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민선

주님의 복음전파

아빠와 함께 2022. 1. 7. 09:25

넘지 말라는 말씀을 선포하셔서 하나님만 있었고 인간은 없었던 시절을 다시 기억하게 하시고 자신에게 관심 가질 필요가 없다는 것을 깨우치시려고 하나님이 선악과나무로 선을 그어 주셨다. 아담은 자신에게 관심 갖는 법을 몰랐기에 죽음은 고사하고 그것을 왜 따먹으면 안 되는지 자체에 의문이나 반감을 품지 않았다. 죽음을 몰랐기에 생명 나무에서 발산되는 생명의 존귀함도 알 필요가 없었다. 아무것도 스스로 생각할 필요가 없었다.

아담은 홀로인 적이 있었다. 그래서 혼자라는 개념도 결핍이라는 감정도 없는 상태로 모든 것을 공급받는 능력 안에 있었다. 마치 아기가 자궁 안에서 홀로 있지만 혼자라는 의미 자체가 성립되지 않고, 스스로 살고자 무언가를 원하지 않아도 필요한 것을 제공받는 것과 같다. 그러나 만들어질 때부터 짝이 있었던 여자는 남자와 함께 둘이 하나를 이루고 자신이 남자의 일부가 될 때만 자신을 온전히 잃어버릴 수 있다.

간교한 뱀이 아담이 아닌 여자에게 질문했고 그 순간 여자는 하나 됨에서 배제된 결핍감이 올라왔다. 뱀은 타이밍을 놓치지 않고 하나님이 던지신 미끼를 덥석 물은 줄도 모르고 여자를 유혹했다. ‘네가 원하는 것은 배필이 없어도 스스로 완전해지는 홀로서기잖아. 금지의 선을 넘으면 너는 너로만 만족 할 수 있다’ 아담과 여자가 선악과로 말미암아 눈이 밝아졌을 때 아담은 하나님이 함께하게 하신 여자로 말미암아 참여된 수치심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는 증인으로, 여자는 잉태의 고통을 통해 여호와로 말미암는 생명의 신호를 보이는 증인으로의 운명으로 들어간다. 하나님은 선을 넘도록 허락하시며 피조물은 죽어도 넘을 수 없는 선을 만드시는 작업을 위해 모든 것을 이용하신다.

하나님의 계획은 단순히 없음에서 있음이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있음을 다시 없음으로 바꾸시며 그 과정에서 생기는 잃어버림이라는 요소로 새롭게 만들어내시는 것이다. 없음에서 있음으로, 죽음에서 생명으로. 기뻐하심을 입은 아들이 하나님 안에 기쁨을 충만케 하시는 업무를 완성하시기 위해 스스로 잃어버림 속으로 오셨고 죽음의 완성 안에서 다시 창조되는 생명이 되시고 생명의 공간이 되셨다.

잃어버림을 통해 되찾으시는 하나님의 기쁨에 합류할 그리스도의 지체를 찾기 위해 주께서 다시 오실 때, 생명이신 주님의 움직임은 완전히 죽은 부재의 자리에서만 보이나 여전히 육체인 인간은 어느새 물질적, 언어적 그리고 몸의 소외를 느끼는 나로 돌아와서 수시로 결핍이 유발된다. 마귀가 때를 놓치지 않고 내부에서든 아니면 만남을 통해서든 결국 두려워하며 숨어버리고 싶은 계기를 만들어내고, 사건이 지나간 자리에 주님의 사건 해석이 말씀을 통해 선포되고 쓰레기의 증거가 낱낱이 밝혀지며 ‘너는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주님이 생산하신 잃어버림의 자리에서 부재가 이론이 아니라 실상인 것을 알게 되는 기쁨으로 춤추게 만드신다. ‘내가 아니라 주님이셨군요. 마음껏 저의 형상을 멸시하여 주시고 주의 형상으로 기뻐하게 하옵소서’ (시 73:20)

가죽옷을 입히시듯 주님의 살과 피로 채우시고 덮으시매 내 목표가 덮이고 내 의식이 희미해지고 내가 원래 없었던 빈자리가 육체를 통해 만들어지면서 마귀는 들어 올 수도 없는 감히 만질 수도 없는 주님의 이야기가 울리는 세계의 표현공간이 된다.(요일 5:18) 악마는 말씀을 공격하지 못하니 어떻게든 자기가 손대고 훼방할 수 있는 인간 안에 ‘나’라는 가상 자아를 유지하기 위해 안달이 난다.(고후 4:4)

나를 건들어서 발작만 시키면 너무도 쉽게 복음이 담긴 내가 살아나서 담아있는 복음을 봉쇄시킬 수 있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무엇이 되고 싶은가. 내가 원하는 내 뜻은 무엇인가’라는 인간 동네에서는 당연히 해야 하는 성찰과 반성 그리고 실현을 위한 노력이 부상할 때 그것이 지옥을 향해 열심을 내는 모습이라는 책망의 말씀 앞에 무작정 ‘나는 정신병자. 타인을 욕망하는 편집증 환자다. 주님 아니고서는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대범한 결론으로 갈 것이 아니라

