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민선

수련회 소감

아빠와 함께 2021. 8. 8. 17:06

천사가 내려와 연못이 동할 때 물속에 들어가면 병이 낫는다는 베데스다 연못에 38년 된 병자가 거적때기 위에 누워있었다. 긴 시간 동안 기적같은 은혜를 받기 위해 그가 했던 것은 물이 움직일 때마다 자신의 판을 벗어나려고 꿈틀꿈틀 용을 쓰며 기어가는 일이었다. 그런데 주변에 포진된 다른 병자들이 일제히 움직이기 시작하니 자신보다 더 나은 조건을 가진 병자가 먼저 물에 들어가는 상황이 오랜 시간 반복되었을 것이고 자기는 언제쯤 최후 1인이 될지, 혹시 영원히 기회가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과 절망을 수도 없이 겪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병자는 인간세계나 신의 세계나 1등만 인정하는 더러운 세계라고 한탄하기 전에 왜 자신이 꼭 정상이 되어야 하는지, 도대체 병자와 정상의 기준이 어디서 나온 건지, 자신 또한 내부에 자리 잡은 절대 자아의 부추김에 놀아나며 답을 알지도 못하는 의미 없는 행위를 계속하고 있음을 깨닫는 찬스를 무려 38년 동안 계속 놓쳤음을 한탄해야 하지 않을까.

예수님이 찾아오시어 병자의 자리를 예수님의 자리로 바꿔주시며 주님이 나의 의미가 되고 나는 그 앞에 무의미가 되는 기적 앞에서 걷고 있건 평생 누워있건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고 자신이 누구이고 왜 여기 있어야 하는지를 알게 하시는 분이 찾아오신 사건 속에서 어리석은 원망의 깊이 만큼 고마움이 더 깊어짐을 경험한다. 주님이 병자에게 그냥 걸어가라고 하시지 않고 병자가 갇혀있었던 자리를 들고 한계 밖으로 가게 하셨고, 경계가 없는 새로운 말씀의 노선에 편입되어 주님의 움직이는 경계선으로 움직일 때마다 저주받아 마땅한 증거가 함께 움직이게 하신다. 병자가 주님을 알고 주님을 믿고 주님의 지시를 따른 것이 아니라 그 병자 안에 삽입된 주님의 요소를 보시고 주께서 찾아오시고 일방적으로 지시를 하시기에 움직이니 알지 못하는 것을 가지고 행함을 주장할 수 없다.

모두 정상이기를 추구하는 환상이 만들어낸 세계에 일부인 무언가로, 나는 한 번도 나인 적이 없었고 타인이 만들어준 ‘나’라는 의미 파편들이 응집되어 ‘나’라는 자아가 만들어진다. 내가 분열되지 않도록 붙잡아주는 힘이 ‘나는 나야’를 견고히 하며 인간 껍데기를 주체라고 믿게 만드는 가상 공간에서 정상과 비정상을 가르는 기준이 끊임없이 제작되고 어떻게든 정상적이고 평탄한 자리를 사수하려는 욕망이 작동하는 이곳이 바로 병든 자만 가득한 연못 변두리같은 세상이다.

율법의 세계가 육신이 되신 예수님에게 일어난 피흘림의 사건 속에서 완성된 율법이 종말의 모습으로 역행해서 거적때기의 확장판인 사무엘하 속에 이스라엘로 침투한다. 미래에서 온 십자가가 다윗을 덮칠 때 다윗은 자신이 모델이 아니며 저주와 심판 속에서 자신이 하는 어떤 것도 욕망이 조작하는 허상임을 알고 죽는 혜택을 입게 되고 하나님의 영광이 되시는 예수그리스도를 구현해 낼 무대로 다시 소환된다.

