈추지 못하도록 악마는 인간을 지각세계 속에 가두고 내가 알고 있음을 고수하면서 결코 실패의 길로, 속는 길로, 죽음의 길로 갈 수 없게 도와준다. 빈틈없이 죄만 가득 찬 동질의 세계에 율법의 줄이 전체를 둘러쳐서 잡아당겨 본들 예외 없이 모든 것이 법에 저촉되어 죄라는 한 점으로 응축되기에 인간은 영원히 나에게서 시작해서 나로 돌아오는 저주 아래 있다. 그러나 율법의 줄이 전체를 아우르지 못하고 걸리는 구멍이 있다면 그곳은 예수님이 인간세계를 빠져나가시며 십자가 죽음으로 뚫으신 소실점이고 율법 외의 한 의가 나오는 생명의 공간이다.
첫 번째 아담은 예수님 외에 누구도 창세 전 지혜에 참여할 수 없는 이유를 보이기 위해 선악과 안으로 들어가야 했고 그 속에서 잉태된 누구도 하나님의 아픔을 담을 수 없음을 증거 하도록 특이한 나라와 존재들이 세상에서 잉태되지 않는 방식으로 출몰해서 언약이라는 바통을 넘기고 넘기며 잉태치 않으신 유일한 실체이고 실재이신 한 분의 다 이루심의 지점까지 흘러가야 했다. 십자가가 둘러친 경계선을 넘어버린 자들은 하나님이 지퍼 내리듯 찢으신 자기 고유성의 잔재들이 걷히면서 이 세대가 해석할 수 없는 예수그리스도의 단일의미가 죄라는 투영체에 분산되어 오색찬란하게 펼쳐지도록 사용된다.
밖에 나가서 사람들을 만날 때나 일을 할 때 나를 감추고 상대에게 모든 것을 맞춰주는 척하며 기계처럼 움직이다가 집에 돌아와 일상의 연장선에서 기계적으로 말씀을 마주하고 듣고 싶은 말만 선별적으로 들으며 끝까지 나와만 소통하는 것을 멈출 길이 없는데, 내 허락도 없이 듣고 싶지 않은 말씀이 마음속을 침범해서 나를 공격하고 밖으로 밀쳐내는 순간에 모든 감각이 나에게 곤두서서 철저히 나는 내가 되고, 이 쓰레기같은 모습이 생생할 때 글이라는 것을 쓰게 된다.
기생라합도 강도도 세리 삭개오도 한결같이 구제 불능의 삶이 주변에 노출되고 그래서 좌절을 능가하는 뻔뻔함으로 살았기에 주님이 찾아오신 것이 아니라 그 악함이 온 천하에 알려지고 누구도 교화할 수 없는, 심지어 자신도 자신에게 손쓸 수 없는 ‘차라리...’의 상태로 미리 이끌어주신 주님께서 그들을 주의 현실을 표현하는 용도로 쓰신 것이다. 몸 팔고 남들 몰래 도둑질하고 사람들 상처 입히느라 파김치가 되도록 바쁜데 말씀을 상고할 시간이 얼마나 있었을까. 뜻하지 않게 선지자의 외침이 귀를 붙잡았기에 들었고 들렸기에 시원적 정보가 쑥 들어오면서 주님은 형식뿐인 껍질들에게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고 요구하지 않으심을 알게 되었기에 자신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든지 상관할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길거리에서 예수님을 스친 수많은 무리가 있었으나 주의 능력이 나간 자는 한 명뿐이었다. 이미 배치된 지체가 타이밍에 맞춰 주님과 연결되고 알토란같은 내용이 주님 쪽에서 빠져나가 혈루병 여인에게 전이되는 관계성을 통해서 주님의 때가 잠시 표현되었다. ‘바로 죽이셔도 아무 손색 없는 걸레가 맞습니다. 살려두셔도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을 죽이는 일 밖에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문제없음이 문제 있음을 찾아오실 때 나의 자리는 나의 결단이 만들어낸 결과를 지키기 위해 혼신을 다해 노력하는 우상숭배의 자리였고, 주님의 지시와 투쟁하는 현장이고, 주님 쪽으로 당겨지고 있음을 잊고 물 위를 걷는다고 생각하다가 물속세계에 빠진 베드로처럼 결국 시공간 있음의 세계에 잠겨있는 것을 당연히 여기는 내가 바로 문제투성이라는 것을 몰랐음이 드러나는 자리이다.
