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만에 요리를 해보려고 메뉴를 정하다가 시골집에서 보내준 포실한 햇감자가 떠올라 보관된 장소에 갔다. 구린 냄새가 코를 자극하며 기분을 상하게 했다. 눈까지 내리고 한겨울이 임박한 마당에 가을 햇감자를 예상하며 뚜껑을 연 것이 그렇게 큰 잘못이 될 줄이야. 박스를 들춰보니 구더기가 부지런히 움직이며 어제의 만나를 오늘도 먹으려고 저장하느냐고, 있지도 않은 내일을 위해 어디 창고를 만들려고 하느냐고 꼬물거리며 신호를 보내는 것만 같았다. ‘에잇, 엿 먹어라’ 얄미운 구더기들을 감자와 분리할 일말의 아쉬움도 없이 신속하게 그리고 가뿐히 통째로 제거해버렸다.
다시 차분하고 깔끔해진 환경에 속이 시원해야 할 터인데 이 불편한 마음은 뭐지. ‘우리가 무엇을 잘못했다고 이렇게 더러운 취급을 하며 버리느냐’라는 구더기들의 외침을 환상으로 판단할 수 있을 만큼 제법 괜찮은 내가 실상은 제거목록 일 순위인 것을 알 길이 없기에 어제의 나를 오늘도 만나고 오늘의 나를 내일도 만나며 내가 살아있다는 것이 문제가 될 것은 전혀 없고 도리어 괜히 오셔서 돼지 농가 쑥대밭 만드셨던 예수님이 계신다면 그게 문제가 될 일이다.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살아야 할 희망이 말살되고 왜 살고 있는지 그리고 살아야 할 의미가 없게 만드는 당신이여, 이곳을 떠나소서.
여호와께서 나귀의 입을 열어 말을 하게 하신 성경 말씀이 정말 현실이라면 그 하나만으로도 내 주변에 보이는 모든 것이 진짜 현실이라는 것을 뒤집어야 하고, 보고 있고 듣고 있다는 내 지각을 의심해야 하며, 내가 정말 있기는 한 건지 혼란스러운 무질서에 사로잡히니, 내 존재감 보존을 위해 “내가 네게 무엇을 하였기에 나를 이같이 세 번이나 때리느냐(민22:28)”라는 나귀의 말은 그냥 소설 속 한 대목으로 성경 속에서 가뿐히 제거해 줘야 한다. 그러다 보면 없앨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닐 것이다.
“율법의 한 획이 떨어짐보다 천지의 없어짐이 쉬우리라(눅 16:17)”라는 말씀이 걸리고 요한계시록의 말씀처럼 예언의 말씀을 제하면 생명나무가 있는 천국에서 제하신다는 말씀이 떠오르며 두려움이 몰려온다면 비책이 있다. 하나님의 전지전능함에 하찮은 피조물이 관여할 수 없다는 겸비함과 말씀 앞에 죄인이라는 또 다른 자기증명으로 스스로 분위기를 환기하고 일말의 불안감도 부상하지 않도록 정신을 쏙 빼놓을 수 있는 일에 몰두하면 된다. 과연 나는 피조물이 되고 싶은 것이 아니라 나를 위한 나가 되고 싶고 신이 되고 싶은 마음을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부인할 수 있을까.
잠속에서 깨어나 눈을 뜨는 시점부터 양같이 그릇 행하며 제각기 갈 길 가면서 하나님 없음을 증명하는 하루를 보내며 눈에 보이는 것들이나 보이지 않는 것들 권세와 정사들 그리고 천사들까지 모든 피조물이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어 주의 징조를 표하는 것에 조금도 흐트러짐이 없음을 깨닫지 못하는 죄로 하루를 시작해 여전히 깨닫지 못하는 죄로 죽음같은 잠속에 다시 빠질 때까지 인간의 공로가 가미된 주의 일은 없다는 주님의 자기 증거를 위해 죄 덩어리 자체로 살뜰히 사용된다.
먹고 마시고 사고팔고 일하고 다시 생존을 위해 또 먹고 마시는 일상생활이 예수님이 없기에 문제없어 보이지만 문제 있음이 되고 주님이 개입되어 문제가 발생한 상황이 도리어 아무 문제 없음이 된다는 말씀을 숙지하고 내가 사는 것이 아니고 주님이 주를 위해 쓰시려고 죽은 시체를 살리신다는 말씀을 억지춘향격으로 떠올리는 의도가 얼마나 사악한 마귀 짓인지 들키는 현장이 일회성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가을 가면 겨울 오고 겨울 가면 봄 오듯이 갇힌 공간에서 돌고 돌며 반복된다.