이제 다윗언약이 주체를 찾아가는 과정에 다윗은 단지 배역을 맡은 것이고 대본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의 내부에 심긴 채 주님의 기호가 다윗을 끌고 다니며 펼쳐나가시기에 다윗은 볼 수도 없고 알지도 못하는 무언가를 하게 되니 거짓이 성립되지 않고 책임질 어떤 상황도 있을 수 없으며 벌어진 결과를 통해 주의 일을 소급해서 공유할 뿐이다. 거짓말은 오직 본다고 하는 자에게만 성립되고 책임은 알고 있는 것을 스스로 행한 자들의 몫일 뿐, 죽음에서 소환된 자는 십자가에서 발산되는 언약의 일방적 선택으로 말미암아 그 선택의 취지대로 움직일 뿐이다.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이 친히 싸우시는 율법의 원칙을 무조건 의존했던 소년 다윗이 왕으로 자리 잡는 과정에서 율법을 알고 적용할 줄 아는 어른 다윗으로 조건부 세계에 젖어들게 허락하시며 인간 왕의 한계를 노출 시키신 것은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전쟁 무대로 삼으셔서 표면 아래 숨어있는 진짜 원수를 끌어내 굴복시키시는 승리자는 따로 있음을 나타내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이었다.

환상이 걷어지고 표피층의 잔인한 욕망이 본색을 드러내며 왕부터 백성에 이르기까지 모두 일관되게 드러내는 방향성은 나를 살맛 나게 해주는 무언가를 끊임없이 추구하는 것이며 이에 방해가 되는 걸림돌은 밀쳐버리는 가장 악마적 모습에 근접해 가며 십자가까지 연출 무대가 펼쳐져 있고 그 위에서 배치물들이 열연한다.

권력을 지향하는 보편적 동질성에 연결된 개별자들이 각자 위치에서 왕은 백성들의 마음을 하나로 모아서 안정적인 왕권과 나라를 만들고자 하고 신하들은 자신의 자리를 견고히 하고 공로를 세워 세력을 확장하기를 힘쓰며 백성들 또한 왕에게 몸과 마음을 바쳐 자신들의 안녕을 보장받기를 바라는 평범하고 자연스러운 모습이 실상은 구더기처럼 우글거리는 욕망들의 움직임이며 내가 나를 한 번도 버린 적이 없기에 나를 감히 버리는 자들에게는 죽여서라도 복수하겠다는 칼을 품은 헌신이다.

다윗은 예루살렘을 쟁취하고 언약궤를 옮겨오면서 모든 지파의 마음이 왕을 중심으로 하나 되게 한 언약 완성자로 하늘과 땅을 맺어주는 매개자가 자신임을 굳게 믿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드리는 다윗의 거룩한 의도가 도리어 율법을 이용하고 무시하는 결과를 만들어내고 있다는 것을 알 길이 없었기에 다윗은 철저히 하나님의 율법에 이용당하며 주께만 범죄 한 죄인으로서 손색이 없는 자리로 갈 수 있었다.

자기 의가 절정에 이른 상태에서 자기편인 줄 알았던 율법의 화살이 다윗의 마음 중심을 관통하며 율법의 세계로 끌고 들어갔을 때 그는 하나님의 영적 전쟁에서 언약궤의 요소를 가진 의인을 죽일 수밖에 없는 언약의 원수로 발각된다. 아무 쓸모 없고 도리어 죄만 생산하는 버려져야 마땅한 자임을 똑똑히 보게 하시고 자기 죽음을 대신 안고 희생된 아이의 운명에 기쁨으로 자신을 일치시키며 하나님의 기름 부음의 진정한 의미가 살아서 움직이는 증상으로 그렇게 잠시 육신에 머무르게 된다는 것을 눈치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율법이 살아있기에 죄가 죄로 살아날 수 있고 ‘나는 나다. 나는 왕이다’라는 자아의 심각함이 산산 조각나고 죄를 씻는 ‘대신 하심’만이 유일한 심각함으로 내 안에 살아서 진정한 예배가 이루어지며 하나님이 친히 지어주시는 성전의 모습을 잠시 드리우는 역할 자인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을 담을 참된 성전은 죽은 우리아를 통해 잉태된 다윗의 잉태치 못한 아들의 경로를 거쳐오신 다윗언약의 주체, 예수님뿐이시다.

여전히 율법 밖에서 자신들이 살아있고 사람들끼리만 상대한다고 믿는 자들이 다윗을 하나님의 보호를 받는 초법적 위치에 있는 최고 권력자로 오해하며 힘을 동경하고 자리를 탐하는 기존 권력 노선에서 이탈된 다윗은 하늘의 요소를 함유한 배치물들이 심기고 성령으로 교통하는 관계망을 통해 그리스도의 세계가 그려지는 새로운 노선에 합류된다.