‘저들이 다 주님을 믿을지라도 저는 끝까지 주님을 의심하겠습니다’라는 다짐으로, ‘다 버리고 예수를 따랐는데 결국 이용당한 것인가. 뭘 해서라도 나의 손해를 만회하고 싶다’라는 가롯유다처럼 해결점은 없고 선택지만 가득한 저주 속으로 ‘나’를 던져야 한다. 이미 복음을 가리는 내가 올라왔기에 심판받아 마땅함의 근거를 풀어낼 때가 허락되었기 때문이다.(눅22:53)

더욱 소심하고 집요하게 자신 안에 악마의 질문이 파고들어야 한다. 당신은 이용하는 자가 되고 싶은지 이용당하는 자로 기뻐할 수 있는지. 내가 교만해지는 것이 힘들고 너무 자기 의만 드러내는 나의 모습이 싫고 위선적인 모습이 역겨워 주님이 필요하다면 여전히 나는 주님을 이용하고 싶은 자이다. 마귀에게 주님을 이용하고 모독하도록 돕는 자가 바로 ‘나’라는 절망 속에서 자아를 찢고 싶은데 찢을 수 없고, 사라지고 싶은데 사라질 수 없고, 빠져나가고 싶은데 빠져나갈 수 없는 철저히 나를 위해 모든 것을 하는 방향성을 돌릴 수 없는 한계에 눌려 참담함으로 주저앉아야 한다. 주님이 기억해주시는 사이가 되고 여호와의 잊음이 되지 않는 관계가 되는 것은 인간의 선택지가 아니다. (사 44:21)

지옥에 간 부자가 목이 터져라 ‘오지 마. 내 사랑하는 형제여, 부디 지옥은 오지 마’라고 외친들 그 외침의 말씀(눅16:28)을 눈으로 읽은 수천, 수억의 자아들이 동일한 성경 구절을 보지만 각기 다른 뜻을 품는다. ‘알았어. 나는 너처럼은 살지 않을 게. 너처럼 지옥에 가지는 않을 게’

죽어서 지옥에 가보지 않았다면 아무도 그 부자의 심정을 알 수 없는 것이 당연한데 미리 닥친 종말을 통해 새로운 세계로 옮겨지는 예외 상황이 발생하기에 부자가 경험하는 진짜 지옥을 외치는 자들이 출몰한다. 성도의 출현 자체가 주님의 증상이고 외부에서 공급된 힘으로 허락된 시간 동안 이미 죽은 자로서 지옥 휴가를 경험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완전한 죽음으로 만드신 처소가 그리스도의 고난이 담긴 채 육체에 심기기에 더 이상 나의 죽음도 나의 아픔도 나의 고통도 생각할 수 없고 다만 주님이 겪으셨던 주님의 속성만 흘려보낸다.(갈 2:20)

주님이 사후적으로 우리 자체를 해석의 재료로 삼아 인간의 능력을 배격하며 주님의 뜻을 표출하시는 방법은 복음을 전하도록 쓰실 때 주님의 원수를 동행시키는 것이다. 살고 죽고 이기고 지고 성공하고 실패하는 이런 생각을 하는 자체가 원수가 되는 ‘나’라는 적과 동행하며 이런 나로 인해 죽는 진짜 나를 발견하게 하심이 주님의 복음 전파 방법이다.

누군가를 만날 때 준비 태세는 자동으로 이루어지나 주께서 지키지 않으시면 우리의 경성함이 허사가 된다는 말씀의 실현장으로 이끌린다.(시127:1) 복음을 위해서, 주를 위해서 한다는 나의 목표가 무산되고 어느새 마주 대하는 마귀에게 자아의 위협을 받고 나를 지키고자 부지중에 나오는 한심스러운 모습으로 적과 마주하며 결국 상대에게 듣는 말이 ‘나에게 미친 자가 부족하여 이런 자와 복음을 나누게 하느냐’라는 말이다.(삼상 21장 12~15)

너도 미쳤고 나도 미쳤고 너도 쓰레기고 나도 쓰레기고 이렇게 주님의 특이성에서 소외된 자리를 만드시려고 성령께서 성도를 돗자리로 펼쳐내시며 그 위에서 무슨 짓을 하며 까불든 결코 인간들에게 거룩한 복음을 던져주지 않으시고 오직 아버지와 예수님의 십자가 재현의 단독무대가 되게 일하신다.(요16:32)

헤롯이 결핍을 해소하려고 자신을 불편하게 만든 주님의 사람 세례요한을 죽였고 또 다른 특이한 소문이 들리매 자신을 불안하게 만드는 예수에 대한 호기심을 갖는 순간 이미 그의 내부에서 살기가 발동된 것이다. 내가 굳게 믿는 나의 믿음에 틈이 생기게 하는 누군가가 등장할 때마다 나의 안정감을 고수하려면 개무시하든 만나서 포섭하든 죽이든 무엇이든 해야 한다.