유령같은 영적 존재를 물질이 물질로 처리하려는 시도를 계속하면서 나를 부인하지 못하고 열심히 파고 파는 존재 증명의 활개침이 ‘딸가닥’ 마귀의 품에 부딪히며 내가 건널 수 없는 구렁이 있기에 하나님 있는 곳에 내가 없고 내가 있는 곳에 하나님 없음의 단절을 알리는 십자가 소리를 듣는 순간, 인간은 영과 육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도 않고 통제할 수도 없는 ‘영’만이 진짜 실체인 것을 알게 된다. 주님께서는 영을 상대하시려고 있으나 마나인 물질 덩어리를 세포 하나하나에 율법대로 죽으신 흠 없는 죽음을 심어 빠짝 마른 쓸모없는 뼈다귀로 만들어 이름 없이 희생된 어린양의 의미를 펼치실 주의 이름이 작동하는 능력 발휘의 장으로 쓰신다.
이쯤 하면 생겨 먹은 꼬라지 자각하고 수치스러운 하나님의 백성으로 긍휼밖에 바랄 것이 없는 상태로 정지되면 좋으련만 주님은 나 좋아라고 일하신 적이 없다. 터럭 하나하나에까지 새겨진 교만의 본성이 집약되면서 육이 저절로 만들어내는 은혜의 고정성, 소유성, 그리고 내일을 위한 저장성까지 싸이고 싸이는 새로움 하나 없는 푸석푸석한 기억으로 다시 조작된 나만의 사적 공간에 갇혀 주님에게 빠져든 첫사랑이 희미해지고 잊힌다.
주께서 보내신 메뚜기떼가 세상에서 흉내 낼 수 없는 각 잡힌 질서로 쳐들어 와서 어느새 지켜야 할 실체로 정돈된 내 환상의 공간을 무질서로 바꾸고 걷어내서 참담함의 원래 모습, 피투성이로 발길질하는 원래 모습, 구원 불가의 처음 자리로 되돌리시고 주님의 것이 심어있기에 홀로 두지 않으시는 하나님 동행의 취지만 남도록 손봐주시며 깊은 여운을 남기신다. ‘너는 가짜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발상이 얼마나 마귀적 심정이고 이방적 우상숭배인지 랍사게 같은 자를 보내시어 ‘하나님이 어디 계시냐, 너의 신이 가짜가 아니냐, 다른 교회와 네가 다를 게 뭐가 있느냐, 예수라는 역사적 인물을 신으로 믿는 그 자체가 이미 종교성에 세뇌된 모습이 아니냐, 팔랑귀라서 뭐든 너무 쉽게 믿어서 사기당하기 딱 좋은 성향이다, 힘든 것은 자업자득이겠지만 그래도 뭐 다 너의 하나님의 뜻이니 어쩌겠냐’라고 맘껏 지껄이게 하실 때 상대를 통해 내 속마음을 듣는다. ‘나 또한 절대 속지 않고 싶다’
세뇌라는 말에 어이없는 이유는 믿고 싶어도 믿어지지 않는 증거만 꾸준히 공급받고 있고 그럼에도 되돌아서는 것조차 내 맘대로 되지 않는 것을 상대에게 납득시킬 수 없다는 답답함이 올라오며 자의식이 살아난 채로 ‘피조물이 신 행세하며 자신을 만든 하나님을 죽인 십자가 사건이 늘 현재로 우리의 죽었음을 증거 하고 인간은 실체가 아니라 환상을 조작하는 영적인 배후세력이 따로 있으며 이 세상에서 인간은 무가치하고 예수님 한 분만 있으면 된다’라고 자신도 안 믿는 복음을 모기소리처럼 읊조려보지만,
말씀인지 막걸리인지 분간도 못 한다는 마귀의 비웃음에 딱 걸린 ‘나’와 ‘내가 안 믿는 것을 건방지게 네가 믿어?’라는 냉소적 표정을 보내는 상대와의 마주침만 덩그러니 놓여있다. 지옥은 여기 있다 저기 있다 할 것이 아니라 사적인 내 공간은 항상 수치심으로 가득한 지옥 아닌 적이 없었다.