이 노선은 아브람이 롯을 구출하고 승리한 전쟁이 사람의 전쟁이 아니었으며 친히 싸우시고 승리하신 분이 따로 계심을 고백하는 십일조를 드리며 멜기세덱의 떡과 포도주에 참여된 아브라함의 십일조 정신이 본격적 시작을 알리며 창세 전에 계획된 종착지까지 이어져 있었고 과정 과정에서 썩음을 당치 않는 언약의 주인공 예수님을 드러내기 위해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 되는 영광 속에서 마음껏 기쁘게 썩을 수 있고 망할 수 있는 죄인들이 흘러들어오는 락커룸같은 곳이다.

이 안에서는 개과천선하는 것이 아니고 여전히 본성 못 버리는 세리고 창기며 혈육 사랑의 극치인 죄인으로 무엇을 해도 안 해도 죄인의 자리에 있고 지시하시는 율법의 취지만 의롭게 남도록 모든 결정자가 따로 있음을 즐거워하고 뻔뻔함의 극치를 보이는 자들이 다 모여있다.

다윗은 피를 더 흘려야 하는 역할에 충실을 기하면서 욕망에 환장한 자들과 함께 머무르면서 율법에 근거한 피의 복수로 마땅히 심판받아야 할 백성을 위해 대신 하나님의 복수의 희생제물이 되기를 구하는 제사장으로서 장차 이루어질 예수그리스도의 고백을 발산했고 낯선 긍정의 요소로 자기가 부정되는 사건에 다윗처럼 말려서 유입된 자들이 오늘날 왕같은 제사장 역할을 담당하는 성도이다.

거룩한 말씀을 듣는데 절대 마음이 흐트러지면 안 된다고 다짐을 하며 눈에 힘을 팍 주고 진지하게 수련회 강의를 들으니 50분이 5시간처럼 흘러가는 중압감 속에 “10분 쉽시다”라는 말씀이 복음으로 들리며 한숨을 돌리는데 뒤에서 말이 들린다. “50분이 5분같이 지나가네” 하나님의 진지함 안에서 자신이 시시한 존재가 되었기에 율법완성의 접시 위에 편하게 실려 가는 누군가의 고백 앞에 나의 진지함으로 율법을 머리에 이고 낑낑대며 말씀을 듣던 욕망 주머니가 찢어진다.

안에서든 밖에서든 말과 말이 부딪히는 현상이 일어나고 난데없이 날아온 기호가 비수처럼 나의 말을 깨부술 때 내 말의 의미가 깨지는 것은 내가 허물어지는 것과 똑같이 작동하기에 그 말을 뱉은 사람이 보이지 않고 그 사람을 거쳐서 나온 말만 남는다. 하지만 내가 해체되지 않고 여전히 건재하다면 결국 사람과 사람 상대 외에 남는 것은 없다. 날아온 말씀에 깨진 자가 그 말씀에 종속될 때 진정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는 주님의 말씀처럼 아무런 한 것도 없이 전쟁에 승리하신 왕께서 자신의 살과 피가 담긴 전리품을 수거하실 때 연결되어 있기에, 묻어있기에 덩달아 복음의 열매로 주님 가시는 곳으로 딸려간다.

이근호

‘돈 많은 사람과 한 번 살아보고 싶어요’, 혹은 ‘권세 있는 자’와 한 번 살아보면 더는 소원이 없겠어요’, ‘부자집에 태어났으면 내 남은 인생은 활짝 펴었을거에요’라는 이런 욕망을 만개시키는 유발요인이 다윗의 존재이며 바로 예수님의 사역이었습니다. 병고치고, 귀신 쫓아내고, 저주 받았다고 낙인찍힌 “기죽지 말아 천국이 너희 것이다”고 희망주셨던 그 주님을 모든 인간이 일심동체가 되어 죽여버렸습니다. 이로서 인간은 ‘새로 시작할’ 기회조차 박탈당한 자들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솔로몬처럼 출현합니다. “우리 아빠 엄마, 천하의 죄인이었고 나는 나 죄의 결과물이다!” 죄를 제대로 말할 수 있는 자는 성도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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