요한의 세례를 받은 자들과 받지 않은 자들이 모두 하나님을 의롭다고 고백하되 한 집단은 인간이 당연히 있어야 할 저주의 물속에 입수한 채로 고백하고 다른 집단은 하나님의 자리인 물 밖에 서서 자신이 신이라도 되는 것처럼 구원을 확신하며 고백했다. 다윗과 부하 아비새가 한 편에 있었지만 아비새는 함께하시고 나를 도우시는 하나님을 알고 있었고 다윗은 여호와의 기름부음에 사로잡혀 있었기에 나를 위할 필요가 없었다.
물속에 있는 자에게만 건져주심의 사건이 성립하고, 주님이 내미신 손과 접촉을 통해 주의 생명이 확장된다. 온전한 제물의 희생이 만든 보호막이 육체 안에 담긴 생명을 보호하기에 주님의 동행에서 타지 않는 떨기나무처럼 몸이 불에 살라지지 않고 유지될 수 있다. 또한 인간이 있는 곳에 하나님이 결코 오시지 않는 증거를 만드는 불심판과의 동행이기에 내 의미로 부풀려놓은 겹겹이 쌓인 죄의 각질층이 하나하나 벗겨져서 몸을 감싼 불에 태워지며 자아가 상실되는 미리 온 심판의 고통을 경유 해서 나의 죽음을 통해 인간 없음을 확인하고 주님이 당겨주시기에 주님 쪽으로 걷는다.
세상 끝에 모든 족속이 하나님을 대면할 때 견딜 수 없는 부끄러움으로 산과 바위에게 내 위에 떨어져 나를 가리기를 부탁하기 전에 진짜 부끄러움이 무엇인지를 미리 알고, 죽기 전에 미리 시체가 되고, 깨지기 전에 미리 깨질 수 있는 당첨의 기쁨을 세상은 알지 못한다. 어제가 없는 오늘이라는 단절됨을 새벽 탁송으로 보내주시기에 ‘왜 그렇게 사냐. 이 불쌍한 인간아. 그렇게 복음으로 자신을 합리화라도 해야 버티지’라는 지옥 세상의 자극에 후회와 분노라는 자연스러움이 아닌 고마움이라는 생뚱맞음이 나올 수 있다. 괜히 그런 척할 필요 없다는 오해 섞인 비웃음에 진짜 이건 말도 안 되는 일이기에 울 수도 있고 그냥 웃을 수도 있다.
“나사로야 나오너라”라는 주님의 호출에 나사로가 무덤에서 나와 주님을 향해 걸을 때 무덤의 의미가 세상으로 확대되면서 인간들이 집결한 장소가 무덤이고 나사로는 자신이 시체인 것을 똑똑히 알게 되었고, 혈루의 근원을 마르게 하는 능력이 여인을 죄의 원형인 시작점에 맞닿게 해주셨기에 그들은 철저히 나의 나 됨의 끝 지점에서 주님이 보내시는 알람 소리에 깨어나 안에 담긴 생명이 이동하는 생명체가 되었다. 이처럼 세상에 속하지 않은 성도는 자신의 움직임이 결코 주의 움직임을 생략할 수 없음을 믿게 되고 십자가가 보내는 시그널을 받아 세상에 내보내는 좌표로 주께서 별처럼 박아놓은 기지국이 된다.
이근호
“인간은 영원히 나에게서 시작해서 나로 돌아오는 저주 아래 있다. ”
“예수? 십자가? 그가 뭐가 중요한데?” 세상은 항상 이런 태도로 성도의 가슴퍅을 손가락으로 꾹꾹 밀어붙이며 나무랜다.
“정신 안 차릴래?” 바깥 세상은 항상 이런 식으로 성도에게 조언하고 충고한다. 참된 성도의 특징은, 바로 이 바깥의 세상의 목소리가 자신의 목소리이며 ‘함께 계시는 주님’을 그런 식으로 핍박하는 상황이 자기 안에 조성되어 있음을 알게 된 자이다.
쉽게 말해서 자신의 죄를 윤리적 차원이 아니라 십자가 사건이 발생하는 차원에서 쓰여지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 자가 성도다. 주님께서 들어오고 난 뒤 눈을 제대로 뜬 것이다.
“사울아, 사울아. 너는 나를 핍박하는 자이다”(행 9: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