태어나기도 전에 상대의 발꿈치를 잡으며 기어이 지지 않으려는 마음, 자신은 하나님조차도 믿지 않을 수 있는 자신만만한 오만으로 가득 차서 자기의 이름을 길이 남기기를 원하는 단단한 본성에 인간의 힘과 능력을 다한들 바늘구멍이라도 낼 수 있을까. 일생을 교회는 구경도 안 해본 불신자나 교회 다니고 있는 불신자나 그리고 그들을 보며 답답해하는 ‘나’라는 불신자나 재수 오지게 없어서 태어나자마자 지옥의 하수구 튜브가 마음에 장착되어 결국 지옥으로 흘러가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십자가를 알고 있다는 것이 오물같은 마음을 후벼 파내주지 않는다.
자신을 낮추시되 죽기까지 복종하신 독생자를 향한 아버지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신 그리스도의 영이 예수님의 아픔에 동참할 신부들에게 강제침투 하셔서 처녀성을 유지한 흠 없는 거룩으로 감싸서 주님의 씨앗으로 만드신다.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신다는 말씀이 주님의 과정이 되어 ‘나의 아버지’라 부르실 수 있는 유일한 ‘나’이신 예수님의 여정으로 씨앗들에 담기고 어느 밭에 뿌려지든지 이 땅이 멸망해야 할 증거를 발아한다.
씨앗은 자기 의미를 담지 않았기에 이루어지는 어떤 일에도 스스로 해석할 수 없으며 그렇기에 주변에서 만들어지는 자체 해석에 분내거나 억울한 것이 아니라 그저 오해 속에 뿌려질 뿐이고 지휘통제부의 주인이신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고대하는 기쁨으로 이미 채워주셨기에 어느 상황에서도 받은 은혜가 족한 줄을 알게 된다.
사건은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물이 갈라지듯 비유가 가르기를 하며 만드는 두 영역에서 한쪽은 하나님을 상실한 사적 공간으로 다른 한쪽은 주의 이름의 진짜 현실 앞에 존재감 상실한 공적 공간으로 분류되는 과정이고 스스로 어느 쪽인지를 규정하려는 나는 머무르지 않고 지평 너머로 계속 소멸하기에 주님의 열매만 처음 사랑 그대로 남겨진다.
한 입에서 저주와 찬송이 나오는 모순에 빠져 똑같은 말을 다른 마음으로 표출할 때, ‘여기는 나와 어울리지 않아. 내가 낄 곳이 아니야’라는 말을 진짜 관계를 끊고 싶은 마음으로도 할 수 있고, 주제 파악 제대로 되며 자신이 있을 수 없는 곳에서 발견됨이 감지덕지 꿈만 같아서 감사하며 말할 수 있다. ‘나를 사람 취급 안 하네’라는 말을 무시당한 분노감에 휩싸여 말할 수도 있고 나를 사람으로 인정해 주지 않으셔서 너무 고마워서 말할 수도 있다.
쓴 물 단물이 한마음에서 동시에 나오고 있는데 아직도 나를 믿고 여전히 나를 실체라고 우길 수 있을까. 평생 몸부림을 쳐도 빠져나올 수 없는 자아, 있지도 않은 실체에서 빼내 주시는 외부의 강제조치를 거부할 선택권이 나에게 없다는 것이 얼마나 기쁜 소식인지 모른다.
주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 좋고 나쁨이 있는 것이 아니라 복음전파의 재료가 되기 위해 일어나야만 했다는 것에 아멘으로 화답하는 나는 분명히 약속밖에 있는 이방인이었는데 어찌 된 영문인지 진작 죽었기에 내가 한 것이 하나도 없고 내가 한 선택도 없다는 사망선고를 미리 받고, 더이상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꺾어진 뼈로, 예수님의 십자가로만 기뻐하게 하시는 낯선 분이 사시는 것을 확인하는 먹먹함 속에 잠시 얼음이 된다.
이근호
속세에 두고 온 님을 그리운 것이지, 아니면 그런 님마저 잊어버리는 그런 나를 그리워하는지 분간이 안 된 상태에서 밤새 수덕사 여승은 법당에 촛불 켜고 염불한다. 열심이다. 열성적이다. 하지만 무엇을 위한 열심인지 열성인지 본인도 모른다.
말씀은 말한다. “그러므로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이제 내 거룩한 이름을 위하여 열심을 내어 야곱의 사로잡힌 자를 돌아오게 하며 이스라엘 온 족속에게 긍휼을 베풀지라” 겔 39:25)
따라서 성도는 다음과 같은 반응을 보인다. “왜 저에는 하나님께서 열심을 내십니까?” 성도는 그저 매사에 감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