주께서는 예측하고 계획하는 인간의 방식이 세워지게 하락하시고 이것을 허물어뜨리시며 하나님의 뜻만 증거되도록 하실 때, 만남의 현장에서 모두가 개돼지임을 밝혀주시며 그 자리에서 자기의 눈알이 뽑히고 주의 시선이 박혀 자신의 원수 됨을 아는 자와(행2:37) 자기 시선 안에 머무르며 깨닫지 못하는 자로(행7:54) 가르기를 하신다. 혹시라도 그 현장의 모두가 주의 특이성에 붙잡혀 우리가 복음을 소유할 수 없는 죄인임을 들킨 기쁨을 나누는 말도 안 되는 신기함을 겪는다면 다시 한번 주님만이 복음의 귀한 가치가 보존되도록 홀로 일하심이 나타난 결과이다.

서로 복음을 나누다가 믿음을 화합하여 패배를 인정하는 기이한 일은 아마도 ‘나는 당신의 죄의 깊이를 따라잡을 수가 없소. 덜 악해서 미안하오. 이러니 지옥 가도 마땅하지. 주님의 값없이 주신 용서의 가치를 살리지 않고 끝까지 마지막 일말의 자기 의를 살리려 하는 나는 예수님의 희생을 모독하는 죄에서 벗어날 수가 없소’라는 고백일 것이다. 다윗은 죄의 전모가 드러나면서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알았기에 허상을 대표할만한 왕이 되었고 실상이신 메시아를 그대로 드리울 수 있는 주의 이름의 성과 제조기가 될 수 있었다.

없었는데 있게 하시는 외부적 요소의 침투는 너무도 큰 상처가 패이기에 나라는 존재감이 찌그러지면서 상상도 못 했던 폭과 깊이의 죄가 들춰진다. ‘너의 망함이 너의 죽음이 마땅하지 않으냐’라고(행 8:1) 스데반을 향해 저주할 때 그를 통해 발산되는 형상은 이 땅에 유일한 타인으로 오신 하나님의 형상이었고, 사람들이 보면서 속이 다 시원했던 그분의 일그러지고 무너지는 모습이 하나님 앞에 내가 받을 마땅한 형벌이고 저주의 모습인 것을 알게 되는 움푹 파인 상처가 된다. 주께서 상처 안에 붉게 채우시는 사랑으로 말미암아 성도는 완성된 무의미가 된다.

하나님은 성도를 귀히 여기시는 것이 아니라 성도의 죽음을 통해 귀한 것이 표현되는 것을 기뻐하신다.(시116:15) 죄의 상처가 깊어갈수록 주님의 사랑만 드러내는 연대감이 선명해지고 모두 빼앗아서 처리해주신 도둑님 덕분에 내 것이 하나도 없는 것에 기쁨이 충만해져 가고(빌 4:4), 날마다 죽는 자는 한시도 존재로 머무름이 없기에 텅 빈 육체를 통해 감사가 나오는 신비로움을 그려내도록 성도를 이용하신다.(고전15:31)

주님의 무기인 전사들은 죽지 않고 사라지는 노병이 아니라 장렬히 무너지는 사건의 공간이고 소망 없는 몸뚱이로 무너져야 하는 증거를 나타내라 주께서 지시하실 때, 십자가 위에서 허물어지신 예수님의 몸에 합류하게 된 기쁨으로 충만한 어딘가이다.

이근호

“악마는 말씀을 공격하지 못하니 어떻게든 자기가 손대고 훼방할 수 있는 인간 안에 ‘나’라는 가상 자아를 유지하기 위해 안달이 난다.(고후 4:4)”
말씀의 세계 안으로 “쑥” 들어서게 된 자들에게만 ‘말씀 밖’의 활동이 훤히 보인다. 가관이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매달아 죽여 없애놓고서는, 본인은 절대로 안 죽고 싶어 한다.
모범적으로 보이는 신앙의 영웅들을 찾아 다닌다. 청빈하게 살고, 돈도 안 밝히고, 낮은 모습으로 섬김의 도리를 다하는 이상(理想)적인 목사를 찾아 보살 모시듯이 교회에 앉혀놓고서는 ‘존경을 표한다’는 태도 하나로 신자의 도리를 다한 것으로 자부한다.
자아는 감추고 계속 자아 밖의 풍경에 신경 쓴다. “예수님 존경하고 복음 존중해 줄테니, 제발 날 안 건드렸으면 좋겠어요. 감사? 그게 뭐에요?” 
이들에게 평생 짐지워진 것은 악마가 준 공포, 그 자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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